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9/2011

타협의 영을 파쇄하라! (Defeating Compromise)by 밥 존스 & 폴 키스 데이비스

지금 분명한 것은 온 나라와 교회가 아주 극심한 요동함을 통과하게 될 것입니다. 이때 저의 가장 첫 번째 질문은, 이러한 격변기를 허락하시는 성령님의 목적을 이해하기 위한 것입니다. 이러한 시험과 고난의 시기를 통해 우리는 어떤것을 깨달아야 할까요

제가 주님께 여쭈어 보았을 때, 저는 수년 전에 밥 존스의 계시를 함께 정리했던 글을 기억나게 하셨습니다. 우리의 사역의 대부분은, 성령님의 역사하심을 미리 이해하여서 많은 사람들이 실족할 만한 부분에 관해 그들이 어떻게 행하는 것이 바른 것인지를 발견하는 것에 중점을 두어왔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너희에게 이르고 너희를 인도하던 자들을 생각하며 저희 행실의 종말을 주의하여 보고 저희 믿음을 본받으라. (히브리서 13:7)

우리 믿음의 선조들이 행한 것처럼 우리도, “믿음에 대한 하나님의 기준” (conditions of faith)에 합한 삶을 선택하게 된다면, 주님께서는 분명히 우리들을 통하여 믿음의 선조들에게 일으켰던 많은 역사들 또한 그 이상의 일들을 행하실 것입니다. 많은 하나님의 사람들의 삶의 예증들을 볼 수 있는데, 그들은 개척자들이며 선각자들이었으며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많은 영적인 혜택들을 지금 우리가 누릴 수 있도록, 우리들보다 앞서 그 길을 평탄하게 닦아왔던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지난 부흥의 역사들을 되돌아보면서, 그들의 부르심의 성취를 실패하거나 원래부터 받았던 주님의 위임명령을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던 사례들을 역사적으로 살펴봄으로써 그들의 실패를 통해서 배워야만 합니다.

이러한 실패하거나 온전히 성공하지 못한 부흥들을 면밀히 살펴보게 되면, 한가지 주요한 마귀적인 속성이 강하게 드러나고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는데 이것은 바로 “타협의 영(Spirit of Compromise)”이라고 부를 수 있는데 이것으로 말미암아 사단은 믿는 자들에게 “영적인 파산” 즉 “영적인 죽음 (demise)을 가져옵니다.

지금과 같은 격동기에 우리들을 도울 수 있는 것은 바로 우리의 믿음이며,  믿음을 통해서 우리는, 숨어있는 영적인 덫들이 어디에 놓여있는지, 영원히 지속될 성령의 행하심이 어떤 것인지 알 수 있게 됩니다. 

용사들의 무덤 (A Graveyard of Warriors)
밥 존스가 환상 가운데 본 것은, 많은 교회들과 영적인 운동들이 비유적으로 표현되길, 아주 강력한 승리를 거둔 파워풀한 여성 전사들의 모습으로 보여졌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밥은 그가 본 환상에서, 교회들과 영적 운동들이 마치 죽음의 상태에 있는 것처럼 활동정지의 상태인 것을 발견했습니다. 밥은 하나님의 군대에서 나머지 병사들이 있는 무덤으로 이끌려 갔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부르심을 다 성취하지 못하고 아주 일찍 무덤으로 들어간 것이 분명했습니다. 그때 밥에게 주어진 임무는 어떻게 그 병사들이 부르심을 다 성취하지 못하고 죽음을 맞게 되는지 그 이유를 밝혀내는 것이었습니다.

밥의 환상 가운데, 교회들은 아주 강력한 기름부음을 받은 것으로 묘사되었습니다. 그들은 신랑이신 예수님을 대신하여서 아주 강력한 승리를 취해왔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죽음을 재촉하는 어떤 비극적인 일들이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그토록 강력하고 전투적인 사람들의 종말이 밥이 목격한 것처럼 그런 폭력을 당한 그런 무덤으로 나타나게 된 것일까요?

이것은 그들이 스스로 깨닫지 못하는 가운데, 그들이 타협의 영(Spirit of Compromise)를 받아 들임으로써, 성령을 대신하여 세상의 영이 그들 가운데 활동하도록 허락했던 결과로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사단이 육탄전과 같은 장열한 전투에서 이기지 못하게 되자, 이렇게 미혹을 통한 덫을 놓음으로써 아주 손쉽게 영적 전투에서 성공해왔던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발람이 이스라엘을 대항하여 사용했던 전략과 동일한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저주하는 일에 성공하지 못하게 되자, 그의 접근방법을 바꾸었던 것입니다. 그는 직접적인 공격을 통해서 성공하지 못하게 되자, 타협을 통하여서 걸려 넘어질 수 있는 함정과 덫을 놓음으로써 쉽게 성공했습니다.

지금 이 글을 나누는 목적은, 이러한 사단의 전략의 전모를 밝혀서 교회에 지혜와 계시의 영이 임하게 되고, 이 세대에 임한 영적인 유산들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신약성경을 보면, 유다서와 요한 계시록에 모두 발람의 영 (spirit of Balaam)으로 나타나는 사단의 전략을 다시금 깨우쳐 주고 있습니다.

낮에 일하고 밤에는 안식하라 (Work In Daylight; Rest At Night)
예언적인 시각으로 보면, 하나님의 일에는 적적한 시기와 때가 있습니다. 즉 심을 때가 있고 거둘 때가 있습니다. 또한 일 할 때가 있고 쉴 때가 있는 것입니다.

“천하에 범사가 기한이 있고 모든 목적이 이룰 때가 있나니 /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심을 때가 있고 심은 것을 뽑을 때가 있으며 / 죽일 때가 있고 치료 시킬 때가 있으며 헐 때가 있고 세울 때가 있으며” (전도서 3:1-3)

논리적인 시각으로 보더라도, 교회들은 이러한 시기를 인식하여 효율적인 모습을 갖추지 못해왔었습니다. 이런 결과로 말미암아,  우리들은 세상의 영에 끌려 다니게 되어 우리의 기준을 세상적인 것들에 타협하게 됨으로써 결국 하나님의 영의 이끄심과 흐름에는 제대로 반응하지 못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이 이성적으로 판단하기에는 아주 바르고 적절한 방법들로 보이는 것들도 그 종말은 결국 파멸인 것입니다.

“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밤이 오리니 그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라. (요한복음 9:4)

영적인 시각으로 말씀 드리자면, 밤이 아니라 빛이 있는 낮이 일하기 적절한 시간입니다. 짙은 어두움에 영적인 빛이 비취는 것에 대한 일반적이고 통용되는 의미를 말합니다. 즉 낮이 지속되는 동안이 일하기 적절한 시간인 것입니다.

밥이 환상에서 본 것처럼, 교회들은 고귀함을 갖춘 여인들이 해가 비취는 낯 시간동안 아주 용맹스럽게 싸우는 모습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신랑을 기다리는 것에 지쳐서 점차 힘이 빠지고 인내심이 없어지는 모습으로 변해갔습니다. 그러다 밤이 되자 그들은 방탕하고 난잡스러움 가운데로 겁없이 마구 뛰어들게 되었습니다.

교회들은 신랑이신 예수님과 주님의 약속의 성취를 기다림에 지쳐가고 있었습니다. 결국 어리석게도 교회를 상징하는 여인들은 세상의 영을 상징하는 남자들에게 자신들을 의탁하게 되었습니다. 그 세상의 영을 상징하는 남자들은 겉모습으로 보아서는 아주 선하고 자비를 베푸는 자들로 보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마음은 악한 것들로 가득 차 있는 자들이었습니다. 이런 결과로 교회가 생각하지 못한 영적인 암살 (assassination)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의문이 계속 들었습니다. “왜 그들은 그런 현명하지 못한 결정을 하게 된거지?” 물론 이것은 영적인 현실을 비유적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영적 환상을 통해서 이런 것들을 관찰한 후, 밥은 사단의 영적 승리를 나타내는 순례지와도 같은 그 무덤에서 떠나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그곳을 떠날 수 있게 되기 이전에, 어떤 부드러운 목소리를 가진 어떤 남자가 밥에게 다가와서 밥 앞에 맞섰습니다. 그는 마치 영업사원처럼 자신감과 확신에 찬 모습이었습니다. 그는 사람의 언어에 아주 능숙한 모습을 보였으며 그의 그런 말재주로 인하여 사람들을 쉽게 미혹시킬 수 있었습니다. 이것은 분명 사단이 예수님께 다가가서 광야에서 40일 금식하시던 동안에 했던 것과 동일한 수법이었습니다.

그 즉시 밥은 그 남자의 정체를 물었습니다. 그 남자는 자신의 정체가 “타협 (compromise)”이라고 밝혔습니다. 이 타협의 영으로 인해, 강력한 여자 전사들(교회들을 상징함)을 죽음으로 내몰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가짜를 얻기 위해서 진짜를 타협하였던 것입니다.

“가라사대 이사야가 너희 외식하는 자에 대하여 잘 예언하였도다 기록하였으되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하였느니라 / 너희가 하나님의 계명은 버리고 사람의 유전을 지키느니라. (마가복음 7:6-8)

“그러나 성령이 밝히 말씀하시기를 후일에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미혹케 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좇으리라 하셨으니 / 자기 양심이 화인 맞아서 외식함으로 거짓말하는 자들이라. (디모데전서 4:1-2)

(교회를 상징하는) 여자 전사들이 강력한 성품을 지니고 있었고, 수 많은 승리들을 얻었을지라도, 그들의 힘은 타협(compromise)에는 결코 상대가 되지 못했습니다타협(compromise) 항상, 가장 강력한 영적 전사들도 모두 파괴시킬 것입니다.  

삼손은 당대에 가장 기름부음이 강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삶의 아주 일부분에 해당하는 타협은 그의 모든 기름부음과 그가 성실히 이루었던 수많은 승리들도 모두 빼앗아 가버렸습니다. 삼손의 생애 말기에 그를 회복시키셔서 그의 죽음과 함께 마지막 승리를 거둘 수 있게 된 것은 하나님의 크신 은혜였습니다. 그러나 삼손이 타협하지 않고 계속 신실함 가운데로 나아갔다면, 그가 이룬 일에 대한 간증들은 더욱 위대한 것들이었을 것입니다.

하나님과 동격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서 공생애 사역을 시작하시려는 시점에서, 타협 (compromise)를 통해서 감히 하나님을 함정에 빠지게 하려는 음모에 착수한다는 것은, 얼핏 보기에는 상상할 수도 없는 것이었습니다. 또한 사단의 그 속임수는 주님께서 이 땅에 내려오신 거룩한 목적에 호소하는 것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악한 일을 행하는 가운데 나타나는 겉으로 보기에만 선한 것처럼 보이는 것일 뿐이었습니다. 사단은 거룩하지 못한 연합과 하나님의 계획 가운데 타협을 통하여서 이 세상 왕국을 주겠다고 제안했습니다.

“어떤 길은 사람의 보기에 바르나 필경은 사망의 길이니라” (잠언 14:12)

타협의 영의 죽음 (The Death of Compromise) 
밥은 비록 영적 환상 가운데 있었지만, 그 타협으로 인해 초래되는 막대한 피해의 결과를 보게 되니, 거룩한 질투심과 의로운 분노가 그의 심령 안에서 불 일듯이 일어나는 것을 느꼈습니다. 밥은 그 타협의 영이 파쇄되어야 함을 느꼈습니다. 이러한 일에 단 한가지 무기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타협의 영을 대적하시며 사용하셨던 그것 즉, 하나님의 말씀뿐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살아있는 말씀은 적의 폐부를 깊이 찔러서 가르는 강력한 검과도 같습니다. 성령말씀에서 이와 같이 선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 지으신 것이 하나라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오직 만물이 우리를 상관하시는 자의 눈앞에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 ( 4:12-13)

이러한 깨달음을 가지고 밥 존스는 하나님의 말씀의 검을 그의 손에서 쥐고, 타협의 영의 깊은 폐부에 깊이 찔러서 꽂았습니다. 이 타협의 영은, 교회들을 상징하는 여전사들을 죽게 만든 자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의 권위는 우리의 삶을 위협하는 영들을 파쇄할 수 있도록 우리들의 손에 쥐어져 있습니다 

주님의 은혜로, 주님께서는 지혜와 권위를 풀어놓으셔서 교회의 대적들을 분별하고 파쇄할 수 있게 하십니다. 우리가 주님의 음성을 경청하고,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기꺼이 행하기를” (DO THE WILL OF THE FATHER) 순종하는 마음으로 기꺼이 원한다면, 우리는 이러한 승리를 항상 취할수 있을 것입니다.

과거로부터 배우기 (Learning from the Past)
집에서 가정을 돌보는 대신에, (교회들과 영적 운동들을 상징하는) 그 여인들은 타협의 영이 자신 스스로들을 미혹하도록 허락함으로써, 그들이 결국 불법적인 관계에 들어가도록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일에는 적절한 시기와 때가 있습니다. 주님께서 주님의 양들을 돌보시면서 사역하시는 때가 있습니다. 우리들은 하나님의 몸 된 교회가 사역의 일을 감당할 수 있도록 준비시키는 일에 집중하는 시간을 지금까지 보내어 왔습니다

밥 존스의 상징들로 가득한 이 영적 환상을 통해서 살펴보면, 여인들은 자신들이 지켜야 할 근무지를 이탈해서 이 세상의 영들과 문란한 관계를 가지면서 방황해왔던 결과로 영적 전쟁에서 결국 패배하고 말았습니다. 때로는 세상적인 눈으로 바라 볼 때는 열매 맺지 못할 것 같은 일들이, 실제적인 영적인 영역에서는 굉장히 큰 보상이 따르는 일들인 경우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눈이 세상의 영역이 아닌 영적인 영원한 세계에 우리의 촛점을 맞추어야 하는 이유인 것입니다.

“볼찌어다 내가 그를 침상에 던질터이요 또 그로 더불어 간음하는 자들도 만일 그의 행위를 회개치 아니하면 큰 환난 가운데 던지고 / 또 내가 사망으로 그의 자녀를 죽이리니 모든 교회가 나는 사람의 뜻과 마음을 살피는 자인줄 알찌라 내가 너희 각 사람의 행위대로 갚아 주리라” (요한계시록 2:22-23)

주님은 교회에 남편 되시는 분이십니다. 신랑 되시는 주님의 마땅하신 그 위치를 침범하는 그 어떠한 사람과의 관계는 영적인 간음이라 볼 수 있습니다. 타협의 영 (spirit of compromise)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그 당시에는 올바른 것으로 보이는 어떤 가짜의 관계를 위해서 약속으로 물려받은 영적 유산을 포기하도록 항상 우리를 미혹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결국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심판 가운데로 내몰았던 발람의 교훈입니다. 발람은 이스라엘 사람들을 저주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대신에 그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나님과의 언약에 있어서 타협함으로써, 결국 발락과 모압 사람들과 뒤섞이도록 미혹하고 설득했습니다.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여자들을 다 살려두었느냐 / 보라 이들이 발람의 꾀를 좇아 이스라엘 자손으로 브올의 사건에 여호와 앞에 범죄케하여 여호와의 회중에 염병이 일어나게 하였느니라 / 그러므로 아이들 중에 남자는 다 죽이고 남자와 동침하여 사내를 안 여자는 다 죽이고 / 남자와 동침하지 아니하여 사내를 알지 못하는 여자들은 다 너희를 위하여 살려 둘것이니라. (민수기 31:15-18)

여기에서 우리의 충고는 바로 이것입니다. 주님과의 언약된 연합이 있기까지는 인내함으로 세상과 구별되며 정결함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타협의 영은 우리들에게 어떤 대가를 치루게 하더라도 이러한 자리를 지키지 못하고 멀어지게 하려는 음모를 가지고 있습니다.

발람의 길 (way of Balaam)은 사람들이 자신이 받은 영적 은사들을 이용하여 돈을 벌려고 하는  숨은 동기를 가진 돈의 하수인들의 탐욕적인 행동을 의미합니다.

“저희가 바른 길을 떠나 미혹하여 브올의 아들 발람의 길을 좇는도다 그는 불의의 삯을 사랑하다가 (베드로후서 2:15)

발람의 교훈은 (teaching of Balaam), “돈을 목적으로 하는 사역 (mercenary ministry)”을 말하며, 세상과 야합하기 위해서 하나님으로부터의 구별되고 고귀한 성품을 버리라고 교회들에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네게 두어가지 책망할 것이 있나니 거기 네게 발람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 발람이 발락을 가르쳐 이스라엘 앞에 올무를 놓아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였고 또 행음하게 하였느니라. (요한계시록 2:14)

아주 많은 경우에, 이렇게 발람의 교훈을 따르는 길은, 겉으로 보기에는 열매들이 더 빨리 나타나는 것처럼 보이며, 사람들의 높은 평가를 받을 뿐만 아니라 영적으로도 반대를 거의 겪는 일이 없어 보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길은 필경 사망이요 열매 맺지 못하는 것으로 끝이 납니다!

발람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저주할 수 없게 되자,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압 사람들과 결혼하게 하여 영적인 간음을 저지르도록 유도하라고 발락에게 가르쳤습니다. 이것은 밥 존스의 영적 환상에 난 온 것처럼, 타협의 영의 동기와 같은 것입니다. 사단이 용맹하고 위협적인 여전사들 (교회들을 상징)을 이길 수 없게 되자 사단의 유일한 희망은 그들을 세상의 영으로 오염시키는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고린도전서 2:12) 

만약 그 여인들이 자신들이 정해진 자리에서 자신들이 처음에 받았던 임무들을 지키고 있었다면, 그들은 열매를 맺는 삶을 살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자신들이 타협의 영에 미혹되는 것을 허락했기 때문에 그들의 생명은 끊어지게 되었고 그들의 자녀들은 고아가 되어 제대로 돌봄을 받지도 못한 채 살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주님의 교회들이 신랑 되시는 주님께 더 신실하여 영광이신 주님께 넘치는 열매들을 올려 드릴 수 있기는 원하십니다.  

타협은 항상 잘못된 관계를 만듭니다. 그리고 신실함의 결과는 회개와 기도 응답과 승리로 이어지지만, 타협의 결과는 사망으로 이어집니다. 밤의 어두움의 시간이 아주 길고 때로는 외롭게 느껴지지만, 타협(compromise), 우리에게 맡겨졌던 소명의 길을 벗어나게 하며, 불법적인 관계를 맺기 시작하여 결국 사망으로 이르게 합니다.

밥 존스는 이러한 결론을 가지고 그 산을 내려오면서, 타협이 가져올 수 있는 그 강력한 파괴력을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

영광스러운 미래 (A Glorious Future)
여기에 나타난 영적 환상에서 가장 안타까운 부분은, 교회를 상징하는 여인들에 의해서 위조된 위대한 미래의 모습입니다. 그들이 싸움에서 승리하기도 하고 어떤 열매를 맺기도 하였지만, 만약 그들이 타협의 영의 미혹을 극복하였을 때는..그 이전에 받았던 승리보다 훨씬 더 큰 보상이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여인들로 묘사된 교회들은 강력하게 기름부음을 받은 믿음의 전사들이었습니다. 그래서 대적은 오직 낮 시간이 아니라 빛이 없는 밤 시간 동안에만 그들을 파괴할 수 있었습니다. 만약 교회들이 자신의 일할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면, 사단은 그들을 파괴할 그 어떤 통로도 찾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눈물은 밤 새 계속되나, 아침의 빛이 비취면 기쁨이 다시 찾아올 것입니다.

모든 사단의 견고한 진은, 사람들의 낙심 (discouragement), 우울함 (depression), 자기 연민(self-pity)을 통하여서, 하나님의 말씀과 주님의 생각과 계획들을 제대로 깨닫지 못하게 모호하게 만들기 위해서 만들어 졌습니다.

우리의 비전이 제대로 성취되지 못하고 있을 때, 마치 우리가 가고자 하는 최종 목적지로 인도하여 줄 것 같은 다른 대안적 방법들이 나타나겠지만, 결국 그 방법들은 하나님의 생각과 뜻이 아닙니다.  
우리는 주님을 향한 헌신의 결단과 주님과 동행하고자 하는 결단을 단, 1 센치도 양보해서는 안되며, 심지어 그것이 가장 고귀해 보이는 그 어떠한 대의명분을 위해서라도 양보해서는 안됩니다.

이 예언적인 환상을 분석해보면, 이 여인들 (교회들)은 자신의 첫사랑과 순결을  잃어 버렸으며, 하나님이 아닌, 사람들의 리더쉽을 따르면서, 그들을 더욱더 생산적이고 열매가 있는 방법으로 인도해 주겠다는 말에 미혹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의 영적 전투는, 우리들의 생각과 의지와 감정이 거하는 혼의 영역에서의 싸움입니다. 우리의 영적 전투에서의 가장 강력한 하늘로부터 임한 무기는 바로, 진리의 영이신 성령님으로부터 바르게 조명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The Word of God Rightfully Appropriated by the Spirit of Truth)

“우리의 싸우는 병기는 육체에 속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 앞에서 견고한 진을 파하는 강력이라 / 모든 이론을 파하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파하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케 하니” (고린도후서 10:4-5)

우리들에게 정당하게 주어진 위대한 약속들의 유산을 물려받는 것은 믿음과 인내를 통해서 입니다. (이 두가지 중 하나만이 아닌, 믿음과 인내, 이 두가지가 모두 필요합니다) 예수님의 몸 된 교회에서 가장 위대한 시기가 바로 우리 앞에 다가오고 있습니다. 우리의 황폐해진 유산들은, 예전에 한번도 나타나지 않았던 강력하고 신선한 하나님의 은혜와 더불어 회복되어가고 있습니다.

얼만큼의 깊이를 원하십니까? - 하이디 베이커

주님이 보내신 천사가 에스겔 선지자에게 물었던 질문은 사실상 "얼마만큼의 깊이를 원하십니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심장 속 어느 깊이까지 파고 들기 원하십니까? 하나님의 임재 속 어느 깊이까지 들어가기 원하십니까?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이 그 임재에 완전히 잠기게 되기를 원하십니다.

잠긴다는 것은 문자 그대로 익사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의 자아가 죽기 원하십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여러분이 죽는 그 순간 생명으로 보답해 주실 것입니다. 그때 여러분은 완전히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나 썩어져 가는 세상의 향기가 될 것입니다.

에스겔 선지자는 처음에 그의 발목까지 차는 깊이까지만 물속으로 걸어 들어갔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그와 비슷한 경향이 있습니다. '발목 깊이' 정도까지만 하나님 안에 거할 때 오히려 편안함을 느낍니다. 그 정도 깊이에서는 여전히 우리가 하고 싶은 일들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뜻대로 움직이고, 우리가 내키는 대로 말하는 수준, 또는 우리 스스로 통제할 수 있는 선까지만 하나님을 원하는 것입니다.

주의 천사는 에스겔에게 오늘날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나는 네가 그보다 더 깊이 나아오길 원한다." 고 말씀하신 것처럼 동일한 메세지를 전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스스로 자아를 버리길 원하십니다. 즉, 우리가 원하는 수준의 깊이가 아니라 항할 수 없는 그분의 사랑의 흐름에 의해 우리가 떠밀려 가기까지 깊은 곳에 이르길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더깊은 곳으로 들어오도록 때로는 부탁하시고 때로는 설득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지존자의 영광스런 임재 속으로 우리를 이끄십니다. 그래서 우리 스스로 더 이상 통제할 수 없는 곳에 이르러 성령님께 굴복당하기 원하십니다.

에스겔은 무릎 깊이의 물까지 걸어 들어갔습니다. 여러분이 무릎 깊이까지 들어가게 되면 그 때부터는 물살의 흐름을 느끼기 시작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 정도 깊이는 너무 안전한 장소입니다. 저는 완전히 잠겨 익사하게 되기까지 나아가고 싶습니다.

여러분을 향한 하나님의 목적은 여러분이 물(그분) 속에서도 살 수 있게 만드는 것입니다. 만약 그정도의 깊이까지 주님안에 잠기게 되면 우리는 더 이상 스스로를 '평범한 사람' 이라고 느끼지 않게 될 것이고, 주님께 완전히 삼킨바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될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의 삶을 통해 주님이 보고 있는 것을 이미 여러분에게 말씀하셨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여러분은 기껏해야 무릎 깊이까지 머물러 있을 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을 더 깊은 물속으로 이끄시도록 허용하지 않는다면 결코 그 누구도 완전한 부르심 가운데 나아갈 수 없습니다.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우리의 자아가 죽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때에야 비로소 여러분의 삶을 향한 하나님의 목적이 성취되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두려워 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부활시킬 것이기 때문입니다. 단지 여러분은 주님께 굴복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은 어느 정도 깊이까지 하나님 안으로 들어갈 것입니까?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임재의 물속으로 걸어 들어가십시오. 그리고 주님의 사랑과 자비와 은헤 속에 완전히 잠길 때까지 멈추지 마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