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7/2010

지금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

학개 2: 9    “이 전의 나중 영광이 이전 영광보다 크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내가 이곳에 평강을 주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NIV)

지금의 말씀:   
“내가 나의 교회를 세울것이며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할것이다. 나의 신부여, 나의 아름다운자여, 내가 너를 준비시키고 있다. 나의 사랑인 너를 나의 빛이 되게 하여 다스리고 지배하며 나와 함께 영원토록 다스리게 할것이다. 일어나 준비하라. 나의 영광이 너를 통해 나타나며 내가 너에게 유업으로 열방을 주리라. 네가 걸어갈때에 나의 평강이 너와 함께 온 땅을 다니게 될것이다. 반드시 나의 영광이 온땅을 덮을 것이며 온 열방이 너를 원하게 될것이다. 나의 사랑하는 자여, 그 어느것도 너를 맞서지 못할것이다.  

내가 너에게 나의 말씀을 주었나니, 너를 대적하려는 그 어떤 무기도 변영되지 못할것이며 그 어떤 말들도 너를 향해 대적하여 서지 못할것이다. 내가 너에게 기름을 부었으며 나의 임재로 말미암아 네가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며, 마음이 상한자를 고치고,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선포하며, 갇힌 자들을 위해 닫힌 문을 열어 다가오는 하나님의 해를 선포하게 할것이다. 네가 집에 있다 할지라도 나는 너에게 치유를 자져다 줄것이며 나의 영광이 너를 통하여 나타날것이다. 오라, 나에게 오라, 더 가까이 오라. 네가 나에게 다가와 나의 얼굴을 구하면 너를 통하여 무엇을 할것인지를 내가 너에게 보여주겠다.”

당신을 위한 나의 기도:   
하나님 아버지, 당신의 신을 모든 만민에게 부어주시기로 하신 축복의 약속으로 인해 감사를 드립니다. 아버지의 자녀가 당신의 얼굴을 구하고 그 영광을 짊어 지고 갈수 있도록 하시는 만군의 여호와께 감사를 드립니다. 

제가 간구하옵는 것은 아버지께서 약속해주신 그 호의를 주의 자녀에게 베풀어 주시기를 위하여 이시간 주 하나님께 구합니다. 새로운 성령님의 만지심을 구합니다. 주 하나님께서 당신의 교회를 짓고 계시며 당신의 자녀가 함께 동참 할수 있게 하심에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는 아버지께서 석조 건축물이나 사람이 만든 천막에 사시는 분이 아니심을 압니다. 하지만 아버지께서는 저희를 당신의 거주지로 삼으셨습니다. 주 하나님 오시옵소서! 오셔서 당신의 자녀가 당신의 형상을 닮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영광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당신의 자녀에게 보이게 하시고 그들안으로 평강이 흘러가게 하옵시며 그들을 통하여 흘러나오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자신을 위하여 기도하세요:   
하나님 아버지, 나를 당신의 아름다운 신부로 택하여 주심을 감사를 드립니다. 이 사악한 죄인을 택하여 주셔서 의인의 옷을 입도록 구원하셨습니다. 주 하나님께서 내 안에서 역사하시고 또 나를 통하여 당신의 영광을 온 열방 가운데 나타나게 하실것으로 인하여 감사를 드립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는 아버지와 깊은 사랑에 빠져 있습니다 그리고, 더 많이 당신을 원합니다. 나의 마음은 아버지의 것이며 제가 하는 모든 것으로 인하여 아버지께서 높임을 받으시옵소서. 주님은 참으로 아름다우신 분이며 주와 같은 분은 없습니다. 모든 이름위에 뛰어나신 주님께 영광을 올립니다. 

하나님 아버지께 간구하옵는 것은 나를 변화 시키셔서 아버지를 더욱 닮게 하옵소서. 나의 마음속 아주 은밀한 곳으로 아버지를 초청합니다. 아직도 아버지와 온전해 질수 없는 부분들까지에도 들어와 주시기를 초청합니다. 주 하나님 오셔서 나의 마음을 움직여 주시옵소서. 아버지의 자비로우심이 내 안으로 그리고 나를 통하여 흐르게 하옵소서. 주님께서 토기쟁이시며 저는 칠흙입니다. 당신앞에 온전히 순복합니다. 나의 마음가운데 역사하시고 당신의 영광이 나를 통하여 나타나게 하옵소서. 아버지를 사랑합니다. 나의 모든것을 드립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주님 안에서, Mark Visser

제16강 기복신앙과 예배회복 - 여주봉목사

신명기 30:19-20절입니다. "내가 오늘날 천지를 불러서 너희에게 증거를 삼노라 내가 생명과 사망과 복과 저주를 네 앞에 두었은즉 너와 네 자손이 살기 위하여 생명을 택하고 20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 말씀을 순종하며 또 그에게 부종하라 그는 네 생명이시요 네 장수시니 여호와께서 네 열조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리라고 맹세하신 땅에 네가 거하리라 ”

오늘은 기복신앙의 예배에 대해서 살펴봅니다.
지난 주일에는 율법주의 예배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거짓신앙체계는 율법주의 기복주의 인본주의는 삼위일체처럼 연결되어 있습니다. 한 신앙체계의 세 가지 특징으로 세 가지는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율법주의는 이론을 제공한다면 기복신앙은 그 배후에 있는 탐심을 말하면 인본주의는 그런 신앙체계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사는 방식을 의미합니다. 기복신앙은 하나님을 자기의 수단으로 삼는 신앙입니다. 우리 신앙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중심적인 삶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중심적인 삶에만 하나님의 생명이 있습니다.

반면에 타락의 본질은 자기중심적인 삶입니다. 우리 가운데 아무리 많은 종교적인 헌신과 열심히 있어도 자기중심적인 삶을 살면 의미가 없습니다. 여기에는 어떤 하나님의 생명 실제도 없습니다. 참다운 신앙은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 사는 것인데 기복신앙은 하나님을 믿어도 자기 목적을 위한 하나님이 수단이 되는 신앙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은 하나님을 믿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있어서 우상숭배는 혼합주의 신앙입니다. 안믿는 사람들은 어차피 자기 목적을 위해서 삽니다. 우상숭배하며 삽니다. 그러나 믿는 자들은 예수님을 믿은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백성들이 가지고 있는 우상숭배는 혼합주의입니다.

예를 들면 구약백성들은 하나님을 섬기면서 동시에 바알을 섬겼습니다.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을 섬겼고 그러나 바알을 섬기지 않았습니다. 그림자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섬기면서 동시에 자기를 섬긴 것입니다. 동일한 우상숭배였습니다. 그래서 우리 신앙은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서 사는 것인데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 살려면 자기 목적이 내려져야 합니다.

그런데 동시에 자기 목적을 위해서 사는데 그것은 실제로 자기 목적을 위해서 사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기 목적을 위해서 살고 자기 목적이 성취되는 범위 내에서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얼마나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 것인지는 실제로 자기 목적을 성취하는 것에 따라 결정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자기 영광을 위해 하나님이 수단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복신앙입니다.

오늘은 기복신앙의 예배를 살펴볼 것인데, 기복신앙을 먼저 살펴보아야 합니다.

1.성경이 말하는 복
기복신앙이 잘못된 것이라고 하면 어떤 사람들은 성경이 얼마나 많이 복에 대해서 말하는데 왜 잘못되었냐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왜 기복신앙이 왜 타락한 거짓신앙체계인가를 알기 위해서도 성경이 말하는 복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1)하나님이 복이십니다.
성경이 말하는 복을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가 반드시 이해해야하는 아주 중요한 이해중 하나는 하나님 자신이 복이라는 것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복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무엇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 복입니다.

오늘 신30장 19-20절은 복에 대해서 말하는 구절입니다. 이것을 보면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이 아무리 말씀하셨어도 듣지 않고 하나님의 명령을 망각하고 자기 길로 행할 것을 염두해 두고 하시는 것 같아요. 하늘과 땅을 내 증인으로 삼는다고 말합니다. 생명과 복 또 사망과 저주를 두었다고 말합니다. 생명을 택하라고 합니다. 즉 복을 택하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생명과 복을 택하는 방법을 말하는데 하나님을 사랑하고 말씀에 순종하고 목소리를 청종하고 부종하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그분은 네 생명이시요라고 합니다. 다시말하면 내가 복이라는 말입니다. 신약성경에서도 예수님도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하셨습니다. 이처럼 성경을 보면 성경이 말하는 복은 하나님이 주시는 무엇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하나님 그분이 복이라는 사실입니다.

2)하나님은 하나님과 함께하는 자와 함께하시고 하나님을 버리는 자를 버리십니다.
역대하 15장 2절 이하입니다. "저가 나가서 아사를 맞아 이르되 아사와 및 유다와 베냐민의 무리들아 내 말을 들으라 너희가 여호와와 함께 하면 여호와께서 너희와 함께 하실지라 너희가 만일 저를 찾으면 저가 너희의 만난 바 되시려니와 너희가 만일 저를 버리면 저도 너희를 버리시리라 3 이스라엘에는 참 신이 없고 가르치는 제사장도 없고 율법도 없은 지가 이제 오래였으나 4 그 환난 때에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께 돌아가서 찾으매 저가 그들의 만난 바가 되셨나니”

여기보면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하면 하나님도 함께한다. 하나님을 찾으면 하나님을 만난바 되신다. 반대로 우리가 하나님을 버리면 하나님도 우리를 버린다. 우리가 하나님을 멸시하면 하나님도 우리를 멸시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영적인 법칙입니다.

3)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의미
하나님이 말씀하신 바가 무엇인지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바리새인들에게 하나님을 존중합니까? 라고 묻는다면 뭐라고 할까요? 그것을 말이라고 하냐고 할 것입니다. 자신들은 누구보다 하나님을 존중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관점에서는 그들은 하나님을 존중한 것이 아니라 멸시했습니다. 이사야 시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도 하나님을 존중하는 자를 존중한다고 외쳤어도 효과가 없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신들은 하나님을 누구보다 존중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관점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사1장 4절입니다. "슬프다 범죄한 나라요 허물진 백성이요 행악의 종자요 행위가 부패한 자식이로다 그들이 여호와를 버리며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를 만홀히 여겨 멀리하고 물러갔도다”

예레미야 시대도 마찬가지입니다. 렘 6장 20절을 봅시다.
“시바에서 유향과 원방에서 향품을 내게로 가져옴은 어찜이요 나는 그들의 번제를 받지 아니하며 그들의 희생을 달게 여기지 않노라”

이들에게 하나님을 존중하십니까? 라고 묻는다면 그것을 말이라고 하냐고 할 것입니다. 하나님을 멸시한다면 이런 예배를 드리겠냐고 할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들이 하나님을 멸시한다고 하십니다.

렘2장 13절입니다.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생수의 근원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물을 저축지 못할 터진 웅덩이니라”

여기보면 본인들은 하나님을 존중한다고 자부했을 것인데 하나님은 그들이 하나님 자신을 버렸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의 신앙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의 다림줄에 의한 삶입니다. 우리의 의견이 중요하지 않고 사람의 생각이 중요하지 않고 하나님 앞에서는 하나님의 관점만 통합니다. 따라서 우리가 이런 구절들을 읽을 때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바가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 자신을 볼 수 있어요. 그 관점을 모르니까 이사야시대에 아무리 외쳐도 효력이 없습니다. 예레미야 시대 예수님 시대의 종교 지도자들 아무런 효력이 없습니다. 오늘날도 우리가 아무리 성경을 아무리 읽어도 하나님이 관점을 모르면 우리에게 효력이 없어요. 의미하는 바를 모르고 우리 식대로 해석하니까요.

렘2장을 보면, 하나님과 함께하는 것이 무엇인지 나옵니다. 하나님과 함께 한다는 말 혹은 하나님을 존중한다는 말은 신앙의 본질인 인격체이신 하나님을 알고 존재를 다해 사랑하며 하나님의행하심에 우리의 온 삶으로 동참하는 삶입니다. 이 삶이 하나님중심적인 삶이며 하나님의 주권적인 통치 아래 있는 삶이며 이 삶에 하나님을 경외함이 있습니다. 이런 삶에서 떠난 것이 하나님을 떠난 것입니다. 의식이 아무리 많아도.

렘6장을 보면 시바에서 원방에서 향품을 가져다 드렸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이 내 법을 버렸다고 합니다. 신앙의 본질에서 떠나면 아무리 의식이 많아도 우리 삶에서는 하나님의 법을 버리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함께한다는 말은 신앙의 본질이라고 표현하는 하나님을 존재를 다해 사랑하고 하나님의 행하심에 동참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또 하나님의 주권적인 통치 아래 사는 삶이며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입니다.

4)복 혹은 생명과 신앙의 본질
하나님과 함께하면 하나님도 함께하십니다. 하나님중심적인 삶을 살면 하나님이 함께하십니다. 그분이 복이요 생명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살면 하나님의 생명이 우리에게 넘칩니다. 기도응답이건 인도하심이건 보호하심이건 등등. 다윗이 시편 23편에서 노래한 것이 그의 인생에 함께하신 하나님의 생명을 노래한 것입니다. 이런 생명이 넘칩니다.

반대로 우리가 신앙의 본질에서 떠난 것이 하나님을 떠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도 떠납니다. 종교적인 의식과 모양은 가득하고 종교적인 교리는 믿음으로 고백할지 모르지만 하나님의 실재가 걷힙니다. 하나님의 생명이 걷힙니다. 여러분이 지금 하나님의 앞에서 다림줄안에 거하는지 안하는지를 알 수 있는 길이 있어요. 지금 여러분의 삶 속에 하나님의 생명이 함께하는지 안하는지를 보면 알 수 있어요. 그만큼 간단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하나님과 함께하는 자들과 함께하시고 하나님을 버린 자들을 버리시고 임재를 거두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이제 심각합니다.

여러분 오늘날 우리나라에 기독교인들이 많은데 그리고 교회가 많은데 우리는 성경에 나와 있는 교리를 다 믿고 하나님을 위한 종교적인 헌신이 많을지 모르지만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의 생명이 개인과 교회 가운데 함께하는 경우는 너무나 적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은 이사야 시대처럼 예레미야 시대처럼 유대인들처럼 종교적인 의식과 헌신이 많기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할지 모르지만, 그리고 그렇게 예배하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우리의 예배가 상달될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하나님의 관점에서는 하나님을 떠났다는 사실을 드러냅니다. 그래서 실제로 우리 삶에서는 하나님의 법도는 간 곳에 없습니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복입니다.

이것을 살펴본 이유는 이것이 보여야 다음에 말할 거짓신앙이 보입니다. 이것이 보여야 우리 삶이 보입니다. 이것이 보여야 기복신앙이 무엇인지 보입니다. 왜 잘못되었는지가 보입니다.

2.기복신앙과 거짓
우리 신앙이 타락하면 항상 거짓신앙체계에 빠집니다. 신앙이 타락한 시대일수록 거짓신앙체계가 전면에 나섭니다. 예레미야 시대가 신앙이 타락했기 때문에 어느 시대보다 거짓신앙체계가 가득하비다. 율법주의 기복주의 인본주의가 가득합니다.

그런데 기복신앙과 아울러 같이 오는 것이 거짓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기복신앙에 빠지면 항상 거짓이 팽배합니다.

1)하나님의 백성들이 기복신앙에 빠지면 거짓이 팽배합니다.
렘5장 31절입니다. "선지자들은 거짓을 예언하며 제사장들은 자기 권력으로 다스리며 내 백성은 그것을 좋게 여기니 그 결국에는 너희가 어찌 하려느냐”

6장 13절입니다. "이는 그들이 가장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탐남하며 선지자로부터 제사장까지 다 거짓을 행함이라”

8장 5절입니다.
“5 이 예루살렘 백성이 항상 나를 떠나 물러감은 어찜이뇨 그들이 거짓을 고집하고 돌아오기를 거절하도다”

8장 8절입니다. "너희가 어찌 우리는 지혜가 있고 우리에게는 여호와의 율법이 있다 말하겠느뇨 참으로 서기관의 거짓 붓이 거짓되게 하였나니” 이것을 보면 예레미야 시대도 율법적인 지식이 없어서 망한 것이 아님을 볼 수 있습니다. 율법을 아는 것은 중요하나 인격체이신 하나님을 아는 수단입니다.

18장 18절입니다. "그들이 말하기를 오라 우리가 꾀를 내어 예레미야를 치자 제사장에게서 율법이, 지혜로운 자에게서 모략이, 선지자에게서 말씀이 끊어지지 아니할 것이니 오라 우리가 혀로 그를 치고 그의 아무 말에도 주의치 말자 하나이다”


종교지도자들이 예레미야를 치면서 하는 말입니다. 영어 niv를 보면 이렇게 번역합니다. 우리가 예레미야를 쳐야 제사장들에 의해서 가르치는 율법의 가르침이 쏟아지지 않을 것이다. 지혜로운 자들에게서 나오는 모략도 쏟아지지 않을 것이다. 선지자들에게서 나오는 말씀도 쏟아지지 않을 것이다.

이것을 보면 선지자 제사장 율법사 서기관 지혜로운 현인이라는 사람들이 다 거짓을 행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백성들은 그 거짓을 좋아했어요. 그래서 심판이 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것을 볼 때 당연하지 거짓을 행하니 심판이 오지 그럽니다. 여러분 바리새인들이 이 구절을 몰랐을까요. 잘 알았을 것입니다. 그들은 이렇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우리 조상들이 하나님 앞에 거짓을 행했다. 총체적으로 거짓을 행했다. 지도자들도 백성들도 거짓에 빠졌기 때문에 심판이 왔습니다고 하고 설교도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들이 그와 같은 거짓에 빠져있는 것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여러분도 거짓을 미워하고 진리를 미워하지요. 제 말은 우리가 이 말이 무슨 뜻인지 알려면 하나님이 무엇을 두고 거짓이라고 하는지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이 말이 우리에게 효력이 있습니다. 바리새인들도 여기서 말하는 거짓이 무엇인지를 보았더라면 자기들은 거짓에 빠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2)거짓의 의미
무엇이 거짓입니까? 렘6장 12절에 나옵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내가 그 땅 거민에게 내 손을 펼 것인즉 그들의 집과 전지와 아내가 타인의 소유로 이전되리니”

14절입니다. 여기에 거짓이 무엇인지 나옵니다. '그들이 내 백성의 상처를 심상히 고쳐 주며 말하기를 평강하다, 평강하다 하나 평강이 없도다” 지금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거짓은 평강이 없는데 평강이 있다고 말하니 거짓입니다. 문제는 거짓 선지자들이 나름대로 성경에 기초해서 그렇게 전한 것입니다.


왕상 2장 33절입니다. "저희의 피는 영영히 요압의 머리와 그 자손의 머리로 돌아갈지라도 다윗과 그 자손과 그 집과 그 위에는 여호와께로 말미암은 평강이 영원히 있으리라”


대상 22장 9-10절입니다. "한 아들이 네게서 나리니 저는 평강의 사람이라 내가 저로 사면 모든 대적에게서 평강하게 하리라 그 이름을 솔로몬이라 하리니 이는 내가 저의 생전에 평안과 안정을 이스라엘에게 줄 것임이니라 10 저가 내 이름을 위하여 전을 건축할지라 저는 내 아들이 되고 나는 저의 아비가 되어 그 나라 위를 이스라엘 위에 굳게 세워 영원까지 이르게 하리라 하셨나니”


삼하 7:12절입니다. "네 수한이 차서 네 조상들과 함께 잘 때에 내가 네 몸에서 날 자식을 네 뒤에 세워 그 나라를 견고케 하리라”


16절입니다. "네 집과 네 나라가 네 앞에서 영원히 보전되고 네 위가 영원히 견고하리라 하셨다 하라”

대상 23:25절입니다. "다윗이 이르기를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께서 평강을 그 백성에게 주시고 예루살렘에 영원히 거하시나니”

제가 몇 구절만 읽었습니다. 여기보면 하나님이 다윗에게 그 왕위와 나라가 가문이 영원히 보전되고 가문과 나라에 영원히 평강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또 하나님이 예루살렘 성전에 영원히 자기 이름을 두시고 자기 눈과 마음을 거기에 거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런데 예레미야 당시 그 나라가 다윗의 나라였습니다. 왕위가 다윗의 왕위였습니다. 


왕이 다윗의 가문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성경에 기초해서 평강을 외쳤던 것입니다. 여기 평강은 단순한 마음의 평강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 삶의 모든 영역을 다르심으로 우리 모든 영역에 하나님의 생명이 넘치는 의미로 평강입니다. 그들은 성경에 기초해서 평강을 외쳤어요.

뿐만아니라 렘7장만 해도 그날도 안식일에 예루살렘 성전에서 하나님께 성대한 예배랄 드렸기 때문에 하나님이 약속하신대로 그 나라를 지키실 것을 선포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것을 거짓이라고 합니다. 여러분이 그 당시에 살았다면 대부분의 선지자들이 성경을 주해하면서 평강을 외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사람인 예레미야라는 사람이 자기가 참 선지자라고 하면서 이것이 거짓이라고 너희가 무익한 거짓말을 믿는다고 외쳤을 때 여러분은 누구의 말을 들었을까요? 만일 그 시대에 살았다면. 그래서 그 시대의 사람들이 돌이키지 못한 것입니다. 눈이  가려진 것입니다.

여러분 왜 예레미야서가 성경에 기록되었을까요? 역사가 하나님이 예레미야가 하나님이 보내신 선지자라는 것이 확실한 것을 증명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예레미야를 통해서 주신 말씀대로 성전이 불타고 폐허가 되고 실제로 나라가 망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참된 선지자였기 때문에 기록한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그 당시에 살았다면 믿었겠느냐는 것입니다.

또한 바리새인들은 예레미야 당시에 예레미야 선지자가 참된 선지자였고 자기 조상들은 거짓이 가득했다는 것을 성경을 통해서 알았습니다. 그래서 심판인 온 것을 알았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자기들의 문제라는 것을 조금도 몰랐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의 의미가 무엇인지 몰랐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왜 이것이 거짓입니까? 영적인 분별력이 없으면 모릅니다.
그래서 제가 성경이 말하는 복을 살펴본 것입니다. 그들이 종교적인 의식은 가득했고 종교적이 헌신은 가득했어도 그들의 삶은 철저하게 하나님의 길에서 떠나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목적을 위한 수단에 불과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길에 대해 관심도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철저하게 하나님을 버린 상태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도 그들을 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에게는 어떤 하나님의 평강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신앙에 대한 이해도 잘못되었습니다. 


의식이 본질을 대체한 것이 율법주의인데 의식 잘해도 본질에서 떠나면 껍데기뿐인데도 그들은 의식을 잘하면 신앙생활 잘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으니까 그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을 떠나있다는 사실도 몰랐습니다. 그런 상태에서 리더들이 하나님의 백성들이 영적으로 어떤 상태에 있는지 하나님의 심판이 코 앞에까지 닥쳐왔는지도 모른채 자기 임의대로 하나님의 백성들의 영적인 상태와는 상관없이 저들이 원하는 좋은 약속만 임의대로 가져다가 전한 것을 두고 거짓이라고 그런 것입니다. 문자 그대로 거짓이었습니다.

이것을 더 확실하게 볼 수 있는 구절이 렘23장 16절입니다.
“16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에게 예언하는 선지자들의 말을 듣지 말라 그들은 너희에게 헛된 것을 가르치나니 그들의 말한 묵시는 자기 마음으로 말미암은 것이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온 것이 아니니라”

렘7장을 다시 봅시다. 22절 -26절입니다. "대저 내가 너희 열조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날에 번제나 희생에 대하여 말하지 아니하며 명하지 아니하고 23 오직 내가 이것으로 그들에게 명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내 목소리를 들으라 그리하면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겠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되리라 너희는 나의 명한 모든 길로 행하라 그리하면 복을 받으리라 하였으나 24 그들이 청종치 아니하며 귀를 기울이지도 아니하고 자기의 악한 마음의 꾀와 강퍅한 대로 행하여 그 등을 내게로 향하고 그 얼굴을 향치 아니하였으며 25 너희 열조가 애굽 땅에서 나온 날부터 오늘까지 내가 내 종 선지자들을 너희에게 보내었으되 부지런히 보내었으나 26 너희가 나를 청종치 아니하며 귀를 기울이지 아니하고 목을 굳게 하여 너희 열조보다 악을 더 행하였느니라”

지금 이것이 예레미야 당시의 백성의 영적인 상태였습니다. 그런데도 리더들은 강팍한 대로 행하는 그들에게 심판이 너희에게 임하지 않을 것이라고 선포했습니다. 이제 거짓임이 보입니까? 이제 왜 이것이 거짓이었는지 보이세요?

성전에 해도 그렇습니다. 아까 신12장에서 내가 내 이름을 그곳에 영원히 두고 내 마음과 눈이 그곳에 영원히 두겠다고 하셨지요. 그런데 그 이전에 신10장 12절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이냐 곧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여 그 모든 도를 행하고 그를 사랑하며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고”

즉 신앙의 본질이 먼저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의식입니다.
뿐만아니라 왕상 9장 1절 이하를 보면 솔로몬이 예루살렘 성전을 봉헌하면서 기도하는 내용입니다. "솔로몬이 여호와의 전과 왕궁 건축하기를 마치며 자기의 무릇 이루기를 원하던 일이 마친 때에 2 여호와께서 전에 기브온에서 나타나심같이 다시 솔로몬에게 나타나사 3 저에게 이르시되 네가 내 앞에서 기도하며 간구함을 내가 들었은즉 내가 너의 건축한 이 전을 거룩하게 구별하여 나의 이름을 영영히 그 곳에 두며 나의 눈과 나의 마음이 항상 거기 있으리니 4 네가 만일 네 아비 다윗의 행함같이 마음을 온전히 하고 바르게 하여 내 앞에서 행하며 내가 네게 명한 대로 온갖 것을 순종하여 나의 법도와 율례를 지키면 5 내가 네 아비 다윗에게 허하여 이르기를 이스라엘 위에 오를 사람이 네게서 끊어지지 아니하리라 한 대로 너의 이스라엘의 왕위를 영원히 견고하게 하려니와”

그런데 그 당시 종교적인 지도자들은 총체적으로 영적인 분별력이 어두워져서 무엇이 옳은 신앙인지도 전혀 모른 채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을 떠나 잇는데 의식 잘하는 것이 신앙생활을 잘하는 것으로 알고 그것을 잘한다고 하나님의 백성들의 영적인 상태를 무시한 채 성경에 나오는 좋은 약속들만 임의로 택해서 그것을 근거로 저들에게 평강이라 평강이라 축복이라 축복이라고 선포한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생명이라 생명이라 이렇게 외친 것을 두고 거짓이라고 말합니다. 문자 그래도 거짓이었습니다.

그래서 렘23장에서 그럽니다. “항상 그들이 멸시하는 자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평안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하며 재앙이 너희에게 임하지 않으리라고 한다고 합니다. 영적분별력이 가려지면 그럽니다. 


21절입니다. "이 선지자들은 내가 보내지 아니하였어도 달음질하며 내가 그들에게 이르지 아니하였어도 예언하였은즉”


이제 그것이 왜 거짓인지 보이시지요.

3)기복신앙에 빠지면 사람들은 거짓을 좋아합니다.
선지자들은 거짓을 예언하며 내 백성들은 그 거짓을 좋아한다고 합니다. 예루살렘 백성이 항상 나를 떠나 물러감은 어찜이뇨 그들이 거짓을 고집하고 내게 돌아오기를 거부한다고 합니다. 여러분에게 묻겠어요. 여러분 거짓 좋아합니까? 그러면 우리는 예레미야 시대 사람들은 거짓을 좋아했으니까 하나님의 심판이 온 것이 너무나 당연했지만 그리고 내 자신과는 상관없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 말씀은 그 시대의 문제만 아니고 우리시대 우리의 문제입니다. 이들이 거짓을 좋아한 이유는 우리 신앙은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 사는 것인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우리를 창조하셨고 구워하셨는데 신앙이 타락하면 하나님은 자신의 목적을 위한 수단이 됩니다. 그리고 자기 목적이 이루어지는 데만 관심이 있습니다. 자기 축복 자기 문제해결 자기 사업 자기 자식 잘되는 데만 관심이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길에는 관심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목적은 그들에게 관심도 없습니다. 이것을 두고 하나님은 내 백성이 거짓을 고집한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사30장이 그 말씀입니다. 저들의 일을 서판에 기록해서 대대로 남기라고 하나님이 하십니다. 화가 대단히 나셨어요.

9절이하입니다. "대저 이는 패역한 백성이요 거짓말 하는 자식이요 여호와의 법을 듣기 싫어하는 자식이라 10 그들이 선견자에게 이르기를 선견하지 말라 선지자에게 이르기를 우리에게 정직한 것을 보이지 말라 부드러운 말을 하라 거짓된 것을 보이라 11 너희는 정로를 버리며 첩경에서 돌이키라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자로 우리 앞에서 떠나시게 하라 하는도다 12 이러므로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자가 말씀하시되 너희가 이 말을 업신여기고 압박과 허망을 믿어 그것에 의뢰하니”

이 말은 입으로 직접 그들이 이렇게 했다는 말이 아닙니다. 이 말은 행동의 소리입니다. 우리 행동이 하나님에 대해서 무엇을 믿는가를 드러냅니다. 그들은 탐심이 가득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길에는 관심도 없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목적을 이루는 데만 관심이 있었습니다. 자기들이 원하는 메시지 부드러운 메시지만 듣기를 원했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의 길에서 떠났고 하나님이 버리셨습니다.

이것을 보면 우리 한국교회는 너무나 심각하게 거짓이 가득합니다. 우리는 진리를 원한다고 하지만 우리는 우리 목적을 위한 메시지만 우리 임의대로 선별적으로 받아들입니다.

4)거짓은 효력이 없습니다.
렘7:4절입니다. "너희는 이것이 여호와의 전이라, 여호와의 전이라, 여호와의 전이라 하는 거짓말을 믿지 말라”

8절입니다. "너희가 무익한 거짓말을 의뢰하는도다”

이것은 두려운 말입니다. 거짓과 헛된 자만으로 신앙이 지금 하나님 앞에서는 완전히 심판이 코 앞에까지 다가왔어요. 그런데 축복이라 축복이라 복주실 것입니다고 함으로 하나님의 백성들로 하여금 헛된 자만 가운데 빠지게 했습니다. 그들이 아무리 평강을 외쳐도 심판이 오지 않을 것이라고 외쳤지만 그 모든 것이 심판을 막지 못했습니다. 거짓은 소용이 없습니다. 거짓은 성도들의 눈을 어둡게 해서 헛된 자만 가운데 빠지게 해서 마취제 같은 역할만 했습니다. 이제 거짓이 무엇인지 보이시지요.

3.기복신앙의 예배
1)기복신앙의 예배에서는 부드러운 메시지가 판을 칩니다.
사람이 탐심이 가득하여 하나님을 믿지만 자기 목적을 위해 살기 때문에 그 목적이 성취되는 것에만 관심이 있기 때문에 그들은 그런 메시지만 듣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리더들이 왜 그런 메시지를 전하냐면 그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서입니다. 소위 부드러운 메시지 평강의 메시지 축복의 메시지를 전하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시대처럼 기복신앙에 빠지면 부드러운 메시지가 판을 칩니다. 예레미야 시대는 선지자 제사장 율법서 현인 할 것 없이 작은 자부터 큰 자까지 모두가 다 총체적으로 거짓신앙체계에 빠져 있었습니다.

오늘날은 어떠합니까? 제가 아는 목사님이 어느 도시에서 개척교회를 하고 있어요. 자기 친구가 서울 근교에서 숫자적으로 큰 교회를 목회하는 목사인데 전화해서 교회성장할 수 있는 비결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오늘부터 3 년동안 주일낮예배 뿐아니라 모든 예배 때 축복만 전하라고 하더랍니다. 이길수 목사님이 지방회 연합성회가 있어서 기도하라고 해서 기도하는데 하나님께서 기복신앙에 빠져있는 것에 대해서 기도하라고 하시는 것 같더래요. 그래서 기도했는데 강사 목사님이 정확하게 기복신앙에 대해서 설교하면서 이목사님을 똑바로 쳐다보면서 한국교회에서 복을 전해서 성장하지 않은 교회 있으면 찾아보라고 하시더래요. 


그것이 이 시대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지금 어떤 상태에 있는지 영적으로 우리가 지금 어떤 상태에 있는지 하나님의 생명이 우리에게서 어떻게 걷혀있는지 알아야 합니다. 임의로 성경에 나오는 좋은 약속만 택해서 전파하는 심각한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래야 성도들이 원하고 교회가 성장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한 가지 기억해야할 것이 있습니다. 부드러운 메시지는 사람을 절대로 변화시키기 못합니다. 사람을 돌이키지 못합니다. 부드러운 메시지는 사람을 하나님 앞에 올바로 세우지 못합니다. 진정한 믿음의 삶으로 인도하지 못합니다. 그렇다면 서위 치는 설교를 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흔히 말하는 강하게 설교하라는 말도 아닙니다. 설교는 하나님의 길을 전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길과는 상관없이 사람들이 듣기를 원하는 소위 축복의 메시지만 전하는 메시지는 절대 사람을 변화시키지 못합니다. 그래서 예레미야 시대에 이렇게 말합니다. “저들이 내 회의에 참여했더라면 내 말을 저희에게 들려서 내 백성들을 악한 길에서 돌이키게 했을텐데”

이 말씀을 정확하게 볼 수 있는 곳이 에스겔서입니다. 거기 보면 적나라하게 드러냅니다. 이스라엘 나라가 바벨론에 의해 세 차례에 걸쳐 포로로 잡혀갑니다. 605년 597년 586년입니다. 597년에 포로로 잡혀간 사람중에 한 사람이 에스겔입니다. 바벨론에서 예언한 사람입니다. 

겔13장 8절-16절을 봅시다. "그러므로 나 주 여호와가 또 말하노라 너희가 허탄한 것을 말하며 거짓된 것을 보았은즉 내가 너희를 치리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 그 선지자들이 허탄한 묵시를 보며 거짓 것을 점쳤으니 내 손이 그들을 쳐서 내 백성의 공회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며 이스라엘 족속의 호적에도 기록되지 못하게 하며 이스라엘 땅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리니 너희가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 이렇게 칠 것은 그들이 내 백성을 유혹하여 평강이 없으나 평강이 있다 함이라 혹이 담을 쌓을 때에 그들이 회칠을 하는도다 그러므로 너는 회칠하는 자에게 이르기를 그것이 무너지리라 폭우가 내리며 큰 우박덩이가 떨어지며 폭풍이 열파하리니 그 담이 무너진즉 혹이 너희에게 말하기를 그것에 칠한 회가 어디 있느뇨 하지 아니하겠느냐 그러므로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분노하여 폭풍으로 열파하고 내가 진노하여 폭우를 내리고 분노하여 큰 우박덩이로 훼멸하리라 회칠한 담을 내가 이렇게 훼파하여 땅에 넘어뜨리고 그 기초를 드러낼 것이라 담이 무너진즉 너희가 그 가운데서 망하리니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 이와 같이 내가 내 노를 담과 회칠한 자에게 다 이루고 또 너희에게 말하기를 담도 없어지고 칠한 자들도 없어졌다 하리니 이들은 예루살렘에 대하여 예언하여 평강이 없으나 평강의 묵시를 본다 하는 이스라엘의 선지자들이니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셨다 하라”

평강의 메시지를 무엇으로 비유합니까? 무너지는 담을 가리기 위해서 회칠을 하여 견고한 담처럼 보이게 하는 것으로 비유합니다. 부드러운 메시지가. 하나님의 심판이 올 때 그 회칠이 전혀 도움이 되지 못할 것을 말합니다.

에스겔서 22장에 보면 또 나옵니다. 25-31절입니다. "그 가운데서 선지자들의 배역함이 우는 사자가 식물을 움킴 같았도다 그들이 사람의 영혼을 삼켰으며 전재와 보물을 탈취하며 과부로 그 가운데 많게 하였으며 그 제사장들은 내 율법을 범하였으며 나의 성물을 더럽혔으며 거룩함과 속된 것을 분변치 아니하였으며 부정함과 정한 것을 사람으로 분변하게 하지 아니하였으며 그 눈을 가리워 나의 안식일을 보지 아니하였으므로 내가 그 가운데서 더럽힘을 받았느니라 그 가운데 그 방백들은 식물을 삼키는 이리 같아서 불의의 이를 취하려고 피를 흘려 영혼을 멸하거늘 그 선지자들이 그들을 위하여 회를 칠하고 스스로 허탄한 이상을 보며 거짓 복술을 행하며 여호와가 말하지 아니하였어도 주 여호와의 말씀이라 하였으며 이 땅 백성은 강포하며 늑탈하여 가난하고 궁핍한 자를 압제하였으며 우거한 자를 불법하게 학대하였으므로 이 땅을 위하여 성을 쌓으며 성 무너진 데를 막아 서서 나로 멸하지 못하게 할 사람을 내가 그 가운데서 찾다가 얻지 못한 고로 내가 내 분으로 그 위에 쏟으며 내 진노의 불로 멸하여 그 행위대로 그 머리에 보응하였느니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

회칠한 것을 사람의 영혼을 삼키는 것으로 표현합니다. 얼마나 두려운 내용입니까?

이것을 보면 부드러운 메시지는 결코 사람들을 변화시키지 못함을 볼 수 있습니다. 부드러운 메시지로 사람들의 마음을 높아지게 해서 헛된 자만 가운데 빠지게 해서 자기가 처한 상황도 인식하지 못하게 해서 심판받게 하는 것을 영혼을 삼키는 것으로 말합니다. 그리고 그런 메시지는 심판을 막지 못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또 하나 볼 수 있는 것은 신앙이 타락할수록 하나님의 메시지는 강해집니다. 여러분이 부모라고 할 때 자녀를 사랑하지 않는 부모가 없습니다. 자녀가 멸망의 길로 가면 잘한다 축복이다 복주고 복주리라고 하겠어요.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나중은 창대하리라고 하겠어요. 멸망의 길로 가고 있는데. 그럴 부모가 없습니다. 그것을 생각하면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을 떠날 때 얼마나 메시지가 강해지는가 볼 수 있어요.


렘23장 29절에서 말합니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 말이 불 같지 아니하냐 반석을 쳐서 부스러뜨리는 방망이 같지 아니하냐” 이렇게 해서라고 돌이키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호세아시대입니다. "에브라임아 내가 네에 어떻게 하랴 유다야 내가 네에 어떻게 하랴 너희 인애가 아침 구름이나 쉬 없어지는 안개 같도다......

마태복음 23장에서 바리새인들에게 화로다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해서라도 돌이키기를 원하십니다.

그런데도 신앙이 타락하면 온통 관심이 자기 탐심과 목적을 이루기 원하기 때문에 이런 메시지를 전혀 원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예레미야 시대 사람들이 하나님중심적인 메시지를 부담스러워했고 똥 보듯이 피했어요. 오늘날의 성도들의 모습입니다. 자기들의 목적을 이루는 데만 관심이 있습니다.

2)사람을 두려워함이 가득 합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을 경외함이 없습니다.
예레미야 시대만 해도 저들이 탐심이 가득하여 평강이 없는데 평강하다고 외쳤어요. 축복이 평강이 저들이 원하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저들의 상태와 상관없이 하나님중심적인 삶을 살면 하나님이 함께하시겠다고 하셨는데 하늘과 땅을 증인 삼아 말씀하셨는데. 세상의 방법 자기 방법으로 살면서 그저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을 원하니까 이렇게 그들 역시 동일하게 탐심이 가득해서 그들이 원하는 메시지를 전했어요. 그러니까 사람을 두려워한 것입니다. 사람의 욕심을 채운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바리새인에게 말씀합니다. 너희가 서로 영광을 구하고 유일하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광을 구하지 아니하니 어찌 나를 믿겠느냐. 여러분 오늘날 우리의 예배를 보세요. 메시지 뿐아니라 모든 면에서 너무나 사람중심적입니다. 진짜 이것을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것인가에는 관심도 없고 어떻게 하면 사람들을 감동시키고 다시 오게 하고 그래서 우리 교회가 부흥하게 할 것인가에 관심이 있습니다. 


메시지 뿐아니라 순서 시간에서 그럽니다. 성가대만 해도 그렇습니다. 원래 성가대 아삽의 무리는 사람에게 찬양하던 자가 아니라 하나님을 경배하던 자였습니다. 그런데 오늘날은 사람들에게 은혜를 끼치기 위해서 노래합니다. 그래서 성가대원들을 돈을 주고 사옵니다. 독창자를 돈을 주고 사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얼마나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예배하는 가는 중요한 것이 아니고 얼마나 노래를 잘해서 사람들에게 얼마나 감동을 주는가에 관심이 있습니다. 그러면서 그것을 예배라고 합니다. 

로이드존스 목사님은 이것이 성령을 소멸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여러분 사람을 두려워하는 것으로는 절대로 하나님과 동행할 수 없습니다. 초대왕 사울은 사람들을 두려워했습니다. 하나님의 경외함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것보다 사람들이 흩어지는 것을 더 두려워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버림받았습니다. 그 중심에 개인적인 야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3)조건없는 섬김이 없습니다. 진정한 섬김이 없습니다.
기복신앙에서도 종교적인 헌신과 희생은 가득할 수 있습니다. 이사야 시대를 보세요. 예레미야 시대를 보세요. 바리새인들의 종교적인 희생과 헌신을 보세요. 엘리만 해도 자기 두 아들의 죽은 소식보다 언약궤를 빼앗겼다는 소식을 들은 것이 충격이 클만큼 종교적으로 헌신적인 사람이었습니다. 기복신앙에서도 종교적인 희생과 헌신은 가득할 수 있습니다. 신앙에 대한 이해가 왜곡되어서 의식이 본질을 대체해버리기 때문에 의식이 뛰어나면 신앙생활을 잘하는 것으로 이해합니다.

그런데 기억해야할 것은 기복적인 섬김은 하나님 앞에서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자주 예를 듭니다. 남자가 있어요. 재벌 외동딸이 있어요. 자기는 가난하게 사는 것이 싫어요. 그래서 빚을 내서도 잘해줍니다. 그런데 목적을 결혼 후에 얻게 될 부와 명예를 위해서 그럽니다. 그럴리 없겠지만 예를 들어서 이런 일이 있다면 이 여자가 그 남자와 결혼하겠어요. 이것은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기복적인 섬김은 하나님 앞에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그래서 이사야 시대의 그 엄청난 의식을 보고 하나님이 싫어한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시대에 하나님이 그 번제를 받지 않겠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진정한 섬김은 조건없는 섬김입니다. 예수님처럼 아버지를 사랑하기 때문에 아버지 일이 내 일이 되는 것입니다. 순종하면 주어질 복 때문이 아니라 아버지를 사랑하기 때문에 아버지의 일이 내 일이 되는 것입니다. 그분의 뜻이 내 뜻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섬김입니다. 이렇게 아버지 일에 동참하는 분들이 오늘날 몇 분이나 됩니까? 예를 들어서 건축헌금을 할 때 건축헌금하면 하나님이 복주셔서 사업이 잘되고 자녀가 잘되기 때문에 동기부여해서 헌금을 걷고 그러지요. 


그런데 이런 것하고는 상관없이 그저 아버지를 사랑해서 아버지 일이 내 일이라는 믿음으로 건축헌금에 동참하는 분이 몇 분이나 되겠어요. 우리들도 마찬가지일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으러 온다고 할지 모르지만, 우리가 기복신앙에 빠져있다면 자기가 은혜받는 일에 관심이 있지 아버지 일에 동참하는 것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그래서 이런 기복신앙의 예배는 자기 목적의 성취를 위해 나가는 예배입니다. 


자기 문제 해결을 위해 새벽기도하고 자기 서원성취를 위해 작정기도하고 좋은 대학 자녀가 들어가게 해달라고 금식기도합니다. 자기 사업 잘되게 해달라고 밤마다 나와서 기도합니다. 진정으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주의 나라를 붙들고 주 앞에 서는 자는 적습니다. 모든 것이 다 조건있는 섬김입니다. 하나님을 빠징꼬 기계 취급합니다. 이것이 기복신앙의 예배의 특징입니다.

어리석은 그것입니다. 예수님이 여러 차례 말씀하셨지요. 누구든지 얻고자 하는 자는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인하여 자기를 잃으면 얻을 갓이라고 하셨어요. 그러니 여러분 한번 해보세요. 여러분 인간적인 방법과 수단으로 세상의 방법을 동원해서 목적을 이룬다고 해서 하나님이 이루신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해서 이룬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이 하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생명이 함께하지 않습니다. 오늘날 대부분의 성도들의 삶처럼.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을 목적삼고 하나님의 뜻을 알고 그 일에 전 존재로 동참하고 아버지의 일이 이루어지를 위해 살면 그들에게 하나님이 함께하시고 하나님의 생명이 함께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얻고자 하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잃으면 얻으리라.

4)기복신앙에서는 선별적인 순종이 가득합니다.
자기 목적을 위해 살기 때문에 순종도 자기 목적을 위해서 선별적으로 합니다. 자기에게 유익이 되는 것은 순종하고 그렇지 않으면 무시합니다. 사울왕이 그랬습니다. 그 당시 왕의 목을 백성 앞에서 밟는 것이 승전의 행사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보다 사람들 앞에서 자기 이름이 높아지는 것이 더 중요했습니다. 벌써 사무엘이 사울을 만나러 갔을 때 기념비를 쌓고 있잖아요. 그래서 선별적인 순종을 한 것입니다.

5)기복신앙에서는 세상사랑이 다루어지지 않습니다.
성경에서는 세상사랑이 탐심이며 영적인 간음이라고 합니다. 하나님과 원수되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기복신앙의 핵심은 자기 목적을 이루는 것이고 하나님은 자기 목적을 위한 수단에 불과하기 때문에 그곳에서는 탐심이 다루어지지 않습니다. 오늘날 하나님의 교회에 탐심이 가득한 것은 기복신앙이 가득하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기복신앙에서는 하나님의 이름과 세상사랑과 탐심을 부추깁니다. 그리고 타락하면 축복의 개념이 바뀝니다. 


세상에서 돈 버는 것이 축복이 됩니다. 돈많이 버는 것이 저주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돈많이 버는 것이 반드시 축복은 아닙니다. 안믿는 사람들 중에도 돈많이 버는 자들이 많습니다. 돈많이 버는 것이 축복이라면 라오디게아 교회는 복받은 교회입니다. 나는 부자로 부요하여 부족함이 없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교회는 후하신 하나님의 눈으로 보아도 칭찬한마디 없습니다.

렘12:1-2절을 보면, 심판이 코 앞에 온 상황에서도 최소한 일부 사람들은 세상적으로 잘되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축복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신앙이 타락하면 기복주의에서는 자기 목적 세상적인 목적을 이루는 것이 축복이기 때문에 세상적으로 잘되는 것이 목적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자랑합니다. 하나님의 임재는 걷혔고 하나님과 교제도 걷혔고 하나남의 목적 의도는 모른 채 시기와 질투가 가득한 채 음란과 사술을 가득한 채 사업 잘되면 축복받았다고 생각합니다. 그것밖에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그것이 기복신앙입니다.

오늘 저는 기복신앙의 예배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여러분이 보이실 것입니다. 우리의 타락한 예배에서 회복되기를 축복합니다. 아멘

제15강 율법주의 예배 - 여주봉목사

갈2:16절 이하입니다.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아는 고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에서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17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게 되려 하다가 죄인으로 나타나면 그리스도께서 죄를 짓게 하는 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18 만일 내가 헐었던 것을 다시 세우면 내가 나를 범법한 자로 만드는 것이라 19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향하여 죽었나니 이는 하나님을 향하여 살려 함이니라”

오늘은 율법주의 예배에 대해서 살펴볼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예배회복을 시리즈로 살펴보고 있습니다. 예배회복이 절실합니다. 예배가 회복되려면 중요한 한 가지가 예배에 대한 그릇된 이해에서 나온 거짓신앙체계의 예배가 버려져야 합니다. 그리고 성경이 말하는 참된 예배가 추구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성경이 말하는 참된 예배를 추구하기에 앞서서 우리가 반드시 버려야할 거짓신앙체계의 예배를 살펴보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거짓신앙체계를 올바로 이해하려면 거짓신앙체계를 올바로 이해해야 지난 주에 살펴보앗습니다. 

오늘부터는 거짓신앙체계의 예배를 하나하나씩 살펴볼 것입니다. 오늘은 첫 시간으로 율법주의 예배에 대해서 살펴볼 것입니다. 거짓신앙체계는 자가중심적인 삶에 기초한 신앙에 대한 왜곡된 이해입니다.‘신앙의 모조품입니다. 하나님의 생명이 없습니다. 거짓신앙체계의 중요한 한 축이 율법주의입니다. 율법주의는 거짓신앙체계의 이론을 제공합니다. 크게 두 가지를 살펴볼 것입니다. 하나는 율법주의이고 또 하나는 율법주의 예배입니다.

1.율법주의
율법주의는 자기의 종교적인 헌신이나 행실에 의지해서 하나님 앞에 서고자 하는 것입니다. 성경적인 용어로 말하면 행함으로 말미암는 의를 의지하는 자세입니다.

1)율법주의는 가치관입니다.
율법주의를 이해할 때 반드시 가져야할 것은 율법주의는 가치관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행동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행동의 배후에 있는 가치관입니다. 율법주의가 신앙에 대한 왜곡된 이해인데, 율법주의는 어떤 행동의 배후에 있는 가치관을 말합니다. 율법주의는 가치관입니다. 

여기에 대한 좋은 예가 오늘 읽은 본문입니다.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 예수로 말미암은 줄 아는 고로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나니 우리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 의롭다함을 얻음이니라 율법의 행위로 의롭다함을 얻을 육체가 없다. 우리 구원과 신앙을 위해 중요한 구절입니다. 이 말은 누가 누구에게 한 말입니까? 사도바울이 베드로에게 한 말입니다. 바울은 이방인을 위한 사도이고 베드로는 유대인을 위한 사도입니다. 바울이 같은 사도를 꾸짖으면서 하는 말입니다.

11절을 보면 게바가 안디옥에 이르렀을 때에 책망받을 일이 있어서 대놓고 책망했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 행함으로 의롭데 될 사람이 아무도 없다고 하며 책망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행함으로 의롭게 됨을 가르쳤기 때문에 책망을 한 것이 아닙니다. 성경을 보면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것을 제일 먼저 가르친 사람이 베드로입니다. 이방인에게 제일 먼저 보냄받은 사람이 베드로입니다. 그때 베드로는 행함으로 말미암은 의를 전하지 않고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를 전했습니다.

뿐만아니라 행15장을 보면 예루살렘회의가 있습니다. 유대인뿐아니라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할 때 복음 뿐아니라 유대인의 전통을 지키게 할 것인가 말것인가를 가지고 회의를 합니다. 이때 유대인의 전통이 중요하지 않고 복음으로 충분하다고 말한 사람이 베드로입니다. 이처럼 베드로는 누구보다 더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를 전파하고 가르친 사람입니다.
그런데 왜 바울은 베드로에게 이 말을 가지고 책망하는 것입니까?

12절 이하에 보면 이렇게 말합니다. "야고보에게서 온 어떤 이들이 이르기 전에 게바가 이방인과 함께 먹다가 저희가 오매 그가 할례자들을 두려워하여 떠나 물러가매 13 남은 유대인들도 저와 같이 외식하므로 바나바도 저희의 외식에 유혹되었느니라”

갈라디아 교회는 이방인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갈라디아교회에서 베드로가 식사할 때 이방인들과 함께 식사중인데 야고보에서 사람들이 왔습니다. 예루살렘 교회에서사람들이 왔습니다. 예루살렘 교회는 유대그리스도인들로 구성된 교회였고 이들 중에서는 유대전통을 지키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 전통중에 하나가 이방인들을 부정한 것으로 여겨서 함께 식사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이방인들과 함께 식사하고 있다가 예루살렘에서부터 사람이 오니까 저들에게 자신이 어떻게 비추어질까 또 예루살렘 교회에 가면 저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해서 그것이 두려워서 앉아 있다가 따로 앉았습니다. 그랬더니 베드로와 같이 있었던 유대기독교인들이 따로 앉았고 심지어 바나바마저 따로 앉았습니다. 이것을 두고 바울이 그 많은 사람 앞에서 강력하게 책망하는 것입니다. 당신은 왜 외식하느냐? 복음의 진리를 따라 행하지 않느냐? 고 한 것입니다. 책망의 내용이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오직 믿음으로 되는데 행함으로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닌데 왜 당신은 행함으로 의롭게 되는 것처럼 행하냐고 합니다. 

오늘날 한국교회에서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없어요. 기껏해봐야 구원받을 때 우리가 믿음으로 구원받지 행함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 구절은 구원에 대해서 하는 말이 아니라 바울이 베드로를 책망하면서 하는 말입니다. 베드로가 함께 식사하다가 따로 옮긴 행동의 배후에 있는 가치관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이방인과 함께 식사하면 안되는가? 아닙니다. 이방인과 따로 식사하면 안되는가? 아닙니다. 따로 식사해도 문제가 없고 같이 식사해도 문제가 없습니다. 


문제는 같이 식사하다가 따로 옮긴 행동의 배후에는 가치관이 있습니다. 어떤 특정한 종류의 사람들과 식사하는 것이 자기를 부정하게 만든다는 가치관 또 그들과 함께 식사하지 않는 것은 자기를 거룩하게 만든다는 가치관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너무나 타락한 율법주의입니다. 아무리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된다고 가르치더라도 이런 행동을 하면 그 사람은 행함으로 의롭게 된다는 가치관의 토대에서 일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해되세요? 그래서 사도바울이 이처럼 강력하게 사람들 앞에서 베드로를 책망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사건이 성경에 기록되도록 성령께서 감동하신 것입니다. 그 이유는 그만큼 우리 삶 속에 율법주의적인 가치관이 팽배하기 때문입니다. 다 말로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된다고 말하지만 예배 시간에 외부적인 순서 하나만 바꾸어도 난리가 납니다. 그 하나 때문에 예배가 참된 예배가 되고 그렇지 않으면 참된 예배가 아닌 것처럼 생각합니다. 전혀 엉뚱한 이해 가운데 있습니다. 이처럼 기억하실 것은 율법주의는 가치관입니다. 누구보다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를 전했어요. 베드로는. 그런데 지금 이 행동의 배후에는 전혀 믿음으로 말미암은 행동이 아니라 행함으로 말미암는 의를 반영하는 행동이었다는 것입니다. 복음의 진리를 따라 행하지 않는 복음을 대적하는 외식하는 행위였습니다.

2)율법주의는 한 마디로 말해서 ‘육신’을 의지해서 서는 것입니다.
어느 시대건 신앙이 타락하면 거짓신앙체계가 전면에 나섭니다. 예레미야 시대에 하나님의 심판이 실제로 임한 시대말적인 상황이었습니다. 예레미야서를 보면 거짓신앙체계가 전면에 나섭니다. 율법주의 기복주의 인본주의가 가득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레미야서에서 우리는 율법주의의 전형적인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렘7장 1절 이하입니다. "여호와께로서 예레미야에게 말씀이 임하니라 가라사대 2 너는 여호와의 집 문에 서서 이 말을 선포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 경배하러 이 문으로 들어가는 유다인아 다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 3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 길과 행위를 바르게 하라 그리하면 내가 너희로 이 곳에 거하게 하리라”


4절"너희는 이것이 여호와의 전이라, 여호와의 전이라, 여호와의 전이라 하는 거짓말을 믿지 말라”

8절"너희가 무익한 거짓말을 의뢰하는도다”
11절"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이 집이 너희 눈에는 도적의 굴혈로 보이느냐 보라 나 곧 내가 그것을 보았노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12절부터 보면 율법주의가 나옵니다."너희는 내가 처음으로 내 이름을 둔 처소 실로에 가서 내 백성 이스라엘의 악을 인하여 내가 어떻게 행한 것을 보라”


14절을 보면 그들이 성전을 믿었습니다.

여기보면 예레미야 시대에 성전을 하나님이 심판하시겠다고 합니다. 그렇게 하시면서 너희가 믿는 이 집에 이렇게 하겠다고 합니다. 다시 말해서 예레미야 시대의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을 믿은 것이 아니라 성전을 믿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율법주의적인 가치관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의식을 믿은 것입니다. 가짜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 타락한 인간들 어떻게 하나님을 믿어야지 성전을 믿냐? 그럴 수 있습니다. 

여러분 오늘 교회에 올 때 하나님께 예배드리러 오지 않고 교회에 예배하러 오신 분 손들어 보세요? 여러분 누구에게 예배하러 왔어요? 하나님께 예배하러 왔지요. 그래서 우리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으니까 저들과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아니요. 그 이야기가 아닙니다. 여러분 그 당시에 안식일날 하나님께 예배하러 왔는데 하나님을 믿지 않고 성전에게 예배하러 왔다고 생각하세요? 이 말씀의 의미를 하려면 아까 실로에서 행함같이처럼 실로가 가봐야 합니다. 


실로에서 보면 이스라엘이 블레셋과 전쟁을 하지요. 그런데 그 전쟁에서 패배합니다. 그랬더니 장로들이 어찌하여 여호와께서 패배하게 하셨는고 합니다.


여러분 이스라엘이 진 것이 그들이 잘못입니까? 하나님 잘못입니까? 그들이 전쟁에서 패배한 이유는 이스라엘이 성경이 말하는 신앙의 본질에 서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신앙의 본질에 서면 군사력에 상관없이 항상 승리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하나님의 길에서 떠나 자기중심적인 삶으로 전락하면 이것이 하나님을 버린 것인데 그러면 하나님도 저들을 버려 패배했고 하나님의 생명이 걷혔습니다. 이들에게는 종교적인 의식은 많았지만 신앙의 본질에서 떠났었습니다. 그래서 저들이 진 것은 그것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생명이 걷혔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장로들 즉 지도자들인데, 백성의 장로들이 하나님이 왜 우리에게 패배를 주셨는가 합니다.

오늘날도 너무나 많은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관점에서 하나님을 떠났기 때문에 하나님의 생명이 걷혔는데 그 책임을 하나님께 전가합니다. 장로들이 하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면서 그들이 꾀를 냅니다. 아이디어를 냅니다. 언약궤를 가지고 전쟁에 출전하여 그것으로 승리를 얻자고 합니다.

언약궤를 가져올 때 저들이 환호성을 질렀습니다. 그 이유는 이제는 이겼다 싶으니까. 하나님의 언약궤가 우리 가운데 함께하니 이제는 이겼다 싶으니까. 함성 소리를 듣고 블레셋 사람이 두려워합니다. 그러면서 그들이 하는 말이 싸우라 해서 블레셋 사람들이 승리합니다. 하나님의 궤를 빼앗기도 패배합니다. 이길 줄 알고 함성까지 질렀고 블레셋 사람까지 두려워했는데 졌습니다. 


왜 그럽니까? 여기보면 블레셋 사람들도 모세와 여호수아 시대의 하나님의 역사를 들었던 같습니다. 그러면 모세와 여호수아 시대에 하나님의 언약궤가 함께하면서 놀라운 일을 하셨는데, 하나님의 언약궤가 함께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함께하신 것입니까? 언약궤를 메고 갔기 때문에 요단강이 갈라졌고 여리고성이 무너졌습니까? 아닙니다. 모세만 여호수아만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그리고 전 존재를 다해 하나님께 순종하는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 가운데 사는 과정에서 하나님이 말씀하는 과정에서 순종했더니 강이 갈라지고 승리하는 복을 누렸습니다. 


이방인들도 아는 승리를 누렸습니다. 그런데 엘리 제사장 시대는 지금 말하는 신앙의 본질에서 떠나 있었습니다. 종교적인 의식은 많았지만. 하나님의 길로 행하는 것에서 떠나 있었고 자기중심적인 삶으로 타락하였습니다. 그들이 사는 길은 하나님중심적인 삶으로 돌이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돌이키기는커녕 언약궤를 가지고 나가면 이길 줄 알았어요. 그래서 이제는 이길 줄 알고 함성도 질었지만 결국 실패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아무리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할지 모르지만 실제로는 하나님을 믿은 것이 아니라 언약궤를 믿은 것입니다. 이것이 가짜신앙입니다. 이것이 율법주의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삼상4장 14절에서 말합니다. "엘리가 그 부르짖는 소리를 듣고 가로되 이 훤화하는 소리는 어찜이뇨 그 사람이 빨리 와서 엘리에게 고하니” 그들이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할지 모르지만 그들의 행동의 소리는 언약궤를 믿는 것이었습니다. 언약궤로 우리를 구원하게 하자!

여러분 다시 예레미야 시대로 돌아옵니다. 예레미야 시대에 의식이 많았습니다. 시바와 원방에까지 가서 특별한 향품을 사다 하나님께 드릴만큼 헌신적이었습니다. 안식일이면 수많은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삶은 철저하게 자기중심적인 삶으로 전락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관점에서는 렘2장 14절입니다. "이스라엘이 종이냐 씨종이냐 어찌하여 포로가 되었느냐” 이들이 살 길은 하나님을 알고 존재를 다해 사랑하는 것으로 돌이키는 것입니다. 신앙의 본질로 돌이키는 것입니다. 그들은 돌이키지 않고 그런 삶을 살면서 하나님이 거하신다고 믿는 예루살렘 성전에서 성대한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지켜줄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말로는 하나님께 드린다고 했지만 실제로는 성전에게 드린 것입니다. 이것이 가짜신앙입니다. 이것을 두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오늘날 주일날 예배드리러 교회에 오시는 분들 중에 교회에게 예배드리러 왔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자기는 하나님을 안믿고 교회를 믿는다고 하는 사람이 있다면 정신 나간 사람일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하나님백성들이 인격체이신 하나님을 알고 존재를 다해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신앙의 본질 가운데 사는 삶을 살 때 거기에 하나님의 생명이 넘치게 되어있는데 전혀 그런 삶을 살지 않으면서 하나님의 관점으로 보았을 때는 하나님을 떠나있으면서 주일날 하나님께 나와 예배를 드렸으니 하나님이 내 소원을 들어주시고 내 가족을 보호하시고 잘되게 하시고 내 문제를 해결해주실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이처럼 너무나 타락한 것이고 교회를 예배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다른 사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무서운 것이 영적분별력이 없다는 것입니다.

실로 시대를 보세요. 엘리 시대를 보세요. 백성의 장로들 엘리 제사장 엘리의 아들들이 영적으로 철저하게 눈이 멀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의 상태를 영적으로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관점으로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을 천리만리 떠나있는데 의식만 잘한다고 신앙생활을 잘한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떠나 있으니까 전쟁에서 패배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생명이 걷혀있으니까. 그런데 하나님의 관점이 가려지니까 왜 졌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니 해결책을 모릅니다. 기껏해야 해결책을 냈는데 율법주의입니다.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이 아니라 종교적인 의식을 의지하면 될 것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무슨 말인지 아시죠? 이처럼 타락했어요.

예레미야 시대는 엘리 시대의 이야기를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똑같은 상태에 있었어요. 종교적인 의식은 있었지만 삶은 신앙의 본질에서 떠나 하나님과 상관없는 삶을 살고 있고 하나님의 심판이 코 앞까지 닥쳐 있었어요. 과거에 잘못된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런데 자기들의 문제는 조금도 모르고 있습니다. 영적으로 눈이 어두워졌기 때문입니다. 전혀 모르는 것입니다.

더 무서운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 시대에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고 부활하기 이전이니까 아직 구약시대입니다. 그때 예루살렘 성전에서 제사가 성경대로 드려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들어가서 쫓아냅니다. 짐승을 쫓고 돈상을 뒤엎으십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입니다. 너희는 내 아버지의 집을 도적의 소굴로 만들었다고 합니다. 이 말씀은 아까 읽은 렘7장 11절의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 시대의 종교 지도자들의 예배가 예레미야 시대와 정확하게 똑같다는 말씀입니다. 종교적인 의식은 아무리 많았을지라 모르지만 그 삶은 철저하게 신앙의 본질에서 떠나 있었습니다.

그러니 보세요. 삶이 하나님을 떠나니까 안다루어집니다. 그래서 강도의 굴혈로 만들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만 해도 이것이 독점이잖아요. 그러니 얼마나 돈을 많이 벌었겠어요. 제사장들이 결탁되어 있었어요. 바리새인들은 엘리 제사장의 사건 뿐아니라 예레미야 시대의 내용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우리 조상들이 하나님을 믿어야 하는데 하나님을 안믿고 성전을 믿어서 하나님의 심판을 자초했다고 설교했을지도 모릅니다. 자기들은 하나님께 예배드리고 자기들은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자기들은 그들과 다르다고 생각했는데 하나님의 관점에서 똑같았습니다.

오늘날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우리는 엘리 제사장의 문제도 압니다. 예레미야 시대의 사건도 기억합니다. 예수님 시대의 바리새인들의 삶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너무나 똑같습니다. 그런데 몰라요. 분별력이 어두어져서 그럽니다. 성경을 하나님의 관점으로 보지 못하고 자기식대로 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성전을 강도의 굴혈로 만들었으니 심판이 오지. 우리에게는 신약시대니까 성전이 있냐 뭐가 있냐 우리와 상관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너무나 똑같습니다. 이것이 율법주의이고 가짜입니다. 육신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육신이 될 수 있는 것은 수없이 많습니다. 의식도 될 수 있어요. 시간이 있으면 좀더 자세하게 설명해야 되는데. 십자가 복음 책에 보면 나와 있습니다. 읽어보세요. 의식도, 자기의 종교적인 헌신이나 열심도, 성경적인 지식도 성령의 은사 사회적인 영향력 세상적인 축복도 육신이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으로 인해서 자부심이 생기면 실제로는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그것을 의지하게 됩니다. 이처럼 율법주의는 육신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혹은 의식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2.율법주의 예배
율법주의 예배를 잘 이해하기 위해서 위에서 한 내용을 잘 기억해야 합니다. 율법주의의 여러 형태들. 율법주의는 하나는 의식이 본질을 대체해버리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교리가 인격체를 대체하는 것이며, 이론이 실제를 대체하는 것이고 가르치는 것이 삶을 대체해버리는 것입니다. 의식이 중요합니다. 


그런데 의식들은 하나님을 알고 존재를 다해 사랑하는 수단입니다. 그런데 신앙이 타락하면 의식은 수단인데 의식 자체를 잘하는 것이 본질이 됩니다. 그것이 이사야 시대 예레미야 시대 바리새인의 모습입니다. 성경적인 교리가 중요합니다. 너무나 중요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리 자체가 목적이 아니고 교리는 살아계신 인격체이신 하나님과 실제적인 교제를 누리게 하는 수단입니다. 교리적으로 잘 아는 것이 신앙생활을 잘 아는 것으로 여깁니다. 


바리새인들처럼. 이들은 교리적으로 뛰어났기 때문에 자기들은 랍비요 인도자요 선생이라고 자부했는데 살아계신 인격체이신 하나님을 전혀 몰랐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적도 없고 하나님의 영광을 본 적도 없어요. 그래서 예수님은 너희가 소경이라고 했습니다. 율법주의는 교리가 인격체를 대체해버린 것입니다. 교리를 잘 아는 것이 신앙생활 잘 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이론이 실제를 대체해버린 것입니다. 우리 신앙은 성경에서 나오는 수많은 인물들이 살았던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해서 말씀하셨던 삶을 실제로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실제적인 교제입니다. 하나님의 실제가 함께하는 것이 우리안에 하나님의 생명이 넘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에 관한 이론이 교리가 실제를 대체해버립니다.

예를 들면,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를 응답하시는 줄 믿습니까? 그러면 당연히 믿지요. 하면서 이것을 뒷받침하는 성경 구절을 많이 댈 것입니다. 그런데 실제로 삶에서 하나님이 그들의 기도를 들어서 응답하시는 일이 거의 없어요. 이것은 가짜입니다. 이것이 이론이 실제를 대체해 버린 율법주의입니다.

또 하나는 가르침이 삶을 대체해버린 것입니다. 자 그래서 제가 여러분에게 율법주의를 잘 이해하기 위해서 교리가 인격체를 대체한 것이다. 이론이 실제를 대체한 것이다. 가르침이 삶을 대체한 것이다고 했어요. 다 같은 말입니다.

또 하나 이해하기 쉽도록 율법주의의 특성은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보다 교리를 강조합니다. 마음의 자세보다 외부적인 복종을 강조합니다. 성령의 임도를 따르는 것보다 규례와 규칙을 따르는 것을 강조합니다. 그래서 율법주의는 필연적으로 우리 신앙을 일정한 규칙을 지키는 것으로 전락시킵니다.

어떤 사람은 저에게 그런 말을 해요. 목사님의 설교는 너무 어려워서 쉽게 말해주세요 합니다.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 하니까 너무나 추상적이라는 것입니다. 우리 신앙을 예를 들면 성수주일 잘하고 십일조 잘하고 기도 많이 하고 성경 많이 읽고 등등 몇 가지 잘하는 것으로 말하면 손에 잡히는데 보이는데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 하니까 너무나 추상적이고 어렵다고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우리 신앙은 몇 가지 규칙을 지키는 것이 아닙니다. 율법주의가 그렇게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그 당시 613가지 규칙을 만들어 놓고 지켰습니다. 너무나 철저하게 지켰는데 그것은 신앙이 아닙니다. 율법주의가 그렇게 신앙을 전락시킨 것입니다. 성경책은 법조문이 아닙니다 법은 죽이는 것입니다. 성경책에는 여러분에게 약속시간에 어떻게 지켜야 하는지 등등의 규칙을 말하지 않아요. 성경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길을 말하고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의 관점과 길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안에 있어야 하나님의 관점이 보입니다. 그런데 율법주의는 몇 가지 규례와 규칙을 지키는 것으로 전락시킵니다.

그러면 율법주의 예배를 살펴봅니다.
1)율법주의에서는 예배가 하나의 절차로 전락합니다.
율법주의가 우리의 신앙을 일정한 규례와 규칙을 잘 지키는 것으로 전락하니까 율법주의에서는 예배를 하나의 절차로 전락시킵니다. 율법주의에서는 주일날 교회에 나와서 주보에 나와있는 순서를 마치고 돌아가면 예배를 잘 드리는 것으로 전락시켜 버립니다. 그것이 예배가 아닌데. 순서는 중요하지만 순서는 이것을 통해 하나님을 보고 하나님의 영광을 알고 하나님의 목적을 보고 하나님의 길을 알아 우리 삶을 조정해서 하나님이 길로 행함으로 하나님과 동행하고 하나님을 경험하기 위한 수단인데 율법주의에 빠지면 예배를 순서를 마치는 하나의 규칙으로 전락시켜 버립니다. 그래서 순서 마치고 돌아가면 예배 잘 드리고 가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껍데기 뿐인 예배입니다. 하나님과 상관없는 예배입니다.

지금 주일날 낮예배 드리고 점심 먹고 조금 쉬었다가 다시 모이기 힘드니까 저녁예배를 미리 앞당겨 예배를 드리는 경향이 많습니다. 안드리자니 그렇고 그래서 그냥 예배한번 더 떼우는 식으로 드립니다. 이것은 철저하게 타락한 예배입니다. 이처럼 율법주의는 예배만 해도 하나의 절차로 전락시키기 때문에.

2)율법주의의 또 다른 특징은 하나님 그분에 대한 사모함이나 갈급함이 없습니다.
우리 신앙은 살아계신 인격체이신 하나님을 알고 그분의 의중을 알고 그 길을 알고 그 길에 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람들은 하나님을 알기를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를 하나님의 뜻을 알기를 열망했습니다.

시편 42편 1절에서 말합니다.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


시편27편 4절입니다. "내가 여호와께 청하였던 한 가지 일 곧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나로 내 생전에 여호와의 집에 거하여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앙망하며 그 전에서 사모하게 하실 것이라”

빌3장에서 바울은 주님을 아는 것이 가장 고귀하게 여기며 주님을 알고자 달려간다고 합니다.

이처럼 신앙은 하나님을 알기를 열망하여 하나님을 보기를 열망하고 하나님의 목적을 알기를 열망합니다. 예배만 해도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여 나오기 때문에 하나님을 향한 갈급함과 사모함이 있게 됩니다. 그래서 기독교 역사를 보면 부흥의 때마다 그 길을 예비했던 자들은 주님의 영광을 보기를 열망하고 갈급했던 자들입니다. 그런데 신앙이 타락하면 그 열망이 사라지고 그저 순서를 떼우고 돌아가는 것이 예배라고 생각합니다.

로이드존스 목사님은 부흥이라는 책에서 말합니다. 죽은 전통주의에 대해서 말합니다. “종교나 예배는 생명력있는 것이 전혀 없습니다............”

여러분 오늘날 우리들의 예배는 어떠합니까? 이처럼 율법주의에서는 예배가 하나의 순서나 절차를 마치는 것으로 전락합니다.

2)율법주의 예배에서는 절차에 대한 외부적인 복종이 강조됩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원래 예배는 중요한 한 부분이 상한 심령의 예배입니다.
그래서 이사야 57장 15절 이하입니다. "지존 무상하며 영원히 거하며 거룩하다 이름하는 자가 이같이 말씀하시되 내가 높고 거룩한 곳에 거하며 또한 통회하고 마음이 겸손한 자와 함께 거하나니 이는 겸손한 자의 영을 소성케 하며 통회하는 자의 마음을 소성케 하려 함이라 16 내가 영원히는 다투지 아니하며 내가 장구히는 노하지 아니할 것은 나의 지은 그 영과 혼이 내 앞에서 곤비할까 함이니라 17 그의 탐심의 죄악을 인하여 내가 노하여 그를 쳤으며 또 내 얼굴을 가리우고 노하였으나 그가 오히려 패역하여 자기 마음의 길로 행하도다”

66장 1절 이하입니다.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등상이니 너희가 나를 위하여 무슨 집을 지을꼬 나의 안식할 처소가 어디랴 2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의 손이 이 모든 것을 지어서 다 이루었느니라 무릇 마음이 가난하고 심령에 통회하며 나의 말을 인하여 떠는 자 그 사람은 내가 권고하려니와 3 소를 잡아 드리는 것은 살인함과 다름이 없고 어린 양으로 제사드리는 것은 개의 목을 꺾음과 다름이 없으며 드리는 예물은 돼지의 피와 다름이 없고 분향하는 것은 우상을 찬송함과 다름이 없이 하는 그들은 자기의 길을 택하며 그들의 마음은 가증한 것을 기뻐한즉”

보세요. 하나님 앞에 예배하러 나올 때 상한 심령과 애통하는 자세로 나오는 것이 필수입니다. 우리의 신앙을 올바로 이해해야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의 목적을 알고 하나님의 길을 알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길에 우리가 서기를 원한다면 우리 삶에 애통함이 없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우리안에 가난함과 배고픔과 갈급함이 넘칩니다.

그런데 율법주의는 초점이 중심에 있지 않고 절차에 대한 외부적인 복종에 있습니다. 사람들이 어떤 모양으로 와서 어떻게 앉아 있다가 가면 그거면 되는 것입니다. 양복입고 앉아서 점잖게 돌아가면 됩니다. 그들 속에 탐심이 가득한지 우상숭배의 마음이 가득한지 용서하지 않고 미워하는 마음이 가득한지 전혀 고려하지 않습니다. 주일날 예배 안빠지고 와서 예배시간 늦지 않게 와서 순서만 마치고 가면 그것이 예배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헌금만 많이 하고 돌아가면 그것이 예배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너무나 타락한 것입니다. 가짜입니다. 무서운 점이 무엇인지 아세요? 

제가 아까 이사야서 61장 1-2절을 읽었지요. 하나님은 성전에 계시지 않는다. 하늘에 계시는 분이 어떻게 성전에 계시겠느냐? 나는 마음이 가난하고 심령에 통회하고 하나님의 말씀 앞에 떠는 자들과 함께하신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3절이하에서 말합니다. "무릇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 희락의 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시고 그들로 의의 나무 곧 여호와의 심으신 바 그 영광을 나타낼 자라 일컬음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4 그들은 오래 황폐하였던 곳을 다시 쌓을 것이며 예로부터 무너진 곳을 다시 일으킬 것이며 황폐한 성읍 곧 대대로 무너져 있던 것들을 중수할 것이며 5 외인은 서서 너희 양 떼를 칠 것이요 이방 사람은 너희 농부와 포도원지기가 될 것이나”


이 말을 자세하게 읽으면 그 당시 이스라엘 백성이 개의 목을 꺾어 제사를 드렸거나 돼지의 피로 제사를 드렸다는 말이 아닙니다. 이 말씀은 여기 나와 있는 것처럼 그들은 성경대로 어린양을 짐승을 드렸어요. 그런데 그들의 마음은 하나님의 뜻에서 천리만리 떠나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관점에서 본 그들의 제사는 개의 목을 꺾어 드리는 것과 같았고 돼지의 피로 드리는 것과 같았습니다. 우상 앞에 분향하는 것과 다름이 없었습니다. 이 구절을 가지고 한 주석가가 주석을 달아놓았는데 제가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유대인에게 있어서 개란 추잡함이나 경멸스러움을 상징하는 말이기도 했는데 그 목을 꺾어 죽여서 희생제물로 바치는 것은 지극히 혐오스러운 모습을 나타내는 것이다. 또한 돼지를 죽여 제물로 바치는 일 역시 이방제사에서나 행해졌던 혐오스러운 것이다. 그러나 본 구절은 율법이 허용하고 있는 어린양의 제사를 이방인의 제사인냥 부정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2절을 고려하면 이 난제가 쉽게 해결된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제사는 제사의 바른 정신을 깨닫고 그 정신에 입각해서 드리는 제사인데 그 제사란 가난한 마음으로 드리는 제사인데 이런 내면적인 자세를 무시한채 그냥 동물만 잡아서 드리는 제사는 이방인의 제사와 다를 바 없다는 것이다.”

여러분 이렇게 볼 때 오늘날 소위 하나님의 백성들이 주일날 하나님 앞에 드리는 제사를 볼 때 어떻게 드리고 있습니까? 그러면서 우리는 예배회복을 외치고 있습니다.

로이드존스 목사는 말합니다. “침체기에 빠진 교회가 예배의식에 있어서 보다 더 형식적으로 예배형식을 채용하고 공기도서나 .....”

그런데 이렇게 율법주의에 빠지면 그래서 예배를 통해서 애통하고 통회하는 심정으로 나와서 그분의 마음을 구하고 그분의 의중을 구하고 그분의 얼굴을 구하기를 추구하는 것보다 이것은 전혀 고려하지 않는채 그저 순서만 마치고 외부적인 모양을 추구할 때 한 가지 같이 가는 것이 있어요. 그것은 공사상입니다. 율법주의의 핵심은 공사상입니다. 이것 함으로 그 대가로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복주실 것을 기대합니다. 


성경에 의하면 하나님은 독생자까지 아끼지 않고 내어주실 만큼 사랑하셨습니다. 창조하신 목적고 구원하신 목적과 하나님중심적인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중심적인 삶에 함께하시고 그 삶에 하나님의 생명이 넘친다고 말씀하십니다. 


예배만 해도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을 추구하고 하나님의 목적과 길을 추구하여 나오면 하나님이 자신을 알리시고 목적과 길을 알리십니다. 그러면 우리가 순종함으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고 그렇게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 때 우리에게 하나님의 생명이 넘칩니다. 


그런데 율법주의에 빠지면 우리 신앙을 몇 가지 규례와 규칙을 지키는 것으로 전락시킵니다. 그리고 예배만 해도 순서 몇 가지 지키는 것으로 전락합니다. 그리고 이것을 지키는 외부적인 모양을 강조합니다. 그리고 그 대가로 하나님이 복주실 것으로 기대합니다. 너무나 타락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사야 시대 그렇게 철저하게 의식을 지켰고 많은 제사를 드렸고 희생을 드렸고 기도를 많이 했고 금식했어도 그들이 신앙의 본질을 떠나 있었는데도 그렇게 드린 이유는 그렇게 드리면 하나님이 자기들을 지킬 것이고 보호하실 것이고 복주실 것이라고 기대했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뭐하고 하셨어요?


사1장 14절입니다. "내 마음이 너희의 월삭과 정한 절기를 싫어하나니 그것이 내게 무거운 짐이라 내가 지기에 곤비하였느니라” 부담스럽고 무거운 짐이라고 하셨습니다.

오늘날 너무나 많은 성도들이 주일날 교회에 나오면서 이런 자세로 나옵니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목적과 길에는 관심도 없습니다. 몇 가지 순서 잘 하고 돌아가면 그것이 예배이고 성수주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사업 잘되게 하고 자기의 필요를 채우실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율법주의가 타락하면 의식을 남용합니다. 의식을 가지고 사람들을 붙잡으려고 합니다. 이것이 타락한 예배입니다. 이것이 하나님 앞에서 쓸모없는 예배입니다. 하나님과 원수된 예배입니다.

3)율법주의는 전통에 집착합니다.
로이드존스 목사님 후임인 알 티 킨달은 예배라는 책에서 말합니다. “우리가 예배를 예배의 형식에서 출발하면 우리는 육신으로부터 시작하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예배에 대한 문화적인 잣대를 들이대고 잇기 때문입니다. ....성령을 방해하는 한 가지 방법은 우리가 미리 정해놓은 생각과 편견을 가지고 그분을 둘러싸는 것이다. 우리가 어떤 형태의 예배를 드릴 것인가를 미리 정하고 예배하로 나올 때 이런 일이 일어난다. 


어떤 종류의 편견보다 성령을 소멸하는 것은 없다. 우리는 너무 자주 우리 속에 그런 것들이 잇다는 사실조차 인식조차 못한다. ....한때 성령께서 진정으로 사용하셨기 때문에 그 형태의 예배가 유일하게 올바른 형태의 예배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올바르지 않다. (예를 들면 하나님의 부흥만 해도 웨일스 부흥 때는 찬양과 경배가 놀랍게 드려졌고 그때 사람들이 변화되고 돌이키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요한웨슬레 시대에는 설교였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똑같은 성령이 역사하시는 놀라운 부흥도 예배 형태가 달랐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과거에 이렇게 하나님이 역사하셨기 때문에 오늘날에도 우리도 이렇게 해야만 하나님의 부흥이 올 것이라고 고집하는 것은 성령을 소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역사를 가로막습니다.

평양 대부흥의 놀라운 경험이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도 하나님의 부흥이 평양 대부흥처럼 또 임할 것이라고 고집하면 여러분은 성령의 역사를 소멸하게 되는 것입니다. 2000년 역사동안 이 땅에 수많은 부흥의 역사가 있었는데 그때마다 평양 대부흥과 같이 임하지 않았습니다. 과거만 해도. 이것이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그런데 율법주의에 빠지면 외부적인 전통에 집착하고 순서에 집착합니다. 전통과 순서를 집착하게 하는 것이 전통입니다. 그래서 전통에 빠진 나머지 성령을 소멸하게 되는 것입니다. 율법주의 예배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과거에 사람의 교훈에 기초한 예배를 살펴보았고 그때도 보았지만 우리가 마태복은 13장에서 거라사인 지역의 귀신들린 자를 말합니다. 수많은 돼지떼를 희생시키면서 치유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옷깃만 스쳐도 치유되는 역사가 나타났습니다. 엄청난 역사를 해서 나았습니다. 그런데도 15장에 보면, 예수님의 제자들이 손을 안씻고 먹었다는 이유로 모든 하나님의 역사를 부인합니다. 이것이 율법주의입니다.

그동안 하나님께서 포도나무 교회를 통해서 새물결선교회를 통해서 엄청난 일을 하십니다. 인터넷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근본적으로 사람을 바꾸어 가십니다. 그런데 전국컨퍼런스가 한번 열릴 때마다 하나님이 그 시간을 통해서 하신 일과 그 결과를 계산한다면 엄청난 일을 하셨습니다. 그런데 과거에 지금도 그럴지 모르지만 가까운 교회 주변의 목회자들 중에 그 모든 하나님이 역사를 배척하며 제가 주일날 평상복 입는 것 때문에 모든 것을 무시합니다. 왜냐하면 주일날 잠바뗑이나 걸치는데 그럽니다. 


예수님이 양복입고 다니지 않았고 바울이 가운을 입고 다니지 않았는데. 포도나무 교회 초기에 찬양과 경배를 통해서 하나님이 너무나 함께하셨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의도와 뜻은 아랑곳하지 않고 그저 입술만 뻥긋해도 찬송가를 부르면 괜찮고 복음성가를 부르면 안된다고 하면서 비난했습니다. 경배와 찬양을 드리는 그 한 가지 이유 때문에 하나님이 행하시는 모든 것을 버립니다.

지금도 율법주의 예배는 외부적인 순서나 절차에 초점을 맞춥니다. 거기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것이 전통입니다. 성경이 기준인데 성경을 통해서 전통도 비추어져야 하는데. 전통에 집착하면 가장 위험한 것이 성령을 소멸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무서운 점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아까 이사야66장 1-2절을 읽었지요. 그 똑같은 일이 예수님 시대에도 있었습니다. 사도들의 시대에도 있었습니다. 스데반을 대적하는 일입니다. 행6장 마지막 부분에 보면 나옵니다. "사람들을 매수하여 말하게 하되 이 사람이 모세와 하나님을 모독하는 말을 하는 것을 우리가 들었도다........”


7장에 보면 스데반이 설교를 합니다. 설교하면서 여기까지 옵니다.
47절입니다. "솔로몬이 그를 위하여 집을 지었느니라”


지금 이사야 66장 1-2절을 인용합니다. 그런데 이것이 무서운 점인데 예수님 시대의 유대인들은 이사야서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정확하게 이사야 시대 유대인들처럼 행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예배만 해도 그렇습니다. 그들의 중심은 하나님 앞에 떠는 애통함으로 주앞에 서는 것이 없이 예배만 해도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규례와 규칙을 지키는 것이 예배인 것처럼 그러니까 그들의 예배는 조상들의 예배처럼 개의 목을 꺾어드리며 돼지의 피를 드리는 것과 같은데 그것도 모르면서 오히려 하나님의 종을 죽입니다.

그러면서 스데반이 말합니다.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너희도 너희 조상들처럼 항상 성령을 거스른다고 합니다. 무서운 점이 성령을 거스른다는 것입니다. 이사야 시대 유대인들이 성령을 소멸하고 바리새인들이 성령을 소멸합니다. 예레미야 시대가 성령을 소멸합니다. 기독교 역사에서도 이런 일이 많았습니다.

4.율법주의 특징은 율법주의 예배에서는 새로운 정보수집에 관심이 있습니다.
알 티 킨달 목사님의 책에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목사님이 친구인 유명한 변호사를 교회에 초대하려고 노력했답니다. 그런데 그주일에 그 친구가 교회에 온다고 했답니다. 그래서 몇 배로 설교를 더 잘 준비했다고 합니다. 변호사를 설득하게 하기 위해서. 그 다음주일에 예배와설교가 어떠했는지 물었데요. 그런데 대답하기를 지난 주에 자네가 설교한 내용이 다 들어있는 책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책이 뭐냐고 했더니 사전을 가져오더니 이 책에 다 들어 있다고 하더랍니다. 말 뿐이라는 것입니다.

아까 율법주의를 이론이 실제를 대체한 것으로 말씀드렸습니다. 가르침이 삶을 대체한 것입니다. 우리 신앙은 실제이고 참된 신앙은 삶입니다.

예배회복만 해도 제가 얼마나 설교했는가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실제로 성경에서 말하는 대로 우리 가운데 예배가 회복되지 않으면 말짱 도루묵입니다. 예배회복에 대해서 설교하고 배우는 이유는 하나님의 길이 무엇인가를 알고, 우리가 조정하고 하나님이 의도하신 예배가 회복되기 위해서입니다. 아무리 설교를 많이 들었다고 해도 회복되지 않으면 말짱 도루묵입니다. 말씀은 살기 위한 것입니다. 말씀과 삶은 결코 분리되지 않습니다. 분리된 것이 율법주의입니다. 바리새인들에게는 분리되었습니다. 가르치기만 하고 행하지 않았습니다.

오늘날 교회는 어떠합니까? 율법주의 예배에 빠지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길을 발견하고 삶을 조정해서 그 가운데 서는 것에 대한 관심도 없습니다. 두려운 것은 설교하는 자나 듣는 자들이 실제로 그렇게 하려는 기대조차 없습니다. 그만큼 이 시대는 말씀을 버렸습니다. 그러면서 예배시간에 뭐하러오느냐? 자기 마음에 와닿은 감동을 받으려고 옵니다. 


목회자들의 많은 사람들이 성도들에게 설교를 통해서 감동을 주려는데 초점이 있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의 설교보세요. 사도들의 설교를 보세요. 구약의 선지자들의 설교를 보세요. 별로 감동적인 설교가 아닙니다. 그들의 설교는 하나님의 길을 제시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길을 제시하여 그 길에 서도록 촉구하는 설교였습니다. 그리고 그 길에 따라 삶을 살 때 거기에 하나님의 생명이 함께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신앙이 타락하면 늘 새로운 정보를 제공하는 것으로 전락해서 늘 새로운 정보 새로운 감동을 추구합니다. 이것은 너무나 타락한 것입니다.

끝으로 율법주의 예배에는 하나님의 생명이 없습니다.
성령이 운행하셔야 하나님의 생명이 넘칩니다. 율법주의는 예배를 몇 가지 절차와 순서로 전락시킵니다. 절차와 순서에 대한 외부적인 복종을 강조합니다. 하나님 자신을 알고 그분의 길을 구하는 열망이 사라집니다. 그러니 율법주의 예배에서는 하나님의 성령의 운행하심이 없습니다. 


이 시대의 예배가 그런 의미로 타락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서도 많은 사람들이 나와서 좋은 옷을 입고 속에는 시기질투 우상숭배와 탐심이 가득한 채로 앉아 있습니다. 영적인 간음인 세상사랑이 가득합니다. 같은 교회 다니는 성도끼리도 반목합니다. 단정한 옷만 입고 순서 마치고 돌아가면 그것이 참된 예배라고 생각합니다.

진짜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고 하나님의 영광의 임재를 구하며 그 앞에서 자신의 죄를 보고 애통하며 돌이켜야 하는데. 모양뿐입니다.

오늘 저는 율법주의 예배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우리 예배가 얼마나 타락했는가를 보고 하나님의 길로 돌이키고 하나님의 임재가 회복되는 예배가 되기를 간절히 축복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