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5/2010

제11강 하나님중심적인 삶과 예배회복 - 여주봉목사

요한복음 6장 57절입니다.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인하여 사는 것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를 인하여 살리라”

지난 주에 하나님중심적인 삶에 대해서 나누었습니다. 하나님중심적인 삶에만 하나님의 생명이 있다. 하나님중심적인 삶을 살아야 하나님의 뜻이 우리안에 우리를 통해서 이루어질 수 있고 하나님의 유업이 우리 가운데 주어질 수있다는 부분을 살펴보았습니다.

오늘은 하나님중심적인 삶의 특징을 살펴보겠습니다. 우리 신앙이 하나님중심적인 삶인데 구체적으로 이해하려면 하나님중심적인 삶의 특징들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모델입니다. 예수님은 누구보다 하나님중심적인 삶을 사셨고 그 삶을 전하셨습니다. 오늘은 하나님중심적인 삶을 살펴보되 예수님의 삶을 본보기로 삼아서 살펴보겠습니다. 이 내용은 십자가 복음 증보판 1단원에 있습니다.

하나님중심적인 삶은 세 가지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목적을 위한 삶, 하나님의 자원으로 사는 삶, 하나님의 길로 행하는 삶입니다. 이 세 가지 특징이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이 삶을 사는 것이 중요합니다.

지금부터는 편집해주세요. 제가 NWS를 마치고 돌아왔더니 그동안 한 분이 다윗의 장막에서 하나님을 지속적으로 찾고 구하고 은혜를 구하는 가운데 저를 위해 기도하고 교회를 위해 기도하게 하시고 주신 감동을 편지를 썼어요. 전해주었어요. 하나님이 집중적으로 기도하게 하신다고 하면서 그중에 하나가 저에게 하나님 말씀을 다시 전하게 해 달라고 기도하게 하셨다고해요. 읽으면서 점검해보고 있었는데 이 말이 잘 이해가 안되었어요. 왜냐하면 NWS에서 말씀을 전하고 왔고 주일에도 계속해서 말씀을 전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무슨 말인지 잘 이해가 안되었어요. 그런데 제가 오늘 아침 1부 예배 시간에 경배와 찬양을 하는데 또렷하게 비추셨어요.

하나님중심적인 삶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삶. 비추어진 것이 그것입입니다 이사야 후반부에 회복과 부흥이 오늘 이 시대에 부어진다고 했어요. 그런데 신앙의 본질적인 부분을 전하고 나누었는데 한편으로는 우리들이 그것을 이론적으로만 듣고 당연한 것으로만 여기고 그 앞에 서지 않는 모습을 보면서 그것을 담대하게 전하고 있지 제 모습이 보였어요. 이 시대에 하나님이 지금 제시하고 있는데. 하나님 앞에 회개했습니다. 원래 대로 돌아가는데요.

여러분 하나님중심적인 삶에 세 가지 특징이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대로 삶을 사는 것이 중요합니다.

1.하나님의 자원으로 사는 삶입니다.
우리 신앙은 모든 면에서 하나님의 자원으로 사는 삶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가는 것도 하나님의 자원으로만 나갈 수 있습니다. 십자가의 공로로 하나님의 은혜로만 하나님의 자비로만 나갈 수 있습니다. 우리 삶에 변화되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로만 가능합니다. 우리 신앙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의 자원으로 사는 삶인데 예수님이 삶에서 이 부분을 잘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처음부터 끝까지 오직 하나님의 자원으로만 모든 삶을 사셨습니다. 


특별히 요한복음에 보면 이 부분이 잘 나옵니다. 그런데 여러분 복음서 중에 어느 복음서보다 예수님이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 가운데 사셨음을 강조하는 책이 요한복음입니다. 이 이야기는 우리들도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 등 하나님의 생명이 우리 가운데 함께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자원으로 사는 것 등 하나님중심적인 삶을 반드시 살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제가 NWS를 가서도 여러 사람이 나누는 것을 들으면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하나님과 친밀한 삶을 살기를 열망하고 있었어요. 여러분 포도나무 교회 나오는 정도면 하나님과 친밀함이라는 말을 하도 많이 들어서 익숙해져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하나님과 친밀한 삶을 살기를 원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기억하세요. 여러분이 하나님중심적인 삶을 살지 않으면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는 절대로 가능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는 하나님중심적인 삶에서만 가능합니다. 그 중에 한 특징이 하나님의 자원으로 사는 삶입니다. 예수님은 그분의 삶의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의 자원으로 사셨는데 요한복음에 몇 가지 영역에 나와 있습니다. 저는 그것을 볼 때마다 그래 저렇게 살아야 하는데 도전을 받고 갈망이 있습니다.

1)예수님은 판단하는데 있어서도 하나님의 자원으로만 판단하셨습니다.요5장 30절입니다.
"내가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노라 듣는 대로 심판하노니 나는 나의 원대로 하려 하지 않고 나를 보내신 이의 원대로 하려는 고로 내 심판은 의로우니라”


심판 판단에 대해서 말씀하시는 구절입니다. 스스로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하십니다.
이 구절의 무게가 무엇이냐면 바로 윗절 26-27절을 보면, "아버지께서 자기 속에 생명이 있음같이 아들에게도 생명을 주어 그 속에 있게 하셨고 27 또 인자됨을 인하여 심판하는 권세를 주셨느니라”


예수님께 심판하는 권한을 주셨다고 합니다. 저와 여러분 중에 어느 누구도 하나님으로부터 판단할 권세를 받은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그런 권한이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스스로 판단할 수 있는 권한과 자격과 능력을 받은 유일한 분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판단에 있어서 자기는 스스로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만큼 하나님 자원을 의지하셨습니다. 듣는 대로 판단하다는 말은 하나님께로 듣는 대로 판단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자원으로만 판단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내 판단은 옳다고 합니다.

반면에 우리는 어떻게 합니까? 많은 경우 우리는 예수님이 정확하게 하지 않는다고 하는 대로 해요. 무슨 말이냐? 예수님이 직접 말씀하신 것은 아니지만 사11장을 보면 메시야로 오실 예수님에 대해 예언하고 있습니다.


3절입니다. "그가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즐거움을 삼을 것이며 그 눈에 보이는 대로 심판치 아니하며 귀에 들리는 대로 판단치 아니하며”

여기 보면 예수님의 눈에 보이는 대로 귀에 들리는 대로 판단을 안할 것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공의로 판단할 것이라고 하십니다. 공의라는 말은 아버지께로부터 온 판단으로 판단하니까 그 판단이 옳다. 공의롭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에 대해서 하지 않는다고 말한 대로 우리는 그렇게 합니다. 


우리가 가진 작은 지식과 작은 경험을 토대로 우리가 보고 듣는 것을 가지고 판단합니다. 여러분이 가진 지식과 경험을 버리라는 말은 아닙니다. 우리의 지식과 경험으로 하나님의 뜻을 몰라요. 왜 하나님의 뜻을 모르게 되었냐면 성경이 말하기를 내 뜻과 너희 뜻은 다르고 내 길과 너희 길은 달라서 하늘과 땅이 다른 것처럼 다르다고 합니다.


이사야 55장 8절 이하에서 말합니다. "여호와의 말씀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9 하늘이 땅보다 높음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

여호와를 찾으라고 합니다. 찾고 돌아가기 위해서는 길을 버리고 생각을 버리고 가야 합니다. 여기서 악인과 불의한 자는 자기 길과 생각을 따라 살아가는 자입니다. 우리의 생각대로 지혜대로 경험대로 주님을 찾아서는 못 만납니다.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의 길은 여러분의 길과 다릅니다. 하늘에 땅에서 높은 것처럼 높습니다. 

그러면서 고린도전서 2장 9절 이하에서는 말합니다. "기록된 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 10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느니라 11 사람의 사정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 외에는 누가 알리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사정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

우리가 하나님의 길과 생각을 우리 생각으로 모른다고 합니다. 아이큐 높다고 박사학위를 가졌다고 사회적인 경험이 많다고 해서 모릅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하나님의 뜻을 모릅니다. 그런데 우리가 설교를 들을 때는 몇 번 듣고 나면 안다고 생각하는데 실제로 우리 삶에서 적용할 때는 전혀 그렇게 안합니다.

예를 들면 비전 프로젝트를 우리 생각으로는 모릅니다. 주님 앞에 나가서 그분의 뜻을 발견하시라니까요. 하나님 앞에 나가서 그분의 의중을 발견하시라니까요. 하나님 앞에 나가서 여러분이 들으시라니까요. 뭐라고 하시는지 하나님의 의중이 무엇인지.

릭조이너의 빛과 어둠의 전쟁이라는 책을 보면, 말세지말이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군대를 세우시는데 대적자들이 대적합니다. 사단의 세력들이 탄 말이 성도들이라고 해요. 그리고 그들이 쏘아대는 화살이 성도들이 하는 말 언어였어요. 소위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 가운데서 하나님의 의중과 의도를 알지 못하고 자기 생각대로 뱉은 말이 하나님의 역사를 대적합니다. 제가 저에게 맡겨준 소명이 그러다 보니 교회를 많이 섬기고 목회자들을 섬기는데, 거기서 가장 많이 대적하는 방법이 지금 말씀드리는 자기가 가지고 있는 작은 지식과 경험에 기초해서 판단하는 말들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역사를 대적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유일하게 하나님으로부터 판단할 수 있는 권세와 권리를 부요받았는데도 그분은 스스로 안하셨어요. 저도 많이 배웁니다. 보이는 대로 판단한 것을 금방 깨닫고 회개한 적이 많아요.

2)예수님은 말씀을 전하시는데 있어서도 하나님의 자원으로 하셨습니다.
요1장 1절을 보면 태초에 말씀이 계셨다 말씀이 하나님이셨다라고 합니다. 즉 예수님이 말씀의 본체였습니다. 본체니까 그분의 임의대로 전해도 괜찮아요. 그런데 그런 예수님이 말씀을 전할 때 한 마디로 임의로 하지 않았어요. 

요14장 10절입니다.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이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요12장 49절입니다. "내가 내 자의로 말한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나의 말할 것과 이를 것을 친히 명령하여 주셨으니” NIV는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내 스스로 자의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아버지께서 무엇을 말할 것과 그것을 어떻게 말할 것까지 내게 보여주셨다고 번역합니다. 말씀의 본체되신 분이 하시는 말씀입니다.

반면에 예레미야 시대에 나오는 거짓 선지자들을 보세요. 그들은 성도들의 영적인 상태가 어떤 상태인지는 상관없이 그저 그들이 원하는 메시지를 전하기에 바빴어요. 그들이 좋아하는 축복의 메시지, 그들의 필요와 욕구를 채워주는 메시지를 전하기에 바빴어요. 그것을 두고 하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예레미야 23장 16-18절입니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에게 예언하는 선지자들의 말을 듣지 말라 그들은 너희에게 헛된 것을 가르치나니 그들의 말한 묵시는 자기 마음으로 말미암은 것이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온 것이 아니니라 항상 그들이 나를 멸시하는 자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평안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하며 또 자기 마음의 강퍅한 대로 행하는 모든 사람에게 이르기를 재앙이 너희에게 임하지 아니하리라 하였느니라 누가 여호와의 회의에 참여하여 그 말을 알아들었으며 누가 귀를 기울여 그 말을 들었느뇨”


21-22절입니다. "이 선지자들은 내가 보내지 아니하였어도 달음질하며 내가 그들에게 이르지 아니하였어도 예언하였은즉 그들이 만일 나의 회의에 참여하였더면 내 백성에게 내 말을 들려서 그들로 악한 길과 악한 행위에서 돌이키게 하였으리라”
예수님과 얼마나 차이가 나는지 보세요.

3)성령사역을 행하실 때도 예수님은 철저하게 하나님이 자원으로 하셨습니다. 아무 것도 임의로 하지 않았습니다. 요한복음 5:17-19절입니다.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하시매 유대인들이 이를 인하여 더욱 예수를 죽이고자 하니 이는 안식일만 범할 뿐 아니라 하나님을 자기의 친아버지라 하여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으로 삼으심이러라 그러므로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들이 아버지의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

이 말씀의 무게를 아세요. 요3장에 보면 성경은 하나님께서 성령을 예수님에게 한량없이 부으신다고 되어 있습니다. 부으신다는 말이 현재형입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에게 세례를 받고 물에서 올라올 때 임하셨을 뿐아니라 요한복음을 보면 그 후에도 한량없는 성령의 임재와 능력을 지속적으로 부으셨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처럼 하나님의 능력에 강하게 나타났던 분은 없습니다. 그런데 그분이 하는 말입니다. 나는 스스로 아무 것도 할 수 없느니라. 나는 아버지가 행한 것을 보고 그것만 행한다. 여러분 이 하나하나의 무게들을 보세요. 얼마나 하나님중심적인 삶을 말하고 있는지를.

3)자기를 세우는 것에 있어서도 하나님의 자원만을 의지했습니다.
다른 말로 해서 예수님은 자신을 세우는 것을 철저하게 포기하시고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했습니다. 세상의 방법대로 자신을 스스로 세우라는 사단의 미혹, 주변사람들의 미혹, 군중들의 미혹, 심지어는 동생들의 유혹도 단호하게 물리치셨습니다.


요8:50절입니다. "나는 내 영광을 구치 아니하나 구하고 판단하시는 이가 계시니라”
자신은 자신의 영광을 구하지 않았습니다. 요한복음 7장에서는 초막절이 되었을 때 동생들이 말합니다. 명절에 올라가서 자신을 드러내라고 권면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들이 하나님을 믿지 않았기 때문에 이렇게 말했다고 말합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합니다. 6절입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때는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거니와 너희 때는 늘 준비되어 있느니라”

알 티 킨달 목사님이 요셉이 생애를 가지고 말하면서 하나님이 우리를 다루시면서 마지막으로 빚으시는 과정이 스스로 세우는 것을 다루신다고 말합니다. 요셉이 하나님의 다루심의 과정에 있었습니다. 이제 마지막에 억울하게 감옥에 들어갑니다. 그때 술맡은 관원장과 떡맡은 관원장이 들어왔고 꿈을 꾸었고 해석해준대로 되었습니다. 그때 술맡은 관원장에게 청탁을 합니다. 그런데 2년동안 잊어버렸습니다. 그 이유는 요셉이 하나님 앞에 빚어지고 있는데 스스로 세우고자 했기 때문입니다. 


리 시대는 자기를 드러내야 사람들이 알아주는 시대입니다. 이 말은 자기를 소신껏 표현하지 말하는 말이 아닙니다. 이 말은 하나님 앞에 스스로 세우는 것을 포기하고 하나님을 추구하고 주님의 행하심에 동참할 때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때에 세우시도록 잠잠하게 기다리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오늘날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인간적인 모든 방법을 총동원해서 스스로 세우려고 합니다. 심지어는 교회가 그렇게 합니다. 개인적인 야망에 기초해서스스로 세우고자 합니다.

제가 이번에 NWS를 인도하면서 여러분의 간증과 소개를 들으면서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 가운데서 하나님 앞에 살고자 하는 열망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사는 것은 배운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삶에서 실제로 살고 전환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어떤 분이 한국에 방문해서 하나님이 우리를 세워가시는 과정을 말하면서 집시 이야기를 합니다. 집시 중에서는 훌륭한 사람들 재능이 있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유럽 문화에 긍정적인 영향을 거의 미치지 못했답니다. 왜냐하면 한 곳에 오래 머물러 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오늘날 많은 교회들이 교회 순례자들로 가득합니다. 큰 교회 1년에 수천명씩 등록하고 들어옵니다. 매년 수천명씩 들어옵니다. 또 수천명씩 나갑니다. 그러니까 매년 수천명씩 들어오면 5년 후면 수만명이 되는 교회가 되어야 하는데 똑같습니다. 왜냐하면 들어온만큼 또 나가기 때문입니다. 큰 교회 정해놓고 교회 순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좋은 교회에 가면 여러분이 변화될 것 같으세요. 소위 세상적으로 말하여 좋은 목사님들 설교 들으면 변할 것 같으세요. 좋은 목사님 설교 듣고 변할 것 같으면 예수님 설교 들은 사람들은 더 변했어요. 그런데 예수님을 통해서 엄청난 기적들을 직접 보고 경험했고 예수님의 입으로 나오는 엄청난 가르침을 들은 사람들도 120명을 빼놓고는 전혀 변하지 않았어요. 설교 듣는다고 변하지 않습니다. 포도나무 교회에 속한다고 변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기준이 비추어질 때 하나님의 길을 하나님께 대하여 하듯이 삶을 전환하여 그 길에 동참하고 주님만을 믿음으로 찾고 하나님께서 여러분 삶 속에 역사하도록 기꺼이 주님께만 순종할 때 가능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고 영적인 순례를 해서는 변하지 않습니다. 여러분 주위에 순례자들이 있으면 순례를 중당하시고 교회에 정착하시고 주님을 찾으시라고 권면하세요.

예수님은 자기를 세우는 것도 하나님을 의지했습니다.

5)예수님은 자기 의를 선을 위해서도 하나님의 선만을 의지하셨습니다.
마가복음 10장에 보면 부자 청년이 예수님께 와서 묻습니다. 선한 선생이여 내가 어떻게 영생을 얻을까요?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하느냐 아버지 외에는 선한 분이 없다고 답하십니다. 이 말은 얼핏보기에 자신의 선함을 부인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만일 예수님이 선하심을 부인한다면 신성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죄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히4장 15절에서 말합니다. 예수님이야말로 인간중에 자기 의를 의지해서 자기 선함을 의지해서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유일하신 사람입니다. 예수님만이 그분은 죄가 전혀 없으신 분이기 때문에 자기 스스로의 의를 가지고도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유일한 사람입니다. 그런데도 그분은 자기 의를 의지해서 하나님 앞에 서지 않았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자원으로 사는 핵심적인 삶의 한 부분이 십자가에 의한 삶입니다. 본문에서 예수님의 말씀에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며 내가 아버지로 인하여 사는 것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리라고 하십니다.

53절부터 보면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54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55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살과 피를 먹고 마신다는 말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공로만을 믿음으로 의지하여 산다는 말입니다. 그런 삶을 살 때 예수님이 우리안에 우리가 예수님안에 사는 친밀함이 가능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자원으로 사는 삶의 한 부분이지요. 하나님 앞에 나아갈 우리의 유일한 근거는 십자가의 공로 뿐입니다. 우리가 의지할 만한 의는 그분의 의요 그분의 거룩함만이 우리의 거룩함이요 그분의 선함만이 우리가 의지할 선이요 그분의 지혜만이 우리가 의지할 지혜입니다. 이것이 십자가에 의한 삶입니다. 내 자신의 의가 걸레처럼 버려지고 주님의 의만이 내 의가 되는 삶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중심적인 삶의 한 특징은 하나님의 자원으로 사는 삶입니다.

2.하나님의 목적을 위해 사는 삶
하나님중심적인 삶의 두 번째 특징은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 사는 삶입니다. 1부 예배 때 이 말씀을 전하는데 이 말씀이 너무나 우리에게 맞설게 느껴졌어요. 골1:15-16절을 보면, 하나님이 만물을 창조하시되 하나님을 위해 창조하셨다고 말합니다. 우리를 예수님을 위해 창조하셨다고 말합니다.

“15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니 16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보이는 것 뿐아니라 보이지 않는 모든 천사들까지 예수님을 통해서 창조되었고 예수님을 위해서 창조되었다고 말합니다. 저와 여러분이 창조된 이유와 목적이 예수님을 위해서입니다. 사람이 중심인 인본주의 시대를 사는 우리에게 예수님을 위해 우리가 창조되었다는 것은 너무나 낯설잖아요. 그뿐아니라 하나님께서 인간을 하나님중심적으로 창조하셨는데 인간이 타락하여 자기중심적으로 전락하자 하나님이 저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예수님이 보내셨습니다. 예수님을 보내셔서 저들을 구원하셔서 저들에게 살게 하신 삶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삶입니다. 하나님을 위해 살도록 예수님을 위해 살도록 구원하셨습니다.


성경 여러 곳에서 말합니다.
벧전 2:9
롬 14:7-8

고전6:19-20절입니다.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20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값으로 사신 바 되었습니다. 옛날에 노예는 스스로 자유할 수 없습니다. 어떤 사람이 값주고 사서 해방시켜야 가능합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의 값을 주고 사서 자유케 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도록 위해서입니다.

고후5:15절입니다.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

구원하신 목적이 하나님을 위해서 예수님을 위해서 살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다시는 너희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너희를 위해 죽으신 분을 위해 살게 하고자 함이라고 말합니다. 세계적인 베스트 셀러 중에 하나인 목적이 이끄는 삶에서 릭 웨렌은 1장에서 말합니다. ‘우리가 스스로에게 초점을 맞추고 시작한다면 삶의 목적에 도달할 수 없다. 삶의 목적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창조주 하나님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에 의해 하나니을 위해서 창조되었고 그것을 이해하기 전에는 결코 삶을 이해할 수 없다.’

여러분 예수님의 경우에도 철저하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셨습니다. 요한복음 5장 30절. 8:49-50, 12:28, 13:4 등에 보아도 알 수 있듯이 예수님은 철저하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하나님의 영광만을 위해 사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목적을 보고 그것을 성취하기 위해서 자신의 삶을 드리는 것을 자신의 양식 밥으로 아셨습니다.


요4:30, 34절입니다. 또한 어떤 사람들의 오해나 대적이나 핍박에도 불구하고 어떤 대가가 요구되어도 하나님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아버지의 목적에 삶을 드렸습니다.


요5:16-17절을 볼 때. 그래서 요8장 49절만 해도 ‘나는 귀신들린 것이 아니라 오직 내 아버지를 공경함이어늘’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50절에서 나는 내 영광을 구하지 않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1)하나님의 목적을 위한 삶과 하나님의 자원으로 사는 삶
두 가지는 서로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요5장 30절을 봅시다. "내가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노라 듣는 대로 심판하노니 나는 나의 원대로 하려 하지 않고 나를 보내신 이의 원대로 하려는 고로 내 심판은 의로우니라”
NIV를 보면 이럽니다. 내 스스로는 나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나는 내가 듣는대로만 판단한다. 그런고로 내 판단이 옳다. 그 다음에 아주 중요한 한 단어가 있습니다. ‘왜냐하면’입니다. 나는 나를 기쁘게 하기를 추구하지 않고 나를 보내신 이를 기쁘게 하기를 추구하기 때문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나는 내 목적을 추구하지 않고 나를 보내신 이의 목적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나는 내 영광을 구하지 않고 나를 보내신 이의 영광을 구하기 때문이다.

요8장 29절에서 똑같은 말씀하십니다.
NIV입니다. 나를 보내신 그분이 나와 함께하신다(현재동사입니다). 항상 함께하신다. 그분은 나를 혼자 내버려두지 않으셨다. 그리고 항상 함께하셨다. 그 이유는 왜냐하면 나는 항상 그분을 기쁘게 하는 일을 행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하나님의 모든 자원으로 예수님과 함께하신 이유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 사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 살 때 하나님이 자원이 함께하십니다.

2)하나님의 목적을 위해 살려면 자기 목적을 위해 살지 않아야 합니다.
제가 우리나라에 있는 수백만 명의 그리스도인들에게 물을 기회가 있어서 여러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십니까? 혹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기를 원하십니까? 하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아니요 하고 대답하시겠어요. 제가 보기에는 많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산다고 혹은 살기 원한다고 말할 것입니다. 그런데 아주 중요한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 살려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려면 자기 목적을 위해 자기 영광을 위해 살아서는 안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말합니다. 나는 나를 기쁘게 하려는 것이 아니고 나를 보내신 이를 기쁘게 하려 한다. 나는 아버지를 공경함이어늘 나는 내 영광을 구하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고 자기 영광을 위해서도 살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서 살고 자기 목적을 위해서도 살기를 원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실제로는 하나님의 영광과 목적을 위해 살지 않습니다. 자기 목적과 영광을 성취하는 범위내에서만 하나님의 영광과 목적을 위해 삽니다.

그런데 여러분의 목적과 영광이 하나님의 목적과 영광 앞에 내려져야 한다는 말입니다. 믿는 사람들에게 가장 전형적인 우상숭배가 혼합주의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고 자기 영광을 위해서 살고.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서 살고 자기 목적을 위해서 살고. 실제로는 자기를 위해서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야고보서 4장 4절 이하에서 말합니다. "간음하는 여자들이여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의 원수임을 알지 못하느뇨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 되게 하는 것이니라 너희가 하나님이 우리 속에 거하게 하신 성령이 시기하기까지 사모한다 하신 말씀을 헛된 줄로 생각하느뇨 그러나 더욱 큰 은혜를 주시나니 그러므로 일렀으되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

제가 어떤 분에게 책을 몇권 주었어요. 거기에 이런 말이 있어요.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헌신적으로 주의 일에 삶을 드린답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헌금만 해도 팁을 주듯이 한답니다.

아시아 선교센타만 해도 한구좌에 100만원 하게 하는 이유는 자기 지교회에 헌금을 하고 그러는 가운데 그렇다고 해도 100원정도 하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의 기본적인 표현에서 지나치지 않을 것이라는 감동을 주셔서 그렇게 했어요. 어떤 사람은 그것 하나 했다고 하나님 앞에서 의무를 다했다고 생각하면 어리석은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산다고 하면서 오늘날 자기가 세워놓은 수준 길 세상적인 영화 자기 목표 자기 계획을 조금도 손해보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확보도는 범위 내에서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산다고 합니다. 그러면서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산다고 합니다. 그것이 무슨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것입니까? 그것이 무슨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 사는 것입니까? 


예수님이 그렇게 살았다면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졌겠어요. 사도바울이 그렇게 살았다면 하나님의 목적이 이루어졌겠어요. 우리나라의 믿음의 선배들이 그렇게 살았다면 우리나라에 이렇게 복음이 확장되었겠어요. 그런데 우리들은 이만큼도 손해보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며서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산다고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려면 자기 영광이 내려져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 살려면 하나님의 목적 앞에 자기 목적이 내려져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죄없는 자로서 우리 죄를 위해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신 이유는 다시는 우리 자신을 위해 살지 말고 예수님을 위해 살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3)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추구할 때 우리 영광은 하나님이 추구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요8장 49-50절에서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나는 귀신들린 것이 아니라 오직 내 아버지를 공경함이어늘 너희가 나를 무시하는도다 50 나는 내 영광을 구치 아니하나 구하고 판단하시는 이가 계시니라”

NIV는 내 영광을 구하는 이가 계시니라 그런데 그분이 심판자시다. 만군의 하나님이 예수님의 영광을 구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예수님을 높이면 높일수록 하나님이 함께하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오늘날도 예수님의 영광을 구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 때 여러분의 영광을 하나님이 추구하십니다. 


저는 한편으로는 십자가 복음을 나누면서 우리가 오랫동안 이 말씀을 들었다. 오래전부터 선교회에 왔다 하면서도 우리 삶이 하나님이 말씀하신 삶에서 멀어진 그래서 이론이 되었고 습관적인 문구가 된 것을 볼 때 많이 힘들었어요. 그런데 최근에 다시 힘을 얻었어요. 여러분이 어떻게 하든 상관없이 저는 힘을 얻을 것 같아요. 대학청년들만 해도 젊은이들이 하나님께 삶을 드리기 원하고 하나님의 길에 서기를 원하고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 삶을 헌신하기를 원하는 저들을 보면서 저들이 지금부터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 삶을 드리면서 신학적으로 무장되고 세상적으로 무장될 때 그들을 통해서 열방을 덮을 수 있는 날이 있다는 것이 보여지면서 제가 힘을 얻기 시작했습니다. 그날을 바라보면서. 


때로는 선교지에서 들려오는 소식을 들으면 앞이 캄캄할 때가 있습니다. 이것밖에 안되는가 할 때, 그런데 그 날을 바라보면서 다시 힘을 얻게 되었습니다. 제가 그런 이야기를 이길수 목사님과 나누었는데 그런 이야기를 해요. 요한 웨슬레가 그렇게 헌신하고 사역했는데 사람이 변하지 않은 것을 보고 너무나 낙심했답니다. 그런데 10몇년이 지난 후에 한 사람이 변한 것을 보고 그것이 계기가 되어 소망을 얻게 되었답니다. 우리의 신앙은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 사는 삶입니다.

내 목적을 위해 하나님이 수단된 삶이 아니라 내 목적이 하나님 앞에 내려진 나를 보내신 이를 위해 사는 삶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목적을 위한 삶입니다. 이것이 우리 신앙입니다. 이 시대가 너무나 타락해서 그런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 이상하게 느껴질만큼 타락했지만 하나님의 진리는 변하지 않습니다.

3.하나님의 방법대로 사는 삶입니다.
성경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의 길을 따라 살라고 합니다. 예수님도 철저하게 하나님의 길을 따라 사셨습니다. 그 길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하나님의 길을 따라야 합니다. 


대표적인 인물이 다윗입니다. 삼상 23장 2-3, 삼하 2:1 5:19 등등을 보면, 다윗은 진정으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행하였음을 볼 수 있습니다. 삼상 30장 같은 경우는 블레셋과 전쟁을 하고 돌아왔는데 자기 가족들과 가축들을 빼앗아 갔고 부하들이 항명하려는 위기 상황에서도 다윗은 하나님께 묻습니다. 그런데 다윗도 하나님 앞에 묻지 않음으로 실패한 적이 있습니다. 언약궤를 처음에 예루살렘으로 가져올 때입니다. 


새 수레를 만들어 법궤를 끌고 오다가 실패합니다. 웃사가 심판받고 죽고 모든 것이 중단되었습니다. 다윗이 화가 났습니다. 분이 터졌지만 나중에 깨닫지요. 자기가 잘못한 것을. 왜냐하면 언약궤는 수레에 메고 가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블레셋의 방법, 세상적인 방법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방법은 레위인이 어깨에 메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방법대로 행하지 않는 것을 회개하면서 하는 말이 묻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고백합니다.


역대상 15장 13절입니다. "무릇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찾지 아니하는 자는 대소 남녀를 무론하고 죽이는 것이 마땅하다 하고” NIV는 말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정하신 방법대로 어떻게 해야할 것인가를 하나님께 묻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우리 신앙은 철저하게 하나님의 방법대로 사는 삶입니다. 오늘은 하나님중심적인 삶의 특징들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하나님중심적인 삶은 하나님의 자원으로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 하나님의 방법대로 사는 삶입니다. 겸손히 하나님 앞에 엎드려 하나님의 자원으로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 하나님의 길을 따라 가기 바랍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생명이 넘치고 유업이 주어지며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아멘.

제10강 하나님중심적인 삶과 예배회복 - 여주봉목사

창세기 1장 1절입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지난 시간까지 타락한 예배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오늘부터 몇 주간은 거짓신앙체계의 예배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우리 신앙이 타락하면 항상 거짓신앙체계에 빠집니다. 거짓신앙체계에 빠지면 우리 신앙 전반에 대한 이해가 달라집니다.

거짓신앙체계는 신앙에 대한 왜곡된 이해로서 가짜입니다. 본인들은 신앙생활을 잘한다고 생각하지만 하나님은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지요. 본인들은 성대하게 예배한다고 하지만 하나님은 전혀 받지 않으십니다. 타락한 예배도 또한 거짓신앙체계의 결과물들입니다. 거짓신앙체계의 예배를 살펴보아야 타락한 예배의 본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거짓신앙체계의 예배를 올바르게 이해하려면 반드시 하나님중심적인 삶과 자기중심적인 삶을 알아야 합니다.

포도나무 교회를 오래전부터 다니신 분들도 있고 나중에 더해져서 다니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다 알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요점만 설교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전혀 하나님이 말씀하시고자 하시는 바가 나누어지지 않습니다.

오늘은 하나님중심적인 삶만 살펴보고자 합니다. 사실은 하나님중심적인 삶과 자기중심적인 삶을 요점만 보려고 했는데 안되겠어요. 그래서 오늘은 하나님중심적인 삶만 살펴보고자 합니다.

1.우리 신앙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중심적인 삶입니다.
1)창조에 나타난 하나님중심적인 삶
하나님이 우리 인간을 창조하실 때부터 하나님중심적인 삶으로 창조하셧습니다. 에덴동산의 선악과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고 에덴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 그곳에 아담을 두셨습니다. 에덴동산은 많은 실과가 있었고 아담에게 마음껏 먹으라고 햇습니다. 그런데 에덴동산의 중앙에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가 있었는데 선악과를 먹지 말라고 했습니다.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사람은 왜 하나님이 선악과를 만드셨는가?: 안 만드셨다면 인간이 타락하지 않으셨을 것인데, 합니다.

그런데 선악과는 두 가지 면에서 우리에게 아주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이 인간을 로봇이 아니라 자유의지를 가진 인간으로 창조한 것을 보여줍니다. 만일 우리가 죄를 지을 수 있는 기회가 없어 죄를 짓지 않았다면 죄은 안지은 것이 아닙니다. 기회가 없었을 뿐입니다. 우리의 순종이 진정한 순종이 되려면 불순종할 수 있는 기회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발적으로 선택하여 순종하여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선악과를 만드시고 인간으로 자발적으로 선택하여 하나님을 선택하여 순종하기를 원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사랑하영 인간이 불순종할 수 있는 가능성까지도 감수하시면서 인간을 자유의지가 있는 인격체로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인간으로 창조하셨습니다. 자발적인 선택에 의해서 하나님과 사랑의 교제를 나룰 가족으로 창조하신 것입니다.

또한 선악과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통치를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처음부터 인간이 하나님의 주권적인 통치 아래 살도록 창조하셨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실 때부터 하나님중심적인 삶을 살도록 창조하셨습니다.

2)아브라함을 부르실 때 나타난 하나님중심적인 삶
인간이 타락하여 하나님을 떠나자 하나님은 하나님을 위한 한 백성을 세우실 계획을 실행하시기 시작합니다. 그것을 위해 아브라함을 부르십니다. 아브라함의 부르심은 오늘 우리에게도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그렇게 세워진 하나님을 위한 한 백성이 이스라엘이고 이스라엘이 실패하자 하나님이 유대인 이방인 차별이 없는 한 백성을 세우셨는데 그것이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심을 보면 하나님이 하나님중심적인 삶으로 그를 부르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를 통해 세워진 한 백성을 하나님중심적인 삶으로 부르셨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창세기 12:1-4절입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2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3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하신지라 4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좇아갔고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그 나이 칠십오 세였더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 어떻게 하나님중심적인 삶으로 부르셨는가를 볼 때 그에게 떠나라고 하시는 것을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75세때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고 합니다. 어디로 갈지도 알지 못하고 떠나라고 합니다. 오직 하나님만을 믿음으로 의지하고 하나님의 말씀에만 순종하도록 훈련시키십니다. 정확하게 하나님중심적인 삶을 살도록 훈련시키십니다. 하나님은 창조할 때부터 하나님중심적인 삶으로 창조하셨습니다. 

타락의 본질은 자기중심적인 삶입니다. 인간이 타락하여 자기중심적인 삶으로 전락하자 하나님께서 하나님을 위한 한 백성을 세우실 때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 가장 그에게 명령하신 삶이 하나님중심적인 삶입니다. 하나님중심적인 삶으로 돌이키기를 원하신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순종하여 나갑니다. 한편으로 롯을 데리고 가는 것을 보면 온전한 순종은 아니었지요. 나중에 넘어지고 실수도 했지만 어떤 단계에까지 성장합니까? 나중에 자신의 아들 이삭을 번제물로 드리기까지 순종합니다.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고 했을 때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시험하는 줄 모릅니다. 


이삭을 드릴지라도 하나님이 재 가운데서라도 이삭을 다시 살리셔서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모든 약속을 이루실 것을 믿는 자리에까지 나갑니다. 하나님은 그를 믿음의 조상으로 삼으십니다. 그리고 그를 통해 하나님을 위한 한 백성을 세우시는데 그 백성에게 말씀하시는 것도 오직 내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고 구약시대부터 말씀하심으로 이 백성은 하나님중심적인 삶을 사는 백성임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하나님중심적인 삶으로 초청하셨는가? 그것이 우리 신앙이기 때문입니다. 더 다른 이유들이 있습니다. 다시 한번 그 구절을 봅시다. 창세기 12장을 다시 한번 봅시다. 2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그에게 한 마디로 말하면 복을 주시려고 했습니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3절에 보면, 이제 그 복이 누구에게까지 미치게 하기를 원하십니까? 열방에게까지. 그러면서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중심적인 삶을 살  때 그곳에 하나님이 복 하나님의 생명이 넘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들에게 하나님중심적인 삶을 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뿐만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중심적인 삶을 살 때 열방이 복을 얻게 됩니다.

어떻게 열방이 복을 얻게 됩니까? 하나님의 백성들을 통해 하나님의 생명이 그들에게 흘러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부터 하나님의 계획은 열방이 복을 받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 아브라함 한 사람에게만 관심이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을 통해서 세워질 하나님을 위한 한 백성에게 관심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하나님을 위한 한 백성을 세우실 때도 그 백성에게만 관심이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그들을 통해서 세워질 열방에 관심이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부터 열방에 관심을 가지셨습니다. 열방이 복을 얻는 것에 관심이 잇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어떻게 이루어지냐면 그것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중심적인 삶을 산다. 둘째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과 영광을 하나님의 백성들 가운데 나타내신다. 셋째 열방이 그 모습을 보고 하나님께 나온다.

우리는 이에 대한 좋은 예를 여호수아 4장 23-24절에서 볼 수 있습니다.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요단 물을 너희 앞에 마르게 하사 너희로 건너게 하신 것이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 앞에 홍해를 말리시고 우리로 건너게 하심과 같았나니 24 이는 땅의 모든 백성으로 여호와의 손이 능하심을 알게 하며 너희로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영원토록 경외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라”

하나님이 왜 요단강을 가르셨는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두 가지가 있는데 첫째는 하나님 백성으로 하나님을 경외하게 하려고 둘째는 열방으로 하나님의 능하심을 보게 하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것을 보고 하나님께로 돌아와 복을 얻게 하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으로 요단강을 건너게 하는 다른 방법이 있었을 것입니다. 배를 만들거나 상류로 우회하게 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보편적인 방법을사용하지 않고 요단강을 가르시고 물줄기를 세우셨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백성이 하나님을 경외하게 하고 열방으로 하나님을 보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여러분 안믿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지 않습니다. 성경도 안믿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볼 수 있는 유일한 길은 하나님의 백성들 가운데 하나님의 영광과 능력과 임재가 실제하는 것을 보는 것입니다. 교회를 통해서 함께하시는 하나님을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들 안에서 그리고 통해서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기를 원하십니다. 그런데 그러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전적으로 하나님만을 믿음으로 의지하여 서며 하나님의 인도에 전적으로 순종하는 한 마디로 줄여서 하나님중심적인 삶을 살아야 가능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부터 믿음에 의한 삶을 강조하셧습니다. 나중에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건지실 때도 광야에서 집중적으로 믿음에 의한 삶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사는 삶을 가르치셨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이런 삶을 살아야 하나님의 목적이 이루어질 수 잇으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반복적으로 하나님께 불순종하자 하나님이 그들을 흩으시고 새로운 세대를 세워서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하실 때 두 번째 세대는 전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하고 순종하는 삶을 살았기 때문에 가나안 땅을 정복하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가나안을 정복하는 것이 가능했습니다. 그리고 그런 하나님의 역사를 이방사람들도 보았기에 예를 들면 라합 같은 사람도 하나님의 행하심을 보고 자신의 삶을 드림으로 구원받았을 뿐아니라 라합은 이방인이요 여자인데도 그리고 그의 전직이 창녀인데도 그의 이름이 예수님이 족보에 오를만큼 하나님이 사람으로 하나님께 더해졌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일하심입니다.

이 모든 삶은 하나님중심적인 삶에서만 가능합니다. 하나님 백성이 하나님중심적인 삶을 살아야만 이것이 가능합니다.

3)이스라엘을 부르실 때 나타난 하나님중심적인 삶
아브라함을 통해서 시작하신 하나님을 위한 한 백성을 세우실 계획을 실현시키기 위해 하나님은 그 놀라운 권능과 능력으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건져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건질 때부터 명령하신 삶은 하나님중심적인 삶이었습니다.


렘7장 22-23절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대저 내가 너희 열조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날에 번제나 희생에 대하여 말하지 아니하며 명하지 아니하고 23 오직 내가 이것으로 그들에게 명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내 목소리를 들으라 그리하면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겠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되리라 너희는 나의 명한 모든 길로 행하라 그리하면 복을 받으리라 하였으나”

우선 여기에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애굽땅에서 건져내신 날에 번제나 희생에 대해서 말하지 않았다는 말은 진짜 그렇다는 말이 아닙니다. 이 말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건져내실 때부터 가장 주된 명령은 가장 본질적인 가장중요한 것 가장 중추적인 것이 번제나 제사와 같은 의식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왜 이렇게 말씀하셨는가? 7장 21절을 보아도 알 수 있듯이 그 당시 많은 의식들이 있었지만 가장 중요한 명령이 하나님중심적인 삶에서 떠나 있었어요. 그래서 그 모든 의식들이 아무런 의미가 없었어요. 가장 핵심적인 것은 너희가 내 목소리를 청종하고 너희가 내 모든 길로 행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중심적인 삶을 사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왜요? 하나님을 위한 한 백성은 하나님중심적인 삶을 살기 위해서 부르신 것이니까. 


그러면 성경 어디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건져내실 때부터 이렇게 말씀하셨는가?


두 구절을 대표적으로 봅니다.
한 구절은 출19:3-6절입니다. "모세가 하나님 앞에 올라가니 여호와께서 산에서 그를 불러 가라사대 너는 이같이 야곱 족속에게 이르고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라 4 나의 애굽 사람에게 어떻게 행하였음과 내가 어떻게 독수리 날개로 너희를 업어 내게로 인도하였음을 너희가 보았느니라 5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열국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6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할지니라”

우리가 수없이 살펴본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애굽에서 건져내신 주된 목적은 가나안이 아니라 그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하기 위함이었습니다.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에로 인도하기 위함이었습니다.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 가운데서 하나님이 목소리를 듣고 하나님의 어약을 지키는 삶을 살라고 명령하십니다. 한 마디로 하나님중심적인 삶을 살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하나님중심적인 삶을 살면 그들에게 하나님의 복과 생명이 넘치게 될 것인데 무엇이 가장 큰 복입니까? 열국 중에서 그들이 특별한 소유가 되고 열국을 위한 하나님 앞에서 제사장나라가 되고 거룩한 나라가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이것이 복이며 생명입니다. 그들이 하나님중심적인 삶을 살 때 그들에게 이런 복이 있을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다른 한 구절은 신30:15-16절입니다. 신명기는 두 번째 율법이라는 말씀입니다.
“15 보라 내가 오늘날 생명과 복과 사망과 화를 네 앞에 두었나니 16 곧 내가 오늘날 너를 명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 모든 길로 행하며 그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 하는 것이라 그리하면 네가 생존하며 번성할 것이요 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가 가서 얻을 땅에서 네게 복을 주실 것임이니라”

하나님은 우리가 생명을 택하기를 원하십니다. 복을 택하기를 원하십니다.
그 생명과 복을 택할 수 있는 길이 무엇인가? 세 가지 명령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합니다. 마음과 뜻과 성품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말입니다. 다음에 하나님의 모든 길로 행하라 하나님의 모든 법도와 명령을 지키라 한 마디로 하나님중심적인 삶을 살라는 말입니다. 그러면 복을 주실 것이라는 것입니다. 복중에 하나가 너희가 들어가 차지할 땅에서 너희 생명이 길리라는 것입니다. 


예레미야서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중심적인 삶에서 자기중심적인 삶으로 타락하자 하나님이 유업으로 주신 그 땅에서 쫓겨납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하나님을 위한 한 백성을 이스라엘을 세우시면서 그들에게 하나님중심적인 삶을 명령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중심적인 삶을 살 때 그들에게 하나님의 생명과 복이 있을 것을 말씀하셨어요. 그드링 제사장나라가 되고 특별한 소유가 되고 거룩한 나라가 되고 하나님이 주실 유업의 땅을 차지하게 그 땅에 생명이 길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바로 하나님중심적인 삶을 살 때. 이 하나님의 명령은 하나님의 새백성인 교회를 위해서도 매우 중요합니다.

4)예수님의 삶 속에 나타난 하나님중심적인 삶
창조하실 때부터 하나님중심적인 삶으로 창조하셨고 타락하자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아브라함을 부르셨는데 그때도 하나님중심적인 삶으로 부르셨고 이스라엘도 하나님중심적인 삶으로 부르셨습니다. 하나님이 인류를 구속하시고 하나님의 백성을 완성하기 위해 예수님을 보내셨는데 예수님의 삶을 보아도 하나님중심적인 삶을 볼 수 있습니다. 특히 예수님은 우리 신앙과 사역과 삶을 위한 모델입니다. 뿐만아니라 예수님의 우리의 목표이기도 합니다. 우리를 예수님처럼 빚어가십니다. 그래서 엡4장을 보면 교회의 목표가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의 충만함에 이르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우리의 모델이자 목표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누구보다 하나님중심적인 삶을 사셨고 하나님중심적인 삶을 전하셨어요. 예수님이 사신 하나님중심적인 삶에 대해서는 다음 주에 살펴볼 것입니다.

예수님은 집중적으로 하나님중심적인 삶을 전파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집중적으로 전하시는 메시지는 하나님나라의 메시지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전파하신 하나님 나라는 지역이나 영토가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적인 통치를 말합니다. 예수님은 이땅에 하나님의 백성을 완성하기 위해 오셨습니다. 그분이 누구보다 분명하게 하나님중심적인 삶을 전하셨습니다. 왜?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중심적인 삶을 살아야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전파하신 메시지 대표적인 한 구절을 보겠습니다. 누가복음 14:26-33절입니다.

이 말씀은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르려고 올 때 하신 말씀입니다. 이 말씀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이 물러가고 더 이상 따르지 않은 경우도 많았습니다.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및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고 27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28 너희 중에 누가 망대를 세우고자 할진대 자기의 가진 것이 준공하기까지에 족할는지 먼저 앉아 그 비용을 예산하지 아니하겠느냐 29 그렇게 아니하여 그 기초만 쌓고 능히 이루지 못하면 보는 자가 다 비웃어 30 가로되 이 사람이 역사를 시작하고 능히 이루지 못하였다 하리라 31 또 어느 임금이 다른 임금과 싸우러 갈 때에 먼저 앉아 일만으로서 저 이만을 가지고 오는 자를 대적할 수 있을까 헤아리지 아니하겠느냐 32 만일 못할 터이면 저가 아직 멀리 있을 동안에 사신을 보내어 화친을 청할지니라 33 이와 같이 너희 중에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우리가 예수님이 제자가 되려면 우리 자신 우리 가족 우리 재산까지도 하나님의 주권 아래 내려져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예나 지금이나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 자신 우리 가족 우리 돈일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런 것들이 하나님의 주권 아래 내려져야 우리가 예수님의 제가가 될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우리 삶에서 진정한 주인이 되려면 그런 소중한 것들이라고 하나님이 주권 아래 내려져야하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우리들이 말로는 하나님이 우리 주인이시고 왕이라고 할지라도 그런 것들이 하나님의 주권 아래 내려지지 않으면 실제로는 하나님이 우리의 주인이 아니고 왕이 아닙니다. 우리 자신이 우리의 주인이고 왕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께 순종할 때도 우리 자신에게 도움이 되는 범위 내에서 우리 가족에게 도움이 되는 범위 내에서 우리 돈에 도움이 되는 범위 내에서만 선별적으로 순종하게 됩니다. 우리의 유익에 순종을 결정합니다. 실제로는 우리가 주인입니다.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고 왕이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래서 안식일을 철저히 지키고 십일조로 철저히 드렸습니다. 그런데 마23장을 보면 알 수 있듯이 그들의 삶 속에는 개인적인 야망 명예욕 세상에 대한 집착, 돈에 대한 탐심이 전혀 내려져 있지 않았습니다. 실제로 그들의 삶에서 하나님이 주인이 아니었고 그들 자신이 주인이었습니다. 그래서 요5장 42절부터에서 예수님은 그들에게 나는 다만 너희 속에 하나님을 사랑함이 없음을 알았다고 말씀하십니다.

이처럼 우리 신앙은 하나님중심적인 삶입니다.

2.하나님중심적인 삶에만 하나님의 생명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통치를 부담스러워합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싫어하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믿는 사람이건 안믿는 사람이건 하나님이 주시고자 하는 복을 원하지 않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나오기를 꺼려하는 주된 이유는 하나님이 그들의 삶 속에서 요구하시는 주권적인 통치 때문일 것입니다. 심지어 하나님의 백성들 사이에서도 이처럼 주권적인 통치를 부담스러워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중심적인 삶에만 모든 하나님의 생명이 있다는 사실을 반드시 기억해야만 합니다. 하나님중심적인 삶의 반대인 자기중심적인 삶에는 어떠한 하나님의 생명도 없습니다.

에덴동산의 삶을 보아도 명확히 볼 수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주권적인 통치 아래 살 때에는 그들에게 하나님의 모든 생명이 넘쳣습니다. 하나님의 친밀함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내려오셔서 그들과 교제하셧습니다. 하나님의 진정한 보호가 있었습니다. 그들에게는 생명나무가 있었습니다. 부부사이에도 온전한 연합이 있었습니다.  온전한 평강과 안식이 그들의 삶 속에 있었습니다. 자연세계도 그들에게 협조적이었습니다. 물질적인 풍요도 그들에게 있었습니다. 그들은 전인적으로 개인적으로 영적으로 정서적으로 내적으로 육신적으로 건강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앞으로 보겠지만 자기중심적으로 전락하자 그 모든 하나님의 생명이 그들에게서 걷혔습니다. 출19:3-6절 신30:15-16, 렘7:22-23절 등등의 모두가 공통적으로 하나님이 저들에게 하나님중심적인 삶을 살라고 명령하시면서 그들이 하나님중심적인 삶을 살면, 그들에게 있을 하나님의 복과 하나님의 생명에 대해 언급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중심적인 삶을 살 때 우리 삶속에 하나님의 생명과 복을 넘칠 뿐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중심적인 삶을 살 때 우리를 통해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집니다. 다시말하면 우리를 통해서 하나님의 생명이 열방으로 흘러갈 수 있기 때문에 열방이 복을 얻게 되는 하나님의 계획이 그때에야 비로서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11장 28-30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28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30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수고하고 지친 영혼들에게 예수님께서 안식을 약속하십니다. 여기 예수님이 약속하신 안식은 단순히 마음의 평안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삶의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의 생명이 함께하시는 살롬 평강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이 안식을 약속하시면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중심적인 삶을 명령하십니다. 너희는 내게 와서 내 멍에를 매고 내게 배우라고 하십니다. 이 하나님의 생명은 하나님중심적인 삶에만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하나님중심적인 삶이 쉽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우니라고 하십니다.

오늘날 적지 않는 성도들은 예수님이 주시는 생명과 평강과 안식을 원하지만 하나님중심적인 삶은 원하지 않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진정한 평강과 안식을 경험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길 원하시는 평안과 안식과 생명은 예수님이 우리의 진정한 왕이 되시는 하나님중심적인 삶에서만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1부예배 시간에 오늘 설교를 하다 보니까 설교가 길지 않을 것 같아요. 그래서 기도사역을 할 시간이 있어서 했어요. 기도하는데 하나님이 이런 부분들을 보게 하셨어요. 사단이 우리 속에 거짓말을 심어놓았는데 그중에 하나가 하나님중심적인 삶은 어렵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삶이 쉽다고 하셨는데. 


어려운 것이 아니고 구약시대의 예레미야 시대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자기 목적과 탐심에 집착하고 돌이키기기를 거부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마음 속에 생각 속에 표현은 하지 않지만 하나님은 대단히 모진 분으로 생각합니다. 우리가 하지 못할 너무나 높은 수준을 요구하시는 모진 분으로 여깁니다.

실제로는 자기 탐심 때문에 그것을 내려놓지 않고 전환하지 않으면서 사단의 거짓말에 속아 자기중심적인 삶을 정당화하면서 하나님중심적인 삶에 하나님의 생명이 있기 때문에 지금이라도 그 길로 돌아오라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이 사람을 거들떠 보지도 않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모진 분으로 여깁니다. 그런 것이 성도들 속에 적지 않게 있습니다. 


얼마나 자신이 사단의 거짓말에 속아서 자기중심적인 삶을 사는 것을 정당화시키고 오히려 하나님께 원망하고 있는가를 깨닫고 돌이키고 돌이켜 진실로 회개하고 하나님중심적인 삶에만 생명이 있기 때문에 그 길로 돌이키라고 하는 하나님의 사랑을 인식하고 주님께로 돌아서도록 결단을 촉구하며 초청했을 때 여러분 가운데 사단의 거짓말을 파괴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오늘날 적지 않는 목회자들은 하나님중심적인 메시지를 전하기를 꺼려합니다. 많은 성도들이 그것을 부담스러워하기 때문입니다. 예레미야서를 보면 알 수 있듯이 하나님의 백성이 타락하면 하나님중심적인 메시지를 부담스러워합니다. 그리고 말로는 하지 않을이지 모르지만 행동으로 여러 가지로 하나님중심적인 메시지에 대해서 거부반응을 합니다. 목회자들에게 압력을 넣습니다. 


목회자들은 사람들에게 소위 은혜를 끼치기 위해서 그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서 하나님중심적인 메시지를 전하지 않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생명은 하나님중심적인 삶에만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중심적인 삶으로 돌이키는 것만이 그들이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예수님은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이 전파하신 하나님중심적인 메시지로 인하여 부담을 느끼고 떠나는 것을 감수하셨습니다. 그러면서까지 하나님중심적인 메시지를 전하셨습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하신 것은 흩어진 사람들에 대해서 무관심하거나 그들을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위해ㅔ 십자기를 지러 오신 분임을 기억하십시오. 


예수님이 그렇게 하신 것은 하나님중심적인 삶이야말로 그들이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중심적인 삶에만 하나님의 생명이 잇고 이런 삶을 살 때 그들안에서 그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예수님보다 더 동정적이어서는 안됩니다. 인간을 사랑하는 데 있어서 예수님보다 더 사랑하는 분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분은 철저하게 하나님중심적인 삶을 전하셨습니다. 자신이 먼저 하나님중심적인 삶을 살았고 철저하게 하나님중심적인 삶을 전하셨습니다.

여러분 렘23장에 보면 양떼들을 흩어버린 목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엄중한 심판에 대해 기록하고 있습니다. 1-2절부터 봅시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 목장의 양 무리를 멸하며 흩는 목자에게 화 있으리라 2 그러므로 이스라엘 하나님 나 여호와가 내 백성을 기르는 목자에게 이같이 말하노라 너희가 내 양 무리를 흩으며 그것을 몰아내고 돌아보지 아니하였도다 보라 내가 너희의 악행을 인하여 너희에게 보응하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3-4절입니다. "내가 내 양 무리의 남은 자를 그 몰려갔던 모든 지방에서 모아내어 다시 그 우리로 돌아오게 하리니 그들의 생육이 번성할 것이며 4 내가 그들을 기르는 목자들을 그들 위에 세우리니 그들이 다시는 두려워하거나 놀라거나 축이 나지 아니하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여기 양들을 흩어버린 목자들이 누구입니까? 하나님중심적인 메시지를 전하자 그 메시지를 부담스러워해서 흩어진 구절이 아닙니다. 예레미야 시대에 의식은 많았을지 모르지만 하나님의 백성들이 자기중심적인 삶으로 타락해서 하나님의 심판이 코 앞에까지 다가온 상황에서도 그들이 듣기 원하는 평화의 메시지 축복의 메시지를 전하며 하나님중심적인 메시지를 전하지 않은 목자들을 두고 한 말씀입니다. 그러면 왜 그들은 양떼들을 흩어버린 목자라고 표현할까요? 그들은 양들을 하나님께로부터 흩어버린 자들이라고 합니다. 


더 나아가 그들은 양들을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신 유업에서 흩어버린 자들이었습니다. 이들을 두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은 그 양들을 불쌍히 여기셔서 흩어진 곳에서 다시 모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회복에 대한 약속입니다. 그리고 그들을 위해 목자들을 세우실 것이라 말합니다. 돌보고 보살피는 목자들 그래서 다시는 양들이 놀라거나 두려워하는 일들이 없는. 

그러면서 목자들의 대표적인 분을 다윗의 한 가지로 말합니다. 다윗의 한 가지는 메시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중심적인 메시지를 전하셨습니다. 삶으로 하나님중심적인 삶을 사셧고 가르쳤습니다. 하나님께로 돌아오도록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중심적인 삶에만 하나님의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길이 그들이 살 수 잇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저는 어떻게 우리 신앙이 하나님중심적인 삶일까를 살펴보았습니다. 
우리 신앙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중심적인 삶입니다. 
창1장 1절의 주어가 하나님입니다. 
성경전체의 주어는 하나님입니다. 
성경전체가 말하는 중심은 하나님중심적인 삶입니다. 
신앙이 타락하면 사람들이 자기중심적인 삶을 삽니다. 
자기중심적인 삶을 살면 사람들이 하나님중심적인 삶을 싫어합니다. 
또 말씀을 전하는 자들도 자기중심적인 메시지를 전할 수 있습니다. 
자기중심적인 사단의 거짓말이 여러분의 생각에서 파괴되기를 축복합니다. 
하나님중심적인 삶은 어려운 것이 아니라 쉽습니다. 깨닫게 되기를 축복합니다. 아멘.

제9강 사람의 교훈과 예배회복 - 여주봉목사

이사야서 29장 13절 이하입니다.
“주께서 가라사대 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를 가까이하며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나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났나니 그들이 나를 경외함은 사람의 계명으로 가르침을 받았을 뿐이라”

오늘 설교는 어려울 수 있습니다. 우리가 주일낮  간을 통해서 예배회복시리즈로 살펴보고 있습니다. 예배가 회복되면 하나님이 예배 가운데 임재하시고 운행하셔서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을 행하실 것입니다. 나라와 민족의 구원 우리 가정의 구원도 하나님이 하셔야만 합니다. 결국 하나님이 하셔야 합니다. 그 핵심은 예배회복입니다. 그래서 시리즈로 살펴보고 있습니다. 그동안 2개월  도로 필요성에 대해서 살펴보았고 지금은 타락한 예배에 대해 살펴보고 있습니다. 


우리는 타락한 예배를 성경이 말하는 참된 예배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예배가 하나님이 원하시는 참된 예배로 돌이키기 위해서 타락한 예배를 살펴보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우리가 그동안 살펴본 부분은 이사야 시대건 예레미야시대건, 예수님 시대건 신앙이 타락하면 예배가 타락하게 되었다는 것을 보았습니다. 


예배가 타락하면 세 시대마다 같은 두 가지로 특징이 나타났습니다. 하나는 마음이 없는 입술 뿐인 예배였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그들의 예배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사람의 교훈에 기초한 예배였음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지난 두 시간은 마음이 없는 입술 뿐인 예배가 무엇인가를 보았습니다.

우리가 성경적인 관점을 이해하지 못하면 하나님의 관점에서는 마음이 없는 입술 뿐인 예배인데 본인들은 정작 깨닫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오늘은 그 중에서 사람의 교훈에 기초한 예배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1.사람의 교훈에 기초한 예배
우리 신앙은 모든 면에서 성경에 기초해야 합니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우리 신학 삶 사역에 있어 하나님의 기준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예배도 하나님이 기뻐하는 예배가 되려면 말씀에 기초해야 합니다. 그러나 신앙이 타락하면 우리 예배가 말씀이 아니라 사람의 가르침에 기초하게 됩니다. 심각한 사실은 정작 자신들은 자신들의 예배가 사람의 교훈에 기초한 예배라는 사실을 모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신앙의 모든 면에서 그렇듯이 신앙이 타락하면 영적인 분별력이 어두워지기 때문에 자신의 상태를 하나님의 관점에서 볼 수 없게 됩니다.

한 가지 예를 봅시다. 이사야 시대의 예배입니다. 이사야 1장 10-15절입니다.
"너희 소돔의 관원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너희 고모라의 백성아 우리 하나님의 법에 귀를 기울일지어다 11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숫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숫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12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그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뇨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13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나의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 14 내 마음이 너희의 월삭과 정한 절기를 싫어하나니 그것이 내게 무거운 짐이라 내가 지기에 곤비하였느니라 15 너희가 손을 펼 때에 내가 눈을 가리우고 너희가 많이 기도할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니 이는 너희의 손에 피가 가득함이니라”


오늘은 주일날 낮이니까 이 구절만 읽었습니다. 제가 책으로 쓰고 있는데 책 나오면 보세요. 출20:8장은 안식일에 대해서 민10:10절은 월삯예배, 레23장은 모든 절기에 대해서 레22:17-22절은 짐승의 제사를 드리는 법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런 구절들과 함께 오늘 본문을 대조해본다면 그 당시 사람들은 성경대로 안식일 지키고 월삯에배드리고 성경에서 말한대로 절기 지키고 성경에서 말한대로 제물을 드렸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자기들의 예배가 성경에 기초한 예배라고 생각했을까요 아니면 사람들의 의견에 기초한 예배라고 생각했을까요. 정확하게 그들은 자기들의 예배가 누구보다 성경에 기초한 예배라고 확신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경대로 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들의 예배에 대해서 하나님은 뭐라고 하십니까? 너희의 예배가 사람의 교훈에 기초한 예배로서 헛된 예배라고 하십니다.

바리새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바리새인들은 누구보다 성경을 열심히 연구하고 강조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성경을 의지하고 살았다고 확신했고 그들의 소망을 율법에 두고 산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성경안에 하나님의 모든 진리와 지식의 모범이 들어있다고 확신했고 그 성경으로 율법으로  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자신들은 누구보다도 잘 안다고 자부했습니다. 그들에게 자기들의 예배가 성경에 기초한 예배인지 사람의 교훈에 기초한 예배냐고 묻는다면 당연히 그들은 성경에 기초한 예배라고 확신했을 것입니다. 


그런 이들에게 예수님이 마태복음 15장 17-19절에서 사람의 교훈으로 가르치니 너희가 나를 헛되이 경배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하나님이 말씀하신 의미를 알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관점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오늘도 사람의 교훈에 기초한 예배를 살펴보되 성경이 말하는 사람의 교훈에 기초한 예배가 무엇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이사야 시대나 바리새인들과 똑같이 될 수 있습니다. 누구보다 말씀 말씀 강조하면서 성경을 열심히 연구하면서 우리는 우리의 예배가 성경에 기초한 예배라고 자부하는데 하나님은 바리새인이나 이사야 시대의 예배와 같이 말씀하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관점이 중요합니다.

2.사람의 교훈에 기초한 예배의 의미
하나님은 무엇을 두고 사람의 교훈에 기초한 예배라고 말씀하시는가. 사람의 교훈에 기초한 헛된 예배가 되지 않기 위해서는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는가?

1)우리의 예배는 철저하게 말씀에 기초해야 합니다.
우리 모든 신앙은 성경에 토대해야 합니다. 우리 예배도 말씀에 토대해야 합니다. 그런데 성경에 토대해야 하려면 우리 삶이 우리 예배가 성경에 토대한 것이 되려면 우리에게 반드시 해야할 것이 있습니다. 

그중에 하나 아주 중요한 것이 우리가 철저하게 신학을 위한 네 가지 출처의 올바른 순서에 서야 합니다. 간단하게 설명하겠어요. 신학은 하나님에 관한 학문이며 이론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에 관해서 알 수 있는 통로가 네 가지가 있습니다. 성경 전통 이성(합리적인 사고) 경험입니다. 그래서 네 가지를 신학을 위한 네 가지 출처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아주 중요한 것이 출처의 우선순위입니다. 이 네 가지 출처의 우선순위입니다. 우선순위는 성경 전통 이성 경험 순서입니다. 순서에 따라 중요성을 갖습니다. 성경이 가장 중요한 권위를 갖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성령으로 감동되어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예배가 하나님의 말씀에 토대 해야 하는데 이 올바른 순서 위에 우리 예배가 세워져야 합니다.

2)신학을 위한 네 가지 출처는 다 중요합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정도로 중요합니다. 또한 전통도 중요합니다. 이성도 중요합니다. 경험도 중요합니다. 학자들은 전통을 하나님에 관한 신학을 위한 하나의 출처로 꼽습니다. 예를 들면 삼위일체하나님입니다. 이것은 전통에서 나온 것입니다. 물론 성경에 보면 하나님이 삼위일체 하나님이심을 알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1장 1절 이하입니다. 


여러 구절에서 예수님이 삼위일체 하나님이심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 어디에도 삼위일체라는 용어는 안나옵니다. 이것은 전통을 통해서 도움을 준 것입니다. 기독교 2000년 역사를 통해서 하나님은 수없는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구원의 교리 믿음에 의한 삶 성령에 의한 삶 은혜에 의한 삶 등 성경에 대한 진리들을 깨닫게 하셨습니다. 이 진리들은 우리가 하나님에 관해서 올바로 아는데 있어서 없어서는 안될 보물창고와 같습니다. 아주 중요합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지난 2000년 동안 깨닫지 못한 것을 깨달았다고 말하면 일단은 의심해야 합니다. 이처럼 전통이 중요합니다.

이성 즉 합리적인 사고도 중요합니다. 하나님이 합리적인 분이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성을 주셨습니다. 여러분 기독교는 세상의 다른 모든 종교보다 훨씬 더 합리적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주신 합리적인 사고는 하나님의 뜻을 발겨나고 하나님의 뜻을 깨닫는데 너무나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경험도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우리 신앙은 실제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어느 책을 보았는데 챨스 스펄전 목사님이 이렇게 말했다는 말이 기록되어 있었어요. “어떤 사람들은 자기 자신들에게 나타난 성령의 역사에 관해서는 너무나 많은 말을 하면서도 다른 사람에게 나타난 성령의 역사에 대해서는 조금도 생각하지 않고 있는데 이런 현상은 이상한 것이다.” 이 말 속에는 우리 경험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신앙의 출처들은 다 중요합니다.

3)다른 출처들이 성경 위로 가면 문제가 생깁니다.
네 가지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성경입니다. 최종적인 권위를 가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전통도 합리적 사고도 경험도 중요하나 성경 아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성경 위로 가면 문제가 발생합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가 아무리 말씀 말씀 해도 실제적으로는 말씀에 의한 삶이 안됩니다. 그래서 미국의 덴버 신학교의 조직신학 교수인데 정성욱교수입니다. 석사와 박사 때 칼빈을 연구한 분입니다. 


제가 어느 기독교 신문에 인터뷰한 내용을 보았습니다. "오늘날 신학자의 주장이 성경보다 우위에 있으면 성경의 권위를 약화시키는 것은 물론 신학을 인간의 학문으로 만들어버린다.” 학자의 의견이 성경 위로 올라가면 그렇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날 우리가 가지고 있는 많은 전통들이 훌륭한 학자들의 의견에 기초하고 있다는 사실을 압니까? 학자들의 의견도 중요하나 그것이 성경 위로 가면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를 약화시킬 뿐아니라 신학이 아니라 인학 인간의 학문으로 약화시킨다고 합니다. “우리의 신앙이 신학자의 주장보다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해야 하며 모든 신학적 주장들도 그것이 성경에 근거한 것인지 성경으로 지지할 수 있는 것인지를 검증해야 한다.” “교회의 비성경적인 전통들 소위 장로들의 유전에 대해서도 분명하게 성경적으로 분석 비평하고 대안을 제시해야 한다.”고 정확하게 주장하고 있습니다. 칼빈박사가 한 이야기입니다. 제가 왜 칼빈박사를 강조하냐면 칼빈이 오늘날 적지 않는 사람들에게 칼빈이 성경 위로 올라가 있기 때문입니다. 

한 가지 이 문제가 되는 요소, 예를 들면 카톨릭에서는 마리아에게 예배를 드립니다. 마리아에게 예배하면 마리아게 예수님께 기도하고 예수님이 하나님께 기도해서 하나님이 응답한다고 생각합니다. 마리아에게 기도하고 예배합니다. 이런 에배는 성경에 태도한 예배가 아닙니다. 아무리 전 세계의 기독교인들이 마리아에게 드린 기도가 성경적이라고 말할지라도 성경 어디에도 그런 내용은 없습니다. 이렇게 드린 이유는 전통이 성경 위로 가서 그런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카톨릭의 문제만이 아닙니다. 카톨릭의 문제만이라면 제가 여기서 설교할 필요가 없습니다. 특별히 여기서 한 가지 집고 넘어가야할 것은 우리가 교리적으로는 전통이면서 실제 삶에서는 전혀 그렇지 않을 수 잇다는 것입니다. 제가 전통이 성경 위로 가서 문제가 된 한 가지 예를 마리아에 대한 예를 들었는데. 이 말에 대해서 보수주의적인 입장에 있는 한국의 목회자들과 성도들이 이 말에 동의하지 않을 분이 있겠습니까? 다 동의할 것입니다. 전통이 성경 위로 가면 문제가 된다는 말에 다 동의합니다. 문제는 우리의 실제 삶은 어떠하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말의 고백이 아니라 우리 신앙의 신조가 아니라 우리 행동이 말하는 소리를 들으십니다. 우리의 행동이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 무엇을 믿는가를 실제로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교리적으로는 전통으로 고백할지 몰라도 실제 우리 행동이 어떤가를 보면 심각하다는 것입니다. 제가 단도직입적으로 한 가지를 물을께요. 일반적으로 우리나라 교회에서 교단법을 성경에 비추어서 건증해보아야 합니까? 아니면 교단법이 성경보다 우선입니까? 답은 다 알지요. 그런데 실질적으로 어떻게 하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이 한 가지만 해도 우리는 다른 출처들이 성경위로 가는 문제가 카톨릭이나 다른 사람들의 문제만을 아님을 알 수 있어요.

제가 집회를 다니거나 강의하다가 보면 이런 부분들도 보여져요. 오늘날 교회에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것, 성경에서 보면 이사야 55장 8-9절에서 하나님의 뜻과 우리 뜻은 다르고 하나님의 생각과 우리 생각은 다르고 합니다. 고린도전서 2장 9-11절을 보면, 하나님의 뜻과 생각은 우리의 지혜나 생각으로 알 수 없다. 그것은 성령의 조명으로만 알수 있다고 합니다. 다시말하면 우리의 의견을 모아서 하나님의 뜻이 분별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에서 개인들이 성도들이 하나님의 뜻을 분별할 때 적지 않는 경우에 하나님을 전혀 믿지 않는 하나님의자리가 전혀 없는 국회나 회사나 로타리 클럽에서 하는 똑같은 방식으로 교회에서 하는 것 아세요. 성경은 그것이 전혀 아니라고 하는데; 그것은 말로는 말씀 말씀 말할지 몰라도 실제로는 성경이 전혀 위로 안 올라가 있어요. 사람의 의견이 위로 올라가 있어요.

제가 한 두 가지 예만 들었어요. 이처럼 우리의 실제적인 행실을 보아야 합니다.
그런 차원에서 이 부분을 보아야 합니다.

3.사람의 의견에 의한 예배의 심각성
그러면 사람의 의견에 의한 예배가 무엇입니까? 이제 짐작하실 것입니다. 사람의 의견에 의한 예배는 전통이나 당시에 팽배한 신앙관이나 일부 신학자들의 의견이나 합리적인 사고나 개인의 경험 등 이런 것들이 성경보다 위에 가면 그런 가치관에 토대한 예배는 성경이 아니라 사람의 의견에 의한 예배가 됩니다. 그렇게 되면 아무리 말로는 말슴을 외치고 교리적으로는 전통적으로 믿고 받아들일지라도 실제 예배와 삶에서는 말씀이 기초가 아닌 사람의 의견이 토대가 된 삶과 예배가 됩니다. 


그런 예배는 헛된 예배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이런 것들 중에 우리의 예배를 가장 타락하도록 영향을 끼치는 것이 전통입니다. 많은 전통은 그것이 시작할 때 훌륭한 하나님의 사람들이 가지고 있었던 전문가적인 의견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학자들의 의견과 전통이 같이 가기도 합니다. 전통이 우리의 예배가 사람에 기초한 예배가 되도록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요소 중에 하나입니다.

그래서 제가 남은 시간은 전통의 위험성을 살펴볼 것입니다. 바꿔말하면 사람의 의견에 의한 위험성을 살펴볼 것입니다. 그런데 먼저 말씀드릴 것은 전통 그 자체는 문제가 아닙니다. 전통은 헬라어로 파라도시스라는 말입니다. 전해내려오는 것 혹은 전해주는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말 자체는 중립니다. 좋을 수도 있고 나쁠 수도 있어요. 문제는 전통이 성경 위로 갈 때 심각해집니다. 이렇게 되어지면 사람에 의한 예배가 되고 우리에게 심각한 결과를 초래합니다.

하나하나 살펴봅시다.

1)우리 영적인 눈을 어둡게 만듭니다.
전통이 성경 위로 가면 우리의 영적인 눈은 어두워집니다. 영적인 분별력이 사라집니다. 성경적인 좋은 예가 있습니다. 요한복음 9장입니다. 날때부터 소경된 자를 고치신 사건이 나옵니다. 눈 먼 사람을 고친 것은 하나의 표적입니다. 세상의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나타내는 표적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로서 세상의 빛으로 오신 분임을 증거하고 드러내고 싸인으로 보여주기 위한 사건입니다. 그 엄청난 일을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그들이 가지고 있던 전통 때문에 그 모든 것이 가려진 것입니다. 안식일도 범하는 놈이 무슨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쓸데없는 소리 말라고 합니다. 여러분 안식일날 땅에 침을 뱉어 진흙을 안들면 안된다는 말이 있습니까? 전혀 없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전통이 가린 것입니다. 무서운 것이 이것입니다. 전통은 구속력이 있습니다. 영향력이 있습니다. 성경만 해도 전통적인 관점에서 해석하도록 우리를 강요합니다. 


안식일을 범한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으로부터 온 사람이야 말할 때 예수님의 제자가 우리 선생님이 무슨 안식일을 범했는데요 하고 물으면 그들은 구약성경에 나오는 안식일에 일하지 말라는 구절들을 언급할 것입니다. 그러면서 안식일을 범했다고 화를 내면서 대적할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말하는 안식일에 일하지 말라는 말은 일상적인 일에서 쉬고 육신의 휴식을 취할 뿐아니라 하나님께 예배하는 날로 삼으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처음에는 좋은 동기로 시작했을 것입니다. 일을 하지 않기 위해서 일을 세분화했을 것입니다. 어떤 훌륭한 선생님이 가르침에 토대를 두고 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전통으로 내려오면서 굳어져서 성경과 동등하게 됩니다. 무엇이 성경인지 무엇이 전통인지가 구별이 안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을 어기는 것인지 전통을 어기는 것인지가 구분이 안되는 것입니다. 


안식일에 일하지 말라는 성경을 보더라고 전통적인 관점에서 이 구절을 보도록 전통이 구속합니다. 영향력을 행사합니다. 그렇게 되니까 눈이 가려지는 것입니다. 못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오셔서 구속의 역사를 이루시며 인류구원의 일을 이루시고 있을 뿐아니라 하나님의 아들로서 세상의 빛으로 오신 분임을 엄청난 능력으로 계시하는데도 불구하고 눈이 어두워진까 전혀 못보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날도 그렇습니다.

2)전통이 말씀 위로 가면 성경말씀을 어기게 만듭니다.
바리새인의 전통에 기초한 에배 사람의 의견에 기초한 예배를 성경 여러 곳에서 볼 수 있습니다. 대표적인 곳이 마태복음 15장입니다. 
15장 1-2절을 보면 "그 때에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예루살렘으로부터 예수께 나아와 가로되 2 당신의 제자들이 어찌하여 장로들의 유전을 범하나이까 떡 먹을 때에 손을 씻지 아니하나이다”


당시에는 전통적으로 손을 씻고 먹지 않으면 부정하게 될 것이라고 받아들여졌습니다. 의식적으로라도 간단하게 담그고라도 먹었습니다. 예수님이 그러자 답하십니다. 3-6절입니다.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는 어찌하여 너희 유전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느뇨 4 하나님이 이르셨으되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시고 또 아비나 어미를 훼방하는 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셨거늘 5 너희는 가로되 누구든지 아비에게나 어미에게 말하기를 내가 드려 유익하게 할 것이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고 하기만 하면 6 그 부모를 공경할 것이 없다 하여 너희 유전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는도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님께 따지지요. 당신들은 왜 전통을 범합니까? 식사할 때 왜 손을 씻지 않고 먹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이 너희는 어찌하여 장로의 전통을 가지고 성경을 어기느냐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느냐고 하시면서 말씀하십니다. 그러면서 고르반을 언급하십니다. 고르반이란 성경중에 십계명 중 5계명이 부모를 공경하라고 합니다. 공경하라는 말에는 존경하라는 말 뿐아니라 부모의 필요를 채우는 것도 포함됩니다. 즉 십계명 중에는 부모의 필요를 부양하는 것도 포함됩니다. 


심지어 학자들은 1계명부터 5계명까지를 하나님께 대한 계명으로 분류하기도 합니다. 부모를 공경하라는 계명을 하나님에 관한 계명에 분류하기도 합니다. 그만큼 부모는 가정에서 하나님이 세우신 권위자라는 말입니다.

그 당시 그들은 어떻게 가르쳤어요. 부모님께 생활비를 드려야 하는데 나는 하나님께 드립니다고 헌신하면 부모에게 안드려도 되는 것입니다. 아마 처음에 헌금 많이 하게 하려고 시작한 것 같습니다. 그 당시 모든 사람이 그렇게 행해왔습니다. 문제는 전통이 성경 위로 간 것입니다. 실제로 그들은 자기들의 예배가 말씀 말씀 하지만 실제로는 그들의 예배는 성경이 아닌 전통에 기초한 예배였습니다.

보세요. 처음에 어떤 의도로 시작되었는지 모르지반 이것이 굳어지면 성경을 해석할 때 전통의 관점에서 해석합니다. 그래서 전통이 성경과 같은 레벨에 올라갑니다. 무엇이 성경인지 무엇이 전통인지가 구분이 안됩니다. 그래서 전통에 집착한 나머지 하나님 말씀에 명백하게 기록되어 있는 말씀까지 범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몰라요. 왜냐하면 눈이 멀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무서운 점입니다.

아까 카톨릭 예를 들었지요. 마리아 예배, 예배시간에 촛불을  켜는 것 등등. 이런 것이 중세시대에 전통적으로 내려오다가 1545년 트렌티 회의에서 성경과 같은 것으로 받아들여지게 됩니다. 그들은 성경 어디에도 기록되어 있지 않는데 전통과 성경과 같은 영향력을 발휘하게 되어서 당연히 그렇게 하는 것이 성경적이라고 인식하고 성경을 해석할 때 그런 관점에서 해석합니다. 성경에서는 심지어 천사들도 예배를 받지 않는데 인간들이 예배를 받으면서 정당하다고 믿는 것입니다.

3)전통이 성경 위로 가면 성령을 소멸합니다.
성령을 대적합니다. 우리 신앙의 성령의 도움이 없이 가능한 것이 없습니다. 우리 예배도 성령의 도움이 없이 가능하지 않습니다. 참된 예배의 핵심은 성령에 의한 예배입니다. 성령이 우리의 예배를 인도하십니다. 하나님의 부흥 때마다 성령이 통치하시는 에배가 되어졌습니다. 그런데 전통이 성경 위로 가면 성령을 대적합니다.

대표적인 예가 요한복음 5장입니다. 베데스다 못가에서 38년된 병자를 고친 이야기가 나옵니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고 명령함으로 고칩니다. 그 날이 안식일날이었습니다. 그래서 안식일을 범했다고 해서 예수님이 그렇게 한 줄을 알고 예수님을 대적하기 시작합니다. 그러자 예수님이 답볍하십니다.

17-18절입니다.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하시매 18 유대인들이 이를 인하여 더욱 예수를 죽이고자 하니 이는 안식일만 범할 뿐 아니라 하나님을 자기의 친아버지라 하여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으로 삼으심이러라”


이 구절을 보면 38년 병자를 고친 것은 예수님이 임의로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인도를 따라 성령의 인도를 따랐음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행하심을 보고 예수님이 동참했을 때 하나님이 이 일을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전통 때문에 하나님의 일을 못볼  뿐아니라 그것을 대적합니다.

여러분 아까 제가 전통의 문제는 카톨릭의 문제만이 아니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교리적으로 전통이면서도 실제 삶과 예배에서는 전통이 말씀 위로 얼마든지 갈 수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교리적으로 교회의 주인은 하나님이시고 머리는 예수님이고 교회를 인도하시는 분은 성령님이십니다. 맞습니까? 이것을 부인할 사람이 누가 잇겠어요. 예배 인도자도 성령님이라고 성경에 명백하게 나와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의 삶에서 적지 않는 교회에서 담임목사의 신학이 교회를 인도하고 있습니다.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일련의 순서가 예배를 인도하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결과가 성령을 대적한다는 것입니다. 성령을 소멸합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말씀 말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교리적으로 아무리 내용을 다 믿고 강조해도 실제 삶에서 전통이 성경 위로 가면 그것은 말씀에 의한 예배가 될 수 없습니다. 


이것이 사람의 의견에 기초한 예배이고 결과는 성령을 소멸합니다. 이것이 무서운 점입니다. 그래서 스데반도 그 당시 그런 유대인들에게 뭐라고 했어요?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너희가 항상 성령을 거스려 너희 조상과 같이 너희도 하는 도다라고 말했습니다.

예배만 해도 그렇습니다.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예배형식과 순서를 고집하는 것이 옳습니까? 아니면 그 모든 형식과 모양을 성경에 비추어 보는 것이 옳습니까? 답변은 명백합니다. 성경에 의한 삶이 되려면 무엇이 옳은가가 명백합니다. 문제는 실제로 그렇게 하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교리적으로는 옳으면서도 실제로는 반대로 하고 있다면 그 사람은 성경에 의한 예배를 드리는 것이 아니라 전통에 의한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포도나무 교회 초기에 우리가 찬양과 경배를 드린다고 교회방문한 사람들이 수없이 왔다가 갔습니다. 얘배 중에 가버리는 사람도 있었어요. 예배 순서가 다르다고. 성경에 어떤 종류의 찬송을 드리라고 나와 있는가요. 안 나와 있습니다. 물론 가사의 내용이 성경적인가 아닌가는 성경에 비추어보아야 합니다. 또 찬송이면 찬송 예배이면 예배에 대한 성경적인 근거가 무엇인지 성경적인 이해가 무엇인지 성경적인 올바른 자세가 무엇인지도 살펴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찬양과 경배를 드리는 것은 성경에 나와있는 경배에 대한 올바른 자세를 가지고 그분을 마음껏 높이고 구하고 구분을 사모하는 가운데 그분만을 예배하기 위해서 구체적으로 하고 있어요. 그러는 가운데 하나님의 성령이 운행하시면서 만지시고 치유하고 계셔요. 그런데 자기가 가지고 있는 익숙한 형식에 틀리다고 해서 그것을 성경에 비추어볼 생각조차 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았어요. 


결과적으로 예배를 통해서 성령이 하시는 놀라운 역사들을 전혀 경험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성령의 역사를 무시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이 자리에 있을 지라도 전통을 가지고 형식을 가지고 판단하면 하나님의 놀라운 일을 경험하지 못합니다. 전통이 성경 위로 가면 성령을 소멸합니다.

4)율법주의 예배가 됩니다.
앞으로 나옵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그런데 전통이 좋을 수 있지만 전통이 성경 위로 가면 예배가 율법주의 예배가 됩니다. 심각한 결과를 가져옵니다. 율법주의는 껍데기입니다. 가짜입니다. 예배가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몇 가지 규례와 규칙을 지키는 것으로 전락합니다. 율법주의는 의식을 지키는 가짜신앙입니다. 여러분 바리새인들의 경우에 율법의 영을 무시하고 율법의 문자에 집착한 나머지 그들은 실제로 율법을 어긴 것을 예수님이 말씀하셨어요. 이렇게 예배가 율법주의로 전락하면 겉모습에 치중합니다. 


예배의 겉모습에 치중하며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몇 가지 순서와 규례와 규칙을 지키는 것에 초점이 맞추어집니다. 결국 껍데기 뿐인 예배가 됩니다. 아까 마태복음 15장을 언급했는데 얼마나 심각한 상황인지 아세요. 음식을 먹을 때 손을 씻지 않고 먹는 문제 때문에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말씀하시는데, 밖에서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더럽히는 것이 아니라 속에서 밖으로 나오는 것이 더럽힌다고 말씀합니다. 제자들이 잘 이해하지 못하지요. 그러자 성경에 보면 나중에 예수님이 설명해줍니다. 

16절부터 보면 아직도 못 깨닫느냐. 17절 입에서 나오는 것은 마음에서 나오는데 그것들은 악한 생각 살인 간음 음란 도적질 거짓증거 훼방 이런 것들이다 이것이 우리를 더럽게 한다고 하십니다. 


마23장에서 말씀합니다. 회칠한 무덤과 같아서 그 속에는 시기 다툼 싸움 미움 탐욕 등이 가득하다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이런 것은 전혀 언급안하면서 손 안씻는 것을 문제 삼는 것입니다. 이것이 율법주의 예배입니다.

여러분 오늘날 제가 마태복음 23장을 읽다보면 이런 것들이 보여요. 오래 전에 젊을 때 읽을 때에는 어떤 구절들은 우리에게 해당되지 않았어요. 그런데 지금은 15년 전에 가까운 포도나무 교회 개척한 다음에 그 구절을 다시 읽을 때 우리중에 마23장 중에서 우리에게 해당되지 않는 것이 하나도 없어요. 지금은 거기서 예수님이 화도다라고 강력하게 책망한 내용들은 오늘날 문제도 아닙니다. 


잔치의 상석에 앉기 원하고 랍비라 칭함을 받기 원하고 이런 것이 무슨 죄냐고 말할만큼 문제도 안됩니다. 오늘날 지도자들과 성도들의 삶에 나타난 것을 보면 그런 것은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더 심각한 것이 우리안에 있습니다. 그처럼 타락한 것입니다. 그런데 몰라요. 조금씩 타락하니까. 이런 상태에 있는데 그것은 전혀 무시하고 성경에 나와 있지도 않은 예배시간에 순서 하나 빠졌다고 문제삼고 야단입니다. 이것이 율법주의 예배입니다. 겉모습만 보고 있어요.

영국의 개신교 교회 중 하나가 웨스트민스터 채플입니다. 알 티 켄들이라는 목사님이 사역하셨어요. 5년 전에 은퇴하셨는데 그분이 쓴 책 예배에 대한 책을 보면 이처럼 전통이 우리에게 해를 끼칠 수 있는데 전통이 참다운 전통인지 아닌지를 어떻게 분별할까 라고 리트머스 테스트처럼 기준을 제시해요. 그중에 하나가 죄를 드러내는 것을 증진하는 것은 참된 전통이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성령님이 운행하시는 예배가 되면, 하나님의 기준이 비추어지고 하나님의 빛이 비추어지고 그 앞에 우리가 하나님을 떠난 죄된 모습이 비추어지기 때문에 중심에서부터 전환해서 회개라고 하나님 앞에 엎드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변화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증진하는 전통이라면 참된 전통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전통이 말씀 위로 가니까 바리새인들에게 속은 그토록 썩어있는데 그런데 그것은 언급조차 안하고 손 안씻고 먹었다는 것을 문제삼고 있어요. 그것이 더 심각한 것은 그런 구절을 성경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는데도. 여러분 이것이 그들의 문제만이 아닙니다. 이것이 무서운 점입니다.

여러분 오늘날 가까운데서도. 지금은 많이 바뀌었어요. 포도나무 교회만 해도 분당에 있을 때만 해도 하나님이 너무나 함께하셨어요.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만지시고 예배시간에 치유하시고 돌이키게 하셨어요. 교회 가운데 생명이 넘쳤어요. 국내 뿐아니라 해외까지 귀한 일을 하셨어요. 그런데도 지방회 내에서 일부 목사님들이 단 한 마디를 가지고 그것을 가리고 대적하는 줄 아세요. 그놈의 목사님은 주일날 잠바땡이나 걸치고 그럽니다. 성경에 양복 입으라는 구절은 없는데. 우리의 상태는 그렇게 심각한데, 하나님은 그처럼 일하고 계시는데. 의복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의복에 대한 성경적 가르침은 단정하게 입으라는 것입니다. 

평상복을 입는 이유가 몇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경건을 입은 옷의 종류에 두는 것은 철저하게 타락한 율법주의적인 가치관을 깨뜨리기 위해서입니다. 둘째 예배가 격식화될수록 성령님이 덜 역사하기 때문입니다. 셋째 가난한 사람들을 배려하기 위해서입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자는 일부러 평상복을 입습니다. 그런데 말씀드린 대로 그것이 성경적으로 옳은지 그른지 어떤 성경적인 근거를 두고 하는지 전혀 고려하지 않습니다. 전통이 성경적으로 되어버렸습니다.

5)전통이 성경 위로 가면 하나님의 마음을 잃습니다.
사실 이 하나하나가 두려운 것입니다. 마14장을 보면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풉니다. 풍랑 만난 제자들에게 예수님이 물 위로 걸어갑니다. 이 광경을 보고 제자들이 당신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로소이다라고 고백합니다(33절). 그리고 나서 게네사렛 땅에 이르렀는데 그곳 사람들이 예수님인 줄을 알고 근방에 말해서 많은 병자들을 데려오는데 다만 예수님의 옷자락에라고 손을 대기를 간구하니 그런 자는 치유되었습니다. 바로 이 시점입니다. 이렇게 일하고 계시는데, 바리새인들은 지금 손 안씻고 먹었다고 주님을 대적하고 있습니다. 무서운 점입니다.

여러분 아까 제가 말씀드렸지요. 요한복음 9장 눈멀고 장님되고 구걸하는 자를 고쳐서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게 했어요. 가족들도 돌보는데 한계가 잇는 버려진 자를 고쳐서 새 삶을 살게 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것은 아랑곳하지 않고 안식일날 땅에 침을 뱉어 흙덩이를 만들었다고 다시말해서 일을 했다고 대적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무엇인 없습니까? 아버지의 마음이 없습니다. 긍휼을 잃었습니다.

아까 말씀드린 알티킨델 목사가 좋은 전통의 근거가 세 가지라고 했는데, 아까 한 가지만 말씀드렸어요. 다른 하나는 사랑을 증진시키는 것입니다. 또 다른 하나는 삶을 드리는 마음의 예배를 증진시키는 것입니다. 율법주의 예배는 외부적인 모양만 강조하는데 그것이 아니라 삶을 드리는 마음의 예배를 증진시킵니다.

아무리 옳은 전통일지라도 전통을 옹호하는 것이 하나님의 사람을 경건하게 만들지 않는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경건하게 되는 것은 하나님과 관계에서 비롯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옹호해야 경건해집니다. 전통을 옹호하는 것은 옳을 지라도 우리에게 경건을 가져다 주지 않습니다.

7)전통이 성경 위로 가면 결국 사람을 예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놀랍게 역사하셨고 예수님이 안식일의 주인이시고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의 증거가 보여지는 순간에 그들이 뭐하고 했어요? 마태복음 15장을 보면 바리새인들이 왜 당신의 제자들은 장로들의 유전을 지키지 않습니까? 장로들이 과거에 신실하고 훌륭한 장로들이었을 수 있습니다. 


장로들이 과거에 나름대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장로들이었을 수 있습니다. 장로들이 과거에 신학적으로 훌륭한 지식을 가진 장로들이었을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해서 전통이 시작되었을지 모르지만 전통이 굳어져서 성경 위로 가게 되고 성경과 같은 영향력을 갖게 되고 전통을 고집하게 되자 하나님을 예배한다고 말할지 모르지만 실제로는 그 장로들을 예배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처럼 사람의 의견에 기초한 전통에 집착하면 그것은 결국 사람을 숭배하는 것입니다. 칼빈이건 마틴 루터이건 우리가 잘 알고 존경하는 신학자이건 그것을 고집하면 그것은 사람을 경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정성욱 교수도 모든 학자들의 의견도 성경에 의해 재검토되어야 한다고 말하면서 학자들의의견이 성경보다 권위를 가지게 되면 성경의 권위를 떨어뜨리고 인학 인간의 학문으로 전락시킨다고 경고합니다.


오늘 저는 사람의 의견에 기초한 예배를 살펴보았습니다. 사실 너무나 심각합니다. 주일 아침이고 시간이 많지 않아서 우리의 현실에 하나하나 적용하지 않았어요. 그런데 실질적으로 우리의 예배 우리의 현실에 적용하기 시작하면 두려울만큼 심각합니다. 그러면서도 우리들은 성경을 교리적으로 하나님 말씀으로 믿고 고백하고 나름대로 성경적으로 예배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우리는 바리새인들과 달리 성경적으로 예배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헛된 예배를 드리는 것을 볼 때 그것이 그들의 문제인 것은 잘 알지만 그것이 우리들의 문제라는 것은 꿈에도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런 것을 살펴봄으로 우리 예배가 진정한 의미에서 성경에 기초한 예배가 되도록 기도하고 겸손이 주님의 도움을 구하고 우리의 모든 것을 성경에 기초해서 재검토하고 검증해서 말씀에 기초한 예배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