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6/2009

회개치 않은 자들의 12 가지 죄

※ 회개치 않은 자들의 12 가지 죄

  1. 고집스러운 무지의 죄: 무지가 수많은 사람들의 눈을 가리고 한 명씩 단두대로 끌고 가 처참하게 목을 자르는 것을 본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당신의 무지에게 죽임을 당하지 않도록 조심하라. 무지의 죄를 버리지 않으면 이 죄가 당신의 생명을 취할 것이다. 그러므로 무지의 죄를 회개하라.

  2.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지 않는 은밀한 죄: 자기만 아는, 몰래 즐기는 죄를 버리라. 그렇지 않으면 결국 영원한 멸망으로 이끈다.

  3. 형식적으로 신앙 생활하는 죄: 종교적 의무(기도, 금식, 봉사 등)를 다하는 것으로 만족하려는 죄.

  4. 잘못된 동기에 이끌려 신앙 생활하는 죄: 육신적인 동기 곧 자기의 양심을 달래기 위해, 경건하다는 평판을 듣기 위해,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해, 자기의 재능을 과시하기 위해, 세속적이고 불경건한 사람이라는 비난을 피하기 위해, 등 자신의 유익을 위해 신앙생활하는 죄. 이러한 자기 기만에 빠지지 않으려면 당신의 행위뿐만 아니라 당신의 동기까지도 깊이 살펴야 한다.

  5. 자기의 의를 믿는 죄: 이것은 그리스도의 의를 부인하는 것이므로 이것이야 말로 자기 영혼을 멸망으로 이끄는 죄이다. 악한 죄로 멸망할 수 있듯이 겉으로 드러난 의와 선행때문에 멸망할 수 있다. 최선을 다한 후에 당신을 부인하고 그리스도를 인정하라. 나의 의를 더러운 옷처럼 여겨라.

  6. 철저한 신앙 생활에 대한 은밀한 증오: 제대로 뜨겁게 신앙생활 하는 사람들에 대해 은근히 미워하는 죄. 이들은 철저한 신앙생활을 기묘한 것, 경솔한 것, 무절제한 열정이라고 비판한다. 이런 사람들은 거룩함을 사랑하지도 않고 거룩함을 추구하지도 않는다. 이들은 결국 마음이 부패한 사람들이다.


7. 일정 수준의 신앙생활에 안주하는 죄: 자기가 정한 어떤 범주의 테두리 안에서만 신앙생활 하려는 죄. 곧 자기들의 신앙생활이 구원받기에 충분할 정도에 이르렀다고 판단하면 더 이상 진전하려고 하지 않는 죄로 이것은 오히려 그들이 진정한 은혜를 받지 못했음을 드러낸다. 왜냐하면 진정한 은혜는 사람들로 하여금 언제나 완전함을 열망하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8. 세상을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죄: 이것이야 말로 거룩하게 되지 못했다는 확실한 증거이다.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요일2:15)." 이것은 또한 회개하지 않았다는 뚜렷한 특징 중 하나이다.

  9. 자기를 무시하고 모욕하는 사람들에게 악의와 시기심을 품는 죄: 겉보기에 경건한 많은 사람들이 자기가 당한 모욕을 기억하고 원한을 품고 악을 악으로 갚고 보복하는 경우가 있다. 이런 악이 마음속에서 부글부글 끓는데도 그것을 미워하거나 억제하지 않고 저항하지도 않고 오히려 습관적으로 지배당하는 사람들은 악독이 가득하며 죽음의 상태에 있는 것이다.

  10. 억제되지 않은 교만의 죄: 하나님의 칭찬보다 사람들의 칭찬을 더 사랑하고 사람의 존경과 갈채와 인정에 마음을 두는 사람들은 아직도 진정한 회개를 모르고 죄 가운데 있는 것이다. 자기 마음속에 있는 교만을 보지도 못하고 문제 삼지도 않고 그것 때문에 고민하지도 않는 사람들은 죄 가운데 완전히 죽어 있는 것이다.

  11. 쾌락을 사랑하는 죄: 육신에게 자유를 주고 육신의 요구를 다 들어주고 육신을 기쁘게 해주는 사람, 배와 감각을 만족시키면서 큰 기쁨을 느끼는 사람은 겉으로는 아무리 경건해 보여도 다 가짜이다. 육신을 기쁘게 하는 삶은 결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릴 수 없다.

  12. 육신의 안전을 의지하는 죄: 돈, 명예 등 자신을 안전(secure)하게 지켜줄 수 있을만한 것은 무엇이든지 붙들고 그것을 의지하여 거기에 안주하려는 죄. (- 조셉 얼라인, “돌이켜 회개하라” 중에서) ·


* 이렇게까지 꼭 회개해야 하는 이유 – 생명으로 가는 길은 좁고 협착하며 구하여도 얻지 못할 수 있으므로. 또한 구한다고 다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 (마 7:14)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 (눅 13:24) · **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으리이까?(마 19:25) 우리 힘으로는 회개할 수 없으나 성령께서 도우시면 가능하다. “예수께서 저희를 보시며 가라사대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할 수 있느니라” (마 19:26)

  ※ 우리가 회개해야 하는 5가지 이유 우리는 죄인이기 때문에: 롬3:23 회개는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에: 겔33:11, 눅5:32, 벧후3:9 회개하지 않으면 멸망하기 때문에: 눅13:3, 5 회개는 심판날에 임할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유일한 길 (회개치 않음은 하나님의 진노를 쌓는것이다): 롬2:4-5 회개하지 않으면 지옥에 갈 수밖에 없기 때문에: 눅16:28-30

  ※ 회개의 4가지 요소 (4R)
 1. Revelation of the truth about sin, sins, and sinful nature.원죄와 나의 죄, 그리고 자아의 죄성에 대해 성경이 말하는 진리가 선포됨으로 죄가 드러남.

 2. Realization of the reality of my condition before God. 하나님 앞에서 내 상태를 적나라하게 보는것. 하나님 앞에 서기 전에는 모든 죄가 상대적이나 하나님 앞에서는 그 빛 아래 나의 모든 어둠이 (죄가) 드러난다. 그러나 죄를 드러내 주시는 것이 은혜이다 (회개할 기회를 얻을 수 있으므로 ) ======= 여기까지가 하나님이 하시는 부분(God initiates)

 3. Renunciation of my sins: 죄를 끊고 버리는 것.
a. 죄를 고백하는 것: 하나님이 죄라고 하시는 것에 대해 동의하고 (하나님과 사람앞에) 죄를 입으로 낱낱히 고백하는 것. (고백이 없는 것은 회개가 아니다)

b. 하나님이 용서하셨음을 받아들이는 것.

c. 내 삶에 죄와 관련된 모든 것을 제거하는 것: 나로 하여금 죄짓게 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찾아 과감하게 제거하는 것.

 4. Restitution and reconciliation: 피해보상(변상)과 화해. 회개의 완성단계. 이것이 없으면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회개가 아니다. ====== 여기까지는 우리가 해야 할 몫(Our response) = 이 네가지가 반드시 다 이루어져야만 진정한 회개를 했다고 할 수 있다. (하나라도 빠진 것은 온전한 회개가 아니다) Repentance (회개) = God’s initiation (하나님의 시작하심) + Our response (우리가 반응함)

  ※ 회개한 사람들의 특징
1. 죄에 대한 인식(깨달음)이 달라진다: 죄에 대한 심각성과 경각심이 생긴다.

 2. 죄에 대한 느낌이 달라진다: 회개하기 전에는 죄는 지을때 우리의 느낌을 자극하여 우리로 하여금 그 느낌을 따라가게 만드는데 회개한 후에는 사소한 죄에도 양심의 가책을 느끼며 죄에 대한 슬퍼하는 마음과 역겨운 마음이 생긴다.

 3. 죄에서 돌이켜 죄와의 타협을 거부하며 죄와 처절하게 싸운다: 죄를 짓지 않을 순 없지만 회개한 후에는 더 이상 죄가 나를 지배할 수 없게 된다. 전처럼 죄에 대해 결코 관대하지 않으며 죄와 피흘리기까지 싸우고 또 싸운다. 힘들고 어려워도 결코 포기하지 않고 계속 죄와 싸운다.

 4. 삶의 목적과 방향이 바뀐다: 내 야망과 꿈 대신 하나님의 소원으로, 나 중심에서 하나님 중심으로 바뀐다. 항상 주님을 생각하며 주님의 뜻을 구하는 삶으로 바뀌게 된다 (“Self centered” 에서 “God centered” 로의 전환)

 5. 나의 기쁨, 관심, 사랑의 대상이 바뀐다: 세상의 것에서 하늘의 것으로, 육신의 것에서 신령한 것으로 그 대상이 바뀐다.

 6.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자 하는 열망과 그 결과로 순종의 기쁨을 알게 된다.

 7. 자신을 의지하지 않고 철저히 하나님을 의지한다: 자신 안에는 전혀 소망이 없음을 깨닫고 전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하게 된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녀는 고난과 책망이 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녀는 고난과 책망이 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녀는 고난과 책망이 있다. 하나님이 사랑하시지 않으면 버린 자식처럼 관심이 없다.하나님이 사랑하는 사람은 관심을 받을 뿐만 아니라 질투를 유발한다. 

우리는 천국을 기업으로 받을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 신앙의 완성을 위한 고난이 존재한다. 그런 고난의 과정, 신앙의 완성의 과정은 신앙의 모험이다. 누구에게는 고난이 빨리 찾아오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더디 온다.

 어떤 사람은 고난이 심하지만 어떤 사람은 덜하게 보인다. 세상을 보면 너무나 우리가 이해하지 못할 일이 많다.하나님이 계획하신 신앙의 모험은 측량할 수 없다. 그것은 두려울 정도로 하나님의 정확한 섭리와 계산에 의해서 진행되고 있다. 

우리가 감을 못 잡을 뿐이다. 신앙의 모험을통해서 얻어지는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가치다. 모든 신앙의 모험은 예수 그리스도의 가치를 깨닫는 과정이다. 삶 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신앙의 모험은 예수 그리스도의 가치를 깨달으라고 주시는 것이다.

 누구나 채워야 할 고난의 잔이 있다. 하나님이 그 속에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와 뜻을 부으신다. 그 잔은 쓴 잔이다. 내가 원하든지 원하지 않든지 어쩔수 없이 마셔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나약한 존재임을 깨닫고 내 뜻대로 발버둥칠 것이 아니라 신앙으로 바로 살아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말씀의 약속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말씀의 약속
 내가 네게 명령한 것은 무엇이나 지켜 행하고, 너는 거기에 더하지도 말고 거기에서 빼지도 말지니라.(신12:32)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리라(사 40:8). 이제 가서 백성 앞에 서판에 쓰고 그것을 책에 기록하여 앞으로 영원 무궁토록 있게 하라(사30:8). 나에게는, 이것이 그들과 함께한 나의 언약이라.

주가 말하노라. 네 위에 있는 나의 영과 네 입에 둔 내 말들이 네 입에서와 네 씨의 입에서와 네 씨의 씨의 입에서 이제부터 영원토록 떠나지 아니하리라. 주가 말하노라(사 59:21). 하나님의 말씀은 다 순전하며 하나님은 그를 의지하는 자의 방패시니라 너는 그 말씀에 더하지 말라 그가 너를 책망하시겠고 너는 거짓말 하는 자가 될까 두려우니라(잠 30:5~6) 주의 말씀들은 순수한 말씀들이라. 흙 도가니에서 단련되어 일곱 번 정화된 은 같도다.

오 주여, 주께서 이 말씀들을 간수하시리니, 주께서 이 세대로부터 영원토록 그것들을 보존하시리이다(시 12:6,7 ). 하늘과 땅은 없어져도 내 말들은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리라(마 24:35). 살아 있고 영원히 거하는하나님의 말씀으로 되었느니라(벧전 1:23). 

이는 내가 이 책의 예언의 말씀들을 듣는 각 사람에게 증거함이니 누구든지 이것들에 더하면 하나님께서 이 책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것이요 또 누구든지 이 예언의 책의 말씀들에서 삭제하면 하나님께서 생명의 책과 거룩한 도성과 이 책에 기록된 것들에서 그의 부분을 제하여 버리시리라.

이런 일들을 증거하신 분이 말씀하시기를 "반드시 내가 속히 오리라." 하시니라. "아멘. 그러하옵니다.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계22:18:21)

진정한 의미의 “마라나타”의 뜻은?

진정한 의미의 “마라나타”의 뜻은? 예수님을 믿는 믿음의 사람들이 대부분 잘 사용을 하고 있는 용어를 들어 보라고 하면 “할렐루야!”, “샬롬!”, “마라나타!”이다. 이것을 좀 더 구체적으로 구분을 하여 보면 ‘할렐루야’는 예수님의 초림을 믿는 사람들이 사용을 많이 하고 있고, 샬롬은 유대인들이 인사할 때 대부분 많이 사용을 하고 있는 것이다.

반면에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잘 사용하는 용어가 ‘마라나타’라는 용어가 있다. 할렐루야는 호흡이 있는 자마다 여호와를 찬양할지어다 할렐루야(시 150:6) 여기에 근거로 하여 히브리어로 ‘야훼(여호와)를 찬양하라’의 뜻으로 쓰여지고 있다. 이것이 라틴어에서는 ‘알렐루야(alleluia)’로 사용하고 있다.

 샬롬(shalom) = 평화(平和=Peace)은 사사기 6장 23절에서 “하나님은 기드온에게 안심하라 두려워말라” 라고 우리에게 평안을 주시는 분으로 여기고, 이러한 위로를 받은 기드온이 24절에서 비로소 “나의 하나님은 평강의 하나님 즉 여호와 샬롬”이라고 말하고 있다. 다시말해서 샬롬은 ‘평안’, ‘평강’이라는 히브리어 원어로 생각을 하면 된다. 우리가 여기에서 강조할려고 하는 것은 ‘마라나타(Maranatha)’인데 이것은 광범위한 의미로 생각을 하여 보면 성경이 기록된 시기에서부터 지금까지 사용되는 용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래서 초대교회의 성도들의 인사말은 ‘마라나타’이었던 것이었다.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한 제자들이 예수님이 빨리 재림하시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사용하였던 인사말이 “마라나타(주님 곧 오신다)”라는 말이었던 것이다. 다시말해서 초대교회 성도들은 자기들이 사는 시대에 주님이 오실 것(?)처럼 생각을 하였다. 바울서신서의 내용을 보아도 우리가 사는 세대가 아니라 자기 세대에 주님이 오실 것처럼 기록이 되어 있는 것을 볼 수가 있다. 그 만큼 주님을 기다리는 열정이 어느 때보다도 뜨거웠던 것을 우리는 알 수가 있는 것이다.

 마라나타는 아람어로 고린도전서 16장 22절에 표기되어 있다. 만일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거든 저주를 받을찌어다 주께서 임하시느니라(고전 16:22) If any man love not the Lord Jesus Christ, let him be Anathema Maranatha.(1Co 16:22, KJV) 요한계시록 22장 20절에도 비슷한 의미로 쓰여지고 있다.이것들을 증거하신 이가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계 22:20) He which testifieth these things saith, Surely I come quickly. Amen. Even so, come, Lord Jesus.(REV 22:20, KJV) 그러나, 시대를 거듭 할수록 이 말이 퇴색되어 재림의 말씀이 공허하게 들리고 있는 것이다.

2000년이 되도록 재림이 아직 일어나지 않았다고 해서 사람들의 마음 속에서 점점 멀리 하고 관심의 밖으로 밀려나게 되어 버린 것이었다. 보라 지금은 은혜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고후 6:2)라는 이 말씀을 우리가 명심하고 지금 이 시간이 구원(휴거)의 날인 것처럼 살아야 하고, 앞으로도 구원(휴거)의 날인 것으로 여겨야 하는데 무조건 재림 날짜 이야기만 하면 미혹된 것으로, 잘못된 것으로, 이단인 것으로 여기고 있으니 참으로 안타까운 현실인 것이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의 내면에는 겉으로는 재림을 기다린다고 말해도 그 마음 속에는 재림을 믿지 않는 불신이 도사리고 있는 것이다.

미래의 시간에 안 일어날 확률이 거의 100%라 하더라도 우리는 날마다 주님이 오실 것으로 생각하면서 신앙생활을 해야 하기 때문인 것이다. 왜냐하면 과거의 시간도, 현재의 시간도, 앞으로의 미래의 시간도 모두 다 주님의 것이기 때문인 것이다. 비록 그 날에 안 일어난다고 하여도 우리는 날마다 마라나타의 신앙으로 살아야 한다. 히 13 : 8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 이 말씀 속에서도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날마다 ‘마라나타’의 신앙으로 살아야 되는 것이다. 

그러면 지금 구원(휴거)의 날인 것처럼 살아간다면 미혹된 자일까? 잘못된 자일까? 이단에 해당되는 자일까? 성경에는 분명이 지금이 구원의 날인 것처럼 살라고 하였다. 앞으로도 구원의 날인 것처럼 살아야 하는 것이 예수님을 믿는 믿음의 사람들이 갖추어야 할 당연한 도리인데도 재림의 날짜가 한번이라도 틀렸다고 하면 마치 굉장히 잘못된 것(?)으로 여기고 있으니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사례를 들어 보면 발명의 왕 에디슨이 축전지를 만들기 까지 수만번의 실패를 거듭하였다고 예전에 위인전에서 읽은 적이 있었다. 또한, 일본이 심해잠수함을 개발하기까지 수백번의 실패를 경험하였다고 하였다. 이와같이 눈에 보이는 물건을 만들기까지도 수백번, 수천번, 수만번의 실패를 거듭하는 데도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인 휴거에 대한 연구는 우리가 이 땅에서 죽을 때까지 계속해서 연구해야 될 가치가 있지 않을까? 라고 생각을 한다. 

나는 주님이 오시는 마지막 세대인 무화과 나무의 비유를 배우라(마 24:32~34; 막 13:28-31; 눅 21:29-33)에 해당되는 이 세대에는 반드시 휴거에 대한 시기를 알려 주신다고 생각을 하여서 지금도 이렇게 연구를 하고, 또 연구를 하고 계속해서 연구를 하는 것이다. 예수님 초림 때부터 무화과 나무의 비유를 배우라(이스라엘 독립의 비유)가 이루어지기 전의 세대에는 당연히 그 날과 그 때는 알 수가 없는 것이다.(마 24:36; 막 13:32) 왜냐하면 주님이 문 밖에 아직 안 오셨기 때문인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인자의 임함은 노아의 때와 같다(마 24:37~39)라는 말을 성경에서 빼어 버려야 한다. 

왜냐하면 노아의 때에는 하나님이 심판하실 시기를 노아에게 계시하여 주셨기 때문인 것이다. 마찬가지로 롯의 때에도 심판의 시기를 계시하여 주신 것이다. 먼저는 아브라함에게 알려주시고(창 18장), 롯에게 찾아가서 알려 주신 것이다.(창 19장) 하나님이 심판할 시기에도(인자의 때에도) 반드시 알려 주신다는 것이 나의 믿음인 것이다.(마 24장)마찬가지로 전 세계를 심판하실 이 시기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안 알려 주신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사실이다. 만일에 오실 때를 계시하지 않으시면 여호와만 몰래 도적같이 오셔야 된다(?)는 결과가 나온다. (마 24:36)

물론 아들도 모르게, 천사들도 모르고, 아무도 모르게 온다는 결과가 나오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을 하면 성경 전체 내용의 맥이 전혀 연결이 되지 않는다. 노아의 때에도 방주에 들어갈 날짜를 일주일 전에 계시하여 주셨기 때문에(유대력 2월 10일), 홍수가 나기 전에 모든 짐승들을 지시한 대로 방주에 넣을 수 있었다.(유대력 2월 17일) 다시말해서 노아의 짐승들이 방주에 들어간 날짜가 바로 2월 10일~2월 17일 바로 이 사이인 것이다.

 만일에 하나님이 사전에 계시를 하지 않았더라면 그 많은 짐승들을 방주에 미리 넣을 수가 없고, 설사 넣었다 하더라도 그 많은 짐승의 오물을 치우는데 전생애를 바치면서 살았을 것(?)으로 생각이 되어 진다. 롯의 때에도 하나님이 계시해 주지 않는다면 오늘날과 똑같이 사람들도 한결같이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는데, 하늘의 천사들도 모르고, 아들(예수님)도 모르는데 하면서 사람들이 방관하며 생활할 것으로 여겨진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와 같이 생각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옳다고 한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의 말이 정석이 되어 버리고, 노아와 롯은 바보, 멍청이 꼴(?)이 되어 버린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정하신 날짜는 우리에게 굉장히 중요하다. 성경에 기록된 어떤 말씀보다도 이 경고의 말씀은 우리의 생명을 좌우하기 때문인 것이다. 우리의 일상생활에서도 이와 같이 마찬가지이다. 예를 들어서 미국이나 유럽 등 여행갈 때에도 미리 비행기표를 예약하고(하나님이 계시하시고), 비행기를 타야(미리 방주로 들어가야) 안전한 것이다.

 이 시간을 놓치면(휴거를 놓치면) 땅을 치고 통곡할 노릇이 아니겠는가? 우리의 믿음의 선조들은 재림의 날짜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연구를 하고 또 연구를 하였던 것이다. 이 구원(휴거)에 대하여는 너희에게 임할 은혜를 예언하던 선지자들이 연구하고 부지런히 살펴서 자기 속에 계신 그리스도의 영이 그 받으실 고난(초림)과 후에 얻으실 영광(재림)을 미리 증거하여 어느 시, 어떠한 때를 지시하시는지 상고(詳考)하니라(벧전 1:10~11)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예수님이 언제 오실 것인가? 하면서 고대하며 기다리면서 언제 오실 지 연구하고 또 연구하고 또 연구하고 또 연구하고 또 연구하면서 기다리는 것이 당연한 사실인데도 마치 휴거날짜가 틀리면 무슨 큰 대죄(大罪)나 역죄(逆罪)라도 한 것처럼 여기고 있는 것이 너무나도 이상한 현실(?)인 것이다. 

그러면 휴거날짜가 틀렸다고 이단일까?사실은 전혀 그렇지가 않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여호수아와 갈렙의 예(민14장)를 통하여서도 잘 알 수가 있고, 요나의 사례(욘 4장)에서도 잘 알 수가 있는 것이다. 지금까지 신앙생활을 해 오면서 느끼는 점은 하나님은 계시를 단번에 우리에게 열어 주지 않는다는 사실인 것이다. 조금씩, 조금씩 그리고 또 조금씩 깨닫게 하고 계신다는 사실인 것이다. 마치 커텐을 열면 빛이 들어오는 것처럼 조금씩, 조금씩 그리고 조금씩 계시의 뜻을 우리에게 깨닫게 해 주시는 것이다.

 이와같이 실패를 거듭하면서 하나님의 영적 비밀인 휴거의 날짜를 알도록 하나님께서는 노아와 롯의 때처럼 인자의 때에도 우리를 그렇게 인도해 오신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영적인 수수께끼(무화과 나무의 비유를 배우라?)를 내 주셔서 우리가 제대로 풀 수 있는지 지금 이 시간에도 지켜 보고 계신다는 것이다. 어제도 구원의 날, 오늘도 구원의 날, 내일도 구원의 날인 것처럼 매일 매순간마다 지금은 구원(휴거)의 날이라고 신앙생활을 매진한 결과 느껴지는 영적인 감정이다. 이러한 사실을 계속해서 연구를 하다 보니까 이제야 서서히 그 해답을 얻을 수 있는 지경에 까지 이르게 된 것이다.

그만큼 하나님(예수님=신랑)과 우리의 사이(성도=신부)는 정말로 신묘막측한 관계인 것이다. 사55 : 6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 55 : 7 악인은 그 길을, 불의한 자는 그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나아오라 그가 널리 용서하시리라 55 : 8 여호와의 말씀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55 : 9 하늘이 땅보다 높음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 나는 주님을 공중에서 만날 때까지 계속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푸신 말세에 예비하신 구원의 계획을 알려고 노력을 할 것이다. 그것이 어쩌면 나에게 주어진 사명인지도 모르겠다.

모두 다 주님이 오실 것을 거부하는 이 세대에 미련하게도 오늘도 계속해서 주님오실 것에 대한 연구를 하여 본다. 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사람보다 지혜 있고 하나님의 약한 것이 사람보다 강하니라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고전 1:25~29)

진정으로 회개하지 않은 사람은 그리스도를 건성으로 붙듭니다.

그는 그리스도의 구원에 대해서는 전적으로 환영의 뜻을 표하지만, 구원을 받았으니 의로운 생활을 해야 한다는 데에는 고개를 돌립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누릴 특권을 말하면서도 그분의 인격을 닮으려고는 하지 않습니다. 그는 그리스도께서 부여해 주신 임무들과 유익들을 분리시킵니다. 근본부터 잘못되어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라는 이름이 아름답다고 하면서도 진정으로 주 예수를 사랑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그분을 “임금과 구주”(행 5:31)로 삼으셨지만, 그들은 그분을 그렇게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고통에서 구원받기는 열망하되, 죄짓는 데서 구원받기는 그다지 바라지 않습니다. 생명의 구원을 바라면서 여전히 육체의 정욕도 갖고 싶어 합니다. 참으로 많은 사람들이 생명의 구원과 육체의 정욕을 나누어서 생각합니다. 또 그들은 자기들의 몇 가지 죄는 제거되기를 원하지만, 들릴라의 무릎에서는 떠나지 않으며, 사랑하는 헤로디아와는 이혼하지 못합니다. 오른손이나 오른쪽 눈을 제거할 만큼 결단력이 있지 못합니다. 이 말을 귀담아 들으십시오. 여러분의 생명이 여기에 달려 있습니다.

  진정으로 회개한 사람은 그리스도를 편벽됨 없이 영접합니다. 하나님께서 가르쳐 주신 모든 의도와 목적대로 그분을 받아들이되, 아무런 예외나 제한이나 보류함 없이 받아들입니다. 그는 무슨 일이 있더라도 그리스도 안에 거하려고 합니다. 그리스도의 구원뿐만 아니라 그분의 다스림도 받으려고 애씁니다. 그는 바울과 같이 “주여 무엇을 하리이까?”라고 말합니다. 무엇을 시키시든 하겠다고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그의 원대로 자기를 쓰실 수 있도록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집니다.

  진정으로 회개한 사람은 그리스도의 계명으로 돌아섭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과 그 안에 포함된 모든 것 하나 하나에 동의하고 만족한다고 고백합니다. 회개한 사람의 생활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데로 행합니다. 진정으로 회개하지 않은 사람은 마음으로는 원치 않으면서도 의무감에서 그리스도의 도를 행하는 데 반해, 진정으로 회개한 사람은 그것을 기쁨으로 행하며, 그리스도의 법을 행하는 데서 자유를 누립니다. 비록 고통이 따르더라도 자유로이 그분을 따라가며, 진정으로 주님을 섬기는 일에 자신을 드리며, 온 마음을 다해 그분을 추구합니다. 그리스도 께서는 당신께 속한 자들을 완력으로 통제하시지 않습니다.

그분은 자발적으로 순종하는 백성들의 왕이십니다. 그들은 그분의 은혜로 자원하여 자신을 드리며 그분을 섬깁니다. 노예처럼 어쩔 수 없이 섬기는 것이 아니라, 아들처럼, 배우자처럼, 사랑과 충성이 우러나와서 자진해서 섬깁니다. 한마디로 회개한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법을 사랑하고 즐거워하며 끊임없이 공부합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 그의 매일의 관심사입니다. 그는 자기 속의 죄가 완전히 없어지고 마침내 거룩함으로 온전해질 때까지 푯대를 향하여 앞만 보고 달려갑니다.

위선자는 거룩함을 천당에 들어가는 다리로써만 좋아합니다. 그는 세상의 많은 것을 포기하지 않은 채 회개할 수 있는 길을 열심히 찾습니다. 죽어서 천당에만 갈 수 있게 해 주는 것, 이것만이 그가 바라는 전부입니다. 그러나 진정으로 회개한 사람은 단지 천당에 가기 위해서 거룩함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거룩함 그 자체를 좋아합니다. 그 는 지옥에 가지 않게 되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거룩함의 가장 높은 경지에 이르기를 소원합니다. 그러나 그 소원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길을 가고 있습니까? 여러분의 인생관과 목표가 바뀌었습니까? 거룩함이 여러분의 추구하는 바요, 신앙이 여러분의 주된 일입니까? 그렇지 않다면 여러분은 진정한 회개에 이르지 못한 셈입니다.”

 - 조셉 얼라인, "진정으로 회개한 사람" 중에서

지속적이고 체계적인 성경읽기

지속적이고 체계적인 성경읽기 저는 수많은 다른 젊은 그리스도인들처럼 성경보다 먼저 신앙 서적을 찾는 잘못에 빠졌습니다. 이전처럼 정신을 살찌운답시고 불어나 독어로 된 소설들을 더 이상 읽지는 않았지만, 성경책은 서재의 한 귀퉁이도 차지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소책자, 선교 보고서, 설교집, 경건한 위인들의 전기를 읽었습니다. 그래도 이런 종류의 책들은 다른 문학 서적들보다는 유익했습니다.

제가 그러한 책들을 탐닉하지 않고, 그러한 책들을 통해 성경 말씀을 사랑할 수 있게 되었더라면, 정말로 큰 유익이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때까지 성경을 가까이 하지 않았습니다. 열 다섯 살이 되기 전까지 학교에서 가끔씩 성경을 읽은 적은 있었습니다만, 그 후로 하나님의 책은 완전히 제 손을 떠났고, 하나님의 일을 시작하기 전까지 한 장도 채 읽지 못했습니다. 

저는 성경에 대해서 아무 것도 아는 것이 없었습니다. 성경을 읽고 이해하기보다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무지, 그 말씀을 이해하는데 느끼는 어려움, 읽는데 따르는 지루함 등으로 성경 읽기를 소홀히 하였습니다. 사실 기도 가운데 성경을 읽으면 많은 지식뿐 아니라 기쁨도 얻게 되는데, 그 사실을 알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다른 많은 그리스도인들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믿은 후 처음 4년 동안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보다는 신앙 서적을 주로 읽었습니다.

그 결과 지식에 있어서나 은혜에 있어서 어린 아이의 수준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참 지식은 성령에 의해서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오는 지식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저는 말씀을 소홀히 했기 때문에 거의 4년 동안 믿음의 기초에 대해서조차 분명하게 알지 못하는 무지함 가운데 지냈습니다. 이러한 말씀에 대한 무지 때문에 하나님께서 주시는 참 자유를 누리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진리(眞理)만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으로부터 우리를 해방시켜 참 자유를 누릴 수 있게 해주기 때문입니다(요 8:31-32). 말씀이 그 사실을 증명합니다. 믿음의 위인들의 삶이 그 사실을 증명합니다. 또 제 자신의 경험을 통해서도 그것을 분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 1829년 8월에 들어 비로소 말씀을 가까이 하기 시작했는데, 그때부터 제 삶은 크게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아직도 멀긴 했지만, 그 후로 지금까지 하나님의 은혜로 이전보다 하나님을 더 가까이 하는 삶을 살아 올 수 있었습니다. 이 글을 읽는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성경보다 다른 책들을 더 좋아하며 하나님의 말씀보다 사람이 쓴 책을 더 즐겨 읽는 사람이 있다면, 저의 예를 통해 경고를 받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지금까지는 다른 책들에 더 매료되어 왔다 할지라도 이제부터는 성경을 더 사랑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저는 불필요하게 또 다른 책 한 권을 더 늘리고 싶지 않습니다.

오직 제 실수를 통해 많은 형제자매들이 경고를 받고, 성경을 가장 가치 있게 여기며, 하나님의 말씀을 모든 행동의 지침으로 삼게 되리라는 소망과 확신을 가지고 이 글을 씁니다. 누가 제게 성경을 어떻게 읽어야 가장 효과적이냐고 묻는다면, 다음과 같이 대답할 것입니다. 

1. 명심해야 할 것은 무엇보다도 하나님께서 성령님을 통하여 우리를 가르치실 수 있으며, 따라서 말씀을 읽기 전(前)과 말씀을 읽으면서 하나님께서 깨우쳐 주시도록 기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2. 이와 더불어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성령님만이 우리에게 필요한 가장 뛰어난 선생이기는 하지만, 우리가 원한다고 해서 성령님께서 언제나 즉각적으로 가르쳐 주시지는 않기 때문에, 어떤 구절에 대해서는 그 뜻을 보여 주시기를 거듭 간청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진심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마음 가운데 인내로써 구하면,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그 뜻을 가르쳐 주신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3. 구약과 신약을 매일 일정량 읽어서 성경 전체를 체계적으로 읽음으로써 하나님의 말씀을 전체적으로 이해하는 것이 대단히 중요합니다. 이것이 중요한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각 성경기록의 연관 관계를 아는데 도움이 됩니다. 어떤 부분만을 뽑아서 읽는다면, 성경의 많은 부분을 이해하지 못할 것입니다.

 둘째, 우리는 육적으로뿐만 아니라 영적으로도 여러 가지 다양한 영양분을 공급받아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그분의 말씀에도 이 같은 다양성을 주신 것입니다.

 셋째, 여기저기서 어떤 부분만을 발췌한다는 것은 곧 어떤 부분은 다른 부분보다 더 낫다든가, 심지어 성경에 보여 진 어떤 진리는 유익하지 못하거나 불필요하다고 말하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넷째, 이렇게 체계적으로 성경 전체를 통독해 나감으로써 특별히 좋아하는 어떤 견해에만 사로잡히지 않고 성경 전체의 개념을 균형있게 파악하게 됨으로써 잘못된 견해에 빠지지 않을 수 있게 됩니다.

 다섯째, 성경 전체에 걸쳐 하나님께서 보여 주신 모든 뜻들을 찾도록 해야 합니다. 오늘날에도 성경 전체를 한 번도 통독하지 못한 사람들이 많은데, 날마다 빠뜨리지 않고 하루 몇 장씩 읽으면 일 년에 성경 전체를 한 번 읽을 수 있습니다. 

4. 우리가 읽은 말씀에 대해 묵상하는 것이 대단히 중요합니다. 읽은 구절 가운데 몇 구절만 묵상하거나, 시간이 허락하면 읽은 내용 전체에 대해서 하루 종일 묵상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는 성경의 한 책이나, 서신서, 복음서의 한 부분을 날마다 규칙적으로 묵상해 보는 것도 좋을 것입니다. 

성경학자들이 쓴 주석은 하나님의 진리에 대한 많은 지식이나 생각을 머리에 넣어 줍니다. 그러나 기도와 묵상을 통해 성령의 가르침을 받을 때, 우리의 마음이 채워지게 됩니다. 전자와 같은 지식은 일반적으로 쉽게 증발해 버리며, 다른 견해로 반박을 받는 경우가 흔하며, 막상 삶 가운데 옮기려고 할 때 아무런 소용이 없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후자의 지식은 통상 우리를 겸손하게 해주며, 우리에게 기쁨을 가져다주고, 우리를 하나님께 더 가까이 이끌어 줍니다. 이러한 지식은 반박의 여지가 거의 없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지식은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온 것이기 때문에 우리 마음속 깊이 파고들어 우리의 한 부분이 되며, 삶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 네비게이토 출판사 발행 [조지 뮬러 : 믿음의 사람]에서 발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