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경건한 책읽기
성인들의 영성, 예수 그리스도를 따른 거룩한 성도들의 경건을 보여주는 책을 읽는 것은 복음의 정신과 맛을 아는 데 유익하고 필수적인 방법이다.
경건한 책읽기의 유익
1) 마음의 적극적인 변화가 있다.
2) 다섯 권의 평범한 책보다 좋은 책 두세 번 읽는 게 더 유익하다.
3) 저자의 제한된 시각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4) 진리는 때때로 역설에서 발견된다.
* 영적 고전들을 읽되, 배타적인 태도가 아니라 종합하려는 자세로 읽으라.
2. 훌륭한 본보기를 본받아라.
바울은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은 자가 된 것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 말했다.
성숙의 과정에서 우리는 훌륭하고 긍정적인 본보기를 찾아 그들에게서 배워야 한다.
3. 덕목을 길러라.
영적 훈련은 우리가 변할 수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덕을 기르는 일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필수적인 부분이다. "전 원래 그래요."는 겸손이 아닌 게으름의 고백이다. 이는 우리의 약함과 덕 없음이 어떤 비극을 낳는지 너무나 무관심하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4. 불편함을 활용하라.
어떤 것이든 간에 불편함이라면 우리는 꺼리는 태도를 극복해야 한다. 죄악된 인간으로서 우리는 자연히 쉽고 편리하며 자기 중심적으로 기우는 경향이 있다. 노력이란 목표를 향해 애쓰며, 기존에 부족한 것을 기른다는 뜻이다. 우리는 편안한 길을 택하지 않고 훈련함으로써 우리의 열정과 습관을 형성할 수 있다. 우리가 시간을 어떻게 보내며 무엇을 먹을 것인가에 관해 내리는 작은 결정들이 실제로는 우리의 인격을 형성해가는 영적 전투들이다.
5. 진리를 몸에 적용하기
훈련은 궁극적으로 진리를 우리 삶에 적용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이것은 우리가 진리대로 살며 거룩하라는 하나님의 부르심대로 사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몸은 훈련에 가장 큰 장애물일 때가 많다. 확실한 것은 헌신이나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습관에 이르기를 원한다면 늘 묵상하고 영을 훈련시키고 또한 내적 기질에 편안함을 느끼는 모든 외적 행동에 대해 몸을
연습시키고 훈련시켜야 한다.
설령 우리가 몸과 영혼을 훈련시킨다 하더라도 우리의 믿음은 이런 훈련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것이다. 영적 삶의 중심은 언제나 체험적인 믿음이 아니라 하나님에게, 그분이 하신 일에 있어야 한다.
6. 일찍 일어나라.
이른 아침을 거룩하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 훈련에는 바른 가르침 찾기와 좋은 결과를 내기 위한 실제적인 목표 설정, 그리고 고통을 받아들이며 몸으로 훈련하는 것과 더불어 바른 스케줄 짜기도 포함된다. 훈련된 스케줄은 실제로 죄의 기회를 없앨 수 있으며 따라서 우리의 마음과 삶에서 죄를 제거하는 데 도움이 된다. 로우는 "지나친 수면은 영혼을 느슨하고 게으르게 만든다" 고 말한다. 아침에 기도하는 것은 많은 유익을 준다.
7. 되돌아보며 살아라.
이기적인 선입견은 영적 성장을 가로막지만 분별있는 자기 회상은 기독교의 본질적이고 건강한 요소이며 영적 상장을 확인하게 해주는 거울이다. 자기 성찰은 우리가 게을러지는 것을 막아주고 성장이 지체될 때에도 희망이 있다는 것을 기억하게 한다.
- '뿌리깊은 영성은 흔들리지 않는다' 중에서, 게리 토마
6/20/2011
신령한 웃음
“하나님은 순전한 사람을 버리지 아니하시고 악한 자를 붙들어 주지 아니하신 즉 웃음으로 네 입에 즐거운 소리로 네 입술에 채우시리니 너를 미워하는 자는 부끄러움을 입을 것이라악인의 장막은 없어지리라”(욥 8:20~22).
오늘날 세계 곳곳에서 예배 중에 성령의 은사로 기쁨의 웃음이 폭발하고 있다. 이것을 ‘거룩한 웃음’(Holy laugh)이라고 한다. 그러나 성령의 역사에 관해 무지한 자들은 이러한 현상을 ‘마귀 웃음’이라고 단정한다. 즉 악한 마귀의 역사라는 것이다. 하지만 성경은 “울 때가 있으면 웃을 때도 있다”고 말한다.
“울 때가 있고 웃을 때가 있으며”(전 3:4).
성령께서 나의 심령에 애통하는 마음을 가득히 채워주시면 우리는 흐느껴 울게 될 것이다. 사람들이 보든 말든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리는 것을 감출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같은 성령께서 나의 마음에 넘치도록 기쁨을 채워주신다면 어떠한 현상이 벌어질까? 웃지 않고는 견딜 수 없게 될 것이다. 바로 그것이 ‘거룩한 웃음’의 은사이다.
1. 거룩한 웃음의 두 가지 주체
‘거룩한 웃음’이 폭발할 경우 그것은 다음 두 가지 중에 하나이다. 첫째는 나의 영이 기뻐 웃는 ‘내 영의 웃음’이 있다. 곧 내 영의 기쁨이 육체를 통해 웃음으로 빠져나온 것이다. 둘째는 내 안에 계신 ‘성령님의 웃음’이 있다. 즉 내 안에 거하시는 주님의 기쁨이 나의 육체를 통해 웃음으로 폭발한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나를 통해 웃으시는 것이다.
1) 하나님의 웃음
규칙적으로 중보기도를 힘쓰는 그리스도인들은 기도 중에 종종 이유를 알 수 없는 탄식과 눈물이 솟구치는 경험을 할 때가 있다. 그것은 누구의 것일까? 나의 것이 아니라 내 육체 안에 거하고 계시는 성령의 탄식과 성령의 눈물인 것이다. 나는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지만, 나로 하여금 성령께서 그렇게 눈물로 중보하게 하시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것은 사실상 하나님의 눈물로서, 내 안에 계시는 성령님이 나를 통해 우시는 것이다.
그와 똑같이 내 안에 계신 하나님께서 나를 통해 웃으실 수도 있다. 우리가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해 웃으시도록 허락해 드리면, 그분은 마치 우리를 통하여 말씀하시는 것(예언 혹은 중보)과 똑같이 우리를 통하여 웃으신다. 하나님은 언제 나를 통해 웃으시는가?
a. 적의 계획이 좌절되었을 때
기도나 찬양 가운데 터져 나오는 웃음은 원수의 계획이 깨어졌다는 표시이다. 그것은 주님이 우리를 통하여 웃으시며 우리를 해치려 하는 적을 모욕하시는 것이다. 이때에 성도들의 웃음은 사단의 진을 흔들고 부수는 영적 전쟁의 강력한 도구가 된다.
“하늘에 계신 자가 웃으심이여 주께서 저희를 비웃으시리로다”(시 2:4).
“여호와여 주께서 저희를 웃으시리니 모든 열방을 비웃으시리이다”(시 59:8).
b. 주님이 나를 지극히 기뻐하실 때
웃음이란 기쁨이 넘칠 때 나타나는 현상이다. 기쁨이 넘치게 되면 미소만 짓고 있을 수가 없다. 큰 소리로 웃게 된다. 기도나 찬양 가운데 폭발하는 웃음은 하나님이 나를 지극히 기뻐한다는 표시이다. 즉 그것은 내 안에 계신 하나님께서 나를 인해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기 때문에 나를 통해 웃으시는 것이다. 그래서 ‘거룩한 웃음’은 하나님이 나를 지극히 사랑하고 기뻐하신다는 표적(sign)이다.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시라. 그가 너를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인하여 즐거이 부르며(singing) 기뻐하시리라”(습 3:17).
그러므로 기도나 경배 중에 거룩한 웃음이 터져 나왔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나를 영접하셨고 열납하셨다는 증표이다.
예수님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니라”(요 15:11)고 말씀하셨다. 주님의 기쁨을 우리 안에 주신다는 것은 내 안에서 예수님이 기뻐하시니 내가 기쁨의 표현으로 웃는다는 뜻이다. 이제부터 주님께서 더욱 자주 웃으시도록 허락해 드리자.
2. 내 영의 웃음
하나님이 나를 통해 기쁨으로 웃으실 때도 있지만, 하나님은 내 영이 기쁨에 넘쳐 웃게 하실 때도 있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의미를 갖는다.
a. 나의 기도가 응답되었거나, 응답이 오고 있다는 표시
기도하고 웃음이 나오면 응답받은 줄 믿고 계속 하나님을 찬양하고 감사하라. 만약 당신이 한 시간쯤 방언으로 기도한 후에 갑자기 웃기 시작 하였고, 또 방언으로 찬양까지 했다면 그것이 무슨 의미인지 아는가? 당신이 무엇을 기도하고 있었던 간에 그 문제가 완전히 기도로 끝났다는 것, 곧 기도한 것이 실현되었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희락’이며(롬 14:17), 또한 희락은 성령의 열매 가운데 하나이기 때문이다(갈 5:22). 그래서 웃음이란 응답의 실상이요 증거이다(히 11:1).
b.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다는 표시
성령은 희락의 영이다(갈 5:22). 그러므로 기도나 예배 중에 웃게 되었다면 그것은 나의 심령에 성령이 충만하게 임했다는 표적이다. 웃음이란 기쁨(희락)의 표현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니라”(롬 14:17).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은 세상이 주는 기쁨과 비교할 수 없는 기쁨이다. “주께서 내 마음 에 두신 기쁨은 저희의 곡식과 새 포도주의 풍성할 때보다 더하니이다”(시 4:7). 그런데 어떻게 웃음을 억제할 수 있겠는가?
2. 거룩한 웃음의 은사가 주는 복
거룩한 웃음의 은사는 다음과 같은 복을 가져온다. 그것은 내적인 치유(Inner Healing)와 외적인 치유에 대한 응답이기도 하다. 하나님은 ‘웃음치료 전문가’이시다.
1) 웃음은 마음의 양약
웃으면 심령이 치유를 받는다. 하나님의 은혜로 웃게 된다면 마음의 상처가 치유되는 기적이 온다. 그러므로 거룩한 웃음은 하나님께서 나를 새롭게 하여 축복의 길을 열어주신다는 증거이다.
“마음의 즐거움은 양약이라도 심령의 근심은 뼈로 마르게 하느니라”(잠 17:22).
“마음의 즐거움은 얼굴을 빛나게 하여도 마음의 근심은 심령을 상하게 하느니라”(잠 15:13).
성령의 역사 속에서 웃음을 경험하신 분들은 한결같이 심령 천국을 맛보았다고 한다. 심령 천국이 이루어질 때 비로소 내 삶의 전 영역에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된다. 따라서 거룩한 웃음을 통해 상한 마음이 치유될 뿐만 아니라 우리의 앞에 닥쳐있는 어려운 문제까지 해결을 받는 은총이 임한다.
2) 웃음은 육체의 보약
웃음은 심령이 치유될 뿐만 아니라 육체의 질병도 물리친다. 마음의 즐거움은 양약이기 때문이다. 모든 질병의 약 70%는 마음에 원인이 있는 심인성 질환이라고 한다. 질병의 원인은 대개 마음으로부터 온다. 마음의 병이 심령을 상하게 하고 면역력을 떨어뜨려서 육체의 질병을 가져오는 이유가 된다. 그런데 웃고 또 웃으면 양약이 되어 나의 심령이 모든 질병을 이길 수 있는 힘이 되는 것이다. 성경은 심령이 상하면 고칠 수 없다고 말한다.
“사람의 심령은 그 병을 능히 이기려니와 심령이 상하면 그것을 누가 일으키겠느냐”(잠 18:14).
현대 과학도 웃음은 엔돌핀을 끌어내어 면역체계를 강화시켜주므로 투병중인 환자에게 매우 중요하다고 한다. 또한 웃음은 만병의 원인인 스트레스를 완화시켜주고 장기에 마사지 효과를 준다. 즉 우리가 웃는 동안 횡경막이 움직여 신장, 간, 위 같은 장기를 자극해 오장 육부에 유익한 효과를 거둘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5분 동안 웃는 것이 5시간의 운동 효과가 있다는 것은 과장된 말이 아니다. 현대의 ‘웃음치료전문가’들은 “가장 좋은 치료방법이 웃음‘이라고 주장한다. 그것은 분명히 성경적, 과학적 근거가 있는 얘기다.
‘거룩한 웃음’은 성령께서 주시는 신령한 역사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일을 잘 알지 못하고 함부로 판단하는 말을 하여 하나님의 일을 방해하는 어리석은 자가 되지 않아야 한다. 욥기에 성령의 역사 즉 ‘거룩한 웃음’을 방해하는 자들을 향하여 무서운 말씀이 기록되어 있다.
“하나님은 순전한 사람을 버리지 아니하시고 악한 자를 붙들어 주지 아니 하신즉 웃음으로 네 입에, 즐거운 소리로 네 입술에 채우시리니 너를 미워하는 자는 부끄러움을 입을 것이라 악인의 장막은 없어지리라”(욥 8:20~22).
미련한 자의 등에는 막대기뿐이다(잠 26:3). 계속 하나님의 일을 방해하면 “악인의 장막은 없어지리라”는 말과 같이 결국 죽음을 당하게 된다. 그 이유는 희락(기쁨)은 성령의 열매인데 성령을 거스르고(행 7:51), 근심하게 하며(엡 4:30), 훼방한다면(마 12:31~32) 사하심을 받지 못하는 무서운 결과를 초래하기 때문이다.
오늘날 세계 곳곳에서 예배 중에 성령의 은사로 기쁨의 웃음이 폭발하고 있다. 이것을 ‘거룩한 웃음’(Holy laugh)이라고 한다. 그러나 성령의 역사에 관해 무지한 자들은 이러한 현상을 ‘마귀 웃음’이라고 단정한다. 즉 악한 마귀의 역사라는 것이다. 하지만 성경은 “울 때가 있으면 웃을 때도 있다”고 말한다.
“울 때가 있고 웃을 때가 있으며”(전 3:4).
성령께서 나의 심령에 애통하는 마음을 가득히 채워주시면 우리는 흐느껴 울게 될 것이다. 사람들이 보든 말든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리는 것을 감출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같은 성령께서 나의 마음에 넘치도록 기쁨을 채워주신다면 어떠한 현상이 벌어질까? 웃지 않고는 견딜 수 없게 될 것이다. 바로 그것이 ‘거룩한 웃음’의 은사이다.
1. 거룩한 웃음의 두 가지 주체
‘거룩한 웃음’이 폭발할 경우 그것은 다음 두 가지 중에 하나이다. 첫째는 나의 영이 기뻐 웃는 ‘내 영의 웃음’이 있다. 곧 내 영의 기쁨이 육체를 통해 웃음으로 빠져나온 것이다. 둘째는 내 안에 계신 ‘성령님의 웃음’이 있다. 즉 내 안에 거하시는 주님의 기쁨이 나의 육체를 통해 웃음으로 폭발한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나를 통해 웃으시는 것이다.
1) 하나님의 웃음
규칙적으로 중보기도를 힘쓰는 그리스도인들은 기도 중에 종종 이유를 알 수 없는 탄식과 눈물이 솟구치는 경험을 할 때가 있다. 그것은 누구의 것일까? 나의 것이 아니라 내 육체 안에 거하고 계시는 성령의 탄식과 성령의 눈물인 것이다. 나는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지만, 나로 하여금 성령께서 그렇게 눈물로 중보하게 하시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것은 사실상 하나님의 눈물로서, 내 안에 계시는 성령님이 나를 통해 우시는 것이다.
그와 똑같이 내 안에 계신 하나님께서 나를 통해 웃으실 수도 있다. 우리가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해 웃으시도록 허락해 드리면, 그분은 마치 우리를 통하여 말씀하시는 것(예언 혹은 중보)과 똑같이 우리를 통하여 웃으신다. 하나님은 언제 나를 통해 웃으시는가?
a. 적의 계획이 좌절되었을 때
기도나 찬양 가운데 터져 나오는 웃음은 원수의 계획이 깨어졌다는 표시이다. 그것은 주님이 우리를 통하여 웃으시며 우리를 해치려 하는 적을 모욕하시는 것이다. 이때에 성도들의 웃음은 사단의 진을 흔들고 부수는 영적 전쟁의 강력한 도구가 된다.
“하늘에 계신 자가 웃으심이여 주께서 저희를 비웃으시리로다”(시 2:4).
“여호와여 주께서 저희를 웃으시리니 모든 열방을 비웃으시리이다”(시 59:8).
b. 주님이 나를 지극히 기뻐하실 때
웃음이란 기쁨이 넘칠 때 나타나는 현상이다. 기쁨이 넘치게 되면 미소만 짓고 있을 수가 없다. 큰 소리로 웃게 된다. 기도나 찬양 가운데 폭발하는 웃음은 하나님이 나를 지극히 기뻐한다는 표시이다. 즉 그것은 내 안에 계신 하나님께서 나를 인해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기 때문에 나를 통해 웃으시는 것이다. 그래서 ‘거룩한 웃음’은 하나님이 나를 지극히 사랑하고 기뻐하신다는 표적(sign)이다.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시라. 그가 너를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인하여 즐거이 부르며(singing) 기뻐하시리라”(습 3:17).
그러므로 기도나 경배 중에 거룩한 웃음이 터져 나왔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나를 영접하셨고 열납하셨다는 증표이다.
예수님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니라”(요 15:11)고 말씀하셨다. 주님의 기쁨을 우리 안에 주신다는 것은 내 안에서 예수님이 기뻐하시니 내가 기쁨의 표현으로 웃는다는 뜻이다. 이제부터 주님께서 더욱 자주 웃으시도록 허락해 드리자.
2. 내 영의 웃음
하나님이 나를 통해 기쁨으로 웃으실 때도 있지만, 하나님은 내 영이 기쁨에 넘쳐 웃게 하실 때도 있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의미를 갖는다.
a. 나의 기도가 응답되었거나, 응답이 오고 있다는 표시
기도하고 웃음이 나오면 응답받은 줄 믿고 계속 하나님을 찬양하고 감사하라. 만약 당신이 한 시간쯤 방언으로 기도한 후에 갑자기 웃기 시작 하였고, 또 방언으로 찬양까지 했다면 그것이 무슨 의미인지 아는가? 당신이 무엇을 기도하고 있었던 간에 그 문제가 완전히 기도로 끝났다는 것, 곧 기도한 것이 실현되었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희락’이며(롬 14:17), 또한 희락은 성령의 열매 가운데 하나이기 때문이다(갈 5:22). 그래서 웃음이란 응답의 실상이요 증거이다(히 11:1).
b.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다는 표시
성령은 희락의 영이다(갈 5:22). 그러므로 기도나 예배 중에 웃게 되었다면 그것은 나의 심령에 성령이 충만하게 임했다는 표적이다. 웃음이란 기쁨(희락)의 표현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니라”(롬 14:17).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은 세상이 주는 기쁨과 비교할 수 없는 기쁨이다. “주께서 내 마음 에 두신 기쁨은 저희의 곡식과 새 포도주의 풍성할 때보다 더하니이다”(시 4:7). 그런데 어떻게 웃음을 억제할 수 있겠는가?
2. 거룩한 웃음의 은사가 주는 복
거룩한 웃음의 은사는 다음과 같은 복을 가져온다. 그것은 내적인 치유(Inner Healing)와 외적인 치유에 대한 응답이기도 하다. 하나님은 ‘웃음치료 전문가’이시다.
1) 웃음은 마음의 양약
웃으면 심령이 치유를 받는다. 하나님의 은혜로 웃게 된다면 마음의 상처가 치유되는 기적이 온다. 그러므로 거룩한 웃음은 하나님께서 나를 새롭게 하여 축복의 길을 열어주신다는 증거이다.
“마음의 즐거움은 양약이라도 심령의 근심은 뼈로 마르게 하느니라”(잠 17:22).
“마음의 즐거움은 얼굴을 빛나게 하여도 마음의 근심은 심령을 상하게 하느니라”(잠 15:13).
성령의 역사 속에서 웃음을 경험하신 분들은 한결같이 심령 천국을 맛보았다고 한다. 심령 천국이 이루어질 때 비로소 내 삶의 전 영역에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된다. 따라서 거룩한 웃음을 통해 상한 마음이 치유될 뿐만 아니라 우리의 앞에 닥쳐있는 어려운 문제까지 해결을 받는 은총이 임한다.
2) 웃음은 육체의 보약
웃음은 심령이 치유될 뿐만 아니라 육체의 질병도 물리친다. 마음의 즐거움은 양약이기 때문이다. 모든 질병의 약 70%는 마음에 원인이 있는 심인성 질환이라고 한다. 질병의 원인은 대개 마음으로부터 온다. 마음의 병이 심령을 상하게 하고 면역력을 떨어뜨려서 육체의 질병을 가져오는 이유가 된다. 그런데 웃고 또 웃으면 양약이 되어 나의 심령이 모든 질병을 이길 수 있는 힘이 되는 것이다. 성경은 심령이 상하면 고칠 수 없다고 말한다.
“사람의 심령은 그 병을 능히 이기려니와 심령이 상하면 그것을 누가 일으키겠느냐”(잠 18:14).
현대 과학도 웃음은 엔돌핀을 끌어내어 면역체계를 강화시켜주므로 투병중인 환자에게 매우 중요하다고 한다. 또한 웃음은 만병의 원인인 스트레스를 완화시켜주고 장기에 마사지 효과를 준다. 즉 우리가 웃는 동안 횡경막이 움직여 신장, 간, 위 같은 장기를 자극해 오장 육부에 유익한 효과를 거둘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5분 동안 웃는 것이 5시간의 운동 효과가 있다는 것은 과장된 말이 아니다. 현대의 ‘웃음치료전문가’들은 “가장 좋은 치료방법이 웃음‘이라고 주장한다. 그것은 분명히 성경적, 과학적 근거가 있는 얘기다.
‘거룩한 웃음’은 성령께서 주시는 신령한 역사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일을 잘 알지 못하고 함부로 판단하는 말을 하여 하나님의 일을 방해하는 어리석은 자가 되지 않아야 한다. 욥기에 성령의 역사 즉 ‘거룩한 웃음’을 방해하는 자들을 향하여 무서운 말씀이 기록되어 있다.
“하나님은 순전한 사람을 버리지 아니하시고 악한 자를 붙들어 주지 아니 하신즉 웃음으로 네 입에, 즐거운 소리로 네 입술에 채우시리니 너를 미워하는 자는 부끄러움을 입을 것이라 악인의 장막은 없어지리라”(욥 8:20~22).
미련한 자의 등에는 막대기뿐이다(잠 26:3). 계속 하나님의 일을 방해하면 “악인의 장막은 없어지리라”는 말과 같이 결국 죽음을 당하게 된다. 그 이유는 희락(기쁨)은 성령의 열매인데 성령을 거스르고(행 7:51), 근심하게 하며(엡 4:30), 훼방한다면(마 12:31~32) 사하심을 받지 못하는 무서운 결과를 초래하기 때문이다.
신령한 노래(spiritual song)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마음에 감사함으로 하느님을 찬양하고…”(골 3:16).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엡 5:19).
여기에서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이 열심을 다해 찬양해야 할 것을 강조하면서 세 가지 유형의 찬송을 나열했다. 어떤 이들은 이 구절에 언급된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를 똑같은 찬양의 다른 이름이라고 생각한다. 결코 그렇지 않다. 세 가지 모두 다른 유형의 찬양이다.
‘시’(psalm)는 구약의 시편을 말하고, ‘찬미’(hymns)는 시편 이외의 찬송을 뜻한다. 그렇다면 “신령한 노래”(spiritual song)는 어떤 것일까? 그것은 “성령의 감동 아래 즉흥적으로 부르는 노래”이다. 일반 찬양과는 다른 독특한 장르의 찬송인 것이다. 다음과 같은 노래들이 신령한 노래이다.
1. 영으로 하는 찬양
‘신령한 노래’의 첫 번째 유형은 “영으로” 하는 찬양이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4장 15절에서 “…내가 영으로 찬미하고 또 마음으로 찬미하리라“고 말한다. 이 말씀은 ‘찬양’에 대하여 말하려는 것이 아니고 ‘방언’에 대하여 말하다가 나온 말이다.
“내가 만일 방언으로 기도하면 나의 영이 기도하거니와 나의 마음은 열매를 맺히지 못하리라 그러면 어떻게 할꼬 내가 영으로 기도하고 또 마음으로 기도하며 내가 영으로 찬미하고 또 마음으로 찬미하리라”(고전 14:14~15).
여기에서 ‘마음으로’는 헬라어로 ‘누스’(νου?)인데, ‘이성적으로’라는 뜻이다. 방언기도는 영(spirit)이 하는 기도이므로 통역의 은사가 없으면 그 기도가 이성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래서 내 영은 기도하지만 나의 마음(mind), 곧 지각(the understanding)은 열매를 맺지 못한다. 따라서 우리는 ‘영으로’(with the spirit) 기도하고, 또한 ‘지각으로’(with the understanding) 기도해야 한다.
그런데 바울은 나의 영이 ‘기도’할 수 있듯이 나의 영으로 ‘찬양’할 수 있다고 말한다. “내가 영으로 찬미하고 또 마음으로 찬미하리라”(고전 14:15b). 영으로 찬양하는 것은 마치 방언기도를 드리는 것과 같다. 곧 이성의 영역을 떠나 내 영이 ‘자유롭게’ 부를 수 있는 찬송의 장르가 있다. 이것을 보통 ‘방언 찬송’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한국교회 성도들이 방언 찬송을 하는 것을 보면 대부분 기존의 찬송가 곡에 맞추어 부른다. 그것은 내 영이 ‘자유롭게’ 부르는 신령한 노래가 못 된다.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있는 곳에는 자유함이 있느니라”(고후 3:17). 진정한 영의 찬송은 일정한 곡이 없고, 곡조에 자유함이 넘친다. 다시 말하면 가락이 제마음대로란 얘기다. 왜냐하면 성령께서 그 사람에게 가사와 가락(곡조)을 주셔서 '즉흥적으로' 노래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영으로 하는 찬양이 ‘신령한 노래’인 것은 바로 그것 때문이다.
이렇게 여러 사람이 함께 신령한 노래로 찬양할 때 그것은 수십 성부의 아름다운 찬송이 된다. 성령이 각 개인의 목소리를 인도해 주실 뿐만 아니라 그것을 모아서 화음을 이루며 영으로 찬양하게 할 때 창출되는 그 조화란, 참으로 천사들의 합창 그 자체처럼 들릴 때도 있다. 이것이야말로 ‘3층천’ 예배인데, 이 때 회중은 강한 성령의 임재를 체험하게 된다.
2. 새 노래(a new song)
‘신령한 노래’의 또 한 가지 유형으로서 “새 노래” 라는 것이 있다. 성경은 도처에서 ‘새 노래’로 주를 찬양하라고 말씀하고 있다(시33:3; 사42:10; 계5:9). 이 ‘새 노래’ 역시 ‘영의 찬양’처럼 악보도 없는 노래를 즉흥적으로 부르는 것이다. 그러나 나의 마음으로, 곧 지각을 사용하여 노래한다는 점이 ‘방언 찬송’과 다르다.
즉 ‘새 노래’는 성령께서 곡조와 함께 내 이성으로 알아들을 수 있는 가사를 즉흥적으로 주시는데, 바로 그 가사와 가락으로 주님을 찬양하는 것이다. 따라서 일정한 가사와 곡조가 없는 노래다. 이것은 '예언적 노래'로서 배워서 부를 수 있는 노래가 아니다.
하느님은 선지자 예레미야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보라 내가 내 말을 네 입에 두었노라”(렘 1:9). 하느님은 예레미야의 입에 말씀을 주셨다. 그래서 그는 예언할 수 있었다. 그 하느님은 우리 입에 노랫말도 주신다. 그래서 우리로 새 노래로 찬양하게 하신다.
“…이새의 아들 다윗이 말함이여 높이 올리운 자, 야곱의 하느님에게 기름부음 받은 자, 이스라엘의 노래 잘하는 자가 말하도다. 여호와의 신이 나를 빙자하여 말씀하심이여 그 말씀이 내 혀에 있도다”(삼하 23:1~2).
그리하여 우리는 즉흥적으로 ‘예언적인 노래'를 부를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초자연적 노래이다. 이러한 노래를 부르면 사람들이 보고 두려워하며 하느님께 굴복한다. 성령의 능력이 그 노래 가운데 있기 때문이다.
“또 그가 내 입에 새 노래를 두셨으니, 곧 우리 하느님께 드릴 찬양이라. 많은 사람이 그것을 보고 두려워하며 주를 의지하리로다”(시 40:3?KJV).
“그러나 다 예언을 하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나 무식한 자들이 들어와서 모든 사람에게 책망을 들으며 모든 사람에게 판단을 받고 그 마음의 숨은 일이 드러나게 됨으로 엎드려 하느님께 경배하며 하느님이 참으로 너희 가운데 계시다 전파 하리라 그런즉 형제들아 어찌할꼬 너희가 모일 때에 각각 찬송시도 있으며...”(고전 14:24~26).
이와 같은 ‘신령한 노래’는 초대교회에서 체험하였고, 일찍이 ‘다윗의 장막’에서도 불리어졌었다.
“다윗이 군대 장관들로 더불어 아삽과 헤만과 여두둔의 자손 중에서 구별하여 섬기게 하되 수금과 비파와 제금을 잡아 신령한 노래를 하게 하였으니 그 직무대 로 일하는 자의 수효가 이러하니라”(대상 25:1).
여기서 ‘신령한 노래를 하게 하였으니’라는 것은 “예언을 하게 했다”(prophesy)는 뜻이다(영어 성경과 비교해 보라). 이 귀한 노래가 오늘날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성령의 역사와 더불어 다시 회복되고 있다.
3. 높은 찬양(high praise)
‘신령한 노래’의 범주에 ‘높은 찬양’(high praise)이라고 하는 또 한 가지 유형의 찬송이 있다. 영적으로 깊고 강한 찬송으로서, 시편 149편 6절에 나온 찬양이다.
“그들의 입에 하느님을 향한 높은 찬양들이 있게 하고, 그들의 손에는 양 날 이 있는 칼이 있어”(시 149:6 ? KJV).
여기에서 ‘높은 찬양’은 원어 ‘로맘’(????)의 번역이다. 이 단어는 시 66:17과 함께 성경에 꼭 두 번 사용되었다. “내가 내 입으로 그에게 부르짖으며 내 혀로 높이 찬송하였도다”(시 66:17). ‘로맘’(????)은 ‘룸’(???)이라는 동사에서 나온 말인데, ‘룸’은 ‘높이다’ ‘높게 하다’의 뜻이다. 높이는 것은 ‘찬양’ 하는 것이다. 그래서 ‘로맘’이라는 단어는 대부분의 영어 성경들이 ‘높은 찬양’으로 번역하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높은 찬송’이 실제로 어떤 찬송을 말하는지 확실하지 않다. 그러나 ‘찬양과 경배’ 사역에서 찬양 인도자(worship leader)로 종사하고 있는 분들은 이 찬송이 영적으로 하느님과 좀더 친밀하게 되었을 때 나오는 자연적이고 즉흥적인 노래(spontaneous song)라는 것을 체험적으로 알고 있다.
찬양의 깊은 경지에 들어가면 음량은 작아지고, 템포는 느려지고, 소리는 높아진다. 가사는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다. 찬송이 영적으로 매우 높은 경지에 있을 때 나오는 참으로 신비한 찬양이다. 이것이 ‘높은 찬양’으로 이때에 회중은 하느님의 임재를 더욱 깊이 체험하게 된다.
이 ‘높은 찬양’은 ‘하느님의 말씀’과 함께 사단의 진을 쳐부수는 역할을 한다. ‘높은 찬양’은 영적 전쟁의 아주 강력한 무기이다(시 149:6~9).
6.그들의 입에 하느님을 향한 높은 찬양들이 있게 하고, 그들 의 손에는 양 날이 있는 칼이 있어
7. 이방에 복수하며 그 백성을 처벌하고
8. 그들의 왕을 쇠사슬로, 그들의 귀족들을 쇠 족쇄로 묶어
9. 기록된 판결을 그들에게 시행하게 할지니, 이 영광이 그의 모든 성도들에게 있도다. 너희는 주를 찬양할지어다.
우리에 입에는 높은 찬양이 있고, 손에는 양날 선 칼이 있어야 한다. 칼은 하느님의 말씀이다(엡 6:17; 히 6:17). ‘하느님의 말씀’과 ‘하느님을 향한 높은 찬양’은 성도들이 갖추어야 할 영적전쟁의 강력한 무기다. 말씀의 검을 높이 들고, 주께는 찬양을 높이 올 릴 때, 성령의 능력이 강하게 역사하여 흑암의 세력이 쫒겨 가게 된다.
맺는말
우리는 모두 ‘신령한 노래’를 부르도록 요청받았다. 그러므로 ‘신령한 노래’를 불러야 한다. 그것은 방언찬송, 새 노래, 높은 찬양 등과 같은 '초자연적 노래'이다. 이러한 찬양들은 우리의 의지를 뛰어 넘는 신비한 찬양들이다.
이 놀라운 영적 찬양들은 성령의 역사가 강했던 초대교회에선 예배할 때마다 흔히 불려졌던 노래들이었다. 그러나 방언과 더불어 교회에서 오랫동안 잊혀져 오다가 20세기에 이르러 성령의 역사와 함께 찬양과 경배라는 새로운 양식의 예배가 시작되면서 마침내 신령한 노래들도 다시 부를 수 있게 된 것이다.
오늘날 교회 안에 ‘신령한 노래’가 회복되고 있다. 의식적이고 예전적인 예배에서는 이러한 놀라운 찬양을 전혀 기대할 수 없다. 순서에 따라 예배가 진행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배를 우리가 만든 순서에 의지하지 않고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맡길 때, 우리는 모두 예배 가운데서 ‘신령한 노래’를 부를 수 있고, 결국 더욱 풍성한 찬송생활의 권능을 체험하게 될 것이다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엡 5:19).
여기에서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이 열심을 다해 찬양해야 할 것을 강조하면서 세 가지 유형의 찬송을 나열했다. 어떤 이들은 이 구절에 언급된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를 똑같은 찬양의 다른 이름이라고 생각한다. 결코 그렇지 않다. 세 가지 모두 다른 유형의 찬양이다.
‘시’(psalm)는 구약의 시편을 말하고, ‘찬미’(hymns)는 시편 이외의 찬송을 뜻한다. 그렇다면 “신령한 노래”(spiritual song)는 어떤 것일까? 그것은 “성령의 감동 아래 즉흥적으로 부르는 노래”이다. 일반 찬양과는 다른 독특한 장르의 찬송인 것이다. 다음과 같은 노래들이 신령한 노래이다.
1. 영으로 하는 찬양
‘신령한 노래’의 첫 번째 유형은 “영으로” 하는 찬양이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4장 15절에서 “…내가 영으로 찬미하고 또 마음으로 찬미하리라“고 말한다. 이 말씀은 ‘찬양’에 대하여 말하려는 것이 아니고 ‘방언’에 대하여 말하다가 나온 말이다.
“내가 만일 방언으로 기도하면 나의 영이 기도하거니와 나의 마음은 열매를 맺히지 못하리라 그러면 어떻게 할꼬 내가 영으로 기도하고 또 마음으로 기도하며 내가 영으로 찬미하고 또 마음으로 찬미하리라”(고전 14:14~15).
여기에서 ‘마음으로’는 헬라어로 ‘누스’(νου?)인데, ‘이성적으로’라는 뜻이다. 방언기도는 영(spirit)이 하는 기도이므로 통역의 은사가 없으면 그 기도가 이성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래서 내 영은 기도하지만 나의 마음(mind), 곧 지각(the understanding)은 열매를 맺지 못한다. 따라서 우리는 ‘영으로’(with the spirit) 기도하고, 또한 ‘지각으로’(with the understanding) 기도해야 한다.
그런데 바울은 나의 영이 ‘기도’할 수 있듯이 나의 영으로 ‘찬양’할 수 있다고 말한다. “내가 영으로 찬미하고 또 마음으로 찬미하리라”(고전 14:15b). 영으로 찬양하는 것은 마치 방언기도를 드리는 것과 같다. 곧 이성의 영역을 떠나 내 영이 ‘자유롭게’ 부를 수 있는 찬송의 장르가 있다. 이것을 보통 ‘방언 찬송’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한국교회 성도들이 방언 찬송을 하는 것을 보면 대부분 기존의 찬송가 곡에 맞추어 부른다. 그것은 내 영이 ‘자유롭게’ 부르는 신령한 노래가 못 된다.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있는 곳에는 자유함이 있느니라”(고후 3:17). 진정한 영의 찬송은 일정한 곡이 없고, 곡조에 자유함이 넘친다. 다시 말하면 가락이 제마음대로란 얘기다. 왜냐하면 성령께서 그 사람에게 가사와 가락(곡조)을 주셔서 '즉흥적으로' 노래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영으로 하는 찬양이 ‘신령한 노래’인 것은 바로 그것 때문이다.
이렇게 여러 사람이 함께 신령한 노래로 찬양할 때 그것은 수십 성부의 아름다운 찬송이 된다. 성령이 각 개인의 목소리를 인도해 주실 뿐만 아니라 그것을 모아서 화음을 이루며 영으로 찬양하게 할 때 창출되는 그 조화란, 참으로 천사들의 합창 그 자체처럼 들릴 때도 있다. 이것이야말로 ‘3층천’ 예배인데, 이 때 회중은 강한 성령의 임재를 체험하게 된다.
2. 새 노래(a new song)
‘신령한 노래’의 또 한 가지 유형으로서 “새 노래” 라는 것이 있다. 성경은 도처에서 ‘새 노래’로 주를 찬양하라고 말씀하고 있다(시33:3; 사42:10; 계5:9). 이 ‘새 노래’ 역시 ‘영의 찬양’처럼 악보도 없는 노래를 즉흥적으로 부르는 것이다. 그러나 나의 마음으로, 곧 지각을 사용하여 노래한다는 점이 ‘방언 찬송’과 다르다.
즉 ‘새 노래’는 성령께서 곡조와 함께 내 이성으로 알아들을 수 있는 가사를 즉흥적으로 주시는데, 바로 그 가사와 가락으로 주님을 찬양하는 것이다. 따라서 일정한 가사와 곡조가 없는 노래다. 이것은 '예언적 노래'로서 배워서 부를 수 있는 노래가 아니다.
하느님은 선지자 예레미야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보라 내가 내 말을 네 입에 두었노라”(렘 1:9). 하느님은 예레미야의 입에 말씀을 주셨다. 그래서 그는 예언할 수 있었다. 그 하느님은 우리 입에 노랫말도 주신다. 그래서 우리로 새 노래로 찬양하게 하신다.
“…이새의 아들 다윗이 말함이여 높이 올리운 자, 야곱의 하느님에게 기름부음 받은 자, 이스라엘의 노래 잘하는 자가 말하도다. 여호와의 신이 나를 빙자하여 말씀하심이여 그 말씀이 내 혀에 있도다”(삼하 23:1~2).
그리하여 우리는 즉흥적으로 ‘예언적인 노래'를 부를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초자연적 노래이다. 이러한 노래를 부르면 사람들이 보고 두려워하며 하느님께 굴복한다. 성령의 능력이 그 노래 가운데 있기 때문이다.
“또 그가 내 입에 새 노래를 두셨으니, 곧 우리 하느님께 드릴 찬양이라. 많은 사람이 그것을 보고 두려워하며 주를 의지하리로다”(시 40:3?KJV).
“그러나 다 예언을 하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나 무식한 자들이 들어와서 모든 사람에게 책망을 들으며 모든 사람에게 판단을 받고 그 마음의 숨은 일이 드러나게 됨으로 엎드려 하느님께 경배하며 하느님이 참으로 너희 가운데 계시다 전파 하리라 그런즉 형제들아 어찌할꼬 너희가 모일 때에 각각 찬송시도 있으며...”(고전 14:24~26).
이와 같은 ‘신령한 노래’는 초대교회에서 체험하였고, 일찍이 ‘다윗의 장막’에서도 불리어졌었다.
“다윗이 군대 장관들로 더불어 아삽과 헤만과 여두둔의 자손 중에서 구별하여 섬기게 하되 수금과 비파와 제금을 잡아 신령한 노래를 하게 하였으니 그 직무대 로 일하는 자의 수효가 이러하니라”(대상 25:1).
여기서 ‘신령한 노래를 하게 하였으니’라는 것은 “예언을 하게 했다”(prophesy)는 뜻이다(영어 성경과 비교해 보라). 이 귀한 노래가 오늘날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성령의 역사와 더불어 다시 회복되고 있다.
3. 높은 찬양(high praise)
‘신령한 노래’의 범주에 ‘높은 찬양’(high praise)이라고 하는 또 한 가지 유형의 찬송이 있다. 영적으로 깊고 강한 찬송으로서, 시편 149편 6절에 나온 찬양이다.
“그들의 입에 하느님을 향한 높은 찬양들이 있게 하고, 그들의 손에는 양 날 이 있는 칼이 있어”(시 149:6 ? KJV).
여기에서 ‘높은 찬양’은 원어 ‘로맘’(????)의 번역이다. 이 단어는 시 66:17과 함께 성경에 꼭 두 번 사용되었다. “내가 내 입으로 그에게 부르짖으며 내 혀로 높이 찬송하였도다”(시 66:17). ‘로맘’(????)은 ‘룸’(???)이라는 동사에서 나온 말인데, ‘룸’은 ‘높이다’ ‘높게 하다’의 뜻이다. 높이는 것은 ‘찬양’ 하는 것이다. 그래서 ‘로맘’이라는 단어는 대부분의 영어 성경들이 ‘높은 찬양’으로 번역하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높은 찬송’이 실제로 어떤 찬송을 말하는지 확실하지 않다. 그러나 ‘찬양과 경배’ 사역에서 찬양 인도자(worship leader)로 종사하고 있는 분들은 이 찬송이 영적으로 하느님과 좀더 친밀하게 되었을 때 나오는 자연적이고 즉흥적인 노래(spontaneous song)라는 것을 체험적으로 알고 있다.
찬양의 깊은 경지에 들어가면 음량은 작아지고, 템포는 느려지고, 소리는 높아진다. 가사는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다. 찬송이 영적으로 매우 높은 경지에 있을 때 나오는 참으로 신비한 찬양이다. 이것이 ‘높은 찬양’으로 이때에 회중은 하느님의 임재를 더욱 깊이 체험하게 된다.
이 ‘높은 찬양’은 ‘하느님의 말씀’과 함께 사단의 진을 쳐부수는 역할을 한다. ‘높은 찬양’은 영적 전쟁의 아주 강력한 무기이다(시 149:6~9).
6.그들의 입에 하느님을 향한 높은 찬양들이 있게 하고, 그들 의 손에는 양 날이 있는 칼이 있어
7. 이방에 복수하며 그 백성을 처벌하고
8. 그들의 왕을 쇠사슬로, 그들의 귀족들을 쇠 족쇄로 묶어
9. 기록된 판결을 그들에게 시행하게 할지니, 이 영광이 그의 모든 성도들에게 있도다. 너희는 주를 찬양할지어다.
우리에 입에는 높은 찬양이 있고, 손에는 양날 선 칼이 있어야 한다. 칼은 하느님의 말씀이다(엡 6:17; 히 6:17). ‘하느님의 말씀’과 ‘하느님을 향한 높은 찬양’은 성도들이 갖추어야 할 영적전쟁의 강력한 무기다. 말씀의 검을 높이 들고, 주께는 찬양을 높이 올 릴 때, 성령의 능력이 강하게 역사하여 흑암의 세력이 쫒겨 가게 된다.
맺는말
우리는 모두 ‘신령한 노래’를 부르도록 요청받았다. 그러므로 ‘신령한 노래’를 불러야 한다. 그것은 방언찬송, 새 노래, 높은 찬양 등과 같은 '초자연적 노래'이다. 이러한 찬양들은 우리의 의지를 뛰어 넘는 신비한 찬양들이다.
이 놀라운 영적 찬양들은 성령의 역사가 강했던 초대교회에선 예배할 때마다 흔히 불려졌던 노래들이었다. 그러나 방언과 더불어 교회에서 오랫동안 잊혀져 오다가 20세기에 이르러 성령의 역사와 함께 찬양과 경배라는 새로운 양식의 예배가 시작되면서 마침내 신령한 노래들도 다시 부를 수 있게 된 것이다.
오늘날 교회 안에 ‘신령한 노래’가 회복되고 있다. 의식적이고 예전적인 예배에서는 이러한 놀라운 찬양을 전혀 기대할 수 없다. 순서에 따라 예배가 진행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배를 우리가 만든 순서에 의지하지 않고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맡길 때, 우리는 모두 예배 가운데서 ‘신령한 노래’를 부를 수 있고, 결국 더욱 풍성한 찬송생활의 권능을 체험하게 될 것이다
너희 목마른 자들아
“네가 네 손이 수고한 대로 먹을 것이라 네가 복되고 형통하리로다”(시128:2)
사람이 영양 실조에 걸리면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없습니다. 마찬 가지로 영적으로 영양 실조가 되면 절망적인 상황에 처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부터 사흘 동안 세상을 살아가면서 영적으로 꼭 필요한 세 자지 영양소를 말씀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성경에는 “너희 목마를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람의 육체는 60%가 물로 되어 있습니다. 물은 우리 생명의 원천입니다.
만약 물을 마시지 못하면 살 수 없습니다. 그런데 사람은 육으로만 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영과 혼과 육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영의 속사람과 육의 겉사람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육의 겉사람에게 물이 필요한 것처럼 영의 속사람에게도 물이 필요합니다.
아담과 하와가 타락한 이후 사람들은 영혼을 던져버리고 육신 위주로 살아왔기 때문에 영혼이 목말라 몸부림 칩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지금까지 영혼의 목마름에는 외면한 채 인생의 행복을 얻고 삶의 목적을 찾으려고 방황하지만 생의 행복과 목적을 발견할 수가 없었습니다.
남편을 다섯 번 바꾸고 여섯 번째의 남편과 살면서도 갈급함이 채워지지 않아 지칠 대로 지쳐있던 여인이 우물가에서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여인에게 ”내가 주는 물을 마시면 영원히 목마르지 않으리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들은 여인은 즉시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넘쳐나는 영원한 생수를 마실 수 있었습니다. 생수를 마신 여인은 동네로 뛰어가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전도사가 되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죄를 많이 지었느냐 적게 지었느냐 그것을 따지기보다는 “나는 죄인입니다.나는 갈급해서 견딜 수가 없어 주님께로 나왔습니다. 주님께서 도와 주옵도서.” 라고 말하는 정직한 죄인을 원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러한 사람들을 구원해 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기 전에는 삶의 목적과 생의 참 가치를 모르고 살았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면 삶의 목적과 생의 참 가치를 알게 되어 영혼의 갈증이 해소되고 마음 속에 평안을 얻는 위대한 기적을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이사야 5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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