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0/2011

♧ 가로등의 유래 ♧

미국의 정치가였던 벤자민 프랭클린은 자기가 사는 필라델피아 시민들에게 선한 일을 하기 원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아름답고 좋은 등을 하나 준비해서 집 앞에 선반을 만들고 그 위에 올려 두었습니다.

그러자 동네 사람들은 이상하게 생각했습니다.
등불은 집 안에 두어야 하는 것으로 이해했기 때문에, 집 밖에 두는 것은 낭비라고 여겼습니다. 그러나 한 주가 지나고, 한 달이 지나자 사람들은 뭔가 깨닫기 시작했습니다.

집 밖에 등불을 두니까 밤에 지나가는 사람도 넘어지지 않았습니다. 멀리서도 방향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것을 좋게 생각한 사람들이 하나 둘씩 집 밖에 등불을 두기 시작했습니다. 길거리가 환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오늘날 가로등의 시작이었습니다. 만약 길거리에 가로등이 없다면 어떻겠습니까?

얼마나 캄캄하고 어둡겠습니까?
세계적으로 가로등이 생기게 된 것은 벤자민 프랭클린이라는 한 사람이 주변 사람들을 위하여 집 밖에 등불을 둠으로써 생겨나게 된 것입니다. 한 사람의 선한 행동이 많은 사람에게 감동과 감화를 준 것입니다.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님

죽음으로 인해 슬퍼하고, 피차 위로하는 것이 최선인 장례식에 예수님이 찾아 오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찾아오심은 다른 사람들처럼 위로하기 위함이 아니었습니다. 죽음의 문제, 절망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부활이요, 생명이다’라고 선언하십니다.

즉 예수님은 죽음에서 살리시는 분이시고, 살린 그 사람에게 영원한 생명을 부여하시는 생명의 주인이라는 것입니다. 주님은 오늘 우리에게도 예수님께 대한 믿음을 확인하는 질문을 던지십니다. “이것을 네가 믿느냐?” 부활과 생명이 누구에게 주어집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가 부활이요 생명이심을 믿는 사람에게 주어집니다.

죽음의 문제 앞에 위로하는 일이 최선인 인간에게 있어 부활이나 생명의 역사는 이해할 수 없는 사건입니다. 하지만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님을 신뢰하고, 그 분께 믿음으로 나아가는 사람에게는 마지막 날에 일어날 부활 뿐 아니라, 오늘의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부활과 생명의 능력을 맛보며 살아가게 하십니다. 나흘이 지나 전혀 소망이 보이지 않더라도,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님을 믿고 의지하시기 바랍니다. 주님이 반드시 회복시켜 주실 것입니다

가지 마세요

조선시대의 명기 황진이는 미모와 가창뿐만 아니라 서사와 시가에 능하여 모든 영웅 호걸들을 사로잡아 꼼짝도 못하게 하는 절세 가인으로 전국에 소문이 나 있었습니다하루는 당시 지조가 있고 절개가 대쪽으로 소문 난 높은 관직에 있었던 벽계수라는 사람이 황진이에 관한 소문을 들었습니다

벽계수는 황진이에게 꼼짝 못하는 사람들을 비웃으며 그녀를 만나 본때를 보여주겠노라고 하면서 송도로 갔습니다.

하지만 천하에 절개와 지조가 곧기로 소문난 벽계수도 밝은 보름달 아래에서 아름다운 자태로 시를 읍조리는 황진이의 자태에 넋이 나가 말에서 굴러 떨어졌다고 합니다.
유혹이 없는 환경에서 아무리 강직하게 보이는 사람도 막상 유혹의 환경에 떨어지면 장담할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유혹을 물리치려면 일단 유혹으로부터 멀리 떨어지는 것이 제일 좋습니다사람은 웬만큼 의지가 강하지 않고는 유혹에 금방 빠지고 맙니다그리고 의지가 강한 사람일지라도 유혹이 계속되면 그만 넘어가고 맙니다이와 같이 인간은 유혹에 약하기 때문에유혹에 빠지지 않으려면 유혹을 멀리해야 하는 것입니다음녀의 소굴에 빠지지 않으려면 음녀 근처에 가지 말아야 하며그 집 근처에도 가지 말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요삼2)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고난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나사로가 병든 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함이라고 말씀하십니다(4). 후에 예수님은 나사로를 무덤에서 살리심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십니다. 또한 이로 말미암아 제자들의 믿음이 강화되었습니다(15). 우리는 세상에서 성공해야만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때로는 인간이 절망하는 곳에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납니다.

인간이 자기 힘과 도덕적 노력으로는 죽음의 문제와 인생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음을 깨닫고 절망할 때, 비로소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은혜와 도우심을 사모하게 됩니다. 그리고 십자가의 은혜를 깨닫고 구원을 체험할 때 하나님은 그 구원의 사건을 통해 영광을 받으십니다. 고난은 한계를 깨닫고 주님만을 바라보게 하는 은혜의 통로가 되며,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기회가 됩니다.

주님이 우리 인생 속에 고난을 허락하실 때, 그 고난에는 뜻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절망의 상황에서 자기 한계에 갇혀 낙심하여 주저앉아 있지 말고, 그 사건을 통해 더 큰 일을 이루실 주님을 바라보십시오. 주님이 더디 응답하신다고 실망하지 마십시오. 주님은 가장 알맞은 때에 최고의 선물을 주심으로 자신의 영광을 나타내실 것입니다

죽음의 절망 앞에 피차 위로하는 사람들

무덤 안에는 죽은 지 나흘이나 되는 나사로가 묻혀 있습니다. 나흘이란 시간은 살아날 가능성이 전혀 없는 시간을 의미합니다. 나사로와 친분을 갖고 있던 예루살렘과 베다니의 많은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일은 마르다와 마리아의 집에 찾아와 그들을 위로하며 슬픔을 함께 나누는 일 뿐입니다.

이 세상의 어떤 사람도 죽음이라는 절망의 문제를 피할 수 없습니다. 어떤 문명이나 의술도 죽음을 극복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기에 많은 사람들은 그러한 죽음의 현실을 그저 받아들일 뿐입니다. 죽음을 맞이하고 슬퍼하는 사람들에게 그저 위로할 뿐입니다. 이것이 사람이 할 수 있는 최선입니다. 또한 위로하던 그 사람들도 시간이 지난 후에 다른 사람들의 위로를 받으며 죽음을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죽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은 모든 인간이 죄인임을 증명해 줍니다.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6:23). 죽음은 자연스러운 현상이 아니라, 죄에 대한 대가입니다. 그러기에 그 대가 앞에서 두려움을 느낍니다. 그 누구도 죄의 삯으로부터 자유롭거나 저항할 수 없습니다. 그러기에 인간은 죽음의 절망 앞에 피차 위로할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