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호세야 소개 – 열정적인 하나님의 긍휼한 계획
A. 호세아는 북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버리고 떠난 강팍하고 사악한 사람들에게 보내진 선지자였다. 그는 그리스도가 오시기 전 750년인 굉장한 풍요와 평안과 군사력과 강한 애국의 긍지를 지니고 있던 시기에 사역을 감당했다. 교회는 종교 행사들을 자기들의 부를 축적하기 위해 이용하는 기회주의적인 상인들과 부유한 사업가드로 가득차 있었다. 많은 사람들은 그 때 개방적으로 귀신을 섬기고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이라 생각하며 성적인 음란 가운데 자신들을 내주었다. 불의, 부정 부패, 약탈과 가난하고 약한 자들을 억압하는 것은 흔한일이었다. 아모스 선지자는 10년 전에 나타나서 불 같은 거룩과 정의의 설교를 통해 나라를 뒤흔들었었다. 이제 주님은 선지자 호세야를 보내셔서 이스라엘에게 전혀 다른 말씀을 주시고 그럼으로써 새로운 하나님의 모습을 드러냈다.
B. 호세야1-3장은 호세야의 예언사역의 개관과 뒤에 계속되는 예언적 말씀을 해석할 수 있는 렌즈를 제공해준다. 2장10절에 있는 “그수치를...드러내리니”라고 한 하나님의 약속은 나중에 나오는 호세아의 통렬한 설교를 통해 부분적으로 이루어진다. 그들은 자신들의 실제 모습과 단절되어 있었으며 자신들의 죄와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음을 깨닫지 못했다. 그러나 그들의 잘못된 생각을 드러내고 그들의 실제 상태에 진리의 등불을 밝히는 하나님의 계획은 그들의 마음에 적합한 방식으로 행하여진 것이었다. 그는 그들이 그의 어조를 정확하게 듣기를 원했다.
1. 인간의 마음에 신부의 영성을 호소하는 것은 우리의 마음이 어떠한 어려운 책망의 말이 임하더라도 들을 수 있도록 우리에게 용기를 주는 근본적인 구조를 우리 안에서 준비시켜주고 세워주기 때문이다. 하나님 나라에 동참할 수 있음으로 드리는 종의 “감사의 사랑”보다 더 높고, 좋으신 아버지에게 드리는 아들의 “가족의 사랑”보다 더 높은 것이 언약에 근거한 단호하고 집요한 열정적인 신랑의 사랑이며, 주님이 우리에게 하신 헌신의 확신으로 우리의 마음을 움직인다.
2. 우리의 구원과 승리에 대한 주님의 포기하지 않는 헌신에서 오는 담대함은 가장 어려운 현실과 책망을 당면할지라도 우리의 마음을 복돋아준다. 우리의 신부의 정체성은 우리의 연약함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신 언약의 헌신을 부정하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에게 상기시켜주는 일을 한다. 우리의 정체성에 있어서의 담대함은 우리의 인간적인 마음이 우리의 실제 사항을 직면하도록 돕는다. 우리가 다림줄로부터 멀리 있으면서도 깨닫지 못하고 있을 때 하나님의 친절하심으로 하나님의 기준을 알게 하시고 우리를 그곳으로 부드럽게 부르시며 인도하신다. 아모스는 기준을 제공하여 주었고 이제 호세아는 그것을 행하기 원하도록 사람들을 책망을 올바르게 듣지 못하며 주님의 열심과 질투를 오해한다.
3. 우리 가운데 살아 있어 지속되는 사랑의 타오르는 불꽃은 종국에는 하나님과의 관계에 또 한번의 시간과 거리를 두려고 하기보다는 다림줄로 돌진하게 될 것이다. 신부의 영성은 마음을 위한 시간을 벌게 하는데, 우리가 포기하지 않고 우리의 삶에 하나님께서 전적인 지도력을 행사하심으로 우리의 욕구를 변화되고 우리의 열정과 가치체계를 재조정된다. 우리가 하나님께 “예”라고 계속해서 응하며 기도의 자리를 지키며 하나님과 동역자로 설 때에 변화는 은혜로 올 것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책망을 올바르게 듣지 못하며 주님의 열심과 질투를 오해한다.
C. 호세아의 삶을 통해 말씀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사랑은 갈보리 예수님의 십자가 위에서 궁극적으로 표현된다. 호세아는 은과 보리를 지불했지만 예수님은 당신의 피를 지불하셨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영광과 사랑은 다른 어떤 것과도 같지 않음을 나타내 보여주는 순간인 것이다. 이것이 바로 영광이 무엇인가에 대한 답이다. 어떤 누군가의 생명이 다른 사람을 구하기 위하여 버려진 것이다. 수치심을 버린 겸손한 사랑이다. 우리는 어떤 귀족이 자신의 아름다운 여인을 위하여 이런 희생을 할 거라고 기대할 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왕이 창녀를 위해 치욕, 고통, 수치와 모욕을 택했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것이 없다. 매춘에 절어있는 여자를 위해 왕의 인생을? 미친짓이다! 그러나 하늘에서는 이런 수치스러운 행동을 영광스러운 행동이라고 부른다.
1. 십자가는 하나님이 오래 전 호세아 선지자에게 말씀하신 것을 외적으로 드러내신 일이다. “다시 가서, 다른 남자의 사랑을 받고 음녀가 된 그 여인을 사랑하여라. 이스라엘 자손이 다른 신들에게로 돌아가서 건포도를 넣은 빵을 좋아하더라도, 나 주가 그들을 사랑하는 것처럼 너도 그 여인을 사랑하여라”(호3:1)
2. 호세아는 창녀 고멜과 결혼했다. 고멜은 계속 다른 남자들을 쫓아다니며 음행에 음행을 거듭하였고, 마침내 어떤 남자의 사랑의 노예로 전략하였다. 그러자 가룟 유다의 배신의 대가에 해당하는 돈을 지불하고서 호세아가 그녀를 다시 데려왔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위대한 “다시 가서”이다. 그것은 사랑하는 대상을 포기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도대체 사랑은 어디까지 인가? 먼 곳에 있는 언덕, 양 팔이 벌려지고, 관절은 찢겨지고, 피가 흘렀다. 희미하게 꺼져가는 목소리가 위로 퍼진다. “아버지, 저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눅23:34)
3. 죄와 사망의 속박으로부터 해방된 신자들이 자주 고멜처럼 반응한다 – 자신을 위해 지불된 돈을 보고, 답례로 자신에게 요구하는 것이 무엇인지 뚫어지게 생각한다. 돈을 주고 샀을 때, 어떤 사람들은 구출된 신부가 아니라 팔요 온 창녀처럼 반응한다. 계약과 댓가를 바라는 행위 중심의 순종은 팔려온 창녀가 보여주는 외형적 행위이다. 이렇게 외형적으로 주도된 순종은 불성실함에 이르게 되고 내면은 더욱 크게 깨어지게 된다. 넘치는 사랑, 감사, 우리를 구원하시고 원수를 정복하신 분에 대한 갈망은 구출된 신부의 내적인 상태이다. 이러한 내적 열정은 열정적인 순종을 낳고, 우리의 죄를 씻으시고 깨끗케 하신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게시는 죄 된 욕망을 이기고 승리하게 한다.
Ⅱ. 호세아 1:1-2:1 –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무거운 마음과 사랑에 대한 개요
A. 1:1-3: 호세아의 사역과 딜레마가 엄청난 역설로 펄쳐지다 – 호세아 선지자는 알면서도 부정한 여인을 택하고 그녀와 마음을 엮어간다. 이것은 이스라엘이 생각해 본 적도, 이해할 수도 없는 방식으로 하나님의 마음을 보여주시는 당신의 계획에 따른 것이다. 하나님은 그들의 부정과 음란함 때문에 놀라지 않으셨다 –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부정한 창녀라는 것을 알고도 “결혼”하셨다. 하나님은 최고로 신실하지 못한 사람들을 선택함으로, 당신이 최고로 신실한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그들에게 보여주시려고 계획하셨다.
1. 또한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자식들도 죄로 더렵혀지고 황폐화 된 길을 따를 것임을 알면서도 당신의 마음을 이스라엘에게 주셨다. “음란한 자식들”은 하나님이 결혼하신 창녀보다 훨씬 더 나쁜 상태로 갈 것이다.
2. 주님으로부터 떨어져 나간 사람들은 “음란한 자식들”이라는 당연한 결과를 낳는다. 호세아를 이런 목적에 부치신 것은 그들이 있기 훨씬 오래 전부터 하나님께서 그들의 상태를 이미 알고 계셨다는 것을 이스라엘에게 보여주는 것이다.
B. 1:4-9: 하나님이 호세아와 고멜의 자식들의 이름을 붙여 주시다 – 각각의 이름은 다가올 심판과 이스라엘의 정확한 상태를 나타내준다. 교만과 새로워지지 못한 마음은 우리의 진짜 상태를 보지 못하게 한다 – 우리는 자신이 모든 이야기의 영웅인 것처럼 상상하고, 도덕성과 돈 문제 같은 것에서 실제보다 훨씬 더 잘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 자식들처럼 우리의 세속적이며 음란함을 잘 드러내는 곳은 없다. 우리 자식들은 우리의 연약함과 깨어짐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으며, 자신들이 성장하면서 그와 같은 죄의 영역들을 악화시킨다. 이 형태는 그들의 자식들에게도 계속되고, 세대를 이어가며 이전 세대보다 더 나빠진다. 하나님은 호세아의 자식들의 이름을 통해서 세 가지 중요한 논점을 분명하게 지적하신다.
1. 이스르엘: 예후의 살육으로 말미암아 흘린 피는 사람들을 황폐하게 했고 하나님의 심판을 불러 일으킨다. 그가 다윗의 집을 친 것은 벌을 받지 않고는 넘어갈 수 없었다 – 강력하게 해가 되는 메시지가 사람들의 마음에 새겨져서, 야곱과 에서 사이에 있었던 것과 비슷한 형제간의 증오심이 굳어졌다. 만약 하나님이 중재하지 않으신다면, 이스라엘의 운명은 에돔과 같이 될 수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계획은 그 족속들을 사랑으로 연합하는 것이다 – 그러므로 하나님은 예후의 피 흘림을 심판하셔야만 했다.
2. 로루하마: 이스라엘 역사에서, 그 당시는 “자비가 없는”때였다 – 그들의 죄와 내적 타락이 너무 심해서 자비를 얻을 수 있는 자리가 이니었다. 그때 그들의 죄와 악령숭배에 대해서 베풀 수 있는 자비는 집행 유예였고, 어떤 구속도 받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사람들에게 옳게 해석될 수 있는 것도 없었다. 심판은 오고 있었고, 피할 수 없었다. 호세아의 설교는 다가오는 진노로부터 살아남을 사람들을 하나님께 되찾아 드리기 위한 것이었다.
3. 로암미: 하나님은 그들을 “내 백성이 아니다”라고 말씀하신다 – 그들은 하나님께서 먼저 시작하신 관계성과 진리로부터 너무 멀리 빗나가서 더 이상 그들을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부를 수 없었다. 이것은 이스라엘에게는 엄청나게 비극적인 사건이었다 – 그들은 자신들의 진정한 정체성, 유업과 부르심으로부터 떨어져 나와 표류하였으며, 그리하여 더 이상 언약의 백성이 될 수 없었다. “음란한 자식들”은 가족들에게서 너무 멀리 떠내려갔기 때문에 마치 애굽에서 나온 사람들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것같아 보였다.
C. 1:10-11: 이스라엘 백성을 구속하시려는 하나님의 약속 – 위의 세 가지 이슈, 하나는 최악의 상황에서도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구속하시려는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을 장래의 구속의 약속이라는 형태로 사람들에게 반영해 준다.
1. 하나님은 현재 “당신의 백성이 아닌” 사람들을 받으셔서, 확실한 가족으로 헌신의 관계를 엮어 가시며,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백성”을 넘어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게 하실 수 있다.
2. 하나님은 나라 전체가 포괄적으로 변화될 것을 약속하시는데, 그들이 진정한 영적 아들들이 되게 할 만큼 포괄적인 변화인것이다. 이것은 영적인 명칭 이상의 것으로 영적 실제인 것이다.
3. 그 분은 가족간의 갈등과 사소한 질투와 화냄으로 그들을 분리시키는 이스라엘의 형제를 살해하는 것들을 구속할 것이며, 이스라엘 자손들을 한 자손으로 다시 모으시고, 서로를 즐거워하고 서로를 격려하여 하나님의 계획과 부르심이 충만히 이루어지도록 하실 것이다. 바울이 훗날 고린도전서 12장에서 그리스도의 몸과 진정으로 연합된 몸의 각각 다르면서도 필요한 역할에 대해 말했던 것처럼 이스라엘 자손들 역시 각 지파가 하나의 큰 나라 안에서 감당해야 할 역할을 완전하게 이해할 것이다. 그들은 “그들을 위하여 한 머리를 세울 것”이고, 더 이상 다윗의 후손과 다윗을 통한 약속을 원망하지 않으며, 그것을 하나님께서 그들의 일들을 통치하시도록 허락하신 최선임을 인정하게 될 것이다.
4. 그래서 그들이 진심으로 서로를 향해 다정함과 헌신의 자리에서 나오는 긍휼을 품을 때, 그들은 하나님의 마음을 반영하는 긍휼을 진정으로 표현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나의 백성”과 “긍휼”은 진정한 하나님의 사람들이 둘 때 계명을 실행함으로 능력있게 연합되어 잔인한 백성으로부터 긍휼한 백성으로 변화될 것이다.
Ⅲ. 호세야 2:2-13 – 하나님의 명령과 긍휼한 계획에 대한 개관
A. 이 백성에 대해서 주님이 하시는 명령은 일단 주된 논점이 확립되면 더욱 큰 명쾌함으로 드러날 것이다. 왜 이스라엘 자손들이 주님의 백성이 아닌가? 왜 그들은 잔인한 백성이라 불리는가? 하나님은 여기서 그들의 완전히 타락한 자기 본위와 자기 보호의 본능을 폭로하신다. 즉 그들은 완전히 자기 중심적이고 자기 통치적이기 때문에 매춘 행위를 하게 되는 것이다.
B. 안락과 만족을 얻으려는 열심으로 그녀는 생활의 필요와 사치를 추구하기 위하여 모든 종류의 부패와 타협을 자행하게 되었다. 그녀는 목말라 하고 도는 갈구하며(3절), 그러므로 그녀는 떡과 물과 양털과 삼과 기름과 술을 얻기 위해 자기 자신과 싸우고 있다(5절). 언약의 남편이 그의 책임을 감당하고 언약을 지키도록 신뢰하기 보다는 그녀의 충동적으로 자기가 필요한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소유하기 위하여 수치스러운 방법과 공급의 출처를 추구하였다. 그녀는 이것이 얼마나 그녀에게 큰 대가를 지불하게 할는지 모르고 있었다.
1. 대부분의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이스라엘은 내일의 크나큰 풍요와 축복과 열매를 위하여 오늘의 구속과 기도와 금식과 하나님의 공급을 신뢰하기가 어렵다. 또 다른 문제는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풍요와 축복에 대한 정의를 받아들이지 않고 그들이 축복에 대해 월등한 개념을 갖고 있다고 상상하며, 그들이 그것을 소유하기 위한 더 나은 방법을 가지고 있다고 상상한다. 우리는 잘못된 생각과 잘못된 방식을 지지하기 위한 미미한 장치들과 도움들로 우리 자신을 둘러 쌓는다.
C. 그러나 하나님은 그녀의 허망된 상상에 휘말리는 것을 거절하신다. 그분은 그녀를 파괴시킬 방법에 능력을 더하시거나 가능케 하시지 않는다. 그분은 그녀의 사랑이나 인정 또는 그녀를 파멸시키는 성향으로부터 그녀를 구원하시기 위해 그녀의 허락을 필요로 하는 허약한(co-dependant) 하나님이 아니시다.
D. 주님은 기묘자, 가장 놀라운 상담자시며 그분의 방법들은 결코 잘못될 수 없다. 그 분은 그녀를 막으시며 그녀의 계획이 무산되도록 하신다. 그 분이 이렇게 행하시는 방법은 그녀의 자연스럽고 감정적인 장치들의 허무함을 드러내심으로 하신다. 주님은 그의 지도력과 그의 방법들의 탁월함을 그녀에게 증거하실 것이다. 주님은 그녀의 어리석은 독립을 부축이는 좋은 것과 재원들을 그녀에게서 빼앗아 가실 것이다. 그녀가 현재 불순종 가운데서 즐기는 작은 축복과 공급 조차도 그녀의 쾌락과 우상을 섬기는데 사용되기 때문이다. 그녀는 진실하신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재원으로 거짓된 것들을 예배한다.
E. 그래서 현재 오고있고 앞으로 다가올 심판과 진동은 그녀를 거짓된 세력 뒤에 숨지 못하게 하고 그녀의 실제있는 약함을 드러내기 위한 하나님의 구속적이고 긍휼하신 목적을 이루기 위해 사용된다. 그녀는 자기의 삶이 제대로 진행되기 위해 얼마나 그녀의 신랑이 필요하며 주님이 없이는 삶이 평탄할 수 없음을 상상하지 못한다. 그래서 주님은 그녀가 정신을 차리고 돌아올 때까지 잠시 동안 그의 관계에 “기부”하시는 것을 중단할 것이다.
Ⅳ. 호세야 2:14-23 – 이스라엘의 다가오는 기적적인 회복과 미래의 축복
A. 일단 그녀가 벌거 벗겨지고 폭로되어 그녀의 교만과 자부심이 사라지면 주님은 “그녀를 달래신다”. 주님은 낙심하고 있는 그녀를 찾으시고 그녀를 유혹했던 악하고 거짓된 속임과 영향력으로부터 구해내신다. 그 때 주님은 강력한 주님의 초월적인 사랑의 실재로 그녀를 위로하실 것이다. 이러한 세상에 속하지 않은 비길데 없는 사랑은 그녀의 마음을 부흥시키고 개심시키며 새롭게 하여 그녀가 진정으로 주님을 주님 있는 그대로 알며 주님이 사랑하시는 대로 알 수 있도록 한다. 주님은 주님의 크나큰 사랑에 그녀가 뿌리를 내리고 터가 굳어지도록 하실 것이다. 그리고 그녀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며 즐거워하는 자가 됨을 아는 그 곳에서 터쳐져 나오는 노래를 부르게 될 것이다.
B. 그날 주님의 사랑의 완전한 영향력, 완전한 이해, 완전한 결합의 충만함에 그녀가 이르게 될 때, 그녀를 향한 주님의 헌신과 위탁의 참된 본질을 깊이 있고 확고하게 이해하게 될 것이다. 그녀는 더 이상 주님을 딱딱하고 엄격하며 요구가 많은 반드시 섬겨야만 되는 주인(왜냐하면 값을 주고 샀기 때문)으로 주님과 관계하지 않는다. 대신 그녀는 왜 그녀가 값을 치르고 사셨는지를 이해할 것이다. 그래서 노예의 신분으로 의무로 하는 말이 아니라 헌신과 다정함과 충성된 사랑의 고백이 그녀의 입술에서 주님께 고백되어질 것이다.
C. 이 비길 데 없는 사랑은 하등한 신들의 거짓된 체제와 거짓된 약속들이 참으로 가치 없으며 소용없음을 나타낼 것이다. 그녀는 너무도 마음이 매료되고 헌신되어졌음으로 마치 다른 사랑과 연인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그녀는 주님의 신부로서 자기의 자리를 차지할 것이고 모든 고귀함과 명예를 누리게 될 것이다. 완전한 사랑의 배경 안에서 하나님은 그녀가 다스리도록 모든 피조물을 다시금 복종시키실 것이다. 전세계의 평화와 회복된 에덴이 주님을 대신하여 주님의 이름으로 그녀가 이끌어 나가기를 기다리고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주님의 이름을 진정으로 대표하며 정복된 피조물을 주님의 마음을 확실히 반영해주는 온화함과 지혜로 다스릴 수 있기 때문이다.
D. 주님은 죄 가운데 그들의 어리석음으로 “지구를 파괴하는”자들이 아닌 주님의 백성에 의해 지혜롭게 다스려지도록 피조물과의 언약을 맺으실 것이다.(계11:18)
E. 주님은 그들에게 온전히 이루어질 그 날에 훨씬 더 강력할 주님의 영원한 서약에 대해 말씀하신다 – 주님은 주님의 성품의 충만하심을 따라 그들과 정혼하셨다. 그들과의 관계의 기준은 의와 공변됨과, 은총과 긍휼히 여김이며, 성실과 주를 아는 지식이 될 것이다.
F.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어 멸망한 사람들이(4:6) 주님을 깊이 있게 사랑하는 지식으로 말미암아 인쳐질 것입니다. 패역했던 사람들이 특별히 신실하며 충성스러울 것이다. 말하자면 “그의 이름을 받아드림”으로서 그의 성품을 받아드리게 될 것이다. 그 당시 실제였던 하나님의 성품이 앞으로 그들의 실제 성품이 될 것이다.
G. 21절에서 그의 뜻이 하늘에게 이룬것과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 짐에 따라(마6:10) 하늘과 땅이 하나님의 응답을 하나님과 온전히 하나되어 선포하고 있다(엡1:9-10).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이 약속이 땅에서 어떻게 나타날지에 대한 그림 또는 맛보기를 주신다. 진명 중에 심겨진 것(이스르엘)과 심판 중에 거둬진 것이 이제 완전히 뒤바뀔 것이 이제 완전히 뒤바뀔 것이다. 그들의 순종으로 인해 온전히 회복된 땅에서 헌신으로 심고 충성하게 거둘 것이다(신28:1-14; 대하7:14; 사62:4)
Ⅴ. 호세야 3:1-5 – 신부에 대한 사랑이 마음에 미치는 영향력: 호세아의 실재
A. 하나님의 지도력의 지혜와 탁월함에 관해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이 호세아에 의해 모든 사람들에게 보여졌다. 그는 아내를 찾아 대가를 지불하고 데려와서 부드럽게 사랑하고 격려하였다. 그의 헌신과 충성을 하나님이 이 패역한 사람들에 대한 추구와 헌신을 예언적으로 그리고 있다 – 그들은 실수로 잠시 타락한 것이 아니고 완전히 자기를 다른 여인에게 주었던 것이다.
B. 그는 그녀와 바로 친밀해지지 않았고 남편의 직분의 권위를 온전히 행사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다른 연인으로부터 구출된 초기 단계에서 그녀는 너무 연약했기 때문이다. 고멜은 아직 남편과 주인의 차이를 온전히 구분할 수 없었고 따라서 호세아의 친밀함을 바르게 해석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그녀에게 그를 깊게 신뢰하고 이해할 수 있는 시간을 주려고 친밀함을 자제하였다. 그녀는 수치감 없이 친밀함의 자리로 온화하고 부드럽게 이끌려와야 했다 – 소유품으로 사용되는 것이 아니라 친구로서 즐기기 위해서 였다.
C. 시간이 흐르면서 그녀의 호세야를 향한 확신과 진실한 사랑, 헌신은 자라나갈 것이고 그렇게 될 때 그녀는 그의 지도력과 가정을 위한 그의 “규칙”을 인정하고 즐길 수 있게 될 것이다. 호세아는 그녀가 이를 갈며 분개하지 않고 자발적으로 신뢰함으로 순복할 수 있도록 그녀를 온화하게 이끌어야 한다. – 사랑은 돈에 대한 것이 아니고 사람에 대한 것이어야만 한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그의 사람들을 진정한 사랑, 헌신과 이해를 바탕으로한 관계의 장소로 이끌기 원하신다. 그래서 우리가 올바른 이해 가운데 하나님의 사랑과 헌신의 “가치”를 높이 평가할 수 있게 되고, 그 가치가 관계를 유지하는 조건으로써가 안 되도록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