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9/2010

제21강 영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 - 여주봉목사

요4:23-24절입니다.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24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

오늘은 영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에 대해서 특별히 그중에서 진리로 드리는 예배를 살펴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참된 예배의 기준을 말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다 중요합니다. 오늘 말씀은 예수님이 특별히 말씀하신 예배의 기준입니다.


세 가지를 볼 수 있습니다.
1.영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가 참된 예배다.
2.하나님은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신다.
3.반드시 우리는 영과 진리로 예배를 드려야 한다.

1.전체적인 개요


1)영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가 참된 예배다.
수가성 우물가에서 사마리아여인과 대화하면서 나눈 이야기입니다. 예배의 형식 때문에 유대인과 사마리아 사람들 사이에 충돌이 있었습니다. 자기들이 참된 예배자라고 주장하면서 치열한 논쟁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마리아여인이 예배에 대해서 문제점을 제기하고 있지요.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는데 당신들은 예루살렘에서 예배해야 한다고 하더라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서 예수님은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하나님께 참되게 예배할 때가 오는데 바로 지금이 그때라고 합니다. 그 예배는 영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라고 합니다. 참된 예배는 영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라고 하셨습니다. 참된 예배의 기준은 조상들로부터 오는 전통도 아니고 장소도 아니고 형식도 아니고 영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라는 말입니다.

2)하나님은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신다.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자들을 하나님이 찾으십니다. 오늘날 예배가 회복되어야할 절실한 필요가운데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예배가 회복되어야 할 가장 중요한 이유는 하나님은 우리의 예배를 받으시기에 홀로 합당하실 뿐아니라 그분이 우리의 예배를 열망하시기 때문입니다. 이 한 가지만 하더라도 반드시 우리의 예배가 회복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마땅히 그분께 드려져야 합니다. 참된 예배가 드려져야 합니다.

책을 정리하면서 예배를 열망하시는 하나님을 보겠더라고요. 하나님은 우리의 예배를 받으시기 위한 열망 가운데서 우리를 창조하셨습니다.


사43:7절입니다."무릇 내 이름으로 일컫는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들을 내가 지었고 만들었느니라”


골1:6절입니다."이 복음이 이미 너희에게 이르매 너희가 듣고 참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은 날부터 너희 중에서와 같이 또한 온 천하에서도 열매를 맺어 자라는도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시되 이스라엘을 창조하시되 그 목적이 예배를 받으시기 위해서였습니다.

또 성경을 보면 하나님이 우리의 예배를 받으시기 위해서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우리의 구원과 관련해서 가장 중요한 구절이 엡1장입니다. 엡1장 3절 이하를 보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볼 수 있습니다 그안에 풍성한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그 엄청난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에게 부으사 구원하셨는데 그 이유가 예배를 받으시기 위해서라고 합니다.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는 말을 반복하고 있습니다. 세 번식이나 반복하지요. 성부 하나님의 사역을 말하고 성자 예수님의 사역을 말하고 성령 하나님의 사역을 말하고 끝에 반복적으로 하나님을 찬송하게 하려는 말을 반복합니다. 6절, 12절, 14절. 우리의 예배를 받기 위해서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이처럼 우리의 예배를 열망하십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예배를 받기를 얼마나 열망하시는가를 하늘의 예배를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계4-5장에 보면 스랍들이 나옵니다. 얼핏 보면 스랍들은 하나님이 예배 받으시기 위해서 창조하신 기계 같습니다. 이것을 보아도 하나님이 우리의 예배를 얼마나 열망하시는가를 볼 수 있습니다.

여기까지만 보면 잘 모릅니다. 우리는 더 살펴보아야 합니다. 왜 하나님이 우리의 예배를 열망하시는가? 가장 주된 이유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사랑하는 여인과 데이트 할 때는 생각해 보세요. 중심으로부터 진짜 사랑하는 사람과 데이트할 때를 생각해 보세요. 상대방이 사랑을 고백합니다. 자기야 사랑해! 그런데 한번만 들으면 족하든가요. 또 듣고 싶지 않던가요? 여러분이 지금 자기도취에 빠져서 나르시즘에 빠졌기 때문이니까? 아닙니다. 상대방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상대방을 통해서 사랑의 고백을 듣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예배를 받기를 열망하시는데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보면 하나님의 열망이 이해가 됩니다. 그전에 한 가지 예를 말씀드릴께요. 포도나무교회가 분당에 있을 때 앞에 카페트가 깔려 있었어요. 하루는 혼자 제가 앉아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열망하며 중보기도하고 있었어요.

갑자기 하나님께서 저에게 너는 내꺼야라고 감동하셨어요. 그 의미가 무엇이었는가 하면 하나님이 나에게 원하시는 것은 헌금도 아니도 봉사도 아니고 내 자신이라고 하셨어요. 그런 의미를 깨닫게 하셨어요. 그러면서 주님이 너는 내꺼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가서를 보면 솔로몬 왕과 술람미 여인간의 사랑의 노래를 담고 있습니다. 아가서는 부부간의 사랑과 예수님과 교회의 사랑의 관계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한 구절을 예를 들면 아4;9-15절을 보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조금이라도 볼 수 있습니다. 여기보면 눈길 하나만 해도 정신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정신을 못차립니다.

“9 나의 누이 나의 신부야 네가 내 마음을 빼앗았구나 네 눈으로 한 번 보는 것과 네 목의 구슬 한 꿰미로 내 마음을 빼앗았구나 10 나의 누이 나의 신부야 네 사랑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 네 사랑은 포도주에 지나고 네 기름의 향기는 각양 향품보다 승하구나 11 내 신부야 네 입술에서는 꿀 방울이 떨어지고 네 혀 밑에는 꿀과 젖이 있고 네 의복의 향기는 레바논의 향기 같구나 12 나의 누이, 나의 신부는 잠근 동산이요 덮은 우물이요 봉한 샘이로구나 13 네게서 나는 것은 석류나무와 각종 아름다운 과수와 고벨화와 나도초와 14 나도와 번홍화와 창포와 계수와 각종 유향목과 몰약과 침향과 모든 귀한 향품이요 15 너는 동산의 샘이요 생수의 우물이요 레바논에서부터 흐르는 시내로구나”

하나님이 우리를 보시고 정신을 못차립니다. 그래서 거기에는 질투가 있습니다. 아가서 8장을 보면, 영어성경을 보면 누가 한 말인지 잘 정리가 되어 있습니다. 8:6-7절은 술람미 여인이 솔로몬 왕의 사랑이 큰 것을 알고 그 사랑에 자기를 의탁하는 고백입니다. 이 구절은 하나님의 사랑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 사랑에 자기를 의탁하는 말입니다.

“6 너는 나를 인같이 마음에 품고 도장같이 팔에 두라 사랑은 죽음같이 강하고 투기는 음부같이 잔혹하며 불같이 일어나니 그 기세가 여호와의 불과 같으니라 7 이 사랑은 많은 물이 꺼치지 못하겠고 홍수라도 엄몰하지 못하나니 사람이 그 온 가산을 다 주고 사랑과 바꾸려 할지라도 오히려 멸시를 받으리라”

이것이 우리를 향한 질투가 있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의 예배를 열망하십니다. 예배를 받기에 홀로 합당하신 분입니다. 이 한 가지만 해도 우리의 예배는 반드시 회복되어야 합니다. 그분께 돌아가야 할 예배가 반드시 회복되어야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예배를 열망하시는 또 다른 이유는 우리의 유익을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은 처음 창조 때부터 하나님을 예배하게 창조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뭔가를 예배하게 되어 있습니다. 돈을 예배하든지 여자를 예배하든지 사업을 예배하든지 우상을 예배하든지..... 그런데 하나님 외에 다른 것을 예배하면 그것이 우상숭배입니다. 거기에는 하나님의 생명이 없고 그곳이 지옥입니다.

또 하나는 우리가 무엇을 애배하느냐에 따라서 그것을 닮게 됩니다. 돈을 예배하면 돈을 담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예배해야 그분의 형상을 닮아가고 그분의 성품이 우리안에 일어나고 은혜가 부어집니다.

그런데 그렇게 우리의 예배를 열망하시기 때문에 하나님은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십니다. 영과 진리를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십니다. 그 예배가 참된 예배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향한 질투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을 향한 예배를 명시하면 성경은 우리가 예배가 아니라 하나님을 멸시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십니다. 바꿔말하면 하나님은 웅장한 장소에서 드려지는 예배를 찾으시는 것이 아닙니다. 거대한 파이프 오르간으로 하는 예배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많은 사람이 모여서 예배하는 것에 관심이 없습니다. 여러분 이 한 가지만 이라도 올바르게 깨닫는다면 예배에 대한 자세가 완전히 달라질 것입니다.

하나님은 영과 진리를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십니다. 그리고 그들을 발견하시면 하나님의 눈이 거기에 머무십니다.

3)우리는 반드시 영과 진리로 예배해야 합니다.
해도 되고 안해도 되는 것이 아닙니다. 선택사항이 아닙니다.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것은 필수입니다. 하나님의 강한 명령입니다. ‘예배할지니라’는 단어는 강력한 명령입니다. 거의 모든 영어성경은 이 단어를 must라는 조동사를 써어 번역하고 있습니다. 반드시 그렇게 드려야 할 예배입니다.

2.영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가 아닌 것
모든 면에서 하나님의 관점이 필수입니다. 이사야시대를 보셨지요. 그들은 하나님께 안식일 예배, 월삭, 모든 대화 절기를 성경대로 드렸습니다. 그들은 수송아지 수염소 어린양을 성경대로 가장 좋은 것으로 드렸습니다. 그것도 무수히 드렸어요. 많이 기도하고 금식했어요. 그들은 하나님이 자신들의 예배를 받으셨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들의 예배를 받지 않으셨습니다. 마당만 밟는 예배 헛된 예배라고 했습니다.

예수님 시대의 바리새인들을 보세요. 이사야 시대의 예배가 잘못된 예배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런데 자기들의 예배가 그 조상들의 예배처럼 타락한 예배라는 사실을 알았을까요? 아닙니다. 전혀 몰랐습니다. 성경은 바리새인들의 예배가 정확하게 이사야시대의 예배와 똑같다고 합니다. 바리새인들은 성경을 보면서도 자기들의 예배가 타락한 예배임을 몰랐습니다. 눈이 가려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영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만 해도 성경이 말하는 의미가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자기들은 영과 진리를 드리는 예배라고 자부하지만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할 수 있어요. 그런데 영과 진리로 드려지는 예배가 무엇인지 알려면 아닌 것이 무엇인지를 알면 도움이 됩니다.

1)영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는 정성이 넘치는 예배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영과 진리로 드린다는 예배가 개역성경에는 신령과 진정으로라고 번역되어 있었어요. 교회주보마다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라는 구절이 없을 정도로 잘 알려진 구절입니다. 그런데 이 구절을 우리는 우리의 종교적인 이해를 가지고 이해합니다. 우리 민족은 조상 때부터 종교성이 강한 민족입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냉수를 떠놓고 정성을 다해 빌면 그 신이 소원을 들어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큰 과일 가게는 무당들 때문에 먹고 산답니다. 얼마나 정성을 다합니까? 이런 종교심 이런 종교적인 배경에서 신령과 진정이라는 말을 정성을 다한 예배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이 말은 하나님께 예배할 때 정성도 없이 예배하는 것이 잘한다는 말도 아닙니다. 하나님께 마음을 쏟아서 정성스럽게 드리는 것이 잘못되었다는 말도 아닙니다.

만일 정성으로 말하자면 이사야 시대의 예배는 정성이 결코 부족한 것이 아닙니다. 그들에게 종교적인 헌신이 부족했습니까? 아닙니다.

렘6장 20절을 보면 시바와 원방 오늘날로 말하면 인도까지 가서 값비싼 향품을 사서 하나님께 예배드렸습니다. 상상할 수 없는 거리입니다. 그렇다면 얼마나 정성이 뛰어났겠어요. 그런데도 하나님은 그들의 예배를 받지 않으셨습니다.

바리새인들도 얼마나 열심과 헌신이 강했습니까? 그렇게 정성을 쏟은 예배인데 그들 모두에게 입술 뿐인 예배라고 합니다. 마당만 밟는 예배 헛된 예{배라고 합니다. 따라서 기억해야할 것은 영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가 정성을 다하는 예배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문제는 이것을 정성으로 드리는 예배의 개념으로 이해하면 영과 진리로 드리는 것을 방해합니다. 왜냐하면 거기에 초점이 있고 이렇게 드리면 하나님 앞에서 마당만 밟는 예배를 드리면서도 하나님 앞에서 영과 진리로 예배하고 있다고 착각하기 때문입니다.

2)외부적으로 화려한 예배를 말하는 것도 아닙니다.
오늘날 성도들이 그럽니다. 믿습니까? 그러면 아멘합니다. 아멘하는데 실제 행동은 아멘한 것과 전혀 다르게 행동합니다. 오늘날 많은 성도들이 영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를 외부적으로 화려하게 드리는 것으로 오해하고 있습니다. 주일날 양복입고 와서 얌전하게 앉아있고 헌금도 신권으로 바꾸어 드립니다. 이런 예배가 참된 예배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구겨진 천원권 하나 그냥 드리는 것이 옳다는 말도 아닙니다. 외부적인 단정함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것에 초점을 맞추고 바른 예배라고 생각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우리의 진정한 경건은 하나님이 통치할 때 가능합니다. 경건함은 우리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평상복 입는 것, 양복 입는 것 그리 중요한 것 아니지요.

에이든 토저도 본문을 말하면서 ‘이 말씀은 예배의 본질이 영적인 것임을 분명히 밝힌다. 종교의 본질은 관습적인 종교행위 축제일 준수, 종교적 의식 의복 등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영과 하나님의 영의 연합에 있다.’

예배의 본질은 하나님과 만남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양복을 입는 것도 다 좋은데 우리의 예배를 외부적인 모양이나 격식에 두면 우리가 마음을 열어 하나님과 만남을 찾는데 방해가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관점에서 우리자신을 보고 우리 속에 있는 하나님 앞에 합당하지 못한 것을 보고 애통해하며 하나님의 통치가 임하여 우리를 다스려야 우리에게 은혜가 임하고 거룩함이 있기 때문에 주님을 사모하고 구하고 나와야 합니다. 그런데 외부적인 모양이나 절차에 두고 그래서 양복 입고 왔다 가면 그 예배가 참된 예배라고 생각하는 것은 껍데기뿐인 예배입니다. 그래서 반드시 깨져야 합니다. 그래야 참된 예배의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처럼 영과 진리를 드리는 예배는 외부적인 모양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3.진리로 드리는 예배.
영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 중에서 오늘은 진리로 드리는 예배를 살펴봅니다. 우리 신앙과 예배는 철저하게 성경에 기초해야 합니다. 루터시대에는 전 세계가 면죄부를 사서 구원받고 죄용서를 받는다고 믿었어요. 루터의 전기를 보면 성베드로 성당을 짓는다고 사람들이 종을 두드리면서 ‘여러분이 헌금을 해서 여러분의 동전이 땡그랑 소리를 내면서 들어가는 순간에 여러분의 부모님이 연옥에서 20만년 먼저 천국에 들어갈 것입니다’고 했어요. 그러면 사람들이 줄을 서서 눈물을 흘리면서 감격하면서 동전을 넣었어요. 그런데 아무리 눈물을 흘리고 감동되었고 전세계가 믿었어도 그것은 가까였어요.

우리는 우리의 모든 신앙과 예배가 다른 사람이, 큰 교회가, 다른 사람이 어떻게 하느냐고 아니라 성경에 기초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예배는 진리에 기초한 예배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더 나아가서 한 가지 살펴볼 것은 우리 개인의 삶의 모든 영역에서 가장 크게 영향을 미치는 진리가 두 가지가 있습니다. 이 두 가지 진리가 모든 삶에 영향을 미칩니다. 그 두 가지는 하나님에 대한 진리, 또 하나님 안에서 자신에 대한 진리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예배만 해도 우리의 예배가 참된 예배가 되려면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진리 위에서 드려져야 합니다.

1)만든 신에 대한 예배
우리가 하나님께 예배한다 하면서 우리가 만든 신에게 예배합니다. 그러면서도 하나님께 예배한다고 착각합니다. 대표적인 예가 출애굽기 32장입니다.


출32:4-10절입니다. "아론이 그들의 손에서 그 고리를 받아 부어서 각도로 새겨 송아지 형상을 만드니 그들이 말하되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 신이로다 하는지라 5 아론이 보고 그 앞에 단을 쌓고 이에 공포하여 가로되 내일은 여호와의 절일이니라 하니 6 이튿날에 그들이 일찌기 일어나 번제를 드리며 화목제를 드리고 앉아서 먹고 마시며 일어나서 뛰놀더라 7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내려가라 네가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네 백성이 부패하였도다 8 그들이 내가 그들에게 명한 길을 속히 떠나 자기를 위하여 송아지를 부어 만들고 그것을 숭배하며 그것에게 희생을 드리며 말하기를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 신이라 하였도다 9 여호와께서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백성을 보니 목이 곧은 백성이로다 10 그런즉 나대로 하게 하라 내가 그들에게 진노하여 그들을 진멸하고 너로 큰 나라가 되게 하리라”

이들이 여호와의 절일에 하나님께 예배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실제로는 금송아지에게 절합니다. 금송아지가 애굽에서 인도한 신이라고 합니다. 예배의 형식을 보면 술취함 광란의 파티가 있습니다. 이것을 보신 하나님이 너무나 분노하셨습니다. 그래서 멸하려고 합니다. 이것이 만든 신에 대한 예배입니다.

그리고 그 만든 신에 대한 예배는 하나님이 분노하십니다. 거기에는 하나님의 생명이 없습니다. 방탕만 있습니다. 여러분 집에 금송아지 있습니까? 혹시. 쓸데없는 소리하고 있어. 제가 집회에 가서 금송아지 있는가 물었더니 앞에 권사님이 앉아서 화가 났는지 무슨 금송아지가 있어 쓸데없는 소리 하더라고요.

포도나무교회 창립된지 2년 째인가 하는데, 우리 조상대대로 내려오는 죄들을 살펴보고 회개하고 그 영향력을 회개하게 하셨어요. 한번은 너희중에 가득한 금송아지를 회개하라고 했어요. 오늘날 성도들이 주일날 교회에 와서 예배할 때는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십니다 하고 월요일부터 돈을 버는 때에는 하나님은 간 곳이 없고 돈의 법칙만 있다는 것입니다. 


말로는 주일날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라고 하지만 실제 삶에서는 돈신을 섬기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는 말입니다. 금송아지를 섬기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그런 경우가 너무나 많습니다. 그러니 그 예배가 하나님께 참된 예배가 되겠어요. 

그런데 만든 신에 대한 예배는 여러 가지 형태를 띌 수 있습니다. 그중에 한 가지가 자유주의신학의 예배입니다. 성경에 의하면 하나님이 우리의 창조주시고 우리는 그분의 피조물입니다. 20세기 이후로 자유주의신학이 급속도로 확산되면서 많은 사람들은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이 아니라 자신들의 지식과 지혜로 만든 신을 만들었습니다. 그러면서 그 신을 예배하고 있습니다. 그 신은 성경을 통해서 자신을 계시하신 그 하나님이 전혀 아닙니다. 그 신은 인간이 만든 신에 불과합니다. 

로이드존스 목사도 당시 영국교회에 팽배한 현상을 비판합니다.
“우리는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철학자들의 신을 가지고 있습니다. 철학자들의 신은 주권적이거나 초월적이거나 살아계신 하나님이 아닙니다. 그들의 신은 하나의 추상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들은 원인없는 원인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중략 철학자들은 입에 파이프를 물고 하나님에 관해서 논합니다. 마치 자기들이 하나님을 취급하며 운운할 수 있을 것처럼 떠들어 댑니다. 그러한 조건 하에서는 결코 부흥을 만나지 못할 것입니다.”

이런 상태에서는 부흥은커녕 절대로 하나님을 향한 올바른 예배가 드려질 수 없습니다. 그것은 진리로 드려지는 예배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에 있습니다. 만든 신에 대한 예배는 단지 자유주의 신학자들의 문제만 아니라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우리가 성경이 다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으면서도 성경이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생각해 낸 하나님을 예배하는 경우가 너무나 많습니다.

하나의 예가 하나님에 대한 낮은 개념입니다. 하나님은 할아버지보다 조금 높은 분으로 여깁니다.  여러분 할아버지들 보면, 손자 손녀들에게 넋을 잃습니다. 손주가 할아버지 앞에서 재롱을 부리는지 아니면 할아버지가 손주 앞에서 재롱을 부리는지 구별 못할 정도입니다. 잘못해도 혼내키지 않고 모든 응석을 다 받아줍니다. 과자 사먹는다고 돈을 주면 또 주고 또 줍니다. 그런데 바로 우리가 하나님을 이런 할아버지보다 조금 높은 분처럼 여긴다는 것입니다. 할아버지 앞에서 손주들처럼 하나님 앞에서 무례합니다.

2)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인식과 참된 예배가 밀접합니다.
따라서 하나님께 올바른 예배를 위해서는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인식이 핵심입니다. 이 말은 하나님에 대한 교리적인 올바른 지식 뿐아니라 성령께서 우리 마음 눈을 밝히셔서 하나님을 더욱 알게 해주신 것을 말합니다. 이런 관점에서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드리는 예배, 영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는 같은 말입니다.

이사야보세요. 성전에서 예배할 때 하늘 문이 열리고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이 자신을 계시합니다. 이사야 시대가 얼마나 타락했어요. 아합 왕이 나쁜 왕으로 선지자들을 다 죽이고 엘리야가 나만 남았다고 할 정도로 어두운 시대입니다. 그때에도 이사야는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어요. 이 시대가 참으로 암울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눈을 여서서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영광의 보좌를 본다면 달라질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에 대한 참다운 지식에 기초한 예배가 참된 예배입니다.

제가 욥에 대한 예를 말씀드리고 마칩니다. 사단이 하나님의 허락을 받고 하루 아침에 모든 재산, 자녀들을 빼앗습니다. 몸에 병이 들었습니다. 아내도 하나님을 저주하고 떠납니다. 욥이 하나님께 불평하지 않았다고 우리는 생각하는데 욥기서를 보면 하나님에 대한 불평으로 가득합니다. 친구 세명이 와서 신학적으로 대합니다. 죄를 회개하라고 합니다. 욥은 잘못이 없다고 반박합니다. 그러면서 그 속에 하나님에 관한 원망과 불평이 가득합니다.


이런 욥이 전환하는 포인트가 42장에 나옵니다.
1절부터 읽습니다. "욥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가로되 2 주께서는 무소불능하시오며 무슨 경영이든지 못 이루실 것이 없는 줄 아오니 3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우는 자가 누구니이까 내가 스스로 깨달을 수 없는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 없고 헤아리기 어려운 일을 말하였나이다 4 내가 말하겠사오니 주여 들으시고 내가 주께 묻겠사오니 주여 내게 알게 하옵소서”

욥이 그동안은 하나님을 이론적으로만 알았는데 이제 하나님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이제까지는 자기가 옳다고 생각했는데 정당화시키고 자기의 결백을 주장한 모든 말들이 자기도 깨닫지도 못한 말을 했는지 인식하게 됩니다. 그래서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렸습니다. 깨닫지도 못한 말을 했습니다. 그러면서 띠끌과 재 가운데 앉아서 회개합니다. 이것이 전환점입니다. 그래서 욥이 회복됩니다. 아내를 주셨고 아이들을 주셨고 재산도 회복됩니다.

우리는 십자가상에서 우리를 용서하신 주님의 사랑을 조금이라도 알면 욥처럼 재 가운데 엎드려 낮아질 것이고 주님을 예배할 것입니다. 거기에 참된 예배가 있습니다. 그러면 거기에 하나님의 눈이 머물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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