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5/2009

자유케 하는 복음

'저희가 대답하되 우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남의 종이 된 적이 없거늘 어찌하여 우리가 자유케 되리라 하느냐'( 8:33)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4:18-19)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케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하리라'( 8:34,36)

믿음의 시기는 구속의 필요성을 느낄 때 - 한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려고 할 때에 알아야 할 필수적인 사항이 있습니다. 그것은 자신이 구속받아야 한다는 필요를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예수 믿으면 천국간다'와 같은 지적인 공식이 아닙니다.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으면 안될 상황에 처해 있음을 아는 사람만이 예수 그리스도를 진심으로 영접할 준비가 된 사람입니다. 이 때가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실제적인 시기라고 볼 수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이 왜 예수를 믿어야 하는 지를 잘 모르고 신앙생활을 시작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습니다. 우리 나라 사람들은 신앙생활의 내용보다는 교회 출석 자체를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을 뿐 아니라, 신앙생활의 이유가 기복적이거나, 다른 사람이나 어떤 힘에 의한 불가항력적 상황일 경우가 많은 것 같습니다. 그러나 어떤 이유로 교회에 나가게 되었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영접할 시기는 자신이 구속받아야 할 필요를 느낄때라는 사실입니다.

구속이란, 자유케 되는 것 - 그러면 구속이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자유롭지 못한 상황에서 다른 사람의 도움으로 놓임을 입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구속의 성격은 스스로 구속할 수 없다는 것이며, 자신을 구속할 자가 따로 있어야 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구속 받아야 할 상황에 처해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는 구속자로 오셔서 자유롭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믿는 자는 예수께서 자유롭지 못한 자신을 구속한 사실을 믿고 받아들여서 그 자유를 누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예수는 믿는데, 그 자유를 누리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첫째 자신이 어떤 상황에 처했는지 모른다는 것이며, 둘째 예수를 믿는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 것입니다.

사람은 타고난 종이다-사람은 타고났을 때부터 자유가 없습니다. 예수께서 유대인들에게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라'(8:3 1-32)라고 말씀하실 때에 유대인들은 '우리는 남의 종이 된 적이 없거늘 어찌하여 우리가 자유케 되리라 하느냐?'(8:33)라고 반문했습니다. 이 유대인들은 성경을 잘 아는 자들이었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성경은 먹는 식사보다도 익숙합니다. 이들의 성경지식은 참으로 박식합니다. 그럼에도 성경의 요점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사람들을 자유케 하기 위해' 왔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자유를 주기 위해 오셨다면 사람들이 자유롭지 못한 '종의 상태'에 있음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성경을 잘 안다는 유대인들이 자신들에게 '자유'가 없음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자유케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유케 하시는 분 - 제가 이 글을 쓰기 시작했을 때, 전에 알고 지냈던 동료 목사님과 전화 통화를 하게 되었습니다. 무려 4년만의 통화였습니다. 책을 좋아하던 그 목사님은 거의 30분 동안 자신의 근황을 장황하게 설명했습니다. 그리고 제게도 화란의 개혁교회 전통과 신앙고백서를 구입해 볼 것을 권유했습니다. 그리고 칼빈의 저서와 주장등도 참고할 것을 덧붙였습니다. 저는 되물었습니다. "목사님은 칼빈의 말을 공부하고 싶습니까? 아니면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았던 칼빈과 같은 사람이 되고 싶습니까?" 나는 이 목사님의 '알고자 하는 열정'과 한 가지라도 더 잘 알아서 '성도들에게 나누어주고 싶은 마음'을 충분히 감지했습니다. 그리고 그 목사님의 말이나 주장이 틀리지 않음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내 속의 답답함이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오신 목적은 우리가 예수님에 대해 또는 성경 말씀과 하나님에 대해 많이 알게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종의 상태에서 자유케 하기 위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아마, 그 목사님은 자신을 이미 '자유케 된 자'로 알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제가 확신하는 것은 '자유케 된 자'는 지식을 추구하지 않을 뿐 아니라, 그 자신도 예수님처럼 다른 사람을 자유케 하는데 온 힘을 기울이게 될 거라는 사실입니다

자유케 된 적이 없는 그리스도인? - 예수님이 오신 목적이 종된 사람을 자유케 하는 것이라면, 그리스도인의 삶도 다른 사람을 자유케 하는 삶이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의 삶은 곧 예수 그리스도의 삶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그리스도인이 예수님처럼 다른 사람을 자유케 하는 삶을 살고 있지 않다면, 단언컨데 그는 자유케 된 적이 없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는 유대인들처럼 자신이 '종의 상태'에 있음을 몰랐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래서 '자유케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적이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초림때는 지금이나 자유케 하는 일을 계속하고 계십니다. 단지 사람들이 자신들이 '종의 상태'에 있음을 모르고 있기 때문에 자유케 하시는 구속자로서의 예수 그리스도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며, 지금 그들이 믿는 예수는 구속자가 아닌 다른 의미의 예수일 뿐입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예수는 복과 행복, 기쁨과 평안, 사후에 천국을 가져다는 주는 분으로만 알기 때문에 그들은 자유를 경험해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유를 경험치 못한 그리스도인의 미래는 참으로 암담합니다.

예수 믿을 자의 다른 표현은 자유케 되기를 원하는 자 - 저는 지금도 그리스도인들을 대할 때에 의아스러운 점은첫째는 사람들이 '종의 상태'에 있는 자신들의 실상을 너무나도 모르고 있다는 점이며, 둘째는 자신이 '종의 상태'에 있음을 아는 사람들이 너무 적다는 사실이며, 셋째는 그중에서도 아주 소수만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유케 됨'을 얻는다는 사실입니다. 구약에서 예언되고 신약의 십자가에서 예언을 성취하신 예수 그리스도는 사람들을 '종의 상태'에서 자유케 하신 분입니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자는 어떤 사람들인가가 분명해집니다. 그들은 종의 상태에서 자유케 되기를 원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자신들이 심각한 '종의 상태'에 있음을 알고 자신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보다도 노예 상태에서 자유케 되는 것을 제 일의 목표로 삼는 사람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이 구속 받아야 할 심각한 상태에 있음을 경험해 보지 못한 사람은 진정한 믿음을 가진 자로 볼 수 없습니다.

그러면 '종의 상태'란 어떤 것일까요?

첫째로 '죄의 종'입니다.  - 아담으로부터 타락한 생명을 이어받는 타고난 사람은 모두 '죄의 종'입니다. 이는 '죄인의 상태'를 스스로 벗어날 수 없어 항상 죄를 짓고 살 수 밖에 없는 존재인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 중에 소수만이 자신이 아무리 선하게 살려고 할지라도 결국 죄를 지을 수 밖에 없는 비참한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속자로 믿을 수 있는 자는 바로 그런 사람입니다. 제가 경험한 사실로는, 참으로 주님 뜻대로 살아보려다가 좌절을 많이 경험한 사람들만이 자신의 비참한 상태를 깨닫고 죄에서 자유케 하시는 주님을 믿게 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처럼 자신이 '죄의 종'이라는 사실에 대해 뼈아픈 고통과 구속의 은혜를 구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예수 그리스도를 바르게 믿지 못하는 것이 틀림없습니다. 뿐만아니라 삶의 열매도 종교적이어서 약간의 도덕적 수준에 그칠 뿐입니다.

죄짓지 않을 자유 - 자신이 '죄의 종'이라는 심각한 상황에 직면해 보지 못한 사람들은 자신들이 미래에 지을 죄까지 모두 용서받았다고 믿고 있기 때문에, 가끔 죄의 행위가 나타날 때 고백하면 그만이라면서 죄의식을 그리 깊이 느끼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따라서 이들은 '죄에서 자유케하시는 예수님'을 경험으로 알지 못합니다. 이들은 십자가의 보혈의 공로로 죄용서 받고 천국간다는 사실을 너무나도 강하게 확신하고 있어서, 자신들에게서 나타나는 '죄의 행위'를 그리 심각하게 생각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죄에서 자유케 된 사람'은 죄를 짓지 않고 사는 것이 정상입니다. 예수님은 ''로부터 자유케 하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예수를 믿는 자는 그분을 의지하여 ''를 짓지 않을 자유를 누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죄로부터의 자유'를 죄를 짓고도 다 용서받았기 때문에, 죄책감도 느낄 필요도 없는 것으로 이해하는 헛된 교리를 퍼뜨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들에게 속아서는 안될 것입니다.

둘째로, '자아의 종'입니다.  - 타고난 사람들은 자신에게 갇혀 삽니다. 자신의 생각을 벗어나서는 살 수 없습니다. 성경 말씀도 자기 생각대로 해석하고 받아들입니다. 그래서 말씀도 하나요, 믿음도 하나요, 성령도 하나인데도 믿는 사람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다 다릅니다. 제게 십자가가 없었을 때는 그 이유를 몰랐습니다. 그런데 십자가를 경험하고 나서야 비로소 그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의 자아는 각자의 기질을 기초로한 경험입니다. 따라서 그들이 믿음을 가져도 하나같이 다 다를 수 밖에 없는 것은 어찌보면 너무 당연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믿음을 가질 때에 십자가에서 자신을 버린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이는 주님과도 하나가 될 수 없음을 의미합니다. 참 믿음이 아닌 것이지요.

하나님과 교회와 성경에 대한 지식이 아무리 많아도 자신을 버리지 않는다면 그 지식은 자기만의 지식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있어도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없는 것입니다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자아'로 부터 해방하기 위해 우리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에서 '자아'가 죽었다는 사실을 믿는 사람은 '자아'에서 해방되어 사는 것입니다.

셋째로, '육신의 종'입니다. - 타고난 사람들은 육신이 원하는 것을 절제할 능력이 없습니다. 다행히도 하나님은 우리에게 '양심'이나 '경건'을 주셔서 어느 정도 육신을 제어할 힘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온전히는 아닙니다. 육신을 이길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생명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사는 것입니다. 그러기 전에는 사람은 육신의 원하는 것을 떠나서 살 수 없습니다. 이 점에 있어서도 절망해보지 않은 사람은 예수님을 참으로 믿는 자가 아닐 것입니다. 예수님은 육신으로부터 자유케 하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믿는자는 자신의 육신의 정욕으로부터 자유케 되어 그 정욕을 이기는 것입니다.

넷째로, '사단의 종'입니다. - 타고난 사람들은 굳이 사단의 역사가 없어도 사단과 같은 자아 중심의 이기적인 삶을 삽니다. 그러나 십자가를 통한 온전한 믿음이 없는 상태에서는 아무리 선하게 살려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를 아무리 다짐하고 기도해도 사단의 간섭과 능력을 피할 길이 없습니다. 그는 믿음이 없는 사람들의 생각과 마음을 멋대로 주장하는 주인 노릇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선하게 살다가도 결정적인 때가 찾아오면 사단의 영향력을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십자가에서 사단의 권세를 이기셨기 때문에, 십자가가에서 자신이 사단의 권세에서 자유케 된 사실을 믿고 행하는 사람에게는 절대로 사단이 역사할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단의 권세로부터의 자유입니다.

다섯째로, '세상의 종'입니다. - 타고난 사람은 세상 논리를 벗어나 살 수 없습니다. 한국 교회에 세상적인 방식이 점령한 것은 이미 오래입니다. 세상 논리의 중심은 '성공'입니다. '성공'은 육신의 이기적인 생명에서 나온 것입니다. '성공 논리'는 하나님의 뜻과는 전혀 다릅니다. '성공'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육신의 이기적인 생각에 나온 것입니다. 교회가 '성공적인 교회'를 꿈꾸고, 목회자가 '성공적인 목회'를 꿈꿀 때 '세상의 종'이 되는 것입니다. 자녀들을 하나님께 맡기고 그분이 이끄신 대로 살게 하지 않고 정부의 교육 정책에 따라 춤을 추는 부모들은 이미 '세상의 종'입니다. 세상의 성공 논리를 가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안에서의 진정한 성공은 세상적인 성공의 모습과는 다릅니다. 이는 십자가에 대한 믿음을 가져보면 알게 될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세상적 성공을 위해 기도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들을 '세상의 종'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세상의 종'으로부터 자유케 하십니다. 참 믿음의 사람은 세상의 성공 논리로 살지 않습니다.

여섯째로 '율법의 종'입니다. - 이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가장 심각한 것입니다. 타고난 사람들은 어떤 기준에 따라 움직입니다. 그 기준에 따라 생각하고 행동합니다. 그 기준을 벗어나는 다른 사람을 보면 지적하기도 하고 정죄하기도 합니다. 그같은 기준으로는 십계명이 있습니다. 그외의 다른 규례와 법도가 있습니다. 교회에서 만든 교인들이 지켜야 할 법칙이 있습니다. 나라의 법과 질서와 도덕이 있습니다. 가정에서의 생활방식이 있습니다. 자녀들에대한 교육 방침이 있습니다. 나름대로 생활 철학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자기 안에 그같은 법과 기준을 정해 놓고 그에 따라 행동을 결정합니다. 이것이 '율법의 종'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에서 율법으로부터 자유케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참 믿음의 사람은 율법에 따라 살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자유를 누린다 - 위의 여섯가지 종으로부터의 자유케 되기를 원하는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준비가 된 사람이며, 자유케 하시는 예수를 믿어 그 자유를 누리며 사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는 진정한 자유를 누리며 오직 주님과 동행하는 삶을 삽니다. 그리스도는 우리를 종으로부터 자유케 하신 분입니다. 그분을 믿는 자는 그 자유를 누리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종이 된 적이 없고, 따라서 자유케 된 적도 없는 사람의 믿음은 헛것입니다

자유케하는 십자가 복음- 십자가는 자신과 세상과 죄와 율법으로부터 죽어버린 사건이기 때문에 이를 믿는 자는 '자신의 죽음'으로부터 자유를 얻게 됩니다. 자유케 된 사람은 경직됨이 없습니다. 부드럽고 자연스럽고 사랑스러우며 인격적입니다. 그는 다른 사람을 충동질하지 않습니다. 사람의 행동을 바꾸려 하지 않고 내면의 본질을 바꾸도록 오직 믿음을 주장합니다. 이는 자유케 된 사람의 특징입니다. 따라서 자유케 하는 복음을 믿고 자유를 누리는 사람은 자유케 하는 십자가 복음을 전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5:1)  <출처:자유케하는복음>

금단 법의 좁고 높은 요구

장이 일 규빗, 광이 일 규빗으로 네모 반듯하게 하고 고는 이 규빗으로 하며…”

이 말은 분향단의 규격을 말하는 것으로서 분향단의 좁고 높은 법의 요구를 말합니다. 규빗이란 고대 이집트, 바벨로니아에서 썼던 길이의 단위로서 일 규빗이란 손가락 끝에서 팔꿈치까지의 길이를 말하는데 일 규빗은 약 45센티미터 정도 입니다. 그리고 여기에서 장은 길이를 말하고 광은 넓이를 말하고 고는 높이를 말합니다. 그리고 장이 일 규빗이고 광이 일 규빗이며 고가 이 규빗이라는 말은 길이와 넓이는 45센티미터씩이고 높이는 90센티미터로서 그 분향단의 구조는 좁고 높습니다. 그리고 네모반듯합니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향단이 네모반듯하다는 말은 분명하고 완전한 하나님의 법을 상징한다고 봅니다. 그러므로 금향단의 법의 요구는 좁고 높습니다.

그리고 출애굽기 27 1절을 보면 ‘너는 조각목으로 장이 오 규빗, 광이 오 규빗의 단을 만들되 네모 반듯하게 하며 고는 삼 규빗으로 하고’라고 기록 되어 있습니다. 이 말은 번제단의 길이와 넓이가 225센티미터씩으로서 네모 반듯하고 높이는 135센티미터로서 넓고 낮습니다. 그리고 네모 반듯하다는 것은 분명하고 완전한 하나님의 법을 상징합니다. 그러므로 번제단의 법의 요구는 넓고 낮습니다.

번제단은 바깥뜰에 있고 금단은 보좌 앞에 있습니다. 번제단이 크기에 비해서 높이가 낮은 것은 우리에게 요구하는 법의 요구가 낮은 것을 말합니다. 이 말은 우리의 죄를 담당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고 영접하기가 쉬움을 말합니다. 바깥뜰에 있는 번제단과 그 뿔과 그 기구들은 모두 놋으로 싸거나 놋으로 만들었습니다. 여기에서 구약 성막의 바깥뜰은 우리의 육체를 상징하고 놋은 심판을 상징합니다.

히브리서 9 27-28절을 보면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이와 같이 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바 되셨고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죄와 상관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 번째 나타나시리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바깥뜰로 상징되는 육체는 한번 태어나면 죽는 것은 정한 이치요 그 후에는 반드시 심판을 받습니다. 그러므로 바깥 들에 있는 기명과 기구들은 다 놋으로 만들었거나 놋으로 싸여있는 것은 우리 육체가 다 심판 받을 것을 상징합니다.

그러나 금향단이 크기는 작으나 높이가 높은 것은 금향단의 법의 요구가 높은 것을 말합니다. 이것을 좁고 협착한 생명의 길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7 13-14절을 보면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생명의 길은 좁고 협착한 길입니다. 이와 같이 금향단의 구조를 보아도 이것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길이와 넓이는 일 규빗씩이고 높이는 이 규빗으로서 좁고 높습니다. 이것은 곧 좁고 협착한 생명의 길을 상징합니다.

향 만드는 법

출애굽기 30장 34-35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소합향과 나감향과 풍자향의 향품을 취하고 그 향품을 유향에 섞되 각기 동일한 중수로 하고 그것으로 향을 만들되 향 만드는 법대로 만들고 그것에 소금을 쳐서 성결하게 하고’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향 만드는 방법을 말합니다.

소합향은 몰약을 말하는데 몰약은 미르라(라틴어) 나무에서 추출한 수액을 말하는 것으로서 향신료로 쓰였다고 합니다. 마태복음에서는 동방박사들이 아기 예수님께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바쳤습니다(마2:11) 그리고 예수님께서 돌아가셨을 때 니고데모는 시체에 바르기 위하여 몰약을 가지고 갔습니다. 몰약은 향신료와 방부제로도 사용 되었습니다. 이 몰약은 고난과 죽음을 상징합니다. 그러므로 소합향은 죽은 자와 방불한 삶 즉 낮은 자의 삶을 말한다고 봅니다.

나감향은 섭조개를 빻아서 만든 향을 말합니다. 섭조개란 홍합과에 속한 연체동물로서 검은색 껍데기를 가지고 있습니다. 조개껍데기는 부서져야할 자아파쇄를 상징한다고 봅니다. 믿는 자라도 자아가 파쇄 되지 않으면 절대로 변화되지 못합니다. 육체에 속한 자는 사단에 속한 자입니다(계2:9) 그리고 검은색은 사단과 세상과 육신에 속한 것을 상징하는 색입니다. 그러므로 나감향이란 검고 딱딱한 육신의 자아가 파쇄 되어 육적인 자에서 영에 속한 자로 변화되는 것을 말한다고 봅니다.

풍자향은 눈물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데 이것은 미나리과의 식물인 회향풀의 줄기를 잘라 추출한 액상의 향료입니다. 이것은 향신료 및 치료제로도 쓰인다고 합니다. 이것은 핍박받는 삶을 상징한다고 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신에 거하실 때 핍박과 고난을 당하셨듯이 복음을 전함으로 남을 치료시키는 삶이요 그로인해 핍박 받는 삶으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때문에 눈물 흘리는 삶을 상징한다고 봅니다.

유향은 감람과에 속하는 유향나무의 줄기에 상처를 내어 추출한 나무진으로서 흰 색깔을 띤 향료로서 방향제로 쓰였다고 합니다. 흰색은 정결이나 순결 또는 부활을 상징합니다. 그러므로 유향은 우리의 삶이 항상 부활의 소망으로 넘쳐야 함을 말한다고 봅니다.

향를 만드는 법은 소합향과 나감향과 풍자향을 동일한 중수로 유향에 섞어야 합니다. 여기에서 동일한 중수란 같은 무게 단위를 말합니다. 이 말이 상징하는 것은 균형잡힌 신앙을 말한다고 봅니다. 그리고 그것을 향 만드는 법대로 만들되 소금을 쳐서 성결하게 하고’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소금은 맛을 내는 용도로도 사용되고 또 부패를 방지하는데도 사용됩니다.

이제 다시 말하면 소합향의 죽음의 향기 나는 순교적인 삶과 낮은 자의 삶을 살고 또 나감향의 자아파쇄를 통해 변화 받음으로 영적인 삶을 살고 풍자향의 복음전파로 인한 핍박받고 눈물 흘리는 고난의 삶을 살되 이 모든 것들을 유향의 부활의 소망 안에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어느 한 쪽으로 치우지지 말고 균형 잡힌 신앙이 되어야 합니다. 또 소금에 절이듯이 이 모든 것들이 거룩하여 부패함이 없어야 합니다.

유향으로 상징되는 부활의 소망이 없다면 고난을 견뎌내기 어렵습니다. 또 한 모든 향이 한 면으로 치우지지 않고 균형 잡히게 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 향들이 부패하지 않도록 소금에 절여짐이 필요합니다.

향기로운 삶

[성경 말씀](계8:3상)
3 또 다른 천사가 와서 제단 곁에 서서 금 향로를 가지고 많은 향을 받았으니

예수 그리스도의 종으로 부름을 받은 나는 각처에 있는 형제들에게 편지하노니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평강 가운데 더욱 넘치기를 기도합니다. 때가 가까웠고 마지막 때에 복을 주는 책인 요한 계시록을 풀어 온 세상에 알리라는 명하심을 따라 지금 그 사명을 감당하고 있습니다. 본문은 향기로운 삶에 대해서입니다.

많은 향을 받았으니
여기에서 향은 무엇을 뜻합니까? 대부분의 믿는 이들은 내용을 잘 살펴보지도 않고 향을 무조건 기도라고 생각하는 고정관념이 있습니다. 그러나 요한 계시록 8장 3절을 보면 ‘또 다른 천사가 와서 제단 곁에 서서 금 향로를 가지고 많은 향을 받았으니 이는 모든 성도의 기도들과 합하여 보좌 앞 금단에 드리고자 함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무슨 말이냐면 천사가 제단 곁에서 향을 받아 기도와 함께 보좌 앞 금단에 드린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말하는 향은 기도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향이 기도라고 하는 고정 관념을 버리시기 바랍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향은 하나님 앞에서 합당하고 향기로운 성도의 삶을 말합니다. 요한 계시록 5장 8절을 보면 향이 성도의 기도들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에서 말하는 향은 기도가 아니라 성도의 합당한 삶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향의 두 방면이 있다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말하는 향이란 하나님 앞에서 합당하고 향기 나는 우리의 헌신적인 삶을 말합니다. 우리가 드리는 기도가 하나님 앞에 상달되는 방법은 향의 연기와 기도가 함께 섞어져서 드려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향이 있어야 향을 피울 수 있고 향연이 피어올라야 향연과 함께 기도가 상달 될 수 있습니다. 그 향은 하나님 앞에서의 합당하고 향기 나는 삶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헌신적인 삶이 없으면 향을 피울 수가 없습니다. 항상 하나님 앞에 성도의 합당한 삶이 있어야 하나님 앞에 기도가 상달 된다는 말입니다. 

창세기 8장 20절을 보면 노아가 하나님 앞에 번제를 드리니 하나님께서 그 향기를 흠향하셨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레위기 26장 31-32절을 보면 ‘내가 너희 성읍으로 황폐케 하고 너희 성소들로 황량케 할 것이요 너희의 향기로운 향을 흠향치 아니하고 그 땅을 황무케 하리니 거기 거하는 너희 대적들이 그것을 인하여 놀랄 것이며’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치 않고 그 계명을 지키지 않으면 그들의 향기로운 향을 흠향치 않으시고 그들을 버리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합당한 삶이 없으면 그 기도도 받지 않으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합당한 삶으로 향을 가지는 것은 번제단에서의 일이요, 향을 피우고 기도하는 것은 향단에서의 일입니다.  기도는 그 향이 타면서 나는 연기와 함께 천사의 손을 통해 하나님께 바쳐집니다. 이것은 하나님 앞에 기도가 상달 되는 방법을 말합니다. 이 말은 향으로 상징된 우리의 향기로운 삶이 없으면 기도도 상달되지 않으며 향기로운 삶이 있을 때 그 삶의 향이 재료가 되고 향연이 피어올라 기도가 상달 된다는 말입니다.

창세기 8장 21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그 향기를 흠향하시고 그 중심에 이르시되 내가 다시는 사람으로 인하여 땅을 저주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사람의 마음의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함이라 내가 전에 행한 것같이 모든 생물을 멸하지 아니하리니’라고 기록 되어 있습니다. 여기에서 알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어떻게 평가하는가에 대해서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보실 때 사람은 그 마음의 계획이 어려서부터 악하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신앙생활을 잘 한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하나님께서 보실 때 사람의 마음과 생각은 어려서부터 악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알 수 있는 것은 노아의 제사는 받으시고 그 향기를 흠향하셨다고 했는데 여기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제사 드리는 것을 무조건 기뻐하시는 것이 아니라 제사 드리는 자의 합당한 삶이 전제 되어야 그 제사도 기뻐 받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양만 있는 형식적인 제사는 아무런 쓸모가 없으며 하나님 앞에 합당한 삶이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고린도 후서 2장 15절을 보면 ‘우리는 구원 얻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라고 말하고 있고 빌립보서 4장 18절을 보면 ‘내게는 모든 것이 있고 또 풍부한지라 에바브로디도 편에 너희의 준 것을 받으므로 내가 풍족하니 이는 받으실만한 향기로운 제물이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에베소서 5장 2절을 보면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생축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향이 뜻하는 것은 하나님을 기쁘시게하는 삶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향이 상징하는 것은 향기로운 삶입니다. 향기로운 삶이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말합니다. 히브리서 10장 3-10절을 보면 '그러나 이 제사들은 해마다 죄를 생각하게 하는 것이 있나니 이는 황소와 염소의 피가 능히 죄를 없이 하지 못함이라 그러므로 세상에 임하실 때에 가라사대 하나님이 제사와 예물을 원치 아니하시고 오직 나를 위하여 한 몸을 예비하셨도다 전체로 번제함과 속죄제는 기뻐하지 아니하시나니 이에 내가 말하기를 하나님이여 보시옵소서 두루마리 책에 나를 가리켜 기록한 것과 같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하시니라 위에 말씀하시기를 제사와 예물과 전체로 번제함과 속죄제는 원치도 아니하고 기뻐하지도 아니하신다 하셨고 (이는 다 율법을 따라 드리는 것이라) 그 후에 말씀하시기를 보시옵소서 내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하셨으니 그 첫 것을 폐하심은 둘째 것을 세우려 하심이니라. 이 뜻을 좇아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고 말합니다.

전에는 번제단에서 제물을 드릴 때 염소와 황소의 피로하고 그 제물을 태워 항상 하나님 앞에 흠향할만한 향기가 있게 하였는데 이것은 그림자요 모형이었으며 실상이 아니었습니다. 흠 없는 어린 양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생축으로 드려 영원한 우리의 속죄제물이 되셨고 하나님의 기쁨이 되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그 이름으로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으니 형제여 우리가 그의 이름을 불러 거룩한 기도를 드리고 그의 삶을 좇아 여호와 하나님의 흠향할만한 향기로운 제물이 됩시다. 우리에게 놀라운 비밀을 밝히 나타내 주시는 주님 감사합니다. 모든 것들이 아버지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 아멘!

귀한 그릇

[성경 말씀](계8:3상)
3 또 다른 천사가 와서 제단 곁에 서서 금 향로를 가지고 많은 향을 받았으니

예수 그리스도의 종으로 부름을 받은 나는 각처에 있는 형제들에게 편지하노니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평강 가운데 더욱 넘치기를 기도합니다. 때가 가까웠고 마지막 때에 복을 주는 책인 요한 계시록을 풀어 온 세상에 알리라는 명하심을 따라 지금 그 사명을 감당하고 있습니다. 본문은 귀한 그릇에 대해서입니다.

금 향로를 가지고
여기에서 향로란 향을 피울 때 쓰는 용기를 말합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금향로라는 말은 그 향로가 금으로 만들어 졌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 금향로는 금 향단 위에 두고 향을 피우는 용기입니다. 금은 불순물이 없는 거룩한 것을 상징합니다. 그러므로 금향로가 상징하는 것은 거룩한 그릇입니다.

출애굽기 30 7-8절을 보면 ‘아론이 아침마다 그 위에 향기로운 향을 사르되 등불을 정리할 때에 사를지며 또 저녁때 등불을 켤 때에 사를지니 이 향은 너희가 대대로 여호와 앞에 끊지 못할지며’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향을 피우는 법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대 제사장인 아론은 아침저녁으로 성소 안에 있는 금향단 위 향로에 향을 살라 향기로운 냄새가 항상 있게 하였습니다. 이 향로는 이동이 가능하며 일반적으로 향단 위에 두고 향을 피우는 것이 원칙이나 성경에 다른 기록들도 있습니다.

레위기 16장 12-13절을 보면 ‘향로를 취하여 여호와 앞 단 위에서 피운 불을 그것에 채우고 또 두 손에 곱게 간 향기로운 향을 채워 가지고 장 안에 들어가서 여호와 앞에서 분향하여 향연으로 증거궤 위 속죄소를 가리우게 할지니 그리하면 그가 죽음을 면할 것이며’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말은 대제사장이 자신과 백성을 위하여 일 년에 한 번씩 그 죄를 속죄할 때 지성소 안에서 향을 피우는 용도로도 사용 되었습니다. 그리고 또 요한 계시록 8장 5절을 보면 제단 불을 담아다가 운반하는 용도로도 사용 되었습니다.

제단에는 항상 꺼지지 않는 불이 있었고 향로에 향을 담을 때는 제단 불을 먼저 담고 그 위에 향을 담습니다. 이 향로는 금으로 만들어져 있습니다. 금이 상징하는 것은 불순물이 없는 거룩한 것을 상징합니다. 그러므로 금향로란 거룩한 그릇을 상징하고 향로 안에 타고 있는 불은 처음 사랑을 상징하며 향은 하나님 앞에서 향기로운 삶을 상징합니다.

디모데 후서 2장 20-21절을 보면 ‘큰 집에는 금과 은의 그릇이 있을 뿐 아니요 나무와 질그릇도 있어 귀히 쓰는 것도 있고 천히 쓰는 것도 있나니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예비함이 되리라’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하나의 그릇입니다. 바울의 말에 의하면 우리가 귀한 그릇으로 쓰일 수도 있고 천한 그릇으로 쓰일 수도 있는데 우리가 귀한 그릇으로 쓰임받기 위해서는 자신을 깨끗하게 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금으로 만들어진 거룩한 향로에 꺼지지 않은 제단불이 있고 그 위에 향기로운 향이 있어 향연이 피어 오릅니다. 그러므로 이 금향로가 요구하는 것은 높고도 거룩합니다. 금향로에 담겨질 여러분의 삶은 향기롭고 여러분의 기도는 거룩합니까? 이 땅에 속한 것들이나 육신에 속한 것이나 자신의 욕심을 위하는 기도들은 다 똥 냄새나는 향과 같습니다. 하나님 앞에 똥 향기를 풍기지 마십시오. 우리의 기도는 거룩해야 합니다. 모든 이 땅에 속하고 육신에 속한 욕심들을 내어 버리고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십시오. 그리하면 이 땅에서의 삶의 필요를 공급하실 것입니다.

그릇에는 여러 종류가 있습니다. 금 그룻도 있고 은 그릇도 있고 나무와 질그릇도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그릇입니까? 누구든지 자신을 깨끗케 하면 귀한 그릇이 되고 주님의 쓰시기에 합당한 그릇이 될 것입니다. 거룩한 그릇에 제단불이 있고 향이 피어 오르는 금향로 같이 자신을 깨끗케하여 그 안에 하나님을 향한 처음 사랑이 불타고 삶의 향기가 피어 오르는 삶이기를 기도합니다. 아멘 우리를 변화의 길로 이끄시는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아버지 곧 우리의 아버지가 되시는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모든 것이 아버지의 뜻대로 이루어지기 원합니다. 아멘!

사탄 숭배했던 자의 악령역사 간증

저는 지금부터 과거 사탄을 숭배했다가 구원을 얻은 한 사람에 대해 나누기를 원합니다.
 
그 남자가 우리에게 그의 간증을 나누었을 때 그것은 제게 너무 큰 도전이었고, 도저히 믿고 싶지도 않아서, "주님 그것이 사실입니까?"라는 질문을 가지고 금식을 하며 주님 앞에 나아갈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때부터, 우리가 기도할 때 영적인 세계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에 대해 주님께서 가르쳐주기 시작하셨습니다.
 
그 남자는 그의 부모님들이 이미 자신들의 영혼을 루시퍼에게 바친 후에 태어났습니다. 어머니의 뱃속에 있는 동안 수차례에 걸쳐 그 부모님들이 드린 제사를 통해 그 태아의 영혼은 루시퍼를 섬기도록 이미 바쳐졌습니다. 그가 네 살이 되던 해부터 그는 영적인 능력을 행사하기 시작했고 부모들은 그를 두려워하기 시작했으며, 여섯살이 되던 해에는 그의 아버지가 그를 마녀들에게 데리고 가서 훈련을 하도록 맡겨 두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열살이 되던 해에는, 마녀들도 그를 두려워 할 정도로 그는 마귀의 왕국에서 엄청난 일들을 해내고 있었습니다.
 
아직 한 소년에 불과했지만 그는 너무나 비참한 일들을 저질렀고, 스무살 청년이 되기까지, 의도적인 살인을 저지르는 등, 너무나 많은 피를 손에 묻히게 되었습니다. 초월적인 명상을 통해 그의 육체를 공중에 떠 있게 할 수 있었으며, 심지어는 무아지경 속을 빠져들어가 육신을 떠나 세상을 떠돌아 다니기도 했다고 합니다. (Called Astro-Traveling) 이 사람은 수많은 교회와 목회자들을 파멸시키도록 사탄에게 사용되어졌다고 합니다.
 
어느 날, 그는 기도로 충만한 한 교회를 무너뜨리라는 임무를 받았습니다. 그 당시 그 교회는 아주 큰 혼란과 분열을 겪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은 이 교회를 무너뜨리는 일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시점에 그 교회의 목사님은 모든 성도로 하여금 금식을 하도록 하였습니다. 금식이 시작되었고, 그 기간 중에 수많은 회개와 화해가 이루어졌으며, 성도들은 함께 모여서 주님께서 그들 가운데 오셔서 중재하시고 그들에게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부르짖으며 기도했습니다. 이렇게 교회가 기도하며 시간이 지나는 동안 이 사람은 귀신(악한 영)들을 데리고 이 교회를 무너뜨리기 위해 계속해서 방문하며 기회를 엿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때 이 교회에 어둠의 세력들이 그 교회를 공격하고 있음을 알리고 교회가 그에 대항하여 일어나서 영적인 전쟁을 치루어야 한다는 예언이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어느 날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이 사람은 그의 방에 그의 육신을 남겨두고 유체이탈을 하여 그 교회를 대항하기 위해 준비된 악한 영들의 막강한 군대를 이끌고 공격해 왔습니다. 그는 이렇게 간증하였습니다. 그가 그의 영으로 교회 위 공중 위를 떠다니면서 공격하려 했지만 그 교회를 온통 덮고 있는 빛의 보호막 (a cover of light) 때문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천사들의 군대(하늘의 군대)가 나타나 그들을 공격하였고 공중에서 전쟁이 벌어지게 되었습니다. 결국 다른 귀신들은 모두 다 달아나고 그 사람만 붙잡혔다고 합니다.
 
도대체 누구에게 붙잡혔다는 말입니까? 천사들에게 붙잡힌 것입니다. 그는 여섯 천사에게 붙잡힌것을 깨달았고, 그 천사들은 그를 교회의 지붕을 관통해서 교회의 제단 앞으로 데려다 놓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거기에 있게 되었고 교인들은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깊은 영적 전쟁의 기도 속에서 묶고, 부수고, 쫓아내고 있었습니다. 단상 위에서 기도와 영적 전쟁을 인도하고 있던 목사님에게 주님의 성령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사단의 멍에는 이제 깨어졌고, 사단의 피해자인 영혼이 너희 앞에 있다. 그가 구원을 받을 수 있도록 도와주어라."
 
목사님이 눈을 떴을 때 그의 앞에 쓰러져 있는 한 젊은이를 보았습니다. 다시 말하면 그 사람의 육체가 그와 함께 있었다는 말입니다. 그는 그 육체 안으로 들어와 있었던 겁니다. 그는 그가 그의 방에 두고 떠나온 그의 몸이 어떻게 자기에게로 왔는지, 그리고 천사들이 어떻게 교회의 지붕을 뚫고 그를 그곳으로 데리고 왔는지 이해할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믿기 힘든 이야기이지만, 목사님은 회중들을 조용히 시킨 후에,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들을 회중들과 나누고, 이 젊은이에게 물었습니다. "너는 누구냐?" 그는 부들부들 떨고 있었고, 귀신들이 그의 몸 밖으로 하나 둘씩 쫓겨 나오기 시작하였습니다. 회중들이 그 젊은이를 위해 기도하였고, 얼마가 지난 후에 그는 자신의 삶을 털어놓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그 날 주님께 나아왔고 이제는 복음을 전하는 복음전도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축사 사역을 통해 다른 사람들을 자유케 하는 일을 하며 주님께 아주 강력하게 쓰임 받고 있습니다.
 
어느 날 나는 저녁식사 자리에 참석하였는데, 그곳에 갔던 유일한 이유는 누군가로부터 바로 이 사람에 대한 소식을 전해 듣고 그를 꼭 한번 만나고 싶어서였습니다. 그날 저녁, 함께 식사를 하고 난 후, 이 사람에게 자신의 간증을 나눌 기회가 주어졌습니다. 아주 많은 이야기를 했고, 얘기를 하는 중간 중간 그는 자신이 과거에 저지른 일들로 인해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렇게 이야기를 마치고, 그는 그곳에 모인 사람들에게 간절히 호소하였습니다.
 
그 장소에는 아주 많은 목사님들이 있었습니다. 그 목사님들에게 그는, "간절히 부탁드립니다. 사람들에게 제발 기도하는 법을 가르쳐 주세요." 기도하지 않는 사람들은 마귀에게 모든 것을 빼앗길 수 있고, 원수들은 그들의 삶과 기도를 악용할 수 있다고 말하면서, 또한 기도를 어떻게 해야하는지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중언부언하고, 원수들은 그들이 하는 기도조차도 어떻게 악용하는지를 너무나 잘 알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것에 대해 곧 이야기를 나눌것입니다." 그는 목사님들에게 또 부탁하였습니다.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주시는 영적인 전신 갑주를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 또한 가르쳐 주세요."
 
그리고는 자신은 어떻게 그것들을 사용하였는지 설명하기 시작했습니다. 수많은 사단의 군대와 악한 영들이 공중에서 마치 순서를 정해두고 일을 하듯이 교대로 돌아가며 일을 하 고, 그 사람 역시도 매번 그의 차례가 되면 하늘에서 전쟁을 해야 했다고 합니다. 그의 말에 의하면 영적인 세계에서, 땅이 어둠의 덮개로 덮여있으면 그 덮고 있는 것은 마치 바위와 같이 아주 두껍고, 모든 지역을 덮는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영들은 그 막의 위 아래로 마음껏 왕래하고, 바로 그 단계에서 세상에 일어나는 일들에 영향을 끼친다고 합니다.
 
악한 영들과 또 악마에게 이용당하는 사람들은 그들의 차례가 끝나면 땅 위나 심지어 물위 라도 어느 곳에든 미리 약속에 의해 정해진 대로 그들의 영을 재충전하기 위하여 내려간다 고 합니다. 어떻게 그들이 충전을 받는가? 그것은 사람들의 제사를 통해 이루어진다고 했습니다. 악령을 부르며 주문을 외우는 제사, 낙태를 포함한 피를 흘리게 하는 모든 것, 전쟁, 사람의 제사, 동물의 제사, 또한 모든 종류의 성적 부정행위들이 그것입니다. 이런 너무나 많은 종류의 악한 행위들이 그 영들을 강하게 하고 재충전하는 제사가 되는 것입니다.
 
그는 저의 마음을 정말 어렵게 하는 이야기를 너무나 많이 하였습니다. 그가 말하기를, 그들이 공중에서 있고 그리스도인들이 기도를 시작하면, 그들의 기도는 세가지 모습으로 그들에게 나타난다고 합니다. 모든 종류의 기도는 마치 연기와 같은 모습으로 하늘로 올라가는데, 그 중 어떤 기도는 연기처럼 올라가지만 공중에서 정처없이 헤매다가 곧 사라져 버린다고 합니다. 그에 따르면, 그런 기도를 하는 사람들은 보통 세상에서 죄를 짓고, 그것이 죄임을 알면서도 크게 신경 쓰려하지 않는 사람들이라고 했습니다. 그들의 기도는 매우 약해서 그 기도의 연기가 공중에서 곧 사라져버리고 맙니다. 그런가하면 어떤 사람들의 기도는 연기처럼 올라가서 하늘을 덮고 있는 어둠의 막까지 올라가지만, 그 바위와 같은 막을 뚫지는 못한다고 합니다. 그런 기도를 하는 사람들은 보통 자신을 정결하게 하려고 노력하지만, 자신들이 기도를 할 때 어떤 일이 벌어진다는 것에 대한 믿음이 부족해서, 함께 힘써 기도해야 하는 또 다른 부분들을 보통 무시해버리고 맙니다.
 
그는 또 말하기를, 세번째 종류의 기도는 불로 가득 찬 연기와 같아서, 하늘로 올라가 덮고 있는 막에 닿을 뿐만 아니라, 닿게 되면 그 불이 너무나 뜨거워서 그 바위와 같은 어두움의 막이 초처럼 녹아버리고, 곧 그것을 뚫어버린다고 말하면서, 사람들이 처음에 기도를 시작 할 때는 첫번째 모습의 기도와 같지만, 그들이 계속해서 기도하게 되면 점점 두번째 모습의 기도처럼 변하게 되고, 또 더욱더 계속하게 되면 갑자기 불이 그 기도에 임하여 가득 채우게 된다고 여러번 강조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기도는 너무나 강력해서 그 바위와 같은 막을 뚫어버린다고 합니다. 그리고 또 덧붙이기를, 대부분의 경우 악한 영들이 신자들의 기도에 불이 붙는 것을 인식하게 되는데, 그럴 때면 땅 위에 있는 악한 영들에게, "그 사람의 기도를 방해하라. 그들의 기도를 멈추게 하라. 끌어내라."라고 이야기 한다고 하였습니다.
 
아주 많은 경우에 너무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러한 방해들에게 양보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이 힘을 다 해 회개하고, 말씀을 통해 영적으로 더 뜨거워지면서 믿음이 쌓여져가며, 기도가 더욱 초점이 맞추어질 때, 마귀들은 그들의 기도가 힘을 얻는 것을 보고 방해하기 시작합니다. 전화벨이 울립니다. 가끔씩 우리가 아주 깊은 충만한 기도를 하는 도중에 전화벨이 울리고, 우리는 그 전화를 받고 와도 계속해서 그 기도를 유지해 나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죠. 하지만 전화를 받고 다시 돌아오면 결국 처음 단계의 기도로 돌아가버리게 되고, 그것이 바로 마귀가 원하는 것입니다.
 
또 다른 종류의 방해가 있습니다. 당신의 몸에 손을 대고 고통을 준다던지, 당신이 배고픔을 느끼도록 해서 부엌으로 가 뭔가를 먹고 싶게 만들던지, 어떻게든 그들이 당신을 기도하는 그 장소에서 나오게만 하면 그들은 당신을 물리친 것입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람들에게 시간을 따로 가지라고 가르치세요. 그저 일상적으로 하는 기도 말고요. 그건 언제든지 나머지 시간 동안 할 수 있는거잖아요. 하루에 한번, 사람들은 하나님께 온 마음을 다해서 아무 것에도 방해 받지 않고 하나님께 초점을 맞추는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만약 사람들이 이러한 기도를 끝까지 인내하며 성령의 감동 속에 자신을 맡긴 채로 지속해 내면 영적인 세계에서는 뭔가 일이 일어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 기도의 불이, 가로막고 있는 바위에 닿고 그것이 녹아지기 시작합니다. 또 그가 말하기를, 그것이 녹기 시작할 때 너무나 뜨거워서 그 어떠한 악한 영도, 사람의 영도 견디지 못하고 모두 도망가 버린다고 합니다. 그 순간 하늘의 문이 열리기 시작합니다.
 
이와 동시에 기도할 때의 모든 어려움들이 사라져버려서, 기도하는 사람은 갑자기 기도가 아주 쉬워지고 기도를 즐기게되며, 동시에 굉장히 강하고 격렬해진다고 합니다. 그리고 내가 발견하게 된 것은, 이와 같은 상황이 되면 우리는 다른 잡생각이나 시간의 흐름에 대한 의식이 없어집니다. 이는 우리에게 장애가 생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의 시간을 통치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모든 것을 내려놓고 하나님과 접촉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이 사람이 말하기를, 기도가 계속되면 그때부터는 그를 멈추게 만들 수 있는 그 어떠한 저항의 세력도 없어져서 언제까지든지 원하는 만큼 기도를 지속할 수 있다고 합니다.
 
기도가 끝나고 난 후에도 그 통로는 열린 채로 남아있고, 그들이 일어나서 다른 곳으로 움직이게 되더라도 그 열린 하늘의 통로는 그 사람을 계속 따라 다닌다고 합니다. 더 이상 그 막힌 하늘 아래서의 운행이 있는 것이 아니라, 열린 하늘 아래에서의 운행함이 있고 마귀는 더 이상 그 사람들을 상대로는 그들이 원하는 것을 아무것도 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임재가 마치 하늘에서부터의 기둥처럼 뻗어와서 그들의 삶 속에 거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들은 보호를 받고, 그 기둥 안에는 엄청난 힘이 있으며, 그들이 어디를 가든지 다니는 곳 마다 그 임재가 사람들을 만지게 됩니다.
 
그 임재는 원수가 다른 사람들에게 저지른 일들을 식별하고, 임재의 통로가 열린 사람과 함께 서서 이야기하는 모든 사람들은 이 임재의 기둥으로 자연스럽게 들어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임재의 기둥 안에 있는 동안에는 원수의 속박이 힘을 잃게됩니다. 그래서 이와 같은 영적인 돌파를 경험한 사람들이 예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그리스도를 전하면 적대심이 적어서 그들을 전도하기가 쉬운 것입니다. 우리가 병자를 위해 기도하거나 어떤 특정한 일에 대해 기도할 때 역사가 일어나느냐 그렇지 않느냐의 모든 차이를 만드는 것은 그곳에 있는 하나님의 임재인 것입니다.
 
마귀는 이런 사람들을 아주 싫어 한다고 이 사람은 말하면서, 이와 같은 돌파의 기도가 정기적으로 꾸준히 드려지는 곳은 하나님의 임재하심이 그곳을 떠나지 않는다고 덧붙였습니다. 그래서 만약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이 그곳에 온다고 할지라도 원수의 속박이 힘을 잃게 되는것입니다. 그 때 누군가가 그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을 인내와 사랑으로 섬기면 그들은 힘도 아닌, 능도 아닌, 오직 그곳에 계신 하나님의 영으로서 아주 쉽게 하나님게로 인도됩니다. 그 사람은, 만약 아무도 이 사람을 방해하지 않는다면 그는 하나님의 임재로 들어오게 되고, 죄를 깨닫게 되며, 이를 수용할지를 두고 마음속에서 싸우게 됩니다.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 장소에서 떠나고 원수의 속박은 다시 그 마음속에서 강해집니다. 마귀는 이러한 상황속에서 그런 사람들이 하나님을 받아들이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모든 안간힘을 쓴다고 합니다.
 
여러분이 상상할 수 있듯이 우리 모두는 앉아서 이 사람을 놀란 눈으로 바라보고만 있었고, 그는 그가 하던 일들과 보았던 것들을 우리에게 계속해서 이야기 해 주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어둠의 영들이 기도의 돌파를 맛 본 사람들을 어떻게 하는지에 대해서도 이야기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그 사람들에게 알아볼 수 있도록 표시를 하고 그들에 대해 연구한다고 합니다. 그 사람들에 대해서 찾아낼 수 있는 모든 것들을 알아내서 약점을 발견해 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사람들이 기도를 하면서 싸움을 싸워 나가는 동안 어둠의 영들은 서로 교신하며, "그 사람의 약점은 이런 것, 이런 것들이다. 그것들을 이용해서 공격하라!"라고 이야기 한다고 합니다.
 
끝까지 싸움에 승리하고 기도를 마친 그 사람이 기도 방에서 나올 때는 기도의 영이 그에게 임하고 하나님의 임재 또한 그에게 임하며, 그의 영이 하늘 높이까지 치솟고, 비로소 주님의 기쁨이 그에게 능력이 됩니다. 하지만 그가 움직이는 동안 원수는 여전히 그가 주님에게 집중하는 것을 방해하려고 온갖 그의 약점들을 동원한다고 합니다. 만약 그의 약한 부분이 신경질이라면, 사람들로 하여금 그가 화를 낼 만한 상황을 만들어서 분노하게 만드는데, 그때 만약 그가 성령에 민감하지 않으면 그는 곧 주님에게서 결국 눈을 뗄 수 밖에 없고, 화가 나서 성질을 내고 말 것입니다.
 
시간이 지나고 나서, 기분을 가다듬고 다시 주님의 기쁨과 동행하려고 노력해도 더 이상 그것을 느낄 수 없게 됩니다. 다시 기분을 전환하려고 노력하지만 그렇게 되지 못합니다. ? 그가 그 사탄의 유혹에 그 기쁨을 양보하였기 때문입니다. 어둠의 세력들은 그 사람의 위로 통하는 통로를 막아버리려고 온갖 노력을 다 하였습니다. 그리고 막히게 되면 그 사람은 하나님의 임재와 두절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 사람이 더 이상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그의 사람에 덧입혀졌던 그 추가적인 하나님의 기름부으심, 아무것도 꾸미거나 속이지 않고도 모든 것을 할 수 있게 했던 하나님의 임재가 끊긴 것입니다. 이렇게 마귀는 우리의 약점을 끊임없이 찾고 있습니다.
 
만약 약점이 성적인 유혹에 있다면 원수는 그의 정욕을 끌어내도록 사람들과 사건, 그리고 뭐든 할 수 있는 것들을 다 동원해서 유혹할 것입니다. 그리고 만약 그가 이 유혹에 양보하고 이런 생각들로 인해 마음껏 즐거워 한 다음, 나중에 다시 그 기름부으심과 동행하려고 해도 그는 곧 그렇게 할 수 없음을 깨닫게 됩니다. 아마도 여러분은, "그건 불공평해요"라고 말할 수도 있지만, 성경이 가르치는 것을 보십시오. "구원의 투구와 의의 갑옷을 입으라." 우리는 보통 이런 전쟁을 위한 무기들의 필요를 인식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주기도문의 마지막 부분을 주목해야 합니다. "우리를 시험에 들게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언제든지 당신이 돌파하는 기도를 하더라도, 그 기도를 마칠 때는 항상 당신이 나약한 인간이라는 것과 우리는 아직 완벽하지 못하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께, "주님, 이 기도하는 시간을 통해 큰 기쁨을 얻었습니다. 세상으로 돌아갈 때 시험에 들지 않게 해 주시고 마귀의 덫에 걸려 넘어지지 않도록 해 주세요. 그것이 어떤 모습일지는 제가 알지 못하지만, 원수가 그렇게 온갖 덫을 놓고 기다리고 있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아직 제가 나약하다는 것도 너무나 잘 알고 있고요. 내가 만약 맞아 떨어지는 시기에 그들이 돌격해 온다면, 저는 이겨내지 못할 것을 알고 있습니다. 주님 보호해 주세요. 제가 원수의 덫이 있는 곳으로 가는 것을 주님께서 보시면, 그 반대쪽으로 가도록 인도해 주세요. 주님, 간섭해주세요. 나 자신의 능력과 역량을 의지하도록 내버려 두지 마시고, 악으로부터 구원해주세요."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하실 수 있으십니다. 그분께서는 가능하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일이 일어나든 우리가 해야하는 것은, "예수님, 감사합니다"라고 고백하는 것 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도 바울이 데살로니가서에서, "모든 것은 하나님 당신을 위한 당신의 뜻인 것을 인해 감사드립니다"라고 고백한 것입니다. 어떤 것은 좋지만은 않습니다. 가끔은 고통스럽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왜 이런 것을 허락하시는지 이해가 안 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그 분께서 도대체 무엇에서 우리를 구원하셨는지를 안다면 우리는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믿게 될 때, 우린 그냥 모든 것으로 인해 그분께 감사드립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제가 더 깊이 들어가야 하는지, 또 그렇지 않아야 하는지 사실 잘 모르겠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끝내지도 못할 것은 시작조차 하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단지 여기서 한 발자국만 더 가겠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말하기를, 만약 기도가 그렇게 돌파되면, 모든 기도에 대한 응답은 언제나 받게 된다고 하였습니다. 그는 돌파하고 나서 응답 받지 못한 기도는 본 적이 없다고 말하였습니다. 그가 말하기를, 모든 기도는 응답을 받지만, 대부분의 경우는 그 기도제목을 가지고 기도한 사람에게 돌아가지는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왜일까요? 하늘에서의 전쟁 때문입니다. 그는, 어둠의 세력들이 하나님 계신 곳과 우리들이 있는 곳을 차단하는데 성공하게 되고, 또 그 사이를 가로막는 막이 다시 막히게 되면 그 들은 그 기도한 사람을 주시하고 기다립니다. 왜냐하면 그 응답이 당연히 온다는 것을 그들은 알고 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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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령님이 바로 그것입니다. 성령님은 우리의 종이거나, 우리를 섬기거나, 우리에게 무언가를 가져다주는 분은 아닙니다. 성령님은 우리가 무엇이 필요한지 알리기 위해 아버지와 우리 사이를 왔다갔다 하지 않으십니다. 그럼 무엇을 하시죠? 우리를 인도하시고, 가르치시고, 이끄시고, 바른 방법으로 기도하도록 도우십니다. 그리고 영적 세계에서 일들이 일어날 때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어떤 때는 우리가 자는 중에 깨우셔서 "기도하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럴 때 우리는 흔히 "아닙니다 주님, 아직 저의 때가 오지 않았습니다" 라고 하기도 하죠. 그러면 성령님은 "지금 당장 기도하라"라고 하십니다.
                                                                                                                 왜일까요? 그분께서는 영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보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성령님께서 "내일은 금식!"이라고 하시고, 우리는 "아니 월요일날 할께요"라고 하지요. 하지만 성령님은 영적인 세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이해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성령님에 민감하게 되는 법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를 진리의 길로 인도하시기 때문입니다. <출처:에스더기도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