1/11/2012

내 안에 역사하는 부활의 권능

“청년이 무엇으로 그의 행실을 깨끗하게 하리이까 주의 말씀만 지킬 따름이니이다”(119:9)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 1장 15절부터 네 가지 기도를 드리고 있습니다. 본문은 마지막 네 번째 기도제목에 해당합니다. “그의 힘의 강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떤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바울은 너희들이 ‘알게 되기를’ 기도하고 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께서 너희에게 도대체 어떤 능력을 주셨고, 또한 지금도 어떤 능력이 머물러 있는지를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강력과 힘과 능력으로 일하셨는데, 그 결과 믿는 우리에게 지극히 큰 능력이 부어졌고 바로 그 능력이 지금 머물러 있다는 것입니다. 그 능력이 무엇입니까? 


바로 예수님을 다시 일으키신 부활의 능력이라는 것입니다. 
놀라운 말씀입니다. 


우리는 대자연과 우주를 보면서 하나님의 창조 능력을 실감합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크고 놀라운 것은 부활의 능력입니다. 창조 능력이 대단하지만 그 창조 능력도 죽은 사람을 영원히 살게 하지는 못합니다. 죄를 씻지 못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결국 하나님의 아들이오셨고,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성령이 오신 것입니다. 성령이 오셔서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 살려놓았고, 성령님은 오늘 우리 안에 머물러 계십니다. 이것이 바로 부활의 권능이 우리 안에 있다는 뜻입니다. 바울은 이 사실을 제발 알기를 바란다고 말씀합니다. 


왜 그럴까요. 자칫 초대교회 교인들은 ‘그리스도인이 무력하지 않은가’라는 고민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로마제국 앞에서 무력하게 순교하는 성도들을 보면서 그들은 이와 같은 고민을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세상을 뒤집어 놓은 부활의 능력이 있으며, 이 부활의 능력이 지금도 우리 안에 머물러 역동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기독교의 부활은 사상도 철학도 교리도 아닙니다. 
부활은 능력이고 실제 경험해야 할 힘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향해 죽은 자의 무덤 위에서 형식적인 예배를 드리는 부활절의 형식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고 질문합니다(고전 15:29). 부활은 생활 속에 체험해야 할 능력이고, 바울은 자신의 예를 들어 그것을 주장합니다. 자신은 그 부활의 능력 때문에 날마다 죽을 수 있었으며, 또한 짐승과 같은 사람들에 의해 둘러싸이는 경험을 했지만 결국은 이겼다고 간증합니다(고전 15:31∼32). 


믿음은 결코 무력하지 않습니다. 
순교자들은 무력해서 죽은 것이 아니라 세상이 그를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에 순교한 것입니다. 우리 안에는 세상을 이길 수 있는 능력, 즉 부활의 능력은 이미 우리 안에 들어와 있습니다. 이것을 믿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 사실을 기억하고 또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나아가서 이것을 체험해야 하겠습니다. 바울은 그것을 체험하면서 살았고, 더욱 더 체험하면서 살기를 원했습니다(빌 3:10). 부활의 능력은 현장성을 가집니다. 내가 살아가는 삶의 현장, 거기서 부활의 능력은 나타나야만 합니다. 바울의 기도는 바로 그것이고, 그 바울의 기도는 바로 우리의 기도가 돼야만 할 것입니다.

오늘의 Daily Bread는 (http://blog.naver.com/paul_jhkim)에서 다시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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