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2/2010

부흥을 놓치는 방법 [빌 존슨]


부흥은 하나님 아나 메시지의 중심이다. 왜냐하면 부흥 가운데 하나님의 다스림이 어떤 것이고 그것이 사회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 똑똑히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최고의 부흥은 하나님 나라가 임하는 것이다. 이렇게 부흥은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의 삶의 모습을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메시아가 오기 전 종교 지도자들은 그의 오심을 위해 기도했고 가르쳤다. 전 세계적인 태동이 있었고 심지어 세속적인 사회에서 조차 무언가 놀라운 일이 일어날 것에 대한 기대감이 있었다. 그리고 그때 베들레헴 마구간에서 예수가 태어나셨다.

점성가들은 그가 누군지 알았고 먼 길을 여행하여 그를 경배하고 그에게 선물을 드렸다. 마귀도 이를 알고 헤롯을 충동하여 장자들을 죽임으로써 인류를 구속하려는 예수의 계획을 멈추려 했다. 이 일이 실패하자 마귀는 광야 시험을 통해 예수께서 죄를 짓도록 유혹했다.

더 놀라운 사실은 하나님이 이 땅에 오신 일을 귀신들린 자들도 알아 차렸다는 것이다. 가다라 지방 사람이 그러했다. 그가 예수를 보았을 때 그는 예수 앞에 엎드려 경배하며 곧 고통의 삶에서 놓여놨다. 하지만 그의 오심을 기도했던 종교 지도자들은 그가 오셨을 때 그를 알아보지 못했다.

바울과 실라는 소아시아 지역을 두루 다니며 말씀을 전했다. 종교 지도자들은 그들이 마귀로부터 왔다고 말했다. 하지만 귀신들린 점치는 소녀는 그들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다고 했다. 어떻게 영적으로 무지하다고 생각되는 사람들은 보는데, 통찰력이 있다고 알려진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감지하지 못했는가?

하나님이 오시기를 위해 기도했지만 정작 그 일이 일어났을 때 그것을 놓친 수많은 사람들의 이야기가 역사 속에 가득 있다. 그리고 이런 일은 하나님과 강한 관계를 가졌던 사람들에게도 일어났다.

다른 종류의 소경 많은 신자들 가운데는 세상 사람에게는 없는 종류의 소경이 있다. 세상은 무엇이 부족한지를 안다. 하지만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일단 거듭나게 되면 점차 그들의 부족함이 무엇인지 느끼지 못하게 된다. 어떤일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인지 아닌지를 가늠케 해주는 것은 하나님을 향한 갈급함이다. 예수께서 이런 현상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소경이 되게 하려 함이라”(9:39)

역사의 증언과 성경의 기록은 우리에게 이런 실수의 가능성에 대해 경고하고 있다.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전10:12). 마태는 마음이 완악해져서 볼 수 없다고 말하고 있다(13:15). 칼이 무뎌진 것이다. 완악한(둔해진) 마음이란 과거 하나님 안에서의 역사는 있지만 현재 하나님이 무얼 하시는지는 따라잡지 못한 마음이다.

우리가 계속 우리의 필요를 인식하면서 열정적으로 예수를 좇을 때에만 우리는 무뎌지지 않고 계속 날이 서있을 수 있다. 이러한 첫사랑만이 우리를 이 땅에서의 하나님의 역사 가운데 우리를 계속 안전하게 남아있도록 지켜준다.

에베소 교회는 하나님께로부터 편지를 받았다. 그 안에는 예수께서 그들이 처음 사랑에서 떠났다고 말씀하신 내용이 적혀있다. 처음 사랑이란 그 성격상 열정적이고 그 밖의 인생의 다른 문제에 대해서 관심조차 없다. 그런데 만일 에베소 교회가 처음 사랑을 회복하지 않는다면 하나님께서는 촛대(lamp stand)를 옮기시겠다고 말씀하셨다.

촛대가 무엇인지에 대해 신학자들은 여러 가지고 말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하다. 촛불은 우리로 볼 수 있게 한다. 위에서 말한 소경이나 둔해졌다는 것이 반드시 지옥으로 간다는 의미는 아니다. 이것은 단지 우리가 이땅에 살면서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의도하신 바를 다 성취하지 못하도록 한다는 것이다.

※ 열정이 식으면 인식의 촛불은 결국 사라지게 된다.

어떻게 성도들이 하나님의 움직임을 놓치게 되는가 
앤드류 머레이(Andrew Murray) 20세기 초반부터 하나님의 위대한 성도들 중 한 사람으로 꼽혔다. 그는 위대한 선생이었고 기도의 열정을 가지고 있었다. 부흥을 위한 그의 부르짖음은 전설적이다.  그가 1904년도 부흥에 대해 조사하기 위해 웨일즈 지방을 방문했을 때 그는 하나님 임재의 위엄에 깊이 감동했다.

지만  그는 자신이 그곳에 더 머무른다면 부지중에라도 하나님 역사의 순수성을 더립힐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그곳을 떠났다. 그는 그가 그동안 기도해 왔던 부흥을 향해 계속 밀며 나아가지 않았다.

하나님의 움직임은 보통 어떤 결함이나 오점과 함께 온다. 거기에는 매력도 없고 어떤 이들을 불쾌하게까지 만드는 무엇인가가 있다.

방언은 20세기 부흥의 오점이었고 많은 사람들은 받아들이기를 꺼렸다.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이요 성경 주석가인 깸벨 모건(G. Campbell Morgan)은 오순절 부흥을 거부하면서 그것을 지옥의 마지막 구토라고 까지 불렀다! 비난을 감수하는 일은 종종 부흥 가운데를 걸어가기 위한 요구조건이다.

사람은 일달 거듭나면 치욕을 가져올 수 있는 일을 추루하기가 쉽지 않은 것 같다. 신자들이 하나님을 놓치는 것은 간절함이 없기 때문이다.

부흥을 향한 우리의 열망은 하나님께로부터 나왔다. 그리고 그러한 열망을 통해 우리는 그가 오셨을 때 그를 알아차릴 만큼 간절한 상태로 남아있어야 한다. 그러한 간절함이 없을 때 우리는 현재 우리의 위치에 자족하며 역사를 바꾸는 일에 가장 큰 걸림돌이 되고 말 것이다.

침략 전쟁을 펼치라 [빌 존슨]


참된 그리스도인은 고귀한 전사다. 그는 혼신을 다해 싸움터로 나아가서는 그 상황을 정복하기를 사랑한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너무나도 오랫동안 교회는 영혼을 취하는 전쟁에서 수비만을 해왔다. 만일 이단 종교나 혹은 어떤 정당이 무엇을 계획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되면 우리는 적들의 계획에 대항할 전략들을 세우기 시작한다. 위원회를 형성하고, 당회에서 논의하며 목사님들은 마귀가 하려고 하는 일에 대해 반대하는 설교를 한다.

이러한 일들은 갑작스레 닥친다. 하지만 난 솔직히 마귀의 계획에 대해 별관심이 없다. 지상대명령은 내가 공격적인 위치에 서있다는 사실을 알게 해주었다. 공은 지금 내수중에 있다 그 공을 효과적으로 몰고 갈 수만 있다면 마귀의 계획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경기장에 모여 있는 미식축구팀을 상상해보라. 코치는 지시를 하고 쿼러백은 그의 공격수들과 의사소통을 하고 있다. 그리고 양 옆에는 상대편 공격수들이 늘어서 있다. 그들은 자신들이 뛸 차레가 아니기 대문에 공도 없고 그 쪽 쿼터백은 자기 공격수들과 함께 금 바깥에 서 있는 것이다.

만일 실제 공격팀이 금 바깥에 서있는 상대편 공격팀의 위협적인 행동 때문에 시합에 집중하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해보라. 적들의 기괴한 행동 때문에 쿼터백이 겁을 먹고 경기장에서 도망치고 코치체게 상대편의 깜짝 행동에 대해 수비해야 한다고 말한다고 생각해보라.

어리석지 않은가? 그런데 지금 많은 교회들이 이처럼 행동하고 있다. 사단은 우리가 수비태세를 갖추도록 하기 위해 자신의 계획을 흘린다. 마귀는 사자처럼 울부짖고 있는데 우리는 마치 물린 것처럼 행동한다. 이제 이런 어리석은 행동을 중단하고 마귀 때문에 이 세상이 어떻게 잘못되어가고 있는지 끊임없이 논의하면서 마귀를 찬양하는 일을 멈추자.

공격할 공이 지금 우리 손에 있다. 앞서간 선배들은 지금 경기장에서 우리가 공격하는 모습을 손에 땀을 쥐고 관람하고 있다. 이 세대의 놀라운 잠재력은 우리가 얼마나 우수한가에 달려있지 않고 우리를 역사의
이 시점에 서게 하신 주님의 계획에 달려있다. 우리는 이제 마귀의 가장 끔찍한 악몽이 되려고 하고 있다.

사단은 왜 자신의 비밀을 누설하는가 나는 사단이 자신의 전략을 일부러 흘려서 우리가 거기에 반응하기를 원하고 있다고 믿는다. 사단은 무언가 컨트롤하기를 좋아한다. 그리고 우리가 먼저 공격하지 않을 때 사단이 그렇게 한다. 반응은 두려움으로부터 나온다.

우리는 예수님이 오실때까지 견디고 기다리는 존재가 아니다! 그의 피로 산 우리는 성령 충만하고 하나님께로 직접 사명을 받아 그가 말씀하셨던 모든 일이 이뤄지도록 정복하는 사람들이다. 우리가 마귀의 계획에 따라 계획을 세운다면 우리속에는 자연히 잘못된 생각들로 가득차게 된다. 그러한 잘못된 태도는 우리의 사고 속에 강한 진으로 남아서 지옥으로부터의 합법적인 공격을 끌어들이는 결과는 낳는다. 이처럼 우리가 갖고 있는 두려움은 자기 성취적인 예언이 된다.

성경적인 전쟁의 비밀 영적 전투는 피할 수 없고 또 무시한다고 해서 비켜가는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초자연적인 권세를 가지고 전투하는 법을 배워야만 한다! 다음은 우리가 자주 간과하는 원리들이다.  바로가 백성을 보낸 후에 블레셋 사람의 땅의 길은 가까울지라도 하나님이 그들을 그 길로 인도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이 백성이 전쟁을 보면 뉘우쳐 애굽으로 돌아갈까 하셨음이라.”(13:17)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현재 다룰 수 있는 문제가 어느 정도인지 늘 염두에 두고 계신다. 그래서 만일 그 전쟁이 우리로 돌이켜 그의 부르심으로부터 떠나게 할 수 있는 것이라면 거기를 피해서 인도하신다. 이 말은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이길 수 있는 전쟁만을 싸우도록 우리를 인도하신다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이 전쟁에서 가장 안전한 곳은 순종의 자리이다. 그의 뜻 안에서 우리는 이길 수 있는 모든 것이 갖추어진 상태로 그 상황을 직면할 수 있다. 그의 뜻을 벗어날 때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넘어지고 스스로 자초한 과도한 압박을 받는다.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23:5)

하나님은 절대 마귀들의 기괴한 행동들을 무서워하지 않으신다. 사실상 하나님은 마귀의 목전에서 우리들과 교제를 나누기를 원하신다. 하나님과의 친밀함은 우리의 가장 강력한 전투복이다. 어떤 것도 여기서 우리의 마음이 흐트러지지 못하게 하라.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유익을 위해 지나치게 전투에만 매달려있다. 이럴 대 은혜 대신 인간의 힘만이 나타난다. 전투에만 매달리는 태도는 우리에게서 기쁨과 하나님과의 친밀함을 빼앗아 간다. 즉 우리의 처음 사랑을 버리게 된다(2:4). 바울이 마귀가 득실대는 로마 감옥에서 이렇게 말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과의 친밀함 때문이었다.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아무 일에든지 대적하는 자를 인하여 두려워하지 아니하는 이 일을 듣고자 함이라 이것이 저희에게는 멸망의 빙거요 너희에게는 구원의 빙거니 이는 하나님께로부터 난것이니라.”(1:28)

우리가 두려워하기를 거부할 때 적들은 두려워 떤다. 확신에 찬 마음은 대적의 궁극적인 멸망과 우리의 현재 승리의 확실한 징표이다. 하나님의 약속으로 돌아와 믿음의 사람들과 시간을 함께 보내고 주의 증거인 간증으로 서로 격려하라. 두려움이 더 이상 문을 두드리지 않을 때까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찬양하라. 이것은 선택 사항이 아니다. 왜냐하면 두려움은 실제로 적을 끌어 들여 죽이고 도적질하고 멸망시키도록 허용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그런즉 너희는 하나님께 순복할지어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4:7) 순복함은 개인적인 승리의 열쇠이다. 영적 전투에서의 우리의 주된 싸움은 마귀와의 싸움이 아니라, 우리 육체와의 싸움이다. 순복하는 자리에 들어올 때 하늘의 자원을 쓸 수 있게 되고 승리를 지속적으로 유지할 수 있다. 그 승리는 이미 갈보리에서 획득된 것인데 이제 우리가 이를 집행하는 것이다.

“… 음부의 권세가 (교회를) 이기지 못하리라.”(16:18) 내가 지구 위에 남아있는 이유는 숨어서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기 위함이 아니다. 난 이곳에 하늘의 군대 대표자로 와있다. 교회는 지금 공격을 받고 있다. 하지만 다스림과 권세의 장소인 음부가 교회를 아무리 대항해도 이길 수 없다.

여호와께서 그 백성을 크게 번성케하사 그들의 대적보다 강하게 하셨으며 또 저희 마음을 변하여 그 백성을 미워하게하시며 그 종들에게 교활히 행하게 하셨도다.”(105:24-25).

하나님께서는 먼저 우리를 강하게 만드시고는 마귀가 우리를 미워하도록 충동하셨다. 그러나 그것은 교회에 문제를 일으키기 원해서가 아니다. 왜내하면 하나님은 그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사람들이 그를 사랑하기로 선택한 다음 마귀를 처부수는 모습을 보고 싶으셨기 때문이다. 우리에게는 그에게로 위임받은 권세가 있다. 하나님의 기쁨은 우리가 예수님의 승리를 집행하는 것을 보는 것이다. “기록한 판단대로 저희에게 시행할지로다 이런 영광은 그 모든 성도에게 있도다”(149:9).

“… 셀라의 거민들은 노래하며 산 꼭대기에서 즐거이 부르라/ 여호와께서 용사 같이 나가시며 전사 같이 분발하여 외쳐 크게 부르시며 그 대적을 크게 치시리로다.”(42:11, 13).

하나님을 섬기는 일은 우리의 삶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특권 중 하나이다. 찬양은 하나님을 놓인다. 하지만 이는 또한 우리의 성품을 다듬으며 지옥의 권세를 말한다! 내가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고 그의 평안으로 내 영혼을 채울 수 있으며 또한 나를 용감한 장수라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가졌다는 것이 놀랍지 않은가!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그를 경배하는 일뿐이다. 그는 나를 위하여 지옥의 권세를 파하셨고 내게 승리를 위한 선재 점수를 주셨다.

위에 열거한 것들이 완전한 목록이 될 수 없다. 단지 영적 전투에 대한 우리의 시각을 종교적이고 육적인 곳에서부터 하나님 나라의 정신으로 바꾸려는 것뿐이다. 회개하고 사고방식을 바꾸면 천국이 정말 어떻게 가까왔는지보게 될 것이다.

우리는 싸우기 위해 태어났다. 중간에 쉬는 시간도 없고 휴식도 없으며 결석도 있을 수 없다. 가장 안전한 곳은 하나님의 뜻 가운데 있는 것이고 이는 하나님과의 깊은 친밀함을 누리는 곳이기도 하다. 하나님께서는 오직 우리가 이길 수 있는 전쟁으로만 인도하신다.

이곳이 가장 안전한 곳일 뿐 아니라 모든 신자들에게 가장 즐거운 장소이기 하다. 친밀함을 떠난다면 우리는 지구상에 벌어지는 가장 위대한 이벤트를 놓칠 수있다.

어떻게 그 능력을 얻을 수 있을까? [빌 존슨]


이 땅에 산 사람들 가운데 초자연적인 세계에 대해 가장 많은 훈련을 받은 사람들을 향해 예수께서는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 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1:4)고 명하셨다. 누가는 이 말씀을 이렇게 기록했다.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을 입히울 때까지 이 성에 유하라”(24:49).

비록 제자들이 예수님과 함께 있었지만, 그리고 그들이 그들 자신의 사역에서 그의 능력을 경험하기도 했었지만, 그리고 그들이 그들 자신의 사역에서 그의 능력을 경험하기도 했었지만 그들은 두나미스(dunamis), 즉 기적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을 기다려야만 했다.

이는 그들이 이전에는 예수님의 기름 부으심의 지붕 아래서 행하였다고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이제 하나님과의 만남을 통해 그들 자신이 직접 그 기름 부으심을 받아야 할 때가 다가왔다. 불세례는 하나님과의 지속적인 만남을 가능하게 하며 이는 장차 핍박이 올 때 하나님의 뜻 가운데 그들이 계속 머물 수 있도록 돕는 것이었다.

성령세례는 하늘의 두나미스(dunamis, 능력) 속에 잠시는 것이다. 방언으로 기도할 수 있는 능력은 이런 세례를 통해 주어지는 놀라운 은사이다. 난 늘 방언으로 기도하며 하나님께로부터 온 이 은사에 대해 감사라고 있다. 하지만 방언으로 말하는 것을 성령 세례의 목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당혹스러울 만큼 단순한 생각이다. 이는 마치 이스라엘이 요단강을 건넌 것이 곧 약속의 땅을 취한 것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그렇다. 그들이 약속의 땅에 들어왔고 그 땅을 볼 수도 있었지만 아직 그 땅을 소유하지는 못했다! 강을 건널 때 그들에게는 그 땅을 소유하도록 접근할 수 있는 법적 권한이 주어졌다. 방언기도는 약속의 땅에 접근할 수 있는 권리를 부여한다. 하지만 강둑에 서서 이 모든 것이 내 것이 되었다고 외치는 건 아무리 잘 보아도 어리석은 일에 불과하다.

이러한 무지는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영의 언어를 받고서 거기서 멈춰 버리게 만들었다. 그들은 방언 기도를 하게 될 때 자신들이 성령 충만하다는 가르침을 늘 받아왔다. 잔은 오직 흘러넘칠 때에만 가득 찬 줄안다. 흘러 넘쳐야 충만한 상태이다.

하나님의 충만은 내게 초자연적인 언어를 주는 것 이상이다. 만일 그것이 전부였다면 난 아무런 불만도 없었으리라. 방언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영광스러운 은사이다. 그러나 그분의 목적은 우리를 좀 더 앞으로 데려가는 데 있다. 그리스도와 함께 일할 수 있는 하나님과의 동역관계로까지 데려가기를 그는 원하고 계신다.

능력은 우리로 증인되게 한다. 하나님의 성령이 성경에 나오는 사람들 위에 내려오셨을 때 모든 자연은 그들 앞에 엎드렸다. 능력은 나타났고 불가능한 상황은 하나님의 임재가 완전히 드러났을 때 비켜서야만했다.

낮은 능력에 대한 값비싼 대가 [빌 존슨]



☆ 표적과 기사는 하나님의 성품을 드러낸다.
기적의 첫 번째 목적은 하나님의 성품을 드러내는 것이다. 기적이 없다면 모든 사람이 누릴 수 있는 소중한 계시를 도적에게 빼앗기는 것이 된다. 인류에 대한 우리의 빚은 불가능에 대한 답변을 주는 것이며 하나님과 개인적으로 만나도록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만남은 위대한 능력을 포함하고 있다.

우리는 하나님의 증인이 되어야 한다. 증인이 된다는 것은 대표하는(repre sent)것이다. 실제로는 그분을 재현(re-present)한다는 의미가 있다. 그러므로 능력을 보여주지 않고는 하나님의 증인 역할을 잘 감당할 수 없다.

하나님의 기적은 항상 목적이 있다. 그는 자신을 과시하거나 즐기려는 사람에게 능력으로 오시지 않는다. 능력의 나타남은 구속적인 성격을 띤다. 구약의 땅을 뒤흔드는 사건들조차 사람들을 회개하도록 이끌기 위해서였다.

치유는 결코 일차원적이 아니다. 치유의 기적은 육체적인 건강상태를 변화시키는 동시에 그 사람 마음속 깊은 곳에 변화의 불을 당긴다. 이 두 가지는 모두 하나님의 속성을 드러내기 때문에 결코 무능력한 기독교를 통해 타협될 수 없다….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한다. 능력은 찬성이건 반대건 어느 한 편에 서도록 한다. 능력이 나타날 때 중간은 없다능력은 사람들로 개인적인 차원에서 하나님을 알도록 몰고간다. 능력은 그 특성상 무엇인가를 유고한다.

※ 표적과 기사는 죄를 드러내고 결단을 촉구한다
※ 표적과 기사는 용기를 가져온다.
※ 초자연적인 세계는 죄악된 도성을 여는 열쇠이다.
※ 기적은 그의 영광을 드러낸다.
※ 표적은 사람들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만든다.
※ 표적 그 자체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
※ 표적은 세대들을 연합시키는 힘이다.
※ 표적과 기사는 예수께서 어떤 분인지 확증한다.
※ 기적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도록 돕는다.
※ 기적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순종하도록 돕는다.
※ 기적은 하나님의 아들과 교회가 누구인지를 확인시켜준다.

성령과의 관계 [빌 존슨]


대략 25년 전 난 누군가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들었다. “만일 우리가 성령을 근심시키지 않는 것소멸하지 않는 것의 차이를 배운다면 성령 충만의 비밀을 알게 도리 것이다.” 너무 단순화한 느낌이 있지만 이 사람은 인격 대 능력의 덫과 관련된 두 가지 매우 중요한 진리를 건드렸다.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4:30)는 명령은 우리 죄가 어떻게 하나님께 영향을 미치는지 설명해 준다. 죄는 성령을 근심시킨다. 이 명령은 인격 중심적이다. 죄는 두 가지로 정의할 수 있다. 하나는 잘못 행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옳은 일을 하지 않는 거[“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치 아니하면 죄니라”(4:17)]이다. 어떤 쪽이든 그리스도의 인격에서부터 멀어질 때 성령은 근심하신다.

이 주제와 관련된 또 다른 명령이 있다. “성령을 소멸치 말라”(살전5:19). 이 명령은 그의 인도하심을 따라야 한다는 우리의 필요에 중점을 두고 있다. 소멸이라는 말은 어떤 것이 흐르는 것을 막는다는 의미이다. 성령께서 구원과 치유, 그리고 축사를 가져올 준비가 되어 있을 때 우리는 그분과 함께 흘러가게 된다. 이렇게 하지 못할 때 우리는 초자연적인 역사를 가져오려는 그분의 노력을 방해하게 된다.

만일 그가 우리 삶에서 자유롭게 움직이신다면 우리는 끊임없이 불가능한 세계에 속할 수 있다. 초자연적인 세계는 그의 영역이다. 성령께서 우리에게 중요하면 중요할수록 이 문제는 우리 마음에 파도처럼 밀려올 것이다.

만남을 추구하라 하나님을 행해 더 많은 것을 추구하려 할 때 그분이 우리를 안전히 지켜주실 만큼 크시다는 사실을 우리는 믿어야만 한다. 실제로 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 하나님보다 마귀가 더 큰 것 같다.

어떻게 타락한 피조물이 감히 무한한 영광의 주와 비교될 수 있겠는가? 이건 신뢰의 문제이다. 내가 만일 속지 않으려는 데 초점을 둔다면 마귀의 세력은 항상 크게 보일 것이다. 하지만 내 마음이 능히 너희를 보호하사 거침이 없게 하실’(1:24-25) 이에게 온전히 드려진다면 그분만이 날 사로잡을 것이다. 내 삶은 내 마음으로 보는 것을 드러낸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우리가 하나님의 능력 안에서 걸어갈 수 있을까/ 첫째, 우리는 그분을 향해 좇아가야 한다. 능력 있는 삶이란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삶이다. (우리의 힘의 근원에 늘 꽂혀있어야 한다.) 능력이 나타나기를 갈망하는 마음은 그를 향한 우리의 열정과 분리될 수 없다. 그러나 이 점을 명심하라. 그분을 향한 갈망은 부분적으로 영적은사를 사모하여 추구하는 것으로 나타난다(고전14:1). 이것이 바로 그분의 명령이다!

우리는 우리 삶을 완전히 바꿔놓을 하나님과의 거듭되는 만남을 열심히 사모해야 한다. 밤낮 그러한 만남을 위해 부르짖되 구체적으로 기도해야 한다. 필요한 것을 얻고자 어디라고 기꺼이 따라갈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만일 하나님께서 내가 사는 곳이 아닌 다른 곳으로 옮겨 가셨다면 난 따라갈 것이다!

만일 그가 나보다 다른 사람을 더 사용하고 있다면 난 겸손히 그 앞에 가서 내게 손을 얹고 기도해달라고 요청하리라.

누군가 이렇게 물을지 모른다. “하나님께서 제가 있는 이곳에서는 저를 만져주실 수 없나요?” 물론 하실 수 있다. 하지만 하나님은 대대 우리가 독립적이 되기보다는 다른 사람들을 필요로 한다는 점을 분명하게 하기 위해 그런 방법으로 움직이신다. 지혜로운 사람들은 항상 하나님을 따라 움직일 준비가 되어있다.

능력의 목적 [빌 존슨]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능력이 죄를 극복하고 사는 데 필요하다고 믿는다. 이러한 생각 때문에 우리는 하늘의 증인이 되리라는 아버지의 의도에 미치지 못하고 있다. 그리스도인의 삶이 이미 패배해버린 영역을 극복하는 데 초점을 둔다는 것이 좀 이상하지 않은가? 죄와 죄의 본성은 이미 뿌리에서부터 끊어져 버렸다. 

많은 사람들이 죄로부터의 승리의 삶을 살기 위해 더 많은 능력을 끊임없이 하나님께 구하고 있다. 그가 우리를 위해 더 이상 무엇을 해줄 수 있겠는가? 그가 돌아가신 것도 충분치 않다면 그 밖에 무엇이 더 남아 있을까? 이 전쟁은 이미 싸웠고 이겼다! 이미 피로 끝난 문제를 계속 붙잡고 있기 때문에 이 문제가 계속된다고는 생각지 않는가?

많은 교회들이 십자가의 이 편에 잘못 머물고 있다. 사도 바울은 이문제에 대해 이렇게 언급했다.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지어다”(6:11).

여길지어다란 단어는 우리의 생각을 바꿀 필요를 말해주고 있다. 내가 거기에 대해 죽은 자라면 그것을 극복하기 위한 능력은 필요 없다. 대신 기적과 불가능을 위해서 담대할(4:28-29) 능력이 필요하다.

우리가 가진 문제 중 하나는 이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위해 불가능하지 않은 일만 하는 것에 너무 익숙하다. 만일 하나님께서 우리를 돕기 위해 나타나지 않으신다 해도 우리는 여전히 성공할 수 있다.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하나님이 개입하지 않으면 불가능한 부분들이 있어야만 한다. 이럴 때 우리는 벼랑 끝에 서서 우리의 참된 부르심과 맞닥뜨리게 된다.

혼동하지 말아야 것은 인격은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궁극적인 문제이다. 하지만 이 문제에 접근하는 그분의 방법은 우리와는 대단히 다르다. 그의 인격은 우리 자신의 노력만으로 우리 안에 이룰 수 없다. 우리의 안간힘 쓰기를 접고 온전히 그의 뜻에 우리를 맡기는 법을 배울 때 우리의 인격이 성장한다.

능력으로 입히다 그리스도의 증인된 삶을 살기 위해서 제자들은 너무나도 능력이 필요했기 때문에 그 능력을 받을 때까지 예루살렘을 떠나서는 안 되었다. 능력이란 단어는 기적적인 영역에 대해 말하는 것이다. 능력이란 단어의 원어인 두나미스는 할 수 있는 힘이란 뜻이다. 그 뜻을 생각해보라. 우리는 하나님의 할 수 있는 힘으로 옷 입는다는 것이다.

가룟 유라를 제외한 나머지 열한 제자들은 역시 가운데 표적과 기사에 대해 누구보다도 많이 훈련을 받았던 인물들이었다. 예수님 외에는 그 누구도 제자들보다 더 많은 기적을 보거나 행치 못했다. 그런데 이들 열한 명은 위로부터 능력이 입혀질 때까지 머물러 있어야만 했다. 그들은 능력을 받았고 그걸 알았다. 이 능력은 하나님과의 만남으로부터 온다.

어떤 이들은 실수할 것을 두려워하여 하나님과의 체험을 추구하는 것이 적합하지 않다고 말해왔다. 결국 성경과 맞지 않는 경험을 기초로 한 자들에게서 잘못된 사람들이 많이 나왔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두려움이 우리의 스승이 되었다.  하지만 잘못되는 것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이 왜 능력 없이 교리로만 무장된 진영에 속하는 것은 두려워하지 않는 걸까?

이러한 속임수가 능력을 남용하는 것보다 덜 위험해서일까? 도대체 받은 은사를 묻어두고 주께서 오실 때는 뭐라고 답변하려고 하는가? 잘못될까 두려워서 그랬다고 말하려는가? 능력과 인격은 성경 속에서 서로 밀접하게 붙어있기 때문에 한 쪽이 손상되면 다른 쪽도 약해 질 수밖에 없다.

기름 부으심, 성장의 열쇠 [빌 존슨]


그리스도를 닮은 인격은 기름 부으심을 받고 섬겨보기 전에는 결코 완전하게 형성될 수 없다. 기름 부음 받은 사역은 능력과의 만남을 가져오고 이럴 때 비로소 인격이 변화된다.

신구약 성경 모두에게는 초자연적인 일을 위한 능력의 덧입혀짐(empowering for supernatural endeavors)에 대한 위대한 예들이 가득하다. 한 가지 중요한 원리는 사울 왕의 이야기에서 찾을 수 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주의 성령이 그에게 부어지게 되면 그가 새 사람으로 변하리라는 것이었다(삼상10:6). 기름 부으심은 그것이 흘러갈 통로를 변화시킨다. 이 약속 뒤에 중요한 두 구절이 나온다.

하나님이 새 마음을 주셨다.(삼상10:9)

하나님의 신이 사울에게 크게 임하므로 그가 그들(선지자의 무리) 중에서 예언을 했다.(삼상10:10)

사울은 이스라엘이 필요로 하는 그런 왕(새 마음을 가진 왕)이 될 뿐더러, 그가 필요로 하는 것을 배울(하나님께 듣고 그의 말을 선포하는 예언할) 기회가 주어졌다.

내게는 친한 친구 한 명이 있는데 그에게는 심각한 인격적인 결함이 있었기 때문에 한동안 자신과 자기 가족을 영적인 불구로 만들었다. 그러나 그때에도 그에겐 여전히 강한 예언의 기름부으심이 있었다. 그는 자신이 사역적으로 성공한 것이 하나님께서 자기의 사생활을 인정했기 때문이라고 오해했다. 그리고 그뿐만 아니라 다른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잘못된 생각에 빠져있기도 하다. 내가 그의 비밀스러운 죄 때문에 그와 만났을 때 그는 깊은 슬픔에 흐느꼈다.

교회에서의 그의 영향력 있는 위치 때문에 나는 그를 훈련시켜야 한다는 강한 책임감을 느꼈다(훈련은 개인에게 승리를 가져올 수 있지만 벌은 수치로 묶어버린다). 어떤 회사나 정부, 혹은 교회나 가정은 그 구성원을 훈련시킬 수 있는 능력이 주어졌다. 내가 할 수 있었던 구제란 그에게 당분간 예언의 말씀을 주지 말라는 것이었다. 그는 이런 지도를 필요하다고 받아들였다.

이러한 제한을 둔지 몇 달이 지났는데, 그 때 나는 사울 왕에 대한 말씀과 그것이 내 친구 문제와도 관련되어 있다는 생각 때문에 마음이 심히 복잡해졌다. 내가 만일 그로(기름부음이 있는) 사역을 하지못하게 한다면 그의 승리를 가져올 수 있는 것과 접촉하지 못하도록 막는 것이 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내가 그로 다시금 예언하게 했을 때 그의 목소리에 새로운 정결함과 능력이 돌아왔다. 그가 새 사람으로 변할 수 있는 기회는 기름부음이 있는 사역과 접촉할 때 주어진다(이 예화는 훈련의 중요성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성경적인 훈련은 벌을 주는 것이 아니다. 훈련은 사랑으로 그 개인과 전체 교회에 가장 유익한 규제를 선택하는 것이다. 훈련이 길어질 때 벌이 될 수도 있고 그가 필요로 하는 것으로부터 오히려 멀어지게 만들 수 있다).

가짜도 있다 백 달러짜리 위조지폐가 있다고 진짜 지폐의 가치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마찬가지로 거짓되고 남용되고 팽개쳐진 은사가 있다고 해서 성령에 대한 필요가 폐기되지 않는다. 우리가 예수님처럼 살려면 성령의 은사는 꼭 필요하다.

동전은 위조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럴만한 가치가 없기 때문이다. 만찬가지로 마귀는 그리스도인의 삶에 엄청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것들만을 복제하거나 왜곡시킨다. 만일 다른 사람들이 하나님 안에 있는 위대한 일을 좇다가 실패하는 것을 볼 때 난 그들이 떠난 간 그 자리에 남겨진 것을 도로 집어들 마음이 있다. 밭에 보물이 숨겨져 있다면 나는 무모하게 보일지라도 그것을 찾을 준비가 되어 있다(무로함은 영적인 부주의와는 다르다. 과거 실패의 대부분은 지도자들이 하나님이 자신들에게 붙여준 사람들(가족과 친구를 포함하여) 에게서 멀어질 때 생겨났다. 나는 위험한 일을 추구하지만 늘 내 행동에 책임을 지고 모든 관계를 보호하기위해 노력한다. 내가 믿기로 많은 사람들이 밭에 숨기운 보물을 찾기 위해 귀중한 안전지대를 내버렸기 때문이다).

한 사람이 남용했다고 해서 다른 사람이 그것을 경시하는 것은 정당하지 않다. 능력의 남용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당혹스러워 했고 또 이 때문에 교회에 오점을 남겼다. 그래서 사람들은 교회 안에 표적과 기사가 없다고 기분 나빠하지 않는다.

피판자들은 혹시라도 시도하다가 실패한 사람들을 재빨리 찾아낸다. 그러면서도 수도 없이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주로 고백하면서도 명령받은 대로 은사를 추구하지 않고 있다는 점은 간과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땅에 믿음 있는 자가 있는지 찾고 계신다.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18:8). 한 명의 협잡꾼이 있다면 수천 명의 선량한 시민이 있다. 그런데 지금 이들은 하나님 나라를 위해 아무 것도 행하고 있지 않다.

만남을 가르치는 가르침 – 능력대(對) 교만 [빌 존슨]


오늘날 우리가 대면하고 있는 문제는 새로운 것들이 아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대해 깊은 관심을 보여주었는데 이는 그들이 능력없는 복음에 대한 유혹에 빠져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려고 이것을 쓰는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내 사랑하는 자녀 같이 권하려 하는 것이라 그리스도 안에서 일만 스승이 있으되 아비는 많지 아니하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복음으로써 내가 너희를 낳았음이라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권하노니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 이를 인하여 내가 주 안에서 내 사랑하고 신실한 아들 디모데를 너희에게 보내었노니 저가 너희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나의 행사 곧 내가 각처 교회에서 가르치는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어떤 이들은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지 아니할 것 같이 스스로 교만한 자의 말을 알아 볼 것이 아니라 오직 그 능력을 알아 보겠노니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음이라.(고전4:14-20).

바울은 선생과 아비를 대비시키면서 말을 시작하고 있다. 여기서 그가 말하는 선생은 예수께서 교회들로 갖기 원하셨던 종류와는 달랐다. 바울은 이들에 대해 그리스도 안에서 일만 스승이 있다고 말함으로써 그들이 신자인 것을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뒤에서는 이들에 대해 교만하였졌다고 말하고 있음을 주목하여보라.

후기 교파적인(post-denominational) 이 시대에 우리는 영적인 아비(남자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님) 주변에 신자들이 놀랄 만큼 몰려드는 모습들을 바라보고 있다. 과거에도 어떤 진리에 대해 몰려든 것이 있었고 이런 것을 통해 새로운 교파가 형성되었다. 그러한 모임의 강점은 교리와 어떤 사역에 대해 한 뚜렷한 동의를 보인다는 데 있다.

반면 어떤 다양함이나 변화를 허락하지 않는다는 약점도 있다. 20세기에 들어오면서 방언 말함으로 성령 세례를 받았던 사람들이 많은 교회에서 환영받지 못했다. 그 이유는 대부분의 교단이 화석화된 믿음의 고백을 확고하게 붙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 이 시대에 영적인 아비를 중심으로 모여드는 현상은 심지어 교파 안에서도 일어나고 있다. 그러한 모임은 핵심적이 아닌 교리에 대해서 그 차이점을 인정하면서 분열되지 않는다는 특징을 갖는다. 많은 사람들은 이러한 움직임을 하나의 사도적인 질서의 회복이라고 보고 있다.

바울은 두 번째로 그의 영적인 자녀들이 교만해지는 문제에 관심을 보였다. 그는 신실함과 교만을 대비시키면서 요점을 말하고 있다. 바울은 멋있는 이론에 그들이 현혹되는 것을 보며 안타까워했다. 개인적인 은사가 기름 부으심이나 진리보다 교회 안에서 더 높이 인정받고 있다.

인격이 부족한 사람들이 인기가 있다면 교회에서 지도자의 위치에 앉을 수도 있다. 바울은 특별히 이것이 문제가 되고 있음을 알았다. 그들은 고린도 교인들이 믿음으로 나아오기를 위해 많은 수고를 해왔었다. 그는 그들을 그의 많은 지식으로 누르지 않기로 선택했다. 사실상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을 믿음의 주가 되시는 능력의 하나님을 만나도록 인도했다(고전2:1-5 참조). 하지만 현재 설교를 잘하는 사람들이 등장하게 되었다.

바울의 해결책은 그들에게 자신과 닮은 사람, 즉 디모데를 보내는 것이었다. 그들에게는 영적 아비가 어던 사람인지를 다시금 생각나게 해 줄 사람이 필요했다. 그럼으로써 그들이 자신의 자치체계를 조정하여 이론만 있는 사람이 아닌 실체를 지닌 사람을 닮을 수 있도록 하길 원했다. 이런 사람은 곧 능력을 가진 사람이었다!

바울은 올바른 선택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하기 위해 놀라운 말을 하고 있다.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음으라(고전4:20). 원어로 보면 이 말씀은 이렇다. 하나님의 나라는 로고스(logos)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두나미스(dunamis)에 있음이라.

분명한 것은 고린도에 말을 많이 하는 일에 능한 선생들은 많았지만 그들이 실제로 능력을 나타내지는 못했다는 것이다. 그들은 예수께서 세워주신 선생의 모습을 따르지 않았다. 두나미스(dunamis)성령의 부어주심 속에 나타나고 전수되는 하나님의 능력이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나라이다!

두 장 앞서서 바울은 그의 사역의 우선순위를 말하면서 그것이 고린도 사람들을 하나님의 능력(두나미스)에 대한 믿음으로 인도하는 일이었다고 말한다(고전2:5 참조). 여지서 그는 아무런 변화를 일으키지 못할 때 그들이 어떻게 잘못되었는지 언급하고 있다. 하나님의 사람들이 그리스도처럼 생명과 능력을 나타내는 대신 어떤 이념이나 생각에 사로잡힐 때 그 생각이 얼마나 좋은가와 상관없이 그들은 실패할 수밖에 없다.

기독교는 철학이 아니라 관계다. 관념을 능력있게 만드는 것은 하나님과의 만남이다. 우리는 우리에게도 이것을 요구해야 한다(*여기서는 우선 능력이라 했을 때 육체적인 상태나, 혹은 자연세계에서의 문제를 변화시키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쉬울 것 같다. 그것은 분명히 이런 종류의 상황을 포함한다. 그 사랑은 한 인생을 전혀 다르게 바꿔놓을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을 우리 주변의 아프거나 고통당한 자들의 분명한 필요를 회피하는 데 대한 변명으로 사용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위로부터 능력으로 옷 입히게 될 때까지 하나님의 사랑을 가지고 그의 얼굴을 구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찾을 때까지 구해야 한다(11:10 참조)

우리 문화가 주는 영향력을 거부하라 [빌 존슨]



우리 문화는 선생의 역할을 축소해버렸다. 대학에 가서 경영학 학위를 받으면서, 직접 경영해본 사람에게서 한번도 가르침을 받지 못할 수 있다. 우리는 결과가 있는 경험보다는 관념과 학문을 더 높게 평가한다.

이런 일이 세상의 학교에만 있기를 바라지만 경험보다 관념을 더 높게 평가하는 문화는 대부분의 성경 학교나 신학교 혹은 교단들을 이러한 모습으로 만들어버렸다. 오늘날의 많은 움직임들은 하나님을 경험하는 일 없이 학과 과정을 밟는 일을 미덕으로 삼고 있다.

문제를 더욱 악화시키는 것은 자신의 체험을 주관적으로 말하는 사람들을 회의에 찬 눈초리로 바라본다는 것이다. 더 심하게는 위험한 인물로 간주해버린다. 하지만 경험을 떠나서는 하나님을 알아갈 수 없다.

1994년 토론토에서의 부흥의 불길을 처음 당기는 일에 쓰임을 받았던 하나님의 사람 랜디 클라크(Randy Clark)는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과의 체험이 없는 사람은 누구도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 하나님은 어떤 철학이나 관념이 아닌 인격이시다.

이제 하나님을 만난 사람들이 자신의 간증을 희석해서 말함으로써 두려움에 영합하는 일을 멈추어야 할 때가 되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보다 더 초자연적인 것을 원하도록 식욕을 북돋아야만 한다.


*** 간증은 목마름을 불러일으키는 능력이 있다 ***

기름 부으심과 적그리스도의 영 – 참다운‘균형’이란 무엇인가? [빌 존슨]


속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은 신자들 가운데 비극적인 방향으로의 문을 열어놓았다. 그런 두려움은 우리에게 이렇게 가르치고 있다. 우리에게는 성경이 있기 때문에 만일 우리가 하나님을 실제로 느끼는 체험을 추구한다면 감정적으로 불균형해지고 속을 수 있다. 이것은 신자들을 양 극단으로 나뉘도록 했다.

두려움은 분리하고 이간시킨다. 많은 사람들은 머리에 이런 그림을 그리고 있다. 한쪽에는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소중하게 생각하는 감정적으로 균형 잡힌 사람들이 있고, 다른 한쪽에는 하나님과의 신비적이고 영적인 체험을 추구하는 감정적으로 균형 잡히지 못한 사람들이 있다.

이것이 과연 성경이 보여주는 정확한 그림인가? 예수님은 성경 공부 대() 체험의 관점으로 나누어 생각하는 사람들에 대해 이런 놀라운 말씀을 해주셨다.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5:39).

만일 성경 공부를 통해 하나님과의 보다 깊은 관계(만남)가 형성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단지 영적으로 교만해지려는 우리의 경향성을 더하게 할 뿐이다. 성경 지식이 많아지게 되면 우리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좋다고 느끼게 되고, 또한 우리와 의견이 다른 사람들과 보다 효과적으로 논쟁할 수 있는 실력을 갖추게 된다.

어떤 교리를 방어하려는 사람들은 하나님과의 만남 없이 이러한 경험을 띄게 되는 유혹에 빠진다. 그래서 이런 가능성에 대해 생각해보게 된다. 언뜻 자신을 잘 절제하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이 실제로는 통제 불능, 특히 하나님의 통제를 벗어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반대로 감정적으로 치우친 축복 클럽에 속했다고 조롱당하는 사람들이 어쩌면 하나님이 만져주심으로 그들의 삶이 완전히 바뀌었다고 하는 실제적인 간증을 들려줄 수 있다. 후자의 모습이 균형 잡힌 신앙생활에 대한 보다 성경적인 그림이 아니겠는가.

예수님은 이처럼 말씀하지 않으셨다. 내 양은 내 책을 아나니.” 우리가 아는 것은 그분의 음성이다. 무슨차이가 있는가? 어느 누구나 성경을 하나의 책으로 알 수 있는 것처럼 마귀 또한 성경 말씀을 알고 인용할 수 있다. 하지만 삶을 성경 한 분께 의탁한 사람들만이 그분의 음성을 계속 감지할 수 있다.

이 말은 성경 말씀이 중요하지 않다는 의미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고 그의 음성은 항상 성경 말씀을 통해 확증된다. 그의 음성은 기록된 것에 영향을 미친다. 우리는 부지런히 말씀을 공부하되 그분을 알 때에만 비로소 성경의 가장 위대한 진리를 이해할 수 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이 시대의 부어주심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특정한 필요를 다루고 계신다. 그분의 음성을 배우도록 하기 위해 지금 우리는 그의 임재 속에 푹 젖어들고 있다. 그분이 우리를 향해 그의 말씀을 열어 젖힐 때 우리는 그분에게 더 의존적이 될 수 있다. 사람들은 다시 한번 우리가 이제껏 받아본 선물(은사)들 가운데 가장 위대한 선물, 즉 하나님 자신에 대해 시선을 집중하고 있다. 기름 부으심을 말할 때마다 자주 은사에 대해 언급하는데, 여기서는 보다 정확히 그분 자신을 부어주신다는 것이다.

성령께서 그분의 백성들에 대한 통치권을 다시금 돌려받으실 때 그분은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한 보다 성경적인 기준을 다시금 세우실 것이다. 이런 놀라운 변화는 더 나은 결과를 가져오기 위함이다. 우리는 성경 속의 하나님을 체험을 통해서만 알 수 있고 또 알아야 한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하였다.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3:18-19). 여려분은 지식에 넘치는 것을 알고 있는가? 이것은 그의 약속이다. 그리고 그 결과는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충만하게 되는 것이다. 얼마나 멋진 상급인가?

예수님께서는 이것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14:21).

기름 부으심과 적그리스도의 영 – 이성을 뛰어넘는 세계 [빌 존슨]


기름 부으심(성령)을 좇는 삶은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주의 임재의 구름을 따랐던 것과 비슷하다.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을 조정할 수 없었다. 그가 이끄셨고 백성은 따랐다. 그분이 가시는 곳은 어디든지 초자연적인 역사가 있어났다. 그들이 만일 구름을 떠나면 그들을 붙들고 있던 기적의 역사는 사라져버릴 것이다.

만일 두려움에 묶여있는 신학자들이 그곳에 있었다고 한다면 과연 무슨 일이 벌어졌을지 상상해보라. 그들은 아마도 그들을 애굽에서 해방시켰던 초자연적인 역사가 이제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는 그들에게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는 사실을 입증할 새로운 교리를 만들었으리라. 국 그들은 지금 그런 신학의 돌비를 갖게 되었다. 그러고 나서 오늘날 하나님의 임재에 우선순위를 두는 것에 대해 문제 삼고 있다.

하나님의 임재를 우선적으로 할 대 초자연적인 역사가 넘친다. 하지만 그 임재가 없을 때 그런 것 없이 사는 우리 모습이 신학적으로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증명할 새로운 교리를 또 만들어야 할지 모른다.

신약적인 용어로 설명하자면 하나님의 임재에 초점을 맞추는 사람이 된다는 것은 기꺼이 우리의 이성을 뛰어넘어 사는 것을 의미한다. 이성을 초월한 영역은 하나님께 순종하는 세계이다. 순종은 믿음의 표시이고 믿음은 하나님의 세계에 들어가는 입장권이다.

이상하게도 그분의 임재에 초점을 맞출 때 우리는 바람처럼 되는데, 이는 곧 성령의 특성이기도 하다(3;8참조). 성령님은 능력 있고 의로우신 분이지만 그의 길은 우리 힘으로 통제할 수 없다. 그분의 행동은 예측할 수 없다.  이 부분은 우리 교회 지도자들의 허를 찌르고 있다. 많은 교회들이 하고 있는 일들 대부분은 성령을 의지하지 않고도 충분히 할 수 있다.

성령이 오시지 않는다고 이상하게 여기는 교회는 별로 없다. 빌리 그래함은 이렇게 말했다. 만일 성령님이 우리 가운데 없다 하더라도 오늘 날 교회 활동의 95%는 계속 될 것입니다. 초대 교회에서는 성령님이 계시지 않을 때 95%는 교회 활동이 중단되었습니다. 난 그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우리는 우리가 드릴 예배들을 미리 계획하고 준비하면서 이를 성실이라고 부른다. 우리는 일 년 계획을 세우고 나서 이것을 비전이라고 부른다. 언젠가 주일 날 주님께서 내게 그 예배는 내 예배가 아니라는 사실을 말씀해 주셨던 일을 결코 잊을 수 없다.

기름 부으심과 적그리스도의 영 - 빌 존슨


그리스는 예수의 성()이 아니다. “기름부음 받은 자 혹은 메시아”란 의미로써 어떤 경험을 일컫는 직함이다. 예수께서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오실 때 직함만 가지고 와서는 부족했다. 그는 아버지께서 원하셨던 일을 성취하기 위해 기름 부음 받는 경험을 해야만 했다.

기름부음(anointing)이란 말은 “기름을 붓다”는 의미이다. 성령은 하나님의 기름(oil)으로서,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신 예수님 위에 부어졌다(3:21-22참조). 예수 그리스도란 이름에는 성령의 기름부음을 받은 자란 뜻이 내포되어 있다.  그러나 모든 시대마다 교회를 몰래 파괴시키려는 또 다른 영이 있었다. 이러한 세력에 대해 사도 요한은 이렇게 불렀다. “지금도 많은 적그리스도가 일어났으니”(요일2:18).

적그리스도의 영의 성격은 그 이름에서 드러난다. ‘(anti)’이란  말은반대하여(against)’  뜻이고그리스도(Christ)’기름부음 받은 자(Anointed One)’란 뜻이다. 예수는 그의 어린 시절을 인간의 한계 속에서 사셨다. 그는 그가 지닌 신성을 제쳐놓고(2:5-7참조) 오직 아버지께로부터 받은 임무를 완수하는 일에만 힘썼다.

  임무란 인간의 삶을 살되 죄가 없는 삶을 살다가 인류의 죄를 대신하여 죽는 일이었다. 이 일은 인류를 구원하려는 하나님의 계획의 핵심이었을 것이다. 죄를 위한 대속 희생제물은 양(힘이 없는)이어야 했고, 또한 흠이 없어야(죄가 없는) 했다.

예수께서 받으셨던 기름 부으심은 그가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어 살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아버지께서 입혀주셨던 필수 장비였다. 그는 인간을 구속해야 했을 뿐 아니라 아울러 아버지를 나타내야만 했다. 그럴 때 하늘이라 불리는 아버지의 세계를 이 땅에 펼칠 수 있었다. 그 일은 초자연적인 일을 행하는 것을 포함하고 있었다. 기름 부으심은 인간 예수를 하나님과 접속시킴으로써 마귀의 일을 멸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이러한 기적적인 방법들은 무엇인가를 활성화시킴으로써 장차 그리스도께서 구속되는 날 인류가 그것을 이어받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하늘(초자연적인 세계)은 인류에게 일용할 양식이 되려고 하고 있었다.

현재형으로서의 하늘은 다음과 같은 예수님의 말씀에서 보여지고 있다.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이 말씀은 천국이우리의 영원한 처소가 아니라 지금 누릴 수 있는 실체이며 우리 손이 닿을 수 있는 여기에 와 있다는 의미이다.

기름 부으심예수께서는 자신의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 성령이 필요했다. 그리고 그 사명이란 아버지의 일은 온전히 이루는 것이었다(4:34).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 그 기름 부으심에 의지했다고 한다면 우리 역시 아버지께서 맡겨주신 일을 하기 위해 성령의 임재가 분명히 필요하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뒷장에서 자세히 다루겠지만 지금 여기서는 우선 초자연적인 사역을 위해 성령으로 옷 입혀져야 한다는 사실을 이해해는 것이 중요하다.

구약에서 기름 부으심은 사역을 담당한 제사장들에게 주어졌고, 예수님의 예를 보듯이 신약 사역도 마찬가지다. 기름 부으심은 초자연적인 결과를 가져온다. 이러한 기름 부으심은 예수께서 하나님이 보여주신 것만을 행하고 말씀하신 것만을 말할 수 있도록 했다. 아버지를 그에게 나타내주신 분이 바로 성령이셨다.

예수라고 하는 이름에 붙여진 의미와 더불어 그분의 구속 역사를 훼손하기 원하는 사람에게는적그리스도라는 이름 보다는적 예수라는 이름  더 적합한 것 같다. 사이비 봉교조차도 예수를 가치 있는 사람으로 여기며 최소한 선생이나 선지자로 인정하고 있다. 그리고 어쩌면 하나님의또 하나의아들이라 생각할 수도 있다.  이런 끔찍한 잘못들 때문에 이런 종류의 대적하는 영을 적그리스도[‘적 예수라 했을 때는 인간 예수를 부정하는 것이지만, ‘적 그리스도라 할 때는 기름부으심에 반대하는 의미가 강하다. 사이비 종교들은 인간 예수는 인정하되 성령의 기름부으심을 부정하므로적 그리스도라 부르는 것이다. 교회 안에적 예수는 없지만 기름부으심을 부정하는적 그시스도가 역사를 통해 늘 있어왔던 이유도 바로 그것이다. 그리고 이에 대해 성경은 조심하라고 경고하고 있다]라 부르는 것이다.
지옥의 영들은 기름 부으심에 대적하여 싸우고 있다. 왜냐하면 기름 부으심 없이 인류는 어둠의 왕국에 대해 아무런 위협도 가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인간을 향한 예수님의 관심에 대해서는 많은 찬사를 보내왔다. 그분의 겸손은 존경을 받아왔지만 실제로 초자연적인 역사를 이룬 것은 기름 부으심이었다. 그리고 하나님 자신이 초자연적으로 개입하셨던 부분에 대해 종교 지도자들은 거부했다. 이러한 기름 부으심은 성령 그분께서 어떤 사람 위에 실제로 임하여 그 사람이 초자연적인 일을 하도록 무장시킨다.

예수께서 “또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12:32)고 말씀하셨던 것을 보면 성령 하나님께서는 매우 존귀하게 여김 받으셨다.

능력있는 사역사람들이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를 좇았던 것은 성령의 능력 사역 때문이었다. 그들은 말과 행동에 있어서의 초자연적인 능력에 이끌렸다. 예수님의 말씀은 사람의 폐부를 찔렀고 그분의 행동은 아버지의 마음을 드러냈다. 성령의 기름 부으심은 겸손한 자의 삶을 영원히 바꿔놓는다. 하지만 교만한 자들을 심히 불편하게 하고 그들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기까지 만든 것 역시 성령의 능력 사역이었다. 얼음을 녹이는 태양이 진흙은 굳게 만든다.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역사는 사람들의 마음 상태에 따라 두 가지 상반된 반응을 불러일으킨다.

하나님은 우리 아버지시고 우리는 그분을 닮았다. 모든 신자들은 그들의 영적 DNA 속에 초자연적인 역사에 대한 갈망이 새겨져 있다. 우린 이 예정된 삶의 목표를 감지하고 있다. 하나님께로 나온 이런 열망은 이것을 멀리하라고 가르침을 받거나 혹은 이성적으로 따질 때, 아니면 초자연적인 일들이 실제로 행해지지 않거나 실망함으로 더 이상 이런 일을 하지 않으려 할 때 희석된다.

적그리스도의 영은 오늘날도 역사하여 신자들로 성령의 기름 부으심과 관련된 모든 것을 다 거부하도록 영향을 미친다. 그 형태는 다양한 종교의 모습으로 나타나지만 그 근간에는우리가 조정할 수 없는 것은 거부한다고 하는 의식이 바닥에 깔려있다. 이런 영은 복음을 단순히 지적인 메시지로 전락시키면서 초자연적인 하나님과의 만남을 부정한다.

만일 그런 능력이 과거에 일어났다면 그건 인정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런 일들이 때때로 다른 먼 곳에서 일어났을 때 그것을 문제 삶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영은 하나님 능력의 기름 부으심이 현재 이곳에서 일어난다고 했을 때 결코 가만히 있지 않는다. 자기 자신이 모든 것을 통제하려고 하는 이런 영들은 인간에게 있는 믿음(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요소)에 반하여 역사한다. 믿음이란 것을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범주 안에 국한시키려고 하고 있다.

적그리스도의 영은 종교의 영이 일어나게 만든다. 종교의 영은 성령 대신 자신의 인도함을 받도록 대치시키는 마귀적인 역사이다. 성령의 인도를 받을 때 우리는 하나님과 계속적으로 만날 수 있다. 종교는 어떤 개념을 우상화하고 개인적인 체험을 무시한다.

현재 우리 삶에 역사하시는 하나님 대신 과거에 있었던 역사만을 높이도록 만든다. 이런 영은 과거 부흥시대의 잔재를 먹고 산다. 이런 영이 가장 즐겨 쓰는 전술은 과거 성령의 역사로부터 배운 이념들을 화석화시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종교의 영은 눈물은 인정하지만 웃음은 이상한 눈으로 쳐다본다. 또 하나의 우상숭배이다. 성령과 성령의 능력 있는 사역을 대신하고자 하는 그 모든 것 뒤에는 반드시 이런 영들이 도사리고 있다.

반동(react)이냐 아니면 반응(response)이냐 - 빌 존슨


다른 사람이 믿음의 이름으로 지나쳐 보이는 일을 하는 것을 두려움으로 쳐다보는 많은 사람들은 아이러니컬하게도 불신앙을 품고 있다. 오류를 범할 것에 대한 반동은 오류를 낳는다. 진리에 반응을 보이는 사람들은 항상 오류 범하는 일에 반동하는 사람들을 이긴다.

어떤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이 잘못한 것을 지적하는 것 말고는 자기 자신의 자발적인 믿음 체게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들의 생각과 가르침은 오직 다른 사람들이 믿고 행하는 것을 반박만 할 뿐이다. 균형을 잡겠다고 애쓰는 그 사람들은 결국 바람에 휩쓸리고 만다.

균형(balance)이란 단어는 길의 가운데 지점을 의미하는 데서부터 왔다. 균형을 잡는다는 것은 사람이나 마귀에게 아루런 위협도 되지 않으며 아무런 위험 부담도 지지 않으려는 태도이고 무엇보다도 자신의 좋은 이미지를 손상시키지 않는 최선의 방법이다.

교회는 성도들에게 지나친 것이 잘못되었다고 경고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불신앙의 죄에 대해 경고하고 계신다. 예수께서는 인자가 올 때 세상에서 지나친 사람들을 보겠느냐?” 라고 말씀하지 않으셨다. 예수께서는 자신이 보여주었던 것과 같은 믿음을 가진 자를 발견하는 데 관심을 가지셨다. 우리는 비슷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끼리 모여 있기를 좋아하지만 믿음을 가진 사람들은 우리들을 불편하게 만든다. 믿음은 안전성을 위협한다.

큰 믿음을 가진 사람과 함께 사는 일은 어렵다. 그들의 사고방식은 다른 세상에 속했기 때문이다. 목사였던 나의 할아버지는 1900년도 초반 몇몇의 위대한 하나님의 남종과 여종 밑에서 사역하셨다. 할아버지께서는 내게 사람들이 얼마나 스미스 위글즈워스(Smith Wigglesworth)를 좋아하지 않았는지 종종 말씀해주곤 하셨다.

그의 믿음은 다른 사람들로 불편하게 만들었다. 우리는 그런 사람을 좋아하든지 피하든지 한다. 그들의 삶의 방식은 전염성이 강하거나 혹은 타협지점도 없이 공격적이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스미스 위글즈워스를 사랑한다. 하지만 그건 그가 죽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사람들도 선지자들은 사랑했다.

불신앙에 대해서도 놀라운 점이 있는데 그건 불신앙적인 기대를 거의 모두 충족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불신앙은 아무런 위험 부담도 없기 때문에 안전하고 또 대부분 기대한 바를 얻는다. 그리고 사람들은 자신의 불신앙에 대한 응답을 받으면 이렇게 말한다. “거봐, 내가 그런다고 했잖아.”

믿음 – 보이지 않는 세계로 내리는 닻(빌 존슨)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11:1)
믿음은 보이지 않는 세계의 실상을 보여주는 마음의 거울이다. 그리고 보이지 않는 세계는 하나님 나라의 실체이다. 믿음의 기도를 통해 우리는 그 세계의 실체를 이곳에 끌어당길 수 있다. 이것이 바로 믿음의 역할이다.

믿음은 보이지 않는 세계로 내리는 닻이다. 믿음은 보이지 않는 세계로부터 시작하여 보이는 세계를 향해 나아간다. 믿음은 깨닫는 바를 실현시킨다. 성경은 눈에 보이는 세계의 한계 앞에 믿음의 삶이 어떤 것인지를 대비시키고 있다(고후5:7참조). 믿음은 마음으로 볼 수 있는 눈을 제공한다.

예수께서는 사람들이 마음으로 볼 수 있기를 기대하셨다. 언젠가 종교 지도자들을 향해 외식하는 자라 부른 것도 그들이 일기는 분변하면서도 시대는 분변치 못했기 때문이었다.  자연의 일기보다 먼저 시대(영적인 기후와 계절)에 대해 깨닫기를 예수님께서 왜 더 바라셨는지 이유는 분명하다. 하지만 시대를 깨닫지 못하는 종교 지도자들을 향해 왜 외식하는 자라 부르셨을까?

많은 사람들은 영적인 세계를 볼 수 있는 능력이 모든 사람에게 주어져 있지만 단지 사용을 하지 않고 있을 뿐이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대신 특별한 은사를 지닌 소수의 사람들에게만 주어진 능력이라고 생각한다.

예수님은 지금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을 향해 외식하는 자라 부르셨다. 만일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에게 영적인 세계를 볼 수 있는 능력을 기대했다고 한다면 이는 곧 모든 사람에게 그런 능력이 있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그들이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 눈이 멀었던 것은 그들의 마음이 부패했기 때문이고 그들은 하나님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함으로써 그런 심판을 받았다.

우리는 믿음을 통해 은혜로 거듭난다(2:8참조). 거듭나는 경험은 우리로 하여금 마음으로 보는 일을 가능케한다(3:3참조). 볼 수 없다면 이는 마음이 둔하고 강퍅해졌기 때문이다( 8:17-18참조). 믿음은 단지 우리를 하나님의 가족이 되게 하기 위해서만 의도되지 않았다. 오히려 믿음은 하나님의 가족에게는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특성이다.

믿음은 보게 하며 하나님 나라에 초점을 둔다. 우리는 믿음을 통해서 아버지의 모든 자원과 아버지가 베푸시려는 모든 혜택을 얻을 수 있다.

우리의 볼 수 있는 능력을 북돋기 위해 예수께서는 상세하게 가르쳐주셨다. “먼저 그의 나라를 구하라”(6:33). 사도 바울은 위에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3:2)고 했고 또한 이렇게도 말해주었다. “보이는 것은 잠간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고후4:18).

성경은 우리로 우리의 관심을 보이지 않는 곳에 두라고 가르쳐주고 있다. 이러한 주제는 성경 말씀 가운데 계속 반복되면서 서구적인 논리에 갇혀있는 우리를 대단히 불편하게 만든다.

오늘날 우리가 교회를 향해 회복하기를 바라는 초자연적인 세계의 비밀이 여기에 있다. 예수께서는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을 본 것만을 행하셨다고 우리에게 말씀해주셨다. 이러한 통찰력이야말로 지금 놓여있는 상태에 만족할 수 없는 이들에게는 꼭 필요한 것이다

눈먼자의 눈에 진흙을 발라 고치신 예수님의 능력은 보이지 않는 세계를 볼 수있었던 능력에 기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