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2/2010

인간의 타락과 형벌(4) - 인간의 의는 더러운 옷과 같음

대저 우리는 부정(不淨) 같아서 우리의 () 더러운 같으며 우리는 쇠패함이 잎사귀 같으므로 우리의 죄악이 바람 같이 우리를 몰아 가나이다”(이사야 64:6).

우리는 부정한 , 모든 사람이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 같으며”. 사람이 죄가 더럽다는 것은 다 알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인간의 의()도 더럽다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인간의 ()조차도 하나님 보시기엔 죄와 마찬가지로 더럽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행하는 선, 인간이 행하는 의로운 행동도 하나님 보실 때는 옷은 옷인데 더러운 옷입니다. 그 더러운 옷으로는 자기의 부끄러움을 가릴 수 없습니다.

사람 속에는 타락된 마음, 양심의 부끄러움, 자기가 지은 죄에 대한 죄책감 등이 있습니다. 그래서 선한 일을 하면 죄에 대한 양심의 부끄러움과 가책감이 없어질 줄 알지만, 그것은 더러운 사람이 더러운 걸레 조각을 걸치고 자기 수치를 가려보려고 하는 것과 같이 쓸 데 없는 짓입니다.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과 같아서 결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가리지 못합니다.

“우리는 다 쇠패함이 입사귀 같으므로.” 창세기 3장에 보면,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하나님 말씀을 거역하고 선악과(善惡果)를 따 먹고 난 후, 벌거벗은 수치를 발견하고 무화과 잎을 엮어 치마를 만들어 입은 내용이 나옵니다.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 자기들의 몸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를 하였더라”(3:7).

아담, 하와 두 사람 밖에 없었지만 옷을 만들어 입었습니다. 인간이 최초로 만든 옷은 동물들에게 자신들의 벌거벗은 모습이 부끄러워서도 또 추워서도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죄에 대한 수치를 가려보려고 옷을 만든 것입니다.

날이 서늘할 때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부르셨고 그들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네가 어디 있느냐하고 물으시자, 아담이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라고 대답했습니다(창세기 3:8-10).

아담과 하와는 무화과나무 잎으로 만든 옷을 입고 있었는데 벗었다고 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낮에 선악과를 따 먹고 무화과나무 잎사귀로 치마를 만들어 입었습니다. 그런데 낮 햇볕에 금방 잎이 마른데다가, 왔다 갔다 하면서 앉았다 일어섰다 몇 번 하니까 나뭇잎 옷이 다 부서져 버렸습니다. 저녁 때 하나님이 부르실 때쯤 해서는 줄기만 앙상하게 남았었을 것입니다. 입기는 입었지만 실은 벗은 것입니다

인간이 행하는 모든 선행과 열심은 마치 무화과 잎사귀로 치마를 만들어 자기 수치를 가리려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무화과가 옷이 되지 못했다는 것은 인간이 행하는 윤리 도덕과 종교생활, 그리고 인간의 모든 의로운 행동들이 자기의 죄에 대한 부끄러움을 덮지 못함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우리는 쇠패함이 잎사귀 같으므로 우리의 죄악이 바람 같이 우리를 몰아가나이다.” 우리의 선행과 열심으로도 우리의 죄악을 가릴 수 없으므로 우리의 죄악이 바람 같이 우리를 지옥까지 몰아갑니다. 이 운명을 아무도 피할 수 없습니다.

인간의 전적 타락
그러면 어떠하뇨 우리는 나으뇨 결코 아니라 유태인이나 헬라인이나 아래 있다고 우리가 이미 선언하였느니라”(로마서 3:9).

유대인은 하나님의 택한 백성 이스라엘 민족입니다. 헬라인은 이방인을 대표하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선민 이스라엘이나 이방인이나 다 죄 아래 있다고 성경은 이미 선언하고 있습니다. 다 똑같이 죄인이며, 죄 아래 있다는 공포(公布)입니다.

기록한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치우쳐 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로마서 3:10∼12).

하나님께서 보실 세상에 의인은 하나도 없습니다. 모두 죄인입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로마서 3:23)라는 말씀처럼, 죄인으로 났으며 실제 죄를 지었습니다. 의인(義人)이란 선한 일을 행할 뿐만 아니라 죄도 짓지 않는 사람을 말합니다. 그런데 사람은 선을 행하기도 하고 죄도 지으며, 사랑도 하고 미워도 하며, 남을 돕기도 하는가 하면 해치기도 합니다.

선도 행하고 악도 동시에 행하는 사람을 의인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선과 악을 섞으면 악이 되듯이, 선악을 함께 행하는 인간은 죄인입니다. 그러므로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전도서 기자는  선을 행하고 죄를 범치 아니하는 의인은 세상에 아주 없느니라”( 7:20)고 공언(公言)하였습니다.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앞에서 말한 것과 같이, 하나님이 보실 완전한 , 하나님의 표준에 도달할 있을 만큼 선한 일을 있는 사람은 없다는 뜻입니다. 인간의 선은 위선입니다. 선하지 않는 마음으로 선한 행위를 꾸미니, 그 겉치장이 곧 위선이요 가식(假飾)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제일 미워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세리와 창녀를 향해서 “화 있을진저 이 창녀들아, 화 있을진저 이 세리들아. 지옥 갈 이 죄인들아”라고 말씀하지는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종교가들을 향해서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여”(마태 23:25)라고 책망하셨습니다.

외식(外飾)이란 겉으로 선한 체 꾸미는 것입니다. 겉으로는 경건한 척 모양을 내고 의로운 체 하지만, 속에는 교만과 욕심, 위선과 음란 그리고 거짓 등이 가득 차 있는 것을 말합니다. 겉으로는 하나님을 섬기는 것처럼, 의롭고 경건한 같지만, 마음속에 각종 더러운 것이 가득하다면 그것이 외식입니다. “회칠한 무덤”처럼, 겉에는 하얗게 칠해 놓았지만 속에는 송장 썩은 것이 가득하여 악취 나고 더러운 것이 외식하는 자의 마음입니다.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하나 속에는 온갖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 잔의 겉이 아무리 깨끗해도 그 안에 든 것이 더러운 것들이라면 먹을 사람이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위선은 하나님이 받으실 수 없습니다.  

외식하는 자들아 먼저 안을 깨끗이 하라 그리하면 겉도 깨끗하리라.” 영혼이 먼저 깨끗해져야만 마음과 생활이 깨끗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더러운 사람은 “더럽다”는 것을 인정하고 사실 그대로 하나님께 자신을 내놓아야 합니다. 죄가 있다면 죄 있는 그대로 하나님 앞에 나와야 합니다. 주님이 그 죄를 없이 하시고  그 타락된 마음, 악한 마음을 고치시며 거룩하게 만들어 주십니다.

주님이 세상에 오셨을 때 죽은 자도 살리시고 문둥이도 깨끗케 하셨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죽은 영혼도 살리시고, 우리의 타락된 마음도 깨끗하게 하고 변화시키실 능력이 있으십니다. 거듭나기 전에 세상에서 노름꾼, 사기꾼, 깡패, 바람둥이 그리고 온갖 죄에 빠져 살던 사람들이 복음을 깨닫고 나서 완전히 새 사람으로 바뀌었습니다.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라는 말씀처럼, 주께서 구원받은 자를 새로운 생애로 인도하시는 것을 필자는 보아왔습니다. 주님은  구속받은 자들을 거룩한 하나님의 자녀로, 거룩한 백성으로, 새 사람으로 만들어 천국으로 이끄십니다. 너희 중에 이와 같은 자들이 있더니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었느니라”(고린도전서 6:11).

하나님은 죄 문제를 얼마든지 해결하실 수 있으므로 사람은 죄악을 감추지 말고 솔직히 인정해야 합니다. 성경이 우리의 죄를 사실대로 폭로시키는 것은 우리를 고쳐주기 위함입니다. 주님이 우리의 위선을 벗기시는 것은 하나님의 의로 입혀주시기 위함이며, 우리의 거짓을 허시는 것은 참된 것으로 세워주시기 위함이며, 저주받은 것들을 뽑으시는 것은 영원한 축복을 심어주시기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각자는 하나님 앞에 비참한 멸망 받을 죄인임을 인정해야 합니다.  

“저희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혀로는 속임을 베풀며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발은 흘리는 빠른지라 파멸과 고생이 길에 있어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 저희 눈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로마서 3:1317).

이스라엘 사람들은 바위에 굴을 파서 무덤을 만들고, 그 안에다가 조상 때부터의 시신을 안치해 두었습니다. 동굴 입구는 바위로 문처럼 닫아 놓습니다. 만일 문을 연다면 그 속에서 송장 썩는 냄새가 나올 것입니다.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라는 말은, 입만 벌리면 음담패설, 험담, 더러운 이야기가 무덤 문에서 악취가 나오듯 나온다는 이야기입니다.

사람들은 덕() 되는 이야기나 좋은 이야기, 아름다운 말보다는 아주 몹쓸 이야기나 수치스러운 이야기 또는 남을 헐뜯고 비방하는 말을 더 좋아하고 더 재미있어 합니다. 입을 열면 목구멍은 열린 무덤처럼 악취를 내뿜습니다. “그 혀로는 속임을 베풀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독사의 독만 무서운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독이 더 무섭습니다.

전에 텔레비젼에서 어떤 유명인사가 했던 이야기에 따르면, 사람이 격분(激憤)해 독이 올라 악을 쓰고 욕을 할 때면 사람의 입에 독이 가득 찬다는 것입니다. 그 사람 입에서 거품이 나올 때, 침을 채취해 주사(注射)하면 황소도 능히 죽일 수 있다고 했습니다.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독이 무섭습니다.

예전에 들은 어느 시골에서 있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거북이 등처럼 논바닥이 갈라질 정도로 가뭄이 심했습니다. 그런 때는 도랑에 흐르는 물조차도 조금이라도 서로 자기 논에 대려고 했던 것이 보통이었습니다. 가뭄에 물싸움하는 데는 형제간도, 이웃도 안면 몰수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한 사람이 모처럼 자기 논에 물을 대 놓았는데, 밤사이에 저쪽 논 주인이 이쪽은 막아버리고 저쪽으로 물길을 돌려놓았던 것입니다.

<출처:생명의말씀선교회>

인간의 타락과 형벌(3) - 가증하고 부패한 인생

 “사람이 무엇이관대 깨끗하겠느냐 여인에게서 자가 무엇이관대 의롭겠느냐 하나님은 거룩한 자들를 믿지 아니 하시나니 하늘이라도 그의 보시기에 부정하거든 하물며 악을 짓기를 마심 같이 하는 가증하고 부패한 사람이겠느냐”(욥기 15:14∼16).

파란 하늘과 죄악으로 가득 찬 사람의 마음을 비교해 봅시다. 하늘도 하나님이 보시기에 깨끗하지 못한데, 하물며 악을 짓기를 물 마심 같이 하는 가증하고 부패한 사람이 어찌 하나님 앞에 깨끗하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세상의 모든 종교는 사람에게 선행을 가르칩니다. 착한 일 많이 하면 곧 선을 많이 쌓으면(적선:積善) 복 받고 극락에도 간다고 가르칩니다. 그런데 성경은 사람에게 선행을 하라고 가르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럼 악행을 가르친다는 말입니까? 그런 것은 물론 아닙니다.

그렇다면 성경은 무엇을 말합니까? 선행을 하지 말라는 이야기가 아니라 인간에게는 참된 의미에서 선을 행할 능력이 없다는 것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선을 행하기 이전에 인간은 이미 진정한 의미의 선을 행할 수 없는 존재라는 사실, 태어나면서부터 죄인이어서 마음은 완전히 타락되었으므로 그 더러운 마음으로부터 선은 나올 수 없다는 것을 가르칩니다.

나무로 말하자면 나쁜 나무입니다. 나쁜 나무 보고 좋은 열매 맺으라고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성경은 인간에게 먼저 선한 일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그 전에 인간은 하나님의 기준에서 볼 때 선을 행할 수 없다는 것을 선언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반박하며 “아니 사람이 죄만 짓나, 선한 일도 하지 않는가”라고 말합니다.  인간이 행하는 선이 사람이 볼 때는 선한 것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사람 볼 때 선일 뿐 하나님 보실 때는 선이 아니라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한문에 사람 인() 자 옆에 할 위()자를 쓰면 거짓 위(=+) 자입니다. 사람이 하는 선은 위선(僞善), 즉 거짓 선이라는 것입니다. 선은 선인데 죄가 발린 선입니다. 그것으로는 하나님 앞에 설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라는 말입니까?

그러므로 먼저 구원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죄 가운데서 먼저 구원을 받고 하나님의 생명에 접붙임 받아야 합니다. 나쁜 나무에다 거름을 많이 주고 물도 많이 주면서 좋은 열매를 맺으라고 공을 들일 것이 아니라, 좋은 나무에 접을 붙이라는 말입니다. 좋은 나무에 접붙이면 좋은 열매를 맺습니다. 구원받을 때, 거듭날 때 우리가 하나님 앞에 죄 용서함을 받는 동시에 하나님의 생명에 접 붙임을 받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생명과 능력으로 인한 변화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것이 되었도다”(고린도후서 5:17).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은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고,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계시다는 말입니다. 누구든 그리스도와 연합하면, 즉 그리스도의 생명이 그에게 오시면 그리스도께서 사람을 새로운 사람으로 만드십니다.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새 사람이 되어야 새로운 삶을 살아 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생명을 받아야 하나님의 말씀을 참으로 순종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되기도 전에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하려고 하는 사람, 하나님의 생명을 받기도 전에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보려고 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결국 그는 위선자가 되고 맙니다.  

하나님의 생명을 받아야 하나님의 말씀을 지킬 수 있습니다. 속에 죄 짓고 싶은 마음이 막 올라오는데 꽉 억누르며 ‘죄 짓지 말아야지. 착한 일 해야지’라고 결심하고 자기 의지로 노력한다고 해서 그리스도인의 생활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생명이 들어오면 하나님께서 사람을 사람으로 만드십니다. 죄는 점점 멀어지고 하나님 말씀을 순종하고자 하는 마음이 저절로 생깁니다. 하나님 말씀을 순종할 있는 힘이 생깁니다.

좋은 나무가 좋은 열매 맺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좋은 나무가 좋은 열매 맺으려고 막 흔들거나 무슨 노력합니까? 그냥 절로 좋은 열매 맺습니다. 하나님의 생명을 받으면 하나님 말씀을 순종하고자 하는 간절한 마음, 하나님 말씀을 순종 할 수 있는 힘이 저절로 나옵니다. 이해하기 어려운 독자도 있으시겠지만, 그것은 사실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구원받자마자 금방 천사처럼 거룩하게 된다는 것은 아니고, 구원받고 하나님의 생명이 시작되면 점점 거룩해집니다. 좋은 나무라도 자라야만 좋은 열매를 맺힙니다.

구원받고 나서 신앙이 자란다고 하는 것은 그 사람 마음이 그때부터 변하기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생명이 들어오면 사람의 마음과 생각을 변화시킵니다. 인격을 변화시킵니다. 그리고 그것이 행동으로 나타납니다. 그것이 신앙생활입니다.

교회에 수십 년 다니고, 교회당에 가서 하나님 말씀대로 살려고 결심하고 기도도 하지만, 밖에 나가면 죄 짓고 거짓말하고, 욕심 부리고 나쁜 짓 합니다. 그리고 또 교회당에 가서 ‘잘못 했다’고 회개하고, 하나님 말씀 듣고, 말씀대로 살려고 결심하고, 죄 짓지 않으려고 애씁니다. 그리고 다시 밖에 나가면 또 죄 짓고 기도하고, 밖에서 나쁜 짓하고 교회 와서 찬송 부르고…. 그것을 계속 되풀이하면서 종교생활을 합니다. 종교생활을 오래 하면 양심까지 무뎌집니다. 그리고 삶의 진정한 변화는 없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기도를 덜 해서 그렇습니까, 의지가 약해서 그렇습니까, 돈을 덜 바쳐서 그렇습니까? 교회당에 더 오래 다니지 않아서 그렇겠습니까? 교회당에 평생 다녀도 안 됩니다. 왜 안 되느냐 하면 마음과 생활을 변화시켜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그 속에 없어서 그렇습니다. 새 하늘과 새 땅(계시록 21:1)에는 예수님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된 사람들만이 들어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지옥갈 수밖에 없는 죄인을 구원해서 하나님의 새 생명과 새로운 능력을 주십니다. 그리그 그 생명을 가지고 하나님 말씀을 지키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 말씀을 지키고 살아가는 신앙생활은 우리의 의지나 노력, 우리의 결심이나 훈련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거듭나 새로운 생명을 받음으로만 가능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의는 하나님이 받으실 수 없음
네가 의로운들 하나님께 무엇을 드리겠으며 그가 네 손에서 무엇을 받으시겠느냐 네 악은 너와 같은 사람이나 해할 따름이요 네 의는 인생이나 유익하게 할 뿐이니라”(욥기 35:7,8).

사람이 의로운들 하나님께 무엇을 드릴 수 있으며, 하나님이 사람 손에서 무엇을 받으시겠습니까? 죄 가운데 태어나 만물보다 심히 부패하고 타락된 마음을 가지고 죄를 물 먹듯 먹고 마시면서 살아가는 인간이 자기 기준에서 착한 일 했다고 해서 그것을 하나님이 받으시겠습니까?

어린아이가 더러운 진흙을 만지작거리던 손으로 호빵을 움켜쥐고 엄마에게 가져와 “엄마, 호빵 드세요” 하고 건네주면, 엄마가 좋아하며 받아먹겠습니까? “고맙기는 한데 네 손이 더러워 못 먹겠다. 개나 갖다 줘라”라고 할 것입니다. 개야 넙죽 받아먹고 더 달라고 졸졸 따라 다니겠지만, 엄마는 못 먹습니다. “네 의는 너 같은 사람이나 유익하게 할 따름이라.” 너 같은 죄인들이 볼 때나 좋게 보이는 것이지 하나님이 보실 때조차도 좋겠느냐는 말씀입니다.

무조건 착하고 의로운 일을 하려고 노력하기만 하면 하나님께서 그저 좋아하실 줄로 여기면 크게 잘못된 생각입니다. 타락된 죄인이 하나님 앞에 무엇을 한들 하나님께서 받으시겠습니까. 사람들은 교회 가면 헌금 낼 걱정부터 합니다. 성경에 의하면 헌금이나 십일조를 바치는 것 등은 거듭난 후에 구원받은 사람이 하는 것입니다. 오늘 밤에라도 죽으면 지옥 갈 사람이 하나님께 무엇을 바칠 자격이 있으며, 하나님께서 지옥 갈 죄인에게서 무엇을 받으시겠습니까?

하나님의 선물을 돈 주고 살줄로 생각한 시몬에게 베드로는 네가 하나님의 선물을 돈주고 살 줄로 생각하였으니 네 은과 네가 함께 망할지어다. 하나님 앞에서 네 마음이 바르지 못하니 이 도에는 네가 관계도 없고 분깃될 것도 없느니라고 책망하였습니다(사도행전 8:20,21). 자기의 재물을 의지하고 풍부함으로 자긍할지라도 사람의 생명의 구속은 너무 귀하여 그 재물로 한 사람의 영혼도 구속할 수 없습니다(시편 49:6-8).

누가 먼저 내게 주고 나로 갚게 하였느냐 온 천하에 있는 것이 다 내 것이니라”( 41:11)라는 말씀대로 하나님께 받은 것이 없이 하나님께 먼저 드릴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구원의 선물을 받은 사람은 감사함이 동기가 되어 모든 것을 행하고 드리며 그것을 하나님이 받으시는 것입니다.  

구원받고 나면 영원히 지옥 갈 죄인이 구원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천국 갈 소망이 생깁니다. 하나님께 받은 그 크신 은혜를 생각하면 하나님을 위해 백 번 죽어도 그 은혜를 갚을 수 없습니다. 헌금을 하고 주님을 위해 살아가는 것은 구원받은 후 너무 기쁘고 감사해서 자원 (自願)하는 마음으로 하는 것입니다. 주님을 위해 살기도 하고 죽기도 하는데 복음을 위해 물질을 드리는 것이 무엇이 문제이겠습니까?

서울대학교에 등록금을 내려면 서울대학교 학생이라는 자격이 있어야 합니다. 믿는다는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생명으로 거듭난 사람이라야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모든 것을 행할 수 있는 자격이 있는 것입니다.

기도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거듭나지도 않은 채 밤새도록 기도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 기도는 교회당 천장 이상 더 올라가지 못 할 것입니다. 거듭나지 않은 사람이 해야 할 기도는 하나뿐입니다. “저를 구원받게 해 주십시오. 제가 진리를 깨달을 수 있게 해 주십시오” 라는 외의 다른 기도는 별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물에 빠져 죽게 된 사람이 “나 취직 좀 시켜주시오. 나 점심 값 좀 주시오. 나 감기약 좀 주시오”라고 합니까? 그는 “사람 살려, 사람 살려”라고 부르짖어 우선 물에서 건짐부터 받아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지옥 갈 죄인은 먼저 지옥 갈 운명에서 건져달라고 부르짖어야 하고 그 운명에서 건짐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요한 3 1:2)라는 말씀대로 영혼의 문제가 우선이고 범사에 잘되는 것이나 육신의 강건은 그 다음의 문제인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기 영혼의 운명을 뒤로 한 채 너무 맹목적인 종교생활을 합니다.

그 짠 것으로는 옷을 이룰 수 없을 것이요 그 행위로는 자기를 가리울 수 없을 것이며 그 행위는 죄악의 행위라 그 손에는 강포한 행습이 있으며”(이사야 59:6).

그 짠 것으로는 옷을 이룰 수 없습니다. “그 짠 것이란, 앞에 보면 거미줄로 옷을 짠다는 말이 있는데(이사야 59:5), 인간이 자기 죄를 가리기 위해 하는 행위를 가리킵니다. 거미줄을 짜서 옷을 만들 수 없듯이, 인간의 선행과 열심으로 자기 양심의 부끄러움을 가리울 수 없다는 것입니다.

대저 우리의 허물이 주의 앞에 심히 많으며 우리의 죄가 우리를 쳐서 증거하오니 이는 우리의 허물이 우리와 함께 있음이라 우리의 죄악을 우리가 아나이다”(이사야 59:12).

우리의 허물이 주의 앞에 심히 많으며.” 우리가 평생 짓는 죄가 얼마나 많겠습니까? 그 죄를 모르거나 잊어버리고 사니까 그렇지, 머리털 보다 더 많은 그 죄(시편 40:12)를 다 기억한다면 괴로워서 견딜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 죄가 우리를 쳐서 증거하오니.”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죄가 꽉 막혀 있습니다.

“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치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내었고 너희 죄가 그 얼굴을 가리워서 너희를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이사야 59:1,2).

하나님이 손이 짧아서 구원하지 못하시는 것도 아니고 귀가 둔해서 듣지 못하시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죄가 꽉 막혀 있어서 이 죄를 해결하기 전에는 우리는 하나님과 원수이며, 다른 무엇을 구해도 죄로 인해 듣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출처:생명의말씀선교회>

인간의 타락과 형벌(2) - 죄인이라는 의미

그렇다면 죄인(罪人)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누가 자기에게죄인인지 아십니까?”라고 묻는다면 기분이 좋을 없습니다. “내가 무슨 죄를 지었냐? 내가 살인을 했나, 사기를 쳤나, 간음을 했나? 나는 비교적 착하게 살았다고 생각하는데….” 죄인이라는 말은 죄를 얼마나 많이 지었느냐 하는 것을 지적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시편 51:5).
  
사람은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죄인입니다. 어머니가 지어 나를 낳았다는 그런 말씀이 아닙니다. 성경은 말씀하기를 사람은 누구나 세상에 태어나면서부터 죄인이라고 하십니다. 시편 51 5절에 “중에”라는 말이 나옵니다. 출생할 때에도 “죄악 중에” 탄생하며, 형성되는 순간에도 “죄 중에” 잉태되는 것입니다. 잉태되는 순간부터 어머니 태에서 자라 세상에 출생할 때까지 전부 죄와 관련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로마서 5:12).

“한 범죄로 많은 사람(모든 사람)(all men :KJV, NIV / all mankind : TEV) 정죄(定罪) 이른 같이”(로마서 5:18).

“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罪人) 같이”(로마서 5:19).

“한 사람”이란 아담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시조 아담을 인류의 대표로 세우셨습니다. 아담 속에 인류의 씨가 들어 있다고 있습니다. 아담이란 말도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아담 사람의 불순종이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영적 생명의 단절이 오고, 죄인됨의 결과를 초래했습니다. 생사(生死) 가름하는 하나님의 법이 아담에 의해 깨지고, 모든 인간은 아담 안에서 하나님 앞에 죄인의 신분으로 전락해 버렸습니다.

아담은 하나님 말씀 대신 사탄의 거짓말을 받아들임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배반해 버린 것입니다. 사람의 불순종 때문에 아담 안에서 태어난 모든 사람은 자기의 의지나 범죄함 이전에 이미 죄인이 되어버렸습니다. 죄를 지어 죄인된 사람은 아담이고, 아담에게서 태어난 사람은 아담의 자손이므로 죄인입니다. 아담 사람의 운명이 전체 인류의 운명을 결정지은 것입니다.

 육신에 있어 아버지가 김씨이면 자손이 전부 김씨이고 조상이 박씨이면 자손이 모두 박씨인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 조상은 영적으로 죄씨(罪氏)입니다. 그래서 아담의 후손은 시조 아담 때문에 죄씨, 죄인인 것입니다. 그리고 죄를 지을 있는 기질이 우리 핏속에 흐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죄인이라는 말은 인간의 영적 신분이며 ‘너는 타락한 아담의 후손이다, 너는 나무로 치면 나쁜 나무(=못된 나무)이다’라는 뜻입니다.

인간은 나쁜 나무로 전락했기 때문에 나쁜 열매를 맺는 것이며 타락한 아담의 후손 죄인이기 때문에 죄를 짓는 것입니다.

본질상 진노의 자녀인 인생
악인은 모태에서부터 멀어졌음이여 나면서부터 곁길로 나아가 거짓을 말하는도다”(시편 58:3).

악인이나 죄인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악인은 모태에서부터 하나님을 멀리 떠났습니다. 똑바로 가는 것보다는 곁길로 가는 것을 좋아합니다. 선한 것보다는 악한 것을 좋아합니다. 깨끗한 보다는 더러운 것을 좋아합니다. 좋은 보다는 나쁜 말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나면서부터 정도를 벗어나 곁길로 나아갑니다. 게가 옆으로 기어 다니는 자기 새끼가 못마땅해서 “너, 옆으로 가느냐. 똑바로 가야지”라고 책망할지라도 자신도 옆으로 가는 것처럼, 사람은 태생이 곁길로 가게 되어 있습니다.

참으로 사람은 선한 것은 좋은 알면서 하기 싫어하고, 악한 것은 나쁜 알면서 하게 됩니다. 그러느냐 하면, 사람 속에 죄를 지을 있는 기질이 있기 때문입니다.

아이가 자라면서 죄도 같이 자랍니다. 아기가 이빨이 나기 시작하면 이빨로 무엇부터 합니까? 젖이 빨리 나오지 않으면 엄마 젖꼭지부터 물어 버립니다. 어거스틴은 엄마 젖꼭지 깨문 죄까지 회개했다고 합니다. 자기의 것을 찾아먹기 시작하면서부터 ‘이것은 내가 먹고 저것도 내가 먹고’, ‘네 것은 것이고 것은 원래 것이고’, 욕심을 가르쳐 주지 않았는데도 모두 움켜쥐려고 합니다.

이모인지 고모인지 삼촌인지 알아보면서부터 눈치를 봅니다. 누구는 나를 좋아하고 누구는 나보다 다른 사람을 좋아하는지, 시기 질투하기 시작합니다. 시기 질투하는 것을 배운 일이 없습니다. 미워하는 것을 배운 일이 없어도 자연스럽게 나옵니다.  

배우면서 벌써 거짓말을 시작합니다. 어린애를 키워보면 있습니다. 아무리 착하고 깨끗하게 키우려 해도 소용없습니다. 거짓말을 어떻게 잘하는지……. 짓고 속이고 거짓말하는 기술은 아무도 가르쳐 주지 않았습니다. 속에서 나온 것입니다.

교육을 받으면 죄가 고상하게 발달됩니다. 고등교육을 받으면 지능적으로 죄를 짓습니다. 외국에 왔다 갔다 하면서 현대교육을 받으면 짓는 것도 고급스러워집니다. 교양 있는 부모 밑에서 윤리와 도덕과 종교교육을 받으며 성장한 사람들은 스스로를 통제하는 것이 낫습니다. 자기 체면도 세울 알고 윤리와 종교, 율법 이런 것으로 자기를 컨트롤합니다.

죄를 지으면 자기에게 체면과 인격의 손상이 온다는 것을 알고, 또한 형벌이 있다는 것을 배워서 압니다. 그래서 배운 사람보다 자제를 합니다. 가지는 억제하고 가지는 나오기도 하지만, 그래도 가능한 속에서 나오려는 것을 눌러 제어합니다.

그런가 하면 어떤 사람은 불우한 환경에서 태어나 제대로 교육을 받지 못하고 자란 터라 속에 있는 죄가 있는 그대로 노출됩니다. 그것을 억제할 있는 힘이 없기 때문에 무식한 사람은 무지막지하게 죄를 짓습니다.

그렇다면 무지막지하게 죄를 짓는 무식한 사람과 교육을 받은 사람이 다른 점이 무엇입니까? 속에 있는 것은 똑같은데 단지 밖으로 나타난 모습이 다를 뿐입니다. 예를 들어, 창문에다 빨강, 노랑, 파랑 색칠을 놓으면 밖에서 때는 색색으로 보일 것입니다. 그렇지만 안에서의 빛은 하나입니다. 밖에서 사람들의 죄는 여러 가지 모습으로 나타나지만, 속의 죄는 하나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무엇을 보십니까? 밖으로 나타난 행동을 보시기 전에 마음을 먼저 보십니다. 속에 죄를 억제하고 있는 사람이든 죄가 밖으로 표출되는 사람이든, 나타나는 보다는 먼저 중심을 보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므로 사람을 깨끗하게 보지 않으십니다.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사무엘상 16:7).

“사람의 행위가 자기 보기에는 모두 깨끗하여도 여호와는 심령을 감찰하시느니라”(16:2).

잠언 26 24-25절에감정 있는 자는 입술로는 꾸미고 속에는 궤휼을 품나니 그 말이 좋을지라도 믿지 말 것은 그 마음에 일곱 가지 가증한 것이 있음이라 했습니다. 말씀대로 사람은 입으로 아무리 그럴듯하게 말하여도 마음에는 7가지 가증한 것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7가지 가증한 것을 7가지 짐승 공작새, 염소, 돼지, , 표범, 개구리, 거북이로 표현하였습니다.

공작새 같은 마음은 교만한 마음, 으시대는 마음, 뽐내는 마음, 자랑하는 마음을 가리킵니다. 염소 같은 마음은 고집과 음란 가리킵니다. 돼지 같은 마음은 욕심과 더러운 것을 사모하는 마음 가리킵니다. 같은 마음은 간사한 마음 간교한 마음 가리키며, 뱀은 혓바닥이 둘로 갈라져 있는 것처럼 한입으로 마디 하는 거짓말을 가리킵니다. 표범은 사나운 기질, 살인하는 기질 뜻합니다. 개구리 같은 마음은 개구리가 시끄러운 것처럼 수군수군하는 마음, 비방하는 마음, 능욕하는 마음을 나타냅니다. 거북이 같은 마음은 기회주의자 가리킵니다.

사람들은 이런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더러운 마음을 억제하는 사람을 가리켜 인격자라고 하지만 속마음은 똑같습니다. 창녀나 수녀도 별반 차이가 없습니다. 단지 차이가 있다면 창녀는 마음속에 있는 죄가 바깥으로 나타났다는 것과 수녀는 종교의 외피로 가리고 있다는 것뿐입니다. 하나님은 중심을 보시므로 앞에서 사람도 깨끗한 자로 나타날 없습니다

부패한 마음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 여호와는 심장을 살피며 폐부를 시험하고 각각 행위와 행실대로 보응하나니”(예레미야 17:9).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이 사람의 마음입니다. 그러나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이라는 말씀대로, 사람은 자신의 마음이 얼마나 더러운지 자신도 모릅니다. 이런 말씀을 드리면 “사람이 더럽기는 하겠지만 나는 그렇게 더럽지는 않다. 사기 치고 도둑질하고 간음죄 짓고 살인죄 짓고 하는 사람이야 ‘나쁜 놈’일 테지만, 나는 그런 짓을 하지 않으니 그렇게 나쁜 사람은 아니다”라고 분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은 그렇게 나쁘지 않다고 여기던 사람도 때로는 상황과 여건이 주어지면 다른 어떤 사람들보다 죄를 지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살인하는 사람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살인할 있는 기질은 모두에게 있습니다. 복수심에서든 분노 때문이든, 생존이나 정당방위 기타 어떤 명분이든 사람은 상황에 따라 무슨짓이든 있는 기질이 있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에게 수백 미터 떨어진 곳에서도 명중할 있는 레이저 광선총이 있고 소리도 증거도 없다면, 나아가 살인해도 형법으로 처벌받지 않는다면, 세상에 살아남을 사람이 그렇게 많지 않을 것입니다.      

수년 부산에서 여인 토막살인 사건이 있었습니다. 사건의 범인이 당시 대구교도소에 수감되어 있었고 교인이 교통사고를 내서 같은 교도소에 들어가게 되었는데, 하필 토막 살인범과 같은 감방을 쓰게 되었습니다. 대개는 토막 살인범이 아주 흉측하고 소위 범죄형으로 소름끼치게 생겼으리라 생각할 터이지만, 사람의 얼굴은 아주 유순하게 생겼더라는 것입니다. 저런 사람이 끔찍한 일을 했으리라고는 도저히 상상할 없더라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살인할 있고, 간음죄 지을 있고, 도둑질 있고 무슨 죄든지 지을 기질이 있으며 상황이 주어지면 자기도 모르게 그러한 일을 행하게 됩니다.

예전에 빽빽이 들어찬 완행열차를 타고 가는 중에, 열차 안에 장사꾼들이 통로를 왔다 갔다 하며 물건을 팔고 있었습니다. 필자 가까이에 한복을 얌전하게 차려입고 하얀 버선까지 신고 아래만 내려다보고 앉아 있는, 아주 점잖게 보이는 부인 앉아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나가던 장사꾼이 실수로 부인의 버선발을 밟았습니다. 하얀 버선 위에 자국이 커다랗게 찍혀버렸습니다. 그때 부인이 “이게 눈깔이 빠졌나…?”라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얌전하던 부인 입에서 지독한 욕설이 터져 나오는 것에 깜짝 놀랐습니다. 건드리니까 속에 있는 것이 쏟아져 나온 것입니다.

여호와는 심장을 살피며 폐부를 시험하고.” 하나님께서는 심장을 살피고 폐부를 시험하시며, 사람의 심령을 감찰하시니(잠언 16:2) 우리 중심을 꿰뚫어 보시는 하나님 앞에서 누가 감히 깨끗하다고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의 속마음에 악이 가득한 것을 아십니다.

모든 사람의 결국이 일반인 그것은 아래서 모든 중에 악한 것이니 인생의 마음에 악이 가득하여 평생에 미친 마음을 품다가 후에는 죽은 자에게로 돌아가는 것이라”(9:3).

하나님은 아시므로 이시므로각각 행위와 행실대로 보응하나니라는 말씀대로 행한 대로 보응하십니다

누가 깨끗한 것을 더러운 가운데서 있으리이까 하나도 없나이다”(욥기 14:4).

더러운 가운데서는 깨끗한 것이 나올 없습니다. 깨끗한 것은 깨끗한 데서 나옵니다.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마태 7:16) 말씀처럼, 나쁜 나무에서 좋은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사람의 마음이 타락했는데, 죄인으로 태어나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마음이 있는데, 거기서 무슨 깨끗한 행동이 나오겠느냐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너희는 악하니 어찌 선한 말을 있느냐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라”(마태 13:34) “입에서 나오는 것들은 마음에서 나오나니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적질과 거짓 증거와 훼방이니”(마태 15:18,19)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악이 가득한 마음이 억제가 되지 않으므로 죄라는 열매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마음으로부터 나오는 것들이 외적인 행동으로 옮겨지는 것입니다. 사람이 짓는 수단과 도구로 쓰이는 육신의 일들을 잠언에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호와의 미워하시는 마음에 싫어하시는 것이 가지니 교만한 눈과 거짓된 혀와 무죄한 자의 피를 흘리는 손과 악한 계교를 꾀하는 마음과 빨리 악으로 달려가는 발과 거짓을 말하는 망령된 증인과 형제 사이를 이간하는 자니라”(잠언 6:16-19).

말씀대로 사람은 마음으로, 눈으로, 입으로, 손으로, 발로 얼마나 많은 죄를 짓는지! 시편 기자는 자신이 얼마나 죄가 많은 지를 깨닫고 “나의 죄악이 내게 미치므로 우러러 수도 없으며 나의 죄가 나의 머리털보다 많으므로” 평안한 마음이 사라졌다고 말하였습니다(시편 40:12)

<출처:생명의말씀선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