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2/2011

예언적인 꿈과 환상의 유형들

“하나님이 가라사대 말세에 내가 내 영으로 모든 육체에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는 꿈을 꾸리라”(행 2:17).

마지막 때에는 예언과 더불어 꿈과 환상이 교회와 성도들에게 충만하게 될 것이다. 주님의 음성을 잘 듣기 위해 예언적인 꿈과 환상에는 어떤 유형들이 있는지 살펴보자.

1. 환상의 유형들
환상은 꿈과 달리 잠이 든 상태가 아닌 의식이 깨어 있는 중에 받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이 체험하는 환상에는 ‘내적 환상’과 ‘열린 환상’, 이렇게 두 가지 기본적 유형이 있다.

내적 환상
내적인 환상은 주변에 있는 사물들 같이 실제로 보이는 것처럼 강력하게 느껴지지는 않지만 마음에 그려보는 어떤 것과 같다. 내적 환상에는 ‘영적인 환상’과 ‘비몽사몽간의 환상’ 두 가지 형태가 있다.

(1) 영적인 환상
이것은 어떤 사람이 그의 영적인 세계에서 환상을 갖거나 어떤 것을 보게 되는 것을 말한다. 영적인 환상의 한 예를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 바울이 겪었던 경험에서 찾아볼 수 있다.

바울은 기독교인들을 핍박하기로 작정하고 다메섹으로 가던 도중 갑자기 대낮의 해보다 밝은 빛이 나타나 자신의 주위를 비추는 것을 보게 되었는데, 당시 그는 자신을 향하여 말하는 한 목소리를 듣게 된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하시거늘 대답하되 주여 뉘시오니이까, 가라사대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행 9:4,5).

여기에서 바울은 자신의 육적인 눈으로는 예수님을 볼 수 없었으나 영적인 영역에서 그분을 보았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영적인 환상’으로서 환상의 첫 번째 유형이다. 가장 하위 형태의 환상이라고 말할 수 있다.

(2) 비몽사몽간의 환상
‘영적인 환상’보다 좀 더 높은 차원의 환상이 있는데, 비몽사몽간에 나타나는 환상이 그것이다. 이러한 환상의 예는 바울이 예루살렘에 처음 갔을 때의 체험에서 볼 수 있다. 그는 사도행전 22장에서 이렇게 말한다.

“후에 내가 예루살렘으로 돌아와서 성전에서 기도할 때에 비몽사몽간에 보매 주께서 내게 말씀하시되 속히 예루살렘에서 나가라 저희는 네가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말을 듣지 아니하니라 하시거늘”(행 22:17,18).

사람이 비몽사몽간에 빠지면 육체적인 감각은 일시정지하게 된다. 그는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그가 신체적으로 접촉하고 있는 것들을 느낄 수 없다. 이것은 의식을 잃은 상태가 아니라, 다만 육체적인 것보다 영적인 의식이 더 깨어 있는 것일 뿐이다. 다음은 이민 교회인 아틀란타제일장로교회의 서삼정 목사님의 간증이다.

“6?25전쟁 때 피난처에서 고향에 돌아온 직후였다. 미군들이 마을 뒤 개천에 주둔해 있던 어느 날 밤, 어머니와 잠깐 누웠다가 미군 세 명을 환상으로 보았다. 가운데 사람은 키가 조금 컸다. 나는 눈을 감은 채 어머니에게 환상을 이야기 했다. 어머니는 급히 일어나 건넌방으로 건너갔고, 잠시 후 누군가 방문을 두드렸다. 문을 열어보니 환상에서 보았던 그 군인 세 명이었다. 환상에서 본 대로 가운데 군인이 키가 컸다. 당시 미군들은 밤마다 젊은 여자들을 찾아다녔는데, 어머니는 그렇게 위기를 모면한 것이었다.”(서삼정,「성령의 음성을 들어야 예수 믿는 맛이 난다」, 두란노, P.50)

서 목사님이 경험했던 환상은 비몽사몽간의 환상이었다. 사도 베드로 역시 비몽사몽간에 나타나는 환상을 체험하였다. 하느님께서 베드로에게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가지고 가라고 말씀을 하셨던 때이다. 베드로가 지붕에 올라가 기도하고 있을 때 거기서 그는 ‘비몽사몽간에 빠지게’ 되고 하늘이 열리는 것을 목격하게 된다.

 “…베드로가 기도하러 지붕에 올라가니 시간은 제 육시더라 시장하여 먹고자 하매 사람이 준비할 때에 비몽사몽간에 하늘이 열리며 한 그릇이 내려오는 것을 보니…”(행 10:9~11).

그는 영적인 세계의 영역으로 들어가서 이러한 것을 보고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우리는 성경으로부터 베드로와 바울이 비몽사몽간에 빠져 영적인 세계를 보았다는 것을 살펴보았다. 이들이 경험한 비몽사몽간의 환상은 두 번째로 높은 형태의 환상이다.

열린 환상
열린 환상은 최고의 경지에 이르는 환상으로서 ‘눈을 뜬 상태에서 보는 환상’이다. 이것은 사람의 육체적 감각기능이 정지되는 것도 아니고 눈도 감지 않은 상태이다. 즉 모든 육체적 기능을 갖고 있으면서 동시에 영적인 세계를 맛보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열린 환상은 주위의 다른 어떤 것과 똑같이 실제적으로 보이는 환상이다. 천사의 방문과 같은 것이 이 범주에 해당된다. 우리는 천사들을 실제의 차원에서 ‘볼 수’ 있다. 주의 천사가 기드온을 방문했던 것 등이 이에 대한 예이다(삿 6:11). 고넬료는 “환상 중에 밝히 보매 하느님의 사자가 들어와 가로되” 그의 이름을  부르는 것을 체험했다(행 10:3).

케네스 해긴(Kenneth E. Hagin)은 그가 체험한 눈을 뜬 상태에서 본 환상을 다음과 같이 간증한 바 있다.

“…눈을 뜬 상태에서 나타난 환상 속에서 평상시 여느 사람과 다름없이 분명하게 (예수께서) 나의 방으로 들어오시는 것을 보았다. 나는 내 침대 옆에 그분이 앉는 것을 보았으며 또한 나는 내가 평상시에 들어왔던 여느 사람들의 목소리와 마찬가지로 그분의 목소리를 분명하게 들을 수 있었다.”(케네스 해긴, 에태해 역,「나는 환상을 믿는다」, 목양세계선교회, P.161)

이처럼 ‘눈을 뜬 상태에서 보는 환상’은 나의 육체적 기능이 모두 정상적으로 활동하고 있는 가운데 영적인 세계를 동시에 경험하는 아주 높은 차원의 환상이다. 이러한 환상을 열린 환상이라고 한다. 우리가 성령으로 충만하다면 내적 환상은 물론 열린 환상과 같은 높은 차원의 환상도 체험도 할 수 있을 것이다.

2. 예언적 꿈의 유형들
꿈의 효능은 의식의 방해가 최소화된 가운데 -잠이 든 상태이므로- 하느님께서 빠른 동영상처럼 그분의 뜻을 보여주는 데 있다. 그리스도인들이 체험하는 꿈은 대개 다섯 가지 유형으로 구별할 수 있다.

 (1) 생각나게 하는 꿈
어느 날 당신이 휴가를 떠나는 꿈을 꾸었다. 그런데 꿈속에서 당신은 여권을 갱신하지 못했고 챙겨야 할 소지품도 잊고 떠났다. 만약 당신이 이러한 꿈을 꾸었다면 그것은 “여행을 떠나기 전에 다시 한 번 모든 것을 확인해 보라”는 신호이다. 이렇게 나의 주의를 환기시켜주는 꿈을 무시해 버린다면 어려움이 닥친다는 뜻으로 해석 할 수 있다.

또한 우리는 난관에 처한 모습의 영적지도자나 지인(知人)을 꿈에서 만날 때가 있다. 이것은 하느님이 우리에게 잊지 말고 그를 위해 기도해 주라는 신호이다. 이러한 하느님의 음성을 무시하면 내가 꿈에서 본 그 사람들은 어려움 속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만다.

성경에서도 이러한 예를 확인할 수 있다. 하느님은 아브라함에게 ‘열국의 아비’라는 약속을 생각나게 하였다(창 15:1~6, 12~16). 하느님은 솔로몬의 두 번째 꿈에서 불순종의 결과에 대한 책임을 생각나게 했다(왕상 9:2~9, 왕상 3:5~15).

 (2) 경고하는 꿈
꿈속에서 자동차 사고를 당하거나 계단에서 넘어져 다치는 경험을 했다면, 나에게 닥칠 수 있는 사고를 경고하시는 하느님의 음성일 수 있다. 이러한 사고는 누구에게나 실제로 일어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꿈에서 체험한 것을 무시하지 말고 조심스럽게 대처를 해야 한다. 즉 계단을 오르내릴 때 조심하고 운전하는 습관이 나쁘다면 그것을 고치는 지혜가 필요하다.

창세기 31장 24절에 하느님은 야곱의 외삼촌 라반에게 나타나서 “너는 삼가 야곱에게 선악 간에 말하지 말라”고 했다. 또 마태복음 1장 20절에도 주의 사자가 나타나서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 말라…”고 했다. 이 외에도 하느님이 아비멜렉 왕에게 경고한 꿈이 있다(창 20:2~7).

(3) 예언적 꿈
미래에 성취될 사건을 꿈에서 경험하였는데, 실제로 자신의 생애 가운데 그대로 이루어질 수 있다. 창세기 37:5~11에 어린 요셉의 꿈이 결국 이루어졌다. 나단 선지자가 잠자고 있는데 하느님의 말씀이 임하여 다윗 왕의 아들이 성전을 건축할 것이라고 했다(삼하 7:4~17). 분명 그것은 나중에 성취될 사건이었다. 따라서 예언의 꿈을 받은 사람들은 그것을 놓고 말하기보다 더 많은 기도를 해야 한다.

기도원 원장이었던 모 목사는 별세하기 수년 전에 자신의 장래에 대한 예언적 꿈을 꾸었다. 어느 날 그는 꿈속에서 큰 나무에 원숭이 한 마리가 높이 올라가는 것을 쳐다보면서 “아이고, 저 놈 좀 봐라. 엉덩이가 빨갛구나!” 하며 큰소리로 웃고 있었다. 그러는 중에 갑자기 원숭이가 나무에서 뚝 떨어져 죽었다. 그가 가까이 가서 땅에 떨어져 죽은 원숭이를 살펴보니 원숭이가 아니고 자기였다. 그는 이 섬뜩한 꿈을 꾼 지 얼마 후 건강에 문제가 생겨 모든 사역을 중단하고 몇 년간 투병하다가 결국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슬프게도 그가 꾸었던 꿈은 교만으로 말미암아 추락할 것이며 죽게 될 것이라는 예언적 꿈이었다.

다음은 아브라함 링컨(Abraham Lincoln)의 꿈이다. 때는 1865년이다. 미국 16대 대통령 아브라함 링컨이 백악관에서 잠을 자고 있었다. 그 때 꿈에서 사람들이 흐느끼며 우는 소리를 들었다. 그는 그 소리를 따라서 계단을 내려갔고 한 사람이 죽어 관에 들어있는 것을 보았다. 링컨은 궁금해서 옆에 서 있는 경호원에게 관 속에 죽어있는 사람이 누구인가를 물었다. 경호원이 대답하기를 관 속에 있는 사람은 총에 맞아 죽은 미국의 16대 대통령이라고 했다. 이 꿈을 꾼 후 얼마 있다가 아브라함 링컨은 암살되었다.

(4) 반복적인 꿈
잠자는 가운데 이례적으로 반복되는 꿈을 꿀 때도 있다. 이 꿈이 내용에 따라 기쁨을 주기도 하고 괴로움을 주기도 한다. 창세기 41:1~7에 바로 왕은 임박한 기근에 대한 꿈을 반복적으로 꾸었다. 느브갓네살 왕 또한 반복적인 꿈을 꾸었다. 이것은 세상 지도자들이 자신의 책임을 다할 시기라는 신호이다(단 2:1).

때는 1912년, 타이타닉(the Titanic)호라고 하는 배가 영국에서 뉴욕으로 떠날 때였다. 그 때 한 소녀가 꿈을 꾸었다. 거대한 배가 가라앉는 꿈이었다. 그 소녀는 사람들의 비명소리에 잠에서 깨어났다. 그는 다시 잠을 청하였다. 같은 꿈을 다시 반복하여 꾸었다. 또 타이타닉 호를 타기 위해 예약하여 놓은 사람이 꿈을 꾸었다. 그는 자기가 타려고 하는 배가 꿈에서 기울어져 물속에 잠기는 것을 서너 번 꾸었다. 그 때 사방에서 사람들의 비명소리를 들었다. 이 꿈으로 인해 그는 예약을 취소하고 그 배를 타지 않았다. 이러한 꿈이 있은 지 며칠 후 타이타닉 호는 침몰하였고 1500명의 사람들이 죽었다.

(5) 악몽
꿈에는 보통 두 가지 면이 있다. 하나는 두려움과 불안을 주는 꿈이고, 다른 하나는 기쁨과 기대감을 갖게 하는 꿈이다. 악몽은 기분 좋은 꿈은 아니지만 하느님이 주시는 꿈의 유형엔 ‘악몽’도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욥기 7장 14절에 “주께서 꿈으로 나를 놀래시고 이상으로 나를 두렵게 하시나이다”라고 했다. 느브갓네살 왕 역시 꿈을 꾸고 나서 두려움과 번민에 휩싸였다(단 4:5). 빌라도의 아내 또한 마음에 괴로움을 주는 꿈을 꾸었다. “오늘 꿈에 내가 그 사람(예수)을 인하여 애를 많이 썼나이다”(마 27:19).

이처럼 꿈은 기쁨만을 주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 괴로움을 주는 것도 있다. 우리는 이 모든 꿈을 주의 깊게 생각하며 나 자신을 뒤돌아보아야 한다. 거기에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예언적 메시지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사람이 침상에서 졸며 깊이 잠든 때에나 꿈에나 이상 중에 사람의 귀를 여시고 인 치듯 교훈하시나니 이는 사람으로 그 꾀를 버리게 하려 하심이며 사람에게 교만을 막으려 하심이라”(욥 33:15~17).

하느님께서는 다양한 방법으로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그리고 주님은 자기 백성들이 그 분의 모든 의사소통 수단에 익숙해지기를 원하신다. 꿈과 환상은 하느님과 인간 사이에 이루어지는 커뮤니케이션의 한 방식이다. 하느님은 여러 가지 방법으로 말씀하시며 그러한 방법들 가운데 한 가지로 어떤 때는 꿈을, 때로는 환상을 선택하신다. 따라서 우리는 꿈과 환상의 여러 가지 유형들에 관해 배울 필요가 있다.

“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히1:1,2

예언적 꿈

인류는 창조 때부터 꿈을 꾸어 왔다. 꿈이란 수면하는 동안에 떠오르는 일련의 생각, 영상, 혹은 감정들이다. 하느님께서는 오랜 세월동안 꿈을 통해 사람들과 의사소통을 해 오셨다. 꿈이 이렇게 하느님과 그의 백성들 사이에서 유효한 통로 역할을 했다는 사실은 성경에 등장하는 무수한 꿈 이야기를 통해 확실히 알 수 있다.

하느님의 도구로서의 꿈
“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히 1:1,2).

유대인의 지혜서인 탈무드에 이런 말이 있다. “하느님이 매일 밤 우리에게 연애편지를 보내시는데 우리는 봉투도 뜯지 않고 버린다.” 꿈에 관한 얘기다.

하느님께서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그리고 주님은 자기 백성들이 그 분의 모든 의사소통 수단에 익숙해지기를 바라신다. 꿈은 하느님과 인간 사이에 이루어지는 커뮤니케이션의 한 유형이다. 하느님은 다양한 방법으로 말씀하시며, 그러한 방법의 하나로 꿈을 선택하신다. 신디 제이콥스는 이렇게 말한다:

“모든 교회에서 일반적으로 꿈을 경계해 왔다. 그러나 꿈을 무시하게 되면, 오늘날 하느님의 음성이 그분의 백성들에게 말씀하시고자 하는 모든 성경적인 방법 중 한 가지를 완전히 끊어버리는 것이 된다.”

실제로 오늘날 ‘말씀 중심’의 교회를 자처하면서도 예언적 꿈을 부정하는 ‘비성경적’ 교회들이 얼마나 많은가? 실로 그것은 우리의 믿음 생활에 아주 큰 영적 손실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마지막 시대로 접어들면서 하느님께서는 이 초자연적 의사소통 수단의 사용을 전례 없이 가속화시키고 계신다.

오늘날에도 꿈은 유효한가?
꿈은 다음 두 가지 측면에서 오늘날에도 유효하며, 종말이 가까울수록 점차 그리스도인들의 ‘일반적 체험’이 될 것이다.

마지막 시대를 향한 약속
꿈은 유사 이래 그 어느 때보다도 오늘날 우리와 더 깊은 관련이 있다. 왜냐하면 이 시대는 ‘마지막 때’이기 때문이다. 성경은 마지막 시대에 우리가 ‘꿈을 꾸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말세에 내가 내 영으로 모든 육체에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는 ‘꿈’을 꾸리라”(행 2:17).

이 구절이 의미하는 바는 예언과 더불어 꿈과 환상이 말세 교회에 충만하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이 은사에 대해 매튜 헨리(Matthew Henry)는 이렇게 말했다:

“너희 젊은 사람이나 늙은 사람이나 환상을 볼 것이요, 꿈을 꿀 것이며, 꿈속에서 하느님의 계시를 받을 것이며, 이러한 일이 교회로 전달될 것이다.”

마지막 시대로 접어들수록 ‘꿈’은 하느님의 인도하심을 나타내는 수단으로서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다. ‘꿈’을 받는다는 것은 이 마지막 시대에 성령이 부은 바 되었다는 사실을 말해 주는 지표이다!

변하지 않는 하느님
하느님께서는 다음과 같은 말씀을 통해 자신의 속성을 보여 주셨다. “나 여호와는 변하는 자가 아니므로”(말 3:6, 현대인의 성경).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만드시고 그에게 꿈을 꿀 수 있는 기능과 능력을 주셨다. 또한 그는 자신이 인간에게 말씀하시는 방법의 한 가지로 꿈을 사용하신다는 사실을 성경 전반에 걸쳐서 보여 주셨다.

그런 하느님께서 이제 더 이상 그렇게 하지 않으시기로 갑자기 마음을 바꾸셨는가? 아니다! 하느님께서는 지금도 여전히 꿈을 통해 말씀하신다. 왜냐하면 그는 변하는 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하느님은 달라지시지 않았다. 그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히 동일하시다.

일상적인 꿈과 영적인 꿈을 구분할 수 있는 기준
영적인 꿈은 보통 매우 선명하고 실제적이다. 그것은 한동안 우리로 하여금 생각하게 하는 그런 꿈이다. 그 기억들이 너무 생생하기 때문에 어떤 때는 깨어 있었는지, 혹은 자고 있었는지조차 의문스럽기까지 하다.

이런 꿈들은 그 자리에서 즉시 자세하게 기록해 두는 것이 좋지만, 그렇게 하지 않아도 종종 우리 기억에 아로새겨지게 된다. 나는 20년 전에 나의 장래에 관한 예언적 꿈을 받은 적이 있는데, 어찌나 생생한 지 아직도 어젯밤에 꾼 꿈처럼 선명하게 내 마음 속에 새겨져 있다.

해석을 위해 지혜를 구하라
우리가 영적인 꿈을 꿀 때 그 의미가 매우 분명하게 다가오는 경우도 있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도 있다. 그런 경우는 해석이 필요하다. 이때는 해석을 위해 하느님께 ‘지혜의 말씀’을 구해야 한다. 그러면 성령께서 초자연적으로 해석에 필요한 지혜를 주신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약 1:5).

예언적 꿈을 받았을 때, 그 의미가 분명하게 다가와서 해석이 불필요한 경우와 그렇지 않아서 꼭 해석이 필요한 경우를 비교해 설명해 보겠다.

해석이 불필요한 꿈
수년 전 세탁소를 경영하는 50대 후반의 남성이 우리 교회에 등록을 한 적이 있었다. 그는 자신을 향해 ‘사명자’라고 예언을 하는 사람들도 있었고, ‘사명자’가 아니라고 예언하는 사람들도 있어서 아주 혼란스러웠다. 진정 자신이 사명자라면 사업을 포기하고, 환갑을 앞둔 나이지만 신학을 하고 목사가 되어야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금식을 하며 하느님께 자신에게 직접 말씀해 달라고 간구했다. 그렇게 기도하는 중 어느 날 범상치 않은 꿈을 꾸었다.

꿈에 그는 한 방의 문을 열고 들어갔는데 그 방 안에는 옷걸이가 가득하고 옷걸이마다 목사님들이 예배를 인도할 때 입는 목사 가운(Gown)이 걸려 있었다. 그는 그 목사 가운들 중에서 하나를 골라서 입었는데 너무 컸다. 그래서 다른 가운 하나를 다시 입어 봤는데 이번엔 너무 작았다.

그리하여 다른 가운 하나를 또 골라서 입었는데 이번에는 너무 컸다. 그래서 또 다른 가운을 하나 골라 입었는데 이번엔 너무 작았다. 그렇게 계속 입어보았는데 자신에게 맞는 옷이 없더라는 것이다. 그러는 가운데 갑자기 방문이 열리더니 담임 목사님이 들어와 자기 이름을 부르며, 당신은 이 방에 들어오면 안 되는데 왜 여기 들어왔느냐고 큰 소리로 야단을 치시더라는 것이다. 그는 나에게 이와 같은 꿈 이야기를 하면서 해몽을 해달라고 했다.

그가 받은 꿈은 해석이 필요 없는 의미가 명확한 꿈이었다. 신실하신 하느님은 이 꿈을 통해 ‘이중으로’ 그가 목사로 부름 받은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말씀해 주셨던 것이다. 왜냐하면 이 꿈의 내용을 묵상해 보자. 우선 그의 몸에 맞는 목사 가운이 한 벌도 없었고, 게다가 담임 목사님께 “들어와서는 안 될 방에 왜 들어왔느냐”고 야단까지 맞는 꿈이었다. 여기에 무슨 설명이 더 필요하겠는가?

나는 그에게 “이 꿈은 해몽이 불필요한 꿈입니다. 하느님은 꿈을 통해 집사님은 사명자가 아니라고 이중으로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 더 이상 이 문제를 가지고 기도하지 마십시오.”라고 권면했다.

해석이 필요한 꿈
모 신학교에서 예언적 꿈에 관해 강의한 후 한 학생이 나를 찾아와 꿈을 해석해 달라고 요청을 했다. 그도 역시 자신이 ‘사명자’라는 예언을 받은 적도 있고, ‘사명자’가 아니라는 예언을 받은 적도 있었다. 그리하여 중년의 나이에 신학교에 입학했지만 계속 신학을 해야 할지 혼란 가운데 있었다. 그는 서울에서 중소기업을 경영하는 사장이었다.

그래서 이 학생도 역시 하느님께 자신에게 직접 말씀해 달라고 작정기도를 했다. 작정기도를 마친 후 그는 이상한 꿈을 꾸었다. 자신이 깊은 바다에 들어가 전복을 따더라는 것이다. 그 꿈은 뜻이 없는 꿈은 아닌 것 같고 분명히 자신의 기도에 대한 응답 같은데, 무슨 뜻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으니 나에게 해몽을 해달라고 했다.

나도 그가 받은 꿈이 예언적인 꿈이며, 그의 기도제목에 대한 성실하신 하느님의 응답이라고 믿어졌다. 그러나 나 역시 그 꿈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물론 전복을 따는 꿈을 꾸었다고 해서 갑자기 그가 바닷가로 가서 ‘수산업’을 시작하라는 계시는 결코 아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성령의 언어로서 ‘상징’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야고보서 1장 5절 말씀에 의지하여 하느님께 ‘지혜의 말씀’을 구했다.

마침내 나는 하느님께서 주신 초자연적인 지혜로 그가 꾼 꿈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해석해 줄 수 있었다. 성령께서는 내 영에 그가 꿈속에서 따던 ‘전복’은 ‘錢福’(전복)이라고 알려 주셨다. 즉 ‘돈복’이라는 것이다. 그는 사업해서 돈을 버는 것이 하느님의 뜻이었던 것이다.

나는 그에게 “전복은 ‘錢福(전복)’이니, 하느님은 당신에게 ‘돈복’을 주실 것입니다. 전복은 값이 많이 나갑니다. 당신은 큰 돈을 벌 것입니다. 그러니 주님을 의지하며 열심히 사업을 해서 물질로 주님께 영광을 돌리십시오.”라고 권면을 했다.

하느님께서 자기 자녀들에게 이와 같은 방식으로 말씀하시는 경우는 간혹 있는 일이다. 6. 25 동란이 한창일 때의 이야기다. 아들을 전장에 보낸 노모에게 어느날 국방부 고위간부를 알고 있다는 한 사람이 찾아와 금품을 요구하면서 전선에 있는 아들을 후방으로 빼주겠다고 했다. 어머니는 이 낯선 사람의 말을 즉각 수락하지 않고 이 문제를 놓고 얼마간 기도했다. 그런데 하루는 기도하는데 환상 중에 어떤 사람이 나타나 사기(사기그릇의 沙器)로 만든 토끼를 주면서 자꾸 가지라고 하더라는 것이다.

노모가 이 환상이 무슨 뜻인지를 알고자 하느님께 지혜를 구하며 묵상할 때, 순간적으로 “그것은 '사기'로 만든 토끼이니, 사기(詐欺)를 당한다는 계시구나”라는 깨달음이 왔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 사람의 제안을 단호히 거절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과연 그 남자는 그렇게 수많은 사람들의 돈을 갈취한 상습적 사기꾼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성령님은 그 노모에게 ‘沙器로 만든 토끼’를 통해 ‘詐欺를 당할 것’을 경고해 주셨던 것이다.

이처럼 의미가 불분명한 꿈은 하느님께 지혜를 구하면 초자연적으로 깨닫게 해 주신다. 다니엘도 기도하고 하느님이 주신 지혜로 느부갓네살의 꿈을 해석해 주었다(단 2:23).

꿈을 통해 말씀하시고 교훈하시는 하느님
이 마지막 시대에 우리는 하느님의 음성을 들어야 한다. 하느님께서 말씀하시는 모든 통로를 통해 그분의 음성을 듣는 기술을 개발해야 한다. 거기에는 꿈도 포함된다. 밤중은 영적 생활의 대단히 중요한 영역이 될 수 있다. 하느님께서 밤중에 말씀하실 수 있기 때문이다. 성경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사람은 무관히 여겨도 하나님은 한 번 말씀하시고 다시 말씀하시되 사람이 침상에서 졸며 깊이 잠들 때에나 꿈에나 밤의 이상 중에 사람의 귀를 여시고 인치듯 교훈하시나니 이는 사람으로 그 꾀를 버리게 하려 하심이며 사람에게 교만을 막으려 하심이라”(욥 33:14~17).

하느님은 우리가 침상에서 잠을 잘 때 꿈을 통해 말씀하시고 또 교훈하신다는 것이다. 신문의 시사만평(時事漫評)을 통해 알 수 있듯이 때로는 한 컷 짜리 그림이 한 쪽 분량의 글 보다 더 강력하고 효과적으로 메시지를 전달한다. 그래서 지혜가 한이 없으신 하느님도 종종 ‘그림’, 곧 꿈과 환상으로 우리에게 교훈하신다.

이 꿈은 하느님께서 인간과 교통하시는 성경적인 방법의 하나이다. 오는 세대에는 하느님의 인도하심을 나타내는 수단으로서 꿈이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다. 따라서 하느님께서는 자기 백성들이 성령의 일하시는 방법에 대해 알기를 원하신다.

하느님께서는 꿈을 받고 해석하는 성령의 언어를 이해할 수 있는 요셉이나 다니엘과 같은 사람들을 오늘날도 불러 모으고 계신다. 우리가 성령으로 충만하면 누구나 그러한 사람이 될 수 있다. 그렇다! 이 마지막 시대에 우리는 성령의 충만을 받음으로 신령한 “꿈을 꾸게” 될 것이다(욜 2:28, 행 2:17).

예수 믿는다는것이 무엇인가?

예수님은 이땅에서 사역하시면서 정말 많은부분을 할애하셔서 자신이 하늘에 갔다가 다시오실것을 말씀하셨다. 부활승천하신후 제자들은 그말을 기억하고 곧 주님다시 오실것을 기다리며 신앙생활을 하고 글들을 썼다.

그내용들이 오늘날 신약성경들이 되었다. 신약성경들의 내용을 잘들여다 보라! 전체의 큰 주제들이 주님이 다시오시니까 깨어서 기다려라 이다.

예수믿는다는것은, 초대교인들부터 그날과 그시는 아무도 모르기 때문에 깨어서 주님다시오시는것을 기다리는것이 예수믿는것이다. 그것이 핵심이다.

그런데 현대크리스천의 삶에 주님의 다시오심에 대한 메시지들이 없다.
주님은 그날을 기다리며 어떻게 살라고 하셨는가? 방탕하지말고, 술취하지말고, 생활의 염려에 빠지지 말라고 했다.

그런데 우리의 모습들은 노아 때처럼 주님이 다시오시는것엔 관심이없고 이땅에서 성공하고 돈벌어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는 일에, 방탕하고, 사치하는 일에, 술취하는 일에, 생활의 염려에, 빠져서 살고있다. 주님은 말씀하셨다.

그날과 그시는 천사들도 아들도 너희들도 모르기 때문에 항상 깨어 있으라고 하셨다.

다음 경고를 덧붙이시며.... " 그날이 덧과 같이 임하리라"

결론은 예수 믿는다는것은 깨어서 주님이 다시오시는것을 기다리며 주님이 명령한것을 수행하며 사는것이다. 여기서 반드시 주님이 다시오시는것을 기다리는것이 빠지면 안되는것이다.
 
출처:End Time 메신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12:2)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번민과 갈등 속에서 한 세상을 살아가고 있습니다대개의 경우 그 번민은 영적인 세계와 물질적인 세계 사이에서 일어납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의 번민은구원을 받아 심령의 평안을 누리고 있지만 아직도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 우리를 세상으로 끌어당기기 때문에 일어납니다.그래서 두 세계를 동시에 붙잡고 두 나라에게 동시에 살고 싶어하지만 그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갈등을 느낍니다바로 이때 우리가 한쪽을 버리고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온전히 택하면 하늘의 평안이 우리를 감싸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을 보면 요나는 누구 못지 않은 애국자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요나야너는 일어나서 저 니느웨 성에 가서 그 성이 죄로 말미암아 40일 만에 멸망한다고 선포하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요나에게 있어서 이보다 더 좋은 소식은 없었습니다왜냐 하면 니느웨는 앗수르의 수도인데 이 앗수르야말로 호시탐탐 이스라엘을 노려 항상 침략하고 재물을 약탈하며 이스라엘 백성들을 괴롭혔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이 음성은 그에게 번민을 심어 주었습니다왜냐하면 만일 가서 그대로 외치면 그들이 구원받아 다시 일어나 또다시 이스라엘 침략할 것이요외치지 않으면 자기가 하나님 말씀을 거역하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깊이 갈등하고 있던 중에 요나는 하나님의 낯을 피해 다시스로 도망갔습니다그러나 며칠 후에는 물고기 뱃속에 들어가는 고난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오늘날도 구원을 받고 영적 서계를 소유한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음성이 그의 마음 속에 들어오자마자 요나처럼 찢겨진 심정을 가지고 방황하고 있습니다하나님의 말씀에 먼저 순복할 것인가 아니면 내 정욕과 감정을 앞세울 것인가?

하나님께서 우리를 택하신 후에는 언제나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먼저 구하도록 이끌어가십니다그러나 우리가 불순종하면 요나가 고기뱃속에 있었던 것처럼 번민과 갈등 속에 지내게 되며 경우에 따라서는 역경과 고난을 당하기도 합니다그리고 이 번민은 우리의 삶의 방향이 그의 나라와 그의 의로 향할 때까지 그치지 않을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택하시고 사랑한다는 표적입니다그러므로 우리가 정신적인 번민과 갈등에서 해방 받는 길은 신속히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일입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태복음 6: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