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8/2009

에베소, 두아디라, 그리고 라오디게아 교회(데이빗 윌커슨 목사) - 1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교회를 사랑하십니다. 그분께서는 교회를 위해 그분의 생명을 주셨고, 지옥의 문이 교회를 대적하여 이기지 못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성경은 그 안에 거하시는 그분의 영광과 지혜에 대해 말합니다. 오순절에, 그분께서는 교회를 세우기 위하여 그의 성령을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그분께서는 교회를 세우기 위하여 기름부음 받은 종들을- 목사, 교사, 사도, 선지자, 복음전도자- 주셨습니다.

주님께서 그분의 교회를 축복하시기 원하신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렇다면 계시록2장에서 그리스도께서 그분의 백성에게 나타나실 때에는 왜 그렇게 두려운 모습으로 나타내는 것입니까? 요한은 예수님께서 불타는 눈과 천둥 같은 목소리로 교회에 오신다고 쓰고 있습니다.

그 일곱 촛대 사이로 인자 같은 이가 있는데 … 그의 머리와 머리털은 눈처럼 희어서 양모처럼 하얗고, 그의 눈은 불꽃 같더라. 그의 발은 용광로에 달군 듯한 빛나는 놋 같고, 음성은 많은 물소리와도 같으며 그의 오른손에는 일곱 별을 가졌고 또 입에서는 날카로운 양날 가진 칼이 나오며, 용모는 해가 그 맹렬한 기세로 비치는 것 같더라. (요한계시록1:13~16)

이제, 계시록은 하나님의 말씀의 집대성한 것입니다. 그것은 모든 것들의 종말을 묘사합니다. 그리고 여기에 이 책에서 우리가 보는 그리스도의 첫 번째 이미지가 있습니다. 여기서 그리스도께서는 왜 그리 두렵게 나타나시는 걸까요? 그리고 그분은 왜 교회를 향하여 날카롭게 말씀하시는 걸까요? 요한은 그리스도의 말씀이 칼과 같이 날카로워 골수를 쪼갠다고 기록하였습니다. 기억하십시오. 이 사도는 예수님의 가슴에 그의 머리를 기대었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지금 그는 엎드려져 있는 그 자신을 발견합니다. “내가 그를 보자 죽은 것처럼 그의 발 앞에 엎드려지니”(1:17)

예수님 자신께서 그분의 두려운 모습에 관해 설명하십니다. “모든 교회들은 내가 사람들의 속과 마음을 살피는 자임을 알게 되리라. 또 내가 너희의 행위에 따라 너희 각자에게 주겠노라.”(2:23) 사실 그리스도는 그분의 교회를 사랑하십니다. 그리고 바로 그것이 그분께서 교회를 살피러 오신 이유입니다. 그분께서는 그분의 백성을 사랑으로 바로잡고 정결케 하기 위하여 오십니다.

무엇보다도, 예수님께서는 요한에게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그가 내게 오른손을 얹고 나에게 말씀하시니라. 두려워 말라. 나는 처음과 마지막이요”(1:17).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본질적으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나는 내 교회의 모두가 내가 그들의 속 사람을 살피기 위하여 왔다는 것을 알기 원한다. 그리고 나는 이를 불 같은 눈과 영혼을 흔드는 천둥으로 행한다. 나는 완곡하게 말하지 않겠다. 내가 말해야 하는 것은 꿰뚫기도 하면서 치유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나의 자녀 중 누구라도 냉담과 무지 가운데 계속하도록 두지 않을 것이다. 나의 눈과 입이 모든 허울을 꿰뚫을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그분의 교회에서 무엇인가 보셨습니다. 그리고 그분께서는 요한에게 그분의 말씀을 받아 적어 교회의 일곱 천사들에게 보내라고 지시하셨습니다. 이는 그분의 사역자를 의미하며 그들을 그분의 손에 있는 별들로 부르기도 합니다. (1:16을 보십시오) 그분께서는 요한에게 이렇게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나는 이 종들을 사랑한다. 내가 그들을 부르고 기름 부었다. 그리고 이제 너는 그들에게 나의 말을 전해야 한다.”

목사인 나 자신으로써, 저는 궁금했습니다. 요한으로부터 그러한 편지를 받아 열게 되는 것은 과연 어땠을까? “뉴욕 교회의 목사에게: 주님께서 당신의 회중에 관하여 말씀하십니다…” 이제 그 일곱 사역자들이 느꼈을 것을 상상해 봅시다.

예를 들어, 에베소의 목사는 요한의 편지를 읽으며, 그리스도께서 그의 교회로 기뻐하고 계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주님께서는 에베소인들이 열심히 일한 것과 인내와 근신을 칭찬하십니다. 그들은 악을 미워하며 그리스도를 위하여 일어섭니다. 또 그들은 내내 선한 행실을 멈춘 적이 결코 없었습니다. 이 목사는 그가 읽는 것에 놀랍니다. 그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와~ 주님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는 구나, 이것은 칭찬의 편지로군.”

그러나 그는 계속 읽어가며, 꿰뚫는 말씀에 다가갑니다.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다소 있나니 이는 네가 너의 첫 사랑을 저버린 것 때문이라”(2:4). 예수님께서는 그 목사에게 경고하십니다. “그러므로 네가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기억하고 회개하며, 너는 처음 일들을 행하라. 만일 그렇지 않고 회개하지 아니하면 내가 속히 너에게 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2:5)

그 예베소의 목사는 여기서 깜짝 놀랐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회개? 아니면 우리의 촛대를 옮기시겠다고? 충격적인 말씀이군, 어떻게 이럴 수 있지? 우리는 언약의 신자들인데, 우리는 믿음으로 의로워 졌는데. 우리는 관대하고, 사랑하며, 돌보았는데. 이제 우리는 돌아가서 처음처럼 되어야 한다고? 이게 무슨 뜻일까? 어떻게 이것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일 수 있을까? 내가 이 편지를 어떻게 우리 회중들에게 이 편지를 읽을 수 있을까?”

기억하십시오. 이 말씀들은 거룩한 회중들에게 지시된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이는 주님의 눈에 깊이 심각한 문제였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어째서 그분께서는 그토록 훌륭한 교회의 본보기에 그렇게도 엄중하게 말씀하셨겠습니까. 그분께서는 그 목사에게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너희의 나를 향한 첫 사랑은 예전과 같지 않다. 너희는 나와의 교제를 소홀히 하였다. 이제 회개하라.”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하십니다. 그 모든 것은 그분의 임재와 관련 있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예베소인들은 선한 일에 성실히 임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더 이상 주님과 친밀하지는 않았던 것입니다.

다음 절에,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일곱 교회의 목사들과 회중들을 향한 메시지를 요약하십니다. 그리고 그분은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보라, 내가 문 앞에 서서 두드리노라.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그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서 그와 함께 먹으며 그도 나와 함께 먹으리라.”(3:20) 너무나도 자주, 그리스도인들은 그들 마음의 문을 예수님께 열지 않습니다. 그분께서 두드리실 때, 심지어 그들은 집에 없기까지 합니다. 대신 그 문 위에 이런 표시가 있습니다. “주님, 저는 병원의 사역으로 부재중이오며 다음은 감옥사역입니다. 교회에서 뵈어요.”

오늘날 많은 교회들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많은 자선적인 착한 일들을 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인간의 필요를 위한 대부분의 모든 프로그램들을 갖고 있습니다. 그리고 회중은 깨끗하고 바른 삶을 살며 죄를 피하기 위해 조심합니다. 그러나 그들에게 무엇인가 바뀌었습니다. 한때, 이 신자들은 예수님과의 교제에 헌신되었습니다. 그들은 그분과 단 둘만의 시간을 보내지 않고는 단 하루도 지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제 상황이 달라졌습니다. 그들이 그분께 드리는 것은 그들이 어떤 일을 하러 갈 때 짧게 드리는 인사뿐입니다. 이것이 예수님께 얼마나 심각하겠습니까?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와의 교제를 매우 심각하게 생각하시기 때문에 영혼을 잃는 데 이르게 되는 한 가지 요소를 제하실 것입니다. 바로 그분의 임재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경고하십니다. “나의 교회는 무엇인가 잃어버렸다. 바로 나의 놀라운 임재 말이다. 너희는 다시 비밀한 골방으로 돌아가야 한다. 나와 다시 식탁을 나누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서 나의 임재를 거두어 가겠다. 너의 모든 선행은- 너의 설교, 전도, 구제- 우리의 시간으로부터 흘러나오는 것이어야 한다. 그것은 나의 테이블로부터 나와야 하는 것이다.”

에베소교회는 한때 소유했던 그 무언가를 잃어버렸습니다. 그것은 그들 한 가운데에 나타나는 예수님의 임재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임재를 당연한 것으로 여기기 시작하였고, 그것이 그들의 사역에 영향을 끼쳤습니다. 한때, 그들은 서로서로 사랑하고 돌보았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들은 서로서로를 당연하게 여기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그들의 선행을 하기 위한 수고에도 비참한 영향을 끼쳤습니다. 그들은 사람들을 섬기는 데에 너무나도 바쁜 나머지 그리스도의 사랑이 아닌 그들의 행위가 초점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분의 강력한 임재를 잃어버린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경고하십니다: “너희가 변화하지 않으면- 너희가 나를 향한 갈급함으로 돌아오지 않는다면- 나는 너희의 증거를 없애겠다. 너희가 선행을 할 때에 더 이상의 어떠한 권위도 없을 것이다. 그것들은 모두 헛된 것이 될 것이다.”

저는 오늘날의 세계에서도 비슷한 경우를 봅니다. 내가 알았던 어떤 열심의 사람들은 복지부나 사회단체에서 일하던 사람들입니다. 특히 정신병동이나 학대어린이에 관하여 일하는 사람들도 그러합니다. 이 사람들은 성실하고 헌신된 일꾼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매일 목격하는 것을 직면하는 것은 너무나도 고통스러울 뿐이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어떤 이들은 스스로 마음을 무감각하게 해버렸습니다.

동일한 일이 그리스도인에게도 일어날 수 있습니다. 목사나 전임 사역자들도 그들이 사역하는 사람들에게서 그러한 고통과 죄를 보면서 무감각해 질 수 있습니다. 그것이 예수님께서 이 에베소의 목사에게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너희는 한때 서로서로에게 너무나도 친절했다. 너희는 사람들을 향한 그러한 사랑이 있었고 그들의 말에 귀 기울였다. 그러나 지금 너희는 귀머거리가 되었다. 너희는 그들과 함께 앉아있으면서도 그들의 울부짖음에 대해 너희 자신을 무감각하게 하였다. 너희는 생명 없이 습관적으로 사역하고 있다. 나는 너희로부터 나의 임재를 제거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저는 잠시 동안 주님께서 그분의 임재를 거두어 가신 교회에 있어본 적이 있습니다. 어두움과 메마름이 거의 만져질 정도였습니다. 모두 그걸 느낄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교회에게 이렇게 말씀 하고 계십니다. “나는 잠시 모든 것이 냉담해지게 하 것이다. 나는 너희를 권태에서 건져내기 원한다. 나는 너희가 나의 임재가 없는 것이 어떠한 것인지를 알기 원한다.” 교회가 이러한 지점에 도달하는 것은 전적으로 참담한 일입니다. 성령님의 죄를 깨닫게 하심도 없고, 회중을 감동시키는 것도 없고, 젊은이들을 감동시키는 것도 없습니다.

또 다른 부작용이 일어납니다. 그것은 영적으로 굶주린 사람들이 예수님의 임재가 뚜렷하지 않은 곳에서는 머무르지 않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몹시도 그분의 친밀함을 알고 싶어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것을 경험하지 못할 때, 다른 곳으로 그것을 찾으러 갑니다. 저는 그런 불평이 담긴 많은 편지들을 받습니다. “저는 주님의 임재가 살아계신 교회를 찾을 수가 없습니다.” <원제 : Christ, the Searcher of Men's Hearts 그리스도, 사람의 마음을 살피시는 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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