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0/2012

♧가로등의 유래

미국의 정치가였던 벤자민 프랭클린은 자기가 사는 필라델피아 시민들에게 선한 일을 하기 원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아름답고 좋은 등을 하나 준비해서 집 앞에 선반을 만들고 그 위에 올려 두었습니다.

그러자 동네 사람들은 이상하게 생각했습니다.
등불은 집 안에 두어야 하는 것으로 이해했기 때문에, 집 밖에 두는 것은 낭비라고 여겼습니다. 그러나 한 주가 지나고, 한 달이 지나자 사람들은 뭔가 깨닫기 시작했습니다.

집 밖에 등불을 두니까 밤에 지나가는 사람도 넘어지지 않았습니다. 
멀리서도 방향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것을 좋게 생각한 사람들이 하나 둘씩 집 밖에 등불을두기 시작했습니다
길거리가 환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오늘날 가로등의 시작이었습니다
만약 길거리에 가로등이 없다면 어떻겠습니까?

얼마나 캄캄하고 어둡겠습니까?
세계적으로 가로등이 생기게 된 것은 벤자민 프랭클린이라는 한 사람이 주변 사람들을 위하여 집 밖에 등불을 둠으로써 생겨나게 된 것입니다. 한 사람의 선한 행동이 많은 사람에게 감동과 감화를 준 것입니다.

행위가 아닌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습니다.

유대인들은 자기들이 자랑할 것이 많다고 생각하여 교만에 이를 정도로 큰 자부심을 가졌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들의 조상 아브라함에게 전혀 자랑할 것이 없다고 단언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는 무엇으로 의롭다함을 받을 수 있습니까?(롬4:1-12)

행위가 아닌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습니다.
아브라함이 행위로 인하여 하나님의 의롭다하심을 얻었다면 자랑할 것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를 의롭다고 인정하신 것은 행위가 아닌 그의 믿음 때문이었습니다(창15:6). 그러기에 하나님의 의와 관련해서 아브라함이 자랑할 것은 아무것도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일하지 않고 삯을 받는 것과 같은데, 다윗의 생애가 이를 잘 보여줍니다.

다윗이 큰 불법을 행했지만 하나님 앞에서 자기 죄를 인정하고 통회 자복했을 때, 하나님의 은혜를 입고 그 죄에 대하여 가리우심을 입은 것입니다(시32:1이하). 바울은 이처럼 일하지 않고 삯을 받는 은혜야말로 우리에게 가장 큰 행복이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데 있어서 우리는 아무런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로 거저 천국에 들어갔기 때문입니다. 자랑할 것은 없으나 행복한 것입니다. 주님 주신 이 행복을 놓치지 말기 바랍니다. 이 행복을 담는 그릇은 바로 겸손입니다. 이 겸손이 유대인들에게는 없었습니다. 오직 자기를 부인하는 겸손한 믿음으로만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한 행복자로 살 수 있습니다.

‘조심하면 중간은 갈 수 있었는데’

“그대는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기억하고 높이라 잊지 말지니라 인생이 그의 일을 찬송하였느니라” (욥36:24)

잘 모르면 가만히 있는 것이 상책이다. 그러면 ‘중간은 간다’는 말이 있다. 바리새인들은 그들의 영적 지식 중에 귀신을 쫓아내는 능력에 대한 것이 없었다. 즉 문외한(門外漢)이었다. 이 사건의 발단은 다음과 같다.
어떤 사람들이 귀신들려 눈멀고 벙어리 된 사람을 예수님 앞에 데려 왔다. 그는 삼중고(三重苦)를 겪고 있는 정말 불쌍한 사람이었다.
바리새인들에게는 그 사람을 고쳐줄 능력도, 지식도, 가능성도 전혀 없었다. 만약 그 사람을 바리새인들 앞에 데려 오면 당황할 뿐일 것이다. 성경은 너무나도 단순(simple)하게 증거하고 있다.

예수님은 그를 고쳐주셨다.
그 벙어리가 말할 뿐만 아니라 보게 된 것이다. 말을 하고 보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가? 당사자는 말할 것도 없이 그의 가족과 친구들은 얼마나 기뻐했을까?

이 일에 대해 바리새인들의 반응은 전혀 달랐다. 그들은 듣고 말하기를 “이가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지 않고는 귀신을 쫓아 내지 못 하느니라”고 한 것이다.
바알세불이란 사단과 마귀의 이름으로도 그다지 익숙지 않은 용어이다. “바알세불”은 “바알”(Baal)과 “제붑”(zebub)의 합성어이다. “바알”(Baal)은 가나안 이교신 아하시야의 돌발적 사고와 죽음의 기사가 나오는 에그론의 블레셋인들의 제식에 나타났다. “제붑”(zebub), 또는 “파리들의 주(lord of flies)"라는 뜻이다.

“제붑”(zebub)에 나오는 ‘b’들은 모두 ‘v’로 발음되는 것으로 파리들이 붕붕거리는 것을 의성어 형태로 모방한 것이다. 제식용의 작은 금파리들이 가나안 유적의 발굴에서 재발견되고 있다. 유대인의 전통에서 바알세붑이라는 칭호는 사단을 나타내는 명칭이 되었다.

그러나 많은 고대 이교적 칭호들과 마찬가지로 이 단어의 음은 불분명하게 바뀌어 바알세붑이 바알세불(Baalzebul) 또는 베엘세불(Beelzebul), 즉 “똥의 주”가 되었다. 바리새인이 말한 것에 대한 예수님의 반응은 예사롭지 않다. 스스로 분쟁하는 나라와 사단이 사단을 내어 쫓을 수 없는 영적 진리를 예를 들어 반박하셨다.
그리고 말씀하시기를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 하였느니라”(마 12:28)고 하시면서 성령의 역사임을 분명히 하셨다.

성령을 훼방하면 죄 사함은 없다. 
뿐만 아니라 그들의 죄가 용서받을 수 없는 것임을 밝히셨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의 모든 죄와 훼방은 사하심을 얻되 성령을 훼방하는 것은 사하심을 얻지 못하겠고 또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마 12:31~32).

생각해보라 “파리의 주” 혹은 “똥의 주”라는 뜻을 가진 칭호를 우리 주님 메시야에게 사용하였다니. 그리고 주님의 능력을 한낱 귀신의 왕을 힘입은 것이라고 하다니. 잘 모르면 알려고 하고 그래도 모르면 입을 다물어야 하는 것 아닌가? 예수님의 신적 권위(Divine authority)를 인정하는 것이 이만큼 중요하다.

오늘날에도 성령 하나님(God the Holy Spiriy)의 역사는 우리의 이성이나 지식을 뛰어넘어 역사하신다. 오, 주님의 신비에 대해 문외한(門外漢)이 되지 않게 하소서! (큐티일대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