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복음은 요란케 한다(갈1:6~10)
다른 복음은 바른 복음에 기초한 교회와 공동체를 혼란에 빠지게 합니다. 바울은 그의 양떼들을 위협하는 다른 복음에 대하여 강력한 어조로 경고하며, 바른 복음을 수호하도록 권고하고 있습니다. 바울 당시에 이들은 여전히 하나님을 말했습니다. 더하여 하나님의 율법을 말하고 할례를 말하는 자들입니다. 이들은 바울이 전한 복음을 듣고 세례를 받고 그리스도인이 된 성도들을 미혹하여 바울이 전한 복음은 불완전하기 때문에 할례를 받아 완전하라고 도전하였습니다.
이러한 시험에 노출되는 교회와 신자들은 크게 요동하게 됩니다. 바른 가르침을 좇는 사람들과 미혹된 사람들로 나뉘어 혼란이 일어납니다. 이러한 현상은 이천년 교회사에서 계속하여 반복되어 온 일입니다. 현대에도 여전히 이러한 현상은 일어나고 있습니다. 지금도 다른 복음을 말하는 자들은 여전히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 성령을 말합니다. 그리고 자신들의 사상을 더하여 말합니다. 결국 교회는 다른 복음으로 인하여 요동케 되는 것입니다.
다른 복음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질시킨다(갈1:6~10)
그리스도의 복음은 그리스도로부터 유래한 복음, 그리스도에 관한 복음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가 빠진 복음은 이미 복음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가 생략된 복음은 아무리 아름다운 말이나 논리적인 설득이 있더라도, 탁월한 도덕과 윤리를 가지더라고 복음이라 할 수 없습니다. 열심과 뜨거움이 있어도 복음이 아닌 것입니다. 더 주의할 것은 그리스도의 구속을 말하면서 무엇인가를 추가하는 것을 용납하는 것입니다.
다른 복음에서 그리스도의 구속을 말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것만으로 충분하지 않다고 말합니다. 당시 바울이 경계하는 자들은 그리스도의 구속과 함께 할례와 율법행위가 있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이와 같은 그리스도의 구속에 보충하거나, 그리스도의 구속에서 무엇을 삭제하거나 재해석하려는 시도는 복음을 변질시킵니다. 그래서 바울은 단호하게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들을 향하여 저주의 말을 합니다. 차이점을 말하기보다 유사점을 강조하는 연합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진리 자체를 훼손시키면서 타협하는 것은 다른 복음입니다.
일용할 양식 기독대학인회(ESF) 제공
1/29/2012
진정한 감사로 나아가는 축제일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롬12:1)
은혜를 아는 사람들의 눈엔 모든 것이 그저 감사할 따름입니다. 진정한 감사는 상황과 환경과 때를 넘어서는 것입니다. 오늘은 우리가 받은 은혜를 생각하며 어떻게 감사할 수 있는지 네 가지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첫째, 찬양함으로 감사드릴 수 있습니다(시 100:1∼4, 147:7).
우리는 찬양 가운데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찬양을 한다는 것이 노래를 잘하고 못하고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즐거운 소리를 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찬양을 기뻐하시기에 찬양을 통해 감성을 표현함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둘째, 기도함으로 감사드릴 수 있습니다(시 105:1, 빌 4:6∼7).
빌립보서 4장 6절은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고 말씀합니다. 기도는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입니다. 어려움과 염려가 많을수록 기도함으로 감사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어떤 사람은 염려하는 것으로 시간을 다 보냅니다. 염려하는 만큼 기도한다면 감사로 이어지기 때문에 염려하는 만큼 기도하는 것이 더 소중할 것입니다. 누구든지 작은 것 하나에도 감사할 줄 알면 더 해주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처럼 하나님도 동일하십니다. 그래서 성령 하나님은 계속해서 감사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감사함으로 구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감사의 표현이 끊이지 않기를 소망합니다.
셋째, 드림으로 감사할 수 있습니다(시 50:14, 고후 9:11).
지금 나의 형편이 어렵고 지금 나의 형편이 드릴 것이 없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 앞에 드린다는 것은 얼마나 드렸는가 하는 양의 개념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얼마나 정성으로 나아가느냐의 질을 의미합니다.
감사하는 자는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좋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명기 16장 10절은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칠칠절을 지키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복을 주신대로 네 힘을 헤아려 자원하는 예물을 드리고”라고 말씀합니다. 특별히 하나님 앞에 절기 헌금을 드릴 때 부부가 상의해 드리는 것이 더 기뻐하시는 온전한 예물이 될 것입니다. 부담이 아닌 기쁨과 감사로 하나님 앞에 드릴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넷째, 간증을 나눔으로 감사할 수 있습니다(사 12:4, 신 4:9).
그리스도인들은 간증할 것이 있어야 하고 또 간증하며 살아야 합니다. 이사야 12장 4절은 “그 날에 너희가 또 말하기를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 이름을 부르며 그 행하심을 만국 중에 선포하며 그의 이름이 높다 하라”고 말씀합니다. 간증하며 살라는 것입니다. 간증은 누가 하는 것입니까? 간증은 변호사가 하는 것이 아닙니다. 간증은 목격자가 하는 것입니다. 보고 경험한 자는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며, 우리는 간증하며 살아야 할 것입니다. 또한 우리의 감사의 간증은 신명기 4장 9절 말씀과 같이 우리 주변과 우리 가족들 자녀들에게까지 이어져야 할 것입니다. 감사의 고백적 삶을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목동제일교회 김성근목사)
은혜를 아는 사람들의 눈엔 모든 것이 그저 감사할 따름입니다. 진정한 감사는 상황과 환경과 때를 넘어서는 것입니다. 오늘은 우리가 받은 은혜를 생각하며 어떻게 감사할 수 있는지 네 가지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첫째, 찬양함으로 감사드릴 수 있습니다(시 100:1∼4, 147:7).
우리는 찬양 가운데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찬양을 한다는 것이 노래를 잘하고 못하고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즐거운 소리를 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찬양을 기뻐하시기에 찬양을 통해 감성을 표현함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둘째, 기도함으로 감사드릴 수 있습니다(시 105:1, 빌 4:6∼7).
빌립보서 4장 6절은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고 말씀합니다. 기도는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입니다. 어려움과 염려가 많을수록 기도함으로 감사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어떤 사람은 염려하는 것으로 시간을 다 보냅니다. 염려하는 만큼 기도한다면 감사로 이어지기 때문에 염려하는 만큼 기도하는 것이 더 소중할 것입니다. 누구든지 작은 것 하나에도 감사할 줄 알면 더 해주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처럼 하나님도 동일하십니다. 그래서 성령 하나님은 계속해서 감사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감사함으로 구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감사의 표현이 끊이지 않기를 소망합니다.
셋째, 드림으로 감사할 수 있습니다(시 50:14, 고후 9:11).
지금 나의 형편이 어렵고 지금 나의 형편이 드릴 것이 없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 앞에 드린다는 것은 얼마나 드렸는가 하는 양의 개념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얼마나 정성으로 나아가느냐의 질을 의미합니다.
감사하는 자는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좋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명기 16장 10절은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칠칠절을 지키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복을 주신대로 네 힘을 헤아려 자원하는 예물을 드리고”라고 말씀합니다. 특별히 하나님 앞에 절기 헌금을 드릴 때 부부가 상의해 드리는 것이 더 기뻐하시는 온전한 예물이 될 것입니다. 부담이 아닌 기쁨과 감사로 하나님 앞에 드릴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넷째, 간증을 나눔으로 감사할 수 있습니다(사 12:4, 신 4:9).
그리스도인들은 간증할 것이 있어야 하고 또 간증하며 살아야 합니다. 이사야 12장 4절은 “그 날에 너희가 또 말하기를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 이름을 부르며 그 행하심을 만국 중에 선포하며 그의 이름이 높다 하라”고 말씀합니다. 간증하며 살라는 것입니다. 간증은 누가 하는 것입니까? 간증은 변호사가 하는 것이 아닙니다. 간증은 목격자가 하는 것입니다. 보고 경험한 자는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며, 우리는 간증하며 살아야 할 것입니다. 또한 우리의 감사의 간증은 신명기 4장 9절 말씀과 같이 우리 주변과 우리 가족들 자녀들에게까지 이어져야 할 것입니다. 감사의 고백적 삶을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목동제일교회 김성근목사)
의인이 하나도 없습니다.
[로마서3:9~20]
지금까지 유대인의 죄를 심도 있게 다루었던 바울은 한 걸음 더 나아가, 결국은 모든 인류가 다 죄 아래 있다고 선포합니다. 이방인들이라고 조금도 나을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모든 인류가 다 죄 아래 있다는 것의 증거가 무엇입니까?
의인이 하나도 없습니다.
사람의 눈으로 볼 때는 더 착한 사람, 덜 착한 사람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보실 때 모두가 죄인들일 뿐입니다. 절대적으로 선하신 하나님 앞에서 인간들은 얼마나 더럽고 추한 존재인지 알 수 없습니다. 목구멍은 열린 무덤입니다. 그 혀에는 속임이,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어 저주와 악독이 가득합니다. 발은 피 흘리는데 빠르고 파멸과 고생으로 달려감으로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합니다. 진실로 목구멍, 혀, 입술, 발과 같은 이런 신체기관들은 오직 하나님께 찬양과 영광을 돌리도록 만들어졌습니다. 그러나 죄로 오염된 인간들은 스스로 그 목적에 이를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더욱 심각한 죄는 그렇게 죄 중에 살면서도 하나님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18절).
전적으로 부패한 인간인 까닭입니다. 이 모든 것은 인류가 다 죄 아래 있다는 확실한 증거들입니다. 오늘날도 지구촌에는 평화라는 명목으로 온갖 전쟁과 폭력이 난무하고 있습니다. 정의라는 이름으로 무서운 악들이 저질러지고 있습니다. 인간이 죄인이 아니라면 불가능한 것들입니다. 우리 자신에게 의로움이 없음을 진실로 인정하고 더욱 그리스도에게 나아가야 하겠습니다.
율법에 의해 죄가 다 드러납니다
율법 앞에 서 있는 사람은 죄를 핑계할 수 없고, 하나님의 심판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율법이 우리의 죄를 고발하기 때문입니다. 율법은 모든 인류가 죄 아래 있다고 선언합니다. 거울 앞에 서게 되면 자기 몸의 허물을 보지 않을 수 없듯이, 율법 앞에 서게 되면 모든 인류의 죄는 극명하게 드러납니다. 율법 앞에 서게 되면 아무리 도덕적으로 자신만만한 사람도 자신의 죄악을 깨닫지 않을 수 없습니다. 유대인들은 율법을 통해서 구원을 얻으려 했지만, 사실상 율법으로는 오직 죄를 깨달을 뿐입니다(20절). 그러므로 우리는 율법주의자가 될 수 없고 그렇다고 율법 폐기론자도 될 수 없습니다. 율법은 필요합니다.
우리는 율법이라는 거울로 자신을 끊임없이 비추어보면서, 더욱 겸손하게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 나아가 무릎을 꿇어야 합니다. 바로 그곳에서 우리는 참된 구원을 맛보며,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샬롬을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율법으로 말미암아 죄를 깨닫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의 은혜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기독대학인회(ESF) 제공
지금까지 유대인의 죄를 심도 있게 다루었던 바울은 한 걸음 더 나아가, 결국은 모든 인류가 다 죄 아래 있다고 선포합니다. 이방인들이라고 조금도 나을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모든 인류가 다 죄 아래 있다는 것의 증거가 무엇입니까?
의인이 하나도 없습니다.
사람의 눈으로 볼 때는 더 착한 사람, 덜 착한 사람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보실 때 모두가 죄인들일 뿐입니다. 절대적으로 선하신 하나님 앞에서 인간들은 얼마나 더럽고 추한 존재인지 알 수 없습니다. 목구멍은 열린 무덤입니다. 그 혀에는 속임이,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어 저주와 악독이 가득합니다. 발은 피 흘리는데 빠르고 파멸과 고생으로 달려감으로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합니다. 진실로 목구멍, 혀, 입술, 발과 같은 이런 신체기관들은 오직 하나님께 찬양과 영광을 돌리도록 만들어졌습니다. 그러나 죄로 오염된 인간들은 스스로 그 목적에 이를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더욱 심각한 죄는 그렇게 죄 중에 살면서도 하나님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18절).
전적으로 부패한 인간인 까닭입니다. 이 모든 것은 인류가 다 죄 아래 있다는 확실한 증거들입니다. 오늘날도 지구촌에는 평화라는 명목으로 온갖 전쟁과 폭력이 난무하고 있습니다. 정의라는 이름으로 무서운 악들이 저질러지고 있습니다. 인간이 죄인이 아니라면 불가능한 것들입니다. 우리 자신에게 의로움이 없음을 진실로 인정하고 더욱 그리스도에게 나아가야 하겠습니다.
율법에 의해 죄가 다 드러납니다
율법 앞에 서 있는 사람은 죄를 핑계할 수 없고, 하나님의 심판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율법이 우리의 죄를 고발하기 때문입니다. 율법은 모든 인류가 죄 아래 있다고 선언합니다. 거울 앞에 서게 되면 자기 몸의 허물을 보지 않을 수 없듯이, 율법 앞에 서게 되면 모든 인류의 죄는 극명하게 드러납니다. 율법 앞에 서게 되면 아무리 도덕적으로 자신만만한 사람도 자신의 죄악을 깨닫지 않을 수 없습니다. 유대인들은 율법을 통해서 구원을 얻으려 했지만, 사실상 율법으로는 오직 죄를 깨달을 뿐입니다(20절). 그러므로 우리는 율법주의자가 될 수 없고 그렇다고 율법 폐기론자도 될 수 없습니다. 율법은 필요합니다.
우리는 율법이라는 거울로 자신을 끊임없이 비추어보면서, 더욱 겸손하게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 나아가 무릎을 꿇어야 합니다. 바로 그곳에서 우리는 참된 구원을 맛보며,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샬롬을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율법으로 말미암아 죄를 깨닫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의 은혜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기독대학인회(ESF)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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