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9/2010

제22강 영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 - 여주봉목사

빌3:3절입니다."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며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하고 육체를 신뢰하지 아니하는 우리가 곧 할례당이라”

하나님께 드리는 참된 예배는 영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입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신다. 하나님께 반드시 영과 진리로 드려야 합니다. 지난 주에는 진리로 드리는 예배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오늘은 예배와 성령의 관계를 살펴봅니다. 한 마디로 하면 하나님이 원하시는 예배는 성령에 의한 예배입니다. 빌3장 3절은 참된 성도의 특징 세 가지를 말하면서 한 가지가 성령으로 예배하는 자라고 합니다. 빌립보서 3장은 당시 이단들에 대해서 비난하면서 쓴 구절입니다. 교회를 보호하고자 쓴 구절입니다. 예수를 믿을 뿐아니라 할례를 주장하는 이단들이 있었어요. 할례를 받아야 진정한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아브라함의 정통후손이 된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들을 바울은 개들이고 행악자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이들이 예수를 믿을지 몰라도 결국 자기들의 종교적인 행위를 의지하여 하나님 앞에 서는 자들이기 때문에 이런 자들은 하나님과 상관없는 자들이지요. 이들이 개들이라고 하면서 진정한 성도가 누구인지 세 가지를 말합니다. 예수님을 신뢰하고 육체를 신뢰하지 않는자라고 합니다. 또한 성령으로 예배하는 자들이라고 합니다.

우선 우리말 성경은 성령으로 봉사한다고 번역하지만 라트류언테스라는 말로 유대인들이 공식적으로 예배할 때 쓰는 말입니다. 즉 예배하다는 말입니다. 주된 영어성경을 보면, 성령으로 예배한다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이 구절이 복음에 대한 구절입니다. 참된 신앙에 대한 구절입니다. 성령으로 예배하며 라고 합니다. 성령으로 예배하는 것이 우리 신앙과 복음에서 얼마나 중요한 핵심적인 것인가를 볼 수 있습니다. 이 단락은 예배에 대한 구절이 아니라 신앙에 대한 구절, 복음에 대한 구절인데, 그 구절에서 예배를 말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우리예배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성령으로 드리는 예배입니다. 그래서 참된 예배가 되려면 반드시 성령에 의한 예배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진정한 예배는 전통이나 형식에 지배를 받지 않고 성령에 의한 예배가 되어야 합니다.

에이든 토저는 “성령이 함께하지 않으면 참된 예배가 불가능하다. 우리가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께 참 예배를 드리려면 우리안에서 하나님의 영 성령이 활동하셔야 한다. 그러므로 예배는 하나님으로부터 우리에게 찾아와 다시 그분에게로 돌아간다. 하나님은 이런 예배가 아닌 다른 예배를 받지 않으신다.”고 말합니다.

뿐만아니라 이렇게 말합니다.
“성령님을 구석으로 몰아놓고 그분에게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그분의 감동의 불을 끄고 그분의 인도에 저항하면서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예배를 드리겠다는 생각은 반드시 교정되어야 할 이단이다. 하나님이 받으실만할 방법을 아는 분은 오직 성령님이다고 합니다.”

알티킨들도 빌3장3절을 기초로 예배에 대한 책을 쓰면서 성령에 의한 예배가 되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우리의 예배가 성령에 의한 예배가 되려면 세 가지가 되어야 합니다.
1.성령의 인도를 따라는 예배 
2.성령의 조명과 예배, 
3성령이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예배입니다.

1.성령의 인도를 따르는 예배.
우선 우리 신앙은 처음부터 끝까지 성령에 의한 삶입니다. 특별히 신약시대는 더욱 그렇습니다. 우리 신앙에서 성령의 도움이 없이 가능한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고전3:6절입니다."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은 자라나게 하셨나니”
여기보면 새언약은 신약을 말합니다. 신약은 율법조문에 의한 삶이 아니고 영에 의한 삶입니다. 문자에 의한 삶이 아니고 성령에 의한 삶입니다. 율법조문에 의한 삶은 당시 유대인들이 이해하는 구약의 삶입니다. 원래 하나님의 의도하신 구약의 삶은 율법조문에 의한 삶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 당시 유대인들은 율법조문에 의한 삶으로 구약의 삶을 이해했습니다. 지금도 유대인들은 자기들의 신앙을 율법조문에 의한 삶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제가 작년에 이스라엘을 갔을 때 들은 이야기입니다. 아랍권과 여러 번 전쟁을 했는데 한번은 속죄일에 쳐들어왔습니다. 왜냐하면 그날은 이스라엘이 일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이들이 반격하는 일을 일로 여겼기 때문에 총에 맞으면서도 반격을 못했습니다. 그날로 전쟁이 끝났다면 졌을 것입니다. 그런데 다음날 반격을 해서 전쟁에 이겼지요. 

예수님 시대의 종교지도자들이나 오늘날 유대인들이 그럽니다. 바울이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 신앙은 특별히 새언약은 율법조문이 아니라 성령에 의한 삶이라고 합니다. 율법규정은 죽이라는 것이라고 합니다. 왜 죽이느냐? 우리 노력으로 율법을 지킴으로 하나님 앞에 서고자 하는 자는 아무도 없기 때문에 죽이는 것입니다. 율법이 문제가 아니라 조문이 문제가 아니라 그것을 자기 행실과 노력을 의지해서 서고자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령에 의한 삶이 새언약의 삶입니다. 그런 삶은 살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 의하면 우리 믿음 신앙 구원 성령의 도움이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따라서 당연히 우리의 예배도 성령의 인도를 따라야 합니다.

시편은 하나님께 드려진 예배입니다. 찬송입니다. 시편을 성령이 감동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것을 가지고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예배입니다. 그래서 예배의 핵심이 성령님의 인도입니다. 예배의 주관자는 성령님이십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입니다.

그래서 부흥에서 로이드존스 목사님은 말합니다.
“예배형태가 형식적이 될 때 성령님이 덜 나타나게 되고 여러분은 신약으로부터 더 멀리 떠나게 된다는 것을 언제나 주목하게 될 것입니다. 신약교회의 매우 중요한 특징은 이 즉흥성입니다. 이 살아있는 내밀성입니다. 그런데 성령과 감화력에서 떠나게 되면 모든 것이 형식적이 되어 버립니다. 그래서 예배의 여러 형식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침체기의 교회가 예배의식에 있어서 보다 더 형식적이며 예배형식을 채용하여 공기도서나 의식으로 돌아갑니다. 이 모든 것은 형식적인 종교의 한 부분입니다.”

참다운 예배는 성령이 운행하셔서 하나님과 교제가 핵심인데 예배가 타락하면 핵심은 빠지고 절차와 형식만 남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이 타락할수록 예배가 형식화된다는 것입니다. 반면에 하나님의 부흥 때의 예배는 형식적인 모양이 아니라 하나님과 살아있는 교제가 특징이라고 말합니다. 이렇게 성령이 인도하시는 예배가 참다운 예배입니다. 성령이 인도하시는 예배가 되려면 예배인도자부터 성령께 민감해야 합니다. 모든 예배인도자가 그래야 합니다.

제가 구체적인 방법을 찬양인도자의 예를 들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경배를 통해서 하나님께 예배하는데 찬양인도자의 역할이 중요합니다. 이 예배가 성령의 인도가 되려면 최소한 세 가지가 있어야 합니다.

첫째 찬양인도자는 준비단계에서부터 무엇을 가지고 하나님을 찬양할까 하는 선곡에서부터 성령의 인도를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무슨 찬양을 가지고 하나님께 예배하기를 원하는지 알아야 합니다. 그때 하나님의 뒷받침을 받을 수 있습니다. 

설교도 마찬가지입니다. 목회자가 마음대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그 주일에 어떤 말씀을 가지고 어떤 주제를 가지고 전하기를 원하시는가를 분별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메시지를 전할 때 그것이 예레미야 23장에 나오는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이 됩니다. 그리고 이런 말씀에 하나님이 뒷받침하십니다.

둘째, 찬양인도자는 선곡 뿐아니라 준비할 때도 성령의 인도를 받아야 합니다. 성령의 인도를 따르는 예배라고 해서 준비가 필요없는 것이 아닙니다. 옛날 우리나라만 해도 성령의 인도를 받은다고 하면서 준비 하나도 하지 않고 옵니다. 그러면 안됩니다. 성령의 인도를 따른다고 해서 준비가 필요없다는 말이 아닙니다. 즉흥적으로만 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러면 성령의 인도와 준비가 어떻게 같이 갑니까? 설교의 예를 들까요? 하나님이 어떤 말슴을 전하기를 원하십니다. 기도하는 가운데, 성경을 통해서 등등 말씀합니다. 그러면 준비과정에서 하나님 앞에 섭니다. 어떤 부분을 강조하기를 원하십니까? 함녀서 준비를 합니다. 
그렇게 예배도 준비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제가 이렇게 에언하라고 하는 책을 보니까 그레엄 쿡 목사님이 쓴 것인데 그분은 예언도 그렇게 한다고 합니다. 


예언도 마음의 부담부터 한다는 것입니다. 사실 설교가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저들을 향한 하나님의 뜻이 무엇입니까? 이렇게 마음을 품으면 기도하는 중에 길을 행할 때 하나님께서 그 개인과 교회에 대한 말씀을 주십니다. 그러면 그것을 가지고 주님 앞에 섭니다. 구체적으로 하나님의 의중과 뜻이 무엇인지 서는 것입니다.

셋째, 실제로 예배를 드릴 때 성령의 인도를 받아야 합니다.
여러분 찬양은 그 자체가 예배입니다. 찬양은 리허설이나 공연이 아닙니다. 찬양을 공연으로 이해하면 기계적인 예배일 뿐입니다. 따라서 성령의 인도를 따라서 준비했을지 몰라도 하나님 앞에 예배할 때 이것까지도 내려놓고 하나님 앞에 서야 합니다. 하나님께만 예배하면서 성령의 인도를 받아야 합니다. 


설교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게 설교를 준비하지만 원고를 읽는 것이 아닙니다. 세계적인 설교자도 이렇게 준비하고 그 다음에 원고를 찢어버리고 올라간다고 합니다. 준비한 것을 토대로 서되 하나님을 의지하고 서는 것입니다. 아까 그 예언도 똑같습니다. 이렇게 준비되어서 실제로 감동을 나눌 때 하나님께서 구체적으로 인도하고 이끌어가신다고 합니다. 

이렇게 예배를 인도할 때 성령의 인도를 따라야 합니다. 그래야 그분이 주관하십니다. 

이렇게 성령의 인도를 따를 때 나타나는 중요한 특징이 즉흥성입니다.
성령이 주관하시는 예배의 한 특징은 즉흥성입니다. 즉흥성이야말로 우리의 예배가 참된 예배인지를 측정할 수 있는 기준입니다. 그러나 이 말은 우리 모든 예배 시간에 끊임없이 늘 즉흥성이어야 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이 말은 우리예배는 성령께서 인도하시기 때문에 때로는 우리가 전혀 기대하지 않는 우리가 전혀 의도하지 않은 성령께서 주권적으로 그분의 의중과 계획을 알리셔서 인도하시는 즉흥성이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챨스 스펄젼 목사는 늘 예배 가운데 하나님의 거룩한 무질서가 있기를 추구했습니다. 로이드존스도 하나님의 부흥 때마다 하나님이 예배에 함께하시는데 그 예배에 즉흥성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알티 킨델 목사도 참되고 열정적인 예배의 특징은 즉흥성이리고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것을 가지고 살펴보아야 합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교회와 예배 가운데 성령께서 운행하심으로 우리가 계획하지 않았던 일들을 보이시는 그런 즉흥성이 있었던 적이 언제 입니까? 까마득합니까? 그렇다면 우리 예배는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형식적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순서는 다를지 모르지만 그것이 또 하나의 순서로 굳어져버린 형식적이 됩니다.

우리가 개인적으로 주님을 따라가려면 직접 주님을 찾고 구하고 배우고 그러면 뜻을 보이십니다. 그 길에 우리 모습이 보입니다. 그러면 회개하고 돌이키고 주님을 따라 갑니다. 그런데 교회가 전체적으로 그래야 합니다. 


예배에 대해서 살펴본다면 참다운 예배의 특징이 즉흥성인데 그런데 즉흥성이 까마득하면 우리 예배가 형식적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회개하고 돌이켜야 합니다. 하나님의 성령이 인도하시는 예배가 되도록 갈망하고 화개하고 돌이켜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기준을 살펴보는 것입니다. 


즉흥성에 있어서도 하나님이 얼굴을 구하는 것이 핵심입니다. 지속적으로 하나님의 얼굴을 구해야 하나님의 임재도 성령의 운행하심 성령의 주도권도 거기에 함께합니다. 제가 지난 주에 광고 때 말씀드렸는데 일부 성도들 가운데 영적으로 어려움을 당하고 있어서 마음이 아팠습니다. 제가 어떻게 그들을 도와야 하는가 고민했습니다. 그런데 정답은 그분들이 집중적으로 주님의 얼굴을 구하지 않아서입니다. 


그분들이 집중적으로 주님을 찾았다면 다 해결될 문제들입니다. 그래서 즉흥성에 있어서도 핵심은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것입니다. 이런 것에 비례해서 성령의 운행하심이 다를 것입니다.

빌리그래함 목사의 말입니다.
오늘날 미국교회에서 성령께서 임재를 거두셔도 교회 가운데 일어나고 있는 모든 일들중에서 90%이상이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이 그대로 진행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초대교회 때는 성령께서 임재를 거두시면 개점휴업상태였습니다. 모든 것이 성령님으로 가능했습니다. 오늘날의 교회는 그분이 떠나셔도 전혀 아무런 일이 없었듯이 90%이상이 진행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미국 교회 뿐아니라 한국교회에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예배도 그런 상태에 있습니다.

2.성령의 조명과 예배
지난 주에 진리로 드리는 예배를 살펴보았습니다. 진리 중에 가장 중요한 두 가지 진리가 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진리와 하나님 안에서 자신에 대한 진리입니다. 이 두 가지가 우리 모든 삶을 좌우합니다. 예배만 해도 우리가 하나님 그분을 얼마나 아느냐에 따라서 그분을 예배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알게 하시는 분이 성령님입니다.

요16:13절 '그러하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엡1:17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성령님이 우리에게 하나님을 알게 하십니다. 우리 예배가 하나님의 진리에 입각한 예배가 되게 하려면 성령께서 그분 자신을 우리에게 계시해주셔야 합니다. 성령의 조명이 필수입니다.

이 부분을 두 가지 면에서 살펴봅니다.
1)성령의 조명으로 우리가 하나님을 올바르게 알 때 하나님을 올바르게 예배할 수 있습니다. 수5:13-15절입니다. "여호수아가 여리고에 가까왔을 때에 눈을 들어 본즉 한 사람이 칼을 빼어 손에 들고 마주 섰는지라 여호수아가 나아가서 그에게 묻되 너는 우리를 위하느냐 우리의 대적을 위하느냐 14 그가 가로되 아니라 나는 여호와의 군대장관으로 이제 왔느니라 여호수아가 땅에 엎드려 절하고 가로되 나의 주여 종에게 무슨 말씀을 하려 하시나이까 15 여호와의 군대장관이 여호수아에게 이르되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하니라 여호수아가 그대로 행하니라”


한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났습니다. 여호수아가 말합니다. 원수편이냐 우리편이냐 우리편이면 와서 돕고 원수편이면 내가 싸울 것이다. 

그러자 여호와의 군대장관으로 왔다고 합니다. 내가 전쟁을 주관하는 자로 왔다고 합니다. 여호와의 사자라는 말은 하나님이 오신 것입니다. 영어성경을 보면 대문자로 쓰고 있습니다. 이 사자가 야곱이 씨름했던 사자입니다. 성육신하기 전의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여호와의 군대장관으로 오신 그분을 인식했을 때 여호수아는 납작엎드려 경배합니다. 

그러면서 여호와의 군대장관이 신발을 벗으라고 합니다. 그당시 노예는 신발을 신지 않았습니다. 네 주권을 포기하라는 것입니다. 네 삶을 내 발 앞에 내려놓으라고 합니다. 내가 네 삶의 온전한 주인으로 삼으로라는 말입니다. 그러면서 이 땅은 거룩한 땅이라고 합니다. 그 의미는 하나님이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을 행하려고 하시는 것입니다. 


시내산에서 모세를 만났을 대 똑같은 말을 했지요. 우리 주권 우리 생각을 철저하게 내려놓고 엎드립니다. 여호수아가 군대장관 앞에 납작 엎드립니다. 주인되신 여호와 앞에 엎드립니다. 종으로서 그 음성을 듣고 순종할 자세로 엎드립니다. 이 모든 것이 여호와의 군대장관으로 인식되었을 때 가능했습니다.

예를 들면 우리 가운데 하나님이 군대장관으로 운행하시는데 그것을 우리가 깨닫게 된다면 우리는 그 앞에 납작 엎드릴 것입니다. 뿐만아니라 여호수아처럼 모세처럼 우리 모든 삶을 그분께 드릴 것입니다. 우리 시간 물질 에너지를 드리고 그 앞에 엎드려 경배하면 말씀하소서 종이 듣겠나이다는 자세로 엎드릴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여리고성부터 가나안 성들을 정복하시면서 여호수아에게 요구하시는 자세가 바로 이런 자세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렇게 엎드릴 때 하나님은 우리를 통해서 그분의 뜻을 이루실 것입니다. 그런데 예배는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인식이 결정합니다. 


성령으로 하나님을 우리에게 계시해주셔야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 앞에 진정한 예배를 드릴 뿐아니라 그분 앞에 우리 삶이 드려지고 올바로 순종하는 자세가 됩니다. 이 모든 것이 예배입니다. 단순히 입술뿐아니라 삶이 예{배고 섬김이 예배입니다.

그래서 섬기다는 말과 예배하다는 단어가 같은 단어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마음문을 여셔서 하나님을 더 알게 하시기를 소원합니다. 우리가 그분의 영광을 그분의 아람다움을 알게 된다면 깨닫게 된다면 우리는 그렇게 경배함으로 엎드릴 것입니다.

2)뿐만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을 올바로 예배할 때 하나님을 더 알게 해주십니다. 
하나님과 개인적인 친밀한 교제가 신앙의 핵심입니다. 친밀함을 열어주는 가장 주된 통로가 예배입니다. 예배는 하나님과 친밀함을 배양해주고 가꾸어줍니다. 왜냐하면 예배는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여 나가는 것이고 이처럼 얼굴을 구하여 나오는 자에게 하나님은 자신을 계시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여 나갈 때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은 자신을 의중을 목적을 계획을 계시해주십니다.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가도록 인도하시고 의중으로 인도하십니다. 이런 친밀함이 예배를 통해서 가능합니다. 

여러분이 예배를 통해서 이런 친밀함을 누리지 못한다면 마당만 밟고 있을 뿐입니다. 그러면 가만히 있어서는 안됩니다. 마음을 찢고 회개하고 돌이켜야 합니다. 여러분의 예배 가운데 하나님을 경험하지 못했다면 하나님을 절박함으로 찾아야 합니다. 고민하고 기도하고 사모하고 목말라하며 찾아야 합니다. 


가만히 있으면 저절로 예배가 됩니까? 기도하려고 하면 가만히 있어도 기도가 나옵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 예배를 받기에 합당하신 분입니다. 그래서 예배는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니라 선택해야 합니다. 우리 입을 열어 구하고 찬양하고 높이기 시작할 때 그분이 함께하기 시작합니다. 예배하기를 선택해야 합니다. 이 부분은 앞으로도 나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해서 하나님 자신을 계시하셔야 참된 예배가 가능합니다. 그리고 참된 예배를 드릴 때 하나님은 더 자신을 계시하십니다. 주님을 찾아야 합니다. 주님이 주시는 오늘의 만나로 살아야 합니다. 무슨 배짱으로 하나님을 찾지도 않고 그렇다고 환경 가운데 하나님의 생명이 넘치지도 않은데, 매일 어렵다고 하면서 다른 사람에게 어렵다고 아우성치면서 사람을 의지하면서도 무슨 배짱으로 하나님을 찾지 않으시는 것입니까?

다윗의 장막에 있는데, 당시에 중보기도를 하고 있는데 제가 인도하고 있었어요. 찬양팀도 있었지만 기도시간은 제가 인도하는데 하나님이 한 부분을 선명하게 보이셨습니다. 어떤 사람들이 은혜 받았다고 하고 바뀌었다고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밥도 사주고 옷도 사주고 그래요. 그런데 서서 예배를 인도하는데 그것이 보여지는 것입니다. 그분들이 저를 대접도 하고 칭찬도 하지만 그것은 제가 한 것이 아니라 저와 함께한 기름부음이 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에서 제가 취할 것이 없습니다. 


심지어 죽은 자가 살아났어도 내가 얻을 것은 아무 것도 없어요. 기름부음이 한 것이니까. 내가 얻은 것은 얼마나 신실하게 사랑함으로 섬겼느냐였어요. 그런데 제 자신을 보니까 얻을 것이 하나도 없는 것이 보여졌어요. 찬양을 인도하고 있는데 이것이 보이니까 깜깜해져요. 캄캄한 가운데 있는데 제가 하나님의 아들됨을 하나님이 인식시켜 주시는 것입니다. 성령의 감동으로 열방을 구하라 내 아들아 내가 그것을 너에게 주리라고 하셨어요. 그래서 그 다음에 어떤 찬양을 같이 했냐면 ‘구하라 모든 열방들을 유업으로 네게 주리라’를 했어요. 


30분정도 했어요. 그때 있었던 분들도 지금 있지만 30분 동안 성령께서 그 자리를 압도하셨어요. 지금은 하나님이 열방을 열어가시고 계십니다.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이 자신을 계시하십니다. 예배가 하나님과 친밀함을 배양시켜 줍니다. 그래서 예배와 하나님의 친밀함은 필수입니다.

3.성령에 의한 예배가 되려면 성령의 능력이 역사하시는 예배가 되어야 합니다.
초대교회의 예배를 보면 성령의 능력이 역사하는 예배였습니다.


고전 14장 6절 이하입니다."그런즉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서 방언을 말하고 계시나 지식이나 예언이나 가르치는 것이나 말하지 아니하면 너희에게 무엇이 유익하리요 7 혹 저나 거문고와 같이 생명 없는 것이 소리를 낼 때에 그 음의 분별을 내지 아니하면 저 부는 것인지 거문고 타는 것인지 어찌 알게 되리요”

성령의 나타나심을 말합니다. 성령의 나타나심은 은사를 말합니다. 그래서 고전12장 7절을 보면 각 사람에게 성령의 나타남을 주심은 유익하게 하려 함이라고 합니다. 은사를 나타나심으로 말합니다. 이 의미는 춤추는 손이라는 두 개의 라틴어에서 나온 단어입니다. 하나님의 성령이 그 예배를 지휘하심으로 능력과 은사들이 이렇게 저렇게 나타났던 것이 초대교회의 예배였습니다. 


특별히 고전 12-14장은 은사에 대해서 다루고 있는데 모일 때 라는 말이 여러번 나옵니다. 즉 예배의 문맥에서 하시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우리 예배 가운데 성령께서 자유롭게 은혜 가운데 운행하시기를 추구해야 합니다.

제가 오늘 아침에 이 설교를 최종적으로 준비하면서도 하나님이 이런 것을 보여주셨어요. 포도나무 교회에도 이런 부분이 더 되기를 적극적으로 추구해야 합니다. 최소한 세 가지가 중요합니다. 더 좋은 공간이 있어야 되고, 더 많은 시간을 드려야 합니다. 오늘날 예배는 일정한 순서를 마치고 돌아가는 것으로 타락했습니다. 껍데기만 있습니다. 


예배가 한 시간에서 5분만 지나도 신경을 쓰지요. 그것이 어떻게 예배입니까? 텔레비전 앞에서는 두 시간을 앉아 있으면서 침을 질질 흘리면서 어떻게 만군의 하나님을 예배하러 온다고 하면서 피로 값주고 자신을 구원하신 하나님을 예배한다고 하면서 5분만 늦어도 인상을 쓰는 것이 어떻게 하나님을 예배한다고 할 수 있습니까? 어떻게 성도라고 할 수 있습니까? 예배를 그렇게 생각합니까? 그런데 예배를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성령이 운행하시는 공간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성령을 환영해야 합니다. 오셔서 운행하시도록. 성령이 우리 가운데 자유롭게 운행하시며 나타나시도록 사모함으로 나와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 성령님의 직접적인 역사에 대해서 거부감을 갖거나 반대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것은 항상 있었습니다. 특별히 어떤 이해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반대하는가? 율법주의적인 사고를 가진 사람들입니다. 갈4장에서 바울이 이삭과 이스마엘을 두 종류의 신앙체계로 비유합니다. 이삭을 참된 복음인 십자가 복음 이스마엘을 거짓신앙체인 율법주의로.

29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나 그 때에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핍박한 것같이 이제도 그러하도다”

율법주의 가치관을 가지고 있는 자들이 성령의 역사를 대적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 시대에도 예수님을 통한 성령의 역사를 가장 대적했던 자들은 불신자들이 아니라 종교지도자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부흥이 임할 때마다 하나님의 부흥을 대적했던 사람들이 율법주의적 가치관을 가지고 있었던 기독교인들이었습니다. 

로이드존소는 죽은 정통주의라고 율법주의를 말합니다. 그러면서 죽은 전통주의의 특징 중 하나는 열심을 싫어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열심은 성령의 외적인 역사를 말합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죽은 정통주의의 두 번째 특징은 열심을 싫어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가장 중요한 주제입니다. 중략 열심을 혐오하는 것은 성령을 소멸하는 것입니다. 교회사와 친밀한 사람들 특히 부흥의 역사를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은 부흥의 시기에 있어서 가장 활동적이었던 사람들에게 가장 큰 걸림돌이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죠나단 에드워드 그 당시에 대적을 받았습니다. 성령의 나타남 때문에.
죠지 휘필드 그 당시에 대적을 받았습니다. 성령 때문에.

요한 웨슬레도 그랬습니다.
‘하나님의 부흥이 임할 때마다 예배만 해도 그냥 정해진 순서를 마치고 돌아가는 것으로 인식했던 사람들은 예배를 통해서 성령이 직접적으로 역사할 때 항상 대적했습니다.’

저는 성경에 기록된 대로 예수님이 오늘날 우리들의 예배 가운데 오셔서 이런 일들을 행한다면 어떤 대접을 받을까 생각해 봅니다. 그러면 적지 않은 교회에서 예수님이 이단이라고 쫓겨날 것입니다. 그처럼 형식적입니다. 이렇게 성령의 직접적인 역사에 대해서 거부하면서 사람들이 많이 인용하는 성경구절중 하나가 고전14장 40절입니다. “모든 것을 품위있게 하고 질서있게 하라” 개역성경에는 모든 것을 적당하게 질서대로 하라는 구절을 들어서 성령의 직접적인 역사를 거부합니다. 그런데 이 말은 주보에 나오는 순서대로 질서대로 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이것은 고전 14장 40절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성령의 은사에 대해서 다루고 있는 말씀입니다. 당시 고린도교회에 하는 말씀입니다. 대부분 방언으로 말했습니다. 그래서 당신들이 서로 방언으로 말하면 다른 사람들에게 어떻게 유익이 되겠냐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다른 사람에게 말할 때는 방언으로 하지 말라 통역이 없으면 알아들어야 유익이 될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또 자세히 보면 그들은 예배할 때 하루 종일 예언했던 것 같아요. 또 동시 다발적으로 하고 있어요. 그래서 바울이 하는 말이 이것입니다. 


방언은 통역이 없으면 하지 말고 예배시간에 그래서 어떤 사람이 방언하면 통변을 하라는 것입니다. 예언도 두 세명만 해라. 그것도 순서대로 해랴. 한 사람이 하면 다른 사람은 들으면서 분별하라. 다른 사람에게 예언이 임하면 하던 사람은그치고 하라는 말입니다. 이런 문맥에서 하는 말입니다.

모든 것을 적당하게 하라는 말은 주보의 순서대로 하라는 말이 아니라 덕을 세우기 위해서 하라는 말입니다. 성령의 은사를 가지고 예배시간에 섬길 때 질서대로 해서 유익이 되게 하라는 말씀입니다. 이 구절을 가지고 직접적인 성령의 역사를 대적하는 것은 비성경적입니다.

직접적인 성령의 역사를 대적하는 가장 큰 문제는 성령을 소멸하는 죄를 범한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사람들의 눈에 좋게 보이는 예배를 위해 신경을 쓰지만 성령을 소멸하는 죄를 범하는 것에 대해서 무감각합니다. 우리 예배는 성령에 의한 예배가 되어야 하는데 그 한 부분이 성령이 능력으로 역사하는 예배입니다.

오늘 저는 성령으로 드리는 예배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그 예배는 성령이 주관하시는 예배. 성령의 조명이 핵심이고 성령이 능력으로 역사하는 예배가 되어야 합니다. 포도나무교회가 그런 예배가 되기를 축복합니다. 아멘.

제21강 영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 - 여주봉목사

요4:23-24절입니다.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24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

오늘은 영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에 대해서 특별히 그중에서 진리로 드리는 예배를 살펴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참된 예배의 기준을 말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다 중요합니다. 오늘 말씀은 예수님이 특별히 말씀하신 예배의 기준입니다.


세 가지를 볼 수 있습니다.
1.영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가 참된 예배다.
2.하나님은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신다.
3.반드시 우리는 영과 진리로 예배를 드려야 한다.

1.전체적인 개요


1)영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가 참된 예배다.
수가성 우물가에서 사마리아여인과 대화하면서 나눈 이야기입니다. 예배의 형식 때문에 유대인과 사마리아 사람들 사이에 충돌이 있었습니다. 자기들이 참된 예배자라고 주장하면서 치열한 논쟁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마리아여인이 예배에 대해서 문제점을 제기하고 있지요.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는데 당신들은 예루살렘에서 예배해야 한다고 하더라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서 예수님은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하나님께 참되게 예배할 때가 오는데 바로 지금이 그때라고 합니다. 그 예배는 영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라고 합니다. 참된 예배는 영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라고 하셨습니다. 참된 예배의 기준은 조상들로부터 오는 전통도 아니고 장소도 아니고 형식도 아니고 영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라는 말입니다.

2)하나님은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신다.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자들을 하나님이 찾으십니다. 오늘날 예배가 회복되어야할 절실한 필요가운데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예배가 회복되어야 할 가장 중요한 이유는 하나님은 우리의 예배를 받으시기에 홀로 합당하실 뿐아니라 그분이 우리의 예배를 열망하시기 때문입니다. 이 한 가지만 하더라도 반드시 우리의 예배가 회복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마땅히 그분께 드려져야 합니다. 참된 예배가 드려져야 합니다.

책을 정리하면서 예배를 열망하시는 하나님을 보겠더라고요. 하나님은 우리의 예배를 받으시기 위한 열망 가운데서 우리를 창조하셨습니다.


사43:7절입니다."무릇 내 이름으로 일컫는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들을 내가 지었고 만들었느니라”


골1:6절입니다."이 복음이 이미 너희에게 이르매 너희가 듣고 참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은 날부터 너희 중에서와 같이 또한 온 천하에서도 열매를 맺어 자라는도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시되 이스라엘을 창조하시되 그 목적이 예배를 받으시기 위해서였습니다.

또 성경을 보면 하나님이 우리의 예배를 받으시기 위해서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우리의 구원과 관련해서 가장 중요한 구절이 엡1장입니다. 엡1장 3절 이하를 보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볼 수 있습니다 그안에 풍성한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그 엄청난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에게 부으사 구원하셨는데 그 이유가 예배를 받으시기 위해서라고 합니다.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는 말을 반복하고 있습니다. 세 번식이나 반복하지요. 성부 하나님의 사역을 말하고 성자 예수님의 사역을 말하고 성령 하나님의 사역을 말하고 끝에 반복적으로 하나님을 찬송하게 하려는 말을 반복합니다. 6절, 12절, 14절. 우리의 예배를 받기 위해서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이처럼 우리의 예배를 열망하십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예배를 받기를 얼마나 열망하시는가를 하늘의 예배를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계4-5장에 보면 스랍들이 나옵니다. 얼핏 보면 스랍들은 하나님이 예배 받으시기 위해서 창조하신 기계 같습니다. 이것을 보아도 하나님이 우리의 예배를 얼마나 열망하시는가를 볼 수 있습니다.

여기까지만 보면 잘 모릅니다. 우리는 더 살펴보아야 합니다. 왜 하나님이 우리의 예배를 열망하시는가? 가장 주된 이유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사랑하는 여인과 데이트 할 때는 생각해 보세요. 중심으로부터 진짜 사랑하는 사람과 데이트할 때를 생각해 보세요. 상대방이 사랑을 고백합니다. 자기야 사랑해! 그런데 한번만 들으면 족하든가요. 또 듣고 싶지 않던가요? 여러분이 지금 자기도취에 빠져서 나르시즘에 빠졌기 때문이니까? 아닙니다. 상대방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상대방을 통해서 사랑의 고백을 듣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예배를 받기를 열망하시는데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보면 하나님의 열망이 이해가 됩니다. 그전에 한 가지 예를 말씀드릴께요. 포도나무교회가 분당에 있을 때 앞에 카페트가 깔려 있었어요. 하루는 혼자 제가 앉아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열망하며 중보기도하고 있었어요.

갑자기 하나님께서 저에게 너는 내꺼야라고 감동하셨어요. 그 의미가 무엇이었는가 하면 하나님이 나에게 원하시는 것은 헌금도 아니도 봉사도 아니고 내 자신이라고 하셨어요. 그런 의미를 깨닫게 하셨어요. 그러면서 주님이 너는 내꺼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가서를 보면 솔로몬 왕과 술람미 여인간의 사랑의 노래를 담고 있습니다. 아가서는 부부간의 사랑과 예수님과 교회의 사랑의 관계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한 구절을 예를 들면 아4;9-15절을 보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조금이라도 볼 수 있습니다. 여기보면 눈길 하나만 해도 정신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정신을 못차립니다.

“9 나의 누이 나의 신부야 네가 내 마음을 빼앗았구나 네 눈으로 한 번 보는 것과 네 목의 구슬 한 꿰미로 내 마음을 빼앗았구나 10 나의 누이 나의 신부야 네 사랑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 네 사랑은 포도주에 지나고 네 기름의 향기는 각양 향품보다 승하구나 11 내 신부야 네 입술에서는 꿀 방울이 떨어지고 네 혀 밑에는 꿀과 젖이 있고 네 의복의 향기는 레바논의 향기 같구나 12 나의 누이, 나의 신부는 잠근 동산이요 덮은 우물이요 봉한 샘이로구나 13 네게서 나는 것은 석류나무와 각종 아름다운 과수와 고벨화와 나도초와 14 나도와 번홍화와 창포와 계수와 각종 유향목과 몰약과 침향과 모든 귀한 향품이요 15 너는 동산의 샘이요 생수의 우물이요 레바논에서부터 흐르는 시내로구나”

하나님이 우리를 보시고 정신을 못차립니다. 그래서 거기에는 질투가 있습니다. 아가서 8장을 보면, 영어성경을 보면 누가 한 말인지 잘 정리가 되어 있습니다. 8:6-7절은 술람미 여인이 솔로몬 왕의 사랑이 큰 것을 알고 그 사랑에 자기를 의탁하는 고백입니다. 이 구절은 하나님의 사랑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 사랑에 자기를 의탁하는 말입니다.

“6 너는 나를 인같이 마음에 품고 도장같이 팔에 두라 사랑은 죽음같이 강하고 투기는 음부같이 잔혹하며 불같이 일어나니 그 기세가 여호와의 불과 같으니라 7 이 사랑은 많은 물이 꺼치지 못하겠고 홍수라도 엄몰하지 못하나니 사람이 그 온 가산을 다 주고 사랑과 바꾸려 할지라도 오히려 멸시를 받으리라”

이것이 우리를 향한 질투가 있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의 예배를 열망하십니다. 예배를 받기에 홀로 합당하신 분입니다. 이 한 가지만 해도 우리의 예배는 반드시 회복되어야 합니다. 그분께 돌아가야 할 예배가 반드시 회복되어야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예배를 열망하시는 또 다른 이유는 우리의 유익을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은 처음 창조 때부터 하나님을 예배하게 창조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뭔가를 예배하게 되어 있습니다. 돈을 예배하든지 여자를 예배하든지 사업을 예배하든지 우상을 예배하든지..... 그런데 하나님 외에 다른 것을 예배하면 그것이 우상숭배입니다. 거기에는 하나님의 생명이 없고 그곳이 지옥입니다.

또 하나는 우리가 무엇을 애배하느냐에 따라서 그것을 닮게 됩니다. 돈을 예배하면 돈을 담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예배해야 그분의 형상을 닮아가고 그분의 성품이 우리안에 일어나고 은혜가 부어집니다.

그런데 그렇게 우리의 예배를 열망하시기 때문에 하나님은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십니다. 영과 진리를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십니다. 그 예배가 참된 예배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향한 질투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을 향한 예배를 명시하면 성경은 우리가 예배가 아니라 하나님을 멸시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십니다. 바꿔말하면 하나님은 웅장한 장소에서 드려지는 예배를 찾으시는 것이 아닙니다. 거대한 파이프 오르간으로 하는 예배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많은 사람이 모여서 예배하는 것에 관심이 없습니다. 여러분 이 한 가지만 이라도 올바르게 깨닫는다면 예배에 대한 자세가 완전히 달라질 것입니다.

하나님은 영과 진리를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십니다. 그리고 그들을 발견하시면 하나님의 눈이 거기에 머무십니다.

3)우리는 반드시 영과 진리로 예배해야 합니다.
해도 되고 안해도 되는 것이 아닙니다. 선택사항이 아닙니다.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것은 필수입니다. 하나님의 강한 명령입니다. ‘예배할지니라’는 단어는 강력한 명령입니다. 거의 모든 영어성경은 이 단어를 must라는 조동사를 써어 번역하고 있습니다. 반드시 그렇게 드려야 할 예배입니다.

2.영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가 아닌 것
모든 면에서 하나님의 관점이 필수입니다. 이사야시대를 보셨지요. 그들은 하나님께 안식일 예배, 월삭, 모든 대화 절기를 성경대로 드렸습니다. 그들은 수송아지 수염소 어린양을 성경대로 가장 좋은 것으로 드렸습니다. 그것도 무수히 드렸어요. 많이 기도하고 금식했어요. 그들은 하나님이 자신들의 예배를 받으셨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들의 예배를 받지 않으셨습니다. 마당만 밟는 예배 헛된 예배라고 했습니다.

예수님 시대의 바리새인들을 보세요. 이사야 시대의 예배가 잘못된 예배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런데 자기들의 예배가 그 조상들의 예배처럼 타락한 예배라는 사실을 알았을까요? 아닙니다. 전혀 몰랐습니다. 성경은 바리새인들의 예배가 정확하게 이사야시대의 예배와 똑같다고 합니다. 바리새인들은 성경을 보면서도 자기들의 예배가 타락한 예배임을 몰랐습니다. 눈이 가려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영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만 해도 성경이 말하는 의미가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자기들은 영과 진리를 드리는 예배라고 자부하지만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할 수 있어요. 그런데 영과 진리로 드려지는 예배가 무엇인지 알려면 아닌 것이 무엇인지를 알면 도움이 됩니다.

1)영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는 정성이 넘치는 예배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영과 진리로 드린다는 예배가 개역성경에는 신령과 진정으로라고 번역되어 있었어요. 교회주보마다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라는 구절이 없을 정도로 잘 알려진 구절입니다. 그런데 이 구절을 우리는 우리의 종교적인 이해를 가지고 이해합니다. 우리 민족은 조상 때부터 종교성이 강한 민족입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냉수를 떠놓고 정성을 다해 빌면 그 신이 소원을 들어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큰 과일 가게는 무당들 때문에 먹고 산답니다. 얼마나 정성을 다합니까? 이런 종교심 이런 종교적인 배경에서 신령과 진정이라는 말을 정성을 다한 예배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이 말은 하나님께 예배할 때 정성도 없이 예배하는 것이 잘한다는 말도 아닙니다. 하나님께 마음을 쏟아서 정성스럽게 드리는 것이 잘못되었다는 말도 아닙니다.

만일 정성으로 말하자면 이사야 시대의 예배는 정성이 결코 부족한 것이 아닙니다. 그들에게 종교적인 헌신이 부족했습니까? 아닙니다.

렘6장 20절을 보면 시바와 원방 오늘날로 말하면 인도까지 가서 값비싼 향품을 사서 하나님께 예배드렸습니다. 상상할 수 없는 거리입니다. 그렇다면 얼마나 정성이 뛰어났겠어요. 그런데도 하나님은 그들의 예배를 받지 않으셨습니다.

바리새인들도 얼마나 열심과 헌신이 강했습니까? 그렇게 정성을 쏟은 예배인데 그들 모두에게 입술 뿐인 예배라고 합니다. 마당만 밟는 예배 헛된 예{배라고 합니다. 따라서 기억해야할 것은 영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가 정성을 다하는 예배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문제는 이것을 정성으로 드리는 예배의 개념으로 이해하면 영과 진리로 드리는 것을 방해합니다. 왜냐하면 거기에 초점이 있고 이렇게 드리면 하나님 앞에서 마당만 밟는 예배를 드리면서도 하나님 앞에서 영과 진리로 예배하고 있다고 착각하기 때문입니다.

2)외부적으로 화려한 예배를 말하는 것도 아닙니다.
오늘날 성도들이 그럽니다. 믿습니까? 그러면 아멘합니다. 아멘하는데 실제 행동은 아멘한 것과 전혀 다르게 행동합니다. 오늘날 많은 성도들이 영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를 외부적으로 화려하게 드리는 것으로 오해하고 있습니다. 주일날 양복입고 와서 얌전하게 앉아있고 헌금도 신권으로 바꾸어 드립니다. 이런 예배가 참된 예배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구겨진 천원권 하나 그냥 드리는 것이 옳다는 말도 아닙니다. 외부적인 단정함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것에 초점을 맞추고 바른 예배라고 생각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우리의 진정한 경건은 하나님이 통치할 때 가능합니다. 경건함은 우리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평상복 입는 것, 양복 입는 것 그리 중요한 것 아니지요.

에이든 토저도 본문을 말하면서 ‘이 말씀은 예배의 본질이 영적인 것임을 분명히 밝힌다. 종교의 본질은 관습적인 종교행위 축제일 준수, 종교적 의식 의복 등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영과 하나님의 영의 연합에 있다.’

예배의 본질은 하나님과 만남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양복을 입는 것도 다 좋은데 우리의 예배를 외부적인 모양이나 격식에 두면 우리가 마음을 열어 하나님과 만남을 찾는데 방해가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관점에서 우리자신을 보고 우리 속에 있는 하나님 앞에 합당하지 못한 것을 보고 애통해하며 하나님의 통치가 임하여 우리를 다스려야 우리에게 은혜가 임하고 거룩함이 있기 때문에 주님을 사모하고 구하고 나와야 합니다. 그런데 외부적인 모양이나 절차에 두고 그래서 양복 입고 왔다 가면 그 예배가 참된 예배라고 생각하는 것은 껍데기뿐인 예배입니다. 그래서 반드시 깨져야 합니다. 그래야 참된 예배의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처럼 영과 진리를 드리는 예배는 외부적인 모양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3.진리로 드리는 예배.
영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 중에서 오늘은 진리로 드리는 예배를 살펴봅니다. 우리 신앙과 예배는 철저하게 성경에 기초해야 합니다. 루터시대에는 전 세계가 면죄부를 사서 구원받고 죄용서를 받는다고 믿었어요. 루터의 전기를 보면 성베드로 성당을 짓는다고 사람들이 종을 두드리면서 ‘여러분이 헌금을 해서 여러분의 동전이 땡그랑 소리를 내면서 들어가는 순간에 여러분의 부모님이 연옥에서 20만년 먼저 천국에 들어갈 것입니다’고 했어요. 그러면 사람들이 줄을 서서 눈물을 흘리면서 감격하면서 동전을 넣었어요. 그런데 아무리 눈물을 흘리고 감동되었고 전세계가 믿었어도 그것은 가까였어요.

우리는 우리의 모든 신앙과 예배가 다른 사람이, 큰 교회가, 다른 사람이 어떻게 하느냐고 아니라 성경에 기초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예배는 진리에 기초한 예배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더 나아가서 한 가지 살펴볼 것은 우리 개인의 삶의 모든 영역에서 가장 크게 영향을 미치는 진리가 두 가지가 있습니다. 이 두 가지 진리가 모든 삶에 영향을 미칩니다. 그 두 가지는 하나님에 대한 진리, 또 하나님 안에서 자신에 대한 진리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예배만 해도 우리의 예배가 참된 예배가 되려면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진리 위에서 드려져야 합니다.

1)만든 신에 대한 예배
우리가 하나님께 예배한다 하면서 우리가 만든 신에게 예배합니다. 그러면서도 하나님께 예배한다고 착각합니다. 대표적인 예가 출애굽기 32장입니다.


출32:4-10절입니다. "아론이 그들의 손에서 그 고리를 받아 부어서 각도로 새겨 송아지 형상을 만드니 그들이 말하되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 신이로다 하는지라 5 아론이 보고 그 앞에 단을 쌓고 이에 공포하여 가로되 내일은 여호와의 절일이니라 하니 6 이튿날에 그들이 일찌기 일어나 번제를 드리며 화목제를 드리고 앉아서 먹고 마시며 일어나서 뛰놀더라 7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내려가라 네가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네 백성이 부패하였도다 8 그들이 내가 그들에게 명한 길을 속히 떠나 자기를 위하여 송아지를 부어 만들고 그것을 숭배하며 그것에게 희생을 드리며 말하기를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 신이라 하였도다 9 여호와께서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백성을 보니 목이 곧은 백성이로다 10 그런즉 나대로 하게 하라 내가 그들에게 진노하여 그들을 진멸하고 너로 큰 나라가 되게 하리라”

이들이 여호와의 절일에 하나님께 예배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실제로는 금송아지에게 절합니다. 금송아지가 애굽에서 인도한 신이라고 합니다. 예배의 형식을 보면 술취함 광란의 파티가 있습니다. 이것을 보신 하나님이 너무나 분노하셨습니다. 그래서 멸하려고 합니다. 이것이 만든 신에 대한 예배입니다.

그리고 그 만든 신에 대한 예배는 하나님이 분노하십니다. 거기에는 하나님의 생명이 없습니다. 방탕만 있습니다. 여러분 집에 금송아지 있습니까? 혹시. 쓸데없는 소리하고 있어. 제가 집회에 가서 금송아지 있는가 물었더니 앞에 권사님이 앉아서 화가 났는지 무슨 금송아지가 있어 쓸데없는 소리 하더라고요.

포도나무교회 창립된지 2년 째인가 하는데, 우리 조상대대로 내려오는 죄들을 살펴보고 회개하고 그 영향력을 회개하게 하셨어요. 한번은 너희중에 가득한 금송아지를 회개하라고 했어요. 오늘날 성도들이 주일날 교회에 와서 예배할 때는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십니다 하고 월요일부터 돈을 버는 때에는 하나님은 간 곳이 없고 돈의 법칙만 있다는 것입니다. 


말로는 주일날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라고 하지만 실제 삶에서는 돈신을 섬기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는 말입니다. 금송아지를 섬기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그런 경우가 너무나 많습니다. 그러니 그 예배가 하나님께 참된 예배가 되겠어요. 

그런데 만든 신에 대한 예배는 여러 가지 형태를 띌 수 있습니다. 그중에 한 가지가 자유주의신학의 예배입니다. 성경에 의하면 하나님이 우리의 창조주시고 우리는 그분의 피조물입니다. 20세기 이후로 자유주의신학이 급속도로 확산되면서 많은 사람들은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이 아니라 자신들의 지식과 지혜로 만든 신을 만들었습니다. 그러면서 그 신을 예배하고 있습니다. 그 신은 성경을 통해서 자신을 계시하신 그 하나님이 전혀 아닙니다. 그 신은 인간이 만든 신에 불과합니다. 

로이드존스 목사도 당시 영국교회에 팽배한 현상을 비판합니다.
“우리는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철학자들의 신을 가지고 있습니다. 철학자들의 신은 주권적이거나 초월적이거나 살아계신 하나님이 아닙니다. 그들의 신은 하나의 추상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들은 원인없는 원인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중략 철학자들은 입에 파이프를 물고 하나님에 관해서 논합니다. 마치 자기들이 하나님을 취급하며 운운할 수 있을 것처럼 떠들어 댑니다. 그러한 조건 하에서는 결코 부흥을 만나지 못할 것입니다.”

이런 상태에서는 부흥은커녕 절대로 하나님을 향한 올바른 예배가 드려질 수 없습니다. 그것은 진리로 드려지는 예배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에 있습니다. 만든 신에 대한 예배는 단지 자유주의 신학자들의 문제만 아니라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우리가 성경이 다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으면서도 성경이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생각해 낸 하나님을 예배하는 경우가 너무나 많습니다.

하나의 예가 하나님에 대한 낮은 개념입니다. 하나님은 할아버지보다 조금 높은 분으로 여깁니다.  여러분 할아버지들 보면, 손자 손녀들에게 넋을 잃습니다. 손주가 할아버지 앞에서 재롱을 부리는지 아니면 할아버지가 손주 앞에서 재롱을 부리는지 구별 못할 정도입니다. 잘못해도 혼내키지 않고 모든 응석을 다 받아줍니다. 과자 사먹는다고 돈을 주면 또 주고 또 줍니다. 그런데 바로 우리가 하나님을 이런 할아버지보다 조금 높은 분처럼 여긴다는 것입니다. 할아버지 앞에서 손주들처럼 하나님 앞에서 무례합니다.

2)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인식과 참된 예배가 밀접합니다.
따라서 하나님께 올바른 예배를 위해서는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인식이 핵심입니다. 이 말은 하나님에 대한 교리적인 올바른 지식 뿐아니라 성령께서 우리 마음 눈을 밝히셔서 하나님을 더욱 알게 해주신 것을 말합니다. 이런 관점에서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드리는 예배, 영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는 같은 말입니다.

이사야보세요. 성전에서 예배할 때 하늘 문이 열리고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이 자신을 계시합니다. 이사야 시대가 얼마나 타락했어요. 아합 왕이 나쁜 왕으로 선지자들을 다 죽이고 엘리야가 나만 남았다고 할 정도로 어두운 시대입니다. 그때에도 이사야는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어요. 이 시대가 참으로 암울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눈을 여서서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영광의 보좌를 본다면 달라질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에 대한 참다운 지식에 기초한 예배가 참된 예배입니다.

제가 욥에 대한 예를 말씀드리고 마칩니다. 사단이 하나님의 허락을 받고 하루 아침에 모든 재산, 자녀들을 빼앗습니다. 몸에 병이 들었습니다. 아내도 하나님을 저주하고 떠납니다. 욥이 하나님께 불평하지 않았다고 우리는 생각하는데 욥기서를 보면 하나님에 대한 불평으로 가득합니다. 친구 세명이 와서 신학적으로 대합니다. 죄를 회개하라고 합니다. 욥은 잘못이 없다고 반박합니다. 그러면서 그 속에 하나님에 관한 원망과 불평이 가득합니다.


이런 욥이 전환하는 포인트가 42장에 나옵니다.
1절부터 읽습니다. "욥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가로되 2 주께서는 무소불능하시오며 무슨 경영이든지 못 이루실 것이 없는 줄 아오니 3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우는 자가 누구니이까 내가 스스로 깨달을 수 없는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 없고 헤아리기 어려운 일을 말하였나이다 4 내가 말하겠사오니 주여 들으시고 내가 주께 묻겠사오니 주여 내게 알게 하옵소서”

욥이 그동안은 하나님을 이론적으로만 알았는데 이제 하나님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이제까지는 자기가 옳다고 생각했는데 정당화시키고 자기의 결백을 주장한 모든 말들이 자기도 깨닫지도 못한 말을 했는지 인식하게 됩니다. 그래서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렸습니다. 깨닫지도 못한 말을 했습니다. 그러면서 띠끌과 재 가운데 앉아서 회개합니다. 이것이 전환점입니다. 그래서 욥이 회복됩니다. 아내를 주셨고 아이들을 주셨고 재산도 회복됩니다.

우리는 십자가상에서 우리를 용서하신 주님의 사랑을 조금이라도 알면 욥처럼 재 가운데 엎드려 낮아질 것이고 주님을 예배할 것입니다. 거기에 참된 예배가 있습니다. 그러면 거기에 하나님의 눈이 머물 것입니다. 아멘.

제20강 하나님을 경외함과 예배회복 - 여주봉목사

잠언 2:3-5절입니다. "지식을 불러 구하며 명철을 얻으려고 소리를 높이며 4 은을 구하는 것같이 그것을 구하며 감추인 보배를 찾는 것같이 그것을 찾으면 5 여호와 경외하기를 깨달으며 하나님을 알게 되리니”

하나님을 경외함과 예배에 대해서 지난 주에 살펴보았습니다. 하나님께 드려지는 참된 예배가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드려져야 함을 살펴보았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함이 없는 예배는 하나님을 멸시하게 되어있다. 그래서 하나님을 경외함이 없는 예배에는 하나님의 심판이 있음을 살펴보았습니다. 특히 하나님의 부흥을 사모하는 이때에 하나님을 경외하는 예배가 얼마나 필수적인가를 살펴보았습니다.

오늘은 하나님을 경외함과 예배를 살펴봅니다. 사실 하나님을 경외함은 우리 예배 뿐아니라 우리의 모든 신앙생활에서 주요합니다.

1.하나님을 경외함이 아닌 것.
경외함이라는 말은 두려워하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말은 하나님을 두려워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과 우리가 일반적으로 이해하는 두려움은 다릅니다. 그래서 경외함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함이 아닌 것을 살피는 이유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무엇인지 더 잘 알기 위해서입니다.

1)사람을 두려워하는 것은 하나님을 경외함이 아니다.
어떤 사람은 당연한 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두려워하려면 반드시 사람을 두려워하는 것이 내려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하나님을 경외함을 방해하는 것이 사람을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사람을 두려워하면 하나님을 경외할 수 없습니다. 

대표적인 인물이 사울입니다. 성경에 보면 사울은 다른 사람보다 키가 컸고 준수했습니다. 외모적으로 볼 때 그 준수함에 압도될 만큼 뛰어났습니다. 사무엘을 통해서 성령이 부어졌을 때 예언을 했는데 기스의 아들도 선지자중에 한 사람이냐고 소문날 정도로 강력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지요. 그 이유 중 하나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두려워했기 때문입니다.

삼상 13장에 나옵니다. 블레셋 군대가 이스라엘을 쳐들어왔을 때입니다. 그때 사무엘이 말하기를 자기가 가서 하나님께 제사드리기 전까지 전쟁에 가지 말라고 합니다. 일주일을 기다리라고 합니다. 기다렸는데도 사무엘이 안와서 제사를 사울이 직접 드립니다. 제사를 끝내자마자 사무엘이 와서 책망합니다. 왕의 나라를 빼앗아서 다른 사람에게 줄 것이라고 합니다. 이런 구절을 읽을 때 우리는 잘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 너무하다고 생각합니다. 블레셋 군대가 이스라엘을 쳐들어왔을 때는 사울이 왕이 된지 2년 때입니다. 


이스라엘 정규군은 3000명 정도였습니다. 성경을 보면 마병이 6000명, 특수부대도 아니고 병거만 해도 3만대, 보병인 일반군사는 바다의 모래같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정규군이라고 해도 3000명 정도였습니다. 일반 농사꾼정도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일주일을 대치했어요. 사람들이 얼마나 두려웠으면 굴속에 바위 속에 숨었습니다. 전쟁이 안됩니다. 상대도 안됩니다. 이런 상황에서 일주일을 기다렸는데 사무엘이 안오자 차라리 제사라도 그리고 전쟁이나 하고 죽자고 생각했겠지요. 그래서 제사를 드렸는데 제사를 드리자마자 사무엘이 온 것입니다.

그런데 사울이 이렇게 제사를 지내는 배후에는 사람을 두려워함이 있었어요.
삼상13:11절을 봅니다. "사무엘이 가로되 왕의 행한 것이 무엇이뇨 사울이 가로되 백성은 나에게서 흩어지고 당신은 정한 날 안에 오지 아니하고 블레셋 사람은 믹마스에 모였음을 내가 보았으므로”

여기보면 사울이 그 열악한 상황에서 일주일동안 사무엘이 오기를 기다렸는데 이스라엘 백성도 숨고 두려워하는 상황에도 사무엘이 와서 기도하면 무엇인가 될 것인가라는 소망을 가지고 기다렸는데 기다려도 사무엘이 안와서 사람들이 흩어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 흩어지는 사람들을 붙잡기 위해서 제사를 드린 것입니다. 사람을 두려워한 것입니다. 

말씀드린 대로 이런 구절을 읽으면 우리는 이렇게 생각할 수 있어요. 아 하나님 정말 모질다. 우리는 일주일을 기다리는 것도 가능하지 않거든요. 일주일을 기다리고 흩어지기 시작한대 제사좀 지냈다고 나라를 빼앗고 다른 사람에게 주시냐. 그렇다면 하나님 앞에 쓰임받을 사람이 얼마나 되겠냐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사울의 문제는 그 속에 하나님을 경외함이 없었습니다. 그 이유는 사람을 두려워함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모질게 느껴지지요.

그러면 다윗을 보세요. 사울이 버림받고 세워진 사람이 다윗입니다. 다윗은 왕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어느날 사무엘 선지자가 와서 왕이 될 것이라고 하며 기름부었습니다. 그 후로 성령이 강력하게 임했습니다. 그 후로 자기를 기다린 것은 사울의 시기와 죽음의 위협이었습니다. 아무런 잘못도 없이 도망다니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심지어 블레셋지역으로 도망가서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서 미친 척도 했습니다. 


블레셋 족장에게 피해있을 때 이스라엘과 블레셋과 전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블레셋 족장 중에서 다윗을 알아본 족장들이 있었습니다. 다윗이 이스라엘 편을 든다면 협공을 당할 것이라고 하면서 다윗을 전쟁터에서 보냅니다. 그런데 돌아왔는데 시글락인데 자기들이 없는 사이에 아말렉 사람들이 와서 여자들과 짐승들을 다 데리고 갔습니다. 이 정도 되니까 부하들이 눈이 뒤집힌 것입니다. 그래서 돌을 들어서 다윗을 치려고 합니다.

삼상 30장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6절입니다."백성이 각기 자녀들을 위하여 마음이 슬퍼서 다윗을 돌로 치자 하니 다윗이 크게 군급하였으나 그 하나님 여호와를 힘입고 용기를 얻었더라”


이 상황에서도 다윗은 하나님을 의지했습니다. 하나님께 묻습니다. 하나님 우리가 쫓아갈까요? 안갈까요?  가지 말라고 하면 안갈 참이었습니다. 부하들에게 돌에 맞아 죽을 상황으로 더 다급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이런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믿음으로 의지하여 서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속에 하나님을 경외함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요5장 44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그 당시 유대인들 즉 종교지도자들에게 말합니다. 너희는 서로 영광을 취하고 상대방의 평가는 중요시하면서 유일하신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평가는 중하게 여기지 않는다고 합니다. 어떻게 나를 믿을 수 잇겠느냐? 여러분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평가를 소중하게 여기지 않았을까요? 너무나도 소중하게 여겼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실제 삶에서 행동은 상대방의 평가를 소중하게 여겼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함이 없었어요. 그래서 예수님을 알 수 없었고 주님의 말씀을 믿을 수 없었어요.

바울도 갈라디아서에서 사람을 기쁘게 하랴 하나님을 기쁘게 하랴고 합니다. 하나님의 평가를 소중하게 여겼습니다. 여러분 사람의 평가를 따라 좌지우지하면 사람의 종입니다.

여러분 오늘날 심각한 것이 있습니다. 사람을 두려워함이 너무나 팽배합니다. 예배, 시간, 메시지에 있어서. 그래서 하나님을 경외함이 없습니다. 그래서 그 결과는 심각합니다.

제가 한번은 오래전에 어느 도시에 집회를 갔습니다. 그 목사님은 군소교단이지만 총회장입니다. 그래서 그 교단 목사님들이 인사차 많이 오셨습니다. 가면서 한분이 하시는 말씀을 담임목사님이 전해주었습니다. 여주봉 목사님이 설교한 내용은 다 맞다. 그런데 그렇게 설교해서 누가 교회에 오겠느냐고 하더랍니다. 바꾸어 말하면 사람들을 교회에 오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정직하게 전하지 않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제가 얼마전에 교회 이렇게 무너지다니 라는 주제로 잡지에서 인터뷰한 내용을 읽어드린 적이 있지요. 어떤 분이 제게 매일로 보내준 것인데. 한국 복음주의 협의회 월례회에서 설교한 내용을 녹취한 내용입니다. 그 제목이 ‘세속화라는 무서운 세균에 한국교회가 감염되었다’는 것입니다. 제가 일부를 읽겠어요.

“...무슨 설교를 하려고 하면 앞에 앉아계신 장로님이 걸려서 못하고 무슨 설교를 하려고 하면 어느 분이 걸려서 못하고 무슨 설교를 하려고 하면 교인들이 마음이 상해서 상처받을까 봐서 못하고 해서 우리는 성경에서 반토막을 잘라내고 설교하고 있는 사람이라고 자백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입니다. 이것이 세속주의에 물들어가는 교회의 현실입니다. 마치 어린아이들에게 먹고 싶지 않은 것은 먹이지 않고 먹고 싶어하는 것만 먹이는 그래서 아이가 원하는 대로 하는 부모와 같은 상황이 오늘날 목회자들의 모습인 것 같습니다. 아이가 고개를 흔들고 신경질내고 짜증을 부리면 절대 못먹이는 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그러다 보내 아이는 자꾸 편식현상에 빠지고 체질이 약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요즘은 책망하려는 사람, 성경을 바르게 가르치려는 사람은 바보취급을 받습니다. 그리고 뭔가 좀 사고가 부정적으로 잘못된 것처럼 병자취급을 해버립니다. 지난해 한국교회 부흥을 위해서 행사도 하고 집회도 많이 했습니다. 아무 일도 안 일어났습니다. 행사로 끝났습니다. 성도들의 삶이 바뀐 것도 아닙니다. 교역자들의 지각이 일어난 것도 아닙니다. 그저 행사로 끝났습니다. 자신을 바꿀 힘이 없습니다. 지금 우리의 교회가 자정할 수 있는 능력을 잃었습니다. 안잃었다면 잃어가고 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사람 두려워함이 가득하기 때문입니다.

사울이야기를 할 때 너무 과하다 생각할 줄 모릅니다. 지난 주에 엘리 제사장을 살펴보았는데 종교적 열정 대단했고 나름대로 아이들 타일렀습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이런 구절을 읽으면 우리 하나님 너무 심하다고 생각할 수 있어요. 그런데 여러분 기억해야할 것이 있습니다. 엘리 속에 하나님을 경외함이 있었다면 자기가 자녀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예배를 멸시하지 못하게 하는 일을 하다가 자신이 목숨을 잃은 한이 있어도 하나님의 예배가 짓밟히는 것은 그의 생전에 용납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랬다면 그도 살았고 이스라엘도 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나름대로 자녀들을 타일렀고 종교적인 열심은 뛰어났을지 몰라도 우리가 이미 살펴본 대로 자녀들이 하나님의 예배를 짓밟는 것을 방치했을 뿐아니라 그들이 하나님의 예배로 자기 배속을 먼저 채웠을 때 동참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과하신 분이 아닙니다. 우리가 할 수 없는 기준을 세워놓고 우리에게 하라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울이건 엘리건 우리들이건 문제는 우리 속에 하나님을 경외함이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 두려워함만 가득하기 때문입니다. 예배 순서, 방식을 어떻게 할지가 사람의 평가에 따라 달라집니다. 사람들을 두려워하면서 사람들이 무엇을 원하는지에만 관심이 있고 그래서 심지어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마저 사람들 두려워해서 타협합니다. 이처럼 오늘날 교회는 사람이 주인되어 있습니다. 바꿔말하면 하나님을 경외함이 없습니다. 그래서 영적인 분별력이 가려지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이 시대가 그렇습니다. 오늘날 교회의 문제는 사람을 두려워함입니다.

2)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은 마귀가 가져다주는 두려움이 아닙니다.
마귀는 사람들을 인도할 때 두려움을 가지고 인도합니다. 고전 12장을 보아도 이방인으로 있을 때는 이끌리는대로 끌어갔다고 합니다. 무당들 중에 많은 사람들은 실제로 그런 일을 하기를 원하지 않는답니다. 그런데 새벽마다 일어나서 목욕제개를 하고 하는 이유는 그렇게 하지 않으면 해꼬지를 당할까봐 두려워서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함이라고 하니까 마귀가 하는 것처럼 공포로 인식하기도 하는데 그것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마귀가 가져다 주는 것입니다.

롬8장 15절입니다.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않았다고 합니다. 무서워하는 종의 영은 사단의 영입니다. 우리는 양자의 영을 받아서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 부릅니다. 아바라는 말은 아빠라는 말입니다. 집에서 아이들이 친근하게 부르는 용어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양자의 영을 주셨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을 아빠라 부릅니다.

롬14:17절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요일4:18절입니다.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그러므로 마귀가 가져다주는 두려움은 하나님을 경외함이 아닙니다. 그런 두려움이 있다면 치유받아야 합니다.

3)종교적인 두려움은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아닙니다.
이 부분에서 많은 사람들이 혼동합니다. 종교적인 두려움을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으로 오해합니다. 종교적인 두려움이란 인간의 종교심에서 나오는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을 말합니다. 쉽게 말하면 어떤 사람이 주일날 식구들과 함께 놀러가야 하는데 예배도 드리지 않고 가면 사고가 날까 봐서 예배라도 드리고 가려고 종교적 의무를 다하는 의미로 예배드립니다. 


그래서 1부 예배 나와 예배하고 갑니다. 이 말은 가족들과 놀러 가는 것이 잘못되었다는 말이 아닙니다. 1부 예배 나오면 잘못되엇다는 말도 아닙니다. 제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그런 이해로 예배하는 것은 하나님을 경외함과는 상관없이 종교적인 두려움이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그런 예배는 하나님이 전혀 받지 않으시는 예배라는 말씀입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사업을 하는데 십일조 안하면 하나님이 칠까봐서 십일조를 드립니다. 물론 십일조 드리는 것 중요합니다. 십일조 뿐아니라 우리의 경제적인 영역에서 하나님의 주권을 따라 올바로 하지 않으면 하나님은 우리 경제영역을 간섭하실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경제적인 면에서 하나님께 신실하게 청지기로 살지 않으면서 경제적인 영역에서 하나님이 함께하기를 원하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될까봐서 십일조를 드리는 것은 하나님을 경외함이 아니라 종교적인 두려움일 뿐입니다. 그리고 그 예배는 하나님이 기뻐받으시지 않습니다.

2.하나님을 경외함의 정의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 우리 예배 뿐아니라 신앙전반에 걸쳐 가장 중요한 것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입니다.

두 가지 측면이 있습니다.
1)하나님의 아름다움에 압도되어 하나님 앞에서 감격하고 감탄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경외함의 한 측면입니다.

시33:8절입니다. '온 땅은 여호와를 두려워하며 세계의 모든 거민은 그를 경외할지어다”


히브리어에는 평행법이 있는데 두려워하는 것은 경외함을 말합니다. 온 땅은 여호와를 두려워한다는 말을 영어성경에서는 거의 모든 영어성경은 그분을 경외함으로 감탄하여 서며입니다. 우리가 어떤 경치나 아름다운 것을 보면 감탄이 나옵니다. 저는 금강산을 한번도 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한구비 한구비를 돌아가면 감탄이 나온다고 합니다. 속리산은 규모는 적을지 모르지만 아기자기한 아름다움에 감탄이 나옵니다. 


이처럼 아름다움을 보면 감탄이 나오는데 그것이 경외함이라는 말입니다. 경외함이란 하나님의 아름다움에 감탄하여 감격하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이 아름답다는 말은 영이시기 때문에 얼굴을 가진 분이 아닙니다. 그분의 속성을 전체를 아름다움으로 표현합니다. 그것에 감격하여 감탄하여 서는 것입니다.

여기를 보아도 경외함이 있으려면 하나님이 자신을 계시하셔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능력을 자신을 아름다움을 계시하셔야 합니다. 그때 그 아름다움 앞에 감탄하여 감격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를 보면 하나님을 아는 것과 사랑하는 것과 경외하는 것이 항상 같이 갑니다. 렘2장을 보아도 신앙의 본질인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는 것 하나님중심적인 삶 하나님을 경외함이 같이 갑니다.

좋은 성경적인 예가 출34장입니다. 출33장에서 모세가 하나님을 향하여섭니다. 그러자 33장에서 하나님이 모세에게 말씀하십니다. 모세의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 34장을 보면 하나님이 영광중에 임하십니다. 임하시면서 이름으로 자신을 계시하십니다. 이 말은 이름으로 자신의 성품을 계시하시는 것입니다. 그에게 하나님 자신의 모습을 보이십니다. 그 영광을 드러내 보이십니다.

그러면서 5-7절입니다. "여호와께서 구름 가운데 강림하사 그와 함께 거기 서서 여호와의 이름을 반포하실쌔 6 여호와께서 그의 앞으로 지나시며 반포하시되 여호와로라 여호와로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로라 7 인자를 천대까지 베풀며 악과 과실과 죄를 용서하나 형벌 받을 자는 결단코 면죄하지 않고 아비의 악을 자여손 삼 사대까지 보응하리라”

하나님에 대한 이론적인 사실을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친히 임하셔서 영광된 성품을 보이신 것입니다. 그러자 모세가 그 앞에 납작 엎드립니다. 하나님을 경외함입니다.

로이드존스 목사의 부흥이라는 책에 보면 죠나단 에드워드라는 사람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미국이 낳은 가장 위대한 설교자입니다.

“1737년 내 건강을 위해서 숲 속으로 말을 타고 가다가 ......”
이것이 하나님을 경외함입니다. 하나님이 자신을 계시하실 때 그 아름다움에 감탄하여 감격하여 서는 것이 경외함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신을 찾는 자에게 자신을 계시하십니다.
그래서 스펄젼 목사님도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의 아는 것의 중요성을 말하면서, 강력하게 사모하는 심정으로 그리스도를 사모하지 않는 사람치고 그리스도를 만나게 될 사람은 없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그런 소원을 가지고 있다면 주님을 만나고자 원하고 그분의 성품을 더 알기를 원하는 소원을 가지고 있다면 하나님께서 그것을 주실 것입니다. 만일 갈망하고 울부짖으면서 주님을 찾는다면 그것이 하나님의 은사요 그로 인해서 하나님을 찬미하십시오. 왜 그 갈망하며 사모하는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로 함께하시는 싸인이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그 작은 은혜가 감사하면서 지속적으로 하나님을 찾으면 하나님을 경험하게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경외함입니다.

2)하나님이 가장 소중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을 행하기를 열적으로 사모하고 하나님께 가까이 가기를 방해하는 것을 열정적으로 버리는 것을 포함합니다.

두 사람의 예를 듭니다.
첫째는 모세입니다.
모세속에는 하나님을 경외함이 있었습니다. 경외함이 있었기 때문에 모세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을 행하고 주님이 기뻐하시는 자리에 머물기를 열정적으로 추구했습니다. 출33장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시 128:1절을 보면,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하나님의 길을 따라 행한다고 하셨는데, 모세는 철저히 하나님의 길을 추구하고 따랐습니다. 하나님 앞에 은총을 입었사오면 주님의 길을 보여주세요하고 기도합니다. 주님의 마음이 있는 것, 주님이 목적하신 바를 알게 해달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나로 하여금 주님이 추구하는 것을 추구하게 하시고 주님이 기뻐하는 것에 삶을 드릴 수 있게 해주세요하고 기도합니다. 그 결과 주님을 더욱 알게 해주시고 지속적으로 주님의 은총을 받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지속적으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자리에 머물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경외함입니다.

이 경외홤이 엘리 속에 있었다면 사울 속에 있었다면 결과는 전혀 달랐을 것입니다. 이 하나님을 경외함이 오늘날 목회자들과 성도 속에 있다면 삶이 완전히 달라질 것입니다. 우리 가운데 하나님의 임재가 회복되고 생명이 회복될 것입니다.

둘째 예는 바울입니다.
빌3장을 봅시다. 바울은 예수님을 아는 것이 가장 소중한 가치를 알았습니다. 주님을 아는 것이 가장 아름다움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예수님을 향해 갔을 뿐아니라 방해하는 것을 배설물로 여기고 지속적으로 달려갔습니다. 저에게도 여러분에게도 동일한 소망입니다.

히12:1-2절에서 말합니다."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며 2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우리 신앙은 한 마디로 말해서 예수 그리스도께 우리 눈을 고정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 믿음을 시작하신 분이요 완성하신 분이시다. 달려가는데 단거리가 아니라 마라톤과 같은 지속적인 것입니다. 달려갈 때 무거운 것과 얽매이는 것을 내려놓아야 한다고 합니다. 바울이 이처럼 주님 안에 있는 가장 값진 보화를 발견하고 달려가되 방해하는 요소들을 배설물로 여기고 달려가고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경외함의 다른 요소입니다. 하나님이 저와 여러분에게 이런 요소를 부어주시기를 축원합니다.

3.경외함의 유익
하나님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에게 많은 축복을 약속하십니다. 하나 하나가 하나님의 생명입니다. 신앙의 본질과 하나님을 경외함은 같이 갑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에게 주시는 축복들은 하나님의 생명입니다.

1)하나님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에게 죄를 이기는 힘을 주십니다.
출20:20절입니다."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두려워 말라 하나님이 강림하심은 너희를 시험하고 너희로 경외하여 범죄치 않게 하려 하심이니라”


죄를 거절하고 죄와 싸우는 것이 우리가 해야할 일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노력만으로는 안됩니다. 우리에게 죄를 이기게 하는 근본적인 능력은 하나님을 경외함입니다. 남편이 아내를 진실로 사랑하고 아내를 보고싶어 하고 갈망하면 다른 여자들은 안보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그렇게 사랑하면 죄를 이길 수 있습니다. 죄를 이기려고 노력하되 우리의 초점은 하나님께 초점을 맞추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선한 것이 업ㅂㅅ음을 인식하고 주님이 오셔서 통치하시고 다스리기를 소망하며 보는 것입니다. 이것이 승리의 비결입니다.

2)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주십니다.
시25:12절입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 누구뇨 그 택할 길을 저에게 가르치시리로다”
친밀함이라는 단어는 원탁회의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회의, 하나님의 비밀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은밀한 하나님의 비밀을 계시한다는 말입니다. 이 비밀을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에게 주신다는 말입니다. 엘리사에게 하나님은 적국의 작전회의까지도 알려주셨습니다. 그래서 적군들이 엘리사를 죽이기 위해서 군대를 보냈지요. 그런데 불병거와 불말을 보내셨어요. 친밀함은 경외하는 자에게 주어집니다.

잠2:3-5절입니다. '지식을 불러 구하며 명철을 얻으려고 소리를 높이며 4 은을 구하는 것같이 그것을 구하며 감추인 보배를 찾는 것같이 그것을 찾으면 5 여호와 경외하기를 깨달으며 하나님을 알게 되리니”


잠8:12절 이하입니다. "나 지혜는 명철로 주소를 삼으며 지식과 근신을 찾아 얻나니 13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악을 미워하는 것이라 나는 교만과 거만과 악한 행실과 패역한 입을 미워하느니라 14 내게는 도략과 참 지식이 있으며 나는 명철이라 내게 능력이 있으므로”
지식과 지혜는 예수님에 대한 상징입니다. 예수님을 알기를 구하되 숨겨진 보화를 찾는 것처럼 찾고 찾으면 하나님을 경외함을 깨달으며 하나님을 알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여러분이 조상 몇 대 내려오는 집에 살고 있는데 청소하다 보니까 집에 엄청난 보화가 숨겨있다고 써 있어요. 그렇다면 온통 그 생각으로 가득찰 것입니다. 남들 몰래 뒤지고 찾고 찾고 바당을 파고 벽고 헐어보고 할 것입니다. 이처럼 주님을 구하면 찾으면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우리에게 부어지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으로 연결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우리에게 있으려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자신을 계시해주셔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할 일은 그렇게 주님을 찾아야 합니다. 주님을 찾지 않으면 안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에게 하나님께서 자신을 계시하십니다. 예배만 해도 왜 경외함이 절실하게 필요한가? 가장 먼저는 삶에서 주님을 구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주님이 보화가 되는 것이 내 삶입니다. 주님의 의중과 의도를 알아서 내 온 삶으로 동참함으로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이 내 기쁨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삶의 만족이 없습니까? 주님을 몰라서 그럽니다. 여러분에게 삶의 의욕이 없습니까? 주님의 목표를 몰라서 그럽니다. 그러니 내 문제만 가지고 사는 것입니다.

최근에 어떤 집회를 갔다가 남편이 천억대의 재산을 가진 사람을 만났습니다. 돈 때문에 염려되고 문제 때문에 걱정이 되어서 밤에 잠을 자기 못하고 뜬 눈으로 샐 때가 한두번이 아니랍니다. 돈이 없는 사람은 돈만 있으면 다 될 것 같지요. 몰라서 그럽니다. 인생에 만족이 없는 것은 주님을 몰라서 그렇고 목표의식이 없는 것은 주님의 목적을 몰라서 그럽니다. 진짜 바울처럼 주님의 목적과 목표를 알아서 푯대를 향해 달려가는 삶을 살면 여러분에게 진정한 삶의 만족이 있을 것입니다. 주님을 알기를 원하는 열망이 우리안에 있어야 합니다.

3)하나님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를 진실로 보호하십니다.
시34:7절입니다."여호와의 사자가 주를 경외하는 자를 둘러 진치고 저희를 건지시는도다”


시31:19-20절입니다."주를 두려워하는 자를 위하여 쌓아 두신 은혜 곧 인생 앞에서 주께 피하는 자를 위하여 베푸신 은혜가 어찌 그리 큰지요 20 주께서 저희를 주의 은밀한 곳에 숨기사 사람의 꾀에서 벗어나게 하시고 비밀히 장막에 감추사 구설의 다툼에서 면하게 하시리이다”

4)하나님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에게 모든 좋은 것으로 부족함이 없게 하십니다.
시34:9-10절입니다. "너희 성도들아 여호와를 경외하라 저를 경외하는 자에게는 부족함이 없도다 10 젊은 사자는 궁핍하여 주릴지라도 여호와를 찾는 자는 모든 좋은 것에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아프리카에도 집회를 가는데 사자가 왕입니다. 젊은 사자가 왕입니다. 젊은 사자가 주일 정도면 다른 사자는 다 죽습니다. 김정일이 먹을 것이 없어 죽을 지경이면 다른 사람은 다 끝난 것입니다.

주릴지라도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에게는 모든 선한 것에 부족함이 없다고 합니다. 이 말은 IMF가 닥쳐도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무조건 부자가 된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러나 기억할 것은 하나님 앞에서 모든 선한 것에서 부족함이 없을 것입니다.


고후6장 3-10절에 보면 하나 하나가 하나님의 생명들입니다. "우리가 이 직책이 훼방을 받지 않게 하려고 무엇에든지 아무에게도 거리끼지 않게 하고 4 오직 모든 일에 하나님의 일꾼으로 자천하여 많이 견디는 것과 환난과 궁핍과 곤난과 5 매맞음과 갇힘과 요란한 것과 수고로움과 자지 못함과 먹지 못함과 6 깨끗함과 지식과 오래 참음과 자비함과 성령의 감화와 거짓이 없는 사랑과 7 진리의 말씀과 하나님의 능력 안에 있어 의의 병기로 좌우하고 8 영광과 욕됨으로 말미암으며 악한 이름과 아름다운 이름으로 말미암으며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9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는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10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바울이 주님을 따라가면서 받은 고난에 대해서 말합니다. 기쁨으로 환난을 당했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을 따라가려면 대가 지불하는 것이 포함되기 때문입니다. 어떤 때는 먹지 못할 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생명이 넘쳤습니다. 이런 것들이 하나님의 생명들입니다.

문제는 우리는 하나님의 선한 것들이 없이 돈 많이 벌었다고 하나님의 축복을 받았다고 생각합니다.

5)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에게 치유의 광선을 발하십니다.
말4:1절입니다."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극렬한 풀무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초개 같을 것이라 그 이르는 날이 그들을 살라 그 뿌리와 가지를 남기지 아니할 것이로되."

6)하나님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을 기뻐하십니다.
시147:11절입니다."자기를 경외하는 자와 그 인자하심을 바라는 자들을 기뻐하시는도다”

7)하나님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의 기도를 들으십니다.
말3:16-18절입니다."그 때에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들이 피차에 말하매 여호와께서 그것을 분명히 들으시고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와 그 이름을 존중히 생각하는 자를 위하여 여호와 앞에 있는 기념책에 기록하셨느니라 17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내가 나의 정한 날에 그들로 나의 특별한 소유를 삼을 것이요 또 사람이 자기를 섬기는 아들을 아낌같이 내가 그들을 아끼리니 18 그 때에 너희가 돌아와서 의인과 악인이며 하나님을 섬기는 자와 섬기지 아니하는 자를 분별하리라."

8)하나님의 눈을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에게 머물게 하십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에게 많은 축복들을 약속하시고 있습니다. 예레미야서를 보면 나라가 망할 것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또한 회복에 대해서도 약속하십니다. 그런데 회복에 대해서 말씀하시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렘32:37-42절입니다."보라 내가 노와 분과 큰 분노로 그들을 쫓아 보내었던 모든 지방에서 그들을 모아내어 이 곳으로 다시 인도하여 안전히 거하게 할 것이라 38 그들은 내 백성이 되겠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될 것이며 39 내가 그들에게 한 마음과 한 도를 주어 자기들과 자기 후손의 복을 위하여 항상 나를 경외하게 하고 40 내가 그들에게 복을 주기 위하여 그들을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는 영영한 언약을 그들에게 세우고 나를 경외함을 그들의 마음에 두어 나를 떠나지 않게 하고 41 내가 기쁨으로 그들에게 복을 주되 정녕히 나의 마음과 정신을 다하여 그들을 이 땅에 심으리라 42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내가 이 백성에게 이 큰 재앙을 내린 것같이 허락한 모든 복을 그들에게 내리리라”

회복에 대해서 말하면서 그들안에 하나님을 일심으로 사랑하는 사랑과 하나님의 길을 따라 사는 삶을 도울 것이며 그들 속에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을 주셔서 그들로 하나님과 동행하게 하심으로 하나님이 마음과 뜻을 다래서 그곳에 심게 하겠다고 하십니다.

오늘날 교회회복이 절실하게 필요한 이때에 하나님을 경외함이 부어져야 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하나님을 따라가며 하나님과 동행하여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을 경외함을 부어주시도록 기도하고 사모해야 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