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6/2010

하나님의 사랑 11 - 구원은 하나님의 선물

너희가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膳物)이라 행위에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에베소서 2:8,9).

앞에서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救贖) 사함을 받았다는 말씀을 배웠습니다. 죄 사함 받았다는 것이나 구원받았다는 것이나 같은 말씀입니다. 모든 죄 값을 예수님이 치르심으로 우리는 죄 사함을 받았습니다. 믿든지 아니 믿든지 자기의 죄 값은 치러졌습니다. 다만 그 사실을 믿어야 그것이 자기 것이 됩니다. 하나님께서 내 죄를 사해 주셨다는 사실을 내가 믿으면, 나는 죄 사함을 받습니다. 그것이 구원받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구원하시는 방식이 그것입니다.   

그 사실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것은 순전히 하나님의 은혜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그것은 우리에게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선물입니다. 독자께서도 선물을 받아보셨을 것입니다. 선물 받을 돈을 주고받습니까, 거저 받습니까? 만 원짜리 선물 받을 때 선물 주는 사람에게 얼마 줍니까? 5만원이나 10만 원짜리 선물 받을 때 혹은 500만 원짜리 선물 받을 때 어떻게 해야 합니까? 고맙고 미안하니까 그 때는 500원 정도 줘야 합니까? 아닙니다. 그랬다가는 선물 준 사람의 마음만 상합니다. 아무리 비싸도 그 값은 선물 마련하는 사람이 이미 다 지불했고, 받는 사람은 거저 받는 것입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대가는 하나님 편에서 비싸게 지불하셨습니다. 그 값은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치룰 수 없을 만큼 비쌉니다. 하나님께서는 나를 구원하시려고 자기 독생자(獨生子)를 보내어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피 흘리심으로, 우리의 죄는 사함을 입었습니다. 그 사실을 믿는 것이 하나님의 선물을 받는 것입니다. 선물은 받으면 됩니다. 받으면 내 것입니다. 그러나 선물 주는데도 받지 않으면 내 것이 안 됩니다.  

예를 들어, 시계를 어떤 사람에게 선물로 준다고 합시다. “이 시계가 필요할 것 같아 선물합니다” 라며 선물을 주는데 “미안해서 받지 않겠습니다”라며 거절합니다. “성의이니 받으세요” 라고 계속 권유하는데도 “받지 않겠습니다”라며 끝내 거절하면, 선물 주려는 사람은 “그렇게 받기 싫으시다면…” 하면서 주려던 선물을 거두어 가버렸습니다. 나중에 “그때 받을 걸” 하고 후회하지만, 이미 늦었습니다. 좋은 뜻으로 주는 것은 고맙게 받는 것이 예의입니다. 선물 주고 싶어 주는데 이쪽에서 끝까지 거절하면, 주는 사람은 얼마나 기분 나쁘겠습니까.

믿는 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을 받는 것입니다. 죄 사함, 즉 구원을 하나님께서 주시면, “예, 감사합니다” 하고 받는 것이 믿는 것입니다. 받는 것이 순종이고 받지 않는 것이 불순종입니다. 그 ‘죄 사함’의 선물을 받으면 구원이고 받지 않으면 멸망입니다. 죄를 많이 지어서가 아니라, 이 큰 하나님의 은혜를 받지 않음으로 인해 지옥에 가는 것입니다.

그 “죄 사함“이라는 선물은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도 그에 대해 자랑할 수 없습니다. 무엇을 한다고 해도 나는 여전히 지옥 갈 죄인일 뿐인데,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해 주셨습니다. “나의 평생 자랑은 십자가뿐이로다”(찬송가). 그 은혜에 기쁘고 감사해서 주를 위해 살아가는 것입니다. 아래에서는 구원에 대해 다른 각도에서 더 자세하게 살펴보고자 합니다

<출처:생명의말씀선교회>

하나님의 사랑 10 - 죄와 불법을 다시 기억지 않음

저희 죄와 저희 불법을 내가 다시 기억지 아니하리라 하셨으니 이것을 사하셨은즉 다시 죄를 위하여 제사드릴 것이 없느니라”(히브리서 10:17,18).  

예수님이 값을 완전히 지불하셨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는데, 그렇다면 죄가 없어지는 곳이 어디입니까? 마음에서 입니까, 하나님 마음에서 입니까? 죄는 죄를 용서해 주는 분의 마음에서 없어집니까, 용서받는 사람의 마음에서 없어집니까? 죄가 없어지는 장소는 용서해 주는 사람의 마음입니다. 가령 어떤 애가 특별히 잘못한 것도 없는데, 제가 화가 나서 뺨을 세게 때렸다고 합시다. 때리고 나서는 ‘그렇게 때릴 것까지는 없었는데’ 하고는 금방 잊어버렸습니다. 맞을 만큼 잘못한 것도 없는데 홧김에 때렸으니까, 제 행동이 그 아이에게 있어서는 저의 죄나 마찬가지입니다.

저는 잊어버렸는데, 그 아이는 저를 볼 때마다 “잘못도 없는데 저 아저씨가 나를 때렸지. 다음에 두고 보자. 당신은 늙고 나는 힘세어지면 그 때 두고 보자”고 마음에 응어리를 안고 삽니다. 그런 경우 그 죄가 있는 곳은 어디입니까? 때린 내게 있는 것이 아니라, 맞은 그 사람 마음 속에 있습니다. 그 사람의 마음에서 용서가 되지 않으면 죄가 없어지지 않습니다. 그 사람의 마음에서 용서되면 죄가 없어지듯이, 우리 죄도 용서해주시는 하나님의 마음에서 없어져야 합니다.  

“저희 죄()와 저희 불법(不法)을” 하나님께서 다시 기억지 아니하시는 근거는 무엇입니까? 그것들을 “사하셨은즉”, 즉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와 불법을 예수님의 피로 말미암아 다 사하셨기 때문입니다. 이미 완료(完了)하신 일입니다. 그래서 “다시 죄를 위하여 제사드릴 것이 없느니라”고 하신 것입니다. 죄와 불법은 사람이 하는 어떤 일로도 없어지지 않고 오직 피 흘려 죽어야 하는데, 그 대가를 하나님은 예수님에게서 이미 받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더 이상 죄를 없이 하기 위해 드려야 할 어떤 제사도 필요 없게 되었습니다.   

이 말씀을 읽고도 “성경은 그렇게 돼 있네요. 성경은 그렇게 돼 있지만, 어디 죄가 없어졌는지 안 없어졌는지 보자”하면서 자기 속을 들여다보는 사람도 있습니다. “에이, 새까맣게 그대로 있는데, 뭘”. 자기 마음 속 들여다봐야 아무것도 없습니다. 자기의 마음을 믿는 자는 미련한 ”(잠언 26:26)라고 했습니다. 왜 자기의 마음을 들여다봅니까? 하나님의 마음을 믿어야 됩니다. 하나님의 마음이 보입니까? 성경말씀이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보십시오. 하나님 마음에서 죄를 기억하지 않으신다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내가 어떤 사람에게 죄를 지어 마음이 괴롭고 답답하다고 합시다. 그 사람이 나를 볼 때마다 ‘저 사람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언젠가는 그 죄를 문제 삼아 나를 잡아넣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항상 불안합니다. 그래서 하루는 그 사람을 찾아가 “선생님, 몇 년 전에 선생님한테 이런 저런 죄를 지은 것이 있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너무 너무 괴로워 용서를 받으러 왔습니다”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러자 그 사람은 “원 별 말씀을 다 하십니다. 그거 예전에 다 용서하고 기억도 안합니다” 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아 그래요? 그거 참말입니까?” “아∼ 참말이고말고요.” “아이구,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이렇게 되면 죄 때문에 더 이상 걱정할 필요 있습니까, 없습니까? 이미 용서했고 그 사람 마음에 기억도 안한다고 했으면 다 해결된 것입니다. 만일 내가 그 사람한테 죄 지은 것을 아는 어떤 사람이 내게 와서 “당신 죄 지은 것 있잖아. 그 사람에게 일러 준다. 나쁜 짓 한 것 다 일러준다. 안 일러줄 테니까 돈 좀 내놔” 한다면 겁납니까, 안 납니까? 그 사람이 이미 다 용서했다고 했는데 겁날 것이 뭐 있습니까. “일러줘라! 일러줘!”하며 당당할 것입니다. 만약 그 사람에게 일러주면 그 사람이 “예끼 나쁜 사람. 내가 다 용서했고 다 해결된 문제인데 왜 고자질하는 거야. 나쁜 사람 같으니라구. 저리 가!”하고 쫓아 버릴 겁니다.

마귀는 우리로 죄를 짓게 해 놓고는 ‘너, 하나님한테 일러준다’, ‘너 같은 것은 안받아준다’, 그리고 ‘너 같은 것은 천국에 못 간다’고 자꾸 송사합니다. 그러할지라도 하나님의 그 말씀을 믿는 사람은 ‘마귀야! 하나님이 내 죄를 기억치 않는다고 말씀하셨다. 최고 재판장이 내 죄를 없다고 하셨다. 눈감아 주는 것이 아니라 합법적으로 죄를 다 갚아 주셨기 때문에 없다고 했는데 무슨 걱정이냐?’며 당당할 수 있습니다. “기억지 아니하리라”고 하신 하나님은 거짓말하지 않으십니다.  

믿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님께서 나 같은 죄인을 대신해 죽으시고 피를 흘리셨는데도 내 죄가 사해지지 않습니까? 당연히 사해지고 말고요. 내 죄가 아무리 커도 예수님의 공로는 더 큽니다. 내 죄보다도 하나님의 사랑은 더 큽니다. 예수님의 피는 내 죄를 영원히 사하고도 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죄를 인하여 여호와의 손에서 배나 받았느니라”(이사야서 40:2)고 말씀하셨습니다. 10억원 빚졌으면 20억원 갚았고, 100억원 빚졌으면 200억원 갚았습니다. 아주 넉넉하게 갚으셨다는 말씀입니다. 또한 하나님은 내 죄를 기억지 않는다고 말씀하셨으니, ‘예. 하나님의 말씀은 진리입니다. 감사합니다’ 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성경말씀을 듣고서 한다는 소리가그래도 믿을 화끈한 것이 있다고 하던데. 오는 없나요?”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성경에 “믿고 화끈하면 구원받은 것이다”고 말씀했습니까? 사실을 믿는 데 화끈한 체험이 왜 필요합니까? 어떤 아들이 아버지에게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그래서 아버지께 용서를 구했습니다. “아버지, 용서해 주십시오.” 그러자 아버지는 “그래, 그래. 용서했다. 걱정하지 마라”고 했습니다. 아들이 “아버지! 용서했다고 하시지만, 화끈한 뭣이 없네요”라고 했습니다. 아버지는 “그럼 화끈하게 해 주지. 용서했다” 하면서 따귀를 ‘딱!’ 때려 화끈하게 해주어야겠지요. 그랬다면 둘 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용서했다고 했으면 된 것이지 또 무슨 화끈한 것이 필요합니까. 요즘 사람들은 별 이상한 것에 의지하는 경향이 많습니다. 성경말씀이 하나님 말씀이자 하나님  자신입니다. “눈에는 아무 증거 아니 보여도 귀에는 아무 소리 아니 들려도 하나님의 말씀 위에 굳게 서 감정을 버리고 말씀에 서니 불완전한 구원 완전해지고 내가 붙잡던 것 주가 붙드네”(찬송가). 그렇습니다. 감정에 의지하지 않고 말씀에 서면 불완전한 구원이 완전해집니다. “예수 나를 죄악에서 구원하셨단 하나님의 말씀에 굳게 서 나는 믿습니다”(찬송가). 어디에 굳게 서서 믿습니까? 말씀에 굳게 서 믿습니다. 성경 말씀만 믿으면 됩니다. 그것이 믿음입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로마서 10:17).

말씀 그대로 믿으면 됩니다. 하나님이 우리 죄를 사()했다고 성경을 통해 말씀하셨으면 사한 것입니다. 누가 만일 “예수가 십자가에 죽었어도 내 죄는 사하지 않았다”고 한다고 합시다. 그렇다고 그의 죄는 사하지 않은 것입니까? 아닙니다. 성경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었으므로 네 죄는 사했다고 선포했다면, 본인이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든 죄 사함은 이루어진 것입니다. 기억치 않는다고 하나님께서 말씀했으면 기억하지 않는 것입니다. 죄를 영원히 사했다고 했으면 영원히 사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인데도 안심이 안 됩니까? 그래도 믿지 않는 사람들은 예수님의 피를 도랑물처럼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피가 내 죄를 어떻게 사하냐?”는 사람은 하나님 말씀을 완전히 거짓말로 여기는 것입니다. 자기 죄가 큰 줄은 알면서 예수님의 공로와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큰 줄은 모릅니다. 예수님의 보혈의 공로는 우리의 죄를 영원히 사하고도 남습니다. 그 사랑을 배척할 수 있다면 그것이 인간이 범할 수 있는 가장 큰 죄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사함을 받았으니”(에베소서 1:7).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 즉 얼마든지 주시는 풍성한 은혜를 따라 예수님의 피로 말미암아 우리는 구속(救贖) 곧 “죄 사함을 받았”습니다. 그 피로 죄 사함을 장차 받을 것이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흘리신 피를 통해 하나님께서는 이미 우리 죄를 사하셨습니다.

가령 밤중에 “지금 밤입니까, 낮입니까?”라거나 “지금 밤인 것을 믿습니까?”라고 질문을 받는다면 어떻게 대답하겠습니까? “예, 밤인 것을 믿습니다”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또 “정말로 밤입니까? 밤인 것을 확실히 믿습니까? 밤이라고 왜 그렇게 철석 같이 믿습니까?”라고 질문을 받는다면, 아마 당신은 “밤이니까 밤이라고 믿지요” 하고 대답할 것입니다. 만일 “이렇게 환한데 낮이라고 좀 믿으면 안 되나요?”라고 물을지라도, 역시 대답은 같을 것입니다. 믿는다고 밤이 되는 것이 아니라 밤이기 때문에 밤인 것입니다. 밤이라는 분명한 사실 때문입니다.

우리의 믿음이라는 것도 이미 완성된 사실에 근거한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만일 밤을 낮이라고 우겨댄다고 해도 그것 때문에 밤이 낮이 되지는 않는 것처럼, 우리의 믿음도 우겨서 그렇게 된 것은 아닙니다. 죄 사해 주신 것을 확실히 믿는 이유는 죄 사해 주신 것이 사실인 까닭입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것이 사실이고, 십자가에 죽으신 것과 부활하신 것이 사실이며, 많은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승천하신 것이 사실입니다. 성경은 그 사실을 설명합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피로 인해 우리 죄를 사해 주셨습니다. 그것이 사실이기 때문에 우리 죄가 사해졌습니다. 다른 이유가 있어서가 아닙니다. 믿어서 죄가 사해진 것도 아닙니다. 사해 주신 것이 사실이니까, 우리는 그 사실대로 믿는 것입니다. “다 사해 주지는 않았다”고 하는 것은, 그 사실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흘리신 피로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습니다.  

너무나 엄청난 사실이라 믿지 못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만일 누가 그럴만한 이유도 없이 성경책만 한 금덩어리를 “이것 그냥 가지세요!” 하고 내게 준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에이, 농담 마십시오” 하겠지요. 사람들에게 구원(救援)이라는 것도 비슷한가 봅니다. 며칠 동안 성경강연회를 들으면서나, 독자의 경우처럼 전도용 책자를 보시면서 “구원받아야 된다”고 해서 굉장히 어려운 일인 줄 알았다가, 복음(福音)을 접하고 보니 구원받는다는 것이 너무 간단합니다. 그래서 “그렇게 구원받아야 한다, 거듭나야 한다고 뜸을 들이더니 이렇게 간단하냐? 하늘의 별따기처럼 어려운 줄 알았는데, 너무 허망하다”며, 너무 쉬워서 못 믿겠다는 사람도 있습니다.

믿는 우리에게나 쉬운 일이지, 우리를 구원하시는 것이 하나님께는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아십니까? 앞에서 말씀드린 대로 우주 만물의 창조는 “말씀으로” 하셨지만, 인간을 구원하신 일은 하나님도 말씀만으로 하지는 못하셨습니다. 그 일만은 하나님의 독생자를 이 땅에 육신으로 보내셔서 십자가에 피 흘려 죽여야만 했습니다. 수천 년 동안 계획하시고 자기 독생자를 보내어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는 그 엄청난 대가를 치러서 우리를 구원하셨는데, 그것이 쉬운 일인지 아십니까? 구원의 선물을 받는 사람은 그냥 받으면 되지만, 준비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희생과 고통과 죽음으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이용자가 전기 켜는 것이야 쉬운 일입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그 전기를 편리하게 사용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노력과 시간과 돈이 바쳐졌는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전기를 발명하면서 들인 노력, 발전소 세워 전기를 얻고 또 그것을 가정까지 끌어오기 위해들인 엄청난 노력과 비용 등을 생각한다면 그것은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그와 같이, 믿는 것은 간단합니다. 믿는 것이니까 쉽습니다. 무엇을 하는 것이 아니라, 이루어져 있는 것을 그냥 받아들이면 되기 때문입니다.

<출처:생명의말씀선교회>

하나님의 사랑 9 - 영원한 속죄, 영원한 구원

그리스도께서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크고 온전한 장막으로 말미암아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永遠) 속죄(贖罪)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히브리서 9:11,12).

구약시대에 이스라엘 사람들은 양이나 염소나 송아지를 잡아 속죄 제사를 드렸습니다. 예수님이 오시기까지 구약시대 사람들은 오랫동안 양이나 염소 같은 짐승을 잡아 제사했습니다. 이러한 것들은, 앞에서 살펴본 바 있는 것처럼, 약속어음을 우선 끊어 주는 것과 같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멀리서 바라보고 믿은 것입니다. 그런데 약속어음만 계속 끊어주면 어떻게 합니까? 실제로 때가 되면 돈을 지불해야 하듯이, 염소와 송아지 피로 제사 드리는 대신에 실체되신 예수님이 오셔야 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오셔서 짐승의 피 아닌, 흠도 점도 없는 어린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영원한 속죄 제사를 단번에 완성하신 것입니다. 인류의 시작부터 끝까지 시간을 초월해 효과를 갖도록 예수님은 영원한 속죄(贖罪)를 이루시고 단번에 하늘 성소에 들어가셨습니다.

속죄(贖罪) 예수님에 의해 우리 값이 치러졌다는 뜻입니다. 그로 인해 우리는 하나님께 사함을 받았습니다. “지극히 화평한 맘으로 찬송을 부름은 어린 양 예수의 그 피로 속죄함 받았네 속죄함 속죄함 주 예수 내 죄를 속했네”(찬송가 189). 우리의 죄 값(죽음)을 대속(代贖)하신 일은 예수님이 하셨고, 예수님이 하신 그 일로 인해 우리가 지불해야 할 죄 값은 없어졌습니다. 인간이 하나님께 죄 때문에 더 이상 두려워할 일이 없도록 해 두셨습니다.

죄 값으로 지불하신 예수님의 피는 예수님이 오시기 전의 사람들의 죄는 물론이고 인류역사 끝 날까지의 모든 사람의 죄를 다 씻으셨습니다. 아담부터 시작해서 마지막에 태어날 사람까지, 모든 인간은 예수님의 피로 인해 하나님께 죄 사함을 받은 것입니다. “영원한 속죄”를 이루신 것입니다.

성경에 영원(永遠)이라는 말은 두 가지 뜻으로 나와 있습니다. 단순히 긴 시간이나 역사를 영원이라고 표현한 것이 그 하나이고, 시작도 끝도 없이 계속적으로 진행되는 무한대의 개념의 것이 다른 하나입니다. 우리는 한정된 시간 속에 살고 있으므로 몇 천 년 전이니, 몇 천 년 후이니 하는 시간 개념이 있지만, 하나님께는 그런 것이 없습니다. 천국에 가면 거기에는 시계가 없고 달력도 없을 것입니다. 얼마의 시간이 흘러가는지 그런 것 계산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같이 영원 속에 들어가 버립니다.

하나님은 영원하십니다. 영원하신 하나님께서 인간 역사를 시작하셨습니다. ()과 같은 영원의 세계에서 한 자락 베어내어 펴놓은 것이 인간 역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느 날 그렇게 시작된 역사가 쯕 진행되다가 또 어느 땐가 끝나면 다시 영원이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인생을 포함한 인류의 역사는 영원과 영원 사이의 한 막간에 불과합니다. 하나님의 관점에서는 아담 때부터 세상 끝 날까지 단지 하나입니다. 인간이 생각할 때 시간이 긴 것이지, 하나님에게는 아무리 긴 시간도 순간일 뿐입니다.

“영원한 속죄”(eternal redemption)라는 것은 그러한 하나님의 관점에서 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하나님께 드리신 “죄를 위”한 “한 영원한 제사”는 우리를 영원히 온전케하는 효력이 있습니다(히브리서 10:12,14). 우리 모든 죄는 하나님께 영원히, 완전하게 사함을 받은 것입니다. 전 시대를 초월하여 모든 인간에게, 개인에게 있어서는 과거와 현재는 물론 미래까지 그 효과가 미칩니다.

태어나서 오늘까지 사는 동안 지은 모든 죄를 하나님이 사해 주신 것은 말할 나위 없습니다. 구약시대 사람들은 사해 주실 것을 믿었고, 우리는 이미 사해 주신 것을 믿습니다. 그런데, 앞으로 죄 지어도 좋다는 얘기가 아니라, 이후로 살면서 우리는 죄 지을 수 있습니다. 육신이 사는 동안 실수할 있고 잘못할 있습니다. ‘나는 앞으로 번도 짓지 않겠다 다짐할지라도 자기 의지와 관계없이 지을 있습니다. 이후에 짓는 죄는 어떻게 할까요? 그것도 사해 주셨습니까? 앞으로 지을 죄도 물론 사하셨습니다.

누가 그렇다고 했습니까? “이목사가 그럽디다!”라고 하면 큰일 납니다. 성경에 하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성경이 그렇게 증거하고 있으며, 성경말씀에 대해서는 하나님께서 책임지십니다.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라는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변치 않습니다. 하나님의 약속도 변치 않습니다. 영원한 속죄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께 죄 사함 받은 것도 영원토록 효력이 있습니다. 과거의 죄 현재, 그리고 앞으로 지을 죄까지 하나님이 이미 사하셨습니다. “영원토록 내 할 말 예수의 피 밖에 없네. 다시 정케 하기도 예수의 피 밖에 없네”(찬송가).

저는 예전에 강단에서 2년간 설교하던 중 제가 거듭나지 못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이제 죽으면 나는 지옥 가는구나!’ 하고 너무나 답답해서 고민해하던 때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다는 말씀은 귀가 아프게 들었고, 저 또한 그렇게 설교했었습니다. 그런데 복음을 깨우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이 나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셨다는 것이 고맙기는 고마운데, 그런데도 안심이 안 되었습니다. 겉으로 말은 안 해도, 속으로는 ‘가만 있자, 예수님은 천구백 몇 십 년 전에 십자가에 죽으셨고 예수님의 피도 흘러 말라붙어 버렸는데, 그것이 지금 나하고 무슨 상관이 있느냐?’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니까 예수님은 예수님대로 죽으셨고 나는 나대로 죄 때문에 답답했습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이 나와 무슨 관계가 있는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 옛날 천구백년 전에 죽으신 예수님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그것입니다. 이상한 말 같지만, 믿는데 안믿어집니다. 예수님은 예수님 대로 죽고 나는 나 대로 답답하고…. 여러분 어떻습니까?

교회 다니며 예수님 믿는다고 하는데도, 죄 때문에 항상 답답하고 괴롭습니다. 교회 가면 항상 죄 때문에 “주여, 어찌 하오리까?”만 되뇌이며 눈물 흘리며 회개합니다. 믿기는 믿는데 안 믿어집니다. 왜 그럴까요? 그것은 예수님 보혈의 능력이 우리에게 어떤 효력이 있는지를 확실히 깨닫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던 중 1962 10 30일 저녁 8시경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라는 말씀을 듣고 깜짝 놀랐습니다. 저는 그날 그 말씀을 처음 봤습니다. 이전에 그 성경구절을 많이 읽었을 텐데, 그 말씀을 저는 처음 봤습니다. 신학교 다니면서 성경 읽은 것만 해도 신약 50, 구약 30번 정도는 됩니다. 그런데도 그날 처음 이 구절을 봤습니다. 눈에 콩이 박혔다는 말처럼, 제 눈이 가리워 있었기 때문에 못 본 것입니다. 성경은 눈으로 본다고 다 보이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눈을 열어 깨달을 수 있는 영적 지혜를 주셔야 진리를 깨닫습니다.   

예수님이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셔서, 지금도 내 보증인으로 살아 계시다는 그 말씀에 “됐구나. 나도 됐다!”라는 탄성이 터져 나왔습니다. 내 죄가 영원히 사해졌다는 것이 그날 처음 믿어졌습니다. “십자가 십자가 내가 처음 볼 때에 나의 맘에 큰 고통 제하네”(찬송가). 그날 저는 주님의 십자가를 처음 봤습니다. 내 마음에 죄에 대한 고통이 사라졌습니다. “오늘 믿고서 내 눈 밝았네 참 내 기쁨 영원하도다”(찬송가). 얼마나, 얼마나 좋은지. 주님이 내 죄를 영원히 사했다니! 이것이 꿈인가 생시인가 싶어 제 살을 꼬집어 봤습니다.

, 사실이구나! 사형이 확정된 죄수에게 사형집행은 시간문제인데 어느 날 “***번 죄수 나오라”고 불리면, 그날 그는 죽습니다. 그와 달리 어느 날 특별사면(特別赦免)으로 불리움을 받았다면, 그는 사는 것입니다. 우리 사회에서도 어떤 수감자들이 대통령 특사(特赦)로 석방되는 것을 더러 볼 수 있습니다. 만일 정당한 법적 근거가 있는 사면장을 받았다면, 그 죄수는 그것이 꿈인가 생시인가 싶을 것입니다. 감옥 문을 나오면서 얼씨구나 하고 춤이라도 추고 싶을 것입니다.

그 날 얼마나 좋았던지, 저는 그것이 구원인지 거듭난 것인지 몰랐습니다. 단지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내 죄가 영원히 사라졌다는 것이었습니다. “마음에 가득한 의심을 깨치고 지극히 화평한 맘으로 찬송을 부름은 어린 양 예수의 그 피로 속죄함 받았네. 속죄함 속죄함 주 예수 내 죄를 속했네”(찬송가 189) 라는 찬송을 부르고 또 불렀습니다. 이전에도 그 찬송을 많이 불렀습니다. 부흥회 할 때는 열나게 손뼉 치면서 “마음에 가득한 의심을 가지고 지극히 답답한 맘으로 탄송()을” 불렀습니다. 겉으로는 찬송인데 속으로는 탄송이었습니다.

마음에 가득한 의심을 가지고 지극히 답답한 맘으로 불렀었는데, 그제야 비로소 마음에 가득한 의심을 깨치고 지극히 화평한 맘으로 찬송을 했습니다. “확실히 믿기는 어린 양 예수의 그 피로 속죄함 받았네”(3). “금이나 은 같이 없어질 보배로 속죄함 받은 것 아니요 거룩한 하나님 어린 양 예수의 그 피로 속죄함 받았네”(2). 또 부르고 또 불러도 얼마나 좋은지. 이제는 지옥에 갈래야 갈 수가 없습니다. 지옥에도 밑천인 죄가 있어야 가는데, 죄를 다 사함 받았으니 이제는 천국 밖에 갈 데가 없었습니다. 그 은혜가 얼마나, 얼마나 감사하던지….

 나중에 성경을 배우다 보니 그것이 구원(救援)이었습니다. 나중에 보니 그것이 거듭난 것이었습니다. 모든 문제가 다 해결이 된 것이었습니다. 그 날부터 지금까지 36년째입니다. 그 기쁨은 날로 새롭습니다. 성경 전체에서 이보다 더 놀라운 사실은 없습니다. 하나님의 독생자가 십자가에 죽어 피 흘려서 우리 죄를 영원히 사했다는 그 사실보다 더 놀라운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 피에다 무엇을 또 보태야 합니까?

어떤 사람은 한다는 소리가 “피로 우리 죄를 사했어도 그것만 가지고는 천당 못 간다. 또 뭘 하나 더 깨달아야 된다”고 합니다. 또 어떤 이는 예수님이 우리 죄 값을 치루었지만 우리의 선행이 뒷받침되어야 구원이 완전해진다고까지 합니다. 그렇습니까? 예수님의 피가 우리의 죄값을 갚기에 부족합니까? 그래서 예수님의 피에다 또 뭘 보태야 구원이 완전해집니까? 예수님의 공로에 우리가 무엇을 더 보태야 할까요? 예수님의 거룩한 피에다 우리의 행위를 감히 더할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의 피는 우리로 사함을 얻게 주셨고, 예수님의 피는 우리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였습니다. 나는 비록 부족하지만 예수님의 보혈의 공로를 의지하고 하나님께 기도하며, 예수님의 피만 의지하고 하나님 앞에 나아갑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예수님의 피입니다. 예수님의 피는 우리를 지옥 운명에서 구원할 아니라, 천국에까지 인도하는 넉넉합니다.

다만 구원받은 이후에 우리가 하나님께 순종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며 주를 위해 살고 주를 위해 죽기까지 하는 것은, 천국 가는 공로를 보태고자 함이 아니라 너무 기쁘고 감사해서 주님을 위해 살기도 하고 죽기도 하는 것입니다. 기쁘고 좋아서 하는 것 이상의 다른 것은 없습니다. 예수님의 피에다 또 뭘 보태야 된다고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거짓인 줄로 생각하면 틀림없습니다.

영원한 속죄가 아니고서는 구원이 됩니다. 이제까지 지은 죄는 사해졌고 앞으로 지을 죄는 사해지지 않았다면 구원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만일 오늘 이 시간까지 지은 죄만 사했고 앞으로 지을 죄는 사하지 않았다면, 그렇게 구원받은 조금 후에 죄 지으면 어디로 갑니까? “죄의 삯은 사망”이므로, 그 죄 때문에 이제까지 사함 받은 것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만일 이 시간까지 지은 죄만 사함 받았다면, 구원받고 조금 후에 또 죄를 지으면 지옥 갈 테니까 지옥 가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죄 사함 받자마자 즉시 그 자리에서 죽어야 됩니다. 그래야 지옥에 갈 걱정이 없을 것입니다.

그럴 수는 없는 일이고, 우리가 구원받은 이후에 지을 죄를 사함 받고자 한다면 예수님이 또 죽고 또 죽고 자주 죽으셔야 할 것입니다. 성경은 이와 관련하여 대제사장이 해마다 다른 것의 피로써 성소에 들어가는 같이 자주 자기 죄를 드리려고 아니하실지니 그리하면 그가 세상을 창조할 때부터 자주 고난을 받았어야 것이로되 이제 자기를 단번에 제사로 드려 죄를 없게 하시려고 세상 끝에 나타나셨느니라”(히브리서 9:25,26)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피로 영원한 속죄가 되지 않는다면, 구약시대에 끊임없이 양을 잡아 제사했던 것처럼, 예수님은 세상을 창조할 때부터 끝날 까지 계속해서 죽으셔야만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렇게 하지 않고, 자기를 단번에 속죄제사로 드림으로써 영원한 효과를 갖게 한 것입니다. 한 번 죽으심으로써 영원히 죄를 없이 하시려고 세상 끝에 나타나셨고, 그것으로 죄의 심판은 끝났습니다. 구약시대 사람들의 죄도 거기서 끝났고, 신약시대 사람들의 죄도 십자가에서 끝났습니다. 한번에 영원히 끝났습니다. 그것이 영원한 속죄입니다.

뜻을 좇아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 (히브리서 10:10). 그리스도를 대신 죽게 하심으로써 우리 죄를 사해 주시고자 함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나님의 그 뜻을 좇아 예수님의 몸을 단번에 속죄 제물로 드리심으로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습니다. 거룩함을 얻었다는 것은 죄 없이 됐다는 말입니다.

컴퓨터로 전과(前科)를 조회해 보면 어떤 사람은 아주 지저분합니다. 남이 잘 모르니까 뻔뻔스럽게 다니지, 얼굴에 표시라도 한다면 얼굴 들고 돌아다니겠습니까? 그런데 어떤 특별조치로 그 전과를 말소(抹消)시켜 버렸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컴퓨터로 그 사람의 신원을 입력했더니, 전과기록 전혀 없이 깨끗합니다. 그와 같이, 하나님 앞에 있는 범죄기록에서 우리 죄를 싹 지워버린 것입니다.

우리가 죄를 지으면, 그것이 비록 사람끼리 지은 죄일지라도, 그 죄는 하나님 앞에 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법을 범했기 때문에, 사람끼리 용서했다고 해도 하나님이 용서하지 않으시면 소용없습니다. 우리 죄가 사함을 얻으려면 하나님에게서 완전히 죄가 없어져야 합니다.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는 말씀은 내 마음과 생활이 거룩해졌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내게서 죄가 없어졌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우리 죄가 없어졌다는 말입니다. 거룩함을 얻으셨습니까? 우리를 내게 적용시키면 “내가 거룩함을 얻었노라”는 뜻입니다. 그렇게 읽으셔도 됩니다. 하나님 편에 있는 내 죄를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셨습니다.

재차 말씀드리지만,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셨다는 것을 믿는데도 완전한 구원이 이루어지지 않는 이유는 영원한 제사, 영원한 속죄를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피를 부분적으로, 조금만 믿는 것입니다. 영원한 속죄여야 영원한 사함이고, 완전한 속죄여야 완전한 구원입니다. 복음은 완전한 것입니다. 아래 성경말씀을 다음과 같이 자기 이름을 넣어서 읽으셔도 됩니다. “오직 그리스도는 OOO의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사.” 그렇게 읽어도 하나님께서 틀렸다고 하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이 누구를 위해 죽으셨습니까?” 라고 물으면 “예, 온 세상 죄를 위해 죽으셨죠” 라고 대답하고, “또 누구를 위해 죽으셨습니까?” 라고 물으면 “만민의 죄를 위하여 죽으셨죠” 라고 하며, “그럼 또 누구를 위해 죽으셨습니까?” 라고 물으면 “우리를 위해 죽으셨죠” 라고 대답하고, “그럼 당신 죄는 어떻게 됐습니까?” 라고 하면 “나는 죄 때문에 큰 걱정입니다”라고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온 세상, 만민, 우리는 아는데, 거기서 자기는 쏙 뺍니다. 세상 것은 ‘네 것도 내 것, 내 것은 원래 내 것’ 하면서 자기 것 못 찾아 먹을까 봐 기를 쓰면서도, 이것만큼은 자기를 쏙 빼어 놓습니다.

“내 죄는 사했네. 내 죄는 사했네. 주님이 흘리신 그 피로 내 죄는 사했네”(찬송가). 예수님이 치루신 대속으로 온 세상 죄와 같이 내 죄도 사해진 것을 믿는 것이 믿음입니다. 믿음이란 나를 예수님과 1:1로 연결시키는 것입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 예를 하나 들겠습니다. 저녁이 되어 집집마다 전기가 환하게 켜졌는데, 한 집은 여전히 캄캄합니다. 그래서 그 집에서 전기회사에 전화를 했습니다. “여보세요, 전기회사입니까?” “그렇습니다만.” “왜 다른 집에는 전기를 다 보내주면서 우리 집에는 안 보내줍니까? 우리 집은 여지껏 캄캄합니다.” “아니, 그럴 리가 없습니다. 전기야 똑같이 보내는 거죠.” “아, 우리집에는 안 왔어요. 빨리 보내주세요.” “전기 스위치 켰어요?” “스위치가 뭔데요?” “스위치를 켜 보세요.

그 집주인이 다시 전기회사에 전화했습니다. “여보세요, 전기 회사입니까? 전봇대 올라가서 우리집 쪽으로 막 흔들고 두드리고 해도 안 오는데요.” “스위치를 모르세요? 문 옆 벽에 젖꼭지만한 것이 있을 겁니다. 그걸 위로 올려보세요.” “그럴게요.” 전화를 끊고 스위치를 올리니까 전기불이 환하게 켜졌습니다. “우와!” 스위치 켜는데 왜 그렇게 힘듭니까? 전기가 발명되고 발전소가 세워지고 각 가정에 전기시설 된 지가 언제인데. 가정에서는 그냥 스위치만 올리면 되지 않습니까.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 편에서 다 이루어진 것을 믿는, 스위치 켜는 것만큼이나 간단한 것입이다. 이미 이루어진 사실(事實)을 나와 개인적으로 연결시키는 그것이 믿는 것입니다. 온 세상 죄를 사했을 뿐 아니라 내 죄도 사했다고 믿는 것이 믿음입니다.

<출처:생명의말씀선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