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0/2011

믿음은 말씀에 기초해야만 합니다.(FAITH MUST BE FOUNDED ON THE WORD)

하나님이 염려하시는 것은 자신의 백성들이 믿음에 있어 흔들리는 것입니다. 즉 자신들이 부르짖는 문제에 대해 그분을 신뢰하지 않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최악의 죄는 그분이 약속하신 것을 행하실 것을 기꺼이 믿지 않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불륜, 간음, 마약과 알코올 남용 또는 다른 어떤 육체의 죄보다 더욱 그분의 감정을 상하게 합니다.

그분의 말씀은 이렇습니다. “주께서 경건한 자는 시험에서 건지실 줄 아시고...”(베드로후서 2:9)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고린도전서 10:13).

이 구절들은 복음이든가 거짓말이든가 둘 중 하나일 것입니다. 만약 복음이라면 우리는 이 말씀들 위에 서야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기를 바라십니다. “주님, 내가 당신이 나를 끝까지 지키실 것을 신뢰하며 여기 선 채 죽는다면 믿음 안에서 죽게 해 주십시오. 살든지 죽든지 나는 당신의 것입니다.”

지옥의 모든 바람과 파도가 당신에게 오도록 내버려두십시오. 모든 것이 당신에게 오도록 내버려 두십시오. 우리 하나님은 자신이 능력이 있다고 말씀하셨고 그분은 당신을 구원하는 법을 알고 계십니다.

그분은 당신과 내가 우리의 여정에서 모든 기쁨과 평강, 승리와 안식을 누리도록 의도하셨습니다. 그분은 이 암흑의 시대에 다가오는 일에 대항하여 굳게 설 남녀들, 즉, 그들 안에 그리스도가 거하시므로 고요와 평강으로 서 있을 하인들을 찾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그러한 신뢰의 자리로 나아오기를 무척 바라십니다. 당신이 다시는 결코 두려워하지 않고 그분의 권세와 능력 안에서 진정으로 안식하기를 원하십니다. 당신이 오직 그분을 신뢰하기만 하면, 그분은 모든 덫과, 시련과 시험으로부터 당신을 구원하시는 법을 알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때를 따라 행하는 은밀한 마음이 있어야합니다.

세상의 유명한 사람들의 행보를 보면 요란합니다. 움직이는 곳마다 방송과 언론의 스포트라이트가 비추어집니다.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이 그의 행보를 지켜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삶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늘 은밀한 중에 행하십니다. 오병이어 기적 후에 예수님은 혼자 산으로 가셨습니다. 예수님은 감람산에 기도하러 가실 때, 전도사역을 마치고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실 때, 늘 제자들과 다니시거나 아니면 혼자 다니셨습니다. 예수님은 은밀한 중에 행하시며 세상의 스포트라이트를 피하셨습니다.

세상 사람들의 관심과 행보는 성공과 물질에 몰려있지만, 예수님의 관심과 행보는 오로지 하나님의 때를 따라 행하시는데 집중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 은밀한 중에 물으시고 오직 하나님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으시면서 은밀한 중에 움직이시는 예수님입니다(10절).

예수님처럼 세상에 자신을 드러내려하기 보다는 하나님께 마음을 드러내어 은밀한 중에 행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은밀히 행하는 것은 비겁한 것이 아닙니다. 은밀하게 행하는 중에 깊이가 있고 지혜가 담겨져 있습니다. 은밀함을 잘 활용하는 자가 하나님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을 수 있습니다.

뒤에 있는 일은 잊어버리고...

하나님의 성령께서는 바울 선생을 통하여 우리 삶의 자세를 가다듬기 위해 뒤엣 것을 잊어버리라.”고 하셨습니다우리들이 기억하지 말아야 될 것이 마음 속에 누적되어 앞길에 방해가 될 때 먼저 그것들을 잊어버려야 합니다마치 시냇가에 앉아 꽃잎을 따러 내어버리듯이 슬픔원한미움부조리부끄러움 등을 잊어버려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먼저 정죄의식을 벗어버려야 합니다.
정죄의식은 죄책감을 가져오고 죄책감은 마음 속에 즐거움을 상실하게 하고 용기와 희망을 잃게 합니다이것은 또 질병을 유발케 하기도 합니다이러므로 모든 죄책감을 예수님 앞에 내어놓고 그의 보혈로 씻음을 받으십시오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기억하지 않으시겠다고 했으니 여러분도 자신의 죄를 다 회개하고 잊어버리시기 바랍니다.

둘째로우리는 과거의 실패를 되씹고 되씹어 열등의식과 좌절감을 갖지 않아야 합니다. 사람들은 대인관계나 사업에 실패를 하게 되면 그만 자신에게 실패자의 낙인을 찍고 실패자의 이미지를 갖게 되어 열등의식과 좌절감에 빠지고 실패자가 됩니다그러나 실패하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비록 어떤 일에 실패하였더라도 그 일에만 실패했을 뿐 인생에 실패한 것은 아닙니다그러므로 실패에서 오는 강박관념을 벗어버리십이오.

셋째로완전주의를 버려야 합니다.
누구든지 나와 같이 완전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여러분의 가정과 사회 생활에 파탄을 일으켰다면 이제 그 생각은 잊어버리십시오완전주의에는 항상 분열과 파괴와 불행이 다가옵니다이제 새해부터는 대인 관계에서 넓은 아량과 포용력을 가지는 여러분 자신이 되며,하나님 앞에서 양심을 저버리지 않는 한계 내에서 모든 사람과 화목할 때 거기 인생의 참맛이 있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과거의 영광에 살지 말아야 됩니다.
사람은 목적을 추구하는 기계입니다 새로운 목표가 없이 지난날의 영광에 도취되어 살면 그 사람에게는 곧 패망이 다가옵니다이것들이 우리가 삶 속에서 버려야 할 것들입니다.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빌립보서 3:13,14)

‘감사합니다’라는 말씀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우리 나라 사람들은 이웃으로부터 선물을 받거나 초청을 받을 때 일단 한번 쯤은 사양하는 입장으로 선물을 받습니다그러나 서양에서는 이 사양의 미덕이 통하지 않습니다만일 이 미덕을 발휘했다가는 받을 의사가 없는 줄로 알고 두 번 다시 권하지 않습니다그러므로 선물을 받거나 초청을 받을 때 “감사합니다.”라고 말하는 것은 결과적으로 “두고 가십시오라는 말이 됩니다.

하나님께서도 마찬가지입니다성경에는 32,500가지의 약속의 말씀이 있어서 우리가 감사함으로 받기만 하면그리고 우리가 받을 준비만 되어 있으면그 약속의 말씀이 우리의 생활 속에서 성취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 말씀을 읽다가 우리 마음 속에 부딪쳐오는 약속의 말씀을 발견 할 때에 “하나님 감사합니다라고 하며 받아들여야겠습니다그것은 곧 “아버지 제가 받겠사오니 주옵소서라는 수락의 의미가 있습니다그 때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복을 쏟아 주시는 것입니다.

다만 한가지그렇게 감사 기도를 드림에도 불구하고 마음 속에 믿음과 확신이 서지 않을 때에는 자기 자신을 돌이켜 볼 필요가 있습니다아직 회개하지 않은 죄나 남에게 원한을 품고 있는 것이 없는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회개하지 않은 죄는 우리에게 언제나 “나는 죽어 마땅할 죄인이다.”라는 죄책감을 주고이 죄책을 다시 “나는 복 을 자격이 없다.”라는 열등의식을 심어줍니다우리는 이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온전히 씻음을 받았고 또 일상 생활에서 짓는 죄도 회개만 하면 그 때 그 때 사함을 받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감사 기도가 하나님께 상달되어 효력을 얻기 위해서는 먼저 죄책감에서 놓여나야 합니다그래서 우리의 마음을 “나는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수 있는 자격이 있다라는 방향으로 돌려 놓아야 합니다예수님의 피로 사신 바된 하나님의 자녀이므로 하나님의 기업을 유산으로 받을 수 있다는 당당한 생각과 자세를 지녀야 합니다겸손과 죄책감을 혼동해서는 안 됩니다.

그 후에 예수 이름으로 구하고 구한 바를 받은 줄로 믿어 “감사로 끝을 맺고 항상 감사하면 여러분의 생활에 하나님의 예비하신 축복이 충만히 임하게 될 것입니다.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빌립보서4:6)

5/28/2011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는 겸손한 마음을 가져야합니다

예수님의 형제들은 세상의 유명세를 타고 있는 예수님이 쉽게 성공할 수 있는 방법을 제안했습니다. 유대로 가서 초막절에 사람들이 모여들 때 기적을 일으켜서 많은 사람들이 믿고 따르도록 하라는 제안을 했습니다(4절). 쉬운 사역의 길을 제안한 것입니다.

가족이 잘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그랬겠지만 그들은 예수님에 대한 불신의 마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5절). 예수님이 임금이 되면 한 자리를 차지해 보고 싶은 마음일 수도 있습니다. 형제들의 제안은 예수님에게 너무나 좋은 제안이었습니다.

단 번에 자신의 사역을 쉽게 이룰 수 있는 기회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거절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사역을 시작할 때 사단에게 세 가지 시험을 받으셨을 뿐 아니라 오병이어 기적을 목격한 무리들이 예수님을 임금 삼으려 하기도 했습니다(6:15).

그러나 예수님은 그 좋은 기회들을 단호하게 거절했습니다. 모든 사람들의 의도가 불순하고 불경건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의 소리를 듣기 보다는 겸손하게 하나님의 소리를 들으며 때를 따라 행하셨습니다. 세상 사람의 소리는 귀에 익숙하고 지혜로워 보이지만, 하나님의 소리는 귀에 거슬리고 미련하게 보입니다(고전 1:18).

그러나 하나님의 소리는 때를 따라 일하는 경건한 소리이며 삶에 능력을 주는 소리입니다. 예수님처럼 겸손하게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며 행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어야 합니다.

물리적이고 경험적인 이해에 갇혀 있는 무리들은 영적이고 초자연적인 진리를 가르쳐 주시는 예수님의 말씀이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리하여 이제 서로 수군거리다가 다투고 있는 모습을 봅니다. 예수님은 그의 사역과 인격에 생명을 관련시키고 있습니다.

갈보리 산의 속죄의 죽음은 구약에 약속된 모형의 실체입니다. 그리하여 이 생명은 믿음을 통하여 받습니다. 살을 먹고 피를 마시는 것은 배고픈 자가 음식을 먹듯이 죄로 말미암아 영적 기아와 굶주림 가운데 있는 죄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임으로 배부름과 참 생명을 얻게 된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또한 먹고 마심은 가장 밀접한 연합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도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계 3:20)고 말씀하셨습니다. 말씀과 기도, 성찬은 우리가 예수님과 깊은 교제를 갖기 위한 매우 중요한 은혜의 수단입니다.

주님과 깊은 인격적인 연합이 당신의 생명을 풍요롭게 한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고 날마다 양식과 음료를 마시듯이 말씀과 기도, 성찬 등의 은혜의 수단을 통해 주님의 배부르게 하시는 풍성한 은혜를 맛보시길 기도합니다.

♧ 비우는 삶 ♧

오늘날 많은 사람은 자기 것을 고집한다.
더 좋은 아파트를 갖기를 원하고, 더 고급스런 자동차를 타고 다니길 원한다.

유명 브랜드로 자신을 치장해야만 남보다 자신이 더 고상하고 우아해 보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아파트값은 천정부지로 오르고 내적인 아름다움보다 뜯어고쳐서라도 외모에 신경을 쓰다 보니 가치관의 혼돈이 생긴다.

정신세계는 피폐해져 엽기적이고 충동적인 행동을 서슴없이 일삼는 것이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마음이 가난한 자가 복이 있으며 하나님 나라가 저희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이는 순간순간 마음을 비우는 삶을 살라는게 아닐까 생각한다.

수영을 배울 때, 몸에 힘을 빼야함에도 초보자들은 물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몸에 힘을 잔뜩 주어 긴장한 나머지 물속에서 계속 허우적거린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조금만 마음을 비우면 세상에서 허우적대지 않고 좀 더 자유롭게 인생을 살아갈 수 있다.
 
복있는 그리스도인

마귀가 주는 쾌락에는 공짜가 없습니다!

인간은 영적인 존재입니다. 사람은 떡으로만 사는 존재가 아닙니다. 사람에게는 떡이라는 물질적인 부분도 필요하지만 사람은 보다 더 중요한 부분인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떡도 아니고 돈도 아니지만 우리의 영혼을 채웁니다. 이처럼 사람은 영적 생기가 충만할 때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사람은 하나님을 예배하고 찬양하고 사랑하고 교통할 때 그 영혼이 빛으로 가득하게 되며 심령에 기쁨과 행복감이 충만해지도록 설계되었습니다. 그것이 영으로 사는 삶입니다.

하지만 죄로 타락한 인간은 하나님을 예배하고 높이며 만족을 얻으려 하지 않습니다. 주님이 아닌 다른 것으로 우상을 만들고 거기에 절을 합니다. 술을 즐기고 죄를 즐기며 악을 행하고 죄와 세상이 주는 쾌락을 즐거워할 때 그것들은 어둠의 영이 되어 사람들을 지배하고 다스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섬기는 것을 싫어하고 우상을 섬길 때 그들은 이방의 민족들에게 잡혀서 노예 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구약에 나타난 이스라엘의 역사입니다. 그처럼 오늘날도 하나님의 백성들은 주님을 예배하며 주와 동행하는 천국의 기쁨을 누리기보다 세상의 영들이 주는 쾌락을 즐거워하며 거기로 도피하기 원합니다. 그렇게 할 때 보이지 않는 악한 영들에게 잡혀서 비참한 어둠속의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원리를 분명히 깨달아야 합니다. 주님을 섬기고 예배하는 일은 처음에는 별로 재미있는 일이 아닐지 모릅니다. 처음에는 좁은 길에 가깝습니다. 몸이 피곤할 때 기도하러 가기가 싫을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몸은 그냥 집에서 TV나 보면서 놀자고 말합니다.

하지만 그 몸의 제안을 거절하고 교회에 가서 주님 앞에 무릎을 끓고 기도할 때 얼마 후에는 그 깊은 심령속에서 놀라운 기쁨이 임하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그처럼 주님께 속한 것은 처음에는 힘들게 느껴져도 조금 지나면 넘치는 기쁨으로 보상을 얻게 됩니다.

마귀의 일은  반대입니다. 처음의 기쁨과 즐거움을 얻는 것은 아주 쉽고 공짜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 기쁨은 아주 잠깐입니다. 쾌락은 순간이며 그 후에는 기나긴 불안과 고통과 재앙이 있습니다.

그 마지막은 멸망입니다. 하지만 이 순간에도 지금 당장의 쾌락을 위해서 많은 사람들이 마귀의 유혹에 넘어가고 있습니다.

부디 기억하십시오. 마귀가 주는 쾌락에는 공짜가 없습니다. 그들은 처음에는 돈을 주지만 나중에는 엄청나게 비싼 이자를 뜯는 사채업자들보다 더 심한 존재들입니다.

오늘날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마귀에게 눌려서 고통을 겪고 있는 이유는 그들이 주님과 천국으로부터 오는 신령한 즐거움에 대해서 알지 못하고 경험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며 세상의 허무한 쾌락을 즐기고 누리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 결과는 얼마나 비참하고 고통스러운 것인지요!

아무리 외롭고 지치고 무기력하고 힘들더라도 악한 영들이 주는 위로를 얻지 마십시오. 그들이 주는 도피처에 가까이 가지 마십시오. 당신은 먹은 것을 다 토해내야만 그들에게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기억하십시오. 그들은 쾌락의 영으로 오지만 결국은 징벌과 재앙의 영으로 당신에게 나타나게 됩니다. 오직 주님을 기뻐하십시오. 외롭고 힘들고 지치고 어려울 때 오직 주님 앞으로 가까이 나아가십시오. 주님의 위로와 평강과 은총과 빛이 당신에게로 가까이 올 것이며 당신은 오직 주님의 사람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할렐루야!
대적기도의 원리와 능력중에서.../정원목사님

5/27/2011

하나님의 임재에 흠뻑 젖기 - 존 아놋

94년 1월 성령님이 우리에게 오신 이후로 우리는 하나님의 임재로 흠뻑 젖어 있습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의 임재로 흠뻑 젖음으로 말미암아 그들의 마음이 크게 변화 되는 경험을 했습니다. 결혼 생활이 회복되고, 두려움이 물러가고, 우울증과 병들이 떠나가는 등 삶이 변화 되었습니다.

흠뻑 젖는것이 무엇인가? BUT What is "Soaking"?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 흠뻑 젖는 것은 기도하면서 무언가 얻기를 애쓰기 보다 하나님의 사랑안에서 안식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만지심을 받으면서 실제적인 성령의 임재와 연결이 되기 시작합니다. 사람들은 때로 앉거나 혹은 단순히 바닥에 눕는 반응을 보이기도합니다.

기대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 쉴때 성령님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더 많은 사랑을 나타내시고 각 사람을 치유하시고 새롭게 하십니다. 신자들이 하나님의 임재에 흠뻑 젖었을 때 주님은 사람들의 주의를 성경 말씀을 통해서든, 내적 음성이나 마음의 눈을 통해 보이는 그림들로 이끄십니다.

캐롤은 임재에 젖는 것을 오이 피클 만드는 것에 비유하기를 좋아합니다. 그리스어 bapto, 곧 살짝 담드다 , 그리고 baptidzo, 곧 푹 담그다라는 뜻입니다. 피클을 만드는 것을 예로 든다면, 생야채를 데치기 위해, 오이를 소독하기 위해 끓는 물에 살짝 담구는 조리법인데  bapto라는 단어는 살짝 담구었다 빼는 것이고 오이를 푹 담그는 것은 baptidzo라는 단어를 써서 소금 물에 절이고 몇주를 두는 것입니다.

이 몇주의 시간 동안 피클의 맛이 만들어지기까지 오이 깊숙히 맛이 배어 들어가게 되어 더 이상의 생오이의 맛이 나지 않게 됩니다. 성령의 임재에 담구어지게 되고, 하나님의 생수의 강에 흠뻑 젖게 되면 과거의 당신, 그대로의 성품이 아닌 예전의 'taste' 맛이 아닙니다. 그리고 당신은 성령으로 채워진 'taste' 맛이 되는 것입니다.

"Pickle us, Lord! 적셔지게 해주세요 주님! 성령으로 적셔주셔서 점점 더 주님을 닮아갈수 있도록 당신의 위대한 임재로 흠뻑 젖게 해주세요"

왜 흠뻑 잠기는것이 필요한가? Why do we need to soak?토론토에서 모든 모임의 마지막은 임재에 젖는 기도 시간으로 마치게됩니다. 우리 사역팀이 " 주님, 오셔서 주님의 임재로 채워주소서, 당신의 더 많은 사랑을 부으소서"라고  서 있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며 사역합니다. 그들은 서 있기도 하고 때로는 쓰러지기도 하면서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 안식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우리들의 모임에서 이런 현상들을 경험하기 때문에 우리는 'catcher'를 준비해 기도 받는 사람들 뒤에서 돕도록 합니다. 이러므로 기도할 때 쓰러지는 것에 대해 덜 염려하게 되고 편안히 기도 받을 수 있도록 허락합니다. 흠뻑 젖는 기도는 또한 당신의 집에서도 가능합니다. 혼자 혹은 배우자와 자녀들과 또는 몇몇의 친구들을 초대하여 차례를 바꿔가며 기도할 수 있습니다.

우리 TACF 사역자 중의 한 사람인 steve long은 처음으로 집에서 혼자 흠뻑 젖는 임재의 기도를 시작한 사람입니다. CD를 틀어 놓고 누워서 친밀한 찬양으로 아름답고 새로운 시간을 주님과 함께하는 것입니다.

Jeff Metzger라는 오하이오 아크론에서 온 사역자는 7년 이상을 "Soaking Prayer 흠뻑 젖는 기도" 모임을 해오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자유롭게 오고 가고 기뻐하며 조용히 바닥에 누워 평안히 생기를 얻는 시간을 주님과 함께 경험합니다. 많은 삶의 변화들이 Jeff의 집에서 참여한 흠뻑 젖는 기도 시간을 통하여 생겨났습니다.

어떻게 흠뻑 젖을 수 있나? How do I Soak? 바닥에 눕지 않더라고 앉거나 침대에 누워서든 중요한것은 안전해서 넘어질 수도 있는 장소라야 합니다. 당신의 애정을 예수님께 고정하고, 친밀한 찬양으로 의미있는 음악을 들으면서 나의 영이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갈 수 있도록 돕습니다.

당신이 십자가를 깊게 생각하고 예수님께서 당신을 사신 그 사랑을 생각할때 당신의 죄를 자백하기 시작하고 예수님께 가까이 가기를 갈망할 것입니다. 조금 뒤 당신은 성령님의 보이지 않는 임재를 알게 될 것이고 사람들은 몸에 무게가 느껴진다거나, 몸에 전기가 오는 듯한 진동이 오거나 따뜻한 사랑의 기운을 느끼는 등 여러 방법으로 체험하면서 하나님께 연결됩니다. 

바로 이런 만남을 통해 묶여지고 하나가 되어 사랑이 자라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만이 합리적인 방법은 아니지만 당신의 마음은 반드시 하나로 연결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는 것은 당신을 당신의 온 마음과 영으로 주님을 사랑하게 해줍니다.

마22:37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렇게 기도하십시오 " 주 예수님. 당신을 경배합니다. 나의 주인이 되어주세요. 당신을 초대합니다. 오셔서 나의 마음을 채워주세요. 가까이 와주시고 당신의 사랑을 알게 해주세요."
마음이 산란해지면 다시 예수님께 초점 맞추고 왜 이 찬양을 들으며 흠뻑 젖어야 하는지를 상기시키십시오.

성령님이 일하시는것을 믿을수 있나요? Can I trust that It is holy sprit working?
물론 그렇습니다. 명심하십시오. 하나님께 받은 모든 것들은 우리가 믿음으로 받는 것입니다. 믿음은 반드시 긍정적이여야 하며 하나님께 초점 맞춘것이라야 합니다. (부정적이거나, 두려움이나, 적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닌)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눅11:11-13 너희 중에 아버지 된 자로서 누가 아들이 생선을 달라 하는데 생선 대신에 뱀을 주며 알을 달라 하는데 전갈을 주겠느냐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

키는 바로 친밀감입니다. 이것은 프로그램을 운영하거나 관리하는 것이 아니라 유지하기 위한 관계입니다.

얼마나 오래 잠겨야하나?How long do I continue Soaking? 예수님이 안식의 주인이시고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그의 쉼으로 들어오기를 원하십니다. 성령의 열매는 사랑, 희락과 화평이니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소중한 시간을 주님과 보내야합니다. 억지로나 서둘러서는 안됩니다. 이 아이디어는 무엇을 얻느냐가 아니고 누군가와 함께 하는 것입니다.

시간을 갖고 주님과 함께하므로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이 당신을 사랑하게 하십시오. 만약 잠이 든다면 그것도 괜찮습니다. 방해 받았다면 언제라도 다시 시작하십시오. 당신은 당신의 시간이 언제 끝나는지 알게 될 것입니다. 마음에 만족감을 가질 것이고 삶속으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이 흠뻑 젖는 기도 시간 중에 때로 사람들은 감정적이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마음 깊은 곳을 만지시기를 원하십니다. 드러내고 싶지 않아 마음내키지 않는 오래전의 상처들을 주님은 방문하셔서 자유케하시고 두려움이나 아픔으로부터 치유하시기를 원하십니다. 이럴때 동역자나 경험있는 사역자들이 한 자리에 함께 해서 그들이 당신을 사랑하고 안심시켜서 믿음으로 이 상처들로 가까이 갈 수 있도록 도울 수 있습니다.

집에서 흠뻑젖는 기도 센터의 시작 Starting a Home Soaking center
나는 수백의 성령의 불을 잡는 " 주님의 임재에 흠뻑 젖는 기도 센터(Soaking Center)"가 북미와 전 세계에 생기는 것을 보길 원합니다. 이것은 생수의 강에 배고파하고 더 많은 주님의 임재를 원해 더 깊이 주님과 친밀해지기를 원하는 사람들을 위한 기회입니다. 프로그램을 갖는 것 없이 하나님과의 소중한 시간을 보내는 것입니다.

예수님께 초점을 맞춤으로 우리의 삶이 진정으로 변화되는 시간입니다.

성령의 은사들[2]

Ⅲ. 은사의 세 가지 종류(분류)
이 9 가지 은사들은 모든 믿는 자에게 주어지는 중요한 사역도구들이다. 우리 생활 속에서 역사함과 그 기능을 이해하기 위하여 세 가지로 분류해 본다. 각각 세 가지의 은사들을 포함하는데 아래와 같다.

발성 은사들 (말함)
a. 각종 방언 말함
b. 방언통역
c. 예언

계시 은사들 (들음)
a. 영들을 분별함
b. 지식의 말씀
c. 지혜의 말씀

능력 은사들 (행함)
a. 믿음의 은사
b. 병 고치는 은사
c. 능력 행함

A. 발성 은사들 (말함)
소리를 내어 언어를 구사해서 나타나는 이 은사들은 우리에게 또는 우리를 통해 초자연적으로 말하는 성령님의 나타나심이다. 이 은사들이 발휘될 때 믿는 자들은 힘을 얻고 세움을 입으며 용기와 안위를 받는다. 결코 정죄함을 받지 않는다. 발성은사는 곧 각종 방언을 말함과 방언을 통역하는 것과 예언하는 은사다.

B. 계시의 은사들 (들음)
하나님께서 영들의 정체, 성질, 활동 등을 초자연적으로 계시하거나 그의 백성들에게 지식이나 지혜를 초자연적으로 계시하여 나타나게 하실 때 발휘된다.

이런 계시는 우리의 영을 통하여 마음속에 생각, 인상, 느낌, 꿈 또는 이상 등의 형태로 전달되는데 곧 영들을 분별하는 은사, 지식의 말씀, 지혜의 말씀의 은사들이다.

C. 능력 은사들 (행함)
이들 능력 은사는 하나님께서 그의 초자연적 믿음이나 능력을 우리를 통하여 흘러 나가게 하시든지 또는 역사 하도록 풀어놓으실 때에 그에 의하여서 나타나게 된다.

Ⅳ. 각종 방언들
“사람이 하나님께 말하는 것” 혹은 “하나님이 사람에게 말씀하시는 것” 성경에는 저들이 성령으로 세례를 받고 모두가 방언을 말하는 것이 나타났던 것과 믿는 자들이 방언의 은사를 초자연적으로 받아서 메시지를 전한 것과는 차이가 있다고 구별한다.

하나는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언어요, 다른 하나는 하나님으로부터 사람에게 전달되는 메시지 인 것이다. 오순절 날이 임하매 “저희가 다 성려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행 2:4).

A. 천사의 말 혹은 사람의 말
방언의 초자연적 나타남은 천국의 언어 즉 천사의 말이거나 자기는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하지 못하나 듣는 자들 중에 누군가는 이해할 수 있는 초자연적으로 나타나는 사람의 말이다(고전 13:1).

행 2:6,7,8,11b “이 소리가 나매 큰 무리가 모여 각각 자기의 방언으로 제자들의 말하는 것을 듣고 소동하여 다 놀라 기이히 여겨 이르되 보라 이 말하는 사람이 다 갈릴리 사람이 아니냐. 우리가 우리 각 사람의 난 곳 방언으로 듣게 되는 것이 어찜이뇨... 우리가 다 우리의 각 방언으로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함을 듣는도다 하고”

B. 방언: 하나님께 드리는 찬양
성령충만을 받았을 때 방언을 말한 표적을 갖고 있는 모든 경건한 신자들은 매일같이 이 초자연적인 언어를 사용하여 하나님과 대화하며 하나님께 노래 부르며 찬양하기를 계속해야 된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의 영으로 비밀을 말하게 되는 것이다.

고전 14:2 “방언은 말하는 자는 사람에게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하나니 이는 알아듣는 자가 없고 그의 영으로 비밀을 말함이니라.”

고전 14:4 “방언을 말하는 자는 자기의 덕을 세우고...”

C. 바울은 방언으로 말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강조했다.
고전 14:18 “내가 너희 모든 사람보다 방언을 더 말하므로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고전 14:5a “나는 너희가 다 방언 말하기를 원하나...” 그리고 39절엔 “...방언 말하기를 금하지 말라”고 강조했다.

D. 방언: 불신자들에게 대한 표적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저희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쫒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막 16:17).

믿는 자들이 복음을 전파할 때에 말씀을 확실히 증거 하시는 초자연적인 표적이 따르는데 그 중의 하나가 방언이요 이는 불신자들에게 표적이 된다.

막 16:20 “제자들이 나가 두루 전파할 새 주께서 함께 역사하사 그 따르는 표적으로 말씀을 확실히 증거 하시니라” 하셨다.

오순절 성령 강림시에 새 방언을 말한 초자연적 표적은 그날에 삼천 명이 구원을 받는 역사를 초래했다.

방언 말함은 성령의 초자연적 은사의 통로에 첫 입문이라고 말할 수 있다.

성령의 은사들[1]

우리는 성령을 선물로 받았다. 그러므로 우리는 초자연적인 삶의 문을 통과했다. 즉 성령의 은사들을 체험하고 사용하는 초자연적 새로운 영역으로 들어오게 된 것이다. 성령의 은사들을 살펴보기로 하자.

Ⅰ. 은사의 중요성
사도 바울은 성령의 은사와 중요성을 강조했다.
고전 12:1 “형제들아 신령한 것에 대하여는 내가 너희의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A. 계시된 9가지 은사들
사도바울은 성령의 9 가지 은사에 대한 그 다른 점, 활동, 나타남에 대하여 가르쳤다.

고전 12:4~10 “은사는 여러 가지나 성령은 같고 직임은 여러 가지나 주는 같으며 또 역사는 여러 가지나 모든 것을 모든 사람 가운데 역사하시는 하나님은 같으니 각 사람에게 성령의 나타남을 주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 어떤 이에게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말씀을 어떤 이에게는 같은 성령을 따라 자식의 말씀을 다른 이에게는 성령으로 믿음을 어떤 이에게는 한 성령으로 병 고치는 은사를 어떤 이에게는 능력 행함을 어떤 이에게는 예언함을 어떤 이에게는 영들 분별함을 다른 이에게는 각종 방언 말함을 어떤 이에게는 방언을 통역함을 주시나니”

B. 모든 신자들을 위함
바울은 고린도전서 12장 7절에 “각 사람에게” 은사를 주신 것은 모든 자를 유익하게 하려함이라고 가르쳤다. 이 은사들을 모두 활용하지 않는다면 하나님께서 뜻하시는 바 그대로 모든 신자들에게 유익을 줄 수 없다. 또한 이 9가지 은사는 각 사람에게 주어진다고 가르쳤다.

이 구절을 통하여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은 초자연적인 성령의 권능으로 인하여 모든 신자들을 통해 이 9가지의 은사가 성령의 지시하심을 따라서 역사하게 되며 그렇게 되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C. 은사의 공용(Public Use)에 대한 교훈
각 신자는 함께 모인 모임에서 은사를 활용하게 된다. 마치 두뇌의 지시를 받아서 몸에 붙은 각 지체들이 나름대로 기능을 발휘하는 것과 같이 모든 성도들도 각각 성령의 지시하심을 따라서 은사를 발휘해야 된다.

고전 12:11,12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몸의 지체가 많으나 한 몸임과 같이 그리스도도 그러하니라.”

히 2:4 “하나님도 표적들과 기사들과 여러 가지 능력과 및 자기 뜻을 따라 성령이 나눠주신 것으로써 저희와 함께 증거하셨느니라.”

Ⅱ. 은사로서 사역하는 우리의 동기
우리는 각자가 이 모든 은사들을 마음껏 활용하는 것을 간절하게 아주 열심을 갖고 사모하고 소원해야 하며, 또 우리 자신들을 뽐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모든 교회에 덕을 세우기 위하여 은사를 활용하여 일해야 한다.

고전 14:12 “그러면 너희도 신령한 것을 사모하는 자인즉 교회의 덕 세우기를 위하여 풍성하기를 구하라.”

A. 교회에 덕을 세우기 위함
예수께서는 그가 당신의 교회를 세우리라고 말씀하셨다. 그의 교회는 이들 은사들이 활용되었을 때 세워졌다. 여러 은사에 대하여 무지해서는 안 되고, 우리는 오히려 배우고 은사들을 알고 실습 해보고 그리고 우리 자신들이 각 은사와 모든 은사를 우수하게 활용하는데 까지 우리 자신들을 계속 훈련시켜야 된다.

우리 삶속에서 이 모든 은사들이 최우수하게 활용되도록 간절하게 소원해야 된다. 교회에서나 혹은 일상생활 속에서 누군가 문제를 당했을 때에 문제를 해결해줄 수 있는 가장 좋은 은사를 활용할 수 있도록 간구하고 찾아야 할 것이다.

벧전 4:10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각양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 같이 서로 봉사하라.”

B. 이러한 은사들을 간절하게 사모하라
고전 12:31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또한 제일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이런 은사들을 최우수한 방법으로 활용하려면 고린도전서 13장 말씀대로 믿음, 소망, 사랑 안에 거해야 된다.

C. 하나님의 은사를 불 일듯 하게 하라
딤후 1:6 “그러므로 내가 나의 안수함으로 네 속에 있는 하나님의 은사를 다시 불 일듯 하게 하기 위하여 너로 생각하게 하노니”

롬 1:11 “내가 너희 보기를 심히 원하는 것은 무슨 신령한 은사를 너희에게 나눠주어 너희를 견고케 하려 함이니”

이 은사들은 바울이 디모데에게 안수할 때 전이되어서 그의 삶속에서 역사 했다. 이와 같이 전이된 은사가 불일 듯 일어나는 일은 디모데에게 달렸으며 그 자신의 삶과 사역을 통해서 불이 바람을 타고 활활 붙듯이 역사하게 된다. 이와 같이 우리는 성령 안에서 걷고 살아가게 된다.

갈 5:25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지니”

성령의 기름부으심이란?

Anointing이란?  "머리에 기름(성령)을 부어 거룩하게 하는"이라는 의미를 가집니다. 따라서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님과 함께 쓰여질 때 '성령의 기름부으심'이란 의미가 됩니다

1. 기름부음 받으신 예수님
예수께서 30세가 되셨을 때 요단강으로 나아가 침례요한으로부터 물침례를 받으셨습니다. 이때 하늘 문이 열리면서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임하시어 예수님 위에 머물러 계셨습니다.
 
"예수께서 침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하늘로서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마3:16-17)
 
그후 예수께서는 안식일에 고향인 나사렛으로 가셔서 회당으로 들어가 이사야서 6장 1절을 읽으시면서(눅4:18-19) 이 글이 오늘날 응하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눅4:21).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눅4:18)
 
우리는 이 말씀에서 언급한 성령을 예수께서는 기름부으심으로 말씀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자신이 받은 성령을 기름부으심으로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이러한 기름부으심을 받으므로 말미암아 이사야가 예언한 대로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포로 된 자를 자유케 하는 그리스도로서의 사명을 감당하시게 된 것입니다.

2. 제자들과 성령의 기름부으심
예수께서는 십자가를 앞에 두고 제자들에게 다른 보혜사를 언급하셨습니다요한복음 14장에서 15장은 보혜사 성령의 강림에 대해서 여러 번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말씀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은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자 이 말씀을 잊어버리고 뿔뿔이 이전의 삶으로 돌아가 버립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께서는 이러한 제자들을 찾아다니시면서 자신의 부활을 나타내시면서 성령으로 침례를 받아야 한다고 말씀하셨고 그 후에 하늘로 승천하셨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3년 반 동안이나 함께하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기적과 표적을 보면서도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 앞에서 흩어졌던 제자들이 예수님의 부활과 함께 다시금 예루살렘에 모여서 예수께서 말씀하신 약속을 붙들고 다른 보혜사를 기다립니다. 그리한즉 몇 날이 못되어 마가 다락방에 모였던 120명의 성도들은 성령으로 침례를 받았습니다.
 
이러한 사실에 대해서 베드로는 사도행전 2:33절에서 설교하기를 "하나님이 오른손으로 예수를 높이시매 그가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너희 보고 듣는 이것을 부어 주셨느니라" 라고 했습니다.

성령침례를 받았던 제자들은 완전히 변화되어 있었습니다. 그들은 이제 더 이상 비굴한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 담대한 증인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새롭게 거듭나 있었습니다.
 
성령의 기름부으심이란 믿는 자들에게 부어주시는 성령침례, 성령충만을 말합니다. 곧 예수를 그리스도되게 했던 성령, 비굴했던 제자들을 그리스도인되게 했던 성령충만을 일컬어 성령의 기름부으심이라 합니다.
 
성령의 기름부으심은 예수님의 제자로서 온전한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 오늘의 성도들에게도 필요한 진리인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십자가에 죽으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믿는 너희들이 성령으로 침례를 받으면 "나의 하는 일도 할 수 있을 것이요, 보다 큰 것도 할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요14;12).  예수님의 사역은 가르침, 전파함, 고침을 베푸시는 일입니다. 이러한 사역에는 기름부음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요단강에서 물침례를 받음과 동시에 성령으로 침례를 받으셨던 것입니다.
 
예수님께 임하셨던 이러한 기름부음이 믿는 자들에게 임하면 예수께서 위임하신 사역들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따르는 자들에게는 성령의 기름부으심이 필요합니다. 사역을 감당하기 위해서 기름부음이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영접하므로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은 동일하시나 각자가 받은 기름부음은 다르다 할 수 있습니다. 기름부으심은 개인적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사역을 하지 않아도 그분을 사랑하며, 그분과 함께 걸으며, 규칙적으로 친교를 나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사역의 길로 들어서는 순간 우리는 죄, 질병, 세상, 마귀들과 싸워야 합니다. 기름 부으심이 없으면 결코 승리할 수 없습니다.
 
우리들 자신의 직분에 좋은 역할을 하려 한다면 거기에는 기름부음이 있어야 합니다. 기름부음은 더욱 강해질 수 있고, 증가될 수도 있습니다. 반대로 우리들 자신이 기름부음을 축소시키거나 약화시킬 수도 있습니다.
 
"우리를 너희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견고케 하시고 우리에게 기름을 부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저가 또한 우리에게 인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 마음에 주셨느니라"(고후1:21)
    
"너희는 거룩하신 자에게서 기름 부음을 받고 모든 것을 아느니라"(요일2:20)
 
"너희는 주께 받은 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요일2:27)
 
우리에게 기름부으심이 임할 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게 될 것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이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그리스도로 영접할 때 예수님은 우리의 죄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제사장이 되시며,  우리 안에 들어오시므로 사탄의 권세를 결박하시는 우리의 왕이 되시며,  구원에 대해서 무능한 우리에게 구원의 길이 되신 선지자가 되십니다(요14:6).

그러나 하나님께서 예수 이름으로 우리에게 성령으로 기름 부어 주실 때,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우리가 더욱 확신하게 되며(요20:31),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를 수가 있습니다(엡4:13).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케 되고(빌1:20), 제사장, 왕, 선지자적인 권능이 나타나며 증인이 됩니다(행1:8). 성령의 은사와 열매들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영광이 드러날 것입니다(요14:26).
 
"그가 내게 일러 가로되 여호와께서 스룹바벨에게 하신 말씀이 이러하니라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신으로 되느니라"(슥4:6)
 
우리는 하나님의 성령과 관련지어서 힘과 능력을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힘과 능'이라 하신 것은 인간의 힘을 일컫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스룹바벨에게 하신 말씀은 "전쟁을 이기게 함은 군대의 힘이 아니라 나의 신(성령)으로 되어지느니라"고 하신 것입니다. 승리를 얻는 것은 하나님의 성령으로 되어지는 것이지 인간의 손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 날에 그의 무거운 짐이 네 어깨에서 떠나고 그의 멍에가 네 목에서 벗어지되 기름진 까닭에 멍에가 부러지리라."(사10:27)
 
"기름진 까닭에"란 말씀은 "기름부음 때문에"란 말씀입니다. 가끔 위의 구절을 바꾸어서 "그 멍에를 부러지게 하는 것은 기름부음이니라"고 말하기도 하는데 이것은 "기름부음 때문에 멍에가 부러지리라"는 말씀과 완전히 똑같은 의미입니다.
 
"이러한 일은 우리의 삶에서나 목회사역에서 똑같이 해당되는 진실인 것입니다. 즉 병마로 인한 멍에나 마귀가 우리에게 씌워 주는 모든 멍에는 기름부음을 받음으로 모두 깨뜨려질 것입니다.
 
구약에서의 기름 부으심은 히브리어 '미세하', '마세하'로 '기름붓다'는 동사 '마사흐'에서 나온 말입니다.

이 '마사흐'가 구약에 어떻게 사용되었는지 그 범위는 집을 새롭게 단장하거나 기름으로 덧입히는 경우에 기름을 부었습니다(민6:16, 사21:5). 또한 성별, 헌신, 성화시키는 행위로서 기름을 부었습니다. 예언자로서(왕상19:16), 왕으로서(삼상9:16, 왕상1:39, 왕하11:12), 제사장으로서(출28:41, 레4:3), 거룩한 것들에(창31:13, 민7:1, 출29:36) 기름을 부었습니다.
 
신약에서는 예수께서 기름 부음 받으시고 또한 믿는 자들에게 기름 부어주셨고 지금도 기름붓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기름부음 받은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 믿는 자들도 더욱 성령의 기름부으심을 받아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온전한 사명을 감당해야 할 것입니다.

빛도 비추이고 시력도 받아야 한다 - A.W 토저

길을 찾기 위해서는 빛만 있어서는 안 된다. 빛과 함께 볼 줄 아는 시력도 필요하다. 성경은 도덕적이고 영적인 빛의 근원이다. 시편 기자는 "당신의 말씀에 들어감이 빛이니이다",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길에 빛이니이다"라고 말하였다.

나는 성경이 처음 주어질 때 완전하게 영감되었다는 것을 믿고 다음과 같은 찬송가를 부를 수 있었다. 우리는 신성한 말씀 속에서 비치는 빛을 찬양하네. 이는 우리 발자취의 등불이 되고 그 등불은 온 세대를 비춘다네.

"빛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이 말은 신성한 말씀을 비난하거나, 또는 말씀에 오점이 있다고 지적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빛 자체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말을 하고 싶었을 뿐이다.

빛은 성경에서 간혹 교사들이"지식"을 말할 때 사용했다. 그래서 무지한 사람들을 이야기할 때 "어둠 속에 있다"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지식이 오는 것은 태양이 떠오르는 것과 같다. 그러나 아침 해가 떠오르더라도 그것을 보는 눈이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 시력이 있는 사람만이 태양에서 오는 빛을 이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빛과 시력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 어떤 사람은 시력이 없기 때문에 빛을 누릴 수가 없다. 바로 맹인이다. 한편 어떤 사람은 빛은 없으면서도 시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있다. 이런 사람은 일시적인 소경이라 할 수 있지만, 언제든 빛만 비추면 곧 볼 수 있게 된다. 예를 들어 빌립보에 있던 간수장은 좋은 시력을 가지고 있었으나 빛이 없었기 때문에 바울을 알아보지 못했다. 반면 삼손에게는 별빛과 달빛과 햇빛이 모두 있었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블레셋 사람들이 삼손의 눈을 멀게 했기 때문이다.

이처럼 시력이 없는 사람은 언제나 밤과 같이 생활하지만, 시력이 있는 사람은 전등만 준비하면 언제나 낮과 같이 생활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것들이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는 무엇일까? 간단히 말해, 종교적인 교훈이 아무리 건전하다 하더라도 그 자체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것이다. 즉 종교적인 교훈이 빛이 되어 줄 수는 있지만, 그렇다고 시력을 회복시켜 주는 것은 아니라는 뜻이다.

성령의 비추심이 없는 말씀만으로는 죄인들을 구원할 수가 없다. 다시 말해, 진리가 없는 구원은 불가능하지만, 구원이 없는 진리는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교리 문답은 정성스럽게 배우면서도 내적 조명이 없었기 때문에 아직도 도덕적으로 어둠 속에서 방황하고 있는 것이다.

빛과 시력이 같은 뜻이라고 생각하는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지금도 이런 비극 속으로 들어가고 있다. 눈먼 사람도 닫힌 눈꺼풀을 열고 아름다운 풍경 쪽으로 시선을 둘 수는 있으나 실제로 그의 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눈먼 마음이 구원하는 진리를 들을 수는 있으나, 그는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한다. 바리새인들은 3년 동안이나 직접 "세상의 빛 되신 이"를 보았다. 그러나 그 빛의 어떤 빛줄기도 그들의 존재 속으로 들어가지 못했다. 빛 자체만으로는 충분하지 못한 것이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성경을 통해 배웠다. 예수님이 직접 모세와 선지자들과 시편 기자들의 말을 가르쳤지만 제자들이 진리를 파악하고 깨닫기 위해서는 먼저 그들의 내면이 "열려야"했다.

"이에 저희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시고"(눅 24:45). 바울이 빌립보에서 전도할 때 하나님을 공경하는 루디아라는 한 여인이 말씀을 듣고, 믿고, 세례를 받은 후에 즉시 자기 집을 바울에게 내놓았다. 한 절 말씀으로 아주 간단하게 이 모든 일을 설명하고 있다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행 16:14). 루디아는 빛뿐만 아니라 시력도 받았던 것이다.

바울 사도는 이 사실을 대단히 일찍 깨닫고서 "모든 사람이 다 믿음을 가진 것이 아니다"라는 말을 하기도 했다. 그는 왜 그렇게 되는지 그 이유를 알고 있었던 것이다.

"만일 우리 복음이 가리웠으면 망하는 자들에게 가리운 것이라 그 중에 이 세상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고후 4:3~4)

사탄은 사람들이 보는 능력이 없을 때는 빛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깨닫지 못하는 머리로는 아무리 진리를 접한다 하더라도 아무런 영향을 받지 못하기 때문이다. 물론 지적인 사람은 구원의 진리를 파악할 수도 있다. 그러나 보는 능력이 없다면 구원의 진리를 파악했더라도 도덕적으로 그 어떤 반응도 나타내지 못한다.

이러한 문제에 대한 고전적인 예를 벤저민 프랭클린과 조지 휫필드의 이야기에서 찾아볼 수 있다. 프랭클린은 그의 자서전에서 자신이 능력 있는 부흥사의 설교를 어떻게 듣고 있었는지 상세하게 기록해 두었다.

프랭클린 은 휫필드가 자신의 목소리가 얼마나 멀리까지 들리는지 알아보기 위해 서 있던 광장 주위에서 서성였다. 휫필드는 프랭클린에게 개별적으로 그리스도가 필요하다는 사실에 관하여 이야기해 주고 그를 위해서 기도해 줄 것을 약속했다. 그러나 수년후에 프랭클린은 그 부흥사에게 "당신이 해 준 기도는 아직도 내게 별 효험이 없습니다"라는 슬픈 소식을 전했다.

그때까지 프랭클린은 회심하지 못했던 것이다. 프랭클린이 지적으로 얼마나 명민한 사람인지는 누구나 다 알 것이다. 뿐만 아니라 휫필드도 프랭클린에게 진리 전체를 잘 전달했다. 그러나 프랭클린에게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프랭클린은 빛은 있었지만 시력은 얻지 못했던 것이다. 시력이 없이는 결코 "세상의 빛"을 볼 수 없다. 세상의 빛을 보기 위해서는 반드시 내면에 성령의 역사가 나타나야 한다. 그러나 벤저민 프랭클린은 아직 그것을 받지 못했던 것이다.

구원에 이르는 믿음이 되려면 성령의 내적 역사가 필요하다. 복음은 빛이다. 그러나 성령만이 시력을 주실 수 있다. 때문에 우리가 잃어버린 자를 그리스도 앞으로 인도하려고 할 때는 그들이 빛을 볼 수 있는 시력도 허락해 달라고 기도해야 한다. 아울러 사람들의 마음을 어둡게 만드는 어둠의 영들에 대항해서도 기도해야 한다.

<능력:거듭난자의삶에드러나는것중에서...>

5/26/2011

기쁨의 생활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하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16:13)


기쁨은 인간으로 하여금 큰 일을 성취하게 하는 원동력이 됩니다. 그래서 자기의 적성에 맞는 직업을 갖고 그 직업 속에서 기쁨을 얻으면 지칠 줄 모르는 능력을 발휘하게 됩니다. 그러나 싫은 일을 억지로 계속하면 곧 피곤하고 지치게 됩니다. 그러면 우리 기독교인들은 어떠한 생활을 해야 할까요?
 먼저 우리는 참된 기쁨을 추구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은 자원이 고갈되어 군인들에게 톱밥으로 만든 빵을 먹였습니다. 톱밥 빵은 겉으로 보기에는 밀로 만든 빵과 다를 바가 없었지만 아무 영양가가 없기 때문에 이 빵을 먹은 군인들은 영양실조에 걸려서 쓰러지기 시작하였습니다.
이 세상에서 얻는 기쁨은 마치 톱밥 빵을 먹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육체적인 향락에서 얻는 즐거움이나, 물질적으로 얻어지는 만족, 그리고 명예나 권세 때문에 얻게 되는 기쁨은 얼마 있지 않아 사라지고 오히려 나중에는 극심한 후유증만 남는 경우가 많은 것입니다.

또한 우리는 건전한 생활의 기쁨을 소유해야 합니다.
 개인적인 생활에서의 기쁨을 얻기 위해서는 여가를 선용할 수 있는 건전한 취미를 가져야 합니다. 기쁨이란 기계에 기름을 치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가정이나 사업에 얽매여 최소한의 기쁨마저 포기한다면, 결국에는 엄청난 스트레스로 쓰러지고 말 것입니다.
 기쁨은 우리 삶에 있어서 부수적인 것이 아니라 근본적인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항상 건전한 생활의 윤활유가 되는 기쁨을 소유하기 위해 노력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나아가 우리는 예수님을 영접함으로 영원한 기쁨을 소유해야 합니다.

예수님 안에서 얻는 영원한 기쁨은 세상이 주는 기쁨과 전혀 다른 기쁨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14:6)고 말씀하셨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영접함을 분명히 깨닫게 됨으로 얻어지는 기쁨입니다. 또한 예수님 안에서 얻는 영원한 기쁨은 우리가 주님의 계명을 지킴으로 얻게 되는 기쁨입니다.
 요한복음 15장10절로 11절에 예수님께서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서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 기쁨을 알지도 깨닫지도 못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마음에 모신 우리는 이 영원한 기쁨이 마음에 넘치므로 항상 기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빌립보서 4:4)

폭풍 속의 목소리 - 프랜시스 프랜지팬

우리를 새로운 권위와 축복으로 인도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우리 과거의 경험들로부터 우리를 해방시켜야만 하는 때가 있다.  하나님은 지나가시는데, 바람 가운데서도 지진 가운데에도 불 가운 데에에도 계시지 아니하였다.  사실, 이러한 것들은 엘리야에게 익숙한 것들이었다.

이러한 웅장한 일들을 일으키셨던 하나님이 그러한 것들 안에 계시지 않았다. 엘리야에게 있어서, 웅장한 그러한 표시들은 하나님께서 인정하신다는 표적들이었다. 하지만, 살아 계신 하나님께 신선한 복종을 요구하는 새로운 어떤 것이 가까이에 있었다.

갑절의 능력이 오고 있었다! 이러한 새로운 기름부음의 독특한 특징이 초자연적 징후들에서 뿐만 아니라, 더 커다란 지혜와 자비 안에서 보여질 것이다.

엘리야를 따라 다녔던 지진과 불과 폭풍과 같은 것들은 또한 우리 시대의 현상들이기도 하다. 하지만, 갑절의 능력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서 우리는 우리의 관심의 사로잡는 " 지진''  이나 "폭풍" 이 없을 때에도 하나님의 근접성을 인식하는 것을 배워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 분과의 더 심화된 관계 안으로 들어오기를 원하신다.  이러한 심화된 관계는 단지 영적인 현상들이나 우리 시대의 문제들에 기초한 것이 아니라, 그의 사랑과 말씀의 속삭임에 기초한 것이다.

마지막 현상 후에, " 세미한 소리(속삭임)" 이 있었다. 엘리야는 이 거룩한 고요함을 인식했다. 하나님의 임재가 돌아오고 있었다.  엘리야는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기 위해서 " 겉옷으로 얼굴을 가리웠다"  아마도 500년 전에 하나님께서 지나가실 때에 모세가 숨었던 곳이 이 근처가 아닌가 싶다.

이제  엘리야의 차례였다. 하나님께서 이 영원한 침묵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우리 또한 우리 귀로 들을 수 있도록 좀처럼 말씀하시지 않는 분의 음성을 듣는 방법과, 보이지 않는 분의  움직임들을 관찰하는 방법들을 배워야 한다. 엘리야는 모세가 바로의 분노를 직면과 것과 똑같은 식으로 이세벨의 저주를 이겨낼 용기를 얻게 되었다. 모세는 " 보이지 아니 하는 자를 보는 것 같이 하여 참았다" (히11:27) 우리는 큰 표적들 없이도 하나님의 세미하고도 작은 음성을 듣는 법을 배워야 한다.

그 분의 우리의 주의를 끌기 위해서 분투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그 분을 찾아야 한다. 그 분은 우리를 깜짝 놀라게 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그 분을 지각해야 한다. 지진이나 불이나 폭풍을 "분별하기" 위해서는 특별한 기교가 필요하지 않다.

하지만 , 하나님의 거룩한 고요함을 의식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다른 활동들이 멈추어져야 한다. 압력이 심하고 계속해서 우리를 산만하게 하는 일들이 많은 우리 세상 속에서, 우리의 마음은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는 보이지 않는 세상으로 올라가야 한다.

우리는 보이지 않는 분을 보는 법을 배워야 한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너는 나가서 여호와의 앞에서 산에 섰으라 하시더니 여호와께서 지나가시는데 여호와의 앞에 크고 강한 바람이 산을 가르고 바위를 부수나 바람 가운데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며 바람 후에 지진이 있으나 지진 가운데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며 또 지진 후에 불이 있으나 불 가운데도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더니 불 후에 세미한 소리가 있는지라  (왕상19:11-12)

기도할때 생기는 7가지의 능력

1. 하늘의 보좌와 직접 통할 수 있는 능력
하나님께서는 하늘 보좌 위에 계시지만 우리는 기도를 통해 하나님께서 계신 곳에 천사나 천사장과같이 즉시 나아갈 수 있다.

2. 하나님과 협력할 수 있는 능력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절대적인 목적 중 많은 것을 일부러 우리의 도움을 힘입어 성취하시는 방법을 택하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협력할 수 있는 자유와 특권과 공적인 지위를 소유하고 있습니다.

3. 사탄에 대항하여 이길 수 있는 능력
기도는 사탄의 계획을 무효화 시킬 수 있으며 사탄의 세력이 공격해 와도 능히 견뎌내게 합니다.

4. 자연 법칙을 초월할 수 있는 능력 
기도는 "자연 법칙"을 초월할 수 있습니다. 기도는 인간이 절체절명의 위기에 놓여 있을 때 하나님의 기적적인 응답을 불러일으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5. 천사들의 도움을 받을 수 있는 능력
우리가 하나님께서 권면 하시는대로 우리의 임무를 다하고 기도하면, 하나님은 자녀들을 보호하시기 위해 기쁜 마음으로 역사 하십니다.

6. 산을 옮길 수 있는 능력 
하나님께서는 그 분의 자녀들이 어려움이라는 산들에 직면했을 때 그 산들을 옮기기를 기대하십니다. 단, 산들을 움직이는 일들은 오랜 기간 동안의 기도와 금식을 필요로 한다는 사실을 말씀 하셨습니다.

7. 축복할 능력
기도는 축복에 이르는 정도이며 남에게 축복을 베풀 수 있는 최대의 수단으로 남을 축복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입니다.

당신의 전쟁은 주님께 속한 것입니다. (역대하 30:15 참조)

내가 이 글을 쓰는 이유는 당신이 당면하고 있는 전투가 당신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이라는 것을 상기시켜 주기 위해서입니다. 만일 당신이 하나님의 자녀라면 사탄이 "당신에게 크게 분낼” 것이라는 것을 확신해도 됩니다.

역대하 20장에서 엄청난 대군이 하나님의 백성을 대적해서 왔습니다. 여호사밧왕과 그의 백성들은 주님을 구하고 금식하기로 결심했습니다. 왕은 우리의 영적 여정에서 우리들 대부분이 한 때 기도드렸던 기도를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우리를 치러 오는 이 큰 무리를 우리가 대적할 능력이 없고 어떻게 할 줄도 알지 못하옵고 오직 주만 바라보나이다”(20:12).

“여호와의 영이 회중 가운데에서 ....임하셨으니....말씀하시기를 너희는.....두려워하거나 놀라지 말라 ] 이 전쟁은 너희에게 속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라”(29:14-15).

이사야는 사탄의 전 세력들에게 이 경고를 했습니다.
“네가 훼방하며 능욕한 것은 누구에게냐 네가 소리를 높이며 눈을 높이 들어 향한 것은 누구에게냐I 곧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에게니라”(사 37:23).

하나님은 그분의 백성 이스라엘에게 말씀하셨고 오늘날 우리에게도 말씀하십니다. “이 전쟁은 네게 대항한 것이 아니다. 네 안에 거하는 주, 나에게 대해 사탄이 분을 낸 것이다.

하나님은 사탄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네 거처와 네 출입과 네가 나를 거슬러 분노함을 내가 아노라“(37:28).

당신에게 묻습니다. 당신의 전쟁은 어디에 있습니까? 당신의 결혼 생활입니까?
사업이나 직장입니까? 재정입니까? 건강입니까? 당신의 전쟁이 날이 갈수록 심해집니까?
당신이 예수님을 향한 마음이 있고 그분께 붙어 있고자 원한다면 지옥의 분노를 직면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도 당신께 속한 전쟁이 아닙니다.
당신이 선택한다면 당신의 전쟁을 속히 끝낼 수 있습니다.
그저 그만두고 당신의 두려움과 의심에 항복하면 됩니다.
사탄은 주님에 대한 확신을 저버리는 사람을 더 이상 괴롭히지 않습니다.

그렇습니다. 전쟁은 주님께 속한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역할이 있습니다. 그것은 소망이 없고 불가능한 듯 보이는 것의 면전에서 그분의 약속을 신뢰하고 믿는 것입니다.

“야곱아 어찌하여 네가 말하며 이스라엘아 네가 이르기를 내 길은 여호와께 숨겨졌으며 내 송사는 내 하나님에게서 벗어난다 하느냐”(사 40:27).
믿음은 내가 나의 모든 문제들, 즉 나의 모든 위기 상황들, 모든 두려움, 모든 불안들을 주님의 손안에 넘겨드릴 것을 요구합니다.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했고 나의 전쟁이 내 능력 밖에 있는 것을 알 때, 나는 모든 것은 그분의 손안에 기탁해야 합니다.

우리의 주님은 사탄의 분노를 알고 계시며 우리는 그분이 일하실 것을 진정으로 믿어야만 합니다.
그분이 우리를 홍수들과 불들을 통과하여 나오게 하시고 모든 영적 원수를 쫓아내실 것입니다. 그분이 하실 일에 관한 하나님의 말씀이 여기 있습니다.

“네가 나를 거슬러 분노함과 네 오만함이 내 귀에 들렸으므로 내가 갈고리로 네 코를 꿰며 재갈을 네 입에 물려 너를 오던 길로 돌아가게 하리라”(사 37:29).

당신이 그분을 신뢰하고, 그분의 약속 안에 안식하며, 당신 마음속에 침입하는 모든 사탄의 거짓말을 거부하며 당신의 믿음을 굳게 붙든다면, 하나님이 그분의 영으로 당신의 상황 가운데 오셔서 당신의 특정한 전쟁에 대해 기대하던 결말을 가져오실 것이라고 기대하십시오.

그분은 당신을 구원하고 길을 내기 위해 하늘과 땅을 움직이실 것입니다.
벗어나는 길은 신뢰, 신뢰, 신뢰하는 것입니다. “그가....전쟁을 쉬게 하심이여”(시 46:9).

5/25/2011

순결해야 하는 원인은 ....

1) 하나님의 명령.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 곧 음란을 버리고 각각 거룩함과 존귀함으로 자기의 아내 대할 줄을 알고(살전4:3,4),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따르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 (히12:14)

* 거룩이란 무슨 뜻인가
거룩은 히브리어로 '코데쉬'인데, 성전이라는 뜻도 있으며, 원래는 거룩하다라고 하는 형용사적 성질을 가지는 상태 동사인 '카다쉬'에서 유래한 말이다. '카다쉬'의 기본적 의미는 구별하거나 분리하는 것이다. 거룩구별이라는 어원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신적 속성을 피조물의 속된 것과 구별하여야 함을 뜻하는 것이다. 

그런데 아이러니한 것은 속된 것 중에서도 속되다고 할 수 있는 창기란 뜻의 히브리어 '케데솨' 역시 '카다쉬'에서 유래하였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은 레 19:2의 너는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고하여 이르라 너희는 거룩하라 나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 거룩함이니라라는 말씀을 통해 당신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본받아 거룩하여 질 것을 명령하셨다. 

이제 거룩이라는 하나님의 대표적 속성이 하나님의 백성에게까지 확대됨으로써 거룩은 의와 정결과 지선을 주로 뜻하게 된 것이다.

거룩한이라는 뜻의 히브리어 코데쉬는 헬라어로는 '하기오스'이다. 한편 거룩이라는 명사 형태가 되면 '하기오스모스'이며, 이는 모두 거룩하게 하다라는 뜻의 동사인 '하기아조'에서 파생된 말이다. 거룩한이라는 표현 즉 하기오스는 하나님께 제일 먼저 사용되었다. 

그런데 신약에서는 삼위 일체의 하나님이 계시되었으므로 아버지 하나님과 아들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하나님의 영 모두에게 하기오스를 붙여서 삼위 하나님의 대표적 속성이 하기오스모스라는 것을 알려주고 있다. 

한편 하나님께서 구약을 통해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요구하셨던 거룩하라는 명령은 신약에 와서는 하나님의 백성이며 하나님의 자녀된 자들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여 한 몸을 이루는 지체가 되므로 요구 사항이 아니라 필수 요건으로 된 것이다.

교회는 그리스도를 머리로 지체된 그리스도인들이 한 영으로 연합하여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으로 지어져 가는 존재이므로 거룩함을 유지하여야 함은 당연한 것이다. 그래서 베드로 사도는 벧전 2:9에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에서 교회를 거룩한 나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교회는 그리스도인 한 사람 한 사람이 모여서 된 것이므로 각 개인에게는 거룩함이 요구된다. 성도는 헬라어로 하기오스인데 하기오스는 거룩한이라는 뜻의 남성 형용사이지만 형용사가 독립적으로 사용되면 명사처럼 쓰이므로 성도라는 뜻이 되었다.

히 2:11에 보면 거룩하게 하시는 자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이 다 하나에서 난지라 그러므로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 아니하시고에서 주님은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는 분이며, 우리는 주님으로 말미암아 거룩함을 입게된 자들이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우리가 거룩하게 된 것은 히 10:10 의 이 뜻을 좇아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에서 주님의 죽으심 때문이다.

그러므로 주님으로 말미암아 거룩함을 입게된 우리는 롬 12:1 에서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라는 말씀대로 우리의 삶 자체를 거룩한 산 제사로 하나님께 드리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구약에서는 제물과 제사드리는 사람이 서로 달랐지만 신약에서는 제사드리는 자가 바로 제물이 되는 것이다

2) 거룩을 떠나 정욕적인 삶은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어긋나는 것들로서 마귀로부터 오는 것들이다. 이것들은 심지어 우리의 부패한 본성과도 어긋나는데, 그 이유는 그것들이 부패하였고 하나님과의 일치성을 망가뜨리기 때문이다. 심지어 인간의 부패한 본성조차도 이것들에게서 움츠러들고 혐오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근치상간, 동성연애, 성정체성의 혼돈을 조장함 등등.....

3) 하나님을 사랑하는 선한 사람들은 부패한 성향인 정욕을 탐닉하지 않고 저향하며, 그리하여 모든 기회들을 끊어내어 그들의 양심이 어려움을 당하지 않는다. 그들이 하나님께 간구하며, 저항할수 있는 은혜를 구하며, 그들의 마음에 그들의 죄들이 은혜로 용서함 받았다는 증거가 있기 때문이다. 이런 죄들에 대한 치유책으로 하나님의 의도에 의하여 결혼이 제정되었다. 정욕이 불같이 타는 것보다 결혼하는 것이 나으니라(고전7:9)

4)정숙: 이것은 부정한 모든 것을 혐오하는 것에, 과거에 부정했던 우리의 삶에대한, 혹은 미래의 부정함에 대한 두려움에서 오는 부끄러움과 안타까움이 결합된 덕이다. 이는 또한 부정 그 자체만이 아니라 그것에로 이어지는 모든 것을 피하고자하는 간절한 마음과 의도를 지닌다. 헬라인들은 이것을 아이도스라 하는데 아리스토텔레스는 이것을 불명예에 대한 두려움이라 정의한다.

5) 절제 : 절제가 없이는 순결한 삶을 유지할 수 없기 때문에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그렇지 않으면 방탕함과 술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지고 뜻밖에 그 날이 덫과 같이 저희에게 임하리라 (눅21:34),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엡5:18) ,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 음란하거나 호색하지 말며 다투거나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롬13:13,14) 절제와 반대되는 것들은 무절제, 사치, 지나친 절제 등등이 있다.

하나님의 임재에 흠뻑 젖기 - 존 아놋

94년 1월 성령님이 우리에게 오신 이후로 우리는 하나님의 임재로 흠뻑 젖어 있습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의 임재로 흠뻑 젖음으로 말미암아 그들의 마음이 크게 변화 되는 경험을 했습니다. 결혼 생활이 회복되고, 두려움이 물러가고, 우울증과 병들이 떠나가는 등 삶이 변화 되었습니다.

흠뻑 젖는것이 무엇인가? BUT What is "Soaking"?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 흠뻑 젖는 것은 기도하면서 무언가 얻기를 애쓰기 보다 하나님의 사랑안에서 안식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만지심을 받으면서 실제적인 성령의 임재와 연결이 되기 시작합니다. 사람들은 때로 앉거나 혹은 단순히 바닥에 눕는 반응을 보이기도합니다.

기대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 쉴때 성령님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더 많은 사랑을 나타내시고 각 사람을 치유하시고 새롭게 하십니다. 신자들이 하나님의 임재에 흠뻑 젖었을 때 주님은 사람들의 주의를 성경 말씀을 통해서든, 내적 음성이나 마음의 눈을 통해 보이는 그림들로 이끄십니다.

캐롤은 임재에 젖는 것을 오이 피클 만드는 것에 비유하기를 좋아합니다. 그리스어 bapto, 곧 살짝 담드다 , 그리고 baptidzo, 곧 푹 담그다라는 뜻입니다. 피클을 만드는 것을 예로 든다면, 생야채를 데치기 위해, 오이를 소독하기 위해 끓는 물에 살짝 담구는 조리법인데  bapto라는 단어는 살짝 담구었다 빼는 것이고 오이를 푹 담그는 것은 baptidzo라는 단어를 써서 소금 물에 절이고 몇주를 두는 것입니다.

이 몇주의 시간 동안 피클의 맛이 만들어지기까지 오이 깊숙히 맛이 배어 들어가게 되어 더 이상의 생오이의 맛이 나지 않게 됩니다. 성령의 임재에 담구어지게 되고, 하나님의 생수의 강에 흠뻑 젖게 되면 과거의 당신, 그대로의 성품이 아닌 예전의 'taste' 맛이 아닙니다. 그리고 당신은 성령으로 채워진 'taste' 맛이 되는 것입니다.

"Pickle us, Lord! 적셔지게 해주세요 주님! 성령으로 적셔주셔서 점점 더 주님을 닮아갈수 있도록 당신의 위대한 임재로 흠뻑 젖게 해주세요"

왜 흠뻑 잠기는것이 필요한가? Why do we need to soak?
토론토에서 모든 모임의 마지막은 임재에 젖는 기도 시간으로 마치게됩니다. 우리 사역팀이 " 주님, 오셔서 주님의 임재로 채워주소서, 당신의 더 많은 사랑을 부으소서"라고  서 있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며 사역합니다. 그들은 서 있기도 하고 때로는 쓰러지기도 하면서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 안식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우리들의 모임에서 이런 현상들을 경험하기 때문에 우리는 'catcher'를 준비해 기도 받는 사람들 뒤에서 돕도록 합니다. 이러므로 기도할 때 쓰러지는 것에 대해 덜 염려하게 되고 편안히 기도 받을 수 있도록 허락합니다. 흠뻑 젖는 기도는 또한 당신의 집에서도 가능합니다. 혼자 혹은 배우자와 자녀들과 또는 몇몇의 친구들을 초대하여 차례를 바꿔가며 기도할 수 있습니다.

우리 TACF 사역자 중의 한 사람인 steve long은 처음으로 집에서 혼자 흠뻑 젖는 임재의 기도를 시작한 사람입니다. CD를 틀어 놓고 누워서 친밀한 찬양으로 아름답고 새로운 시간을 주님과 함께하는 것입니다.

Jeff Metzger라는 오하이오 아크론에서 온 사역자는 7년 이상을 "Soaking Prayer 흠뻑 젖는 기도" 모임을 해오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자유롭게 오고 가고 기뻐하며 조용히 바닥에 누워 평안히 생기를 얻는 시간을 주님과 함께 경험합니다. 많은 삶의 변화들이 Jeff의 집에서 참여한 흠뻑 젖는 기도 시간을 통하여 생겨났습니다.

어떻게 흠뻑 젖을 수 있나? How do I Soak?
바닥에 눕지 않더라고 앉거나 침대에 누워서든 중요한것은 안전해서 넘어질 수도 있는 장소라야 합니다. 당신의 애정을 예수님께 고정하고, 친밀한 찬양으로 의미있는 음악을 들으면서 나의 영이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갈 수 있도록 돕습니다.

당신이 십자가를 깊게 생각하고 예수님께서 당신을 사신 그 사랑을 생각할때 당신의 죄를 자백하기 시작하고 예수님께 가까이 가기를 갈망할 것입니다. 조금 뒤 당신은 성령님의 보이지 않는 임재를 알게 될 것이고 사람들은 몸에 무게가 느껴진다거나, 몸에 전기가 오는 듯한 진동이 오거나 따뜻한 사랑의 기운을 느끼는 등 여러 방법으로 체험하면서 하나님께 연결됩니다.

바로 이런 만남을 통해 묶여지고 하나가 되어 사랑이 자라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만이 합리적인 방법은 아니지만 당신의 마음은 반드시 하나로 연결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는 것은 당신을 당신의 온 마음과 영으로 주님을 사랑하게 해줍니다.

마22:37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렇게 기도하십시오 " 주 예수님. 당신을 경배합니다. 나의 주인이 되어주세요. 당신을 초대합니다. 오셔서 나의 마음을 채워주세요. 가까이 와주시고 당신의 사랑을 알게 해주세요."

마음이 산란해지면 다시 예수님께 초점 맞추고 왜 이 찬양을 들으며 흠뻑 젖어야 하는지를 상기시키십시오.

성령님이 일하시는것을 믿을수 있나요? Can I trust that It is holy sprit working?
물론 그렇습니다. 명심하십시오. 하나님께 받은 모든 것들은 우리가 믿음으로 받는 것입니다. 믿음은 반드시 긍정적이여야 하며 하나님께 초점 맞춘것이라야 합니다. (부정적이거나, 두려움이나, 적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닌)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눅11:11-13 너희 중에 아버지 된 자로서 누가 아들이 생선을 달라 하는데 생선 대신에 뱀을 주며 알을 달라 하는데 전갈을 주겠느냐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

키는 바로 친밀감입니다. 이것은 프로그램을 운영하거나 관리하는 것이 아니라 유지하기 위한 관계입니다.

얼마나 오래 잠겨야하나? How long do I continue Soaking?
예수님이 안식의 주인이시고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그의 쉼으로 들어오기를 원하십니다. 성령의 열매는 사랑, 희락과 화평이니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소중한 시간을 주님과 보내야합니다. 억지로나 서둘러서는 안됩니다. 이 아이디어는 무엇을 얻느냐가 아니고 누군가와 함께 하는 것입니다.

시간을 갖고 주님과 함께하므로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이 당신을 사랑하게 하십시오. 만약 잠이 든다면 그것도 괜찮습니다. 방해 받았다면 언제라도 다시 시작하십시오. 당신은 당신의 시간이 언제 끝나는지 알게 될 것입니다. 마음에 만족감을 가질 것이고 삶속으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이 흠뻑 젖는 기도 시간 중에 때로 사람들은 감정적이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마음 깊은 곳을 만지시기를 원하십니다. 드러내고 싶지 않아 마음내키지 않는 오래전의 상처들을 주님은 방문하셔서 자유케하시고 두려움이나 아픔으로부터 치유하시기를 원하십니다. 이럴때 동역자나 경험있는 사역자들이 한 자리에 함께 해서 그들이 당신을 사랑하고 안심시켜서 믿음으로 이 상처들로 가까이 갈 수 있도록 도울 수 있습니다.

집에서 흠뻑젖는 기도 센터의 시작 Starting a Home Soaking center
나는 수백의 성령의 불을 잡는 " 주님의 임재에 흠뻑 젖는 기도 센터(Soaking Center)"가 북미와 전 세계에 생기는 것을 보길 원합니다. 이것은 생수의 강에 배고파하고 더 많은 주님의 임재를 원해 더 깊이 주님과 친밀해지기를 원하는 사람들을 위한 기회입니다. 프로그램을 갖는 것 없이 하나님과의 소중한 시간을 보내는 것입니다.

예수님께 초점을 맞춤으로 우리의 삶이 진정으로 변화되는 시간입니다.

푯대를 향하여 나아가자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14:26)



우리가 뒤엣 것을 잊어버리면 이제는 가벼운 마음으로 푯대를 향하여 뛰어 나가야 합니다.새날을 살아가는 우리 생활의 성공과 실패는 우리가 어떤 목표를 가지고 살아가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목표를 세울 수가 있을까요?
간절한 기도 중에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아야 합니다.
나의 탐욕과 정욕으로 과분한 목표를 세운다고 다 성취되는 것은 아닙니다목표에는 반드시 시한에 붙어야 합니다무엇을 언제까지 어떻게 하겠다는 분명한 계획이 있어야 합니다.
다음으로 목표에 대한 강렬한 소원을 가져야 합니다.
욕망과 의욕을 잃어버린 사람은 창조적인 일을 할 수가 없습니다그러므로 푯대를 설정해 놓은 다음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푯대에 도달하겠다는 뜨거운 욕망을 가지고 여러분께서 목표 속에 들어가 그 속에서 호흡하고 생활하여야 목표에 도달하게 됩니다목표에 도달한 여러분의 모습을 상상하고 마음에 기쁨을 느낄 때 목표에 도달할 수 있는 기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마음 속에 신념이 생기도록 기도하여야 합니다.
소원을 가지고 주님께 주야로 부르짖어 기도하기 시작하면 어느 시점에 와서는 마음 속에 평안이 다가올 것입니다하나님께서 주시는 마음의 확신은 언제나 평안으로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다음으로 실패를 두려워하지 말아야 됩니다.
목표를 향하여 나아가는 사람에게는 반드시 실패가 다가오게 됩니다그러나 실패는 여러분의 뼈마디를 굵게 하여 신앙 인격을 자라게 할 것입니다실패는 여러분에게 축복을 싣고 오는 수레바퀴라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수레가 오면 바퀴 소리가 요란하고 먼지가 나고 시끄럽지만 수레 위에는 축복의 보화가 있는 것입니다그러므로 어떤 실패가 다가오더라도 감사하십시오감사는 실패와 고난을 넘게 하는 지렛대입니다.
또한 우리는 완전히 주님께 의지하여야 합니다.
항상 기뻐하고 쉬지 말고 기도하고 범사에 감사하는 가운데 순간순간을 하나님께 맡길 때 하나님께서 그 위에 훌륭한 옷감을 지어 입히실 것입니다.여러분은 하나님께서 피로 사신 왕 같은 제사장이요그의 백성입니다앞으로 나아가십시오여러분에게 하나님의 복이 넘치게 임하시길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아멘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 (빌립보서 3:12)

5/24/2011

실패하게 하는 마음의 자세(IV)

“하나님이 보내신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니 이는 하나님이 성령을 한량 없이 주심이니라”(3:34)



여러분들의 마음을 부정적으로 만드는 또 다른 요소는 좌절감입니다좌절감이란 자기의 부정적인 면을 과대 평가할 때 생기는 감정을 말합니다.
바울이 아시아에 복음 증거를 하러 가려고 했다가 크게 실패했습니다그러자 이번에는 비두니아로 가려 했으나 또 실패했습니다그러나 그는 드로아로 내려가서 기도하여 하나님을 만나고 환상을 보자마자 마게도냐로 갔습니다그리고 거기에서는 크게 성공했습니다.

바울이 실패한 것은 아시아로 가는 것과 비두니아로 가는 것 뿐이지 하나님의 사업을 하는데 실패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한 두가지 실패했다고 하여 실패자로 낙인이 찍히는 것은 아닙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몇 번의 실패를 일시적인 것이라 생각하기보다는 그 사실을 과대 평가하여 자기 자신을 실패자로 생각하기 때문에 좌절감에 빠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좌절감에서 해방될 수 있을까요한 가지 일에 실패를 하면 “내가 이 일에는 실패했지만 다른 일에는 성공한다나는 실패자가 아니다.”라고 하면서 일어나야 합니다성경에는 너희 중에 고난당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기도할 것이요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여러분들에게 좌절감이 다가오면 엘리야처럼 기도하여야 할 것입니다.

엘리야 같은 위대한 믿음의 용사도 이세벨이 죽이겠다고 위협하자 낙심하여 사흘 길을 도망가서 로뎀나무 밑에서 하나님께 죽여 달라고 통곡 했습니다 주님께서 낙심한 엘리야를 저버리셨습니까그렇지 않습니다하나님께서는 엘리야에게 충분한 휴식을 주시고 격려하여 다시 주의 종으로 일으켜 세웠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들을 능력이 없는 실패자라는 것을 잘 아시면서도 손수 택하셨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한두 번 실패했다고 하여 결코 여러분을 저버리시지 않습니다그러므로 엘리야처럼 고난을 당하고 좌절감이 다가올 때 그 기회를 이용하여 성공으로 나아가는 새로운 마음가짐을 갖는 기회를 삼아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온갖 구하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에 더 넘치도록 복을 주십니다그런데 하나님의 복은 여러분의 생각과 꿈과 믿음을 통하여 다가옵니다오늘 여러분의 마음 자세는 어떠합니까여러분의 생각은 창조적입니까여러분의 생각을 바꾸는 순간 여러분의 환경도 변화될 것입니다.

"너희 중에 고난 당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기도할 것이요“(야고보서 5:18)

5/23/2011

내게 네 마음을 다오, 너는 내 것이라.

내 영혼아! 십자가에 못 박히신 주님의 옆구리로 들어가라. 그 거룩한 상처로 들어가 사랑 때문에 관통당하는 것을 허락하신 주님의 사랑의 심장에 이르고, 그 반석의 갈라진 틈새 안에서 이 세상의 풍파를 피하라.

그대, 하나님께 복 받은 자여! 들어가라, 왜 밖에서 주저하는냐? 그 심장 안에서 그대를 기다리는 것은 생수의 강이요 구원의 길이다.

그 안에 있는 하늘의 보고에서는 소생케 하는 향기가 한없이 흘러나온다. 그 안에는 그대를 노리는 원수의 매서운 눈길과 유혹들이 도달하지 못하는 안식처가 있다. 그 안에는 장차 임할 진노의 심판에서 그대를 구할 사랑과 자비가 있다.

주님의 심장 안에는 기름과 은총의 샘이 항상 흐르고 있으니, 진정으로 통회하면 찾아오는 죄인들은 언제나 긍휼을 얻는다. 그 안에는 거룩한 장의 근원이 있으니, 그 근원은 낙원의 중심에서 흘러나와 지면에 물을 주고, 목마른 영혼을 적셔주고, 죄를 씻어주고, 더러운 욕심을 없애주며, 분노를 가라앉혀준다.

그러므로 그 샘에서 흐르는 구주의 사랑을 마시고, 주님의 옆구리에서 흐르는 달콤한 위로의 포도주를 마셔라. 그리하면 그대는 더 이상 자기 안에서 살지 않고 그대를 위해 상처를 입으신 분 안에서 살게 될 것이다. 그대에게 심장을 열어 보이신 주님께 그대의 마음을 바치는 것이 마땅하다.

주님의 거룩한 상처 구멍으로 들어가 주님의 가장 깊은 곳까지 이르라. 주님은 그대에게 들어오라고 초대하시며 주님 안에 머물라고 부탁하신다.

거룩한 소원이 그대를 떠밀고 있으니, 서둘러 달려가 주님의 거룩한 옆구리에 손을 대어 주님의 거룩한 물과 피를 그대의 손에 묻혀라.

그대의 심장을 꺼내어 주님의 심장 옆에 놓아 주님의 심장이 그대의 심장을 소유하고 다스리고 보호하도록 하라. 그리하면 그대의 심장이 세상 것들에 사로잡혀 부패하지 않을 것이다.

그대의 마음을 주님께 온전히 열어드려라. 절대적 신뢰 가운데 그대를 주님께 맡겨라. 그대가 바라는 것과 바라지 않는 것을 모두 주님 앞에 내놓아라.

하나님과 한마음 한뜻이 되어라! <주인님나를바칩니다중에서...>

성령님은 깨끗한 마음에 거주하신다.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님을 기쁘게 해드리려면 우리는 오직 예수님에게만 몰두해야 한다. 현재 성령님이 하시는 일은 예수님을 영광스럽게 하는 것이다. 성령님이 행하시는 모든 것은 궁극적으로 이 한 목적에 집중되어 있다,

따라서 우리의 생각이 성령님이 거하시고 합당하고 깨끗한 성소(聖所)가 되도록 해야 한다. 성령님은 우리의 생각 안에 거하신다. 왕(王)이 더러운 내의(內依)를 불쾌하게 여기듯이 성령님은 우리의 더러운 생각들을 불쾌하게 여기신다.

무엇보다 우리의 감정이 시시각각 아무리 요동친다 할지라도 성령님에 대한 우리으 믿음이 흔들려서는 안 된다. 성령 충만한 삶이란 어쩌다가 다른 사람들보다 예민하고 세련된 성격을 타고난 소수의 특권층에게나 어울리는 호사스러운 기독교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성령 충만한 삶은 전 세계의 구속(救贖)받은 모든 사람들의 정상적인 삶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 임재를 연습하고 있습니까?

나의 영혼아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라 무릇 나의 소망이 그로부터 나오는도다. 오직 그만이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원이시요 나의 요새이시니 내가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 나의 구원과 영광이 하나님께 있음이여 내 힘의 피난처도 하나님께 있도다(시62:5-8)

그리스도인의 영적 삶에서 가장 주요하고 가장 필요한 훈련은 하나님의 임재를 연습하는 것, 곧 '언제나 하나님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연습한다는 것은;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언제나 우리와 동행하신다는 사실에서 기쁨을 얻는 것이며, 그 사실에 익숙해지는 것입니다.

언제나 겸손하게 하나님께 말을 걸고 삶의 모든 순간, 특별히 시험과 고통과 메마름이 찾아올 때, 심지어 영적인 것들이 싫어지고 불순종과 죄악 가운데 처하게 될 때에도 마음에서 우러르는 사랑으로 하나님과 대화를 나누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그다지 많은 것을 요구하지 않으십니다. 그저 우리가 자주 하나님을 기억하고 찬양하고 경배하기를 바라십니다. 때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구해야 하며, 때로 하나님을 위해 고난을 받아야 하고, 때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드려야 합니다.

일을 하는 동안 할 수 있는 한 자주 하나님을 떠 올리십시오. 밥을 먹는 동안이나 대화를 하는 동안에도 할 수 있는 대로 자주 하나님을 기억하십시오. 아주 잠깐만 하나님을 기억해도 하나님께서는 매우 흡족해 하실 것입니다. 큰 소리로 부르짖지 않아도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가까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실패하게 하는 마음의 자세(III)

여러분들의 마음을 부정적으로 만드는 요소는 공포입니다공포란 어떤 대상이나 사물이 자기보다 크고 위협적일 때 마음 속에 일어나는 반응을 말합니다.오늘날 수많은 사람들이 인생에 실패하고 패배하는 까닭은 실패를 두려워하여 아무일도 시작하려 하지 않고 뒤로 물러서기 때문입니다.이와 같이 공포는 우리의 마음을 부정적으로 만들고 우리를 파멸하게 만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네스바네아에 도착하자 모세가 열두명을 선발하여 가나안 땅을 정탐하러 오라고 보냈습니다. 40일만에 돌아온 정탐꾼 중 열명은 공포심으로 부정적인 말을 하였으나 두 사람은 공포심이 없었기 때문에 긍정적인 말을 하였습니다 그 결과 부정적인 말을 하였던 사람들은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였지만 긍정적인 말을 한 사람은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복을 받으려면 부정적인 공포심을 제하여야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여야 공포심을 없앨수 있을까요여러분들은 천지만물을 지으신 하나님께서 그 아들 예수님을 통하여 여러분들을 사랑 모시고 성령을 충만히 받아서 내 속에 하나님이 계시고 하나님께서 나의 친아버지가 되신다는 것을 알고 하나님을 확실히 믿을 때 여러분 마음 속의 공포심을 사라지게 됩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면서 공포심을 극복한 사람은 없습니다그러므로 여러분들은 예수님을 구주로 모시고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십시오그러할 때 말로만 듣던 하나님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내안에 내가 하나님 안에 들어가는 체험을 하게 되면기도를 통하여 마음 속에 평화가 넘쳐 어떠한 환경에 부딪치게 되더라도 두려워하지 않고 “주여 믿습니다.”하고 나가게 됩니다.
성경에는 32.500가지의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이 있습니다이 약속의 말씀을 늘 듣고 읽음으로써 눈에 아무 증거 보이지 않고 손에 잡히는 것이 없어도 약속의 말씀 위에 서서 여러분의 생애 전체를 맡기면주님께서 역사하셔서 표적이 따르게 하여 말씀을 확실하게 증거해 주시기 때문에 두려움을 쫓아낼 수 있습니다여러분의 마음을 부정적으로 만드는 공포심을 몰아낼 때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복을 주시는 것입니다.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요한일서 4:18)

5/22/2011

내가 움직이지 않아도 하나님은 다 이루실 수 있다.

우리가 고난의 기간이 무의미하다고 여기는 이유가 무엇인가? 
아무런 변화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요셉이 억울하게 감옥에 갇혔을 때, 감옥 안에 있는 요셉 자신의 환경은 변화가 일어나지 않았다.

그렇지만 그 시간이 아무 일 없이 그냥 흘러가기만 하는 시간이었는가? 아니다. 요셉은 감옥에서 기다리고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감옥 바깥에서 바삐 일하고 계셨다.

하나님이 어떻게 무슨 일을 하셨는가?
일단 바로를 움직이셨다. 바로가 꿈꾸게 하셨고, 그 꿈에 대해 번민케 만드셨다. "아침에 그 마음이 번민하여 보내어 애굽의 술객과 박사를 모두 불러 그들에게 그 꿈을 고하였으나 그것을 바로에게 해석하는 자가 없었더라." (창41:18)

아무렇게나 해석해도 될 텐데 해석하는 자가 없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 꿈을 해석하지 못하게 만드셨다는 뜻이 된다. 하나님께서 다 하셨다.

하나님은 우리가 움직이지 않아도 다 이루실 수 있다. 
지금 감옥 안에 갇혀서 꼼짝도 못하는 요셉에게 하나님께서는 주신 메시지는 이것이다. '네가 움직이지 않아도 일이 되지?' 이 경험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요셉은 총리가 되고 난 다음에도 지나치게 앞서 가지 않았다.

자신이 감옥에 있을 때에도 하나님께서 일하셨고 앞서 행하셨는데, 내가 기도하고 내가 하나님께만 능력을 구해도 하나님께서 일하시리라 믿는 것이야말로 정말 중요한 믿음의 자세이다.

분주한 마음 가운데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 차분히 무릎을 끓고 엎드려서 하나님이 행하시는 그 능력을 바라보기 바란다.

내가 완전히 변화될 수 있는길은 없는가

농가의 외양간에 있는 황소는 길들여진 동물이지만, 때로는 난폭해진다. 무엇엔가 화가 나면 황소는 머리를 들어밀면서 거친 소리를 낸다. 이렇게 황소가 분노를 폭발시킬 때 농장에 남아 있는 사람은 재빨리 나무로 기어오르거나 담장을 넘어 도망쳐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크게 다칠 것이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날까? 그것은 황소가 분노를 폭발시켜 수 세기 동안의 순치(馴致)의 굴레를 깨뜨렸기 때문이다. 오랜 세월 동안 길들여졌음에도 불구하고 황소의 깊은 내면에는 야수의 본성이 변하지 않은 채 잠복해 있는 것이다.

우리 인간도 황소와 별반 다르지 않다. 교육을 받지 못하고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만이 폭력적인 죄를 범한다고 생각하지 말라. 폭력적인 범죄는 사회적 및 경제적으로 혜택을 많이 누리는 계층에서도 발생한다.

이렇게 교육은 인간의 본성을 바꿀 수 없다. 물론 교육이 억제 수단으로 작용하여 어느 정도 절제할 수 있는 능력을 길러주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교육받은 사람들이 자신들의 본성에 따라 마음대로 행동하도록 내버려둔다면 그들의 본색이 드러날 것이다.

종종 우리는 사람들의 탐욕을 눈치채지 못하는데, 그것은 사회가 법으로써 그들의 탐욕을 억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람들 속에는 여전히 탐욕이 도사리고 있다. 그것을 억제하고 있던 빗장이 풀리면 각종 범죄가 발생하고, 그들은 법에 따라 감옥에 갈 것이다.

그렇다면 희망은 없는가? 하나님께 감사하라! 희망은 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길을 마련하셨기 때문에 방법이 있다. 하나님의 말씀에 따르면, 새로운 본성과 소원과 취향을 가질 수 있는 길이 우리에게 열려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해결책을 제공하신다. 우리 구주 예수께서는 탐욕스러운 사람에게 희망이 있다고 말씀하신다. 하나님은 그 사람에게 탐욕을 제거하시고, 그 사람을 가난한 자들에게 후하게 베푸는 사람으로 변화시키실 수 있다. 주님은 화를 잘 내는 사람에게도 희망이 있다고 말씀하신다. 주님은 쉽게 분노하는 사람의 성격을 온유한 성격으로 바꾸실 수 있다.

하나님은 우리 각 사람에게 완전히 새로운 본성과 도덕적 소원과 성향을 주실 수 있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옳은 일을 할 수 있는데, 그것은 우리가 옳은 존재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하나님 말씀의 가르침이다.
이것이 복음의 약속하는 것이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진정한 제자로서 주님을 끝까지 좇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것이다.
<네믿음은어디있느냐중에서...>

실패하게 하는 마음의 자세(II)

“누구든지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영원히 사하심을 얻지 못하고 영원한 죄가 되느니라 하시니”(막3:29)

여러분들의 마음을 부정적으로 만드는 요소는 분노입니다. 분노는 우리의 사고력을 마비시킬 뿐만 아니라 온몸의 혈관을 수축시켜 몸의 신진대사를 방해하고 혈압을 높이며 심장마비를 일으킵니다.

모세를 지도자로 삼고 가나안 땅으로 향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마실 물이 없어 고통을 당하자 하나님을 원망하고 모세를 원망했습니다. 그러자 화가 난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패역한 너희여 들으라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이 반석에서 물을 내랴”(민수기 20:10)라고 말하면서 바위를 두 번 쳤습니다.

그러자 바위에서 물이 나와 이스라엘 백성들은 갈증을 해소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고 이스라엘 자손의 목전에 나의 거룩함을 나타내지 아니한 고로 너희는 이 총회를 내가 그들에게 준 땅으로 들이지 못하리라”(민수기 20:12)고 하셨습니다.

모세처럼 위대한 종도 분노로 그의 마음이 부정적이 되어 하나님을 올바르게 대면하지 못하게 되자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눈앞에 두고도 그 땅에 들어갈 수 있는 복을 빼앗기고 말았던 것입니다.

오늘날 분명히 하나님의 축복 속에 들어갈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분노함으로 말미암아 받을 수 있는 복을 빼앗긴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성경에는 “사람의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이니라”(야고보서 1:20)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분노는 여러분의 마음을 부정적으로 만들어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수 있는 특권을 빼앗아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살아가면서 화를 내지 않을 수도 없고 그렇다고 하여 화를 내면 자기만 손해볼 것으므로 화가 날때에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화가 날 때에는 찬송을 부르는 것이 좋습니다. 화가 나더라도 참고 찬송을 부르면 성령의 역사로 화가 가라앉게 됩니다. 그리고 화가 날때에는 시간을 벌어야 됩니다. 마귀는 조급하게 굴지만 성령은 조급하게 서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분이 나면 심호흡을 크게 하고 ‘20분 후에 화를 내자’하고 20분만 기다리면 분노가 거짓말같이 사라지고 그 때에는 화를 내지 않은 것이 얼마나 잘한 일인가를 느끼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상대방을 이해하려고 하면 분이 나지 않게 되므로 우리의 마음의 자세가 부정적이 되는 것을 막을 수가 있습니다.

“사람의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이니라”(야고보서 1:20)

5/21/2011

내 친구는 신앙이 날로 깊어지는데, 나는 왜 늘 그대로일까?

신자의 영적 삶에는 다양한 영역이 있는데, 각각의 영역에 도달하는 것이 균일하게 쉬운 것은 아니다.

회개와 믿음과 기쁨과 소망처럼 모든 신자들이 공통으로 누리고 있는 통상적인 뼈대와 느낌이 있는가 하면, 광희와 그리스도와의 신령한 교제와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었다는 의식처럼 모든 신자들이 공통으로 누리고 있다고 보기 어려운 상위 영역에 놓인 것들이 있다.

모든 신자들이 그리스도를 본다. 그러나 모든 신자들이 그리스도의 못 자국에 손가락을 넣거나 그분 옆구리에 손을 넣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모두가 요한처럼 예수님 품에 기대는 지고의 특권을 누리는 것이 아니고, 바울처럼 셋째 하늘에 이끌려 올라가는 특권을 누리는 것이 아니다.

체험의 강에 대해 말하자면, 발목까지만 물에 담그고 있는 그리스도인이 대대수이고, 무릎 닿는 곳까지 나아간 사람은 약간 있고, 가슴이 닿는 곳까지 들어간 사람은 소수이며, 깊은 곳에서 자유로이 헤엄치는 그리스도인은 정말, 정말, 정말로 극소수이다.

하나님께 속한 것들을 체험으로 아는 지식에는, 독수리의 예리한 시력이나 철학자의 심원한 사유로도 볼 수 없는 높은 곳이 있으며, 사자 새끼처럼 제멋대로 돌아다니는 이성과 판단력을 가지고는 도무지 여행할 수 없는 비밀스러운 길이 있다.

그곳은 오직 하나님만이 인도하실 수 있다. 이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태워 그곳으로 데려가시는 병거가 바로 기도이며, 그 병거를 끄는 날랜 준마도 바로 기도인 것이다. "야곱은...하나님과 힘을 겨루되 천사와 힘을 겨루어 이기고 울며 그에게 '간구'하였으며 하나님은 벧엘에서 저를 만나셨고 거기서 우리에게 말씀하셨나니"(호12:3,4)

기도(간구)는 자비로우신 하나님의 팔을 움직인다. 기도는 그리스도인을 갈멜 산으로 데려가 축복의 구름으로 하늘을 덮고 자비의 홍수땅을 적실 능력을 주며(왕상18:41-46), 비스가로 데려가 예비된 기업을보여주며 (신34:1-3), 변화산으로 데리고 올라가 이 세상에서 주님을 닮을 때까지 변화시킨다(눅9:28-36).

평범하고 낮은 체험 이상의 무엇을 원한다면 당신보다 높은 곳에 있는 반석을 바라보라! 믿음의 눈으로 끈질긴 기도의 창문을 통해 당신보다 높으신 하나님을 바라보라! 더 높고 깊은 체험을 원한다면 힘써 더 많이 기도하라!

남들도 다 그렇게 하잖아요...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온전하라"(마5:48), "주의하라"(엡5:15), "우상숭배자들을 멀리하라"(고후6:17), "세상에서 빛을 발하라"(빌2:15) 라고 명령하신다.

그분은 우리가 죄인들과 어울리거나 그들의 행위를 본받는 것을 원치 않으신다. 지옥으로 향하는 길은 많은 사람들이 걸어가는 넓은 길이다. 하나님께서는 그 길에서 당장 빠져나오라고 손짓하신다.

다수를 따라 악을 행하지도 말라고 말씀하신다(출23:2).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이 온통 죄로 물든 시대에 우리 자신을 거룩하게 지켜야 한다. 기독교를 회의적으로 받아들이는 시대에 믿음을 고백하는 일은 누구나 할 수 있다. 그러나 악한 시대에 믿음을 고백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야말로 참 은혜를 받았다는 징표이다.

진리가 박해와 비방과 모욕을 당할 때 그 진리를 사랑할 수 있어야만 참 은혜를 받았다고 할 수 있다. 죽은 물고기는 강물 아래로 떠내려가지만 살아 있는 물고기는 세찬 물살을 거슬러 올라간다. 만찬가지로 참 은혜를 받은 사람은 악한 시류를 거슬러 올라간다.

엘리야 선지자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제단을 무너뜨리는 시대에도 만군의 하나님을 충실히 섬김으로써(왕상19:10; 롬11:13) 그의 입술과 마음이 제단의 핀 숯으로 정결케 되었다는 사실을 입증했다.

죄에 순응하며 시대의 유행과 형식에 따라 믿음을 재단해 맞추면서 기독교인임을 자처하는 것은 매우 부끄러운 일이다. 그런 사람들은 최선의 길을 찾기보다 가장 안전한 길을 찾는 데 초점을 맞춘다. 그들은 대중의 의견을 숭배하며 순결한 양심보다 안전한 삶을 선택한다.

우리는 부패한 시대에 믿음의 열정을 더욱 뜨럽게 불태워야 한다. 얼음처럼 꽁꽁 얼어붙은 시대에 거룩한 열정을 불어넣어 시류를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이 시대는 죄가 도처에 만연하며 더욱 노골적으로 드러나고 있다. 우리는 이때 세상과 정반대의 길을 걸어가야 한다(롬12:2)

우리 모두 무성한 가시덤불 속에 피어 있는 백합과 장미처럼 살아가자. 죄가 유행처험 번지고 있어서 상황이 좋아질 가능성은 거의 없다. 더러운 오물 속에서도 순수함을 유지하자. 짠 바닷물에서도 생명력을 잃지 않는 물고기처럼, 연기나는 물무 속에서 환한 빛을 드리우는 횃불처럼(창15:17) 살아가자.  <.하나님을경외하는사람중에서...>

숨은 마음


우리에게는 숨은 마음이란 게 있습니다. 남에게 보여주기 싫어하는 마음이나 감추고 싶은 마음이기도 하지만 자기 자신도 모르고 있는 마음일 수도 있습니다. 이것은 자신의 내면을 찬찬히 들여다보지 않으면 찾을 수 없는 마음이고 성령의 음성일 수도 있습니다.

가령 지금 내가 무엇을 계획하고 있을 때 그 일이 나를 위한 일이냐, 타인을 위한 일이냐. 하나님 영광을 위한 일이냐. 혹은 선한 일이냐. 악한 일이냐. 등...

마땅히 성도라면 첫째가 하나님 영광을 위한 것이고 선한 일이고 타인을 위한 일이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는 바이지요. 그런데 가만히 그 일의 정말 목적을 깊이 생각해 보면 첫째가 나를 위한 것이고. 별로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은 일인 것을 발견할 것입니다.

특히 전도하는 것, 하나님 영광을 위한 일이고 기도하는 것이 성도가 해야 할 본분이라 생각하지만. 전도함으로써 그동안 바르게 살지 못한 것에 대한 자신의 스스로 위로를 받고자 하는 마음이 아니지요?

죄를 사함 받는 것은 예수님의 피의 값이지. 우리가 선을 행하거나 전도를 하거나 봉사를 하거나 기도를 많이 한다고 사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것으로 마음의 위안을 얻으려고 하는 얄팍한 숨은 마음이 있습니다.

사람에게는 그럴듯하게 보일 수는 있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그럴 수 없다는 것을 잘 알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내 안에 숨은 마음, 진실한 내 마음이 무엇인지 어떤 일을 하든지 어떤 말을 하든지 깊이 생각해 봐야 합니다.

이 글 또 한 내 자랑이나, 인기나, 보이기 위한 것이 되지 않길 기도하는 마음으로 씁니다.

5/19/2011

나를 버려야 예수가 산다!

왜 수백 번 기도하고 다짐했는데도 여전히 분열되고 열의 없고 뒤죽박죽된 삶을 사는가?
이전 질문들에 대한 대답은 단 하나뿐이다. 모든 문제의 뿌리는 우리의 '자아'(自我)이다.

"타협하는 삶에서 벗어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라고 묻는 사람에게 "당신은 이렇게 혹은 저렇게 해야 합니다" 라고 대답해서는 안 되고 "위로부터 임하는 새 삶(그리스도 중심적 삶)이 자아 중심적 삶을 대신해야 합니다." 라고 대답해야 한다.

그렇다면 자아 중심적인 삶에서 벗어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자아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오직 한 가지뿐이다. 마음을 다해 주님을 따르고 주님의 가르침에 귀 기울이고 날마다 자신을 주께 드려서 주님이 우리의 전부가 되시게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동참하려는 사람은 매 시간, 매 순간마다 하나님의 은혜에 힘입어 끊임없이 자아를 부인해야 한다. 예수님이 죽음과 무덤까지 낮아지셨다는 것을 기억하라. 끝까지 주님을 따라가 자아의 죽음에 이를 때, 우리에게 구원과 생명이 있을 것이다.

하나님의 영광을 가린 모든 잘못의 뿌리가 바로 '자아'라는 것을 인정하고 "주님, 제가 바로 이런 존재입니다"라고 주께 고백하라. 그런 다음 그리스도의 생명이 당신의 생명이 될 수 있음을 확실히 믿고 당신 삶의 통제권을 완전히 주님께 넘겨드려라.

그러나 자아에서 벗어나는 것이 쉬운 일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헌신예배 때 서약하고, 기도드리고, 상징적인 행동으로 복종하는 마음을 나타내기는 쉽다.

명심하라! 그리스도께서 죄 없는 자아를 하나님께 드린 갈보리 언덕의 죽음이 준엄한 사실이듯이, 우리의 자라를 죽음에 내어주는 것도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서 준엄한 현실이 되어야 한다.

다른 방법은 없다. 오직 하나님만 따르라. 그리스도 중심적 삶을 이해하고 받아들이고 그런 삶을 살 수 있는 은혜를 주님께 구하라!

기쁨이 사라졌나요?

예수님은 진정한 구주로 영접한 후 나는 다시는 죄를 짓지 않겠다고 다짐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 통회 자복하고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한 이후에도 나는 여전히 똑같았고 그 사실이 너무 당황스러웠습니다.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고, 사흘이 지나도 내 삶은 여전히 그대로입니다.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이 조금도 사라지지 않고 있었습니다.

회심한 이후에도 우리는 여전히 죄의 역사를 경험합니다. 구원받았다는 것이 다시는 죄를 짓지 않는 존재가 되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죄 많은 이 세상에서 여전히 사람의 몸을 입고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죄를 지어도 괜찮다는 말입니까?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믿어도 죄를 떠날 수 없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이 하나님께서 죄를 용납하신다는 의미는 결코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절대 죄 위에 복을 내리지 않으십니다. 우리 안에 죄가 있으면 기도의 문이 막히고, 감사와 기쁨이 사라지고, 연단이 지속됩니다.

그렇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예수 믿으면 자동으로 죄를 짓지 않게 되는 것도 아니고, 또 죄를 용납할 수도 없으니 이 일을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법이 바로 회개입니다. 우리가 죄를 지을 때마다 회개하고 돌이키면 그 죄들은 더 이상 내 안에서 역사하지 못합니다. 사랑의 하나님께서는 거듭난 성도들 속에 남아 있는 내적 죄성을 온전히 없애주시기 위해 성경의 은혜를 예비해두셨습니다.

그런데 정작 그리스도인들이 이 '회개'를 하지 않고 살아갑니다. 우리는 죄를 지을 때마다 그 즉시 회개해야 합니다. 이 사실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나 역시 이 사실을 몰랐습니다. 모르니까 말로 행동으로 죄를 지으면서도 그냥 넘겨왔습니다.

하나님과 나 사이에 무언가 해결해야 할 문제가 있고, 기도해야 할 기도제목들이 쌓여 있는데, 도무지 기도가 나오지 않습니까? 그것은 나의 죄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회개한 다시는 죄를 짓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로마서에서 사도 바울은 우리가 악을 행하는 것이 우리 의지와 상관없이 되는 일이라고 했습니다. "내가 원하는 바 선을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은 행하는도다"(롬7:19)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다시는 죄를 짓지 않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회개입니다. 우리에게 죄를 자백하기 원하셨습니다. 우리 힘으로는 절대 죄를 이길 수 없습니다. 회개하면 보혈의 능력으로 죄를 이기게 됩니다. 이것은 전적인 성령의 역사입니다.

기름부으심을 왜, 구하지 않는가?

진정으로 구원 받았다면 당신에게는 성령님이 함께하십니다. 당신이 정말 죄 사함을 받았고 거듭났고 의로운 자가 되었고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으며 하나님나라의 백성이라면 당신은 하나님의 귀한 자녀입니다.

그렇게 당신이 정말 그리스도인이라면 당신은 기름부으심을 받아야 합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면 절대적으로 기름부으심을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지금 당신에게 기름부어주실 원하십니다.

하지만 기름부으심은 반드시 성령님의 임재를 전제로 합니다. 예수님도 성령세례를 받으신 후 성령충만 하셨고, 기름부으심을 받으신 후에 성령의 권능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셨습니다.

그 가르치심에 권세가 있고, 하나님나라의 비밀을 선포하시고, 권능으로 기사(奇事)와 표적을 일으키신 것도 바로 기름부으심이 임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시고 우리는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리스도가 기름부으심을 받은 자라면 우리도 마땅히 기름부으심을 받은 자에게 속해야 합니다.

기름부으심이 없는 그리스도인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기름부으심은 신비로운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선지자와 예수님을 통해 이미 약속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늘로 올리우시고 약속하신 보혜사 성령님이 오신 오순절 사건을 통해서 모든 자에게 성령님이 임하신다는 말씀이 성취되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기름부으심이 구약에서 왕, 제사장 그리고 선지자에게만 주어졌기 때문에 나와는 상관이 없는 일이라고 항변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신약에서도 특별한 사람들에게만 주어졌다고 말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다면 다음 말씀을 묵상해보십시오.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德)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벧전2:9)

하나님께서 기름부으심을 주시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거룩하게 구별하여 하나님 나라와 의(義)를 구하게 하고, 하나님나라에서 하나님나라의 법칙이 어떻게 적용되는지를 깨닫고 행하게 하여, 믿지 않는 자에게 증거하고, 이 땅에서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이루게 하기 위함입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우리를 도우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기름부으심을 받으십시오.

실패하게하는 마음의 자세(I)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도 통달하시느니라”(고전2:10)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우리들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기를 원하시고 생명으로 채우시기를 원하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근원적으로 좋으신 하나님이시며 생명과 아름다움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복을 주실 때 여러분의 자세는 바로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그릇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의 마음 자세가 부정적이 되면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복을 주실 수 없습니다.
그러나 언제든지 여러분의 마음을 부정적으로 만드는 요소를 제거하기만 하면 하나님의 복을 받을 수 있습니다.

먼저 여러분의 마음을 부정적으로 만드는 요소는 미움입니다. 주님께서 응답받는 기도에 관하여 설명하실 때마다 결론으로 남을 미워하는 마음을 없애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왜냐하면 미워하는 마음은 우리의 마음을 부정적으로 만들어 하나님의 은총 속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미움은 시기와 질투를 동반하므로 상대방이 잘되기를 바라기보다는 망하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을 미워하면 미워하는 생각이 먼저 나를 통하여 나가기 때문에 자신이 먼저 부정적이 되므로 자기가 먼저 파멸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이에 대한 해답으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원수를 사랑하며”(누가복음 6:27) 예수님께서 원수를 사랑하라고 말씀하신 까닭은 원수가 좋아서가 아닙니다.
원수를 미워하면, 원수를 미워하는 생각이 자신을 거쳐 나가기 때문에 원수가 해(害)를 받기보다는 먼저 자기 마음의 자세가 부정적이 되어 하나님의 복을 받지 못하게 됩니다.

그러나 원수를 위하여 복을 빌어 주면 원수에게 이르기 전에 먼저 자기 자신을 긍정적으로 만들어 하나님의 복을 받을 수 있는 그릇을 준비한 상태가 되어 하나님의 복을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기도가 응답을 받지 못하는 까닭은 여러분의 마음 속에 미움이 점령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미워하는 사람을 축복하여 미움을 배제하십시오. 그러할 때 하나님의 복을 받게 되실 것입니다.

"종말로 형제들아 무엇에든지 참되며 무엇에든지 경건하며 무엇에든지 옳으며 무엇에든지 정결하며 무엇에든지 사랑할 만하며 무엇에든지 칭찬할 만하며 무슨 덕이 있든지 무슨 기림이 있든지 이것을 생각하라“(빌립보서 4:8)

5/17/2011

기도하지 않았는데도 좋은 결과를 얻었다면?

언젠가 고든(A. J. Gorden, 19세기 후반의 미국 부흥사)은 이렇게 말한 것이 있다.
"기도한 후에는 기도하는 것보다 더 큰 일을 할 수 있지만, 기도하기 전까지는 기도하는것보다 더 큰 일을 결코 할 수 없다." 우리 모두가 이 말을 진심으로 믿는다면 얼마나 좋을까!

기도하지 않는 전도자가 노고(勞苦)의 결과를 거둘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그것은 누군가 어딘가에서 그를 위해 기도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므로 그 열매는 전도하는 사람의 몫이 아니라 기도하는 사람의 몫이다.

주님이 각 사람의 행한 대로 갚으실 때에(마16:27) 많은 전도자가 몹시도 당황할 것이다. 그들은 아마 다음과 같이 항변할 것이다. '주여! 저 사람은 제가 회개시킨 사람이 아닙니까? 수많은 사람을 양의 우리 안으로 불러들인 이 사명을 주도한 사람이 바로 제가 아닙니까?"

그러면 주님이 이렇게 꾸짖으실 것이다.
"그건 그렇지. 네가 전도하고 부탁하고 설득하였지, 그러나 기도도 네가 했단 말이냐?'

오, 주님이여! 저희가 이러한 당혹스러움을 겪지 않게 하소서. 
오, 주님! 저희에게 올바른 기도를 가르쳐 주소서.

하나님께 돌아온 사람은, 성령께서 어떤 성도의 기도에 응답하여 간구한 결과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인 열 명 중에 아홉 명이 믿지 않는 사람을 위해 중보기도를 드리지 않고 있다. 그리스도인이 '기꺼이 기도하려 하지 않는다'라는 것이 나는 놀랍기만 하다.

선교지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특권을 소유하지 못한 사람도, 해외의 선교사가 끼치는 것과 유사한 축복을 끼치는 데에 공헌할 수 있다. 우리가 기도함으로써 인도나 중국, 아프리카에 축복의 소나기를 불러올 수 있다는 사실이야말로 탄복할 만한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오늘날 주님께서 주님의 일꾼들의 기도의 협력을 통하여 이루시는 많은 일들을 보고 믿으라.

당신은 무엇을 찾고 있는가? 당신 인생의 목표는 무엇인가? 우리는 지위나 명에나 권세를 구하지 않는다. 무엇보다 우리는 하나님의 일에 풍성한 열매를 맺기를 소망하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반드시 기도해야 한다.

<무명의그리스도인,무릎꿇는그리스도인중에서...>

하나님은 만만한 상대가 아니다!

성경 기자들은 모든 사람이 죄인이라고 단호하게 밝힌다. 
일부 선한 생활을 하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이것은 팜으로 놀라운 일이다. 그들은 자기 이상을 가지고 있고 어느 정도 그것을 달성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자신이 때때로 실수를 한다는 것과 성격적 결함도 알고 있다. 그러나 그것 때문에 특별히 놀라지 않는다. 또한 자신이 다른 사람들보다 나쁜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런 모든 것들은 다음 두 가지를 기억하기 전까지는 충분히 이해가 간다.
첫째, 실패의식은 기준이 얼마나 높은가에 달려있다.
둘째, 하나님의 관심은 행위 뒤에 있는 생각, 즉 행동 뒤에 있는 동기에 있다.
예수님은 산상설교에서 이것을 가르치셨다. 따라서 우리는 이것을 고려해야 한다.

죄는 단순히 잘못된 외적 행동이나 습관이 아니다.
죄란 깊은 곳에 자리잡고 있는 인간 본성의 오염이다. 죄는 자아를 통제한다. 그래서 실제로 죄가 곧 자신이다. 따라서 우리의 모든 죄는 하나님이나 사람에 대한 자기 주장이다.

십계명은 하나님과 다른 사람들에 대한 우리의 의무를 규정한다.  이것은 레위기 19:18과 신명기 6:5를 결합하여 예수님이 제시하신 율법에 대한 요약에서 더욱더 분명하게 드러난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마22:37-40)

첫째 계명은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의무와 관계된 것임을 주목하라. 우리는 하나님을 먼저 사랑해야 한다. 그 다음 이웃을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정하신 순서는 하나님 먼저, 이웃이 둘째, 나는 마지막이다.

죄는 이 순서를 바꾸는 것이다.
우리는 자신을 첫째에 두고, 이웃을 둘째에, 그리고 하나님은 뒤 구석 어디에 둔다. 이 근본적인 자기 중심성은 모든 행위에 영향을 미친다.

하나님을 자주 만날수록 나의 삶은 거룩 해집니다.

죄와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대한 개념이 교회에서 사라졌다는 말을 종종 듣는다. 그러나 은밀한 기도골방에서는 하나님의 거룩하심이 우리의 믿음과 생활에서 어떤 위치를 차지해야 하는지 다시 배울 수 있다.

만약 30분 동안 기도하면서 하나님과 교제하는 방법을 모른다면 그분의 거룩하심에 대해 깊이 묵상하라. 하나님 앞에 엎드려 하나님과 만날 수 있도록 시간을 드려라. 그렇게 하기가 쉽지는 않겠지만, 큰 복이 흘러넘칠 것이다.

이런 거룩한 임재의 훈련을 통해 당신의 영혼이 강해지기를 원한다면 성경을 펼쳐라. 예를 들어 레위기를 펴서 하나님께서 다양한 표현을 통해 일곱 번이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라는 명령을 내리신 것에 주목하라. (레11:44,45, 19:2, 20:7, 21:8, 22:32)

이보다 훨씬 더 자주 등장하는 표현은 "나는 너희를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인줄 너희로 알게 함이라"(출31:13)라는 말씀이다. 이는 신약으로 이어져, 베드로는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기록하였으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하셨느니라"(벧전1:15-16)라고 말했다.

바울도 '우리 주 예수께서... 강림하실 때에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 앞에서 거룩함에 흠이 없게 하시기를 원하노라...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심은 부정케 하심이 아니요 거룩케 하심이니...너희를 부르시는 이는 미쁘시니 그가 또한 이루시리라"(살전3:13, 4:7, 5:24)

거룩하신 하나님을 아는 지식만이 우리를 거룩하게 만들 수 있다. 그런데 이런 지식을 얻을 수 있는 곳은 오직 은밀한 기도골방, 즉 개인적 기도의 장소뿐이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의 빛이 우리를 비추지 않으면 이런 지식을 얻을 수 없다. 세상에서 뛰어난 지혜를 가진 어떤 사람을 깊이 알려면 그와 교제하고 그의 영향을 받아야 한다. 하나님의 영광스런 능력을 받는 데 시간을 투자하시 않으면 하나님이 우리를 거룩하게 하실 수 없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거룩하심은 무엇인가?
이것은 하나님의 모든 속성 중에서 가장 높고 영광스러우며 가장 포괄적인 것이다. '거룩함(holiness)은 성경에서 가장 심오한 단어이며, 천국과 잘 어울리는 단어이다. 구약과 신약 모두 이 사실을 입증한다.

5/14/2011

당신을 위한 최상의 인생 계획을 발표합니다!!

나는 삼십대 초반에 갑작스러운 남편의 결심으로 중국으로 선교를 왔다. 그러나 나는 선교와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먼 사람이었다. 나는 내 가족의 부와 번영에 익숙해져 있었다. 화목한 가정, 남편의 승승장구, 불어나는 예금통자, 자고 나면 뛰는 부동산, 고급 취미생황 등 안전지대에 머물러 신앙생활을 하려고 했다.

선교는 후원남 하면 됐지 내가 직접 가야 할 이유는 없다고 생각했다. 조금이라도 고생스러운 곳에는 갈 엄두를 내지 못하던 절름발이 신자였다.

물론 모든 사람이 나처럼 지금 있는 자리를 박차고 나와 해외 선교를 가야 한다는 말은 아니다. 우리에게는 각자 버리고 싶지 않은 안전지대가 있을 것이다. 그 자리가 어디든 그곳에서 벗어나라고 말하는 것이다.

우리 인생에서 풍성한 추수를 거두고 싶다면 풍성하게 심어야 한다. 그것은 선택의 변화를 요구하는 일이다. 이제 변화를 선택해보자.

주님을 인생의 최우선순위를 둔 사람은 주님의 열매를 맺는다. 우리에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자유함을 누릴 수 있게 된다. 세상의 인생은 별것없다. 내 힘으로 무언가를 이루려고 해도 남는 것은 없다.

당신의 인생은 당신 것이 아니다.
주님의 것이다.
우리의 인생은 오직 주님께 드려야 한다.

당신의 인생은 누구의 것인가?
당신 자신의 것인가? 아니면 누구의 것인가?

당신을 온전히 지배하길 원하신다.

성령님이 우리 안에 거하심을 믿어라! 이미 다 아는사실이라서 더 이상 깊이 생각할 필요조차 없다고 말하지 말라.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증거하시나니"(롬8:16)

우리의 마음이 성령의 전(殿)이며, 그분이 우리 안에서 거하시고 우리의 몸과 마음을 다스리신다는 사실을 믿고 깊이 묵상하라. 기도할 때마다 성령님이 우리 안에 계시며 우리가 기도할 수 있게 하심에 진심으로 감사하자. 그럴 때마다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을 향하고 계속 그분을 바라보게 된다. 감사하는 사람은 자신에게 몰두하는 생각에서 벗어나 성령님을 마음에 모실 수 있다.

이제까지 당신은 성령님과 관계없이 하나님과 교제하려고 발버둥쳤는가? 만일 그렇다면 당신은 틀림없이 기도를 제대로 하지 못하고, 기도를 큰 부담으로 느꼈을 것이다. 왜냐하면 성부(聖父)와 성자(聖子)를 나타내시는 분은 바로 성령이시기 때문이다. 성령께서 우리의 기도를 통해 행하시는 사역은 아래와 같이 다양하다.

그분의 첫째가는 일은 그리스도의 무소부재(無所不在)한 사랑과 능력을 나타내는 것이다. 성령님은 우리가 기도할 때 그리스도의 이름과 보혈이 기도응답의 근거하는 사실을 끊임없이 상기시키실 것이다. 나아가 성령께서는 "성결의 영"(롬1:4)으로서 우리에게 죄를깨닫고, 미워하고, 버리라고 가르치신다. 지혜와 빛으로 영으로서 하늘의 비밀, 곧 하나님의 넘쳐흐르는 은혜가 무엇인지를 깨닫게 해주신다(엡1:17)

하나님은 사랑과 능력의 영으로서 우리가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온유와 긍휼의 마음으로 영혼들을 위해 수고하도록 가르치신다(딤후1:7)

그분에게서 이토록 많은 복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달을수록 우리는 성령님의 신성(神性)을 더욱 확신할 것이고, 기도 중에 성령님의 인도(引導)에 우리 자신을 더욱 철저히 맡길 것이다.

성령께서 기도의 영이심을 깨닫는다면 우리의 삶은 그만큼 달라질 것이다. 우리는 성령을 충만하게 해달라고, 성령의 기름부음을 더 달라고 기도한다. 그러나 성령께서도 우리에게 더 많은 것을 원하신다는 것을 먼저 깨달아야 한다.

성령님은 중보기도를 하는 자들에게, 교회의 원수를 물리쳐달라고 밤낮으로 부르짖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계획을 수행하게 하신다.

그리스도인의 가정교육

“내가 너와 함께 애굽으로 내려가겠고 반드시 너를 인도하여 다시 올라올 것이며 요셉이 그의 손으로 네 눈을 감기리라 하셨더라”(창46:4)

오늘날 많은 심리학자들은 "사람은 아동기에 인생의 방향이 결정된다."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이와 같이 중요한 시기에 좋은 부모 밑에서 좋은 교육을 받고 산다는 것은 말할 수 없는 행복이라 할 수 있습니다.

잠언 22장 6절에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가정에서는 자녀들에게 어떤 교육을 시켜야 할까요?

우선 하나님 중심의 신앙 교육을 해야 합니다. 오늘날 수많은 사람들이 양심을 버리고 사악한 행동을 하는 것은 그들의 마음속에 하나님을 모시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모시고 사는 그리스도인들은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삶을 살고, 자녀들에게도 그것을 가르쳐야 합니다.

성경은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3)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신앙 교육을 철저히 받고 자란 자녀들은 계속 하나님 중심의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다음은 실천적인 신앙생활을 할 수 있도록 가르쳐야 합니다. 먼저 성수주일 할 것을 강조하여, 엿새 동안 열심히 일하고 이레째는 경건하게 하나님을 섬겨야 함을 가르쳐야 합니다. 또한 온전한 십일조를 드리도록 가르쳐야 합니다. 입술로는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리면서 십일조는 드리지 않는다면, 그 감사의 기도는 진실일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이 멜기세덱에게 십일조를 드린 그 신앙정신을 가르쳐야 합니다.

또한 사랑을 실천하도록 가르쳐야 합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독생자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어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죽게 하심으로 인류에 대한 사랑의 극치를 보여 주셨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의 실체가 자녀들의 삶 속에 나타나도록 가르쳐야 합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은 물론 이웃과 나라와 나아가서 자연까지 사랑하며 그 사랑을 실천하도록 가정에서 끊임없이 가르쳐야 합니다. 그러한 교육이 가정에서 잘 이루어질 때, 우리 사회는 보다 밝고 맑고 아름답게 변화되어 갈 것입니다.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 안에서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이 약속 있는 첫계명이니 이는 네가 잘 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에베소서 6:1-4)

5/12/2011

하나님의 뜻을 아는 길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누구든지 자기 인생에 있어서 부여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기를 원할 것입니다하나님께서는 우리 각자에 대하여 분명한 뜻을 가지고 계십니다이러므로 우리가 우리 생애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분명히 알아서 일생을 동업하고 동행하며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을까요?

첫째로우리 마음 속에 진실하게 하나님을 사랑하고 있느냐그렇지 않으냐를 물어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랑이시고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았기 때문에 언제나 사랑의 동기로 삽니다그래서 하나님을 사랑하든지 마귀를 사랑하든지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합니다이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가 목숨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하나님을 사랑하여야 합니다.

둘째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여 순복하겠다는 자세가 되어야 합니다. 달면 받아들이고 쓰면 뱉는 태도는 하나님께서 싫어하십니다하나님의 뜻이 무엇이든지간에설혹 손해가 나고 고통이 다가오더라도 절대로 순종하겠다는 마음의 각오와 헌신이 있을 때 하나님께서 인도해 주시는 것입니다

셋째로하나님께서는 마음의 소원을 일으켜서 하나님의 뜻을 알려 주십니다. 성경에는 "또 여호와(야웨)를 기뻐하라 저가 네 마음의 소원을 이루어 주시리로다"(시편37:4)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그러므로 마음의 소원을 무시해서는 안 됩니다.

넷째로그 소원이 하나님의 말씀과 일치되는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 생활의 거울이요척도입니다성경에는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길에 빛이니이다."(시편119:105)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마음에 구름 기둥과 불기둥처럼 소원이 올라왔을지라도 그것을 먼저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보아야 합니다.

다섯째로는이제는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간절히 기도할 때 마음 가운데 놀라운 평화와 기쁨이 다가오고 사랑과 평안이 마음을 지키면 그것은 분명히 하나님의 뜻입니다.
이렇게 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하나님의 뜻을 순복하겠다는 각오가 섰으며마음 속에 소원이 일어나고그 소원이 하나님 말씀에 일치될 뿐만 아니라 기도중에 평안을 가져오면자 이제 출발하십시오그것이 바로 여러분의 인생에 대한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런 즉 너희가 어떻게 행할 것을 자세히 주의하여 지혜없는 자 같이 말고 오직 지혜 있는 자같이 세월을 아끼라"(에베소서 5:15~16)

5/11/2011

뭘 그렇게 속이려 하는가, 당신이 약한 것 다 안다!

'금이 간 항아리'라는 우화를 아는가?
어떤 사람이 물지게에 각각 항아리 하나씩을 매달고 물을 날랐다. 오른쪽 항아리는 온전했지만, 왼쪽 항아리는 금이 가 있었다. 그래서 주인이 물을 받아서 집으로 오면 오른쪽 항아리에는 물이 차 있었으나, 왼쪽 항아리에는 물이 반 정도 비어 있었다.

금이 간 왼쪽 항아리는 주인님에게 너무 미안했다. 주인님에게 일을 두 번 시키는 것처럼 보여 너무 미안한 나머지 이렇게 말했다.

"주인님...제가 도저히 송구스러워서 견딜 수가 없습니다. 저는 금이 간 항아리입니다. 저를 버리시고 좋은 항라리 금이 안 간 깨끗한 항아리를 새로 사서 사용하세요"

그러자 주인이 금이 간 항아리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도 네가 금이 간 것 알고 있어. 그러나 나는 항라리를 바꿀 마음이 전혀 없단다. 우리가 물을 나르기 위해 지나온 길을 한번 보렴. 글미 가지 않은 항아리가 있는 오른쪽은 아무런 생물도 자라지 못하는 황무지가 됐구나. 하지만 네가 지나왔던 왼쪽은 한번 봐라. 네가 반쯤 금이 가서 물을 흘린 자리 위헤 아름다운 꽃이 피었고 풀이 자라고 있지 않니? 금이 간 네 모습 때문에 많은 샘영이 풍성하게 열매를 맺으며 자라고 있지 않니? 그러니 너를 어떻게 버릴 수 있겠니"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이다.
금이 좀 가면 어떤가? 금이 갔다고 일을 못하진 않는다. 하나님께서는 금이 간 그대로 우리를 사용하기를 원하신다.

이 좀 있으면 어떤가?
부족함이 있으면 어떤가?
완벽하게 일하는 사람이 사실 어디 있는가?
연약하면 좀 어떤가?
자신의 연약함을 토로하면 좀 어떤가 말이다.

우리는 나의 약함을 인정해야 한다.
다른 말로 하면 나의 죄인 됨을 인정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자기 자신의 약함을 토로하지 못하는 인생은 자기 의에 빠진 사람이다.
자신의 약함을 토로하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구할 줄 아는 믿음의 사람이 되기를 바란다.

밤낮 문제만 묵상하지 말고 하나님을 묵상하라

마귀는 크리스천에게 염려를 준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믿음을 무너뜨리기 위해서다.
또한 마귀는 항상 문제를 과장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크리스천들로 하여금 말씀을 묵상하는 것이 아니라 문제를 묵상하게 만든다...

크리스천 삶 가운데 고난과 의심의 안개가 있는가?
코앞으로 닥친 산적한 문제가 있는가?
시험의 구름이 몰려오고 있는가?
그러나 기억할 것은 이런 시험과 문제가 허구라는 점이다.

주님만 바라보라. 주님이 비추는 빛이 있으면, 모든 안개는 순식간에 사라지게 된다. "너는 네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가"(렘33:3). 마귀의 낙심께 하는 공격이 있을 때 우리는 더욱더 주님만 바라보아야 한다.

욥기 14장을 보면, 믿음의 사람 욥이 절망에 빠진다. 욥은 자신을 '꺾인 꽃', '사라지는 그림자', '해고되는 품꾼'에 비유한다. 하나같이 비참하고 안 되는 것과 자신을 동일시하고 있다.

마귀가 쓰는 방법 중의 하나가 성도들의 가까이해서는 안 될 분위기로 그들을 이끈다는 것이다. 욥은 마귀에게 속은 것이다.

예수님께서도 다른 것은 다 참아도 믿음 없는 것은 참지 않으셨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하시고 곧 일어나사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신대 아주 잔잔하게 되거늘"(마8:26)

예수님은 제자드을 믿음 없음을 꾸짖으셨다. 왜그런가? 믿음만큼 중요한 것은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항상 자신이 믿음 가운데 있는지 확인해야 한다.

하나님은 믿음의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믿음을 통해서 일하신다.
그러므로 다른 것은 빼앗겨도 믿음만은 빼앗겨서는 안된다.
<히스기야의기도중에서...>

행함이 있는 신앙생활

기독교 신앙 생활에 있어서 '행함'은 구원을 받기 위한 조건이 아닙니다. 그러나 이미 구원받았기 때문에 구원 받은 사람답게 행할 의무가 있는 것입니다구원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구원받았기 때문에 더 열심히 전도하고영생을 얻었기 때문에 더 열심히 기도하고,하나님의 백성이 되었기 때문에 더 훌륭한 신앙인이 되어야 합니다에베소서 4장에는 우리가 어떻게 행하여야 할지 그 모범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첫째로"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에베소서4:2,3)고 했습니다.온유라 함은 자기 자신을 길들이는 것을 말합니다.

자기 마음을 길들이고 겸비하게 되어서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고 서로 인내하고 용납해서 하나되게 하라는 말씀입니다마귀는 나뉘게 하여도 성령은 하나되게 합니다.

둘째이단과 사신을 요동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궤술과 간사한 유혹에 빠져 모든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치 않게 하려 함이라"(에베소서4:14)하나님의 은혜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보좌에 앉은 사람은 좌우로 요동하지 않습니다

오늘날 수많은 사람들이 이단과 사설에 현혹되어 하나님의 자녀된 위치를 상실하고 있습니다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외에는 구원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주시지 않았습니다이러므로 이단 사설에 요동치 않는 믿음을 가져야겠습니다.

셋째로 옛 사람을 벗어 버리라고 했습니다.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에베소서 4:22~24)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니 이제는 자녀답게 육신의 정욕안목의 정욕이생의 자랑을 좇아 살던 옛사람을 벗어버려야만 합니다.

옛사람은 거짓과 분노와 도적질과 추한 말은 덕을 세울 수가 없습니다그리고 탐욕과 도적질은 우상 숭배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된 사람은 이와같은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모든 일에 착하고 모든 일에 선하며 모범이 되는 생활을 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입은 부름에 합당하게 행하여" (에베소서 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