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5/2009

근심하는 자를 위한 하나님의 치료[존 번연]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14:1) 이 성경 구절은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고난받으시기 바로 전, 이 땅에서 우리를 축복하신 마지막설교의 한 부분입니다.

불쌍한 제자들은 자신들이 존경하는 주님이 머지않아 큰 해를 입게 되실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떠나시는 것은 제자들에게 생각할 수조차 없는 큰 손해였습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이 명령은 27절에서 반복해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이 말씀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려고 하신 말씀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전혀 근심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인가요? 아니면 우리 속에 근심이 없어야 한다는 것인가요? 아닙니다. 눈에 보이는 어떤 해를 당하게 될 때나 어떤 고난을 당하게 될 때, 또는 가장 가깝고 소중한 친구와 헤어지게 되었을 때, 우리는 근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항상 죄를 지나치게 혹은 경미하게 취급하는 극단에 빠지기 쉽습니다. 곧 죄를 너무 크게 혹은 너무 사소하게 처리하려고 한다는 뜻입니다. 이 두 가지 방법은 잘못된 것입니다. 아주 사악한 죄악에 대해서, 우리는 거의 고민을 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죄에 지나치게 과민하여 실패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물론 일부 사람들은 복음서에서 말하고 있는 그리스도의 약속으로위로 받는 것을 거절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런 사람은 아주 소수이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죄를 너무 안일하게 대처하려고 하기 때문에 실패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죄에 대하여 마땅히 느껴야 할만큼 고통스러워 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죄악이 당연히 힘들고 무겁게 느껴야 할만큼 힘들고 무거운 짐이 되지 않고 있습니다. 마음을 억누르고 있는 무거운 죄를 그렇게 무겁게 느끼지 않습니다. 우리는 많은 죄악을 가벼운 짐으로 느끼고 있습니다. 우리의 헛된 생각, 태만, 거룩한 책임에 대해 부주의한 태도, 소중한 시간의 낭비 등은 우리를 고통스럽게 합니다.

그러나 이와는 반대로 우리는 비교적 사소한 고통을 무거운 짐으로 느끼며, 심지어 육체까지도 억눌러 먼지가 되게 합니다. 우리는 자신이 짊어지고 있는 고통에 대하여, 성령님이 경고하시는 두 극단에 치우치기 쉽습니다.

"내 아들아 너는 주의 징계를 멸시하지 말며 그분의 꾸짖음을 싫어하지 말라"는 구절에 대하여 사도들은 "그분께 책망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3:11, 12:5). 또한 하나님은 극단적인 사람들에게 무서운 징계를 하십니다. "주님께서 자신이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자신이 받으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라"( 12:6)

여전히 아들은 아버지에게 있어서 기쁨이 되고 있습니다. 아들은 아버지의 징계와 벌을 멸시하지 않습니다. 또한 아들은 그러한 것을 가볍게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런 채찍질은 사랑스런 아버지, 현명한 아버지로부터 비롯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버지가 자녀에 의하여 멸시를 받는 법은 없습니다. 징계는 아버지의 사랑에 대한 열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징계 때문에 피곤해 해서는 안 됩니다. 또한 연약해져서도 안 됩니다. 그 이유는 징계가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으로부터 나오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우리로 인해 기쁨을 누리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연약해져서는안 됩니다. 본문에서 말하고 있는 것처럼 괴로운 일이 생기더라고 우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여기에 마음의 동요가 있어서는 안 됩니다. 결코 하나님의 자녀가 아닌 것처럼 생각해서는 안 되며,어린아이처럼 하나님의 매를 무섭게만 생각해서도 안 됩니다. 하나님의 회초리는 음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 소리를 잘 들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매를 드실 때, 우리는 그 매와 하나님을 주목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손길을 하나님과 동일한 것으로 인정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손길을 주목하지 않을 뿐 아니라 인정하려고 하지도 않습니다. 고난이 닥칠 때, 하나님을 생각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능력의 손 아래서 겸손해지려고 하지 않습니다. 자기를 낮추고 하나님께 맡기지 않습니다. 우리가 겪고 있는 괴로움은 도움이 필요없는 것이라고 말하며, 그렇게 생각합니다. 따라서 치료가 필요없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채찍질을 멸시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것을 주의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손길이 우리를 위로하고 있음을 주의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징계를 두려워하며, 하나님의 징벌로 인해 의기소침해지고 연약해지는 다른 극단에 빠지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오직 마음에 근심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우리의 질문
우리의 자유, 재산, 사랑의 관계, 욕망, 우리의 가슴에 기쁨이 되는 것을 빼앗기고 고통스러울 때, 우리의 마음 속에 근심이 없을 수 있다는 것이 가능합니까?

우리는 성경에서 베냐민, 사라, 리브가, 요셉 등을 볼 수 있습니다. 또한 일시에 사랑하는 남편, 사랑스럽고 믿음직스럽고 자애로운 아내가 떠나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일시에 하나님의 위로를 빼앗기는 때를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때는 불행하고 슬플 때입니다. 그리고 고통스러운 때입니다. 이러한 때에 성령님은 우리의 고통을 덜어주시고, 우리의 무거운 짐을 잘 견뎌내도록 도아주십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상담을 해주고,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방법을 볼 수 있도록 해 줍니다.

정말로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가능합니까? 그것은 사랑스런 친구와 단 한 번의 포옹을 하고 헤어지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그리고 어두운 침실로 보내져, 시체실에 밀봉되고, 무덤 속에서 조용히 있다가, 다정한 친구들의 얼굴을 못 보며 심지어 천국에 갈 때까지 더 이상 보지 못하게 되는것과 같습니다.

이와 같은 때에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고 말하는 것이 가능합니까? 그것은 놀라운 일이지만 우리가 그런 경지에 도달하는 것이 가능합니까?

저는 대답합니다.
앞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우리는 하나님의 징계를 멸시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손길에 대하여 무감각한 목석이나 돌처럼 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징계에 민감해야 합니다. 이러한 일에 마음을 두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역사하심에 관심을 두어야 합니다. 물론 그러한 손실은 마땅히 슬퍼해야 할 일입니다. 그것은 무언가 부족한 것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친척들도 결핍을 발견할 것이며, 교회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다윗은 요나단을 잃은 것에 대하여 슬퍼했습니다. 그리고 제자들도 예수님을 잃었을 때 슬퍼했습니다. 사랑스런 친척이나 친구가 떠나거나 죽게 되었을 때 고통을 받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한 일 때문에 슬퍼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우리가 은혜없이 혼자서 일하는 것처럼 근심한다는 점입니다. 그럴 때 곧바로 근심의 범위를 넘어 서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근심은 자제되고 제한되어야 합니다. 적당하게 슬퍼하는 것은 적절한 것입니다. 그러나 비록 우리가 슬퍼할 수는 있지만, "너희가 소망 없는 다른 자들과 같이 근심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살전 4:13)는 말씀처럼 소망이 없는 자처럼 절망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 안에서 잠자고 있는 자는 안전하고 행복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예수님께서 죽으셨다가 다시 일어나셨음을 믿는다면, 이와 같이 예수님 안에서 잠자는 자들도 하나님께서 그분과 함께 데리고 오시기 때문입니다(살전 4:14).

때로 우리는 선택의 여지 없이 뜻밖의 고통을 당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 때도 우리는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마음에 근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를 잠시 후에 알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금해야 할 것은 마음의 근심입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근심하는 마음을 예방하고 치료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우리의 구주이신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저택들이 많도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 말씀에서 주목해야 할 점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악한 질병 혹은 영적인 혼란은 그리스도의 제자들에게도 일어났던 일로서, 쉽게 이러한 고통에 처하게 하였으며, 마음에 근심을 일으켰습니다. 이것이 우리를 애워싸기 시작합니다. 우리는 이러한 것에 주의해야 하며, 힘써 대항해야 합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나와 헤어지는 것이 너희의 살점을 도려내는 아픔과 같은 것임을 알고 있다.그러나 너희는 나와 헤어져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마음의 고통으로 인한 혼란에 빠지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둘째, 영적인 혼란에 대한 가장 좋은 예방책이나 치료는 "너희는 하나님을 믿어라. 또한 나를 믿어라"는 말씀입니다. 주님이 말씀하셨던 것처럼, 우리는 확실하게 하나님을 믿어야 합니다. 왜 우리의 마음 속에 근심이 있습니까? 만약 그 믿음이 하나님에 기초하여 역사한다면 우리를 도와주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믿음의 역사가 일어나지 않는다면, 우리의 믿음은 우리 위에 기초한 것입니다.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또한 나를 믿어라! 너의 믿음이 나를 의지하여 역사하도록 하라. 내가 너를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을 믿어라. 내가 너희를 떠나 있을 동안에도,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믿어라"

 "내가 아버지께 청하겠으니, 그분께서 또 다른 위로자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히 너희와 함께 거하게 하시리니, 곧 진리의 영이시라. 세상은 그분을 받아들이지 못하나니, 이는 그분을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분을 아나니, 그분께서 너희와 함께 거주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실 것임이라"( 14:16-17)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너희 마음이 근심하지 않도록 하라. 나를 믿어라. 나는 너희를 떠나야만 하고, 너희와 헤어져야만 하지만, 너희가 내가 가는 곳을 믿고 생각한다면, 위로를 받을 것이며 평안을 얻게 될 것이다. 내 아버지 집에는 거할 곳이 많도다. 너희가 여기에서 거하는 집들보다 훨씬 더 아름답고 찬란한 집들이 너희를 위하여 예비되어 있다. 너희가 이 땅에서 방황하는 동안, 많은 어려움이 드러나게 될 것이다."

주님은 이 땅에 계실 동안 자신의 머리 둘만한 집이 없으셨습니다. 그러나 아버지 집에는 거할 곳이 많습니다. 그 집은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들에 있는 영원한 집"으로서(고후 5:1), 보다 더 높은 차원의 것입니다. 우리가 단 한 번이라도 그곳에 가게 된다면,더 이상 다른 곳으로 가고 싶어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 곳은 그렇게 아름답고 축복된 곳입니다.

거기에는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이 예비되어 있으며, 거할 집이 많습니다. 그리고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천사와 성도들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나를 믿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주님이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 중에서 가장 참된 것입니다. 그리고 또한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려 가는"사실을 믿으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나는 너희를 대신하여 너희들에게 영원한 거주지, 즉 천국의 집을 마련해주기 위해서 간다. 너희가 이 땅에 있는 동안, 나는 너희들이 거할 처소를 예비할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를 위하여 떠나는 것이기 때문에, 너희들이 당하게 되는 마음의 근심을 막기 위해서, 그러한 것들을 강하게 대적하기 위해서, 그리고 너희 자신을 훈련시키기 위해서, 너희는 하나님을 믿어라. 또한 나를 믿어라. 이것은 너희를 위한 치료제가 될 것이니, 너희는 이것을 복용해야 한다. 너희는 나를 믿고 의지해야 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연약한 제자들에게 아주 친절한 분이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제자들이 이 세상에서 부딪히게 될 나쁜 일, 손실, 고난, 시련, 박해를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마음의 질병을 극복하기 위한 일종의 해독제와 연약한 자와 마음에 근심하는 자를 위한 일종의 강심제를 주시고 떠나셨습니다. 이것은 가장 중요한 원리입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한 나를 믿어라" 이러한 고백을 할 수 있는 믿음은 최고의 치료제가 될 것이며, 최고의 해결책이 될 것입니다.

연약한 신자들은 세상에서 단지 변장한 왕자에 불과합니다. 예수님이 그들 모두를 그렇게 만드셨습니다. 그들은 세상에 있는 동안 베일에 가리운 채 외국 땅에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이제 하나님의 아들들이라. 앞으로 어떻게 될지는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분께서 나타나실 때에, 우리가 그분과 같게 될 줄 아는 것은, 우리가 그분을 계신 그대로 볼 것임이라."(요일 3:2)

그들은 아주 커다란 교회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세상에서 알려지지 않은 땅에 있습니다.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낯선 땅입니다. 오직 거룩하시고 위대하신 하나님께서 그들의 분깃이며 유산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이 확신하고 있는 대상이며, 그들의 목적이며, 영원한 몫입니다. 그들은 약속하신 나라를 유업으로 받게 될 자들입니다.그들은 또한 구원 얻을 상속자들입니다( 1:14). "자녀이면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공동 상속자이니, 우리가 그분과 함께 고난을 당하는 것은 함께 영광도 받게 하려 함이니라."( 8:17). 그렇습니다. 이 세상의 만물이 다 그들의 것입니다(고전 3:21). 만물은 그들을 축복하고 있으며, 거룩하게 하고 있으며, 그들을 영적이고 영원한 복지로 이끌어갈 것입니다( 8:28).

그러나 이러한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비록 하늘과 땅이 경건함과 그것을 고백하고 누리는 자들의 발 아래 놓여 있다 하더라도, 그 경건이 현재의 생명과 앞으로 올 생명의 약속을 지니고 있다 할지라도(딤전 4:8),성도들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의 모든 선한 것을 누릴 참된 자격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성도들은 여전히 세상에서 갖가지의 유혹과 시련을 접하게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 집으로 가는 길에서 어두움을 만나게 되며 슬픔과 폭풍우에 부딪히게 됩니다. 그리고 이 땅에서의 모든 위로를 빼앗길 수도 있습니다.

또한 우리가 성경에서 읽었던 것처럼 가장 친한 친구나 친척이 자유함을 빼앗길 수도 있습니다. 이런 일은 가장 훌륭한 성도들도 가질 수 있는 삶의 한 부분입니다.

본문에서 주님은 마음의 불안을 미리 예방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예수님을 구주로 모시고 천국의 행복을 얻을 자격을 가진 제자들이 좌절하고 불안해하는 것을 원치 않으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을 책망하시는 것입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주님은 이런 불안이 제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지 못하도록, 죄로 만성된 마음의 불안을 막기 위해 적절한 예방책을 주신 것입니다. 곧 그들의 마음에 자리 잡고 있는 불안을 치료하기 위해서는 오직 하나님을 믿는 길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내가 죽어야 예수가 산다 (막 14:10-21)


이 시간에 “내가 죽어야 예수가 산다”는 제목으로 은혜 나누고자 합니다. 그리스도인이란 누굴까요?마음속에 예수님이 사는 사람입니다. 8:9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했습니다. 이것은 구원과 관계 되고 영생과 우리 모든 삶과 관계가 됩니다. 그러므로 마음에 예수님이 계시냐 아니 계시냐는 대단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마음에 예수님이 살지 않는다면 그는 버리운 자입니다.

요즘 세계적으로 줄기세포 연구가 활발합니다줄기세포란 원래 육신을 구성하는 세포들의 기원이 되는 세포입니다줄기세포로 인해서 우리 인체가 형성되었고 지금도 이 줄기세포가 작용하고 있기에 다쳐도 치료되고 복원이 됩니다. 그런데 성장하면서 상당 부분의 줄기세포는 둔화되어 복원력이불가능합니다. 그래서 활성화된 줄기세포를 추출하여 이식시키려는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연구대로라면 심장에 심장세포를 심어주면 도마뱀의 꼬리가 다시 자라듯 자라서 새로운 심장이 생기고 간에 간장세포를 심으면 새로운 간이 자라나게 됩니다그래서 불치병에 걸린 사람들이 줄기세포에 큰 기대를 걸었습니다. 기대만큼 결과가 나타날지 모르지만 과학자들은 치료를 위하여 줄기세포에 많은 투자를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장기의 복원을 위해 줄기세포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우리 영혼의 문제입니다. 우리 속에 예수가 접목되고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안에서 사시면 주님께서 우리 성품이 되시고 우리 생명이 되시고 우리 능력이 되십니다. 이보다 더 아름답고 귀하고 위대한 것은 없습니다. 우리에게 예수가 나타나시는 것입니다그래서 사도 바울은 “내가 그리스도와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2:20) 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믿을 뿐 아니라 내가 철저히 악에서 죽을 때 생명의 예수께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에는 세상에서 제일 불행한 사람이 나옵니다. 바로 예수님을 배반한 가룟 유다입니다. 가룟 유다는 불의한 욕망을 위하여 예수를 판 가장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가룟 유다에 대해서 본문 21절에서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으면 제일 좋았을 뻔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죽어야 예수가 사는데 그는 자기 욕망 때문에 예수를 팔아 결국은 십자가에 못박게 하고 말았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내가 죽는 것 중요한 문제입니다.

우리 안에 예수님이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1. 교만을 죽여야 합니다.
흔히 고난 주간 넷째 날인 수요일을 ‘사랑과 배신의 날’이라고 부릅니다. 그때 주님은 옥합을 깨뜨린 여인의 사랑을 받았고 바로 다음에 가룟 유다로부터 배신을 당했기 때문입니다. 그 여인의 사랑받는 장면이 본 14 3-9절에 나오고 바로 이어서 10-11절에 가룟 유다가 배신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왜 이런 극과 극의 장면이 연이어서 나올까요? 그것은 가룟 유다의 오해에서 비롯된 예수님께 대한 분노가 깊이 암시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 분노는 바로 우월감 교만에서 비롯되었습니다.

가룟 유다는 다른 제자들보다 똑똑했습니다. 계산이 빨라 제자들 중에서 돈 궤를 맡을 정도로 주님의 신임을 받았습니다. 출신도 다른 열한 제자들은 북쪽 갈릴리 출신인데 가룟 유다는 남쪽 유다의가룟이라는 도시였습니다. 가룟 지방은 교육여건이 아주 좋은 곳이었습니다. 가룟 유다는 출신부터 다르고 학력도 다르고 다른 제자보다 똑똑했고 돈 궤도 맡았기 때문에 가룟 유다는 항상 엘리트 의식이 가득한 자부심이 강한 사람이었습니다. 이런 사람이 조금만 무시당한 듯 싶으면 문제를 일으킵니다.

한 번은 예수님께서 베다니의 시몬의 집에서 식사하실 때 한 여인이 옥합을 깨뜨려 향유를 예수님의 머리에 부었습니다. 그 향유의 가치는 삼백 데나리온으로 1년 소득 정도의 가치였습니다. 유다는 그것을 허비했다고 곁에 계신 주님이 무안할 정도로 그 여인을 책망했습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잘했다고 자기를 두둔해 줄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도리어 자기를 제지하시며 “가만 두어라. 왜 저를 괴롭게 하느냐? 저가 내게 좋은 일을 했다. 복음이 증거 되는 곳이 이 여자의 일도 말하라” 하시면서 여인을 칭찬해 주셨습니다.

그 때 유다의 마음은 발칵 뒤집혔습니다틀린 말을 한 것도 아닌데 자기는 무시 받고 별 볼일 없는 여인을 두둔하시니 사람들 앞에서 면박을 주는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자기를 일개 무명의 여인보다 못한 존재로 여기는 것 같아서 창피해서 견딜 수 없었습니다. 그런 격한 감정 가운데 마귀가 들어가 결국 유다는 예수님을 팔려고 결심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가룟 유다가 받은 상처는 순전히 자기를 대단한 사람으로 여기는 교만 때문입니다. 이 교만이 주님의 말씀을 은혜로 받지 못하게 합니다. 모든 시험은 교만 때문에 옵니다. 교만이 시험을 생산해 냅니다. 정말 낮아져 보세요. 성령께서 함께 하셔서 시험 들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자기를 낮추는 사람을 기뻐하십니다. 좋은 학교를 나왔어도 하나님 앞에서는 무식쟁이일 뿐이요 초라합니다. 많은 것을 가졌어도 하루 세 끼 이상 먹는 것 아닙니다. 우월감과 교만이 내게 있을 때 주님은 내 안에 계실 자리가 없고 나도 죽는 것입니다. 또 예수님이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2. 내 뜻을 죽여야 합니다.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판 또 다른 이유는 자기 야심을 죽이지 못해서입니다. 그가 왜 주님을 따랐을까요? 그것은 야심 때문입니다. 그에게 정치적 야심이 있었습니다. 다른 제자에게도 야심이 있었지만 가룟 유다는 특별히 그런 정치적인 야심이 강했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왕이 되실 때 큰 한 자리를 차지하고 싶었습니다. 그는 주님에게서 그런 야심을 버려야 한다는 말씀을 무수히 들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마음에는 여전히 예수님의 능력으로 세상을 뒤엎고 자신도 한 자리를 차지할 것에 대한 기대를 버리지 못했습니다. 이 자기 뜻이 큰 문제를 만들어낸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점점 자기 기대와는 다르게 그 반대의 길로 가신 것입니다. 하늘을 찌르는 인기와 능력을 이용하여 예루살렘으로 올라가 왕이 될 채비를 하지 않고 여전히 소수의 제자들을 데리고 다니며 어울리는 사람도 비천한 사람들이요 십자가에 달려서 죽으신다는 말씀만 하십니다. 이것을 본 야심을 가진 가룟 유다로서 너무 답답하고 속터질 일이었습니다.

유다는 야망을 비전으로 착각했습니다. 비전과 야망은 다릅니다. 비전은 하나님이 주신 꿈이지만 야망은 자기 욕망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왜 주님의 뜻을 맞추지 못합니까? 주님의 뜻을 받들려면 내 뜻을 접어야 하는데 도리어 주님을 불러 내 뜻을 이루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됩니다.

하나님의 뜻을 구하지 않고 날마다 내 뜻을 놓고 기도하니 어떻게 우리 주님이 함께 하실 수 있겠습니까? 겸손히 자기 뜻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뜻을 구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뜻을 모르면 그냥“하나님의 종이 여기 있습니다.” 하면서 엎드리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우리에게 소원을 주시고 그 소원을 이루어주실 것입니다. 또 우리 안에 예수님이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3. 탐심을 죽여야 합니다.
가룟 유다에게 있는 또 하나의 결정적인 약점은 바로 물질에 대한 욕심이었습니다. 그가 옥합을 깨뜨려 예수님께 부은 여인을 책망한 것은 선교와 구제에 관심이 있어서가 아니라 저는 도적이라 돈 궤를 맡아 그것을 훔쳐가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팔아먹을 것이 없어서 예수님을 돈을 받고 팔았으니 얼마나 탐심이 대단한 사람입니까?

이것은 가룟 유다에게만 있는 약점이 아닙니다. 사람이 탐심에 눈이 어두우면 상상할 수 없는 짓을합니다. 그래서 자기 아내를 팔고 부모를 팔고 자식을 팔기까지 합니다. 누구나 한 가지 이상씩의 탐욕이 있습니다. 자신이 어떤 면에 약한지 알아야 합니다. 물질에 명예에 권세에 이성에 무엇에 약하냐는 말입니다.

부자 청년은 모든 계명을 다 지켰지만 물질 사랑을 버리지 못했습니다. 다윗은 다른 것은 다 잘 이겼는데 이성문제에 넘어졌습니다. 베드로는 한 순간 자기 목숨을 사랑해서 거짓을 말합니다. 자기 목숨이 우상이었습니다. 자기 건강이 우상이기도 합니다. 자기만이 갖고 있는 탐심을 버려야 예수님을 바로 모시고 살게 되는 것입니다. 또 예수님이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4. 자기를 죽여야 합니다.
예수님의 열두 제자 중에서 가룟 유다가 가장 자존심이 강한 사람이었습니다. 자존심이 때로는 성공을 가져다주는 동력이 되기도 하나 지나치면 자기 체면을 위해 마음의 문을 닫습니다. 옳은 줄 알면서도 자존심이 마음을 닫게 합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여러 차례의 회개의 기회를 주었습니다. 그러나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먼저 향유 사건을 통해서 질책하시므로 유다에게 회개의 기회를 주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도적의 마음을 회개하기는커녕 반항함으로 예수님을 팔 결심을 했습니다. 주님은 최후의 만찬에서도 “너희중에 한 사람 곧 나와 함께 먹는 자가 나를 팔리라” 하시며 그의 회개를 유도했습니다. 그러나 유다는 “저건 나 들으라는 소리구나!”하고 자존심 소리로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다른 제자들은 주님의 말을 듣고 근심하며 한 사람씩 “접니까?” 하고 질문했지만 그런 상황에서 유다는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주님은 유다에게 또 다시 회개의 기회를 주시기 위해 “열둘 중 하나 곧 나와 함께 그릇에 손을 넣는 자니라” 그러시면서 “나를 파는 그에게는 화가 있으리라 그는 차라리 나지 않았다면 좋았을 뻔하였느니라”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주님의 세 번째 회개의 기회인데 그래도 유다는 끝까지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사랑의 목자라면서 어떻게 이렇게 저주를 퍼붓나?” 그렇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자기를 내려놓지 못한 자의 삶이 이렇게 악하고 비참하다는 사실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유다에게서 자기를 죽이지 못한 자의 최후를 봅니다내가 죽어야 예수님이 삽니다. 최고의 원수는 바로 자기입니다아무리 봐도 우리가 가룟 유다보다 더 선하다 할 수 없습니다. 가룟 유다가 갖고 있는 죄악의 속성 우리도 다 갖고 있습니다. 주님을 뒷전에 둔적이 얼마나 많고 주님을 무시한 적이 얼마나 많으며 그의 뜻보다는 내 뜻만을 추구할 때가 얼마나 많았습니까? 우리 모두 예수 공로 힘입어 교만을 죽이고 내 뜻을 죽이고 탐심을 죽이고 자기를 죽여서 주님께서 우리 안에서 온전히 사시는 가장 복된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한국강해설교연구원>


고난은 친밀한 사랑과 영광을 위한 대가지불입니다 2 - 조호남 목사님


3. 고난은 친밀한 사랑을 위한 댓가지불입니다.
. 고난을 통해서 우리가 만들어지고 고난을 통해서 주님과 친밀해집니다. 그때는 욥처럼 우울해지기도 하고 주님께서 이럴 수 있을까~! 하기도 했는데 은혜를 경험하고 보니 이런 은혜를 주시려고 그랬구나.. 하고 계속 감사하게 됩니다.

. 이스라엘 백성에게 애굽의 종 되었던 때를 잊지 말라고 하시는데 이것이 신앙에 도움이 되고 겸손해집니다.

. 큰 어려움과 고난이 그때는 죽을 것 같고 망할 것 같지만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경험하고 친밀하게 되고 그것을 통해서 새롭게 되었을 때 두고두고 감사하게 됩니다.

.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고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라고 하십니다. 고난당하기 전보다 훨씬 더 찬양하게 되고 주님을 사랑하게 됩니다.

. 가짜는 고난 때 물러가게 되고 진짜는 더 정결케 되고 더 큰 은혜를 경험하게 됩니다. 힘들고 어렵고 고난을 당하니 사람들이 볼 때는 별로 주님께서 사랑하지 않고 망한 줄 아나 주님의 엄청난 사랑을 받고 있는 것인데 천국가면 알게 됩니다.

. 고난 때 망해버렸으면 그 고난은 완전히 죄에 대한 징벌입니다. 악인은 매를 들면 그대로 끝나버리고 아무 의미도 섭리도 없지만 고난을 통해서 더 큰 은혜를 주셨다면 그 고난은 이 은혜를 주시기 위해서 허락하신 것입니다.

. 요셉도 고난을 통해서 주님께서 총리로 높여주셨습니다.

. 사랑하는 자는 고난이 유익이 되고 합력하여 선이 됩니다. 그 영광을 위한, 친밀한 사랑을 위한 필수적인 댓가지불입니다.

. 죄로 인해 영원히 멸망시켜 버리는 그런 고난이 아닙니다. 죄를 지었으면 지금 고난 때 은혜가 없어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도 불순종해서 나라가 초토화 되어버리는데도 다시 회개하게 되면 다시 깨어진 조각이라도 다시 맞추셔서 나중 영광이 이전 영광보다 더 크다고 죄가 많은 곳에 은혜가 많다고 더 크게 하시는데 하나님나라는 놀라운 신비가 있습니다.

. 주님께서 한번 선택하시고 계획한 사람은 주님의 뜻대로 영광으로 영광에 이르게 됩니다. 그 사람이 별로 기름부음이 없다고 별로가 아닙니다. 요셉이 감옥에 있다고 해도 하나님께서 함께 하셨습니다.

. 환경이 좋아서 함께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개인도 어려울 때 여러분 스스로가 하나님께서 나를 박대하시구나 사랑하지 않는구나 하고 절대 순간을 보면 안되고 이렇게 하시려고 그랬구나! 할 때가 오니 절대 자신에 대해서나 남에 대해서나 함부로 말을 하면 안됩니다.

. 항상 기뻐하라고,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고 하시고, 변함없이 주님을 사랑하라고 하시는데 평안하든지 어떤 때든지 중요한 것이 주님의 임재입니다. 주님께서 나와 함께 하심을 확인만 하면 됩니다.

. 고난당한다고 이스라엘 백성처럼 원망하고 불평하면 안되고 고난 때 기도만 하면 됩니다. 그 사람을 버렸다면 아무것도 없고 기도도 자기 마음대로 못합니다. 조그만 은혜라도 은혜가 있으면 하나님께서 아직 나를 버리지 않았구나! 거기에서 위로받습니다.

4. 고난을 통해 주님밖에 없게 되고 주님과 친밀한 교제가 되고 최고의 행복을 얻게 됩니다. 

. 베드로 사도께서 여기가 좋사오니! 하듯이 주님으로 만족하게 됩니다. 그런 사람은 드디어 주님을 누리면서 이 좋으신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이 안타까워 복음을 전하든지, 가르치든지, 중보하든지, 권고하든지 합니다.

. 이런 사람을 안쓰시면 누구를 쓰시겠습니까! 깨어지고, 주님과 친밀해지고, 주님의 마음을 알고, 주님의 행복을 아는 사람을 쓰시는데 이때부터 상 받게 됩니다.

. 이로써 하나님을 섬길 때 상이 있습니다. 깨어져서 주님께 순복하고 굴복하고 역시 주님밖에 없구나! 주님이 최고구나 할 때 무슨 일을 하든지 가치가 있습니다

. 그가 주님과 어떤 관계이고 그가 주님을 어떻게 생각하고 주님께서 그를 어떤 은혜가운데 대해 주느냐에 따라 사역에 가치가 있는데 그때부터 진짜 주의 일입니다.

. 그래서 고난이 내게 유익입니다. 이런 고난이 없으면 형식적으로 살다가 주님과 친밀함을 한번도 맛도 못보고 갈등하고 고민하고 죄만 쌓다가 환난이나 심판때 서게 되면 그가 어떤 평가를 받겠습니까!

. 고난을 통해서 깨어져서 주님중심으로 주님을 제일로 생각하고 주님께서 시키신 일을 하게 될 때 이 고난은 행복의 첫걸음이고 영광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 구약이나 신약이나 누구든지 이런 과정을 겪게 하십니다. 지금 하나님과 친밀함, 그리고 이 밤에 주님과 친밀함을 누리고 친밀을 통해서 주님의 일에 동역하고 하늘에 어마어마한 상급을 쌓고 주님께 기쁨이 되어드리고 나는 너로 더불어 먹고 너는 나로 더불어 먹고 주님과 친밀한 교제를 통해서 주님과 풍성한 복락의 강수를 먹고 마시고 우리를 통해서 주님께서 큰 기쁨과 보람을 느끼시도록 주님도 우리를 누리시고 우리도 주님을 누리는 것이 친밀함을 통해서 오는 은혜입니다.

. 힘든 만큼 얻어지는 것이 너무나 많으니 기쁨으로 섬기게 하십니다. 항상 기쁨과 감사와 소망가운데 섬기게 해주시고 오늘도 주님과 친밀한 사귐을 통해서 주님의 은혜를 받으면서 주님께 쓰임받고 하다보면 피곤하기도 하지만 그에 비해 너무나 받은 은혜가 많으니 피곤이 삭감되는데 은혜가 없으면 피곤함이 부각됩니다.

. 시간이 간다고 되는 것이 아니고 늘 기도하고 고난을 통해서 나를 개조시켜서 주님과 친밀한 관계가 되면 어떤 일이든 행복속에서 하게 되고 지상천국이 되게 됩니다.

. 물론 힘들 수도 있지만 그때그때 힘을 주십니다. 오늘도 귀한 밤을 주셨는데 하나님과 만남이 은혜가 없을 때는 힘들고 부담스럽고 잘 만나지지도 않으나 경험한 사람은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 최고의 행복이라고 했습니다.

. 주의 일을 한 사람도 하나님을 만난 행복과는 다름을 경험한 사람들은 하나님과 만남이 최고라고 하고 기쁨으로 감사함으로 사랑함으로 감격하면서 주님을 섬기게 됩니다. 그러면서 피곤함이나 조금 힘든 것은 그렇게 중요치가 않고 피곤한 것은 그것에 비해 너무너무 큰 상급으로 갚아 주십니다.

. 이런 놀라운 행복이 지금도 이런 섭리가운데서 수많은 사람들이 낮아지고 깨어지고 고난받고 있는데 이런 사람들에게 임하기를 바랍니다. 아멘

고난은 친밀한 사랑과 영광을 위한 대가지불입니다 1 - 조호남 목사님


50:14~15 감사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며 지극히 높으신 자에게 네 서원을 갚으며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 아멘
  
1. 고난은 더 큰 은혜를 주시려는 변장된 축복입니다.
. 시대적인, 국가적인, 개인적인, 영적인 어려움, 힘듦, 육신의 질병 등을 환난이라고 합니다. 이런 모든 고통들은 주님께서 큰 그림 안에서 전체의 우리 인생을 보시면서 우리를 영광으로 인도해 주시기 위한 하나님의 인도의 한 부분이며 한 과정입니다.

. 119:67 고난 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

. 119:71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

.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의 학대를 받으며 고난중에 있을 때 하나님께 부르짖으니 모세를 보내어 빼내십니다.

. 풍요롭고 건강하면 잘 안믿다가 깨어지고 낮아질 때, 무너질 때, 겸손해질 때 이런 고난 때 대부분 예수님을 믿습니다. 주님께서 낮은대로 임하십니다.

. 고난당함이 내게 유익이라! 고난은 축복의 과정중에 하나입니다. 주 안에서 고난은 축복과 영광으로 이끌어 주기 위한 하나의 과정입니다.

. 큰 집을 짓기 위해 허술한 집을 부셔뜨리고 땅을 깊이 판다거나 하면 거기에 힘을 들이고 물자를 들이고 하는데 이는 큰 집을 짓는 하나의 과정입니다. 이를 보고 누가 헛고생한다고 하지 않습니다.

. 고난은 변장된 축복입니다. 겉으로는 고난 같으나 찢고 보면 축복이라는 것입니다.

. 주님께서 우리를 인도하실 때 주의 뜻대로 인도하시되 더 큰 은혜를 주실 때를 보면 우리를 낮추셔서 겸손케 하시고 낮아진데서 주님께 부르짖게 하시고 거기에서 치유를 주시든 새로운 길로 인도하시든 하십니다.

. 고난을 통해서 현재 나의 삶이 잘못된 길로 가고 있으면 바로 잡아 주시는 것도 은혜이고 잘못을 깨닫게 하셔서 회개시켜 주심도 은혜입니다.

. 또한 새로운 사명의 길로 인도하실 때 새로운 인생이나 주의 길이 완전히 무너지게 하시고 한쪽 문을 닫아놓고 새로운 길을 여십니다.

. 저도 고난을 통해서 예수님을 믿게 되었고, 고난을 통해서 기도하게 되고, 기도하다 보니까 주님의 은혜를 받고 응답을 받고 인도받고 하다가 주님과 친밀해졌습니다.

. 고난의 최종 결론은 주님과 친밀입니다. 고난은 너 나와 이야기 좀 하자는 기회를 제공해주시는 것입니다. 자기도 모르게 주님과 점점 멀어지는데 그러면 마귀와 가까워지게 됩니다. 주께 가까이 해야 복인데 평안하고 부요하면 주님과 더 멀어지니 사랑하는 자는 제동을 걸어 주님과 친밀하게 하십니다. 친밀해야 구원도 영광도 행복도 있습니다.

. 고난을 통해서 새 은혜, 큰 은혜를 얻게 됩니다. 강한 사람이 죽을 병에 걸려 금식하고 기도하고 그러다가 하나님의 놀라운 치유의 은혜를 받으면 새롭게 되는데 고난이 없었으면 주님께 매달리지도 않고 무미건조한 삶을 살았을 것입니다.

2. 고난을 통해 은혜를 받을 심령의 준비가 됩니다
. 23:10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 같이 나오리라.

. 하나님의 사람들은 고난을 통해서 새롭게 되고, 더 정결케, 더 아름답게, 친밀하게 됩니다. 새로운 은혜나 새로운 사역방향이나 팻턴이 바꿔집니다.
  
. 저도 크게 보면 불신앙의 삶에서 고난을 통해서 주님의 세계로 왔습니다. 저는 평안할 때는 마음이 높여져서 듣지 않고 성경도 보지 않으니 주님께서 은혜를 주실 상태가 되어 있지 않으니 낮추셔서 때가 되어 찾아오셨습니다.

. 주안에서 은혜의 단계를 걸어오다가 고난을 통해서 힘들어 기도하다보니 새로운 은혜로 말씀을 보내어 위경에서 건지신다고 새로운 사명을 주시고 기름부어 주셨는데 고난이 없었으면 간절히 하지 않습니다.

. 모든 것이 막히고 안되었습니다. 결국 낮아져서 내가 어떻게 하오리까! 항복하고 물었을 때 드디어 순종할 상태가 되고 마음의 정리가 되니 그때 말씀을 주셨는데 그전에는 제가 거부할 수 있으니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다른 길도 없고 더 이상 어떻게 할 수 없는 상태에서 주신 말씀이기에 소멸시킬 수가 없었는데 고난을 통해서 이렇게 하십니다.

. 모든 걸 고난을 통해 인도하십니다. 고난을 통해서 신앙이 성숙하게 됩니다.

. 욥도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고 고백하기를 전에는 귀로 듣기만 하였더니 이제는 눈으로 보나이다! 영적 수준이 달라지고 차원이 달라져 그러므로 이제 회개한다고 했습니다.

. 하나님을 만나기 전에는 거만한 태도로 하나님을 의심하고 너무한다고 하는 태도가 죄가 아닌 줄 알다가 주님을 만나게 되면 그것도 불충이었고 잘못이었고 죄였음을 깨닫게 됩니다.

. 고난은 축복과 영광의 길로 이끄시는 첫 관문이고 좁은 문입니다. 끝은 말할 수 없는 지극히 큰 영광입니다.

. 한약은 쓴데 그렇다고 독이 아니듯이 쓴 것이 고통이 아니고 약입니다. 들이키는 과정에서 순간 쓴 것이고 또한 쓴 것이 계속 가는 것이 아닙니다.

. 신앙의 고난은 우선 쓰니 뱉어버리는데 그것이 약이고 그것이 영광입니다. 정말 순종하고 겸손하고 낮아지는 자에게 주시는 테스트인데 거기에 힘들다고 다 물러갑니다.

. 금잔에 포도주 색깔로 번쩍 번쩍 빛나면 술맛이 당기겠지만 그것이 행복입니까! 세상영광은 순간 달콤한 것 같은데 그것이 독이고 신앙생활 안일함이 순간 달콤한 것 같으나 영원히 고난으로 들어갑니다.

. 아이들이 불량식품이 달콤하니 밥보다 더 좋아하는데 그것이 정말 영양식이 안되고 건강이 안되듯이 고난에는 그런 가치와 의미가 있습니다.


달란트 비유 - 충성된 종과 악한 종 2


5.  악하고 게으른 종의 태도와 행동
18절 “한 달란트 받은 자는 가서 땅을 파고 그 주인의 돈을 감추어 두었더니”
24-25 “한 달란트 받았던 자도 와서 가로되 주여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 심지 않은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데서 모으는 줄을 내가 알았으므로 두려워하여 나가서 당신의 달란트를 땅에 감추어 두었었나이다 보소서 당신의 것을 받으셨나이다”

1) 이 종에 대한 주인의 평가는 이 종이 “악하고 게으르다”는 것이다. 악한 것이 착한 것의 반대라면, 게으른 것은 충성된 것의 반대이다. 착한 사람이 충성되다면, 악한 사람은 게으르다.

2) 이 악한 종의 주인에 대한 오해는 자신의 악한 성품에서 비롯된 것이다. 일반적으로 착한 사람은 악인을 평가하는 일에도 조심한다. 그러나 악인은 착하고 관대한 사람까지도 자신의 악의 기준으로 평가하고 비난한다. 선한 사람은 자기 마음에 쌓은 선에서 선을 내고, 악한 사람은 자신이 마음에 쌓아 놓은 악에서 악을 분출한다.

이 종은 주인을 “굳은 사람”, 즉 엄하고 잔인한 사람으로 평가했다. 그래서 그는 주인에게 “나는 당신을 두려워합니다” 라고 말하고 있다. 이러한 악평이 다른 종들에 비해 비교적 적은 “한 달란트”를 받았기 때문이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이 종이 주인을 “엄하고 무서운 사람”으로 평가한 자신만의 근거를 분명히 밝히고 있다.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을 내가 알았으므로”

이 종은 주인을 마치 불로소득을 취하는 사람으로 이해하고 있다. 주인 자신은 흩어 심지도 않으면서 모아 거두어 들인다는 불평이다. 자신은 투자도 않고, 또 아무 노력도 하지 않고 이익을 취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27절 본전과 이자에 대한 언급은 바로 이 종의 악한 평가에 대한 지극히 정당한 주인의 주장이다. “그러면 네가 마땅히 내 돈을 취리하는 자들에게나 두었다가 나로 돌아와서 내 본전과 변리를 받게 할 것이니라”

그럼 이 종의 숨은 악한 의도는 무엇이었는가? 이 종은 게으른 종이었기 때문에 주인을 위해 노력할 생각이 없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리고 자신의 게으름과 악함을 정당화시키기 위해 반대로 주인을 악평했다. 이 종은 행동에서 그의 악한 의도를 발견할 수 있다. “한 달란트 받은 자는 가서 땅을 파고 그 주인의 돈을 감추어 두었더니” 이 종은 주인의 달란트, 즉 소유가 증가하지 못하도록 의도적으로 감추어 두었다. 이 종은 주인의 소유가 증가하는 것을 원하지도 않았을 뿐만 아니라 증가하는 것을 방해하고도 싶었던 것이다. 이 종은 자기가 맡은 달란트를 여러  번 “당신의 것”이라고 표현하고 있다(18절 “그 주인의 돈”, 25절 “당신의 달란트”, 당신의 것”). 다시 말하면 이 악한 종은 자신이 아무리 고생하며 일을 해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주인의 것이지 자신의 것이 될 수는 없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다.

3) 드러난 악하고 게으른 종의 성품
첫째, 이 종은 이기적이다. 자기에게 직접 이익이 되지 아니면 일하지 않는다. 주인의 이익을 위해서도 일하지 않는다. 자기에게 직접 이익이 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와 선교를 위해서 일하지 않는 이기적이고 세속적인 그리스도인들이 여기에 해당한다. 자신의 재산 축적을 위해서는 물불을 가리지 않으면서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해서는 아무런 희생도 하려고 하지 않는 교인들과 교회들이 얼마나 많은가!

둘째, 이 종은 자신의 신분을 망각하고 있다. 이 종은 어디까지나 주인을 위해서 일해야 하는 존재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인을 위해 순순히 일할 의사가 없다. 자신을 하나님을 위해 기꺼히 헌신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헌신하지 않고, 오히려 자기 유익을 위해 하나님을 이용하려 들고, 하나님을 제 맘대로 평가하는 위선적인 그리스도인이 여기에 속한다.

셋째, 이 종의 성품과 속성은 불순종이다. 처음부터 주인에게 순종하려는 의사가 전혀 없다. 그래서 자기에게 있는 재능과 사명과 시간을 낭비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주신 재능과 사명과 시간을 하나님 나라의 확장에 사용할 의사가 전혀 없는 허울 뿐인 그리스도인이 여기에 해당한다.

넷째, 이 종은 불평을 일삼고 있다. 심지어 주인을 악평하고 있다.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하나님마저도 악평하는 사람들이 여기에 속한다.

6.  결론 및 적용
1) 본문은 단지 세상에서 자기 재능을 마음껏 활용하고 발전시키라는 메시지가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이미 받은 재능과 능력을 가지고, 하나님으로부터 부여 받은 사명, 즉 하나님 나라를 확장시켜 하나님의 유익을 도모하라는 명령이다.

2) 본문은 착하고 충성된 그리스도인들과 교회들에게는 축복과 위로의 메시지이다. 반면 악하고 게으른 그리스도인들과 교회들에게는 경고의 메시지이다.

3) 악하고 게으른 종과 착하고 충성된 종의 차이는 행동의 차이를 넘어 성품과 태도의 차이이다. 그리스도인의 삶과 사역(또는 교회)에 열매와 유익을 초래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받은 재능이 아니다. 또한 받은 달란트(위탁받은 사명)도 아니다. 이것은 누구에게나 동일하게 주어지는 것이다. 재능이나 받은 사명은 악하고 게으른 종에게도 주어졌다. 결국 하나님 나라에 유익을 초래하는 것은 착하고 충성스러운 성품이다. 그리고 이러한 어떠한 성품도 한 순간에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전체 삶을 통해서 형성되며, 그것은 곧 그 인간 됨됨이 자체가 된다.

불순종하는 자는 습관적으로 불순종한다. 악하고 게으른 자는 자신이 평상시 그렇게 살면서 쌓은 습관에서 그렇게 악하고 게으르다.

우리가 본받고자 하는 것은 본문에서 말하는 착하고 충성된 자의 모습이다. 그는 즉각적으로 충성하였는데, 그 즉각적인 충성도 한 순간에 갑작스럽게 이루어진 것은 결코 아니다. 불순종이 몸에 베인 사람은 절대로 즉각적인 순종과 지속적인 순종을 하지 못한다. 순종이 습관화되고 몸에 베인 사람이 어떤 명령이 주어졌을 때 즉각적으로 순종할 수 있는 것이다. 착하고 충성된 종이란 표현은 바로 변함없이 순종적인 이 종들의 삶의 태도를 보여준다.

주 하나님께서 무슨 일을 맡기시든, 어떠한 희생을 요구하든 자신의 유익을 생각하지 않고, 주인의 유익을 위하는 착하고 충성하는 종, 바로 그런 종이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달란트 비유 - 충성된 종과 악한 종 1


1. 서론
달란트는 무엇인가? 성경의 달란트가 영어로는 재능을 뜻하는 talent이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달란트를 와전된 뜻인 ‘재능’으로 이해하고 있다. 본래 달란트는 무게를 재는 단위이다. 각 나라마다 차이가 있었지만, 이스라엘을 기준으로 보았을 때 한 달란트는 36kg에 해당된다.

성경에서 달란트는 분명히 ‘재능’이란 의미보다는 단순히 중량을 재는 단위로써 36kg을 의미한다. 만일 본문에서 달란트가 일반적인 의미로 ‘재능’을 의미하고, 본문에서 재능을 더욱 개발하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면 그것은 단순히 그리스도인에게 해당되지 않고, 모든 불신자 세계를 향해 하시는말씀처럼 이해될 수도 있다. 물론 본문의 달란트 비유에서 재능에 대한 언급이 있으며, 또 재능을 개발하면 할수록 더 뛰어난 재능을 소요하게 된다는 점에서 잘 부합하는 면이 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간과하는 것은 달란트 앞에 붙는 명사와 수사이다. 성경에서는 분명히 “금 한 달란트” 혹은 “금 두 달란트” 등으로 구체적으로 그 가치를 분명히 하고 있다.

달란트는 금의 무게만을 재는 단위가 아니라 ‘은’ 또는 ‘동’을 재는 단위로도 사용될 수 있다. 금 한 달란트와 은 한 달란트의 가치는 엄청나게 크다. 또 금 한 달란트는 금 36kg이며, 예수님 당시에 금 한 달란트를 품 삯으로 계산했을 때는 6,000 데나리온(6000일에 해당하는 품 삯)이었다. 따라서 금 한 달란트는 실제로 엄청난 액수이다. 오늘날 하루 평균 품삯을 6,000에 곱한다면 수 억원에 이른다. 따라서 달란트를 받은 세 명의 종들 중에서 자기가 받은 것이 작다고 불평할 수 있는 입장에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2.천국에 대한 비유이다.
천국은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방법이며, 당신의 뜻과 계획을 성취해 가시는 현장을 의미한다. 예수님은 천국을 “주인이 종에게 자기 소유를 맡겨 그 종들을 통해 소유와 이익을 증가시켜 가시는 것으로, 또 결국은 자기의 모든 소유를 자기의 종들에게 완전히 위탁하시는 것”으로 비유하신 것이다.

3. 달란트 비유에서 우리가 중요하게 다루어야 하는 세부 사항들은 아주 많다.
1) 주인은 종들에게 각각 그 재능대로 나누어 주었다.
“재능대로” 주었다는 의미는 그의 역량으로 감당할 수 없을 정도의 부담을 주지 않았다는 말이다. 그리고 주인은 종의 재능 이상으로 종으로부터 무리한 것을 요구하지도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2) 금 한 달란트를 받은 종을 비롯해서 모든 종들에게 주인은 대단히 관대할 뿐만 아니라 그 어떤 것도 아끼지 않고 자신의 전부를 맡겨 주었다. 주인은 결코 마음이 좁은 사람이 아니며, 종들을 완전히 신뢰하는 사람이었다.

3) 19절 “오랜 후에 그 종들의 주인이 돌아와 저희와 회계할새” 주인이 종들에게 일단 소유를 맡긴 기간은 “주인이(자신이) 돌아올 때까지”였다. 주인이 돌아와서 결산을 하리라는 것은 기정 사실이다. 주인은 종들에게 충분한 시간과 기회를 주기 위해 “오랜 후”에 돌아왔다. 주인은 종들에게 엄청난 거금을, 그것도 자신의 모든 소유를 다 나누어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오랫 동안 완전히 종들에게 위탁하고 떠나 있었다. 이것은 한 달란트 받은 종의 악평과 완전히 반대되는 모습이다. 이 주인은 자기의 것을 맡기고도 안절부절 못하고 쩔쩔매는 속 좁고 째째한 성품의 소유자가 아니었다. 이 주인은 대단히 관대하고 도량이 넓고 큰 마음의 소유자이다.

4) 주인은 종들에게 구체적으로 어떻게 그 달란트를 가지고 이용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일체 언급하지 않았다. 종들의 자유로운 선택과 결정, 개인의 능력과 재량에 완전히 맡긴 것이다. 이것은 종들이 주인으로부터 자기들이 받은 달란트를 마치 주인처럼 사용할 수 있는 특권과 영광을 준 것이다. 이것은 종들이 주인의 위치에서 주인을 대신하여 주인의 소유를 사용한다는 의미로 이해될 수 있다. 이것은 주인의식과 책임감을 주는 것이기도 하지만, 그보다 주인이 되어 보는 특권과 영광을 받았다는 의미가 더 크다고 할 수 있다.

4. “착하고 충성된 종”의 태도와 행동
1) 두 착한 종은 즉각적으로 순종했다. 
“바로 가서 장사하여” 배를 남겼다. 두 종들의 즉각적인 순종에서 무엇을 발견해야 하는가? 일일이 변명하고 따지지 않는 순수하고 착한 마음, 맡겨주신 사명에 감사하며 충성하는 성품을 발견하게 된다. 본문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두 배로 남긴 재능과 능력이 아니라 착한 종들의 사람 됨됨이와 악한 종의 성품을 대조하여 알려 주려는 것이다. 한 달란트 받은 종도 충분히 한 달란트를 더 남길 수 있는 재능이 있었다.

2) 충성된 두 종에게 주어진 동일한 칭찬의 내용은 동일한 것이다.
 21, 23절 “그 주인이 이르되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하고”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는 칭찬은 종들의 행동으로 드러난 것이지만, 그들의 행동을 칭찬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됨됨이를 칭찬한 말이다. “착하다” 그리고 “충성되다”는 표현으로 종들의 모든 좋은 성품을 표현한 것이다. 주인의 기쁨은 이들이 남긴 달란트 때문이 아니라 자기에게 이렇게 소중한 착하고 충성된 종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종들에게 한 달란트 한 달란트는 엄청난 것이라고 여겨지겠지만, 주인의 관심은 종들에게 있었기 때문에 달란트를 남기는 일을 작은 일로 표현하고 있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착하고 충성된 자들의 충성에 대한 보답은 더 많은 것을 맡기는 것이다. 주인은 남긴 달란트마저 다 종들에게 맡겨 주었다. 주인은 자신의 소유 전부를 충성된 종들에게 넘겨 준 것이다. 주인은 단지 그 충성된 종을 소유한 기쁨으로 만족해 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주인의 상급은 다음에 주는 주인의 보답보다 결코 큰 것이 아니다.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이 표현은 주인이 가진 즐거움, 즉 주인처럼(또는 주인이 되어) 주인의 것을 완전히 자기의 것으로 주인과 함께 소유하고 누리는 즐거움을 의미한다. 주인의 즐거움은 증가한 이익 때문이 아니라 충성된 종을 소유한 것 때문이듯이, 종들의 즐거움 또한 착하고 관대하며, 자기들을 완전히 알아주고 신뢰하는 주인을 소유하는 즐거움이다

예수의 종이 되는 것은 그의 친구가 되는 길


(servant)이란 주인에게 예속되어 있는 사람이다. 종에게는 자신의 개인적인 삶이나 소유가 있을수 없다. 최악의 경우에는 전쟁 포로에 의해 노예가 되는 경우도 있고, 가난과 굶주림을 모면하기 위해 스스로 자신의 생명을 의탁하며 종이 되는 경우도 있다. 신분은 세습되는 경우가 흔하게 발생한다.

성경에서 종은 일반적인 개념으로서 주인에게 속하여 주인을 섬기는 자이다. 종에게 자신의 개인적인 삶이 보장된 것은 아니지만, 청지기의 경우에는 자발적으로 주인의 뜻을 이해하고 수행하는 자이다. 하나님과 그를 섬기는 그리스도인의 관계는 주인과 종의 관계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일반적인 책임을 지시해 두셨다. 거룩하고 의로우며 선하고 진실하며 충성되고 자비로운 삶을 명령하셨으며, 하나님 나라의 확장과 복음 전파의 사명을 맡겨 놓으셨다. 하나님의 명령에 종인 그리스도인들이 순종을 할 것인가 말 것인가, 어느 정도 충성을 할 것인가는 순전히 우리의 자발적인 태도에 맡겨 놓으셨다.

하나님의 종으로서 가장 좋은 보여준 것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뜻에 자발적으로 철저히 순종하는 삶을 사셨다. 그는 하나님의 창조의 권능과 지혜의 말씀으로서의 영광을 버리고 인간이 되셨다. 그는 평생을 가난하게 살았고, 가난한 자들의 친구가 되어 그들을 치료하고, 그들에게 복음을 전했다. 최종적으로는 자신의 생명을 내어주기까지 사람들을 사랑했으며, 하나님께 순종했다.

선지자들과 사도들은 하나님의 충성된 종으로서 어떠한 자세로 하나님께 순종하고 충성해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본보기들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종이었기 때문에 자신들의 행복과 평안한 삶을 포기해야 했다. 심지어는 자신의 재산을 포기해야 했으며, 때로는 가족을 희생해야 했다. 가난과 매맞음과 온갖 종류의 고난도 감수해야 했다.

오늘날 수 많은 일반 그리스도인들과 목회자들이 자신을 하나님의 종으로 부른다. 그 중에 하나님을 신실하게 섬기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이 분명하다. 그런데 대개 하나님의신실한 종들은 자신을 하나님의 종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다만 묵묵히 순종하며 봉사할 뿐이다. 정작 자신을 '하나님의 종'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은 이전에 예수 그리스도와 선지자들과 사도들이 보여주었던 그들의 권위와 영광을 은밀히 탐내고 있는지도 모른다. 자신을 하나님의 종이라고 부른다면 그에 상응하는 삶이 필요한데, 자신을 하나님의 종이라고 부르면서 다른 사람들 위에서 권세를 부리는 것은 종의 자세가 아니다.

종에게 특권과 영광이 없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의 종이라면 하나님께 속해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보호와 사랑과 돌봄 가운데 살아간다. 주인인 하나님께 속해 있다고 하는 것만큼 놀라운 특권과 영광은 있을 수 없다.

하지만 종의 개념에 있어서 먼저 생각해야 할 것은 특권과 영광이 아니다. 왜냐하면 불순종하고 게으로고 부정직한 종은 순종적이고 착하고 충성스러운 종이 누릴 수 있는 특권과 영광을 함께 누릴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종에 대해 가장 먼저 생각해야 할 점은 특권과 영광이 아니라 현재 주인앞에서 어떻게 살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착하고 충성스러운 종은 항상 섬김 준비가 우선적으로 되어 있다. 허리에 띠를 띠고 서서 대기하고 있는 자세가 충성된 종의 자세이다.

착한 종은 자신의 영광을 생각하지 않고 주인의 영광을 생각한다. 주인의 영광을 위하여 자신은 멸시를 받는 낮은 곳에서 섬긴다. 주인의 이익을 위해 자신은 고통스러운 희생을 감수한다. 종이 만일 섬기는 자리를 버리고 섬김을 받는 자리를 은밀히 추구한다면 그것은 반역에 가까운 행위이다. 주인과 동등해지려는 태도이다. 우리 그리스도인이 잊어서는 안될 가장 중요한 사항은 하나님의 종은 하나님만을 섬기기 위해 부름을 받은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섬기면서 동시에 이 세상 사람들을 섬기는 종으로 부름을 받았다.

10:45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예수님의 삶은 교훈이 아니라 실제이다. 그는 하나님으로서 이 세상에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으로 오셔서 자신이 창조한 피조물을 섬기셨으며, 자신을 반역하고 불순종한 죄인인 우리들을 위해 자신의 생명을 내어 주셨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사람을 섬기는 것을 자신을 섬기는 것으로 인정하신다.

우리가 하나님을 섬길 수 있는 방법은 다른 사람들을 섬기는 것이다. 그것도 우리 자신보다 못하고 추악한 사람들까지 봉사하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의 죄성 때문에 인정하고 싶지 않은 것이지만, 성경이 말하는 진리이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것은 우리가 소위 말하는 일회성의 의식적인 "세족식"을 거행하라고 보여준 본이 아니라, 우리 삶 전체로 다른 사람을 섬기라고 보여준 본보기였다( 13:4-8).

그리스도는 죄인을 섬기기 위해 자신을 비우셨다. 자신의 영광과 특권을 버리고 조롱받고 멸시받고 고통받는 종의 자리로 내려 오신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배워야 할 단순한 교훈이나 교리가 아니라 우리가 따라야 할 거룩한 삶이다. 사도 바울을 비롯한 모든 사도들은 이러한 그리스도의 삶을 그대로 따르며, 자신을 하나님의 종으로 선포하였다. "우리가 우리를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주 되신 것과 또 예수를 위하여 우리가 너희의 종 된 것을 전파함이라"(고후 4:5).

사실 우리가 우리와 동등한 다른 사람이나 우리보다 열등하다고 생각되는 다른 사람에게 "내가 당신을 섬기는 당신의 종입니다" 라고 말하는 것은 굴욕적인 것이다. 이것은 도저히 하고 싶지 않은 극도로 불쾌한 것이다. 그러나 사도들은 자신들이 복음을 전파하는 사람들의 종이라고 전파하였다. 한 두 번 입으로 중얼거린 것이 아니라 가는 곳마다 광대한 지역에 전파하였다고 말한 것이다. 이러한 종의 자세는 항상 불편하고 고되고 피곤하고 겸손한 태도를 필요로 한다. 안정되고 평안하고 부유하고 고상하고 영광스럽고 다른 사람의 위에서 군림하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다. 언제든 일하며 섬길 수 있는 복장과 마음가짐과 환경과 태도를 필요로 한다.

이것은 성경 자체가 말하는 것이지만,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에게 거부감을 줄만큼 받아들이고 순종하기 쉽지 않은 명령이다. 이러한 말씀에 얼마든지 반론을 제기하고 싶을 것이다. 성경은 우리가 "하나님의 종"이라고만 말하지 않고, "하나님의 자녀"라고도 말한다. 또한 "하나님의 친구"(예수 그리스도께서 요 15:13-15에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것처럼)라고까지도 말한다고 할지도 모른다.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나니 너희가 나의 명하는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라하리니 종은 주인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니라"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 제자들과 우리들에게 "나의 친구"라고 부르시는데에는 하나의 조건이 있다. 그것은 "나의 명령하는 대로 행하면"이다. 그리고 그 명령은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는 것이다. 그 사랑은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는 것이기도 하다. 예수님이 사랑받을 자격이 없는 죄인인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우리도 다른 형제 자매들을 거룩하게 사랑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들을 위해 종이 되신 것처럼 우리도 종이 되는 것이다.

친구란 흔히 동고동락하며, 친구를 아끼고 사랑하며, 자신의 것을 희생하며 주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의 친구이다"라고 말했던 것도 바로 제자들의 예수님께 대한 사랑과 헌신과 충성을 보셨기 때문이다. 제자들은 자신의 안정된 삶을 포기하고 예수님의 부르심에 순종했으며,예수님의 가난과 멸시와 모든 고난에 동참한 사람들로, 예수님을 가장 잘 아는 친구들이었다.

따라서 제자들과 예수님과의 관계는 "주인과 종" "친구"로 승화된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종이라고 말할 때, 그 종이 누리는 모든 특권과 영광,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녀와 친구로 승화되는 것은 먼저 그 만큼의 헌신과 사랑과 충성을 전제로 한다. 현재의 삶의 위치가 섬기는데 있지 않고, 도리여 영광과 특권을 누리는 위치에 있다면, 그 종은 십중팔구 악하고 게으른 불충성스러운 종일 것이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종으로 낮고 멸시받고 모욕받는 굴욕적인 위치에서 하나님과 세상 사람들을 섬기더라도 하나님의 종으로서 장차 누릴 완전하고 충만한 특권과 영광에는 아무런 피해가 되지 않는다. 오히려 이 세상에서 낮고 멸시받는 위치에서 충성스럽게 섬길수록 나중의 영광은 더욱 증대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허리에 띠를 띠고 섬길 준비를 하라!" 낮은 곳에 서며, 굴욕적인 섬김의 자리에서 기쁨과 선한 마음으로 봉사하라!

믿음과 행위, 구원과 행위와의 관계 2


구약의 가르침과 신약의 가르침은 하나도 상충되고 모순되는 것이 없다.
심지어는 율법도 복음과 대립적이지 않다. 율법은 몽학선생이 되어 하나님의 복음을 받아들이도록 사람들에게 죄를 깨우치고, 하나님의 의가 무엇인지를 가르쳐 준다. 신약에서 폐기된 것처럼 보이는 구약의 율법 의식들도 실은 폐기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되었다.

그것들은 단지 그림자였는데, 실체인 예수 그리스도가 오셔서 성취되고 완성된 것이다. 이것을 특별히 언급하는 것은 구약에서 이신칭의에 대립되는 행위 구원을 강조한 것처럼 보이는 구절이 많이 있다는 것을 주지시키기 위한 것이다. 신구약 전체를 통해서 하나님은 사람들의 믿음 못지 않게 행위에 관심을 가지고 계시며, 그의 모든 심판의 근거는 사람들의 행위에 의한 것이다.

에스겔 3:17-21 “…... 또 의인이 그 의에서 돌이켜 악을 행할 때에는 이미 행한 그 의는 기억할 바 아니라 …… ” 의인이 타락하는 것은 구약만의 특별한 사건이 아니다. 신약에서도 분명하게 다루어지는 사건이다. 행위가 심판의 기준이라면 구원에 있어서도 그만큼 중요한 역할을 감당하고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내가 말하는 행위란 은혜와 믿음이 배제된 행위를 의미하지 않는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된다.

“너희 의가 바리새인과 서기관보다 더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5:2)

4.  믿음과 행위와의 관계
믿음이란? 넓은 의미에서 그리스도인의 믿음을 정의한다면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체험하여 그의 신실하심과 선하심을 알고 하나님을 신뢰하여 그분께 자신의 모든 것을 의탁하고 맡기며, 그분으로부터 모든 것을 의지하고 바라며 그분의 도우심으로 사는 것을 의미한다( 6:25-34). 구체적이고 적극적인 의미에서 믿음은 보지 못하는 것을 확신하며 바라고 기대하는 것을 성취하는 것이다( 11:1).

믿음이 하나님의 선물인 것은 분명하지만, 믿음은 단순히 하나님의 존재와 구원을 처음으로 인정하고 받아들일 때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의 삶의 전반에서 필요로 하는 것이다.

11:1을믿음으로 정의하든, 믿음의 성격으로 정의하든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분명한 것은 믿음이란 서로에 대한 신뢰와 사랑의 관계를 떠나서는 생각할 수 없으며, 믿음은 항상 지적이고 의지적인 것을 뛰어넘어 위대한 결과를 초래하는 행위를 씨앗처럼 품고 있다는 점이 중요하다. 결실로 드러나지 않는 믿음은 죽은 것이다.

야고보서에서 보는 것처럼 성경은 항상 행위가 없는 죽은 믿음에 대해 경고하고 있다. 야고보 사도가 말하는 것처럼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고 순종하여 이삭을 번제로 드린 것은 그의 믿음에 생명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믿음이 반드시 어떠한 행동으로 나타나지 않는 경우도 수 없이 많지만 결국에 그 믿음의 성취를 체험한다는 점에서 생명력이 있다.

아브라함이 백 세가 되어서 이삭을 받은 것은 신실하신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것뿐만 아니라 그것을 기다리는 그의 삶으로 나타난다. 그리스도인의 믿음은 삶의 세세한 행동의 발자취로 구성된다.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살았다는 것, 의인이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삶의 모든 발차취가 믿음에 의해서 옮겨진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삶의 개별적인 발자취가 모두 구원과 직접 관련을 갖는 것은 아니지만, 삶의 총체적인 발자취는 그의 삶의 목표와 방향, 즉 구원을 결정짓는다. 우리가 좁은 길을 가다가 잠시 길을 벗어난다고 구원을 잃어버리지는 않지만, 아예 좁은 길을 벗어나서 넓은 길로 간다면 절대로 구원에 이르지 못한다. 심지어는 한 편 십자가에서 그리스도의 자비와 구원을 간청한 강도도 그 구원의 서정이 극도로 짧았을지라도 많은 사람들이 선택한 길을 버리고 이 좁은 길을 통과한 것임은 분명하다.

인간의 선한 행위는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신 목적이다. 하나님께서 선한 분이시기 때문에 인간은 당연히 하나님을 복종하며,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의로운 삶을 살아야 한다. 하나님은 인간을 자신의 형상으로 창조하셨기 때문에 인간은 하나님을 복종하는 한 그 자체로 선한 존재였다. 그리고 인간의 선한 행위란 하나님을 닮은 존재로서 사는 것이며, 또한 하나님을 전적으로 사랑하며, 전적으로 복종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복종하지 않고 행해지는 선한 행위란 있을 수 없으며, 하나님을 닮지 않은 선한 존재도 있을 수 없다. 인간의 삶 자체는 하나님의 형상이어야 하며, 하나님을 닮은 선한 삶을 살아갈 때 하나님은 기뻐하시며 영광을 받으신다. 이 때문에 하나님께 대한 불복종은 단지 그가 단 한 가지 죄를 지었는데 하나님께서 잔인하게 자신의 의로우심을 기준으로 하여 심판하시고 형벌하시는 것이 아니라 인간 안에 있는 선한 하나님의 형상의 파괴와 타락이라는 점에서 엄청난 결과를 초래한 것이다.

따라서 모든 인간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든 아니든, 그리스도인이든 불교인이든 무슬림이든 미신을 믿는 존재이든, 심지어는 무신론자라 할지라도 모두가 선한 행위를 해야 한다. 그것은 물론 구원을 받기 전이든, 구원을 받은 이후이든 하나님의 선한 형상인 인간이라면 마땅히 선한 행위를 해야 한다. 하지만 선한 행위, 즉 믿음의 열매가 없이는 구원도 없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선한 행위가 없다는 것은 그 자체가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을 거스르는 것이며, 하나님을 배반하고 있는 것이다.

5.   행위와 심판
5:20 “너희 의가 바리새인과 서기관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본문은 이신칭의를 다루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의, 즉 성도의 인격과 삶이 얼마나 높은 수준이어야 하는지를 말하는 것이다. 바리새인과 서기관의 의는 구원에 도달하지 못하는 기준이 되고 있다. 성도가 구원에 이르는 의는 최소한 바리새인과 서기관의 의보다 더 나아야 한다. 바꾸어 말하면 바리새인과 서기관의 위선적인 인격과 삶보다 못한 성도는 참 성도라고 볼 수도 없는 것이다.

산상수훈을 비롯한 신구약 모든 성경이 말하는 진정한 성도의 기준은 인격과 삶을 통해서 나타난다.

24:3-6 “여호와의 산에 오를 자 누구며 그 거룩한 곳에 설 자가 누군고 곧 손이 깨끗하며 마음이 청결하며 뜻을 허무한데 두지 아니하며 거짓 맹세치 아니하는 자로다 저는 여호와께 복을 받고 구원의 하나님께 의를 얻으리니 이는 여호와를 찾는 족속이요 야곱의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자로다”

2:6-8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대로 보응하시되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시고 오직 당을 지어 진리를 좇지 아니하고 불의를 좇는 자에게는 노와 분으로 하시리라” 심판과 보응이 각 사람의 행위에 따라 이루어질 것이라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다.

2:6-8이 말하는 것처럼 평생 각자가 추구하는 삶에 대한 심판과 보응은 단지 불신자들에게만 시행되는 것이 아니라 성도라고 하는 사람들에게도 동일하게 시행된다. 성경이 이신칭의를 언급하지 않고 삶을 언급하는 부분에서 이신칭의 교리만 주장하는 사람들은 신앙의 초보에서 더 이상 진보하지 않는 사람들이다. 의롭다고 일컬음을 받은 성도에게 중요한 것은 칭의를 선고받은 그 상태로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기까지 성장해 가는 것이다. 심판은 내면의 상태와 인격의 모든 비밀을 드러내고, 모든 행위를 달아보는 것이다. 아무런 생각이나 행위가 없이는 심판도 보응도 없다.

심판의 기준은 다음과 같다.
첫째, 불신자들에게는 불신과 양심과 악행이 심판의 기준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하며 죄를 회개치 않는 죄인들에 대한 심판은 기정 사실이다( 2:18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불신자들의 죄에 대한 심판은 그들의 양심과 행동이 근거가 된다. 2:14-15 “율법 없는 이방인이 본성으로 율법의 일을 행할 때는 이 사람은 율법이 없어도 자기가 자기에게 율법이 되나니 이런 이들은 양심이 증거가 되어 그 생각들이 서로 혹은 송사하며 혹은 변명하여 그 마음에 새긴 율법의 행위를 나타내느니라”

둘째, 그리스도인이라 하는 자들에게는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삶을 따르는 인격과 삶이 심판의 기준이 된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사람들 알에서 시인(고백)하지도 않고, 자기를 부인하며 십자가를 지고 그리스도를 따르지 않는 형식적이고 외선적인 그리스도인들도 심판을 피할 수 없다.

심판과 보응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반응과 믿음에 대해서만 집행되는 것이 아니라 인격과 삶에 대해 집행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구원이 이신칭의에만 관련이 있는 것이 니라 믿음 이후의 인격과 삶과도 깊은 관련이 있다.

6.   결론
믿음과 행위, 이신칭의와 행위, 구원과 행위를 간략하게 살펴보았다. 행위의 문제는 어느 것 하나와도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처럼 조화되는 관계이다. 문제는 사람들이 무엇을 어떻게 어떤 관점에서 강조하느냐에 따라 결과가 상당히 다르게 보일 수 있다. 이러한 위험을 피하는 방법은 조화와 균형이 이루어지는 방법을 찾는 것이다.

천국은 그리스도의 피를 통하여 거룩해졌을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거룩한 삶을 산 사람들로 이루어진 곳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의로워지지 않은 성도를 생각할 수 없는 것처럼, 거룩한 삶을 살지 않는 성도를 생각할 수 없다.

율법과 율법주의를 혼동할 필요가 없다. 율법은 성도들의 삶에 여전히 선악을 구별하고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의로우심의 기준을 알려주고 인도하는 표준이다. 하지만 율법은 그리스도의 인격과 삶에 비하면 초보적인 것에 불과하다.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높아짐을 위하여 낮아지셨고, 우리의 부하게 됨을 위해 가난해지셨고, 우리의 구원을 위해 고난을 당하셨다. 우리가 진실하게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다면 우리는 세상을 향한 욕심과 야욕, 쾌락과 안일함, 세상 영광의 추구를 배설물처럼 던져버리고, 단호히 그리스도를 따르는 거룩한 삶을 통해 구원을 성취해 나가야 한다.

말세에 재물축적과 세상의 안락에 눈 멀어 삼손처럼 모욕당하는 일이 없어야 한다. 재산도 많고 성도도 많아서 나는 부자다 부족한 것이 없다고 자만과 무지에 빠진 라오디게아 교회처럼 영적 소경이 되어서는 안된다. 안티그리스도들에게 치부가 드러나 처참하게 짓밟히고 비난당하는 무기력한 교회가 되어서는 안된다. 하나님의 마음도 이해하지 못하고, 하나님께 대한 처음 사랑과 충성도 팽개쳐 버려 더 이상 교회라고 받아들여지지 않는 교회가 되어서는 안된다. 세상과 음란하게 짝하고 세속화되어 실상 죽어 있는 교회가 되어서도 안된다.

하나님은 촛대를 옮기시는 분이시다. 하나님은 성도의 믿음만 살피시는 분이 아니라 또한 행위를 살피시는 분이시다. 특별히 목회자인 우리는 믿음을 가지고 삶의 현장으로 나가야 한다. 그리고 바울처럼 다른 사람의 구원을 도모할 뿐만 아니라 자신의 구원과 쓰임받음을 위해서도 절제해야 한다.

 “그러므로 내가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 것 같이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 같이 아니하여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로라” 고전 9:26-27에서 바울의 외침은 구원의 확신이 흔들리는 데서 오는 두려움이 아니라는 것을 명심하라! 목회자들이 복음을 전하고 설교를 중요한 일과로 삼으면서도 복음에 합당치 않게 살 수 있다는 것을 경고하고 있다.

죽음에 이르도록 충성하라는 것은 유대인들의 율법주의가 아니라 성경의 최고의 가르침이다. 주님이 오늘날에도 교회의 온전한 모습과 온전한 구원을 위해서 하시는 음성이 있다면 그것은 회개하라는 것이다.

회개하라는 외침은 단지 불신자들에게만 들려져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리스도의 삶을 진실되게 따르지 않는 모든 성도와 목회자들과 신학자들과 교회들은 회개해야 한다. 처음 사랑을 회복하고, 거룩하고 정결하며 충성된 증인이신 그리스도의 삶의 발자취를 따르며, 열심을 내어 죽도록 충성해야 한다.

하나님은 순종하지 않는 사람, 행함이 없는 사람을 결코 사용하지 않으실 것이다. 주인의 마음을 잘 알고 착한 마음으로 충성하는 종들만이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하게 될 것이다.

교회는 모든 성도들이 가장 영광스러운 칭찬과 보응을 받도록 더욱 낮아짐과, 더욱 가난해짐과, 복음과 예수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에 참여하도록 가르쳐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