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8/2009

영적 눌림의 치유 - 성령으로 충만하라

마12:43-45은 우리에게 쫓겨난 귀신이 다시 돌아올 수 있다는 사실뿐만 아니라 다시 돌아올 때에는 보다 더 사악한 동료 귀신들을 데리고 오기까지 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육신을 십자가에 못박고 귀신을 쫓아냈으면 우리는 예수님을 모시고 우리의 삶을 인도하시도록 해야 한다. 사실 귀신들을 몰아내는 이유는 좀더 예수님의 말씀을 더 갖기 위해서이다.

예수님으로 집안이 충만하게 채워진다는 것은 '순결'과 '권능'으로 채워진다는 것이다. 우리의 순결은 그리스도 안에 거함으로부터, 그리고 그 결과로 나타나는 성령의 열매로부터 얻어진다. 우리들의 권능도 성령세례에 의해서, 그리고 그 결과로서 나타는 성령의 은사를 통하여 오게 된다.

귀신을 쫓아낸 자리마다 반드시 성령의 은사와 열매로 그 자리를 채워야 한다. 이 일은 사역받은 사람의 명확한 책임이다. 축귀사역을 행하는 목회자는 사람들 각자가 모두 자신의 집을 충만하게 채워야 할 책임이 있다는 것을 강조해야 한다.

1) 성령의 권능으로 집안을 충만케 하라.

성령세례의 목적은 '권능 받기 위해서'이다(행1:8).

성령의 권능은 아홉가지 성령의 초자연적인 은사로 나타난다(고전12:7-14).

` 병고치는 은사 : 베드로와 요한을 통하여 앉은뱅이가 일어남(행3장)

` 지혜와 지식의 말씀 : 사울을 구원하기 위하여 아나니아에게(행9장)

` 영 분별의 은사 : 바울은 설교를 방해하는 여자에게 씌운 분열의 귀신을 몰아냄(행16장).

` 믿음의 말 : 베드로가 아나니아와 삽비라에게(행5장)

` 기적의 능력 행함 : 베드로를 통해서 도르가의 생명이 살아나는 부활의 기적(행9장)

` 방언과 통역의 은사 : 베드로가 고넬료의 집에서 설교할 때(행10장)

` 예언 : 아가보라는 제자를 통하여 교회가 받음(행11장)


귀신은 성령의 은사를 멸시하여 사람들에게서도 이 은사를 멸시하도록 충동질한다. 왜 그런가? 그 이유는 초자연적인 권능의 은사는 마귀의 역사를 거스리기 때문이다.

` 영을 분별하는 은사와 지식의 말씀의 은사로 마귀의 존재와 계책은 의해 폭로된다.

` 지혜의 말씀, 믿음, 병고치는 은사와 기적을 통해 귀신들이 행한 악은 없어져 버린다.

` 예언, 방언 및 통역으로 해를 끼치려는 귀신들의 계획은 폭로되어 저지된다.

아홉가지 은사는 교회 발전을 위해서 주어졌다. 사탄은 교회의 적이며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 발전에 관계되는 모든 일에 공격을 가한다. 사탄은 성령의 은사에 강한 공격을 가할 뿐 아니라 특별히 믿는자들의 신앙 함양에 특별한 목적이 있는 방언에 강한 공격을 가한다(고전14:4)

2) 성령의 열매로 집안을 가득 채우라.

갈5:22 "사랑, 희락, 화평, 오래참음,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

이 아홉가지 열매는 예수님의 완전한 성품을 나타낸다. 믿는 이의 삶 속에서 성품이 나타난다. 믿는 이의 삶 속에서 이들 성령의 열매가 맺어졌을 때, 그 사람은 예수님과 동일한 성품을 지니게 된다.

귀신들은 예수님과 정반대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 그들은 자신의 악한 성질을 나타내기 위하여 인간의 놈 속에 침입한다. 그러므로 축귀사역을 통해 마귀와 그 영향을 없애고 예수님과 성령의 열매를 그 사람의 마음 속에 모시는 것이다


영적 눌림의 치유 - 영적 전쟁을 하라

성경은 우리 신자들이 사탄과 그의 군사들과의 전쟁을 씨름으로 비유하여 설명하고 있다. 씨름이란 비유는 참으로 정곡을 찌르는 표현이다. 이 말은 백병전을 의미하는데 암흑세계의 주관자들과 몸을 서로 붙잡고 싸우는 것을 말한다.

우리들 대부분은 거대한 대포를 사용하여 멀리서 이 적들을 박살내고 싶겠지만 그 방법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이 전쟁은 아주 개인적이기에 적과 몸을 맞대어 싸워야 하기 때문이다. 적은 영적인 존재이며 무기도 역시 영적인 것이다.

씨름이란 압박전술을 의미한다. 이 말은 사탄의 전술이 우리를 압박하는 것임을 알려준다. 사탄의 이 전술은 우리의 사고, 감정, 의사결정과 우리의 육체 등 여러 면에서 사용되어진다. 그러나 귀신들의 압박에 대해 승리하는 하나님의 치료방법은 영적인 전쟁이다.

영적인 적에 대해 엡6:12은 우리에게 네가지 중요한 사항을 알수 있다.

1) 우리는 사탄의 '정사(政事)자'들에 대항하여 싸우고 있다.

` 지도자, 통치자들, 행정관리들처럼 일련의 상하질서가 있는 체제를 기술할 때 쓰인다.

` 지도자들과 통치자들의 순서는 그들의 계급과 조직을 설명해 준다.

` 그러므로 '정사'라는 단어는 사탄의 왕국은 고도로 조직화 되어 있음을 알려 준다.

` 사탄은 그 왕국의 우두머리이며 그 아래에 완전하게 복종하는 지배계급이 있다.

` 웹스터 사전에 '정사(Principality)'는 '왕의 영토나 관할구역 혹은 왕의 호칭을 부여한 나라'라고 정의되어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들 지배층의 악령들은 국가나 도시와 같은 일정한 통치지역을 할당받고 있음을 알 수 있다.

2) 우리들은 '권세(Power)'에 대항하여 싸우고 있다.
이 단어는 헬라어로 'Exousias'로 '권위(authority)'라고 번역하는 것이 정확하다. 이 단어는 여러 지역과 영토에 대한 권리를 부여받은 귀신들이 그들에게 내려지는 어떠한 명령이라도 수행할 수 있는 권위를 지니고 있음을 말해 준다. 또한 성경은 귀신들이 권위뿐만이 아니라 권능도 지니고 있음을 보여 준다(눅10:19).

3) 우리는 '이 세상의 어두움의 주권자들'과 맞붙어 싸우고 있다.
'세상의 주권자'에 해당하는 헬라어로는 'Kosmokratoras'이다. 이 단어는 '세상의 왕' 또는 '그 시대의 군주'라고 번역될 수 있다. 이 명칭은 그들이 지배하려는 의도(마4:8)가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성경에 사탄은 '이 세상 신'(고후4:4)이라고 언급되어 있다.

4) 우리가 '하늘에 있는 사악한 영들'과 싸우고 있다.
이 구절의 핵심이 되는 것은 '사악(邪惡)'이라는 단어이다. 이 단어는 귀신들이 매우 파괴적으로 사람을 헤치는 성격을 지니고 있음을 알려 준다. 그들은 때로는 광채를 발산하는 천사의 형상처럼 나타나기도 하지만, 그 간교한 사기성에 의해 많은 사람들을 타락의 함정에 빠뜨리고 있다.

요10:10 "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 뿐이요"

사탄의 왕국은 그들의 악한 목적을 수행하기 위하여 고도로 조직화되어 있다. 귀신의 군사들은 전투대형을 갖추고 있으며, 그들은 사탄으로부터 권세를 부여받아 온 세상을 지배할 뿐 아니라 지독한 악행으로 괴롭히고 있다. 사탄의 세력과 간교한 계략을 모른 체 하므로 우리에게 이로울 것은 하나도 없다


영적 눌림의 치유 - 악한 영이 인간에게 주는 현상들

귀신들린 사람의 일반적 현상은 거짓말과 부정한 일에 열을 냄, 불안, 침울, 두려움, 하나님께 대한 반역, 하나님을 모독, 폭력과 저주, 과도한 성욕, 육욕, 영적인 것에 대한 저항과 증어, 상담을 거역함, 보통이 아닌 신체적인 힘, 병이나 상해와 무관한 고통으로 괴로움을 당함.

1) 각양의 질병을 준다
- 마4:24 "그의 소문이 온 수리아에 퍼진지라 사람들이 모든 앓는 자 곧 각색병과 고통에걸린 자 귀신 들린 자 간질하는자 중풍병자들을 데려오니 저희를 고치시더라"

- 눅4:40-41 "해질 적에 각색 병으로 앓는 자 있는 사람들이 다 병인을 데리고 나아오매 예수께서 일일이 그 위에 손을 얹으사 고치시니, 여러 사람에게서 귀신들이 나가며 소리질러 가로되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 예수께서 꾸짖으사 저희의 말함을 허락지 아니하시니 이는 자기를 그리스도인 줄 앎이러라"

2) 난폭하게 성격이 변한다
- 마8:28 "또 예수께서 건너편 가다라 지방에 가시매 귀신 들린 자 둘이 무덤 사이에서 나와 예수를 만나니 저희는 심히 사나와 아무도 그 길로 지나갈 수 없을만 하더라"

3) 더럽다
- 마8:31 "귀신들이 예수께 간구하여 가로되 만일 우리를 쫓아 내실진대 돼지 떼에 들여 보내소서 한대"

- 마12:43 "더러운 귀신이 사람에게서 나갔을 때에 물 없는 곳으로 다니며 쉬기를 구하되 얻지 못하고"

4) 벙어리가 되게 한다
- 마9:32 "저희가 나갈 때에 귀신 들려 벙어리 된 자를 예수께 데려오니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는 일도 있다"

- 마11:18 "요한이 와서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아니하매 저희가 말하기를 귀신이 들렸다 하더니 눈을 멀게 한다"

- 마12:22 "그 때에 귀신들려 눈 멀고 벙어리 된 자를 데리고 왔거늘 예수께서 고쳐 주시매 그 벙어리가 말하며 보게 된지라"

5) 악한 귀신이다
- 마12:45 "이에 가서 저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가서 거하니 그 사람의 나중 형편이 전보다 더욱 심하게 되느니라 이 악한 세대가 또한 이렇게 되리라

6) 흉악한 귀신으로 불에 던지기도 한다
- 마15:22 "가나안 여자 하나가 그 지경에서 나와서 소리질러 가로되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히 귀신들렸나이다 하되"

7) 소리를 지른다.
- 막1:23 "마침 저희 회당에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 있어 소리질러 가로되"
- 눅4:41 "여러 사람에게서 귀신들이 나가며 소리질러 가로되 당신은하 나님의 아들이니이다 예수께서 꾸짖으사 저희의 말함을 허락지 아니하시니 이는 자기를 그리스도인줄 앎이니라"

8) 무덤사이에 지낸다
- 막5:2 "배에서 나오시매 곧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 무덤 사이에서 나와 예수를 만나다"

9) 옷을 입지 않기도 한다. 반대로 화려하게 옷을 입기도 한다
- 막5:15 "예수께 이르러 그 귀신 들렸던 자 곧 군대 지폈던 자가 옷을 입고 정신이 온전하여 앉은 것을 보고 두려워하더라"
- 눅8:27 "육지에 내리시매 그 도시 사람으로서 귀신들린 자 하나가 예수를 만나니 이 사람은 오래 옷을 입지 아니하며 집에 거하지도 아니하고 무덤 사이에 거하는 자라"

10) 거꾸러뜨리고 거품을 흘리며 이를 갈며 힘이 없어지고 약해진다
- 막9:18 "귀신이 어디서든지 저를 잡으면 거꾸러져 거품을 흘리며 이를 갈며 그리고 파리하여 가는지라 내가 선생의 제자들에게 내어쫓아 달라 하였으나 저희가 능히 하지 못하더이다"

11) 경련을 일으킨다
- 막9:20 "이에 데리고 오니 귀신이 예수를 보고 곧 그 아이로 심히 경련을 일으키게 하는지라 저가 땅에 엎드러져 굴며 거품을 흘리더라"
- 막9:26 "귀신이 소리지르며 아이로 심히 경련을 일으키게 하고 나가니 그 아이가 죽은 것 같이 되어 많은 사람이 말하기를 죽었다"

12) 물과 불에 던진다
- 막9:22 "귀신이 저를 죽이려고 불과 물에 자주 던졌나이다 그러나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도와 주옵소서"

13) 나가면서 예수님을 알아보기도 한다.
- 눅4:41 "여러 사람에게서 귀신들이 나가며 소리질러 가로되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 예수께서 꾸짖으사 저희의 말함을 허락지 아니하시니 이는 자기를 그리스도인줄 앎이니라"

14) 귀신으로 인하여 고난을 받는 자들이 있다
- 눅6:18 "더러운 귀신에게 고난 받는 자들도 고침을 얻은지라"

15) 타락하게 한다 성적인 타락도 귀신들이 하는 일이다
- 눅8:2 "또한 악귀를 쫓아내심과 병 고침을 받은 어떤 여자들 곧 일곱 귀신이 나간자 막달라인이라 하는 마리아와"

16) 힘이 세고 강하다
- 눅8:29 "이는 예수께서 이미 더러운 귀신을 명하사 이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셨음이라 귀신이 가끔 이 사람을 붙잡으므로 저가 쇠사슬과 고랑에 매이어 지키웠으되 그 맨 것을 끊고 귀신에게 몰려 광야로 나갔더라"

17) 귀신들은 여러마리가 된다
- 눅8:30 "예수께서 네 이름이 무엇이냐 물으신즉 가로되 군대라 하니 이는 많은 귀신이 들렸음이라"

18) 몸을 상하게 한다
- 눅9:39 "귀신이 저를 잡아 졸지에 부르짖게 하고 경련을 일으켜 거품을 흘리게 하며 심히 상하게 하고야 겨우 떠나 가나이다"

19) 신체의 일부를 꼬부라지게 한다
- 눅13:11 "십팔년 동안을 귀신들려 앓으며 꼬부라져 조금도 펴지 못하는 한 여자가 있더라"

20) 괴롭게 한다
- 행5:16 "예루살렘 근읍 허다한 사람들도 모여 병든 사람과 더러운 귀신에게 괴로움 받는 사람을 데리고 와서 다 나음을 얻으니라"

21) 점을 치기도 한다
- 행16:16 "우리가 기도하는 곳에 가다가 점하는 귀신 들린 여종 하나를 만나니 점으로 그 주인들을 크게 이하게 하는 자라"

22) 미혹하는 일을 한다
- 딤전4:1 "그러나 성령이 밝히 말씀하시기를 후일에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미혹케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좇으리라 하셨으니"

23) 이적을 행하기도한다
- 계16:14 "저희는 귀신의 영이라 이적을 행하여 온 천하 임금들에게 가서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의 큰 날에 전쟁을 위하여 그들을 모으더라"



영적 눌림의 치유 - 악한 영이 침입하는 방법

(행8:7) 많은 사람에게 붙었던 더러운 귀신들이 크게 소리를 지르며 나가고 또 많은 중풍병자와 앉은뱅이가 나으니 악한 영들은 '열려져 있는 문'을 통해 침입하여 영적 쓰레기가 있는 곳에 기거한다. 그들은 기회가 주어져야만 들어올 수 있다.

1. 죄를 통하여
사람의 마음 속에 죄를 범할 생각(망상)을 넣어줌. 마귀는 우리의 생각에 죄지을 생각을 넣기 위해 항상 기다린다(창4:7). 귀신은 알고 짓는 죄, 모르고 짓는 죄를 통해서 들어온다.

` 아나니아와 삽비라(행5장).
 ` 가룟유다(눅22:3)

어떤 사람이 단순히 죄를 지었다고 해서 귀신이 그 사람 속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그 죄를 회개하지 않거나 죄 가운데 그대로 있기를 좋아하여 혼돈된 상태로 지낸다면 귀신들은 그 사람에게 들어갈 수 있다. 계속해서 죄를 짓는 행위는 귀신 들림의 기회를 제공해 준다.

갈5장에서 우리는 17가지 '육체의 일'들을 볼 수 있다. 이런 죄를 지으면 귀신이 침입할 수 있는 문이 열리게 된다. 이 때에 그 사람은 이중의 문제, 즉 육체와 귀신의 문제를 갖게 된다. 그 해결책도 이중인데, 그것은 육신을 십자가에 못박고 귀신을 쫓아내는 일이다.

※ 게네스 헤긴
한 악한 영이 와서 어떤 사람 어깨 위에 앉아 그의 귀에 대고 속삭인다. 그 사람이 그 악한 영이 그에게 넣어주는 생각을 즐기게 되면 그 악한 영은 마음에 들어간다. 들어갈 때 우두머리 영이 그 사람을 사로잡아 들창문을 열듯 그의 머리를 열고 그때 다른 악한 영들이 그에게로 들어간다

2. 의도적인 초청을 통한 귀신의 침입
우상숭배와 같이 의식적으로 초청, 관여할 때 마귀는 악령을 그 사람에게 들여보낸다. 영매, 마술, 부적, 주문 등이다.

사교(이단) 모임 참석 - 자신이 영적 활동에 대한 지식이 없는 상태에서 불건전한 모임, 무당집, 점치는 집은 악령이 강하게 역사하므로 자신의 의사 여부와 관계없이 영적 침범을 당한다.

어린아이들을 어떤 영들이나 귀신들에게 봉헌하는 일로 인해서 귀신들이 침입한다.

부모들의 자녀들을 저주함으로써 그들의 자녀가 귀신들리게 될 수도 있다.

3. 무의식적인 초청에 의한 마귀의 침입
1) 자신의 행위와 관계없이 조상의 죄로 인해서 유전적으로 침입(막9:21, 막7:25)
   ` 조상의 심한 우상숭배
   ` 가족 가운데 무당과 같은 귀신에게 직접 관련된 사람이 있는 경우

2) 문화, 생활 환경에 영향을 받는다.
   ` 기독교 문화보다 불교권의 문화에서 마귀에 영향력을 많이 받는다.

3) 마음의 큰 충격, 상처를 받았들 때
` 인간이 가장 약할 때(큰 충격, 질병) 약한 부분에 공격을 받는다. 또한 인간의 성장기간중 가장 약한 기간인 유아때, 노인시기에 사단의 공격이 심해진다.
` 인간의 장점, 약점을 공격한다. 장점은 교만해지기 쉬운 습성이 있다.
` 배우자와의 사별, 파산, 직장 해고, 심한 수치, 모욕, 충격과 같은 자신이 수용할 수 있는 한계를 넘은 환경의 큰 변화가 있을 때

4) 심한 분노를 지니고 있을 때(엡4:25)

5)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특정한 죄를 상습적으로 반복하는 행위

6) 자신의 추구하던 일이 성공적으로 이뤄졌을 때, 교만한 마음을 일으키고 그 뒤를 따라 들어간다.

7) 폭력, 살인과 같이 다른 사람에게 큰 피해를 입힌 경우

8) 악한 사업과 관련(매춘, 마약 밀매, 포르노 사업, 도박장)

9) 가족에 대한 다른 사람으로부터의 저주

10) 탈진현상을 통해서

11) 죽은 사람을 만지는 것을 통해서 - 사람이 죽은 모습을 볼 때

# 귀신의 통제의 형태
신약에서 사용하는 용어로 '귀신들림'이 있는데 이 말은 두가지 명확한 형태를 보여 준다.

1. 점거로서의 귀신들림 - 내적으로서 흔히 점거라고 부르며(막9장 / 귀신들린 아이),

1) 부지불식간에 비술을 접했거나, 비술로 말미암아 치유 혹은 저주를 받거나 물려 받았을 때 귀신이 들린다.
- 간질에 걸린 아이(막9:21), 수로보니게 여자의 딸(막7:25)
- 이것은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것으로 보여지며,
- 특히 후자의 경우는 우상숭배나 이방종교와 연결된 것 같다.

2) 초청함으로서, 의도적인 것(사단을 경배하는데 의도적으로 자신을 드리는 경우)과 비의도적인 것이 있다(영매의 경우)

3) 점거는 일시적이거나(마12:43-45), 거라사인의 광인과 같이 장기적인 경우가 있다. 회당에 더러운 귀신들린 사람처럼(막1:23-25) 그리스도께서 임재하셔서 차단시키시기 전까지는 귀신들린 현상이 표면적으로 나타날 수도 있고 잠행하는 상태로 있을 수 있다.

점거의 결과
(1) 인성에 변화가 온다. 혹은 의식이 혼미해진다(막9:26)
(2) 귀신들린 사람을 통해 다른 인격체가 말을 한다(눅8:28-30)
(3) 비자연적인 힘(눅8:29)
(4) 비자연적인 지식과 심령술 혹은 비술적 능력(행16:16-17)
(5) 심한 신체적 장애, 예를 들어 간질에 의한 경련증(막1:26),
   귀먹고 벙어리됨 혹은 호경됨(마12:22-30, 9:32-34)
(6) 자살충동과 자기학대(막9:22, 5:5)
(7) 그리스도 혹은 예수님의 이름에 대한 반응과 두려움(막1:24)

그리스도인도 점거당할 수 있는가? 완전히 점거당할 수 없다.
(행8:7) 많은 사람에게 붙었던 더러운 귀신들이 크게 소리를 지르며 나가고 또 많은 중풍병자와 앉은뱅이가 나으니

2. 묶임으로서의 귀신들림 - 외적인 것으로서(눅13장 / 귀신들려 병에 걸린 여자, 고후12:7/바울의 가시).

외부의 어떤 존재에 의해 인격이 완전히 점거당하지 않으면서도 귀신의 통제를 받는 상태가 있다. 이런 경우 삶의 일부가 종속되어서 일반적인 은혜의 수단으로는 자유케 되지 못한다.

1) 비술에 접한 경험이 있을 때에는 영적 진리에 대하여 전반적으로 혹은 부분적으로 눈이 멀거나 마비가 야기된다.

2) 특정 죄에 대해 상습적으로 행하는 허물이 있을 때 믿는 자라도 귀신의 묶임을 당할 수 있다. ` 용서하지 않음(고후2:10-11),
` 영적 속임(딤전4:1-2)과 율법주의(갈4:9)
` 교만(딤전3:6-7)
` 음란(고전7:5, 유1-10, 벧후2:9-15)
` 훼방(딤전1:20)
` 거역과 완악함(삼상15:23)
` 두려움(히2:14-15)

3) 육체의 죄악된 일과 연관되어 나타난다. 그러나 육체가 십자가에서 처러되면(갈5:24) 마귀가 통제할 수 있는 근거는 사라지고 자동적으로 자유가 찾아온다.

4) 묶임은 저주 때문에 생길 수 있다. 영의 전달 매체는 말이다. 따라서 말은 생명과 죽음, 선과 악, 축복과 저주가 임하는 수단이 된다(잠18:21). 저주는 저주한 사람의 말에 의해 악이 미치는 영의 작용을 동반한다(민22:6, 23:7, 신11:26-28, 삿5:23). 비난하는 말이나 위신을 깍아내리는 말을 들었을 때 그 말을 의식하고 두려움으로 반응 한다면 그것은 저주가 될 수 있다(잠26:2)






영적 눌림의 치유 - 귀신에 대한 이해


인간의 문제를 크게 세가지 영역으로 나눈다면 죄와 질병과 악령의 묶임인데, 예수님의 사역은 바로 이러한 영역을 다루신 것이었다. 그리고 교회에 이 세가지를 분부하셨다. 따라서 우리는 '복음을 전파하라. 병든 자를 고치라, 귀신을 쫓아내라'는 명령에 순종해야 한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된 후 이전 보다 훨씬 더 많은 문제에 부딪히게 된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을 때, 전에 없었던 원수가 생기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에게 오기 전에는 이 세상의 사단이 우리를 방해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이미 사단의 소유물이었기 때문이었다.

사단의 목표는 우리를 구원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섭리(고후4:3-4)에 눈이 멀게 함으로써 우리를 자기의 소유로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으로 나아왔을 때, 사단은 그의 정체를 감추지 않는 것이다.

우리는 인간에게 미치는 마귀의 세력을 다루는 데 있어서 양극단을 피하기 위해 성경에 계시된 말씀을 아주 면밀히 살펴보아야 한다. 양극단이란, 한쪽은 초자연적인 악의 세력에 병적인 집착을 가지고 모든 불행과 모든 죄의 배후에 귀신이 있다고 보는 것이며 또 다른 한쪽은 귀신의 활동을 무시하는 것이다.

1. 악의 세력에 대해서 병적인 집착을 가지는 자들
귀신들이 그들을 삼키려고 삶의 구석구석에 잠복해 있다고 의심하면서, 악의 세력에 대하여 다소 편집증적인 반응을 보이는 자들이 있다. 그것이 근거가 없는 두려움이다. 영적인 영역에서 우리와 사단의 관계는 마치 우리와 병균과의 관계와 아주 흡사하다. 우리 주변에는 곳곳에 병균이 있다. 공기 속에, 물 속에, 음식물 속에, 다른 사람들 속에, 그리고 우리 몸 속에도 있다. 그러나 그것 때문에 자신이 어떤 병에 결릴 것이라는 끊임없는 공포 속에서 살고 있는 사람이 있는가? 우울증 환자가 아닌 한 그렇지 않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알맞은 음식과 적당한 휴식을 취하고, 자신과 주변을 청결하게 하면 아무 문제가 없이 건강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만일 감기에 걸리거나 홍역에 걸렸다면, 그것을 치료하기만 하면 다시 정상적인 행활로 돌아간다.

영적인 영역에서도 마찬가지다. 악령들은 전염시킬 대상들을 찾아 다니는 눈에 보이지 않는 작은 병균들과 같다. 성경은 그것들이 결코 우리가 두려워할 대상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다. 악령들은 존재하지만 우리는 악령들의 정체를 바로 알고 의롭게 살아가면 된다.

우리는 그들의 공격을 받을 수 있다. 그때에는 그들을 대적하고 일상적인 생활을 하면 된다. 우리가 유일하게 마귀에 관해 주의할 것은 그의 큰 입술이다. 악령들은 상습적인 거짓말쟁이다. 그러나 우리는 진리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악령들이 던지는 공격을 대적하는 데 필요한 모든 권세와 보호를 이미 다 갖추고 있다.

2. 귀신의 활동을 무시하는 자들.
"만일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내 신분이 보장되고 잘 보호받을 수 있다면 왜 내가 적극적으로 방어해야 하는가? 나는 그냥 예수 안에 안식하고 예수님이 나를 보호해 주시면 되지 않는가?"라는 의문이 들지도 모른다.

그것은 마치 군인이 "우리 나라는 막강한 군사력을 보유하고 있어, 최신식 탱크와 비행기, 미사일, 그리고 바다 곳곳에 해군 함대도 소유하고 있어, 왜 내가 철모를 쓰고 보초를 서야 하며, 사격술을 익혀야 하는가? 탱크와 공군기들이 전방에서 싸우는 동안 나는 군대 내무반에서 편안히 있으면 되지 않는가?"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적군이 공격해 왔을 때, 누가 최초의 공격 대상이 되는지 상상해 보라.
우리의 "사령관 되시는 그리스도께서 어두움의 세력을 대적하여 승리를 얻도록 모든 것을 우리에게 제공해 주셨다. 그러나 주님은 "나는 승리를 위한 전략과 효과적인 무기들을 다 준비하였다. 그러나 네가 적극적으로 그 전쟁에 참여하여 사우지 않는다면 너는 그 전쟁에서 지게 될 것이다"라고 말씀하신다.

제시 펜루이스는 그녀의 고전적인 책 War on the Saints에서 "그리스도인의 소극성은 죄를 짓는 차원 다음으로 악령의 일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된다. 이것은 하나님이 그의 자녀들에게 요구하시는 것과는 아주 상반되는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께서 준비해 놓으신 전략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이 우리를 마귀의 영향력에서 보호해 주실 것을 기대할 수 없다.

3. 무속적 귀신관을 기독교에 적용하려는 생각:
이런 경우 기독교를 무속적인 종교로 만들어 버린다. 예수의 사랑보다 귀신이 무서워서 믿음생활을 하게 만든다. 예수를 귀신 쫓는 존재로 만들어 버린다.

4. 인간의 불행, 질병을 모두 귀신이 일으킨다는 인과응보적, 동양적 세계관.
인간은 죽음과 함께 두 번의 분리가 있다. 하나는 육체와 영혼의 분리이며, 또 하나는 일생동안 그 사람에게 붙어서 살아왔던 악령과의 분리이다. 인간의 영혼은 육체와의 분리후 심판을 받기위해 심판대 앞으로 가며, 분리된 악한 영은 육체를 필요로 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들어간다. 그 때 전혀 모르는 사람보다 그 사람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사람에게 들어간다. 따라서 악한 영은 가문, 지역, 국가와 같은 영역에서 활동한다.

그리스도인도 귀신들릴 수 있는가?
[딕 케이슨 ]"그리스도인이 귀신들릴 수 있을까? 하는 질문은 마치 그리스도인이 암에 걸릴 수 있을까 라고 묻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메릴 엉거 "중생한 사람 속에는 귀신이 거할 수 없다는 이론을 뒷받침할 만한 것이 성경 어느 곳에도 없다."

찰스 크래프트"귀신들로부터 자유스러워져야 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있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경종을 울려 주는 것이다. 얼마나 많은 수의 사람들이 귀신으로 인해 괴롭힘을 당하고 있는지 정확한 통계를 낼 수 없지만 나는 대략 교회에 출석하고 있는 사람들의 약 삼분의 일 정도가 귀신의 괴롭힘을 받고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나의 이러한 발언에 대해 비난을 퍼부을 사람도 있다는 것을 모르는 것은 아니다. 또한 그리스도인들이 귀신들릴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논란은 두 가지 측면에서 생겨난다. 즉 이와 같은 논쟁은 귀신들림에 대한 용어상의 문제와 귀신들린 사람들을 다루어 본 경험이 없는 데서 오는 문제에 기인한다." - 사악한 영을 대적하라 -

성도에 대한 사단의 역사에 대한 성경적인 예들을 살펴보자
` 눅13:10-18 / 18년 동안 귀신들린자 - 회당안에 있었으나 귀신이 들려 있었다. 벽을 통과
` 마16:22-23 / 신앙고백 후 베드로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 눅22:31-34 / 베드로 - 사단이 밀까부르듯 함
` 엡6:10-17 / 전신갑주를 입으라 - 입는 목적은 사단의 화살이 뚫고 들어오지 못하도록
` 약3:14-16 / 시기나 다툼, 이기적 욕심 - 이런 것은 세상적이요 정욕적이요 마귀적인 것
` 딤전3-6 / 비방과 마귀의 올무에 빠질까 조심하라.
` 딤전4:1-3 / 마음을 속이는 것 - 우리 내면에서 작용한다는 것
` 딤전5:15 / '사단에게 돌아간' 신앙인에 관하여 이야기 하고 있다.
` 고전5:1-13 / 아버지의 아내와 근친상간 - 마귀 유혹에 빠져서 교회 안에서 행함
` 고후2:10-11 / 바울은 사단의 속임수를 알지 못해 신자들이 겪을 위험을 기록
` 엡4:26-27 /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라 - 마귀로 틈(장소)을 타지 못하게 하라.
` 벧전5:6-9 /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삼킬 자를 찾는다 - 삼키다 : 먹어치우다
` 행5:1-11 / 아나니아와 삽비라 -사단이 가득 - "온 교회와 이 일을 듣는 사람들이 두려워함"

이상의 성경 말씀을 통해 볼 때 성도라 이름을 가진 자들에게도 귀신들이 역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 한국 문화에서 '귀신'이라고 하면 머리풀어 헤친 처녀 귀신이라는 이미지를 제일먼저 떠 올린다. 그래서 성도에게는 그러한 귀신이라는 자신 속에 없다고 단정짓는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하는 귀신의 개념은 우리 문화에서 말하는 개념하고 조금 다른 의미로 말씀하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이를테면 베드로가 신앙고백을 하고나서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듣자 "주여! 그리마옵소서.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라고 했을 때 예수께서 베드로를 보고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라고 하셨다.

이 말씀은 지금 예수께서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않고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 베드로를 보되 그 뒤에서 조종하고 있는 사단을 대하여 말씀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말하는 귀신이란 개념은 우리의 생각과 감정, 육신에 영향을 미치는 어떤 영적 세력, 즉 영적 병균과 같은 존재로 말씀하고 있다.

따라서 하나님의 자녀라 할지라도 영적으로 건강하지 않으면 병균과 같은 악한 것들이 가까이하여 하나님과의 관계, 사람과의 관계, 자신과의 관계 등에 역사해서 하나님께서 주신 참된 복을 노략하는 것이다.

야고보는 약4:7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고 깨우치고 있다. 이 말씀은 우리가 마귀를 대적하지 않으면 마귀는 떠나가지 않는다는 말씀이 아니겠는가?

바울은 엡6:10-17 "마귀의 궤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믿는 사람들이 입어야 할 전신갑주에 대해 말하고 있다. 만일 우리가 전신갑주를 입지 않고 마귀와의 전쟁터에 나간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상처를 입는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전신갑주로 우리를 감싸지 않는다면, 무장되지 않은 부분이 공격을 당할 것이다.

다시 엉거 박사는 "만일 그리스도인이 그의 전신갑주를 이용하지 못한다면, 사단이 믿는 사람들의 도시를 공격하지 않겠는가? 사단이 믿는 사람들을 공격하는 이유는 분명히 그를 노예로 만들어 자기 뜻을 좇게(딤후2:26)하려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해 악한 영들이 그리스도인에게도 역사한다. 들어올 수 있다는 것이다. 영적으로 볼 때,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된 자의 영 속에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신다. 그러나 아직 육체의 소욕을 좇아 살아가는 옛 사람의 생각과 감정, 육신에는 얼마든지 영적인 존재인 귀신들이 숨어 있거나 붙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인간의 문제를 크게 세가지 영역으로 나눈다면 죄와 질병과 악령의 묶임인데, 예수님의 사역은 바로 이러한 영역을 다루신 것이었다. 그리고 교회에 이 세가지를 분부하셨다. 따라서 우리는 '복음을 전파하라. 병든 자를 고치라, 귀신을 쫓아내라'는 명령에 순종해야 한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된 후 이전 보다 훨씬 더 많은 문제에 부딪히게 된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을 때, 전에 없었던 원수가 생기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에게 오기 전에는 이 세상의 사단이 우리를 방해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이미 사단의 소유물이었기 때문이었다.

사단의 목표는 우리를 구원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섭리(고후4:3-4)에 눈이 멀게 함으로써 우리를 자기의 소유로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으로 나아왔을 때, 사단은 그의 정체를 감추지 않는 것이다.

우리는 인간에게 미치는 마귀의 세력을 다루는 데 있어서 양극단을 피하기 위해 성경에 계시된 말씀을 아주 면밀히 살펴보아야 한다. 양극단이란, 한쪽은 초자연적인 악의 세력에 병적인 집착을 가지고 모든 불행과 모든 죄의 배후에 귀신이 있다고 보는 것이며 또 다른 한쪽은 귀신의 활동을 무시하는 것이다.


원인이 소멸되면 결과도 소멸된다

“아니 뗀 굴뚝에 연기나지 않는다”는 한국 속담과 유사한 말이다. “심은 대로 거둔다”는 성경의 진리와도 일치되는 말이다.(갈 6:7) 이러한 단순한 진리는 질병의 증상 치료보다 “뿌리치료(root therapy)” 혹은 “원인 / 근원치료”의 필요성을 역설한다. 일반적으로 서양 의학은 국부적 증상치료에 역점을 두는 것 같다. 반면에 동양 의학은 총체적 원인치료에 심혈을 쏟는다. 서양 의학 역시 점점 원인치료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예를 들면, “스트레스는 만병의 근원이다” 혹은 “비만은 만병의 근원이다” 등이다. 그러나 이러한 접근방법은 동양 의학과 마찬가지로 “낮은 차원의 뿌리치유”(Surface-Level Root Healing)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인간의 질병의 원인을 영•혼•육과 인간관계 및 하나님과의 관계 등 총체적으로 분석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성서적 치유는 “깊은 차원의 뿌리치유” 이다.

질병의 원인을 바로 알면 치유가 보인다
사람들이 병드는 이유는 무엇인가? 모든 질병의 근원은 죄이다.
죄는 원죄와 본인의 죄(혹은 자범죄)로 구분된다. 모든 인간은 아담과 이브의 원죄로 인해 영•혼•육이 타락하게 되어 죽음과 질병의 고통을 당하게 되었다.(창3:14~19, 롬5:12)

본인이 죄를 질 때, “심은 대로 거둔다”라는 하나님의 우주적 법칙에 따라 죄의 결과로 질병에 걸리기도 한다. 범죄한 사람은 하나님의 법을 어겼기 때문에 하나님의 심판인 저주의 징계를 받아 질병의 고통을 겪게 된다.(출 15:26, 시 103:5, 요 5:14, 약 5:16) 질병을 통한 하나님의 저주의 징계는 범죄한 사람들의 후손에게까지 내려 갈 수 있다.(출20:4~6, 민14:18, 신7:9~10, 욥4:8, 렘32:18, 애5:7)

마귀가 모든 질병을 주는 것은 아니지만, 마귀가 질병을 주는 경우도 많다. 이는 마귀는 인간을 유혹하여 하나님을 반역하고 범죄하게 함으로써 인간에게 질병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눅9:38~43, 눅13:16, 마17:14~18, 막7:27, 막9:17~29, 요10:10)

마음의 상처(혹은 정신적 스트레스) 역시 각종 질병을 유발한다. 그 외에 과로나 과식 또는 무절제한 생활 등으로 육신을 잘 돌보지 않는 자신의 부주의로부터 질병이 올 수 있다.

질병의 원인을 자신 및 자신의 가계에 적용하라
전술한 바와 같이, 죄는 모든 질병의 근원이다. 모든 인간은 원죄로 인해 사망과 질병의 고통을 당하게 되었다. 그런데, 모든 인간이 당하는 사망과 질병의 정도는 같지 않다. 모든 인간은 아담의 후손으로서 똑같은 죄인이지만, 한 개인 및 가계의 범죄 정도는 장수 및 ‘건강수명(평균수명에서 질병이나 부상으로 인한 평균적 장애기간을 뺀 수명)’을 결정한다.

이런 의미를 일반적으로 해석한다면, 죄는 장수 및 건강을 빼앗아 가는 최대의 적이다. 이런 진리는 다세대를 통해 유효하다. 즉 수명 및 건강은 조상으로부터 후손에게 대물림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에 대한 의학적 설명이 유전병, 희귀병 및 가족병력일 것이다.

현대 의학은 한 개인의 많은 질병이 가계로부터 온 유전병임을 증언한다. 약 천오백만 명의 미국인들이 유전병으로 인해 고통을 당하고 있다. 미국 캘리포니아 산타 모니카에 위치한 유전병 연구재단에 의하면,

병원에 입원할 정도로 심각한 어린이들의 병은 33%, 유아 사망은 50%, 훨씬 높은 비율의 유산은 유전병에 기인한다. 많은 정신박약아의 경우 역시 유전병에 기인한다. 희귀한 유전병을 포함한, 혈우병, 당뇨병, 녹내장, 전신마비, 색맹, 야맹증 등의 약 5천여개의 유전병이 현재까지 발견되었다.

만성질환의 비밀을 밝혀주는 유전인자가 발견되었는데, 이를 가족병력(家族病歷 : family history)이라고 한다. ‘가족병력’은 조부모, 외조부모로부터 본인까지 3대에 걸쳐 같은 질병환자가 2명 이상인 경우를 말한다.

현대 의학자들이 밝혀낸 가족병력의 영향을 받는 질환은 1만 가지가 넘는다. 현재 의학계가 연구를 집중하는 가족력은 암을 비롯한 심장병, 고혈압, 당뇨 등이다. 우리나라에서 희귀질환을 앓고 있는 환자 수는 110여종에 약 50만 명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는 인구 100명당 한명으로 희귀병이 너무 흔하다. 약 40만 명이 간질병 환자로 알려져 있다.

어떻게 유전병과 가정병력을 대처할 것인가?
먼저 우리 집안에 어떤 유전병과 가족병력이 대물림 되는가를 알아야한다.
가계를 관찰함으로서 이런 현상을 파악할 수 있다. 유전병 및 가족병력에 대한 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는 유전자 검사를 통해서도 가능하다.

유전자 검사를 통해 생활습관의 변화, 식이요법, 약물 투여 등 다양한 방법으로 질병에 대처할 수 있다.
과연 치유 교과서인 성경은 유전병과 가정병력에 대해 무엇이라고 말하고 있는가?

성경은 유전병과 가정병력을 조상의 불순종의 삶으로 인해 후손들이 받을 ‘가계의 저주’라고 증언한다.
예를 들면, 아브넬을 살해한 요압을 향해 선포된 다윗왕의 저주에 후손이 걸릴 질병이 포함되어 있다. “그 죄가 요압의 머리와 그 아비의 온 집으로 돌아갈찌어다 또 요압의 집에서 백탁병자나 문둥병자나 지팡이를 의지하는 자나 칼에 죽는 자나 양식이 핍절한 자가 끊어지지 아니할찌로다 하니라.”(삼하3:29)

가계의 저주를 핵심적으로 다루고 있는 신명기 28장 15절~68절의 말씀은 불순종하는 자들이 받을 12가지 저주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데, 후손들이 여기에 포함되어 있다. 이 모든 저주가 너와 네 자손에게 영원히 있어서 표적과 감계가 되리라.(신28:18, 32, 41, 46 및 신29:22 참조)

후손들이 받게 될 가계의 저주 중 하나는 만성적 질병이다. 여호와께서 너의 재앙과 네 자손의 재앙을 극렬하게 하시리니 그 재앙이 크고 오래고 그 질병이 중하고 오랠 것이라.(28:59)

신명기 28장은 범죄자 자신 및 후손에게 임할 가계의 저주로서 유전병 및 가정병력을 구체적으로 열거하고 있다.

신 28:21 여호와께서 네 몸에 염병이 들게 하사 네가 들어가 얻을 땅에서 필경 너를 멸하실 것이며

신 28:22 여호와께서 폐병과 열병과 상한과 학질과 한재와 풍재와 썩는 재앙으로 너를 치시리니 이 재앙들이 너를 따라서 너를 진멸케 할 것이라

신 28:27 여호와께서 애굽의 종기와 치질과 괴혈병과 개창으로 너를 치시리니 네가 치료함을 얻지 못할 것이며

신 28:28 여호와께서 또 너를 미침과 눈멂과 경심증으로 치시리니

신 28:35 여호와께서 네 무릎과 다리를 쳐서 고치지 못할 심한 종기로 발하게 하여 발바닥으로 정수리까지 이르게 하시리라

신 28:61 또 이 율법 책에 기록지 아니한 모든 질병과 모든 재앙을 너의 멸망하기까지 여호와께서 네게 내리실 것이니

예수님의 보혈의 능력으로 유전병과 가정병력의 저주는 끊어질 수 있다.예수님은 범죄한 모든 인간이 받을 모든 저주를 십자가에서 대신 담당하셨다.(마27:46, 막15:34, 요17:41, 19:30, 갈3:13~14)

따라서,예수님의 보혈의 능력으로 유전병과 가정병력의 저주를 끊어야 한다.

이제 유전병과 가정병력을 끊는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치유의 능력을 경험해 보자.
하늘에 계신 아버지, 나를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해 주심”에 감사드립니다.(창1:26, 5:1)
나를 또한 “부모의 형상을 따라 창조해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마19:6, 막10:92)
이 시간 하나님께서 “나의 부모를 통해 내게 주신 모든 복으로 인해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잠19:14)

반면에, 내가 부모를 통해 받은 것 중에 하나님께로부터 받지 않은 것들도 있음을 고백합니다. 왜냐하면, “각양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서 내려온다”고 하나님이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약1:17)

나는 “나의 조상으로부터 망령된 행실이 나에게 유전된 것”을 고백합니다.(벧전 1:18)
나는 유전병이나 질병에 걸리기 쉬운 연약한 체질이 부모를 통해 대물림된 것을 인정합니다.
나는 인류의 조상 아담과 이브의 죄 및 나의 부모의 죄악으로 인해 이 모든 유전병과 가정병력 이 내게 대물림된 것을 고백합니다.(창3:14~19, 출20:4~6, 34:6~7, 신5:8~10)

주님, “나의 조상은 범죄하고 없어졌지만, 나는 조상이 뿌린 죄악의 씨의 열매인 유전병으로 고통을 당하고 있음”을 시인합니다.(애5:7, 욥 4:8, 갈6:7)“산 자와 죽은 자”의 하나님, 나는 “유전병과 가정병력을 가져 온 나의 죄와 나의 조상의 죄악을 인정하고 회개합니다.”(렘 14:20)

이제 주 예수 그리스도의 피의 권세로, 내 가계에 임한 유전병을 치유하여 주옵소서.(요19:10, 갈3:10,13) 나는 나에게 해를 입혔거나 잘못했거나 유전병과 같은 부정적 영향을 준 부모와 조상들을 용서합니다.(엡4:32, 골3:13, 눅6:37)

나는 또한 조상의 죄에 참여하여 대물림된 유전병과 가정병력을 악화시킨나의 모든 죄를 회개하며 용서를 구합니다. (요일1:9, 시38:18, 잠언28:13)

사랑의 하나님, “나의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유전병과 가정병력의 모든 병을 짊어지시기 위해 채찍에 맞으신 예수님의 피의 권세와 능력으로 인해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마8:17, 사53:5)

나는 이 시간 예수 그리스도의 피의 권세와 사랑의 능력으로 대물림된 죄를 끊어버리고, 죄로 인한 대물림된 유전병과 가정병력으로부터 해방된 것을 선포합니다.

이제부터 나와 내 가정은 하나님만 섬기기로 결단합니다.(수24:15)

주님, “후손이 땅에서 강성하고, 정직자의 후대가 복을 받는” 은총으로 나의 가정을 축복하여 주옵소서.(시112:2)

나를 죄에서 건저주신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영혼의 목마름


사55:1-3] “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 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너희가 어찌하여 양식 아닌 것을 위하여 은을 달아 주며 배부르게 못할 것을 위하여 수고하느냐 나를 청종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좋은 것을 먹을 것이며 너희 마음이 기름진 것으로 즐거움을 얻으리라 너희는 귀를 기울이고 내게 나아와 들으라 그리하면 너희 영혼이 살리라 내가 너희에게 영원한 언약을 세우리니 곧 다윗에게 허락한 확실한 은혜니라”

우리는 항상 하나님께 대한 목마름으로 살아야 합니다[사55:1].
하나님께서는 목마른 자들을 사용하십니다.
목마름은 바로 하나님께 대한 갈급함(thirsty)입니다.
목마른 자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목마름을 가시게 만드는 ‘물’입니다.
물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의미합니다[요3장].

예수님은 복음의 영생수에 목말라 하는 수가성 여인을 찾으셨습니다.
여인은 죄에 대한 죄책감, 대인기피증, 정죄감에 눌려 살았었습니다.
그런 그녀를 예수님께서는 친히 찾아가셔서 우물가에서 만나주셨습니다.
여인의 심령은 자신의 고통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갈급함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것을 아시고 여인을 찾아가 복음의 영생수를 부으시고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하나님께 대하여 갈급한 자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도 갈급합니다.
갈급한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주야로 묵상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돈없이 값없이 와서 사 마시라고 하십니다.
이것은 바로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입니다.
은혜는 내가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께서 이루어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생각과 이성으로는 측량할 수 없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긍휼이란 우리는 받을 가치가 없는 존재이지만 하나님께서 불쌍히 여기시고 하나님의 것으로 채워 주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대하여 갈급해야 합니다. 목마름은 부흥의 시작입니다.
하나님은 수가성 여인을 만나셨을 때와 마찬가지로 지금도 우리에게 은혜와 긍휼을 붓고 계십니다.

우리는 이 세상의 삶을 거룩하게 살아야 합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으로 채워야 합니다.
우리의 삶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채워질 때 하나님은 인간의 힘으로 할 수 없는 일들을 행하십니다. 성령으로 말씀으로 충만함을 입고 하나님을 바라보십시오.
하나님께 대하여 더 갈급한 마음을 가지십시오.
하나님은 은혜와 긍휼을 값없이 부으십니다.
우리에게 제일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 오래 사귀는 것이며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전부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 육신이 열매 맺지 않기 위해서는 성령 안에서 수시로 기도해야 합니다. 방언 기도는 성령의 언어이며 성령님이 함께 하시는 기도 이므로 우리 영혼에 유익이 됩니다.
성령 안에서 여러분을 건축하십시오.
수시로 무시로 방언으로 기도하십시오.

하나님을 찾을 때 우리 영혼은 하나님이 주시는 기름진 것으로 즐거움을 얻게 됩니다
(‘your soul will delight in the richest of fare')[사55:2].
하나님은 우리에게 참된 기쁨과 즐거움이 되십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풍요와 즐거움 가운데 거하는 자에게는 기름부음의 역사가 있습니다. 말씀이 채워질 때 즐거움이 임하며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 영혼을 소생케 합니다. 하나님은 하나님 앞에 갈급한 자에게 은혜를 주시며, 갈급함으로 천국을 침노하는 자에게 기적을 더하십니다.

하나님께 돌아오면 하나님은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용서하십니다.
불의한 자는 그 생각을 버리고 돌아오십시오. 그러면 하나님께서 긍휼히 여기십니다.
불의한 자는 바로 악한 생각, 즉 ‘내 생각’으로 나가는 자들입니다(the wicked forsake his way).
불의한 생각을 버리십시오. 육신의 생각을 영의 생각으로 바꾸십시오.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강입니다.

내가 크게 나타날 때 하나님께서는 역사하지 못하십니다. 악한 생각을 다 버리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에서 벗어난 모든 것을 버리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은 산 떡입니다.

지금은 은혜 받을 때이며 긍휼을 받을 때입니다. 그러기 위해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 성령님과 함께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 육신의 마음, 생각, 행동을 과감히 버려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마음을 알기 위하여 말씀을 봐야 하고 이를 행하는 믿음의 사람이 될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the mind of the Lord)을 가지십시오[고전2:16].
그리스도의 마음을 알기 위해서는 말씀을 봐야 합니다.

목마른 자들은 불의한 생각을 버리고 하나님의 말씀(the word of God)을 가져야 합니다[사55:11].
하나님의 말씀은 영이며 생명입니다[요16:63].
말씀은 물이며 복된 장마비이고 생수의 강물입니다.
목마른 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채워야 합니다.
우리 영육혼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채워질 때 기름부음을 받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깊게 생각하십시오.
성령님과 함께 하는 자가 되고 기름부음으로 사는 자가 되십시오.

[요7:37-39] “명절 끝날 곧 큰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가라사대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하시니 이는 그를 믿는 자의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요4;14]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죄, 질병, 저주, 연약함의 문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들어올 때 해결됩니다.
하나님은 긍휼의 하나님이시며 우리의 문제를 해결하시고 도우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들어가기 위하여 반드시 영으로 기도하고 우리 육신이 열매 맺지 못하도록 말씀과 기도로 나가야 합니다[고전14:1-14].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인 방언의 은사를 사용하여 영으로 기도하십시오.
그것은 여러분을 하나님의 안식 가운데, 상쾌함 가운데로 인도할 것이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사28:11-12] “그러므로 생소한 입술과 다른 방언으로 이 백성에게 말씀하시리라 전에 그들에게 이르시기를 이것이 너희 안식이요 이것이 너희 상쾌함이니 너희는 곤비한 자에게 안식을 주라 하셨으나 그들이 듣지 아니하였으므로”

초대 교회를 강건케 했던 힘도 바로 방언 기도입니다.
또한 방언 기도는 내 자신에게 유익이 되는 은사입니다.
또한 여러분은 하나님 앞에 모든 죄를 회개함으로 자유함 가운데 나아가십시오.

회개(repent)는 여러분을 유쾌하게(refreshing)만드는 능력입니다.
[행3:19] “그러므로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 없이 함을 받으라 이같이 하면 유쾌하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부터 이를 것이요”, [마11:28]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회개는 잘못된 육신의 생각을 깨뜨리고 영의 생각이 우리 안에 거하도록 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생각, 습관, 행동의 변화는 하나님 앞에서의 참된 회개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오직 하나님의 것을 생각하십시오. 오직 위엣 것을 생각하십시오.
첫사랑 그대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늘 하나님께 대한 갈급함과 열정을 가지고 나아가십시오.
하나님은 그런 자들을 사랑하며 그런 자들을 사용하십니다


상처와 영적 전쟁

1. 상처는 거짓 선지자들로부터 온 것이고 그 거짓 선지자는 사단의 영향과 조종을 받고 있는 상태에서 우리에게 상처를 준 것이다.

2. 우리 안에 있는 상처를 이용해서 우리를 자신들이 원하는 대로 움직이게 하고 우리의 삶을 파괴하려는 마귀의 공격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으며 이것이 영적 전쟁이다.

* 영적 전쟁에서 중요한 세 가지는
- 원수의 전략을 간파하는 것(Recognizing)
- 그들의 원하는 대로 움직이기를 거부하는 것(Refusing)
- 그것들을 예수의 이름으로 물리치는 것(Resisting)

알다. 인지하다.
1. 마귀가 하는 일의 세 가지 속성(요10:10)
  - 도적질하고(steal) - 죽이고(kill) - 멸망시키는 것(destroy)
→ 이것이 상처가 인간 속에서 역사하는 경우의 삶의 모습이다.

* 하나님의 하시는 일의 속성(요 10:10)
- 생명을 얻게 하고,
- 이것이 가득 차게 하는 것이다.

2. 마귀가 우리에게 노리는 것은 무엇인가?
→ 권위(Authority)

* 이 권위란 원래 하나님만이 가지고 계신 것인데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일부를 위임해 주신 것이다(사랑하시므로). 이것을 자유 의지라고 부를 수 있다. 그런데, 사탄 마귀는 이 권위를 갖기 위하여 인간을 유혹했고, 인간의 동의 하에 이 권위를 자기 것으로 만든 것이다. 이것이 타락이다.

*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하신 일은 바로 이 인간이 빼앗긴 권위를 되찾아 주시는 일이었다(골 2:14-15).

3.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도 마귀의 공격을 받는가?
→ 그리스도인들은 이미 잃었던 권위를 되찾았지만, 우리의 권위를 다시 빼앗으려는 마귀의 공격을 받지 않을 수 없다. 어떤 면에서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이기에 더 심하게 공격을 받는다고 말할 수 있다.

4. 마귀가 우리를 공격할 때 주로 공격하는 네 부분은 어디인가?
1) 생각 (Mind)
2) 마음 (Heart) / 태도(마음가짐), 감정
3) 입(Mouth) / 언어
4) 관계 (Relationship) / 일치됨을 파괴하고 갈등을 유발하려 함.

거부

1. 모든 사람에게 있는 두 개의 문이 무엇입니까?
- ‘음부의 문’(The Gate of Hades/ 마 16:18)
- ‘천국의 문’(The Gates of Heavenly Kingdom/ 마 16:19)

2. 예수를 주님으로 고백한 믿음의 고백을 통하여 주님의 사람이 된 자들에게 주님께서 주신 것은 무엇입니까?
→ 천국의 열쇠(마 16:19)

3. 천국의 열쇠의 기능은 무엇입니까?
- 매는 것(Binding)
- 푸는 것(Loosing)

* 이 매는 것과 푸는 것은 수동적으로 할 수도 있고 공격적으로 할 수도 있다. 이 중에서
수동적으로 하는 것을 ‘거부’(Refusing)이라고 말할 수 있다.

4.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는 것이 거부입니까?
- 생각 속에서 마귀가 주는 생각은 잘라내고(Binding), 하나님이 주신 생각은 받아드린다 (Loosing).
- 마음속에서 마귀가 주는 감정과 태도는 거부하고(Binding), 하나님이 주신 느낌과 마음가짐을 붙잡는다(Loosing).
- 말을 할 때 마귀가 주는 언어를 사용하는 것을 거부하고(Binding), 하나님이 주신 언어를 사용한다(Loosing).
- 관계를 깨고 단절시키는 모든 것을 거부하고(Binding), 일치를 이루기 위한 부분을 노력한다(Loosing).


1. 영적 전쟁에서 우리는 무엇을 통해 음부의 문을 닫고 하늘의 문을 열 수 있습니까?
- 기도 (Praying)
- 언어 (Speaking)
- 삶 (Living)

2. 기도를 통하여 우리는 어떻게 영적 전쟁을 수행할 수 있습니까?
- 우리에게 있는 모든 영적 장애들을 제거할 수 있다. 두려움, 의심, 불순종하는 마음들..
- 우리 자신의 의지를 주님께 내어 드릴 수 있다. 주님께 마음을 여는 것
- 성령님에 의해 인도 받을 수 있다. 영적 깨달음, 영적 감동, 영적 계시
- 성령님에 의해 힘을 공급받을 수 있다. 영적 영향력, 성령님이 흘러넘치는 것.

3. 말하는 것을 통하여 우리는 어떻게 영적 전쟁을 수행할 수 있습니까?
- 마귀의 세력을 향해 예수님의 이름으로 명령하므로
- 마귀의 세력을 향해 십자가의 공로를 선포함으로
- 마귀의 세력을 향해 예수님의 보혈의 능력을 선포함으로

4. 삶을 통하여 우리는 어떻게 영적인 전쟁을 수행할 수 있습니까?
→ 경건 생활


상처를 Blocking하면서 우리가 쓸 수 있는 도구들

1.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은 우리가 사용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Blocking의 무기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속에는 다음 두 가지의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
예수 이름은 그의 능력을 의미한다. 모든 악한 것들을 내어쫓고 병든 것들을 치유하는 능력이다. 모든 염려와 불안, 근심, 두려움 등이 계속 엄습할 때, 이 이름을 사용하여 이 능력으로 내어 쫓을 수 있다.

-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은 죄인인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 갈 수 있는 공로이다. 우리를 향해 끝없이 정죄해 오는 영적 공격을 막을 수 있는 의의 흉배이다. 죄책감이 들고 열등감에 시달릴 때 이 이름의 공로로 이길 수 있는 것이다.

- 예수 그리스도의 다스림(통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은 그 분이 우리의 주되심의 선포이다. 우리를 다스리시는 분은 예수님이심을 선포하고 우리는 그의 사람임을 선포함으로 우리의 내면을 자기의 영역으로 삼으려는 모든 공격을 막는 것이다. 조상의 모든 잘못된 상처의 유전을 이 이름의 다스림으로 막을 수 있다.

2.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실 때 우리의 모든 죄 문제를 해결해 주셨다. 이 죄 문제에는 상처의 문제도 들어 있다. 그러므로 십자가 (공로)는 치유를 위한 강력한 도구이다. 특히 상처가 우리를 지속적으로 괴롭히고 있을 때, 그것을 blocking해 주는 능력이 있다.

- 감추임에서의 해방(드러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모든 감추임에서의 해방을 의미한다. 계속 감추려고 하고 숨기려고 할수록 더욱 더 그 상처에 잡히게 되는 데 본인이 그것을 알면서도 그 감춤에서 벗어날수 가 없다. 십자가의 예수님은 벌거벗은 채 그대로 다 드러나신 분이다. 그 십자가의 능력이 감추어야 한다는 공격을 막아 준다.

- 권리 포기
십자가에서 주님은 완전한 버림받음을 경험하셨다. 그러므로 십자가는 모든 것을 포기하는 능력이다. 우리의 상처가 계속 우리를 붙들고 있는 것은 우리가 잃을까 하는 두려움에 잡혀서 있기 때문이다. 사람의 사랑과 관심, 물질, 명예 등을 잃지 않겠다는 생각 때문에 상처에 지속적으로 잡혀있게 된다. 십자가는 다 포기할 수 있는 능력을 줌으로 이 지속적인 상처의 공격을 막아 준다.

3.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은 치유하는 능력의 도구이다. 주님은 단순히 십자가에서 죽으셨을 뿐 아니라 보혈을 흘려주심으로 우리 가운데 온전한 치유를 선포하셨다.

- 모든 허물(부끄러움)을 가리는 능력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에는 허물을 가리는 능력이 있다. 아담과 하와의 부끄러움을 가리기 위해 가죽옷이 지어졌을 때 흘린 피가 보혈을 의미한다. 레위기에 속건제를 드릴 때 흘린 제물의 피가 보혈을 의미한다. 자기의 자존감을 떨어뜨리는 아프고 추한 기억들이 자기를 계속 힘들게 할 때 우리는 이 보혈을 사용하여 덮을 수 있다.

- 깨끗하게 하는 능력
예수님의 보혈은 죄를 씻는 능력이 있다. 더러운 죄에 빠져 헤어나올 수 없을 때 예수 그리 스도의 보혈이 그 죄를 씻어 준다. 온갖 유혹과 욕심, 음란, 도박, 교만 등 굶주림에서 오는 상처를 통하여 공격해 들어오는 것들을 막을 수 있는 능력이다. 우리를 깨끗이 씻어 새롭게 함으로 이런 생각들에서 우리를 지키신다.

- 의심을 사라지게 하는 능력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은 언약의 피이다. 이것은 결코 하나님께서 우리를 버리시지 아니하신 다는 사랑의 언약을 의미한다. 마음에 의심이 들고 두려움이 있을 때 이 보혈의 공로를 의지하여 그 지속적인 불신을 막을 수 있다.

→ 어떻게 사용하여 Blocking하는가?

1. 열린 문을 통하여 상처의 세력들이 밀려 들어와 우리를 공격할 때 직접 사용할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로를 의지하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나를 지켜 주옵소서

2. 기도할 때마다 근원적으로 Blocking할 수 있다.

3. 상처가 많은 다른 사람을 위해 중보기도할 때 사용할 수 있다.
- 개인을 위하여
- 가정을 위하여
- 공동체를 위하여
- 사회를 위하여

4. 찬양을 하면서 사용할 수 있다.
예수님의 이름을 찬양하는 것, 보혈 찬양, 십자가의 공로를 의지하는 찬양


반복되는 죄는 악습에 의한것

우리는 죄를 회개하면 모든 것이 다 끝난 것으로 여깁니다.
이것은 죄의 처리에 대해서 충분하게 알고 있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범죄한 죄 가운데는 영혼의 구원과는 상관이 없는 윤리적인 죄가 있습니다.

이 죄는 하나님의 축복과 연관된 것입니다. 주님의 은혜를 받고 예정되어있는 축복을 얻기 위해서는 우리는 이런 죄를 반드시 처리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일상생활을 하면서 만나고 저지르게 되는 이런 윤리적인 죄는 평생 짓고 평생 회개해야 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우리 가운데 동일한 죄를 자주 반복하는 경우가 있지요. 그 때문에 갈등과 회의가 깊어집니다. 신앙생활을 잘 해보려고 하지만 이런 어처구니없는 실수를 거듭하기 때문에 주님을 볼 면목이 없어지고 성장하지 못하는 자신이 미워지기도 합니다.

이때 마귀는 우리를 더욱 비참하게 만들지요. 우리를 조롱하고 책망합니다.
그래서 한심한 자신을 보고 믿음이 점점 식어지고 신앙생활이 이 때문에 무기력해지고 심한 경우 믿음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이와 같이 반복되는 죄를 저지르는 까닭은 죄로 인해서 만들어진 악습 때문입니다.
우리가 죄를 고백하고 회개하면 그 죄로 인한 영적 손실을 완전히 회복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 죄로 인해서 생긴 육신적 악습은 우리의 노력으로 제거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하나님은 영적인 문제에 관한 것들을 회복시켜주시지만 육신에 습관이 되어 있는 것은 자신의 노력으로 그 습관을 끊어야 합니다.

물론 일시적으로 강한 성령의 임재로 그런 행위가 나타나지 않지만 악습이 제거된 것은 결코 아니지요. 그러므로 우리 스스로가 노력하여 체거해야 하는 것입니다.

반복되는 죄는 자신에게 물들어 있는 악습 때문인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정신적이든지 육체적이든지 죄에 오랫동안 노출되어 아무런 가책이 없이 죄를 행하여 온 사람은 그 죄의 행위가 우리 몸에 익숙해져서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상황이 주어지면 그 죄에 휘말리게 되는 것입니다.

문제를 죄로 인식하고 회개하기 전까지 그런 행위를 반복해온 사람이 그 죄를 회개하면 그 죄로 인해서 빼앗긴 영적 권리가 회복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에게는 그 죄로 인한 습관이 들어있는 것입니다.

이 습관을 악습라고 부릅니다. 이 처리되지 않은 습관으로 인해서 우리는 그 죄를 계속 반복하는 것입니다. 이 경우 마귀는 우리를 더욱 비참하게 만들어 그 죄로 인해서 믿음에서 떨어지게 만듭니다. 같은 죄를 반복하는 우리에게 마귀는 이렇게 속삭입니다.

“똑 같은 죄를 반복하면서 날마다 회개하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
그것은 하나님을 속이는 것이다”라고 말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죄를 용서하신 것이 아니다. 용서했다면 왜 그 죄를 반복하느냐?”라고 말입니다. 이런 마귀의 참소를 들으면 우리는 정말로 하나님에게 기도하고 싶은 마음이 사라지고 하나님의 용서하심을 의심하게 됩니다.

이런 의심이 일어나면 자신의 죄를 하나님에게 전가시킵니다.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하는 하나님의 존재마저 의심하게 되어 기도도 하지 못하고 영적 침체의 깊은 늪으로 빠져 들어가고 있습니다. 무기력해지고 영적인 일에 관심을 끊게 되며, 무덤덤한 신앙생활을 하기 시작해서 마침내는 무능한 신자로 전락하고 마는 것입니다. 이것이 마귀가 원하는 바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죄를 짓는 것에 대해서 문제를 삼는 것보다 죄를 회개하지 않는 것에 더 관심을 가지고 계십니다. 우리는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구조 속에 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죄에서 자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회개하는 일은 일상적인 일입니다. 반복되는 죄를 회개하는 것은 염치없는 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마귀의 생각입니다. 하나님은 하루에 죄를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회개하면 용서하시는 분입니다. 우리의 일은 죄를 짓고 회개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일은 용서하시고 회복하는 일입니다.

반복되는 죄는 우리의 영육의 축복을 지연시키거나 무효로 만드는 위험이 있습니다.
여러 차례 반복되어 죄를 짓고 있다면 그 죄로 인한 악습 때문입니다.
우리의 육신은 어떤 일을 여러 차례 반복하게 되면 몸에 익숙해지게 됩니다.
이것이 공부의 기능인데 좋은 것뿐만 아니라 나쁜 것도 가리지 않고 몸에 담아둡니다.

육신적인 것은 물론이고 정신적인 것도 만찬가지로 몸에 담아두게 되는 것이지요.
이런 습관 가운데 나쁜 것은 제거해야 하는 것이 우리의 몫입니다. 좋은 것은 받아들이고 나쁜 것은 제거하는 일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악습은 우리의 의지가 제대로 형성되지 못한 유년기부터 시작된 것들입니다.

어떤 것들은 부모로부터 유전된 것도 있습니다. 부모의 죄악으로 인해서 우리에게 그 죄얼이 유전되어온 것이지요. 이런 유전적 죄는 그 처리가 간단하지 않습니다. 죄의 처리뿐만 아니라 악습의 처리도 쉬운 것은 아니지요. 그러나 반드시 처리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 과정은 힘들고 시간도 많이 걸립니다. 의지가 약하고 지식이 많지 않은 시절에 생긴 문제들로 인해서 우리는 고통을 당합니다.

불가항력적인 상황에서 생긴 죄로 인한 악습은 이성이 발달하고 믿음이 들어온 이후에 그것을 제거해야 하겠다는 생각이 들면 그 때부터 각오를 단단히 하고 악습을 떨쳐내는 노력을 해야 합니다. 이것이 성화의 과정인데 이 길이 순례자의 길과 같습니다.

믿음의 동료들과 함께 서로 격려하고 도와주면서 악습을 끊는 노력을 해야 하지요. 혼자는 힘이 듭니다. 서로를 위해서 기도하고 정기적인 기도모임을 가지면서 성화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죄의 유인들로부터 자신을 일정기간 격리시켜서 악습을 제거하기도 합니다.
거룩한 사람들과 지내면서 온전함을 본받습니다. 정기적인 묵상과 깊은 기도를 통해서 성령 충만을 항상 유지하도록 합니다.

말씀에 뿌리를 두고 실천함으로써 믿음을 강하게 하여 세속적 유혹을 이기는 비결을 배웁니다. 자신에게 향한 비전을 항상 마음속에 품고 당당하게 사는 법을 익힙니다. 자신보다는 남을 먼저 배려하는 것이 모든 일에 유익이라는 점을 확실하게 경험하여야 합니다.

겸손한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습니다. 영적 특권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를 위해서 많은 부분을 버릴 줄 알아야 합니다.

세상의 욕망을 내려놓을 때 하나님의 영적 축복이 그 자리를 채운다는 사실을 발견하여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신앙의 선배를 두어야 하고 그 믿음의 길을 본받아 사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신앙의 지도자를 만나는 것이 이런 부분에서 축복의 길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이런 과정을 거쳐서 신앙의 지도자가 되어 약한 사람들을 돕는 자리에 서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죄는 우리를 무기력하게 만들고 하나님의 은혜를 가로막는 장애물입니다. 죄의 회개는 그 장벽을 허무는 것이며, 그 죄의 결과물인 악습을 몸에서 제거하는 일이 완성입니다.

우리는 온전해져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는 바는 우리가 온전해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 속에 있는 쓴 뿌리를 뽑아낼 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죄의 쓴 뿌리인 악습은 저절로 사라지는 것이 절대로 아니며, 끊임없이 싸워서 이겨야 하는 것입니다.


감정의 치유


서 론
기억을 통하여 감정이 형성된다는 것을 우리는 배웠습니다. 감정을 형성하는 근원(base)이 기억이었습니다. 그러나 기억의 치유만으로 우리의 감정과 폭 넓은 영역이 모두 다 치유되는 것은 아닙니다. 마음의 대부분의 형성의 원인이 되는 감정의 치유과정을 살펴보겠습니다.

감정의 영역과 문제점은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모든 것에 완전한 사람은 없습니다. 따라서 완전주의 치료라는 것은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은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감정영역의 문제를 일으키는 요인들과 그에 따르는 현상들에 대하여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1.내부세계
①기억과 쓴 뿌리의 치유되지 않음
대부분의 감정적인 문제를 일으키는 요인이 기억입니다. 이것은 앞 시간에 다룬 것입니다.

②받아드리지 못함
그리스도인들의 정서적 감정적인 문제 중 중요한 요인은 받아드리지 못함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용서를 받아드리지 못함에 그 근원적인 문제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은 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주시는 것이 은혜입니다. 그리고 그 은혜는 우리가 일을 한다고 해도 선을 행한다고 해도 갚을 수 없는 은혜입니다.은혜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하나님의 용서를 받아드리지 못합니다.따라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불행하게도 행위에 급급하게 됩니다.그리고 애써서 노력하는 일에 전념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례)한 그리스도인의 경우입니다. 그는 신실한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그는 외국인으로 한국에서 군복무를 하던 중에 특별한 기간에 일본에서 2주동안에 머무른 적이 있었습니다.그는 그 기간 동안에 동경의 거리에서 외로움과 공허감을 느끼고 몇번 거리의 여자와 동침을 했습니다. 그는 그 이후에 절대로 자신을 용서할 수 가 없었습니다.거울을 드려다 볼 때마다 자신을 보는 것이 견디기 힘들었습니다.그는 그의 경험을 어떠한 사람과도 나누지 못했습니다. 그는 그 사건을 이후에 군 복무가 끝이나고 자신을 변함없이 사랑하며 기다리는 약혼녀를 만났습니다. 그의 정신적인 갈등은 더 커졌습니다. 그는 아직도 자신의 잘못한 대한 완전한 용서를 받아들일 수 가 없었습니다.

자기 자신에 대한 분노와 원망은 치명적인 문제입니다. 자신을 스스로 용서하지 않는 것은 우리가 다른 사람을 향해서 상처를 입게 하는 만큼 우리 스스로에게도 상처를 입히는 일입니다.또한 자신의 상처를 해소를 못하는 사람은 타인도 용서를 못합니다.

③용서의 결여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드리면 다른 사람을 용서할 수 있는 능력이 생깁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용서를 받아드리지 못하는 결과는 다른 사람에게 베풀지 못하는 결과를 낳게 됩니다. 다른 사람을 무조건 용서하고 사랑하고 이해할 수 있는 정서적인 안정감은 대인관계를 성공하게 합니다. 우리와 다른 사람들 간에 생기는 정서적인 갈등의 원인이 여기에 있습니다. 용서를 하지 않기 때문에 다시 용서를 받지 못하는 악순환이 반복되는 것입니다.영적인 악순환입니다.간단한 원리인 것 같지만 가장 실천하기 힘든 것이며 결국은 우리를 실패하게 하는 것입니다.

④완벽주의
하나님의 용서를 받아드리지 못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자신에 대하여 완벽성을 추구하다보면 너무나 심각한 죄책감을 유발하게 됩니다. 완벽성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용서와 십자가의 사랑을 받아 드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2.외부세계
①환경적인 요소들
출생부터 유아기가정적인 환경,성장배경,유년기,사춘기,지금 현재까지 경험했던 경험과 학습했던 모든 것,이것이 외부세계입니다.타인으로부터 어떠한 대우를 받았는가와 어떠한 관계를 맺고 살아왔는가 또한 어떠한 훈련과 학습을 해왔는가가 주요한 요소입니다. 가정적인 환경과 가족 구성원들의 영향력이 감정에 영향을 주는 경우입니다.

②유전적인 요소들
가족의 유전적인 내력이 중요한 요소가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감정이나 성격적인 요인도 유전적으로 영향을 받는다는 것이 학자들의 의견입니다. 집안의 성격적인 내력도 대물림 된다는 것입니다.물론 이는 어린 시절 부모로부터의 학습적인 요인도 있습니다.

그러나 정신적인 질환의 경우도 유전적인 경향이 두드러지며 큰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조사되었습니다. 친척이나 가족이 정신질환자가 있는 경우에 발병율이 더 많고 그 사이가 가까우면 가까울수록 그 가능성이 많다는 것이 연구 결과입니다. 그러므로 감정적으로 쉽게 상처를 받는 것과 자기 마음을 통제하지 못하고 치유하지 못하는 것도 넓은 의미에서 정신병으로 의사들은 분류합니다. 이것을 신경증이라고 합니다.

3.신체적 요인
①호르몬 이상(hormonal imbalance)
여러 가지의 형태의 호르몬 이상은 여러 가지의 감정적인 증세를 수반합니다. 월경기간에 여성들이 감정적인 문제가 생기는데 이것이 거기에 해당합니다. 호르몬의 이상의 문제인 것입니다. 요즈음에는 생리 증후군이라고 하여 잘 알려져 있고 운동이나 의학적인 치료를 통하여서 성공적으로 처방이 되고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첫 월경이나 폐경기나 혹은 갱년기, 유산후나 아이를 낳은 후 혹은 임신 중절이나 불임 수술과 관련된 원인을 들 수 있습니다.

②질병의 합병증(Secondary sympton of Disease)
드물기는 하지만 질병으로 인한 부수적인 증상으로 감정적인 손산이 올 수 있습니다.

③뇌손상
충격이나 사고로 인한 손상으로 정신적인 질병으로 분류됩니다.이와같은 신체적인 현상에 의하여 감정적인 원인으로 다가올 수 있습니다.뇌의 물리적인 손상으로 인하여 진행되는 모든 두뇌의 활동 감각과 지각력 기억력과 사고과정에 영향을 주기 때문입니다.

④중독으로 인한 감정 손상
알코올과 약물등의 남용과 중독으로 인한 감정의 손상이 다가옵니다.또한 현대인의 일중독도 그와 같습니다. 경쟁시대를 살아가는 인생들에게 다가오는 증상의 일종입니다.

그외 음란과 섹스중독으로 인한 존엄성의 상실과 가정의 파괴를 들 수 있습니다. 중독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 큰 죄를 짖게합니다.요즈음에는 컴퓨터 중독이라는 것이 등장하여 많은 청소년들을 유혹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중독의 증상도 사람의 감정적 정서적인 요인에 악영향을 끼칠 수 있습니다.정상적인 인격의 성장을 방해합니다.싸이버 공간 속에서 가상의 세계를 통하여 사람들의 감정이 점점 고립화 내성화 되고 있습니다.

⑤화학적인 불균형
감정적영역의 문제 요소가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잘못된 감정들은 침체의 현상을 가져옵니다. 이것은 발전하여 우울증을 일으키며 나아가서 정신적인 심각한 상태까지 다다르는 것입니다.부정적인 사고는 뇌속의 화학적인 불균형을 가져온다는 것이 의학자들의 이야기입니다. 이 화학적인 불균형이 정신질환을 파생하기도 합니다.

4.영적인 요인
사단의 공격이 주원인입니다. 사단은 우리의 마음을 공격의 목표로 삼기 때문입니다.이 문제에 대하여서는 5강의에서 다루기로 하겠습니다. 중요한 치유의 영역입니다.

5.감정문제의 현상과 반응
①인지와 지각의 증상
어떠한 사건이나 행위를 통하여 먼저 사람은 자극을 받습니다. 자극이라는 것은 나쁜 감정을 유발하는 사건입니다.사람은 자극을 통하여 그 자극의 의미를 파악합니다.자극이 일어나는 동안에 사람의 머리 속에서는 여러 가지 생각이 일어나게 됩니다.

②현상과 행동적 반응
상황에 대한 대처를 위하여 내리는 결정 선택 행동이 나타납니다.

③생리적 현상
빠른 맥박, 호흡의 변화 소화불량 근육의 긴장, 혈기와 분노등으로 표출됩니다.

결론
감정치료의 중요성은 매우 큽니다. 아무리 탁월한 능력과 재능과 학식이 있는 사람이라고 해도 감정이 치유되지 않은 사람은 사회생활을 하는 가운데 매우 큰 어려움을 겪습니다.비단 사회생활 뿐만이 아닙니다.치료되지 않은 감정은 영적인 성장을 방해하는 것입니다. 크리스찬의 삶과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도 늘 패배할 수 밖에 없습니다. 올바로 치료된 감정을 가지고 있는 사람만이 승리합니다.


가계 치유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참고로하세요)

근래에 와서 가계 치유라는 말이 많이 쓰여지고 있다. 이전에 들어보지 못했던 단어이기도 하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의문을 갖기도 하고, 거부감을 갖기도 한다. 심지어 이 부분에 대해서 잘못된 이해로 인해서 이단성이 있다느니 하는 말까지 나오기도 한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가계에 흐르고 있는 많은 문제들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다고 해도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가 예수의 이름으로 누리지 않으면 여전히 많은 문제들이 그리스도인들에게 남아 있거나 가계에 흐를 수 있다는 것이다.

가계에 흐르는 여러 가지 문제들, 즉 육적인 질병의 문제, 정신적인 문제, 영적인 문제는 우리가 치유받아야 할 영육간의 질병이다. 이 질병은 이미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다 담당하셨다. 즉 질고를 담당하시고 채찍에 맞으시므로 우리에게 나음을 주셨다. 그러나 아직 우리에게는 이 질병이 그림자처럼 나타나고 있기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나음을 주장하고 그 질병을 물리치고 나음을 입어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질병 중에는 가계에 흐르는 것이 많다. 어떤 이들이 이것을 가계에 흐르는 저주라고 하기도 한다. 이것을 가계에 흐르는 저주라고 말하므로 성경에 밝은 자들이 말하기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에게는 이미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저주를 담당하셨기에 저주가 없다고 하면서 성경적으로 맞지 않다고 말하기도 한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 위에서도 언급했지만 예수께서 질고를 담당하셨으면 우리에게 질병이 없어야 하는데 있는 것과 같은 것이며, 이 질병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물리쳐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가계에 흐르는 영육간의 문제들을 해결하여야 할 것이다.

그래서 본인은 가계치유에 대해서 조심성 있게 언급하면서 '가계에 흐르는 저주'라는 말 대신에 '가계에 흐르는 영육간의 문제'로 바꾸어 쓰면서 이 부분에 대해서 자료를 제공하고져 한다.

이 부분에 대해서 성경적으로 맞지 않거나 미비하다고 생각되는 부분이 있으면 정죄하거나 판단, 비판하기에 앞서 본인에게 질문과 조언을 바란다.

결론적으로 가계치유란 가계에 흐르는 여러 가지 영육간의 문제, 즉 죄악의 문제이든, 죄로 말미암은 결과이든, 질병의 문제이든 간에 성령의 능력 안에서 치유하자고 하는 취지에서 이런 단어를 쓰고져 한다.

조상의 허물은 자손들에게 영향을 미친다
(출20:5-6)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여호와 너의 하나님은 질투하는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비로부터 아들에게로 삼 사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

(신7:9-10) 그런즉 너는 알라 오직 네 하나님 여호와는 하나님이시요 신실하신 하나님이시라 그를 사랑하고 그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그 언약을 이행하시며 인애를 베푸시되 그를 미워하는 자에게는 당장에 보응하여 멸하시나니 여호와는 자기를 미워하는 자에게 지체하지 아니하시고 당장에 그에게 보응하시느니라

1) 고라, 다단, 아비람 세가족의 가장이 모세에게 반역하는 죄를 통해 그들의 전 가족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았다*(민16:1-33).

2) 아간의 범죄 때문에 전 가족의 죽음을 가져왔다(수7:24-25).

3) 엘리 선지자가 자신의 자녀들의 죄를 방관한 죄를 통해 자녀들에게 하나님의 저주가 임했다(삼상2:12-17, 22-33, 3:13-14).

4) 기브온 족속과의 계약을 어긴 사울 때문에 다윗 때에 전 민족이 삼년 동안 기근을 당하였다(삼하21:1-13).

5) 여로보암 왕의 우상숭배 죄는 자신의 자녀들 및 전 국가에 저주를 몰고 왔다(왕상14:9-18, 왕하17:21-22).

이처럼 조상의 삶이 자손들에게 반드시 어떤 종류의 영향 즉 죄의 결과를 끼친다는 것이다. 인류의 조상 아담과 하와의 범죄를 통해 전 인류는 죄인이 되었다(롬5:12-19).

가계 치유의 중요성
가계 치유는 삶과 죽음의 심각한 문제이다. 어떤 연구단체에서 미국의 유명한 두 가정을 비교 분석하였다. 맥스 존스는 무신론자로서 불신자 여성과 결혼했다. 이제 그의 가문의 560명의 자손들의 삶이 추적되었다. 그들 중에 310명이 거지로 죽었고, 150명이 범죄자가 되었으며, 이들 중에 7명이 살인자였고, 100명이 술주정뱅이였으며, 그 가계에 속한 여자들 중 절반 이상이 몸을 파는 청녀들이었다.

반면에 동시대를 살았던 죠나단 에드워즈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하나님께 헌신된 신자로서 경건한 자매왁 결혼해서 약 1,394명의 자손들을 두었다. 그의 자손 중 295명이 대학을 졸업했고, 그들 중 13명이 대학 총장이 되었으며, 65명이 교수가 되었고, 3명이 미국 의회의 상원의원으로 선출되었으며, 3명은 주지사로, 다른 사람들은 외국에 선교사로 파송받았고, 30명은 판사로, 100명은 변호사로(그 중 한 명은 유명한 법과 대학의 학장이었으며), 56명은 외과 의사로, 75명은 군대의 장교가 되었으며, 100명은 유명한 선교사와 목사와 작가가 되었으며, 또 다른 80명은 다양한 공직을 맡고 있었으며, 그 가운데 3명은 미국의 대도시의 시장으로 일했으며, 한 명은 미국 재무성의 감사관이었고, 다른 한 사람은 미국의 부통령이었다.

또 다른 예로는 우리 모두에게 잘 알려진 미국으 존,에프 케네디 가문이다. 1998년 1월 2일에 지난 68년 6월에 민주당 대선 후보 지명 선거운동중에 켈리포니아에서 암살 당한 로버트 케네디 전 미국 상원의원 및 전 법무장관의 아들인 마이클 케네디(39)가 콜로라도두 에스핀의 스키장에서 사망했다. 이로써 피살과 사고사, 각종 추문으로 얼룩진 미국 케네디 가에 또 다시 이목이 쏠리고 있다. 마이클 케네디의 사망은 케네디가로선 여섯 번째 젊은 사망이다. 삼촌인 존 에프 케네디 대통령은 지난 63년 11월 텍스스주 댈라스에서 46세의 나이로 암살되었고, 아버지인 로버트 케네디는 42세에 목숨을 잃었다. 또 케네디 대통령 형제중 맏이인 조세프 케네디 주니어는 2차 대전 중 29세때 비행기 추락으로 전사했다. 또 케네디 대통령의 여동생 캐슬린 역사 지난 48년 비행기 사고로 28세로 사망해, 케네디 대통령 세대 그룹중 모두 4명이 비명에 숨졌다. 마이클의 형제 데이비드 케네디 역시 지난 84년 플로리다에서 마약 과다 복용으로 숨졌다. 그런가 하면 케네디 대통령 자신도 암살되기 석 달전 미숙아로 태어난 첫 번째 아들이 이틀만에 숨지는 비운을 겪었다.

성경에 나타난 가계에 흐르는 문제들의 예
(1) 아브라함이 자기 아내를 누이라고 속였는데(창12:10-20, 20:1-19), 그 아들 이삭도 똑 같은 거짓말을 하였다(창26:6-11).

(2) 다윗은 간음죄와 살인죄는 그 자녀들에게도 그대로 물려주었다(삼하12:9-12).
- 암논의 간음죄와 압살롬의 살인죄, 솔로몬의 이방여인을 후궁으로 둔 것

어떤 통로로 후손들에게 전수되는가?
1. 부모의 삶의 형태를 모방하여 전수된다. 대부분의 자녀들은 부모와 같이 된다. 알코올 중독이나 도박하는 부모를 가진 자녀들이 그렇지 않은 부모를 가진 자녀들보다 알코올 중독이나 도박꾼이 될 확률이 더 높다.

2. 추수의 법칙을 통해 설명될 수 있다.
(갈6:8-9)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3. 여러 영적 전쟁 전문가들이 주장하는 바와 같이 조상 안에 있는 귀신들이 가계를 통해 후손들에게 전수된다. 이런 영들을 가계의 영이라고 부른다. 이런 영들은 조상들이 사탄과 맺은 어떤 계약, 헌신, 맹세 때문에, 혹은 후손에 대한 저주 때문에 악한 영들은 법적 권리를 획득해 가계를 통해 들어왔다.

프란시스 맥너트는 조상의 죄 혹은 조상으로부터 온 문제는
1) 조상 중에 사교에 가담한 경우 : 무당

2) 가정이 누군가에 의해 저주를 받은 경우
(잠26:2) 까닭 없는 저주는 참새의 떠도는 것과 제비의 날아가는 것같이 이르지 아니하느니라

3) 가족 중에 특별한 죄에 깊숙히 관여된 경우(출20장)

4) 조상 중에서 어떤 타 종교의 지도자였거나 사탄과의 직접적인 계약, 헌신, 맹세가 있는 경우이다.

신자가 저주 아래 있을 수 있는가?

가계에 흐르는 문제에 대한 부정적인 견해가 있다.
1) 죄 및 죄악의 결과는 단지 개인의 책임이다.
2) 은혜의 시대의 신자들에게는 해당되지 않는다.
3) 이미 구원받은 신자들에게는 조상의 죄로 인한 피해가 유효할 수 없다.
4) 부모의 죄 때문에 자녀들이 피해를 보는 것은 불공평한 것이 아닌가?

(갈3:13)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이 말씀에 의하면 우리는 저주에서 속량되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저주를 담당하셨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어떻게 신자가 아직도 저주 아래 있을 수 있단 말인가?

이 질문에 대답은 성경의 법적으로는 신자는 저주아래 있지 않다. 그러나 체험적으로는 저주의 증세를 체험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영적인 문제에 있어서 이 일을 더욱 더 진실로 만들어 주는 바는 우리에게 법적으로 우리 것이 된 것을 우리에게서 빼앗아 가려고 기를 쓰는 불법을 행하는 마귀가 있기 때문이다.

사단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에게 저주를 강요할 법적인 권리는 없지만 그러나 불법을 행하는 범법자이므로 어찌 되었든 그렇게 하려고 시도를 한다. 그러므로 신자들은 자신들의 생활 속에서 사단에게 틈을 주지 않도록 철저히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허물과 죄악된 구습에서 벗어나야 한다.

만일 우리가 저주의 증세를 체험하고 있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온전한 축복 속으로 걸어 들어갈 수 있기 전에 먼저 그 저주의 증세를 물리쳐야 한다. 그리고 그 증세 속에 눌려있는 자들에게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미 저주를 담당하셨으니 그 증세를 자신의 것이 아님을 알고 물리쳐라고 가르쳐 줄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가계에 흐르는 저주는 불신자에게 내려진 것이요, 신자에겐 그것이 하나님의 징계이거나 아니면 불법을 행하는 마귀가 주는 저주와 같은 증세일 것이다.

구체적으로 해결해야 할 문제들
가계에 흐를 수 있는 문제들이다. 아래에 나열한 것을 믿는 자들도 행하고 있다면 저주 증세와 같은 것이 흐를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1) 가장 중요한 죄
- 제1계명의 죄 : 다른 신을 너에게 두지 말라
- 제2계명의 죄 : 하나님을 미워하는 죄 - 우상숭배 죄, 신비술 관련한 죄

2) 신비력과 관계되는 죄악들 - 손금, 점성술, 부적, 화투점, 오늘의 운수, 귀신 놀이, 점쟁이를 찾아다님, 무당굿, 마술, 심령술, 사탄종교, 사이비 기독교, 사주팔자, 토정비결, 신수택일, 기(氣)치료, 컴퓨터 점, 점성술

3) 성적인 죄악들 - 동성애, 수간, 간음, 외도, 음란한 비디오 필름, 음란물, 변태성욕, 간음, 성도착증, 축첩

4) 사탄과의 맹세, 계약, 헌신 - 자녀들을 시영어머니, 무당에게 팔거나 절에 이름을 올리거나 타인이나 바다에 팔지 않았나?

5) 부모에게 불효, 불 공경 (제5계명)

6) 특별한 직업 - 술집, 술 제조, 이방종교 하수인, 음란성과 관련된 직업, 고리대금업, 퇴폐 이발소, 전화방

7) 집안에 부적을 붙어 놓거나 지니고 다니지는 않았나?

8) 자식이 잘 되라고 어머님이 새박마다 정안수를 떠놓고 빌지는 않았는가?

9) 집안의 불상이나 가정신인 신주단지 모셔놓고 빌지는 않았는가?

10) 억울한 피를 흘리거나 타살, 자살한 사람은 없었는가?

11) 혈통적 죄과 - 자녀를 생산 못함, 별거, 이혼, 간음, 중혼, 유산, 자텨의 방탕, 배반, 가출, 자녀를 잃음, 자살, 병사, 사고사, 단명, 갯가, 인공유산(낙태), 귀양살이, 유배,

12) 유전적인 저주, 육체적인 저주 - 관절, 신장, 담낭(용서와 관련된다), 유전병, 각종 암, 만성적 질병, 심장질환

13) 말에 의한 저주 - 병신, 멍청이, 바보, 촌놈, 팔푼이, 석두 같은 놈

14) 시기, 질투, 욕심, 탐심 - 다른 사람이 잘되면 못봐 주는 놀부심보

15) 성품 및 정서적인 상처를 통한 죄악들 - 슬픔, 비통, 근심, 지나친 걱정, 불안, 앙심, 한 맺힌 삶, 우울증, 의처증, 의부증, 게으름, 상습적인 거짓말, 심한 열등감

16) 중독으로 인한 저주 - 일, 약물, 알코올, 마약, 도박, 담배, 음식, 쇼핑

17) 행동적인 특징들 - 분노, 화, 구타, 폭언, 다른 삶을 억압함

18) 저주 - 다른 사람, 이웃, 형제, 친척, 후손들에게 저주하는 조상은 없는가?

19) 참혹한 일 - 전쟁, 익사, 화재사, 대형사고, 홍수, 기근, 집단 자살, 전염병

20) 정신 질환 - 정신 분열증, 정신 장애자, 우울증, 자폐증

21) 우리 집안의 혈기 분노는 어느 가계를 통해서 흘러들어왔나?

22) 우리 집안이 열심히 일하는데도 대대로 가난하지는 않았는가?

23) 사기, 절도, 강간, 살인 등 흉악범은 없는가?

가계에 흐르는 문제들에 따르는 결과
1) 육적으로
강퍅한 마음을 지니게 되며, 실패, 비극, 좌절, 죽음, 파멸, 가정파탄, 결혼문제, 질병, 연약함, 정신질환, 자살, 유산, 사고, 우울증, 슬픔, 비애, 비탄, 고뇌, 번뇌, 절망, 낙담, 가난, 결핍, 사업실패, 혼란, 통증, 죄 잉태, 방해물, 죄의식, 수치, 정죄, 지애, 고난, 재난, 쓴 경험, 악운, 좌절, 진통, 신음, 어려운 시기, 패배, 혼란, 재앙, 불행한 사건, 부진상태, 경제불황, 그리고 화이다.

저주 증세는 어떤 사람을 따라 다니는 일종의 그림자와도 흡사하다. 그것은 한 개인, 가족이나 혹은 국가의 백성을 덮고 있는 검은 구름이다. 만일 이러한 구름이 걷히지 않는다면 그것은 그 세력 아래 있는 사람을 파멸시킬 것이다. 예수님은 오셔서 죽으셨고 또 다시 사셔서 모든 저주에서 속량하셨다. 그 분은 우리가 영적인 일들에 무지하기를 원하시지 않는다. 저주에 관한 지식과 그것을 분별하고 또 그것을 중단시키는 마귀의 역사를 멸하는 신자의 무기로써 절대 필요한 도구이다.

2) 영적으로
(1)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게 한다.
(2)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행치 못하게 한다.
(3) 성경 안에 있는 율법을 살펴보면 7가지 축복과 저주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다.

- 축복 7가지 : ① 높아짐, ② 생식의 축복 ③ 건강의 축복 ④ 재산, 성공의 축복 ⑤ 승리의 축복 ⑥ 꼬리가 아닌 머리가 되는 축복 ⑦ 높은데 거하는 축복

- 저주 7가지 ① 굴욕 ② 열매를 맺지 못함 ③ 모든 종류의 질병 ④ 가난함과 실패
⑤ 패배 ⑥ 머리가 되지 못함 ⑦ 낮아지게 됨

3) 후손에게 미친다.
저주 증세는 우리 자신에게만 영향을 미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후손들에게도 영향을 미치게 된다. 저주 증세는 십자가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가 마련해 주신 구속 안에서 얻은 회개와 거기에 상당한 믿음으로 중단될 때까지 혈통을 따라서 계속해서 이어져 내려가게 될 것이다.

저주 증세가 그대로 지속되는 이유는 그 후손들이 대체적으로 선조들과 같은 죄를 범하기 때문이다. 어떤 죄가 가족들에게 들어올 때는 그들의 어떤 영이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옮기도록 문을 열어주게 된다. 그것은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넘어가는 파멸의 순환이 될 수 있다.

4) 귀신을 들어오게 하는 통로가 된다.
가계에 흐르는 습관적인 죄악은 귀신들에게 문을 열어줄 뿐 아니라 귀신들이 남아 있으면서 작용할 수 있도록 법적 권리를 준다.

이러한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것인가?

우리 가계의 뿌리를 찾아 보자.
우리 가계의 뿌리를 찾아 보자. 가계도를 그려보자
고조부(고조모) - 증조부(증조모) - 조부(조모) - 부
외고조부(외고조모) - 외증조부(외증조모) - 외조부(외조모) - 모

1) 이들의 부부생활은 어떠했는가?

2) 이들의 종교는, 특히 이단종교에 심취하지 않았었나?

3) 무당이나 점쟁이, 사주팔자 보는 사람, 지관은 없었는가? 이런 사람들을 자주 찾아가지는 않았는가?

4) 우상숭배는 어느 정도 했는가? 특히 장손이기 때문에 집안의 제주(祭主)역할을 한 적은 없었는가?

5) 죽을 때 자연사인가? 또는 병사인가? 타살인가?

6) 정신병으로 고생을 한 사람은 없었는가?

7) 특별한 직업은 없었는가?(술집, 술 제조, 중, 이방 종교의 하수인, 성과 관련된 직업 등)




가계 치유에 대하여

1.저주에는 반드시 이유가 있다

한 개인의 가정에 저주를 가지고 온 네 가지 죄:
   1) 환경에 의한 죄(environmental sin)
   2) 악한 영들에 의한 죄(demonic sin)
   3) 개인에 의한 죄(personal sin)
   4) 조상에 의한 죄(generational sin)
이 가운데 조상의 죄는 원죄라는 개념으로 피상적으로 취급되거나, 거의 주목을 못 받았다.
그러나 조상의 죄에 초점을 맞출 때, 다른 세 가지 죄에 대한 이해가 깊어진다.

1.환경에 의한 죄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라는 말은 한 개인과 사회와의 불가피한 관계성을 입증한다.

인간은 직계가족을 비롯한 사회로부터 태어나고 큰 유익을 받는다. 한편 한 인간은 자신이 태어난 가정, 사회, 문화, 민족에 의해 거의 절대적인 영향을 받는다. 이 세상은 사탄의 지배하에 있기 때문에(요일 5:19),우리는 불건전한 사회적 환경에 살고 있다. 이 사회적 환경은 문화, 전통, 가치, 관습 중 모든 불 경건한 영역을 포함한다.

따라서 우리의 문화는 우리가 어떻게 생각하고 행동해야 하는가에 대해 절대적 영향을 준다. 또한 한 문화 속에 형성된 인간은 어린 시절부터 밴 문화적 습관을 아무런 판단 없이 무의식적으로 받는 경향이 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모두는 선과 악의 선택에서 선보다는 악을, 그렇지 않으면 죄를 선택하도록 제약받는 존재이다.

2. 악한 영들에 의한
우리의 인식과 관계없이, 인간의 모든 악이나 죄의 배후에는 악한 영들이 존재한다.
인간이 죄를 선택했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사탄의 악의 도구로써 역할을 한 셈이다.

사탄은 유혹을 통해 인간을 죄에 빠뜨린다. 사탄은 우리의 생각과 자연적 본능을 통해 역사 한다. 우리의 본능과 생각을 충동하여 본능에 굴복하게 하여 죄에 빠지게 하는데, 이 모든 것들은 항상 자기 파괴적이다. 사람이 죄의 유혹에 반복적으로 굴복하게 되면, 그런 행동은 습관이 된다. 따라서 죄에 대해 거부하는 힘은 점점 감소하고, 사탄이 한 개인을 지배 할 수 있는 빌미를 준다.(엡 4:26-27).

영적 전쟁 전문가 에드 머피(Ed Murphy)는 여섯가지 종류의 "죄의 연속성"(continuum ofsin)을 사용하여 어떻게 사탄의 힘이 점진적으로 신자들을 사로잡는가를 설명한다.

1) 우리마음이 하나님이 원하는 것을 생각하는 대신에 죄악의 생각(thought)에 집착한다.
2) 선택(choice)을 유발한다.
3) 반복되는 행동은 습관(habiits)이 된다.
4) 습관은 통제 불가능(loss ofcontrol)상태에 이르게 된다.
5) 죄의 포로(bondage)가 된다.
6) 궁극적으로 죄의 전적 통제(total control)를 받는 상태에 이르게된다.

3. 개인에 의한 죄
우리의 개인적 죄에 의해 총체적 악을 증가시킨다. 아담과 이브의 범죄로 인해 우리 속에 육신과 연약한 인성이 형성되었다. 이러한 범위 내에서도 인간 스스로는 도덕적, 윤리적, 영적 자유 의지를 가지고 선과 악을 선택 할 수 있다. 우리는 위치적으로 죄에 사로 잡혀 있을 뿐 아니라, 죄 성을 즐기게 되었다. 사도 바울은 이점을 분명하게 설명한다.

또한 저희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저희를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 사 합당치 못한 일을 하게 하셨다........저희가 이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한다고 하나님의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 일을 행하는 자를 옳다 하느니라(롬1:28,32)

따라서 모든 인간은 자신의 자유 의지를 따라 하나님보다는 사탄을 선보다는 악을 선택하였기 때문에 이에 따른 도덕적, 윤리적, 영적 결과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 이런 관점에서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라는 로마서 3장23절의 말씀을 아담의 죄로 인한 모든 인간이 죄인 되엇을 뿐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 각각의 실제적 죄로 인해 죄인이 되었다고 해석 할 수도 있다.

죄의 네 번째 원인을 살펴보기 전에, 위에서 언급한 죄의 세 가지 원인을 정리해보자.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 2장1-3절의 말씀을 통하여 인간의 죄의 세 가지 원인을 규명하였다.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1)[세상]이 세상 풍속을 좇고 (2)[사탄]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 하는 영이라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3)[육신]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진노의 자녀이었더니
본문의 말씀은 성도가 구원받기 전의 상태를 잘 묘사해 주고 있다. 불신자는 세상과 사탄과 육신에 의해 사로 잡혔다.(약3:15;요일2:15-17;3:7-10)

4. 조상에 의한 죄
조상에 의한 죄는 가계를 통해 내려온 죄의 심판이다. 전이, 전 혹은 가족 죄 등 여러 이름으로 불러진다 이런 현상을 내분비 호르몬 및 신경 조직 등 유전인자로 설명 할 수 있다.

그러나 조상을 통한 죄나 이로 인해 한 개인 및 가정이 받는 피해는 생물학적 유전 현상만으로 설명하기에 역부족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단순히 생물학적 육체가 아닌 영과 혼과 몸으로 지음 받았고, 더욱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영적 존재이기 때문이다.(창1:27;전3:11).우리는 영적으로 하나님과 분리된 채 이 세상에 태어났다.

아담과 이브로부터 현재까지, 우리 모두는 죄의 사슬을 유전 받았다. 조상에 의한 죄와 이로 인한 병은 점점 심해져 우리 모두 축적된 죄의 희생자가 되었다. 우리 가계와 사회는 점점 역기능 적이 되어 버렸다.

사도 바울이 로마서 5장20절에서 말씀한 바와 같이 "(범)죄는 더해간다" 알코올 중독자 부모는 알코올 중독자를 만들고, 타인의 죄로 인한 피해자는 가해자가 된다. 이런 죄악의 사이클은 가계를 통해 계속 반복된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사탄은 세상을 지배할 권리를 상실하였다(골 2:13-15). 세상의 소유권을 잃은 사탄은 사용권을 계속 주장한다.

또 아는 것은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고 온 세상은 악한 자 안에 처한 것이며(요일 5:19).

이를 위해 사탄은 자신의 모든 영적 세력인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사용한다(엡 6:12). 따라서 사탄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영원한 심판을 받기 전까지는 인간을 대상으로 계속적인 전쟁을 벌이게 된다.

사탄이 지배하고 있는 세상에서 가계치유는 개인 죄와 세상과 사탄과 싸우는 영적 전쟁의 중요한 관건이 된다.

2. 산 자만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가계치유를 향한 영적 순례를 시작하다
이제까지 우리는 가계치유의 필요성을 성경적, 임상적 측면에서 조명해 보았다. 문제에 대한 분석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문제의 해결책이다. 마치, 중병에 걸려 있는 환자에게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장시간에 걸친 진단보다는 병의 치료인 것과 같다.

문제의 해결책을 모색할때, 다시 신학적인 문제에 봉착하게 된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나면서 소경된 자를 보면서, 예수님께 질문을 던졌다.

랍비여 이 사람이 소경으로 난 것이 뉘 죄로 인함이오니이까 자기오니이까 그 부모오니이까(요 9:2).

예수님은 "두 경우가 다 아니다"라고 대답했다. 예수님의 대답은 나면서 소경된 자나, 그의 부모가 죄를 전혀 범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단지, 예수님은 이 사람이 소경된 것과 그 부모의 어떤 죄와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다는 것을 설명한 것에 불과하다. 이 질문은 당시에 유대인들이 보편적으로 믿고 있는 자신 혹은 부모의 죄와 징벌에 관한 상관 관계에 근거를 둔 것이다. 임상적으로 이 사실은 쉽게 입증한다.

예수님은 아무말없이 구덩이에 빠진 사람을 보고는 손을 내밀어 그를 구덩이에서 건져주었다. 예수님의 초점은 문제에 대한 장황한 분석보다는 문제의 해결에 있었다. 따라서 예수님은 "그(나면서 소경된 자)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니라"고 대답했다(요 9:2 하반절).

이제, 가계치유를 구체적으로 적용하기 전에, 다시금 가계치유의 기초가 되는 세 가지 진리를 명백히 하고자 한다.

1. 가계치유를 성경적 진리로 받아들여야 한다.
조상의 죄와 저주가 후손에게 미치는 영향은 성경적으로 매우 분명하다.

너희 자녀들은 너희의 패역한 죄를 지고 너희의 시체가 광야에서 소멸되기까지 사십년을 광야에서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민 14:33).

하나님이 그의 죄악을 쌓아 두셨다가 그 자손에게 갚으신다 하거니와 그 몸에 갚으셔서 그로 깨닫게 하셔야 할 것이라 자기의 멸망을 자기의 눈으로 보게 하시며 전능자의 진노를 마시게 하셔야 할 것이니라 그의 달 수가 진하면 자기 집에 대하여 무슨 관계가 있겠느냐(욥 21:19-21).

악인은 모태에서부터 멀어졌음이여 나면서부터 곁길로 나아가 거짓을 말하는도다 저희의 독은 뱀의 독 같으니 곧 술사가 아무리 공교한 방술을 행할지라도 그 소리를 듣지 아니하는 독사로다(시 58:3-5).

네가 자기 땅을 망케 하였고 자기 백성을 죽였으므로 그들과 일반으로 안장함을 얻지 못하나니 악을 행하는 자의 후손은 영영히 이름이 나지 못하리로다 할지니라 너희는 그들의 열조의 죄악을 인하여 그 자손 도륙하기를 예비하여 그들로 일어나 땅을 취하여 세상에 성읍을 충만케 하지 못하게 하라(사 14:20-21).

2. 당신이 문제 해결의 열쇠를 쥐고 있다.
우리가 짓는 죄와 과실의 책임을 조상에게 전가시키고 말 것인가? 아니면 "사탄이 나를 죄를 짓도록 했다"라고 죄의 책임을 사탄에게 전가시키겠는가? 아니면 조상의 죄가 우리 개인에게 미치는 것을 운명론적으로 받아들일 것인가?

예를 들면 "나의 증조부가 간음죄를 지었고, 나의 할아버지 역시 간음죄를 지었고, 나의 아버지 역시 간음죄를 지었고, 이제는 내가 간음죄를 지을 차례다"라고 자포자기하고 말겠는가? 이 가정의 "간음/음란의 영"이 가계를 통해 흐르고 있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각 세대는 나름대로 죄와 선을 선택할 자유의지가 있다. 때로는 단 한 사람을 사용해서 조상의 저주를 차단할 수도 있다. 바로 당신이 그 한 사람이 될 수 있다.

너희 남은 자가 너희 대적의 땅에서 자기의 죄로 인하여 쇠잔하며 그 열조의 죄로 인하여 그 열조같이 쇠잔하리라 그들이 자기 죄와 그 열조의 죄와 및 그들이 나를 거스린 허물을 자복하고 .......그 할례 받지 아니한 마음이 낮아져서 그 죄악의 형벌을 순히 받으면 내가 야곱과 맺은 내 언약과 이삭과 맺은 내 언약을 생각하며 아브라함과 맺은 내 언약을 생각하고...... 그 땅을 권고하리라(레 26:39-42).

조상의 죄든 자신의 죄든 상관없이, 죄의 결과에 대해 누군가는 책임을 져야 한다. 여기서 말하는 죄의 결과에 대한 책임은 법적 책임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이런 의미에서, "자식들은 아버지의 죄로 인해 죽지 않는다."(신 24:16, 왕하 14:6, 대하 25:4, 렘 31:29-30, 겔 18:20). 그러나 죄의 열매를 먹고 있는 자녀들은 죄의 결과에 대한 윤리적/영적 책임을 져야 한다. 따라서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도전했던 것처럼, 조상의 죄악의 길을 답습할 것인가 아니면 회개하고 하나님을 섬기는 길을 택할 것인가를 결정해야 한다. 하나님이 가인이 동생 아벨을 살인하는 죄를 짓기 전에, 경고한 말씀과 일맥상통한다.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치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리느니라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릴찌니라"(창 4:7).

3. 겸손은 가계치유의 첩경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가능한 한 자신의 약점을 포장하고 은폐하려고 한다. 더욱이, 한 가문의 수치에 대해서는 더욱 그렇다. 특히 역기능의 가정에서 자란 사람들은 이러한 성향이 현저하다. 왜냐하면 남에게 공개 못할 가정의 비밀이 많기 때문이다. 그러나 치료받기 위해서는 한 가문의 약점을 인정하고, 하나님과 사람 앞에 약점을 내어놓는 것이다. 만약, "간음/음란의 영"이 흐르는 가계에서 자란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겪는 성적 유혹에 대해 나누었을 때, 이 사람과 그런 이야기를 들은 사람 중 누가 더 거룩하고 위대한 사람인가? 사실상 이런 이야기를 들은 사람이 더 거룩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런 약점을 공개할 뿐만 아니라 도움을 요청한 사람은 더 용기 있는 사람이 아닌가? 현재의 개인의 문제를 본인에게서 찾을 수 있지만, 자신의 가계의 약점을 하나님과 사람 앞에 드러낼 때 가계치유는 일어난다. 반대로, 자신의 가계의 약점을 숨기고 포장하면 치료받을 수가 없다. 예수님도 손마른 자를 치료할 때, "네(마른) 손을 내밀라"고 명령하지 않았던가?(마 12:13, 막 3:5, 눅 6:10) 아무도, 이 사람은 불구가 된 "흉한 손"을 다른 사람에게 한 번도 보여 준 적이 없었을 것이다. 가계의 약점은 죄와 관련된 경우가 많다. 야고보 사도는 치유의 지름길을 이렇게 피력한다.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치유)하리니 주께서 저를 일으키시리라 혹시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사하심을 얻으리라 이러므로 너희 죄를 서로 고하며 병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많으니라(약 5:15-16).

왜냐하면 겸손만이 하나님의 치유와 능력과 사랑을 받을 수 있는 통로가 된다. 자신과 자신의 가계에 문제가 있는 것 자체가 큰 일은 아니다. 가장 큰 문제는 자신과 자신의 가계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모르는 것이다. 또 알지만 인정하고 싶지 않은 교만 때문에 문제를 은폐하거나 역으로 포장하여 없는 것처럼 가장하는 것이다. 또한 알고 인정한다 하더라도 문제를 드러내고 치유 받으려는 모험을 하지 않는 것이다.

3. 저주를 복으로 바꿔라

1. 가계의 영적 뿌리를 추적하라.
예수님은 마태복음 13장에서 알곡과 가라지의 비유를 통해 이런 원리를 설명하고 있다. 당신 조상의 죄들은 당신의 영혼에 심겨진 나쁜 씨앗과 같다. 이런 씨앗들은 당신이 태어나기 전에 이미 심기어졌다. 다른 씨앗들은 당신의 성장 과정을 통해 심기어졌다. 대부분의 씨앗들은 적당한 환경이 주어지기만 하면, 싹이 나고 잎이 무성해지고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있는 큰 나무가 된다. 가계의 저주, 즉 나쁜 열매를 제거하는 방법은 나무의 뿌리를 자르는 것이다. 나무의 뿌리가 잘라지면, 뿌리에서 온 영양분이 차단됨으로 자동적으로 잎은 시들어지고 나무는 말라 죽게 된다. 이것은 단신의 생애를 향한 하나님의 거룩한 계획이다.

2. 당신의 삶과 가계 위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권세를 주장하라.
사탄은 인간을 타락시킴으로써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권리를 박탈했다. 그래서 사탄은 예수님을 광야에서 유혹할 때 전세계가 자기 것이라고 주장한다. "가로되 이 모든 권세와 그 영광을 내가 네게 주리라 이것은 내게 넘겨준 것이므로 나의 원하는 자에게 주노라"(눅 4:6). 사탄은 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다.

이 후에는 내가 너희와 말을 많이 하지 아니하리니 이 세상 임금이 오겠음이라 그러나 너는 내게 관계할 것이 없으니(요 14:30).

또 아는 것은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고 온 세상은 악한 자 안에 처한 것이며(요일 5:19).

예수님은 그의 죽으심과 부활을 통해 이 세상을 통치하는 사탄의 소유권을 박탈하셨다(창 3:15; 빌 2:9-11; 골 2:14-15; 히 9:22; 요일 3:5,8).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탄은 마치 소유권이 있는 것처럼 사용권을 행사하고 있다. 따라서 요한복음 10장 10절 상반절의 말씀과 같이, 우리와 우리 가계를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고 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심으로, 우리로 하여금 죄의 형벌과 심판으로부터 벗어날 뿐만 아니라 가계에서 내려오는 저주를 복으로 바꿀 권세를 주셨다(고후 5:14-15, 21; 딛 2:14; 벧전 3:18; 히 10:14).

3. 예수 그리스도의 피의 능력을 당신의 가계에 적용하라.
다니엘과 느헤미야는 조상들의 죄를 회개했다(단 9:5-6,11, 16,20; 느 1:6, 9:2). 유대 백성들 역시 자신들의 열조의 죄를 인정하고 회개하였다(레 26:40,42; 렘 14:20)

우리는 이미 범죄하여 패역하며 반역하여 주의 법도와 규례를 떠났사오며 우리가 또 주의 종 선지자들이 주의 이름으로 우리의 열왕과 우리의 방백과 열조와 온 국민에게 말씀한 것을 듣지 아니하였나이다(단 9:5-6).

온 이스라엘이 주의 율법을 범하고 치우쳐 가서 주의 목소리를 청종치 아니하였으므로 이 저주가 우리에게 내렸으되 곧 하나님의 종 모세의 율법 가운데 기록된 맹세대로 되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주께 범죄하였음이니이다(단9:11)

우리의 죄와 우리의 열조의 죄악을 인하여 예루살렘과 주의 백성이 사면에 있는 자에게 수욕을 받음이니이다(단 9:16)

이제 종이 주의 종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주야로 기도하오며 이스라엘 자손의 주 앞에 범죄함을 자복하오니 주는 귀를 기울이시며 눈을 여시사 종의 기도를 들으시옵소서 나와 나의 아비 집이 범죄하여"(느 1:6).

모든 이방 사람과 절교하고 서서 자기의 죄와 열조의 허물을 자복하고(느 9:2).

하나님의 원리는 "피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다"는 것이다(히 9:22). 따라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예수님의 피가 적용되기 위해서는 누군가가 중보 회개기도를 해야 한다. 우리는 조상의 죄를 다니엘과 느헤미야와 같이 회개해야 한다.

4. 당신 가계에 저주와 악영향을 가져온 조상을 용서하라.
많은 역기능 가정에서 자란 자녀들처럼, 당신도 모르는 사이에 당신의 부모처럼 행동할 수 있다. 누가복음 6장 37절의 말씀에서, 남을 비판하고 정죄함으로 남에게 비판과 정죄를 받는 악순환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예수님의 말씀과 같이 용서해야 한다.

비판치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비판을 받지 않을 것이요 정죄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정죄를 받지 않을 것이요 용서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용서를 받을 것이요(눅 6:37).

가계치유와 관련하여 부모를 포함한 조상을 용서해야 한다. 용서란 그들의 죄와 허물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로 인해 당신이 받은 부정적인 영향이나 고통을 부정하는 것도 아니다. 당신이 이로 인해 지불해야 할 값을 부정하는 것도 아니다. 용서란 조상의 죄와 허물로 인해 당신이 지불해야 할 부채를 용서함으로써 탕감시키는 것이다. 즉, 당신이 그들에 대해 불평하고, 비난하고, 책임을 추궁하고, 어떤 모양이든지 부정적인 반응을 보일 수 있는 권리를 포기하는 것이다. 당신이 받은 모든 부정적인 영향을 십자가 위에 내려놓는 것이다.

우리는 감정에 근거해서가 아니라, 의지적으로 용서해야 한다. 치유의 가장 큰 장애물은 용서하지 않는 마음임을 명심하라. 타인의 죄를 용서해 주는 것은 타인보다도 우선 자신의 육적, 정신적, 감정적 및 영적인 복을 위해서다.

5. 당신의 죄를 회개하고 죄에서 떠나는 순종의 결단을 내려라.
"잘 되면 내 탓, 안되면 조상 탓"이라는 우리네 속담이 우리의 책임 전가 기질을 잘 대변해 주고 있지 않은가? 이는 마치 "사탄이 나를 요모양 요꼴로 만들었지"라고 모든 죄의 원인을 사탄에게 뒤집어씌우는 것과 같다. 따라서 조상의 죄로 인한 피해와 저주로부터 해방되기 위해서는 당신의 죄 및 이로 인한 저주의 삶을 당신 개인의 책임으로 받아들여야만 한다. 왜냐하면 당신 생애에 있는 저주가 오도록 기여한 많은 외적인 요소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모든 당신의 문제의 뿌리는 당신 자신 안에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향한 반항적인 태도와 이로 인한 죄과를 당신이 회개하기를 요구하신다. 당신은 조상이 지은 죄를 답습해서 지은 자신의 죄를 겸손하게 인정하고 회개해야 한다. 뿐만 아니라 결단의 순종을 통해 사탄의 공격을 차단해야 한다.

내 죄악을 고하고 내 죄를 슬퍼함이나이다(시 38:18).

자기의 죄를 숨기는 자는 형통치 못하나 죄를 자복하고 버리는 자는 불쌍히 여김을 받으리라(잠 28:13).

죄의 고백은 자신이 지은 죄를 구체적으로 인정하는 것이다. 죄를 지은 것에 대해 슬퍼하는 것이다. 더 나아가서, 조상 및 본인이 행한 죄를 버리는 것, 즉 악한 길에서 떠나야 한다. 죄로부터 떠나는 방법 중의 하나는 역시 죄의 고백이다.

조상의 죄와 그로 인한 저주로부터 해방되기 위해선 순종의 결단이 요청된다. 조상이 어떤 사람들에게 화를 불러올 만한 행동을 한 것이 있으면 조상을 대신하여 대신 사과할 필요가 있다. 또한 필요하고 가능한 범위 내에서 하나님의 인도를 따라 물질적, 윤리적인 배상이 필요하다. 당신의 가정은 상대방의 저주와 속박으로부터 놓임을 받을 수 있다.

6. 당신 가계의 무단 침입자를 축출하라.
당신이 인정하든지 안하든지 간에, 사탄은 당신의 가계에 무단 침입할 수 있다. 사탄은 당신이나 당신 조상의 허락없이 당신 가계에 침입했지만 사탄 역시 하나의 영적 법칙을 따른 셈이다. 사탄은 침입의 빌미가 마련되기만 하면 언제든지 침입한다.

따라서 사도 바울은 "마귀로 틈을 타지 못하게 하라"(엡 4:27)고 권면한다. 본문에서 말하는 "틈(foothold)"은 거주 장소를 의미하는 것으로서, 마귀가 체류할 수 있는 빌미 혹은 법적 근거를 말한다. 본문(엡 4:25-32)에서 빌미는 거짓(25), 분노(26), 도적질(28), 더러운 말(29)등의 죄를 의미한다. 죄는 자신의 죄도 있지만 부모와 조상의 죄도 있다.

정확하게 이해할 수는 없지만, 악한 영들은 부모의 죄를 통해 많은 신생아들에게 침입한다. 이는 하나님이 정한 원리에 따라 부모들의 죄의 결과를 자녀들이 받기 때문이다(출 20:5-6). 따라서 한 가계 안에 어떤 부정적인 영적, 정신적, 감정적, 육체적인 성향이 가계의 영을 통해 계속 대물림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자들은 절대로 귀신들리지 않는다"는 영적 무지와 착각 때문에 더욱 고통을 당하는 신자들이 많다. 그렇다면 악한 영들은 "언제 침입하였을까?" 신자들의 경우, 그들이 예수를 믿기 전에 악한 영들은 이미 침입하였다. 성경이 말씀하는 바와 같이, "나(예수님)보다 먼저 온 자는 절도/강도(사탄)"이다(요 10:8 상반절). 그들이 예수를 믿을 때 모든 악한 영들이 도망간 것으로 간주하고 싶지만, 실제로는 거주 장소를 영에서 혼과 육체로 이동한 것에 불과하다. 가계를 통해 이미 들어온 무단 침입자인 악한 영들을 어떻게 추방할 것인가가 우리의 관심사이다.

7. 하나님의 치유의 능력을 찬양하고 자신 및 가계를 축복하라.
하나님은 자신을 치유자로 소개한다.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니라"(출 15:26 하반절). 하나님은 당신뿐만 아니라 당신 가계를 치유하기를 원하신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통해 당신은 조상의 죄로 인한 저주로부터 해방될 수 있는 특권을 부여받았다. 만약, 당신이 위에서 언급한 여섯 단계를 진실되게 실천했다면 하나님의 치유는 당신의 것이 되었다. 만약, 아직도 순종하지 않았다면 미루지 말고 지금 당장 하라. 하나님의 복은 하나님의 진리를 듣고 또한 행하는 자에게만 있다(마 7:24-25). 이제, 믿음으로 당신과 당신 가계의 치유를 선포하라.

아직도 할 일이 남아 있다. 어쩌면 당신 지금까지 당신과 당신 가정을 속박한 것에서 풀린 기쁨보다는 허전함을 느끼게 될는지 모른다. 이것은 당신과 당신 가정을 얽매어 놓았던 죄성, 습관, 저주 및 악한 영들이 떠난 공간이 비어 있기 때문이다. 당신은 이런 빈 공간을 성령으로 채워주시도록 기도해야 한다. 당신과 당신 가계를 속박한 영역과 반대되는 것으로 하나님께서 축복해 주시도록 기도해야 한다.




내적 치유와 용서

내적 치유와 용서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우리는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나에게 해꼬지 한 사람을 미워하고 증오하며 내 힘으로 보복하는 것을 당연한 권리로 생각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원수를 용서하고 사랑하라고 말씀하신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마 5:44)

원수를 용서하지 못하고 증오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원수를 미워하고 증오하는 것이 실제로는 나를 고문하고 학대하는 것이란 사실을 모르고 있다. 어떤 의사는, 병원에 입원하고 있는 환자들 중 용서만 제대로 한다면 약 50%정도는 금방이라도 퇴원할 수 있다고 말한다.

나에게 해코지한 사람을 용서하지 못하고 미워하는 마음을 품고 있는 것은, 그 사람에게 폐를 끼치기보다 실제로는 나를 죽이는 것이다. 용서의 최대의 수혜자는 용서하는 사람 자신이다. 남을 용서하지 않은 사람은 자기 가슴에 대못을 박는 사람이다.

1. 용서와 회개가 내적 치유의 양대 축이다
용서는 회개와 함께 내적 치유의 양대 축이다. 용서 없이는 회개가 있을 수 없고 용서와 회개가 없는 내적 치유는 불가능하다.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면 너희 천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시려니와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마 6:14-15). “서서 기도할 때에 아무에게나 혐의가 있거든 용서하라 그리하여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도 너희 허물을 사하여 주시리라”(막 11:25).

비록 신자이지만 죄를 짓지 않고 사는 사람은 없다. 죄를 지었으면 회개를 해야 한다. 회개란 쉽게 말하면, 내가 지은 죄를 하나님께 자백하고 하나님의 용서를 구하는 것이다. 그런데 내가 지은 죄는 하나님이 용서해 주시기를 바라면서, 나에게 죄 지은 형제를 용서해 주지 않으면 하나님은 내가 회개할 때 그 죄를 용서해 주시지 않겠다는 말씀이다.

물론 하나님이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는 것은 우리가 죄 지은 형제를 용서해 주는 조건으로 용서해 주시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지옥가야 마땅할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용서해 주셨기 때문에 하나님의 큰 은혜를 입은 우리는 당연히 우리에게 죄 지은 형제를 용서해 주어야 한다.

2. 무자비한 종의 비유.
우리의 죄 용서에 관한 하나님의 은혜와 그런 큰 은혜를 입고도 자기에게 죄 지은 형제를 용서하지 못하는 사람을 어떻게 하나님이 처분하시는가에 대해서는 마태복음 18장의 무자비한 종의 비유(마 18:21-35)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하나님의 크신 은혜로 죄사함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나에게 죄지은 형제를 용서하지 못하는 사람은 옥졸들에게 붙여져서 고통을 받는다(마 18:34-35).

‘옥졸들에게 붙이셨다’는 말은 옥졸들의 처분에 맡겼다는 말이다. 인권이 최고로 발달한 미국이나 한국의 교도소에서도 때로 간수들은 죄수를 무자비하게 다룬다. 하물며 인권 사상이 거의 전무한 당시의 옥졸들이 무자비한 종을 어떻게 가혹하게 다루었는지는 여러분의 상상에 맡긴다.

핵심적인 의미는 무엇이냐? 그렇게 큰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고도 자기에게 죄 지은 형제를 용서하지 못하는 사람은 그 자신이 크나 큰 고통을 당한다는 말이다.

일만 달란트, 6,000만 데나리온(한 데나리온은 노동자의 하루 일당)이나 되는 엄청난 빚을 공짜로 탕감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100데나리온 빚진 동료를 윽박지르며 용서하지 않는 이 종의 모습이 바로 우리의 모습이다.

우리는 모두 죄인이다. 고슴도치같이 서로가 서로를 찌르는 죄인이다. 알게 찌르고 모르게 찌른다. 문제는 내가 남을 찌른 것은 금방 잊어버리지만 남이 나를 찌른 것은 쉽게 잊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서로 원망하고 미워하고 증오하고 앙심을 품고 여러 가지 방법으로 보복한다.

많은 사람들은 누가 나를 괴롭히고 해코지를 하면 그 사람을 미워하고 증오하는 것을 당연한 권리로 생각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상대방을 미워하면 할수록 내 자신을 괴롭힌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증오심이 지나치면 혈압이 오르고 맥박이 뛴다. 오래 되면 화병이 나서 몸져눕는다. 신체적인 병의 70%는 마음에서 오는 병이며 분노에서 오는 병들이 대부분이다. 어느 사람은 ‘세월이 약이다. 잊어 버리라’고 한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간단한 것은 쉽게 잊어버릴 수가 있을지 모르지만 심령 깊숙이 박혀 있는 증오심은 세월이 간다고 잊혀지지 않는다.

잊혀진 것 같지만 깊숙이 박혀 있다가 짜증나는 일이나 언짢은 일이 생기면 온갖 형태의 추한 몰골로 그 모습을 드러낸다. 상대방의 사소한 잘못에도 예민하게 반응하거나 극도의 자기보호 본능 때문에 정상적인 부부 관계나 인간 관계를 가지는 것이 어려울 때가 많다. 이것들이 바로 형제를 용서하지 못한 무자비한 종이 옥졸들에게 붙여져서 당하는 고통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무한한 은혜를 힘입은 우리는 어떤 경우에도 나를 해코지한 형제를 용서해야 한다. 사람이 사람에게 지은 죗값은 아무리 크더라도 하나님 보시기에는 100 데나리온에 불과하다. 그러나 하나님이 나를 위해 예수님을 대신 희생시키신 값은 6,000만 데나리온이다.

여러분은 어떤 죄값을 갚겠는가? 100데나리온인가, 6,000만 데나리온인가? 성경은 원수를 용서하고 또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축복까지 해 주라고 말한다.

“너희를 저주하는 자를 위하여 축복하며 너희를 모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눅 6:28).

남을 미워하고 증오하는 병은 이 세상의 어떤 약(藥)으로도 치료할 수 없다. 미워할수록 내 가슴에 굵은 대 못을 망치로 쾅, 쾅 박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 이것을 치료하는 약은 오직 한 가지 밖에 없다. 그것은 원수를 용서하고 축복하는 일이다.

나를 저주하고 나의 신세를 망친 사람을 축복하고 그를 위해 기도하는 것이 내 심령 깊숙이 박혀 있는 증오의 가시를 뽑아내는 유일한 약다. 나의 원수를 축복할 때 나를 괴롭히던 증오의 가시가 뽑히고 내 심령에 평강과 안식이 임한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방법이기 때문이다.

3. 용서하지 않았을 때 받는 불이익들
형제를 제대로 용서하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어떤 불이익이 있을까? 그 반대는 축복이라고 할 수 있다.

자신이 하나님의 용서함을 받지 못한다(마 6:14-15; 막 11:25; 롬 12:19-21; 요 20:23).

“서서 기도할 때에 아무에게나 혐의가 있거든 용서하라 그리하여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도 너희 허물을 사하여 주시리라 하시니라”(막 11:25).

사랑하는 사람들을 괴롭힌다.

내 마음속에 앙심을 품고 있으면 그 화살이 주변의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날아간다.

영, 혼, 육의 고통을 당한다(롬 2:9-10; 8:6; 사 48:22; 57:21).

“악을 행하는 각 사람의 영에게 환난과 곤고가 있으리니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며 선을 행하는 각 사람에게는 영광과 존귀와 평강이 있으리니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라”(롬 2:9-10).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악인에게는 평강이 없다 하셨느니라”(사 48:22).

하나님이 예물을 받아들이지 않으신다(마 5:23-25; 호 6:6; 암 5:21; 사1:11-18).

예수님은 예물을 드리기 전에 먼저 형제와 화목하라고 말씀하신다(마 5:23-25).

마귀에 궤계에 놀아난다.
용서 않고 금방 분을 삭이지 않으면 마귀의 궤계에 놀아난다(고후 2:10-11; 엡 4:26-27).

죄 지은 형제를 제 때―해가 지도록 즉 하루가 지나기 전―에 용서하지 않으면 마귀에게 공격할 팔 발판(foothold)을 주어, 용서하지 못하는 마음을 통해, 분노. 증오, 배신감, 죽음과 자살의 영이 역사 하여 이후에 용서하는 것을 더욱 힘들게 만든다.

4. 남을 잘 용서하지 못하는 이유.
이런 불이익들의 많음에도 불구하고 남을 용서하는 것은 쉽지 않다. 용서하지 못하는 몇 가지 이유를 살펴보자.

나는 잘 했고 남은 못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물론 성 폭행이나 어른의 폭행 등과 같이 일방적으로 피해를 받을 수 있다. 이런 경우에도 사적인 보복은 절대 금물이다. 예수님은 아무런 잘못이 없이 고난을 당하셨지만 스스로 원수를 갚지 않고 공의로 심판하시는 하나님께 맡기셨다(벧전 2:22-23).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에는 일방적으로 당했다기 보다는, 상대방의 허물은 보지만 자신의 허물을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마 7:3). 형제의 눈에 있는 티를 빼기 전에 나의 눈에 있는 들보를 먼저 빼는 자세가 필요하다.

교만한 마음 때문에 용서하지 못한다.
감히 내가 누구라고 나를 이렇게 대해’라면서 복수의 칼을 가는 경우가 있다. 이럴 때 우리는 죄 지은 형제를 불쌍히 여겨서 용서해야 한다(엡 4:32).

용서해준 것 같은데 기도 중 용서해 주지 않은 것같이 생각된다.
사역을 할 때 이런 간증을 하는 사람이 더러 있다. 표면적으로는 용서한 것 같지만 중심으로 용서하지 않았을 경우에 성령이 다시 중심으로 용서하게 하시는 경우이다. “너희가 각각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마 18:35).

내가 죄 지은 형제를 중심으로 용서했나를 알려면, 그 사람이 잘되었거나 잘못되었다는 소문이 들릴 때 내가 어떻게 반응했는가를 통해 알 수 있다. 그 사람이 잘 되었을 때 배가 아프고 잘못 되었을 때 고소한 마음이 생기면 중심으로 용서했다고 할 수 없다.

보상 심리 때문에 용서하지 못한다.
사람은 누구나 보상 심리가 있다. ‘내 원수의 빚은 공짜로 탕감해 주면 내가 받을 빚은 누가 갚아주는가? 내 원수를 누가 갚아 줄 것인가?’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하나님이 갚아주신다고 말씀하신다.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여호와께 꾸이는 것이니 그 선행을 갚아 주시리라”(잠 19:17).

가해자가 먼저 사죄하지 않기 때문에 용서하지 못한다.
하나님은 우리가 죄인되었을 때 먼저 용서하셨고(롬 5:8), 간음한 여인이 회개하기 전에 먼저 용서하셨다(요 8장). 특히 고의적으로 위해를 가한 가해자일 경우 가해자 먼저 용서하는 경우는 드물다. 이때 주님의 사랑으로 먼저 용서하는 자가 승리하는 사람이며 가해자의 얼어붙은 마음을 녹일 수 있다.

5. 누구를 용서할 것인가?
우리는 용서라고 하면 얼른 나에게 죄 지은 사람만을 용서해 주는 것으로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용서의 대상은 하나님, 나에게 죄 지은 형제 및 본인 자신이다.

하나님
충격적인 사건이나 뜻밖의 재앙을 당했을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왜 이런 일이 나에게 일어나는가?’(why me?)라면서 무엇보다 먼저 이런 재앙이 일어나는 것을 허용하신 하나님을 원망한다. 욥이 재앙을 당했을 때 욥의 아내는 ‘하나님을 저주하고 죽어라’는 악담을 했다.

다른 사람들
나에게 고통과 상처를 준 모든 사람들을 말한다.

본인 자신
자신이 죄의 피해자가 되었다는 연민의 정과 함께 피해자가 된 그 사실을 증오하여 자신을 미워하고 용서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특히 완벽주의, 율법주의, 부당한 죄책감을 느끼는 경우이다. 이런 사람은 그리스도의 피 공로에 의지하여 자신마저 용서하고 축복할 필요가 있다.

6. 용서하는 방법.
용서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이다. 신자는 누구나 죄 지은 형제를 용서할 권세가 있다. “너희가 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하시니라”(요 20:23).

그러므로 용서는 직설적이 되어야 한다. 즉 “하나님 아버지 저는_____죄를 지은 _____를 용서합니다”라고 해야 한다. “하나님 저는_____를 용서하기를 원합니다” “하나님 제가 ____를 용서할 수 있게 해 주시옵소서”라는 말은 하지 않는 것이 좋다.

우리가 이 땅에서 용서할 때 매인 것이 풀린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마 18:18).

가능하면 가해자 본인에게 직접 용서를 해주면 좋다. 그러나 여러 가지 사정―가해자의 사망, 원거리에 거주, 행방불명 등―으로 가해자를 직접 용서하기 힘들거나 가해자가 아직 용서를 받아들일 자세가 되어 있지 않을 경우에는 먼저 하나님 앞에서 그의 죄를 용서하는 것이 필요하다.

또한 유의할 사실은 마음으로 지은 죄는 하나님께만 용서를 구할 것이며, 성적인 죄를 배우자에게 미주알고주알 자세히 고백하는 것은 지양하는 것이 좋다.

이렇게 용서할 때 우리의 죄가 사함을 받아 내적 치유가 주는 심령의 평강과 안식을 누릴 수 있다.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롬 14:17).

“사람이 먹고 마시며 수고하는 가운데서 심령으로 낙을 누리게 하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나니 내가 이것도 본즉 하나님의 손에서 나는 것이로다”(전 2:24).


내적 치유의 원리

성경 인물들의 내적 치유 일기로 들어가기 전에 먼저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것은 내적 치유에 대한 이해입니다. 이러한 이해에 대하여 저는 저의 글 “날마다 치유하는 가정”(도서출판 진흥)이라는 책에서 자세하게 그 원리를 제시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여기에서 이 원리들의 전체를 반복하지는 않겠습니다. 단지 “날마다 치유하는 가정”을 읽기를 권합니다.

그러한 이해와 함께 이 책을 읽게 되면 이 책이 더 깊이 열려지리라고 믿습니다. 그리고 여기에서는 “날마다 치유하는 가정”에 나오는 원리들을 다소 수정 보완하여 요점만 간단하게 소개하려고 합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이 글을 읽어나가는 여러분들에게 도움이 되리라고 생각합니다.

두 번 째로 이 책을 읽기 위하여 전이해(前理解)로 필요한 것이 성경을 읽는 구속사적인 관점에 대한 이해입니다. 성경 전체를 하나의 구속사로 보면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아름다운 구속의 이야기를 이끌어오셨는가에 대한 이해가 필요한 것입니다.

이것은 저의 저서 브라이드 성서연구 시리즈 제6권, 구속사적 설교-부흥회 편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도서 출판 진흥)에 자세하게 설명이 되어 있습니다. 이 책은 성경 전체를 하나의 구속사로 보면서 풀이해 나간 책입니다. 이 책에서 저는 전체적인 구속사, 객관적인 구속사를 다루어 나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내적 치유 일기에서는 이러한 객관적인 구속사를 이끌어 가시면서 동시에 개인적인 구속사, 주관적인 구속사를 이끌어 가시는 주님의 손길을 다루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내적 치유 일기를 더 깊이 이해하고 여러분의 삶에 적용하기를 원한다면 “내적 치유”에 대한 의미와 “구속사”에 대한 의미를 이해하는 은총이 먼저 임하기를 기도합니다.

누구에게나 상처는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외적, 내적 상처를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 상처가 나타난 상처이든지 아니면 감추어진 상처이든지 간에 모두가 상처를 받고 살아갑니다. 또한 상처를 주는 가해자로 살아가기도 합니다. 이렇게 상처를 주고받는 것은 누구도 피할 수 없는 것인데 그것은 인간이 사회적인 동물이기 때문입니다.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사회생활을 하는 가운데 본의 아니게 상처를 주고 상처를 받습니다.

이러한 상처들 가운데는 어렸을 때부터 가지고 있었던 상처가 있는가하면 결혼하고 나서 뒤틀어진 부부관계로 생기는 것들도 있습니다. 특히 어렸을 때에 성폭행이라든지, 편애, 가난함, 신체적 열등감, 버림받음, 아동 학대, 신체적 정신적 장애 등으로 인하여 받은 상처들도 많이 있습니다.

이러한 상처들은 영적인 억눌림, 낮은 자화상, 허무주의, 분노, 성인아동, 자폐증, 강박증, 정신이 산만함, 냉소주의, 죄책감, 수치심, 자기 방어, 합리화, 과거에 얽매임, 상처에 얽매임, 자기비하, 자기무시, 완전주의, 불신감, 의심, 우울증, 불안, 신경쇠약, 복수심, 자기 비애, 공포, 두려움, 원한, 자멸적 행동방식, 열등의식, 우월 의식, 교만, 피해의식, 자포자기, 책임전가, 무기력증, 소외감, 과대망상증, 의존증, 질투, 버릇없음, 미움, 체념, 일 중독증 등등의 증상으로 나타나서 함께 사는 이들을 괴롭게 만듭니다.

문제는 상처가 있는가 없는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모두에게 있는 이러한 상처들에 대하여 어떻게 대응하느냐에 따라서 상처를 치유 받고 더 성숙한 사람이 되기도 하고 상처에 일생 노예가 되어 많은 시간을 허비하며 고통스러운 삶을 살기도 합니다. 이 책에서 다루려고 하는 성경 인물 40명에게도 우리와 비슷한 상처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어떤 인물들은 치유 받고 성장, 성숙해졌는가하면 어떤 인물들은 치유 받지 못하고 영원히 그 상처의 노예가 되어 살다가 인생을 마치기도 하였습니다.

내적 치유의 의미
치유에는 몸의 치유, 영의 치유, 감정의 치유, 귀신들림의 치유가 있습니다. 몸의 치유는 신체적으로 질병을 앓는 것에 대한 치유입니다. 문둥병환자나 귀머거리 등을 예수님이 고쳐주신 것은 몸의 치유였습니다. 또한 중풍병자를 고치시고 “죄 사함을 받았다”라고 말씀하시면서 고쳐주신 것은 영적인 질병의 치유였습니다. 그리고 삭개오와 같은 키 작은 세리장이의 열등의식을 치유하여 준 것은 정신적, 내면의 치유라고 하겠습니다.

이러한 치유이외에도 정신병자들, 혹은 악한 영의 공격으로 인하여 얻은 질병을 치유하는 귀신들림의 치유도 있고 상처를 위한 내적 치유라는 것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내적 치유라는 말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외부로 나타나는 외상이 아니라 감추어져 있는, 숨겨져 있는 어떤 상처들을 치유한다는 의미입니다. 이러한 숨겨진 상처는 외상과는 달리 보이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무시되고 치료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어느 때는 본인도 그렇게 깊은 상처가 남아있었는지 잘 모릅니다. 그래서 외부로 보이는 상처들은 열심히 치료하지만 내부에 숨겨져 있는 상처는 무시하며 살아갑니다. 그리고 이러한 상처가 성격, 인간관계, 인격, 믿음의 생활 모든 것에 부정적이고 파괴적인 영향을 주고 있다는 것을 모릅니다.

이러한 상처에 대한 예들은 많이 있지만 간단하게 예를 들어 “당신은 너무 키가 작아”라고 말할 때에 그 말을 듣는 사람들은 다 각각 반응이 다를 것입니다. “아담하고 좋은데요”“작은 것이 더 아름답지요”“별로 불편이 없어요” 등등으로 반응하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벌컥 화를 내면서 “저의 키가 작아서 불만이 있습니까?”하면서 반응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이 사람은 키 작은 것에 대한 마음의 상처가 깊은 사람이기 때문에 그 말에 예민하게 반응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상처들은 평소에는 나타나지 않지만 어떤 때에 “불시에” 나타나서 사람들을 괴롭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숨겨져 있는 상처, 내면에 보이지 않는 상처들을 치유하는 것을 내면의 치유라고 말합니다. 마음 속 깊이 보이지 않는 곳에 자리잡고 있는 감정의 상처들을 근본적으로 먼저 치유하면서 전인격적인 치유를 해 나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내적 치유에서는 가정의 문제들을 다루게 될 때에도 먼저 치유하고 지나가야 할 상처가 없는지 살펴봅니다. 문제를 일으키고 있는 원인이 되는 것, 즉 진정으로 해결해야 할 근본적인 상처들이 자리잡고 있지 않은지 살펴봅니다. 이것부터 치유하려는 것이 내적 치유입니다. 곧 원인치유라고 보면 이해가 잘 될 것 같습니다.

치유 받지 못한 상처
40명의 치유일기 가운데 치유 받지 못한 상처의 주인공들이 나옵니다. 사울 왕, 헤롯 왕, 그리고 가룟 유다가 이 예로 나옵니다. 상처는 치유 받아야 합니다. 우리의 몸이 아플 때 치유 받아야 하는 것처럼 내적으로 감정에 남은 상처들은 치유 받아야만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이 치유 받지 못 할 때에 다른 이에게 또 다른 상처를 입히는 가해자가 되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 상처를 이용하여 사단은 건강한 인간관계를 가지지 못하게 할뿐만 아니라 그 상처에 일생 노예가 되도록 하는 경우를 보게 됩니다.

한 여인은 20세 된 아들이 교통사고로 죽은 후에 살아있는 일생동안 그 무덤을 찾아가서 죽은 아들과 대화하는 것으로 소일하였습니다. 그 여인은 산 사람은 바라보지 않고 죽은 사람만 바라보며 자신의 귀한 인생을 소비하였습니다. 사단은 그 여인을 아들을 갑자기 잃은 상처에 일생 가두어 버렸습니다. 이 여인은 삶의 모든 즐거움과 부요를 잃어버리고 일생 슬픔을 누리며 살았습니다.

사단은 상처에 얽매여서 다른 것을 바라보지 못하도록 만듭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상처를 통하여 새로운 세계, 새로운 은혜를 바라보게 하십니다. 그래서 새로운 성장의 출발이 되도록 하십니다. 주님은 상처받은 자들에게 “나는 길이요” 라고 말씀하시면서 회복의 길이 있음을 보여주시고 소망을 갖게 하십니다. 하지만 사단은 이것이 “끝”이다라고 말하면서 그 엄청난 상처로부터 헤어나지 못하도록 만듭니다.

이렇게 사단은 감정의 충격을 받고 해결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찾아가서 그 상처에 얽매이게 합니다. 그리고 일생을 슬픔과 고통, 상처, 저주, 분노가운데 살게 합니다. 이렇게 치유 받지 못한 상처는 모든 생활에서 파괴적인 요소로 작용합니다. 그래서 더욱 내적 치유가 필요하며 주님의 도움 앞으로 나아 오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사단은 그 상처를 통하여 자신의 나라와 다스림을 쉽게 확장해 나갈 것입니다.

영원한 주치의: 예수 그리스도
예수님은 우리가 어떤 질병을 갖고 있는지 아시는 분이십니다. 그 질병이 영적인 질병인지, 아니면 내적 치유가 필요한 것인지 아니면 신체적인 질병인지 알고 계십니다. 그 분은 먼저 우리의 질병을 분별해 주시고 진단해 주십니다. 중풍병자에게 “네가 죄 사함을 받았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그가 영적인 죄악으로 인하여 중풍병이 생겼음을 이미 아시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또한 혈루증 걸린 여인을 치유하실 때에도 그 여인의 내면에 남아있는 정신적 공포, 두려움을 먼저 치유하시기를 원하셨습니다.

삭개오를 치유하실 때에도 그와 인격적으로 만나주심으로 낮은 자화상이 그에게 문제가 되는 것을 분별하여 주셨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은 우리의 질병을 통전적으로 온전하게 근본적으로 치유하여 주시는 능력 있는 주치의가 되십니다.

또한 예수님의 병 고쳐 주시는 목적은 평강과 거룩함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주님은 질병과 상처로부터 자유와 해방을 주시면서 평강이라는 선물을 주십니다. 그러므로 가장 건강한 상태는 하나님과 이웃과 누리는 살롬, 평강입니다. 아무리 병원에서 피검사를 하여 모든 수치가 정상으로 나왔다고 하여도 그가 하나님을 모르고 이웃과의 평화를 누리지 못한다고 하면 그는 건강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래서 구약에서는 살롬이라는 말이 가장 건강과 가까운 말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또한 주님이 우리의 병을 고쳐주시는 동기는 사랑입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병을 고쳐주시고 사랑하기 때문에 우리의 저주와 질병을 대신 감당하셨습니다. 주님이 우리의 질병과 상처를 고치시는 가장 큰 능력은 그의 사랑이며 그의 눈물입니다. 그의 눈물은 우리를 향하신 가장 큰 약입니다. 그 눈물로 우리가 구원을 받았고 생명을 얻었고 치유를 얻었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사실은 예수님께서 우리를 치유하여 주실 때에 “병든 삶”까지 근본적으로 치유하여 주신다는 것입니다. 세상에서는 보이는 병들을 치유할 수 있습니다. 요사이 의학이 발달하여 (불치병도 있습니다만) 엄청난 종류의 질병들이 고침을 받고 있습니다. 암도 이제는 극복하는 단계에 들어갔고 에이즈도 조만간 치유의 길이 열리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이 우리를 온전하게 치유하여 주시기를 원하시는 이유는 우리의 삶을 치유하여 거룩한 예배자, 거룩한 존재로 회복시키기 위함입니다. 거룩한 삶, 성결한 삶, 구별된 삶을 살 수 있도록 인도하시기 위함입니다. 이 세상 어디에도 이렇게 “병들고 지친 삶, 악하고 패역한 삶”을 치유하는 약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신유의 은사를 주셔서 병들고 찌들은 삶, 중독 되고 부패한 삶, 음란하고 더러운 삶까지 치유하여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세상에서는 결코 치유해 줄 수 없는 부분까지 주님은 근본적으로 치유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치유를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미리 십자가의 아픔과 고통을 받으셨으며 우리의 죄와 질병을 위하여 피 흘려주셨습니다.

어디에 가든지 병 고칠 수 있는 길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러나 병을 고쳤다는 결과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누가 치유를 베풀었는가가 중요합니다. 예수님은 사랑이라는 동기로 우리를 치유하여 주십니다. 그리고 온전하고도 통전적인 치유를 하여 주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이웃과 평강을 누리도록 인도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이웃에게는 사랑을, 하나님께는 예배를 드리는 자로 회복시켜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근본적으로 원하시는 것은 자녀들의 행복과 건강, 풍요한 삶입니다. 이러한 삶을 주시기 위하여 하나님은 예수님을 통하여 온전한 치유의 길을 마련하여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언제든지 상처를 들고 나오게 되면 그 곳에는 온전한 치유의 길이 준비되어 있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복음과 치유(약5:13-18)

복음과 치유(5:13-18)
 


(5:14-16)"너희 중에 병든 자가 있느냐 저는 교회의 장로들을 청할 것이요 그들은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며 위하여 기도할찌니라 (15)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저를 일으키시리라 혹시 죄를 범하였을찌라도 사하심을 얻으리라 (16) 이러므로 너희 죄를 서로 고하며 병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많으니라"

<
서론>
예수께서는 복음을 전하시면서 병자를 고쳐주셨다. 그 내용에서 병의 원인과 잘못된 치유법, 치유의 순서 등을 보여주셨다.

1.
성경에는 치유의 약속이 있다.
1) 6:56 "다 성함을 얻으니라"
2)
8:17 "우리 연약한 것을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3)
53:5, 요삼1:2

2.
잘못된 치유법
1)
영혼의 병을 고치지 않는 것
2)
마음의 병을 먼저 고치지 않고 육신의 병만 고치려는 것
3)
의사, 약 등을 전적으로 의존하는 것
4)
미신등을 의존하는 방법

3.
병의 원인을 진단해 보자.
1)
생리적인 것 -- 과로, 연령(48:1,10)
2)
실수로 인한 것 -- 실족, (7:5)
3)
하나님의 뜻이 있는 병(고후12:7, 8:27)
4)
죄로 인한 병
 
① 죄 -- 저주받은 병(원래가진 병)(3:16-19)
 
② 조상의 죄 -- 특히 우상숭배(삼하12:15, 20:4-5)
 
③ 자범죄로 인한 병(왕하5:27, 대하21:12-19, 고전5:5)
5)
마귀(귀신)가 가져다 주는 병
특징 -- 병명 불분명, 이유없는 두통, 머리에서 소리가 남, 치유되지 않으
면서 순간적 변동
 
① 정신(5:3-15)
 
② 마음(4:23-27)
 
③ 육신(2:7, 9:17, 13:16)
 
④ 환경(12:25-28)

4.
치유 방법 -- 계속(103:1-5)
<
연구문제> 인간에게는 도저히 사람의 기술이나 약물의 힘으로 고칠 수 없는 병이 더 많으며 병명을 밝히지 못하고 죽어가거나 앓고 있는 병이 대부분이며건 강하던 사람도 갑자기 불치병과 여러가지 병에 평생을 시달리는 사람이 많다

)
1)
수리아의 귀신들린 간질병자 2) 문둥병자 3) 소경 바디메오 4) 눈멀고 벙어리된 자 5) 두로.시돈의 흉악한 귀신들린 자6) 성전의 앉은뱅이 7) 38년된 병자 8) 손 마른자 9) 혈루증 여인 10) 빌립보의 정신이상자 .....
<
주의사항> 이러한 병의 원인은 전부 영적인 병이므로 예수 영접하여 구원부터 받지 아니하면 치유가 불가능하며 잠시 다른 방식으로 치유되었다가 점점 더 악화되어 간다.

<
예수님의 치유> 성경이 가르치는 치유의 순서?

1.
영적치료
1)
믿음(5:15-16, 10:52, 4:9-10)
2)
예수그리스도 영접
 
1:12 -- 영접(λαμβανω람바노) - "굳게 붙든다, 취한다"는 의미
 
8:4-13
 
10:38
3)
예수 영접하면 변하는 것 세가지
 
① 하나님의 자녀(8:44 --> 요일3:2)
 
② 정신적인 변화(6:17 --> 6:22)
 
③ 점진적인 생활의 변화(2:2 --> 5:18)
4)
원죄, 우상숭배한 조상과 본인의 죄가 없어지는 이유(요일3:8, 12:28 3:14-15)



2. 모든 영적, 정신적, 육체적인 병은 마음을 타고 들어온다.
1)
그 마음은 미혹의 영이 작용한다.
2)
미혹의 영에 관하여
 
왕상22:20-22 "누가 아합을 꾀겠느냐?...한 영이 내가 꾀겠나이다 ... 거짓 말하는 영이 되어"


  9:23 "악한 신을 보내시매"

14:9 "유혹의 영이 선지자에게 붙어"
3)
미혹의 영의 특징
 
① 평생을 따라다님 ② 계속 증가함 ③ 결국 육체를 멸함(4:25-27 살후2:10-11 고전5:5)
4)
이기는 길
  (
4:23) - 마음을 지키고
  (
4:27) - "마귀로 틈을 타지 못하게 하라"
  (
벧전5:7) -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겨 버리라"
  (
요일3:8) - 마귀의 일을 멸하신 예수님
  (
6:11) - 하나님의 전신갑주 - 말씀무장, 기도무장
  (
6:19) - 복음증거
  (
12:29) - 사단 결박


(4:7) - 하나님께 순복, 마귀 대적

묵상: 기도를 습관으로 삼으라

예수님은 종종 ‘어둠이 채 가시지 않은 아침에’ 일어나 ‘조용한 곳’으로 가셔서 기도하셨다.
스트레스 해소책 여섯 번째 원리는 개인기도를 습관으로 삼는 것, 곧 묵상의 원리이다. 기도는 스트레스를 이겨내는 가장 강력한 무기다. 기도는 우리의 걱정을 덜어낼 수 있도록 하나님이 주신 도구다. 예수님이 아무리 바쁜 와중에서도 하나님과만 함께하는 시간을 내어 기도하셔야 했다면, 우리가 얼마나 더 많은 기도 시간을 가져야 하는지는 말할 필요도 없다.

하나님과 단둘이 함께하는 그 짧은 시간은 인생의 스트레스를 줄여주는 작은 공간이 될 수 있다. 우리는 기도 가운데 하나님과 대화한다. 우리의 생각을 그분께 이야기하고, 성경을 읽는 가운데 그분께 이야기하고, 성경을 익는 가운데 그분이 말씀하시게 한다.

우리가 가진 대부분 문제는 우리가 조용히 있지 못하기 때문에 오는 것이다. 우리는 침묵하는 법을 알지 못한다. 사람 대부분은 자동차에 타면5분 안에 라디오를 켠다. 만일 당신이 집에 돌아왔는데 아무도 없다면 무슨 일을 가장 먼저 하는가? 아마 텔레비전이나 오디오를 켤 것이다. 우리는 침묵을 불편해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

많은 사람이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알지 못하는 한 가지 이유는 그들이 조용히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너무 바빠서 조용히 생각할 시간을 갖지 못한다.

너무 바쁠 때 오히려 기도해야

누군가 이렇게 말했다. “사람이 길을 잃으면 발걸음이 두 배나 빨라지는 것은 역설적인 습관이 아닐 수 없다.” 제2차 세계대전에 참가해서 태평양을 향해 발진한 공군 조종사에게 무선연락으로 통제관이 물었다. “자네 지금 어디가?” 조종사가 대답했다.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최고 속도로 나는 중입니다.” 많은 사람이 빠른 속도로 살고 있지만,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지 알지 못한다. 우리는 예수님이 그러셨던 것처럼 기도로 아침을 시작하고, 정기적으로 멈추어 서서 다시 기도하여 영적 재충전을 해야 한다.

주님께 아뢰라

불행히도 기도는 대개 우리가 가장 마지막으로 시도하는 방법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스스로의 힘으로 문제를 해결하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어느 날 한 집사가 담임목사를 찾아가 이렇게 말했다. “목사님, 집에 문제가 생겼습니다.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났는데, 도저히 해결할 수가 없습니다.” 목사는 이렇게 말했다. “그렇군요, 그럼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기도밖에 없겠습니다.” 그러자 집사가 이렇게 대답했다. “목사님 그렇군요. 결국 그런거군요.”

기도는 우리가 인생의 전투에 직면했을 때, 가장 나중이 아니라 가장 먼저 사용하는 무기어야 한다.

“여호와께서 내 음성과 내 간구를 들으시므로 내가 그를 사랑하는도다. 그의 귀를 내게 기울이셨으므로 내가 평생에 기도하리로다.”[시편116:1-2]


출처: 아침향기

우정 – 다윗에게는 요나단이 필요하다

생애 동안 많은 적대감에 부딪혔고 그것을 극복했던 위대한 유대인이자 하나님의 사람 마틴 부버(Martin Buber)는 펜실베이니아에 위치한 퀘이거 학교인 하버포드대학에 초청을 받아 북미를 방문했다. 집회 중에 한 사람이 침묵을 깨뜨리고 언어와 인종, 종교적 장벽을 초월하여 만나는 위대한 경험과 그러한 장벽들을 넘어 다른 사람과 사귈 수 있다는 경이와 낯선 이를 친구로 변하게 하는 사귐에 대해 말했다.

그러자 부버가 자리에서 일어나 모든 것을 꿰뚫는 듯한 강인한 눈빛으로 입을 열었다. “다른 사람을 만나는 것이 위대한 경험이긴 하지만 가장 위대한 경험은 아닙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을 위해 할 수 있는 가장 위대한 일은 그 사람의 가장 깊은 내면에 있는 것을 굳게 다져주는 것입니다. 즉 시간을 들여서, 상대의 가장 내면에 있는 가장 그 사람다운 것이 무엇인지를 찬찬히 알아보고, 인정과 격려를 통해 그것을 굳게 다져주는 일입니다.”

우리는 겉모습만 보는 사람을 수없이 많이 만난다. 그들은 우리가 그들에게 어떤 이용가치가 있을지 그리고 우리에게서 무엇을 얻어낼 수 있을지 계산하기 시작한다. 우리는 우리를 쓱 흝어보고 즉석에서 판정을 내린 다음 어떤 범주에 포함해 버리는 사람을 많이 만난다. 그들은 우리 각자를 한 사람의 인간으로 대하려 하지 않는다. 그들은 우리를 우리 이하의 존재로 대우한다. 그런 사람들과 계속해서 같이 있을수록 우리는 점점 우리 이하의 존재가 되어간다.

그런데 우리 삶에 이와는 다르게 들어오는 사람이 있다. 그는 우리를 이용할 목적으로 바라보지 않고 넉넉한 마음으로 내면의 진실에 대해 관심을 가지며 우리의 약점을 잡거나 우리에게 흠집을 내려 하지 않고 우리의 속생각을 알아주며 내적 신념을 따르려는 삶의 어려움을 이해해 주고 우리의 내면 가장 깊은 곳을 다져 준다. 그가 바로 ‘친구’다.

요나단이 되는 일은 위대한 일이다. 요나단이 없었다면 다윗을 자신의 소명을 포기하고 단순한 목동 생활로 돌아갔거나 아니면 자신의 선의를 짓밟은 자에 대해 복수의 칼날을 갈게 되었을 위험이 크다. 그러나 다윗은 두 길 모두에 빠져들지 않았다. 그는 요나단의 우정을 받아들였다. 그것은 이전에 사무엘로부터 받았던 왕업에 대한 기름을 굳게 다져 주었다.

친구가 말로 우리를 굳게 다져 주지 않는다면 우리의 가장 유명한 시작은 실패한다. 친구가 함께 있으면서 우리를 굳게 다져 주지 않는다면 우리의 가장 용감한 모험은 무산된다. 우리가 굉장한 일을 하는 것은 특이한 일이 아니다. 그러나 그것을 계속하고 유지하는 것은 특이한 일이다. 대개 어려움은 외적인 것이 아니라 내적이다. 즉 그러한 노력을 지속시킬 힘과 비전을 발견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선해지고 선한 일을 하는 것이 제대로 보상받는 경우는 드물다. 오히려 그것들은 종종 우리를 곤경에 빠뜨린다. 세상과 육신과 사탄은 기독교적 방식을 격렬하게 반대한다. 그리고 아름답게 출발한 수많은 사람의 삶을 파선시킨다.


출처: 아침향기

삶의 현장에서 만나는 성소

성소란 무엇을 하는 곳인가? 목소리를 낮추고 교양있게 행동해야 하는 경건한 장소인가? 묵상하고 사색하며 아브라함, 모세, 베드로, 바울등을 기억하는 곳인가? 그렇다. 하지만 성소는 또한 긴급한 상황에 놓였을 때 도움을 얻는 곳이기도 하다. 그곳은 여행을 위해 양식을 주고 싸움을 위해 칼을 주는 곳이다. 다윗은 먹지 못한 빈 배와 무기 없는 맨손으로 성소에 들어왔다. 하지만 거기서 나올 때는 다위을 배는 든든했고 손에는 무기가 들려져 있었다.

나는(유진 피러슨)라는 단어를 단순히 사원, 성전, 성당, 예배당 등에 한정하지 않고 모든 거룩한 장소를 다 포함하는 의미로 쓰고 싶다. 거룩한 장소란, 삶에는 눈에 보이는 것 이상의 무언가가 있을 알고 그 무언가가 ‘다른 것’임을 인식하는 장소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초월해 계시면서 동시에 우리 가까이 계시는 분이다. 정원이나 공원이 성소가 될 수도 있다. 산이나 사막, 혹은 자동차 안이나 서재가 성소가 될 수도 있다. 거룩한 장소는 대개 사제나 목사가 감독하는 곳이라는 전제하에 정의가 된다. 그러나 야곱의 돌베개, 모세의 불붙은 가시 떨기, 베드로의 고기잡이 배 등을 생각해 보라. 내가 이런 말을 하는 이유가 있다. 추잡한 세상사와 성가신 가족으로부터 차단된 조용한 세계로 도피해서 불가사의한 종교적 가르침이나 장엄한 종교의식에 온통 파묻혀 지내면서 무언가 신비스런 분위기만을 탐미하게 하는 잘못된 영성을 막기 위해서다.

사울 왕이 다윗을 죽이려고 창을 던졌을 때 다윗은 성소와 제사장이 있던 놉 땅으로 피한다. 그곳에서 다윗은 제사장만이 먹을 수 있는 떡을 먹고 호신용 칼을 얻는다(원래 그 칼은 골리앗이 지녔던 것을 다윗이 물 맷돌로 쓰러뜨리고 나서 전리품 기념으로 성소에 보관해 둔 것이었다. 삼상21-22장). 1천여 년 후 예수님은 이 사건을 언급하심으로써 율법 문자에 얽매이지 않고 배고픈 다윗과 그 일행에게 떡을 주어 굶주림을 면케 할 아히멜렉을 넌지시 칭찬하셨다(마12:1-5).

놉에서 일어났던 일에 비추어 내 삶을 바라볼 때 나는 성소란 단지 하나님에 대한 나의 인식과 관계가 깊어지는 장소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곳은 또한 다윗처럼 빵과 칼을 얻는 곳, 든든한 양식과 전투용 무기를 얻는 곳이기도 하다. 빵과 칼, 이 두 단어 모두 성경에서 종종 하나님의 말씀을 가리키는 말로 쓰인다. 하나님의 말씀은 빵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칼이다. 이는 말의 유희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깊은 체험을 담은 실제다. 궁지에 몰려 양식도 무기도 없이 필사적으로 도망칠 때 우리는 성소를 찾는다. 거룩한 장소를 찾는다. 그러면 거기에서 놀라운 일이 일어난다. 우리는 그 거룩 속에서 생명력과 삶을 깊이 있게 하는 힘을 발견한다. 위험을 만나 약해질 대로 약해진 우리는 새 성소에 들어와 어느새 그 위험과 정면으로 맞설 힘과 무장을 갖추게 된다.

이러한 성소의 영성은 그리스도인의 삶에 없어서는 안 될 근본적인 영성이다. 우리에게는 달려 들어갈 수 있는 성소가 필요하다. 우리는 신앙을 대적하는 이 위험한 세상 속에서 성소 없이는 삶을 이어 갈 수 없다. 우리에게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공급이 필요하다. 거룩한 삶을 위해 거룩한 장소들이 필요하다.



다윗:현실에 뿌리 박은 영성 – 유진 피러슨/
개인적으로 이 책을 꼭 사서 읽어 보시기를 추천합니다 Deborah.J.K.L>

그 외의 유진 피러슨의 책:
하나님의 신비에 눈뜨는 영성 – 좋은씨앗
묵시:현실을 새롭게 하는 영성 – IVP
한길 가는 순례자
이 책을 먹으라

내 안에 거하라 – 해밀턴 스미스

마지막으로 주님이 제자들과 함께 하시면서, 고별의 말씀을 나누시고, 마지막 교훈을 주시던, 그 감격스러운 순간에, 주님은 주 안에 거하는 일의 복됨과 필요성을 힘주어 강조하셨다.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의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절로 과실을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리워 말라지나니 사람들이 이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요15:4-7).

이 고별의 말씀을 주님의 입술로부터 직접 들었던 그 사랑받던 사도 요한은 다시금, 요한일서에서 신자들에게 들려주고 있다.

“저 안에 거한다 하는 자는 그의 행하시던 대로 자기도 행할지니라”(일요2:6).

“자녀들아 이제 그 안에 거하라 이는 주께서 나타내신 바 되면 그의 강림하실 때에 우리로 담대함을 얻어 그 앞에서 부끄럽지 않게 하려 함이라”(요일2:28).

“그 안에 거하는 자마다 범죄하지 아니하나니 범죄하는 자마다 그를 보지 못하였고 그를 알지도 못하였느니라”(요일3:6).

만일 이 구절들이 우리에게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일의 복됨을 알려주고 있다면, 우리는 잠시 멈추고 물어야만 한다. 주님이 말씀하신 “내 안에 거하라”는 말씀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이 말씀은 곧 그리스도께 가까지 밀착하여 동행하는 삶을 살므로써 우리 영혼이 주님의 사랑스러움과 그분의 도덕적 탁월함을 기뻐하면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 삶의 목적과 완전한 본을 발견한다는 뜻은 아닐까?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 안에 거한다는 것은 우리 마음이 그리스도와의 교통을 가짐으로써, 그리스도를 의지하고 그리스도께 배우는 기쁨을 말하는 것은 아닐까? 무엇보다 그리스도 안에 거한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임재의 영향력 아래 살면서 믿음으로 그 임재를 체험하는 삶을 가리키는 것을 아닐까? 만일 거룩하고 그리스도를 닮은 하나님의 사람이 우리의 집을 방문한다고 했을 때, 그 사람의 출현이 집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거부할 수 없는 어떤 영향력을 미치지 않겠는가?

어쩌면 우리는 평상시 사용하던 우리 자신의 말과 태도 보다 더 조심할 것이다. 만일 우리와 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의 영향력이 이렇다면, 그리스도 그분 자신의 임재를 깨달을 때의 영향력은 어떠할 것인가? 하지만 주의 백성들 가운데서 슬픈 광경이 벌어지곤 한다. 시기와 다툼이 일어날 때 우리는 마땅히 겸손한 태도를 가져야 함에도 불구하고, 신자들은 생각 없이, 또는 악의를 가지고 가혹하며 공격적인 말을 하면서 서로에게 상처를 주곤 한다. 우리는 심한 말에 대해 용서를 구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만일 주님이 고요하게, 그러나 분명하게 분쟁하는 우리 가운데로 걸어 들어오신다면 과연 무슨일이 일어날지를 우리 자신에게 묻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주님의 임재의 영향력 아래서 결코 해서는 안될 말이었지만 우리가 내뱉은 심하고 모욕적인 언사에 대해서 자백해야만 하지 않을까?

그렇다면, 비록 주님이 우리 눈에 보이지 않지만, 그럼에도 주님은 들으시고, 보시고, 또 아신다는 사실을 우리가 항상 기럭하고 있을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시편 기자는 이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귀를 지으신 자가 듣지 아니하시랴 눈을 만드신 자가 보지 아니하시랴 눈을 만드신 자가 보지 아니하시랴 열방을 징벌하시는 자 곧 지식으로 사람을 교훈하시는 자가 징치하지 아니하시랴”(시94:9-10).

그렇다면 주님이 우리 말을 들으시고 우리의 모든 행동을 보시며, 또 우리의 모든 생각을 아신다는 의식 가운데 행하는 것은 주님의 임재의 복된 영향력 아래 사는 것이며, 이것이 바로 주 안에 거하는 삶을 사는 것이다.

게다가 그리스도 안에 거하도록 권면하는 모든 성경구절들은 우리가 주 안에 거하기만 한다면 우리는 그 복됨을 즐거워하며 노래하게 될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첫 번째로,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거하면 우리는 저절로 열매를 맺은 것이다. 이 일의 중요성은 부정적인 면과 긍정적인 면으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 우리가 만일 그리스도 안에 거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열매를 맺을 수가 없다. 반면에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거하고 또한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거한다고 할 것 같으면, 우리는 많은 열매를 절로 맺을 것이다. 우리는 다른 성경에서 성령의 열매를 볼 수 있다. 즉 갈라디아서에서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성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갈5:22-23)는 말씀을 볼 수 있다. 이 사랑스러운 자질들은 그리스도의 아름다운 성품의 묘사가 아니고 그 무엇이겠는가? 이처럼 주님이 말씀하시는 열매는 신자들의 삶 속에서 그리스도 자신의 성품이 재생산되는 것을 가리킨다.

갈라디아서에서 말하는 열매는 섬김이나 봉사 또는 은사의 활용이 아니다. 물론 은사의 활용은 나름대로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은사의 활용은 사실 소수의 사람들에게 제한되어 있다. 하지만 이와는 달리 성령의 열매를 맺는 것은 젊은 신자나 나이든 신자나 동일하게, 자신의 삶 속에서 그리스도의 아름다움을 나타낼 기회를 얼마든지 가지고 있다. 그리스도의 은혜로부터 흘라나온 지극히 작은 것도 승화되어 아버지를 향해서 열매로 올라가며, 세상을 향해서는 그리스도인의 강력한 증거로서 뻗어 나간다. 바로 이것이 그리스도의 아름다운 성품을 선전함으로써 세상에 빛을 비추도록 우리가 이 어두운 세상 가운데 남겨진 이유이다. 이 일은 오직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거함으로써만 가능한 일이다. 우리가 그저 그리스도를 닮고자 노력한다고 해서 그리스도의 성품을 선전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우리가 그리스도와의 사귐을 추구하고, 그리스도 안에 거함으로써 그분의 거룩한 영향력 아래 살기만 한다면, 우리는 주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되어 영광으로 영광에 이르게 될 것이다.


분명 확실한 것은 주의 임재 안에서
내 영혼이 머문다면
나의 눈은 더욱 친밀하게
그 밝은 영광의 광채를 보리.

그럴 때 주의 완전한 형상
나 더욱 확실하게 보며
흠모할 주님의 성품
그 영광의 광채 속에서 나 자라게 되리.

두 번째로,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거하게 될 때, 우리의 기도가 응답될 것이라고 주님은 분명히 말씀하신다. 만일 주님의 임재의 복된 영향력 아래 산다면, 주님의 말씀이 우리 마음에 거하게 되면서, 우리의 생각은 점점 주님의 생각으로 바뀌게 되고 우리의 기도 또한 주님의 뜻과 일치를 이루게 된다. 따라서 우리가 드리는 기도마다, 응답되는 것이다.

세 번째로, 사도 요한은 요한일서에서 “저 안에 거한다 하는 자는 그의 행하시는 대로 자기도 행할 지니라”(요일2:6)고 말한다. 그리스도는 어떻게 행하셨는가? 우리는 로마서에서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하셨나니”(롬15:3)라는 구절을 볼 수 있다. 주님은 친히 아버지를 향해서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하시도다 내가 항상 그의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요8:29)라고 말씀하실 수 있었다. 이것이 신자가 따라야 할 완벽한 모범이다. 사도 바울도 “너희가 마땅히 어떻게 행하며 하나님께 기쁘시게 할 것을 우리에게 받았으니 곧 너희 행하는 바라 더욱 많이 힘쓰라.”(살전4:1)고 말했다. 또한 에베소서에서는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생축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 (엡5:2)고 신자들을 권면한다.

우리 주님이 걸으신 길의 탁월한 특징은 자기의 뜻은 철저히 배제하고 아버지의 뜻을 행했으며, 또 사랑 안에서 다른 사람들을 섬긴 점이다. 우리에겐,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길만이 주님이 걸으신 완전한 길을 조금이라도 걸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주님의 발치에 앉아 주님의 말씀을 들었던 마리아는 얼마나 아름다운가! 마리아는 우리에게 주안에 거하는 삶을 어떻게 시작할 수 있는지를 잘 보여준다. 우리도 마리아처럼 온전히 주님의 영향력 아래 있을 때에만, 주님이 걸었던 길을 묵상하며, 주님의 발자취를 좇고, 주님의 사람으로 가득하며 또한 은혜로운 말씀을 들으며, 축복하시기 위해 내미는 손길을 경험하게 된다. 또한 사랑 안에서 다른 이들을 섬기기 위해 자아에 속한 모든 생각을 내려놓으셨던 주님의 모든 완전한 행함과 행사와 말씀을 경험하게 된다.

우리는 기독교의 교리들을 알지도 모른다. 또한 믿음의 위대한 핵심적인 진리들을 바르게 붙들고 있을 수 있다. 누군가 “지식이 아무리 정확하고, 이해력이 아무리 올바르다고 해도 그러한 것들이 우리 영혼에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심어 줄 수는 없다”라고 말했다. 이것은 참으로 사실이다. 우리가 만일 그리스도로 옷을 입고자 한다면, 우리가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나타내고자 한다면,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시간을 가져야 하며, 또한 실제 삶 속에서 그리스도와 동행해야 한다. 모든 사람은 자신이 가까이 하는 사람에 의해서 영향을 받는다. 우리가 동행하는 사람의 성품을 은연 중에 닮게 된다. 우리가 만일 그리스도를 닮고자 한다면, 또한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대로 행하고자 한다면, 우리는 반드시 그리스도 안에 거해야 하며, 또한 그리스도와 동행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네 번째, 사도 요한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거하면 주님이 다시 오시는 그 날 그 앞에서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종종 우리의 행동과 말투와 태도에 세상적인 것들이 많이 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람들 사이에서도 인간적인 기준으로 매우 가볍게 서로를 판단하기도 한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의 다시 오시는 영광의 빛 가운데서 우리 자신과 우리의 말과 행실을 판단하면서 산다면, 우리는 그 영광의 기준에 미치지 못하는 자신을 발견하면서 이내 부끄러움을 느끼며 스스로를 책망하며, 많은 것을 자백하게 되지 않겠는가?

오직 그리스도 안에 거하며 주님의 임재의 영향력 아래서 살 때에만, 우리는 그 영광스러운 날에 부끄러움을 당할 만한 모든 일에서 보호를 받을 것이다.

다섯 번째로, 사도 요한은 “그 안에 거하는 자마다 범죄하지 아니하나니 범죄하는 자마다 그를 보지도 못하였고 그를 알지도 못하였느니라”(요일3:6)고 말한다. 이 구절 바로 앞의 구절로부터 우리는 성령님이 무엇을 죄로 말씀하고 있는지를 배우게 된다. 즉 4절에서 “죄는 불법이라”고 말한다. 죄의 본질은 하나님이나 다른 사람과는 관계없이 다만 자신의 뜻을 행하는데 있다. 주변 세상은 날로 불법이 증가하고 있다. 모든 사람이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한다. 그 결과로 문명, 교육, 그리고 법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세상 질서는 깨어지고, 사회와 국가는 계속해서 분열을 거듭하고 있다. 불법의 영이 횡행하는 곳마다, 분열은 따라 온다. 이 일은 세상 사람들이나 하나님의 백성들 가운데서나 마찬가지이다. 신자인 우리도 주변 세상의 영에 의해 영향을 받는 위험에 처해 있다. 따라서 경계를 게을리 할 때 세상 질서를 무너뜨리는 불법의 원리가 역사하게 됨으로 하나님의 백성들 사이에 분열과 나뉨을 초래한다.

만일 학교에서 학생들이 자기 뜻대로 하도록 허락된다면 학교는 필연적으로 문을 닫아야 할 것이다.

만일 가정에서 각자 가지 마음대로 할 수 있다고 한다면, 그 가정은 파괴되고 말 것이다. 만일 교회에서 신자들이 각자 자신의 뜻을 추구한다면, 분열은 필연적으로 따라 올 것이다. 불법의 영이 역사하는 곳은 그곳이 어디든지 분열이 일어나고, 자신의 뜻을 추구하는 성향이 강하면 강할수록, 미치는 해악은 더욱 클 것이다. 성실한 사람의 확고한 자기의 의(義)만큼 하나님의 백성들 사이에서 분열을 일으키는 요소는 없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처럼 악한 불법의 원리 또는 자기 의를 어떻게 피할 수 있을까? 그것은 오로지 그리스도 안에 거함으로써만 가능하다. 왜냐하면 사도 요한은 “그 안에 거하는 자마다 범죄하지 아니하나니”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오로지 “내가 하늘로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요6:38-39)고 말씀하신 주님의 영향력 아래서 살 때만이 우리는 죄의 본질인 자기 의(self –will)를 피할 수가 있다.

주 안에 거할 때 우리에게 임하게 될 복된 결과에 대해 살펴보자. 분명한 것은 주 안에 거하고자 추구함으로써 주님의 말씀에 응답한다면, 우리의 삶은 그리스도의 아름다운 성품을 나타냄으로써 열매를 맺게 된다는 것이다. 다음과 같은 열매들이 맺힐 것이다.

주님의 마음에 합하게 드려진 우리의 기도들이 응답될 것이다.
우리가 걷는 길에는 주님의 행하신 아름다움이 나타날 것이다.
우리의 행사는 장차 임하는 그리스도의 영광과 조화를 이루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내 안에 거하라…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15:4-5)는 주님의 말씀에 주의하는 것이 얼마나 선한 일인가! 어쩌면 우리는 은사를 받았고, 또 모든 지식이 있고 또 열심이 있을지도 모른다. 오랜 경험이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은 여전히 참된 진리이다. 은사, 지식, 역=열심, 그 자체는 결코 능력이 아니다. 이 모든 것들은 결코 우리로 하여금 육신을 이기고, 세상을 거절하고, 마귀의 올무에서 벗어나도록 해주지 못한다. 이 모든 것을 다 가지고 있는다 해도,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지극히 작은 시련에도 넘어지고, 엄청난 악에 떨어지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우리가 정말 아무것도 할 수 없다면,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것을 구하도록 하자. 이 일을 내일로 미루지 말자. 그리스도를 떠나 하루도 살고자 하지 말며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도록 하자.

주 예수님, 내 영혼을 지켜 주소서
주 떠나 방황할 때
나를 가르치시고
곧 주께로 돌이키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