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1/2009

경청의 힘


- 현인은 자기 눈으로 본 것을 사람들에게 이야기 하고, 어리석은 자는 자기의 귀로 들은 것을 이야기 한다 -
 
 침묵의 쌍둥이 같은 친구가 있다. '경청(敬聽)이'라고 부르는 친구인데 이 구 친구는 어딜 가나 붙어 다니는 둘도 없이 친한 사이이다. '침묵이'가 '경청이'를 좋아하는 이유는 경청이는 침묵이가 외롭고 힘들 때 어김없이 자신의 것을 나눠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경청이는 침묵이를 늘 풍요롭게 한다. 경청이가 침묵이를 좋아하는 이유는 침묵이라는 친구가 자신을 '경청이답게' 만들어주기 때문이다. 경청이는 늘 생각한다. '만약 침묵이가 없다면 경청이 자신도 없을 거라고....' 또 침묵이는 생각한다. '만약 경청이가 없다면 자신은 얼마나 외로울까?라고.
 
 우리는 침묵을 더올리면 경청이라는 말이 함께 떠오른다. 우리의 삶에 침묵만큼이나 꼭 필요한 덕복이 경청하는 것인데, 바로 침묵이 경청으로 나아가게 하는 길이요 또 다른 면에서 경청은 침묵의 깊이로 더 들어가게 하기 때문이다. 자신만의 시간이든 혹은 여러 사람 사이에서든 침묵과 경청이 함께 일어날 때 비로소 침묵고, 경청도 의미 있게 된다.
 
 말이 오고 가는 대화 속에서도 상호 소통이이루어지지 않는 경우가 허다하다. 분병 서로 말을 하고 이해를 하는 것 같은데도 서로의 뜻이 어긋나 무엇인지 모를 답답함을 느낀다. 원인은 대화를 하면서도 침묵속에서 서로의 말을 경청하는데 관심을 갖지 않고 자신이 할 이야기만 생각하고 말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경청에 대해 관심이 없는 이유는 대화의 목적이 자신의 견해로 남을 설득하거나 논쟁하려 들기 때문이다.
 
사실 우리는 듣는 것이 훨씬 어렵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그 이유는 말을 할 때에는 자신이 중심이 되지만 들을 때는 상대방을 중심에 놓고 침묵 속에서 기다려야 하기 때문이다.
 
그저 듣는 것 Hearing과 경청 Listening은 질적으로 다르다. 듣는 것을 말하는 사람의 말소리를 귀로 듣는 것에 그치는 수동적인 행위이고, 경청은 침묵 속에서 마하는 이의 말뿐만 아니라 그 존재의 의미까지도 듣는 적극적인 행위이다. 이런 경청은 침묵 엇이 불가능하다. 이런 의미에서 침묵과 경청은 참되고 창조적인 대화의 길이다.
 
 우리 시대의 최고 사상가였던 함서건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하나님이라면, 진리는 근본에 있어 계시된 것이라면 우리 할 일은 듣는 것밖에 없다. 하나님은 무엇이냐, 듣는 존재다. 저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서만 살 수 있는 존재다. 그러기 때문에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말씀으로 살 것이니라' 하시는 것이다.
 
'예는 예라 하고 아니는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치는 것은 죄니라' 듣는 자는 대답한다. '예'라고 하든지, '아니'라 하든지. 신앙이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 '예'라 하는 일에서 다른 게 아니다.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분명하게 알아듣는 것과 알아듣거든 그것을 듣는 것이다."
 
 경청을 통해 우리는 비로소 우리에게 위탁된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선포할 수 있다. 설교 또한 경청의 결과로 선포되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침묵의 영성>

개인적인 공격들에 대한 대적기도


1. 특별한 문제가 있는 것도 아닌데 그냥 마음이 심란하고 우울해질 때가 있습니다.
이 우울함은 마귀가 가장 많이 사용하여 우리를 속이는 무기입니다. 우울함을 대적하십시오.우울함은 하나님의 생각도 아니고 나의 생각도 아닙니다. 마귀의 생각입니다. 정상적인
그리스도인들은 밝고 맑게 살아야 하며 어두운 마음과 우울한 마음을 쫓아내야 합니다.
 
2. 하나님이 우리 안에 계실 때 경험할 수 있는 것은 ''마음의 평화''입니다. 반대로 악한 영이 우리 안에 있을 때 드는 생각은 마음의 불안입니다. 불안감을 대적하십시오. 불안감은 악한 영들이 움직이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불안하면 어떤 일도 되지 않습니다.

3. 주로 내성적인 사람, 혼자 있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외로움과 고독에 빠지기 쉽습니다. 하지만 외로움과 고독은 마귀로부터 옵니다. 주님의 이름을 부르면 고독과 외로움은 순식간에 사라집니다.

4. 사랑이 어떤 대상을 끌어당기는 것이라면 분노는 이와 반대로 어떤 대상을 공격하고 밀어내는 것입니다.  분노를 대적하십시오. 분노는 마귀로부터 오는 아주 강한 감정입니다. 분노의 기운은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고통스럽게 하며 죽이고 파괴하는 영입니다. 분노할 때 첫째는 자신이 죽고, 둘째는 가까이에 있는 가족이 피해를 당합니다. 그러나 당신이 미워하는 사람은 피해를 입지 않습니다.
 
5. 많은 슬픔과 눈물이 어두운 곳에서 옵니다. 슬픔을 대적하십시오. 천국은 슬픔과 눈물의 장소가 아니고 기쁨과 행복이 가득한 곳입니다.
 
6. 우리나라 사람들은 한이 많습니다. 그것은 일종의 복수심인데, 그것은 약자들의 특성이기도 합니다. 악한 영은 연약한 사람의 심리를 이용해서 복수심을 자극합니다. 속지 마십시오. 복수심에 빠지면 그것은 마귀에게 복종하는 것입니다. 복수심을 대적하여 물리치십시오. 원수를 오히려 사랑하게 될 때 영적으로 강한 사람이 됩니다.

7. 과거의 아픈 기억은 두고두고 고통의 근원이 됩니다. 그것은 그 당시 우리 안에 들어온 악한 영이 지금까지 떠나가지 않고 자리를 잡고 사는 것입니다. 그 상황으로 가서 그때 들어온 악한 영들을 부르고 대적하고 초토화시키십시오. 그것들을 깨끗이 처리하십시오. 더 이상 과거의 어떤 기억들 때문에 고통을 겪지 마십시오.
 
8. ''말이 비수와 같이 꽂힌다''는 말은 사실입니다. 사람의 말에는 어떤 형태의 에너지가 있습니다. 부드럽고 따뜻한 말을 할 때는 구름과 같은 몽실몽실한 에너지의 형태가 상대방의 영혼을 부드럽게 감싸주어서 행복감을 줍니다. 그러나 비난하며 공격하는 악한 말은 문자 그대로 비수와 같습니다. 날카로운 화살이나 칼과 같은 것이 상대방의 가슴을 그대로 관통하는 것입니다.
 
9. 항상 근심에 잠겨 사는 이들은 어두움의 창조자들입니다. 이들은 근심의 영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항상 나쁜 일을 끌어당겨, 어디에 가든지 안 좋은 일을 만나게 됩니다. 근심은 지옥에서 옵니다. 천국에는 근심이 없습니다. 평소에 두려움과 근심이 임할 때 그것을 시인하고 고백하지 말고 그것을 물리치십시오.
 
10. 주님의 은총이 온 우주 안에 가득합니다. 모든 만물이 그 하나님의 생명과 생기로 살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전신이 나른하고 기운이 없고 몸이 찌뿌등하고 움직이는 것조차 귀찮은 무력감은 주로 조용하고 내성적인 기질의 사람들이 마귀의 공격을 받을 때 나타나는 증상입니다. 무기력 해질 때마다 거기에 빠지지 말고 대적하십시오. "나는 하나님의 생기를 빼앗기지 않겠노라!"
 
11. 교만은 지옥의 중심에 속하는 악입니다. 모든 종류의 죄를 짓는 사람들이 구원을 받고 주님께 가까이 나아갈 수 있으나 교만한 사람들은 아주 어렵습니다. 그것은 마귀의 본질과 거의 흡사하기 때문입니다. 모든 질병에 자각증상이 있지만 교만에는 자각증상이 없어서 교만한 사람일수록 자기가 겸손하다고 생각합니다. 교만을 증오하고 저주하십시오. 사람에게 높임 받는 것은 하나님께 미움 받는 것입니다. 교만의 영을 물리치고 이길 수 있다면 다른 대부분의 마귀의 공격은 쉽게 분별하여 물리칠 수 있습니다.
 
12. 주님께로부터 온 사람은 남을 판단하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그들은 남에 대하여 함부로 말하지 않습니다. 남의 약점과 죄와 잘못된 것을 보는 것은 비판의 영이 그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높은 마음을 가지고 있는 이들은 남들을 함부로 비판하면서 자기의 미래에는 아무 일도 없을 것이라고 착각합니다. 비판의 도구가 되지 마십시오. 오직 사람을 축복하고 격려하며 모든 심판을 주님께 맡기십시오.

13. 비난의 영은 비판의 영보다 더 악질입니다. 교만과 비판이 하나님을 대적하고 자신을 높이는 것이라면 비난은 스스로 심판자가 되어서 자신의 영을 살인하는 것입니다. 모든 비난은 날카로운 창과 같고 화살과  같아서 사람들의 가슴과 영혼에 깊은 상처와 충격을 줍니다. 비판은 주로 논리적인 논쟁으로 끝나는 경우가 많지만 비난은 비판 위에 정죄가 더해져서 나중에는 저주에까지 이릅니다.
 
14. 짜증과 신경질을 잘 내는 사람이 있습니다. 짜증과 신경질은 악한 영들입니다. 내 안에 있는 짜증과 신경질을 대적하십시오. 그들은 내 안에서 나를 피곤하게하고 지치게 하는 영들입니다.

15. 가는 곳마다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고 왕따 당하고 천덕꾸러기가 되는 사람이 있습니다. 특별한 이유도 없고 잘못한 일도 없기에 본인은 이런 대우를 받는 게 억울하기만 합니다. 학대의 영은 어릴 때 부모를 통해서 들어오는 경우가 많습니다. 부모가 자식들을 꾸짖고 미워하고 구박하고 미워하면 아이의 마음 안에 그런 것들을 담는 그릇이 생겨서 평생토록 사람들에게 그렇게 미움을 받으며 살게 됩니다. 반대로 부모가 자식을 맘껏 사랑하고 축복하면 사랑을 담는 그릇이 생겨 평생 사람들의 사랑을 받으며 살게 됩니다.

16. 꿈은 영적인 상태를 보여줍니다. 잠을 자는 것은 우리의 의식이 쉬고 영혼이 활동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잠이 든 사이에 우리의 영혼은 영계로 올라가서 영계의 빛을 받으며 에너지를 얻고 영감을 얻게 됩 니다. 그러나 잠들기 전 나쁜 영들을 받아들이면 우리의 영은 빛의 세계로 올라갈 수 없습니다. 하루의 3분의1을 자는데, 잘못하다가는 하루의 3분의 1을 악한 영에게 눌려 악몽 속에서 보낼 수 있습니다. 잠들기 전 5분간을 조심하십시오. 기도하는 상태에서 잠이 드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17. 음란하고 난잡하고 더러운 생각이나 공상을 일으키는 것은 귀신이 하는 짓입니다.
주님께서는 생각으로만 간음하여도 그것은 실제로 간음이라고 하셨습니다. 음란죄를 이기기 위해서 음란한 생각과 충동을 대적하여 내 안에서 몰아내십시오. 그런 영을 공급하는 매체와 절대로 가까이 하지 마십시오. 다윗도 솔로몬도 삼손도 이 문제로 넘어졌음을 기억하십시오. 간절하게 순결함과 거룩함과 아름다움과 깨끗함을 허락하여 주실 것을 구하십시오.

18. 악한 영들은 항상 사람들에게 억울하다는 마음을 심어 줍니다. 억울하다는 마음은 자신의 잘못을 돌아보지 않는 마음이며 반성하지 않는 마음입니다. 남을 많이 비난하여 상대방이 화를 내자 그것이 억울하다고 우는 사람도 있습니다. 세상에 억울한 사람은 없습니다. 억울한 영이 내 안에서 나를 속이고 있는 것입니다. 억울한 영은 나가면서 ''억울하다'' ''억울하다''하고 나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19. 주님으로부터 오는 죄책감은 우리를 주님께 나아가게 하며 그러한 죄의 고백과 자신의 부족함을 이야기 할 때 그 공간과 분위기가 아름답고 포근하며 달콤해집니다. 그러나 마귀로부터 오는 죄책감은 우리를 주님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게 하며 자신의 사악함과 부족함을 고백할 때 어떤 경우에는 그 공간의 분위기가 우울하고 침침해집니다.

20. 모든 질병이 다 귀신으로부터 오는 것은 아니지만 적지 않은 경우의 질병과 질병의 고통은 악한 영으로부터 옵니다. 이 경우에 악한 질병의 영을 대적해보면 놀라운 효과를 경험하게 됩니다. 질병의 고통이 있을 때 그 질병과 고통을 꾸짖으며 대적하십시오. 많은 경우에 곧 회복될 것이며 예수 이름의 놀라운 권세에 대해서 깨닫게 될 것입니다.

21. 갑자기 아플 때, 갑자기 괴로울 때, 갑자기 마음이 심란해질 때, 갑자기 서러울 때, 갑자기 무서운 마음이 들 때, 갑자기 고독해질 때, 갑자기 절망스러운 마음이 생길 때, 그럴 때 그것들을 내버려두지 마십시오. 그것은 악한 영들의 장난입니다. 오직 주의 이름으로 깨어 있어서 악한 영의 침투를 느끼고 쫒아내십시오. 당신의 몸과 영혼을 지키십시오.

22. 특별한 이유도 없이 지나치게 피로감이 몰려올 때, 정신이 멍~ 하고 혼미하며 하루 종일 잠이 쏟아질 때, 몸도 무겁고 일도 손에 잡히지 않을 때 정신 차리십시오. 악한 영의 공격인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 현상을 대적하여 기도하면 피로감은 순간에 사라지는 것이 보통입니다.

23. 예배를 시작하기만 하면 졸음이 오고 눈이 감기는 사람, 설교를 시작하기만 하면 눈이 감기는 사람, 성경을 읽거나 기도를 하면 마음속에 딴생각이 가득하여 혼미한 사람은 악한 영들이 그렇게 머릿속에 혼미함과 졸음을 심어놓았기 때문입니다. 졸음과 혼미함을 대적하십시오. 자연적으로 잠이 부족해서 오는 잠은 아주 부드럽고 달콤하지만, 마귀로부터 오는 졸음은 아주 찝찝하고 불쾌한 것입니다.

24. 지나치게 많은 잠은 묶임입니다. 특별한 이유 없이 피곤이 몰려오고 잠이 쏟아진다면 당신은 그것을 대적해야 합니다. 그것은 잠의 영이 당신을 묶고 있는 것입니다.

25. 여성들이나 내성적인 사람들 가운데 공상에 자주 잠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공상의 대부분은 죄에 가까우며 건강한 영성을 훼손합니다. 공상의 영을 대적하십시오. 공상은 현실에 있어서 무능하고 약한 사람이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영을 강하게 하여서 현실에 적응해야 합니다. 현실의 삶을 잘 감당하고 누릴 수 있는 강하고 지혜로운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혼자만의 세계로 도망가서는 안 됩니다.

26. 끊임없이 떠오르는 생각을 대적하십시오. 생각이 많고 복잡한 것은 중대한 증상입니다. 극단적으로 가게 되면 정신병에 걸릴 수도 있습니다. 믿음이란 단순한 것입니다. 진리도 단순하고, 명쾌하고 신선하고 아름다운 것이지 복잡한 것이 아닙니다. 복잡한 영을 대적하십시오.

27. 불면은 생각이 끊어지지 않고 이어지기 때문에 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생각을 일으키는 악한 영을 대적하여 쫒아버리면 생각이 멈추어지고 잠이 오게 됩니다. 불면증에 시달리는 사람들은 자신의 삶을 근본적으로 개선하고 반성하는 것이 좋습니다.

28. 병에는 생명이 있습니다. 그것은 파괴하고 깨뜨리는 악한 생명입니다. 만성병을 대적하십시오. 만성병은 들어와서 자리를 잡은 지 오래 된 것들입니다. 질병이란 근본적으로 주님으로부터 온 것이 아닙니다. 병을 대적하고 증오하고 미워하십시오.
 
29. 주님의 영이 제한 없이 우리 가운데 임하실 때 우리의 몸과 마음은 아주 쾌적하고 행복해질 것입니다. 그러나 악한 기운이 개입되면 우리의 몸은 피곤하고 무거워지고 아프고 열이 나고 눌리고... 여러 가지 증상에 시달리게 될 것입니다. 그때마다 기도함으로 그 악한 에너지, 악한 기운을 대적하십시오. 그리고 쫒아내십시오.
 
30. 사람들은 흔히 많은 결심을 하지만 당초의 결심대로 그것을 이루는 이들은 많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의 결심을 방해하는 존재가 있기 때문입니다. 무슨 일을 하든 미루게 하고 싫어하게 하고 의지를 방해하는 악한 영을 대적하십시오. 선한 결심을 하거나 우리가 해야 할 의무를 하려고 할 때 거기에는 반드시 방해하는 영의 작용이 있습니다. 그것을 모르고 ''나는 원래 이래... 나는 의지가 약해... 나는 원래 작심삼일이야..." 하고 인정해 버리면 그 사람은 평생을 그런 식으로 열매를 맺지 못하고 방황하며 살게 됩니다.

31. 가난의 영을 대적하십시오. 가난이란 별로 좋은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주님은 심령이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고 했지 물질적으로 가난한 것이 복이 있다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가난과 궁핍의 영들은 고통스러운 것이며 지옥으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물질에 집착하는 것은 좋지 않은 것이지만 그렇다고 가난을 좋은 것으로 여기면 안 됩니다. 영적인 풍성함이 있을 때 사람, 물질, 천사가 따릅니다.
 
32. 채무의 영을 대적 하십시오. 채무의 영은 사람들을 빚지게 하고 빚에 묶여서 살아가게 합니다. 여러 가지 이유로 경제적인 어려움이 생길 수 있습니다. 한탕주의나 나중에 어떻게 되겠지...하는 생각은 바로 채무의 영이 불어넣어주는 생각입니다. 속지 마십시오. 그렇게 해서는 채무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 문제를 가지고 주님께 나아가야 하며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지 주님께 물어야 하고 실제적이고 구체적인 대책을 세워야 합니다.

33. 밤에 갑자기 무서운 느낌이 들 때가 있습니다. 밤엔 육체의 힘이 약해지고 영의 감각이 깨어나기 때문에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주위에 있는 어떤 영의 감각을 느끼는 것입니다. 무서움은 그 사람의 영이 약하여 마귀에게 눌리는 현상입니다. 무섭거나 두려운 마음이 들면 억지로 싸우려 하지 말고 불을 켜고 찬양을 크게 틀어놓으십시오. 그것은 마귀에게 폭탄을 퍼붓는 것과 같아서 그 공간에 있던 악한 영은 정신없이 도망을 칩니다.

34. 악몽은 깨어있을 때에 접촉한 악한 세력이 꿈속에서 드러나는 것입니다. 악몽이란 낮에 경험한 악한일의 기운이 남아 있다가 육체가 약해지는 밤에 드러나는 일종의 영적 배설과 같은 것입니다. 꿈을 잘 관리하십시오. 악몽을 꾸지 않기 위해서 깨어있을 때 접촉하는 것들을 주의하십시오.
 
35. 새로운 곳에서 잠을 자게 될 일이 있을 때 잠을 잘 이루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모든 공간에는 그 공간을 지배하는 영들이 있는데, 생소한 사람이 오면 자신의 영역을 침범했다고 생각하고 공격을 합니다. 예민한 사람들은 막연하게나마 이러한 기운을 느끼기 때문에 무서운 느낌을 갖는 것입니다. 그럴 때는 대적하는 기도를 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 공간에 있는 모든 악한 영들에게 떠나가라고 명령합니다.

36. 사랑이 있는 곳에 그리움이 있으므로 보고 싶은 사람을 보지 못하면 상대방에 대한 그리움에 잠기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입니다. 하지만 이와 같이 자연스러운 그리움을 넘어서 지나친 그리움에 사로잡혀 삶 자체가 어려운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한 그리움은 본인 스스로 절제할 수 없으며 그것이 깊은 슬픔과 무기력을 동반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악한 영이 개입된 것입니다. 이러한 절망에 가까운 그리움은 생명을 포기하게 하기까지 합니다. 그러한 그리움을 대적하십시오. 가슴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절망스러운 그리움, 그 처철한 느낌을 받아들이지 않겠다고 선포하고 마귀를 대적하십시오.
 
37. 과식이란 몸이 필요한 것 이상의 음식을 먹는 것인데, 이것은 아주 좋지 않습니다.
몸의 건강을 나쁘게 할 뿐 아니라 영적으로도 아주 나쁜 영향을 끼칩니다. 배가 터지게 먹는다던가, 끊임없이 뭔가를 먹는 것, 맛있는 음식을 찾아다니는 것 그렇게 입의 쾌락을 즐기는 사람은 영혼이 발전하기 어렵습니다. 필요 이상의 음식이 몸 안에 있으면 썩게 되는데 그 썩은 냄새는 악한 영들이 좋아하는 냄새며 그 냄새를 맡고 악한 영들이 몰려오게 됩니다. 부디 과식의 영을 대적하십시오.

38. 지나친 쇼핑의 영을 대적하십시오. 여성들은 남성들에 비해 애정에 대한 욕망을 많이 가지고 있는데 그것이 자신 안에 채워지지 않으면 내면의 공허함을 느끼고 그것을 채우기 위해 쇼핑 탐닉에 빠집니다.

39. 도박의 영을 대적하십시오. 도박 중독은 도박의 영에게 사로잡힌 것입니다. 도박의 영은 가정을 파괴하고 삶을 파괴하고 엄청난 재앙을 일으킵니다. 도박의 영에게 사로잡히면 자기의 의지로는 절대로 그 손아귀에서 빠져나갈 수 없습니다. 도박의 영을 대적하고 결박하고 주변의 사람들에게 부탁을 해야 합니다. 도박장에는 일정한 액수의 돈을 내면 자신을 도박장에 절대로 들여보내주지 않는 제도가 있다고 합니다. 자기가 자기 돈을 내고 도박장에 들어가지 못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40. 지나친 승부욕을 대적하십시오. 여성들은 이기는 것보다 사랑받는 것을 좋아하는 반면에 남성들은 사랑도 승부로 생각합니다. 승부에 대한 집착은 사람을 사납고 악하고 거칠고 교활하게 만듭니다. 그 배후에는 악령들의 장난이 있습니다. 승부에 대한 집착과 욕심은 영혼을 어둡고 비참하게 만듭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가능한 승부를 다투는 것을 피해야 합니다.

41. 지나친 애정의 영을 대적하십시오. 애정에 대한 욕구는 당연한 것이지만 지나친 애정의 욕망은 재앙의 시작입니다. 과도한 애정은 종종 소유욕과 집착으로 발전해갑니다. 인간을 파괴하고 가정을 파괴하고 싶어 하는 영들의 장난에 속지 마십시오. 일반적으로 악령들은 여성들에게는 애정의 집착을 남성들에게는 무책임하고 한사람에게 성실하지 않게 하는 영을 집어넣어줍니다. 오직 주의 이름으로 사랑하고 사랑을 받으십시오.

42. 수다의 영을 대적하십시오. 언어는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주신 귀한 은총입니다. 그러므로 언어를 적절하게 표현하고 사용해야 합니다. 주님의 인도 속에서, 영혼의 감동 속에서 흘러나오지 않는 언어는 많은 경우 해로운 것이 됩니다. 자칫 말이 악한 영의 통로로 변질될 수 있습니다. 사람과 많은 대화를 나누는 것보다 주님과 충분한 대화를 나누십시오.

43. 취미, 기호, 습관에 주의 하십시오. 사람이 무엇에든 미치고 빠지는 것은 그 영이 역사하기 때문입니다. 진정 우리를 아름답고 행복하고 풍성하게 하는 것은 기도의 취미이며 예배의 습관입니다. 주를 바라보고 주를 얻으며 그 임재 안에 사로잡히는 것입니다.
 
44. 고집의 영을 대적하십시오. 이것은 쓸데없이 고집을 부리는 영인데 오기라고도 합니다. 아이들이나 또 다른 사람이 이처럼 고집을 부리고 있다면 우리는 조용히 그들의 안에서 역사하고 있는 고집의 영들을 결박해야 합니다.

45. 공중의 권세 잡은 악령들은 불순종하는 사람들의 안에서 움직이고 역사합니다. 그러한 불순종의 대표적인 것이 거스르고 대적하는 영입니다. 권위를 거스르고 반항합니다. 순복, 순종을 싫어하고 권위자를 대적합니다. 이들은 교사이든 목회자이든 정치적 지도자이든 모든 권위에 대해서 거스르고 분노합니다. 그리하여 질서를 무너뜨리고 파괴하고 싶어 합니다. 이들은 자기 안에서 움직이는 그 기운이 자신인줄 알겠지만 그것들은 지옥의 영이며 지옥의 기운입니다.
 
46. 폭력과 파괴의 영을 대적하십시오. 어떤 이들은 이 폭력의 영을 촉발시키는 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을 비난하거나 비웃거나 흥분시켜서 폭력의 영이 바깥에 나오도록 환경을 조성합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폭력의 피해자가 됩니다. 폭력의 영은 지옥의 영입니다. 폭력의 영을 통해서 두려움이나 공포의 영이 들어오고, 자학의 영이 들어오고, 분노와 증오의 영이 들어옵니다.

47. 혼미케 하는 영을 대적하십시오. 진리를 깨닫는 것을 방해하는 영이 혼미의 영입니다. 혼미의 영은 마치 기생충과 같습니다. 아무리 좋은 음식을 먹어도 속에서 기생충이 그 영양분을 다 흡수해버리면 그 사람은 영향실조가 될 것입니다. 좋은 영적인 분위기에 접하고 좋은 책을 읽고 좋은 교제가 있어도 혼미한 영을 가지고 있으면 그 사람은 변화되지 않습니다.

48. 죽음의 영을 대적하십시오. 죽음의 영들이 찾아와서 빨리 우리의 삶을 마치도록 하라고 유혹합니다. 죽고 나면 모든 고뇌가 사라지고 평안할 것이라고 속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거짓말입니다. 죽는다고 고뇌가 사라지지는 않습니다. 죽음이 가까이 이른 것을 볼 때 우리는 죽음의 영을 대적해야 합니다. 낙심하여 삶을 포기하려는 이들에게 우리는 죽음의 영을 결박하고 대적할 것을 권해야 합니다. 어떤 이들은 오래 살면 뭐하냐고 합니다. 그것은 어리석은 말입니다. 우리는 살아서 해야 할 일이 많이 있습니다.

49. 길이 막혔을 때 대적하십시오. 사단은 우리의 길을 막는 존재입니다. 그들은 우리의 일을 방해하며 우리를 통한 영적인 사역을 방해합니다. 이유 없이 길이 막힐 때, 자연스럽지 않은 어떤 막힘을 경험할 때 그때 마귀를 결박하며 명령하는 기도를 사용하면 길이 뚫리는 경험을 하게 될 것입니다.

50. 어떤 사건 이후에 갑자기 사람이 달라졌다는 이야기를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것은 그 사건을 통해 들어온 악한 영이 그 사람 안에 자리를 잡고 계속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하기 때문입니다. 해결하는 방식은 간단합니다. 그 사건이 일어난 당시로 돌아가서 그때 들어온 악한 영을 대적하고 결박하고 쫒아내면 됩니다.

51. 속이는 영을 대적하십시오. 진리는 단순한 것입니다. 진리의 영이 임할 때 우리는 겸손해지며 영혼들을 사랑하게 되고 주님의 아름다운 통로가 됩니다. 속이는 영들에게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겸손하고 순전한 영이 필요합니다. 자신을 대단한 존재로 생각하는 이들, 남들보다 우위에 있고 싶어 하는 이들은 이러한 영의 유혹을 이길 수 없습니다.
 
52. 자살의 영을 대적하십시오. 악한 영들의 최종 목적은 영혼들을 지옥으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입에서 ''죽고 싶다''는 말은 절대로 꺼내서는 안 됩니다. 어떤 사람들은 습관적으로 ''죽겠네''하는 말을 하는데 그것은 무척 위험한 일입니다. 그것은 죽음의 영을 부르는 소리입니다.
 
53. 사람은 살아있는 동안 계속적으로 천국의 영과 지옥의 영에 의해서 영향을 받습니다. 천사들은 영혼들을 천국으로 이끌려 하고 지옥의 악령들은 영혼들을 지옥으로 끌어당기려 합니다. 이 땅에 살면서 좀 더 강한 악령의 공격을 받는 사람이 있고 비교적 약한 공격을 받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악한 영들의 공격이 강한 곳에는 그것을 이길 수 있는 더 큰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게 됩니다.
 
54. 한계를 느낄 때 대적하십시오. 특별한 이유가 없이 일이 잘 안 풀릴 때가 있습니다.
이럴 때 대적기도를 하는 것이 좋습니다. 대적하는 기도는 영적, 정신적, 육적, 환경적인 장애물을 제거해주며 우리를 새로운 곳으로 올려줍니다. 그것은 더러워진 창문을 깨끗이 닦았을 때 바깥의 경치가 선명하게 보이는 것과 같습니다


기도는 단계적으로…


기도하는 것에는 일곱 가지 단계가 있습니다.

첫 번째 단계는 신앙 고백(confession) 입니다. 하나님이 누구이신지를 생각함으로써 시작합니다. 아브람은 "천지의 주재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 여호와께"(창14:22)라고 그분의 전능하신 능력을 선포함으로써 시작했습니다. 엘리야는 갈멜 산에서 기도할 때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왕상18:36) 라고 시작했습니다. 여러분도 불이 하늘에서 떨어지기를 원한다면 하나님이 누구이신지를 고백함으로써 시작하십시오.

두 번째 단계는 간구(supplication) 입니다. 여러분의 간청을 주님이 아시게 하십시오. 불행하게도 수많은 사람들이 너무 많은 시간을 보내고 있는 단계이기도 합니다. 그들의 모든 기도 생활이 필요함과 원함과 갈망으로 집약되고 있는 듯합니다. 물론 여러분의 개인적 문제는 하나님께서 주목하실 가치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들을 다 아뢰었다고 해서 곧 '아멘' 할 때는 아닙니다. 더 중요한 것이 남아 있습니다.

세 번째는 내가 아주 좋아하는 단계로 찬미(adoration) 입니다. 절대적인 아름다움과 경배의 시간입니다. 그분을 사랑하고 찬미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시작할 수 있겠지요. "예수님 사랑합니다" 그 순간 여러분은 성령님의 임재하심을 느낄 것입니다. 그리고 두 시간쯤 후 시계를 들여다보고는 '시간이 이렇게 빨리 가다니 믿을 수가 없어' 할 것입니다. 너무나 실제적이며, 너무나 생생하기에 그렇습니다.

네 번째 단계는 친밀의 시간(time of intimacy) 입니다. 그것은 표현하기에는 너무나 사랑스럽고 너무나 신성하며 너무나 아름답습니다. 나는 기도의 깊은 상태에 빠질 때 누군가가 앞에 서서 내 이마를 만지는 것처럼 느낄 때가 여러 번 있었습니다. "고맙다. 너와 함께 있는 것이 너무 기쁘구나" 라고 주님께서 내게 말씀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기억하십시오. 성령님은 결코 여러분에게 강제로 시키지 않으십니다. 그분은 여러분의 기도 생활에서 요구나 약속을 하는 위치에 계시지 않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 저의 기도를 도와주십시오." 하면 그분은 즉각 도와주실 준비가 되어 계십니다.

나의 기도 생활에서 이 부분은 어느 때는 몇 시간이고 계속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친밀함의 단계는 여러분이 시작할 수 있는 위치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전 단계를 빨리 지났다고 해서 이 단계에 도달하는 것도 아닙니다.

다섯 번째 단계는 중보기도(intercession) 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성령님께서 우리에게 여러 가지를 보여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여러분이 성령님께 도와달라고 기도드릴 때 그분은 여러분이 바라는 이기적인 필요에 초점을 두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초점은 외부를 향하고 있습니다. 그분은 수년 동안 생각지 않았던 사람들의 이름과 얼굴들을 내 앞에 내어놓으십니다. 그러면 나는 그들을 위해 중보기도를 합니다. 그러나 이 단계가 기쁨과 경배의 시간이라고 믿지 마십시오. 그와는 반대입니다. 처음에 내가 중보기도를 하게 되면 우선 내가 그것을 원해서 기도하고 있는지 알 수 없습니다. 성령님이 교통하심도 떠나갔고 친밀함도 떠났습니다. 나는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고통과 고뇌를 느낍니다. 나의 가족, 친구, 사역자들을 위한 기도, 더 나아가 나라와 민족을 위한 기도까지 있는 힘을 다해 바치며 마룻바닥을 치기도 합니다.

여러분에게 경고를 하나 하지요. 손가락을 '탁' 하고 퉁기듯이 그렇게 쉽게 중보기도로 들어가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것은 깊고 강한 개인적 관계가 요구되는 하나님과의 동업이기 때문에 즉각적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님은 여러분의 기도 생활을 단계적으로 인도하십니다. 나에게 그러한 기도의 깊이로 들어가기까지는 적어도 6개월이나 걸렸습니다. 성경은 우리가 조그만 일에 믿음을 보이면, 하나님께서는 더 큰 일을 우리에게 주신다고 하였습니다. 바로 그것이 그분이 하시는 일입니다. 그분은 완전한 아버지이시며, 완전한 스승이십니다.

여섯 번째 단계는 감사(thanksgiving) 입니다. 바울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고전15:57) 라고 말합니다. 나는 언제나 아버지 하나님께, 아들 예수님께, 그리고 성령님께 감사드리는 데 시간을 보냅니다.

마지막으로 일곱 번째 단계는 찬양(praise) 입니다. 나는 어떤 때는 찬송을 하며, 어떤 때는 영의 언어로 말합니다. 이것은 나의 영혼 깊숙한 곳으로부터 폭발해 나오는 완전한 찬양이며, 이전에 경험해 보지 못했던 아주 순수한 형태의 기도입니다.

" 베니, 당신은 언제나 이 일곱 단계를 모두 거칩니까? " 하고 여러분은 질문하겠지요. 그렇습니다. 그리고 여기에 성령님에 관한 놀라운 일이 있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기도 중에 여러분을 통해 그분께서 일하시게 한다면, 여러분 자신은 많은 기도를 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을 발견할 것입니다. 그분께서 모든 일을 다 하시기 때문입니다. 중보기도 단계에서 고통을 느끼는 것과 같이, 성령님의 팔이 여러분을 들어올리시며, 여러분의 기도가 끝나면 생기를 다시 채워 주십니다. 바울이 ' 모든 기도와 간구로 하되 무시로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엡6:18) 라고 말한 것은 옳습니다. 그는 여러 종류의 기도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안녕하세요 성령님 중에서> - 베니 힌


바로 듣기, 바로 보기, 바로 말하기


 - 우리는 흔리 언어라고 하면 말하는 것을 생각하고, 언어 능력하면 곧 말 잘하는 능력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조금만 깊이 생각하면 '말하기'는 '듣기', '보기'가 있은 다음에 오는 행동입니다. 그러므로 언어란 본질적으로 삼위일체적 심중 구조입니다. 그 구조는 바르게 잘 듣기, 바르게 잘 보기, 바르게 잘 말하기입니다. -
 
        바르게 잘 듣기란 무엇인가? 
사람들은 잘 듣지 못합니다. 들리지 않아서 못 듣는 것이아니라 들으려 하지 않기 때문에 못 듣는 것입니다. 자기에게 좋고 유리한 것만 들으려 합니다. 선입관을 가지고 듣습니다. 
그러므로 듣지 못합니다. "너희가 들어도 깨닫지 못하며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사6:9)는 말씀입 그 뜻입니다. 미국 CNN 방송국의 명 대담자 래리 킹은 대화의 법칙 제 1조는 상대방의 말을 '경청'하는 것이라고 갈파했습니다.

마음 문을 열고 열성을 가지고 관심을 가지고 정성을 다하여 듣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모습을 주의 깊게 보십시오. 대부분의 사람들이 상대방의 말을 듣는 척하지만 속으로는 다음에 자기가 할 말을 생각하느라 바쁩니다. 우리들은 집 식구들의 말도 제대로 듣지 못하고 삽니다. 남편이 부인 말을, 부인이 남편 말을, 부모가 자녀의 말을, 자녀가 부모의 말을 건성으로 듣습니다. 성의 없이 듣습니다. 잔고리로 듣습니다. 우리네 가정불화의 많은 부분이 '잘 듣지 않기' 때문에 일어나고 있습니다. 성겨은 '듣기는 속히하고 말하기는 더리하라'(약1:19)고 하셨습니다.

        바르게 보기란 무엇인가?
 검은 안경을 쓴 사람 눈에는 세상이 모두 시커멓게 보이는 것처럼, 바르게 듣지 못하는 사람은 바르게 보지도 못합니다. 자기에게 필요한 것, 유익한 것, 보고 싶은 것만을 보려 하지 때문에 바르게 보지 못합니다. 마음을 담지 않고 보기 때문에 보지 못합니다. 마음을 담고 천지자연을 보면 보는 것마다 아름답지 않은 것이 없고, 마음을 담고 사람을 보면 보는 사람마다 귀하지 않은 사람이 없고, 마음을 담고 글을 읽으면 글자 하나 하나 문장 사시사이에 숨겨진 비밀한 의미가 또렷이 드러납니다.  바르게 보기란 따뜻한 마음으로, 감사하는 마음으로 자연을 보고, 글으 ㄹ읽고, 사람을 보는 것입니다.
 
        바르게 말하기란 무엇인가?
 '바르게 말하기'는 '말 잘하는 것'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모세나 바울 사도의 경우를 보십시오. 저들은 '말 잘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바르게 잘 말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내 입의 말과 마음의 묵상이 주의 앞에 열납 되기를 원하나니다(시19:14).
    경우에 합당한 말은 아로새긴 은쟁반에 금사과니라(잠25:11).
    모든 악독과 궤휼과 외식과 시기와 모든 비빙하는 말을 바라라(벧전2:1)
 
이 말씀들은 '바르게 말하기'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잘 밝여주고 있습니다. '바르게  말하기'란 경우에 합당한 말, 진실한 말, 선하고 따뜻한 말을 의미합니다. '바르게 잘 말하기' 위하여 꼭 필요한 전제 조건이 '바르게 잘 듣기'와 '바르게 잘 보기'라는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제대로 잘 듣지 못하고 잘 보지 못한 사람이 경우에 합당한 말, 진실한 말, 선하고 따뜻한 말을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언어 생활은 바르게 잘 듣고, 바르게 잘 본것을 바르게 잘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 시대에 꼭 필요한 것은 바르게 잘 듣고, 바르게 잘 보는 훈련이라고 생각합니다. 잘 듣고 잘 보면 자연히 잘 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말씀의 샘물 제5권> 이정수

  
   - 죽음이 아니고 생명을, 저주가 아니고 축복을 선택하는 것은 흔히 침묵을 지키는 것을 선택함으로써, 또는 치유의 길로 향하는 문을 여는 말을 선택함으로써 시작된다 - 
<말을 현명하게 선택하기> 헨리 나웬

영적인 사람의 7가지 습관


첫째,영적인 사람은「행복」해지는 것보다는「거룩」해지는 것을 원한다.
          사람들은 대부분 좀더 편안하고 행복해지기를 바라지만 이러한 바람은 그 사람의 
          관심이 세상에 치우쳐 있기 때문에 생겨난 것이다. 

둘째,영적인 사람은 주기도문을 고백할 때「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 오며」
        라는 구절 바로 뒤에「제게 어떤 희생이 뒤따르더라도」라는 조건을 덧붙이는
        사람이다.즉 자신이 어떠한 희생을 치르더라도 결국 주님의 이름이 높여지기를 원
         하는 그런 사람이 바로 영적인 사람이다. 

셋째,영적인 사람은 하나님의 관점에서 사물을 보는 습관을 갖고 있다
사람들은 대개 사물의 겉모양만을 보기 때문에 쉽게 상처받고 흥분하게 된다.그러나 영적인 사람은 사물의 겉과 속을 한꺼번에 통찰하시는 하나님을 닮으려고 애쓰기 때문에 일시적으로 흥분하거나 상처받지 않는다.

넷째,사촌이 땅을 사도 배가 아프지 않은 사람이 영적인 사람이다.
          그래서 자신이 낮아지고 다른 사람이 높아지는 것을 기쁘게 받아들일줄 안다.

다섯째,영적인 사람은 죽음에 대해 두려움이 없는 사람이다.
       
그래서 그릇된 모습으로 살기보다는 아름답게 죽기를 원한다.

          죽음이 두려워 조금이 라도 더 오래 살기 위해 안간힘을 다하는 사람들과 달리 
          영적인 사람은 불의와 타협해 가며 하루하루를 연명하기보다는 단 하루라도 
          의미있는 삶을 살기 위해 최선을 다하게 마련이다. 

여섯째,영적인 사람은 장기적인 안목을 가진 사람이다.
       
영적인 사람은 세상의 모든 것을 초월하기 때문에 사람들 사이에서 유명해지거나 섬김
         을 받으려 하지 않고 오히려 다른 사람들에게 유용한 존재가 되기 위해 애쓴다. 

일곱째,영적인 사람은 기꺼이 고통을 감수하는 사람이다.
       
사람들은 일단 무겁고 힘든 것이라는 생각에 짓눌려 자신의 십자가를 지기도 전에 
         한숨과 탄식에 빠지게 된다.그러나 영적인 사람은 그 십자가가 불편하고 고통스럽다
         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탄식하지 않는다.

이 세상에 계시는 동안 고난 당하신 주님께 순종한다는 것은 이미 세상적인 것들을 포기 한다는 것임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토우저는『인간의 힘만으로는 이러한 일곱가지 습관을 가질 수 없다』면서 『먼저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야만 영적인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다』고 덧붙였다.

출처:국제리더십훈련원

거룩한 공의 – “다윗의 장막”


성경은 아모스를 통해 예언된 다윗의 장막의 회복을 주님의 통치와 왕권의 드러남에 분명하게 연결시킨다. 바울과 바나바가 그들의 성공적인 첫 전도여행에서 돌아왔을 때 제자들은 이방 회심자들로 인해 딜레마에 빠졌다. 제자들은 원래 아브라함의 후손들을 위하여 약속된 축복을 이방인들도 받아들이자, 그들을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 예상치 못한 과업을 지게 되었다. 성령은 주님의 초기사역 동안 함께했던 베드로와 다른 사역자들에게 하셨던 동일한 방법으로 이방 크리스천들에게도 역사하셨다. 진리는 기적과 표적과 기사를 통해 이방인 사이에 입증되었고, 풍부한 추수를 거두었던 것이다.

많은 토론 후에 지혜의 영에 이끌림을 받은 야고보가 결국 회중에게 말했다. 그는 아모스 9장을 인용하여 하나님의 이름으로 인정받고 주님을 위하여 구분된 이방 백성에게, 회복된 다윗의 장막에 대한 예언적 약속을 적용했다. 사도들은 다음과 같이 말함으로써 이방인과의 영적 관련성을 확증했다.

하나님이 처음으로 이방인 중에서 자기 이름을 위할 백성을 취하시려고 그들을 돌보신 것을 시므온이 말하였으니 선지자들의 말씀이 이와 일치하도다 기록된바 이후에 내가 돌아와서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다시 지르며 또 그 허물어진 것을 다시 지어 일으키리니 이는 그 남은 사람들과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모든 이방인들로 주를 찾게 하려함이라”(15:14-17).

초대 사도들은 성경의 전례가 적용을 다루어야 했다. 이전 세대의 선지자들을 통한 하나님의 약속은 회복을 위한 것이었다. 이 세대에서도 마찬가지로 우리는 전례 없이 적용되고 회복되어야 할 많은 진리들을 다루게 될 것이다. 적합한 성경적 적용에 대한 우리들의 유일한 기준은 성경말씀과 그것을 밝혀 주시는 성령이 될 것이다.

야고보 사도는 아직 달성되지 않은 진리를 선포했다. 어느 세대도 다윗의 장막의 완전한 회복을 목격하지 못했다. 우리는 하늘의 보좌와 세상에서 주님의 공의가 실현되는 것을 보아야 한다. 야고보의 선포는 성취되어야만 하고, 우리는 이 주목할 만한 성취를 체험할 시대를 사는 특혜를 입고 있다.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시대는 라오디게아 시대라 불릴 만하다. 헬라어로 라오디게아는 사람들의 공의혹은 사람들의 권리를 의미한다. 불행히도 이것은 하나님의 공의와는 아주 거리가 멀다. 이 세상의 영은 인간의 권리를 우선적으로 선포하지만, 하늘은 거룩한 공의와 하나님의 성경적 권리를 선포한다. 거대한 대결이 이 두 영 사이에서 진행 중이다.

공의가 단지 인간의 손에 의해서 행해진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인간의 마음은 대단히 악하다. 라오디게아 교회 시대는 주님께서 당신의 백성에게 보여주시고자 소망하셨던 그 공의를 전적으로 대적했다. 하나님은 공정과 공평, 그리고 진리로 넘쳐나신다. 그러나 인간의 마음에는 진정한 공명정대함이 성령에 의해 공급될 때를 제외하고는 결여되어 있다. 전능하신 하나님은 정의에 있어서 완전하시지만, 이 세상의 신들은 불의의 화신이다.

하나님의 공의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믿는 자들에게 상당한 용기를 준다. 성경은 정결하고 의로운 주님의 속성에 대해 분명하게 기술하고 있다. 주님과 결합하여 그분의 의로움을 나누는 사람은 주님의 공의의 표출에 두려움을 갖지 않는다. 실제로 거룩한 공의는 왕국의 중요한 비밀이고, 그 공의가 그리스도의 신부들을 인간 역사에서 목격된 바 없는 대추수에 나서게 할 것이다. 하나님의 공의는 신실함에 보답하실 뿐 아니라, 주님과 그의 백성에 대항하는 불의에 대해 보응하신다.

마지막 시대에 대한 대부분의 계시적이고 두려운 묘사는 불의를 심판하는 공의의 동전의 한쪽 면과 같다. 다행히도 거룩한 공의는 양날의 칼이다. 한쪽 면은 그리스도의 신부에 의해 탐구되고 포용된다. 다른 한면은 죄에 대한,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과 품성의 모독에 대한 혹독한 벌이다. 그러나 이러한 면도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된 시간은 아니다. 나의 친구는 종종 문제가 있으면 하나님에게서 도망하지 말고 그분에게 달려가라라고 말한다.

공의의 사역
의로움과 공의는 주님 보좌의 기초라서 성서는 단언한다. 이 두 가지의 속성은 하나님 나라의 근본 원리이고, 변환의 시대 동안 아주 강조 될 것이다.

우리는 하늘의 공의를 전적으로 받아들이지 못해 왔다. 왜냐하면 우리가 그것의 절대적인 적용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님의 공의는 하늘의 자원으로 무장한 마지막 때의 믿는 자들의 군대를 풀어 놓을 것이다. 주님께서 자신을 공의의 심판관으로 드러내실 때 성도들에게 대한 평결이 내려질 것이다. 시대를 걸쳐 하나님의 백성에게 부여된 모든 귀중한 소명, 기름부음, 사명, 은사가 회복되고 되찾아질 것이다.

A.W. 토저는 그의 책 [하나님을 바로 알자](The Knowledge of the Holy)에서 하늘의 거룩한 공의에 대해 다음과 같이 썼다. 『하나님이 하실 어떤 행위를 가리켜 공의가 하나님이 이렇게 하도록 요구한다라고 말할 때가 있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잘못이다. 왜냐하면 이것은 어떤 특정한 방법으로 하나님을 움직이시도록 강요하는, 하나님이 없는 공의의 원리를 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러한 원리는 없다.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보다 더 월등한 것이다. 왜냐하면 오직 더 월등한 힘만이 복종을 강요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본성밖에는 그분을 조금이라도 움직이는 그 무엇도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하나님의 이유는 그의 자존하는 실재에서 비롯된다. 영원 전부터 그 무엇도 하나님의 존재에 덧붙여지지 않았으며, 그 무엇도 그분의 존재에서 제거되거나 변화되지 않았다. 하나님은 도덕적 공평의 자존하는 원리이시다. 하나님은 악한 자에게 형을 선고하시고 의로운 자에게 상을 주실 때 자신 외의 어떤 것으로도 영향을 받지 않으시면서 내면으로부터 자신에 걸맞게 행하실 뿐이다.[개인적으로 이 책을 꼭 읽어 보시기를 추전합니다]

거룩한 공의는 의로운 자에게는 복으로, 불의한 자에게는 심판으로 갚는다. 공의는 도둑맞은 것을 되찾아 주고 도둑이 잡혔을 때 피해자에게 보상하게 만든다. “도둑이 만일 주릴 때에 배를 채우려고 도둑질하면 사람이 그를 멸시하지는 아니하려니와 들키면 칠 배를 갚아야 하리니 심지어 자기 집에 있는 것을 다 내주게 되리라”(6:30-31).

대부분의 모든 믿는 자들은 그들이 도둑맞은 것을 안다. 많은 사람들의 아이들과 가족이 질병과 궁핍으로 고통받고 있다. 또 다른 이들은 재원을 다 빼앗겨 버렸다. 하나님의 백성에게 주어진 영적 유산의 대부분이 불법적으로 빼앗겼다. 귀중한 사역의 은사들과 영적 기름부음을 마귀라는 강도의 습격으로 잃어버렸다.

수천 년간 역사는 강도의 뻔뻔한 활동과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그의 악랄한 계획과 전략을 기록해 오고 있다. 원수의 뿔이 하늘의 언약백성을 대항하여 높이 들려졌다. 원수는 질병, 죽음, 경제적 재난, 부패한 정치적 문화적 권위, 유산, 마약과 알코올 중독, , 우울, 사고 등을 포함한 무기를 파괴의 계략으로 이용해 왔다. 역사의 연대기는 셀 수 없는 사악한 참소, 고문 그리고 숭고한 남녀의 순교로 가득 차 있다.

일련의 주석과 저널들은 종교적 광신자들의 손에 자신을 살육하도록 희생적으로 내어 놓은 용감하고 신실한 사람들의 삶을 기록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부당하게 고문을 당했고, 종교의 이름으로 처형을 당했다. 그들은 실제로 그리스도의 순교자들이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만물을 꿰뚫어 보시는 눈 아래서 일어났다. 하나님은 적들이 망쳐 놓은 모든 것을 회복하실 것을 약속하셨다. 분명히 이러한 성도들은 영원한 순교자의 상급을 받는다. 그들은 또한 영적인 씨앗을 뿌렸고, 그 결과로 하나님께서 이전에 증거된 바 없는 가장 현저한 은혜의 보증을 주실 것이다.   
<폴 키스 데이비스 계시의 비밀중에서

진리의 책 [폴 키스 데이비스]


선지자 다니엘은 하늘에서 매우 존중받는 자였고 우리 시대에 직접 적용되는 여러 주요한 방문에 대한 특권이 주어진 자였다. 다니엘은 이스라엘의 포로 생활이 곧 끝날 것이라는 것을 알고 난 후, 회개의 기도와 영적 각성의 기도를 시작했다(9). 다니엘의 청원은 지난 몇 년 동안 그리스도의 몸(the Body of Christ)에 스며들었다. 이스라엘이 70년간 억압되어 있었던 것과 같이, 그리스도의 신부는 전례없는 영적 각성과 회복을 경험함으로 억압으로부터 이제 막 자유를 얻으려 하고 있다.

선지자 예레미야를 통해 선포된 하나님의 때를 알게 된 다니엘은 자신을 하늘과 땅 사이 중보자의 자리에 두었다. 그의 삶은 하나님의 백성을 위한 짐과 그들의 회복을 위한 하늘의 계획을 지고 나아가는 것이었다. 그는 하나님의 마음을 흔들었고, 그 결과 성령은 이스라엘이 그들의 기업의 장소로 돌아갈 수 있는 전환을 만드는 일에 다니엘을 사용하셨다. 그러나 적은 수의 남겨진 자들만이 돌아가 성전을 재건축하라는 부르심에 응답하였다. 이것으로 인해 나이든 선지자들은 슬퍼하며 하나님 앞에서 애통하며 금식하며 3주를 보냈다. 주님은 그의 백성들을 위한 하나님의 계획에 대해 통찰력을 지닌 초자연적인 메신저를 보내심으로써, 그 애통함에 응답하셨다. 다니엘서 10장은 그에게 있었던 중요한 방문에 대해 기록하고 있다.

그가 이르되 내가 어찌하여 네게 왔는지 네가 아느냐 이제 내가 돌아가서 바사 군주와 싸우려니와 내가 나간 후에는 헬라의 군주가 이를 것이라 오직 내가 먼저 진의 글(the Book of Truth)에 기록된 것으로 네게 보이리라 나를 도와서 그들을 대항할 자는 너희 군주 미가엘뿐이니라”(10:20-21).

우리는 다니엘이 그날에 대면했던 사람이 누구인지 확실하게 알 수는 없다. 5-9절에 있는 단어들은 심판관으로서의 역할을 하시는 주 예수의 다른 표현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아마도 다니엘에게 천사장 가브리엘로 나타난 주님의 예표가 주어졌을 것이다. 나를 포함한 많은 성경 주석자들은 가브리엘이 진리의 책의 메시지를 전달했을 것이라고 믿는다.

이 메시지의 선포는 그 통찰력을 나누기 위해 하늘의 존재를 필요로 했다. 가브리엘이 읽은 책은 세상의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영원한 나라에 속한 책이었다. 그 말들은 원래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 하늘의 도서관에서 나온 것이다.

오늘날의 우리의 소명과 고전은 다니엘의 것과 흡사하다. 우리는 겸손하게 하나님께 자신을 드려야 하고, 이 세대를 위한 하늘의 짐을 받아야 한다. 그렇게 했을 때 초자연적인 방법으로 나타나는 하늘의 운명이 생겨날 것이다.

나는 많은 사람들이 하늘의 메신저를 만날 특권을 갖게 될 것이며, 진리의 책에 있는 통찰력을 얻게 될 것이라고 믿는다. 이 시대에 그러한 전략과 운명과 섭리가 주어질 것임에 틀림없다.

진리의 책은 하늘이 선포한 예정된 계획과 사건들을 담고 있으며, 그것들은 틀림없이 드러날 것이다. 우리는 이 계획에 참여할 특권을 부여받았다. 우리는 주님이 하늘에서 계획하신 과업을 이루시도록 우리 자신을 주님께 내어드릴 때 영원한 열매를 즐길 수 있게 된다. 그러나 각자가 협동하여 거룩한 뜻에 자신을 드릴 것인지 아닌지는 우리의 자유의지에 의해 결정되고, 그러한 의지는 이 책임을 위해 성령의 단련과 준비를 겸비하여야 한다. 궁극적으로 하늘을 지상으로 옮기고 주님의 계획, 목적 그리고 하늘의 구상을 실현할 메신저와 전달자를 주님은 찾으실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다. 히브리서 13 8절의 이 진리를 우리는 종종 인용한다. 그러나 이 거룩한 약속을 온전히 이해하기 위하여 그 앞의 절을 생각해야만 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너희에게 일러 주고 너희를 인도하던 자들을 생각하며 그들의 행실의 결말을 주의하여 보고 그들의 믿음을 본받으라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13:7-8)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하나님의 길을 보여준 이전 세대의 헌신적인 성도들과 리더들을 기억하여야 한다. 그들은 다른 이들이 성령의 초자연적인 영역에 살 수 있도록 길을 열어 준 사람들이다. 이 특혜는 수세기 전에 살았던 소수의 사람들만을 위해 주어진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 선각자들은 뒤에 올 사람들을 위하여 형태를 잡고 영적으로 다져진 길을 만들었다.

히브리서 137-8절은 우리로 하여금 그들의 행위의 결과를 정확히 관찰하고 생각하게 한다. 예를 들면 다니엘의 안내로 하나님의 방문과 진리의 책에 대한 통찰력이 만들어졌다. 우리가 이러한 리더들의 믿음을 따라갈 때 우리는 동일한 결과를 얻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기 때문이다.

우리 믿음의 주춧돌 중 하나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불변성이다. 특히 서방 교회에서 하나님이 쓰셨던 사람들을 모방하려 한 것은 흔히 범하는 실수였다. 대신 우리의 작전은 사람이 아니라 그들의 믿음을 모방하는 것이어야 한다.

우리가 이 세대를 위하여, 그리고 우리의 때에 위임된 하늘 명령의 성취를 위하여 하나님의 짐을 지고 갈 때, 우리는 진리의 책을 볼 수 있는 준비가 될 것이다. 하늘의 메신저는 주님의 책에 있는 통찰력을 나눌 수 있도록, 이 세대의 필요에 우리가 응답하기를 기다린다. 우리가 하나님 나라의 비전과 목적에 맞추어 살아갈 때, 단체와 개인의 운명들은 거룩한 도움을 받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눈은 그 마음이 하나님의 마음과 온전히 같은 사람을 찾기 위해 두리번거리신다.

성경은 마지막 때에 초자연적인 활동이 증가될 것을 지적하고 있다. 감소되는 것이 아니다. 오늘날을 향한 하나님의 목적은 이스라엘을 애굽의 억압에서 구원한 것과 바벨론에서 이스라엘의 귀환시킨 것만큼이나 중요한 의미가 있다. 가브리엘과 하늘 군단의 움직임(성령과 조화를 이룬 역사)이 일어날 것이다. 놀라운 통찰력이 그리스도 안에 숨겨진 보물 창고로부터 나누어질 것이다. 우리가 하늘의 계획을 더 온전히 이해하면 할수록 하나님의 승리의 권위를 풀어내기 위하여 성령과 더욱더 협력할 수 있을 것이다.

메신저와 메시지
가브리엘은 다니엘에게 진리의 기록과 하늘의 법령으로부터 놀라운 통찰력을 가져다 주었다. 오직 하나님 안에서만 이 거룩한 목적과 운명은 실제화 될 수 있는 것이다. 오직 하나님 안에서만 이 거룩한 목적과 운명은 실제화 될 수 있는 것이다. 성경은 그 천사가 하늘의 계획을 세상에 알리기 위해 왔다고 분명히 밝히고 있다. 초자연적인 나눔을 통하지 않고는 그러한 하늘의 기록이 전해질 수 없다. 주권자 하나님께서는 오직 그만이 알고 계신 미래의 일들을 그가 높이 신임하는 사람들과, 나누실 것이다.

메신저 가브리엘은 하늘에서 지상으로 복음과 전환의 시기를 알리도록 특별하게 임명받았다. 그는 이스라엘이 회복의 기간으로 이제 막 들어가려고 할 때 다니엘에게 초자연적 계시를 전했다. 마찬가지로 그는 그리스도를 위해 앞서 온 자, 세례 요한의 탄생을 사가랴에게 전했다. 또한 마리아에게 그녀가 성령으로 잉태할 것이며, 아이는 임마누엘이라 불릴 것이라고 했다. 이러한 각각의 천사의 방문은 한 시대가 끝나고 다른 시대가 열리는 것을 의미하는 중요한 전환의 시기를 보여준다.

다니엘과 가브리엘의 만남에서 천사장 가브리엘은 그가 진리의 책에 있는 통찰력을 가지고 왔다고 말한다. “오직 내가 먼저 진리의 글에 기록된 것으로 네게 보이리라 나를 도와서 그들을 대항할 자는 너희의 군주 미가엘뿐이니라”(10:21).

진리의 책에는 하나님의 계획, 목적 그리고 인간의 일상사와 관계 있는 법령들이 기록되어 있다. 하나님은 시작에서 끝을 보시고 한순간에 모든 시간을 관찰하신다. 영원을 통찰하시는 주님은 그의 심판과 위임통치, 그리고 열망을 기록해 놓으셨다.

가브리엘은 민족들의 미래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리고 지금 우리는 그것들을 역사적으로 추적할 수 있다. 천사장은 진리의 책에 기록된 운명들을 분명히 말하고 계시하는 임무가 있는 것 같다.

다니엘서의 나머지 부분은 세상 나라에 대한 하나님의 법령(세상 나라의 탄생, 타락과 각각의 정치적, 영적 분규)들과 하나님의 언약백성의 관계에 대한 개요를 말하고 있다. 천사는 다니엘에게 포로 시기에서 약속된 회복의 시기로 넘어가는 이스라엘의 때를 알려 주었다. 가브리엘은 다니엘에게 주님의 계획에 대한 분별과 이해를 전했다. 성경은 이 환상과 전략이 오랜 후의 일’ –우리 시대의 일-이라고 말한다(10:14).

<폴 키스 데이비스 계시의 비밀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