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9/2011

천국 수준의 믿음

사람들이 생각하기를 죽은 자를 살리는 것이 가장 큰 이적이라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아그립바 왕에게 "당신들은 하나님이 죽은 사람을 다시 살리심을 어찌하여 못 믿을 것으로 여기나이까?"(행 26:8) 라고 했습니다.

위글스워스의 사역을 통하여 하나님께선 열 네 번이나 죽은 자를 살리셨습니다. 때로는 그의 기도를 통하여, 때로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는 가운데 이 역사가 일어난 것입니다. 그는 온 가족이 다섯 살 된 아이의 죽음 때문에 울고 있는 집을 방문했습니다. 그 당시엔 사람이 죽으면 그 시신을 그대로 집에 두고 장례를 거행했습니다.  관 속에 누워있는 얘를 바라보면서 그의 얼굴에는 눈물이 흘러내렸습니다.

죄로 인하여 죽을 수밖에 없는 이 천진난만한 꼬마가 차가운 시신이 되어 벌써 관 속에 누운 것을 보고 불쌍한 생각이 든 것입니다.

위글스워스는 자기만 남겨두고 모두 밖으로 나가도록 요청했습니다. 그는 문을 잠궜습니다.  그리고 딱딱하게 변해버린 아이의 시체를 두 손으로 번쩍 들어올렸습니다. 그리고 나서는 아이를 벽에 기대어 놓고 방구석에 강제로 세웠습니다.

위글스워스는 주 예수의 이름으로 사망을 꾸짖었습니다. 그리고 사망더러 이 아이의 몸에서 떠나라고 세웠습니다. 순간 놀라운 이적이 일어났습니다. 죽었던 다섯 살 된 아이가 살아나는 것이었습니다. 이 일을 하던 위글스워스는 조금도 의심이 없었습니다.

또 다른 사역과 이적의 경우에서 그는 말했습니다.  "어떤 조치가 취해지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었지요. 나의 믿음이 갑자기 천국 수준 정도까지 올라가는 것이 느껴지더군요. 만약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응답 받기 원한다면 우리는 그분이 원하시는 믿음의 수준을 가지고 기도해야 합니다. 이 믿음은 다름 아닌 천국 수준의 믿음입니다. 내 믿음의 한계가 느껴지는 순간, 다른 수준의 믿음, 즉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는 믿음이 내게 다가왔지요. 그때 나는 조금 전의 위글스워스가 아니더군요. 하나님께서 천국을 흔들고 남을 정도의 큰 믿음을 내게 주셨습니다."

그는 항상 불신앙과 싸웠습니다. 그리고 승리의 삶으로 이끌어갔습니다. 한번은 어느 젊은이가 "어떻게 그렇게 큰 믿음을 소유할 수가 있습니까?"라고 질문했습니다. 그러자 "처음에는 싹이요, 다음에는 이삭이요, 그 다음에는 이삭에 충실한 곡식이라" (막 4:28)라고 대답했습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답변입니까? 이것이야말로 성서신학이 아닐까요? 그가 언급한 믿음이라는 것은 지속적인 성장이 이루어져서 결국에 온전하게 되는 것을 의미한 것입니다.  믿음은 날마다 하나님을 더 많이 알아감으로써 자라가는 것입니다.

종종 사람들이 스미스 위글스워스라는 사람은 일생에 한번 나올까 말까 한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위글스워스는 그러한 말에 동의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믿고 열심히 하면 누구든지 위글스워스가 쓰임 받은 것처럼 또는 그 이상 쓰임 받을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알버트 히버트가 지은 “스미스 위글스워스, 그 능력의 비밀” 중에서...)

믿음으로 나아가면 약점이 나를 강하게 만든다

믿음은 내가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행동으로 옮김으로써 받는 것이다.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을 사용하면 내 믿음은 자라게 될 것이다. 내가 행동할 때까지는 내 믿음은 결코 자라지 않는다.

내가 하나님의 생명 안에서 자라기 원한다면 어떤 경우에든지 성령님을 거슬리지 않겠다는 마음의 결단을 해야 한다.  성령의 불은 나를 쇠퇴케하고 파괴하는 어떤 것이라도 태워버리기 때문이다.

마귀는 언제나 내가 가장 자신없어 하는 약점과 약한 것을 통해서 시험하고 접근한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 담대하게 믿음으로 나아가면 내 강점보다 오히려 약점이 나를 더 강하게 만든다는 것을 알게 된다.

초자연적인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나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믿음을 살아나게 해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죽지 않고 하늘로 옮겨 가는 것(translation)은 하나님의 마음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억할 것은 죽지 않고 하늘로 옮겨 가는 것은 거룩한 순종과 함께 오는 것입니다.  이것은 에녹에게 일어난 사실이었습니다 우리도 에녹과 같이 성령안에서 하나님과 동행하고  그분과 교통하며 하나님이 기뻐하시며 웃는 모습 아래서 살아야 한다고 나는 믿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영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움직이셔서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했던 곳에  우리도 있게 되도록 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믿음에는 두 종류가 있습니다. 자연적인 믿음이 있습니다 그러나 초자연적인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사도행전 26장18절 에서 바울은 아그립바에게 주님이 그에게 사명을 주어 보내실 때 그에게 한 말을 하고있습니다.

"그 눈을 뜨게 하여 어둠에서 빛으로 사탄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고 죄사함과 나를 믿어 거룩하게 된 무리 가운데서 기업을 얻게 하리라 하더이다".

이것이 바울의 믿음입니까? 아닙니다 이것은 성령님께서 그에게 주신 믿음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께 계속 가까이 나아갈 때 성령님께서 우리에게 가져다 주시는 믿음입니다.

나는 예수님의 믿음과 우리의 믿음의 차이를 여러분앞에 보여주기원합니다.  우리의 믿음은 한계에 도달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주님 나는 더이상 갈수 없습니다 나는 내가 가진 모든 믿음을  다 써버렸기 때문에 나는 여기서 멈추어서 기다려야만 합니다". 라고 말한 지점에 와 있습니다.

내가 랭카쉬어에 있던 어느날 아픈 사람들을 돌아보던 것이 생각납니다. 나는 한 젊은 여자가 소망이 전혀 없이 침대에 누워있는 어떤 집으로 안내되었습니다. 이유는 알수 없었고 마귀적인 여러가지 일들이 나타났었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젊은 나이의 아름다운 사람이었습니다.

아주 젊은 남편이 아이를 안고 들어와서 그녀에게 키스하려고 몸을 굽혔습니다. 그가 그렇게 하는 그순간 그녀는 귀신들린 사람이 그렇게 하듯이 벌떡 일어나더니 반대편 쪽으로 자기 몸을 던졌습니다.그것은 정말 가슴찢어지는 일이었습니다.  그러자 그는 그 아기를 안고 가서 어머니에게 젖을 물리려고 아기 입술을 대었습니다. 또 다시 대단히 거친 행동이 벌어졌습니다. 그녀를 돌보고 있는 사람에게 제가 물었습니다.

"누군가 도와준 사람이 있습니까"?
"네 우리는 모든 종류의 도움을 받았었습니다".
"그렇지만, 어떤 영적인 도움은 없었습니까? " 라고 내가 물었습니다.

그 남편이
"도움이라고요? 칠주 동안이나 잠 한잠 자지 못하고 귀신들린 상태에 있었는데 우리가 하나님을 믿으리라고 생각하십니까? " 라고 소리 지르며 나가버렸습니다. 그러자 열 여덟 살쯤 되어 보이는 여자가 나를 바라보고 히죽 웃더니 문밖으로 나갔습니다.  이런 일을 통하여 나는 그 여자에 대한 동정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든지, 무엇인가 해 주어야했습니다.

나는 나의 믿음으로 하늘나라에 침투하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곧 그집 밖으로 나왔습니다.  나는 땅 위에서 이렇게 하나님께 기도하고 얻는 사람을 본적이 없었습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으로부터 무엇이든지 얻기를 원한다면 당신은 하늘나라 속으로 기도를 해야합니다(you will have to pray into heaven). 왜냐하면 거기에는 모든 것이 다 있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땅의 영역(earth realm)에 살면서 하늘나라로부터 무엇을 기대하고 있다면, 당신이 구하는 것은 결코 얻지 못할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서 내 믿음의 한계를 본것과 같이 다른 믿음이 와야만 합니다. 즉 부정될수 없는 믿음, 약속을 쟁취하는 믿음,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믿음이 와야만 합니다. 그 임재로부터 나는 다시 땅으로 돌아 왔습니다. 그러나 나는 다른사람이 되어 돌아왔습니다. 지옥이나 어떤것도 흔들수없는 그런 믿음을 하나님은 주셨습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이 여자에게서 나가라" !!

내가 이렇게 말하자 그녀는 침대 위에서 한바퀴 몸을 돌리고 잠이 들더니 열 네시간 후에 완전히 온전한 정신을 가진 ,완전히 온전한 사람이 되어 깨어났습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믿음으로 말미암지 않은 모든 것이 죄이기 때문에 나는 오직 믿음 이외에는 하나님을 기쁘게 할수 없다는 것을 알수있었습니다.

믿음으로 되도록 한것은 하나님의 원칙이요 이상이라는 것을 하나님은 우리가 알기를 원하십니다. 이런 관점에서 나는 "믿음의 창시자요 완성자이신 예수를 바라봅시다" 라고 말한 히브리서 12장2절의 아름다운 말씀을 내 생각속에 사랑하며 간직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믿음을 처음 만드신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통하여 세상을 처음 만드셨습니다. "모든 것이 그로 말미암아 창조 되었으니,그가 없이 창조된 것은 하나도 없다." 우리에게 이렇게 위대한 구원을 마련해 주는 너무나 풍성한 기쁨때문에 그는 살아있는 믿음의 창시자가 되셨습니다.

우리의 믿음의 창시자시요 완성자인 예수님을 바라보는, 이 살아있는 믿음의 원리를 통하여, 우리는 주님의 영으로 말미암아, 영광에서 영광으로 그와 같은 모습으로 변화됩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을 위해 여러분이 과거에 가졌던것보다 더 좋은 것을 가지고 계십니다. 당신의 과거의 것들은 잊어버리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위에서 부르신 그의 높은 부르심의 상을  향하여 달려감으로써 그분이 기꺼이 공급해 주려고 하는 매우 충만한 믿음과 능력과 생명과 승리로 나오십시오
       
스미스 위글 스워스의 승리하는 믿음 중 ---

스미스 위글스워스의 믿음에 대한 가르침 - 믿음에 이르는 길

이것이 바로 사람들이 부족한 부분입니다. 모든 믿음의 부족은 하나님의 말씀을 먹지 않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은 하나님의 말씀이 매일 필요합니다.

어떻게 믿음으로 사는 삶으로 들어갈 수 있을까요?
말씀에 가득한 살아있는 그리스도를 먹으십시오. 여러분이 그 영광스러운 사실과 살아계신 그리스도의 놀라운 임재에 사로잡히게 되면 하나님의 믿음이 여러분 안에서 솟아나오게 될 것입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생기고, 들음은 그리스도를 전하는 말씀에서 비롯됩니다."(로마서 10:17)

예수님은 사람들이 자기에 관하여 무엇이라고 말하는지 제자들에게 물었습니다.  그들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세례자 요한이라 하는 사람들도 있고, 엘리야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고, 예레미야나  예언자들 가운데 한 분이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그들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아보기 위하여 물어보았습니다.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베드로가 대답하였습니다. "선생님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십니다."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시몬 바요나야, 너는 복이 있다. 너에게 이것을 알려 주신 분은 사람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나의 아버지시다."

이렇게 간단한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분을 누구라고 합니까?   그는 누구입니까? 여러분은 베드로와 함께 "당신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십니다"라고 말하십니까? 어떻게 이것을 알 수 있었습니까? 그분이 알게 해 주셔야만 알 수 있습니다.

사람은 이것을 계시해 줄 수 없습니다. 이것은 내적인 계시입니다(an inward revelation).   그러면 여러분은 이렇게 외칠 수 있습니다.

"그분이 나의 것이라는 것을 나는 알고 있습니다! 그분은 나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분은 나의 그리스도이십니다!"
  
"아들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은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
(마태복음 11:27).

아들에 대한 강한 계시를 받을 때까지, 내적인 계시로 말미암아 당신이 항상 흔들리지 않고 튼튼히 서서, 조금도 동요하지 않고, 주님의 일에 항상 풍성한 그런 자리에 이를 때까지, 하나님으로부터 받을 때까지 하나님을 구하십시오.

이 계시는 놀라운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나는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겠다. 죽음(그리스어로 하데스, 곧 '죽은 자들이 모여 있는 세계')의 문들이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 내가 너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마태복음 16:18-19).

베드로가 반석이었습니까?  아닙니다. 몇 분 후에 그는 너무나 마귀로 충만하여서 그리스도께서는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라고 말해야 했습니다.

이 반석은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분이 그 반석입니다. 이를 확증하는 많은 성경 구절이 있습니다.그가 그리스도라는 것을 아는 사람에게는 누구나 그분은 믿음의 열쇠 즉 매는 능력과 푸는 능력을 주십니다.   여러분의 심령에 이 사실을 확실히 하십시오.



열정으로 하나님을섬기라

한국이 낳은 세계적 생물학자 석주명, ‘나비박사’로 잘 알려진 그는 자기 스스로에게 무서울 정도로 치열한 삶을 살았던 학자였습니다. 일제 강점기부터 삶의 끝에 이르기까지 오직 나비 하나만을 연구하기 위해 자기 일생을 바쳤지요. 평생 60만 마리가 넘는 나비를 채집하였으며, 논문 한 줄을 쓰기 위해 나비 3만 마리를 만졌습니다. 그의 논문은 자신의 손과 발로 나비를 직접 만져가며 써내려간 ‘삶의 노동’ 그 자체였습니다.

2003년 S그룹이 각 언론사에 실은 광고에, ‘236억 달러를 벌어온 여권’이라는 제목으로 초록색 빛을 띄는 아주 낡은 여권사진이 실린 적이 있습니다. “S전자 김 과장은 지난 한 해에만 여권을 두 번이나 바꿨습니다. 세계최고의 반도체기술로 유럽을 놀라게 하고, 미국을 공략하고, 중동에 디지털 바람을 일으키며 세계를 뛰어다녔습니다. 지난 2003년 벌어들인 외화는 모두 236억 달러! 올해도 S전자의 김 과장들은 세계를 뛰어다닐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세상에서 무언가를 이루는 사람은 끌려가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목적을 위해 창의적으로 또 열정적으로 삶을 살아갑니다.

신앙생활도 그 원리 자체는 다르지 않습니다. 제자들의 삶도 같은 원리입니다. 목적을 위해 열정으로 살아갈 때 하나님이 그 삶을 기억하십니다. 그러나 신앙인의 열정은 성공을 위한 열정과는 다릅니다. 석주명 박사나 S전자의 김 과장들에게도 비범함이 있지만,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저들이 감히 필적할 수 없는, 비교할 수 없는 목적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 부활의 증인이 되는 일입니다. 부활, 그것은 전대미문의 사건입니다. 그것은 온 세상에서 가장 흥미진진한 뉴스입니다.

부활은 교회로 하여금, 세상을 위하여 그리고 세상 안에서 선교하게 했습니다.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19∼20절)” 제자들은 이 일을 들고 세상을 향하여 뛰도록 부름을 받았습니다. 바라기는, 부활의 증인이 되는 일에 뛰어들 우리에게 뜨거울 열정이 불일듯 일어나기를!

6/28/2011

성경 공부는 계속,,

"일어나 우리를 도우소서 주의 인자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구원하소서."(시편 44편 26절)

가장 안전한 곳
로마가 이스라엘을 지배하고 있을 때 성경 공부를 금지시켰다.
만일 성경을 공부하다가 잡히면 사형에 처했다.
그러나 '아키바' 랍비는 계속 성경 공부를 시켰다.

사람들이 죽음이 두렵지 않느냐고 묻자 아키바 랍비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하였다.
배고픈 여우가 강 옆을 걸으며 보니 물속에는 물고기들이 이리저리 도망다니고 있었다.
이유를 묻자 어부들이 그물을 들고 자기들을 잡으러 다닌다고 말했다.

맛있는 생선요리를 기대하며 여우가 말했다.
“그러면 너희가 육지로 올라 올래? 내가 안전한 곳을 가르쳐줄게. 육지에는 어부들이 한 명도 없단다”

이말을 들은 물고기들이 말했다.
“이 어리석은 여우야, 너는 우리에게 이 물속보다 더 안전한 곳이 있다고 생각하니?”

'물고기에게는 위험하여도 물속이 좋은 것처럼 우리는 죽어도 성경 공부를 하지 않을 수 없다.'고 '아키바' 랍비는 말했다. 고 한다.

이기는 자에게는

하는 땅에 있는 아모리 족속의 신들이든지 너희가 섬길 자를 오늘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야훼를 섬기겠노라”(수24:15)

성경을 보면 예수님께서 약속하시기를 주님께서 싸워 이켜서 아버지 보좌에 앉은 것처럼 우리도 이기면 하나님 보좌에 앉게 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죄와 절망과 저주와 죽음은 이미 예수님께서 싸워 이기셨기 때문에 우리가 새삼스럽게 이러한 것들과 싸울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싸워 이겨야 할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자기 자신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자기 자신과 싸워 이기셨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요단강에서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고 성령에 이끌리어 광야에 나가서 시험을 당하셨습니다. 40주야를 금식하신 주님 앞에 마귀가 와서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면 이 돌들이 떡덩이가 되게 하라."고 했습니다.

40주야를 금식하신 주님께서는 마귀에게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식욕의 욕망을 이김으로 자신을 이기셨습니다.

그러자 마귀는 예수님을 성전 꼭대기에 서게 하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면 뛰어 내리라. 하나님께서 그 사자들을 보내어 너를 상치 않게 하시리라." 이말은 예수님이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 내려도 조금도 상하지 않는 기적을 보이면 사람들이 그 기적을 보고 예수님을 따를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을 시험치 말라"는 한마디로 마귀의 유혹을 물리치셨습니다.

마귀가 이번에는 예수님을 데리고 높은 산으로 가서 천하만국과 그 영광을 보이며 "내게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주리라."고 할때 예수님께서는 "사탄아, 물러가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영.혼.육의 모든 시험에서 자기를 극복하고 이기셨던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할 수만 있으면 이 잔을 내게서 떠나게 하옵소서. 그러나 내 뜻으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라고 하여 아버지의 뜻에 자기를 굴복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하여 주님께서는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도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 그리고 아버지의 뜻을 거역하려는 우리 자신을 이겨야 합니다. 이렇게 해서 우리가 이길 때 예수님과 함께 아버지 보좌에 앉게 되는 것입니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는 것과 같이 하리라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요한계시록 3:21,22)

풍성한 은혜와 꾸짖는 사랑

풍성한 은혜와 꾸짖는 사랑. 베드로가 적의 귀를 잘랐을 때 예수님께서는 이를 바로 고쳐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적을 고쳐주십니다. 심지어 그가 요청하지 않았는데도 고쳐주셨습니다. 게다가 이 '말고'라는 대제사장의 종이 예수님께 삼가를 표했다는 기록도 없습니다.

그리고 베드로에게 '칼을 집어 넣으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의 은혜와 자비가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이들의 행동에 동의하신 것이 아닙니다. 이 상황에서도 사랑으로 꾸짖으십니다. "너희도 나와 성전에 함께 있었으니 내가 이렇게 위험한 범죄자가 아닌 것은 너희도 충분히 알지 않느냐?" 라고 말씀하시면서 이들의 외식을 드러내십니다.

빛이신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드러내시고, 우리가 회개할 때 용서하시는 분이십니다. 하지만, 절대로 죄를 간과하지 않으시십니다. 왜냐하면 모든 죄에는 겨로가가 있고 심판 날에 모두 심판 받는 것을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어두움의 시간이 올 때 어떻게 해야 될까?(눅22:47-53)

예수님께서는 군병들에게 "이제는 너희 때요 어둠의 권세로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시간이 오기 전에 제자들에게 기도로 무장하라고 말씀하셨지만, 제자들은 슬흠을 못 이겨 잠에 빠져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이들은 믿음이 없는 상태로 어두움의 시간을 맞이합니다. 제자들은 무언가 해보려고 검을 들고 나서지만, 그들은 영적으로 전혀 준비가 되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결국 베드로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모두 잊고, 육의 힘으로 적을 이겨보려고 적의 귀를 자릅니다. 겉모습은 신실해 보였지만, 사실은 신실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우리는 겉모습으로만 신실하게 행동하지 말고, 우리의 본질 자체가 하나님 앞에 신실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너희가 깨어서 시험에 들지 않게 기도하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환란 가운데 해야 하는 것이 기도입니다. 우리에게 삶의 환난이 왔을 때, 깨어서 기도하지 않으면, 우리의 적이 왔을 때 정신없어 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테스트를 통과할 때 항상 예수님을 향한 초점을 놓치지 말고, 깨어서 믿음으로 뚫고 가야 합니다.

믿음과 행함

네 하나님 야훼를 섬기라 그리하면 야훼가 너희의 양식과 물에 복을 내리고 너희 중에서 병을 제하리니”(23:25)
  
흔히들 믿음은 볼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그러나 실제로 믿음은 눈에 보이는 것입니다왜냐하면 믿음에는 반드시 행위가 따르기 마련이고 그 행위가 우리 눈에 돋보이기 때문입니다.

마가복음 2 1 12절까지를 보면 우리는 그와 같은 믿음을 볼 수 있습니다어느날가버나움에 예수님이 오셨다는 소문이 퍼지자 사람들은 예수님을 보기 위해 몰려와 그 집을 꽉 채우고 말았습니다그런데 중풍병자를 친구로 둔 네 사람들도 이 소식을 들었고 그들은 "이 친구를 예수님께 데려가자그러면 중풍병이 고침을 받을 것이다"라고 의견을 모았습니다중풍병이 틀림없이 고침 받을 것이라는 그들의 믿음은 반석과도 같았습니다.

친구들은 들것에 병자를 싣고 예수님 계신 곳으로 왔습니다그러나 사람들이 너무 많아 발을 들여놓을 틈도 없었습니다그들은 정상적으로 예수님 앞에 간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습니다결국 그들은 묘안을 생각했는데 그것은 지붕을 뚫고 그 구멍을 통해 병든 친구를 예수님 앞으로 내려 놓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생각해 보십시오남의 지붕을 부수어 구멍을 뚫는데 그것도 누운 침상이 내려갈 만한 크기이니 적어도 석자 혹시 여섯자 정도는 뚫어야 했을 것입니다주인의 항의와 사람들의 비웃음과 비난도 보통이 아니었을 것입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모든 환경들은 그들의 치료의 확신을 요동시키지 못했습니다마침내 그들은 병든 친구를 예수님 앞에 내려 놓았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셨다"라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마태복음 18:20)고 했는데 다섯 사람이 한 믿음으로 그 행위를 보였으므로 기적이 일어나지 않을 까닭이 없습니다예수님께서 중풍병자에게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고 하시자 그가 일어나서 곧 상을 가지고 걸어 나갔으며 이를 지켜본 주위의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믿음은 행위를 통하여 실제로 나타나고 그때 하나님의 기적이 임하는 것입니다어떤 일을 하다가 인간의 힘과 능력으로 해결할 수 없는 경우가 있거든 먼저 여러분의 믿음을 행함으로 나타내 보이십시오 그때에 여러분의 생애 가운데 놀라운 기적이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야고보서 2:17)

6/27/2011

달콤한 복음....

"와서 나를 따르라"(막10:21)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영생으리 길을 묻는 부자 청년에게 정직히 말씀하셨다. 주님을 따르려거든 십자가를 져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십자가는 고통의 상징이다.
주님은 제자들이 세상에서 고난을 당할 것이라고 분명히 말씀하셨다.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요16:33)

처음부터 주님은 부자 청년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에게 순종하려면 불편과 희생을 각오해야 한다."
부자 청년은 자신의 육신적 욕구를 충족시키는 데서 오는 즐거움을 포기해야 했다. 그런데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는 율법에 비추어 문제가 없는 정당한 것들까지 많이 포기해야 했다.

주님은; 나를 따라오는 길을 거칠고 가파르다. 그 길을 처음부처 끝까지 폭풍우가 몰아친다. 고난의 산과 굴욕의 골짜기가 참된 그리스도인들을 기다리고 있다. 내가 말하는 십자가는 내 제자들에게 닥칠 고난과 희생을 상징한다. 나는 너희가 나에게 오기를 원한다. 하지만 나를 따를 때 치러야 할 비용을 계산해보아라.

그리스도께서는 이 시대를 위한 '다른 복음'을 만들지 않으셨다. 그런데 오늘날 많은 복음전도자들이 전하는 복음은 성경에서 멀리 벗어나 있다.

이 시대의 복음은 그리스도를 단 한 번의 상담으로 사람들의 문제를 전부 해결해주는 '우주의 심리학자'로 제시한다. 오늘날의 복음은 그리스도쎄거 요구하시는 십자가를 전하지 않는다. 그리스도를 따르기 위해 희생과 고통을 감수해야 한다고 전하지 않는다.

주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많은 대가를 치르는 것이다.

특수기도

“네가 호렙 산에서 네 하나님 야훼 앞에 섰던 날에 야훼께서 내게 이르시기를 나에게 백성을 모으라 내가 그들에게 내 말을 들려주어 그들이 세상에 사는 날 동안 나를 경외함을 배우게 하며 그 자녀에게 가르치게 하리라 하시매”(4:10)

여러분에게 신속히 해결해야 할 중대한 문제가 생기면 그때는 여러분들이 평소에 하던 것과 같은 기도로써는 응답받을 수 없습니다이때에는 특수 기도를 해야 하는데 특수 기도란 바로 금식 기도를 말합니다.


유대 민족들이 파사 나라에 포로로 잡혀갔던 적이 있습니다파사나라의 아하수에로 왕이 국무충리 하만의 모략에 넘어가 하만에게 유대 민족을 몰살하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유대 민족은 일대 위기에 처하게 되었습니다.이 소식을 들은 온 유대 민족은 베옷을 입고 잿더미 위에 올라 앉아 금식하며 부르짖기 시작하였습니다.그때 아하수에로 왕의 왕비는 유대인 에스더였습니다에스더는 사촌 오빠 모르드개와 의논하여 전국의 유대인들에게 사흘 동안 금식하여 주께 부르짖게 하고왕비는 왕에게 가서 자기 민족을 위해서 간청하기로 결정하였던 것입니다.


그 당시 왕실의 법도로서는 왕이 왕비를 부르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왕 앞으로 나갔다가 왕이 받아들이지 않으면 왕비는 사형을 당했습니다그러나 유대 민족을 위해서 에스더는 자신이 사흘 동안 금식하고 유대 민족들에게도 사흘을 금식하게 한 후 '죽으면 죽으리이다'라고 하며 왕 앞으로 나갔습니다.


에스더가 왕 앞에 나갔을 때 아하수에로 왕은 한달 동안 못 보던 에스더를 보니 너무 아름다운지라 마음에 감동되어 선뜻 금홀을 내밀었습니다왕이 금홀을 내밀면 왕비를 받아들인다는 뜻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바로 금식 기도가 효과를 본 것입니다에스더는 죽음을 면했습니다왕은 에스더가 너무 사랑스러워 "원한다면 나라의 반이라도 줄테니 원하는 것이 있으면 말하라"고 다정하게 말했습니다에스더는 그 자리에서 왕을 잔치에 초청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잔치에 참석한 왕에게 유대 민족의 슬픔을 호소하고 총리대신 하만의 불법을 고발하여 하만과 그 가족을 몰살토록 하고 온 유대민족이 전멸당하게 될 위기에서 구출하였던 것입니다이는 희생이 따르는 금식기도를 하나님께서 속히 들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은 일반적인 기도로써 문제가 해결 될 것 같지 않을 때에는 금식기도를 하여 응답받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당신은 가서 수산에 있는 유다인을 다 모으고 나를 위하여 금식하되 밤낮 삼일을 먹지도 말고 머시지도 마소서 나도 나의 시녀로 더불어 이렇게 금식한 후에 규례를 어기고 왕에게 나아가리니 죽으면 죽으리이다"(에스더 4:16)

아바드(일하다) - 일과 예배는 하나

히브리어 동사 "아바드(ybd)"는 "일하다"는 뜻이다. 동시에 "섬기다, 예배하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명사형 "에베드(ybd)"는 "종, 노예, 일군"이라는 뜻과 아울러 "예배하는 자"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또 다른 명사형 "아보다"는 "노동, 일"이라는 뜻과 "예배"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일하는 것이 어떻게 예배한다는 개념을 함께 갖게 되었을까? 일하는 것이 곧 예배인 이 오묘한 일치를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고대시대로 상상의 날개를 펼쳐보면 아마도 당시에 필드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노예들이 아니었을까 추측해본다. 왕족과 귀족들은 일하지 않았을 테고 대부분 직접 일하는 사람들은 왕과 귀족을 섬기는 노예, 하인들이었을 것이다. 자영농이 있었다고 해도 오늘날과 같은 동등한 자유로운 신분보다는 왕과 귀족들에게 자신들의 안녕을 의지할 수 밖에 없는 무척이나 종속적인 관계였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들이 일하는 것은 자연스럽게 왕이나 귀족을 섬기는 일이 된다. 그러기에 일하는 것은 곧 섬기는 것을 의미하게 되는 것일게다. 나아가 그 섬김이 왕을 위한 것이라면 왕을 신의 대리자로 여기던 시대에 왕을 섬기는 것은 곧 신을 섬기는 것, 예배하는 행위가 된다. 히브리인들에게 이 신은 하나님이었고, 나아가 결국 일하는 것은 영원하신 하나님을 섬기는 예배의 행위였다.

오늘날 우리는 일하는 것과 하나님을 섬기는 것을 구분한다. 어려서 주일학교에서 불렀던 찬송이 기억난다. "월화수목금토 엿새동안에는 나를 위해 일하고, 복주시는 주일 하나님의 날은 주를 위해 일하세." 그렇게 우리는 우리를 위해 일하는 것과 하나님을 위해 일하는 것을 구분했다. 그리고 열심히 구별된 날들 동안 주를 섬겼다. 그러나 이 성과 속의 구별은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행하는 우리의 일을 "거룩"으로부터 구별시켰다. 나아가 어떤 경우 이 일들은 그리스도인이지만 어쩔 수 없이 행해도 괜챦은 세속의 일로까지 여겨졌다.

종교개혁 시대에 마틴 루터가 말한 "만인제사장"론은 바로 성경 속의 일과 예배의 일치됨을 재발견한 중대한 사건이다. 세속의 일과 성직을 구분하던 시대에 루터는 모든 사람들이 성직자임을 천명하였다. 모든 사람이 거룩한 제사장이라는 것은 그가 하는 일이 어떤 것이든, 어떤 직업을 가지고 있든 그 일 자체가 예배가 된다는 의미가 아닌가? 그래서 직업이라는 뜻의 영어 단어 vocation은 "부르심(부르다)"를 의미하는 라틴어 "보카치오(vocacio)"에서 나오게 된 것이다. 다시 말해 직업은 하나님의 부르심이요, 하나님을 섬기는 통로이다. 그래서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직업은 "소명"이 된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상을 가졌던 우리의 조상들은 이러한 의미를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일까? 우리 말에 "천직"이라는 말이 있다. 하늘이 내린 직업이란 뜻인데, 소명, 부르심의 개념과 전혀 다르지 않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에게 필요한 것이 일과 예배의 하나됨, 일치, 천직 개념의 회복, 부르심의 재발견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오늘날 직업은 돈버는 방법으로만 인식되고 있다. 그리스도인들의 직업 선택에 있어서, 혹은 직업에 임하는 자세에 있어서 우리 시대에 회복해야 할 개념은 바로 직장에서 일하는 것, 장사하는 것이 모두 하나님을 섬기는 예배이며 우리가 부르심을 받은 일임을 인지하는 것이다.

나아가 가족들과의 관계, 부모에게 대하는 태도, 형제에게 대하는 태도 모두를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이요 교회의 일을 거룩하게 여겨 기쁘게 짐을 지는 태도와 다르지 않음을 공감하는 것이다. 이 두가지가 하나되는 "하나됨"의 영성, "일치"의 영성이 성경의 히브리어 단어 "예배"가 주는 하나님의 메세지인 듯 하다.

바라크(무릎꿇다) - 무릎꿇는 것이 축복

히브리어 동사에는 강화형이라는 형태의 동사가 있다. 일반적인 동사를 강화형으로 만들면 보다 강력한 의미를 갖는다. 예를 들어 "때리다"라는 동사를 강화형으로 만들면 "쳐부수다, 산산조각내다" 정도의 뜻을 갖게 되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동사를 강화형으로 만들어 보다 강화된, 강력한 행동 양식을 표현한다.

히브리어로 무릎꿇다는 뜻의 동사를 바라크 라고 한다. 그런데 이 "무릎꿇다"는 뜻의 동사를 강화형으로 만들면 어떤 뜻이 될까? 놀랍게도 "축복하다"라는 뜻이 된다. 어떻게 무릎을 꿇는 것이 축복하는 행위가 될 수 있을까? 무릎꿇는 것과 축복하는 것 간에 어떤 상관관계가 있는 것일까?

고대에 무릎을 꿇는다는 것은 "항복, 복종, 모든 것을 내어 놓는 것"을 의미했다. 일례로 한 나라의 왕이 타국의 왕앞에서 무릎을 꿇는 다는 것은 패배를 인정하고 항복했다는 뜻이며, 나아가 종이나 신하로서 새 왕을 섬기겠다는 의미였다. 동시에 나의 나라를 당신에게 모두 바친다는 온전한 헌사이기도 했다. 결국 항복은 정복당한 왕의 모든 소유를 새 왕에게 바치는 행위로 연결된다. 무릎꿇는 행위의 결국은 완전한 헌신, 봉사, 충성을 의미했다. 완전한 항복은 결국 정복자에게는 엄청난 축복이 되는 셈이다. 자신의 영토를 확장하고, 엄청난 부를 쌓게 되었으니 말이다.

하나님 앞에 우리가 무릎을 꿇는다는 것은 이와 같이 자신의 모든 것을 하나님께 바치겠다는 온전한 헌신을 의미한다. 중요한 것은 그러한 헌신이 우리가 하나님을 축복하는 행위가 된다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최상의 축복은 그 분 앞에 무릎꿇는 것임을 "바라크"는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한가지 주목해야 할 점은 무릎꿇는 것이 축복을 "받는" 것이 아님을 인지해야 한다. 무릎꿇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축복하는 행위이지 하나님께로부터 축복을 받는 행위가 아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헌신은 하나님을 위한 것이어야지, 우리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흔히들 하나님께 나 자신을 희생하면 그에 상응하는 하나님의 축복의 보상이 있으리라고 기대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축복을 주시는 것은 하나님의 절대주권이지 우리의 헌신에 자연적으로 수반되는 결과물은 결코 아니다. 무릎꿇음으로, 헌신함으로 하나님을 축복하는 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피조물로서 창조주에게 드릴 합당한 경배와 예물이다.

6/25/2011

큰 용사가 되려면...

“그러므로 이제는 야훼를 경외하며 온전함과 진실함으로 그를 섬기라 너희의 조상들이 강 저쪽과 애굽에서 섬기던 신들을 치워 버리고 야훼만 섬기라”(수24:14)
 
미디안 사람들이 이스라엘을 침범하여 곡식과 짐승과 제물을 마구 빼앗아 갔기 때문에, 하루는 이스라엘 백성들 중에 있는 기드온 이라는 사람이 미디안 사람의 눈을 피하여 몰래 포도주 틀에서 밀을 타작하고 있었습니다. 그 때 하나님의 천사가 기드온에게 나타나 이렇게 말했습니다.    

"큰 용사 여 여호와(야웨)께서 너와 함께 계시도다"(사사기 6:12)

하나님께서는 많은 이스라엘 백성들 중에서 왜 기드온을 택하셨을까요? 기드온에게는 하나님께서 사용하실 수 있는 자질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명실공히 하나님께서 인정하는 큰 용사였습니다.
 
기드온의 어떤 점이 큰 용사라는 칭호를 받기에 합당했을까요?
그것은 바로 기드온의 사상이었습니다. 천사가 기드온에게 와서 "큰 용사여 여호와(야웨)께서 너와 함께 계시도다"라고 하자 기드온은 그에게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나의 주여 여호와(야웨)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면 어찌하여 이 모든 일이 우리에게 미쳐나이까 또 우리 열조가 일찍 우리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야웨)께서 우리를 애굽에서 나오게 하신 것이 아니냐 한 그 모든 이적이 어디 있나이까"(사사기 6:13)

기드온의 이 말은 '만일 하나님께서 우리와 같이 계시면 어찌하여 우리가 원수들에게 짓밟히고 약탈당하여 헐벗고 굶주리며 노숙하겠습니까? 나는 하나님께서 복의 근원이 되시며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되 풍성히 주시는 좋으신 하나님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와 같이 계시지 않고 우리를 버리셨기 때문입니다.'라는 뜻입니다. 

이러한 기드온의 사상은 성경 중심의 사상입니다.그는 하나님의 말씀위에 그의 사상을 세워 놓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잘 알수 있었습니다. 기드온은 하나님에 대하여 올바르게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 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요한삼서1:2)고 하신 말씀처럼 우리의 영육간에 풍성한 복을 주시길 원하시는 좋으신 하나님이심을 알았습니다.

이렇게 기드온이 하나님에 대해 올바르게 알고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를 사용하셨던 것입니다. 만일 오늘날 우리들도 기드온처럼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사상을 갖게 된다면 틀림없이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큰 용사가 될 것입니다.
 
"여호와(야웨)의 사자가 기드온에게 나타나 이르되 큰 용사여 여호와(야웨)께서 너와 함께 계시도다"(사사기 6:12)

6/24/2011

피의 성분

나는 우리 아들이 보는 책 퀴즈 과학상식이라는 책을 보면서 피의 성분이 이렇구나! 깨달으면서 동시에 우리 몸에 피가 있듯이 우리의 영적 삶에도 예수의 피가 역할을 하고 있음을 생각해 본다.
피는 구성되어 있기를 혈장(55%), 백혈구와 혈소판(1%), 적혈구(44%)로 되어 있다.
피는 온 몸 구석구석 흘러 생명을 유지시켜 주는 일을 한다.
피는 우리 몸의 필요한 산소와 영양분을 공급한다.

적혈구 : 적혈구는 허파에서 얻은 산소를 몸 구석구석으로 운반하는 일을 하고 있다.
혈장 : 우리 몸의 세포들에게 영양분을 실어 나른다.
혈소판 : 우리 몸에 상처가 났을 때, 더 이상 피가 나지 않도록 막아주는 일을 한다.
백혈구 : 우리 몸 안에 침투한 나쁜 병균을 잡아먹는 일을 한다.

우리 몸의 나쁜 병균을 주는 세포를 잡아먹는다.
그래서 식균세포라고도 한다. 병균을 잡아먹는 백혈구는 병균과 함께 죽는다.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짓고 나서 나뭇잎으로 치마를 해서 중요한 부분을 가렸다.
그런 모습을 보신 하나님은 가죽옷을 입히신다.
가죽옷을 입힌다는 것은 어떤 동물의 희생이 있었다는 것이다.
지금은 가죽 기술이 좋아졌지만 나는 중학교를 졸업하고 취직을 해서 일을 했다.
처음으로 한 일이 가죽 허리띠를 만드는 일을 했다.
공장으로 출근해서 퇴근할 때까지 가죽에서 피비린내가 심했고 온 몸에 피비린내가 베겼다.

최초의 이 가죽옷에는 아마도 피비린내가 나지 않았을까?
피비린내를 통해서 우리는 예수의 피가 나를 감싸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예수님의 피가 우리 영에 흐를 때 피의 역할은 산소와 영양분을 공급하여 우리의 생명을 유지해주듯이 우리의 영이 살기 위해서는 예수의 피에서 흐르는 산소와 영양분이 우리를 살게 하는 것이다.

예수님의 피 속에는 적혈구가 있어 우리 영의 생명을 유지하도록 한다.
예수님의 피 속에 있는 혈장은 영이 자라나기 위해서 영양분을 공급한다.
예수님 속에 흐르는 피는 혈소판이 있다.
사탄이나 원수의 공격 받았을 때 더이상 피가 흐르지 않도록역할을 하고 있다.
예수님의 피 속에 있는 백혈구는 사탄이나 원수의 공격에 당하고 살지 않기 위해 잡아 먹어 버린다.

그래서 성경은 사탄을 가리켜 말하기를 "우는 사자" 같다고 한다.
아무 힘을 우리에게 끼칠 수 없다.
짖기만 요란하게 짖고 있다.

이 예수의 피 아래 있는가?
즐겨 부르는 찬양 중에 예수의 피에 관련된 찬양이 많다.
"1.  나의 죄를 씻기는 예수의 피밖에 없네 다시 정케 하기도 예수의 피밖에 없네
2. 나를 정케하기는 예수의 피밖에 없네 사죄하는 증거도 예수의 피밖에 없네
3. 나의 죄 속하기는 예수의 피밖에 없네 나는 공로 없으니 예수의 피밖에 없네
4.  평안함과 소망은 예수의 피밖에 없네 나의 의는 이것 뿐 예수의 피밖에 없네
5.  영원토록 내 할말 예수의 피밖에 없네 나의 찬미 제목은 예수의 피밖에 없네

[후렴]  예수의 흘린 피 날 희게 하오니 귀하고 귀하다 예수의 피밖에 없네"
이 찬양의 진가를 오늘에야 발견한다.
예수의 피 속에 사는 오늘이 되기를 소망하며....

6/23/2011

은밀한 골방은 우리의 온 맘을 가지고 나아오는 곳입니다!

"여호와의 증거를 지키고 전심으로 여호와를 구하는 자가 복이 있도다!(시편 119:2)

여러분이 (골방 기도)습관을 가지고 산만함을 닫아버렸다면, 하나님은 여러분이 전심으로 자신을 구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나 네가 거기서 네 하나님 여호와를 구하게 되리니 만일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그를 구하면 만나리라"(신명기 4:29).

모세가 이스라엘에게 유언을 했습니다. 그는 위대한 자취와 시련이 사람들 앞에 있음을 알았으며 그들에게 승리의 열쇠를 주었습니다."이 모든 일이 네게 임하여 환난을 당하다가 끝 날에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와서 그 말씀을 청종하리니(여러분의 하나님은 자비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은 여러분을 버려 두지 않으시며 그들에게 하신 약속을 잊지도 않으십니다"(30 -31).

모세는 또한 경고했습니다, "너희가 어떠한 일을 당하든 불평하거나 불만을 터트리지 말라. 육으로 되돌아가지 말라. 주께 향하여 기도하며 그를 구할지라! 그분은 여러분이 전심으로 구하면 만나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골방에 있다고 하는 것은 여러분 자신을 내놓는 한가지 목적만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온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은 여러분 안에 있는 모든 것, 즉 마음, 영혼, 심장 그리고 힘이 하나님께로 닿는 다는 것을 말합니다. 때때로 여러분은 이것을 한 마디도 하지 않고 할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의 하늘 아버지에게 그러한 모든 문제는 여러분이 가진 모든 것을 가지고 그분께 나아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갚아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여러분의 삶을 지시하십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길 우리가 은밀한 골방으로 들어갈 때 산만케 하는 모든 것을 닫고 하나님께 자신을 완전히 내어놓으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보응해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마태복음 6:6).

은밀한 골방의 능력으로부터 많은 보응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특히 저에게 성령이 계시하는 보응이 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여러분이 이것을 알기를 바랍니다!

성경은 여호사밧을 "저는 전심으로 여호와를 구하던"(역대하 22:9) 사람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가 여호와를 구했기에 그는 자신의 왕국을 35년간 다스렸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능력과 이스라엘의 모든 적들에 대항할 수 있는 능력을 가졌습니다

심지어 온갖 곳에서 공격이 있다해도, 사람들이 여호와를 속히 구하므로 하나님은 적들을 속히 꺽으셨습니다. 혼란이나 혼동이 없이 항상 인도하심이 있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들이 여호와를 구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호사밧의 아들 아하시야가 왕이 되었지만 그는 여호와를 구하지 않았습니다. 아하시야는 예후에의해 살해되었으며 "아하시야의 집이 약하여 왕위를 지키지 못하게 되니라"(9). 기도하지 않았기 때문에 아하시야는 그의 아버지처럼 왕위를 지키지 못했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왕국은 여러분의 가정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하나님을 구하는 매일 매일의 습관인 기도의 골방을 갖지 않았다면, 여러분은 가정을 인도할 능력이 없습니다. 악마는 직업, 가족, 관계 등 이 모든 것에 혼란을 가져올 수 있습니다! 여러분도 알 듯이, 은밀한 골방의 능력은 여러분의 삶, 가족, 직업, 교회 안의 모든 혼동과 무질서에 대항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구하는 모든 사람들을 위한 복음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이 전심으로 계속해서 그분을 구한다면 항상 영의 양식을 풍성히 받을 것을 약속하십니다.

"사론은 양떼의 우리가 되겠고 아골 골짜기는 소떼의 눕는 곳이 되어 나를 찾은 내 백성의 소유가 되려니와"(이사야 65:10).

그러나, 하나님을 구하지 않는 사람들은 배고프고 결코 만족함이 없이 목자를 찾아 헤매지만 아무 것도 없고 굶주리며 목마르게 합니다. 성경은 그들은 "주릴 것이니라 ... 갈할 것이니라 ... 수치를 당할 것이니라"(13). "(그러나) 나의 종들은 ... 먹을 것이로되 ... 마실 것이로되 ... 기뻐할 것이로되"(13-14). 주께 자신의 영혼을 내어놓고 모든 것에서 주를 구하며 하나님 안에서 사는 사람들은 능력, 권위, 영적 능력, 영과 마음의 양식을 갖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영적 휴식과 충만함 가운데로 인도하십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구할 때 볼 수 있는 능력 즉, 여러분의 삶에 일어나는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여호와를 찾는 자는 모든 것을 깨닫느니라"(잠언 28:5). 하나님을 구하고 기도하십시오, 그러면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직면하는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게 하십니다! "하나님을 찾는 너희들아"(시편 69:32).

시편 91편은 많은 신자들이 좋아하는 성경 구절입니다. 여기서 위대한 약속을 볼 수 있습니다! 시편 전체는 하나님을 구하며 살아가는 원인이 되는 능력의 인도를 받고 살아갈 수 있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이런 기도의 습관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모든 악마의 덫, 공포, 연약함 그리고 재앙에 대항하는 능력을 가지게 됩니다 - 기도로 이겨내고 그 결과를 얻는 능력을 갖게 됩니다!

그러나 이런 모든 것에는 한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1절에서 보면 "지존자의 은밀한 곳에 거하는 자는 전능하신 자의 그늘 아래 거하리로다"라고 하였습니다. "거하다" "살다"라는 의미입니다. 지존자의 가장 은밀한 곳인 기도의 골방에서 살고 계십니까? 여러분의 가정은 하루의 어느 때입니까?

여러분은 아마도 "모든 시간을 하나님과 함께 지내야 한다는 의미가 아닙니까?" 하고 의아해 할 것입니다. 말하자면 그렇습니다! 바울은 우리에게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다윗은 "여호와와 그 능력을 구할지어다 그 얼굴을 항상 구할지어다"(역대상 16:11)라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이 깨어 일어나는 모든 시간에, 여러분의 마음을 하나님께 두십시오. 그리고 그분과 대화하십시오. 언제나 그분을 갈망하십시오. 하루의 모든 것을 여러분의 영 안에서 그분을 만나십시오, 그러면 그분의 능력을 알게되며 여러분의 모든 발걸음을 인도하십니다! 아멘

주 예수님 어서 오셔서 통치하시옵소서!

계19:6-9 "또 내가 들으니 허다한 무리의 음성도 같고 많은 물 소리도 같고 큰 뇌성도 같아서 가로되 할렐루야 주 우리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가 통치하시도다 우리가 즐거워하고 크게 기뻐하여 그에게 영광을 돌리세 어린 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그 아내가 예비하였으니 그에게 허락하사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게 하셨은즉 이 세마포는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하더라 천사가 내게 말하기를 기록하라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청함을 입은 자들이 복이 있도다 하고 또 내게 말하되 이것은 하나님의 참되신 말씀이라 하기로" ~ 아멘.

1. 악한마귀는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합니다
2. 주님외의 다른 통치는 실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3. 주님은 은혜 안에서 인격적으로 우리를 지키시고 보호하시고 인도해 주시는데 이것이 주님의 통치입니다.
4. 주님자체가 행복의 왕, 의의 왕이니 주님을 따라가면 영광을 얻습니다.
5. 죄악세상 벗어나면 온전히 천국의 통치를 받는데 온전히 사랑과 행복을 누리는 곳이 천국입니다.
6. 성령이 거대한 바람같이 우리를 휘몰아칠 때 온전히 주의 뜻대로 인도되는데 그때가 제일 행복한 때입니다.
7. 핵심적인 말씀에 순종했을 때 큰 기름부음을 부어주시는데 이것이 영광이고 통치입니다.
8. 성령 안에서 우리를 통치하시는데 통치하신 만큼 의롭게 되고 변화되고 영화롭게 됩니다.
9. 주님 어서 오시옵소서!! 주기도문대로 간절하게 기도해야 합니다.
10. 주님의 나라를 위해 헌신하고 수고하고 충성한 사람들에게 상을 주십니다.
11. 주님께서 의로 백성들을 통치하시려고 임하시니 기뻐하고 즐거워하세~

6/22/2011

예언적인 꿈과 환상의 유형들

“하나님이 가라사대 말세에 내가 내 영으로 모든 육체에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는 꿈을 꾸리라”(행 2:17).

마지막 때에는 예언과 더불어 꿈과 환상이 교회와 성도들에게 충만하게 될 것이다. 주님의 음성을 잘 듣기 위해 예언적인 꿈과 환상에는 어떤 유형들이 있는지 살펴보자.

1. 환상의 유형들
환상은 꿈과 달리 잠이 든 상태가 아닌 의식이 깨어 있는 중에 받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이 체험하는 환상에는 ‘내적 환상’과 ‘열린 환상’, 이렇게 두 가지 기본적 유형이 있다.

내적 환상
내적인 환상은 주변에 있는 사물들 같이 실제로 보이는 것처럼 강력하게 느껴지지는 않지만 마음에 그려보는 어떤 것과 같다. 내적 환상에는 ‘영적인 환상’과 ‘비몽사몽간의 환상’ 두 가지 형태가 있다.

(1) 영적인 환상
이것은 어떤 사람이 그의 영적인 세계에서 환상을 갖거나 어떤 것을 보게 되는 것을 말한다. 영적인 환상의 한 예를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 바울이 겪었던 경험에서 찾아볼 수 있다.

바울은 기독교인들을 핍박하기로 작정하고 다메섹으로 가던 도중 갑자기 대낮의 해보다 밝은 빛이 나타나 자신의 주위를 비추는 것을 보게 되었는데, 당시 그는 자신을 향하여 말하는 한 목소리를 듣게 된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하시거늘 대답하되 주여 뉘시오니이까, 가라사대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행 9:4,5).

여기에서 바울은 자신의 육적인 눈으로는 예수님을 볼 수 없었으나 영적인 영역에서 그분을 보았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영적인 환상’으로서 환상의 첫 번째 유형이다. 가장 하위 형태의 환상이라고 말할 수 있다.

(2) 비몽사몽간의 환상
‘영적인 환상’보다 좀 더 높은 차원의 환상이 있는데, 비몽사몽간에 나타나는 환상이 그것이다. 이러한 환상의 예는 바울이 예루살렘에 처음 갔을 때의 체험에서 볼 수 있다. 그는 사도행전 22장에서 이렇게 말한다.

“후에 내가 예루살렘으로 돌아와서 성전에서 기도할 때에 비몽사몽간에 보매 주께서 내게 말씀하시되 속히 예루살렘에서 나가라 저희는 네가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말을 듣지 아니하니라 하시거늘”(행 22:17,18).

사람이 비몽사몽간에 빠지면 육체적인 감각은 일시정지하게 된다. 그는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그가 신체적으로 접촉하고 있는 것들을 느낄 수 없다. 이것은 의식을 잃은 상태가 아니라, 다만 육체적인 것보다 영적인 의식이 더 깨어 있는 것일 뿐이다. 다음은 이민 교회인 아틀란타제일장로교회의 서삼정 목사님의 간증이다.

“6?25전쟁 때 피난처에서 고향에 돌아온 직후였다. 미군들이 마을 뒤 개천에 주둔해 있던 어느 날 밤, 어머니와 잠깐 누웠다가 미군 세 명을 환상으로 보았다. 가운데 사람은 키가 조금 컸다. 나는 눈을 감은 채 어머니에게 환상을 이야기 했다. 어머니는 급히 일어나 건넌방으로 건너갔고, 잠시 후 누군가 방문을 두드렸다. 문을 열어보니 환상에서 보았던 그 군인 세 명이었다. 환상에서 본 대로 가운데 군인이 키가 컸다. 당시 미군들은 밤마다 젊은 여자들을 찾아다녔는데, 어머니는 그렇게 위기를 모면한 것이었다.”(서삼정,「성령의 음성을 들어야 예수 믿는 맛이 난다」, 두란노, P.50)

서 목사님이 경험했던 환상은 비몽사몽간의 환상이었다. 사도 베드로 역시 비몽사몽간에 나타나는 환상을 체험하였다. 하느님께서 베드로에게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가지고 가라고 말씀을 하셨던 때이다. 베드로가 지붕에 올라가 기도하고 있을 때 거기서 그는 ‘비몽사몽간에 빠지게’ 되고 하늘이 열리는 것을 목격하게 된다.

 “…베드로가 기도하러 지붕에 올라가니 시간은 제 육시더라 시장하여 먹고자 하매 사람이 준비할 때에 비몽사몽간에 하늘이 열리며 한 그릇이 내려오는 것을 보니…”(행 10:9~11).

그는 영적인 세계의 영역으로 들어가서 이러한 것을 보고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우리는 성경으로부터 베드로와 바울이 비몽사몽간에 빠져 영적인 세계를 보았다는 것을 살펴보았다. 이들이 경험한 비몽사몽간의 환상은 두 번째로 높은 형태의 환상이다.

열린 환상
열린 환상은 최고의 경지에 이르는 환상으로서 ‘눈을 뜬 상태에서 보는 환상’이다. 이것은 사람의 육체적 감각기능이 정지되는 것도 아니고 눈도 감지 않은 상태이다. 즉 모든 육체적 기능을 갖고 있으면서 동시에 영적인 세계를 맛보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열린 환상은 주위의 다른 어떤 것과 똑같이 실제적으로 보이는 환상이다. 천사의 방문과 같은 것이 이 범주에 해당된다. 우리는 천사들을 실제의 차원에서 ‘볼 수’ 있다. 주의 천사가 기드온을 방문했던 것 등이 이에 대한 예이다(삿 6:11). 고넬료는 “환상 중에 밝히 보매 하느님의 사자가 들어와 가로되” 그의 이름을  부르는 것을 체험했다(행 10:3).

케네스 해긴(Kenneth E. Hagin)은 그가 체험한 눈을 뜬 상태에서 본 환상을 다음과 같이 간증한 바 있다.

“…눈을 뜬 상태에서 나타난 환상 속에서 평상시 여느 사람과 다름없이 분명하게 (예수께서) 나의 방으로 들어오시는 것을 보았다. 나는 내 침대 옆에 그분이 앉는 것을 보았으며 또한 나는 내가 평상시에 들어왔던 여느 사람들의 목소리와 마찬가지로 그분의 목소리를 분명하게 들을 수 있었다.”(케네스 해긴, 에태해 역,「나는 환상을 믿는다」, 목양세계선교회, P.161)

이처럼 ‘눈을 뜬 상태에서 보는 환상’은 나의 육체적 기능이 모두 정상적으로 활동하고 있는 가운데 영적인 세계를 동시에 경험하는 아주 높은 차원의 환상이다. 이러한 환상을 열린 환상이라고 한다. 우리가 성령으로 충만하다면 내적 환상은 물론 열린 환상과 같은 높은 차원의 환상도 체험도 할 수 있을 것이다.

2. 예언적 꿈의 유형들
꿈의 효능은 의식의 방해가 최소화된 가운데 -잠이 든 상태이므로- 하느님께서 빠른 동영상처럼 그분의 뜻을 보여주는 데 있다. 그리스도인들이 체험하는 꿈은 대개 다섯 가지 유형으로 구별할 수 있다.

 (1) 생각나게 하는 꿈
어느 날 당신이 휴가를 떠나는 꿈을 꾸었다. 그런데 꿈속에서 당신은 여권을 갱신하지 못했고 챙겨야 할 소지품도 잊고 떠났다. 만약 당신이 이러한 꿈을 꾸었다면 그것은 “여행을 떠나기 전에 다시 한 번 모든 것을 확인해 보라”는 신호이다. 이렇게 나의 주의를 환기시켜주는 꿈을 무시해 버린다면 어려움이 닥친다는 뜻으로 해석 할 수 있다.

또한 우리는 난관에 처한 모습의 영적지도자나 지인(知人)을 꿈에서 만날 때가 있다. 이것은 하느님이 우리에게 잊지 말고 그를 위해 기도해 주라는 신호이다. 이러한 하느님의 음성을 무시하면 내가 꿈에서 본 그 사람들은 어려움 속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만다.

성경에서도 이러한 예를 확인할 수 있다. 하느님은 아브라함에게 ‘열국의 아비’라는 약속을 생각나게 하였다(창 15:1~6, 12~16). 하느님은 솔로몬의 두 번째 꿈에서 불순종의 결과에 대한 책임을 생각나게 했다(왕상 9:2~9, 왕상 3:5~15).

 (2) 경고하는 꿈
꿈속에서 자동차 사고를 당하거나 계단에서 넘어져 다치는 경험을 했다면, 나에게 닥칠 수 있는 사고를 경고하시는 하느님의 음성일 수 있다. 이러한 사고는 누구에게나 실제로 일어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꿈에서 체험한 것을 무시하지 말고 조심스럽게 대처를 해야 한다. 즉 계단을 오르내릴 때 조심하고 운전하는 습관이 나쁘다면 그것을 고치는 지혜가 필요하다.

창세기 31장 24절에 하느님은 야곱의 외삼촌 라반에게 나타나서 “너는 삼가 야곱에게 선악 간에 말하지 말라”고 했다. 또 마태복음 1장 20절에도 주의 사자가 나타나서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 말라…”고 했다. 이 외에도 하느님이 아비멜렉 왕에게 경고한 꿈이 있다(창 20:2~7).

(3) 예언적 꿈
미래에 성취될 사건을 꿈에서 경험하였는데, 실제로 자신의 생애 가운데 그대로 이루어질 수 있다. 창세기 37:5~11에 어린 요셉의 꿈이 결국 이루어졌다. 나단 선지자가 잠자고 있는데 하느님의 말씀이 임하여 다윗 왕의 아들이 성전을 건축할 것이라고 했다(삼하 7:4~17). 분명 그것은 나중에 성취될 사건이었다. 따라서 예언의 꿈을 받은 사람들은 그것을 놓고 말하기보다 더 많은 기도를 해야 한다.

기도원 원장이었던 모 목사는 별세하기 수년 전에 자신의 장래에 대한 예언적 꿈을 꾸었다. 어느 날 그는 꿈속에서 큰 나무에 원숭이 한 마리가 높이 올라가는 것을 쳐다보면서 “아이고, 저 놈 좀 봐라. 엉덩이가 빨갛구나!” 하며 큰소리로 웃고 있었다. 그러는 중에 갑자기 원숭이가 나무에서 뚝 떨어져 죽었다. 그가 가까이 가서 땅에 떨어져 죽은 원숭이를 살펴보니 원숭이가 아니고 자기였다. 그는 이 섬뜩한 꿈을 꾼 지 얼마 후 건강에 문제가 생겨 모든 사역을 중단하고 몇 년간 투병하다가 결국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슬프게도 그가 꾸었던 꿈은 교만으로 말미암아 추락할 것이며 죽게 될 것이라는 예언적 꿈이었다.

다음은 아브라함 링컨(Abraham Lincoln)의 꿈이다. 때는 1865년이다. 미국 16대 대통령 아브라함 링컨이 백악관에서 잠을 자고 있었다. 그 때 꿈에서 사람들이 흐느끼며 우는 소리를 들었다. 그는 그 소리를 따라서 계단을 내려갔고 한 사람이 죽어 관에 들어있는 것을 보았다. 링컨은 궁금해서 옆에 서 있는 경호원에게 관 속에 죽어있는 사람이 누구인가를 물었다. 경호원이 대답하기를 관 속에 있는 사람은 총에 맞아 죽은 미국의 16대 대통령이라고 했다. 이 꿈을 꾼 후 얼마 있다가 아브라함 링컨은 암살되었다.

(4) 반복적인 꿈
잠자는 가운데 이례적으로 반복되는 꿈을 꿀 때도 있다. 이 꿈이 내용에 따라 기쁨을 주기도 하고 괴로움을 주기도 한다. 창세기 41:1~7에 바로 왕은 임박한 기근에 대한 꿈을 반복적으로 꾸었다. 느브갓네살 왕 또한 반복적인 꿈을 꾸었다. 이것은 세상 지도자들이 자신의 책임을 다할 시기라는 신호이다(단 2:1).

때는 1912년, 타이타닉(the Titanic)호라고 하는 배가 영국에서 뉴욕으로 떠날 때였다. 그 때 한 소녀가 꿈을 꾸었다. 거대한 배가 가라앉는 꿈이었다. 그 소녀는 사람들의 비명소리에 잠에서 깨어났다. 그는 다시 잠을 청하였다. 같은 꿈을 다시 반복하여 꾸었다. 또 타이타닉 호를 타기 위해 예약하여 놓은 사람이 꿈을 꾸었다. 그는 자기가 타려고 하는 배가 꿈에서 기울어져 물속에 잠기는 것을 서너 번 꾸었다. 그 때 사방에서 사람들의 비명소리를 들었다. 이 꿈으로 인해 그는 예약을 취소하고 그 배를 타지 않았다. 이러한 꿈이 있은 지 며칠 후 타이타닉 호는 침몰하였고 1500명의 사람들이 죽었다.

(5) 악몽
꿈에는 보통 두 가지 면이 있다. 하나는 두려움과 불안을 주는 꿈이고, 다른 하나는 기쁨과 기대감을 갖게 하는 꿈이다. 악몽은 기분 좋은 꿈은 아니지만 하느님이 주시는 꿈의 유형엔 ‘악몽’도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욥기 7장 14절에 “주께서 꿈으로 나를 놀래시고 이상으로 나를 두렵게 하시나이다”라고 했다. 느브갓네살 왕 역시 꿈을 꾸고 나서 두려움과 번민에 휩싸였다(단 4:5). 빌라도의 아내 또한 마음에 괴로움을 주는 꿈을 꾸었다. “오늘 꿈에 내가 그 사람(예수)을 인하여 애를 많이 썼나이다”(마 27:19).

이처럼 꿈은 기쁨만을 주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 괴로움을 주는 것도 있다. 우리는 이 모든 꿈을 주의 깊게 생각하며 나 자신을 뒤돌아보아야 한다. 거기에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예언적 메시지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사람이 침상에서 졸며 깊이 잠든 때에나 꿈에나 이상 중에 사람의 귀를 여시고 인 치듯 교훈하시나니 이는 사람으로 그 꾀를 버리게 하려 하심이며 사람에게 교만을 막으려 하심이라”(욥 33:15~17).

하느님께서는 다양한 방법으로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그리고 주님은 자기 백성들이 그 분의 모든 의사소통 수단에 익숙해지기를 원하신다. 꿈과 환상은 하느님과 인간 사이에 이루어지는 커뮤니케이션의 한 방식이다. 하느님은 여러 가지 방법으로 말씀하시며 그러한 방법들 가운데 한 가지로 어떤 때는 꿈을, 때로는 환상을 선택하신다. 따라서 우리는 꿈과 환상의 여러 가지 유형들에 관해 배울 필요가 있다.

“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히1:1,2

예언적 꿈

인류는 창조 때부터 꿈을 꾸어 왔다. 꿈이란 수면하는 동안에 떠오르는 일련의 생각, 영상, 혹은 감정들이다. 하느님께서는 오랜 세월동안 꿈을 통해 사람들과 의사소통을 해 오셨다. 꿈이 이렇게 하느님과 그의 백성들 사이에서 유효한 통로 역할을 했다는 사실은 성경에 등장하는 무수한 꿈 이야기를 통해 확실히 알 수 있다.

하느님의 도구로서의 꿈
“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히 1:1,2).

유대인의 지혜서인 탈무드에 이런 말이 있다. “하느님이 매일 밤 우리에게 연애편지를 보내시는데 우리는 봉투도 뜯지 않고 버린다.” 꿈에 관한 얘기다.

하느님께서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그리고 주님은 자기 백성들이 그 분의 모든 의사소통 수단에 익숙해지기를 바라신다. 꿈은 하느님과 인간 사이에 이루어지는 커뮤니케이션의 한 유형이다. 하느님은 다양한 방법으로 말씀하시며, 그러한 방법의 하나로 꿈을 선택하신다. 신디 제이콥스는 이렇게 말한다:

“모든 교회에서 일반적으로 꿈을 경계해 왔다. 그러나 꿈을 무시하게 되면, 오늘날 하느님의 음성이 그분의 백성들에게 말씀하시고자 하는 모든 성경적인 방법 중 한 가지를 완전히 끊어버리는 것이 된다.”

실제로 오늘날 ‘말씀 중심’의 교회를 자처하면서도 예언적 꿈을 부정하는 ‘비성경적’ 교회들이 얼마나 많은가? 실로 그것은 우리의 믿음 생활에 아주 큰 영적 손실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마지막 시대로 접어들면서 하느님께서는 이 초자연적 의사소통 수단의 사용을 전례 없이 가속화시키고 계신다.

오늘날에도 꿈은 유효한가?
꿈은 다음 두 가지 측면에서 오늘날에도 유효하며, 종말이 가까울수록 점차 그리스도인들의 ‘일반적 체험’이 될 것이다.

마지막 시대를 향한 약속
꿈은 유사 이래 그 어느 때보다도 오늘날 우리와 더 깊은 관련이 있다. 왜냐하면 이 시대는 ‘마지막 때’이기 때문이다. 성경은 마지막 시대에 우리가 ‘꿈을 꾸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말세에 내가 내 영으로 모든 육체에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는 ‘꿈’을 꾸리라”(행 2:17).

이 구절이 의미하는 바는 예언과 더불어 꿈과 환상이 말세 교회에 충만하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이 은사에 대해 매튜 헨리(Matthew Henry)는 이렇게 말했다:

“너희 젊은 사람이나 늙은 사람이나 환상을 볼 것이요, 꿈을 꿀 것이며, 꿈속에서 하느님의 계시를 받을 것이며, 이러한 일이 교회로 전달될 것이다.”

마지막 시대로 접어들수록 ‘꿈’은 하느님의 인도하심을 나타내는 수단으로서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다. ‘꿈’을 받는다는 것은 이 마지막 시대에 성령이 부은 바 되었다는 사실을 말해 주는 지표이다!

변하지 않는 하느님
하느님께서는 다음과 같은 말씀을 통해 자신의 속성을 보여 주셨다. “나 여호와는 변하는 자가 아니므로”(말 3:6, 현대인의 성경).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만드시고 그에게 꿈을 꿀 수 있는 기능과 능력을 주셨다. 또한 그는 자신이 인간에게 말씀하시는 방법의 한 가지로 꿈을 사용하신다는 사실을 성경 전반에 걸쳐서 보여 주셨다.

그런 하느님께서 이제 더 이상 그렇게 하지 않으시기로 갑자기 마음을 바꾸셨는가? 아니다! 하느님께서는 지금도 여전히 꿈을 통해 말씀하신다. 왜냐하면 그는 변하는 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하느님은 달라지시지 않았다. 그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히 동일하시다.

일상적인 꿈과 영적인 꿈을 구분할 수 있는 기준
영적인 꿈은 보통 매우 선명하고 실제적이다. 그것은 한동안 우리로 하여금 생각하게 하는 그런 꿈이다. 그 기억들이 너무 생생하기 때문에 어떤 때는 깨어 있었는지, 혹은 자고 있었는지조차 의문스럽기까지 하다.

이런 꿈들은 그 자리에서 즉시 자세하게 기록해 두는 것이 좋지만, 그렇게 하지 않아도 종종 우리 기억에 아로새겨지게 된다. 나는 20년 전에 나의 장래에 관한 예언적 꿈을 받은 적이 있는데, 어찌나 생생한 지 아직도 어젯밤에 꾼 꿈처럼 선명하게 내 마음 속에 새겨져 있다.

해석을 위해 지혜를 구하라
우리가 영적인 꿈을 꿀 때 그 의미가 매우 분명하게 다가오는 경우도 있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도 있다. 그런 경우는 해석이 필요하다. 이때는 해석을 위해 하느님께 ‘지혜의 말씀’을 구해야 한다. 그러면 성령께서 초자연적으로 해석에 필요한 지혜를 주신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약 1:5).

예언적 꿈을 받았을 때, 그 의미가 분명하게 다가와서 해석이 불필요한 경우와 그렇지 않아서 꼭 해석이 필요한 경우를 비교해 설명해 보겠다.

해석이 불필요한 꿈
수년 전 세탁소를 경영하는 50대 후반의 남성이 우리 교회에 등록을 한 적이 있었다. 그는 자신을 향해 ‘사명자’라고 예언을 하는 사람들도 있었고, ‘사명자’가 아니라고 예언하는 사람들도 있어서 아주 혼란스러웠다. 진정 자신이 사명자라면 사업을 포기하고, 환갑을 앞둔 나이지만 신학을 하고 목사가 되어야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금식을 하며 하느님께 자신에게 직접 말씀해 달라고 간구했다. 그렇게 기도하는 중 어느 날 범상치 않은 꿈을 꾸었다.

꿈에 그는 한 방의 문을 열고 들어갔는데 그 방 안에는 옷걸이가 가득하고 옷걸이마다 목사님들이 예배를 인도할 때 입는 목사 가운(Gown)이 걸려 있었다. 그는 그 목사 가운들 중에서 하나를 골라서 입었는데 너무 컸다. 그래서 다른 가운 하나를 다시 입어 봤는데 이번엔 너무 작았다.

그리하여 다른 가운 하나를 또 골라서 입었는데 이번에는 너무 컸다. 그래서 또 다른 가운을 하나 골라 입었는데 이번엔 너무 작았다. 그렇게 계속 입어보았는데 자신에게 맞는 옷이 없더라는 것이다. 그러는 가운데 갑자기 방문이 열리더니 담임 목사님이 들어와 자기 이름을 부르며, 당신은 이 방에 들어오면 안 되는데 왜 여기 들어왔느냐고 큰 소리로 야단을 치시더라는 것이다. 그는 나에게 이와 같은 꿈 이야기를 하면서 해몽을 해달라고 했다.

그가 받은 꿈은 해석이 필요 없는 의미가 명확한 꿈이었다. 신실하신 하느님은 이 꿈을 통해 ‘이중으로’ 그가 목사로 부름 받은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말씀해 주셨던 것이다. 왜냐하면 이 꿈의 내용을 묵상해 보자. 우선 그의 몸에 맞는 목사 가운이 한 벌도 없었고, 게다가 담임 목사님께 “들어와서는 안 될 방에 왜 들어왔느냐”고 야단까지 맞는 꿈이었다. 여기에 무슨 설명이 더 필요하겠는가?

나는 그에게 “이 꿈은 해몽이 불필요한 꿈입니다. 하느님은 꿈을 통해 집사님은 사명자가 아니라고 이중으로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 더 이상 이 문제를 가지고 기도하지 마십시오.”라고 권면했다.

해석이 필요한 꿈
모 신학교에서 예언적 꿈에 관해 강의한 후 한 학생이 나를 찾아와 꿈을 해석해 달라고 요청을 했다. 그도 역시 자신이 ‘사명자’라는 예언을 받은 적도 있고, ‘사명자’가 아니라는 예언을 받은 적도 있었다. 그리하여 중년의 나이에 신학교에 입학했지만 계속 신학을 해야 할지 혼란 가운데 있었다. 그는 서울에서 중소기업을 경영하는 사장이었다.

그래서 이 학생도 역시 하느님께 자신에게 직접 말씀해 달라고 작정기도를 했다. 작정기도를 마친 후 그는 이상한 꿈을 꾸었다. 자신이 깊은 바다에 들어가 전복을 따더라는 것이다. 그 꿈은 뜻이 없는 꿈은 아닌 것 같고 분명히 자신의 기도에 대한 응답 같은데, 무슨 뜻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으니 나에게 해몽을 해달라고 했다.

나도 그가 받은 꿈이 예언적인 꿈이며, 그의 기도제목에 대한 성실하신 하느님의 응답이라고 믿어졌다. 그러나 나 역시 그 꿈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물론 전복을 따는 꿈을 꾸었다고 해서 갑자기 그가 바닷가로 가서 ‘수산업’을 시작하라는 계시는 결코 아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성령의 언어로서 ‘상징’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야고보서 1장 5절 말씀에 의지하여 하느님께 ‘지혜의 말씀’을 구했다.

마침내 나는 하느님께서 주신 초자연적인 지혜로 그가 꾼 꿈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해석해 줄 수 있었다. 성령께서는 내 영에 그가 꿈속에서 따던 ‘전복’은 ‘錢福’(전복)이라고 알려 주셨다. 즉 ‘돈복’이라는 것이다. 그는 사업해서 돈을 버는 것이 하느님의 뜻이었던 것이다.

나는 그에게 “전복은 ‘錢福(전복)’이니, 하느님은 당신에게 ‘돈복’을 주실 것입니다. 전복은 값이 많이 나갑니다. 당신은 큰 돈을 벌 것입니다. 그러니 주님을 의지하며 열심히 사업을 해서 물질로 주님께 영광을 돌리십시오.”라고 권면을 했다.

하느님께서 자기 자녀들에게 이와 같은 방식으로 말씀하시는 경우는 간혹 있는 일이다. 6. 25 동란이 한창일 때의 이야기다. 아들을 전장에 보낸 노모에게 어느날 국방부 고위간부를 알고 있다는 한 사람이 찾아와 금품을 요구하면서 전선에 있는 아들을 후방으로 빼주겠다고 했다. 어머니는 이 낯선 사람의 말을 즉각 수락하지 않고 이 문제를 놓고 얼마간 기도했다. 그런데 하루는 기도하는데 환상 중에 어떤 사람이 나타나 사기(사기그릇의 沙器)로 만든 토끼를 주면서 자꾸 가지라고 하더라는 것이다.

노모가 이 환상이 무슨 뜻인지를 알고자 하느님께 지혜를 구하며 묵상할 때, 순간적으로 “그것은 '사기'로 만든 토끼이니, 사기(詐欺)를 당한다는 계시구나”라는 깨달음이 왔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 사람의 제안을 단호히 거절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과연 그 남자는 그렇게 수많은 사람들의 돈을 갈취한 상습적 사기꾼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성령님은 그 노모에게 ‘沙器로 만든 토끼’를 통해 ‘詐欺를 당할 것’을 경고해 주셨던 것이다.

이처럼 의미가 불분명한 꿈은 하느님께 지혜를 구하면 초자연적으로 깨닫게 해 주신다. 다니엘도 기도하고 하느님이 주신 지혜로 느부갓네살의 꿈을 해석해 주었다(단 2:23).

꿈을 통해 말씀하시고 교훈하시는 하느님
이 마지막 시대에 우리는 하느님의 음성을 들어야 한다. 하느님께서 말씀하시는 모든 통로를 통해 그분의 음성을 듣는 기술을 개발해야 한다. 거기에는 꿈도 포함된다. 밤중은 영적 생활의 대단히 중요한 영역이 될 수 있다. 하느님께서 밤중에 말씀하실 수 있기 때문이다. 성경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사람은 무관히 여겨도 하나님은 한 번 말씀하시고 다시 말씀하시되 사람이 침상에서 졸며 깊이 잠들 때에나 꿈에나 밤의 이상 중에 사람의 귀를 여시고 인치듯 교훈하시나니 이는 사람으로 그 꾀를 버리게 하려 하심이며 사람에게 교만을 막으려 하심이라”(욥 33:14~17).

하느님은 우리가 침상에서 잠을 잘 때 꿈을 통해 말씀하시고 또 교훈하신다는 것이다. 신문의 시사만평(時事漫評)을 통해 알 수 있듯이 때로는 한 컷 짜리 그림이 한 쪽 분량의 글 보다 더 강력하고 효과적으로 메시지를 전달한다. 그래서 지혜가 한이 없으신 하느님도 종종 ‘그림’, 곧 꿈과 환상으로 우리에게 교훈하신다.

이 꿈은 하느님께서 인간과 교통하시는 성경적인 방법의 하나이다. 오는 세대에는 하느님의 인도하심을 나타내는 수단으로서 꿈이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다. 따라서 하느님께서는 자기 백성들이 성령의 일하시는 방법에 대해 알기를 원하신다.

하느님께서는 꿈을 받고 해석하는 성령의 언어를 이해할 수 있는 요셉이나 다니엘과 같은 사람들을 오늘날도 불러 모으고 계신다. 우리가 성령으로 충만하면 누구나 그러한 사람이 될 수 있다. 그렇다! 이 마지막 시대에 우리는 성령의 충만을 받음으로 신령한 “꿈을 꾸게” 될 것이다(욜 2:28, 행 2:17).

예수 믿는다는것이 무엇인가?

예수님은 이땅에서 사역하시면서 정말 많은부분을 할애하셔서 자신이 하늘에 갔다가 다시오실것을 말씀하셨다. 부활승천하신후 제자들은 그말을 기억하고 곧 주님다시 오실것을 기다리며 신앙생활을 하고 글들을 썼다.

그내용들이 오늘날 신약성경들이 되었다. 신약성경들의 내용을 잘들여다 보라! 전체의 큰 주제들이 주님이 다시오시니까 깨어서 기다려라 이다.

예수믿는다는것은, 초대교인들부터 그날과 그시는 아무도 모르기 때문에 깨어서 주님다시오시는것을 기다리는것이 예수믿는것이다. 그것이 핵심이다.

그런데 현대크리스천의 삶에 주님의 다시오심에 대한 메시지들이 없다.
주님은 그날을 기다리며 어떻게 살라고 하셨는가? 방탕하지말고, 술취하지말고, 생활의 염려에 빠지지 말라고 했다.

그런데 우리의 모습들은 노아 때처럼 주님이 다시오시는것엔 관심이없고 이땅에서 성공하고 돈벌어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는 일에, 방탕하고, 사치하는 일에, 술취하는 일에, 생활의 염려에, 빠져서 살고있다. 주님은 말씀하셨다.

그날과 그시는 천사들도 아들도 너희들도 모르기 때문에 항상 깨어 있으라고 하셨다.

다음 경고를 덧붙이시며.... " 그날이 덧과 같이 임하리라"

결론은 예수 믿는다는것은 깨어서 주님이 다시오시는것을 기다리며 주님이 명령한것을 수행하며 사는것이다. 여기서 반드시 주님이 다시오시는것을 기다리는것이 빠지면 안되는것이다.
 
출처:End Time 메신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12:2)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번민과 갈등 속에서 한 세상을 살아가고 있습니다대개의 경우 그 번민은 영적인 세계와 물질적인 세계 사이에서 일어납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의 번민은구원을 받아 심령의 평안을 누리고 있지만 아직도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 우리를 세상으로 끌어당기기 때문에 일어납니다.그래서 두 세계를 동시에 붙잡고 두 나라에게 동시에 살고 싶어하지만 그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갈등을 느낍니다바로 이때 우리가 한쪽을 버리고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온전히 택하면 하늘의 평안이 우리를 감싸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을 보면 요나는 누구 못지 않은 애국자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요나야너는 일어나서 저 니느웨 성에 가서 그 성이 죄로 말미암아 40일 만에 멸망한다고 선포하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요나에게 있어서 이보다 더 좋은 소식은 없었습니다왜냐 하면 니느웨는 앗수르의 수도인데 이 앗수르야말로 호시탐탐 이스라엘을 노려 항상 침략하고 재물을 약탈하며 이스라엘 백성들을 괴롭혔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이 음성은 그에게 번민을 심어 주었습니다왜냐하면 만일 가서 그대로 외치면 그들이 구원받아 다시 일어나 또다시 이스라엘 침략할 것이요외치지 않으면 자기가 하나님 말씀을 거역하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깊이 갈등하고 있던 중에 요나는 하나님의 낯을 피해 다시스로 도망갔습니다그러나 며칠 후에는 물고기 뱃속에 들어가는 고난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오늘날도 구원을 받고 영적 서계를 소유한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음성이 그의 마음 속에 들어오자마자 요나처럼 찢겨진 심정을 가지고 방황하고 있습니다하나님의 말씀에 먼저 순복할 것인가 아니면 내 정욕과 감정을 앞세울 것인가?

하나님께서 우리를 택하신 후에는 언제나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먼저 구하도록 이끌어가십니다그러나 우리가 불순종하면 요나가 고기뱃속에 있었던 것처럼 번민과 갈등 속에 지내게 되며 경우에 따라서는 역경과 고난을 당하기도 합니다그리고 이 번민은 우리의 삶의 방향이 그의 나라와 그의 의로 향할 때까지 그치지 않을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택하시고 사랑한다는 표적입니다그러므로 우리가 정신적인 번민과 갈등에서 해방 받는 길은 신속히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일입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태복음 6:33)

6/21/2011

겨자씨 믿음

내가 기쁨으로 그들에게 복을 주되 분명히 나의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그들을 이 땅에 심으리라”(32:41) 

하루는 제자들이 예수님을 따라오면서 “주님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라고 말했습니다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믿음을 더하여 주겠다는 말씀은 하지 않으셨습니다.왜냐 하면 믿음은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의 성품으로 이것을 더하고 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보이는 믿음 위에 기적을 베풀어 주십니다믿음이 크든지 작든지 간에 눈에 보이게 될 때 하나님의 기적이 나타납니다그렇기 때문에 주님께서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었더면 이 뽕나무더러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기우라 하였을 것이요.” 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주님께서는 믿음을 더하여 주시겠다고 하지 않고 겨자씨만한 믿음이라도 그 믿음을 활용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이 말씀은 의미가 깊은 말씀입니다.

주님께서는 왜 믿음을 겨자씨에 비유하셨을까요?
첫째로겨자씨는 아무런 가치가 없기 때문입니다.
겨자씨 한 알을 그냥 내버려 두면 별 가치가 없습니다바람만 불어도 날라가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이와 같이 여러분의 마음 속에 믿음도 밖으로 나타내 보이기 전에는 아무런 가치가 없는 것입니다.
둘째로겨자씨는 심을 때 그 효과를 발생하기 때문입니다.
콧김에 날아갈 만큼 겨자씨가 작아도 땅에 심으면 새들아 깃들 만큼 자라고 열매도 많이 맺습니다이처럼 우리 속의 믿음이 아무리 작다고 할지라도 그것을 눈에 보이도록 심으면 기적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러면 눈에 보이지 않는 믿음을 어떻게 심을 수 있을까요그것은 믿음의 씨앗을 심으면 됩니다주님께서는 믿음의 씨앗을 눈에 보이도록 심으라고 하셨습니다심지 않은 믿음은 절대로 거둘 수가 없습니다적게 심으면 적게 거두고 많이 심으면 많이 거두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각기 눈에 보이지 않는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이것을 심느냐심지 않느냐는 중대한 문제인 것입니다.
사르밧 과부는 밀가루 한 웅큼과 소량의 기름으로 떡을 구워 엘리사에게 드리는 믿음의 씨앗을 심자 가뭄이 다하도록 가루와 기름이 떨어지지 않는 기적이 나타났고나아만 장군이 요단강에 일곱 번 목욕을 하며 믿음의 씨앗을 심자 문둥병이 깨끗하게 고침을 받는 기적이 나타났던 것입니다이러므로 여러분들도 여러분들의 믿음을 외부로 나타나 보이게 씨앗을 심어야 기적이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너희에게 한 알만한 믿음이 있었더면 이 뽕나무더러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기우라 하셨을 것이요” (누가복음 17:6)

6/20/2011

영성훈련을 위한 일곱가지 방법

1.  경건한 책읽기
성인들의 영성, 예수 그리스도를 따른 거룩한 성도들의 경건을 보여주는 책을 읽는 것은 복음의 정신과 맛을 아는 데 유익하고 필수적인 방법이다.

경건한 책읽기의 유익
1) 마음의 적극적인 변화가 있다.
2) 다섯 권의 평범한 책보다 좋은 책 두세 번 읽는 게 더 유익하다.
3) 저자의 제한된 시각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4) 진리는 때때로 역설에서 발견된다.
* 영적 고전들을 읽되, 배타적인 태도가 아니라 종합하려는 자세로 읽으라.

2.  훌륭한 본보기를 본받아라. 
바울은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은 자가 된 것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 말했다.
성숙의 과정에서 우리는 훌륭하고 긍정적인 본보기를 찾아 그들에게서 배워야 한다.

3.  덕목을 길러라. 
영적 훈련은 우리가 변할 수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덕을 기르는 일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필수적인 부분이다. "전 원래 그래요."는 겸손이 아닌 게으름의 고백이다. 이는 우리의 약함과 덕 없음이 어떤 비극을 낳는지 너무나 무관심하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4.  불편함을 활용하라.
어떤 것이든 간에 불편함이라면 우리는 꺼리는 태도를 극복해야 한다.  죄악된 인간으로서 우리는 자연히 쉽고 편리하며 자기 중심적으로 기우는 경향이 있다. 노력이란 목표를 향해 애쓰며, 기존에 부족한 것을 기른다는 뜻이다. 우리는 편안한 길을 택하지 않고 훈련함으로써 우리의 열정과 습관을 형성할 수 있다. 우리가 시간을 어떻게 보내며 무엇을 먹을 것인가에 관해 내리는 작은 결정들이 실제로는 우리의 인격을 형성해가는 영적 전투들이다.

5.  진리를 몸에 적용하기 
훈련은 궁극적으로 진리를 우리 삶에 적용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이것은 우리가 진리대로 살며 거룩하라는 하나님의 부르심대로 사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몸은 훈련에 가장 큰 장애물일 때가 많다. 확실한 것은 헌신이나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습관에 이르기를 원한다면 늘 묵상하고 영을 훈련시키고 또한 내적 기질에 편안함을 느끼는 모든 외적 행동에 대해 몸을
연습시키고 훈련시켜야 한다.

설령 우리가 몸과 영혼을 훈련시킨다 하더라도 우리의 믿음은 이런 훈련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것이다. 영적 삶의 중심은 언제나 체험적인 믿음이 아니라 하나님에게, 그분이 하신 일에 있어야 한다.

6.  일찍 일어나라. 
이른 아침을 거룩하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 훈련에는 바른 가르침 찾기와 좋은 결과를 내기 위한 실제적인 목표 설정, 그리고 고통을 받아들이며 몸으로 훈련하는 것과 더불어 바른 스케줄 짜기도 포함된다. 훈련된 스케줄은 실제로 죄의 기회를 없앨 수 있으며 따라서 우리의 마음과 삶에서 죄를 제거하는 데 도움이 된다. 로우는 "지나친 수면은 영혼을 느슨하고 게으르게 만든다" 고 말한다. 아침에 기도하는 것은 많은 유익을 준다.

7.  되돌아보며 살아라. 
이기적인 선입견은 영적 성장을 가로막지만 분별있는 자기 회상은 기독교의 본질적이고 건강한 요소이며 영적 상장을 확인하게 해주는 거울이다. 자기 성찰은 우리가 게을러지는 것을 막아주고 성장이 지체될 때에도 희망이 있다는 것을 기억하게 한다.

- '뿌리깊은 영성은 흔들리지 않는다' 중에서, 게리 토마

신령한 웃음

“하나님은 순전한 사람을 버리지 아니하시고 악한 자를 붙들어 주지 아니하신 즉 웃음으로 네 입에 즐거운 소리로 네 입술에 채우시리니 너를 미워하는 자는 부끄러움을 입을 것이라악인의 장막은 없어지리라”(욥 8:20~22).

오늘날 세계 곳곳에서 예배 중에 성령의 은사로 기쁨의 웃음이 폭발하고 있다. 이것을 ‘거룩한 웃음’(Holy laugh)이라고 한다. 그러나 성령의 역사에 관해 무지한 자들은 이러한 현상을 ‘마귀 웃음’이라고 단정한다. 즉 악한 마귀의 역사라는 것이다. 하지만 성경은 “울 때가 있으면 웃을 때도 있다”고 말한다.

“울 때가 있고 웃을 때가 있으며”(전 3:4).

성령께서 나의 심령에 애통하는 마음을 가득히 채워주시면 우리는 흐느껴 울게 될 것이다. 사람들이 보든 말든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리는 것을 감출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같은 성령께서 나의 마음에 넘치도록 기쁨을 채워주신다면 어떠한 현상이 벌어질까? 웃지 않고는 견딜 수 없게 될 것이다. 바로 그것이 ‘거룩한 웃음’의 은사이다.

 1. 거룩한 웃음의 두 가지 주체
‘거룩한 웃음’이 폭발할 경우 그것은 다음 두 가지 중에 하나이다. 첫째는 나의 영이 기뻐 웃는 ‘내 영의 웃음’이 있다. 곧 내 영의 기쁨이 육체를 통해 웃음으로 빠져나온 것이다. 둘째는 내 안에 계신 ‘성령님의 웃음’이 있다. 즉 내 안에 거하시는 주님의 기쁨이 나의 육체를 통해 웃음으로 폭발한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나를 통해 웃으시는 것이다.

  1) 하나님의 웃음
규칙적으로 중보기도를 힘쓰는 그리스도인들은 기도 중에 종종 이유를 알 수 없는 탄식과 눈물이 솟구치는 경험을 할 때가 있다. 그것은 누구의 것일까? 나의 것이 아니라 내 육체 안에 거하고 계시는 성령의 탄식과 성령의 눈물인 것이다. 나는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지만, 나로 하여금 성령께서 그렇게 눈물로 중보하게 하시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것은 사실상 하나님의 눈물로서, 내 안에 계시는 성령님이 나를 통해 우시는 것이다.

그와 똑같이 내 안에 계신 하나님께서 나를 통해 웃으실 수도 있다. 우리가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해 웃으시도록 허락해 드리면, 그분은 마치 우리를 통하여 말씀하시는 것(예언 혹은 중보)과 똑같이 우리를 통하여 웃으신다. 하나님은 언제 나를 통해 웃으시는가?

  a. 적의 계획이 좌절되었을 때
 기도나 찬양 가운데 터져 나오는 웃음은 원수의 계획이 깨어졌다는 표시이다. 그것은 주님이 우리를 통하여 웃으시며 우리를 해치려 하는 적을 모욕하시는 것이다. 이때에 성도들의 웃음은 사단의 진을 흔들고 부수는 영적 전쟁의 강력한 도구가 된다.

 “하늘에 계신 자가 웃으심이여 주께서 저희를 비웃으시리로다”(시 2:4).


 “여호와여 주께서 저희를 웃으시리니 모든 열방을 비웃으시리이다”(시 59:8).

  b. 주님이 나를 지극히 기뻐하실 때
웃음이란 기쁨이 넘칠 때 나타나는 현상이다. 기쁨이 넘치게 되면 미소만 짓고 있을 수가 없다. 큰 소리로 웃게 된다. 기도나 찬양 가운데 폭발하는 웃음은 하나님이 나를 지극히 기뻐한다는 표시이다. 즉 그것은 내 안에 계신 하나님께서 나를 인해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기 때문에 나를 통해 웃으시는 것이다. 그래서 ‘거룩한 웃음’은 하나님이 나를 지극히 사랑하고 기뻐하신다는 표적(sign)이다.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시라. 그가 너를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인하여 즐거이 부르며(singing) 기뻐하시리라”(습 3:17).

그러므로 기도나 경배 중에 거룩한 웃음이 터져 나왔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나를 영접하셨고 열납하셨다는 증표이다.

예수님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니라”(요 15:11)고 말씀하셨다. 주님의 기쁨을 우리 안에 주신다는 것은 내 안에서 예수님이 기뻐하시니 내가 기쁨의 표현으로 웃는다는 뜻이다. 이제부터 주님께서 더욱 자주 웃으시도록 허락해 드리자.

 2. 내 영의 웃음
하나님이 나를 통해 기쁨으로 웃으실 때도 있지만, 하나님은 내 영이 기쁨에 넘쳐 웃게 하실 때도 있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의미를 갖는다.

  a. 나의 기도가 응답되었거나, 응답이 오고 있다는 표시
기도하고 웃음이 나오면 응답받은 줄 믿고 계속 하나님을 찬양하고 감사하라. 만약 당신이 한 시간쯤 방언으로 기도한 후에 갑자기 웃기 시작 하였고, 또 방언으로 찬양까지 했다면 그것이 무슨 의미인지 아는가? 당신이 무엇을 기도하고 있었던 간에 그 문제가 완전히 기도로 끝났다는 것, 곧 기도한 것이 실현되었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희락’이며(롬 14:17), 또한 희락은 성령의 열매 가운데 하나이기 때문이다(갈 5:22). 그래서 웃음이란 응답의 실상이요 증거이다(히 11:1).

  b.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다는 표시
성령은 희락의 영이다(갈 5:22). 그러므로 기도나 예배 중에 웃게 되었다면 그것은 나의 심령에 성령이 충만하게 임했다는 표적이다. 웃음이란 기쁨(희락)의 표현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니라”(롬 14:17).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은 세상이 주는 기쁨과 비교할 수 없는 기쁨이다. “주께서 내 마음 에 두신 기쁨은 저희의 곡식과 새 포도주의 풍성할 때보다 더하니이다”(시 4:7). 그런데 어떻게 웃음을 억제할 수 있겠는가?

 2. 거룩한 웃음의 은사가 주는 복
거룩한 웃음의 은사는 다음과 같은 복을 가져온다. 그것은 내적인 치유(Inner Healing)와 외적인 치유에 대한 응답이기도 하다. 하나님은 ‘웃음치료 전문가’이시다.

1) 웃음은 마음의 양약
웃으면 심령이 치유를 받는다. 하나님의 은혜로 웃게 된다면 마음의 상처가 치유되는 기적이 온다. 그러므로 거룩한 웃음은 하나님께서 나를 새롭게 하여 축복의 길을 열어주신다는 증거이다.

  “마음의 즐거움은 양약이라도 심령의 근심은 뼈로 마르게 하느니라”(잠 17:22).


  “마음의 즐거움은 얼굴을 빛나게 하여도 마음의 근심은 심령을 상하게 하느니라”(잠 15:13).

성령의 역사 속에서 웃음을 경험하신 분들은 한결같이 심령 천국을 맛보았다고 한다. 심령 천국이 이루어질 때 비로소 내 삶의 전 영역에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된다. 따라서 거룩한 웃음을 통해 상한 마음이 치유될 뿐만 아니라 우리의 앞에 닥쳐있는 어려운 문제까지 해결을 받는 은총이 임한다.

  2) 웃음은 육체의 보약
웃음은 심령이 치유될 뿐만 아니라 육체의 질병도 물리친다. 마음의 즐거움은 양약이기 때문이다. 모든 질병의 약 70%는 마음에 원인이 있는 심인성 질환이라고 한다. 질병의 원인은 대개 마음으로부터 온다. 마음의 병이 심령을 상하게 하고 면역력을 떨어뜨려서 육체의 질병을 가져오는 이유가 된다. 그런데 웃고 또 웃으면 양약이 되어 나의 심령이 모든 질병을 이길 수 있는 힘이 되는 것이다. 성경은 심령이 상하면 고칠 수 없다고 말한다.

 “사람의 심령은 그 병을 능히 이기려니와 심령이 상하면 그것을 누가 일으키겠느냐”(잠 18:14).

 현대 과학도 웃음은 엔돌핀을 끌어내어 면역체계를 강화시켜주므로 투병중인 환자에게 매우 중요하다고 한다. 또한 웃음은 만병의 원인인 스트레스를 완화시켜주고 장기에 마사지 효과를 준다. 즉 우리가 웃는 동안 횡경막이 움직여 신장, 간, 위 같은 장기를 자극해 오장 육부에 유익한 효과를 거둘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5분 동안 웃는 것이 5시간의 운동 효과가 있다는 것은 과장된 말이 아니다. 현대의 ‘웃음치료전문가’들은 “가장 좋은 치료방법이 웃음‘이라고 주장한다. 그것은 분명히 성경적, 과학적 근거가 있는 얘기다.

  ‘거룩한 웃음’은 성령께서 주시는 신령한 역사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일을 잘 알지 못하고 함부로 판단하는 말을 하여 하나님의 일을 방해하는 어리석은 자가 되지 않아야 한다. 욥기에 성령의 역사 즉 ‘거룩한 웃음’을 방해하는 자들을 향하여 무서운 말씀이 기록되어 있다.

“하나님은 순전한 사람을 버리지 아니하시고 악한 자를 붙들어 주지 아니 하신즉 웃음으로 네 입에, 즐거운 소리로 네 입술에 채우시리니 너를 미워하는 자는 부끄러움을 입을 것이라 악인의 장막은 없어지리라”(욥 8:20~22).

미련한 자의 등에는 막대기뿐이다(잠 26:3). 계속 하나님의 일을 방해하면 “악인의 장막은 없어지리라”는 말과 같이 결국 죽음을 당하게 된다. 그 이유는 희락(기쁨)은 성령의 열매인데 성령을 거스르고(행 7:51), 근심하게 하며(엡 4:30), 훼방한다면(마 12:31~32) 사하심을 받지 못하는 무서운 결과를 초래하기 때문이다.

신령한 노래(spiritual song)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마음에 감사함으로 하느님을 찬양하고…”(골 3:16).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엡 5:19). 

여기에서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이 열심을 다해 찬양해야 할 것을 강조하면서 세 가지 유형의 찬송을 나열했다. 어떤 이들은 이 구절에 언급된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를 똑같은 찬양의 다른 이름이라고 생각한다. 결코 그렇지 않다. 세 가지 모두 다른 유형의 찬양이다.

‘시’(psalm)는 구약의 시편을 말하고, ‘찬미’(hymns)는 시편 이외의 찬송을 뜻한다. 그렇다면 “신령한 노래”(spiritual song)는 어떤 것일까? 그것은 “성령의 감동 아래 즉흥적으로 부르는 노래”이다. 일반 찬양과는 다른 독특한 장르의 찬송인 것이다. 다음과 같은 노래들이 신령한 노래이다.

1. 영으로 하는 찬양
‘신령한 노래’의 첫 번째 유형은 “영으로” 하는 찬양이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4장 15절에서 “…내가 영으로 찬미하고 또 마음으로 찬미하리라“고 말한다. 이 말씀은 ‘찬양’에 대하여 말하려는 것이 아니고 ‘방언’에 대하여 말하다가 나온 말이다.

“내가 만일 방언으로 기도하면 나의 영이 기도하거니와 나의 마음은 열매를 맺히지 못하리라 그러면 어떻게 할꼬 내가 영으로 기도하고 또 마음으로 기도하며 내가 영으로 찬미하고 또 마음으로 찬미하리라”(고전 14:14~15).

여기에서 ‘마음으로’는 헬라어로 ‘누스’(νου?)인데, ‘이성적으로’라는 뜻이다. 방언기도는 영(spirit)이 하는 기도이므로 통역의 은사가 없으면 그 기도가 이성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래서 내 영은 기도하지만 나의 마음(mind), 곧 지각(the understanding)은 열매를 맺지 못한다. 따라서 우리는 ‘영으로’(with the spirit) 기도하고, 또한 ‘지각으로’(with the understanding) 기도해야 한다.

그런데 바울은 나의 영이 ‘기도’할 수 있듯이 나의 영으로 ‘찬양’할 수 있다고 말한다. “내가 영으로 찬미하고 또 마음으로 찬미하리라”(고전 14:15b). 영으로 찬양하는 것은 마치 방언기도를 드리는 것과 같다. 곧 이성의 영역을 떠나 내 영이 ‘자유롭게’ 부를 수 있는 찬송의 장르가 있다. 이것을 보통 ‘방언 찬송’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한국교회 성도들이 방언 찬송을 하는 것을 보면 대부분 기존의 찬송가 곡에 맞추어 부른다. 그것은 내 영이 ‘자유롭게’ 부르는 신령한 노래가 못 된다.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있는 곳에는 자유함이 있느니라”(고후 3:17). 진정한 영의 찬송은 일정한 곡이 없고, 곡조에 자유함이 넘친다. 다시 말하면 가락이 제마음대로란 얘기다. 왜냐하면 성령께서 그 사람에게 가사와 가락(곡조)을 주셔서 '즉흥적으로' 노래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영으로 하는 찬양이 ‘신령한 노래’인 것은 바로 그것 때문이다.

이렇게 여러 사람이 함께 신령한 노래로 찬양할 때 그것은 수십 성부의 아름다운 찬송이 된다. 성령이 각 개인의 목소리를 인도해 주실 뿐만 아니라 그것을 모아서 화음을 이루며 영으로 찬양하게 할 때 창출되는 그 조화란, 참으로 천사들의 합창 그 자체처럼 들릴 때도 있다. 이것이야말로 ‘3층천’ 예배인데, 이 때 회중은 강한 성령의 임재를 체험하게 된다.

2. 새 노래(a new song)
‘신령한 노래’의 또 한 가지 유형으로서 “새 노래” 라는 것이 있다. 성경은 도처에서 ‘새 노래’로 주를 찬양하라고 말씀하고 있다(시33:3; 사42:10; 계5:9). 이 ‘새 노래’ 역시 ‘영의 찬양’처럼 악보도 없는 노래를 즉흥적으로 부르는 것이다. 그러나 나의 마음으로, 곧 지각을 사용하여 노래한다는 점이 ‘방언 찬송’과 다르다.

즉 ‘새 노래’는 성령께서 곡조와 함께 내 이성으로 알아들을 수 있는 가사를 즉흥적으로 주시는데, 바로 그 가사와 가락으로 주님을 찬양하는 것이다. 따라서 일정한 가사와 곡조가 없는 노래다. 이것은 '예언적 노래'로서 배워서 부를 수 있는 노래가 아니다.

하느님은 선지자 예레미야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보라 내가 내 말을 네 입에 두었노라”(렘 1:9). 하느님은 예레미야의 입에 말씀을 주셨다. 그래서 그는 예언할 수 있었다. 그 하느님은 우리 입에 노랫말도 주신다. 그래서 우리로 새 노래로 찬양하게 하신다.

“…이새의 아들 다윗이 말함이여 높이 올리운 자, 야곱의 하느님에게 기름부음 받은 자, 이스라엘의 노래 잘하는 자가 말하도다. 여호와의 신이 나를 빙자하여 말씀하심이여 그 말씀이 내 혀에 있도다”(삼하 23:1~2).

그리하여 우리는 즉흥적으로 ‘예언적인 노래'를 부를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초자연적 노래이다. 이러한 노래를 부르면 사람들이 보고 두려워하며 하느님께 굴복한다. 성령의 능력이 그 노래 가운데 있기 때문이다.

“또 그가 내 입에 새 노래를 두셨으니, 곧 우리 하느님께 드릴 찬양이라. 많은 사람이 그것을 보고 두려워하며 주를 의지하리로다”(시 40:3?KJV).

“그러나 다 예언을 하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나 무식한 자들이 들어와서 모든 사람에게 책망을 들으며 모든 사람에게 판단을 받고 그 마음의 숨은 일이 드러나게 됨으로 엎드려 하느님께 경배하며 하느님이 참으로 너희 가운데 계시다 전파 하리라 그런즉 형제들아 어찌할꼬 너희가 모일 때에 각각 찬송시도 있으며...”(고전 14:24~26).

이와 같은 ‘신령한 노래’는 초대교회에서 체험하였고, 일찍이 ‘다윗의 장막’에서도 불리어졌었다.

“다윗이 군대 장관들로 더불어 아삽과 헤만과 여두둔의 자손 중에서 구별하여 섬기게 하되 수금과 비파와 제금을 잡아 신령한 노래를 하게 하였으니 그 직무대 로 일하는 자의 수효가 이러하니라”(대상 25:1).

여기서 ‘신령한 노래를 하게 하였으니’라는 것은 “예언을 하게 했다”(prophesy)는 뜻이다(영어 성경과 비교해 보라). 이 귀한 노래가 오늘날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성령의 역사와 더불어 다시 회복되고 있다.

3. 높은 찬양(high praise)
‘신령한 노래’의 범주에 ‘높은 찬양’(high praise)이라고 하는 또 한 가지 유형의 찬송이 있다. 영적으로 깊고 강한 찬송으로서, 시편 149편 6절에 나온 찬양이다.

“그들의 입에 하느님을 향한 높은 찬양들이 있게 하고, 그들의 손에는 양 날 이 있는 칼이 있어”(시 149:6 ? KJV).

여기에서 ‘높은 찬양’은 원어 ‘로맘’(????)의 번역이다. 이 단어는 시 66:17과 함께 성경에 꼭 두 번 사용되었다. “내가 내 입으로 그에게 부르짖으며 내 혀로 높이 찬송하였도다”(시 66:17). ‘로맘’(????)은 ‘룸’(???)이라는 동사에서 나온 말인데, ‘룸’은 ‘높이다’ ‘높게 하다’의 뜻이다. 높이는 것은 ‘찬양’ 하는 것이다. 그래서 ‘로맘’이라는 단어는 대부분의 영어 성경들이 ‘높은 찬양’으로 번역하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높은 찬송’이 실제로 어떤 찬송을 말하는지 확실하지 않다. 그러나 ‘찬양과 경배’ 사역에서 찬양 인도자(worship leader)로 종사하고 있는 분들은 이 찬송이 영적으로 하느님과 좀더 친밀하게 되었을 때 나오는 자연적이고 즉흥적인 노래(spontaneous song)라는 것을 체험적으로 알고 있다.

찬양의 깊은 경지에 들어가면 음량은 작아지고, 템포는 느려지고, 소리는 높아진다. 가사는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다. 찬송이 영적으로 매우 높은 경지에 있을 때 나오는 참으로 신비한 찬양이다. 이것이 ‘높은 찬양’으로 이때에 회중은 하느님의 임재를 더욱 깊이 체험하게 된다.

이 ‘높은 찬양’은 ‘하느님의 말씀’과 함께 사단의 진을 쳐부수는 역할을 한다. ‘높은 찬양’은 영적 전쟁의 아주 강력한 무기이다(시 149:6~9).

6.그들의 입에 하느님을 향한 높은 찬양들이 있게 하고, 그들 의 손에는 양 날이 있는 칼이 있어

7. 이방에 복수하며 그 백성을 처벌하고

8. 그들의 왕을 쇠사슬로, 그들의 귀족들을 쇠 족쇄로 묶어

9. 기록된 판결을 그들에게 시행하게 할지니, 이 영광이 그의 모든 성도들에게 있도다. 너희는 주를 찬양할지어다.

우리에 입에는 높은 찬양이 있고, 손에는 양날 선 칼이 있어야 한다. 칼은 하느님의 말씀이다(엡 6:17; 히 6:17). ‘하느님의 말씀’과 ‘하느님을 향한 높은 찬양’은 성도들이 갖추어야 할 영적전쟁의 강력한 무기다. 말씀의 검을 높이 들고, 주께는 찬양을 높이 올 릴 때, 성령의 능력이 강하게 역사하여 흑암의 세력이 쫒겨 가게 된다.

맺는말
우리는 모두 ‘신령한 노래’를 부르도록 요청받았다. 그러므로 ‘신령한 노래’를 불러야 한다. 그것은 방언찬송, 새 노래, 높은 찬양 등과 같은 '초자연적 노래'이다. 이러한 찬양들은 우리의 의지를 뛰어 넘는 신비한 찬양들이다.

이 놀라운 영적 찬양들은 성령의 역사가 강했던 초대교회에선 예배할 때마다 흔히 불려졌던 노래들이었다. 그러나 방언과 더불어 교회에서 오랫동안 잊혀져 오다가 20세기에 이르러 성령의 역사와 함께 찬양과 경배라는 새로운 양식의 예배가 시작되면서 마침내 신령한 노래들도 다시 부를 수 있게 된 것이다.

오늘날 교회 안에 ‘신령한 노래’가 회복되고 있다. 의식적이고 예전적인 예배에서는 이러한 놀라운 찬양을 전혀 기대할 수 없다. 순서에 따라 예배가 진행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배를 우리가 만든 순서에 의지하지 않고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맡길 때, 우리는 모두 예배 가운데서 ‘신령한 노래’를 부를 수 있고, 결국 더욱 풍성한 찬송생활의 권능을 체험하게 될 것이다

너희 목마른 자들아

네가 네 손이 수고한 대로 먹을 것이라 네가 복되고 형통하리로다”(128:2)

사람이 영양 실조에 걸리면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없습니다마찬 가지로 영적으로 영양 실조가 되면 절망적인 상황에 처하게 되는 것입니다오늘부터 사흘 동안 세상을 살아가면서 영적으로 꼭 필요한 세 자지 영양소를 말씀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성경에는 너희 목마를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람의 육체는 60%가 물로 되어 있습니다물은 우리 생명의 원천입니다.
만약 물을 마시지 못하면 살 수 없습니다그런데 사람은 육으로만 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영과 혼과 육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다시 말하면 영의 속사람과 육의 겉사람으로 되어 있습니다그래서 육의 겉사람에게 물이 필요한 것처럼 영의 속사람에게도 물이 필요합니다.
아담과 하와가 타락한 이후 사람들은 영혼을 던져버리고 육신 위주로 살아왔기 때문에 영혼이 목말라 몸부림 칩니다그러나 사람들은 지금까지 영혼의 목마름에는 외면한 채 인생의 행복을 얻고 삶의 목적을 찾으려고 방황하지만 생의 행복과 목적을 발견할 수가 없었습니다.
남편을 다섯 번 바꾸고 여섯 번째의 남편과 살면서도 갈급함이 채워지지 않아 지칠 대로 지쳐있던 여인이 우물가에서 예수님을 만났습니다예수님께서는 여인에게 내가 주는 물을 마시면 영원히 목마르지 않으리라.” 고 말씀하셨습니다이 말씀을 들은 여인은 즉시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넘쳐나는 영원한 생수를 마실 수 있었습니다생수를 마신 여인은 동네로 뛰어가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전도사가 되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죄를 많이 지었느냐 적게 지었느냐 그것을 따지기보다는 “나는 죄인입니다.나는 갈급해서 견딜 수가 없어 주님께로 나왔습니다주님께서 도와 주옵도서.” 라고 말하는 정직한 죄인을 원하고 계십니다그리고 그러한 사람들을 구원해 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기 전에는 삶의 목적과 생의 참 가치를 모르고 살았습니다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면 삶의 목적과 생의 참 가치를 알게 되어 영혼의 갈증이 해소되고 마음 속에 평안을 얻는 위대한 기적을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값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이사야 55:1)

6/19/2011

♡ 지나친 욕심은 해가 됩니다.♡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욕심이 잉태한 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 즉 사망을 낳느니라.(1:14-15)

어느 나이 많은 성자(聖者)가 길을 가다가 두 사람과 동행을 하게 되었습니다.
헤어지게 되자 성자가 동행한 두 사람에게 말했습니다.
'덕분에 외롭지 않게 잘 왔소. 보답으로 두 분의 소원을 들어드리리다다만 먼저 말하는 사람의 소원을 들어주되 다음 사람에게는 그 두 배로 소원을 들어드리겠소.'

그러자 두 사람은 서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내가 먼저 말하면 저 친구가 두 배나 되는 소원을 이루겠지. 그러나 절대 먼저 말할 수 없어.'

서로 상대가 먼저 말하기를 기다리며 눈치만 보다가 시간이 꽤 흘렀습니다.
그 중에 욕심이 더 많은 친구가 ', 어서 말해! 먼저 말하지 않으면 죽일 거야.'라며 윽박질렀습니다분위기는 금세 험악해졌고, 그러다 힘에 부쳐 상대에게 먼저 얻어맞은 사람이 입을 열어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의 한 쪽 눈을 뽑아주세요.'
결국 그 사람은 한 쪽 눈을, 다른 사람은 두 눈을 다 뽑히고 말았습니다.

만일 두 친구가 서로 협력했다면 어땠을까요?
아마 소원을 이루는 데 더없이 좋은 기회가 됐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나친 욕심이 두 사람을 다 망쳐버렸습니다.

남을 배려하는 마음이 곧 나를 위하는 길이라는 점을 잊지 맙시다.

6/18/2011

예수님은 양의 문이십니다

목자들은 양을 부를 때에 무조건 숫자만 세지 않습니다. 각각의 이름을 주고 그 이름을 사랑스럽게 부릅니다. 그리고 목자는 항상 앞서 가면서 장애물을 제거하고 때로는 악한 짐승들과 싸우면서 양들을 안전하게 보호합니다.

양이 잠을 잘 때에는 자신이 양의 우리 가운데 누우므로 스스로 문이 되어서 원수로부터 안전하게 생명을 보호합니다. 세상에 수많은 그리스도인이 있다 하여도 예수님은 우리를 그 중의 한 명으로 가볍게 여기지 않으십니다. 그는 우리 각 사람의 이름을 아시고 존귀하게 여기십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심은 바로 나 한사람을 귀히 여기고 살리기 위함입니다.

혹시 ‘나 한사람이 기도한다고 주께서 들어 주시겠는가’라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염려하지 마십시오. 주님은 나의 음성을 아시며 나의 어려움에 귀를 기울여 주시고 또한 나의 아픈 마음을 안타까워하시며 나보다 먼저 나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나서시는 분입니다. 양의 문 되신 예수님이 계시기에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서 생명을 얻고 또한 풍성한 은혜의 삶을 누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양입니다 
목자가 인격을 가지고 있듯이 양도 인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양도 목자의 음성을 알고 목자의 뒤를 조심스럽게 따릅니다. 다른 원수가 목자의 음성을 흉내내거나 유혹의 말을 하여도 오히려 그것을 두려워하며 거절합니다.

그리고 목자가 문이 되어줄 때, 그 안에서 편안하게 생명의 잠을 잡니다. 예수님을 믿는 자들은 예수님이 목자입니다. 예수님이 선한 목자이기를 기대한다면, 우리 자신도 선한 양이 되고자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주의 말씀을 사모하며, 주의 말씀에 순종하고 또한 주의 인격과 삶을 본받고자 하는 진지한 노력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주일이 되면 교회에 나와서 예배를 드리지만, 그 예배가 진지하지 못하고 또 은혜가 충만하지도 못한 경우가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바로 자신의 삶이 주의 말씀을 존귀히 여기고 따르는 삶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말과 유혹에 흔들리며, 그러한 말에 마음을 빼앗길 때, 주님의 선한 인도와 주님의 품안에서 누리는 평안을 기대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예수님의 양으로서 주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며 사는 성도가 되어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