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2/2009

흰 옷이 상징하는 것/죄 없이 정결케 된 이기는 자(준비)

그리고 요한 계시록 19장 7-8절을 보면 ‘우리가 즐거워하고 크게 기뻐하여 그에게 영광을 돌리세 어린 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그 아내가 예비하였으니 그에게 허락하사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게 하셨은즉 이 세마포는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하더라’고 기록 되어 있습니다. 여기에서 어린 양이란 예수 그리스도를 말하고 세마포는 깨끗한 옷으로서 어린 양의 신부 예복을 말합니다.
 
우리가 옷을 벗었다면 수치를 당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옷은 수치를 가리는 것을 상징합니다. 이와 같이 우리의 행위가 옳지 못하면 수치를 당하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의 행위가 온전하면 수치를 당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옷과 우리의 행위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성도의 행실을 옷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어기는 것은 죄입니다. 곧 죄는 그의 수치입니다. 사람이 수치를 보이지 않기 위해서는 죄를 짓지 말고 온전한 자가 되어야 합니다. 죄를 짓지 않기 위해서는 먼저 하나님의 뜻을 알고 지켜 행해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법을 어기고 죄를 지었을 때에 우리의 옷이 더러워진 것과 같습니다.
 
요한 계시록 22장 14절 보면 ‘그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은 복이 있으니 이는 저희가 생명나무에 나아가며 문들을 통하여 성에 들어갈 권세를 얻으려 함이로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두루마기는 겉옷을 말하는 것으로서 우리의 행실을 상징합니다. 그리고 옷이 더럽혀 졌다는 것은 죄를 지은 것을 말합니다. 옷이 더러워지면 표백제로 세탁하여 희게 하듯이 우리의 양심이 죄로 인하여 더러워졌을 때에 어린양의 피는 더러워진 우리의 양심을 씻는 표백제가 됩니다.
 
아래에 있는 성경 구절은 흰 옷 입은 자가 무엇을 말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 3:5]5 이기는 자는 이와 같이 흰 옷을 입을 것이요 내가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반드시 흐리지 아니하고 그 이름을 내 아버지 앞과 그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리라

[ 21:7]7 이기는 자는 이것들을 유업으로 얻으리라 나는 저의 하나님이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라
 
흰 옷을 입은 무리는 이기는 자를 말하고 이기는 자가 아버지 집의 유업을 받게 됩니다. 그러므로 본문은 흰 옷을 입는 방법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방법은 죄가 없이 정결하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정결하게 되는 방법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며 큰 환난을 통해 연단을 받고 어린양의 피에 죄를 씻어 희게 해야 합니다. 이것이 천국에 가기 위한 준비입니다. 천국은 오물을 두지 않습니다. 정결하게 된 자만 천국에 갈 것입니다. 이것이 천국에 가기 위한 준비이며 휴거를 위한 준비임을 아시기 바랍니다. 정보는 적에게 속지 않고 이기기 위한 중요한 것이로되 정보를 아는 것이 준비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지금의 믿는 이들이 준비할 줄 모른다는 것입니다.
 
요한 계시록 7장에서는 아버지집에 살 자들을 말하는데 아버지 집에 살 두 종류의 이기는 무리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 하나는 신부들이고 또 하나는 순교자들입니다. 신부들이란 흠 없게 된 자들을 말하고(계14:3-5) 순교자들은 흠이 있더라도 목베임을 당한 자들입니다. 이 두 무리가 이기는 자입니다. 이기는 자에게 속하기 위해서 준비가 필요합니다. 준비란 죄 없이 변화 되는 것임을 깨닫기 바랍니다.

흰 옷을 입게 하는 방법/큰 환난

히브리서 12 6-8절을 보면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의 받으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니라 하였으니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비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참 아들이 아니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하나님의 참 아들들은 모두가 징계를 받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베드로 전서 4 12-13절을 보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시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오직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는 큰 불시험이라는 표현을 씀으로서 믿는 자들이 당하는 시험이 크고 중하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또 그것이 이상한 일 당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다니엘서 12 10절을 보면 ‘많은 사람이 연단을 받아 스스로 정결케 하며 희게 할 것이나 악한 사람은 악을 행하리니 악한 자는 아무도 깨닫지 못하되 오직 지혜 있는 자는 깨달으리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는 지혜 있는 자가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희게 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 말라기 3장 2절을 보면 ‘그의 임하는 날을 누가 능히 당하며 그의 나타나는 때에 누가 능히 서리요 그는 금을 연단하는 자의 불과 표백하는 자의 잿물과 같을 것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금을 연단하는 자의 불이란 주님께서 믿는 이들을 거룩하게 하는 방법을 비유한 말입니다. 금의 불순물을 제거하기 위해서는 불의 재련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금은 거룩함을 상징합니다. 그러므로 금을 연단하는 자의 불이란 우리를 거룩하게 하는 방법을 말합니다. 

그 방법은 불같은 시험을 통해서 믿는 이들을 연단하는 것을 말합니다. 또 표백하는 자의 잿물과 같을 것이라는 말은 정결케 하는 방법을 말합니다. 여기에서 잿물이란 옷 따위를 희게 하는 표백제를 말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회개할 때에 우리의 지은 죄를 씻어 주시는 어린양의 피를 말합니다(계7:14) 그러므로 여기에서 어린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 라는 말은 흰 옷을 입는 방법을 말합니다.  <수님따라가기>

시대 말의 성도들에게 필요한 것 세 가지/금과 흰 옷과 안약

요한 계시록 3 18을 보면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에서 성도에게 요구하는 것은 세 가지입니다. 금과 흰 옷과 안약을 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금은 하늘에 속한 영적 재산을 상징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사는 날 동안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하나님의 법을 따라 헌신한 삶을 통해서 얻은 영적 재산을 말합니다.
 
흰 색은 정결을 상징하며 옷은 수치를 가리는 것을 상징합니다. 그러므로 흰 옷이란 우리가 죄를회개함으로 어린양의 피에 죄를 씻어 우리의 행위가 정결하게 된 상태를 말합니다. 사람의 행실을 옷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죄를 지으면 옷이 더러워집니다. 더러워진 옷은 잿물에 빨면 희게 됩니다. 여기에서 잿물이란 표백제를 말합니다. 이와 같이 죄를 지은 자는 어린양의 피에 씻어 희게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죄를 지었을 때에 어린 양으로 상징 된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피로 씻어 정결하게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안약이란 눈이 병들었을 때에 넣는 치료제를 말하는 것으로서 영적으로 소경 된 것을 고침 받으라는 것을 상징합니다. 그리고 여기에서 사라는 말은 그 값을 지불 하라는 말입니다. 그 값을 지불하는 방법은 영의 눈을 뜨기 위한 합당한 행위와 노력을 말합니다

우리 속에 있는 양심이라는 기능/죄를 알게 함

창세기 3 6-11절을 보면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실과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한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 자기들의 몸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를 하였더라 그들이 날이 서늘할 때에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아담과 그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 가로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가라사대 누가 너의 벗었음을 네게 고하였느냐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 명한 그 나무 실과를 네가 먹었느냐’라고 기록 되어 있습니다.
 
옷이란 수치를 가리는 것을 상징합니다. 사람이 죄를 짓기 전에는 벗었어도 수치를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죄를 지은 후부터 벗은 줄을 알고 수치를 느꼈습니다. 죄에 대해 수치를 느끼게 하는 것은 우리 속에 있는 양심의 기능 때문입니다(롬2:14-16,요8:9) 예를 들어 어떤 한 사람이 길을 가면서 죄 없는 한 형제의 뺨을 치고 갔다고 합시다. 그것이 악한 행동이라는 것을 누구한테 물어보지 않아도 알 수 있습니다. 이 선악을 알 수 있게 되는 것이 바로 양심이라는 기능입니다.
 
로마서 14장 10-13절을 보면 ‘네가 어찌하여 네 형제를 판단하느뇨 어찌하여 네 형제를 업신여기느뇨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리라 기록되었으되 주께서 가라사대 내가 살았노니 모든 무릎이 내게 꿇을 것이요 모든 혀가 하나님께 자백하리라 하였느니라 이러므로 우리 각인이 자기 일을 하나님께 직고하리라 그런즉 우리가 다시는 서로 판단하지 말고 도리어 부딪힐 것이나 거칠 것으로 형제 앞에 두지 아니할 것을 주의하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설 때에 우리 속에 있는 양심의 소리를 무시한 모든 행위들이 그 사람의 양심에 기록 되어 있어서 각 사람의 은밀한 것들이 다 드러나게 될 것이며 각 사람이 자기 죄를 자기 입으로 실토하게 될 것입니다(롬14:12-14,롬2:15)
 
그러므로 우리는 깨끗한 양심을 가져야 합니다(고후4:2,딤전1:19) 죄를 짓기 전 무죄시대에는 양심이라는 기능이 필요치 않았습니다. 그러나 세상에 죄가 들어 온 후부터 양심이라는 기능이 작동하여 선악을 알 수 있게 하셨습니다. 곧 그 이유는 선악을 분별하여 선을 따라 살아가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자기 속에 있는 욕심 때문에 양심의 소리를 무시하게 되고 양심의 소리를 무시할 때 죄를 짓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