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9/2011

십자가에 못박힌 사람

“악을 버리고 선을 행하며 화평을 찾아 따를지어다” (34:14)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과연 무슨 의미를 내포하고 있을까요믿는다는 것은 그분이 어떤 분인가를 아는 것과는 같은 의미가 아닙니다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그분을 진정으로 체험했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신앙의 길을 가는 데 있어 무엇보다 예수님께서 지신 십자가를 내가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 깊이 있게 묵상해 보는 것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우선 내가 십자가를 바라볼 때 어떤 느낌이 드는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십자가를 바라보며 거기에 예수님이 아니라 내가 매달려야 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나를 대신해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다는 믿음과 함께 십자가를 통해 나 자신의 가치와 영적인 자존감을 회복해야 합니다무엇보다 십자가를 보면서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한없는 사랑을 깨달아야 합니다.십자가는 내가 얼마나 큰 죄인지를 깨닫게 하며 큰 사랑을 받은 존재라는 것을 깨닫게 합니다아울러 나를 위해 하나님께서 천국을 예비해 놓으셨다는 귀한 은혜를 깨닫게 합니다.우리가 기독교 교리적으로 무엇인가를 아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십자가의 의미를 정확하게 이해하고 믿음으로 그것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 것은 또한 내가 얼마나 존귀한 자인가를 믿는 것입니다. 우리의 지식이나 물질이나 명예나 지위가 나를 존귀케 하는 것이 아닙니다우리의 현재 상태가 어떻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십자가의 은혜로 말미암아 진정으로 존귀한 존재가 되었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더 나아가 그런 믿음이 커질수록 나뿐만 아니라 믿음 안에 있는 다른 사람들도 그런 존재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의 율법을 완전하게 지킬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의인은 아무도 없기 때문입니다( 3:10). 그렇기 때문에 율법을 완전히 지켜서 살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그래서 이 사실을 잘 알았던 사도 바울은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해 죽었나니 이는 하나님에 대하여 살려 함이라”( 2:19)고 말합니다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로 율법의 속박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로믿음으로 들어간다는 의미입니다.


율법을 통해 바울이 깨달은 것은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이었습니다또한 아무리 율법을 온전히 지켜도 결코 구원에 이르지 못하는 현실을 깨달았습니다율법에 대한 이러한 절망이 바울을 새로운 세계에 눈뜨게 했습니다곧 그리스도를 통한 은혜였습니다그 은혜를 발견했을 때 바울은 용서를 알았고 구원을 보았습니다그래서 바울은 율법에 의존하기를 포기했습니다이런 점에서 바울은 율법에 대해 죽었습니다.


우리는 세상을 살면서 우리 삶이 내 뜻과 내 마음대로 풀리지 않는다고 불평할 때가 많습니다하지만 우리는 그럴 때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보며 진정한 감사와 은혜를 회복해야 합니다매일 매일순간순간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를 더욱 깊이 묵상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목동제일교회 김성근목사)


모든 상황 속에서 주를 기뻐하고 신뢰함

바울은 불의한 벨릭스 때문에 2년이나 넘게 가이사랴에 억울하게 구금되어 있었습니다. 2년간의 시간이 전혀 의미없는 시간은 아니었지만 자유롭게 다니며, 왕성하게 복음을 전파하던 바울의 입장에서는 참으로 답답한 시간이었을 것입니다.
다행히 새롭게 부임해 온 총독 베스도는 신속한 재판 진행(1절), 로마 총독으로서 합리적인 법 집행 의지(4, 5절) 등으로 바울에게 새로운 희망을 던져 주는 듯 했습니다. 하지만 베스도 역시 얼마가지 못해 노련하고 약삭빠른 유대 종교지도자들의 마음을 얻기 위해 바울의 예루살렘 행을 추진함으로 바울의 형편은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고 맙니다.

사실 이런 기다림의 상황을 하나님께서 바울에게 허락하시는 이유는 그의 생명을 살기등등한 유대인들로부터 안전하게 지키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예루살렘을 포함하여 소아시아 어느 지역도 바울의 생명을 담보해줄만한 상황이 아니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총독으로 하여금 2년 넘게 바울을 지키신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바울의 삶의 속도 뿐아니라 안전도 책임져 주셨던 것입니다. 짧은 생각으로 하나님을 원망하지 말고, 바울처럼 모든 상황 속에서 주를 기뻐하고 신뢰함으로 전진하며 돌파할 수 있길 바랍니다.

개인적 유익보다는 하나님 나라를 먼저 생각함.
바울은 베스도 총독을 향해 자신이 결코 유대인의 율법이나 성전이나 가이사에게 죄를 범하지 않았음을 선포합니다. 그리고 로마시민으로서 로마의 최고 법정인 가이사의 법정에서 공정한 심판을 받게 해 줄 것을 요청합니다.
아마도 바울은 2년이라는 시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도무지 하나도 바뀌지 않은 살기등등한 유대인들의 모습을 보며 이렇게 가이사랴에 머물며 지루한 공방을 하는 것보다는 비록 죄수의 몸이고 자유는 없다 할지라도 로마 군인들의 안전한 호송을 받아 로마로 가서 그곳에서 복음을 전하는 것이 훨씬 더 하나님 나라에 유익할 것이라 여겼던 것이 틀림없습니다.

어떤 상황에서든지 자신의 개인적 유익보다는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이룰 수 있는 길이 무엇인지를 먼저 생각하고 고민하는 바울의 모습이 엿보입니다. 어렵고 힘든 상황 앞에서 낙심하여 좌절하지 말고, 이 상황 속에서 주님 나라를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고 그 일에 전력투구하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할 때 우리가 전혀 예상치 못했던 새로운 상황이 열리게 되고, 놀라운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믿는 자는 지체를 하나님께 의의 병기로 드려야 합니다 ]

신자는 죄에 대하여 죽은 대신에 하나님께 대하여는 산 자입니다. 예수님의 죽음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부활에도 적용을 받기 때문입니다.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5절).
그 결과 신자는 사망의 주장을 다시는 받지 아니하고, 사망으로부터 완전한 자유를 획득하게 되었으며,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심과 연합하여 함께 살게 되는 것입니다. 전혀 새로운 삶의 문이 활짝 열린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죄에 대하여는 단호하게 죽은 자로 살아야 하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겨야 합니다.

죄에 대해 살고, 하나님께 대하여 죽었던 옛 삶은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히 새롭게 변화되었습니다. 이제 우리 지체의 용도는 완전히 바뀌었고, 지체의 사용 목적도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전에는 죄가 왕 노릇 하도록 지체를 내어주었고, 몸의 사욕을 만족시키기 위해 지체를 사용했지만, 이제는 하나님께서 왕 노릇 하도록 우리의 지체를 내어드리고,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우리의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헌신하는 것입니다(롬6:1-14) .

일용할 양식   기독대학인회(ESF) 제공

[믿는 자는 지체를 죄에게 주지말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신 것은 온 인류의 죄 때문입니다.
사람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영접할 때, 그의 죄도 십자가에 같이 못 박히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예수님을 믿는 순간 죄에 대하여 죽은 자가 됩니다. 그러므로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구원받기 전의 세상 사람처럼 죄를 지을 수는 없습니다.
물론 신자는 아직 세상에 거하면서 완전한 수준에 이르지 못한 채로 성화의 삶을 살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자와 죄를 짓는 생활은 결코 양립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죄에 대해 죽은 자이기 때문입니다.

죄에 대해 죽었다는 것은 어떤 경우에도 죄 짓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죄와 타협하며 적극적으로 죄를 따르는 것이 불가능해졌으며, 또한 이제는 죄와 싸워 이길 수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믿는 자는 죄짓고자 하는 생각과 끊임 없이 싸워야 하고, 죄 짓고 싶어 하는 지체를 매 순간마다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지체를 죄에게 드리지 않는 생활입니다. 성도는 죄가 더 이상 왕 노릇하지 못하도록 몸의 사욕에 철저히 불순종해야 합니다.(롬6:1-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