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에 인간을 표현하는 용어로 영, 혼, 몸, 생명, 마음, 육, 육신이라고 하는 말들이 많이 나온다. 잘 정리해 두지 않으면 매우 혼란스럽고 혼동하기 쉽다. 또 우리
나라 언어 가운데 담겨져 있는 육이나 육체의 개념은 성경에 있는 몸이나 육신의 개념과 많은 차이가 있기 때문에 그것도 역시 혼란스럽기 쉽다. 그리고 헬라사람들이 생각하는 영혼 불면설이나 영에 대한 개념 또는 혼에 대한 개념, 이런 것들이 성경적으로 잘 정리 되어야 할 것이다.
데살로니가전서 5:23절에 보면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오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 온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고
바울은 말하고 있다. 바울은 사람에게 영과 혼과 몸, 세
가지가 있다는 것을 말했고 그 세 가지는 다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까지 흠 없게 성화되고 보전되기를 바란다고 가르쳤다.
창세기 1:27절과 2:7절을 보면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실 때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하시되 흙으로 사람을 만드시고 그 코에 생기를
불어 넣으니 사람이 생령이 되었다고 했다. 이것은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하심을
보이는 하나님만이 무에서 유를 만들 수가 있다는 것이다. 사람은 이미 있던 것을 다르게 변조할 수는
있어도 창조는 못한다.
하나님이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하셨다고 했는데 하나님의 형상이 무엇인지
우리는 모른다.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이다(요4:21). 하나님은 순수 영이시기 때문에 형상화시킬 수가 없다. 그러나 예수께서 육신으로 오셨을 때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다’. ‘나와 아버지는 하나라’고 말씀하셨다(요 14:9). 형상이 있다면 예수님으로 나타나신 하나님, 그것이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고린도전서 15장에 첫째 아담과 마지막 아담이 있다고 했는데 창세기의 아담은 첫째 아담이고 예수님은 마지막
아담이다. 첫째 아담으로
인하여 죄와 사망이 들어왔고 마지막 아담이신 예수님은 살려주는 영이라고 한다. 첫째 아담은 혼(Soul)이 본질적인 존재였고, 마지막 아담이신 예수님은 영(Spirit) 이 본질적인 존재인데, 성육신(成肉身,
Incarnation)하셨으며 인간의 몸과 혼의 존재양식을 취하여 사람이 되신 것이다.
1. 영,
혼, 몸의 구분
1) 영의 구분
성경에는 영(Spirit)이라는 말이 많이 나온다. 구약에는 374회 나오고 신약에는 383회 나온다. 이 영은
히브리어로 ‘루아흐’, 헬라어로는 ‘푸뉴마’라고 한다. 이
말은 ‘숨’, ‘바람’, ‘영’의 뜻을 포함하고 있다. 그런데 신약에서는 383회 중에서 226회가 성령에 관해서 말한 것이고, 157회가 인간의 영에 대해서 말한 것이다.
2) 혼의 구분
히브리어로 ‘네페쉬’라는 말이고 헬라어로는
‘프쉬케’라고 한다. 이
혼(Soul)이라는 말이 구약에는 692회 나온다. 그 중에 428회는 혼의 의미로 사용되었고, 7회는 인간의 몸과 동물의 몸에 대해서 사용되었고, 8회는 사람이나
동물의 시체에 대해서 사용되었으며, 신명기 6:5에서는
성품으로 번역되었고, 119회는 단순히 ‘목숨’이라든가 ‘생명’ 의 뜻으로
사용되었다. 신약에는 프쉬케를 103회 사용하는데, 103회 중에서 53회는 혼의 의미로 사용되었고 40회는 ‘목숨’혹은 ‘생명’의 의미로 사용되었다. 혼이라는 것은 단순히 목숨이나 생명의 의미로
사용된 것이 많고, 심지어 어떤 때는 동물의 시체에까지 사용된 것을 볼 수 있다.
3) 몸의 구분
성경에 147회 사용되었는데
몸[body, 바사르, 소마]은 다음과 같이 세 가지 의미로 사용되었다. 첫째는 인간의 생물학적인 육체를 말했고, 둘째는 인류 전체를 가리켜서
말했으며, 셋째는
육신이라는 말로 바꾸어 말했다. 그리고
이 경우에는 옛날의 죄의 본성에 대해서 가리킨 경우도 있다.
2. 생 명
이 생명이라는 말도 두 가지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첫째 의미는 생물학적인(의학적인) 생명이다. 둘째 의미는 구약에서는
혼이라는 뜻에서 생명이라는 말을 사용했고, 또 생령이라고 하는 의미로 사용하기도 했다. 생명은 하나님에게서 온 것이다. 하나님이 생기를 불어
넣어서 사람으로 생명이 되게 하셨다.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영이 생명을 부여한 것이다.
로마서 8:2절에 ‘생명의 성령의 법이 우리를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하였다’고 했다. 하나님께서 우리 속에 생기를 불어 넣어서 살아 있는 인간
존재(a living being)가 되게 하셨다. 그런데 구약에서나
신약에서나 마찬가지로 영도 생명이라는 말로 사용했고 인간의 혼도 생명이라는 말로 사용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영적인 생명과 혼적인 생명을 어떻게 구분할 수 있겠는가?
우리의 시각과 우리의 지각적인 경험으로는 이 영과 혼을 그리고 생명을 구분하기
어렵다.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가서 작용할 때 반응으로 나타날 뿐이지 우리는 이 혼과 영과 생명을 구분하기
어렵다. 성경에서 이 생명을 생물학적인 의미로 사용할 때는 헬라어로 ‘누스’라는 말을 썼으며 생물학(Biology)의 어원이 된다. 그리고 특히 성경에 ‘조에’라는
생명이라는 말에는 영원이라는 형용사를 붙였다.
영원한 생명, 그것은 예수님께서
죽으심으로 예수 믿는 사람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신다는 것이다. 이것이 ‘조에’ 라는 특별한 생명이다. 보통
사람이 가지고 있지 않은, 영원한 하나님에게만 속한 생명이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할 때 이 생명을 소유하게 되는 것이다. 베드로전서 1:23절에 “너희가
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하나님의 살아 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되었느니라”로 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인간 생명의 씨가 되어 그 씨가 사람의 영혼 속에 들어가서
영원한 생명을 낳는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자신의 생명을 내어 주셨다. 우리가 예수님을 영접하여 성령으로 거듭남으로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었다. 첫째
아담의 후손들이 예수님을 영접하고 성령이 그들을 다시 살게 해서 하나님의 자녀되게 할 때까지, 영원한
새 생명을 줄 때까지 자연 인간들의 영은 죽은 상태에 있는 것이다. 물론 지식의 활동도 하고 정서 활동도 하지만 그것은 무엇인가 잘못되어
고장난 전자제품처럼 제구실을 하지 못한다. 인간이 범죄를 저지르지 않았을 때에는 인간의 영과 혼과 육체의
질서가 바로 서 있었다.
영이 우리 인체 중에서는 제일 주인격이다.
그 영은 하나님에게서 명령을 받는다. 그래서 그 영의 지배를 받는 혼은 지금보다도 그 정서나
의지의 힘이 훨씬 강했을 것이도 우리의 육체도 광채가 나고 향기가 나는 그런 영광스러운 몸이었을 것이며 또 우리의 육체는 병들지 않고 깨끗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거꾸로 되었다. 육체가 우리의 혼을
지배하고 영은 완전히 죽어 버렸다. 모든 사람이 범죄를 했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롬3:10)고 했으며, 욥은
말하기를 “나는 썻은물건의 후패함 같으며 좀먹은 의복같으니이다”(욥13:28)라고 했고, 또
“만물중에 가장 거짓된 것이 사람의 마음”(렘17:9)이라고 했다.
소돔과 고모라의 사람들은 모두가 타락해서 멸망을 받았으며 노아의 홍수 때도
마찬가지이다. 예레미야가 하나님의 시각으로 인간을 보았을 때에 “너희는 예루살렘 거리로 빨리 왕래하며… 공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하는 자를 한 사람이라도 찾으면 내가 이 성을
사하리라”(렘5:1)는 말씀으로 한 사람의 의인도
없음을 개탄했다.
다윗이 그의 참회록에서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시51:5)라고 한 것은 자기 원죄를 경험으로 느끼고 있는 것이다. 육체가
반란을 일으키는 육신적 인간(a man of sinful nature)dl 되어 하나님의 속성인 영과
아무런 상관이 없이 되어버렸다고 개탄을 하고 있다.
하나님의 영이 떠나가면 그 사람은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중생(born again)dl 필요하며 중생은 곧 영을 살리는 것이다. 하나님의
영은 사람의 영에게 역사를 한다. 내가 지 · 정 · 의를 가지고 내 언어, 내 지식으로 예수님을
영접하여도 반드시 성령의 역사하심을 입어야 한다.
하나님의 영이 사람의 영에게 역사를 해야 한다. 구약의 제사제도라든가 성전제도는 앞으로 올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에 대한 그림자이다. 너희 몸은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다. 인간구조와 성전구조는
비교될 수가 있다. 손과 발, 즉 오관으로는 접촉하는 것이 바깥 뜰이고 가운데 성소는
인간이 혼이라고 말할 수가 있으며 또 지성소는 인간의 영이라고 말할 수가 있다.
지성소에는 법궤가 있다. 그
법궤 위에 속죄소가 있다. 은혜의 좌소라고
한다. 그 지성소에는 제사장이 일 년에 한 번씩 들어가서 피를 가지고 제사를 지내는 곳이다. 속죄소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피를 상징하며 그 안에 있는 십계명은 하나님의 말씀을 상징한다. 지성소는 아주 은밀하고 조용한 곳이다.
이와 같이 나의 영의 지성소에서 하나님의 영이 와서 나를 만나고 나를 가르치시고
나를 변화시키면 이 혼적인 모든 기능을 새로워 진다. 영혼은 혼보다 더 근본적인 요소이기 때문에 그
영이 살아나면 혼이 생기를 받고 그 결과로 우리 몸이 죽지 않을 몸이 되어 점진적인 성화의 과정을 밟게 된다.
3. 영, 혼, 몸의 개념
1) 영 [spirit, 루하흐, 프누마]
영이라는 근본 의미는 ‘이같은
움직임’ ‘미풍’ 혹은 ‘바람’, ‘호흡’이다. 더 넓게는
‘생며의 본질’이라는 뜻으로 쓰여졌다. 그 근본적인 개념은 창1:2절에 분명히 나타나고 있다.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 이 구절은 “하나님의
바람이 수면에 운행하시니”라고도 번역될 수 있다.
영의 개념은 성경기자들에 의해 전개된 바와 같이 바람의 속성과 같은 것이다. 요3:8절에서 예수께서 니고데모에게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니라”라고 하셨는데, 이 말씀은 영적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그것은 바람과 영을 의미하기 때문에 생명의 본질로서의 영은 살아서 숨쉬는 존재들, 즉 인간의 육체에 거하고 있다.
욥27:3, 이사야42:5, 스가랴12:1에서 하나님이 그 영을 지키신다고 말하고 있다. 따라서 영은 하나님께 속한다. 그러나 구약 성경에는 하나님의 영이라는
표현이 94번 나오고 있으며 하나님의 영은 특히 신비 체험의 유형으로서 예언자들을 감화시키는 것으로
생각되었다(민수기11:17-29).
우리는 이제 영의 모든 다양한 측면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 우리에게는 영에 대한 분명한 견해를 줄 이런 모든 다양한 측면의 이상이 필요하다. 한마디로 영에 대한 이상을 보아야 한다. 일련의 메시지 등에는 “그 영”이라는
제목이 붙여진다. 그 영은 성경에서 하나님의 영에 대한 단순하고 신선한 칭호다.
2) 몸 [body, 바사르, 소마]
첫째, 선악 간에 몸으로 행한
것은 다 심판을 받는다는 것이다. 고린도후서 5:10절에
기독교인들도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서 선악 간에 모든 것이 드러난다고 했다. 예수 안 믿는 사람은 백보좌
심판이라고 하여 천년왕국 후에 영원한 지옥으로 들어가는 심판을 받는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고 죄사함을 받는 구원과는 상관없이 예수님의 심판대 앞에서
예수 믿는 사람이 받는 심판이 있다. 이것을 공로의 심판이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자신의 죄가 다 드러난다고 생각하여 두려워해서는 안된다.
베드로와 유다의 다른 점을 보면 베드로는 주님을 부인했지만 주님의
수제자로 주님의 제자의 길을 갔고, 예수를 판 유다는 자살해 버렸다. 누구나 다 주님 앞에서는 고개를 들지 못하는 죄인이다. 오직 주님의
은총으로 구원받는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
둘째, 우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주님의 쓰시는 병기로 드려야 한다는 것이다. ‘주여, 내 몸
을 가지고 내 입을 가지고 내 언어를 가지고 주님을
증거하게 하시고 기도하게 하시고 찬송하게 하시고 내 몸을 통해서 일하시도록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산제물로 몸을 드리게 하옵소서’라고 기도를 드려야 하겠다.
셋째, 땅에 있는 육체는 죽을
때 썩고 없어지지만 영은 하나님께로 돌아간다. 예수를 믿는 사람과 안 믿는 사람의 가는 곳이 죽는 순간에
달라진다. 우리는 죽음을 염려할 필요가 없다. 바울은 현재의
고난은 장차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가 없고(롬8:18) 오히려
자신은 이 육을 떠나서 주님과 같이 있기를 바란다고 했다.
우리의 생각이 늘 내세를 소망해야 한다.
이것은 피안(被岸)주의나 도피주의가 아니기 때문에
절대로 혼동해서는 안된다. 내세의 소망과 앞으로 바라보는 그 영광과 현재가 족히 비교될 수 없다는 것은
너무 엄청나게 큰 것이기 때문에 현실이 상대화가 된다는 뜻이다.
성경이 아브라함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도 아브라함은 가나안 복지를 바라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예비하신 영원한 성을 바라보았다고 했다. 믿음의 조상들은 항상 하나님을 향한 영원한
소망이 있었고 그들의 이 세상의 생활은 임시적인 생활이었다. 우리는 나그네이다.
넷째, 우리에게 부활의 육체를
입혀 주실 때 우리의 몸을 예수님과 같이 영광스러운 몸으로 입혀 주신다. 누구든지 다 아름다울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세상살이도 지루하고 권태로운데 영원히 죽지 않고 산다면 얼마나 권태로울 것이냐고 말한다. 그렇지가 않다. 권태는 죄인들이 느끼는 것이며 예수안에서의 생명은
영원한 청춘이다.
3) 혼 [soul, 네페쉬, 프쉬케]
구원받은 후에도 이 혼 속에 대결하는 두 개의 원리가
싸우게 되는데 옛 사람과 새 사람이 싸우게 된다. 우리 마음 속에는 예수를
믿은 후에도 옛 것이 많이 살아 남아 있어서 항상 싸우나 성령은 우리 속에 들어와 계신다. 우리의 영이
살아 있으므로 하나님의 음성도 듣고 하나님께 기도도 한다.
우리의 영과 함께 계시는 성령이 우리의 혼의 지성과 감성과 의지에게 명령할
때 그것이 잘 들으면 좋겠는데 그 속에는 옛날의 사단의 죄의 원리가 다 없어지지 않고 이 생명이 다하는 날까지 살아서 대결을 한다. 그래서 죄가 들어오면 갈등을 일으켜 육신의 생각이 영의 생각과 싸우게 된다. 그러기 때문에 죄를 항상 고백하여 사함을 받고 없애 버리므로 죄에서 승리하여
주님의 성령을 기쁘시게 해드려야 한다.
주님의 성령의 불을 끄지 말아야 하며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이 하라는 것을 하지 않을 때 성령을
슬프게 하는 것이다. 성령을 슬프게 하는 것은 계명을 범하는 것이다. 성령을 슬프게 하지 않고 근심시키지 않을 때 내 속사람이 강건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령을 따라서 살아가는 순종의 삶이 영성적인 생활이다.
우리의 영이 자유롭게 하나님과 통하고 있으려면 죄라고 하는 것이 항상 없어야
한다. 믿음이 항상 필요하고 조금이라도 믿음이 흔들리지 말아야 한다.
또 죄가 생각나면 고백하고 용서함을 받아야 한다. 이 죄는 우리에게 악영향을 준다. 죄는 육체를 통해서 들어오고, 생각으로 들어와서 반드시 영의 기능을
마비시켜 버린다.
우리 안에는 성령께서 계시는데 우리가 죄를 범하면 성령께서는 탄식하신다. 따라서 죄를 자백하여도 죄의 문제가 해결이 안되는 사람은 항상 옛자아의 상태에 머물러 있는 것이다. 성경을 보아도 그는 성경말씀을 행동으로 옮기지 못하며 그 말씀이 은혜가 되지도 못한다.
고린도전서 2:9절은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하였다’로 했다.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한다는 것은 하나님은 영이시기에 신령한
것은 신령한 것으로만 분별을 할 수 있다는 뜻이다.
하나님의 깊은 사정은 하나님의 영밖에는 모르는 것이다. 그러나 죄가 들어오면 영이 해침을 받아서 몽롱해지고 무능해지고 혹은 잠자고 어떤 때는 귀머거리가 되고 벙어리가
되고 보지 못하는 자가 되어 마비상태에 들어간다는 것이다. 그래서 항상 깨어 있으라는 말은 믿음에 깨어있고, 자나 깨나 앉으나 서나 주님과 동행하며 순종하는 생활을 하라고 권고하고 있다.
나오면서
그리스도인들이 사랑의 삶을 완성하여 그리스도인의 완전에 도달하려면 언제나
그리스도의 현존을 체험하며, 그리스도의 초자연적인 사랑에 이끌려 가야 한다. 비록 이 세상의 세속적이며, 일상적인 삶 속에서 살고 있다고 할지라도
바울이 말한 바와 같은 “내가 주 안에, 주가 내 안에” 있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삶은 어디서나 현존하는 그리스도를 느끼지 않는 한 불가능하다. 우리
일상사에서는 물론이거니와 공동체 생활과 역사적인 사건들 속에서 나타나는 그리스도의 현존을 직시하고, 그리스도의
현존 속에서 살아가지 않는 한 언제나 이 세상의 유한성에 지고 마는 것이다. 죄의 본성에 지배받는 육신적인
사람들은 자기중심적이 되고, 조건적이 되고 만다.
우리가 용서받지 못할 죄임이미에도 불구하고, 죄를 용서해주시는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이웃을 사랑하지 못하고, 다른
사람을 지배하려는 사랑을 하거나, 그 대가를 바라는 사랑밖에 하지 못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의 삶 속 어느 곳에나 현존하고 계시는 그리스도의 모습을 읽어내고,
그리스도의 사랑에 깊이 잠겨야 한다.
우리를 즐겁게 하는 일에서는 물론 괴롭고 힘든 일들 속에서도 빛나는 그리스도의
현존을 볼 수 있는 예민한 감수성을 가지고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기독교영성의
마지막 단계인 일치의 단계이다. 사실 하나님은 그의 본질과 권능을 가지고서 어느 곳에나 현존하고 계신다.
우리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부재나 하나님의 침묵을 느낀다면 그것은 감수성이
예민하지 못해서 그런 것이지 하나님이 거기에 현존하지 않기 때문이 아니다. 기독교 신학을 보면 우리 일상생활에서 하나님의 현존을 느낄 수 있는 현존 양식이 무소부재 하심과 내주하심이다.
하나님은 만물 가운데 그의 본질과 현존과 권능으로 존재하시며 의로운 영혼에게
마치 친구나 아버지처럼 현존하시며 그 영혼으로 하여금 당신 자신의 신적 생명에 참여하게 하신다.
시편기자는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할지라도 곧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시편139:9-10)라고 고백했다.
이와 같은 예민한 감수성을 가지고 하나님의 현존 속에서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삶을 살 때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현하는 영성적 생활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실현시키려는 의도(intention)를 가지려면, 먼저 하나님의
현존에 주의 (attention)를 기울여야한다.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께시면 몸은 죄로 인하여 죽은 것이나 영은 의를 인하여 산 것이니라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로마서 8장 9-11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