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식의 말씀’의 은사는 고린도전서 12장에 기술된 아홉 가지 은사 목록 가운데 두 번째로 나타나는 은사이다. 이 ‘지식의 말씀’은 성령에 의한 초자연적 계시로서 사람의 마음으로는 도저히 파악할 수 없는 어떤 형편 혹은 사람에 대한 사실 등 그의 현재, 과거에 관한 계시이다.
이 초자연적 지식은 우리의 영을 통해 우리 마음에 전달된다. 그것은 자주 우리의 마음속에 떠오르는 보통 생각들을 중단시킬 것이다. 이는 생각, 말, 이름, 느낌, 인상, 이상 혹은 속에 ‘내적 감지’로서 온다. 짧은 말이라 할지라도 이 지식의 말씀은 하나님이 주시는 어떤 형편에 대한 전체적 지식(이해)의 작은 한 부분이 된다.
그냥 ‘말씀의 은사’가 아닌 ‘지식의 말씀’의 은사
성경은 ‘말씀의 은사’(이러한 은사는 없다)라고 하지 않고 ‘지식의 말씀’의 은사라고 가르치고 있다. 그 이유는 이 은사가 ‘말씀’과 관련 된 것이 아니라 ‘지식’에 대한 것이기 때문이다. ‘지식’이란 저절로 생기지 않는다. 배우고 경험함으로서 습득된다. 그러나 성령의 은사로 나타나는 ‘지식의 말씀’의 은사는 연구와 체험에 의해 획득된 지식이 아니라 성령께서 특정한 때에 그 곳에서 내 영에 말씀해 주심으로 초자연적으로 생긴 지식이다. 그러므로 ‘지식의 말씀’의 은사라고 한다.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성경 본문을 잘 분석하고 명료하게 해석하며, 적절한 예화를 곁들여 설교를 은혜롭게 잘하는 목사님을 ‘말씀의 은사’를 받았다고 한다. 그러나 그것은 ‘은사’가 아니다. ‘은사’란 ‘성령의 나타남’(고전 12:7)으로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초자연적’ 능력이기 때문이다. 말씀을 잘 전하는 것은 ‘성령의 나타남’ 곧 초자연적 현상이 아니다. 따라서 그것은 ‘은사’라고 할 수 없다. 그래서 단순히 ‘말씀의 은사’라는 것은 없다는 것이다.
물론 설교에 성령의 능력이 함께 할 때 큰 은혜의 역사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설교 자체는 아무리 뛰어난 설교라 할지라도 서재에서 잘 준비한 설교는 ‘예언’의 말씀처럼 성령님이 직접적으로 주시는 즉흥적인 초자연적 선물이 아니므로 ‘은사’라고 말할 수 없다.
지식의 말씀이 주어진 성경상의 사례
성경에는 성령께서 계시해주신 ‘지식의 말씀’의 은사에 관한 사건이 많이 기록되어 있다. 먼저 구약 성경에서, 다음에 신약 성경에서 그 사례들을 찾아보자.
사무엘이 여호와께서 왕으로 택한 사울을 찾거나 사울의 잃어버렸던 나귀를 찾은 사건(삼상 9:15~20, 10:21~23)은 지식의 말씀이 잃어버린 사람이나 재산을 찾는 데 사용된 경우이다.
여권을 어디에 두었는지 생각이 안날 때, 그리고 통장을 분실했을 때 성령님께 ‘지식의 말씀’을 구해보라. ‘지식의 말씀’은 아주 평범해 보이는 일에도 정보를 가져다준다. 나의 아버지 되시는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필요에 관심을 두신다.
나단은 ‘지식의 말씀’을 받아서 다윗 왕과 밧세바의 은밀한 일을 알았다(삼하 12:7~13). 엘리사는 게하시가 거짓말 하는 것을 ‘지식의 말씀’으로 드러내었다(왕하 5:20~27). 또 엘리사는 초자연적 계시로 아람(시리아)군대의 진영의 위치를 알아내었고 그 결과 이스라엘이 승리했다(왕하 6:8~23).
예수님도 ‘지식의 말씀’의 은사를 사용하셨다. 그는 지상에 육체로 계실 동안 ‘전지’하지는 않으셨지만, 필요할 때마다 모든 지식을 성령을 통해 사용하실 수 있었다. 예수님은 ‘지식의 신’(the Spirit of knowledge)이신 성령께서 그의 육체에 충만히 임하여 계셨다.
“여호와의 신 곧 지혜와 총명의 신이요 모략과 재능의 신이요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신이 그 위에 강림하시리니”(사 11:2)
예수님이 중풍병자의 병을 고치시고 그의 죄까지 사해주셨을 때 율법학자들인 서기관들은 이를 마음에 참람하다고 생각하였다. 예수님은 ‘지식의 말씀’으로 그들의 마음의 상태를 아시고 ‘너희가 어찌하여 마음에 악한 생각을 하느냐’고 공개적으로 말씀하셨다(마 9:2~6).
이 계시의 은사로 예수님은 나다나엘을 만나기 훨씬 전부터 그가 무화과나무 아래 있는 것을 ‘보았으며’ 그가 어떤 사람인지도 아셨다(요 1:47~18, 29). 이처럼 ‘지식의 말씀’은 사람의 ‘거처’와 사람의 ‘마음’과 생각의 ‘상태’를 드러낼 수 있다.
또 예수님은 ‘지식의 말씀’으로 우물가의 여인에게 “네가 남편이 다섯이 있었으나 지금 있는 자는 네 남편이 아니다”라고 말씀하실 수 있었다. 그 때에 비로소 여인은 예수님을 메시아로 영접할 필요를 느끼게 되었으며, 마을에 들어가서 사람들에게 이렇게 증거 했다. “나의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 보라…”(요 4:17~18, 29).
오늘날 우리들도 예수님 안에서 이와 같은 초자연적 지식이 가능하다.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또한 이보다 큰 것도 하리니…”(요 14:12). 우리가 어떻게 예수님보다 더 큰 일을 할 수 있는가? 그 열쇠는 계시의 은사들을 발휘하여 일하도록 배우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사용하신 이 초자연적 지식은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라는 주님의 약속대로 초대교회에 지속적으로 나타났다. 그것은 베드로에 의해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부정을 드러내는 데 사용되었다(행 5:3).
또한 성령은 베드로에게 ‘지식의 말씀’을 나타내시어 그는 의심치 않고 욥바에 있는 그의 집 문 앞에서 그를 찾고 있는 세 사람과 함께 고넬료의 집으로 갔던 것이다(행 10:17~23). 바울은 루스드라에 있던 그 앉은뱅이가 구원받을 만한 믿음이 있는 것을 그의 영으로 ‘봤을 때’ 지식의 말씀이 동원되었다(행 14:9~10).
이와 같이 성경에는 ‘지식의 말씀’에 관한 사건이 다양하게 기록되어 있다. 이러한 지식은 인간적인 연구를 통하여 노력해서 얻은 지식이 아니요, 또 어떤 사람들이 은밀히 알려줘서 그 정보를 통해 얻은 지식도 아니다. 오직 성령님에 의해 계시된 초자연적 지식인 것이다.
‘지식의 말씀’의 은사의 주된 목적
성령에 의한 계시로서 믿는 자들에게 주어진 초자연적 ‘앎’(지식)은 주님의 백성들 가운데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시는 것에 조력하여 도울 것이다. 사람에게가 아니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함이다. 정확하고 효과 있게 사역하도록 우리를 돕는 것이 ‘지식의 말씀’의 은사다. 위험을 경고하기도 하고, 용기를 주기도 하며, 우리들의 매일의 삶과 사역 가운데 나를 ‘정로(正路)’로 인도하기 위하여 죄를 드러내기도 할 것이다.
이 놀라운 은사는 사람이 소유하여 물 쓰듯 마음대로 사용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하나님의 성령께서 이 은사를 갖고 계셔서 특정한 때에 필요를 따라 성령의 뜻대로 나타내 주신다. 그리하여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 안에서 풍성한 삶을 살도록 하신다.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능력대로 우리의 온갖 구하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이에게 교회 안에서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이 대대로 영원무궁하기를 원하노라 아멘.”(엡 3:20~21)
한 개인에 대한 지식의 말씀은 우리가 그들의 눈을 들여다 볼 때나 그들을 만질 때에 우리에게 종종 나타나는 것을 볼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믿음으로 성령께 귀를 기울이며 듣는 것을 배우는 것이다. 은사를 활용하기를 기대하며 믿음으로 나아가라! 은사를 사모하라! 그러면 주님의 약속대로 누구나 초자연적 지식, 곧 지식의 말씀의 은사를 체험할 수 있을 것이다.
6/16/2011
지혜의 말씀
‘지혜의 말씀’의 은사는 고린도전서 12장의 아홉 가지 성령의 은사들 가운데 가장 먼저 나오는 계시의 은사 가운데 하나다. 지혜는 문제를 해결하고 축복과 승리를 가져오는 기능이다. 따라서 우리의 삶에는 지식뿐만 아니라 지혜도 꼭 필요하다. 영국의 시인 윌리엄 쿠퍼(1731~1800)은 이런 말을 했다.
“지식은 자기가 많이 배운 것을 자랑하는 교만을 낳고, 지혜는 지식이 더 알지 못한 것에 대한 겸손을 낳는다. 공부를 많이 하면 지식을 쌓는 것이 사실이지만, 지식을 많이 쌓는다고 해서 지혜가 생기는 것은 아니다. 지식은 경험을 쌓음으로 알게 되는 힘이지만, 지혜는 근본적으로 하느님이 사람에게 주시는 선물이다. 세상에는 학문을 많이 닦은 어리석은 사람이 수두룩한가 하면, 공부를 많이 못했어도 지혜로운 사람이 꽤 많다.”
지식보다 더욱 귀한 것이 지혜다. 아무리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을지라도 만일 지혜가 부족하면 그 사람은 자신의 그 많은 지식을 충분히 활용하지 못한다. ‘지식’과 ‘지혜’의 차이점을 다음과 같이 설명할 수 있다:
“지식은 아는 것의 총칭을 가리키는 말이고, 지혜는 아는 지식을 바로 쓸 수 있는 지력을 의미한다. 지식이 인격의 한 구성요소인 지능에 속한다면 지혜는 전 인격에 속한다. 지식을 연장으로 상정한다면 지혜는 연장을 사용하는 손으로 상정할 수 있다. 지식의 측정은 IQ나 시험에 의해서 나타나지만 지혜의 감지는 행위와 태도와 표정에서 나타난다. 지식을 맛이라고 표현한다면
지혜는 멋이라 표현할 수 있다. 지식은 찬 기분을 주지만 지혜는 따뜻한 기분을 준다. 지식은 이해관계에 빠르지만 지혜는 이치관계에 민감하다. 지식은 스승에 의해서 배울 수 있지만 지혜는 하나님으로부터 선물로 받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솔로몬이 그랬던 것처럼 하나님께 지혜를 구해야 한다. ‘지혜의 말씀’이란 하나님께서 내 영에 당신의 말씀을 주심으로 생긴 ‘하나님의 지혜’를 뜻한다. 그리하여 인간의 지혜로는 도저히 풀 수 없는 문제를 능히 해결할 수 있게 된다.
이러한 초자연적인 ‘지혜의 말씀’의 은사는 특별한 상황을 만났을 때나 특별한 질문을 받았을 때, 또는 특별한 자연적, 혹은 초자연적인 지식의 일부를 이용할 때 갑작스럽고 기적적인 방법으로 주어지는 지혜이다. ‘지식의 말씀’처럼 이것도 전혀 인간의 능력이 아니며 전적인 하나님의 은사이다.
‘지식의 말씀’을 받았으면 ‘지혜의 말씀’을 구하라
‘지혜의 말씀’의 은사는 믿는 자들에게 성령에 의하여 초자연적 계시로 주어지는 지혜로서 자연적 지식(학습과 경험) 또는 초자연적 지식(지식의 말씀)을 기초로 한 실제적 행동에 필요한 지혜이다. ‘지혜의 말씀’이 보통 ‘지식의 말씀’의 은사와 함께 주어지는 경우가 많은 까닭이 여기에 있다.
‘지식의 말씀’ 은사와 ‘지혜의 말씀’ 은사는 종종 밀접하게 같이 움직인다. 어떤 경우에는 서로 분리할 수 없을 정도이다. 하나는 초자연적으로 어떤 사실을 계시해 주고, 또 하나는 계시된 사실들에 관하여 어떻게 무엇을 행할 것인가 지혜를 계시해 준다.
따라서 만약 ‘지식의 말씀’, 곧 초자연적 지식을 받았으면 그것을 가지고 무엇을 해야 할지 다시 하나님의 말씀, 곧 ‘지혜의 말씀’을 구하고 인내를 갖고서 기다려야 한다. ‘지혜의 말씀’은 하나님이 보여주신 것을 어떻게 해야 할지, 일어난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또는 주어진 상황 특히 믿음에 도전을 받았을 때 무엇을 어떻게 말해야 할지 보여 주기 때문이다.
지혜의 말씀이 오는 통로들
‘지혜의 말씀’ 은사는 어떤 방식으로 주어지는가? 이 은사 역시 ‘지식의 말씀’처럼 나의 영 속에 ‘깊이 있는 지식’이 갑작스런 영감에 의해 나타날 수도 있고, 꿈의 해석이나 환상, 비유 또는 상징을 통해서, 말에 관한 성령의 은사를 통해서, 그리고 드물긴 하지만 천사의 방문이나 하나님의 음성을 들음으로써 올 수 있다.
일반적으로 ‘지혜의 말씀’이란, 해결해야 할 문제가 있어 그 결정이 필요할 때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다. 이러한 말씀은 앞서 언급한 다양한 방식들을 통해 모임 가운데 있는 어느 한 사람에게 주어질 수도 있고, 교회 전체 안에 한꺼번에 주어질 수도 있다(행 6:2~3).
성경에 나오는 ‘지혜의 말씀’의 예
요셉이 바로 왕의 꿈을 해석할 때 이 능력은 육적인 지혜도 아니고 연구나 사전 준비로 얻은 지혜도 아니고 즉각적인 초자연적인 해답으로 얻은 것이었다(창 41:25~36). 요셉은 ‘바로 그 자리에서’ 알아차린 것이다. 이것은 지혜의 말씀이 ‘꿈의 해석’을 통해 주어진 사례이다.
하나님은 다니엘에게도 지혜의 말씀을 주셔서 그가 느브갓네살 왕에게 불려갔을 때 왕의 잊어버린 꿈과 그 꿈 해석(지혜)을 드러내었다. 이 비밀들은 ‘밤에 환상으로’ 다니엘에게 나타난 것이었다. 다니엘은 이렇게 말했다:
“영원 무궁히 하나님의 이름을 찬송할 것은 지혜와 권능이 그에게 있음이로다. 그는 지혜자에게 지혜를 주시고 지식자에게 총명을 주시는도다 그는 깊고 은밀한 일을 나타내시고…”(단 2:22).
그 결과 왕은 다니엘에게 엎드려 절하고 지혜로운 사람 다니엘로 하여금 왕궁에 거하며 바벨론을 다스리게 했다(단 2:46~49).
‘지혜의 말씀’의 은사는 예수님의 생애를 통하여 우리에게 놀라웁게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 어느 날 바리새인들이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쳐야 하는지 예수께 물어봄으로써 말로 올무를 씌우려고 했다. 그러나 궁지에 몰리셨던 예수님은 ‘지혜의 말씀’으로 답변하셨다.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쳐라”(마 22:15~22).
다음으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간음 중에 잡힌 여자를 끌고 와서 예수님을 시험할 때였다. “선생이여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나이다.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
그들은 만약 예수님이 돌로 치라고 하시면 예수 그리스도를 용서와 사랑이 없는 자로, 돌로 쳐서는 안 된다고 하시면 하나님의 법을 거역하는 자라고 매도할 계획이었다. 이때에도 예수님은 ‘지혜의 말씀’으로 대답하셨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요 8:1~9).
이와 같이 예수님은 어려운 일에 봉착할 때마다 하늘의 섬광 같은 ‘지혜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조금도 어려움이 없이 문제를 능히 해결해 나가셨다.
신자들에게 약속된 지혜의 말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과 복음 때문에 핍박을 당할 때는 이와 같이 ‘지혜의 말씀’을 주시겠다고 예수님은 우리에게 약속하셨다. 앞서 살펴본 바처럼 예수님 자신도 ‘지혜의 말씀’의 은사로서 종종 난관을 벗어 나셨기 때문이다.
“이 모든 일 전에 내 이름을 인하여 너희에게 손을 대어 핍박하며 회당과 옥에 넘겨주며 임금들과 관장들 앞에 끌어가려니와 이 일이 도리어 너희에게 증거가 되리라. 그러므로 너희는 변명할 것을 미리 연구치 않기로 결심하라 내가 너희의 모든 대적이 능히 대항하거나 변박할 수 없는 구재와 지혜(the right words and such wisdom)를 너희에게 주리라”(눅 21:12~15).
주님께서 여기에 약속하신 ‘구재와 지혜’가 바로 ‘지혜의 말씀의 은사’인 것이다. 우리가 갖고 있는 신앙과 믿음에 관해 세상의 완악한 사람들로부터 갑자기 위협당하고 도전 받을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놀라우신 성령의 지혜를 부어주심으로써 능히 그 난관을 극복하고 해결하게 해주시겠다는 약속인 것이다.
일상적인 때에도 사람의 능력으로는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어려운 일을 만날 때, 난관을 해결할 수 있는 아이디어가 떠오르질 않아 마음이 괴로울 때, 또한 예언적인 환상을 보거나 꿈을 꾸었지만 어떤 뜻인지를 도무지 알 수 없을 때, 홀로 머리를 싸매고 앉아 고민만 하지 말고 하나님께 ‘지혜의 말씀’을 구하라. 믿음으로 구하면 후하게 주시겠다는 약속이 주님의 모든 자녀들에게 주어져 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약 1:5).
지혜를 구하는 자는 누구든지 ‘지혜의 말씀’의 은사를 체험할 수 있다. 하지만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의 지식과 경험을 의지하여 활동하면서 성령의 은사를 구하지도, 기대하지도, 사모하지도 않는다. 성도들이 삶과 사역 속에서 이 놀라운 초자연적 은사를 경험하지 못하는 이유는 거기에 있다.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하기 때문이요...”(약 4:2).
“지식은 자기가 많이 배운 것을 자랑하는 교만을 낳고, 지혜는 지식이 더 알지 못한 것에 대한 겸손을 낳는다. 공부를 많이 하면 지식을 쌓는 것이 사실이지만, 지식을 많이 쌓는다고 해서 지혜가 생기는 것은 아니다. 지식은 경험을 쌓음으로 알게 되는 힘이지만, 지혜는 근본적으로 하느님이 사람에게 주시는 선물이다. 세상에는 학문을 많이 닦은 어리석은 사람이 수두룩한가 하면, 공부를 많이 못했어도 지혜로운 사람이 꽤 많다.”
지식보다 더욱 귀한 것이 지혜다. 아무리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을지라도 만일 지혜가 부족하면 그 사람은 자신의 그 많은 지식을 충분히 활용하지 못한다. ‘지식’과 ‘지혜’의 차이점을 다음과 같이 설명할 수 있다:
“지식은 아는 것의 총칭을 가리키는 말이고, 지혜는 아는 지식을 바로 쓸 수 있는 지력을 의미한다. 지식이 인격의 한 구성요소인 지능에 속한다면 지혜는 전 인격에 속한다. 지식을 연장으로 상정한다면 지혜는 연장을 사용하는 손으로 상정할 수 있다. 지식의 측정은 IQ나 시험에 의해서 나타나지만 지혜의 감지는 행위와 태도와 표정에서 나타난다. 지식을 맛이라고 표현한다면
지혜는 멋이라 표현할 수 있다. 지식은 찬 기분을 주지만 지혜는 따뜻한 기분을 준다. 지식은 이해관계에 빠르지만 지혜는 이치관계에 민감하다. 지식은 스승에 의해서 배울 수 있지만 지혜는 하나님으로부터 선물로 받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솔로몬이 그랬던 것처럼 하나님께 지혜를 구해야 한다. ‘지혜의 말씀’이란 하나님께서 내 영에 당신의 말씀을 주심으로 생긴 ‘하나님의 지혜’를 뜻한다. 그리하여 인간의 지혜로는 도저히 풀 수 없는 문제를 능히 해결할 수 있게 된다.
이러한 초자연적인 ‘지혜의 말씀’의 은사는 특별한 상황을 만났을 때나 특별한 질문을 받았을 때, 또는 특별한 자연적, 혹은 초자연적인 지식의 일부를 이용할 때 갑작스럽고 기적적인 방법으로 주어지는 지혜이다. ‘지식의 말씀’처럼 이것도 전혀 인간의 능력이 아니며 전적인 하나님의 은사이다.
‘지식의 말씀’을 받았으면 ‘지혜의 말씀’을 구하라
‘지혜의 말씀’의 은사는 믿는 자들에게 성령에 의하여 초자연적 계시로 주어지는 지혜로서 자연적 지식(학습과 경험) 또는 초자연적 지식(지식의 말씀)을 기초로 한 실제적 행동에 필요한 지혜이다. ‘지혜의 말씀’이 보통 ‘지식의 말씀’의 은사와 함께 주어지는 경우가 많은 까닭이 여기에 있다.
‘지식의 말씀’ 은사와 ‘지혜의 말씀’ 은사는 종종 밀접하게 같이 움직인다. 어떤 경우에는 서로 분리할 수 없을 정도이다. 하나는 초자연적으로 어떤 사실을 계시해 주고, 또 하나는 계시된 사실들에 관하여 어떻게 무엇을 행할 것인가 지혜를 계시해 준다.
따라서 만약 ‘지식의 말씀’, 곧 초자연적 지식을 받았으면 그것을 가지고 무엇을 해야 할지 다시 하나님의 말씀, 곧 ‘지혜의 말씀’을 구하고 인내를 갖고서 기다려야 한다. ‘지혜의 말씀’은 하나님이 보여주신 것을 어떻게 해야 할지, 일어난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또는 주어진 상황 특히 믿음에 도전을 받았을 때 무엇을 어떻게 말해야 할지 보여 주기 때문이다.
지혜의 말씀이 오는 통로들
‘지혜의 말씀’ 은사는 어떤 방식으로 주어지는가? 이 은사 역시 ‘지식의 말씀’처럼 나의 영 속에 ‘깊이 있는 지식’이 갑작스런 영감에 의해 나타날 수도 있고, 꿈의 해석이나 환상, 비유 또는 상징을 통해서, 말에 관한 성령의 은사를 통해서, 그리고 드물긴 하지만 천사의 방문이나 하나님의 음성을 들음으로써 올 수 있다.
일반적으로 ‘지혜의 말씀’이란, 해결해야 할 문제가 있어 그 결정이 필요할 때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다. 이러한 말씀은 앞서 언급한 다양한 방식들을 통해 모임 가운데 있는 어느 한 사람에게 주어질 수도 있고, 교회 전체 안에 한꺼번에 주어질 수도 있다(행 6:2~3).
성경에 나오는 ‘지혜의 말씀’의 예
요셉이 바로 왕의 꿈을 해석할 때 이 능력은 육적인 지혜도 아니고 연구나 사전 준비로 얻은 지혜도 아니고 즉각적인 초자연적인 해답으로 얻은 것이었다(창 41:25~36). 요셉은 ‘바로 그 자리에서’ 알아차린 것이다. 이것은 지혜의 말씀이 ‘꿈의 해석’을 통해 주어진 사례이다.
하나님은 다니엘에게도 지혜의 말씀을 주셔서 그가 느브갓네살 왕에게 불려갔을 때 왕의 잊어버린 꿈과 그 꿈 해석(지혜)을 드러내었다. 이 비밀들은 ‘밤에 환상으로’ 다니엘에게 나타난 것이었다. 다니엘은 이렇게 말했다:
“영원 무궁히 하나님의 이름을 찬송할 것은 지혜와 권능이 그에게 있음이로다. 그는 지혜자에게 지혜를 주시고 지식자에게 총명을 주시는도다 그는 깊고 은밀한 일을 나타내시고…”(단 2:22).
그 결과 왕은 다니엘에게 엎드려 절하고 지혜로운 사람 다니엘로 하여금 왕궁에 거하며 바벨론을 다스리게 했다(단 2:46~49).
‘지혜의 말씀’의 은사는 예수님의 생애를 통하여 우리에게 놀라웁게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 어느 날 바리새인들이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쳐야 하는지 예수께 물어봄으로써 말로 올무를 씌우려고 했다. 그러나 궁지에 몰리셨던 예수님은 ‘지혜의 말씀’으로 답변하셨다.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쳐라”(마 22:15~22).
다음으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간음 중에 잡힌 여자를 끌고 와서 예수님을 시험할 때였다. “선생이여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나이다.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
그들은 만약 예수님이 돌로 치라고 하시면 예수 그리스도를 용서와 사랑이 없는 자로, 돌로 쳐서는 안 된다고 하시면 하나님의 법을 거역하는 자라고 매도할 계획이었다. 이때에도 예수님은 ‘지혜의 말씀’으로 대답하셨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요 8:1~9).
이와 같이 예수님은 어려운 일에 봉착할 때마다 하늘의 섬광 같은 ‘지혜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조금도 어려움이 없이 문제를 능히 해결해 나가셨다.
신자들에게 약속된 지혜의 말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과 복음 때문에 핍박을 당할 때는 이와 같이 ‘지혜의 말씀’을 주시겠다고 예수님은 우리에게 약속하셨다. 앞서 살펴본 바처럼 예수님 자신도 ‘지혜의 말씀’의 은사로서 종종 난관을 벗어 나셨기 때문이다.
“이 모든 일 전에 내 이름을 인하여 너희에게 손을 대어 핍박하며 회당과 옥에 넘겨주며 임금들과 관장들 앞에 끌어가려니와 이 일이 도리어 너희에게 증거가 되리라. 그러므로 너희는 변명할 것을 미리 연구치 않기로 결심하라 내가 너희의 모든 대적이 능히 대항하거나 변박할 수 없는 구재와 지혜(the right words and such wisdom)를 너희에게 주리라”(눅 21:12~15).
주님께서 여기에 약속하신 ‘구재와 지혜’가 바로 ‘지혜의 말씀의 은사’인 것이다. 우리가 갖고 있는 신앙과 믿음에 관해 세상의 완악한 사람들로부터 갑자기 위협당하고 도전 받을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놀라우신 성령의 지혜를 부어주심으로써 능히 그 난관을 극복하고 해결하게 해주시겠다는 약속인 것이다.
일상적인 때에도 사람의 능력으로는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어려운 일을 만날 때, 난관을 해결할 수 있는 아이디어가 떠오르질 않아 마음이 괴로울 때, 또한 예언적인 환상을 보거나 꿈을 꾸었지만 어떤 뜻인지를 도무지 알 수 없을 때, 홀로 머리를 싸매고 앉아 고민만 하지 말고 하나님께 ‘지혜의 말씀’을 구하라. 믿음으로 구하면 후하게 주시겠다는 약속이 주님의 모든 자녀들에게 주어져 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약 1:5).
지혜를 구하는 자는 누구든지 ‘지혜의 말씀’의 은사를 체험할 수 있다. 하지만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의 지식과 경험을 의지하여 활동하면서 성령의 은사를 구하지도, 기대하지도, 사모하지도 않는다. 성도들이 삶과 사역 속에서 이 놀라운 초자연적 은사를 경험하지 못하는 이유는 거기에 있다.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하기 때문이요...”(약 4:2).
용서의 체험
수많은 사람들이 의식적으로, 형식적으로 교회에 왔다갔다 하므로 예수님의 용서함에 대한 은혜를 실제로 체험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죄를 짓고 불의하며 버림을 받아야 마땅함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사랑으로 용서를 받았다는 용서의 체험을 하지 못하면 영적인 세계 속으로 깊이 들어갈 수 없습니다.
우리들이 매일 세수를 하고 손발을 씻어서 먼지와 티끌을 씻어내는 것처럼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알게 모르게 짓는 죄를 매일같이 용서받고, 주님의 깊은 용서 속에 들어가 예수님의 보혈을 통한 용서에 대해 깊이 깨달으면 깨달을수록 여러분과 나의 신앙이 더 깊은 세계로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통한 하나님의 용서를 체험해야 할뿐만 아니라 나아가서 자기가 자기 자신을 용서해 주어야 합니다.
저는 육신적으로, 정신적으로 깊이 병든 한 자매님과 신앙 상담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 자매님과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나는 그 자매님의 병의 원인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자매님의 남편은 장사를 하시는 분인데 어느 날 장사차 남편과 함께 시골을 다녀왔더니 그 동안 청상과부로 자기만 바라보고 살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던 것입니다. 임종도 못 지키고 평생 고생만 시켜 드린 친정 어머니를 생각하니 자매님은 자신이 죽도록 미워 자신을 학대했습니다. 이것이 자매님에게 깊은 병을 유발하게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 자매님에게 하나님께서는 이미 자매님을 용서하셨는데 자매님은 자신을 용서하지 않으면 그것은 하나님을 모독하는 행위라고 하자, 자매님은 깜짝 놀라면서, “하나님께서 나 같은 불효자도 용서하십니까? 라고 물었습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모든 죄를 용서하셨음을 깨달은 자매님은 자기 자신도 용서하게 되어 자책과 원망과 탄식 대신에 마음 속에 넘치는 기쁨을 소유하게 되었습니다. 용서가 그의 병든 생애를 변화시켰던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깊은 용서를 받고 난 뒤에는 나 자신을 용서하고 나아가서 이웃을 용서하는 생활을 하게 될 때 생활에 변화가 다가올 뿐 아니라 영적으로도 성장하게 되는 것입니다.
“너희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같이 붉을지라도 양털같이 되리라” (이사야 1:18)
피드 구독하기:
글 (At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