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8/2009

아멘의 뜻의 두 방면

요한 계시록 7장은 아버지 집에 살 자들을 말하고 있는데 아버지 집에 함께 살 천사들의 경배를 통해서 나타난 몇 가지 경배 지식 들이 있습니다. 그 중에서 본문은 아멘에 대해서 말하려고 합니다. 본문에서 말하는 경배의 지식들은 아멘과 찬송과 영광과 지혜와 감사와 존귀와 능력과 힘, 이 여덟 가지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이 용어들은 하나님께 경배하는데 있어서 제일 중요한 용어들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보좌 앞에 나아가기 원하는 자들은 마땅히 경배지식을 알아야합니다.

본문에서 말하는 아멘이란 두 가지 뜻이 있습니다. 그 하나는 진실로, 참으로라는 뜻이 있고 또 하나는 예라는 뜻이 있습니다. 요한 계시록 3장 14절에는 아멘이시오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오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에서의 아멘은 예수님 자체를 말씀하시는 것으로서 진실로나 참으로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진리이십니다. 진리는 참 것, 실제의 것을 말합니다. 진리란 참 것으로서 어느 무엇으로 대신할 수 없는 것을 말합니다.

이 말은 예수님께서 라오디게아 교회 사자의 형편없는 모습을 지적 하시면서 아멘이신 예수님 즉 참으로 진실하신 분의 말씀이니 그 말씀에 동의하고 받아들이라, 인정 하라, 예하라, 순종하라는 뜻으로 쓰인 말로서 예를 이끌어 내기 위해 쓰인 말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고린도 후서 1장 19-20절을 보면 ‘우리 곧 나와 실루아노와 디모데로 말미암아 너희 가운데 전파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예 하고 아니라 함이 되지 아니하였으니 저에게는 예만 되었느니라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 그런즉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멘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느니라’고 기록 되어 있습니다. 무슨 말이냐면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언제나 예만 된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아니오란 불순종을 뜻하며 예만 된다는 말은 하나님의 모든 약속을 받아들여 순종해야 함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여기에서의 아멘의 뜻은 예하고 받아들이라는 말로서 순종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아멘은 두 방면으로 쓰였는데 그 하나는 진실하고 참되신 예수님 그 자체를 말씀하실 때도 쓰였음을 봅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상대방에 대한 답변으로서 예라는 뜻으로 쓰였습니다. 이 말은 곧 나도 뜻을 같이 합니다. 그 뜻에 순종합니다. 그 말에 동감합니다. 라는 뜻입니다. 우리에게 아멘이 되시는 예수님! 항상 주님 앞에 순종하는 자 되기 원합니다. 모든 것들이 아버지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 아멘! <예수님따라가기>

하나님의 자비에 대한 놀라운 계시(데이빗 윌커슨 목사) - 2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영광, 자비 그리고 보호를 계시하십니다. 여기에서 바울이 우리가 하나님을 실망시켰을 때, 즉 우리가 빛을 대적하여 중대하게 범죄 하였을 때, 우리는 예수님 안에 숨었다고 말하는 뜻이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실패한 상황에서 꾸물거리고 있어서는 안 됩니다. 대신 우리는 재빨리 예수님께로 달려가야 합니다. 반석 안에 숨기 위해서 입니다. 바울은 이렇게 씁니다.

“우리 조상들이…모두가 같은 영적 음료를 마셨느니라. 이는 그들이 자기들을 따라가던 영적 반석으로부터 마셨기 때문이니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였느니라”(고린도전서10:1~4)

그 장면으로 돌아가 봅시다. 하나님께서는 바위 가운데 틈을 내셨고 모세를 그 가운데에 안전하게 두셨습니다. 그분께서는 그의 종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나 자신이 네 옆을 지나가겠노라. 그리고 나는 너에게 나의 마음을 보여주겠노라. 그러면 너는 한 번에 내가 누구인지 모두 알게 될 것이다. 너는 내 본성의 전체를 보게 될 것이다. 그리고 너는 실패의 때에 너를 향한 나의 마음을 알게 될 것이다.”

모세와 같이, 우리도 바위틈에서 안전하다는 것의 의미를 알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그분을 실망시킬 때마다 주님으로부터 도망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약속하셨습니다. “나는 너를 안전한 장소에 숨길 뿐만 아니라, 내가 거기서 너를 덮어서 보호해 주겠다. 너는 완전히 안전하다. 나의 거룩한 임재 가운데서도 말이다. 너는 알게 될 것이다. 네가 알아 온 나의 본성에 또 다른 면이 있음을. “너는 크게 범죄를 하였다. 그러나 나는 네가 경건한 슬픔으로 나에게 달려오기를 바란다. 나는 네가 나의 자비와 은혜의 확실한 계시를 얻을 때까지 너를 내 손으로 지켜주겠다. 나는 네가 내가 누구인지 보고 알기를 원한다. 그렇지만 모세와 같이, 너는 이 계시를 구하여야 한다. 너는 ‘주님, 당신의 영광을 보여주십시오.’라고 울부짖어야 한다. 여기서 모세 또한 하나님의 율법을 어겼다는 것을 지적하겠습니다. 그가 산에서 돌아와 사람들이 금송아지 주위를 벌거벗고 춤추는 것을 보았을 때, 그는 분노로 타올랐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십계명을 써주셨던 돌 판을 들어 땅에 내동댕이쳤습니다. “

모세가 크게 분노하여 자기 손에서 그 판들을 던져 산밑에서 깨뜨리니라”(출애굽기32:19)

이것은 거룩한 분노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격노하는 사람의 인간적인 뜨거운 분노였고 그것은 죄였습니다. 성경은 모세를 하나님의 온유하고 겸손한 종으로 설명합니다. 그러나 이 동일한 종이 사람들의 죄를 보았을 때, 그의 노여움은 난폭하게 터졌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 돌 판을 깨뜨려 문자 그대로 하나님의 율법을 깨뜨린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사역자로써, 이것은 저에게 거룩한 두려움을 줍니다. 그것은 나에게 하나님의 집 집에 죄에 대하여 감히 내 자신의 인간적인 분노로 다가갈 수 없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제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분노를 드러내기 위하여 육신적인 열정으로 응하려고 할 때마다, 저는 하나님의 법을 깨뜨리는 것입니다. 대신, 저는 반석으로 달려가야 합니다. 저는 하나님의 영광, 그분의 사랑의 친절에 대한 계시를 얻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는 그분의 백성들을 그분의 자비와 보호의 자리로 다시 이끌어야 합니다.

그 다음 장면도 모세가 여전히 분노 가운데 행하고 있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는 금송아지를 가루가 되도록 갈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사람들이 그것을 물과 함께 마시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공개적으로 그의 형제인 제사장 아론을 책망하였습니다. 아론은 죄의식과 두려움에 짓눌려 부르짖었습니다. “내 주여, 크게 분노하지 마소서”(32:33)

그 시점에 모세는 오직 하나님의 분노만을 보았던 것입니다. 그는 주님께서 어떻게 죄를 다루시는지 목격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아직 하나님의 선하심이 드러난 것을 보지는 못했습니다. 모세는 여전히 하나님의 그 백성을 향한 마음의 완전한 그림을 갖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 때문에, 그는 주님을 잘못 전했습니다. 그는 오직 반쪽자리 복음을 전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야고보가 이렇게 말하듯이 말입니다. “사람의 진노가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한다”(야보고1:20)

우리는 하나님의 성품을 잘못 전해서는 안 됩니다.
성경은 여기에서 주님께서 모세의 분노를 인정해 주셨는지 관해서는 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모세의 행동은 이스라엘에게 무엇을 말했습니까? 그리고 그 행동들은 불신의 세계를 향해 무엇을 말했습니까? 그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했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럼 이것이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이 범죄 하였을 때의 모습이시구나. 만일 네가 금송아지를 세우면, 그분께서 분노와 진노로 너를 대적하여 오실 것이다. 그분께서는 네게 쓴 물을 마시게 하실 것이다. 그리고 그분은 너의 가족을 죽이고 너를 버릴 것이다.”

아니요, 절대로! 하나님에 대한 그러한 개념은 완전한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그것은 단지 두려움을 나을 뿐입니다. 주님의 사역자로써 저는 하나님의 자비 없이 하나님의 진노를 이야기할 수는 없다는 것을 압니다. 네, 주님은 의로우시고, 그렇습니다, 죄를 미워하십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분께서는 또한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은 자비로우시고, 인내하시며, 인자하시고, 용서하십니다.

모세는 단지 인간적인 열정으로 행동했었습니다. 그는 이 모든 것을 하나님의 자비에 대한 계시 없이 행하였습니다. 그는 그의 메시지로 소리질렀습니다. “나는 주님의 편이다. 범죄한 너희 모두 나에게 오라. 나는 주님께 가려고 한다, 그리고 아마도 내가 너희 죄로 인해 속죄하여야 하리라,”(출애굽기32:20을 보십시오)

성경은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모세로 약속된 땅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신 이유라고 말합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본성, 그분의 성품, 영광을 잘못 나타냈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이 거룩하고 온유하고 귀한 사역자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이스라엘 자손 가운데서 내게 범죄하여 이스라엘 자손 한가운데서 나를 거룩히 구별하지 아니하였음이라. 네가 네 앞에 있는 땅을 바라다보기는 하려니와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주는 땅에 들어가지는 못하리라”(신명기32:51-52)

여기에 주님께서 이 그분을 잘못 나타내는 문제를 얼마나 중대하게 여기시는지 나옵니다. 모세는 그의 최선으로, 그분의 자비로 그분의 진노를 누그러뜨리시는 하나님을 나타내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모세로 하여금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는 것을 막았습니다. 주님께서는 지적하셨습니다.

“너희가 이스라엘 자손 한가운데서 나를 거룩히 구별하지 아니하였음이라”(32:51)

베드로는 이렇게 이 문제를 언급합니다. “오직 너희 마음 속에서 주 하나님을 거룩히 구별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사람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예비하되 온유함과 두려움으로 하며”(베드로전서3:15). 베드로는 정확히 무엇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까? 단순히 말해, “당신 자신의 마음대로 하나님을 잘못 드러내지 마십시오.” 다른 말로 하면, “여러분의 마음속에 하나님의 성품의 흐름이 단호하게 자리잡게 하십시오.”

이것이 우리가 우리의 소망의 기초를 잡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아시다시피, 만일 우리가 하나님께서 충실한 때와, 반역의 때에 그의 자녀들에게 어떻게 반응하시는지 모른다면, 어떻게 다른 사람과 그분을 정확하게 나눌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단지 그분을 엄격한 판관으로써만 대표할 것입니다. 우리가 그분을 사랑의 아버지로써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너희 속에 있는 소망”(3:15). 베드로는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소망의 이유는 여러분이 주님과의 경험을 가져 왔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비참할 정도로 그분을 실망시켰습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삶에 금송아지를 세웠습니다. 그러나 그리고는 반석으로 돌아왔습니다. 여러분은 그분의 보호의 손길을 느꼈던 바위틈에 숨었습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그분의 용서, 자비, 사랑을 맛보았습니다. 그리고 그분께서 여러분을 회복시키셔서 그분 안에서 자라게 하였습니다. 여러분은 이제 주님께서 거룩하신 하나님이실 뿐만 아니라, 또한 자비로우신 아버지이심을 압니다.”

“이제, 여러분의 마음에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성품에 대한 진실한 계시를 확실히 하십시오. 그것이야말로 여러분 소망의 기초입니다. 여러분이 한번이라도 죄에 의해 놀라거나 압도당한 적이 있다면 알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도망칠 필요가 없다는 것을. 그리고 여러분은 죄책감에 눌릴 필요가 없습니다. 여러분은 회개로 돌아가 반석 안에 숨을 수 있습니다. 거기서 여러분은 필요한 모든 자비와 사랑을 발견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그 자신에 대해 모세에게 주셨던 커다란 계시는 무엇이었을까요? 우리가 우리 마음 속에 거룩히 구별해야 할 그분에 대한 진리는 무엇입니까?

“주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너는 아침에 예비하고 아침에 시내 산에 올라와… 주께서 구름 가운데 내려오사 그와 함께 거기 서서 주의 이름을 선포하시니라. 주께서 그 앞으로 지나가시며 선포하시되, 주로다. 긍휼이 많고 은혜롭고 오래 참고 선함과 진리가 풍성한 주 하나님이로다. 내가 긍휼을 수천에게 베풀며 불법과 범죄와 죄를 용서하리라. 그러나 이것은 결코 죄 있는 자를 깨끗하게 하는 것은 아니며”(출애굽기34:1,6-7)

여기 하나님이 누구이신가에 관한 완전한 그림, 더욱 큰 계시가 있었습니다. 주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아침에 이 바위로 올라오라. 내가 너를 지켜 줄 소망을 주겠노라. 나는 너에게 네가 전에는 결코 보지 못했던 나의 마음을 보여주겠노라.” 하나님의 마음은 무엇이었습니까? 모세가 주님께 간청했던 그 ‘영광’은 무엇이었습니까?

여기에 영광이 있습니다. “긍휼이 많고 은혜롭고 오래 참고 선함과 진리가 풍성한, 긍휼을 수천에게 베풀며 불법과 범죄와 죄를 용서하시는. 그러나 이것은 결코 죄 있는 자를 깨끗하게 하는 것은 아닌” 하나님이십니다. 그리스도는 그 영광의 완전한 표현이십니다. 정말 아버지 안에 있는 모든 것들이 아들 안에 구현되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그 영광을 우리에게 가져다주시기 위하여 땅으로 보냄을 받으셨습니다.

모세의 시대에는 물론 그리스도는 아직 육체를 입지 않으셨지만 하나님 안에 계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께서 그 자신의 성품에 대해 선포하신 그 모든 것들이 예수님 안에서 나타난 것을 봅니다. 그리스도는 자비롭고 은혜로우시며, 진리로 가득하고, 순수하고 의로우시나 죄를 용서하십니다.

이제 여러분은 묻습니다. “마지막 절은 어떻게 된 것입니까? 하나님께서는 죄 있는 자를 깨끗하게 하지는 않으실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분께서 자비롭고 용서하신다면 어떻게 그럴 수 있지요? 그 절은 다음과 같습니다. “이것이 결코 죄 있는 자를 깨끗하게 하는 것은 아니며 아버지들의 불법을 자녀들과 자녀들의 자녀들에게 벌하여 삼대와 사대까지 이르게 하리라”(출애굽기34:7)

하나님께서는 본질적으로 이렇게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여기 나의 영광이 있노라. 나는 너에게 자비와 은혜와 용서를 풍성히 주노라. 그러나 만일 네가 이 영광을 거절한다면 -마음을 강퍅히 하고, 네 죄를 사랑하며, 나에게 되돌아오기를 거부한다면- 빨리 회개하고 너를 지키겠다는 나의 언약의 약속을 신뢰하지 않겠다면- 그렇다면 너는 그 모든 죄 중에서도 가장 악한 죄를 범한 것이다. 너는 나를 거절한 것이다. 너는 나의 사랑의 품에서 뒤돌아 선 것이다.”

사실 예수님 품 밖에는 아무런 치유가 없습니다. 여러분은 주님과의 대단한 친밀함을 가진 것에 대해서, 많이 기도한 것에 대해서, 강력한 계시를 받은 것이 대해서 간증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지만 그리스도를 여러분의 마음에 거룩히 구별하였습니까? 실패와 반역의 때에 그분의 풍성한 자비에 대한 소망을 아십니까? 여러분에게 누군가가 물어볼 때에 이 소망에 대해 말할 수 있습니까? 여러분이 금송아지에게 절한 이후에 예수님에 의하여 회복된 것을 간증할 수 있습니까? 다른 사람들도 여러분이 그랬던 것처럼 그리스도께 달려갈 수 있다는 동일한 소망을 건네줄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은 의아하게 여길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풍성한 영광에 대한 그리스도의 계시를 붙잡는 범죄 하기 일수 인 신자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까요? 그들이 그분의 자비를 받아들이고 회복된다면, 그들이 계속해서 범죄 하겠습니까? 이 풍성한 사랑의 계시가 그들로 죄를 가볍게 여기게 하겠습니까? 우리는 이 놀라운 계시에 대한 모세의 반응을 보기만 하면 됩니다. 그 다음에 이 사람이 행한 것은 나의 영혼에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모세가 급히 땅을 향하여 머리 숙이고 경배하며 이르되, 오 주여, 이제 내가 주의 눈 앞에서 은혜를 입었사오면 원하건대 우리 가운데서 함께 가시옵소서. 이는 이 백성이 목이 뻣뻣한 백성이기 때문이니이다.”(출애굽기34:8-9)

모세는 경배하며 재빨리 그의 머리를 숙였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놀라운 자비와 사랑의 강력한 환상을 받은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그 안에서 주님의 임재에 대한 새로운 갈망이 솟아올랐습니다. 갑자기, 그의 마음 속에 용서를 위한 더 큰 울부짖음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의 죄를 마음 놓고 고백하기 시작했고 백성들을 위해 중보했습니다.

무엇이 이 변화를 일으킨 것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자비에 대한 계시였습니다. 그것은 아버지의 사랑의 마음에 대한 강력한 진리의 계시였습니다. 모세는 그가 용서 받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저는 나중에 그 스스로 이렇게 묻지 않았을까 합니다. “왜 내가 아론이 그분과 대면하도록 조용히 끌어당기지 않았을가? 왜 나는 그렇게 빨리 칼을 빼 들었던가? 내가 이 하나님의 영광의 계시만 받았었더라면”

여기에 모세의 부르짖음에 주님께서 반응하신 방법이 있습니다. “보라, 내가 언약을 맺으리라. 내가 아직 온 땅에서 나 혹은 어떤 민족 중에서도 행하지 아니한 놀라운 일들을 너희 온 백성 앞에서 행하리라. 너와 함께 있는 모든 사람이 주의 일을 보리니 이는 내가 너와 함께 행할 일이 두려운 것이기 때문이니라”(34:10) 마지막 절의 히브리 원문은 다음과 같이 번역됩니다. “참으로, 내가 너의 안에 둘 것은 하나님을 두려워함이라.”(Helen Spurrell)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너의 전성기가 앞에 있다, 모세. 나는 내 백성들 가운데서 기적을 행할 것이다. 그리고 내가 하는 것은 너 뿐만 아니라 네 주위에 있는 자들 안에 나의 거룩한 두려움을 넣을 것이다.” 간단히 말해, 하나님의 영광의 계시는 경건한 두려움을 낳을 것입니다.

친애하는 성도 여러분, 이 하나님의 자비의 계시를 여러분의 마음에 거룩히 구별하십시오. 여러분은 모세의 예로 인해 그것이 죄로 이끌지 않을 것임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진실로 주님의 풍성한 사랑을 받아들인다면, 그것은 여러분이 찬양하도록 감동시킬 것입니다. 여러분은 기도할 것입니다.

“주님, 나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나를 사랑하시다니 하나님은 어떠한 분이십니까? 죄 가운데서 나를 찾으시고도, 바위 속 틈으로 데려가시는 하나님은 어떠한 분입니까? 오, 제가 섬기는 그 하나님이시라니. 전 세계가 당신에 대해 알기를 원하옵나이다.”

하나님의 자비에 대한 놀라운 계시(데이빗 윌커슨 목사) - 1

출애굽기 33장은 모순적입니다. 11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주께서는 마치 사람이 자기 친구와 이야기하듯 모세와 얼굴을 마주 대하여 말씀하시니라” 그리고는, 단지 몇 절 뒤에는 이렇게 쓰여져 있습니다. “또 이르시되, 네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니 이는 나를 보고 살 자가 없을 것 임이니라”(33:20) 이는 문자적으로, “내 얼굴은 보이지 않을 것이다.”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이를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요? 한 절은 모세가 주님의 얼굴을 보았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다른 절은 분명히 그 누구도 하나님의 얼굴을 보고 살아남을 수 없다고 단언합니다. 실제로, 모세는 문자 그대로 주님의 얼굴을 바라보지 않았습니다. 그 보다, 이 절은 모세가 하나님과 나누었던 놀라운 친밀함을 뜻합니다.

그것은 주님과 모세 사이의 결속 때문에, 주님께서 모세에게 주었던 통찰력과 계시에 대해 말하는 것입니다. 모세는 모든 날들을 하나님의 임재 속에서, 그분 알기를 구하며 지냈습니다. 그리고 성경은 주님께서 모세를 친구로 인식하셨다고 말합니다(33:11). 이것은 우리에게 모세가 하나님을 그 어떤 사람도 보지 못했던 것처럼 보았다고 (또는 알았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모세는 그가 하나님과 함께 보냈던 충실한 시간 때문에 하나님의 마음에 대한 친밀한 지식과 이해를 얻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제, 이 일은 모두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결정적인 시점에서 일어납니다. 이스라엘은 막 주님을 대적하여 불경스러운 죄를 저질렀습니다. 그들은 그들의 모든 보물을 녹여서 우상, 즉 금 송아지로 빚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우상의 주위를 악마적인 광란 속에서 춤추고 돌며 숭배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우상숭배는 금송아지를 숭배하는 그 이상이 관련된 것입니다. 사람들 또한 그들의 장막에 작은 우상을 숨기고 그것들을 숭배하였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가 몰록의 장막과 너희의 신 렘판의 별 곧 너희가 경배하고자 하여 만든 형상들을 들고 다녔은즉”(사도행전7:43)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진노를 불러 일으켰습니다. 그분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홀로 내버려 두라. 내가 그들에게 맹렬히 진노하여 그들을 진멸하고”(출애굽기32:10)

여기서 중요한 것은 모세는 나머지 이스라엘과 함께 범죄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는 그 모든 시간 주님과 함께 산에서 있었습니다. 그래도 모세는 여전히 그 백성들의 행동에 책임을 졌습니다.이스라엘의 지도자로써, 그는 이렇게 언명하며 백성들의 죄를 자신과 동일 시 했습니다.

“이 백성이 자기들을 위하여 금으로 신들을 만들어 큰 죄를 범하였나이다”(32:31)

모세는 주님께서 모든 진을 소멸하실 권리가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문 문제를 야기하였습니다. 결국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선택된 나라였던 것입니다. 제사장과 레위인들은 그분의 정해진 사역자들이었고, 주님은 그들과 언약 안에 계셨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이렇게 말하며 하나님을 설득하려 했던 것입니다. “네, 주님, 이들은 당신의 백성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끔찍한 불경을 저질렀습니다. 당신은 그들에게 사랑만을 보여주었지만, 그들은 당신 얼굴의 큰 빛 앞에서 범죄하였습니다.”

“그러나, 주님, 그들은 여전히 당신의 백성입니다. 그러니 만일 그들을 자르신다면, 우리는 망할 것입니다. 우리는 달리 갈 곳이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되돌아갈 사람이나 다른 소망이 없습니다. 차라리 스스로 무덤을 파고 거기에 앉아서 죽기를 기다리는 것이 낫겠습니다.”

모세에게 주어진 이 딜레마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는 우선 이스라엘의 죄 된 본성을 알았습니다. 사람들의 마음은 확실히 퇴보로 기울어져 있었습니다. 그의 마지막 날에 모세는 이렇게 그들을 상기시키곤 했습니다.

“네가 이집트 땅을 떠나오던 날부터 이곳에 이르기까지 늘 주를 거역하였으되”(신명기9:7)

그러나 모세는 또한 그 자신의 죄도 의식하고 있었습니다. 그가 금송아지에게 절하지는 않았다 해도, 그는 그 자신의 인간적인 의가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받을만하지 못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제 모세는 이 딜레마에 빠져 곤란하게 되었습니다. 마치 이렇게 말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주님, 당신께서는 현장에서 저희를 심판하실 모든 권리가 있습니다. 제가 당신이었어도 아마 그렇게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에게도 문제가 있습니다. 이 위기에 대한 어떤 점은 제 스스로도 관련이 있습니다. 당신께서는 제 이름을 아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당신께서는 나의 모든 움직임, 나의 일어섬과 앉음을 아십니다. 저는 당신과의 친밀함을 나누었고, 당신 앞에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주님, 저는 이전 어떤 때와도 달리 위기에 빠졌습니다. 그리고 이 상황에서 무엇인가 당신에 대해 알지 못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무엇인가 매우 중요한 것이고 저는 알아야 하겠습니다.”

“제가 주님 앞에서 호의를 얻었다면, 제발, 당신의 백성을 죄 가운데서 발견되었을 때, 그들을 향한 당신의 모습은 어떠한 것인지 보여주십시오. 이 위기에 제가 지금 당신과 함께 어디에 설지 보여주십시오. 제가 여전히 당신의 친구입니까? 여전히 당신의 은혜 안에 있는 것입니까? 우리는, 당신의 백성은, 여전히 당신의 선하신 은혜 안에 있는 것입니까? 저는 모든 위기를 통해 당신께서 우리를 보살피시는 것을 봐 왔습니다. 그러나 지금, 현재의 위기상황에서는, 당신을 모르겠습니다. 당신께서 우리의 죄에 대해 어떻게 반응하실지 모르겠습니다.”

이 장면에서, 모세는 단지 이스라엘의 지도자 그 이상을 의미합니다. 그는 높은 하늘에까지 죄를 지은 하나님의 사람을 상징합니다. (마찬가지로, 그 자신의 죄도 그를 하나님 앞에서 정죄하였습니다. 성경은 모든 자들이 죄를 지어 하나님의 영광에 모자란다고 말합니다.) 결국 모세는 이렇게 울부짖습니다. ‘주의 길을 내게 보여 주사 주를 알게 하시고”(출애굽기33:13).

여기 히브리 원문은 이렇습니다. “당신 자신을 보여주십시오” 여기서 자신이라는 단어는 “마음”으로 번역됩니다. 모세는 이렇게 말했던 것입니다. “하나님, 저는 당신의 마음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당신의 영광에 대한 새로운 계시기 필요합니다. 저의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바로 세우기 위해서 당신은 여기서 뭔가 당신 자신에 관해 저에게 보여주셔야 합니다. 저는 이런 류의 위기에서 당신께 어떻게 다가가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어떻게 당신의 은혜를 구해야 할지, 심지어 그것을 어떻게 믿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예수님의 사람이 불결한 죄에 사로잡힐 때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우리도 모세의 입장에 설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 마땅하다는 것을 알 때에 우리는 그분께 어떻게 반응합니까? 우리의 죄가 얼마나 크거나 작게 느껴지는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어떠한 죄라도 그분의 심판을 살 만큼 큰 것입니다. 모세와 같이, 우리는 하나님과 큰 친밀감을 나누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 친밀감을 부정하고 그분의 우정을 화나게 하는 것도 가능합니다. 우리는 큰 계시로 축복 받았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가 받은 빛을 대적하여 죄를 지었습니다. 우리는 큰 사랑을 보았지만 그 면전에서 범죄 하였습니다. 이제 우리 안에서 급박한 울부짖음이 솟아오릅니다.

“주님, 이런 위기에 당신은 어떠한지 보여주십시오. 저는 당신의 이러한 면을 알아야겠습니다. 제가 죄 때문에 놀랐다면- 내가 내 마음에 금송아지를 세웠다면- 저에게 어떻게 반응하실 건가요? 우리의 위기에, 우리의 의식은 죄의식에 짓눌립니다. 깊게 침체되어, 우리가 들을 수 있는 목소리라고는 모세가 들었던 그 진노의 음성입니다. 나를 혼자 두어라. 나는 너를 소멸하고 내칠 것이다. 몇 번이고, 나는 너를 내 팔로 끌어안았다. 모든 소망 없는 상황을 통해 나는 너를 안고 건넜다. 나는 너에게 친절하고 사랑 많은 하나님이었다. 그러나 너는 자진하여 심각하게 실패하였다. 그리고 이제 나는 너를 포기한다. 나는 나의 길로 걸을 충실한 종을 찾을 것이다. 나는 너에 대한 나의 마음을 바꿀 것이다. 나는 더 이상 너를 원하지 않는다. 너는 반역하는 양이다.”

간단히 말해, 우리는 모세가 마주친 것과 동일한 딜레마에 직면한 것입니다. 모세는 하나님을 그의 친구처럼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께서 그 자신의 회중의 죄와 마주치실 때 어떠할지는 몰랐던 것입니다. 이 장면은 우리에게 하나님을 친한 친구로써 아는 것으로만은 충분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아시다시피, 이 관계의 인간적인 측면에서, 친구는 친밀함의 신뢰를 배반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한편 모세는 이렇게 말할 수 도 있었습니다. “나는 하나님께서 나의 친구이신 것으로 아는데. 그리고 나는 그분께서 나의 필요에 어떻게 반응하시는지 알아. 그분께서는 어떠한 친구라도 그러는 것처럼 공급해 주시지. 그리고 내가 기도할 때에 그분께서는 자비로 응하시지.”

그러나 이제 모세는 문제에 직면하였습니다: “지금은 어떻습니까? 내 삶에서 금송아지를 발견했을 때 말입니다. 내가 주님과의 친밀함의 신뢰를 배반할 때에는 어떤 일이 벌어지는 것입니까? 그분께서는 거룩하시고, 순결하신데, 나는 그분과의 언약의 관계를 깨었습니다. 지금 나의 상처 받은 친구의 눈 앞에 어떻게 서겠습니까?

“네, 나는 그분과 함께 직면하여 이야기해왔습니다. 나는 그분과 함께 많은 시간을 지내왔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놀라운 친밀감을 나누어왔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나의 실패를 한층 더 나쁘게 만들 뿐입니다. 나는 심각하게 범죄 하였고, 그분의 영을 슬프게 하였습니다. 그분께서 나에게 어떻게 반응하실까요? 주님, 당신이 누구인지 보여주십시오, 우리 사이가 좋았을 때만이 아닌, 제가 반역하여 죄 지었을 때, 당신은 어떻게 반응하시겠습니까? 제가 이 계시를 받지 못한다면, 저는 당신과 함께 어디에 서야 하는지 알지 못할 것입니다.”

당신이 주님의 성품을 알기 전에는 그분과 함께 어디에 서야 할지 알 수 없습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이 완전히 이해하여야 할 하나님의 계시가 하나 있습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이 범죄 하였을 때 그분께서 여러분을 어떻게 다루실지 알아야 합니다. 모세는 하나님께서 사악한 자를 어떻게 다루시는지 관해서는 모든 것을 알았습니다. 그는 주님께서 파라오의 강퍅함에 무시무시한 심판으로 응하시는 것을 거룩한 두려움 안에서 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집트의 군대가 그분의 기름부음 받은 자를 건드렸기 때문에 그들을 멸하셨습니다. 모세는 하나님께서 죄를 얼마나 싫어하시는지 직접 보았습니다.

그는 또한 주님께서 어떻게 믿음과 순종에 반응하시는지도 보았습니다. 모세는 하나님께서 그분의 백성들이 안전하게 건너도록 초자연적으로 홍해를 가르시는 것도 보았습니다. 이렇게 모세는 하나님을 구원자로 알았습니다. 더구나, 모세는 하나님을 그분의 거룩하심으로 알았습니다. 주님은 불붙는 떨기에서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모세, 모세, 네 신을 벗어라, 너는 거룩한 땅에 있노라.”

그러나 지금, 현재의 위기에서, 모세는 주님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는 이러한 경우의 하나님의 성품에는 익숙하지 않았습니다. 모세는 이것은 더 이상 친밀함에 관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것은 그가 얼마나 많이 기도했느냐, 그가 얼마나 신실했는가, 또는 그가 얼마나 성실하게 봉사했는가에 관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가 하나님에 관하여 아는 것이 무엇이든지 간에 과거는 여기서 상관없었습니다. 이제 그것은 하나님의 자녀 안에서 죄가 용솟음 칠 때의 하나님은 누구이신가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모세는 주님의 성품에 관한 무엇인가를 더 알아야만 했습니다. 뭔가 희망을 줄 것 말입니다. 그는 하나님에 관한 더 깊은 진리를 가져야만 했습니다. 백성들을 그분의 임재로, 그분의 사랑의 품으로 돌아오게 할 그 무엇인가를 말입니다.

모세는 그것을 알지 못하였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영광과 성품에 대한 더욱 큰 계시로 그를 이끌려고 하신 것입니다. 이 계시는 우정이나 친밀감을 훨씬 뛰어넘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모든 그의 상한 백성들이 알기를 원하시는 계시였습니다. 주님께서는 모세에게 그분의 영광을보여주실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내 모든 선함을 네 앞에 지나가게 하고 주의 이름을 네 앞에 선포할 것이요”(출애굽기33:19)

그리고는 그분은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니 이는 나를 보고 살 자가 없을 것 임이니라. 내 옆에 한 곳이 있으니 너는 반석 위에 설지니라. 내 영광이 지나갈 때에 내가 너를 그 반석 틈에 두고 내가 지나가는 동안에 내 손으로 너를 덮었다가”(33:20-22)

이 절에서 ‘영광’의 히브리 단어는 ‘내 자신’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이렇게 말씀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내 자신이 네 가까이에 지나갈 것이다.” Helen Spurrell의 히브리 원어에서는 이렇게 나옵니다. “나는 너를 바위의 움푹한 곳에 숨기겠노라. 그리고 나는 내가 지나갈 때까지 너를 내 능력의 보호로 지켜 주겠노라.”

주님께서는 본질적으로 이렇게 말씀하고 계신 것이었습니다. “그래, 너는 나를 실망시켰다. 그러나 나는 네가 안전할 장소에 너를 두겠노라. 그 장소는 바위 안이다. 그리고 나는 네가 거기에 머물기를 바란다. 의심을 품거나 두려워 말라. 나는 너에게 내가 누구인지 계시를 주려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신부(데이빗 윌커슨 목사)

우리는 이 세상의 어느 것에도 매여 있지 않아야 합니다. 그 반면에 우리가 전에 전혀 깨닫지 못한 것일지라도 하나님의 보살핌에 우리들의 삶 자체를 의지할 수 있도록 준비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영원"에 우리들의 눈을 고정시키며, 새 예루살렘에 합당한 마음 상태를 가져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모든 것을 잃을 각오까지 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 자신의 생명과 가족들과 미래를 주님의 보살피시는 손안에 완전히 맡겨야 합니다.

우리는 이렇게 그리스도의 신부로 준비해야 하는 것이 성경에 잘 묘사되어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그분의 승리하는 교회, 그분의 아들의 신부로 선택하셨습니다. 이 신부는 지명되었고, 선별되었고, 예수님과 결혼하기로 약속되어졌습니다.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치게 하셨느니라" (행 20:28)

무엇이 이 신부의 초점이 되어야 할까요? 그녀의 초점은 전적으로 혼인식을 위해 자신을 준비하는데 맞추어져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하나님께서 아들의 신부가 영적으로 쇠퇴한 상태를 마음 아파하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슬프게도 많은 관심사가 다른 곳에 가 있습니다. 그들은 이 세상과 물질을 사랑함으로 그들 자신들을 더럽혔습니다. 지금 그들의 예복은 먼지로 더럽혀져 있고 또 얼룩져 있습니다. 사도바울이 말했습니다.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그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 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라." (에베소서 5:25-27)

바울은 알기 쉽게 이야기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신랑을 위해서 단 하나의 티나, 주름, 혹은 흠잡을 것이 없이 거룩해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과 동행하기 위해 이 세상의 것들에 매달리지 않고 죄로 저주받은 이 세상을 떠날 준비를 하고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분을 만나기 위해 매일 자신을 준비하고 있지 않다면 예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요한계시록을 통해 우리는 천국의 하나님으로부터 신부로 준비된 거룩한 사람들이 내려오고 있음을 압니다.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城)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예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계 21:2)

여기서 요한이 말하는 거룩한 도시는 시온이며 인내로 이긴 하나님의 영적 자녀들로 형성된 곳입니다. 그들은 천국에 그리스도와 단둘이 앉혀졌습니다. 그들은 단둘이 시간을 보낸 그곳, 즉 은밀한 기도실에 들어갈 때마다 요한이 말하는 것처럼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신부" 인 성도들은 이 세상으로부터 즐거움을 추구하지 않습니다. 그들의 사랑은 물질적인 것을 따르지 않습니다. 그와 반대로, 그들의 마음은 항상 주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 외에 아무도 바라지 않습니다. 주님은 그분의 임재하심을 찾는 사람의 마음을 그분에게 자석처럼 달라붙게 합니다. 매일 아침 그들은 일어나며 생각합니다.

"주님, 저의 가족과 직장. 그리고 당신께서 허락하신 모든 것을 감사드립니다. 그러나 저는 이 지구가 계속 존재 할지 그 여부에 대해서는 전혀 모릅니다. 저의 마음은 여기에 있지 않습니다. 바로 예수님과 함께 있습니다!"

오늘날 승리하는 그리스도의 신부로 자신들을 다듬고 있는 성도들은 재앙이 내릴 때 자신들의 생명을 구하려고 준비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이 준비하고 있는 가장 중요한 것은 대혼인 잔치를 위해 떠나는 것입니다. 이 신부는 믿음으로 자신을 깨끗하게 준비하며 그녀 자신을 가꾸고 있습니다. 그녀는 마음을 정돈하고 사랑하는 분에게 나아가기 위해 자신을 바치는 것입니다. 그녀는 오직 그녀의 신랑과 함께 하기만을 원하기 때문에 더 이상 이 세상 것들에 매여 있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신부들이 지상에서 펼치고 있는 사역이 얼마나 멋지고 거룩합니까? 하지만 저는 얼마나 많은 다른 그리스도인들이 그들의 육적인 안녕을 위해 더 열심히 준비하고 있는지를 생각해 봅니다. 그들의 전적인 초점은 경제적 불황의 위기를 넘기기 위해 필요한 모든 것을 타당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양의 속죄물 위에 잔치를 벌이는 대신 직접 불황에 맞서다 기진하게 될 것입니다. 그들은 세상적인 것들에 마음을 고정시켰기 때문에 이 세상의 불결한 것들에 정신이 팔려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더 이상 영적인 사람이 아닌 육적인 사람이 되어버렸습니다!

하늘나라에서는 이 지상의 운명을 안전하게 넘기기 위해 모든 정력을 다해 갖은 수단을 강구하는 사람들 때문에 슬퍼하고 있을 것입니다. 주님은, "오, 너의 그러한 정열을 내게 바칠 수 있었을 텐데, 나를 위해 너의 마음을 그처럼 철저히 준비할 수 있었을 텐데!" 라고 탄식하실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께 확신시켜 드립니다. 만약 여러분이 마음을 정돈하고, 죄 문제를 청산하고, 마음을 다해서 주님을 찾으며, 그분의 약속의 말씀을 의지하며, 믿음을 쌓고, 영적인 준비를 하고 있다면 여러분은 모든 준비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불황과, 손해와 박탈, 사방의 재난 등에 대응할 수 있게 될 뿐만 아니라 혼란 상태나 홍수, 훨훨 타는 용광로, 핍박, 흉년, 가뭄, 기근, 질병 등을 극복할 준비도 되어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마지막 때에 하나님의 나팔소리를 들을 수 있는 준비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와 결합하기 위한 혼인 잔치를 향해 행진할 수 있도록 준비될 것입니다!   
<위기 그곳에 계신 하나님 - 데이빗 윌커슨 목사 저>

에베소, 두아디라, 그리고 라오디게아 교회(데이빗 윌커슨 목사) - 2

저는 이렇게 느꼈던 많은 그리스도인의 비극적인 퇴보를 목격해 왔습니다. 그들은 절대 교회를 찾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집에 앉아 TV로 설교를 보는 것으로 끝냅니다. 그들은 영적 식사로 어떠한 고기도 얻지 못합니다. 그들이 먹는 것들은 가벼운 것들 뿐입니다. 시간이 지나, 냉담함이 들어섭니다. 곧 그들은 교회를 완전히 포기합니다. 그들은 지체들의 모임을 무시하는데, 이에 대해서 히브리서는 경고합니다.(히브리서10:25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그리고 그들은 그리스도와 그분의 임재에 완전히 무관심하게 됩니다.

여러분께 말씀 드립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사람들로부터 어떠한 변명도 듣지 않으실 것입니다. 여러분이 그분과 개인적 교제를 계속한다면 예수님께서는 누구에게라도 모든 것이 되어주십니다. 여러분의 교회가 어떠한 상태인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그분께 귀중한 시간을 성실히 드려야 합니다. 그분의 말씀이 여러분 가운데 사시기를 원한다면, 여러분은 그분의 임재로부터 깊이 마셔야 합니다.

계시록1-3장을 비추어볼 때, 모든 신자는 스스로 이렇게 물어야 합니다. “나의 선행- 나의 성경공부와 내 섬김-이 예수님과의 시간을 빼앗았는가? 나는 여전히 한 때 그랬던 것처럼 그분을 갈망하고 있는가? 아니면 뭔가 잃어버렸나?”

그리스도께서는 영적 어두움을 염려하시며 모든 시대의 그의 백성들의 마음을 살피십니다. 계시록2-3장에서 예수님께서 언급하신 교회들은 글자 그대로 아시아의 일곱 회중이었습니다. 어떤 성경학자들은 이 교회가 교회역사의 7지역을 대표한다고 믿습니다. 저는 단순히 여기 이 메시지는 모든 세대의 그리스도인들을 위한 것이라고 믿습니다. 간단히 말해 예수님께서는 모든 시대의 그분의 백성들의 마음을 찾으시는 것입니다. 그분께서는 그의 교회에 퍼지는 어떠한 영적 어두움에 관해서도 우려하시는 것입니다.

주님께는 이 절의 일곱 교회 중 다섯 교회에 거스르는 것이 있었습니다. 저는 세 개의 교회에 초점을 맞추겠습니다: 에베소, 두아디라, 그리고 라오디게아.

우리는 이미 에베소의 문제가 그리스도와의 친밀감 부족이었음을 봤습니다. 두아디라의 문제는 달랐습니다. 그것은 꿰임의 악마적인 사역자들과의 관련이었습니다. 그 목사가 이 말씀을 읽었을 때의 반응을 생각해 보십시오. “두아티라 교회의 천사에게 편지하라. 그의 눈은 불꽃 같고 그의 발은 빛나는 놋 같은 하나님의 아들이 이 일들을 말씀하시느니라. ”(계시록2:18) 예수님께서는 이 교회를 거룩한 분노의 타오르는 눈으로 보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 편지는 칭찬으로 이어집니다. “내가 네 행위와 사랑과 봉사와 믿음과 네 인내와 네 행위를 아노니 나중 행위가 처음 것보다 많도다.”(2:19) 다시 한번, 그리스도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너의 행위를 안다. 너의 사랑, 믿음, 섬김, 인내, 이들은 너희가 시작했을 때보다 더 훌륭하다.” 무엇보다도 주님은 그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너희가 나를 사랑하는 것을 안다.” 그분께서는 그분과의 친밀함을 잃었다고 그들을 꾸짖지는 않으십니다.

그러나 그 다음 우리는 다음과 같은 꿰뚫는 말씀을 읽게 됩니다. “그러나 네게 두어 가지 책망할 것이 있나니 이는 네가 자칭 여선지자 이사벨이란 여자를 용납함으로 그녀가 내 종들을 가르치고 유혹하여 행음하게 하고 우상에게 바친 제물을 먹게 하기 때문이라.”(2:20)

여기서 언급된 이세벨은 정확히 누구입니까? 예수님께서는 거짓 목자들에 대하여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분께서는 두아디라의 목사에게 그분의 백성을 꿰는 탐욕스러운 사역자들을 허용한 것에 대해 책망하고 계십니다. “너희는 육욕으로 가득 찬 사역자들이 너희 강단에서 마음껏 이야기하도록 내버려 두었다. 그들은 빛의 천사와 같이 와서는 내 백성을 꿰기 위하여 사악한 속임수들을 쓴다.”

여기의 이세벨의 언급은 단지 탐욕스러운 사역자 그 이상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 거짓목자들은 실제로 그들의 육욕을 실행하고 이루기 위한 음모를 짜냅니다. 단순히 말해, 이세벨이라는 이름은 주님의 눈에 악하고 가증한 모든 자들의 전형인 것입니다.

이 얼마나 우리에게 주어진 혼란스러운 상황입니까? 여기에 주님을 사랑하는 헌신된 하나님의 남녀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인내하고, 신실하며 예수님을 사랑합니다. 어떻게 이러한 신자들이 거짓선지자들에게 현혹될 수 있었을까요? 어떻게 그들이 하나님께서 멸시하는 사악한 사역자들에게 꿰임 당할 수 있었을까요?

여러분은 충격 받으실지 모르겠지만 저는 바로 이와 같은 것이 이 나라의 방방곳곳에서 일어나는 것을 봅니다. 무리를 속여 강탈하려는 여우들이 한때 거룩한 메시지로 알려졌던 교회들 안에서 설교하고 있습니다. 그 목사에게 왜 이를 허용했는지를 물어보면 그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이 설교자들은 회중을 끌어요. 사람들이 교회로 오지요.” 그러나 그는 사탄 그 자신의 먹이를 대접하기 위하여 거짓선지자를 허락하는 것입니다. 자기 중심적인 탐욕의 복음 말입니다.

여기의 모순을 아시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두라디아의 목사를 사랑과 경건함의 사람이라 칭하셨습니다. 그러니 이와 같은 사람이 언어도단의 죄, 곧 사람들의 육신을 선동하고 그들의 육욕거리를 제공하는 목자들을 용납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부흥에 관한 잘못된 이해 때문이 사악한 발상을 들여왔고 사람들을 악마적 유혹으로 이끄는 것입니다.

목사의 마음 깊은 곳에서, 그는 그들의 복음이 순수하지 못하다는 것을 압니다. 그러나 무리들이 몰려오는 것이 멈추게 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이제 그리스도께서 그에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이 여우들의 유혹을 관용한다. 그리고 너는 그것이 너희 백성들에게 하는 짓에 대해 무지하다. 그들은 이 설교자들의 집회에 빠져들고 있다. 그리고 그들은 파탄으로 이끌리고 있다. 그들은 간음하며 우상의 제물들을 먹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너는 그들에게 경고하기를 거절하였다. 나는 내 양들에 대해 목자로 너를 불렀다. 그러나 너는 그들을 보호하고 있지 않다. 왜 너는 이와 같은 악을 관용하는 것이냐? 왜 너는 네 목소리를 높이지 않느냐?”

목사들의 첫째 의무 중 하나는 강단을 깨끗하게 지키는 것입니다. 그는 어떤 자가 거기 서서 거짓된 말을 전하도록 허락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에게 억제적인 문제처럼 들릴지도 모르나 그것이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께서도 아시겠지만 여기서 그리스도께서는 성적인 간음에 관해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분께서는 악한 속박, 육욕적인 교제, 즉 거짓 사역자의 힘에 자신을 맡기는 것에 관해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경고는 확실합니다. “너희는 육신을 자극하는 것을 먹고 있다. 그것은 육욕을 만족시키는 복음이다. 그리고 너희의 영적 생명은 위기에 처해있다.”

기억하십시오. 예수님께서 언급하시는 자들은 배교하는 신자들이 아닙니다. 그는 그들이 가진 무엇이라도 여러분에게 내줄법한 사랑스러운 그리스도인들에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육의 복음에 유혹되었습니다. 그들은 이렇게 속삭이는 교활한 목소리에 주의를 기울입니다. “너는 이 사람이 말하는 것을 들어야 해”

복음서를 통해, 예수님께서는 많은 이들을 멸망시키고 속이러 오는 거짓목자에 대해 경고하십니다. 그러나 저는 그 거짓 복음을 받는 다수의 분별력 없음에 충격을 받습니다. 이와 같은 일이 여러분에게도 일어났습니까? 여러분의 영이 사실은 악마적인 어떤 TV복음을 먹습니까? 여러분은 여러분의 육욕에 호소하며 노인의 마지막 동전마저 취하는 그런 부유한 설교자들로부터의 메시지를 들이키고 있습니까?

이렇게 생각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것들을 보는 게 무슨 해악이람? 그들이 말하는 걸 듣는 게 나를 해할 리가 없어. 게다가, 그것은 모두 주님으로부터 온 것 같은걸?” 아니오! 만일 여러분이 사악한 목자와 함께 한다면 여러분은 악마와 함께 침대에 누워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악과 함께 음행을 저지르는 것입니다.

오해하지는 마십시오. 저는 모든 TV복음 설교자들에 관해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분별력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그 차이를 압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러한 육에 이끌리는 설교자들의 동기를 간파하는 잘 다져진 성도들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사탄의 깊은 것들을 알지 못하는 많은 자”(계시록2:24) 그리스도께서는 이 돈을 붙잡는 사역자들에 관해 둘러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그분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들은 지옥의 바로 깊은 곳까지 영혼을 끌어 내린다.” 그렇습니다. 이 사역자들은 그리스도를 설교하지만 그리스도의 영광을 설교하지 않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들은 말씀을 설교하지만, 그리스도의 말씀을 설교하지는 않습니다. 그것은 악마의 교리로 얼룩진 복음인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그러한 악한 목자들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그녀에게 자기의 음행을 회개할 기회를 주었으나 그녀가 회개하지 아니하였도다.” 그분은 본질적으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나는 이 거짓 선지자와 복음전도자들을 인내해 왔다. 나는 그들에게 거듭 경고를 주었다. 그들은 그들의 사악함에서 돌아설 충분한 시간을 받아 왔지만 그들은 거절하였다.”

그리고 주님은 그분의 말씀에 모든 바른 사역자들에게 경고하십니다. “보라, 내가 그녀를 침상에 던질 것이며, 그녀와 더불어 간음하는 자들도 자기들의 행위를 회개하지 아니하면 대환란에 던지리라. 또 내가 그녀의 자녀들을 사망으로 죽이리라. 그러면 모든 교회들은 내가 사람들의 속과 마음을 살피는 자임을 알게 되리라. 또 내가 너희의 행위에 따라 너희 각자에게 주겠노라. ” 예수님께서는 여기서 단지 거짓 선지자들에 관하여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분께서는 그들을 듣고 지지하는 모든 자들을 포함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들은 모두 고약한 병든 상태와 영적 죽음으로 끝날 것입니다.

에스겔은 그러한 신자들이 저지르는 것을 말합니다. “지나가는 모든 자들에게 네 음행을 쏟았으니”. 다른 말로 “너희는 온갖 이런 거짓 사역자들을 쫓아 다녔다. 그러나 그들은 너희를 이용하였다. 그들은 너희를 팔아먹으며 너희에게 상처와 영적 죽음을 남겼다.”

마지막으로 예수님께서는 이세벨의 사역자들에게 대항하여 신실하게 섰던 자들을 칭찬하십니다. “”(2:25) 그분은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너희는 진리의 분별을 배웠구나, 너희는 온갖 교리의 바람과 물결에 의해 왜곡되지 않게 하였다. 그러므로 이제 붙들 고 있는 것을 지키라. 속지 않게 하여라. 그것이 내가 부탁하는 전부이다. 나는 내가 돌아 올 때까지 너희에게 아무런 짐도 지우지 않겠다” (2:24를 보십시오)

저는 예수님으로부터의 편지를 여는 라오게디아의 목사가 되고 싶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라오게디아의 교회에 한마디의 칭찬도 하지 않으십니다. 대신에 이 목사는 다음을 읽습니다.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덥지도 아니하도다. 나는 네가 차든지 덥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네가 그처럼 미지근하여 차지도 아니하고 덥지도 아니하기 때문에 내가 너를 내 입에서 토해 내겠노라.” 이 얼마나 주님의 무서운 말씀입니까?

저의 의문은 이것입니다. 어떻게 전 교회가 똑같이 위험한 상황에 빠질 수 있을까? 어떻게 모두가 영적으로 눈멀어서 그들 모두가 미지근하게 되었을까? 이 그리스도의 몸 가운데서 거룩한 남은 자에 관한 언급도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들 모두 “비참하고, 가련하며, 가난하고, 눈멀고, 헐벗은”(3:17) 것으로 묘사하십니다. 어떻게 이럴 수 있습니까? 사람이 어떻게 비참하고 가련하며 헐벗었으면서도 그걸 모를 수 있단 말입니까?

그것은 이 사람들이 지독한 거짓에 의해 눈멀었기 때문에 일어난 일입니다. 라오게디아 사람들은 매우 물질적이었고 부유하며 번영하였습니다. (이는 금전적으로 뿐만 아니라 수적으로나 영향력적으로 증대하였다는 뜻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들 자신만으로도 전적으로 만족하였습니다.

분별력 없는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이 교회는 번창한 것처럼 보였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그 교회를 좋아하고 거기에 끌렸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그 교회를 살피셨을 때, 그분께서는 그 보신 것으로 인해 질겁하셨습니다. 이 라오게디아 사람들은 거짓에 의해 속았습니다. 그 거짓은 “나는 괜찮아, 나는 내가 영적으로 있어야 할 곳에 있는 거야, 나는 변하지 않았어, 나는 여전히 동일하게 헌신된 그리스도인이야. 나는 의롭고, 뜨거운 신자야.” 예수님께서는 그들 스스로 이렇게 단언했다고 말씀하십니다. “"나는 부자이며, 부요하고, 아무것도 부족한 것이 없다.”(3:17)

저에게 이 회중은 현대 미국교회의 자본주의적 열광을 상징하는 것 같았습니다. 우리나라는 단지 계속 증가하는 성장을 뜻하는 자본주의 사회입니다. 그리고 비즈니스 세계에는 이런 모토가 있습니다. “성장 아니면 죽음” 항상 모든 것은 커져야 합니다. 그래서 여러분도 모든 것이 가장 커지고 최고가 되도록 하기 위한 동인을 가져야 합니다.

그거야 비즈니스를 위해서는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사고방식이 교회에도 침투되었습니다. 미국은 자본주의적 기독교를 목도하고 있습니다. 더 이상 목표는 영적 성장이 아니라 재정과 자산 그리고 수적인 확장인 것입니다. 그리고 사역자들은 이러한 열광에 사로잡혔습니다.

예수님의 라오게디아인들에 대한 심판은 오늘날의 많은 교회에도 적용됩니다. “너는 네게 일어난 일을 알지 못하지. 너희의 눈먼 것이 너희를 미지근해지게 만들었다. 그런데 너희는 그것을 알지도 못하지. 너희는 여전히 너희가 나에게 뜨겁다고 생각한다”

에베소에서 교회의 죄는 예수님과의 친밀감을 상실한 것이었습니다. 두아디라에서는 분별의 상실이었고, 영적인 간음이었습니다. 이제 라오게디아에서 우리는 그 모든 죄보다 심각한 것을 봅니다. 그리스도를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의 상실입니다.

그것은 모두 벌거벗음으로 귀결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벌거벗은 상태에 관해 라오게디아인들을 책망하십니다. “너의 벌거벗은 수치를 드러내지 않게 하며”(3:18) 여기서 벌거벗은이라는 말의 희랍어는 ‘자원이 고갈된’ 이라는 뜻입니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하나님께서는 그분을 신뢰하는 자들 곧 그들의 필요에 그분을 의지하는 자들을 위해 그의 자원을 준비해두십니다. 그분의 자원이란 무엇입니까? 그것들은 진정한 영적 부요 입니다. 그분의 힘, 그분의 기적적인 사역의 권능, 그분의 초월적 인도하심, 그분의 명백한 임재말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이 스스로를 의지하는 교회에 이렇게 경고하시는 것입니다. “나는 너에게서 나의 모든 자원을 치웠다. 그러나 너희는 그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지 않는구나. 너희는 완전히 피폐해졌다. 그러나 너희는 너희 상태를 깨닫지 못한다.”

한 시간짜리 찬양예배 내내 편안하게 앉아있는 회중을 그려보십시오. 이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인생의 스트레스를 다루는지에 관한 짧은 설교를 듣습니다. 그리고는 그들은 재빨리 문을 박차고 나갑니다. 그들은 예수님 앞에서 깨어지거나 뉘우쳐야 할 어떠한 필요도 느끼지 못합니다. 그들은 꿰뚫는 말씀으로 죄를 깨닫거나 괴로워할 필요를 느끼지 못합니다. “주님, 나를 녹여주소서, 나를 깨뜨려 주소서, 오직 당신만이 나의 갈급함을 채우실 수 있습니다.” 이런 울부짖음이 없는 것입니다.

그들이 전에 가졌던 열정은 어디로 간 것입니까? 이 신자들은 한때 하나님의 말씀에 열중하기 위해, 그들의 마음을 영적인 탐조등 아래 내려놓기 위해 간절한 마음으로 교회에 가고 싶어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제 그 모든 것에서 자라났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들의 신앙을 일요일 아침으로 제한하였습니다. 그러나 이것이야 말로 미지근한 종교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라오게디아의 목사와 그의 회중을 너무 사랑하셔서 그분이 과감한 조치를 취하시겠다는 것을 그들로 알게 하십니다. 그분께서는 그들이 그분의 자원을 필요로 하도록 만드시겠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내가 사랑하는 자마다 책망하고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열심을 내고 회개하라.” 그분의 사랑의 손이 그들을 단련시키기 위하여 오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께서는 그들 안에 그분의 권능과 도움을 구해야 할 필요를 만들어내심으로써 그 일을 행하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리스도께서는 오늘날도 동일한 말씀으로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분께서는 우리에게 라오게디아 교인들에게 말씀하신 것과 같이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은 나와 함께 식사를 드는 것에 관한 모든 것이다. 그것은 내가 문을 두드릴 때 응답하는 것에 관한 것이다. 그리고 지금 나는 와서 교제하자고 너희를 불러내고 있다. 나는 너희가 필요한 모든 것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너희가 나와 함께 보내는 그 어떠한 시간이라도 너희에게 그 자원들을 살수 있는 능력을 준다. 바로 그것이 너희가 나의 자원을 얻는 방법이다. 나와 함께하는 너희의 교제는 너희가 사역을 계속 하는데 필요한 것을 준다. 그 모든 것은 우리가 함께하는 시간에서 나와야만 하는 것이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교회가 이 마지막 날에 교회의 간증을 내세울 수 있는 방법인 것입니다. 아멘!   <원제 : Christ, the Searcher of Men's Hearts 그리스도, 사람의 마음을 살피시는 분>

에베소, 두아디라, 그리고 라오디게아 교회(데이빗 윌커슨 목사) - 1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교회를 사랑하십니다. 그분께서는 교회를 위해 그분의 생명을 주셨고, 지옥의 문이 교회를 대적하여 이기지 못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성경은 그 안에 거하시는 그분의 영광과 지혜에 대해 말합니다. 오순절에, 그분께서는 교회를 세우기 위하여 그의 성령을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그분께서는 교회를 세우기 위하여 기름부음 받은 종들을- 목사, 교사, 사도, 선지자, 복음전도자- 주셨습니다.

주님께서 그분의 교회를 축복하시기 원하신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렇다면 계시록2장에서 그리스도께서 그분의 백성에게 나타나실 때에는 왜 그렇게 두려운 모습으로 나타내는 것입니까? 요한은 예수님께서 불타는 눈과 천둥 같은 목소리로 교회에 오신다고 쓰고 있습니다.

그 일곱 촛대 사이로 인자 같은 이가 있는데 … 그의 머리와 머리털은 눈처럼 희어서 양모처럼 하얗고, 그의 눈은 불꽃 같더라. 그의 발은 용광로에 달군 듯한 빛나는 놋 같고, 음성은 많은 물소리와도 같으며 그의 오른손에는 일곱 별을 가졌고 또 입에서는 날카로운 양날 가진 칼이 나오며, 용모는 해가 그 맹렬한 기세로 비치는 것 같더라. (요한계시록1:13~16)

이제, 계시록은 하나님의 말씀의 집대성한 것입니다. 그것은 모든 것들의 종말을 묘사합니다. 그리고 여기에 이 책에서 우리가 보는 그리스도의 첫 번째 이미지가 있습니다. 여기서 그리스도께서는 왜 그리 두렵게 나타나시는 걸까요? 그리고 그분은 왜 교회를 향하여 날카롭게 말씀하시는 걸까요? 요한은 그리스도의 말씀이 칼과 같이 날카로워 골수를 쪼갠다고 기록하였습니다. 기억하십시오. 이 사도는 예수님의 가슴에 그의 머리를 기대었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지금 그는 엎드려져 있는 그 자신을 발견합니다. “내가 그를 보자 죽은 것처럼 그의 발 앞에 엎드려지니”(1:17)

예수님 자신께서 그분의 두려운 모습에 관해 설명하십니다. “모든 교회들은 내가 사람들의 속과 마음을 살피는 자임을 알게 되리라. 또 내가 너희의 행위에 따라 너희 각자에게 주겠노라.”(2:23) 사실 그리스도는 그분의 교회를 사랑하십니다. 그리고 바로 그것이 그분께서 교회를 살피러 오신 이유입니다. 그분께서는 그분의 백성을 사랑으로 바로잡고 정결케 하기 위하여 오십니다.

무엇보다도, 예수님께서는 요한에게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그가 내게 오른손을 얹고 나에게 말씀하시니라. 두려워 말라. 나는 처음과 마지막이요”(1:17).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본질적으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나는 내 교회의 모두가 내가 그들의 속 사람을 살피기 위하여 왔다는 것을 알기 원한다. 그리고 나는 이를 불 같은 눈과 영혼을 흔드는 천둥으로 행한다. 나는 완곡하게 말하지 않겠다. 내가 말해야 하는 것은 꿰뚫기도 하면서 치유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나의 자녀 중 누구라도 냉담과 무지 가운데 계속하도록 두지 않을 것이다. 나의 눈과 입이 모든 허울을 꿰뚫을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그분의 교회에서 무엇인가 보셨습니다. 그리고 그분께서는 요한에게 그분의 말씀을 받아 적어 교회의 일곱 천사들에게 보내라고 지시하셨습니다. 이는 그분의 사역자를 의미하며 그들을 그분의 손에 있는 별들로 부르기도 합니다. (1:16을 보십시오) 그분께서는 요한에게 이렇게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나는 이 종들을 사랑한다. 내가 그들을 부르고 기름 부었다. 그리고 이제 너는 그들에게 나의 말을 전해야 한다.”

목사인 나 자신으로써, 저는 궁금했습니다. 요한으로부터 그러한 편지를 받아 열게 되는 것은 과연 어땠을까? “뉴욕 교회의 목사에게: 주님께서 당신의 회중에 관하여 말씀하십니다…” 이제 그 일곱 사역자들이 느꼈을 것을 상상해 봅시다.

예를 들어, 에베소의 목사는 요한의 편지를 읽으며, 그리스도께서 그의 교회로 기뻐하고 계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주님께서는 에베소인들이 열심히 일한 것과 인내와 근신을 칭찬하십니다. 그들은 악을 미워하며 그리스도를 위하여 일어섭니다. 또 그들은 내내 선한 행실을 멈춘 적이 결코 없었습니다. 이 목사는 그가 읽는 것에 놀랍니다. 그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와~ 주님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는 구나, 이것은 칭찬의 편지로군.”

그러나 그는 계속 읽어가며, 꿰뚫는 말씀에 다가갑니다.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다소 있나니 이는 네가 너의 첫 사랑을 저버린 것 때문이라”(2:4). 예수님께서는 그 목사에게 경고하십니다. “그러므로 네가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기억하고 회개하며, 너는 처음 일들을 행하라. 만일 그렇지 않고 회개하지 아니하면 내가 속히 너에게 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2:5)

그 예베소의 목사는 여기서 깜짝 놀랐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회개? 아니면 우리의 촛대를 옮기시겠다고? 충격적인 말씀이군, 어떻게 이럴 수 있지? 우리는 언약의 신자들인데, 우리는 믿음으로 의로워 졌는데. 우리는 관대하고, 사랑하며, 돌보았는데. 이제 우리는 돌아가서 처음처럼 되어야 한다고? 이게 무슨 뜻일까? 어떻게 이것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일 수 있을까? 내가 이 편지를 어떻게 우리 회중들에게 이 편지를 읽을 수 있을까?”

기억하십시오. 이 말씀들은 거룩한 회중들에게 지시된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이는 주님의 눈에 깊이 심각한 문제였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어째서 그분께서는 그토록 훌륭한 교회의 본보기에 그렇게도 엄중하게 말씀하셨겠습니까. 그분께서는 그 목사에게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너희의 나를 향한 첫 사랑은 예전과 같지 않다. 너희는 나와의 교제를 소홀히 하였다. 이제 회개하라.”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하십니다. 그 모든 것은 그분의 임재와 관련 있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예베소인들은 선한 일에 성실히 임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더 이상 주님과 친밀하지는 않았던 것입니다.

다음 절에,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일곱 교회의 목사들과 회중들을 향한 메시지를 요약하십니다. 그리고 그분은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보라, 내가 문 앞에 서서 두드리노라.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그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서 그와 함께 먹으며 그도 나와 함께 먹으리라.”(3:20) 너무나도 자주, 그리스도인들은 그들 마음의 문을 예수님께 열지 않습니다. 그분께서 두드리실 때, 심지어 그들은 집에 없기까지 합니다. 대신 그 문 위에 이런 표시가 있습니다. “주님, 저는 병원의 사역으로 부재중이오며 다음은 감옥사역입니다. 교회에서 뵈어요.”

오늘날 많은 교회들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많은 자선적인 착한 일들을 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인간의 필요를 위한 대부분의 모든 프로그램들을 갖고 있습니다. 그리고 회중은 깨끗하고 바른 삶을 살며 죄를 피하기 위해 조심합니다. 그러나 그들에게 무엇인가 바뀌었습니다. 한때, 이 신자들은 예수님과의 교제에 헌신되었습니다. 그들은 그분과 단 둘만의 시간을 보내지 않고는 단 하루도 지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제 상황이 달라졌습니다. 그들이 그분께 드리는 것은 그들이 어떤 일을 하러 갈 때 짧게 드리는 인사뿐입니다. 이것이 예수님께 얼마나 심각하겠습니까?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와의 교제를 매우 심각하게 생각하시기 때문에 영혼을 잃는 데 이르게 되는 한 가지 요소를 제하실 것입니다. 바로 그분의 임재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경고하십니다. “나의 교회는 무엇인가 잃어버렸다. 바로 나의 놀라운 임재 말이다. 너희는 다시 비밀한 골방으로 돌아가야 한다. 나와 다시 식탁을 나누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서 나의 임재를 거두어 가겠다. 너의 모든 선행은- 너의 설교, 전도, 구제- 우리의 시간으로부터 흘러나오는 것이어야 한다. 그것은 나의 테이블로부터 나와야 하는 것이다.”

에베소교회는 한때 소유했던 그 무언가를 잃어버렸습니다. 그것은 그들 한 가운데에 나타나는 예수님의 임재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임재를 당연한 것으로 여기기 시작하였고, 그것이 그들의 사역에 영향을 끼쳤습니다. 한때, 그들은 서로서로 사랑하고 돌보았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들은 서로서로를 당연하게 여기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그들의 선행을 하기 위한 수고에도 비참한 영향을 끼쳤습니다. 그들은 사람들을 섬기는 데에 너무나도 바쁜 나머지 그리스도의 사랑이 아닌 그들의 행위가 초점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분의 강력한 임재를 잃어버린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경고하십니다: “너희가 변화하지 않으면- 너희가 나를 향한 갈급함으로 돌아오지 않는다면- 나는 너희의 증거를 없애겠다. 너희가 선행을 할 때에 더 이상의 어떠한 권위도 없을 것이다. 그것들은 모두 헛된 것이 될 것이다.”

저는 오늘날의 세계에서도 비슷한 경우를 봅니다. 내가 알았던 어떤 열심의 사람들은 복지부나 사회단체에서 일하던 사람들입니다. 특히 정신병동이나 학대어린이에 관하여 일하는 사람들도 그러합니다. 이 사람들은 성실하고 헌신된 일꾼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매일 목격하는 것을 직면하는 것은 너무나도 고통스러울 뿐이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어떤 이들은 스스로 마음을 무감각하게 해버렸습니다.

동일한 일이 그리스도인에게도 일어날 수 있습니다. 목사나 전임 사역자들도 그들이 사역하는 사람들에게서 그러한 고통과 죄를 보면서 무감각해 질 수 있습니다. 그것이 예수님께서 이 에베소의 목사에게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너희는 한때 서로서로에게 너무나도 친절했다. 너희는 사람들을 향한 그러한 사랑이 있었고 그들의 말에 귀 기울였다. 그러나 지금 너희는 귀머거리가 되었다. 너희는 그들과 함께 앉아있으면서도 그들의 울부짖음에 대해 너희 자신을 무감각하게 하였다. 너희는 생명 없이 습관적으로 사역하고 있다. 나는 너희로부터 나의 임재를 제거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저는 잠시 동안 주님께서 그분의 임재를 거두어 가신 교회에 있어본 적이 있습니다. 어두움과 메마름이 거의 만져질 정도였습니다. 모두 그걸 느낄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교회에게 이렇게 말씀 하고 계십니다. “나는 잠시 모든 것이 냉담해지게 하 것이다. 나는 너희를 권태에서 건져내기 원한다. 나는 너희가 나의 임재가 없는 것이 어떠한 것인지를 알기 원한다.” 교회가 이러한 지점에 도달하는 것은 전적으로 참담한 일입니다. 성령님의 죄를 깨닫게 하심도 없고, 회중을 감동시키는 것도 없고, 젊은이들을 감동시키는 것도 없습니다.

또 다른 부작용이 일어납니다. 그것은 영적으로 굶주린 사람들이 예수님의 임재가 뚜렷하지 않은 곳에서는 머무르지 않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몹시도 그분의 친밀함을 알고 싶어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것을 경험하지 못할 때, 다른 곳으로 그것을 찾으러 갑니다. 저는 그런 불평이 담긴 많은 편지들을 받습니다. “저는 주님의 임재가 살아계신 교회를 찾을 수가 없습니다.” <원제 : Christ, the Searcher of Men's Hearts 그리스도, 사람의 마음을 살피시는 분>

진정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싶습니까? - 2

사랑하는 여러분, “저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싶습니다! 저는 한 점 왜곡되지 않고, 타협함 없는, 순전한 말씀을 원합니다”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자들이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결코 듣지 못할 것은 너무나 자명한 일입니다. 그들의 교만함이 진리가 닥치는 때를 듣지 못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예레미야는 갈대아인들에게 항복하라고 말했습니다. 그리하면 왕과 왕의 가족 그리고 백성들이 살 것이라 말했습니다. 예루살렘 성읍도 파멸되지 않을 것을 이야기했습니다. 그러나 항복하지 않는다면 모든 것이 파괴되고 왕도 죽을 것임을 예레미야는 말했습니다. 시드기야는 답했습니다. “그럴 수 없네. 이미 항복한 유대인들이 있지 않은가. 내가 항복한다면 그들이 나를 조롱하고 멸시하지 않겠는가. 그들이 나를 괴롭게 할걸세!”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거절했습니다. 모든 사람이 죽어가고 성읍이 무너지고 있는 가운데서도 그의 교만은 여전히 살아 있었습니다!

시드기야는 마침내 한 밤을 틈타 도망하려 하였습니다. 그러나 붙잡히고 말았습니다. 그의 아들들은 그가 보는 앞에서 죽임을 당했습니다. 왕비들은 겁탈을 당했습니다. 그의 눈은 불태워져 뽑힘을 당했습니다. 이 모든 것이 교만 때문이었습니다!

3. 많은 사람들이 정결한 말씀을 큰 소리로 요구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오랜 동안 지속되어 온 그들 마음에 감추어진 우상을 숨기기 위한 것일 뿐입니다! “우리에게는 주님의 마음에서 나오는 강력하고 순결한 말씀이 필요합니다.”라는 안타까운 마음이 적혀있는 그리스도인들의 편지를 읽었을 때 저는 기도했습니다. “오 하나님, 우리 시대의 예레미야는 어디 있습니까? 거룩함을 선포하기를 두려워하지 않는 목사들은 어디에 있습니까?”

그러나 저는 주님의 대답에 놀라 충격을 받았습니다.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데이빗, 많은 사람들이 나의 말을 듣고 싶다고 이야기한다. 그리고 땅의 사악함으로 인해 탄식하며 우는 거룩한 남은 자들이 있다. 그들은 진리를 갈망하며 나에게 순종한다. 그러나 대다수의 사람들은 진리를 발할 때 듣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자신이 즐기는 죄나 우상을 다루는 메시지를 거부할 것이다!”

이 말씀이 예레미야 42장에 그대로 나타나 있습니다! 거룩한 자들만이 남아 있었고 요하난이 그 지도자였습니다. 그들은 이집트로 도망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베들레헴 밖에 진을 치고 예레미야를 불러 주님의 말씀을 받으려 했습니다.

“이에…다 나아와 선지자 예레미야에게 이르되 당신은 우리의 간구를 들으시고 이 남아 있는 모든 자를 위하여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기도하소서 당신이 목도하시거니와 우리는 많은 중에서 조금만 남았사오니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의 마땅히 갈 길과 할 일을 보이시기를 원하나이다 …그들이 예레미야에게 이르되 우리가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당신을 보내사 우리에게 이르시는 모든 말씀대로 행하리이다 여호와는 우리 중에 진실 무망한 증인이 되시옵소서” (예레미야 42:1-6)

하나님의 진실한 말씀을 듣기 위해 이 보다 더 진지한 사람들의 고백을 들어 보신 적이 있습니까? 그들은 “우리는 진심으로 진리를 원합니다!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이 무엇이든, 우리가 좋아하든지 그렇지 않든지 간에, 순종하겠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예레미야는 열흘 동안 주님과만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는 분명 이렇게 기도했을 것입니다. “하나님, 순전한 말씀을 열망하는 그들의 외침을 들으시옵소서. 당신의 심령에서 나오는 말씀을 내게 주옵소서!”

그러나 주님은 대답하셨습니다. “그들은 거짓말을 하고 있다! 그들은 나의 말을 원하지 않는다. 그들은 우상숭배로 가득 차 있다! 그들은 진리를 원한다고 이야기하지만 이미 자신들이 원하는 대로 하기로 마음을 정하였다!”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그들에게 왔습니다.

“너희가 이 땅에 여전히 거하면 내가 너희를 세우고 헐지 아니하며 너희를 심고 뽑지 아니하리니…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는 그 두려워하는 바벨론 왕을 두려워 말라 내가 너희와 함께하여 너희를 구원하며 그의 손에서 너희를 건지리니 두려워 말라… 그러나 만일 너희가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복지 아니하고 말하기를 우리는 이 땅에 거하지 아니하리라 하며… 애굽 땅으로 결단코 들어가 거하리라 하면 잘못되리라… 너희가 만일 애굽에 들어가서 거기 거하기로 고집하면 너희의 두려워하는 칼이 애굽 땅으로 따라가서 너희에게 미칠 것이요 너희의 두려워하는 기근이 애굽으로 급히 따라가서 너희에게 임하리니 너희가 거기서 죽을 것이라” (예레미야 42:10-16)

지도자들은 예레미야가 거짓을 이야기한다고 그를 맹렬히 비난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에게 말씀하셨던 것처럼 그들은 자기들 마음대로 결정을 내렸습니다. “우리는 전쟁도 보이지 아니하며 나팔 소리도 들리지 아니하며 식물의 핍절도 당치 아니하는 애굽 땅으로 결단코 들어가 거하리라…”(예레미야 42:14)

그들은 나팔 소리가 지겨워 하나님의 말씀을 거절했습니다. 영적 전쟁에 지친 것입니다! 남은 자들의 지도자들은 말했습니다. “여긴 너무 큰 전쟁이 있는 곳이야. 나팔과 천둥 같은 소리를 듣는 것이 이젠 지겨워!”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이 고집한 길을 갔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그대로 극소수를 제외하고는 칼로 죽임을 당했습니다. 이것이 마지막 시대를 사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입니다. 다가올 심판을 선포하는 예언의 나팔소리 듣는 것을 지겨워 하고 영적 전쟁과 삶의 전투에 지친 모습 말입니다. 그들은 “제발, 저를 그냥 내버려두세요! 더 이상 저를 괴롭게 하는 설교나 정죄하는 모임은 싫어요. 저는 단지 고상하고 조용하며 위로하는 예배 처소를 원할 뿐이에요”라고 말합니다.

여러분도 이러한 이야기가 다 지겨우십니까? 너무나 지쳐서 이제는 “그냥 평안했으면 좋겠다. 이런 긴장감 속에서는 참 살기 싫은데!”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까? 아니면 진심으로 옳곧은 주의 진리의 말씀을 듣기 원하십니까? 여러분은 하나님의 선지자가 여러분의 심장에 손가락을 겨누고서 “당신은 하나님을 부지런히 찾고 있지 않습니다. 당신의 심령은 점점 차가와 지고 있습니다! 당신이 당신의 우상숭배를 치리하지 않는 한 더 이상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수 없을 것입니다!”라고 이야기하는 것을 들을 수 있겠습니까?

솔직히 저 역시도 그 질문에 직면해야 했습니다. 나는 진정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듣기 원하는가? 저의 정직한 대답은 이것입니다. “아니오, 주님, 저는 진정 당신이 말씀하시는 것 모두를 듣기 원하는 지 잘 모르겠습니다. 저는 당신이 원하시는 대로 당신이 저를 감찰하기를 원하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제가 그것을 다 감당할 수 있을 지 확신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미국에 임할 하나님의 끔찍한 심판에 대해서 계속해서 듣기를 원하는지 확신할 수가 없습니다. 저는 오직 당신의 은혜만이 그 모든 것을 뛰어넘을 수 있게 해 줄 것이라는 것을 너무나 많이 들어왔습니다.” 최근에 어느 젊은 목사가 제게 이렇게 물어왔습니다. “앞으로 일어날 일을 알아야 할 필요가 있나요? 그런 건 그냥 하나님의 손에 맡기고 기뻐하며 우리의 길을 가면 되지 않나요?”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은 우리를 준비시키기 원하십니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주님은 준비된 신부를 위해 오십니다. 그리고 하늘로부터 심판의 불이 떨어질 것을 알고 계십니다. 주님은 사랑 가운데 우리에게 미리 경고해주십니다. “이 모든 것이 이렇게 풀어지리니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뇨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베드로후서 3:11-12) 우리는 심판이 닥칠 때 당황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세움을 입고 준비하고 있을 것입니다!

예레미야의 예언 중에 가장 감동적인 것은 이것입니다. 그 모든 일들이 일어났을 때 그가 그곳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그는 안전했습니다!

예레미야는 그가 닥쳐오고 있다고 경고했던 그 모든 공포의 사건들을 무사히 통과했습니다. “예레미야가 예루살렘이 함락되는 날까지 시위대 뜰에 머물렀더라” (예레미야 38:28) 그는 틀림없이 갈대아 인들이 성안으로 밀려들어올 때 감옥 안에서 조용히 그것을 지켜보았을 것입니다. 그는 무려 23년간을 경고했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듣지 않았습니다. 이제 피가 흘러 넘치고 있었습니다!

왕의 궁궐도 화염에 휩싸였습니다. 모든 지도자들이 숨어있는 곳에서 끌려 나왔습니다. 그 광경과 소리는 견디기 어려운 것이었습니다. 얼마나 예레미야가 주의 긍휼을 구하며 외쳤을까요! “오 주님, 저는 그 모든 것을 보았습니다. 저는 그것을 예언했습니다! 그러나 주님, 살려주실 수는 없으십니까?”

그러나 여기 기쁜 소식이 있습니다. 예레미야는 온 도시가 부숴지는 것을 보는 자리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안전했습니다! 그 뿐 아니라 예레미야를 구덩이에서 건져주었던 에벳멜렉도 안전했습니다! 모든 것이 무너지고 있을 때 예레미야는 두려움 가운데 숨어있는 에벳멜렉에게 메시지를 보냈습니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그 날에 너를 구원하리니 네가 그 두려워하는 사람들의 손에 붙이우지 아니하리라 내가 단정코 너를 구원할 것인즉 네가 칼에 죽지 아니하고 네 생명이 노략물을 얻음같이 되리니 이는 네가 나를 신뢰함이니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예레미야 39:17-18)

에벳멜렉이 이 말씀을 들었을 때 느꼈을 평안을 상상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도 에벳멜렉에게 주어진 것과 똑 같은 메시지를 소유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고 신실함과 순종함으로 행하는 자들은 고난의 때에 주님께서 기적적으로 지켜 주실 것입니다! “내가 너를 구원하리라! 두려워 말라 네가 나를 신뢰하였은즉 네 생명이 보전되리라!”

바로 지금, 하나님께서는 샌프란시스코에서 로스앤젤레스, 샌디에고 까지 캘리포니아를 지진으로 흔들고 계십니다. 온 나라가 심판을 해산하는 진통을 느끼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일을 보시거든, 뉴욕시가 화염에 휩싸였다는 이야기를 들으시거든, 무릎을 꿇고 기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심판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 때문입니다. “주님, 저는 당신께서 하시는 말씀을 듣기 원했습니다. 그리고 당신은 제게 경고해주셨습니다! 저는 당신의 말씀에 순종했습니다. 바로 지금 저는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할렐루야!

데이빗 윌커슨 목사님은 하나님께서 기름부으신 선지자중의 한 분입니다.
성령의 음성에 민감하면서 말씀 위에서 시대를 보는 영적 통찰력이 아주 탁월하신 분입니다.

진정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싶습니까? - 1

예레미야의 목자들에 대한 경책은 아주 신랄했습니다! 저는 오늘날도 하나님께서 수많은 경건한 목사들을 거느리고 계시다는 것을 믿습니다. 그러나 선지자 예레미야는 삯꾼 목자들을 이렇게 꾸짖었습니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 목장의 양 무리를 멸하며 흩는 목자에게 화 있으리라”(예레미야 23:1)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선지자와 제사장이 다 사특한지라 내가 내 집에서도 그들의 악을 발견하였노라”(11절)

예레미야는 이들을 “소돔의 선지자”라 불렀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서 보았던 사특함들을 열거했습니다.

1. 그 목록의 맨 위에는 간음이 있었습니다. 즉 정욕으로 가득한 눈을 가지고 있는 목사들 말입니다! 그들은 음란하고, 육적이며 안목의 정욕을 좇습니다.

2. 그들은 거짓을 행합니다. 진리가 그 가운데 있지 않습니다.

3. 그들은 악한 자들의 행위를 더욱 굳게 해 주었습니다. 그들은 이름이 나있는 자들의 죄를 드러내려 하지 않았습니다. 십일조가 줄어들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입니다!

4. 그들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지 않은 비전을 이야기했습니다. 반대로 자신의 자아와 명성을 세우기에 합한 육적인 비전을 이야기합니다.

5. 그들은 타협하는 자들을 부추깁니다. 지지와 사랑을 잃을 까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6. 그들은 개인적인 꿈을 부추깁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지 않았음에도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이야기합니다.

7. 그들은 다른 사람의 말씀을 빌려옵니다. 그들이 직접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말씀이 없습니다.

8. 최악의 경우에는 자기 자신만을 위하는 이기적인 이야기를 말씀인양 늘어놓습니다. 예레미야가 이러한 자들에 대해 이야기 한 바 있습니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에게 예언하는 선지자들의 말을 듣지 말라 그들은 너희에게 헛된 것을 가르치나니 그들의 말한 묵시는 자기 마음으로 말미암은 것이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온 것이 아니니라 항상 그들이 나를 멸시하는 자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평안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하며 또 자기 마음의 강퍅한 대로 행하는 모든 사람에게 이르기를 재앙이 너희에게 임하지 아니하리라 하였느니라”(예레미야 23:16-17)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오늘날 이런 메시지를 미국 전역에 있는 강단에서 들으실 수 있습니다.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미국은 다시 축복을 받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부유해질 것이며 모든 것이 잘 될 것입니다. 현재도 모든 것이 잘 진행되고 있습니다! 미국은 언제나 하나님께 특별한 나라로 기억될 것입니다…”

그러나 실상은 슬프게도 이런 부드러운 메시지를 선포하는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기름 부으심을 잃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자들에게 더 이상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그들의 삶이 죄 가운데 거하기 때문입니다! 수많은 목사들, 전도사들 교사들이 성결하지 못함으로 강단에 설 자격이 없습니다! 그들은 비디오 가게에 몰래 다녀와서는 자신의 서재에서 지옥의 끝에서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외설스러운 것들을 뚫어지게 쳐다봅니다.

(저는 이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이로 인해 고통 받는 불쌍한 많은 아내들로부터 수많은 편지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눈과 마음은 각종 나체와 음란한 것들로 언제나 불타고 있습니다. 성결치 못한 이러한 삯꾼 목자들 대부분은 사역이 금지될 필요가 있습니다. 그들은 수많은 믿음의 양들에게 저주를 부으며 셀 수 없이 많은 젊은이들을 지옥으로 보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레미야는 동시에 다른 부류의 목사들 “그분의 종, 선지자들”에 대해서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진리와 성령으로 충만한 기도의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진정한 목자들로서 거룩하고 흠이 없으며 양들을 위해 세워진 두려움 없는 종들입니다. (예레미야 23:4)

성경은 이 하나님의 사람들이 “여호와의 회의에 참예하였다(stand)”(18절)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참예하였다(stand)는 단어의 의미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와 주고 받는 교제를 가졌다는 뜻입니다. 성경에서 거듭 거듭 우리는 이러한 특징을 하나님의 사람이라면 누구에게서든지 발견할 수 있습니다. 엘리야는 악한 왕 아합 앞에 서서 말했습니다. “왕이여, 내가 당신에게 온 것은 주님 앞에 서 있기 때문입니다!”

“누가 여호와의 회의에 참예하여 그 말을 알아들었으며 누가 귀를 기울여 그 말을 들었느뇨”(예레미야 23:18)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권고를 듣습니다. 그리고는 그 말씀을 이해하고 선포합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종들이 “…내 백성에게 내 말을 들려서 그들로 악한 길과 악한 행위에서 돌이키게”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예레미야 23:22) 그들은 누구의 죄가 드러나든지 간에 하나님의 집에서 죄를 드러내기를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오늘날 교회의 영적 죽음과 타협은 전적으로 타락한 목자들의 탓만은 아닙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갈급한 회중들이 가장 바라는 목자의 모든 것을 갖춘 자 입니다. 그는 하나님께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세상에 있는 그 어떤 것으로도 그의 마음을 살 수 없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짓는 죄로 인해 울부짖었습니다. 그는 교회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내려놓을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는 진리를 이야기하는 것으로 인해 투옥되었으며 끔찍한 물웅덩이에 내던져졌습니다!

성경은 거듭 거듭 예레미야가 “주님의 말씀이 임할 때까지” 주님의 임재를 기다렸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구절은 예레미야서에 무려 50번이나 나옵니다.) 당시에는 진정한 하나님의 말씀이 전혀 부족하지 않았습니다. 진실로 주님은 타협과 타락의 시대에도 진정한 선지자와 목사들을 거느리고 계셨습니다. 우리는 반복해서 “여호와의 말씀이 이사야에게… 예레미야에게… 에스겔에게… 임하니라”라는 말씀을 읽을 수 있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은 다니엘, 호세아, 요엘, 아모스, 요나, 미가, 하박국, 스바냐, 학개, 스가랴, 그리고 말라기에게 임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은 언제나 분명하게 경고해 주셨습니다. 죄에 대한 심판으로 가득하였지만 동시에 회개하는 자들에게는 소망으로 가득 찬 말씀이었습니다. 그것은 경건치 못한 것들로부터 구별될 것에 대한 부르심이었습니다. 동시에 끊임없는 거룩한 삶으로의 부르심이기도 합니다! 보편적으로 진리의 말씀에는 세 종류의 반응이 있습니다.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에게서 바로 이 세 종류의 반응을 우리는 볼 수 있습니다.

1.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말씀하고 계신 것을 그냥 들으려 하지 않습니다! “대저 이는 패역한 백성이요 거짓말하는 자식이요 여호와의 법을 듣기 싫어하는 자식이라 그들이 선견자에게 이르기를 선견하지 말라 선지자에게 이르기를 우리에게 정직한 것을 보이지 말라 부드러운 말을 하라 거짓된 것을 보이라” (이사야 30:9-10)

제가 이 말씀을 처음 접했을 때는 받아들이기가 무척 어려웠습니다. 저는 “자기 목사님에게 거짓된 메시지를 요구할 하나님의 백성들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예, 그런 자들이 있습니다! 직접적으로 그런 말을 하는 사람들을 볼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목사님들이 강력한 예언의 메시지를 선포할 때 그러한 자들의 반응을 볼 수는 있습니다. 그들은 교회를 떠납니다. 그들은 “나는 이런 설교를 받아들일 수 없어. 저런 설교는 참 황당해! 나의 문제를 어떻게 다루면 좋을지에 대한 단순한 성경의 가르침이나 들으면 좋을 것을…”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말은 바로 이스라엘이 원하던 바로 그 말을 바꾼 것에 불과하다고 이사야는 말합니다.

“너희는 정로를 버리며 첩경에서 돌이키라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자로 우리 앞에서 떠나시게 하라 하는도다” (이사야 30:11)

그들은 죄를 드러내는 말씀을 너무나 경멸한 나머지 그런 말씀을 더 이상 전하지 말도록 요구했습니다! 주님은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듣기 싫어하는 자들에게 경고하십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이는 그들이 내가 그들의 앞에 세운 나의 법을 버리고 내 목소리를 청종치 아니하며 그대로 행치 아니하고 그 마음의 강퍅함을 따라 … 좇았음이라 그러므로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 내가 말하노라 보라 내가 그들 곧 이 백성에게 쑥을 먹이며 독한 물을 마시우고” (예레미야 9:13-15)

하나님은 “너희가 그런 부드럽고 우유부단하며 쉬운 위로로만 가득찬 설교에 안주하기를 선택할 수있다. 그러나 그것은 너희에게 독이 될 것이다! 너희들은 그것을 마시고 죽게 될 것이다!”라고 경고하고 계신 것입니다.

2. 어떤 이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싶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교만함으로 인해 들을 수 없습니다. 시드기야 왕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그는 큰 능력과 영향력, 권위를 가진 자 였습니다. 그의 아버지 요시야 왕도 경건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시드기야가 경건과 하나님께 속한 것들에 대해 좋은 배경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왕좌를 이어받자 그에게는 주님을 위한 시간이 없었습니다. 결국 위기가 닥쳐오고야 말았습니다!

예루살렘이 갑자기 포위되었습니다. 무자비한 갈대아 족속, 강하고 힘있는 군대에 둘러싸여버리고 말았습니다! 결국 먹을 것이 부족하게 되었고 물도 차츰 떨어져 갔습니다. 시드기야는 선지자 예레미야를 불러서 “너는 우리를 위하여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기도하라”고 간청하였습니다. (예레미야 37:3) 어려운 때를 만나는 많은 자들이 그러하듯이 시드기야도 진리를 원하는 것 같았습니다. 온 나라에 기도를 촉구하는 그의 간청은 참으로 진지하게 들립니다!

그러나 예레미야는 왕에게 파멸을 예언했습니다. 이럴 즈음, 예루살렘을 포위하고 있던 갈대아인들에게 애굽의 바로 왕이 거대한 군대를 거느리고 다가오고 있다는 첩보가 전해졌습니다. 공포가 갈대아인의 진지에 엄습했습니다. 마침내 그들은 도망가기 시작했습니다.

“예루살렘을 에워쌌던 갈대아인이 그 소문을 듣고 예루살렘에서 떠났더라” (5절)

이스라엘 사람들이 예루살렘 성벽 위에서 대적이 도망하는 것을 보고 기뻐 날뛰었을 장면을 상상해보십시오! “우리의 성벽은 무너지지 않았다. 우리 성읍이 불타지 않았다. 이제 예레미야가 말하는 멸망과 어두움도 이와 함께 끝나버렸다!”

저는 그날 밤 이스라엘이 성문을 열어 젖히고 일주일간의 공식적인 잔치를 선포하면서 포도주 잔이 넘치고 양식이 풍성했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위기는 끝났다. 축배를 듭시다!” 인간 본성이 그러하듯이 모든 사람들의 마음에서 위기는 떠나가고 일상 생활로의 복귀가 일어났습니다. 시드기야 왕은 자신이 국가적인 기도를 요청했었던 것 때문에 체면이 말이 아니라고 느꼈을 것입니다. “내가 어떻게 그 선지자 때문에 그렇게 놀라서 두려워했지?”

그날 밤 누가 가장 조롱과 멸시를 받았겠습니까? 멸망을 예언했던 자가 아니겠습니까! 예레미야기 지붕꼭대기에서 홀로 성읍을 내려다보고 있을 때 그는 분명 이렇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주님, 당신은 제게 심판을 예언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이게 어찌된 일입니까! 갈대아인들이 물러갔습니다. 경제적, 물질적 환란도 끝났습니다. 당신은 제게 여자와 아이들까지도 죽음을 당하고 온 도시가 불탈 것이라고 경고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피흘림도, 양식의 부족함도 없습니다. 제가 받은 말씀이 그게 다 였습니까?” 그러나 갑자기 성경은 다음과 같이 이야기합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예레미야에게 임하니라.” 주님의 말씀이 다시 있었습니다! 예레미야는 시드기야 왕에게 가서 다시 갈대아인이 돌아올 것과 그들이 자기들의 임무를 끝낼 것이라는 사실을 예언하라는 명을 받았습니다!

예레미야는 분명히 이렇게 외쳤을 것입니다. “안돼요, 주님, 또 하라니요! 누가 저를 믿겠습니까?” 그러나 그는 왕의 궁전에 들어가 외쳤습니다. “시드기야 왕이여! 갈대아인들이 돌아오고 있습니다. 그들이 예루살렘을 불태울 것입니다!” 시드기야가 이 말을 믿지 않고 고개를 저었을 것이 자명합니다. 전에도 들었던 이야기니까요! 그는 예레미야의 이야기를 듣지 않았습니다. 다른 사람들과 즐기는 자리로 다시 돌아갔던 것입니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척후병이 달려들어왔습니다. “갈대아인들이 돌아왔습니다!” 예루살렘이 포위되어 있는 상태가 계속되었습니다. 갈대아인들은 이번에는 그 자리에서 물러나지 않았습니다! 시드기야는 예레미야를 다시 불렀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아무도 모르게 몰래 그를 불러들였습니다. “여호와께로서 받은 말씀이 있느뇨?” (예레미야 37:17) 다른 말로 하자면, “나는 이제 진심으로 주님의 말씀을 듣고 싶다네!”라는 뜻입니다.

예레미야는 대답했습니다. “예, 말씀이 있었습니다. 왕께서 바벨론 왕에게 사로잡히실 것입니다!” 그러나 시드기야는 여전히 그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마음을 강퍅케 할 따름이었습니다. 자신이 듣고 싶던 말씀이 아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마침내, 포위된 성읍의 상황이 악화되어 갔습니다. 굶주림에 지친 여자들은 자신의 아기를 삶아 먹었습니다. 남아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종말이 눈앞에 있었습니다. 시드기야 왕은 베옷을 입고 성벽 위를 거닐며 그 파멸의 상황을 다 보았습니다. 마지막으로 그는 예레미야를 불렀습니다. 그는 그 선지자를 비밀 입구를 통해 자신의 집무실로 데려갔습니다. “내가 네게 한 일을 물으리니 일호도 내게 숨기지 말라” (예레미야 38:14) “나에게 진실을 말해주시게. 부드러운 말은 필요 없네. 하나님께서 이번에 무어라 말씀하시는지를 진심으로 듣고싶네!”라고 그는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여러분을 위해 싸우실 것입니다 - 2

우리는 우리 영혼의 적 앞에서 벌벌 떠는 것으로 끝마칩니다. 그리고 이는 모두 우리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약속하신 것을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분이 우리에게 전혀 말씀하신 적이 없었다는 듯이 행동합니다. 그리고 바로 그것이 우리가 그분을 시험하는 때인 것입니다.

그분께서 그 자신을 우리에게 다시 또 다시 증명하셨을 지라도 우리는 계속해서 그분에게 그분의 신실하심을 새로이 증명하시기를 또 다른 믿음을 세워줄 말씀을 보내주시기를 구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단지 한 말씀만 하실 것입니다. “내가 너에게 이미 말한 것을 믿으라.”

여러분, 여러분 위에 성벽과 같이 솟은 끊임없는 죄 앞에서 떠십니까?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이 대적의 속박에 관해 뭐라 말씀하셨던가요? 그분께서는 말씀 내내 약속하셨습니다. “내가 너를 위해 싸우리라. 너는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네 안에 계시는 이가 세상에 있는 자보다 더 크시니라. 어떤 사람도, 어떤 대적도 너를 내 손에서 빼앗을 수는 없다. 내가 나의 영으로 너를 깨끗케 하고 성결케 할 것이다. 너에게 계시된 나의 말을 신뢰하라.”

신약에 있어서의 불신은 구약에서보다 더욱 큰 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자신의 성전인 이스라엘에 선지자와 기적을 행하시는 자로써 오셨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말하여집니다. 그리고 그들이 믿지 않으므로 거기서는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시니라.(마태13:58) 이 얼마나 믿을 수 없을 놀라운 말입니까, 불신은 심지어 그리스도께서 역사하실 권능까지도 제한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신약을 통해 다른 불신의 비극적인 결과들을 봅니다. 제자들은 그들의 불신 때문에 작은 아이로부터 악마를 쫓아 낼 수가 없었습니다. (마태복음17:14~21을 보십시오) 부활 이후, 그리스도께서는 다시 한번 그들의 불신에 충격을 받으셨습니다. ‘그들의 믿음 없음과 마음이 완악한 것을 꾸짖으시니’(마가16:14) 게다가 바울은 유대인들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그들은 믿지 아니함으로 꺾여졌고’(로마서11:20)

왜 신약에서 하나님의 불신에 대한 심판은 그렇게 가혹한 것일까요? 그것은 오늘날의 신자들이 구약의 성도들이 단지 꿈꾸기만 했던 무엇인가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그들의 성령의 선물로 축복해 주셨습니다. 옛 언약 아래에서 신자들은 단지 가끔씩 하나님의 영의 방문을 받았을 뿐입니다.

그들은 주님의 임재를 경험하기 위하여 성전으로 가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백성들 안에 그분의 처소를 만드셨습니다. 우리는 그분의 성전이며 그의 임재는 모든 믿는 자들 안에 거하십니다.

구약에서, 아브라함은 단지 가끔씩 천사들의 방문을 받거나 하나님으로부터 말씀을 받았을 뿐입니다. 그리고 그는 들은 것을 믿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그가 청원한 모든 것을 하실 수 있으시다는 것을 신뢰하였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아니하였고’(로마서4:20)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어느 때나 예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전 생애 동안 그분께 청할 자격을 가지고 있으며 그분이 응답하실 것을 압니다. 그분께서는 우리의 청원을 알릴 수 있도록 우리가 그 보좌의 방으로 담대히 나오도록 초청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성령을 통하여 우리에게 평안과 인도하심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축복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극심한 시험의 때에는 여전히 하나님을 의심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러한 불신을 이렇게 말씀하시며 꾸짖으십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밤낮 부르짖는 자신이 선택하신 사람들의 원한을 갚아 주시지 않고 그들에게 오래 참고만 계시겠느냐?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원한을 속히 갚아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 그가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볼 수 있겠느냐?"(누가복음18:7~8) 예수님께서 오늘 돌아오신다면, 그분께서 여러분 안에 믿음을 찾으시겠습니까?

여기에 불신의 결말이 있습니다. 주의 손이 그들을 치셨음이니 그들이 소멸될 때까지 군대로부터 그들을 멸하신 것이니라(신명기2:15) 여기 불신에 관하여 모든 성경에서도 가장 강경한 말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이렇게 말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은혜의 말씀이 아니잖아요, 하나님은 오늘날 불신을 그렇게까지 가혹하게 다루시지는 않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은 은혜 아래에 그것을 이렇게 말합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그 분이 존재하시는 것과 그 분이 자기를 열심히 찾는 자들에게 보상하는 분이심을 마땅히 믿어야 하느니라.’(히브리서11:6) 여기에 몇몇 불신의 결과들이 있습니다. 불신은 우리 삶의 모든 부분을 더럽힙니다. 이 죄는 우리 삶에 있어서 단 하나의 문제로 분리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모든 곳으로 넘치며, 우리의 걸음의 모든 일들을 오염시킵니다.

이스라엘의 의심은 단지 그들의 적들을 쓸어버릴 하나님의 능력에 대해서만이 국한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불신은 매일의 공급에 대한 신뢰로 흘러갔습니다. 그들은 그들의 자녀를 보호하실 하나님의 능력을 의심하였습니다. 그들은 그분께서 약속의 땅으로 이끄실지 아닐지 의심하였습니다. 그들은 심지어 그분께서 그들과 함께 하시는가를 의심하였습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신 이유입니다. “너희는 돌이켜서 홍해의 길을 따라 광야로 너희 여정을 취하라… 내가 너희 가운데 있지 아니하니”(신1:40,42)

우리가 한 부분에서 불신을 가지고 있다면, 그것은 암과 같이 우리의 온 마음을 오염시키며 모든 부분으로 퍼집니다. 우리는 그를 믿음이 믿음으로 우리를 구원한다던가, 그분이 전능하시다거나, 그분의 영이 우리 안에 거한다는 것과 같은 특정한 문제들에 있어서는 하나님을 믿을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의 미래에 대하여서는 정말 그분을 신뢰합니까? 우리는 그분이 우리의 건강과 재정을 공급해 주실 것과 죄를 이기는 승리를 주실 것을 믿습니까?

불신은 추측의 죄로 이끕니다. 추측하는 것은 감히 우리가 무엇이 옳은 지를 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이렇게 말하는 오만입니다. “내가 길을 알아.” 그리고 그 나름대로의 방법에 따라 행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이스라엘이 그 불신에 있어서 범하였던 또 다른 죄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광야로 돌아가라고 말씀하셨을 때, 그들은 복종하기를 원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그들은 모세에게 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그래요, 우리가 죄를 지었어요, 그러나 우리는 이제 방금 알아챘거든요, 우리는 적을 대항하여 올라가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복종할 준비가 되었어요.” 그리고 그들은 문제들을 그들 자신의 손으로 가져갔습니다.

여기에 의심하는 많은 신자들이 저지르는 비극적인 실수가 있습니다. 그들이 믿음의 문제에서 실패할 때에 그들은 육으로 돌아갑니다. 그들은 그들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을 하지만 그들 자신의 지혜와 기술로 합니다. 그러나 믿음은 두려움 가운데 행하는 것을 항상 거부합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일하시기를 기다립니다.

믿음은 절대 어떤 것이 하나님을 앞서서 일어나도록 하지 않으려 하는 것입니다. 이 이스라엘 무리들은 작은 군대를 조직함으로써 하나님에 앞서 갔습니다. 그들은 전략을 계획하고 그들 혼자서 공격한 것입니다. 그러나 적들이 그들을 보았을 때, 벌떼같이 이스라엘을 쫓아가 파하였습니다(신명기1:44)

저는 하나님의 안식에 절대 들어간 적이 없는 신자들의 끔찍한 케이스들을 봐 왔습니다. 주님은 그들을 가족문제, 재정적인 어려움, 결혼문제와 같은 혹독한 시험으로 데려가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께서 행하실 것을 기다리지 않았습니다. 대신 그들은 그분이 무시하셨다고 비난하며 그들 스스로 위기를 해결하려 하였습니다.

오늘날 그 신자들에게는 안식도 평안도, 하나님의 임재의 느낌도 없습니다. 대신에 그들은 계속 되는 의심가운데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하나의 위기에서 또 다른 위기로 가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들이 말할 수 잇는 모든 것은 그들의 최근의 문제들 뿐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모든 혼돈의 순간은 단지 한 가지에서 연유한 것입니다: 바로 불신 말입니다.

시편기자는 말합니다. “우리의 연수가 한갓 이야기처럼 지나가나이다”(시편90:9) 이 시편은 믿지 않는 자들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 이야기의 제목은 무엇일까요? 이 모두 헛되이 살고 죽었던 모든 사람들 말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사람들로부터 믿지 않는 조부모님의 이야기를 들을 때와도 같은 이야기입니다. “그분들은 모든 세월을 그늘 속에 사셨어, 그들은 투덜대며 불평만 하셨지, 그리고 그들은 홀로 돌아가시고 잊혀지셨지.”

이것이 불신의 무서운 점입니다. 그것은 여러분들의 영적인 역사를 잘라버려서 여러분들에 관하여 기억된 모든 것은 고작 낭비된 삶이 되어 버리게 합니다. “할아버지와 할머니들은요?” 이스라엘의 젊은 세대들이 이렇게 물었을 때. 그들은 이렇게 말하여 졌습니다. “그들은 단지 투덜대고 불평만 했지, 그들은 무언가를 위해서 살 것이 없었단다. 그래서 그들은 그냥 죽기를 기다리며 하는 일 없이 보냈지.”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아직도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해 간직하신 안식에 들어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누군가 거기에 들어가는 일이 남아 있으나(히브리서4:6)” 진실한 신자들은 설사 그들의 기도가 응답 받지 못한다 하더라도 하나님을 신뢰할 것을 결심합니다. 그들이 모든 물건들을 빼앗기거나 심지어 죽음에 직면한다 해도 그것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기를 갈망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삶의 증거는 무엇일까요? 그들은 ‘(그들)자기 일에서 쉬었느니라.(4:10) ’ 그들은 더 이상 그들의 문제를 자신의 지혜와 기술로 해결하려 밤에 깬 채로 누워있지 않습니다. 대신 그들은 모든 것을 예수님께 돌립니다. 그들이 얻거나 잃는 것으로 끝나는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들의 유일한 초점은 하나님께서 계획을 갖고 계시다는 것과 그분께서 우리의 삶에서 그 계획을 행하시고 있다는 것입니다.
저는 제가 최근에 겪었던 경험으로 끝 맺고자 합니다. 어느 토요일 저녁 저는 관광객과 휴일 쇼핑을 하는 다른 사람들로 붐비는 타임스퀘어 광장을 거닐었습니다. 거의 25만의 사람들이 이 곳을 지나가는 러시아워의 때였던 것 같습니다. 이제 제가 거기 서있을 때, 저는 사람들의 무리들이 지나가는 것을 지켜보며 기도하였습니다.

어느 순간, 성령님이 저에게 속삭이셨습니다. “데이빗, 이 군중을 보아라, 그들을 여러 번 곱하라, 그러면 그것이 광야에서 죽었던 나의 백성들의 수이다. 그 온 무리 속에서도 여호수아와 갈렙 단지 두 명이 나의 안식에 들어왔다. 다른 모든 자들은 그들의 때가 되기도 전에 절망과 불신 가운데 죽었다.

그 생각은 저를 압도하였습니다. 저는 브로드웨이 극장, 레스토랑, 백화점으로 들어가는 군중들을 더욱 자세히 보았습니다. 저는 부유한 사람, 집 없는 사람, 중산층의 사람, 동성연애자, 여장남자를 보았습니다. 그리고 저는 십중팔구 그들 중 누구의 생각 가운데에도 하나님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저는 강 건너 축구장, 농구장, 하키장 그리고 그곳을 채우고 있는 모든 사람을 생각했습니다. 그들 중 단지 적은 수만이 진정 하나님을 사랑했습니다. 나는 타임스퀘어 광장의 모든 영화관을 둘러보았고 모든 거룩함을 조롱하며 거기에 앉아있는 수천 명을 생각했습니다.

제가 이 사람들의 무리를 보았을 때, 저는 그들 모두 어느 때나 복음의 메시지를 접할 수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텔레비전, 라디오, 문학 심지어 호텔 방에 있는 무료 성경을 통해서까지 말입니다. 그들이 만일 알기를 원하기만 하였다면, 그들은 고대 이스라엘에게 기적을 행하셨던 동일한 하나님이 오늘날 그분을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을 위해 동일하게 행하신 다는 것을 들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사람들은 그분을 알기 원하지 않았습니다. 만일 그들이 복음책자를 건네는 누군가를 본다면, 그들은 지나가며 그를 물리칩니다. 그들에게는 신이란 없고 단지 즐거움, 돈 그리고 재산이 있을 뿐입니다.

갑자기, 저는 하나님 눈에서의 한 신자의 가치를 보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저는 오늘 예수님께서 동일한 질문을 하시는 것을 듣습니다. “내가 돌아갈 때, 내가 지상에서 믿음을 찾겠는가” 저는 그리스도를 봅니다. 사람의 마음을 찾으시는 분, 온 거리를 찾아 헤매시고도 진정 그분을 사랑하는 자를 거의 찾지 못하십니다. 저는 그분께서 대학의 캠퍼스를 찾으시는 것을 봅니다. “여기에 누가 나를 믿을 것인가?” 저는 그분께서 그분을 받아들이려는 자들을 구하며 워싱턴D.C.를 찾으시고도 거의 발견하지 못하시는 것을 봅니다. 저는 그분께서 온 나라들을 찾으시고 단지 자투리만 발견하시는 것을 봅니다. 저는 그분께서 현대의 변절한 교회를 찾으시고도 죽음 뿐 아무런 믿음도 발견하지 못하신 것을 봅니다.

결국, 그분께서는 그분의 교회에서 진실한 믿음의 종들을 찾으십니다. 그러나 그분께서 보시는 것은 그분의 마음을 깨뜨리며 그분을 깊이 슬프게 합니다. 저는 그분께서 이스라엘에 대해 우셨듯이 우시는 것을 듣습니다. ‘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며 너에게 보낸 사람들을 돌로 치는 자야, 마치 암탉이 자기 병아리들을 날개 아래 함께 모으듯이 내가 얼마나 자주 네 자녀들을 모으려고 하였더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하였도다!’(마태복음23:37)

그분의 진노의 이유는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사랑 받는 자녀에게 아버지의 사랑을 보이기 위해 그분의 아들을 보내셨습니다. 그분께서는 그들을 인도하고 위로하기 위하여 성령님을 보내셨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그분의 성전에 대다수는 믿음이 없습니다.

그들은 그분께서 그들의 기도에 응답하신다는 것을 믿지 않습니다. 그들은 투덜대고 불평하며 그분이 무시한다고 비난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두려워하고 절망하게 됩니다. 마치 하나님께서 그들을 포기하시기라도 한 것처럼 말입니다.

주님의 사역자로써, 저는 내 양들의 짐을 집니다. 그리고 저는 지금 그분의 슬픔을 느낍니다. 저는 그분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을 듣습니다. “나의 집 안이라도 믿음을 가진 사람을 거의 찾지 못하는 구나. 나의 목자들을 포함해서 나의 많은 자녀들은 그들의 고난의 때에 쓰러지는 구나. 그들은 그들의 가족, 직업, 미래에 대하여 나를 신뢰하지 않는구나. 참으로 많은 자들이 그들의 자신의 선택을 해버렸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주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이렇게 물으시며 오십니다. “나를 믿겠느냐? 나를 신뢰하느냐? 내가 올 때, 내가 네 안에서 믿음을 찾겠느냐?” 여러분은 어떻게 반응하시겠습니까?
 <데이빗 월커슨목사>

주님께서 여러분을 위해 싸우실 것입니다 - 1

신명기 전체는 모세가 죽음 직전에 전한 일련의 말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이 말은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헤매며 보냈던 40년의 회고였습니다. 그리고 모세는 이것을 이스라엘의 새로운 세대에게 전합니다. 그 때, 사람들은 그들 역사에 있어서 중요한 지점인 카데스바네아에 자리잡았습니다.

그들은 약속된 땅인 가나안의 경계에 있었습니다. 그곳은 그들의 아버지들이 38년 전에 섰었던 동일한 지점이었습니다. 그곳은 또한 하나님께서 구세대가 약속된 땅으로 들어가는 것을 막으셨던 장소이기도 했습니다. 주님은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한 온 세대가 죽을 때까지 헤매도록 그들을 광야로 되돌려 보내셨습니다.

이제 모세는 이 새로운 세대에게 그들 아버지들의 이야기를 상기시키고 있습니다. 모세는 왜 하나님 보시기에 포기하실 만한 반역으로 이전 세대가 죽었는지를 그들이 정확히 알기 원하였습니다. 모세는 분명하게 말하며, 그들이 그들 부모들의 비극적인 실수로부터 배울 것을 강권합니다.

“너희는 너희 아버지들의 이야기를 알지. 그들은 하나님으로 부름 받아 선택 받고 기름부음 받았던 백성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비젼을 잃었지. 주님은 그들을 너무 사랑하셔서 몇 번이고 그의 팔로 그들을 안고 옮기셨다. 그러나 계속해서, 그들은 투덜거렸고 그를 대적하여 불평하며 그분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결국, 하나님의 인내는 한계에 왔다. 그분께서는 그들이 불신을 저지른 것을 보셨지. 그리고 그들의 마음을 바꾸기 위하여 그분께서 하실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분께서 행하셨던 어떠한 기적도 그들로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선하심을 완전히 믿게 할 수가 없었다.

그들의 마음은 단단한 돌 같았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 중 하나도 나의 약속 한 땅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대신 너희들은 이제 돌아가야 한다. 너희들은 다시 광야로 돌아가라”

이 얼마나 강경한 말입니까, 그러나 모세는 단지 이스라엘의 새 세대에게 말하는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또한 오늘날의 우리를 포함한 뒤따를 모든 세대의 신자들에게도 말하는 것입니다. 모든 구약의 이야기들과 같이, 이것은 ‘본보기가 되고 또 세상의 끝날들을 당한 우리에게 훈계로 기록되었습니다’(고린도전서10:11)

모세는 우리에게 불신의 위험을 보이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우리가 주의하지 않으면, 우리도 우리 앞에 넘어진 사람들과 같은 무시무시한 귀결을 겪을 것을 경고하였습니다. ‘아무도 똑같은 믿음 없음의 본에 빠지지 않게 하려 함이라’(히브리서4:11) 그는 본질적으로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어떠한 불가능과 마주치고 있는가 또는 문제가 얼마나 가망 없이 보이는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같은 불신앙의 죄에 빠져서는 안 됩니다. 아니면 그들이 그랬던 것처럼 여러분은 끔찍한 광야에서 끝나고 말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당신의 남은 삶 동안 그 곳을 헤매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을 인도하는 데에 신실하십니다. 그리고 그분은 우리의 선조들을 그들이 그 이유를 울부짖으며 구할만한 그런 곳으로 이끄셨습니다. 그것은 그들에게 그분을 신뢰하는 것을 가르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분께서는 믿음에 있어 흔들리지 않는 사람을 원하신 것입니다.

그들은 금과 같이 순수하게 단련된 믿음과 함께 광야를 나와야 했습니다. 그분께서는 그들이 세상을 향해 하나님의 백성을 향한 그분의 선하심을 증인이 되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저는 우리 세대가 너무나도 가볍게 불신의 죄를 지어왔다고 믿습니다. 그래서 지금 우리는 비극적인 결과들을 보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오늘날 많은 신자들이 우울과 불안으로 차 있는 것을 봅니다. 물론 어떤 사람들은 육체적인 이유로 이러한 것들을 겪기도 합니다. 그러나 다른 많은 사람들은 그들의 영적 상태 때문에 그런 고통을 겪습니다. 제 생각에, 그들의 우울은 그들의 계속적인 불신으로 하나님을 화나시게 한 결과인 것 같습니다.

주님께서는 그분 백성 중의 불신을 언급하실 때면 항상 진노, 분노, 혐오, 그분을 시험한다라는 말과 같은 강경한 언어를 쓰십니다. 모세는 이스라엘의 젊은 백성들에게 이것을 중점적으로 상기시켰습니다. “광야에서도 주 너희 하나님께서 너를 어떻게 감당하셨는지 네가 보았나니 마치 사람이 자기 아들을 감당한 것같이 너희가 갔던 모든 길에서 그렇게 하셔서…주께서 너희의 말소리를 듣고 노하시어 맹세하여 말씀하시기를 "분명히 이 악한 세대의 이 사람들 가운데는 내가 너희의 조상에게 주기로 맹세한 그 좋은 땅을 볼 자가 아무도 없을 것이니라”(신명기1:31,34-45)

그리고 모세는 그들의 아버지들이 카데스바네아에서 저질렀던 비극적인 실수를 설명합니다. 그것은 홍해를 건넌 지 잠시 후에 일어났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담대하게 가나안으로 들어갈 것을 명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그들에게 이러한 강력한 확신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주 너의 하나님께서 네 앞에 그 땅을 두셨으니 너의 조상의 주 하나님께서 너에게 말씀하신 대로 올라가서 그 땅을 차지하라. 두려워하지도 말고 낙담하지도 말라 … 그들을 두려워 말고 무서워 말라. 너희 앞에 가시는 주 너희 하나님께서 이집트에서 너희를 위하여 너희 목전에서 행하신 모든 일대로 그 분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라.”(1:21,29-30) 이 얼마나 놀라운 약속입니까. 그들의 대적 중 누구도 그들을 대항하여 설 수 없을 것이었습니다.(7:24을 보십시오)

하지만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약속에 주저하였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그분을 신뢰하지는 않고 오히려 가나안에 첩자들을 보내자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첩자들은 불신으로 가득한 악한 보고를 갖고 돌아왔습니다. 그들은 거인족과 높은 벽으로 쌓인 도시에 대해 말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들의 보고를 믿었습니다: 그러나 너희가 올라가기를 원치 아니하고 주 너희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였으니(1:26) 이제 모세는 젊은 세대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즉각적으로 움직여야만 했었다. 주님께서 그들을 위하여 싸우시겠다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그들은 반역하였다.”

옛 세대에게 무엇이 일어났던 것인지 아시겠습니까? 가나안에 그 첩자들을 보낸 것은 불신의 행위였습니다. 그리고 첩자들이 거기에 있는 동안 그들은 사탄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대적의 거짓말에 사로잡혔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그분을 신뢰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악마의 도구가 되어 진영으로 돌아왔던 것입니다.

사악한 보고를 듣고 나서, 사람들은 하나님에 대하여 비난하면서 그들의 주먹을 쥐고 흔들었습니다. ”당신께서는 우리를 버리셨습니다. 하나님, 당신께서 우리를 여기에 죽게 하려고 데려오셨습니다.” 한달 전만 해도, 동일한 이 사람들은 하나님에 의해 구별되어, 그분의 눈에 특별하게 들어서 기적적으로 구원 받았습니다. 그러나 이제 온 진영이 혼란가운데 있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서로서로 소리치며 의심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정말로 우리와 함께 하시는가?” 곧 그들은 그들의 자녀에 대해 흐느꼈습니다. “우리의 아이들은 이 광야에서 굶어 죽을 거야, 하나님은 우리를 미워하셔” 모세는 젊은 이스라엘에게 그들 부모들의 비난을 떠올렸습니다. “주께서 우리를 미워하시기 때문에 우리를 아모리인들의 손에 넘겨 죽이시려고 우리를 이집트 땅에서 데리고 나오셨도다.”(1:27)

카데스바네아는 하나님께서 그의 모든 자녀들의 믿음을 궁극적으로 시험하시기 위해 데려오시는 곳입니다. 카데스바네아는 여러분이 직면한 불가능의 장소입니다. 그 이름은 도망자, 유랑자, 방랑자라는 뜻의 히브리 어원으로부터 온 것입니다, 간단히 말해서 여기서 당신이 잘못된 선택을 한다면, 당신은 당신의 인생 내내 광야를 헤매는 것으로 끝날 것입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바로 지금 이 장소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그분의 언약을 주셨습니다. 그분께서는 그들에게 구원의 기적에 기적을 주시며 함께하셨던 굉장한 역사를 주셨습니다. 그러나 악마는 그들이 그것을 이룰 수 없을 거라며 거짓말을 갖고 왔습니다. 그는 그들이 충분히 훌륭하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여전히 그들의 과거의 죄들에 대해 화내고 계시며, 절대 용서하지 않으실 것이라고 그들을 꼬드겼습니다.

말해보십시오. 여러분은 그런 거짓말을 받아들이기 시작하셨습니까? 여러분!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위기의 때에 져버리시리라고 생각하십니까? 만일 그렇다면 여러분의 행보의 어떤 언젠가부터 여러분은 그분의 말씀에 신뢰하는 것을 멈춘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분의 명령에 따라 행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에게 사실이었던 것은 여러분에게도 사실입니다. 여러분이 카데스바네아에서 마주친 시험이 여러분의 남은 인생의 진로를 결정할 것입니다.

이스라엘과 같이, 여러분은 혹독한 광야를 하나님으로 인해 지나왔습니다. 되돌아 보면, 여러분은 마주쳤던 끔찍한 시험과 견뎌냈던 고통스러운 실패들을 떠올릴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은 절대로 벗어나리라 생각하지 못했던 고난들을 통과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모든 때에 여러분에게 신실하셨습니다. 때마다 그분께서는 자비롭게 내려오셔서 여러분을 들어 올리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여러분은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절대 나를 져버리지 않으셨어, 나는 그분의 은혜로 오늘 여기에 서있어, 정말이야, 하나님은 그 팔로 나를 품으셨어, 아버지가 그 아이를 안듯이 말이야.”

게다가,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을 들이기 위해서 데리고 나오신 것입니다. 이스라엘에게 그랬던 것처럼 여러분 앞에도 약속된 땅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에게 한 안식이 남아 있도다’(히브리서4:9). 주님은 여러분을 안식의 장소로 데려가시기 위하여 구원하셨습니다. 이 안식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주님 안에 흔들리지 않는 믿음과 확신입니다. 그것은 가장 어려운 때를 통하여 여러분을 보기 위한, 그분의 약속을 신뢰하는 장소입니다.

그러나 이 안식의 장소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먼저 카데스바네아를 통과해야 합니다. 거기에 있을 때 여러분은 격렬한 전투와 마주치게 됩니다. 그것은 여러분이 경험했던 그 어떤 것의 범위도 넘어서는 것입니다. 대적, 거인, 높은 성벽, 완전히 불가능해 보이는 것들이 거기에 있습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구하실 것에 절대적 신뢰를 두어야 합니다.

우리는 이미 카데스바네아에서 이스라엘이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행하는 것을 주저하였는지를 보았습니다. 결과적으로 사탄은 그들을 악마에게 속은 10명의 거짓말쟁이의 영향을 받도록 만들었습니다. 그 결과는 어땠습니까? 그 사람들은 결국 하나님께서 그들을 파하실 것이라고 믿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오늘날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약속에 따라 신속히 행하기를 거절할 때, 우리는 자신을 악마의 흉포한 거짓에 여는 것이 됩니다. 그리고 그 거짓들은 우리의 믿음을 파괴할 것입니다.

사탄은 우리가 하나님께서 우리를 스스로 싸우도록 내버려 두셨다고 생각하기를 원합니다. 그는 우리에게 앞에 벽이 너무 높아서 그것을 넘어서 승리할 길은 없다고 말합니다. 그는 우리가 실패할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예수님과 함께해왔던 모든 걸음이 헛되다고 말합니다. 그는 소용없다며 우리는 끝내는 게 나을 것이라고 속삭입니다. 제가 말씀 드립니다. 이것이 왜 하나님께서 항상 우리에게 그분의 말씀에 따라 빨리 행하시기를 원하시는가 이유입니다. 그분께서는 악마가 우리를 거짓말로 공격할 기회를 갖는 것을 원치 않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미워하신다고는 절대 믿을 수 없어, 어떻게 내가 하나님께서 나를 파하려 하신다고 생각할 수 있겠어?” 그러나, 우리가 사탄의 거짓말을 듣는다면, 이것은 우리가 끝내 바로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불가능한 상황으로 이끄셨어, 그가 나를 위해 길을 만드실 것이라는 아무런 증거도 없어. 그런데도 그분은 내가 질 수 있는 것 이상은 견디게 하지 않으실 것이라고 말씀하셨어. 그리고 지금 이건 내가 견뎌낼 수 있는 수준보다 더 심해.” 그러한 생각이 바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비난인 것입니다. 그들은 우리의 시험 한가운데 하나님께서 함께하지 않으신다고 하며 그분을 비난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러한 불신을 이스라엘에서 다시 봅니다. 그들이 르비딤에 이르렀을 때, 이곳은 광야에서도 가장 마른 곳이자 또 다른 위기의 장소였습니다. 곧 사람들은 갈증으로 괴로워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또 한번 하나님 안의 확신을 잃었습니다. 그들은 울부짖었습니다. “주께서 우리 가운데 계신가 안계신가”(출애굽기17:7) 즉 이런 뜻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면, 우리는 이런 위기는 겪지 않을 텐데, 이번은 절대적으로 불가능한 상황이야”

이스라엘 불신의 근본 이유는 오늘날 교회 안에서의 불신과 동일한 이유입니다. 간단히 말해, 하나님의 말씀만으로는 이스라엘에게 충분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놀라운 약속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그들 위기의 한 가운데서, 이스라엘은 그분의 말씀을 절대 신뢰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을 도우시겠다는 모든 약속과 그 모든 굳은 맹세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분의 말씀을 헛되게 하였습니다. 어떻게 말입니까? 그들은 그것을 절대 믿음과 결합시키지 않았던 것입니다. “전파된 말씀이 그들에게 유익을 주지 못한 것은 그것을 들은 자들이 믿음을 결합시키지 못했기 때문이라.”(히브리4:2)

대신, 그 사람들은 항상 하나님께 새로운 말씀을 요구하였습니다. 우리는 이를 그들의 질문에서 볼 수 있습니다. “주께서 우리 가운데 계신가 안계신가” 다른 말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이 위기에 우리와 함께 계신지 아닌지 알아야겠어, 이전의 마지막 계시말고, 우리는 그분으로부터 새로운 계시를 받아야 해, 이런 낯선 상황에 말이야.” 여러분에게 묻겠습니다.

누가 어떻게 그렇게도 빨리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해 하셨던 것들을 잊을 수 있단 말입니까? 이스라엘은 과거 하나님께서 구원해주셨던 모든 순간들을 그들의 기억으로부터 지워버렸던 것입니다. 그들은 절대로 과거에 그분의 초자연적인 사역들이 그들 안에서 믿음을 세우도록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 분을 대적한 비방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또 다른 말씀을 이스라엘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분께서는 모세에게 이렇게 말하라고 지시하셨습니다. “그들을 두려워 말고 무서워 말라. 너희 앞에 가시는 주 너희 하나님께서 이집트에서 너희를 위하여 너희 목전에서 행하신 모든 일대로 그 분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라.”(신명기1:29-30)

지금, 이것은 새로운 약속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단지 그분께서 이미 그 백성들에게 말씀하셨던 것을 다시 말씀하고 계신 것뿐이었습니다. “주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잠자코 있을지니라” 그분께서는 그들에게 이렇게 상기시킨 것이었습니다. “내가 이집트에서 너희에게 내가 너희 앞에 가겠다고 말하였노라.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하며 너희를 위하여 너희 적을 대항하여 싸우겠다고 말하였노라” 그리고 그분께서는 틀림없이 그렇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변화와 모든 시험 내내 그들을 구원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몇 번이고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너희와 함께 있노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싸우리라. 이제 이 약속을 붙들고 잊지 말아라.” 그러나 그들은 여기 가데사바네아에서 그들의 대적 앞에서 떨며 그들의 약한 점에만 집중하고 있었습니다. 결국 그들은 따졌습니다. “우리는 그들을 대적하여 올라갈 능력이 안됩니다.” 심각한 의심이었습니다- 그들의 삶에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의심, 그분이 그들을 보내셨다는 것에 대한 의심, 그들 가운데에 그분의 임재에 대한 의심이었던 것입니다.

여러분은 절대로 이런 식으로는 반응하지 않았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너무나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와 비슷한 말을 합니다. “주님, 정말 저와 함께 하시나요? 나는 당신께서 제게 약속하신 것을 알아요, 그런데, 정말 그게 사실인가요? 제가 당신께서 말씀하신 것을 믿을 수 있나요? 저는 당신에게 새로이 들어야겠어요. 저는 새로운 말씀이 필요해요. 제발, 좀 더 확신을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