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3/2011

안돼요 아버지

가을 한 철에만 농어낚시가 허용되는 호수에 아버지와 열 살배기 아들이 낚시를 하고 있었습니다그 날은 농어잡이가 허용되기 바로 전날이었습니다밤이 으슥할 무렵 드디어 아들의 낚싯대 끝이 둥그렇게 구부러지며 큼직한 놈이 한 마리 걸려들었습니다농어였습니다아버지는 시계를 보았습니다.  10 30농어잡이는 내일부터 허용되었고 지금은 농어 이외의 고기만 잡을 수 있는 시간이었습니다주위엔 아무도 없었고 호수엔 낚시꾼도 배도 없었습니다.

얘야그 농어는 풀어주고 우리 다른 것을 잡도록 하자꾸나” “안돼요 아버지이렇게 큰 물고기를 잡은 건 처음이에요” 하지만 아버지의 단호한 결정에 아들은 농어를 놓아주었습니다그 후 세월이 흐른 뒤 사업가가 된 아들은 정직하고 모범적인 경영자로 뽑힌 자리에서 열 살 때의 그 사건을 통해 아버지로부터 ‘진정한 정직을 배웠노라고 말했습니다.

사람의 마음속에는 정의가 있어야 합니다정의는 바른 길입니다그러므로 정의에 입각해서 살면 평안하게 살 수 있는 것입니다양심의 바른 길을 따라 정의를 가지고 사는 것이 사람답게 사는 길입니다불의는 굽은 길이요불의를 가지고 산다는 것은 스스로 사람다워지기를 거부하고 파멸을 자초하는 것입니다.

홀로 마시셨습니다

예수님은 ‘혼자서’ 그 잔을 다 마시셨습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구원자로 지명하여 보내신 분은 예수님 한 분 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 외에는 이 세상의 죄를 씻어내기 위해서 피 흘릴 수 있는 어떤 자격자도 없습니다.

오직 그분만이 우리를 대신하여 저주의 잔이요, 심판의 잔인 십자가의 잔을 마실 수 있습니다. 그 잔은 아무도 나누어 마실 수 없는 잔입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그 잔을 자기도 나누어 마실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눅 22:33).

그래서 베드로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이 붙잡히는 순간에 용감하게 칼을 빼서 휘둘렀고, 예수님이 잡혀서 대제사장 집으로 끌려가실 때도 그 뒤를 몰래 따라갔습니다. 그러나 그런 행동이 멋은 있었는지 모르지만 오히려 주님과 베드로 자신에게 손해만 되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때때로 주님을 위해서 뭔가를 해드려야 한다고 생각하며 섣불리 나설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오히려 주님께 손해를 끼쳐드리고 일을 오히려 어렵게 만들 수도 있습니다. 어떤 때는 기도만 하면서 가만히 있는 것이 오히려 주님을 위하고 나에게 유익이 되는 길일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기꺼이 마시셨습니다.

예수님은 종교지도자들이 보낸 군병들과 하속들에게 체포당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힘이 없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체포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기꺼이 체포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가룟 유다도 알고 있었던 겟세마네 동산을 피하지 않고 가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군병들이 체포하러 왔을 때 조금도 주저하지 않으시고 ‘내로라’하면서 자신을 드러내셨습니다.

이 신적인 위엄에 놀라 군병들은 뒤로 물러나다가 넘어지기까지 하였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이 마음만 먹으셨다면 이들을 얼마든지 물리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그 어떤 힘도 사용하지 않고 강도처럼 체포당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정하신 죽음이기 때문에 주님은 우리를 살리고자 기꺼이 그 잔을 마신 것입니다. 우리가 당하는 고난 가운데는 우리가 피할 수 있는 고난들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는 너무나 지혜로워 그것들을 피하는 방법을 잘 압니다. 그러나 목욕물을 버리다가 아기까지 버리듯이, 고난을 피하려다가 그 안에 숨겨진 하나님의 선한 뜻까지도 잃어버리게 됩니다.

우리는 그러한 우를 범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고난의 잔을 피하지 않고 기꺼이 받으셨던 예수님을 본받고자 항상 노력해야겠습니다.

거짓되고 헛된 것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눅15:7)

도시에서 성장한 사람들은 내가 하는 이야기를 잘 이해할 수 없을 것입니다. 내가 태어나서 14년 동안 살았던 곳은 집이라고는 불과 다섯 채뿐인 고적하고 쓸쓸한 산촌이었습니다. 대낮에도 여우가 나오고 밤이면 밤마다 지붕 위에서 부엉이가 울었습니다. 우리 마을은 북쪽을 제외하면 삼면이 공동묘지로 둘러싸여 있었으므로 나는 늘 장례 때에 슬픈 울음을 들으면서 자랐습니다. 또한 깊은 산곡에 위치하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자연에 대한 경외심을 갖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산에는 산신이 있고, 물에는 용왕이 있었으며, 나무에는 목신이 있고, 부엌에는 부엌신이 있으며 심지어 화장실에도 화장실신이 있다는 노인들의 소박한 가르침을 그대로 믿었던 나는 어느 곳에 가든지 신을 두려워했습니다. 그리고 울창한 수림에 싸인 산길을 걸어 학교에 갈 때면 언제나 오늘이 짐승에게 물려가는 나의 마지막 날이 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에 몸을 떨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우리 집으로 돌아올 때면 산비탈에 오르기 전에 모든 신들에게 나를 보호해 달라고 수없이 절을 하였습니다. 그렇게 신들에게 절을 해야 그들의 도움으로 무사히 도착할 수 있는 줄로만 알았습니다.

깊은 산 속, 주위에 공동묘지가 있는 외딴 곳에 살고 있던 나는 늘 불안과 공포심으로 가득차 있었습니다. 그러나 훗날 내가 학교에서 과학을 배우자 내게 공포의 대상이 되었던 그 모든 것들이 거짓되고 헛된 것을 깨닫게 되어 쓰디쓴 웃음을 웃었습니다.

그런데 그 이후에 또 다른 거짓되고 헛된 것이 나를 엄습해 왔습니다 그것은 다름아닌 가난과 질병과 열등의식과 좌절감과 절망 같은 것들이었습니다. 이러한 것들이 또 다른 형태의 신앙으로 나에게 다가왔습니다. 그리하여 '어떻게 하면 가난에서, 저주에서, 질병에서, 절망에서 놓여날 수 있을까?'라는 문제가 나에게 가장 큰 문제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고 난 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하여 영혼이 잘됨 같이 범사에 잘 되며 강건하기를 원하시고 생명을 주시되 넘치게 주시는 좋으신 하나님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가난과 궁핍과 저주와 질병과 절망과 열등의식과 좌절감, 이러한 것들은 모두가 다 거짓되고 헛된 것들이라는 것을 알게 되어 이를 다 쫓아낼 수 있었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진실하고 참된 평화와 자유와 행복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무릇 거짓되고 헛된 것을 숭상하는 자는 자기에게 베푸신 은혜를 버렸사오나" (요나 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