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2012

드림으로 감사할 수 있습니다(시 50:14, 고후 9:11)

지금 나의 형편이 어렵고 지금 나의 형편이 드릴 것이 없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 앞에 드린다는 것은 얼마나 드렸는가 하는 양의 개념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얼마나 정성으로 나아가느냐의 질을 의미합니다.

감사하는 자는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좋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명기 16장 10절은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칠칠절을 지키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복을 주신대로 네 힘을 헤아려 자원하는 예물을 드리고”라고 말씀합니다. 특별히 하나님 앞에 절기 헌금을 드릴 때 부부가 상의해 드리는 것이 더 기뻐하시는 온전한 예물이 될 것입니다. 부담이 아닌 기쁨과 감사로 하나님 앞에 드릴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간증을 나눔으로 감사할 수 있습니다(사 12:4, 신 4:9).
그리스도인들은 간증할 것이 있어야 하고 또 간증하며 살아야 합니다. 이사야 12장 4절은 “그 날에 너희가 또 말하기를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 이름을 부르며 그 행하심을 만국 중에 선포하며 그의 이름이 높다 하라”고 말씀합니다. 간증하며 살라는 것입니다. 간증은 누가 하는 것입니까? 간증은 변호사가 하는 것이 아닙니다.

간증은 목격자가 하는 것입니다. 보고 경험한 자는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며, 우리는 간증하며 살아야 할 것입니다. 또한 우리의 감사의 간증은 신명기 4장 9절 말씀과 같이 우리 주변과 우리 가족들 자녀들에게까지 이어져야 할 것입니다. 감사의 고백적 삶을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진정한 감사로 나아가는 축제일

[진정한 감사로 나아가는 축제일-영적성숙]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롬12:1)

은혜를 아는 사람들의 눈엔 모든 것이 그저 감사할 따름입니다. 진정한 감사는 상황과 환경과 때를 넘어서는 것입니다. 오늘은 우리가 받은 은혜를 생각하며 어떻게 감사할 수 있는지 네 가지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찬양함으로 감사드릴 수 있습니다(시 100:1∼4, 147:7).
우리는 찬양 가운데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찬양을 한다는 것이 노래를 잘하고 못하고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즐거운 소리를 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찬양을 기뻐하시기에 찬양을 통해 감성을 표현함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기도함으로 감사드릴 수 있습니다(시 105:1, 빌 4:6∼7).
빌립보서 4장 6절은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고 말씀합니다. 기도는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입니다. 어려움과 염려가 많을수록 기도함으로 감사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어떤 사람은 염려하는 것으로 시간을 다 보냅니다.

염려하는 만큼 기도한다면 감사로 이어지기 때문에 염려하는 만큼 기도하는 것이 더 소중할 것입니다. 누구든지 작은 것 하나에도 감사할 줄 알면 더 해주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처럼 하나님도 동일하십니다. 그래서 성령 하나님은 계속해서 감사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감사함으로 구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감사의 표현이 끊이지 않기를 소망합니다.

눈 먼 나실인의 눈물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2:16)



구약시대에는 나실인이라 불리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일시적으로 또는 일생 동안 하나님께 구별되어 살았던 자들입니다. 그들은 머리를 자르지 않음으로 구별되어 보였고, 포도주와 독주를 멀리 함으로 세상 즐거움에서 절제하였으며, 시체를 가까이 하지 않음으로 부정하지 않은 삶을 살아야 하는 나실인 규례를 갖고 살았습니다. 구약시대에 구별된 자로서의 나실인이 있었던 것처럼 이 시대에도 나실인들이 있습니다. 바로 성도라 불리는 그리스도인들입니다. 하나님께서 구별하여 세우신 거룩한 백성들이 의미적으로 보면 나실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삼손 역시 사사이자 나실인이었습니다. 그는 태어날 때부터 죽는 날까지 나실인으로 하나님께서 세우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구별하여 세우신 나실인이었던 삼손이 두 눈이 뽑힌 채, 짐승들이 돌리는 맷돌을 돌리며 비참한 모습으로 등장합니다. 무너진 하나님의 사람으로 등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일까요? 


첫째는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 살았기 때문입니다.
나실인으로 멀리해야 할 포도주에 취했고, 부정한 시체를 만지기도 했습니다. 이방 여인을 아내로 맞이할 때도 하나님의 말씀보다는 자신이 좋은 대로 결정했습니다. 말씀을 떠난 삶이 그 당시에는 좋을지 모르나 결국은 하나님의 사람이었던 그를 무너뜨린 것입니다. 


둘째는 괴로움의 자리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사사기 16장 16절은 삼손이 들릴라의 요청에 마음이 번뇌로 가득했다고 언급합니다. 하나님의 사람이 범죄의 자리에 있으면 마냥 즐거운 것만은 아닙니다. 그 마음에 번뇌와 고민이 생기게 됩니다. 하나님의 영이 그 속에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상황이 되면 죄의 자리에서 떠나야 하는 신호입니다. 하지만 삼손은 그러지 못했고, 그는 결국 죄악으로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셋째는 서서히 무너져 간다는 사실을 기억하지 못했습니다.
삼손은 한번에 와르르 무너지지 않았습니다. 말씀을 떠나 쾌락을 좇아 사는 그의 삶은 조금씩 무너져 가고 있었음을 그는 알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결코 한번에 무너지지 않습니다. 조금씩 서서히 무너져 가게 됩니다. 뉴스에서 들리는 무너진 목회자나 교회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때 어떤 생각이 듭니까? 한번에 무너진 것일까요? 그들은 서서히 무너져 갔던 것이고 삼손 역시 그런 상황인 것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렇게 비참하게 쓰러진 삼손의 인생은 거기에서 끝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찾아가셨습니다. 삼손의 머리털이 자라고 있다는 것은 하나님과의 영적 교제가 회복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삼손은 두 눈이 뽑힌 후에 영적인 눈을 뜨기 시작한 것입니다. 죄의 유혹들을 보고 넘어졌던 그는 눈이 뽑힌 후에 정말 떠야 할 눈을 떴던 것입니다. 또한 삼손은 영적 교제의 회복과 함께 그의 사명이 회복되었습니다. 


하나님을 부정하고 하나님의 백성들을 괴롭히던 블레셋 군대로부터 이스라엘 백성을 보호하는 그의 사명을 그의 죽음으로 감당했던 것입니다. 삼손과 같이 그리스도의 백성 된 성도들에게 사명이 회복되고 하나님의 나라가 증거되기를 축복합니다.(목동제일교회 김성근목사)



왜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의 아들로...

“미리암이 그들에게 화답하여 이르되 너희는 여호와를 찬송하라 그는 높고 영화로우심이요 말과 그 탄 자를 바다에 던지셨음이로다 하였더라” (15:21)



“또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보리라 하시니라”(요 1:51)

인자(人子)라는 단어는 예수님이 자신을 가리키는 말이다. 요한복음 1:51에는 최초로 제자들과의 대화에서 당신을 지칭하는 말로 사용되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주님의 왜 스스로를‘사람의 아들’이란 단어로 사용하셨을까? 사뭇 궁금한 일이다. 예수님은 ‘인자’라는 용어를 마태복음에서 15회, 마가복음에서 15회, 누가복음에서 25회, 요한복음에서 12회 사용하셨다.

먼저 구약의 배경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구약에선 ‘인자’라는 단어가 두 가지로 사용된 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첫째는 단순히 ‘사람’을 뜻하는 것으로, 시적 표현이거나 하나님이 상대적 존재로서 불릴 때 사용되었다. 시편 8:4에는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권고하시나이까’라고 하였다.

에스겔서에는 인자라는 칭호가 90회나 사용되었는데 하나님이 선지자를 부르시는 특정한 대명사로 여겨진다. 이것은 다니엘서에서도 나타난다. ‘그가 나의 선 곳으로 나아왔는데 그 나아올 때에 내가 두려워서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리매 그가 내게 이르되 인자야 깨달아 알라 이 이상은 정한 때 끝에 관한 것이니라’(단8:17)

두 번째로 더 중요한 의미가 있다. 이 칭호는 메시아 예언에 사용되었다는 점이다.
‘주의 우편에 있는 자 곧 주를 위하여 힘있게 하신 인자의 위에 주의 손을 얹으소서’(시80:17)
다니엘서에서 ‘인자’라는 단어는 장차 올 메시야를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 ‘내가 또 밤 이상 중에 보았는데 인자(人子)같은 이가 하늘 구름을 타고 와서...그 나라는 폐하지 아니할 것이니라(단7:13-14)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주님은 인자라는 칭호를 사용함으로써 그의 인성을 증거할 뿐만 아니라 그의 신성, 메시아임을 드러내셨다. 첫 아담이 인류의 시조로 ‘사람’으로 불린 것처럼 둘째 아담(고후 15:45)인 그리스도는 ‘사람의 아들’로 자칭했다. 주님은 당신을 인자라고 했으나, 제자들은 직접 혹은 간접적으로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 불러 메시아요, 신성을 가지신 분으로 이해했다는 점을 잊어선 안된다.

‘인자’라는 용어의 특징은 또한 종말론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인자는 장차 영광 중에 재림하셔서 세상을 심판하실 분이시다(마 13:41,26:31,막13:26, 눅17:22). 이것을 보면 인자의 초자연적, 신성의 신비한 심판이 묘사되어 있다. 그리스도께서 당신을 ‘인자’라고 부르신 것은 역시 신비에 속한다.(큐티와일대일)

오늘의 Daily Bread는 (http://blog.naver.com/paul_jhkim)에서 다시 보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