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2010

영성 용어 해설


로고스와 레마
성서에서 하나님의 말씀, 여호와의 말씀, 주의 말씀과 같이 말씀을 가리킬 때 헬라어로는 로고스나 레마로 표현하고 있다. 구약성서에서 많이 사용되고 있는 다바르가 칠십인역에서는 로고스와 레마로 번역되었으나 구별없이 동의어로 사용되었다. 레마는 오경, 욥기여호수아, 사사기, 룻기에서 흔히 사용되지만 로고스는 그외의 역사서와 시편에서 주로 사용되고 있다예언서에서는 로고스가 레마보다 8회 더 나타나고 있다.

1. 로고스(λόγος) - 로고스는 신약성서에서 330회 나타난다. 이 단어가 헬라 세계에서 헬레니즘 문화와 함께 발전해 오면서 다양한 뜻을 가진 단어로 발전해 왔다. 예를 들면 로고스는 계산하다, 설명하다와 같은 기본적인 의미에서 시작되어 이야기연설설명원리주장결과비례관계계측순서인간의 이성정신표현정의(定義)’ 등 많은 뜻의 단어로 발전하였다

로고스는 풍부한 의미를 가지고 있으나 창조적인 힘을 지닌 말이나 연설을 나타내는 의미로 사용된 곳은 없다. 로고스는 있는 그대로를 드러내기 위해 무엇인가를 보내주는 것그것을 향해 지향된 것을 의미한다.
            
요한복음 1:1~3절에 나타난 로고스는 전() 복음의 기초가 그리스도의 말씀과 행동의 단일성에 있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 예수께서는 로고스를 주시기도 하지만 또한 자신이 로고스이다. 이러한 사실이 이 단어의 용법을 결정한다. 그러나 요한복음에서 서두 이후에는 예수를 결코  로고스라고 부르는 일이 없다.

왜냐하면 선재하셨던 그 로고스가 이제는 육신, 즉 몸을 가진 예수로 되었기 때문이다(1:14). 예수와 로고스를 동일시하는 것이 여기에서는 로고스를 특별한 의미로 사용하고 있는 모든 신약 말씀들의 핵으로 나타나고 있다. 새로운 것은 로고스가 선재했다는 것과 그것이 역사화되었다는 것이다.

로고스는 단순한 개념이 아니라 선포된 말씀을 의미한다. 성포함이 없이는 어떤 말씀도 들을 수 없으며, 말씀을 받음도, 믿음도 그리스도인의 생활도 없다(로마서 10:17).

2. 레마̀ήμα) - 레마의어근은 말씀을 계속 간직하고 지키는 것을 의미하는 중요성을 지니고 있다. 이 단어가 시사하는 바는 분명하게 말해진 어떤 것, 진술’(선포, 성명)과 같은 것이다. 행동 자체와는 구분이 되지만 행동고 관련된 단어이기도 하다언행(言行)이란 말을 사용할 때 말()과 행동()은 구별되지만 레마는 행동을 요구하는 뉘앙스를 가진다.

레마는 선포된 말씀, 즉 기록된 말씀을 표현하는 데에도 사용되었다. 레마는 감정적이며 의지적인 강조점이 있다. 레마는 말과 사건을 나타내는 것으로 사용되고 있다. 레마는 신약성서에 68회 나타난다.

이 가운데 사도행전에 33, 요한복음에 12회 나타난다. 마태복음에는 5, 마가복음에 2, 바울서신에 16회 나온다. 계시록에는 나타나지 않는다. 마태복음 4:4절에 언급된 모든 말씀말씀이 레마이다.

3. 창세기 1 1절에 대한 암시 - 요한복음 1;1-3절의 로고스(λόγος)는 태초까지 소급되기 때문에 만물의 기원인 태초시의 창조의 말씀과 자연스러운 연결이 이루어진다. 요한복음에서 볼 때, 말씀은 태초(ένάρχη,엔아르케) 에 하나님의 천지 창조에 함께 있었다. 창세기 1:3절에서 빛이 있으라고 말씀하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라고 성경은 밝히고 있는 것이다.

 이 말씀은 단순한 기능이 아니라 인격적으로 말씀이 육신이 된 그분의 인격과 동일하다는 진리를 밝히고 있는 것이다이 로고스는 선재하신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다.

4. 구약에서의 하나님의 말씀 - 말씀을 의미하는 히브리어 아마르다마르와 같은 어근들이 헬라어로 로고스(λόγος), 로기온(λόγιον), 레마̀ήμα)와 레시스̀ήσις)의 주된 용어들이다. 아마르는 말함(saying)을 의미하는 데 사용될 때에는 보다 시적인 의미를 지닌다. 다바르는 역사, 율법, 예언등에 있어서 말씀”(word)을 의미하는 고전적인 용어들을 지시한다.

5. 신약에서의 말씀(Word)과 말함(Speech) - 로고스는 일상생활의 의미로부터 가장 의미 심장한 것까지 다양한 의미를 지닌다. 사람들이 사용하는 악한 말, 헛된 말, 거짓말까지 포함하고 있다. 방언으로 말함에 있어서 로고스(λόγος)는 알아들을 수 없는 것일 수도 있다(고전 14:19).

6. 신약에서 개인들을 향한 특별한 하나님의 말씀 - 시므온과 세례 요한에게 하나님의 레마̀ήμα)가 임했다는 언급을 볼 때, 시므온과 세례 요한은 모두 구약 선지자의 범주에 속한다(누가 2:29; 3:2). 사도시대에 하나님의 말씀(로고스와 레마)이 나타나지만 특별한 하나님의 지시들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이제 이 말씀들은 성령, 그리스도, 천사 또는 하나님의 음성에 의해 주어진다이러한 변화는 성육신된 말씀으로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분명하게 오셨기 때문이다.

예수께 대하여는 예수 자신이 말씀을 주시는 분이고 말씀 자체이기 때문에 예수에게 말씀이 임했다는 언급이 없다. 예수 수세시에 하늘에서 들린 하나님의 음성은 예수가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아들이라는 것을 알리는 차원에서 주어진 것이다.

7.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 인용 - 예수님께서 친히 자신의 말씀을 기록하지 않으셨기 때문에 그 말씀의 기록은 항상 그분이 말씀하셨다는 것, 또는 예수님의 말씀(λόγοι 또는 ρ̀ήματα)을 언급하고 있다. 이러한 언급은 한 가지 말씀을 의미하기도 하며(마가 10:42) 일군(一群)의 말씀을 의미할 수도 있고(마태 26:1) 또는 예수의 메시지 전체를 의미하기도 한다(마태 24:35).

구속(救贖)과 구원(救援)


구속(Redemption)
히브리어 – ‘파다’, ‘코페르’, ‘가알’,  명사= ‘게울라’.  헬라어 – λυτρο 어근(語群) ‘해방이란 의미가 있고, 대가를 지불하고 속박 상태에서 풀려나는 것을 구속(救贖)이라 한다. 국어사전에는 구속이란기독교에서 에수가 십자가의 보혈(寶血)로 만민의 죄를 대신 씻어 구원한 일-대속(代贖)”으로 되어 있다.

1) 구약(Old Testament)히브리어파다와 파생어들이 구속이란 의미로 가장 많이 사용되었는데, 이 단어들은 주로 율법에 따라 하나님께 속한 초태생의 사람이나 가축을 대속할 때 사용하였다(,13:13).  그러나파다란 말이 간혹 상실된 생명을 다시 회복시킬 때 지불하는속죄금’ (보상금)이란 의미로도 사용되었다(21:30; 삼상14:45; 참조-30:12).

히브리어코페르’(몸값, 속전, 속죄금, 속죄) : 하나님께서파다’[몸값(배상금)을 치르고 되찾다. 속전하다, 구속하다, 건지다, 속량하다, 대속하다, 구원하다, 속하다]의 주체가 되실 때 출애굽 사건을 일반적으로 구속 사건이라 부른다(, 7:8’ 9:26; 삼하7:23; 78:42). 이와 같은 경우에는 대가에 대한 지불보다는 하나님의 주관적인 구속 행위가 더 강조되고 있다.

히브리어 동사가알  명사게울라는 자신을 종으로 팔아버린 곤궁한 친족을 구속해야 하는 의무나, 이미 팔아버린 친족의 땅을 다시 구입해야 하는 의무와 관련되어 있다(25:25-26, 33, 47-49; 4;4, 6). 이와 같이 구속의 의무를 수행하는 자를 가리켜서 구속자(‘고엘’, , 3:12기업 무를 자라 불렀다) 구속자는 또한 친족의 부당한 죽음에 대해서 복수까지 해야 할 의무가 있었다. “내가 알기에는 나의 구속자가 살아 계시니”(19:25)라는 욥의 고백은, 그에게 닥칠 부당한 죽음을 구속자가 보복해 줄 것이라는 의미이다.

이와 같은 친족의 구속 의무 개념을 확대시킨 것이 바로 애굽의 노에 상태에 있던 이스라엘을 약속의 땅으로 이끌어 내신 하나님의 구속 사건이다. 하나님께서는 이사야서에서 자신이 구속자라고 말씀하셨는데(, 41:14, 47:4), 이 때 하나님께서는 앞으로 행하실 구원 사역을 이전에 있었던 출애굽 사건과 비교하면서 강조하였다. 여기에서 주의할 점은 위에서 언급한 히브리 단어들이 항상구속이나속량이란 의미로만 사용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 문맥에 따라 이 단어들의 의미가 변할 수도 있음을 알아야 한다.

 2) 신약(New Testament)신약에서 구속이란 개념은 주로 헬라어뤼트로어군(語群)으로 표현되었다명사뤼트론(λυτρον… 몸값, 속전), ‘뤼트로시스(λύτρωσις… 속전, 구속), ‘아폴뤼트로시스(ὰπολύτρωσις… 몸값, 속전, 구속, 의무의 면제, 해방), ‘안틸뤼트론(ὰντίλυτρον … 몸값, 속전), 동사뤼트로오’(λυτροω) 그리스도의 죽음을 속전으로 이해한다.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代贖物)로 주려함이라”(53:12) .

앞에서 언급된 헬라어 단어들이 구약의 구속 개념을 완전하게 전달해 준다고는 볼 수 없으나 설명하는데는 크게 도움이 된다. 일상 이러한 헤라어 단어들은보상이란 의미를 지닌다.  노예들이 자유를 얻기 위하여, 또는 죄수들이 석방되기 위하여 제사의식 때 신에게 바치는 돈을 지칭하가도 했다. 아무튼 이스라엘의 구속 개념과 여러 면에서 유사했던 이 단어들은 그리스와 로마 사회에 여호와의 구속을 이해시키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바울 서신에서아폴뤼트로시스(ὰπολύτρωσις)는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얻게 된 현세의 구속 (3:24; 1:7; 1:14; 참조 고전 1:30), 장래에 얻게 될 종말론적 구속(1:14, 4:30) 모두를 지칭할 때 사용하였다또한 이 단어가 히브리서 11:35에서는 악형의 고통에서 벗어남을 가리키는 일상적인 의미로도 사용되었다.

헬라어 동사아고라조(àγοράζω … 사다, 구입하다)는 시장에서 사용하던 말인데, 성경에 사용되고 있다. 이 말은 본래 헬라 사회에서 노예를 구입할 때 주로 사용하였다. 그런데 이와 같은 용례가 하나님의 구속을 이해할 수 있는 가교 역활을 해 주었다(고전6:20, 7:23; 벧후2:1; 5:9, 14:3).

곧 노예를 구입하기 위해서는 그 대가를 지불해야 하며, 구입한 노예는 그 주인이 바뀌게 된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보혈이란 대가를 지불하여 하나님의의의 종이 된 그리스도인들의 모습과 일맥 상통한다(5:9; 6:18-20). 후에 교부들에 의하여 속죄 교리가 발전하게 되자, 누구에게 속죄의 대가를 지불했는가 하는 문제가 제기되었다.


아고라조’(àγοράζω)의 강조형인엑사고라조’(ὲξαγοραζω)는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율법의 저주나 속박으로부터의 구속을 나타낼 때 사용하였다(3:13, 4:5). 이 때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그 전환점이 되었다.

구속자’ (속량하는 자 … ‘뤼트로테스’λυτρωτής)란 말이 신약에서 모세에게 사용되고 있는데(7:35) 이는 모세뿐만 아니라 구약성경에 있는 여러 인물들이 구속사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계시하고 있는 것이다.

계시(啓示)

영어 : Revelation
헬라어 : 명사 아포칼립시스 άποκάλυψις동사 아포칼립토άποκαλύπτω
히브리어 : 니글라, 갈라
라틴어 : revelatio

구약에서는 신약에서 사용된 계시(아포칼립시스)와 같이명사로 사용된 곳이 없으며 동사(니글라,Niph)나타났는데(was revealed)’로 표현되어있고 갈라가 계시하다, 알게하다, 벌거벗다, 열다, 밝히다등의 뜻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구약성경 전체가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알라는 하나님의 계시로 가득 차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인간은 죄를 짓고 타락한 후에 스스로 하나님을 볼 수 없게 되었다즉 하나님께서 직접 자신을 알려주시기 전에는 알 길이 없게 되었다. 하나님은 초월자로서 자신을 계시하고 계신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신을 열심히 알리시고 계신다구약과 관련된 하나님의 지식은 경험적인 지식, 곧 단순한 사실만을 알리는 지식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시로, 천사, 사람, 선지자, 말씀, 생물, 자연, , 환상 등에 의해 관계적으로 교훈된 경험과 지식이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의 역사 가운데 직접 참여하심으로 자신을 계시하신다. 영원히 살아계신 하나님이란 말안에 많은 의미와 계시가 들어있다. 출애굽은 단지 과거의 이야기가 아니라 계속될 하나님의 백성들의 삶을 위한 하나님의 계시와 교훈의 역사이다. 그러므로 구약성경은 현재와 미래에서 기대되고 또 우리의 영적 훈련을 위한 생명의 말씀(성경)이 된다.

신약에서 특별히 요한계시록은 계시문학의 형태로 기록되었다. 성경 전체는 구약이나 신약이나 계시의 성격을 내포하고 있다. 계시란 하나님께서 창조, 역사, 말씀, 인간의 양심 등을 통하여 자신을 나타내신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계시의 궁극적 목적은 인간을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것이다. 또한 성경의 모든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되어있으며,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Incarnation)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드러내신 최고의 행위이다. 이런 맥락에서 구약은 장차 오실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하나님의 계시이며, 신약은 오신 그리스도와 다시오실 그리스도를 알려주는 계시라 할 수 있다.

계시에 대한 보다 나은 이해를 위하여 원어의 어근을 중심으로 연구해 보자. 칼립토(καλύπτω) 파묻다, 숨기다, 덮다는 뜻으로 아포칼립토(ὰποκακα  λὺττω)벗기다, 드러내다의 어근이다 (14:28,  27:2, 24:15-16, 8:24, 23:30 )칼륌마(κὰλυμμα)베일, 두건, 덮개등을 의미한다. 모세는 수건으로 자신의 얼굴을 가리웠다(34:33). 고린도후서 3:7 이하에서 바울은 모세의 이야기를 가지고 구약의 계시와 복음을 비교한다. 만일 일시적인 광채가 영광스럽다면, 복음의 영원한 광채는 얼마나 더 영광스럽겠는가?


여기에서 베일은 완고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구약을 읽을 때, 그들의 마음에 드리워져 있는 베일을 상징한다아나칼립토(ὰνακαλὺπτω)열다, 벗기다, 제거하다를 의미하고, 카타칼립토(κατακαλὺπτω)자신을 덮다, 가리다’, 예배시간에 너울을 쓰다를 의미한다.

1. 구약에서의 계시
구약에서 계시로 사용되고 있는 계시의 도구들도 신약과 동일하다. 표적(24:12). 선견자들 (삼상9:6), (28:12), 신탁(삼상14:37), 제사장의 지시(17:9, 12), 황홀경, 예언 등과 같은 계시의 수단들이 사용되었다. 금식은 그러한 계시를 받기 위한 예비적인 수단이 될 수 있다(9:3). 구약 성경에서 강조하고 있는 계시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살아계신 하나님이라는 것이다(3:10, 37:4, 5:23). 하나님은 숨어 계시며 자신이 원할 때에만 자신을 계시하신다 (45:15).

2. 하나님의 계시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알아보자.
1) 하나님은 역사의 주인으로서 그 자신을 계시하신다. 출애굽 사건에서 하나님은 그 자신을 위해 이스라엘을 분리시키셨다(19:4). 출애굽 사건이 역사의 주인이신 여호와 하나님을 잘 계시하고 있다. 역사는 하나님의 작품이다(7:1). 하나님은 앗수르와 바로 그리고 고레스같은 나라와 사람을 사용하여 구속사를 이끌어 가신다.

2) 하나님은 그 자신을 은혜롭고 거룩한 분으로 계시하신다. 하나님은 윤리적인 의미에서 거룩하시다(십계명). 하나님은 순종을 요구하신다. 순종없는 제사는 가증스러운 것이다(삼하12:7; 왕상17:1; 2:6; 1:). 하나님은 그의 거룩하심 속에서 그의 영광에 대한 관심을 갖는다(20:5). 하나님은 은혜로우시며 자비를 보여주시고 용서를 베푸신다(34:6-7). 하나님은 심판을 통해 축복을 가져다주신다(40:1; 53, 61:1-). 여기에서 창조자와 주님(주인)으로서의 하나님의 전능한 능력이 나타난다.

3) 하나님은 이 세상을 말씀으로 창조하셨고 동일한 말씀으로 유지하고 지배하신다. 우리가 하나님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자신을 계시하신다. 하나님은 직접 말씀해 주시거나 천사나 선지자를 통하여 또는 기록된 말씀으로 자신을 계시하신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에게 신실함을 요구하신다. 하나님은 우상을 섬기는 것을 허용하지 않으신다. 우상숭배는 하나님께 대하여 간음죄가 된다.

3. 계시에 대한 유대교의 태도
1) 일반적인 관점 유대교는 더 이상 직접적인 계시를 기대하지 않는다. 유대교에서의 초점은 율법서, 예언서, 성문서들에서 나타난 과거의 계시에 근거한다. 구전은 단지 설명을 의미할 뿐이다. 하나님의 뜻은 지금도 앞으로도 알려지고 또 알려질 것이다.

2) 묵시 묵시는 계시를 대치한다(묵시라는 용어는 신약의 마지막 책인 요한계시록에 나온다). 이 용어는 다른 지역에서 발견되기도 하지만 현저히 팔레스타인적인 것이다. 묵시의 장르는 위경에 있으며 하나님의 추월성이 강조된다. 새 시대는 이미 존재한다. 악이 절정에 달할 때 새 시대는 능력 있게 나타날 것이다. 선견자(선지자)들은 싸우고 있는 하나님의 종들을 격려하기 위하여 이러한 환상을 계시해 준다. 이러한 주제들의 진지성, 세계사에 대한 개념, 그리고 계시에 대한 역동적인 이해로 인해 묵시는 중요한 요소가 되고 있다.

3) 자연계시 헬리니즘 유대교는 한편으로는 변증적인 이유로 인해,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논쟁적인 이유로 인해 보다 더 내재주의적인 경향을 띠고 있다. 필로와 지혜서는 세사의 아름다움과 목적속에서 하나님을 발견한다. 따라서 우상 숭배는 비록 용서할 수 없는 것이기는 하지만 동정받을만한 것이다. 헬라 철학에서처럼 필로에게서도 아래로부터 위로의 운동이 나타나고 있으며, 따라서 피로는 범신론의 위협을 방지하기가 어렵다. 바로 여기에 문제점이 있는 것이다. 이와 더불어 계시된 율법과 자연법을 동일시하는 견해가 나타난다.

4. 신약에서의 계시
신약은 구약의 계시를 이어받고 있으며 이를 전제로 하고 있다. 따라서 신약은 묵시에 대한 종말론적 영향을 제외하고는 유대교를 무시한다. 계시에 대한 신약의 견해의 특징적인 역동성은 역사와 종말론과의 관계에서 나타난다.

1) 공관복음서에서의 계시 세례(침례) 요한의 증거(3:2)와 예수님의 최초의 메시지 (1:15) 는 하나님이 도래하고 있으며, 그의 왕국을 나타낸다는 것이었다. 우리는 이러한 계시적인 하나님의 행위에 대비해야만 한다. 그런데 예수님 자신이 하나님 나라라는 사실이 명백해진다. 하나님 나라는 예수 안에서 종말론적 실재로서 현존한다. 예수님께서는 계시를 부여해주고(11:27), 그것을 구현시키며 결국 그 자신을 나타낸 것처럼(17:30)

계시를 드러낼 것이다(8:38). 신자들은 성부 하나님에 의해 이미 있는 그대로의 그를 볼 수 있다(16:17). 베드로의 예수님에 대한 신앙고백은 하늘에 계신 그의(예수님의) 아버지의 계시에 의한 것이다[Then Jesus said: ‘Simon son of Jonah, you are favoured indeed! You did not learn that from motal man; ot was revealed to you by my heavenly Father. Mt16:17, NEB].

예수 안에 현존하는 계시를 알리는 것, 그 자체가 계시의 행위이다. 여기서의 장애물은 인간 자신이 가지고 있는 인간적인 지식이다(11:25). 예수님의 계시의 목적은 언약의 하나님께서 계시를 영화롭게하고 성취하도록 하는 것이다(7:8; 마태5:17). 이러한 계시는 모든 사람을 위한 것이다(8:11). 그러나 계시는 모든 죄인들에 대한 하나님의 자기 희생이라는 의미에서, 그리고 죄인들로 하여금 순종하는 믿음과 신앙고백을 통해 그러한 계시에 응답하도록 하기 위해 주어진다.

2) 초대 그리스도교에서의 계시 이해 –  여기서 우리는 미래에 대한 보다 강력한 경향을 발견한다. 이미 오신 메시야는 다시 오실 것이다. 메시야는 하늘에 계시다가 어느 날 다시 나타나실 것이다(3:21). 메시야의 지상에서의 말씀들과 행위들은 구약의 약속들을 성취시켰다. 그러나 메시야의 목적은 그가 영광 중에 재림하실 때에야 비로서 이루어질 것이다(10:36). 성령을 주신 것은 과거와 미래를 연결짓는 현재의 고리이다.

3) 신약의 서신들에서의 계시 서신들에서 계시는 일차적으로 예수 안에서 성취되고 취후의 날에 완성될 하나님의 역사적 도래를 가리킨다. 구약은 계시의 거룩한 말씀이다. 그러나 구약은 계시 그 자체로 불리우지는 않으며, 신약에서의 성취를 돕는 것으로 나온다(4:23-24). 진정한 주제는 종말론이다즉 그리스도(고전1:7), 하나님의 심판(2;5) 또는 진노(1:18), 적그리스도(살후2:3), 하나님의 의(1:16), 그의 자녀들(8:19), 그들의 영광(8:18)과 구원(벧전1:5) 등의 나타남이다.

하나님의 통치에 의해 구원의 수단으로서 믿음이 계시된다(3:23). 선포와 받아들임은 메시지일 뿐만 아니라 계시이다(살전2:13). 인간은 죄로 인하여 하나님을 볼 수도 없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도 없게 되었다. 하나님은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시고 인류의 모든 죄를 아들에게 전가하여 하나님의 어린양으로 십자가 위에서 대속의 죽음을 받게 하셨다. 그리고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도와 부활을 믿는 자를 하나님께서는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게 하시고,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신다.

5. 요한문헌에서의 계시
1) 요한복음서와 서신들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은 보혜사 성령을 통해 감동과 감화의 계시로 깨달아 알게 하신다.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 그리스도인 안에 와서 내주하시는 임마누엘 성령님(14)은 그리스도인들안에 영원히 내주하실 것이다(14:16will be with you forever). 삼위일체 하나님의 내주(현재)와 내재(미래) -(14:15-26)를 체험하는 믿음은 성화 또는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까지 자라가게 돕는 하나님의 은혜의 계시에 의한 것이다.

요한은 로고스(λογος)란 용어를 그리스도에게 적용시켜 모든 피조물을 그리스도 안에서의 계시와 연결시킨다. 이 로고스는 우주적이면서도 또한 개인적이다. 우주는 그리스도 안에 있지만, 그리스도는 그의 신자 안에 내주하신다. 성육신이 된 로고스 안에서는 메시야적인 것이든, 신비적인 것이든 관련된 모든 것들(, 생명, 기쁨, 하나님과의 영적인 결합)이 만난다. 하지만 이것은 혼합주의나 자연 계시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의 절대적이며 역사적인 하나님의 계시에 의한 것이다. 이러한 계시의 최고의 징표는 사랑이다.

그리스도교 이전의 구원사는 선재하신 그리스도에게 연결된다(8:58). 예수의 지상 사역은 일차적으로 현현의 시각에서 본다(1:14; 요일1:1). 예수를 통해 되와 사망의 세계에 하나님의 실재가 빛을 발한다(3:14). 불신자들에게는 감추어져 있지만 믿는 자들은 모든 은헤와 진리가 충만한 그(예수 그리스도)를 본다(1:14).

2) 요한계시록 이 책은 계시(아포칼립시스àποκὰλὺψς)라고 불리운다. 이 책에서는 복음서에서와 마찬가지로 로고스를 사용한다. 그러나 이 책의 관심의 초점은 하늘의 세계가 드러날 미래에 주어지고 있다. 이 책은 절대화된 국가 권력과 충돌하고 있던 교회에게 힘을 복돋우어 주기 위해 씌어진 것이다. 이 잔인한 국가와 고난받고 있는 교회 위에는 영원한 세계가 있다. 그 세계는 궁극적인 정복의 세계이며,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왕국이다.

6. 계시의 한계와 확증
구약의 언약을 성취한 신약은 하나님께서 세상 모든 곳에서 자신을 계시로 증거하셨지만 (14:16-17). 이스라엘이 구원을 가져다주는 계시의 중심지라는 사실을 인정한다(4:22). 하지만 이러한 계시는 이제 모든 인류에게 보다 완전히 전달된다(13:10; 1:8 ). 동시에 신약은 거짓 계시에 대항하여 참된 계시를 확증하는 일에 관심을 갖는다. 표적들은 계시를 보여준다(11:5-6; 5:36; 고전2:4). 그러나 마귀의 기적들도 존재한다(13:22-23; 살후2:9- 10). 천사 조차도 진정한 계시의 보증이라고 인정할 수가 없다(1:8; 고후11:14).

참된 계시를 판단하는 보다 나은 시금석은 열매이다(7:15). 성령은 분별의 은사를 주신다 (고전12:10).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는 것은 참된 계시의 가장 분명한 기준이다(고전12:3) 그러나 신앙고백에는 사랑이 수반되어야 한다(고전13:1). 성육신하신 그리스도(요일4:1)를 영화롭게 하는 것이다그러므로 계시는 그리스도에게 충성함으로써 그 진실성을 입증해야만 한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역시 사랑의 뒷받침을 받아야만 한다(요일4:8; 13:35). 사랑은 신앙고백이 형식적으로 되지 않도록 하며, 신앙고백은 사랑이 도덕주의로 빠지지 않게 한다.

7. 신학적인 요약
신약에서 계시는 감추어졌던 사실들을 드러내주는 것과 초월적인 하나님의 현현을 가리킨다계시는 죄가운데 빠져있는 자들을 향한 하나님의 은혜로운 돌이킴이다. 계시는 구약에서 준비되었으며,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과 부활에서 실현되었고 재림시에 이루어질 완성을 기다리고 있다.

또한 계시는 이러한 내용을 전달해 주는 메시지, 즉 계시의 효과적인 전달을 가리키기도 한다. 이러한 전달에 의해 계시는 개인들을 위한 계시가 된다. 요약해서 말하면 계시란 그리스도안에서의 교제를 위해 성부 하나님이 그 자신을 희생하신 것이다.

한 사람의 도움


1:22-25 …요셉 족속이 벧엘을 정탐케 하였는데 그 성읍의 본 이름은 루스라…

이스라엘 백성은 전쟁에 임하기 전에 적의 동태를 살피기 위하여 수시로 정탐꾼을 보내었습니다. 여리고성을 점령할 때에도, 요셉 족속이 벧엘을 점령할 때에도 그랬습니다. 그들은 이처럼, 적을 알기에 주력함으로써 큰 이득을 보았습니다.

1. 영적 전쟁에서도 정보는 중요합니다
1) 요셉 족속이 벧엘에 정탐꾼을 보냄
원시적 형태의 전쟁에서든 현대전에서든 간에 전쟁에서 승리하려면 적에 관한 정보를 알아내야 합니다.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전 백승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요셉 족속도 벧엘을 치러 올라가기 전에 벧엘을 정탐케 함으로써, 전쟁을 승리로 이끌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날에는 전쟁을 위해서 뿐만 아니라, 기업 경영에서 스포츠에 이르기까지 소위 정보 전쟁을 벌이고 있다 할 정도로 정보를 알아내기 위하여 사람들은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성도들은 정작 우리의 대적자인 사단의 정체에 관하여 얼마나 알고 있으며, 또한 얼마나 알려고 애쓰는지 반문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2) 우리도 사단의 정체를 잘 알 필요가 있음
일각에서는 소위 사단론이니 마귀론이니, 귀신론이니 하는 것들에 대하여 심한 거부감을 나타내는 신자들이 있습니다. 물론 그러한 것들에 너무 치우치면 신앙이 편협하기 쉽고 신비주의에 빠지기도 쉽습니다. 기동 목사가 그러한 예에 속할 것입니다. 그러나 '구더기 무서워서 장 못 담근다'는 속담처럼, 그러한 폐단들 때문에 우리의 원수인 사단과 귀신들의 정체와 그 활동 속성에 대하여 알기를 두려워 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그럴수록 더욱 건전한 방향으로 마귀론을 집대성해서 성도들에게 보급해야 마땅할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사단의 정체를 보다 더 잘 알기 위한 방도로써 하나님의 말씀보다 더 적절한 것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말씀을 제대로 읽으면서 악한 영들에 대한 연구를 한다면, 결코 치우치거나 잘못되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2. 한 사람의 영향은 지대합니다
1) 벧엘의 한 사람 때문에 가족 전체가 구원받음
본문에 등장하는 벧엘 사람은, 여리고 정탐시 기생 라합과는 달리 정탐꾼들의 은근한 위협으로 말미암아 마지못해 이스라엘에게 협조하는 듯한 인상을 줍니다. 하지만, 비록 타의에 의해서일망정 그가 하나님의 신성한 사역에 동참하게 된 것은 그 이면에 하나님의 손길이 함께하신 결과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한 사람의 행동 여하에 따라 전 가족의 구원과 멸망이 좌우되었다는 데서 우리는 '구원의 대표 원리'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즉 한 사람 아담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된 것입니다. 물론 구원은 최종적으로 개개인과 예수 그리스도와의 만남을 통해 이루어지기 마련이며, 어떤 사람이 타인의 구원을 대신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한 사람이 그 주변 사람들에게 심대한 영향을 끼쳐 구원에로 인도하는 경우 또한 허다한 것입니다.

2) 우리도 영향을 주는 한 사람이 되어야 함
벧엘 사람의 역할을 통하여,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하여 한 가지 물음을 제기하게 됩니다. 과연, 우리 자신은 주변의 사람들에게 얼마나 많은 영향을 끼치고 사느냐는 것입니다. 물론, 그 영향은 좋은 영향이어야 하겠지요. 이러한 질문은 매우 단순하기도 하지만, 매우 심각한 질문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그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수많은 사람들이 변화받고, 구원의 반열에 오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한국 땅 인구의 1/4 정도가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는데, 왜 더 많은 탈선과 비리가 횡행하고 있습니까?

그것은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이 제 구실을 다하고 있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한 사람의 성도가 주위의 3명에게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면 그 믿음은 분명 죽은 믿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자신의 믿음과 행위가 일치함으로, 더욱 분명한 복음의 전달자가 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3. 약속은 반드시 지켜져야 합니다
1) 요셉 족속이 신실하게 약속을 지킴
라합의 경우에서처럼, 이스라엘 백성은 약속을 신실하게 지켰습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도움을 준 벧엘 사람과 그 가족은 무사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이스라엘의 신실성은 하나님의 성품에 기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 자신이 신실하신 분이므로, 그 백성도 신실하기를 원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으로 하여금 함부로 맹세하거나 또는 함부로 약속을 어기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그 백성의 신실성 여부는 그들이 섬기는 하나님의 이미지와 관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도 살아가면서 우리가 한 약속이나 말들에는 반드시 책임을 질 줄 알아야 할 것입니다.

2) 말은 신중해야 함
하나님께서는 천지를 말씀만으로 지으셨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의 능력으로 이 세상은 유지되고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천지의 보편적 진리와 법칙의 주체는 바로, 하나님의 살아 있고 운동력 있는 말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말씀은 곧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매우 신실하신 분이시며, 약속하신 바를 철저히 이행하시는 분이십니다.

왜냐하면, 그분의 속성은 너무나 거룩하고 흠이 없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러한 말씀 가운데 사는 우리들도 주님의 신실하심을 본받아야 합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신실함의 본을 보임으로써 주님의 보증 수표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믿는 자들 가운데는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신뢰를 쉽게 저버리고 말을 함부로 내뱉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는 매우 부끄러운 일이기 때문에, 우리 자신도 혹 그런 경우가 없는지 돌아보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려면, 원수 마귀의 속성과 궤계를 알기에 힘써야 합니다. 또한, 매사에 신실함을 보임으로써 세상 사람들이 우리를 통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도록 해야 할 의무가 있는 것입니다.

자아의 파쇄


우리의 영적 삶을 풍성히 누리기 위하여 우리의 천연적인 생명은 십자가에 의해 처리되어야 한다. 우리의 자아는 온전히 부서져야 한다. 우리의 자아가 파쇄 되기 전에는 우리는 주님의 뜻을 온전히 누릴 수 도 없고 또한 하나님의 뜻을 실행할 수도 없다.


우리의 자아파쇄는 우리의 혼의 생명이 다할 때까지 처리되어야 할 과제이다. 우리 자아의 파쇄는 단번에 이루어지기보다는 우리의 일생을 통하여 조금씩 서서히 파쇄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야곱이 얍 복 강가에서 단번에 처리된 것처럼 보이지만 그 후의 삶에 있어서도 자아 처리의 하나님의 손길은 끊이지 않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우리의 자아를 큰 바위로 비유해 본다면 처리되는 과정은 바위가 반으로 기본적으로 갈라지고 계속 하여 하나님의 손길로 두 쪽 난 바위가 네 쪽이 되고 이렇게 하여 계속 부수어져 바위가 흙처럼 되었을 때 자아 처리의 완성이라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대부분은 이런 과정을 모르기 때문에 몇 번의 자아 처리 경험을 가지고 자아 처리가 다 된 것처럼 착각하여 많은 실수를 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우리는 섰다고 생각할 때 넘어진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우리의 죄는 십자가에서 단번에 처리되지만 --우리가 죄를 저지를 수 없거나 죄를 지었을 때 회개할 필요가 없다는 말이 아니다.--- 자아의 처리는 일생을 두고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다시 인식하고 성령님께 우리의 자아를 처리해 달라고 기도해야겠다. 우리의 자아가 처리된 만큼 우리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할 수 있다 이것은 우리의 딱딱한 자아가 고운 흙 부스러기처럼 부서질 때 바위처럼 굳은 자아의 본래 모습은 없어지고 하나님의 원하시는 데로 빚어질 수 있는 질그릇이 될 재료가 되기 때문이다.


하나님께 흡족한 산 제물이 될 수 있도록 우리의 자아가 파쇄 되기를 기도하여야 한다. 오늘도 처리되기 위하여 우리는 성령님께 의지하여 십자가를 구하여야 한다

인간의 본질과 영성

성경에 인간을 표현하는 용어로 영, , , 생명, 마음, , 육신이라고 하는 말들이 많이 나온다. 잘 정리해 두지 않으면 매우 혼란스럽고 혼동하기 쉽다. 또 우리 나라 언어 가운데 담겨져 있는 육이나 육체의 개념은 성경에 있는 몸이나 육신의 개념과 많은 차이가 있기 때문에 그것도 역시 혼란스럽기 쉽다. 그리고 헬라사람들이 생각하는 영혼 불면설이나 영에 대한 개념 또는 혼에 대한 개념, 이런 것들이 성경적으로 잘 정리 되어야 할 것이다.

데살로니가전서 5:23절에 보면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오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 온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고 바울은 말하고 있다. 바울은 사람에게 영과 혼과 몸, 세 가지가 있다는 것을 말했고 그 세 가지는 다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까지 흠 없게 성화되고 보전되기를 바란다고 가르쳤다.

창세기 1:27절과 2:7절을 보면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실 때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하시되 흙으로 사람을 만드시고 그 코에 생기를 불어 넣으니 사람이 생령이 되었다고 했다. 이것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심을 보이는 하나님만이 무에서 유를 만들 수가 있다는 것이다. 사람은 이미 있던 것을 다르게 변조할 수는 있어도 창조는 못한다.

하나님이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하셨다고 했는데 하나님의 형상이 무엇인지 우리는 모른다.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이다(4:21). 하나님은 순수 영이시기 때문에 형상화시킬 수가 없다. 그러나 예수께서 육신으로 오셨을 때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다’. ‘나와 아버지는 하나라고 말씀하셨다(요  14:9). 형상이 있다면 예수님으로 나타나신 하나님, 그것이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고린도전서 15장에 첫째 아담과 마지막 아담이 있다고 했는데 창세기의 아담은 첫째 아담이고 예수님은 마지막 아담이다. 첫째 아담으로 인하여 죄와 사망이 들어왔고 마지막 아담이신 예수님은 살려주는 영이라고 한다. 첫째 아담은 혼(Soul)이 본질적인 존재였고, 마지막 아담이신 예수님은 영(Spirit) 이 본질적인 존재인데, 성육신(成肉身, Incarnation)하셨으며 인간의 몸과 혼의 존재양식을 취하여 사람이 되신 것이다.

1. , , 몸의 구분
1) 영의 구분
성경에는 영(Spirit)이라는 말이 많이 나온다. 구약에는 374회 나오고 신약에는 383회 나온다. 이 영은 히브리어로 루아흐’, 헬라어로는 푸뉴마라고 한다. 이 말은 ’, ‘바람’, ‘의 뜻을 포함하고 있다. 그런데 신약에서는 383회 중에서 226회가 성령에 관해서 말한 것이고, 157회가 인간의 영에 대해서 말한 것이다.

2) 혼의 구분
히브리어로 네페쉬라는 말이고 헬라어로는 프쉬케라고 한다. 이 혼(Soul)이라는 말이 구약에는 692회 나온다. 그 중에 428회는 혼의 의미로 사용되었고, 7회는 인간의 몸과 동물의 몸에 대해서 사용되었고, 8회는 사람이나 동물의 시체에 대해서 사용되었으며, 신명기 6:5에서는 성품으로 번역되었고, 119회는 단순히 목숨이라든가 생명’ 의 뜻으로 사용되었다. 신약에는 프쉬케를 103회 사용하는데, 103회 중에서 53회는 혼의 의미로 사용되었고 40회는 목숨혹은 생명의 의미로 사용되었다. 혼이라는 것은 단순히 목숨이나 생명의 의미로 사용된 것이 많고, 심지어 어떤 때는 동물의 시체에까지 사용된 것을 볼 수 있다.

3) 몸의 구분
성경에 147회 사용되었는데 몸[body, 바사르, 소마]은 다음과 같이 세 가지 의미로 사용되었다. 첫째는 인간의 생물학적인 육체를 말했고둘째는 인류 전체를 가리켜서 말했으며셋째는 육신이라는 말로 바꾸어 말했다. 그리고 이 경우에는 옛날의 죄의 본성에 대해서 가리킨 경우도 있다.

2. 생 명
이 생명이라는 말도 두 가지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첫째 의미는 생물학적인(의학적인) 생명이다.  둘째 의미는 구약에서는 혼이라는 뜻에서 생명이라는 말을 사용했고, 또 생령이라고 하는 의미로 사용하기도 했다. 생명은 하나님에게서 온 것이다. 하나님이 생기를 불어 넣어서 사람으로 생명이 되게 하셨다.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영이 생명을 부여한 것이다.

로마서 8:2절에 생명의 성령의 법이 우리를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하였다고 했다. 하나님께서 우리 속에 생기를 불어 넣어서 살아 있는 인간 존재(a living being)  되게 하셨다. 그런데 구약에서나 신약에서나 마찬가지로 영도 생명이라는 말로 사용했고 인간의 혼도 생명이라는 말로 사용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영적인 생명과 혼적인 생명을 어떻게 구분할 수 있겠는가?

우리의 시각과 우리의 지각적인 경험으로는 이 영과 혼을 그리고 생명을 구분하기 어렵다.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가서 작용할 때 반응으로 나타날 뿐이지 우리는 이 혼과 영과 생명을 구분하기 어렵다. 성경에서 이 생명을 생물학적인 의미로 사용할 때는 헬라어로 누스라는 말을 썼으며 생물학(Biology)의 어원이 된다. 그리고 특히 성경에 조에라는 생명이라는 말에는 영원이라는 형용사를 붙였다.

영원한 생명, 그것은 예수님께서 죽으심으로 예수 믿는 사람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신다는 것이다. 이것이 조에’ 라는 특별한 생명이다. 보통 사람이 가지고 있지 않은, 영원한 하나님에게만 속한 생명이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할 때 이 생명을 소유하게 되는 것이다. 베드로전서 1:23절에 너희가 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하나님의 살아 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되었느니라로 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인간 생명의 씨가 되어 그 씨가 사람의 영혼 속에 들어가서 영원한 생명을 낳는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자신의 생명을 내어 주셨다. 우리가 예수님을 영접하여 성령으로 거듭남으로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었다. 첫째 아담의 후손들이 예수님을 영접하고 성령이 그들을 다시 살게 해서 하나님의 자녀되게 할 때까지, 영원한 새 생명을 줄 때까지 자연 인간들의 영은 죽은 상태에 있는 것이다물론 지식의 활동도 하고 정서 활동도 하지만 그것은 무엇인가 잘못되어 고장난 전자제품처럼 제구실을 하지 못한다. 인간이 범죄를 저지르지 않았을 때에는 인간의 영과 혼과 육체의 질서가 바로 서 있었다.

영이 우리 인체 중에서는 제일 주인격이다. 그 영은 하나님에게서 명령을 받는다. 그래서 그 영의 지배를 받는 혼은 지금보다도 그 정서나 의지의 힘이 훨씬 강했을 것이도 우리의 육체도 광채가 나고 향기가 나는 그런 영광스러운 몸이었을 것이며 또 우리의 육체는 병들지 않고 깨끗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거꾸로 되었다. 육체가 우리의 혼을 지배하고 영은 완전히 죽어 버렸다. 모든 사람이 범죄를 했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3:10)고 했으며, 욥은 말하기를 나는 썻은물건의 후패함 같으며 좀먹은 의복같으니이다”(13:28)라고 했고, 만물중에 가장 거짓된 것이 사람의 마음”(17:9)이라고 했다.

소돔과 고모라의 사람들은 모두가 타락해서 멸망을 받았으며 노아의 홍수 때도 마찬가지이다. 예레미야가 하나님의 시각으로 인간을 보았을 때에 너희는 예루살렘 거리로 빨리 왕래하며… 공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하는 자를 한 사람이라도 찾으면 내가 이 성을 사하리라”(5:1)는 말씀으로 한 사람의 의인도 없음을 개탄했다.

다윗이 그의 참회록에서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51:5)라고 한 것은 자기 원죄를 경험으로 느끼고 있는 것이다. 육체가 반란을 일으키는 육신적 인간(a man of sinful nature)dl 되어 하나님의 속성인 영과 아무런 상관이 없이 되어버렸다고 개탄을 하고 있다.

하나님의 영이 떠나가면 그 사람은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중생(born again)dl 필요하며 중생은 곧 영을 살리는 것이다. 하나님의 영은 사람의 영에게 역사를 한다. 내가 지 · 정 · 의를 가지고 내 언어, 내 지식으로 예수님을 영접하여도 반드시 성령의 역사하심을 입어야 한다.

하나님의 영이 사람의 영에게 역사를 해야 한다. 구약의 제사제도라든가 성전제도는 앞으로 올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에 대한 그림자이다. 너희 몸은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다. 인간구조와 성전구조는 비교될 수가 있다. 손과 발, 즉 오관으로는 접촉하는 것이 바깥 뜰이고 가운데 성소는 인간이 혼이라고 말할 수가 있으며 지성소는 인간의 영이라고 말할 수가 있다.

지성소에는 법궤가 있다. 그 법궤 위에 속죄소가 있다. 은혜의 좌소라고 한다. 그 지성소에는 제사장이 일 년에 한 번씩 들어가서 피를 가지고 제사를 지내는 곳이다. 속죄소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피를 상징하며 그 안에 있는 십계명은 하나님의 말씀을 상징한다. 지성소는 아주 은밀하고 조용한 곳이다.

이와 같이 나의 영의 지성소에서 하나님의 영이 와서 나를 만나고 나를 가르치시고 나를 변화시키면 이 혼적인 모든 기능을 새로워 진다. 영혼은 혼보다 더 근본적인 요소이기 때문에 그 영이 살아나면 혼이 생기를 받고 그 결과로 우리 몸이 죽지 않을 몸이 되어 점진적인 성화의 과정을 밟게 된다.

3. , , 몸의 개념
1) [spirit, 루하흐, 프누마]
영이라는 근본 의미는 이같은 움직임’ ‘미풍혹은 바람’, ‘호흡이다. 더 넓게는 생며의 본질이라는 뜻으로 쓰여졌다. 그 근본적인 개념은 창1:2절에 분명히 나타나고 있다. “하나님의 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이 구절은 하나님의 바람이 수면에 운행하시니라고도 번역될 수 있다.

영의 개념은 성경기자들에 의해 전개된 바와 같이 바람의 속성과 같은 것이다. 3:8절에서 예수께서 니고데모에게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니라라고 하셨는데, 이 말씀은 영적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그것은 바람과 영을 의미하기 때문에 생명의 본질로서의 영은 살아서 숨쉬는 존재들, 즉 인간의 육체에 거하고 있다.

27:3, 이사야42:5, 스가랴12:1에서 하나님이 그 영을 지키신다고 말하고 있다. 따라서 영은 하나님께 속한다. 그러나 구약 성경에는 하나님의 영이라는 표현이 94번 나오고 있으며 하나님의 영은 특히 신비 체험의 유형으로서 예언자들을 감화시키는 것으로 생각되었다(민수기11:17-29).

우리는 이제 영의 모든 다양한 측면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 우리에게는 영에 대한 분명한 견해를 줄 이런 모든 다양한 측면의 이상이 필요하다. 한마디로 영에 대한 이상을 보아야 한다. 일련의 메시지 등에는 그 영이라는 제목이 붙여진다. 그 영은 성경에서 하나님의 영에 대한 단순하고 신선한 칭호다.

2) [body, 바사르, 소마]
첫째, 선악 간에 몸으로 행한 것은 다 심판을 받는다는 것이다. 고린도후서 5:10절에 기독교인들도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서 선악 간에 모든 것이 드러난다고 했다. 예수 안 믿는 사람은 백보좌 심판이라고 하여 천년왕국 후에 영원한 지옥으로 들어가는 심판을 받는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고 죄사함을 받는 구원과는 상관없이 예수님의 심판대 앞에서 예수 믿는 사람이 받는 심판이 있다. 이것을 공로의 심판이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자신의 죄가 다 드러난다고 생각하여 두려워해서는 안된다.

 베드로와 유다의 다른 점을 보면 베드로는 주님을 부인했지만 주님의 수제자로 주님의 제자의 길을 갔고, 예수를 판 유다는 자살해 버렸다. 누구나 다 주님 앞에서는 고개를 들지 못하는 죄인이다. 오직 주님의 은총으로 구원받는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

둘째, 우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주님의 쓰시는 병기로 드려야 한다는 것이다. ‘주여, 내 몸
을 가지고 내 입을 가지고 내 언어를 가지고 주님을 증거하게 하시고 기도하게 하시고 찬송하게 하시고 내 몸을 통해서 일하시도록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산제물로 몸을 드리게 하옵소서라고 기도를 드려야 하겠다.

셋째, 땅에 있는 육체는 죽을 때 썩고 없어지지만 영은 하나님께로 돌아간다. 예수를 믿는 사람과 안 믿는 사람의 가는 곳이 죽는 순간에 달라진다. 우리는 죽음을 염려할 필요가 없다. 바울은 현재의 고난은 장차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가 없고(8:18) 오히려 자신은 이 육을 떠나서 주님과 같이 있기를 바란다고 했다.

우리의 생각이 늘 내세를 소망해야 한다. 이것은 피안(被岸)주의나 도피주의가 아니기 때문에 절대로 혼동해서는 안된다. 내세의 소망과 앞으로 바라보는 그 영광과 현재가 족히 비교될 수 없다는 것은 너무 엄청나게 큰 것이기 때문에 현실이 상대화가 된다는 뜻이다.

성경이 아브라함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도 아브라함은 가나안 복지를 바라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예비하신 영원한 성을 바라보았다고 했다. 믿음의 조상들은 항상 하나님을 향한 영원한 소망이 있었고 그들의 이 세상의 생활은 임시적인 생활이었다. 우리는 나그네이다.

넷째, 우리에게 부활의 육체를 입혀 주실 때 우리의 몸을 예수님과 같이 영광스러운 몸으로 입혀 주신다. 누구든지 다 아름다울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세상살이도 지루하고 권태로운데 영원히 죽지 않고 산다면 얼마나 권태로울 것이냐고 말한다. 그렇지가 않다. 권태는 죄인들이 느끼는 것이며 예수안에서의 생명은 영원한 청춘이다.

3) [soul, 네페쉬, 프쉬케]
구원받은 후에도 이 혼 속에 대결하는 두 개의 원리가 싸우게 되는데 옛 사람과 새 사람이 싸우게 된다. 우리 마음 속에는 예수를 믿은 후에도 옛 것이 많이 살아 남아 있어서 항상 싸우나 성령은 우리 속에 들어와 계신다. 우리의 영이 살아 있으므로 하나님의 음성도 듣고 하나님께 기도도 한다.

우리의 영과 함께 계시는 성령이 우리의 혼의 지성과 감성과 의지에게 명령할 때 그것이 잘 들으면 좋겠는데 그 속에는 옛날의 사단의 죄의 원리가 다 없어지지 않고 이 생명이 다하는 날까지 살아서 대결을 한다. 그래서 죄가 들어오면 갈등을 일으켜 육신의 생각이 영의 생각과 싸우게 된다그러기 때문에 죄를 항상 고백하여 사함을 받고 없애 버리므로 죄에서 승리하여 주님의 성령을 기쁘시게 해드려야 한다.

주님의 성령의 불을 끄지 말아야 하며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아야 한다하나님이 하라는 것을 하지 않을 때 성령을 슬프게 하는 것이다. 성령을 슬프게 하는 것은 계명을 범하는 것이다성령을 슬프게 하지 않고 근심시키지 않을 때 내 속사람이 강건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령을 따라서 살아가는 순종의 삶이 영성적인 생활이다.

우리의 영이 자유롭게 하나님과 통하고 있으려면 죄라고 하는 것이 항상 없어야 한다. 믿음이 항상 필요하고 조금이라도 믿음이 흔들리지 말아야 한다. 또 죄가 생각나면 고백하고 용서함을 받아야 한다. 이 죄는 우리에게 악영향을 준다. 죄는 육체를 통해서 들어오고, 생각으로 들어와서 반드시 영의 기능을 마비시켜 버린다.

우리 안에는 성령께서 계시는데 우리가 죄를 범하면 성령께서는 탄식하신다. 따라서 죄를 자백하여도 죄의 문제가 해결이 안되는 사람은 항상 옛자아의 상태에 머물러 있는 것이다. 성경을 보아도 그는 성경말씀을 행동으로 옮기지 못하며 그 말씀이 은혜가 되지도 못한다.

 고린도전서 2:9절은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하였다로 했다.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한다는 것은 하나님은 영이시기에 신령한 것은 신령한 것으로만 분별을 할 수 있다는 뜻이다.

하나님의 깊은 사정은 하나님의 영밖에는 모르는 것이다. 그러나 죄가 들어오면 영이 해침을 받아서 몽롱해지고 무능해지고 혹은 잠자고 어떤 때는 귀머거리가 되고 벙어리가 되고 보지 못하는 자가 되어 마비상태에 들어간다는 것이다. 그래서 항상 깨어 있으라는 말은 믿음에 깨어있고, 자나 깨나 앉으나 서나 주님과 동행하며 순종하는 생활을 하라고 권고하고 있다.

나오면서
그리스도인들이 사랑의 삶을 완성하여 그리스도인의 완전에 도달하려면 언제나 그리스도의 현존을 체험하며, 그리스도의 초자연적인 사랑에 이끌려 가야 한다. 비록 이 세상의 세속적이며, 일상적인 삶 속에서 살고 있다고 할지라도 바울이 말한 바와 같은 내가 주 안에, 주가 내 안에있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삶은 어디서나 현존하는 그리스도를 느끼지 않는 한 불가능하다. 우리 일상사에서는 물론이거니와 공동체 생활과 역사적인 사건들 속에서 나타나는 그리스도의 현존을 직시하고, 그리스도의 현존 속에서 살아가지 않는 한 언제나 이 세상의 유한성에 지고 마는 것이다. 죄의 본성에 지배받는 육신적인 사람들은 자기중심적이 되고, 조건적이 되고 만다.
            
우리가 용서받지 못할 죄임이미에도 불구하고, 죄를 용서해주시는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이웃을 사랑하지 못하고, 다른 사람을 지배하려는 사랑을 하거나, 그 대가를 바라는 사랑밖에 하지 못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의 삶 속 어느 곳에나 현존하고 계시는 그리스도의 모습을 읽어내고, 그리스도의 사랑에 깊이 잠겨야 한다.

우리를 즐겁게 하는 일에서는 물론 괴롭고 힘든 일들 속에서도 빛나는 그리스도의 현존을 볼 수 있는 예민한 감수성을 가지고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기독교영성의 마지막 단계인 일치의 단계이다. 사실 하나님은 그의 본질과 권능을 가지고서 어느 곳에나 현존하고 계신다.

우리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부재나 하나님의 침묵을 느낀다면 그것은 감수성이 예민하지 못해서 그런 것이지 하나님이 거기에 현존하지 않기 때문이 아니다. 기독교 신학을 보면 우리 일상생활에서 하나님의 현존을 느낄 수 있는 현존 양식이 무소부재 하심과 내주하심이다.

하나님은 만물 가운데 그의 본질과 현존과 권능으로 존재하시며 의로운 영혼에게 마치 친구나 아버지처럼 현존하시며 그 영혼으로 하여금 당신 자신의 신적 생명에 참여하게 하신다.

시편기자는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할지라도 곧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시편139:9-10)라고 고백했다.

이와 같은 예민한 감수성을 가지고 하나님의 현존 속에서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삶을 살 때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현하는 영성적 생활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실현시키려는 의도(intention)를 가지려면, 먼저 하나님의 현존에 주의 (attention)를 기울여야한다.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께시면 몸은 죄로 인하여 죽은 것이나 영은 의를 인하여 산 것이니라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로마서 8 9-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