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희가 대답하되 우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남의 종이 된 적이 없거늘 어찌하여 우리가 자유케 되리라 하느냐'(요 8:33)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눅 4:18-19)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케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하리라'(요 8:34,36)
믿음의 시기는 구속의 필요성을 느낄 때 - 한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려고 할 때에 알아야 할 필수적인 사항이 있습니다. 그것은 자신이 구속받아야 한다는 필요를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예수 믿으면 천국간다'와 같은 지적인 공식이 아닙니다.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으면 안될 상황에 처해 있음을 아는 사람만이 예수 그리스도를 진심으로 영접할 준비가 된 사람입니다. 이 때가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실제적인 시기라고 볼 수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이 왜 예수를 믿어야 하는 지를 잘 모르고 신앙생활을 시작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습니다. 우리 나라 사람들은 신앙생활의 내용보다는 교회 출석 자체를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을 뿐 아니라, 신앙생활의 이유가 기복적이거나, 다른 사람이나 어떤 힘에 의한 불가항력적 상황일 경우가 많은 것 같습니다. 그러나 어떤 이유로 교회에 나가게 되었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영접할 시기는 자신이 구속받아야 할 필요를 느낄때라는 사실입니다.
구속이란, 자유케 되는 것 - 그러면 구속이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자유롭지 못한 상황에서 다른 사람의 도움으로 놓임을 입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구속의 성격은 스스로 구속할 수 없다는 것이며, 자신을 구속할 자가 따로 있어야 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구속 받아야 할 상황에 처해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는 구속자로 오셔서 자유롭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믿는 자는 예수께서 자유롭지 못한 자신을 구속한 사실을 믿고 받아들여서 그 자유를 누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예수는 믿는데, 그 자유를 누리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첫째 자신이 어떤 상황에 처했는지 모른다는 것이며, 둘째 예수를 믿는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 것입니다.
사람은 타고난 종이다-사람은 타고났을 때부터 자유가 없습니다. 예수께서 유대인들에게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라'(요8:3 1-32)라고 말씀하실 때에 유대인들은 '우리는 남의 종이 된 적이 없거늘 어찌하여 우리가 자유케 되리라 하느냐?'(요8:33)라고 반문했습니다. 이 유대인들은 성경을 잘 아는 자들이었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성경은 먹는 식사보다도 익숙합니다. 이들의 성경지식은 참으로 박식합니다. 그럼에도 성경의 요점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사람들을 자유케 하기 위해' 왔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자유를 주기 위해 오셨다면 사람들이 자유롭지 못한 '종의 상태'에 있음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성경을 잘 안다는 유대인들이 자신들에게 '자유'가 없음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자유케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유케 하시는 분 - 제가 이 글을 쓰기 시작했을 때, 전에 알고 지냈던 동료 목사님과 전화 통화를 하게 되었습니다. 무려 4년만의 통화였습니다. 책을 좋아하던 그 목사님은 거의 30분 동안 자신의 근황을 장황하게 설명했습니다. 그리고 제게도 화란의 개혁교회 전통과 신앙고백서를 구입해 볼 것을 권유했습니다. 그리고 칼빈의 저서와 주장등도 참고할 것을 덧붙였습니다. 저는 되물었습니다. "목사님은 칼빈의 말을 공부하고 싶습니까? 아니면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았던 칼빈과 같은 사람이 되고 싶습니까?" 나는 이 목사님의 '알고자 하는 열정'과 한 가지라도 더 잘 알아서 '성도들에게 나누어주고 싶은 마음'을 충분히 감지했습니다. 그리고 그 목사님의 말이나 주장이 틀리지 않음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내 속의 답답함이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오신 목적은 우리가 예수님에 대해 또는 성경 말씀과 하나님에 대해 많이 알게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종의 상태에서 자유케 하기 위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아마, 그 목사님은 자신을 이미 '자유케 된 자'로 알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제가 확신하는 것은 '자유케 된 자'는 지식을 추구하지 않을 뿐 아니라, 그 자신도 예수님처럼 다른 사람을 자유케 하는데 온 힘을 기울이게 될 거라는 사실입니다.
자유케 된 적이 없는 그리스도인? - 예수님이 오신 목적이 종된 사람을 자유케 하는 것이라면, 그리스도인의 삶도 다른 사람을 자유케 하는 삶이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의 삶은 곧 예수 그리스도의 삶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그리스도인이 예수님처럼 다른 사람을 자유케 하는 삶을 살고 있지 않다면, 단언컨데 그는 자유케 된 적이 없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는 유대인들처럼 자신이 '종의 상태'에 있음을 몰랐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래서 '자유케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적이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초림때는 지금이나 자유케 하는 일을 계속하고 계십니다. 단지 사람들이 자신들이 '종의 상태'에 있음을 모르고 있기 때문에 자유케 하시는 구속자로서의 예수 그리스도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며, 지금 그들이 믿는 예수는 구속자가 아닌 다른 의미의 예수일 뿐입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예수는 복과 행복, 기쁨과 평안, 사후에 천국을 가져다는 주는 분으로만 알기 때문에 그들은 자유를 경험해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유를 경험치 못한 그리스도인의 미래는 참으로 암담합니다.
예수 믿을 자의 다른 표현은 자유케 되기를 원하는 자 - 저는 지금도 그리스도인들을 대할 때에 의아스러운 점은, 첫째는 사람들이 '종의 상태'에 있는 자신들의 실상을 너무나도 모르고 있다는 점이며, 둘째는 자신이 '종의 상태'에 있음을 아는 사람들이 너무 적다는 사실이며, 셋째는 그중에서도 아주 소수만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유케 됨'을 얻는다는 사실입니다. 구약에서 예언되고 신약의 십자가에서 예언을 성취하신 예수 그리스도는 사람들을 '종의 상태'에서 자유케 하신 분입니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자는 어떤 사람들인가가 분명해집니다. 그들은 종의 상태에서 자유케 되기를 원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자신들이 심각한 '종의 상태'에 있음을 알고 자신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보다도 노예 상태에서 자유케 되는 것을 제 일의 목표로 삼는 사람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이 구속 받아야 할 심각한 상태에 있음을 경험해 보지 못한 사람은 진정한 믿음을 가진 자로 볼 수 없습니다.
그러면 '종의 상태'란 어떤 것일까요?
첫째로 '죄의 종'입니다. - 아담으로부터 타락한 생명을 이어받는 타고난 사람은 모두 '죄의 종'입니다. 이는 '죄인의 상태'를 스스로 벗어날 수 없어 항상 죄를 짓고 살 수 밖에 없는 존재인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 중에 소수만이 자신이 아무리 선하게 살려고 할지라도 결국 죄를 지을 수 밖에 없는 비참한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속자로 믿을 수 있는 자는 바로 그런 사람입니다. 제가 경험한 사실로는, 참으로 주님 뜻대로 살아보려다가 좌절을 많이 경험한 사람들만이 자신의 비참한 상태를 깨닫고 죄에서 자유케 하시는 주님을 믿게 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처럼 자신이 '죄의 종'이라는 사실에 대해 뼈아픈 고통과 구속의 은혜를 구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예수 그리스도를 바르게 믿지 못하는 것이 틀림없습니다. 뿐만아니라 삶의 열매도 종교적이어서 약간의 도덕적 수준에 그칠 뿐입니다.
죄짓지 않을 자유 - 자신이 '죄의 종'이라는 심각한 상황에 직면해 보지 못한 사람들은 자신들이 미래에 지을 죄까지 모두 용서받았다고 믿고 있기 때문에, 가끔 죄의 행위가 나타날 때 고백하면 그만이라면서 죄의식을 그리 깊이 느끼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따라서 이들은 '죄에서 자유케하시는 예수님'을 경험으로 알지 못합니다. 이들은 십자가의 보혈의 공로로 죄용서 받고 천국간다는 사실을 너무나도 강하게 확신하고 있어서, 자신들에게서 나타나는 '죄의 행위'를 그리 심각하게 생각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죄에서 자유케 된 사람'은 죄를 짓지 않고 사는 것이 정상입니다. 예수님은 '죄'로부터 자유케 하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예수를 믿는 자는 그분을 의지하여 '죄'를 짓지 않을 자유를 누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죄로부터의 자유'를 죄를 짓고도 다 용서받았기 때문에, 죄책감도 느낄 필요도 없는 것으로 이해하는 헛된 교리를 퍼뜨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들에게 속아서는 안될 것입니다.
둘째로, '자아의 종'입니다. - 타고난 사람들은 자신에게 갇혀 삽니다. 자신의 생각을 벗어나서는 살 수 없습니다. 성경 말씀도 자기 생각대로 해석하고 받아들입니다. 그래서 말씀도 하나요, 믿음도 하나요, 성령도 하나인데도 믿는 사람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다 다릅니다. 제게 십자가가 없었을 때는 그 이유를 몰랐습니다. 그런데 십자가를 경험하고 나서야 비로소 그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의 자아는 각자의 기질을 기초로한 경험입니다. 따라서 그들이 믿음을 가져도 하나같이 다 다를 수 밖에 없는 것은 어찌보면 너무 당연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믿음을 가질 때에 십자가에서 자신을 버린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이는 주님과도 하나가 될 수 없음을 의미합니다. 참 믿음이 아닌 것이지요.
하나님과 교회와 성경에 대한 지식이 아무리 많아도 자신을 버리지 않는다면 그 지식은 자기만의 지식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있어도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없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자아'로 부터 해방하기 위해 우리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에서 '자아'가 죽었다는 사실을 믿는 사람은 '자아'에서 해방되어 사는 것입니다.
셋째로, '육신의 종'입니다. - 타고난 사람들은 육신이 원하는 것을 절제할 능력이 없습니다. 다행히도 하나님은 우리에게 '양심'이나 '경건'을 주셔서 어느 정도 육신을 제어할 힘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온전히는 아닙니다. 육신을 이길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생명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사는 것입니다. 그러기 전에는 사람은 육신의 원하는 것을 떠나서 살 수 없습니다. 이 점에 있어서도 절망해보지 않은 사람은 예수님을 참으로 믿는 자가 아닐 것입니다. 예수님은 육신으로부터 자유케 하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믿는자는 자신의 육신의 정욕으로부터 자유케 되어 그 정욕을 이기는 것입니다.
넷째로, '사단의 종'입니다. - 타고난 사람들은 굳이 사단의 역사가 없어도 사단과 같은 자아 중심의 이기적인 삶을 삽니다. 그러나 십자가를 통한 온전한 믿음이 없는 상태에서는 아무리 선하게 살려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를 아무리 다짐하고 기도해도 사단의 간섭과 능력을 피할 길이 없습니다. 그는 믿음이 없는 사람들의 생각과 마음을 멋대로 주장하는 주인 노릇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선하게 살다가도 결정적인 때가 찾아오면 사단의 영향력을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십자가에서 사단의 권세를 이기셨기 때문에, 십자가가에서 자신이 사단의 권세에서 자유케 된 사실을 믿고 행하는 사람에게는 절대로 사단이 역사할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단의 권세로부터의 자유입니다.
다섯째로, '세상의 종'입니다. - 타고난 사람은 세상 논리를 벗어나 살 수 없습니다. 한국 교회에 세상적인 방식이 점령한 것은 이미 오래입니다. 세상 논리의 중심은 '성공'입니다. 그 '성공'은 육신의 이기적인 생명에서 나온 것입니다. '성공 논리'는 하나님의 뜻과는 전혀 다릅니다. '성공'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육신의 이기적인 생각에 나온 것입니다. 교회가 '성공적인 교회'를 꿈꾸고, 목회자가 '성공적인 목회'를 꿈꿀 때 '세상의 종'이 되는 것입니다. 자녀들을 하나님께 맡기고 그분이 이끄신 대로 살게 하지 않고 정부의 교육 정책에 따라 춤을 추는 부모들은 이미 '세상의 종'입니다. 세상의 성공 논리를 가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안에서의 진정한 성공은 세상적인 성공의 모습과는 다릅니다. 이는 십자가에 대한 믿음을 가져보면 알게 될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세상적 성공을 위해 기도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들을 '세상의 종'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세상의 종'으로부터 자유케 하십니다. 참 믿음의 사람은 세상의 성공 논리로 살지 않습니다.
여섯째로 '율법의 종'입니다. - 이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가장 심각한 것입니다. 타고난 사람들은 어떤 기준에 따라 움직입니다. 그 기준에 따라 생각하고 행동합니다. 그 기준을 벗어나는 다른 사람을 보면 지적하기도 하고 정죄하기도 합니다. 그같은 기준으로는 십계명이 있습니다. 그외의 다른 규례와 법도가 있습니다. 교회에서 만든 교인들이 지켜야 할 법칙이 있습니다. 나라의 법과 질서와 도덕이 있습니다. 가정에서의 생활방식이 있습니다. 자녀들에대한 교육 방침이 있습니다. 나름대로 생활 철학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자기 안에 그같은 법과 기준을 정해 놓고 그에 따라 행동을 결정합니다. 이것이 '율법의 종'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에서 율법으로부터 자유케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참 믿음의 사람은 율법에 따라 살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자유를 누린다 - 위의 여섯가지 종으로부터의 자유케 되기를 원하는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준비가 된 사람이며, 자유케 하시는 예수를 믿어 그 자유를 누리며 사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는 진정한 자유를 누리며 오직 주님과 동행하는 삶을 삽니다. 그리스도는 우리를 종으로부터 자유케 하신 분입니다. 그분을 믿는 자는 그 자유를 누리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종이 된 적이 없고, 따라서 자유케 된 적도 없는 사람의 믿음은 헛것입니다
자유케하는 십자가 복음- 십자가는 자신과 세상과 죄와 율법으로부터 죽어버린 사건이기 때문에 이를 믿는 자는 '자신의 죽음'으로부터 자유를 얻게 됩니다. 자유케 된 사람은 경직됨이 없습니다. 부드럽고 자연스럽고 사랑스러우며 인격적입니다. 그는 다른 사람을 충동질하지 않습니다. 사람의 행동을 바꾸려 하지 않고 내면의 본질을 바꾸도록 오직 믿음을 주장합니다. 이는 자유케 된 사람의 특징입니다. 따라서 자유케 하는 복음을 믿고 자유를 누리는 사람은 자유케 하는 십자가 복음을 전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갈5:1) <출처:자유케하는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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