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2:16절 이하입니다.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아는 고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에서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17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게 되려 하다가 죄인으로 나타나면 그리스도께서 죄를 짓게 하는 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18 만일 내가 헐었던 것을 다시 세우면 내가 나를 범법한 자로 만드는 것이라 19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향하여 죽었나니 이는 하나님을 향하여 살려 함이니라”
오늘은 율법주의 예배에 대해서 살펴볼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예배회복을 시리즈로 살펴보고 있습니다. 예배회복이 절실합니다. 예배가 회복되려면 중요한 한 가지가 예배에 대한 그릇된 이해에서 나온 거짓신앙체계의 예배가 버려져야 합니다. 그리고 성경이 말하는 참된 예배가 추구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성경이 말하는 참된 예배를 추구하기에 앞서서 우리가 반드시 버려야할 거짓신앙체계의 예배를 살펴보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거짓신앙체계를 올바로 이해하려면 거짓신앙체계를 올바로 이해해야 지난 주에 살펴보앗습니다.
오늘부터는 거짓신앙체계의 예배를 하나하나씩 살펴볼 것입니다. 오늘은 첫 시간으로 율법주의 예배에 대해서 살펴볼 것입니다. 거짓신앙체계는 자가중심적인 삶에 기초한 신앙에 대한 왜곡된 이해입니다.‘신앙의 모조품입니다. 하나님의 생명이 없습니다. 거짓신앙체계의 중요한 한 축이 율법주의입니다. 율법주의는 거짓신앙체계의 이론을 제공합니다. 크게 두 가지를 살펴볼 것입니다. 하나는 율법주의이고 또 하나는 율법주의 예배입니다.
1.율법주의
율법주의는 자기의 종교적인 헌신이나 행실에 의지해서 하나님 앞에 서고자 하는 것입니다. 성경적인 용어로 말하면 행함으로 말미암는 의를 의지하는 자세입니다.
1)율법주의는 가치관입니다.
율법주의를 이해할 때 반드시 가져야할 것은 율법주의는 가치관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행동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행동의 배후에 있는 가치관입니다. 율법주의가 신앙에 대한 왜곡된 이해인데, 율법주의는 어떤 행동의 배후에 있는 가치관을 말합니다. 율법주의는 가치관입니다.
여기에 대한 좋은 예가 오늘 읽은 본문입니다.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 예수로 말미암은 줄 아는 고로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나니 우리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 의롭다함을 얻음이니라 율법의 행위로 의롭다함을 얻을 육체가 없다. 우리 구원과 신앙을 위해 중요한 구절입니다. 이 말은 누가 누구에게 한 말입니까? 사도바울이 베드로에게 한 말입니다. 바울은 이방인을 위한 사도이고 베드로는 유대인을 위한 사도입니다. 바울이 같은 사도를 꾸짖으면서 하는 말입니다.
11절을 보면 게바가 안디옥에 이르렀을 때에 책망받을 일이 있어서 대놓고 책망했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 행함으로 의롭데 될 사람이 아무도 없다고 하며 책망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행함으로 의롭게 됨을 가르쳤기 때문에 책망을 한 것이 아닙니다. 성경을 보면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것을 제일 먼저 가르친 사람이 베드로입니다. 이방인에게 제일 먼저 보냄받은 사람이 베드로입니다. 그때 베드로는 행함으로 말미암은 의를 전하지 않고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를 전했습니다.
뿐만아니라 행15장을 보면 예루살렘회의가 있습니다. 유대인뿐아니라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할 때 복음 뿐아니라 유대인의 전통을 지키게 할 것인가 말것인가를 가지고 회의를 합니다. 이때 유대인의 전통이 중요하지 않고 복음으로 충분하다고 말한 사람이 베드로입니다. 이처럼 베드로는 누구보다 더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를 전파하고 가르친 사람입니다.
그런데 왜 바울은 베드로에게 이 말을 가지고 책망하는 것입니까?
12절 이하에 보면 이렇게 말합니다. "야고보에게서 온 어떤 이들이 이르기 전에 게바가 이방인과 함께 먹다가 저희가 오매 그가 할례자들을 두려워하여 떠나 물러가매 13 남은 유대인들도 저와 같이 외식하므로 바나바도 저희의 외식에 유혹되었느니라”
갈라디아 교회는 이방인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갈라디아교회에서 베드로가 식사할 때 이방인들과 함께 식사중인데 야고보에서 사람들이 왔습니다. 예루살렘 교회에서사람들이 왔습니다. 예루살렘 교회는 유대그리스도인들로 구성된 교회였고 이들 중에서는 유대전통을 지키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 전통중에 하나가 이방인들을 부정한 것으로 여겨서 함께 식사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이방인들과 함께 식사하고 있다가 예루살렘에서부터 사람이 오니까 저들에게 자신이 어떻게 비추어질까 또 예루살렘 교회에 가면 저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해서 그것이 두려워서 앉아 있다가 따로 앉았습니다. 그랬더니 베드로와 같이 있었던 유대기독교인들이 따로 앉았고 심지어 바나바마저 따로 앉았습니다. 이것을 두고 바울이 그 많은 사람 앞에서 강력하게 책망하는 것입니다. 당신은 왜 외식하느냐? 복음의 진리를 따라 행하지 않느냐? 고 한 것입니다. 책망의 내용이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오직 믿음으로 되는데 행함으로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닌데 왜 당신은 행함으로 의롭게 되는 것처럼 행하냐고 합니다.
오늘날 한국교회에서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없어요. 기껏해봐야 구원받을 때 우리가 믿음으로 구원받지 행함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 구절은 구원에 대해서 하는 말이 아니라 바울이 베드로를 책망하면서 하는 말입니다. 베드로가 함께 식사하다가 따로 옮긴 행동의 배후에 있는 가치관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이방인과 함께 식사하면 안되는가? 아닙니다. 이방인과 따로 식사하면 안되는가? 아닙니다. 따로 식사해도 문제가 없고 같이 식사해도 문제가 없습니다.
문제는 같이 식사하다가 따로 옮긴 행동의 배후에는 가치관이 있습니다. 어떤 특정한 종류의 사람들과 식사하는 것이 자기를 부정하게 만든다는 가치관 또 그들과 함께 식사하지 않는 것은 자기를 거룩하게 만든다는 가치관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너무나 타락한 율법주의입니다. 아무리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된다고 가르치더라도 이런 행동을 하면 그 사람은 행함으로 의롭게 된다는 가치관의 토대에서 일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해되세요? 그래서 사도바울이 이처럼 강력하게 사람들 앞에서 베드로를 책망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사건이 성경에 기록되도록 성령께서 감동하신 것입니다. 그 이유는 그만큼 우리 삶 속에 율법주의적인 가치관이 팽배하기 때문입니다. 다 말로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된다고 말하지만 예배 시간에 외부적인 순서 하나만 바꾸어도 난리가 납니다. 그 하나 때문에 예배가 참된 예배가 되고 그렇지 않으면 참된 예배가 아닌 것처럼 생각합니다. 전혀 엉뚱한 이해 가운데 있습니다. 이처럼 기억하실 것은 율법주의는 가치관입니다. 누구보다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를 전했어요. 베드로는. 그런데 지금 이 행동의 배후에는 전혀 믿음으로 말미암은 행동이 아니라 행함으로 말미암는 의를 반영하는 행동이었다는 것입니다. 복음의 진리를 따라 행하지 않는 복음을 대적하는 외식하는 행위였습니다.
2)율법주의는 한 마디로 말해서 ‘육신’을 의지해서 서는 것입니다.
어느 시대건 신앙이 타락하면 거짓신앙체계가 전면에 나섭니다. 예레미야 시대에 하나님의 심판이 실제로 임한 시대말적인 상황이었습니다. 예레미야서를 보면 거짓신앙체계가 전면에 나섭니다. 율법주의 기복주의 인본주의가 가득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레미야서에서 우리는 율법주의의 전형적인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렘7장 1절 이하입니다. "여호와께로서 예레미야에게 말씀이 임하니라 가라사대 2 너는 여호와의 집 문에 서서 이 말을 선포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 경배하러 이 문으로 들어가는 유다인아 다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 3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 길과 행위를 바르게 하라 그리하면 내가 너희로 이 곳에 거하게 하리라”
4절"너희는 이것이 여호와의 전이라, 여호와의 전이라, 여호와의 전이라 하는 거짓말을 믿지 말라”
8절"너희가 무익한 거짓말을 의뢰하는도다”
11절"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이 집이 너희 눈에는 도적의 굴혈로 보이느냐 보라 나 곧 내가 그것을 보았노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12절부터 보면 율법주의가 나옵니다."너희는 내가 처음으로 내 이름을 둔 처소 실로에 가서 내 백성 이스라엘의 악을 인하여 내가 어떻게 행한 것을 보라”
14절을 보면 그들이 성전을 믿었습니다.
여기보면 예레미야 시대에 성전을 하나님이 심판하시겠다고 합니다. 그렇게 하시면서 너희가 믿는 이 집에 이렇게 하겠다고 합니다. 다시 말해서 예레미야 시대의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을 믿은 것이 아니라 성전을 믿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율법주의적인 가치관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의식을 믿은 것입니다. 가짜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 타락한 인간들 어떻게 하나님을 믿어야지 성전을 믿냐? 그럴 수 있습니다.
여러분 오늘 교회에 올 때 하나님께 예배드리러 오지 않고 교회에 예배하러 오신 분 손들어 보세요? 여러분 누구에게 예배하러 왔어요? 하나님께 예배하러 왔지요. 그래서 우리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으니까 저들과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아니요. 그 이야기가 아닙니다. 여러분 그 당시에 안식일날 하나님께 예배하러 왔는데 하나님을 믿지 않고 성전에게 예배하러 왔다고 생각하세요? 이 말씀의 의미를 하려면 아까 실로에서 행함같이처럼 실로가 가봐야 합니다.
실로에서 보면 이스라엘이 블레셋과 전쟁을 하지요. 그런데 그 전쟁에서 패배합니다. 그랬더니 장로들이 어찌하여 여호와께서 패배하게 하셨는고 합니다.
여러분 이스라엘이 진 것이 그들이 잘못입니까? 하나님 잘못입니까? 그들이 전쟁에서 패배한 이유는 이스라엘이 성경이 말하는 신앙의 본질에 서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신앙의 본질에 서면 군사력에 상관없이 항상 승리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하나님의 길에서 떠나 자기중심적인 삶으로 전락하면 이것이 하나님을 버린 것인데 그러면 하나님도 저들을 버려 패배했고 하나님의 생명이 걷혔습니다. 이들에게는 종교적인 의식은 많았지만 신앙의 본질에서 떠났었습니다. 그래서 저들이 진 것은 그것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생명이 걷혔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장로들 즉 지도자들인데, 백성의 장로들이 하나님이 왜 우리에게 패배를 주셨는가 합니다.
오늘날도 너무나 많은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관점에서 하나님을 떠났기 때문에 하나님의 생명이 걷혔는데 그 책임을 하나님께 전가합니다. 장로들이 하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면서 그들이 꾀를 냅니다. 아이디어를 냅니다. 언약궤를 가지고 전쟁에 출전하여 그것으로 승리를 얻자고 합니다.
언약궤를 가져올 때 저들이 환호성을 질렀습니다. 그 이유는 이제는 이겼다 싶으니까. 하나님의 언약궤가 우리 가운데 함께하니 이제는 이겼다 싶으니까. 함성 소리를 듣고 블레셋 사람이 두려워합니다. 그러면서 그들이 하는 말이 싸우라 해서 블레셋 사람들이 승리합니다. 하나님의 궤를 빼앗기도 패배합니다. 이길 줄 알고 함성까지 질렀고 블레셋 사람까지 두려워했는데 졌습니다.
왜 그럽니까? 여기보면 블레셋 사람들도 모세와 여호수아 시대의 하나님의 역사를 들었던 같습니다. 그러면 모세와 여호수아 시대에 하나님의 언약궤가 함께하면서 놀라운 일을 하셨는데, 하나님의 언약궤가 함께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함께하신 것입니까? 언약궤를 메고 갔기 때문에 요단강이 갈라졌고 여리고성이 무너졌습니까? 아닙니다. 모세만 여호수아만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그리고 전 존재를 다해 하나님께 순종하는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 가운데 사는 과정에서 하나님이 말씀하는 과정에서 순종했더니 강이 갈라지고 승리하는 복을 누렸습니다.
이방인들도 아는 승리를 누렸습니다. 그런데 엘리 제사장 시대는 지금 말하는 신앙의 본질에서 떠나 있었습니다. 종교적인 의식은 많았지만. 하나님의 길로 행하는 것에서 떠나 있었고 자기중심적인 삶으로 타락하였습니다. 그들이 사는 길은 하나님중심적인 삶으로 돌이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돌이키기는커녕 언약궤를 가지고 나가면 이길 줄 알았어요. 그래서 이제는 이길 줄 알고 함성도 질었지만 결국 실패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아무리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할지 모르지만 실제로는 하나님을 믿은 것이 아니라 언약궤를 믿은 것입니다. 이것이 가짜신앙입니다. 이것이 율법주의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삼상4장 14절에서 말합니다. "엘리가 그 부르짖는 소리를 듣고 가로되 이 훤화하는 소리는 어찜이뇨 그 사람이 빨리 와서 엘리에게 고하니” 그들이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할지 모르지만 그들의 행동의 소리는 언약궤를 믿는 것이었습니다. 언약궤로 우리를 구원하게 하자!
여러분 다시 예레미야 시대로 돌아옵니다. 예레미야 시대에 의식이 많았습니다. 시바와 원방에까지 가서 특별한 향품을 사다 하나님께 드릴만큼 헌신적이었습니다. 안식일이면 수많은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삶은 철저하게 자기중심적인 삶으로 전락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관점에서는 렘2장 14절입니다. "이스라엘이 종이냐 씨종이냐 어찌하여 포로가 되었느냐” 이들이 살 길은 하나님을 알고 존재를 다해 사랑하는 것으로 돌이키는 것입니다. 신앙의 본질로 돌이키는 것입니다. 그들은 돌이키지 않고 그런 삶을 살면서 하나님이 거하신다고 믿는 예루살렘 성전에서 성대한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지켜줄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말로는 하나님께 드린다고 했지만 실제로는 성전에게 드린 것입니다. 이것이 가짜신앙입니다. 이것을 두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오늘날 주일날 예배드리러 교회에 오시는 분들 중에 교회에게 예배드리러 왔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자기는 하나님을 안믿고 교회를 믿는다고 하는 사람이 있다면 정신 나간 사람일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하나님백성들이 인격체이신 하나님을 알고 존재를 다해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신앙의 본질 가운데 사는 삶을 살 때 거기에 하나님의 생명이 넘치게 되어있는데 전혀 그런 삶을 살지 않으면서 하나님의 관점으로 보았을 때는 하나님을 떠나있으면서 주일날 하나님께 나와 예배를 드렸으니 하나님이 내 소원을 들어주시고 내 가족을 보호하시고 잘되게 하시고 내 문제를 해결해주실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이처럼 너무나 타락한 것이고 교회를 예배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다른 사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무서운 것이 영적분별력이 없다는 것입니다.
실로 시대를 보세요. 엘리 시대를 보세요. 백성의 장로들 엘리 제사장 엘리의 아들들이 영적으로 철저하게 눈이 멀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의 상태를 영적으로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관점으로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을 천리만리 떠나있는데 의식만 잘한다고 신앙생활을 잘한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떠나 있으니까 전쟁에서 패배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생명이 걷혀있으니까. 그런데 하나님의 관점이 가려지니까 왜 졌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니 해결책을 모릅니다. 기껏해야 해결책을 냈는데 율법주의입니다.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이 아니라 종교적인 의식을 의지하면 될 것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무슨 말인지 아시죠? 이처럼 타락했어요.
예레미야 시대는 엘리 시대의 이야기를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똑같은 상태에 있었어요. 종교적인 의식은 있었지만 삶은 신앙의 본질에서 떠나 하나님과 상관없는 삶을 살고 있고 하나님의 심판이 코 앞까지 닥쳐 있었어요. 과거에 잘못된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런데 자기들의 문제는 조금도 모르고 있습니다. 영적으로 눈이 어두워졌기 때문입니다. 전혀 모르는 것입니다.
더 무서운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 시대에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고 부활하기 이전이니까 아직 구약시대입니다. 그때 예루살렘 성전에서 제사가 성경대로 드려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들어가서 쫓아냅니다. 짐승을 쫓고 돈상을 뒤엎으십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입니다. 너희는 내 아버지의 집을 도적의 소굴로 만들었다고 합니다. 이 말씀은 아까 읽은 렘7장 11절의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 시대의 종교 지도자들의 예배가 예레미야 시대와 정확하게 똑같다는 말씀입니다. 종교적인 의식은 아무리 많았을지라 모르지만 그 삶은 철저하게 신앙의 본질에서 떠나 있었습니다.
그러니 보세요. 삶이 하나님을 떠나니까 안다루어집니다. 그래서 강도의 굴혈로 만들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만 해도 이것이 독점이잖아요. 그러니 얼마나 돈을 많이 벌었겠어요. 제사장들이 결탁되어 있었어요. 바리새인들은 엘리 제사장의 사건 뿐아니라 예레미야 시대의 내용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우리 조상들이 하나님을 믿어야 하는데 하나님을 안믿고 성전을 믿어서 하나님의 심판을 자초했다고 설교했을지도 모릅니다. 자기들은 하나님께 예배드리고 자기들은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자기들은 그들과 다르다고 생각했는데 하나님의 관점에서 똑같았습니다.
오늘날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우리는 엘리 제사장의 문제도 압니다. 예레미야 시대의 사건도 기억합니다. 예수님 시대의 바리새인들의 삶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너무나 똑같습니다. 그런데 몰라요. 분별력이 어두어져서 그럽니다. 성경을 하나님의 관점으로 보지 못하고 자기식대로 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성전을 강도의 굴혈로 만들었으니 심판이 오지. 우리에게는 신약시대니까 성전이 있냐 뭐가 있냐 우리와 상관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너무나 똑같습니다. 이것이 율법주의이고 가짜입니다. 육신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육신이 될 수 있는 것은 수없이 많습니다. 의식도 될 수 있어요. 시간이 있으면 좀더 자세하게 설명해야 되는데. 십자가 복음 책에 보면 나와 있습니다. 읽어보세요. 의식도, 자기의 종교적인 헌신이나 열심도, 성경적인 지식도 성령의 은사 사회적인 영향력 세상적인 축복도 육신이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으로 인해서 자부심이 생기면 실제로는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그것을 의지하게 됩니다. 이처럼 율법주의는 육신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혹은 의식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2.율법주의 예배
율법주의 예배를 잘 이해하기 위해서 위에서 한 내용을 잘 기억해야 합니다. 율법주의의 여러 형태들. 율법주의는 하나는 의식이 본질을 대체해버리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교리가 인격체를 대체하는 것이며, 이론이 실제를 대체하는 것이고 가르치는 것이 삶을 대체해버리는 것입니다. 의식이 중요합니다.
그런데 의식들은 하나님을 알고 존재를 다해 사랑하는 수단입니다. 그런데 신앙이 타락하면 의식은 수단인데 의식 자체를 잘하는 것이 본질이 됩니다. 그것이 이사야 시대 예레미야 시대 바리새인의 모습입니다. 성경적인 교리가 중요합니다. 너무나 중요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리 자체가 목적이 아니고 교리는 살아계신 인격체이신 하나님과 실제적인 교제를 누리게 하는 수단입니다. 교리적으로 잘 아는 것이 신앙생활을 잘 아는 것으로 여깁니다.
바리새인들처럼. 이들은 교리적으로 뛰어났기 때문에 자기들은 랍비요 인도자요 선생이라고 자부했는데 살아계신 인격체이신 하나님을 전혀 몰랐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적도 없고 하나님의 영광을 본 적도 없어요. 그래서 예수님은 너희가 소경이라고 했습니다. 율법주의는 교리가 인격체를 대체해버린 것입니다. 교리를 잘 아는 것이 신앙생활 잘 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이론이 실제를 대체해버린 것입니다. 우리 신앙은 성경에서 나오는 수많은 인물들이 살았던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해서 말씀하셨던 삶을 실제로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실제적인 교제입니다. 하나님의 실제가 함께하는 것이 우리안에 하나님의 생명이 넘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에 관한 이론이 교리가 실제를 대체해버립니다.
예를 들면,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를 응답하시는 줄 믿습니까? 그러면 당연히 믿지요. 하면서 이것을 뒷받침하는 성경 구절을 많이 댈 것입니다. 그런데 실제로 삶에서 하나님이 그들의 기도를 들어서 응답하시는 일이 거의 없어요. 이것은 가짜입니다. 이것이 이론이 실제를 대체해 버린 율법주의입니다.
또 하나는 가르침이 삶을 대체해버린 것입니다. 자 그래서 제가 여러분에게 율법주의를 잘 이해하기 위해서 교리가 인격체를 대체한 것이다. 이론이 실제를 대체한 것이다. 가르침이 삶을 대체한 것이다고 했어요. 다 같은 말입니다.
또 하나 이해하기 쉽도록 율법주의의 특성은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보다 교리를 강조합니다. 마음의 자세보다 외부적인 복종을 강조합니다. 성령의 임도를 따르는 것보다 규례와 규칙을 따르는 것을 강조합니다. 그래서 율법주의는 필연적으로 우리 신앙을 일정한 규칙을 지키는 것으로 전락시킵니다.
어떤 사람은 저에게 그런 말을 해요. 목사님의 설교는 너무 어려워서 쉽게 말해주세요 합니다.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 하니까 너무나 추상적이라는 것입니다. 우리 신앙을 예를 들면 성수주일 잘하고 십일조 잘하고 기도 많이 하고 성경 많이 읽고 등등 몇 가지 잘하는 것으로 말하면 손에 잡히는데 보이는데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 하니까 너무나 추상적이고 어렵다고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우리 신앙은 몇 가지 규칙을 지키는 것이 아닙니다. 율법주의가 그렇게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그 당시 613가지 규칙을 만들어 놓고 지켰습니다. 너무나 철저하게 지켰는데 그것은 신앙이 아닙니다. 율법주의가 그렇게 신앙을 전락시킨 것입니다. 성경책은 법조문이 아닙니다 법은 죽이는 것입니다. 성경책에는 여러분에게 약속시간에 어떻게 지켜야 하는지 등등의 규칙을 말하지 않아요. 성경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길을 말하고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의 관점과 길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안에 있어야 하나님의 관점이 보입니다. 그런데 율법주의는 몇 가지 규례와 규칙을 지키는 것으로 전락시킵니다.
그러면 율법주의 예배를 살펴봅니다.
1)율법주의에서는 예배가 하나의 절차로 전락합니다.
율법주의가 우리의 신앙을 일정한 규례와 규칙을 잘 지키는 것으로 전락하니까 율법주의에서는 예배를 하나의 절차로 전락시킵니다. 율법주의에서는 주일날 교회에 나와서 주보에 나와있는 순서를 마치고 돌아가면 예배를 잘 드리는 것으로 전락시켜 버립니다. 그것이 예배가 아닌데. 순서는 중요하지만 순서는 이것을 통해 하나님을 보고 하나님의 영광을 알고 하나님의 목적을 보고 하나님의 길을 알아 우리 삶을 조정해서 하나님이 길로 행함으로 하나님과 동행하고 하나님을 경험하기 위한 수단인데 율법주의에 빠지면 예배를 순서를 마치는 하나의 규칙으로 전락시켜 버립니다. 그래서 순서 마치고 돌아가면 예배 잘 드리고 가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껍데기 뿐인 예배입니다. 하나님과 상관없는 예배입니다.
지금 주일날 낮예배 드리고 점심 먹고 조금 쉬었다가 다시 모이기 힘드니까 저녁예배를 미리 앞당겨 예배를 드리는 경향이 많습니다. 안드리자니 그렇고 그래서 그냥 예배한번 더 떼우는 식으로 드립니다. 이것은 철저하게 타락한 예배입니다. 이처럼 율법주의는 예배만 해도 하나의 절차로 전락시키기 때문에.
2)율법주의의 또 다른 특징은 하나님 그분에 대한 사모함이나 갈급함이 없습니다.
우리 신앙은 살아계신 인격체이신 하나님을 알고 그분의 의중을 알고 그 길을 알고 그 길에 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람들은 하나님을 알기를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를 하나님의 뜻을 알기를 열망했습니다.
시편 42편 1절에서 말합니다.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
시편27편 4절입니다. "내가 여호와께 청하였던 한 가지 일 곧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나로 내 생전에 여호와의 집에 거하여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앙망하며 그 전에서 사모하게 하실 것이라”
빌3장에서 바울은 주님을 아는 것이 가장 고귀하게 여기며 주님을 알고자 달려간다고 합니다.
이처럼 신앙은 하나님을 알기를 열망하여 하나님을 보기를 열망하고 하나님의 목적을 알기를 열망합니다. 예배만 해도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여 나오기 때문에 하나님을 향한 갈급함과 사모함이 있게 됩니다. 그래서 기독교 역사를 보면 부흥의 때마다 그 길을 예비했던 자들은 주님의 영광을 보기를 열망하고 갈급했던 자들입니다. 그런데 신앙이 타락하면 그 열망이 사라지고 그저 순서를 떼우고 돌아가는 것이 예배라고 생각합니다.
로이드존스 목사님은 부흥이라는 책에서 말합니다. 죽은 전통주의에 대해서 말합니다. “종교나 예배는 생명력있는 것이 전혀 없습니다............”
여러분 오늘날 우리들의 예배는 어떠합니까? 이처럼 율법주의에서는 예배가 하나의 순서나 절차를 마치는 것으로 전락합니다.
2)율법주의 예배에서는 절차에 대한 외부적인 복종이 강조됩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원래 예배는 중요한 한 부분이 상한 심령의 예배입니다.
그래서 이사야 57장 15절 이하입니다. "지존 무상하며 영원히 거하며 거룩하다 이름하는 자가 이같이 말씀하시되 내가 높고 거룩한 곳에 거하며 또한 통회하고 마음이 겸손한 자와 함께 거하나니 이는 겸손한 자의 영을 소성케 하며 통회하는 자의 마음을 소성케 하려 함이라 16 내가 영원히는 다투지 아니하며 내가 장구히는 노하지 아니할 것은 나의 지은 그 영과 혼이 내 앞에서 곤비할까 함이니라 17 그의 탐심의 죄악을 인하여 내가 노하여 그를 쳤으며 또 내 얼굴을 가리우고 노하였으나 그가 오히려 패역하여 자기 마음의 길로 행하도다”
66장 1절 이하입니다.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등상이니 너희가 나를 위하여 무슨 집을 지을꼬 나의 안식할 처소가 어디랴 2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의 손이 이 모든 것을 지어서 다 이루었느니라 무릇 마음이 가난하고 심령에 통회하며 나의 말을 인하여 떠는 자 그 사람은 내가 권고하려니와 3 소를 잡아 드리는 것은 살인함과 다름이 없고 어린 양으로 제사드리는 것은 개의 목을 꺾음과 다름이 없으며 드리는 예물은 돼지의 피와 다름이 없고 분향하는 것은 우상을 찬송함과 다름이 없이 하는 그들은 자기의 길을 택하며 그들의 마음은 가증한 것을 기뻐한즉”
보세요. 하나님 앞에 예배하러 나올 때 상한 심령과 애통하는 자세로 나오는 것이 필수입니다. 우리의 신앙을 올바로 이해해야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의 목적을 알고 하나님의 길을 알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길에 우리가 서기를 원한다면 우리 삶에 애통함이 없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우리안에 가난함과 배고픔과 갈급함이 넘칩니다.
그런데 율법주의는 초점이 중심에 있지 않고 절차에 대한 외부적인 복종에 있습니다. 사람들이 어떤 모양으로 와서 어떻게 앉아 있다가 가면 그거면 되는 것입니다. 양복입고 앉아서 점잖게 돌아가면 됩니다. 그들 속에 탐심이 가득한지 우상숭배의 마음이 가득한지 용서하지 않고 미워하는 마음이 가득한지 전혀 고려하지 않습니다. 주일날 예배 안빠지고 와서 예배시간 늦지 않게 와서 순서만 마치고 가면 그것이 예배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헌금만 많이 하고 돌아가면 그것이 예배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너무나 타락한 것입니다. 가짜입니다. 무서운 점이 무엇인지 아세요?
제가 아까 이사야서 61장 1-2절을 읽었지요. 하나님은 성전에 계시지 않는다. 하늘에 계시는 분이 어떻게 성전에 계시겠느냐? 나는 마음이 가난하고 심령에 통회하고 하나님의 말씀 앞에 떠는 자들과 함께하신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3절이하에서 말합니다. "무릇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 희락의 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시고 그들로 의의 나무 곧 여호와의 심으신 바 그 영광을 나타낼 자라 일컬음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4 그들은 오래 황폐하였던 곳을 다시 쌓을 것이며 예로부터 무너진 곳을 다시 일으킬 것이며 황폐한 성읍 곧 대대로 무너져 있던 것들을 중수할 것이며 5 외인은 서서 너희 양 떼를 칠 것이요 이방 사람은 너희 농부와 포도원지기가 될 것이나”
이 말을 자세하게 읽으면 그 당시 이스라엘 백성이 개의 목을 꺾어 제사를 드렸거나 돼지의 피로 제사를 드렸다는 말이 아닙니다. 이 말씀은 여기 나와 있는 것처럼 그들은 성경대로 어린양을 짐승을 드렸어요. 그런데 그들의 마음은 하나님의 뜻에서 천리만리 떠나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관점에서 본 그들의 제사는 개의 목을 꺾어 드리는 것과 같았고 돼지의 피로 드리는 것과 같았습니다. 우상 앞에 분향하는 것과 다름이 없었습니다. 이 구절을 가지고 한 주석가가 주석을 달아놓았는데 제가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유대인에게 있어서 개란 추잡함이나 경멸스러움을 상징하는 말이기도 했는데 그 목을 꺾어 죽여서 희생제물로 바치는 것은 지극히 혐오스러운 모습을 나타내는 것이다. 또한 돼지를 죽여 제물로 바치는 일 역시 이방제사에서나 행해졌던 혐오스러운 것이다. 그러나 본 구절은 율법이 허용하고 있는 어린양의 제사를 이방인의 제사인냥 부정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2절을 고려하면 이 난제가 쉽게 해결된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제사는 제사의 바른 정신을 깨닫고 그 정신에 입각해서 드리는 제사인데 그 제사란 가난한 마음으로 드리는 제사인데 이런 내면적인 자세를 무시한채 그냥 동물만 잡아서 드리는 제사는 이방인의 제사와 다를 바 없다는 것이다.”
여러분 이렇게 볼 때 오늘날 소위 하나님의 백성들이 주일날 하나님 앞에 드리는 제사를 볼 때 어떻게 드리고 있습니까? 그러면서 우리는 예배회복을 외치고 있습니다.
로이드존스 목사는 말합니다. “침체기에 빠진 교회가 예배의식에 있어서 보다 더 형식적으로 예배형식을 채용하고 공기도서나 .....”
그런데 이렇게 율법주의에 빠지면 그래서 예배를 통해서 애통하고 통회하는 심정으로 나와서 그분의 마음을 구하고 그분의 의중을 구하고 그분의 얼굴을 구하기를 추구하는 것보다 이것은 전혀 고려하지 않는채 그저 순서만 마치고 외부적인 모양을 추구할 때 한 가지 같이 가는 것이 있어요. 그것은 공사상입니다. 율법주의의 핵심은 공사상입니다. 이것 함으로 그 대가로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복주실 것을 기대합니다.
성경에 의하면 하나님은 독생자까지 아끼지 않고 내어주실 만큼 사랑하셨습니다. 창조하신 목적고 구원하신 목적과 하나님중심적인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중심적인 삶에 함께하시고 그 삶에 하나님의 생명이 넘친다고 말씀하십니다.
예배만 해도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을 추구하고 하나님의 목적과 길을 추구하여 나오면 하나님이 자신을 알리시고 목적과 길을 알리십니다. 그러면 우리가 순종함으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고 그렇게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 때 우리에게 하나님의 생명이 넘칩니다.
그런데 율법주의에 빠지면 우리 신앙을 몇 가지 규례와 규칙을 지키는 것으로 전락시킵니다. 그리고 예배만 해도 순서 몇 가지 지키는 것으로 전락합니다. 그리고 이것을 지키는 외부적인 모양을 강조합니다. 그리고 그 대가로 하나님이 복주실 것으로 기대합니다. 너무나 타락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사야 시대 그렇게 철저하게 의식을 지켰고 많은 제사를 드렸고 희생을 드렸고 기도를 많이 했고 금식했어도 그들이 신앙의 본질을 떠나 있었는데도 그렇게 드린 이유는 그렇게 드리면 하나님이 자기들을 지킬 것이고 보호하실 것이고 복주실 것이라고 기대했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뭐하고 하셨어요?
사1장 14절입니다. "내 마음이 너희의 월삭과 정한 절기를 싫어하나니 그것이 내게 무거운 짐이라 내가 지기에 곤비하였느니라” 부담스럽고 무거운 짐이라고 하셨습니다.
오늘날 너무나 많은 성도들이 주일날 교회에 나오면서 이런 자세로 나옵니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목적과 길에는 관심도 없습니다. 몇 가지 순서 잘 하고 돌아가면 그것이 예배이고 성수주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사업 잘되게 하고 자기의 필요를 채우실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율법주의가 타락하면 의식을 남용합니다. 의식을 가지고 사람들을 붙잡으려고 합니다. 이것이 타락한 예배입니다. 이것이 하나님 앞에서 쓸모없는 예배입니다. 하나님과 원수된 예배입니다.
3)율법주의는 전통에 집착합니다.
로이드존스 목사님 후임인 알 티 킨달은 예배라는 책에서 말합니다. “우리가 예배를 예배의 형식에서 출발하면 우리는 육신으로부터 시작하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예배에 대한 문화적인 잣대를 들이대고 잇기 때문입니다. ....성령을 방해하는 한 가지 방법은 우리가 미리 정해놓은 생각과 편견을 가지고 그분을 둘러싸는 것이다. 우리가 어떤 형태의 예배를 드릴 것인가를 미리 정하고 예배하로 나올 때 이런 일이 일어난다.
어떤 종류의 편견보다 성령을 소멸하는 것은 없다. 우리는 너무 자주 우리 속에 그런 것들이 잇다는 사실조차 인식조차 못한다. ....한때 성령께서 진정으로 사용하셨기 때문에 그 형태의 예배가 유일하게 올바른 형태의 예배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올바르지 않다. (예를 들면 하나님의 부흥만 해도 웨일스 부흥 때는 찬양과 경배가 놀랍게 드려졌고 그때 사람들이 변화되고 돌이키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요한웨슬레 시대에는 설교였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똑같은 성령이 역사하시는 놀라운 부흥도 예배 형태가 달랐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과거에 이렇게 하나님이 역사하셨기 때문에 오늘날에도 우리도 이렇게 해야만 하나님의 부흥이 올 것이라고 고집하는 것은 성령을 소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역사를 가로막습니다.
평양 대부흥의 놀라운 경험이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도 하나님의 부흥이 평양 대부흥처럼 또 임할 것이라고 고집하면 여러분은 성령의 역사를 소멸하게 되는 것입니다. 2000년 역사동안 이 땅에 수많은 부흥의 역사가 있었는데 그때마다 평양 대부흥과 같이 임하지 않았습니다. 과거만 해도. 이것이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그런데 율법주의에 빠지면 외부적인 전통에 집착하고 순서에 집착합니다. 전통과 순서를 집착하게 하는 것이 전통입니다. 그래서 전통에 빠진 나머지 성령을 소멸하게 되는 것입니다. 율법주의 예배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과거에 사람의 교훈에 기초한 예배를 살펴보았고 그때도 보았지만 우리가 마태복은 13장에서 거라사인 지역의 귀신들린 자를 말합니다. 수많은 돼지떼를 희생시키면서 치유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옷깃만 스쳐도 치유되는 역사가 나타났습니다. 엄청난 역사를 해서 나았습니다. 그런데도 15장에 보면, 예수님의 제자들이 손을 안씻고 먹었다는 이유로 모든 하나님의 역사를 부인합니다. 이것이 율법주의입니다.
그동안 하나님께서 포도나무 교회를 통해서 새물결선교회를 통해서 엄청난 일을 하십니다. 인터넷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근본적으로 사람을 바꾸어 가십니다. 그런데 전국컨퍼런스가 한번 열릴 때마다 하나님이 그 시간을 통해서 하신 일과 그 결과를 계산한다면 엄청난 일을 하셨습니다. 그런데 과거에 지금도 그럴지 모르지만 가까운 교회 주변의 목회자들 중에 그 모든 하나님이 역사를 배척하며 제가 주일날 평상복 입는 것 때문에 모든 것을 무시합니다. 왜냐하면 주일날 잠바뗑이나 걸치는데 그럽니다.
예수님이 양복입고 다니지 않았고 바울이 가운을 입고 다니지 않았는데. 포도나무 교회 초기에 찬양과 경배를 통해서 하나님이 너무나 함께하셨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의도와 뜻은 아랑곳하지 않고 그저 입술만 뻥긋해도 찬송가를 부르면 괜찮고 복음성가를 부르면 안된다고 하면서 비난했습니다. 경배와 찬양을 드리는 그 한 가지 이유 때문에 하나님이 행하시는 모든 것을 버립니다.
지금도 율법주의 예배는 외부적인 순서나 절차에 초점을 맞춥니다. 거기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것이 전통입니다. 성경이 기준인데 성경을 통해서 전통도 비추어져야 하는데. 전통에 집착하면 가장 위험한 것이 성령을 소멸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무서운 점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아까 이사야66장 1-2절을 읽었지요. 그 똑같은 일이 예수님 시대에도 있었습니다. 사도들의 시대에도 있었습니다. 스데반을 대적하는 일입니다. 행6장 마지막 부분에 보면 나옵니다. "사람들을 매수하여 말하게 하되 이 사람이 모세와 하나님을 모독하는 말을 하는 것을 우리가 들었도다........”
7장에 보면 스데반이 설교를 합니다. 설교하면서 여기까지 옵니다.
47절입니다. "솔로몬이 그를 위하여 집을 지었느니라”
지금 이사야 66장 1-2절을 인용합니다. 그런데 이것이 무서운 점인데 예수님 시대의 유대인들은 이사야서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정확하게 이사야 시대 유대인들처럼 행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예배만 해도 그렇습니다. 그들의 중심은 하나님 앞에 떠는 애통함으로 주앞에 서는 것이 없이 예배만 해도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규례와 규칙을 지키는 것이 예배인 것처럼 그러니까 그들의 예배는 조상들의 예배처럼 개의 목을 꺾어드리며 돼지의 피를 드리는 것과 같은데 그것도 모르면서 오히려 하나님의 종을 죽입니다.
그러면서 스데반이 말합니다.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너희도 너희 조상들처럼 항상 성령을 거스른다고 합니다. 무서운 점이 성령을 거스른다는 것입니다. 이사야 시대 유대인들이 성령을 소멸하고 바리새인들이 성령을 소멸합니다. 예레미야 시대가 성령을 소멸합니다. 기독교 역사에서도 이런 일이 많았습니다.
4.율법주의 특징은 율법주의 예배에서는 새로운 정보수집에 관심이 있습니다.
알 티 킨달 목사님의 책에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목사님이 친구인 유명한 변호사를 교회에 초대하려고 노력했답니다. 그런데 그주일에 그 친구가 교회에 온다고 했답니다. 그래서 몇 배로 설교를 더 잘 준비했다고 합니다. 변호사를 설득하게 하기 위해서. 그 다음주일에 예배와설교가 어떠했는지 물었데요. 그런데 대답하기를 지난 주에 자네가 설교한 내용이 다 들어있는 책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책이 뭐냐고 했더니 사전을 가져오더니 이 책에 다 들어 있다고 하더랍니다. 말 뿐이라는 것입니다.
아까 율법주의를 이론이 실제를 대체한 것으로 말씀드렸습니다. 가르침이 삶을 대체한 것입니다. 우리 신앙은 실제이고 참된 신앙은 삶입니다.
예배회복만 해도 제가 얼마나 설교했는가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실제로 성경에서 말하는 대로 우리 가운데 예배가 회복되지 않으면 말짱 도루묵입니다. 예배회복에 대해서 설교하고 배우는 이유는 하나님의 길이 무엇인가를 알고, 우리가 조정하고 하나님이 의도하신 예배가 회복되기 위해서입니다. 아무리 설교를 많이 들었다고 해도 회복되지 않으면 말짱 도루묵입니다. 말씀은 살기 위한 것입니다. 말씀과 삶은 결코 분리되지 않습니다. 분리된 것이 율법주의입니다. 바리새인들에게는 분리되었습니다. 가르치기만 하고 행하지 않았습니다.
오늘날 교회는 어떠합니까? 율법주의 예배에 빠지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길을 발견하고 삶을 조정해서 그 가운데 서는 것에 대한 관심도 없습니다. 두려운 것은 설교하는 자나 듣는 자들이 실제로 그렇게 하려는 기대조차 없습니다. 그만큼 이 시대는 말씀을 버렸습니다. 그러면서 예배시간에 뭐하러오느냐? 자기 마음에 와닿은 감동을 받으려고 옵니다.
목회자들의 많은 사람들이 성도들에게 설교를 통해서 감동을 주려는데 초점이 있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의 설교보세요. 사도들의 설교를 보세요. 구약의 선지자들의 설교를 보세요. 별로 감동적인 설교가 아닙니다. 그들의 설교는 하나님의 길을 제시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길을 제시하여 그 길에 서도록 촉구하는 설교였습니다. 그리고 그 길에 따라 삶을 살 때 거기에 하나님의 생명이 함께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신앙이 타락하면 늘 새로운 정보를 제공하는 것으로 전락해서 늘 새로운 정보 새로운 감동을 추구합니다. 이것은 너무나 타락한 것입니다.
끝으로 율법주의 예배에는 하나님의 생명이 없습니다.
성령이 운행하셔야 하나님의 생명이 넘칩니다. 율법주의는 예배를 몇 가지 절차와 순서로 전락시킵니다. 절차와 순서에 대한 외부적인 복종을 강조합니다. 하나님 자신을 알고 그분의 길을 구하는 열망이 사라집니다. 그러니 율법주의 예배에서는 하나님의 성령의 운행하심이 없습니다.
이 시대의 예배가 그런 의미로 타락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서도 많은 사람들이 나와서 좋은 옷을 입고 속에는 시기질투 우상숭배와 탐심이 가득한 채로 앉아 있습니다. 영적인 간음인 세상사랑이 가득합니다. 같은 교회 다니는 성도끼리도 반목합니다. 단정한 옷만 입고 순서 마치고 돌아가면 그것이 참된 예배라고 생각합니다.
진짜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고 하나님의 영광의 임재를 구하며 그 앞에서 자신의 죄를 보고 애통하며 돌이켜야 하는데. 모양뿐입니다.
오늘 저는 율법주의 예배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우리 예배가 얼마나 타락했는가를 보고 하나님의 길로 돌이키고 하나님의 임재가 회복되는 예배가 되기를 간절히 축복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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