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1/2011

조직을 개편하고 사람을 세우게 하셨습니다.

사도들의 처방은 조직을 새롭게 하고 적절한 사람들을 세워서 분주한 일들을 위임함으로 자신들은 본질적인 사역에 더 충실할 수 있도록 한 것이었습니다.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사람들에게 칭찬을 듣는 사람 일곱을 택하여 구제의 일을 위임하였습니다. 이러한 결정은 사도들에게 힘든 결정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자신들을 드러낼 수 있는 좋은 기회를 내려놓는 것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구제하는 일에는 약간의 권력이 생길 수도 있고, 나누어 주는 것을 자기의 것처럼 행세할 수도 있는 재미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도들은 자신들이 얻을 수 있는 인간적인 유익을 과감하게 포기하는 결단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자신들은 말씀을 전하는 것과 기도하는 것, 사도로서의 본연의 임무에 충실하였습니다.

진정으로 하나님의 교회를 생각한 믿음의 결단입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어떻게 되든지 상관하지 않고 자기에게 조금이라도 유익이 된다면 괜찮다고 생각했다면 결코 할 수 없는 결단이었습니다. 사도들은 하나님 보시기에 좋은 결정을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끊임없는 문제해결의 연속입니다. 좋은 결단이 있는 곳에 하나님께서는 좋은 결과를 주십니다(7절).

지도자들로 하여금 사태를 파악케 하셨습니다.

초대교회의 본질적인 것의 훼손은 교회가 부흥하여 숫자가 많아져서 음식을 나누어 주는 일에 원망이 생긴 것과 지도자들이 분주하여 자신들의 본연의 임무를 상실해 버린 것입니다. 원망은 신령한 공동체의 공공의 적입니다. 사단은 원망을 시발점으로 하여 공동체 파괴공작을 실행합니다.

원망이 커지면 미움이 되고 미움은 더 큰 화를 불러옵니다. 원망으로 파당이 생겨나게 되면 공동체는 분열하게 됩니다. 사도들의 분주함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과 기도하는 것을 소홀하게 만들어서 교회를 근본적으로 병들게 할 수 있었습니다. 사단은 지도자들을 분주하게 만들어 본질적인 사역을 못하게 하여 공동체를 파괴하려고 하였습니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지도자들로 하여금 사태를 파악하게 하셨고 사도들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주도적으로 나섰습니다. 그리고 문제의 핵심원인을 발견하였습니다(2절). 문제의 원인은 자신들에게 있었습니다. 문제가 발생했을 때는 섣부른 처방보다는 올바른 진단이 매우 중요합니다. 사도들은 처방에 앞서 올바른 진단을 하였습니다.

하나님과 대화하자

“도둑질하는 자는 다시 도둑질하지 말고 돌이켜 가난한 자에게 구제할 수 있도록 자기 손으로 수고하여 선한 일을 하라”(엡4:28)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당신의 형상과 모양대로 지으셨기 때문에 사람과 대화하기를 원하십니다. 아담과 하와가 타락하기 전에는 하나님과 에덴 동산을 거닐면서 대화를 나눌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타락한 후에는 그 영이 죽었으므로 하나님과 대화가 끊어졌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지*정*의를 소유하신 인격적인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만물을 아시고 슬퍼하시고 분노하시며 사랑하십니다. 그런데 우리의 영이 죽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마음을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우리의 영이 살아났고 이제는 하나님과 대화할 수 있습니다. 그 대화가 바로 기도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기도할 때 논리를 세워 정연하게 하기를 원하십니다. 기도할 때 억지를 부린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들어 주시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조리있게 하나님께 구하면 먼저 우리 자신에게도 확신이 오고 은혜가 되면 하나님께서도 응답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무엇으로 기준을 삼아야 하나님 앞에 질서 정연하며 논리가 서는 기도를 드릴 수 있을까요? 그것은 바로 성경입니다. 재판관과 변호사가 헌법을 가지고 논리를 전개하듯이 우리가 성경 말씀을 가지고 하나님과 대화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물질 축복을 기도할 때에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너희로 부요케 하려 하심이니라"(고린도후서 8:9)는 말씀을 들어서 하나님께 간구할 수 가 있습니다.

또 병든 사람은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이사야 53:5)라는 말씀을 들어 병 낫기를 간구할 수 있습니다.

기도는 하나님과의 대화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과 생명감으로 넘치는 대화를 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먼저 우리 생활의 터를 하나님의 말씀 위에 두어야 합니다. 말씀을 읽지 않아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 알지 못하고 중언부언한다든가 인간의 생각을 내세워 억지를 부린다면 그것은 대화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을 알고 말씀을 근거로 하여 나누는 대화는 하나님의 기쁨이 내 기쁨이 되고 하나님의 복이 나의 복이 됩니다.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의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지라도 양털 같이 희게 되리라"(이사야 1:18)

오늘의 Daily Bread는 (http://blog.naver.com/paul_jhkim)에서 다시 보실수 있습니다.

부족함과 행복함

행복이란 만족한 삶이라고 했습니다.
자기가 만족할 수 있으면 무엇을 먹든, 무엇을 입든, 어떤 일을 하든 그건 행복한 삶입니다.

우리의 불행은 결핍에 있기보다 부족하다고 느끼는 결핍감에서 온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것도 다른 사람과 비교하면서 느끼는 상대적인 결핍감에서 비롯된다고 합니다.

첫째, 먹고 입고 살고 싶은 수준에서 조금 부족한듯한 재산.
둘째, 모든 사람이 칭찬하기에 약간 부족한 용모.
셋째, 자신이 자만하고 있는 것에서 사람들이 절반 정도밖에 알아주지 않는 명예.
넷째, 겨루어서 한 사람에게는 이기고 두 사람에게 질 정도의 체력.
다섯째,연설을 듣고도청중의 절반은 손뼉을 치지 않는 말솜씨가 그것입니다.

그가 생각하는 행복의 조건들은 완벽하고 만족할 만한 상태에 있는 것들이 아닙니다. 조금은 부족하고 모자란 상태입니다.

재산이든 외모든 명예든 모자람이 없는 완벽한 상태에 있으면 바로 그것 때문에 근심과 불안과 긴장과 불행이 교차하는 생활을 하게 될 것입니다.

적당히 모자란 가운데 그 부족한 부분을 재산이든 외모든 명예든 모자람이 없는 완벽한 상태에 있으면 바로 그것 때문에 근심과 불안과 긴장과 불행이 교차하는 생활을 하게 될 것입니다.

적당히 모자란 가운데 그 부족한 부분을 채우기 위해 노력하는 나날의 삶 속에 행복이 있다고 플라톤은 생각했습니다. 우리는 잘 모르고 있습니다.

늘 없는것, 부족한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더 많이 생각하며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행복은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살되 만족할 줄 아는 사람에게 찾아옵니다.

행복은 물질적 풍요가 가져다 주는 것이 아니라 만족할 줄 아는 마음에서 생긴다는 것을 그분들은 잘 보여 주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