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2012

♧가로등의 유래

미국의 정치가였던 벤자민 프랭클린은 자기가 사는 필라델피아 시민들에게 선한 일을 하기 원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아름답고 좋은 등을 하나 준비해서 집 앞에 선반을 만들고 그 위에 올려 두었습니다.

그러자 동네 사람들은 이상하게 생각했습니다.
등불은 집 안에 두어야 하는 것으로 이해했기 때문에, 집 밖에 두는 것은 낭비라고 여겼습니다. 그러나 한 주가 지나고, 한 달이 지나자 사람들은 뭔가 깨닫기 시작했습니다.

집 밖에 등불을 두니까 밤에 지나가는 사람도 넘어지지 않았습니다. 멀리서도 방향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것을 좋게 생각한 사람들이 하나 둘씩 집 밖에 등불을
두기 시작했습니다. 길거리가 환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오늘날 가로등의 시작이었습니다. 만약 길거리에 가로등이 없다면 어떻겠습니까?

얼마나 캄캄하고 어둡겠습니까?
세계적으로 가로등이 생기게 된 것은 벤자민 프랭클린이라는 한 사람이 주변 사람들을 위하여 집 밖에 등불을 둠으로써 생겨나게 된 것입니다. 한 사람의 선한 행동이 많은 사람에게 감동과 감화를 준 것입니다.

우리의 사명은 무엇입니까

“그들의 역사로 말미암아 사랑 안에서 가장 귀히 여기며 너희끼리 화목하라” (살전5:13)

복음 전도란 무엇입니까? 
모든 사람은 죽게 되는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면 살 수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는 주님은 실제적이며 실존하신 분입니다. 사도신경의 다섯 가지 기둥-동정녀 탄생, 십자가 고난, 부활, 하늘에 오르심, 다시 오심-에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산다는 것을 전하는 게 복음 전도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예수님에게 주셨다고 하십니다. 신학적, 영적으로 말하면 당신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하늘나라에 갈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 오직 한 길, 예수 그리스도만 구원의 통로입니다. 그분께만 쉼이 있습니다. 그 쉼은 하나님 안에서의 평안입니다.

예수님께서 모든 권세를 갖고 계신다는 말씀을 왜 하셨을까요?
제자들에게 너희도 나로 말미암아 동일하게 이 능력을 쓸 수 있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그분이 갖고 있는 죄 사함을 얻게 하는 권능이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이 땅 위에서 아무런 힘없이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권세를 다운로드 받아 승리하며 살아가야 하는 게 우리 믿는 사람의 가치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권세와 권능을 쓰는 것이 중요한데 이것을 쓰기 위해서는 믿음이라고 하는 신용카드를 꺼내야 합니다. 이때 우리가 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가라’는 것입니다. 가는 것은 대충 가거나 시늉만 내는 것이 아니라 끝까지 가는 것입니다. 결심하시기 바랍니다. 끝까지 가야 합니다. 독수리가 날개를 펴고 날아오르듯이 끝까지 가는 것을 소망하시기 바랍니다. 가지 않으면 역사가 없습니다.

두 번째는 모든 곳으로 가라는 것입니다. 내가 마음에 드는 곳에만 가는 것이 아니라 모든 곳에 가야 합니다. 세 번째는 제자를 삼는 것입니다. 제자를 삼는다는 것은 예수를 믿게 하는 것입니다. 제자를 만든다는 것은 한 순간에 되는 것은 아닙니다. 카를 바르트는 “제자를 삼는 데 나와 똑같은 사람을 만들어라”라고 말했습니다.

이제는 관계전도입니다. 이 관계전도에 필요한 것은 영향력입니다. 영향력은 직위나 외모로부터 나오지 않습니다. 강력한 영향력은 여러분들의 성품으로부터 나옵니다. 성령의 9가지 열매를 보면 그것은 다 성품인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의 성품으로 사람들에게 매력을 주셔야 합니다. 그래서 말합니다. ‘성격으로 신앙생활하지 마시고 성품으로 승리하셔야 합니다.’ 이것이 제자 삼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무엇입니까? 가르쳐 지키게 하는 것입니다. 사실 사람은 흔히 우리가 아는 것처럼 가르쳐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은 격려로 됩니다. 히브리서 10장 24∼25절에서는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변 사람들을 가르친다고 변화가 일어나지는 않습니다. 격려가 변화를 가능하게 합니다. 이렇게 할 때 우리는 임마누엘을 경험하게 됩니다. 우리의 삶에서 정말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고 그 가운데 있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의 인도하심, 하나님의 함께하심, 이 임마누엘의 축복으로 살아가게 되기를 소망합니다.

(목동제일교회 김성근목사)

하나님의 말씀을 기도의 재료로...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고전13:11)

기도는 책에서 배우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현장을 통해 배웁니다. 함께 기도하는 사람을 통해 배웁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예수님을 통해 기도를 배웠습니다. 기도의 사람 다니엘을 통해 기도를 배워봅시다. 기도의 사람 다니엘은 어떤 내용으로 그의 기도를 채웠을까요? 우리가 실제로 기도를 하고 싶어도 무슨 내용으로 기도를 채워야 할지 잘 모릅니다.

다니엘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기도하고 있습니다. 
성경말씀을 보면, 다니엘이 예레미야 성경을 읽으면서 마음이 뜨거워진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자 그에게 있어서 바로 그 말씀이 그의 기도의 재료가 돼 이 성경말씀을 펼쳐놓고서 이 말씀 자체를 하나님께 주장하면서 기도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 이 말씀이 하나님 당신의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저 하늘이 무너지고 이 땅이 꺼져도 절대로 무너지지 않는 말씀인 줄 믿습니다.” 다니엘은 이 말씀을 떠나지 않습니다.

한 아버지가 병상에 있는 아들을 위해 살라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처음에는 그저 다급해 살려달라고 기도했지만, 나중에는 그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자세를 바꾸어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붙들고 그 말씀 속의 약속을 주장하면서 기도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주시는 감동이 있었습니다. “네가 나의 말씀을 갖고 너와 나 사이를 꽁꽁 묶어 놓으니 내가 축복을 하지 않을 수 없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를 하나님과 묶어버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힘들 때 우리의 기분과 감정을 하나님께 토해놓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마음이 후련할지는 몰라도 힘을 느낄 수가 없습니다.

베트남 전쟁이 일어났을 때, 
미국 포로 중에 제러마이어 덴튼이라는 분이 있었습니다. 그는 지독한 고문을 받으면서 독방에서 무려 7년을 보냈습니다. 이 사람이 나중에 풀려난 뒤에 어떻게 그 고통과 지루함을 견뎠는지 질문을 받았습니다. 그의 대답은 이것입니다. 그는 계속해서 성경말씀을 암송하고 곱씹었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그 말씀을 통해 하나님과 교제를 하고 그 교제가 깊어지니까 자기가 암송하던 말씀이 어느 순간에 기도로 변하더라는 것입니다. 말씀이 그대로 기도로 변하기 시작하면서 이 사람 속에서 말할 수 없는 힘을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기도를 들으실 수밖에 없다는 확신이 섰습니다. 그는 결국 그 모진 고난을 이겼습니다. 그리고 나중에는 미국 앨라배마 주 상원의원에 뽑히기도 했습니다. 엘리야 선지자가 이스라엘에 비가 오지 않도록 기도한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신명기에는 하나님을 떠나게 될 때, 그 증표로서 하늘에서 비가 오지 않겠다는 약속이 있습니다. 엘리야는 이 약속의 말씀을 펼쳐놓고 기도한 것입니다.

다니엘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그가 읽은 말씀을 펼쳐놓고 바로 그 말씀을 재료로 해 기도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능력의 기도 원천입니다. 우리도 말씀을 읽는 것을 게을리 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우리가 읽은 약속의 말씀이 기도로 변할 때 능력의 역사는 나타날 것입니다.(박지웅목사)

오늘의 Daily Bread는 (http://blog.naver.com/paul_jhkim)에서 다시 보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