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5/2010

하나님은 전심의 예배자를 찾으신다.

I .하나님은 전심의 예배자를 찾으신다.

23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요한복음 4:23)

A. 하나님은 단지 형식적으로만 드리는 예배를 찾지 않으신다. 우리의 예배가 순결하고 더럽히지 않으려면 가지가 필요하다:

1. 신실한 마음: 하나님은 그분을 자발적으로 사랑하는 마음을 원하신다. 의무감이나 강요감에 근거한 어그러진 애정을 구하지 않으신다. 그분은 조건이 없고 남김 없이 선택에 의해 사랑하시는데, 그분과 같이 사랑하려고 하는 자들을 찾으신다.

2. 앎에 근거한 마음: 하나님은 계시와 이해를 가진 예배 자들을 찾으신다: 그들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추구하는 자들이다. 우리는 그분을 제대로 알지 못한다면 그분을 제대로 예배할 없다.

B. 말라기 서에, 하나님은 이스라엘 사람들을 바벨론 포로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을 귀환시키셨다. 그분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제사장의 나라로 부르셨다고 하셨다. – 그들의 예배를 통하여 인간이 가질 있는 권위가 최고의 위치가 되는 특권을 누릴 있었다. 그들은 성전을 재건축했다, 그러나 그들이 예배가운데 갖는 그들의 역할이 얼마나 위대한 지에 대하여 존중하지 못했다. 그들은 하나님이 요구하는 예배를 드리는 대신, 단지 겉모양으로만 나타내는 형식적인 예배를 드리게 되었다.

10 “만군의 여호와까 이르노라 너희가 위에 헛되이 불사르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너희 중에 성전 문을 닫을 자가 있었으면 좋겠도다 내가 너희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너희 손으로 드리는 것을 받지도 아니하리라.” (말라기 1:10)
  
1.  그들은 올바르게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 노력하지 않은 것과 같이, 하나님은 그들의 형식적인 예배를 존중하지 않았다. 그분은 진정한 마음과 앎에 근거한 마음이 없는 예배를 계속하기 보다는 오히려 그들의 예배의 형식을 완전히 그만두게 하셨다.

2. 하나님은 하나의 약속의 말씀으로 그들을 꾸짖으셨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올바르게 예배하는 것이 실패하였더라도, 그분은 마지막 예배 운동을 일으켜서 그분의 이름이 위대해지도록 하겠다고 약속하셨다. 이스라엘이 이방 나라들이 그들이 거절한 부르심 가운데 사는 것을 보고, 그들을 시기 나게 것이다. 이스라엘은 다시 주님께 돌아와 계시와 전심으로 주님을 예배하게 것이다.

11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뜨는 곳에서부터 해지는 곳까지의 이방 민족 중에서 이름이 크게 것이라 각처에서 이름을 위하여 분향하며 깨끗한 재물을 드리리니 이는 이름이 이방 민족 중에서 크게 것임이니라. (말라기 1:11)

II.  성경적인 기도들을 사용하기
A.  기도와 예배가운데 드려지는 우리의 언어가 성경을 인용하여 사용하는 것이 중요하다.
1. 합심으로: 우리가 우리의 기도와 노래를 성경의 언어로 사용할 , 하나님의 마음의 언어로 일치되는 가운데 우리가 함께 모이도록 준다. 모든 성경은 성령의 감동으로 것으로, 말씀 안에는 우리를 향한 그분의 뜻과 마음이 계시되어 있다.

2. 개인적으로: 하나님은 성경말씀을 통하여 그분 자신을 우리에게 계시하시는데, 이러한 방법 안에는 우리로 하여금 그분 앞에 있는 사랑 안에서 자신감을 증진시키고 우리로 하여금 믿음 안에서 성장하게 하여 효과적인 기도를 하게 한다. 예를 들면, 하나님은 우리에 의해 알려지기를 갈망하시며 우리는 지혜와 계시의 영을 구할 그분의 갈망과 우리의 기도가 일치된다 (에베소서 1:17). 이러한 기도는 무엇을 위해 기도해야 할지 우리를 도울 아니라, 우리가 그것을 위해 기도해야 하는지도 알려준다. 무엇은 하나님의 성품의 양상을 우리에게 계시해 주는 것이다.

17 우리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에베소서 1:17)

B. 신약 성경의 사도들의 기도들은, 사도적 기도문으로 알려줄 뿐만 아니라, 특별히 기도와 예배를 위한 효능있는 자원들이다.

1. 사도적 기도문은 항상 하나님을 직접적으로 향해 있다. 기도문들은 사탄을 향해 말을 건네는 것들은 전혀 없다. 신약성경에서, 사도들은 개인들을 사로잡고 있는 사탄들을 제어하는 권위를 행사했다. 그들에게서 떠나도록. 그래서, 우리는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대항하는 기도를 금하지 않는다. 그러나, 훨씬, 신약에서 보여지는 기도의 패턴은 직접적으로 하나님께 기도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의 교통의 대부분은 사탄이나 이세상의 주관자들과 교통하는데 보내지 않아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마음의 눈을 하나님께 초점을 맞추기를 원하고 우리의 교통은 그분과 하고 싶은 것이다.

2. 사도적 기도들의 언어는 항상 긍정적이다. 부정적인 것들이 없어지도록 기도하는 것이 잘못은 아니지만, 하나의 법칙으로, 사도들은 긍정적인 부분이 나누어지도록 기도했다. 예를 들면, 분열을 대항하여 기도하는 대신, 사도들은 하나님으로 하여금 하나됨이 나눠지고 사랑이 증가되도록 기도하는 것이다. 긍정적인 기도로 기도하는 것은 우리의 마음이 우리가 기도하는 사람들에 대하여 다르게 느끼도록 준다. 우리가 다른 사람에 대하여 긍정적이고 사랑하는 마음을 가질 , 우리는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과 연합하여 기도하게 되는 것이다.

III. 요한복음 17, 대제사장적인 기도 
20 내가 비옵는 것은 사람들만 위함이 아니요 저희 말을 인하여 나를 믿는 사람들도 위함이니;” (요한복음 17:20)

A. 요한복음 17장의 예수님의 기도는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드려졌던 기도이다. 예수님은 그분의 고난과 십자가의 죽음에 대한 댓가로써 그분의 신부에 대하여 가지 특별한 기도로 하나님 아버지께 탄원하셨다. 기도는 너무나 강력한 기도인데, 왜냐하면 하나님이신 그분이 하나님께 이야기하며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 기도하셨기 대문이다하나님이신 아들이 아버지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 그리고 성령 하나님의 힘으로 드리는 기도이기 때문이다

B. 요한복음 17:1-19, 예수님은 직접적으로 그분의 제자들을 위해 기도하셨다. 그때, 마지막 6개의 구절들에서는, 우리를 포함하는 기도를 함으로써 그분의 기도를 확장하셨다그분은 앞으로 역사가운데 있을 그분의 교회를 위해 기도하셨다.

C. 예수님은 구절에서 교회를 위해 주요한 것들을 위해 기도하셨다:
1. 예수님은 연합을 위해 기도하셨다––그것은 우리가 그분의 거룩함 안에서 그분과 하나가 되도록 기도하셨다. 그분은 우리가 그분을 친밀하게 알기를 갈망하셨다. 그분은 그분과의 우리의 관계가 예수님이 그의 아버지와 갖는 관계와 같이 같은 성격들 위에 놓여 지기를 기도하셨다.

21 “…아버지께서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 23 내가 저희안에, 아버지께서 안에 계서 저희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나를 사랑하심같이 저희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 (요한복음 17:21,23)

2. 예수님은 그분이 있는 그곳에 우리가 있기를 기도하셨다. 그분은 우리가 그분의 마음과 일치하는 삶을 살며, 그분이 하는 일을 하며, 그분이 말하는 것을 말하기를 원하십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아버지와의 관계를 맺으셨던 방식입니다

24 “아버지여 내게 주신 자도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어 …” (요한복음 17:24a)

3. 예수님은 우리가 그분의 아름다움과 영광을 알도록 기도하셨다. 예수님은 말할 없이 아름다우시고 영광스러운 분이시다 (37:22, 아가서 5:10-16; 이사야 24:23; 계시록 21-22). 비록 그분은 신성의 모든 충만한 것을 소유하고 계실지라도, 예수님은 육체의 형상으로 영원히 거하신다. 우리가 그분의 영광을 바라볼 , 우리 마음가운데 사랑을 일깨운다.

24“… 아버지께서 창세 전부터 나를 사랑하시므로 내게 주신 나의 영광을 저희로 보게 하시기를 원하옵나이다.” (요한복음 17:24b)

4. 예수님은 우리의 사랑이 순결하고 더럽혀지지 않도록 그리고 우리의 마음이 열정과 매혹으로 불타오르도록 기도하심으로 기도를 끝내셨다주님은 우리가 그분을 사랑하되 종교적인 의무감으로 사랑하지 않고, 우리가 아버지 하나님이 예수님을 사랑하는 방식으로 그분을 사랑하기를 위해 기도하셨다. 다시한번, 예수님은 그분과 아버지가 관계를 맺는 방식과 같은 특성으로 예수님과 우리의 관계가 형성되도록 기도하셨다.

26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저희에게 알게 하였고 알게 하리니 이는 나를 사랑하신 사랑이 저희 안에 있고 나도 저희 안에 있게 하려 함이니이다.” (요한복음 17:36)

D. 삼위일체 하나님의 갈망들이 가지 기도로 간결하게 우리 앞에 활짝 펼쳐져 있는 것이다. 가지 기도문은 우리가 기도와 예배가운데 기도문을 가지고 성령님과 대화를 한다면 우리의 삶에 극적으로 영향을 미칠 것이다. 우리는 그분이 기도문들을 들을 것이라는 확신을 갖게 되며, 그분은 그분이 요청한 것을 가지게 것이다.

IV.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의 연약함을 온전케
19 기록된바 내가 지혜 있는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하리라 하였으니…”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고린도전서 1:19, 27-28)

A. 기도를 가장 방해 요소 하나는 겉으로 보이는 우리의 연약함이다. 세상에서의 지혜와 능력이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에 비해 반하고 열등하다. 하나님은 실제적으로 세상에서 연약하고 어리석은 것들을 택하사 그분의 영광의 위대함을 보이시고자 하신다.

B. 금식, 기도, 겸손, 섬김, 나누어 그리고 이와 같은 자원들은사람들의 눈에는 어리석은 것으로 보이는 자원하는 연약함의 형태들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우리는 이러한 것들에 지속적인 방식으로 자신을 드릴 진정한 지혜와 지속적인 힘을 나타내게 된다.

C. 세상은 자원하는 연약함을 품는 사람들을 멸시할 모르나 예수님을 통한 끝임 없는 은혜의 저수지를 우리는 찾을 있다. 이것은 오직 하나님의 자신의 신성의 능력이 우리의 온전한 충분으로 나타내지는 자원하는 연약함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9 내게 이르시기를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고린도 후서 12:9)

V. 하늘에 계신 우리의 아버지께 기도하는 법을 배우기  
1 …제자중 하나가 여짜오되 주여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친 것과 같이 우리에게도 가르쳐 주옵소서.” 2 예수게서 이르시되 너희는 기도할 이렇게 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 11:1-2)

A. 예수님이 설교하시고, 치료하시고, 구원하시고, 예언하시고, 기적을 행하실 예수님의 제자들은 그와 함께 하였다. 그러나 아무도 어떻게 기적을 행하는지, 예언하거나 가르치는 방법을 가르쳐 달라고 그분께 요청하지 않으셨다. 그들은 그들이 예수님의 사역에 있어서 증인이 되는 것은 하늘과 직접적인 연결, 아버지와 단둘이 기도하는 비밀스러운 장소였던 것을 이해했다.

B. 기도할 우리의 첫번째로 우리의 요구를 생각하게 되지만, 예수님은 우리를 첫째로 하늘에 계신 하나님 자신께로 이끄신다- 아버지 자신. 그분은 우리가 기도하는 대상이 누구인지에 대해 말씀하시는데, 이것은 요청 자체보다 중요하다. 계시록 4장은 하늘 보좌에 앉아 계신 우리 아버지에 대한 서술적 묘사를 보여 주고 있다. 우리는 우리의 주의를 하늘의 아버지 그분께 맞추어질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대로 기도하기 시작한다.

1. 우리의 요청은 중요하지만, 하늘에 계신 아버지가 우리의 모든 자원이며 우리를 갈망하고 있다는 계시를 갖지 않으면, 요구사항은 우리를 압도해 버릴 것이다.

2. 우리가 아버지와 하늘보좌에 연결되어 있을 , 우리의 기도는 원근법적으로 놓이게 된다. 하나님의 무한한 자원들과 우리의 아버지로서 우리를 향한 그분의 마음을 알게 됨으로써 우리는 우리의 기도가 응답될 때까지 믿음으로 기도하며 기대감과 자신감으로 살게 된다.

씨앗을 심으십시오.

기독교는 역설의 종교입니다. 살고자 하는 자는 죽고 죽고자 하는 자는 삽니다.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집니다. 그리고 움켜쥐는 사람은 가난하게 되고 손을 펴서 주는 사람은 부요하게 됩니다.

성경은 우리가 필요한 것들을 얻으려면 먼저 주어야 한다는 것을 여러 곳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받기 원하는 자는 주라!" 이것이 씨앗 신앙의 번째 원리입니다. 그리고 요절은 누가복음 6:38절입니다.

"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것이니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너희의 헤아리는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
빌립보서 4:19절은 물론이요, 구절도 암기하시기 바랍니다.

받는 것은 주는 것을 뒤따릅니다. 바침의 기회를 거절하는 것은 받을 있는 기회를 거절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바칠 있는 기회를 우리가 이를 받아들이면 그것이 받을 있는 기회가 됩니다. 우리는 숨을 때마다 공기를 들이마셨다가 내뱉습니다. 공기를 마시기 위해서는 내뱉어야 합니다. 농사하는 농부는 땅에 주어야 합니다. 그는 씨를 심어야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잡초 이외에 아무 것도 수확할 없습니다. 그러므로 씨앗을 심는 것은 필요한 일입니다.

우리는 십일조를 드려야 하지만 씨앗 신앙은 십일조를 드리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씨앗 신앙과 십일조는 다릅니다. 십일조는 어떤 수확이 있은 연후에 그것에서 십분의 일을 바치는 것입니다. 반면에 씨앗 신앙은 우리가 받을 있도록 드리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받은 후에 주는 것이 아니라 받기 전에 주는 것입니다. 농부는 항상 밭에 씨앗을 먼저 뿌립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성경이 약속하고 있는 축복을 누리려면 씨앗 헌금을 드림으로 먼저 축복의 씨앗을 심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씨앗을 심을 얼마나 심어야 할까요?
오랄 로버츠 목사님은 "당신이 하나님께 바치려할 너무 많은 것으로 출발하지 마십시오. 당신의 신앙 정도에서 출발하십시오"라고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무리하게 시작부터 너무 많이 하지 말고 여러분의 믿음대로 시작하십시오. 그렇게 해서 작으나마 수확의 기쁨을 맛보십시오. 일단 수확을 함으로써 씨앗 신앙이 실제로 작용한다는 것을 알게 되면 여러분은 누가 강요하지 않아도 많이 심고 싶어하게 것입니다.

한편, 성경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내가 형제들로 먼저 너희에게 가서 너희의 전에 약속한 연보를 미리 준비케 하도록 권면하는 것이 필요한 생각하였노니 이렇게 준비하여야 연보답고 억지가 아니니라. 이것이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둔다 하는 말이로다. 각각 마음에 정한대로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

이와 같이 적게 심은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은 자는 많이 거둡니다. 이것이 만고의 진리입니다. 그러므로 있는 많이 심는 것이 좋습니다. 많이 심을수록 많이 거둘 있기 때문입니다.

나아가서 우리는 좋은 씨를 뿌려야 합니다. 농부가 씨를 뿌릴 좋은 씨는 먹어버리고 부실한 것들을 뿌리는 보았습니까? 보셨지요? 농부는 갖고 있는 가장 좋은 것을 씨로 뿌립니다. 씨앗이 좋은 것이 아닐 그것은 싹이 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자라더라도 수확이 적게 나오든지 아니면 전혀 없든지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있는 좋은 씨를 뿌려야 합니다.

"
씨앗 신앙의 기적"이라는 책에서 오랄 로버츠 목사님은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
당신이 바칠 가장 좋은 것으로 바쳐야 한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그리고 나서 주님의 가장 좋은 것을 구하십시오. 희생의 정도가 만큼 축복의 정도도 큽니다. 예수님은 '네가 헤아리는 헤아림으로 너도 도로 헤아림을 받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고통의 풍랑 위를 걸을 "라는 책에 보면 오랄 로버츠 목사님의 이런 간증이 나옵니다.
툴사에 위치한 교회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교회는 흑인들 사이에 세워진 침례교회였습니다. 교회의 담임목사는 감옥에서 예수님을 만나 소명을 받았습니다. 그는 감옥에서 나온 신학을 공부하기 시작했고, 목사안수를 받아 툴사에다가 교회를 세웠습니다. 그런데 어찌나 사람들이 많이 몰려드는 교회가 비좁아 건물을 신축해야만 했습니다.

번은 오랄 로버츠 목사님이 교회에서 설교를 하게 되었습니다. 설교가 끝난 그는 씨앗을 심는 믿음을 통한 가지 기적의 열쇠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사람들에게 그들이 갖고 있는 지폐 중에서 가장 것을 하나님 앞에 드리라고 요청했습니다. 그리고 그냥 드릴 것이 아니라 그들의 삶에 있는 어떤 절실한 문제의 해결을 위해 드릴 것을 부탁했고, 그로써 하나님이 그의 풍성하심을 따라 그들의 모든 필요를 채워주실 것을 기대하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 앞에 자신들의 가장 좋은 것을 먼저 드리고 다음에 하나님께 가장 좋은 것을 구하고, 그것을 기대하라고 부탁했습니다.

사람들은 교회의 헌금 드리는 관습에 따라 줄을 서서 앞으로 나왔습니다. 그리고 남녀노소 없이 모두들 자신이 지닌 가장 큰돈을 헌금함에 넣었습니다. 모든 회중들이 주님께 헌금을 드릴 눈물을 흘리면서 기뻐했습니다. 그런 광경은 오랄 로버츠로서도 처음 보는 광경이었습니다.

일이 있은 주의 수요일에 교회의 과부가 담임목사님에게 전화를 했습니다. 여자 분은 나이가 많고 교회 안에서 영향력이 있는 분으로서, 모든 사람의 사랑과 존경을 받는 여인이었습니다. 여자 성도님은 목사님에게 빨리 주십사고 부탁을 했습니다.

목사님이 집에 오자 여자 분은 지갑을 열어서 닳아빠진 20 짜리 지폐 장을 목사님께 건네주었습니다. 깜짝 놀란 목사님이 "자매님, 이것은 너무 큰돈입니다. 우리보다는 당신에게 돈이 필요합니다"라고 만류했습니다. 그러자 그녀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
목사님, 들어보세요. 지난 주일날 오랄 로버츠 목사님은 우리가 가진 가장 지폐를 하나님 앞에 드리라고 말씀하셨어요. 목사님은 자기의 음성이 아니고,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라고 하셨어요. 만약 하나님의 말씀이 그분을 통해서 나왔다면,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렇게 하기를 원하신다는 것과, 그럼으로 인해서 우리의 가장 필요를 채워주실 있다는 사실을 우리가 깨닫게 거라고요. 그런데 나는 주님께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단지 오랄 로버츠 목사님 자신의 말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던 대로 5센트 짜리 개만을 드렸습니다. 그러나 바로 이후부터 나는 오랄 로버츠 목사님이 아닌, 주님의 음성을 듣게 되었습니다. '너에게서 지폐를 내어라. 그리고 나서 너의 가장 필요한 것을 내가 채워줄 것을 믿으라!' 20 짜리 지폐는 필요한 때를 위해서 내가 저축해 두었던 돈입니다. 하나님께서 필요한 때가 바로 지금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내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며, 그렇게 함으로써 주님이 그의 종을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실 있습니다. 목사님, 이제 20불을 거절하지 않으시겠지요? 그렇게 되면 제게서 기적을 빼앗으시는 결과가 됩니다. 그러니 받으세요." 

목사님은 눈물을 글썽거리면서 돈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과부가 다시 이렇게 말했습니다. "목사님, 저는 수년 동안을 두려운 생각 속에서 살았습니다. 제가 드리는 적은 헌금, 그것을 저는 그다지 즐거운 마음으로 드리질 못했습니다. 나는 내가 드린 것을 잃어버린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두려워했습니다. 그것을 되돌려 받지 못할 같았지요... 그런데 오랄 로버츠 목사님의 말씀을 통해서 예수님은 나의 돈을 필요로 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대신에 내가 하나님께 드리는 것은 그것을 통해서 내게 다시 되돌려주실 있게 하기 위함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나는 주님의 사업을 위해 가장 큰돈을 드린 것입니다. 이제 나는 달라졌습니다. 나의 영혼은 평안합니다. 주님께서 나를 돌보아주실 것을 믿습니다. 다시는 걱정할 필요가 없을 거예요. 그리고 나는 앞으로 더욱 많은 씨앗을 심을 계획입니다."

일이 있은 부인은 새로운 사람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녀의 필요한 것들을 얼마나 많이 채워주시는지 교회에서는 더이상 어떤 것도 가져다 필요가 없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일은 교회의 모든 성도들을 크게 고무시켰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부인처럼 좋은 씨를 심으십시오. 여러분이 가진 가장 것을 심고 기적을 기대하십시오. 그리고 필요가 크면 클수록 금액을 심으십시오. 하나님의 기적을 경험하게 것입니다.

그런데 제가 이런 말을 해주면 종종 이렇게 말하는 사람을 만납니다. "그러나 드릴 있어야 드리지요. 저는 너무나도 궁핍하기 때문에 드릴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오랄 로버츠 목사님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
누구나가 있는 것을 갖고 있습니다. 그것을 생각해 보십시오... 만일 당신이 아무것도 있는 것이 없었다면 하나님은 주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아마도 성경에서 가장 것이 없는 사람이 있었다면 엘리야가 찾아간 사렙다 과부였을 것입니다. 당시 기근이 몹시 심했습니다. 과부에게는 조각 떡을 구워만들 밀가루와 기름 방울이 전부였습니다. 그것으로 마지막으로 떡을 만들어서 사랑하는 자식에게 주고 죽을 작정이었습니다. 이런 과부가 드릴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런 극한 상황에 ?? 과부에게도 드릴 것을 요구하셨습니다. 엘리야는 과부에게 떡을 자신에게 가져오라고 했습니다. 놀랍게도 과부는 경멸하는 눈초리로 쏘아보거나 히스테리칼하게 반응하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엘리야의 말에 순종하여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심었습니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발생했습니다. 가뭄이 지나가도록 밀가루 통에서 밀가루가 떨어지지 않고 기름통에서 기름이 떨어지지 않은 것입니다. 결과 과부와 아들은 기근이 지나도록 날마다 하나님의 기적을 보며 살았습니다.

저는 하나님의 사람에게 식사 대접 번하고 이렇게 축복을 받은 사람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도 저와 생각이 같을 것입니다. 그러면 무슨 엄청난 재산을 바친 것도 아니요, 식사 대접 것뿐인데 어떻게 이런 축복을 받을 수가 있었을 까요? 왜냐하면 돈의 가치는 사람 따라 다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의 세계에서는 돈이 액수대로 평가를 받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중심을 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서는 돈이 액수대로가 아니라 바치는 사람이 느끼는 대로 돈의 가치를 인정 받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에서 이와 같은 하나님의 계산법을 수가 있습니다.

"
예수께서 연보 궤를 대하여 앉으사 무리의 연보 궤에 넣는 것을 보실 여러 부자는 많이 넣는데 가난한 과부는 와서 렙돈 고드란트를 넣는지라.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가난한 과부는 연보 궤에 넣는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 저희는 풍족한 중에서 넣었거니와 과부는 구차한 중에서 자기 모든 소유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 하셨더라."( 12:41-44)

똑같은 액수를 드리더라도 사람의 형편이 어려우면 어려울수록 하나님 앞에서는 돈이 가치가 있습니다. 바꾸어 말해서 그것은 상대적으로 좋은 씨앗이고, 따라서 가장 풍성한 열매를 맺습니다. 이런 측면에서 궁핍할 때야말로 최고의 씨앗을 하나님께 심을 있는 절호의 기회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심을 것이 없다 라고 말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가지고 있는 적은 것이라도 심으십시오. 하다못해 천원이나 혹은 백원이라도 심으십시오. 하나님께서 그것을 통해 경제적인 기적을 이루어 주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