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5/2010

하나님의 사랑 8 -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 함, 죄를 정결케 하는 일을 완성하신 하나님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건대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고린도후서 5;14).

“한 사람”은 물론 예수님을 말합니다. 예수님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다면, 그 모든 사람에 저와 여러분이 포함됩니까, 안됩니까? 하나님께서 포함시키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죄를 위한 화목제물이니 우리(그리스도인) 위할 아니요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요한일서 1:2).

사람인 예수님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셨습니다. 보통 사람이 아닌 하나님의 거룩하신 분이 나 같은 죄인을 대신해 형벌을 받으셨습니다. 그것이 우리를 향한 그리스도의 사랑입니다. 나 같은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신 분이 있는데, 우리가 그 분을 몰라서야 되겠습니까. 예수님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으로써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면, 우리는 하나님 앞에 죽은 것입니까 죽지 않은 것입니까? 우리 각자는 하나님 앞에 죽어야 할 죄인인데, 예수님이 죽으실 때 죽어야 될 그 죄인은 이미 죽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의인이 죄 값을 대신 갚아도 된다는 법을 만드셨고, 또한 대속(代贖)을 위해 예수님을 죽음에 내어 주셨습니다.

십자가를 지고 사형장으로 끌려가시면서, 예수님께서는 ‘왜 죄 없는 나를 죽이려고 하느냐? 나는 억울하다’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목숨)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10:18)고 말씀하신 대로 예수님은 억울하게 죽으신 것이 아니라 합법적인 죄 사함을 위해 스스로 우리 죄 짐을 지시고 자원해서 죽음을 맞이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죽으심으로써 죄인 된 우리는 하나님 앞에 심판받고 죽은 것입니다.

혹자는 ‘어떻게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해서 죽을 수 있느냐?’고 말합니다. 이것을 생각해 봅시다. 우리가 죄인된 것이 몇 사람이 죄를 지었기 때문일까요? 그것은 인류의 시조인 아담 한 사람 때문입니다. 아담 한 사람이 죄를 지음으로  아담이 먼저 죄인이 되었고, 그로 인해 아담의 자손은 하나님 앞에 모두 죄인이 된 것입니다.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왔다고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범죄로 많은 사람이(all men - KJV.NIV) 정죄(定罪) 이른 ”(로마서 5:18)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인간은 나면서부터 아담 안에서 죄인이 됐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을 인류의 대표로 정하셨습니다. 결과 아담 사람이 죄인 됨으로 인류 전체가 죄인이 되었고, 아담 사람이 쫓겨남으로 인류가 하나님 앞에서 쫓겨났습니다. 한 사람의 운명이 전체의 운명을 결정지은 것입니다. 리가 세상에 태어나고 싶어 것이 아니라 어쩌다가 태어났던 것처럼, 죄인 것도 죄인이 되고 싶어 것이 아니라 아담의 후손이기 때문에 죄인으로 났고 죄인이기 때문에 어쩔 없이 죄를 지은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 모두가 아무런 대책도 없이 심판받고 지옥에 보내진다면, 우리로서는 억울한 일입니다. 만일 이대로 우리가 지옥에 간다면, 우리는 지옥 가서 머리에 수건을 두르고 “하나님! 억울합니다. 우리는 억울합니다” 하든지 아니면 “하나님, 물러가시오!” 라고 하면서 데모할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억울하지 않게 해 놓으셨습니다.

아담과 같은 대표 한 사람을 보내신 것입니다. 그분이 바로 예수님입니다. 고린도전서 15장에 보면 아담을 “첫 사람 아담“이라고 했는데, 아담은 사람이란 뜻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마지막 아담“이라고 했습니다.  아담이 인류를 대표하는 것처럼, 마지막 아담 예수님도 인류를 대표합니다

아담은 죄를 지은 대표이고, 예수님은 죄 값을 치룬 대표입니다. 그래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처음에 우리가 죄인 될 때 아담 안에 전 인류를 포함시켰던 것처럼, 역시 또 한 아담인 예수님에게 인류의 죄를 지워 하나님의 심판을 내렸습니다.

알지도 못한 때에 우리는 아담 안에서 죄인 되었고, 또한 우리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우리의 죄는 예수님 안에서 모두 해결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왜 그렇게 하셨든 우리가 그것을 따질 필요는 없습니다. 아무튼 우리는 아담 안에서 죄인으로 태어나 죄를 짓고 살았는데, 예수님 안에서 그 죄 값은 치러졌습니다. 아담의 운명은 거기서 끝났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마지막 아담이라고 한 것입니다. 아담의 모든 죄, 그로 말미암아 받을 심판은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끝이 났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 대신 심판을 받았는데, 그러면 우리는 심판을 받아야 됩니까, 받지 않아도 됩니까? 받지 않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우리 죄를 대신해 심판받고 죽으셨는데, 우리도 우리 죄의 심판을 받고 지옥가야 된다면 예수님이 죽으심은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예수님은 헛되이 죽으셨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피 흘려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는 우리는 심판받을 필요 없이, 지옥 갈 필요 없이 만들어 놓았습니다. 이 사실을 성경은 우리에게 말씀합니다. 이것이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하신 방법입니다.

죄를 정결케 하는 일을 완성하신 하나님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본체의 형상이시라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 정결(淨潔) 하는 일을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위엄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브리서 1:3).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실 때 마지막으로 하신 이루었다는 말씀은 영어로 “It is finished”입니다. 이는 ‘완성했다’, ‘성취했다’, ‘다 갚았다’는 뜻입니다. 죄 값을 치루는 일, 그럼으로써 죄인을 구원하는 일을 예수님께서 다 하셨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죄를 정결케 하는 일을 하시고” 부활 승천하시어 높은 곳에 계신 위엄(the Majesty)의 우편에 앉으셨습니다. 예수님이 피 흘려 죽으신 것은 우리의 죄 값을 대속함이요, 부활하여 승천하신 것은 우리의 죄가 다 사해졌다는 사실을 우리로 믿게 하기 위한 증거입니다. 이쪽에서 세금 내면 저쪽에서 세금 냈다는 증거로써 영수증을 주듯이 부활은 우리 죄가 확실히 사해졌다는 보증입니다.

제자들이 모여 있는 가운데 부활하신 예수님이 그들 가운데 나타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손과 발을 보이시면서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누가 24:36)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평강(平康), 즉 하나님 앞에 너희의 죄가 다 사함을 입었으니 이제 마음을 푹 놓으라는 것입니다. 많은 빚을 지고 갚을 길이 없는 사람을 대신해서 어떤 사람이 빚을 갚아 주었습니다. 그리고 빚진 자에게 영수증을 가져와 보여 주며 “이걸 보시오. 당신 빚은 내가 다 갚았습니다. 돈 다 받았다는 도장도 찍혀 있지요”라고 말하고 그것이 사실임이 분명할 때 안심이 되고 마음이 놓일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악인에게는 평강이 없느니라”(이사야 57:21)하셨으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구속의 역사를 완성하셨으므로 죄의 형벌에서 해방된 평강을 주셨습니다.

구약은 우리의 죄를 사해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이고, 신약은 사함의 일을 마무리했다는 증거입니다. 그 약속에다 예수님께서 피로써 도장을 찍으셨고, 그 사실을 받아들이는 사람의 마음에 성령으로 인()을 치시는 것입니다. 우리 죄가 사함을 입지 못했다면, 예수님은 부활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 사함에 대한 증거입니다. 하나님께서 속죄 제사를 받으셨다는 증거입니다.

승천하신 예수님은 우리를 위한 증인으로 하나님 앞에 살아 계십니다. 지금도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 이 피를 보십시오. 저 아무개를 위해 내가 죽어 피를 흘렸습니다”라고 우리의 죄 사함을 증거하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의 피를 보시고 “됐다!”고 하십니다. 성경은 무엇입니까? 그 사실을 기록하여 우리에게 떼어 주신 영수증입니다.

“예수 예수 믿는 것은 받은 증거 많도다”라는 찬송가 가사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받은 증거란 무엇을 말합니까? 성경이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요한복음 5:39). 예수님이 하신 일을 증거하는 성경이 곧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떼어 주신 영수증입니다. 예수를 믿게 되면 그 사실을 증거로 받는 것입니다.

“내 주의 보혈(寶血)은 정하고 정하다 내 죄()를 정()케 하신 주 날 오라 하신다”(찬송가 186). 내 죄를 정케 “하실” 주입니까, “하신” 주입니까? 죄를 정케 “하신” 주님께서 날 오라고 하십니다. 오면 죄를 사해 준다는 말씀입니까, 죄 다 사해 놓았으니까 오라는 말씀입니까? 죄 다 사해 놨으니 그 사실 좀 믿어달라는 것입니다.

죄는 근본적으로 믿는다고 사()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이 무슨 공로입니까? 우리가 믿기 전에 하나님께서는 이미 우리의 죄 값을 예수님에게서 다 받았으므로, 하나님 앞에 우리의 죄는 모두 다 사함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것 좀 믿어 달라는 것입니다. “날 정케 하신 피 보니 그 사랑 많도다”(찬송가 ). “예수는 우리를 깨끗케 하시는 주시니 그의 피 우리를 눈보다 더 희게 하셨네”(찬송가 ). 주님이 그 피로써 우리 죄를 깨끗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깨끗케 하신 것을 네가 ()되다 하지 말라”(행전 10:15)는 말씀처럼, 예수님이 피 흘려 죽으심으로 우리 죄를 깨끗하게 하셨는데 우리가 ‘깨끗하게 되지 않았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사람이 그것을 믿든 믿지 않던 하나님께서 이루어 놓으신 사실입니다.

<출처:생명의말씀선교회>

하나님의 사랑 7 - 세상 죄를 지신 하나님의 어린 양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가로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요한복음 1:29).

세례 요한이 자기에게 나아오시는 예수님을 향해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라고 말씀하신 바와 같이, 구약성경에 기록된 약속을 이루시려고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셨습니다. “세상 죄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을 보라!(찬송가).

“보라!” 믿는 것은 보는 것입니다. 성경을 통해 우리는 예수님을 봅니다. 성경을 통해 보면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준비한 한 마리 속죄양입니다. 그 속죄양 위에 하나님께서는 세상 죄를 짊어 지웠습니다.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그리고 하나님의 어린 양은 세상 죄를 지고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죄인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예수님은 한 마리 양으로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세상 죄를 지고 가실 때 저와 여러분의 죄도 거기에 포함됐겠습니까, 안됐겠습니까? 물론 포함되었습니다. 그 사실을 본인이 알든 모르든 상관없이,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내 죄를 지고 갔다”고 해도 지고 간 것이고, “내 죄는 지고 가지 않았다”고 해도 지고 간 것입니다. 그것을 믿든 안 믿든 똑같습니다. 한 사람도 빠짐없이 세상 모든 사람의 죄를 예수님은 다 지고 가셨습니다. “슬픔과 수고로 주께 오니 내 죄를 지시고 내 죄를 지셨네. 그 사랑 내 맘에 기쁨 되니 내 죄를 지셨네. 네 죄를 지시고 내 죄를 지셨네”(찬송가).

주님 앞에 나아올 때는 슬픔과 답답한 마음으로 왔는데, 주님 앞에 와서 말씀을 보니 주님이 이미 내 죄도 지고 가신 것입니다. 저의 죄, 여러분의 죄, 우리의 모든 죄를 예수님이 지고 가셨습니다. 그 거룩한 죄 없는 분의 몸에 우리의 죄를 지웠으니 예수님이야 말로 죄 덩어리인데, 예수님은 그 죄를 지고 어디로 가셨습니까? 죽음의 형벌을 받으러 십자가를 메고 사형장 골고다로 가신 것입니다. 죄는 죽음의 심판을 받지 않고는 해결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것과 같이, 사형집행 전날 밤 예수님은 갖가지 고통과 모욕을 당하셨습니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십자가 형틀을 직접 짊어지고 사형장으로 끌려 가셨습니다. 전날 당한 고통스런 몸에 형틀을 지고 병사들의 채찍을 맞으며 넘어지고 또 넘어지며 골고다 언덕으로 올라 가셨습니다. 머리에 가시로 엮어 씌운 면류관 때문에 예수님 얼굴에는 피가 범벅이 되었습니다.

필자가 이스라엘을 여행할 때 있었던 일입니다. 관광차 운전기사가 도중에 갑자기 차를 세우더니 길가에 있는 가시나무를 가리켰습니다. 그 가시는 억센 탱자나무 가시와 비슷하면서도 그 보다는 훨씬 날카롭게 생겼습니다. 일행 가운데 몇 사람이 차에서 내려 가시를 하나씩 꺾었습니다. 필자도 그 가시를 하나 꺾다가 잘못하여 가시에 찔렸는데, 금방 손에서 피가 났습니다. 소름끼치도록 무섭고 날카롭게 생긴 그런 가시로 면류관을 엮어 예수님 머리에 씌웠습니다. 가시가 예수님의 이마에 깊이 박혔습니다. 왜 가시면류관이 예수님의 머리에 씌어졌습니까?

창세기에 보면, 아담의 범죄로 땅이 저주를 받아 가시와 엉겅퀴를 내게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창세기 3:17,18). 그러므로 예수님이 가시 면류관을 썼다는 것은 인간의 죄의 저주를 머리에 쓰신 것입니다. 사람의 생각과 사상이 항상 악하다는 말씀과 같이(이사야 59:7), 인간이 머리로 지은 죄 때문에 예수님의 이마에 가시가 박혔습니다.

골고다에 도착한 예수님은 자기가 지셨던 십자가에 손과 발이 못 박혀 달리셨습니다. 하늘과 땅 사이에,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높이 달리셨습니다.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예수님)에게 담당”시키셨고, 예수님은 그 형벌을 스스로 지셨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예수님 자신의 영광을 위해, 그리고 우리 인간에게 주시려는 천국의 영광을 위해 예수님은 죽음의 잔을 받으신 것입니다.

우리의 손으로 지은 죄 때문에 예수님의 거룩한 손에 대못이 박혔습니다. 우리의 발로 지은 죄 때문에 예수님의 발에 큰 못이 박혔습니다. 우리의 마음으로 지은 죄 때문에 예수님의 가슴이 창에 찔렸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몸으로 지은 죄 때문에 예수님의 몸이 채찍에 상하시고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우리의 죄()가 예수님을 죽이신 것입니다.

오전 9시에 못 박혀 오후 3시에 운명(殞命)하셨습니다. 여섯 시간 동안 극한 고통과 수치와 멸시를 당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 전날 너무 고통을 많이 받으셨던 까닭에 조금 일찍 돌아가신 듯합니다. 예수님은 이루었다”(요한복음 19:30)라는 말씀을 끝으로 남기고 머리를 숙이시고 돌아가셨습니다.

로마 군인이 밑에서 창으로 예수님 옆구리를 찌르자, 심장에 구멍이 뚫려 몸에 남은 피와 물이 다 쏟아졌습니다.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고 땅이 진동하며 바위가”(마태 27:50) 터졌습니다. 이를 보던 로마군 백부장이 심히 두려워하며 이는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27:54)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는데, 그 때 나도 거기 있었다면 무엇이라고 말했겠습니까?

주님 양편에는 강도 두 사람이 못 박히고, 예수님은 그보다 중죄인으로 취급되어 그 가운데 있는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가시면류관이 깊이 박힌 얼굴은 온통 피투성이이고, 대못이 박힌 데다 무게로 인해 찢어진 양손과 양발에서는 피가 흐릅니다. 채찍에 상한 몸에서도 피가 나옵니다. 그리고 창에 찔려 구멍 난 가슴에서는 핏물이 줄줄 흘러내립니다. 십자가 밑은 온통 피로 물들고, 그 아래쪽까지 피가 흥건합니다.

그 때 거기서 그 광경을 봅니다. ‘아, 정말 비참하구나! 저 사람이 도대체 무슨 죄를 지었길래 저렇게 죽어야만 했을까? 무슨 죄를 지었길래…’. 여러분도 그렇게 생각하셨겠지요? 예수님께 죄가 있습니까? 성경은 “그에게는 죄가 없느니라”고 했습니다. “누가 나를 죄로 책()잡겠느냐”고 하신 그 분입니다. 그럼 무슨 까닭으로, 그토록 비참하게 죽으셔야 했을까요? 누구의 때문에 분이 값을 담당하신 것입니까? 죄인의 , 자신의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박혀 죽으신 비참한 모습은 바로 모습입니다. 죄인인 모습이 하나님 앞에 그렇게 비참한 것입니다. 우리 각자가 얼마나 비참한 죄인인지 알려고 감고 생각해 것도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비참하게 죽으신 그 광경을 그려보면 됩니다. 예수님의 그 모습은 바로 죄의 형벌을 받아야 할 내 모습입니다. 내 죄에 대한 저주가 하나님 앞에 그렇게 무서운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서 그렇게 저주와 형벌을 받아야 되는데, 하나님께서는 대신 예수님 몸에다 내리신 것입니다. 우리가 받아야 심판과 저주는 그렇게 예수님이 받으셨습니다.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있거니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로마서 5:8).

“내 지은 죄 다 지시고 못 박히셨으니 웬일인가 웬 은혠가 그 사랑 크셔라”(찬송가 141 2). 나 같은 죄인을 위해 예수님이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인간을 구원하고자 하시는 그 사랑이 이루어졌습니다.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공의도 이루어졌고, 하나님의 사랑도 이루어졌습니다. 완전하게 성취된 것입니다.

<출처:생명의말씀선교회>

하나님의 사랑 6 - 하나님의 공의와 사람

성경에는 하나님의 주요한 가지 속성(屬性) 나옵니다. 가운데 하나는 이사야서에서 말씀하신 공의(公義)입니다.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십니다(이사야30:18). 다른 하나는 사랑입니다. 요한일서 4 16절에하나님은 사랑이시라 말씀이 그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공의와 사랑이라는 가지 속성을 갖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공의는 율법(律法)으로 나타나 있습니다. 율법은 하나님의 공의를 표현한 것입니다. 사랑은 은혜로 나타나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공의, 율법 앞에서는 범법한 죄인으로서 하나님께 심판받아 멸망 받을 수밖에 없지만, 하나님의 사랑인 은혜로는 어떤 죄인이든지 용서받고 구원받을 있습니다. 공의와 사랑 가지는 완전합니다.

만일 하나님이 사랑은 없고 공의 뿐이라면, 한 사람도 구원받지 못합니다. 모두 심판 받고 영원한 형벌에 처해집니다. 이와 반대로 하나님이 공의는 없고 사랑만 있다면, 하나님께서는 아무런 조건 없이 우리를 구원하실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실 필요도 물론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은 완전하기 때문에, 하나를 위해 다른 하나를 무시할 없습니다. 공의와 사랑은 조화를 이루며 함께 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공의의 하나님’이라고 하여 죄인(인류) 심판하여 모두를 멸망시켜버린다면,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어디 있습니까? 하나님의 사랑은 파괴될 밖에 없습니다. 반대로 ‘사랑의 하나님’이라고 하여 죄를 묵인하고 무조건 죄인을 용서한다면, 구원은 이루어질지 모르지만 하나님의 공의는 완전히 무시되고 맙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의 속성 자체에 모순이 생깁니다. 그래선 됩니다. 공의와 사랑 가지가 이루어져야 합니다.

예를 들어서, 사람이 죄를 지어 재판정에 끌려 왔다고 합시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범죄자는 재판장의 아들입니다. 법정 내외의 많은 사람들이 재판이 어떻게 이루어질지를 지켜봅니다. 재판장이 범죄자인 아들에게 먼저 심문합니다. “피고의 이름은 무엇이가?. “예, 아무개입니다”하면서 앞을 바라보니, 재판장은 다름 아닌 자기 아버지입니다. 만일 죄수가 “아버지 접니다. 용서해 주십시오”라고 하자, 재판장이 “그래, 아들아. 걱정 마라. 내가 알아서 처리하겠다”고 한다면, 재판이 재판답게 되겠습니까?

재판장이 만일 “너는 아들이므로 범죄는 형을 면제한다”는 선고로써 아들을 면죄시킨다면, 이를 보는 많은 사람들이 재판장과 법을 따르겠습니까? “불공정하긴 하지만 피는 법보다 가까우니 그럴 있겠다”고 동정하겠습니까? “저 재판장을 몰아내자. 우리는 저런 자에게 법집행을 맡길 없다”며 당장 시위가 일어날 것입니다. 비록 힘이 없어 법을 따르는 경우는 있을지 몰라도, 공의는 이미 깨어진 것입니다.

재판장과 죄수의 사이는 공의(公義) 관계이고, 아버지와 아들의 사이는 사랑의 관계라고 하겠습니다. 재판정에서는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는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거기에는 재판장과 죄수로 것이지 아버지와 아들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직 죄수의 죄에 대한 형벌이 어떠하냐가 중요합니다. 죄수가 “아버지, 접니다”라고 할지라도, 재판장은 “피고는 건과 관계없는 소리는 하지 말고 묻는 말에만 대답하라. 이름이 무엇인가?”라고 심문해야 것입니다.

“예, 아무개입니다”. “피고는 원고(검사)측의 주장대로 이런 이런 죄를 지었는가?”라고 재판장은 물을 것이고, 피고가 “예, 그렇습니다”라고 인정하거나 또는 분명한 증거가 있다면 법이 정한 바에 따라 형의 선고를 받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어 재판장은 “형법 조에 의거, 피고 아무개에게 징역 *년형 또는 벌금 *억을 선택적으로 선고한다”는 식의 선고를 했다고 합시다. 그렇게 정당한 법적용에 따른 판결이 내려졌다면, 이를 지켜보는 많은 사람들이 재판에 박수를 보낼 것입니다. “역시 재판장은 공의로운 분이시다”며 그를 존경할 것입니다.

 재판장의 아들인 범죄자는 그렇게 감옥에 들어갔습니다. 죄인은 벌금을 있는 사정도 못되는 터라 * 징역을 밖에 없는 처지입니다. 어쨌든 재판의 공의는 이루어졌습니다. 선고가 내려진 재판장은 이번에는 아버지의 자격으로 죄수인 아들을 감옥으로 찾아갔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이 녀석아, 어떻게 그런 죄를 지었느냐?”고 묻습니다. 이에 아들이 “아버지, 잘못했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다시는 그런 죄를 짓지 않겠습니다”며 진심으로 뉘우쳤습니다.

아버지는 “그래, 됐다. 너는 그래도 아들이다. 돈은 내가 마련해 보겠다”며 집으로 돌아와 동원 가능한 모든 돈을 끌어 모으고, 그것으로 부족하자 살고 있는 집까지 처분하여 벌금 돈을 마련했습니다. 그렇게 마련한 돈으로 아버지는 아들을 대신해 벌금을 냈습니다. 그러자 아들은 석방됐습니다. 아버지의 노력과 희생이 아들을 구했습니다. 아버지의 사랑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재판장처럼 그렇게 해야 공의도 이루어지고 사랑도 이루어집니다. 공의는 공의대로 세우고, 사랑은 사랑대로 드러난 것입니다.

옛날에 실제로 있었다는 사건을 가지 예로 들겠습니다. 임금이 엄한 법을 제정하여 나라에 공포하면서, 법을 범하는 자는 누구든지 벌로써 눈을 빼겠다고 했답니다. 그런데 법을 가장 처음 범한 사람은, 어이없게도 하나 밖에 없는 왕자였습니다. 왕자가 포박되어 왕에게 끌려 왔습니다. 재판 석에 자리한 왕은 “범법자의 눈을 법에 따라 것을 선고한다. 범죄한 왕자의 눈을 빼라”고 명령했습니다. 그러자 신하들이 앞에 엎드려 간청했습니다. “폐하, 왕자님은 후에 왕위에 오르실 폐하에게 하나 밖에 없는 아들이십니다. 눈을 빼다니요. 용서해 주시옵소서”. 왕은 “용서할 없다. 범죄자가 비록 왕자라 할지라도 법을 변개시킬 수는 없다. 어서 눈을 빼라”고 명령했습니다.

왕의 엄명에 집행을 맡은 관리들이 왕자를 묶고서 눈을 뺐습니다. 나머지 눈을 빼려고 하는데, 임금이 “잠깐 멈추어라. 하나는 빼지 말고 대신 눈을 빼라”고 했습니다. 눈을 빼버리면 왕자가 장님이 것을 임금은 아버지로서 걱정한 것입니다. 임금이 “내 눈을 대신 빼라”고 했지만, 누가 감히 임금님의 눈을 있겠습니까? 신하들이 엎드려 “폐하, 그럴 없습니다”고 하자, 임금은 직접 송곳을 취하여 자기 하나를 찔러서 뺐습니다. 임금이 아들 대신 눈을 뺐는데도, 백성들이 ‘그것 가지고는 된다’고 하지는 않았겠지요.  

 법에 따라 눈을 빼는 것은 공의이고, 범죄자 대신 자기의 하나를 것은 사랑입니다. 자기 눈을 주면 완전한 사랑이겠지요. 법은 일단 공포하면, 비록 법을 제정한 임금 자신이라도 따라야 합니다. 지금도 입법기관인 국회의원에게나 사법기관인 법관에게나 법은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하나님은 공의로운 제정자이자 재판자이십니다. 하나님의 공의가 무너지면 하나님의 권위와 명예는 땅에 떨어지고 맙니다. 공의와 사랑 가지를 이루기 위해 하나를 깨뜨릴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공의는죄의 삯은 사망이지만, 하나님의 사랑은대신 죽어도 된다는 것입니다. 의인이 죄인 대신 죽어주는 그것은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심은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을 완전히 성취한 것입니다. 값은 죽음으로 치러야 한다는 것은 공의이고, 하나님의 독생자가 죄인인 우리 대신 죽었다는 것은 사랑입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이 동시에 이루어진 곳입니다.

<출처:생명의말씀선교회>

하나님의 사랑 5 - 우리의 죄를 없이 하러 오신 하나님

그가 우리 () 없이 하려고 나타내신바 것을 너희가 아나니 그에게는 죄가 없느니라”(요한일서 3:5).

예수님께서는 우리 죄를 없이 하려고 세상에 오셨습니다.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오셨다는 말씀을 좀더 쉽게 설명하자면, “죄를 없이 하러 오셨다”라는 말이 됩니다. 죄 때문에 심판받고 죄 때문에 지옥 가기 때문에, 죄인인 우리를 구원하시려면 죄를 없애야 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우리의 죄를 없이 하실 수 있을까요? 그냥 하나님의 크신 사랑으로 용서해 주면될까요? 그것은 안됩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의 공의(公義)가 손상되고 맙니다. 죄 값은 반드시 치뤄져야 합니다. 죄 값을 치루기 전에는 죄가 해결될 수 없습니다.

사형(死刑)이 확정된 사형수가 재판장에게 살려 달라고 통사정한다고 사형을 면할 수 있습니까? 살려 주면 선한 일을 많이 해서 그 죄 값을 갚겠다고 하면 됩니까? 그렇게는 안 됩니다. 이 죄수의 죄와 형벌이 법()에 따라 결정되었듯이, 사형수가 살 수 있는 길도 대속법(代贖法)이 있어야만 가능합니다. 즉 죄 값인 형벌을 다른 사람이 대신 치러도 된다는 법이 있으면 됩니다.

형벌은 죄를 지은 당사자가 받는 것이 원칙이고, 그래야 정의가 세워집니다. 그렇지만 예외없는 법칙이 없듯, 거의 모든 법은 그것의 적용에 단서(但書)나 예외가 있습니다. 또한 정상참작이라는 것도 있습니다. 만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든 인간이 죄로 인해 모두 지옥 간다면, 하나님의 공의는 이루어질지 모르지만 하나님의 사랑은 폐하여지고 하나님의 창조계획은 실패하고 맙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 모든 것을 아시고 ‘대속의 법’을 제정하셨습니다.

가령 돈을 많이 빌려 벌인 사업이 실패하여 10억원 쯤 부도를 냈다고 합시다. 갚을 능력이 없어서 그 10억 돈 때문에 감옥살이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가 석방되려면 어떻게 하면 됩니까? 돈 많은 친척이나 아는 사람이 부도낸 금액을 대신 다 갚아 주면 그 사람은 풀려납니다. 그와 같이 하나님 앞에 치러야 할 죄 값인 죽음도 ‘대신 죽어도 된다’는 법이 있고, 또 누가 대신 죽는다면 해결됩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므로 죽음이 치러지는 외에는 달리 방법은 없습니다.

옛날에는 그런 법이 적용되던 때도 있었답니다. 죽게 된 친구를 위해 한 친구가 재판장에게 왔습니다. “재판장님! 저 사형수 이 아무개 대신 제가 죽게 허락해 주십시오. 저 친구가 죽으면 그의 가족은 살 길이 없습니다. 저는 홀몸인데다가 저 친구에게 큰 신세를 졌습니다. 제가 죽음으로써 저 친구에게 진 사랑의 빚을 갚고 싶습니다. 허락해 주십시오”라고 사정했습니다. 그래서 재판장은 그 친구가 사형수인 친구를 대신해서 죽는 것을 허락했다고 합시다.

 그렇게 되면 그 사형수는 죽을 필요가 없겠지요. “이 아무개의 친구 김 아무개가 친구를 대신해서 사형을 당했은즉 사형수 이 아무개는 석방한다”. 죄 값을 치룬 정당한 석방이 이루어집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준비하신 방법은 다름 아닌 “대신 죽어도 된다”는 법입니다. 그렇게 하심으로써 공의도 세우고, 다른 한편으로 하나님의 사랑도 이루십니다.

뿐만 아니라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이 세상에 오신 예수님께서 “죄를 없이” 하시려면, 예수님은 당연히 죄가 없으신 분이어야 합니다. 죄인 자신이 타인의 죄를 대신 할 수는 없습니다. 같은 사형수들만 있는 감옥에서 한 사형수가 다른 사형수를 대신하여 죽고 그를 무죄 방면케 할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죄인)를 위해 하나님 앞에 대신 죽어줄 사람은 무죄한 사람이어야 합니다.     

죄 값을 의인이 대신 죽음으로써 치른다는 것은, 죄를 사()함 받으려면 거기에는 생명(生命)이 지불되어야 한다는 말과 같습니다. 생명의 희생이 곧 죽음이며 “피 흘림”입니다.

창세기에서 처음 보듯 ‘죄의 대가 = 죽음’이었던 것이 하나님의 법이었던 것처럼(“정녕 죽으리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히브리서 9:22)라는 규정 역시 하나님의 법입니다. 레위기 17 11절에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 내가 피를 너희에게 주어 단 () 뿌려 너희의 생명을 위하여 ()하게 하였나니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가 죄를 속하느니라라고 하여, 피는 곧 생명임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생명이 피 흘려 죽음으로써 그 피가 죄 값을 치른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학자들도 사람이나 짐승이나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다고 합니다.    

구약시대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율법을 범한 죄를 사함 받기 위해 짐승을 죽여 속죄제물(贖罪祭物) 드렸습니다. 그 때문에 많은 양과 염소, 송아지가 속죄 제물로 희생당했습니다. 흠도 없고 점도 없는 깨끗한 짐승을 죽여 속죄제단에 피를 뿌리고 하나님 앞에 기도함으로써 그들의 죄를 사함 받았습니다.

사람이 우상 숭배한 죄, 살인한 죄, 부모 거역한 죄, 간음한 죄, 도적질한 죄를 짐승에게 짊어지워서 죽였습니다. 그리고 그 짐승의 피를 뿌리며 하나님 앞에 기도하면 죄를 사함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한 속죄제사법 또한 이스라엘 민족이 이행해야 할 하나님께서 주신 법이었습니다. 그런데, 사람의 죄 값을 짐승의 죽음으로 씻을 수 있겠습니까?  

짐승을 속죄제사의 희생으로 드렸던 그 제사는 효력 있는 참 제사가 아닙니다. 짐승이 사람을 대신하여 죽을 수는 없습니다. 짐승의 피가 사람의 죄 값을 씻을 수 없습니다. 황소와 염소의 피가 능히 죄를 없이 하지 못함이라”(히브리서 10:4). 짐승의 피가 죄를 속()할 수 없는데, 왜 그것을 하라고 하셨을까요?

그것은 진짜 제사는 아니지만, 후일에 진짜 제사가 드려지리라는 약속(約束)하에 행한 의식입니다. (구약의 제사법) 의지하여 드리는 예물과 제사가 섬기는 자로 양심상 온전케 없나니 이런 것은육체적 예법만 되어 개혁(改革) 때까지 맡겨둔 것이라”(히브리서 9:9,10)고 하셨고 율법은 장차 오는 일의 그림자요 형상이 아니”(10:1)라고 하셨습니다.  

사업하는 경우에 쉽게 볼 수 있는 일인데, 예를 들어 물건 값으로 1억원을 지급해야 할 일이 생겼다고 합시다. 물건을 구입한 때 대금을 지불하는 것이 원칙이지만, 구매자 역시 물건을 팔아야 자금이 도는 것이 현실이므로 대개의 경우 어음을 발행합니다. 그래서 상거래에 있어서는 “금 ****원을 ** **일에 지급하겠다”는 것을 표시한 ‘어음’을 현재의 현금 대신 지급합니다. 어음은 돈은 아니지만 기한이 되면 현금의 효력이 발생하는 약속입니다.

물론 어음은 사람들 간의 일이기에 그 약속이 깨지는 수도 있습니다. 어음발행자가 부도(不渡)나거나 고의로 어음사기를 하는 경우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되면 그 어음은 휴지가 되고, 어음소지자의 믿음은 헛 것이 되고 맙니다. 그러나 그것은 특수한 경우이고, 대부분의 경우 어음은 곧 때가 되면 실현될 약속된 돈입니다. 그 믿음 때문에 그것은 현재 효과가 있습니다. 어음소지자는 그것을 할인해서 돈으로 바꿀 수도 있고, 또 돈 대신 지급하기도 합니다. 기한이 이르면 그 돈이 지급되기 때문입니다.

그와 같이 양이나 염소, 송아지로 제사한 것은 참 제사는 아닙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약속이므로 효력이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에 의해 참 제사가 드려질 때까지 어음과 같은 역할을 하는 하나님의 약속이었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죄를 사함 받으려면 사람이 대신 죽어야 하지만, 아담의 자손은 다 죄인이므로 아담의 후손이 아닌 의로운 사람이 죽어야만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아담의 자손이 아닌, 죄 없는 한 사람을 준비하셨습니다. 그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가 우리 죄를 없이 하려고 나타내신바 것을 너희가 아나니 그에게는 죄가 없느니라”.

예수님이 인간 세상에 오시기 700년 전 하나님께서는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주께서 친히 징조로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7:14)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처녀의 몸에서 잉태하시는 그분은 바로 인류의 시조 아담과 하와가 범죄로 인해 추방받기 전 하나님으로부터 약속받았던 여자의 후손”(창세기 3:15)이기도 합니다.

아담의 후손은 죄인이므로 예수님은 사람으로 나시되 죄 없이 나시기 위해 성령으로 잉태하여 여자에게 태어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동정녀 마리아의 태를 열 달 동안 빌리셨고, 아담의 후손이 아니기 때문에  그에게는 죄가 없느니라고 하신 것입니다.

<출처:생명의말씀선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