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7/2011

선지자의 예언의 영을 개발하는 것에 대해서

우리가 예배하는 순간에는 예배 중에 예언의 영이 임할 때가 있다. 그래서 우리가 주님과 함께 안식하는 것을 배워야 할 때가 있다. 왜냐하면 이러한 순간에서 우리가 성령님 안에서 부드러운 마음 가운데 머무는 것이 필요하다. 그렇게 하면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와 지속적인 사랑의 관계를 가질 수 있다.

우리가 이런 시간에 서두르거나 할 필요가 없다. 그래서 이러한 순간에 우리의 정서가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우리가 어쩔 때는 서둘러서 진행할 때가 있다. 이럴 때는 우리가 안식이 필요한 것이다.

제자들이 가난한 자에게 돈을 주기 원했을 때,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길 가난한 자는 항상 너희와 함께 있으나 나는 너희와 함께 있지 않다.” 라고 말씀하셨다. 우리가 여기서 배워야 할 영원한 원리가 있다. 어디서 어떻게 주님이 나타나실지 상관없이 우리가 주님의 임재를 경험할 때, 주님 안에서 기다리고 머무는 것이 필요하다.

많은 경우 우리가 주님의 임재 가운데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것을 느낄 때가 있다. 그러나 성경 안에서는 우리가 항상 무언가 많이 해야 할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

우리가 예배할 때, 주님이 임하시면 그것으로 족하다. 그냥 머물면 된다우리가 꼭, 예언의 영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치유의 역사가 일어난 것은 아니지만 그냥 주님의 임재가 머무신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주님께서 함께 하시면 뭔가 많이 할 필요가 없다. 그러한 순간에서 아주 중요한 것은 주님께 사랑의 노래를 불러 드리는 것이다.

찬양 사역자들을 통하여 예언적인 영을 개발하길 원한다

찬양의 순간들이 있을 때, 주님께서 친히 나타나시는 것이 우리에게 가장 큰 상급이다. 저는 항상 주님의 임재를 높이 여길 것이다. 그것은 예언의 영보다 더 중요한 것이다. 그리고 치유보다도 더 중요한 것이다. 물론 다 좋아하지만, 우리가 가장 큰 갈망은 주님께서 임하시면 그냥 거기서 머물고 기다리는 것이다.

이러한 순간에 여러분이 이것을 경험하시면 영원히 여러분의 영 가운데 이것을 기억하게 될 것이다. 주님의 임재로 인하여 여러분의 영에 각인이 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순간에는 주님이시고, 예언이고, 치유인지 분별할 필요가 있다.

여러분이 또 아셔야 할 것이 있는데오늘 이곳에 머물렀던 영은 제가 설교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느꼈다. 무엇을 하고 싶었냐면 마이크를 잡고 말씀을 열고, 그냥 찬양 사역자와 말씀 가지고 순환하기를 원했다. 제가 말씀을 가지고 찬양 사역자에게 읽어 드리고찬양 사역자는 그 말씀을 가지고 찬양을 하는 것이다. 확실하게 우리가 그렇게 할 수 있는 주님의 임재가 이곳에 있었다. 그럴 때는 우리가 서두르지 않는 것을 배워야 할 필요가 있다.

다니엘서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준다. 예언의 영을 개발하는 것이다특히 젊은이들에게 말씀드리겠다. 격려가 안 될지도 모르지만 여러분이 이것을 취하십시오. 이것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면, 여러분의 나이가 50, 60, 70대에 접어들면 천사와의 놀라운 만남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 말이 지금 경험하지 못한다는 말은 아니다. 그러나 우리가 다니엘서를 보면 예언의 영이 개발되는 과정을 볼 수가 있다. 우리가 예언의 은사를 받는 것은 한 가지이지만, 예언의 영을 개발하는 것도 있다. 그러나 또한 선지자가 되는 것은 다른 이야기이다. 예수님께서는 확실하게 다니엘이 선지자였다고 말씀하셨다.

구체적으로 다니엘이 예언한 것 중 하나는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선 것을 보거든(24:15)이다. 멸망의 가증한 것을 말씀한 것은 인간 역사의 마지막 어느 시점에서 적그리스도가 우상을 가지고 유대인을 위하여 만든 성전 안으로 들어가게 된다.

그리고 유대인들은 이렇게 말한다. “내가 이제 하나님이니 너희는 나를 하나님으로 섬겨라.” 그리고 그 성전 안에 보좌를 만든다. 그러면서 그들에게 자기를 섬기라고 강요한다. 그 순간 이후부터 그를 하나님으로 섬기지 않는 자는 죽임을 당하게 된다. 그를 추적하고, 짐승의 표를 받도록 강요한다.

이 사람은 법도 없고, 굉장히 폭행적으로 나갈 것이다. 다니엘은 이것을 이미 다 예견했다. 그리고 그것을 멸망의 가증한 것이라고 말했다. 예수님께서 여기에 대해 또 예언하신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은 다니엘이 여기에 대해서 말씀하셨을 때, 선지자로써 얘기하신 것이다. 2장에서 말씀하신 또 한 사람의 사람은 노아였다. (24:37) "그때와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우리는 이 말씀을 읽는 경우 노아의 시대에 악함만을 읽을 때가 있다많은 경우 우리가 그렇게 생각한다. 그래서 우리가 노아의 시기에 있었던 좋은 점은 생각하지 않는 경우가 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노아의 때와 같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노아의 때에는 좋은 점도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것에 대해서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가 알 필요가 있다. 여러분은 아시는가노아가 방주를 만드는데 120년이 걸렸다. 날마다 사람들이 와서 그를 멸시했다. 왜냐하면 노아의 시대에는 비라는 개념이 없었다.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말씀하신다. “노아야, 7일 후에는 비가 내리면서 내가 이 나라를 멸망시키겠다. 너와 가족들은 방주 안으로 들어가라. 그리고 문을 닫아라.” 110년이 지난 뒤에 사람들에게 어리석었던 그 모습이 갑자기 하나님의 지혜가 되었다.

여러분 이걸 하시길 바란다. 노아는 자기 스스로 그 방주를 짓지 않았다. 하나님께서는 노아에게 그 주신 일에 대하여 일을 할 수 있도록 은혜를 주셨다. 그래서 우리가 노아의 때를 생각하면 악함만을 생각하지만, 또한 좋은 면도 보아야 한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 기도운동을 일으킬 수가 없다

그러나 기도운동이 이 재림 때, 방주 역할을 할 것이다. 우리가 여기에 대해서 깨달아야 한다. 우리가 이러한 삶의 모습을 살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하다. 하나님께서는 다시 방주를 짓고 계십니다. 이 방주는 사람을 구원할 필요가 있다.

다니엘이 무엇을 예언했고, 어떻게 개발했을까?

하나님께서는 다니엘을 높이며 선지자라고 부른다. 저는 여기서 질문을 한다. “다니엘이 무슨 예언을 했을까? 그래서 선지자라는 부름을 받았을까? 어떻게 선지자로써 그것을 개발했을까? 언젠가 나도 선지자가 되고 싶은데...”

여러분의 삶 가운데도 예언의 영을 개발하시길 격려한다. 다니엘 이름의 의미는 하나님이 나의 심판자이다이다. 그래서 이 다니엘 책이 우리에게 아주 중요하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어떻게 역사하시는지 보여준다. 그래서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보여준다.

하나님의 갈망이 무엇인지를 보여준다. 그래서 우리가 다니엘서를 보면 다니엘이 심판의 때에 대해서 얘기한다. 그리고 심판 때에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도 보여준다.

마지막 하나님께서 보낸 선지자가 예레미야이다. 그래서 유다의 사람들에게 그 선지자가 말하길 포로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러한 말을 함으로 인하여 예레미야는 우물 웅덩이에 빠지게 된다. 왜냐하면 그러한 말을 듣는 것을 왕이 싫어했기 때문이다.

여기서 배울 수 있는 원리 하나는 예언의 영을 개발하는 것에는 때로는 사람에게 인기가 없는 말을 해야 할 때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이것을 사랑으로 부드럽게 말할 필요가 있다.

제가 예레미야 선지자에게 가장 고마워하는 것은 그는 하나님의 사랑의 마음 때문에 울면서 얘기했다. 사람들에게 이러한 일을 하나님께서 백성들에게 행하는 것이 얼마나 마음이 아픈 것인지를 보여줬다.

하나님이 아파하는 마음이 백성들을 돌이켰어야 하는데, 그들은 돌이키지 않았다. 마치 말다툼하는 것과 같다. 그 말다툼 안에 아픔이 있다. 이것은 다른 사람을 기교를 부리기 위해서 흘린 눈물이 아니었다. 아픔, 슬픔의 눈물이었다. 그래서 이 관계를 회복시키려는 마지막 시도이다. (23)

예수님께서는 우는 마음으로 말씀하신다. 예수님께서 울면서 말씀하신다. “예루살렘아, 너에게 보내는 선지자들을 죽이고 내가 얼마나 어미가 닭을 품듯이 품는데 너희는 오지 않는구나.” 우리는 주님 마음에 아픔을 볼 줄 알아야 한다.

우리는 그 장을 읽을 때, 예수님께서 울면서 부르짖는 마음을 볼 줄 알아야 한다. “예루살렘아, 네가 가고 있는 이 파괴적인 길에서 돌이키라.” 그리고서는 또한 기회를 주신다. “내가 이 포도주를 너희와 함께 마시지 않으리라. 너희가 다시는 나를 보지 못하리라. 너희가 다시 오는 자에 대하여 송축하기 전에는 다시는 나를 보지 못하리라.”

우리는 이 부드러운 마음을 개발할 필요가 있다. 우리 가운데는 이 예언의 말은 하지만 부드러운 마음이 없는 것을 경험할 때가 있다. 그들의 말은 강퍅하고 거칠고 어렵다. 주님께서는 선지자들을 찾고 계신다. 부드럽고 울 수 있는 마음, 하나님의 연인의 모습을 나타내는 사람... 그래서 사람들이 그 선지자의 말을 들을 때, 마치 연인인 주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 필요하다. 주님은 이러한 사람을 찾고 계신다.

다니엘서 1장에는 사람들이 포로가 된다. 포로가 된 상태에서 다니엘은 두 가지 큰 은사를 받는다. 한 가지는 이미 가졌는데 이 기간 동안에 다니엘은 10일 동안 금식하려 한다. 왕이 주는 그 음식으로 인하여 자기 자신들을 더럽히려 하지 않는다. 그런데 왕의 음식을 먹지 않는 것에는 또 한 가지의 이유가 있다.

그 당시에는 왕의 식탁에서 같이 먹을 때는 그의 신도 믿는다는 표현이 되기 때문이다. 그의 결정에 믿는다는 표현, 그리고 그것을 전적으로 후원한다는 표현이 된다. 다니엘은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는 자기 마음 가운데 있는 그 굶주림을 다른 방법으로 채우고자 했다.

우리가 여기에 대해 다 갈망하는 분들이다. 하나님의 것에 관하여 갈망이 있으신 분들이다. 그런데 때로는 우리의 육신이 세상적인 것에 배고파하고 굶주려 할 때가 있다. 그러나 세상적인 것들은 결코 우리를 만족시킬 수 없다.

다니엘이 여러 가지 방법 중에도 예를 들어, 왕이 준 새 이름을 거부할 수도 있었다. 아니면 왕이 주는 그 교육을 거부할 수 있었다. 그런데 결국 다니엘은 자기의 그 육신적인 정욕 부분에서 싸운다. 식욕을 가지고 싸운다.

미국에서는 이런 표현이 있다. ,녀가 서로 데이트하면서 알아가는 기간에 남자의 마음을 사로잡으려면 그의 배를 먼저 채워주라는 표현이 있다. 이 말은 여자가 음식을 잘하면 그 남자를 가질 수 있다는 말이다.

다니엘이 아주 중요한 결정을 내렸다. 자기의 그 육신적인 식욕으로 인하여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을 결정하지 않았다. 우리가 예언사역에서 볼 수 있는 한 가지는 금식하는 삶의 모습이다. 우리는 우리의 식욕을 다스릴 줄 알아야 하고, 절제할 줄 알아야 한다. 물론 그렇다고 완벽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우리가 그것을 향해 달려간다.

우리가 거부할 수 있는 것은 거부해야 한다. 그래서 주님의 것을 더 붙잡는 것이다. 사실 이 의미는 우리의 시간과 우리의 재물을 가지고 무엇을 하는지에 따라 우리가 중요한 결정을 내리는 것이다.

우리의 시간과 돈이 우리를 지배하지 않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시간과 돈이 우리에게 어떻게 살게 하기에 규정을 내리지 않게 해야 한다. 우리는 시간과 돈에 대해서 청지기가 되어야 한다. 좋은 열매 맺는데 사용해야 한다.

다니엘과 그 친구들은 10일 동안 금식을 하기로 중요한 결정을 한다. 10일 후에는 다른 남자들보다 강해보였고, 더 근육이 있어 보였다. 이것은 사실 정상이 아니다. 10일 동안 야채만 드셔 보셨는가? 더 좋아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연약해 보인다.

10일 동안 이들에게 뭔가 초자연적인 것들이 일어난 것이다. 그들은 그들의 작은 결정을 주님 앞에 내렸다. 하나님께서는 더 큰 일을 행하셨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삶의 모습이 되는 것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한다. 그 다음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것이다.

다니엘에게 주신 두 번째 은사는 17절과 21절에서 볼 수 있다. (1:17) 하나님께서는 다니엘과 그 친구들에게 지식을 얻게 하셨다. 축복을 부어주셨다. 이러한 금식하는 삶을 선택하는 것에 대해서 축복해 주셨다. 그들의 삶 가운데 은혜를 더하셨다.

그 은혜가 모든 학문과 재주에 명철하게 하시며 하나님께서 그에게 지혜를 주셨다. 계시의 영을 주셨다. 그래서 그들이 모든 이상과 몽조를 깨달아 알게 되었다. 이 상급을 보아라! 10일 동안 금식했더니, 하나님께서 하실 일을 행하시고 예언의 영이 증가되는 사연들을 보게 된다.

금식과 기도의 삶은 예언의 영을 증가시키게 된다. 정말 그렇다

오늘 날 이 마지막 때에 가르침에는 많은 혼돈이 있는 것 같다. 많은 변론과 혼돈이 있는 것 같다. 저는 이러한 혼돈의 모습을 보면서 마음이 슬프다. 머리로만 가지고 있는 지식 때문인 것 같다.

마지막 때에 대해서 참으로 깨달은 많은 분들은 다니엘, 예수님, 바울, 요한.... 이다. 이러한 사람들은 다 금식하는 삶의 모습을 가졌다. 그들은 전부 기도하고 금식하는 삶의 모습을 가졌다.

제가 이해할 수 없는 것 중 하나는 마지막 때에 대해서 깨달음을 갖고자 하면서도 전혀 기도하거나 금식하지 않는 모습이다. 이것이 제가 볼 때는 혼돈의 뿔이라고 본다. 이러한 삶의 모습이 없이 머리로만 아는 지식만을 전하는 자들이 문제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많은 혼돈이 있다고 생각한다.

(1:27) "다니엘은 고레스 왕 원년까지 있으니라" 꿈에 대한 깨달음, 이 세상에 있는 탐욕에 대해 거부하는 모습, 그리고 금식하고 기도하는 삶의 모습 그러한 식으로 그때까지 계속 산 것이다. 그러한 스타일로 고레스 왕 원년까지 살았다는 것이다.

고레스 왕은 60년 뒤에 나타난 왕이다. 그러면 여기에 의미는 다니엘은 이러한 삶의 모습을 60여년 살았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금식하고 기도하는 삶의 그 모습을 은사로 주셨다. 다니엘은 하고 싶을 때, 하고 안하고 싶을 때는 안 했다. 아름답게 마치는 것을 의미한다. 15, 20세 때 하던 것을 70, 80대 때 하는 것이다. 이것은 아주 중요하다.

지금 선지자 사역을 하시는 많은 분은 이것을 승진하는 사다리로 보는 자들이 있다. “내가 이 경지에 이르면 더 이상 주님 앞에 머물 필요도 없다. 내게 이제 기름부으심이 있으니까..” 

 여기에 대해서 명확히 말씀드리겠다. 목사님이나 사역자에게 있는 그 기름부음은 제가 믿기에는 그들에게 말씀을 전하는 백성들에게 축복이 되기 위하여 받은 것이다.

예언 사역의 목적은 자기 자신을 어떠한 높은 위치에 두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섬김을 받는 것이 아니다. 목적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사랑 안에서 성장하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예언하는 것을 배우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개발하는 것을 배우는 것이다.

내가 해야 할 일이 없다고 느낄 때가 제대로 배운 것이다. 그것이 목적이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승진의 사다리는 없다. 그러한 것에 빠지지 말라. 여러분이 그런 것에 빠지면 여러분이 파괴되고 다른 사람도 멸망된다.

우리가 가진 모든 은사는 다른 사람을 위한 것이다

다니엘서 2, 3장을 보시면 선지자의 삶의 모습을 개발하는 데는 압박감과 어려운 환경 와중에 그것이 개발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삶의 모습이다.

여러분, 최근 인생을 돌이켜 보셨는가? 모든 것이 완벽하지 않다. 주님께서는 그러한 상황을 주신다. 예언하고 실수할 때도 있다. 그럴 때, 속으로 한숨 쉬고 신음할 수도 있다. 이러면서 고통을 통과한다. 실수하는 아픔, 그리고 어려움을 인내한다. 기다린다.

제가 예언사역에서 가장 어려웠던 것은 기다리는 것이었다. 기다리는 것을 배우는 것은 어렵다. 훈련이 필요하다. 그리고 안내가 필요하다. 그리고 배우고자 하는 마음이 또한 필요하다.

다니엘서 2장과 3장에는 압박감과 어려운 가운데서 어떻게 우리의 예언의 영이 개발되는가를 배운다. 주님께서 여러분의 영에게 말씀을 주시고, 말하라고 하신다. 그런데 그것이 결코 백성들에게는 이루어지지 않을 것 같은 내용... 그러나 그것을 여러분이 혼자 받았다.

어느 누구도 여러분의 말을 믿지 않을 것 같은 상황..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것을 주셨다. 그것을 가지고 혼자 도망칠 수가 없다. 백성들 사이에 계속 머물러야 한다. 그러면서 어느 누구도 믿어주지 않는 하나님의 말씀을 혼자 붙잡아야 한다. 이러한 것을 통하여 예언 사역에 큰 힘을 갖게 된다.

다니엘서 2,3장의 목적은 가장 높으신 하나님의 관한 계시를 주는 것이다. 예언 사역을 개발하는 아주 중요한 시점이다. 이것은 저와 여러분에 대한 내용이 아니다. 가장 높으신 주님에 관한 내용이다. 주님께서 무얼 말씀하시는가가 핵심이다.

주님께서 어느 날 새벽에 저를 깨우셨다. 다니엘 7장에서부터 저에게 말씀하시기 시작했다. 다니엘서 7장 앞부분에는 다니엘이 폭풍을 보고 꿈을 꾼다. 그래서 이 꿈에 보면 네 바람을 본다. 그래서 큰 바다에 몰려온다. 그리고 그 바다에서는 큰 짐승 넷이 나온다. 그리고 이 네 짐승은 네 개의 다른 왕궁을 얘기한다. 그리고 다니엘의 이 꿈에서 4개의 왕국이 진행되는 것처럼 역사에도 진행되었다. 다니엘이 본 그대로 진행 됐다.

또 한 가지 더 말할 것은 많은 경우 예언 사역을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받는다. 그래서 우리를 향한 어떤 진리가 된다. 그래서 우리의 관심을 사로잡게 된다. 나중에 어떠한 일이 일어나게 된다는 것.. 우리는 믿음으로 그것을 동의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그것 자체가 하나님의 참된 말씀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11장과 12장 말씀에는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말씀이 있다. 그러나 7장 내용에서는 많은 내용이 이미 이루어진 것도 있다. 다니엘이 본 것은 부분적으로 이미 이루어졌는데, 앞으로 올 내용에 대해서는 우리가 의심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저를 깨우시면서 보여주셨다.

그리고 말씀하셨다. “지금 이 세상은 변화를 갖게 될 것이다. 그래서 모든 세상에 있는 것이 지역적인 것에서 세계적인 분야로 바뀔 것이다.”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너는 이상한 동력의 모습을 보게 될 것이다. 경쟁적인 회사들이 같이 동역하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그리고 어떤 사람들이 결정을 내리는데, 사업계에 재정으로 결정을 내리는 것이 아니라 파워를 갖기 위해 결정을 내리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이것은 아주 새로운 수준의 결정이다. 얼마나 많은 파워를 누리는 가로 가게 되는 것이다.”

"사람들이 어떤 위력을 갖기 위해서는 돈을 잃는 것도 할 수 있게 된다. 그래서 증권, 재정 분야의 굴곡이 굉장히 심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올라가고 내려가는 것을 알아 맞히지 못할 것이다. 내가 돈더러 명령하여 일어나서 많은 육신을 취하라고 명령했다.”

어느 한 지도자가 어느 한 왕국을 가지고, 다른 지도자에게 주는 그런 것이 아니다. 이것이 느부갓네살 왕이 왕국을 위임하는 것이 아니다. 이 내용은 바벨론 왕국이 다 멸망하고, 다른 왕국이 세워지는 것을 얘기한다.

오늘 날 이와 같은 변동이 이 세상에서 일어나고 있다. 어느 한 왕국이 다 무너지고 다른 왕국이 세워지는 것이다. 그리고 세계적인 수준으로 세워지게 된다.

이것을 보라. 시대의 표적과 이적을 볼 줄 알아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마지막 때, 그것들을 일으키고 계신다. 어느 왕국이 완전히 없어지는 것이 있고, 다른 면에서는 세계적으로 운행하시는 것이 있다. 왜냐하면 적그리스도는 세계적인 지도자여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주님의 아들도 세계적인 지도자이다.

,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은 열방의 경제가 세계적으로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한다. 이 모든 것들이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금은 서로가 협력하는 것을 배워야 한다고 하신다.

다른 동역 나라가 희생되면서 그렇게 된다면, 그들의 그 부유함은 사실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런 것은 참 어려운 시기이다. 이러한 변동은 아주 폭력적으로 여러 가지 극등이 있다.

이 마지막 때가 지금 속히 임하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예언의 영을 개발해야 한다. 그래서 이 어려운 상황에서 우리가 어떻게 통과될 수 있는가를 알아야 한다. 공의가 지금 일어나면서 위력을 갖게 된다.

경제적인 공의를 상징할 수도 있고, 정치적인 것을 상징할 수도 있다. 이 공의 육신적인 것을 취할 것이다. 이 의미는 사람들에게 위로가 되는 그러한 것들을 이 공의가 취한다는 것이다. , 어떤 사람들은 모든 것을 잃어버리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우리가 이 부유함이 어느 한 시점에서 다른 곳으로 옮겨지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예를 들어, 불의한 자의 재력을 가지고 경건한 자에게 맡겨주실 것이다. 그래서 지금 여기서도 어떤 분들은 그야말로 수억대의 액수를 채워주실 분들이 계신다. 하나님께서 수억 원을 주는 모습을 볼 자도 계신다. 그래서 그 재정을 가지고 이 마지막 때 기도운동을 후원하는 것이다.

선교사들을 후원하며, 가난한 자들에게 먹을 것을 주는 것이다. 이런 것이 이루기 위해서는 예언의 영이 꼭 필요하다. 그것으로 말미암아 멸망하지 않아야 한다. 이것에 대해 주님으로부터 약속을 받은 자들은 지금 일어나라!

하늘 보좌에 앉은 신앙’

지금 우리는 어디에 있습니까이 질문에 올바른 대답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성공적인 신앙 생활을 하는 사람입니다.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에베소서 2:5,6)

이 말씀처럼 우리는 허물과 죄로 말미암아 죽었던 사람입니다죽은 사람은 스스로 살아날 수 없으나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습니다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넣어 주셨습니다

때문에 예수님께서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너희가 내 안에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요한복음 14:20)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이렇게 하여 예수님 안에 거하게 된 우리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목박힐 때 함께 못박혔고예수님께서 장사되셨을 때 우리도 장사되었으며예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새로운 생명으로 부활하여 하늘 보좌 위에 앉으셨을 떄 우리도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 보좌에 앉게 된 것입니다.
이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여러분은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며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고그리스도 안에서 함께 죽고 함께 장사 지내고 함께 살아나서 지금은 하나님 편에 앉아 계십니다지금 여러분은 합리적으로 천국의 보좌 위에 앉아 있습니다여러분과 천국의 사이에는 오직 이 육신의 장막집이 무너지면 우리가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게 되는 것입니다이러므로 우리는 죄인도 아니요,이방인도 아니요세상에 소망 없이 버림받은 나그네도 아닙니다우리는 이와 같은 제사장들이요하나님의 자녀들이요영생을 얻은 사람들이요새 하늘과 새 땅의 주인들입니다그러므로 우리는 하늘 보좌에 앉은 신앙으로 살아 나가야 됩니다.
세상에 부귀 영화와 지위와 청춘은 하루 아침에 쏜살처럼 날아가 버릴 수도 있고 안개처럼 사라질 수도 있습니다이 세상에 영원히 변하지 않고 남아 있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그러나 우리는 영원히 쇠하지 않고 추하지 않고 빼앗길 수 없는 영생에 거하고 있습니다그러므로 우리는 세상의 일들로 말미암아 요동하지 않습니다신앙으로 하늘 보좌에 앉아 있는 사람그 사람은 마치 물 가에 심겨진 나무와 같아서 성공적인 인생을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 (로마서 8:16)

기도를 말한다.

참 기도는 비 인격체의 언어가 아닙니다. 기도는 대화라고 하잖아요? 그럼 듣기도 하고 말하기도 해야지요. 기도하게 전에 먼저 말씀을 자세히 들으세요. 하나님은 누구신가? 그 아들 예수그리스도가 무슨 일을 하셨는가? 우리를 어디까지 옮기셨는가? 그래서 우리는 지금 어떤 자격을 가지고 있는가? 듣고 파악하세요. 들으면 믿음이 오고 믿으면 기도가 됩니다. 기도다운 기도지요. 그 때부터 나를 부르신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그리스도께 반응을 하는 기도를 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생명을 주셨고 또 주시니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아버지... 

예수그리스도가 나의 개인의 구원의 주, 믿음의 주, 생명의 주, 평강의 주가 되시니 주님이라고 부릅니다. ‘주여...’ 자연은 창조주 하나님의 은총이지만 구원은 예수그리스도의 대속의 은총으로 우리에게 주어집니다. 그래서 이방인의 기도와 그리스도인의 기도가 다릅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참 기도는 예수그리스도와 합일 시키는 작업부터입니다. 존재에서 그 분의 하시는 일이 나옵니다. 누구신가를 알고 난 다음부터 그분의 역사를 바라게 됩니다. 그리고 나와 그분의 관계를 통해 기도는 성립이 됩니다. 이 기도는 실패가 없습니다. 항상 살아계신 주와 하나님 아버지께 반응하는 기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비인격인 사물을 구하는 기도는 우리의 필요 유무에 따라 오다가다 합니다. 이 기도의 응답은 신앙이 어릴 적 표적이 필요할 때에 잠깐 또는 신앙의 걸음이 뒤쳐질 때에 간혹 보여주십니다. 그러나 장성한 자의 길에 접어들 때는 하나님이 침묵하실 때가 더 많습니다. 인격적인 우리의 기도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언제나 주님이 이룩하신 그곳에서 자신을 발견하고 거기서 주와 더불어 하나님께 나아가 경배와 찬양을 드릴 때에 더 큰 은사가 하늘로부터 임하십니다. 아니 우리 안에 계시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 응답이 나타납니다. 생명, 평강, 능력, 확신, 용기, 힘 등입니다. 그야말로 아우라(aura)가 있는 사람이 되지요.

그래서 우리는 기도를 하기 위해 언제나 한 잔으로 주신 주의 보혈을 기억합니다. 주의 생명, 나의 생명입니다. 하나가 되었습니다. 한 몸이며 한 운명입니다. 주의 십자가로 육신의 세계에서 영의 세계로 넘어왔습니다. 이제 우리는 육신의 빚진 자가 아니라 영을 좇아 살 수 있는 자유인들입니다. 그의 영안에서 거룩함을 입어 주의 형상의 영광으로 하나님 아버지의 영광으로 나아갑니다(고후3:17-18) 나의 옛날을 기억하고 주의 은총을 또박 또박 읊조리고 주께서 이룩하신 일을 생각하며 추구하고 사모하는 마음으로 나아갑니다. 이게 바로 기도입니다. 이 기도에 대해서는 내일 오라 모레 오라고 하시는 대답은 결코 없습니다. 언제나 하나님은 손을 벌리고 계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