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7/2009

짐승이란 무엇인가? - 장죠셉목사님

짐승이란 무엇인가? 요한계시록 13장과 14장에는 예수를 믿던 믿지 않던 호흡하는 모든 인류에게 적용되는 짐승의 표라는 666에 관하여 기록되어있다. 이것은 어떤 신을 섬기든 다 해당되는 내용이다. 짐승의 이름이라는 표에 대하여 이해하려면 그것을 시행하는 주체가 무엇인지부터 알아야 된다. 그것을 알기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경고하신 성경에 근거해야 된다. 예수님께서 마지막 때에 나타나게 될 새세계질서(New world order)정책은 무엇으로 나타난다고 하셨는가? UN이라는 거대한 조직이 어떻게 세계정부를 만들고 있는지 알아야 한다. 그리고 예수님의 말씀은 마지막 때를 알려면 시대를 보라 하셨다. 외식하는 자여 너희가 천기의 기상은 분변할 줄 알면서 어찌 이 시대를 분별치 못하느냐? 또 어찌하여 옳은 것을 스스로 판단치 아니하느냐? (마16:3. 눅12:56-57) 내가 보니 바다에서 한 짐승이 나오는데 뿔이 열이요 머리가 일곱이라. 그 뿔에는 열 면류관이 있고 그 머리에는 참람된 이름들이 있더라.(계13:1) 내가 보매 또 다른 짐승이 땅에서 올라오니 새끼 양 같이 두 뿔이 있고, 용처럼 말 하더라.(계13:11) 내가 보니 여자가 붉은 빛 짐승을 탔는데 그 짐승의 몸에 참람된 이름들이 가득하고 일곱 머리와 열 뿔이 있으니....(계17:3)

  1. 짐승(θηρ?ον) 내가 보니 바다에서 한 짐승이 나오는데....(계13:1) 짐승이라는 테리온(θηρ?ον)은 형체가 아니다. 테리온이라는 뜻은 ‘짐승, 짐승 같은 사람, 따르는 사람, 맹수’라는 뜻이다. 곧 사단의 뜻을 따르는 사람이 추구하는 어두움의 사상(Evil Ideology)을 말한다. 내가 보니 하늘에서 땅에 떨어진 별 하나가 있는데 저가 무저갱의 열쇠를 받았더라.(계9:1) 저희에게 임금이 있으니 무저갱의 사자라. 히브리 음으로 아바돈(Αβαδδ?ν)이요 헬라 음으로 이름은 아볼루온(Απολλ?ων)이더라.(계9:11) 이사야는 하늘에서 떨어진 별은 사단으로 타락한 루시퍼(Luciper)라 하였다(사14:12~ 13). 히브리음 아바돈(Αβαδδ?ν)과 헬라음 아볼루온(Απολλ?ων)은 둘 다 파괴자란 뜻이다. 지음을 받은 피조물이 자기 이성을 망각하고 하나님의 질서를 파괴하는 행위는 어두운 기운을 받아들였기 때문인데 이 사상을 짐승이라 한다. 어두움을 받아들인 루시퍼가 사건을 만들고 사단으로 전락되었다. 이것이 어두움의 사상은 분명한데 바다에서 나오는 짐승과 땅에서 올라오는 짐승 둘로 나타난다. 짐승으로 표기된 테리온(θηρ?ον)은 형체가 아니라 하나님을 대적하는 어두운 세력의 사상(Ideology)을 말한다. 따라서 누구든지 구원사역을 훼방하거나 방해하는 것은 어두움의 세력에 잡혀서 그렇게 하는 행위가 사단과 같은 사상을 가진 사람이란 뜻이다. 이 사상을 받아들이고 행하는 사람을 적그리스도라 한다. 적그리스도는 단수가 아니라 복수라고, “많은 적그리스도가 나타난다”고 성경은 경고하였다. 바다에서 한 짐승이 올라온다는 뜻은, 이 세대가 사단의 사상을 받아드리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법이라는 New World Order 제도를 만들고 인류가 그 제도를 따르도록 함을 말한다.

  2. 바다(θαλ?σσα) 네가 본바 음녀가 앉은 물은‘백성과 무리와 열국과 방언들이라.(계17:5) 물로 표기된 ‘타라싸’의 소유격 단수 다라쎄(θαλ?σση)에 대하여 예수께서 액체가 아니라 인류(백성, 무리, 열국, 방언)인 세대(Generation)라고 하였다. 세대의 변천(Transitionary-變遷)은 제도 사회(Systemic Society)를 이룬다. 제도는 사회를 법으로 다루어짐을 말한다. 21세기에 살고 있는 우리들 세대가 어떤 법을 만들었는가? 세계정부를 위한 새세계질서(New world order)라는 제도를 만든지 오래다. New World Order는 어두움의 사상(Evil Ideology)이다. New World Order는 라틴어 Novus Ordo Seclorum(노브스 오도 섹크로룸)에서 왔으며, 의미는 하나님의 간섭에서 벗어난다는 의미다. 여기에 대하여 시편기자는 오래전에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어찌하여 열방이 분노하며 민족들이 허사를 경영하는고,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원들이 서로 꾀하여 여호와와 그 기름 받은 자를 대적하며 우리가 그 맨 것을 끊고 그 결박을 벗어버리자 하도다.(시2:1~3) 3절에서 New World Order가 설명된다. 하나님을 대적하고 훼방하는 사상이 세대라는 무리에서 나타나는 것을 바다에서 짐승이 나온다는 말이다. ‘어찌하여 열방들이 분노하며 민족들이 허사를 경영하는고’ 모든 나라들이 세계정부를 만드는 데에 동참함을 말한다. 세상 군왕들이 나서며 관원들이 서로 꾀하여 여호와와 그 기름 받은 자를 대적하며...(시2:2) 군왕들은 각 나라의 통치자를 말하고, 관원들은 관료들이다. 꾀하여는 구상이나 계획이고, 기름 받은 자는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리스도에게 대적하는 자는 사단의 사상으로 움직이는 무리들이므로 세계정부를 만들거나 그들의 정책을 따르며 그리스도의 사업을 훼방 또는 방해하는 사람들은 이 범주에 속하게 된다. 또한 누구든지 그리스도께서 이루시려는 구원사역을 방해하거나 훼방하면 그도 사단의 사상을 받은 사람임으로 짐승의 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바다에서 나오는 짐승이라는 뜻은 ‘세대라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대적하며 구원사역을 훼방하는 New World Order라는 제도를 만드는 것’을 말한다.

  3. 땅(το?s) 또 다른 짐승이 땅에서 올라오니 새끼 양 같이 두 뿔이 있고 용처럼 말하더라.(계13:11) 앞에서 나온 짐승의 출처는 세대의 변천(變遷)으로 이루지는 제도사회를 위한 법이라 하였다. 두 번째 짐승이 나타나는 것을 ?(?)(ν)라는 단어로 표기되었다. ??는 땅도 되겠지만, 세계나 민족도 된다. 더 구체적인 확증은 다음 성구에서 알려진다. 저가 먼저 나온 짐승의 모든 권세를 그 앞에서 행하고 땅(??ν)과 땅(το?s)에 거하는 자들로 처음 짐승에게 경배하게 하니 곧 죽게 되었던 상처가 나은 자니라.(계13:12) 땅과 땅으로 표기된 ??ν 다음에 부사 το?s는 Time이므로 시대를 말한다. 시대의 변천(變遷)은 문화(Culture)를 이루게 된다. 따라서 두 구절을 연결지우면 ‘그 시대에 하나님을 대적하는 문화가 나타난다’는 뜻이 “땅에서 짐승이 올라온다”라 하였다.

그런데 나중에 나타는 짐승이 앞선 짐승의 권세를 받게 된다. 또한 상처로 죽게 되었다가 회생된 짐승에게 경배하도록 강요하게 할 권세를 받았다고 한다. 그런데 세계를 단일화시켜서 주관하려던 New World Order는 그들이 바라는 만큼의 성과를 이루지 못하여 사문화(死文化)에 가깝게 되고 말았다. 이것을 “칼에 상하여 죽게 된 것 같더라.”한다. 따라서 ‘땅에서 올라오는 짐승’이라는 뜻은 ‘세대라는 인류가 만들어낸 Cyber 문화 속에 Biochip을 개발하였고 그것을 더 발전시켜서 VeriChip을 사람 몸에 넣고 활용되는 문화를 “땅에서 올라오는 짐승”이라 한다.

 두 짐승에 대한 첫 번째 가능성은, “그의 머리 하나가 상해서 죽게 되었던 자”가 “상처가 나은 자”라 한다. 하나님을 대적하던 사회주의 사상의 원조인 소련이 경제적 타격을 받고 죽어가다가 러시아라는 이름으로 다시 살아났다는 의미라고 한다. 두 번째 가능성은, 이 세대사람들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세계정부를 위해 만들어진 New World Order 정책이 사문화(死文化)로 힘을 잃게 되었다. 그러나 이 시대 사람들이 만들어낸 VeriChip 이라는 문화가 New World Order 정책에 힘을 싫어주게 된다. 그리고 시대라는 문화는 666 짐승의 표로서 New World Order정책에 따라 막강한 힘을 지니게 된다. 그것이 모든 사람에게 짐승의 표를 받도록 강요하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구정부를 위한 New World Order 제도가 죽어가다 짐승의 표가 되는 VeriChip이 나타남으로 힘을 얻게 되고 666 짐승의 표는 땅에 거하는 모든 사람이 세계정부제도에 굴복당하는 것을 ‘경배’하게 한다고 기록되었다. 이것이 “땅과 땅에 거하는 자들로 처음 짐승에게 경배하게 한다.”는 말씀이다.

  4. 세계정부와 어두움의 세력 내가 보니 바다에서 한 짐승이 나오는데 뿔이 열이요 머리가 일곱이라.(계13:1) 지구정부통치(Globalist Governance)자들은 세계정부를 만들려고 몸부림치고 있다. 그들은 삼각통치(TC) 대표자들로 하여금 기술적으로 정치와 금융과 지적과 성직 등 네 가지 중심권을 장악하려면 미국은 정부로 하여금 직접적으로 개입시킨다 하였다. 금융통합을 위해 세계경제를 정치적으로 비상구제(Bailout)로 몰아왔다. 이제 그들은 국가와 민족 등 다른 종교 등을 통합시키기 위해서는 인간을 통제해야 된다. 통제방법은 오래전부터 연구하고 실험해온 신분제도뿐이다. 이미 개발을 완료하고 곳곳에서 실시하는 생체측정법(Biometric System)이 그것이다. 이 제도는 세계정부의 정책이므로, 이 법에 저항하거나 반대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국제형사재판소(ICC)의 심판을 받게 된다.

 성경은 이 시대를 향하여, “저가 모든 자 곧 작은 자나, 큰 자나, 부자나, 빈궁한 자나, 자유 한 자나, 종들로 그 오른 손에나 이마에 표를 받게 하고, 누구든지 이 표를 가진 자 외에는 매매를 못하게 하니 이 표는 곧 짐승의 이름이나 그 이름의 수라. 그 수는 사람의 수니 666이니라”고 경고하였다(계13:16~18). 각 지역(나라)의 종교지도자인 목사는 강단을, 신학교 교수는 교단을 떠나지 아니하는 한, 자신부터 짐승의 표를 받아야 된다. 받지 않으면 UN으로부터 성직자의 자격증을 받지 못하게 되기 때문에 성직을 떠나지 아니하는 한 그렇다. 교회와 성도들에게 짐승의 표를 받도록 하고, 하나님 대신에 세계정부통치자를 찬양하며 경배하는 지침에 따라야 된다. 그리하지 않으면 목사 자신은 물론이요 성도들도 세계정부정책에 반대한다는 이유로 육신과 생명을 빼앗기게 된다.

 그러기에 그들은 UN산하에 단일종교단체를 만들 때, 종교윤리문서에는「이 규범은 절대적이며 전체지역의 생존가족과 사회나 인종과 나라 그리고 종교에까지 재물의 개인적인 자유를 인정할 수 없고, 지구정책에 개인적인 결정이나 종교나 인류문제의 정당성으로 이 정책에서 분리시킬 수 없다」국제형사 재판소는 사회 안정을 위한 법질서와 세계평화를 위한 법정이 아니라 인류에게 횡포와 포학한 법정으로 된다. 그러므로 대환난 때는 UN평화유지군(UN-Peace Unity)이 국제경찰 임무를 전담하게 된다. 세계정부의 진행에 관계되는 문서는 1961년 3월 9일에 작성된「전쟁에서 자유」라는 내용에 보면 전쟁종합프로그램은 무장해제로 세계를 자유롭게 만들기 위한「3단계전략」에 있음을 보게 된다. 케네디(John F. Kennedy)행정부당시 작성된 이 문서는 미국국방성에서 비밀문서해제가 되면서 밝혀진 내용이다.

 군비축소와 무장해제를 이루려면 국제법(International law)으로 UN평화유지군을 증강시켜야 된다는 것이다. 1962년 2월 죤 F. 케네디 대통령이 사망하기 7개월 전에 전쟁에서 자유를 위한 무장해제 프로그램은 당시 외교협의회(CFR) 회원이던 국무성 딘 루스크(Dean Rusk)가 공식으로 발표 했었다. 링컨 부름필드(Lincoln Bloomfield)박사에 의해 작성된 UN에서 세계를 지배하도록은 다음과 같다.

 충분한 힘으로 감독과 법률로서 무장해제를 유도하고 논쟁을 결정하고 평화를 이루어야 된다. 여기에는 힘을 얻기 위한 부담까지 포함시키고....,국제적인 폭력에는 적당한 균형으로 땅과 바다와 공중과 공간의 영역에 50만의 신병을 보충시켜서 그들에게 UN군 복장을 갖추고 핵무기 관리에 100/50으로 이루어진 혼합 이동식 지상기지와 수중미사일 기지에 매 무기마다 평균 1메가톤(TNT 100만 톤에 해당하는 폭발력)에 달하는 위력으로 무장시키고.....

 부름필드가 말하는 세계정부는 우주공간까지 포함시켰다. 그것은 세계정부의 구성원으로서 조직을 규정하는 등록 법’이며, 그 국가는 부름필드가 말하는 단일정부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효과적인 지배는 초국가적인 조직체로서 모든 나라를 초월하는 세계정부가 된다. 세계정부중앙에서 피라밋식으로 모든 국민 개개인을 직접 다스리고, 가족단위구성은 인정하지 않으며, 개개인의 신체에까지도 명령으로 다스리며, 명령에는 어떠한 예외가 있을 수 없으며, 강제적인 재판권을 국제법정에 두어야하며, 초국가적인 조직센터의 손에서 다스린다는 것이다.

ⓐ지구촌에 살고 있는 모든 인류는 국제형사재판소의 의사봉(Gavel) 앞에서 생명을 잃게 될 것. ⓑ공안당국에 의해 개인의 자유에 속하는 신앙적인 문제로 육신까지 빼앗기게 될 것. ⓒ국제형사 재판소는 누구든지 세계정부가 요구하는 정책에 대하여 반대하거나 거부할 때는 개인의 육신까지 구속할 것이라는 부분에 해당되는 내용이다. 지난 수십 년 동안 UN 찬성론자들은 세계정부체제를 위한 법적 가능성을 앞질러서 제공했었다. 그러나 거기에는 결정적인 숙제가 남게 된다.

 만일 UN이 강한 힘을 가진다면 포학한 통치로 발전되는 것을 누가 그것을 막을 것인가? 또 만일 UN이 충분한 힘을 가졌을 때, 그 이상으로 막강한 힘을 가진 인류의 지도자는 누가 될 것인가? 이러한 두 가지 숙제는 인류역사에서 찾게 된다. 인류역사는 성경에 기록되어있다. 성경에는 지난날의 과거역사와 미래의 예언까지 기록되어있다.

 그렇다면 성경에는 후일에 나타나게 될 지도자가 묘사되어 있는가? 물론이다. 그는 하나님의 아들인 그리스도 자신이 인류의 죄를 없애버리고 평화롭고 자유로운 그리스도의 나라를 펼치게 된다고 기록되어있다. 그렇지만 그전에 이것을 훼방하기 위해 ‘지구’라는 세계를 장악하려는 인물이 나타난다고 기록되어있다. 성경의 마지막 부분에 여러번 언급되고 있는 적그리스도라 불리는 인물이 막강한 힘을 가지게 된다고 기록되어 있으므로 그가 UN보다 더 막강한 힘을 가질 것이다. 앞으로는 어느 나라이든 UN의 통치에서 벗어날 수 없다. 모든 나라는 군대무장을 해제하고 질서를 위함과, UN평화유지군에 파병시키는 외에는 어떠한 이유로도 재무장이 금지된다. 육해공군과 해병대는 더 이상 국가적인 이유로도 방어와 중요부분까지도 활동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세계평화유지군에 징집되고, 국가질서를 위한 경찰만이 배제된다는 뜻이다. 지침의 두 번째 뜻은 UN평화유지군은 질서유지차원이란 명분으로 분쟁국가의 병기 창고에서 모든 무기를 제거시키고, 나아가서 대량파괴 무기운반과 기술이전은 용납하지 않는다. UN이 세계에서 무장해제를 위한 조직을 설립하고 효과적인 운영방침에 책임지고 있으므로 모든 나라는 UN에서 요구하는 무장해제에 따라야 된다. 따라서 강제적인 구속력을 행사하기 위해 국제형사재판소(International Criminal Court-ICC)와 UN평화유지군을 활용하는 것이다. 또한 UN의 활동은 종교에까지 깊숙이 개입한다. 모든 국제기구들을 UN산하기구로 하였듯이 단일종교회(URO)를 만들도록 한 것도 UN이다. 그리고 단일종교를 UN산하기구로 가입시키도록 하였다.

 요한계시록 13장에서 짐승이 두 번 언급되는데, 1~10절의 짐승의 바다에서 나오고 두 번째 11~18절의 짐승은 땅에서 올라온다. 짐승정부로 불리는 세계정부를 만들기 위하여 여러 국제기구들이 먼저 보인다. 그것은 한 짐승인데 짐승에게는 뿔이 열이고, 머리가 일곱이고, 뿔에는 열 면류관이 있고, 일곱 머리에는 참람된 이름들이 있다고 한다. 예수께서 마지막 때는 시대를 보라고 하셨다.(마16:3. 눅12:56)

 마지막 때를 보려면 바다에서 나오는 짐승과 땅에서 올라오는 짐승은 시대적으로 보는 것이 성서적이다. 밧모섬에서 유배생활을 하던 사도 요한이 마지막 때에 하나님을 대적하며 인류를 파멸로 몰아넣는 존재를 짐승이라 하였다. 그 짐승에게는 뿔이 열이고 머리는 일곱이라 한다. 그리고 짐승에게는 참람된 이름들이 많다고 한다. 그러면 이 짐승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성경에는 짐승을 은유법(隱喩法)으로 표기되었으며, 영어로는 Beast라 하였고, 헬라어는 θηρ?ον라 하였다. θηρ?ον은 형체나 어떤 동물이 아니라 사상(Ideology)을 말하며 이는 하나님을 대적하거나 그리스도의 구원사업을 대적하는 사상을 뜻한다.

 짐승이 무엇이냐를 설명하기 이전에 짐승이 나타나는 바다부터 먼저 설명되어야 짐승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예수께서 ‘바다(θ?λασσα)’라는 “물은 백성과 무리와 열국과 방언들”이라 하였다(계17:15). 그러므로 바다라는 물은 문자적인 액체가 아니라 무리라는 사람들이다. 사람들이라는 무리는 세대(Generation)를 말하며, 세대의 변천(變遷)은 법으로 이루어진다. 21세기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하나님과 구원사역에 대적하는 ‘제도’를 만든다는 뜻이 바다에서 짐승이 나온다는 해석이다. 그 제도가 모든 나라들이 따르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들어 놓은 새세계질서( New World Order)라는 제도다.

바깥 어두운 곳에 대한 바른 인식 - 장죠셉 목사님

바깥 어두운 곳에 대한 바른 인식 
바깥 어두움에 내어 던지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하니라.(마22:13) 하나님나라 낙원이나 왕국이나 시온에서는 슬피울며 이를 가지 않습니다. 그곳은 기쁨이 충만하고 희락이 넘치는 곳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경고하신 “바깥 어두운 곳"이라고 하신 그곳은 어디이어야 되겠습니까? 사도 바울은 로마서와 고린도후서 두 곳에서 이곳을 베마(βημα)하고 경고하였습니다.

βημα는 “연단장, 재판석, 법정, 층계를 올라가는 곳” 등으로 위치라고 설명하였습니다. 이 단어의 뜻에서는 분명히 연단 또는 심판이란 징계를 나타냅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이 단어를 인용하여 “상급심판”으로 설명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여러분, 상급은 잘한 일에 대한 보상을 주는 것이며, 심판은 잘못한 일에 대한 벌을 내림을 말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상급과 심판을 같은 의미로 해석하며 설명할 수 있습니까? 아닙니다. 상급은 하나님나라가 얻어지는 축복입니다. 반대로 심판은 하나님나라를 얻지 못하는 저주입니다.

두 단어를 함성시킬 수 없는 단어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베마를 우리말로 “심판대”로 표기되었다 하여 원어를 찾아보지도 아니하고 추론으로 단어가 지니는 성격자체도 이해하지 못하는 무지한 사람들은 연단장이라는 단어자체를 성경에 없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만 분명히 성경에 있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왜 연단장을 인정하려 하지 않을 까요? 몰랐던 것이 첫 번째 이유가 됩니다.

두 번째는 자신이 가야될 곳이기 때문에 그 단어자체가 듣기 싫기 때문입니다. 세 번째는 성경에 그런 말이 없다고 주장함으로서 스스로 위로를 받으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바램과는 상관없이 어느 날 그것에 가서 체험하여야 깨닫게 되고 인정하게 되는 곳이 연단장입니다. 네가 어찌하여 네 형제를 판단하느뇨, 어찌하여 네 형제를 업신여기느뇨,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βηματι) 앞에 서리라.(롬14:11)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β?ματοs)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 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고후5:10) 심판대를 로마서에서는 여격단수로 표기되었고, 고린도후서에서는 소유격 단수로 표기되어 있는 베마(βημα)라는 의미는 “연단, 법정, 재판석, 층계를 올라가는 곳”등으로 다양한 해석이 있으므로 어떤 해석을 하느냐에 따라서 성경을 인식하는 각도가 달라집니다.

  1. 바깥 어두운데로 가는 대상 = 성경에서 예수를 믿었어도 불법을 행하는 자(마7:23, 13:41), 넘어지게 하는 자(마13:41, 18:7), 세마포 옷을 입지 못하고 벌거벗은 자(마22:13), 무익한 종(마25:30), 나라의 본 자손들(마8:12, 21:41,43, 눅13:28), 남을 판단하는 자(롬14:10), 악한 종(24:51), 거짓말을 지어내는 자(계22:15)등은 바깥 어두운 곳으로 쫓겨나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다고 경고한 그 곳은 어디이어야 됩니까?

  2. 바깥 어두운 곳의 위치= 바울 사도는 몸으로 행한 행위를 따라 받게 되는 ‘베마(β?ματοs)’라 했습니다. 베마는 우리말로 ‘연단장’이며 ⓐ바깥 어두운 곳, ⓑ성 바깥 등으로 성경은 명시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어느 곳을 가도 어두운 곳이 없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나라는 어느 곳에서도 슬피 울며 이를 갈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어둡고 캄캄하고 풀무가운데서 슬피 울며 이를 가는 곳은 어디이어야 됩니까?

  3. 현실적인 추세= 대부분의 믿는 사람들이 연단장이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합니다. 또한 연단장 자체를 인정하지 않으려 합니다. 원인은 믿기만 하면 다 구원되는 줄로 인식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성경에는 연단장이 명시되었는가? 그렇습니다. 그것도 많은 곳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4. 성경은 증거한다 = 헬라어 원전에는 교육(παιδε?α-파이데이아)받는 낙원을 파라데소스(παρ?δεσοss)로 표기되었고(눅23:43,고후12:4,계2:7), 연단을 받는 베마(β?μα-롬14:11, 고후5:10)는 바깥 어두운데 쫓겨나서 슬피 울며 이를 가는 곳이라고 표기되어 있습니다(마8:12, 13:42, 50, 22:13, 25:30, 눅13:28). 이 사실을 부정한다면 성경을 부정하는 문제가 생깁니다.

  5. 바른 인식= 혹자들은 이곳을 지옥 또는 음부라 하는데, 지옥은 ‘게엔나(??εννα)’이지 음부나 연단장은 아닙니다. 음부라는 해데스(aδηs)는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는 불신자들이 백보좌 심판이전까지 대기하는 곳입니다. 연단장이라는 베마(β?μα)는 하나님을 믿는 자들로서 거듭나지 못하고 벌거벗은 온전치 못한 그리스도인들이 가는 곳이라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임금이 손을 보러 들어올새 거기서 예복을 입지 않은 한 사람을 보고 가로되 친구여 어찌하여 예복(eνδυμα g?μου)을 입지 않고 여기 들어왔느냐 하니 저가 유구무언이어늘 임금이 사환들에게 말하되 그 수족을 결박하여 바깥(eξ?τερον) 어두움(σκ?τοs)에 내어던지라 거기서 슬피 울며(κλαυθμos) 이를 갊이(βρυ?μ?s) 있으리라 하니라. 청함(κλητο?)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eκλεκτο?)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마22:11~14) 앞에서 1층천 낙원과 2층천 왕국과 3층천 시온과 시온 공중에 떠 있는 예루살렘을 알아보았습니다.

앞엣것만 읽고 끝나면 좋은 면만 생각하고 신앙생활이 안일해지겠기 때문에 계속해서 연단장을 알아야 온전한 믿음을 지키게 됩니다.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연단장(β?μα-베마)’이 있는 것조차 모릅니다. 연단장이 어떤 곳이며, 어떤 사람들이 그곳에 있으며, 그곳에서 어떻게 되는지도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지옥에 가서 보았다고 간증하고 또 그렇게 가르치고 배워왔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를 자신의 구주로 믿으면 누구나 다 하늘나라의 같은 곳으로 갈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러한 생각은 자신의 일방적인 사상이나 이론일 뿐입니다. 하나님은 공의로우시며 보상 제도를 엄격하게 시행하시는 분이심을 생각하지 않는데서 생겨나는 발상입니다. 나라와 본토 자손들은 ‘바깥 어두운로 내어 쫓으라 거기서 슬피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마8:12,22:13) 때로는 연단장을 낙원이라고 말할 것이며, 연단을 교육이라 말할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낙원은 밝고 빛나는 곳이지만, 연단장은 어둡고 캄캄한 곳입니다.

낙원은 기쁨과 희락이 있지만, 연단장은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는 곳입니다. 낙원에서는 천사들이 때리거나 고통 주는 곳이 아니지만, 연단장에서는 연단사자들이 때리고 짓밟고 매질하는 곳입니다. 낙원은 끊는 물이나 불붙는 고통이 없지만, 연단장에서는 끓는 물가마속과 불로 고통을 주는 곳입니다. 그러므로 연단장을 낙원이라는 사상은 옳지 않습니다. 그러면 왜 연단장을 낙원으로 착각합니까? 입신 또는 영으로 하늘나라에 처음 도착하는 곳은 낙원입니다. 그곳에는 주님과 만날 사람들을 만나서 환영을 받게 됩니다. 다음에는 생명강에 가서 생명수도 마시고 목욕도 하고 생명과일도 맛보게 합니다. 그리고 여러 곳으로 다니면서 구경을 시킵니다. 이러한 이동은 눈 깜짝할 순간에 수만리를 옳기는 것은 시공간을 초월하는 원리의 법칙 때문입니다. 그 후에 연단장에 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낙원에서 연단장으로 이동하는 시간은 순식간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여기에서 혼돈합니다. 처음에 낙원에 도착한 것만을 생각하고, 연단장으로 옮겨가서도 낙원에 있는 줄로 착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연단장을 낙원으로 알고 있는데, 성경에 근거하지 아니하고 자신의 체험만을 고집하기 때문입니다. 분명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입니다. 자신이 보았다는 것을 주장할지라도 성경과 다르게 표현하거나 묘사할 때는 그러한 비진리로 말미암아 마귀가 그를 악용하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벗나나는 내용을 주장하면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하늘나라는 누구든지 자신이 행한 대로 배치된다는 경고입니다. 하나님은 만세전부터 당신의 예지로서 많은 영혼들을 택하시기로 예정하셨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택함 받은 자들만이 하나님의 아들과 딸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씨에서 태어나기 때문입니다. 에서(Ησαυ)와 야곱(?Ιακωβ)은 같은 부모에게서 태어나서 선택된 하나님의 국민이었습니다. 인간의 이성으로 불 때는 아무런 차이가 없습니다. 두 사람 다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야곱은 복중에 잉태될 때 택한 자라 하셨고, 에서는 택하지 않았다 하셨습니다. 택함 받은 자라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지만, 택함을 받지 못한 사람은 하나님을 믿지 아니합니다. 가령 믿을지라도 건성으로 믿든가 아니면 형식적으로 믿습니다. 예수는 믿으면서 진정으로 아버지의 집으로 가려고 믿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이름을 이용하여 세상에서 영원히 살 것을 마련합니다. 그리스도의 사도로 자청했었던 가리옷 사람 유다(Iοδ?αs)가 그랬습니다. 바리새파와 사두개파의 많은 서기관들과 장로들도 그랬습니다. 가리옷 유다도 그리스도의 사도라는 이름을 이용하여 자신의 영달과 명성과 재물의 야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끝내는 그리스도의 원수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런 사람들을 마귀의 씨라고 주님께서 경고하신 것처럼, 하나님을 찾고 성경을 가지고 읽기는 하지만 그리스도의 속성이나 영원성은 믿지 않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길로 갈 것이며 그 길에서 돌이키지 못하는 것은 그들의 마음이 쇠보다 더 단단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위의 몇 구절의 말씀과 같이 부름은 받았으나 택함은 받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택함을 받은 사람은 반드시 하나님을 믿게 됩니다. 하나님은 한 명의 영혼이라도 당신이 택한 자는 버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에게 의지를 주셨기에 각기 주어진 의지를 어떻게 행하느냐에 따라서 온전한 아들이 될 수도 있고, 절뚝바이 백성이 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임금이 사환들에게 말하되 그 수족을 결박하여 바깥 어두움에 내어던지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하더라.(마22:13) 거기로 표기된 바깥(eξ?τερον-에쏘테론)은 eξ?τεροs의 목적격 단수로서 ‘더 바깥에’ ‘더 먼 곳에’ ‘가장 먼 곳에서’ 등. 비교급으로 쓰이므로 낙원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연단장(β?μα-베마)임을 명심해야 됩니다. 로마서는 동사 여격 단수로 β?ματι라 하였고, 고린도후서는 소유격 단수 동사로 β?ματοs로 표기돼 있습니다. 그런데 한글과 영어 성경에는 심판으로 잘못인식 하게끔 표기되어 있습니다. 연단장에서의 연단에 대하여 회개하는 과정을 직고(λ??ον-로곤)라 했습니다. 그러므로 직고는 자신의 허물을 자백한다는 뜻이요, 동사로서 β?ματι는 죄를 씻으며 더 좋은 곳으로 한 단계씩 올라가기 위한 과정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연단장의 내용을 아는 자만이 그곳에 가지 않는다 하셨기에 연단장이 어떤 곳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믿음의 장군 나희필의 굳건한 신앙

나 장군이 이처럼 술을 절대 입에 대지 않겠다는 것은 바로 하나님과의 한번 맺은 그 약속 때문이었다. 그러나 오늘만은 하나님과의 약속을 어기고 대통령의 체면을 봐서라도 모른 체 하고 넙죽 받아 마셔 버릴까?..... 그러나 나 장군은 하나님과 약속한 그 굳건한 믿음의 정절을 결코 버릴 수가 없었다.

이윽고 드디어 나 장군이 입을 열었다. "대통령 각하 저에게는 술 대신 콜라나 사이다를 주십시오! 저는 술을 못합니다!" 일언지하로 대통령의 축하 술잔을 거부해 버리자 박정희대통령은 나 장군을 유심히 쳐다 보았다. 이 날의 이순간을 지켜봤던 한 장군은 이렇게 회고했다. "마치 폭탄이 터지고 난 후 엄청난 정적 속에 잠긴 것이다."

닭 쫓던 개가 지붕 쳐다본 격이 된 대통령의 굳은 표정을 본 국방 장관이 순간 벌떡 일어나 "각하 나 장군은 원래 술을 못합니다. 그 잔은 제가 대신 받겠습니다."하고 잔을 뺏다시피 하여 단숨에 마셔 버렸다. 대통령의 체면 손상! 그 위기의 순간을 국방장관의 기지로 일단 넘어갔지만 만찬장의 분위기는 이미 엎질러진 물이 되고 말았다. 만찬이 끝나고 자리에서 일어난 대통령은 의기소침해 있던 나 장군에게 다가 가더니 "니가 진짜 기독교인이다"라는 한 마디를 남기고 만찬장을 나가버렸다.

이슬람권 국가 원수가 방문하는 나라의 만찬 석상에서 양국 국가 원수가 건배를 할 때 어떤 종류의 술을 사용하느냐를 두고 양국 외교 팀의 사전 의논과 준비는 항상 골칫거리라고 한다. 그러나 국빈 만찬에서 건배의 순서는 배놓을 수 없는 중요한 순서로 진행된다. 참고로 아마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공식 만찬 석상에서 축배를 거절 당한 예는 이때가 아마도 처음이요 마지막이라고 예측해 볼 수 있다.

한편 이날 만찬이 끝났을 때 박종규 경호 실장이 나희필 장군에게 다가와 "선배님 해도 너무 했습니다! 꼭 그렇게 각하에게 망신을 주어야 합니까? 국군의 통수권자요 대통령으로서 손수 축하의 술 잔을 권하면 정중히 받아서 입잔 이라도 하는 척 해야 되는 것 아닙니까?‥‥‥‥
분 초를 따지며 대통령의 일거수 일투족, 또한 얼굴 표정 하나하나까지 살펴야 하는 경호 실장으로서 이 날의 그 순간의 초조함과 그 고뇌가 어떠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대통령이 떠나간 후 선배 장군들이 나 장군에게 찾아와 너무 경솔했다는 질책을 했다. "이 사람아 별을 하나 더 달 수 있는 하늘이 준 기회인데 왜 그렇게 미련한 짓을 했지 내일 일찍 책상 정리나 하게.”‥‥‥‥

사단장 관사로 돌아온 나 장군은 정작 매우 불안해야 될 자신의 마음이 오히려 평안함을 느끼면서 "내가 과연 그 정도의 신앙에 대한 용기가 어디서 나왔을까? 그것참 이상한 일이로다. 내일 당장 청와대에서 어떤 책벌이 떨어져도 상관하지 않겠다. 내가 하나님을 믿으니 하나님께서 나의 앞날을 책임져 주시겠지 내가 육사를 졸업할 때 구대장께서 장교가 되어 술을 안 먹으면 출세를 할 수 없다고 했는데 그러나 나를 오늘날 장군까지 진급시켜 주신 것은 바로 하나님은 나와 함께 하신다는 증거가 아니겠는가?"라고 하면서 나 장군은 기도와 함께 이날 밤 깊은 명상에 잠겼다.

그런데 나희필 장군은 왜 술을 그토록 싫어했을까? 그것은 아마 어린 소년시절 술을 자주 마시는 할아버지 때문에 어머니가 항상 고생하던 모습이 그가 청소년으로 성장하는 동안 항상 머리에서 사라지지 않았기 때문이며 더 크게는 당시 평양에서도 소문난 전도사인 어머니(임태화)의 눈물의 기도가 쉬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 한가지 이유로 자신이 모태 신앙인으로 술을 자주 마시게 되면 인생을 사는 동안 술의 즐거움보다 후회스러운 일들이 더 많이 생긴다는 것을 스스로 확신했기 때문이다.

한편 군복을 벗을 것으로 생각한 나 장군은 다음날 책상 정리를 끝내고 상부의 명령을 기다렸다. 그러나 문책은 오지 않고 오히려 별을 하나 더 달고 소장으로 진급, 육군본부 작전 참모부장으로 영전되었고 다시 3군 사령부 창설의 중요한 임무를 담당했다.

나희필 장군의 군대생활에는 아무도 모르는 또 하나의 일화가 있다. 월남전이 치열할 때 우리나라 장성들과 고위급 인사들이 월남으로 갈 때는 꼭 대만의 한 호텔에서 1일 숙박을 하게 된다. 잠이 들 무렵 호텔 지배인이 나 장군 방을 노크 하더니 정중히 인사를 하고 책 한 권을 건넨다. 여자들의 나체 사진첩이었다. 한 사람 골라 주시면 보내 주겠다고 했다. 물론 돈은 출장비에서 계산이 다 끝났다고 했다. 그러나 나 장군은 이를 거절하고 내일 새벽 교회를 가야 하니까 교회 위치나 알려 달라고 했다. 그 후 이 호텔 지배인은 한국의 고위 인사들이나 장성들이 이 호텔에 유숙할 때마다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이 호텔 건립이래 그렇게 청렴한 사람은 과거도 지금도 오직 한국의 나 장군 한 사람 밖에는 없었습니다‥‥‥‥

나 장군의 부인 박영례 권사는(새문안 교회) 이 일화를 필자에게 두 번이나 알려 주었다. 특히 전쟁터로 향하는 군인이 그것도 공짜로 수청(?)을 들겠다는 아가씨와 하룻밤쯤은 쥐도 새도 모르게 보낼 수도 있었는데도 (하나님은 항상 나와 함께 하신다)라는 평소 남편의 믿음이 그날 밤의 유혹을 단호히 거절했다는 것이다. 이러니 박영례 권사는 남편에 대한 존경심과 그 애틋한 사랑을 잊을래야 잊을 수가 없다고 하면서 하루빨리 남편과 천국에서의 재회를 손꼽아 기다린다고 했다.

한편 나 장군이 육대 총장에서 만기 제대 예편된 것을 뒤늦게 알게 된 박정희 대통령은 "나희필이는 더 있어야 할 인물인데" 하며 아쉬움을 표했다고 한다. 나희필 장군이 제대 후 어느 날 밤 심야에 당시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정보부의 차장보 자리의 인선문제로 며칠 밤을 지새던 김재규 부장은 문득 나희필 장군이 생각나 새벽 두 시에 전화를 했다. "나 장군이야 말로 바로 이 자리에 앉을 가장 적임자요, 내일 아침 일찍 출근하시오" 당시 이 차장보 자리는 중앙 정보부의 막대한 예산 집행에 관여하는 요직이기 때문에 청렴 결백성이 요구되는 인물을 추천해야만 대통령의 재가를 받을 수가 있었다. 김재규 부장의 보고를 받고 난 박정희 대통령도 흐뭇한 표정을 지우면서 "일국의 국가 원수가 친히 권하는 축하의 술 잔도 기독교인이라는 이유로 거절하는 믿음의 장군 나희필이야 말로 그 어떤 압력도 부정도 유혹도 능히 거부할 수 있는 인물이다. 잘 추천했다"라고 만면에 미소를 머금었다. 또한 수석 비서관 회의에서도 나희필 장군에 대한 칭찬을 자주했다.

얼마 후 대통령은 나희필을 다시 장관급인 비상 기획원 위원장 자리로 영전시켰다. 그런데 만일 이때 영전이 안되었더라면 1979년 10월 26일 궁정동 만찬 자리에 나희필은 김재규와 함께 꼭 참석을 해야만 되는 확정적 인물이었다.

끝으로 박 대통령이 비명에 쓰러진 지 14년이 지난 1993년 9월 16일 위대한 신앙의 장군 나희필 장로는 68세로 세상을 떠났다. 새문안 교회 김동익 목사의 눈물의 기도를 받는 자리에서 그는 오히려 목사를 위로하면서 "목사님 제가 목사님을 잘 보필하지 못하고 먼저 떠납니다. 언젠가 하늘나라에서 다시 만납시다. 목사님, 한가지 부탁이 있습니다. 찬송가 455장을 좀 불러 주시겠습니까?" (주 안에 있는 나에게)‥‥‥청초한 가을 백화처럼, 젖먹이 아이가 어머니의 품 안에서 포근히 잠든 모습처럼, 그는 허물 많은 이 세상을 미련 없이 하직하고 너무나도 편안한 모습으로 눈을 감았다‥‥‥‥"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의롭고 경건한 사람이 죽어도 그 일에 관심을 가지고 깊이 생각하는 자가 없으며 재앙이 닥치기 전에 내가 그를 데려가도 그 사실을 깨닫는 자가 아무도 없구나 경건하게 사는 자들은 죽어도 평안과 안식을 얻는다"(현대인의 성경 이사야 57장 1절∼2절)

[출처] 믿음의 장군 나희필의 굳건한 신앙작성자 예닮

2장 15~17절 - 사랑하는 자야, 작은 여우를 잡아라

사랑하는 자야, 작은 여우를 잡아라 - 장죠셉목사님
2:15 우리를 위하여 여우 곧 포도원을 허는 작은 여우를 잡으라 우리의 포도원에 꽃이 피었음이니라. ?.나의 사랑하는 자는 내게 속하였고 나는 그에게 속하였구나 그가 백합화 가운데서 양떼를 먹이는구나. ?.나의 사랑하는 자야 날이 기울고 그림자가 갈 때에 돌아와서 베데르 산에서의 노루와 어린사슴 같아여라. 솔로몬 왕은 사랑하는 술람미와 함께 원수를 잡자고 한다. 그 원수는 작은 여우였다. 포도원에는 꽃이 피어있었다. 그 꽃은 자방의 발달로서 포도 알이 열게 한다. 그것은 1년 내내 퇴비를 주고 물을 주어서 얻으려는 수확이다. 그렇게 중요한 포도원에 작은 여우가 들어가서 말랑말랑한 포도 알을 먹어치우면 1년 농사는 헛것이 된다. 술람미에게는 얼굴이 검게 햇볕에 그을리면서 애써 수고한 작물이다. 자신의 모든 열정을 쏟아 부었던 유일한 일터였다.

그토록 애정과 열정을 쏟으며 가꾸어놓은 포도원에 여우가 굴을 만들고 포도원을 헌다는 소리는 큰 충격이다. 신자들도 주님으로부터 이러한 경고를 받고 있다. 우리를 위하여 여우 곧 포도원을 허는 작은 여우를 잡아라.(2:15a) 포도원은 술람미에게 맡겨진 솔로몬 왕의 소유지다. 따라서 포도원은 술람미의 삶의 터전이다. 많은 수확을 내야 자신에게 주어진 의무를 충실히 수행하게 된다. 그런데 작은 여우가 포도원에 들어와서 굴을 파고 포도원을 허는 것을 술람미는 모르고 있었다. 이것을 일깨워준 사람이 사랑하는 솔로몬 왕이다. 술람미가 애써 가꾸었던 포도원은 솔로몬 왕과 사랑의 꽃을 피우는 밀회의 장소이기도 하다.

여우가 포도원에 들어가 있으면 포도 열매는 말할 것도 없고 잎사귀까지 남겨두지 않는다. 솔로몬 왕이 술람미에게 여우를 잡으라 하듯이 예수께서도 우리에게 나의 믿음을 해치는 여우를 잡으라는 것이다. 포도원은 자신과 주님과의 사랑을 만끽하는 믿음의 터전이다. 포도원은 주님과 함께 내가 사랑을 나누는 마음이다. 날마다 열심히 땀 흘리며 수고하여 가꾸어가는 믿음 밭에 여우라는 마귀가 들어갔다면 큰 문제다. 포도원을 헌다는 것은 주님과 나와의 사랑을 헐어버리는 마귀라는 말이다. 이러한 사실을 신자들 본인은 전혀 모르고 있을 때 주님께서 알려주신다. 여우는 교회에 있고 가정에 있고 개인에게도 있다. 포도 수확을 위해서도 여우를 잡아야 되고 푸른 그늘 밀에서 사랑을 유지하기 위해서도 여우는 반드시 잡아야 된다. 그래서 솔로몬은 ‘우리’라고 말한다.

오늘 나와 함께 ‘우리’라고 불러줄 분은 누구이어야 되는가? 신랑이신 예수시다. 신자도 이러해야 된다. 작은 여우를 잡지 않으면 나와 주님과의 사랑에 해를 받는다. 그렇게 되면 자신의 영에 치명적인 피해를 입게 될 것이고 따라서 영적공황이 이르게 된다. 가정에 있는 여우를 잡지 못하면 가정은 경제적으로 타격을 받게 된다. 교회에 있는 여우를 잡지 않으면 교회가 헐벗고 성도들이 떠나간다. 그래서 작은 여우를 잡으라 하신다. 작은 여우란 무엇을 말하는가? 주님을 사랑하는 믿음을 해치게 하는데 그것이 곧 믿음이 식어지도록 마음에서 작용하는 마귀로 인함이다. 여우는 반드시 잡아야 된다. 여우를 잡지 않으면 함께 갈수 없게 된다. 그놈을 잡지 않으면 주님을 사랑하는 그 사랑이 식어지기 때문에 잡아야 된다. 자신과 가정과 교회에 있는 여우는 반드시 잡아야 된다.

우리의 포도원에 꽃이 피었음이니라.(2:15b) 왜 포도원에 있는 작은 여우를 잡지 않으면 안 되는가? 꽃이 피었기 때문이다. 꽃은 열매를 내기위한 자방을 생산하게 되는데 그것을 여우가 먹어버리면 포도 알을 얻지 못한다. 그렇게 되면 포도가지는 열매를 얻지 멋하기 때문에 잘리어져서 불에 태움을 받게 된다. 믿음을 자라게 하는 주님과의 사랑을 생산하는 열정이 침해받기 때문에 여우를 잡아야 된다. ‘포도원에 꽃이 피었다’ 주님과의 사랑의 꽃이 피었는데 여우가 사랑의 꽃을 먹으면 안 된다. 그러면 그날 주님께 붙어있는 자가 될 수 없겠기 때문에 반드시 마귀를 잡아야 한다.

나의 사랑하는 자는 내게 속하였고 나는 그에게 속하였구나(2:16) 솔로몬은 술람미 여인에게 너는 나에게 속하고 나는 너에게 속했다고 말한다. 참으로 놀라운 말이다. 신자들도 어린양이신 신랑으로부터 이러한 소리를 듣는 자는 복되다. 그렇다면 이 글을 읽는 당신은 주님에게 속한 자인가? 여기에 대하여 성경은, 이 사람들은 여자로 더불어 더럽히지 아니하고 정절이 있는 자라. 어린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자며, 사람 가운데서 구속을 받아 처음 익은 열매로 하나님과 어린양에게 속한 자들이니(계14:4) 교회에 출석하며 주여 주여 부른다고 다 예수께 속한 자는 아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사랑하는 요한 사도에게 주신 말씀을 들어보자! 어떤 삶이어야 예수님께 속한 자가 되는가? 어린양이신 주님께서 무엇을 요구할지라도 그대로 준행하는 신자이어야 된다. 주께서 저리로서 산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는 그날, 휴거되고 부활에 속하는 영적수준이라야 한다. 당신은 어디에 속하는가? 성령의 사람과 마귀의 사람이 있듯이 예수께 속한 신자가 있고, 사탄에게 속한 신자가 있다.

  그가 백합화 가운데서 양떼를 먹이는구나.(2:16c) 술람미는 솔로몬 왕을 백합화 가운데서 양떼를 먹인다고 한다. 백합화는 예루살렘 여인들 중에서 왕을 사랑하고 신뢰하는 아름다움이다. 이런 곳에서 양떼를 먹이시는 왕은 만왕의 왕이신 예수님이시다. 교회라는 조직에는 양떼가 있고 그들을 먹이는 참 목자가 있다. 그리고 염소 떼를 먹이는 거짓목자와 그를 따르는 염소 떼도 있다. 백합화는 신자들중에서 어린양을 따르는 신부 후보들이다. 염소 떼는 대 환난에 남겨질 엉터리 신자들이다. 당신은 어떤 목자를 따르고 있는가? 당신의 영혼을 먹이는 목자는 어떤 목자인가? 선택은 자신의 의지에 달려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시간이 되었을 때, 그 결과는 말로 표현하지 못할 기쁨과 고통이 따른다.

  나의 사랑하는 자야 날이 기울고 그림자가 갈 때에.(2:17a) 솔로몬은 어두워짐을 말한다. 어둡기 전에 돌아오라고 한다. 술람미가 어디서 무엇을 하기에 어둡기 전에 돌아오라고 하는가? 솔로몬왕은 포도원을 허는 작은 여우를 잡는 술람미에게 빨리 잡으라고 재촉했다. 이유는 어두워지기 때문이다. 어두워지면 여우를 잡을 수 없기 때문에 빨리 작은 여우를 잡으라는 독촉이다. 주님은 신자들에게도 이러한 분부를 하신다. 자신의 영혼을 해치고 주님과의 교제를 나누는 사랑을 헐고자하는 여우, 곧 마귀를 세상이 어둡기 전에 잡으라고 하셨다. 마귀를 잡는 일을 오래 끌지 말고 어둡기 전에 끝내라는 말이다. 그래야 세상이 어두워지기 전에 돌아와서 함께 가야되기 때문이다. 당신은 언제까지 마귀에게 사로잡혀 있는가? 시간이 없다. 어린양이 오시기 전에 빨리 잡아버려야 된다.

  돌아와 베데르 산에서의 노루와 어린 사슴 같아 여라.(2:17b) 술람미를 베데르(???) 산에 있는 노루와 어린 사슴과 같아지라고 한다. 베데르는 ‘산의 성소’라는 뜻이 담긴 지명이다. 베다니(Βηθαν?α)라는 이름이 베데르에서 왔다는 설도 있다. 베다니는 나사로가 주님을 위해 봉사했던 마을이다. 술람미를 베데르 산의 노루와 어린 사슴이 되라는 의미는 무엇일까? 베다니에 살았던 나사로는 주의 일에 헌신적으로 봉사한 사람이다. 나사로는 물질을 아끼지 아니했고, 몸으로서 헌신할 때 정결한 마음으로 절대적으로 순종했던 사람이었었다. 신자도 이러해야 된다. 주님께서 당신의 신부인 신자에게 순결하고 순종했던 나사로처럼 되라는 뜻일 것이다. 신자는 노루처럼 순결하고 어린 사슴처럼 깨끗한 심령이 되라는 것이다. 마음이 순결하지 못하고 영이 깨끗하지 못하면 하늘나라로 함께 갈수 없다. 노루와 같이 마음이 순결해야 된다. 주님을 사랑하는 신자는 어린 사슴과 같이 심령이 깨끗해야 된다. 그림자는 시간을 재촉하는 말이다. 거듭날 수 있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분부시다. 어두워지기 전에 빨리 거듭나서 돌아오라는 분부시다. 땅거미가 드리워지면 하늘나라로 가지 못한다. 믿음을 해치는 마귀를 빨리 잡아버려야 거듭나게 된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은혜의 그림자가 가기 전에 여우를 잡아야 된다

요한계시록 강해 - 정동수 교수

요한계시록 강해 제1과 강해 노트 자료: www.KeepBible.com, 다운로드 자료실, 요한계시록 강해노트 교재: 킹제임스 흠정역 성경(그리스도 에수안에 출판사, 생명의 말씀사 총판) 참고교재: 요한계시록해설(팀 라하이, 보이스사, 1991년)

  A. 계시록 1. 성경의 책 중에서 사람들이 가장 두려워하고 미워하고 오해하는 책이다. 2. 종말: 사탄, 교회, 유대인, 이방인, 민족들, 바빌론(천주교 체제), 땅과 우주 3. 계시록은 기록된 때부터 시종일관 신학적 싸움의 근원이 되었다: 전천년설을 반대하는 무리들 에의해서 4. 계시록을 반대하는 가장 큰 이유는 계20:1-6에서 나온다. 많은 무리들이 그리스도께서 가시적인 왕국을 세운다는 것에 반대함

  B. 계시록 연구의 가치 1. 읽는 이들에게 특별한 복이 임한다(계1:3; 22:7). 2. 미래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을 알 수 있다. 3. 성경의 예언에 대해 가장 명료하게 알 수 있다(재림의 상세 사항, 19-22장). 4. 성경의 처음과 나중을 앎으로 진리의 원을 완성시킬 수 있다.

  창세기 계시록 1. 낙원 - 잃어버림, 회보함 2. 생명나무 - 접근 금지(3:22-24), 먹음(22:2) 3. 인간의 반역 - 시작(3-4장), 종결 4. 살인 등의 죄악 - 시작, 종결(21:27) 5. 죽음 - 시작(4:8), 종결(21:4) 6. 저주 - 시작(3:15-18), 종결(22:3) 7. 마귀 - 인간의 유혹자(3:1-18), 최후를 맞음(20:10) 8. 하나님의 말씀 - 변개(3:1-5), 변개의 저주(22:19) 5. 성경 전체의 요약과 결론을 알 수 있다: 구약성경 39권 중 26권의 내용이 인용되고 있다.

  C. 연구에서 주의할 점 1. 특별한 일이 없는 한 문자 그대로 성경을 읽고 해석한다. 2. 사건의 배열에 신경을 써야 한다: 하늘에서 일어나는지, 땅에서 일어나는지 예: 4-5장은 하늘에서, 6장은 땅에서 3. 이 책의 사건 중 4-19장은 시간 순서대로 기록된 것이 아니다.

 D. 네 가지 해석 방법 1. 과거적 해석 방법: 계시록에 기록된 것들은 계시록이 기록된 AD 96년경에 일어난 것들이다. 2. 역사적 해석 방법: 계시록에 기록된 것들은 지나간 교회 역사에서 일어난 것들을 기록한 것이다. 다섯 번째 봉인: 순교자들, AD 300년경의 디오클레티안 황제의 핍박, 다섯 번째 나팔: 메뚜기 심판,마호메트 군대의 침략 등, 프로테스탄트 일부 3. 영적 해석 방법: 계시록에 기록된 것들은 실제 사건이 아니므로 다 상징이나 은유로 받아들여야 한다(무천년주의). 천주교, 프로테스탄트 일부 4. 미래적 해석 방법: 계시록 4장 이후에 기록된 것들은 모두 미래에 이루어질 것이다.

  하나님의 사람 성도 요한의 계시록 요 한 계 시 록 기록자: 요한, 기록 시기: 주후 96년경, 성격: 예언 수신자: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와 하나님의 모든 성도 이름: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계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를 담은 기록이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에게서 그것을 받아 천사에게 주었고 천사는 요한에게 그것을 표적으로 보여 주었다. 주제: 하나님이 정하신 심판자 예수 그리스도의 심판(요5:22, 27) 목적: 하나님의 구속 사역의 최종 목적과 인류와 사탄의 최종 종착지와 특별히 구원받은 자들과 구원받지 못한 자들의 최후 상태를 보여 주는 것 내용: 계시록은 하나님의 백성이 외부의 원수들에 의해 핍박을 받고 또 미지근한 성도들이 세상의 것을 추구하는 상황에서 위로와 경고의 메시지로 모든 교회에 주어졌다. 이 책은 또한 신구약 성경의 진리를 요약하며 아직 성취되지 않은 예언들의 성취를 보여 주고 특히 창세기와 함께 완전하게 진리의 사이클을 구성한다. 요한은 자기가 본 것들과 지금 있는 것들과 이후에 있을 것들을 기록하면서(1:19) 먼저 그리스도의 환상(1장), 교회의 심판(2-3장), 교회의 휴거 이후에 이 땅에 남는 이스라엘과 이방 민족들을 향한 7년 환난기(4-19장), 천년왕국(20:1-6), 하나님의 최후 승리와 사탄의 패배(20:7-15), 새 하늘과 새 땅과 새 예루살렘(21-22장)을 차례대로 기록한다. 요한계시록은 22장, 404절, 12,000 영어 단어로 구성되어 있다. 핵심 장: 19장(영광의 왕으로 오시는 그리스도) 핵심 절: “네가 본 것들과 지금 있는 것들과 이후에 있을 것들을 기록할지니”(1:19) 핵심 단어: 이기다(2:7, 11, 17, 26; 3:5, 12, 21), 세상을 이기는 자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이다(요일5:5), 핵심 구: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2:7) 계시록의 그리스도: 살아 계셔서 승리하시는 주님(1:18) 영적 교훈: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지키라.”(1:3)

  요한계시록 강해 제2과 E. 중요 구절 - 계시록 1장 19절 F. 계시록 개요 I. 서론(1:1-8) II. 네가 본 것들(1:9-20) - 환상을 받을 때의 상황, 내용 III. 지금 있는 것들(2:1-3:22) 에베소, 서머나, 버가모, 두아디라, 사데, 필라델피아, 라오디게아 교회에 보내는 메시지 IV. 이후에 있을 것들(4:1-22:5) A. 환난기(4:1-19:21) 1. 하늘의 왕좌(4장) 2. 하늘의 책과 그것의 봉인들(5장) 3. 일곱 봉인 심판(6:1-17) 4. 환난기에서 구속받은 자들(7:1-17), 144,000명의 유대인(7:1-8), 수많은 이방인(7:9-17) 5. 일곱 나팔 심판(8:1-9:21) 6. 하늘에서 오는 천사와 작은 책(10:1-11) 7. 두 증인(11:1-19) 8. 하늘에서의 전쟁(12:1-17) 9. 바다에서 올라오는 짐승과 그의 대언자(13:1-18) 10. 여러 가지 일들을 알려줌- 144,000명에 대하여, 영존하는 복음에 대하여, 짐승을 경배하는 자들에 대하여, 땅의 수확에 대하여 11. 일곱 병 심판(15-16장) 12. 종교적 바빌론의 심판(17장) 13. 상업적 바빌론의 심판(18장) 15. 그리스도의 지상 강림(19장) B. 천년왕국(20장) C. 새 예루살렘: 영원한 상태(21:1-22:5) D. 결론(22:6-21) E. 계시록 타임라인 계1:1 계시, Apokalypsis(아포칼립시스): 신비를 밝혀내다(눅2:32; 갈1:12; 살후1:7), ‘휘장을 젖히다’, 요한은 이미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기록하였다(요한복음).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계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이다. 예수님께서 친히 승인하신 유일한 책(계22:16) 계시록은 예언의 책: 이 대언(prophecy)의 말씀들(1:3; 22:7, 10, 18, 19), 대언 중 예언 속히 일어나야 할 것들을 담은 책이다(1:1). 마지막 대언(예언)의 책, 더 이상 예언은 없다(계22:18-19). 자신의 천사를 통해: 계22:8-9, 아마도 구약의 대언자들 가운데 부활한 증인 표적으로 보여 주다(signified), 상징들을 사용하여 보여 줌, 성경에서 상징이 가장 많이 사용된 책 다니엘서를 이해하지 못하면 계시록을 해석하기 어렵다. 상징들은 성경으로 풀어야 한다. 다니엘의 예언은 끝이 이르는 때까지 봉인됨(단12:4, 9) 계시록은 봉인되지 않음(계22:10). 상징들을 사용한 것은 영적인 분별력이 있는 독자들을 위한 것이다(신29:29). 마지막 대언이므로 교회, 이스라엘, 이방 민족들(고전10:32)에 대한 모든 결론을 줄 것이다. 초반부: 교회, 중반부: 이스라엘과 민족들, 후반부: 이스라엘과 민족들 새 예루살렘을 지을 때도 이 세 부류가 등장한다. 열두 사도로 나타나는 교회는 새 예루살렘의 기초 안에(21;14), 열두 지파로 나타나는 이스라엘은 문 안에(21:12), 구원받은 민족들은 거리들에 나타난다(21:24). 이 책은 매우 유대적이다: 상징들, 성막, 언약 궤, 나팔과 재앙들, 144,000명의 유대인들 이유: 마23:37-39, 재림 전에 유대인들을 다루는 때가 있어야 한다. 다니엘의 70이레의 마지막 이레 모든 것이 절정을 이룬다: 사탄과 악한 자들의 종말, 새 하늘과 새 땅의 창조(사65:17; 66:22).

  요한계시록 강해 제3과 계1:2 요한은 기록자이다(1:1; 22:8) 요한의 다른 책들과는 문제가 매우 다르다. 환상을 보는 대로 기술함. 그리스도의 증언은 대언의 영(계19:10), 하나님의 뜻을 밝히 알려준다, 미래를 예언한다(사41:23-26)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인 이유 중 하나는 그 안에 대언(예언)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영이 들어오면 구원받은 것을 알고 갈 곳을 안다. 그리스도의 증언은 대언의 영이다(요일5:13). 계1:3 깨닫는 자가 아니라 읽고 듣는 자가 복이 있다. read+hear+keep 마귀의 패망이 있으므로 마귀는 사람이 계시록과 창세기를 읽지 못하게 한다. 때가 가깝다: 이런 일들이 발생하면 끝이 가까움을 알아야 한다. 예; 3장의 라오디게아 교회 계1:4 아시아는 소아시아를 말한다. 소아시아에서도 서쪽 끝부분, 7교회만 있지 않았다. 골로새(골1:2), 히에라폴리스(골4:13), 드로아(행20:6-7)에도 교회가 있었다. 이것들은 그 당시 교회들이고 교회 시대를 대표하는 교회들이다. 일곱이라는 숫자는 계시록에 매우 많이 나온다(일곱 영, 일곱 별, 일곱 등잔대, 일곱 교회 등 54회). 일곱은 완전한 수: 계시록은 성경의 절정이다. 일곱 영(사11:2?), 성령님의 일곱 가지 사역, 완전함을 강조함(계3:1; 4:5; 5:6) 계1:5 그리스도의 세 가지 직분, 과거: 죽임 당한 대언자, 현재: 제사장, 미래: 왕, 직분을 잘 구분해야 한다(딤후2:15). 계시록의 왕국은 문자적, 가시적, 1000년 동안 지속되는 왕국 예수님이 왕으로 오시면 다윗의 왕좌에 앉아서(눅1:30-33; 마25:31-46), 영광의 왕좌에 앉아서(마1927-39) 다스린다. 계시록 19장 이후에 왕으로서 다스린다. 죽은 자들 중에서 처음 나신 분(골1:18; 행13:32-33; 롬1:4) 땅의 왕들의 통치자: 진짜 왕국의 통치자 은혜와 평강, 그리스와 히브리 인사법 자신의 피로 우리를 씻으셨다: 침례의 물이 아니라 피로 씻으셨다. 4-5절은 삼위일체 하나님, 아버지, 성령님, 아들 계1:6 우리를 왕과 제사장으로 만드심, 우리, 제사장은 지금(벧전2:9), 왕은 나중에(계5:9-10)

  요한계시록 강해 제4과 계1:7 그리스도의 지상 강림, 찌른 자(슥12:10), 올리브 산으로, 유대인들의 후회와 회심(슥12:9-14). 이것은 휴거를 가리키지 않는다(고전15:50-53). 구름과 함께 오신다(행1:9). 눈에 보이게 임하는 것: 슥9:1; 마24:30; 26:64등, 공중 강림(휴거)과 지상 강림은 완전히 다르다. 초림 때: 로마 시대,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에 있었다. 그런데 재림 때에도 마찬가지이다. 초림과 재림의 상황: 비밀리에, 공개적으로, 33년, 7년 계1:8 알파와 오메가, 첫 글자와 마지막 글자, 말씀(요1:1), 예수님은 전능자이시다. 계1:9 요한은 환난에 동참한다. 어떤 환난, 이것은 7년 환난이 아니다. 로마 황제 도미티안의 극심한 기독교 핍박, 요한은 소아시아의 에베소의 감독(목사)이었으며 거기서 50킬로미터 떨어진 밧모 섬으로 유배됨. 이유: 하나님의 말씀과 그리스도의 증언으로 인해, 많은 순교자들이 생김 계1:10 주의 날에 성령 안에 있었다. 주의 날(Lord's day): 일요일(Sunday) 혹은 주의 날(day of the Lord) 주의 날 개념: 암5:16-20; 욜2:1-2; 습1:14-18; 사2:12-18; 말4:5; 행2:20 등, 주님이 돌아와 통치하는 날(환난기+천년왕국) 성경에서 일요일은 항상 주의 첫 날이라 불렸다. 일요일이라고 봐도 아무 문제가 없다. 그는 성령 안에서 마지막 때로 옮겨져서 모든 것을 보았다. 계1:11 알파와 오메가, 처음과 마지막, 개역성경은 ‘아시아에 있는’ 제거 일곱 교회: 실제의 일곱 교회, 교회 시대의 일곱 종류의 교회 형태, 교회(성도)의 일곱 가지 속성, 교회사의 일곱 교회(?) 계1:12 일곱 금 등잔대=일곱 교회(1장 20절), 성경이 성경을 해석한다. 교회는 등불이 아니라 등잔대이다. 계1:13 영광 중에 있는 사람의 아들(딤전2:5), 66년 만에 다시 봄 그리스도는 땅에 있을 때 사람의 아들로 대언자, 지금은 사람의 아들로 제사장, 재림할 때는 사람의 아들로 왕, 제사장의 옷을 입고 계심 계1:14-16 그리스도의 일곱 가지 영광 1. 머리와 머리털: 단7:9 2. 눈, 전지한 눈(히4:12) 3. 발(계19:15) 4. 음성: 심판하는 음성(마25:41) 5. 손: 일곱 별, 20절은 별이 천사임을 보여 줌, 여기의 천사는 angelic being이 아니라 사자 (messenger)를 뜻한다. 회당의 천사, 목사(감독)의 권위는 그분의 손 안에 있다. 6. 입, 성령의 검(엡6:17; 히4:12), 여기서는 사람의 아들의 검, 심판의 검(계19:11-15) 7. 용모, 변화산의 주님(마17:2; 계21:23; 말4:2) 그리스도는 심판하는 분으로 오신다.

  요한계시록 강해 제5과 계1:17 요한이 위엄 있는 그리스도 앞에서 죽은 자처럼 쓰러짐(66년의 차이) 계1:18 지옥과 사망의 열쇠를 가진 분, 우리는 문제가 없다(히2:14-15).
★★★ 적용 계1:19 계시록은 세 단원으로 되어 있다. 성경에서 유일하게 단원 구분이 되어 있다. 1. 과거(계1:10-20) 2. 현재(계2:1-3:22) 3. 미래(계3-22장) 계1:20 별은 천사들(목사들), 별은 마귀들을 가리키기도 한다(계12:4). 내 오른 손에 있는: 그리스도 중심의 교회 신비는 그리스도인들에게만 계시된다. 계시록에는 일곱 개가 일곱 개 있다. 1. 일곱 교회 2. 일곱 봉인 3. 일곱 나팔 4. 일곱 인물: 해(sun)를 입은 여인, 용, 사내아이, 천사장, 유대인들의 남은 자들, 바다에서 나오는 짐승, 땅에서 나오는 짐승 5. 일곱 병 6. 일곱 심판: 종교적 바빌론, 상업적 바빌론, 적그리스도와 거짓 대언자, 반기독교적 민족들, 곡과 마곡, 사탄, 이미 죽은 사악한 자들 7. 일곱 개의 새 것: 새 하늘, 새 땅, 새 도시, 새 민족들, 새 강, 새 나무, 새 왕좌 이제 2장부터 교회가 나오기 시작한다. 제 2 장 각 교회에 보내는 메시지의 형태: 주님의 모습, 주님께서 아는 사실, 책망할 것, 회개할 것, 귀 있는 자는… 에베소 교회에 보내는 편지(계2:1-7) 배경: 에베소는 항구 도시로 소아시아 모든 교역로의 중심지이며 소아시아에서 가장 큰 도시였다. 그래서 이 도시는 ‘아시아의 시장이며 문명의 빛’이라는 별칭을 얻기도 하였다. 또한 에베소가 교통의 요지였던 만큼 이교도 신앙의 중심지이기도 했다. 이곳에는 고대 세계의 7대 불가사의 중 하나로 꼽히는 ‘다이아나’ 신전(행19:35)이 있었고 황제 숭배와 신비 종교, 마술 등이 성행하였다. 또한 에베소는 정치적으로 특권이 부여된 자유 도시였다. 자유 도시란 로마에게 충성하는 도시에게 붙여진 칭호였으며 따라서 그 경계 내에서는 자치가 인정되었고 군대도 상시 주둔하지 않았다. 따라서 이곳은 자유로운 상거래와 종교의 자유가 허락된 곳이었다. 그러나 에베소가 얻은 명성은 이교도들의 문란한 종교 의식과 어디서나 행해지는 부도덕 등으로 인해 땅에 떨어졌고 결국 그곳은 향락과 퇴폐의 도시로 몰락하였다. 에베소 공회에서 마리아를 하나님의 어머니로 인정함(AD 431년). 사도 바울은 제2차 선교 여행 때 이곳을 방문하여 교회를 세우고 제3차 선교 여행 때는 이곳의 두란노 학교에서 직접 2년 이상 목회하기도 했다(행18-20장 참조). 처음의 에베소 교회는 사도 바울이 집집마다 다니면서 눈물로 경고하며 세운 교회로서 영적으로 활기에 넘친 교회였다. 계2-3장에 기록된 일곱 교회 중 에베소 교회만이 유일하게 사도에 의해 세워진 교회였다. 사도 바울은디모데를 에베소 교회의 첫 번째 감독으로 임명했으며(딤후 추신) 또 감옥에 갇혀서도 에베소 교회에 보내는 편지를 기록하여 이방인과 유대인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차별이 없이 하나가 되는 교회의 신비가 무엇인지 자세히 보여 주었다. 역사가 유세비우스는 사도 요한이 자신의 마지막 생애를 에베소에서 보냈다고 기록한다. 에베소에는 유대인도 많이 살았고 회당도 있었다(행18:19; 19:17). 바울은 제2차 선교 여행에서 돌아오는 길에 들려 얼마동안 전도하다가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를 남겨 두고 떠났다(행18:21). 그는 3차 선교 여행 때에 거기를 들러 2년 이상 체재하면서 열심히 전도하였고 그 결과 아시아에 살고 있던 유대인과 그리스인이 모두 주의 말씀을 들었다(행19:10). 사도 바울이 그 도시에 처음으로 기독교를 들여오지는 않았다. 오순절 사건 이후에 전 세계로 퍼져 나간 유대인들이 에베소에서도 복음을 선포했지만 본격적으로 교회가 형성되며 그 온 지역에 영향을미친 것은 바울과 디모데의 수고 때문이었다.

  주 예수님: 계2:1 예수님은 오른손에 일곱 별을 붙잡고 일곱 금 등잔대 한가운데를 거니는 분(1절) 계1:20은 금 등잔대가 교회라고 말하므로 에베소 교회에 드러난 예수님은 교회의 시작이요, 기초요, 중심이요, 머리되는 분이다(마16:18).

  에베소 교회의 특징: ‘처음 사랑을 버린 교회’(2:4)라는 부정적인 인상이 있지만 사실 긍정적인 것이 부정적인 것보다 훨씬많다. 에베소 교회는 첫 세대가 가졌던 복음의 열정을 잃고 있었으나 기독교의 진리를 수호하는 데는 결코 게으르지 않은 교회였다. 계2:2 1. 믿음과 행위가 일치하는 교회 예수님은 먼저 2절에서 “내가 네 행위를 안다”고 말씀하신다. 이 ‘행위’는 곧 ‘믿음의 행위’(살전1:3; 엡2:8-10.

  요한계시록 강해 제6과 2. 서로 섬기는 교회 주님은 에베소 교회를 향해 “내가 네 수고를 안다”고 하셨다. 수고에는 이미 섬김과 봉사가 들어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은 많은 사람을 섬기고 자신의 생명을 그들의 대속물로 주기 위한 것이다(막10:45). 따라서 우리는 섬기는 교회, 섬기는 성도가 되어야 한다.
★★★ 3. 소망으로 인내하는 교회 주님은 “내가 네 인내를 안다”고 말씀하셨다. 에베소 교회는 유혹을 받고 핍박을 받음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을 든든히 가졌기에 인내할 수 있었다.

★★★ 4. 성별된 교회 예수님은 “네가 사악한 자들을 용납하지 못함을 안다”고 말씀하셨다. 초대 교회의 특징 중 하나는 세속 문화와 그것을 가져오는 자를 거부했다는 점이다(롬16:17 참조). 5. 순수한 교회 주님은 또한 “네가 스스로 사도라 말하나 사도가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들이 거짓말하는 자들임을 알아낸 것”을 안다고 말씀하셨다. 사도는 예수님을 본 적이 있어야 하며(행1장) 고후 12장 12절에 있는 것처럼 사도의 표적들을 보여야 한다. 즉 죽은 자를 살리고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대기만 해도 낫는 표적을 말한다(행19:12). 초대교회에는 사도적 계승권(Apostolic succession)을 주장하는 자들이 있었다. 카톨릭(베드로로부터), 오순절 주의(은사의 표적) 에베소 교회는 이런 거짓 사도들을 인지하고 교회에 발을 붙이지 못하게 한 순수한 교회였다. 계2:3 6. 낙심하지 않는 교회(3절) 예수님은 3절에서 “네가 낙심하지 않은 것을 안다”고 말씀하신다. 아무 일도 하지 않으면 낙심할 필요가 없다. 무슨 일을 하려 하는데 방해가 있고 그것을 이길 수 없다고 생각하면 낙심한다(갈6:9). 계2:4 책망 첫째 하나님께 대한 열심이 식어졌다. 둘째 성도들 사이의 사랑이 식어졌다.

★★★ 계2:5 권면 처음 사랑을 가지기 위해서는 어디에서 잘못했는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 이것은 구원을 잃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네 등잔대를 그것의 자리에서 옮기리라’. 등잔불을 끄는 것이 아니라 등잔대를 옮긴다. 계2:6 칭찬, 참과 거짓을 정확히 판별해 낸 교회: 바울의 경고(행20:29-30) 당시 에베소 교회에는 니골라당이라는 무리가 거짓 교리로 교회를 어지럽게 했다. 니골라당은 ‘정복한다’는 의미의 ‘니코’와 ‘일반 성도들’을 뜻하는 ‘라오스’가 결합된 말로 ‘일반 성도들을 억누르는 자들’이란 뜻이다. 주교, 감독, 추기경, 교황 등이 나옴. 성직자 계급 체계(벧전5:1-4) 에베소 교회는 이들의 거짓 교리를 판별하고 그것을 미워했다. 계2:7 보상, 이기는 자(overcomer, 요일4:4; 5:4), 결코 구원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죄를 이기고 육신을 이기고 연약함과 시험을 이기는 자 거짓 교리를 물리쳐 이기고 온전한 신앙을 소유한 자에게는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과실을 먹게 하리라는 말씀이다.

  요한계시록 강해 제7과 - 서머나 교회에 보내는 편지(계2:8-11) 배경: 서머나는 에베소 북방 45km에 위치한 항구 도시로 주전 300년 경 알렉산더 대왕이 계획도시로 세웠다. 이곳은 부요함 때문에 ‘아시아의 왕관’, ‘아시아의 꽃’, ‘이오니아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등의 칭찬을 받았다. 서머나는 로마에게 처음부터 충성을 바쳤고 원정군들을 원조하기도 하였으며 이러한 충성의 결과로 한때 로마의 보호와 호의를 받아 황제 숭배의 중심지가 되기도 하고 자유 도시가 되었다. 고고학자들이 발견한 바에 의거하면 이 도시는 매우 부유한 도시였다. 한편 서머나는 유대인들이 많이 이주하여 살던 곳으로 유대인들이 기독교인들을 모함하고 핍박한 지역이기도 하다. 서머나 교회는 믿는 자들에게 조금의 여유도 허락하지 않는 부유한 도시 한가운데서 큰 핍박을 받은 교회였다. 에베소 교회가 ‘처음 사랑을 버린 교회’라고 한다면 서머나 교회는 ‘핍박받는 교회’이다. 이 도시의 이름은 영어로 ‘Smyrna’인데 이것은 ‘myrrh’ 즉 몰약을 뜻한다. 몰약은 사람을 장사지낼 때 쓰는 물품으로 사망과 고통을 상징한다. 서머나 교회의 성도들은 주로 정부와 부유한 자들과 유대인들로부터 고통과 핍박을 받았다. 핍박하는 자들은 그리스도인들의 가산을 약탈하기도 하였으며 그래서 사실 초대 교회 신자들은 거의 다 가난한 생활을 하였다. 서머나라는 도시 자체의 경제적인 부유함과 상품 등의 풍요로움은 궁핍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지만 여기 사는 크리스천들은 큰 고난과 궁핍을 당했다.

  주 예수님: 계2:8 서머나 교회에 나타난 예수님은 환난과 고난을 극복하고 승리한 분이시다. 이것은 환난과 궁핍에 직면한 서머나 교회에게 큰 위로가 되는 적절한 표현이다.

  서머나 교회의 특징: 계2:9 예수님은 생존을 위협 당하는 서머나 교회의 환난과 궁핍을 다 알고 계신다고 말씀하셨다(9절). 또 주님은 서머나 교회가 겉보기에는 가난하지만 실제로는 매우 부요하다고 말씀해 주셨다(고후6:10). 요16:33의 권면의 말씀 스스로 유대인이라 하나 사탄의 회당인 자들, 영적 유대인이 진짜 유대인이 되면 안 된다.

★★★ 서머나 교회에서는 사탄의 하수인 노릇을 하던 유대인들의 핍박이 심하여 경건하게 믿고자 하는 자는 항상 순교의 위기에 직면해 있었다. 사도 요한의 제자이며 서머나 교회의 초대 감독(AD 155-165) 이었던 폴리캅은 이곳에서 순교했다. 폴리캅 당시의 유대인들은 극심하게 성도들을 핍박했다. 사탄: 대적하는 자, 비난하는 자(욥1:6), 회당: 유대인들의 예배 장소, 원래는 모임, 집회를 뜻함. 계2:10 고난 중에 충성한 교회에 대한 축복, 두려워하지 말라(사43:1-3). 고난을 면하게 해 주지 않고 이길 수 있게 해 준다.

★ 여기서 열흘은 문자적인 열흘이 될 수도 있고 어떤 사람들이 이야기하듯이 어떤 일정한 기간을 가리킬수도 있다. 여기에 ‘신실하다’고 번역된 그리스어는 ‘피스토스’인데 이것은 하나님의 진리와 사랑을 깨닫고 그것을 정직하게 지키며 성실히 전파한다는 의미이다(고전4:1-2). 성경에는 여러 종류의 관(冠)이 소개되고 있는데 특별히 생명의 관은 믿음으로 구원받은 성도가 얼마나 신실했는가에 따라 주시는 보상이다. 약1:12, 벧전 5:4 등의 관 여기서 한 가지 중요한 것은 생명의 관을 받을 수 있는 믿음은 마귀의 핍박과 시험을 이긴 연단된 믿음이라는 점이다.

★ 계2:11 이기는 자(요일5:4)는 둘째 사망의 해를 입지 아니한다. 둘째 사망(계20:6, 14; 21:8). 
 
버가모 교회에 보내는 편지(계2:12-17) 배경: 버가모는 에베소 북방 160km, 서머나 북방 110km 지점에 위치한 도시로 주전 5세기에 이미 잘 알려진 도시였다. 알렉산더의 그리스 제국이 붕괴하여 생긴 셀레우코스 왕조 때는 그 왕조의 수도였다. 그 후 주전 133년경에 시리아가 로마에 합병되면서 버가모는 아시아 지방의 수도로 불릴 정도로 큰 도시로 발전했다. 또한 이 도시는 문화의 도시로도 잘 알려졌는데 이곳에는 알렉산드리아 다음으로 유명한 도서관이 있었고 20만권 이상의 양피지 두루마리가 소장되어 있었다. 이곳은 종교의 중심지로서 주신(主神)인 제우스(Zeus)를 비롯하여 승리자 아테네(Athene), 지도자 디오니소스(Dionysos) 등의 신전이 있었다. 더구나 이곳은 황제 숭배까지 성행하는 곳으로 각지에서부터 오는 순례객들로 언제나 번잡한 곳이었다. 그러므로 이곳에 위치한 버가모 교회도 이 도시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즉 교회의 구성원들 중에는 신실한 자도 있었지만 니골라당의 교리에 동조하는 자들도 있었고 우상 숭배자들도 포함되어있었다. 예수님은 13절에서 버가모에 사탄의 자리가 있다고 하시면서 이 도시가 우상숭배의 본거지임을 지적하셨다.

 주 예수님: 계2:12 예수님께서 양날 달린 칼을 가진 분으로 나타나신 것은(계1:16) 버가모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음의 대적들과 싸워야 한다고 격려하기 위한 것으로 생각된다. 예수님은 자신의 교회를 거룩하게하실 때에도(요17:17), 성도들을 깨끗하게 하실 때에도(요15:3), 기쁘게 하시는 일에도(요15:11), 화평을 주시는 때에도(요16:33) 하나님의 말씀을 쓰셨다.
 
요한계시록 강해 제8과 버가모 교회의 특징: 계2:13 고난을 당한 버가모 교회(13절 초반부) 버가모 교회가 당면한 가장 큰 고난은 그 도시에 ‘사탄의 자리’가 있었다는 것이다. 로마는 백성들에게 로마에 대한 충성의 표시로 황제를 숭배하게 하고 신전을 지어 그것을 구체화했다. 특히 버가모는 아시아 지방의 수도로서 어느 지역보다 먼저 카이사르의 신전이 세워졌다. 그리고 백성들로 하여금 황제를 ‘주’(Lord)라 부르게 했다. 그러나 그리스도만을 주(Lord)로 믿는 버가모 성도들은 이를 거부했고 교회는 자연히 핍박을 받았다. 특히 황제 숭배를 거부하는 성도들은 로마 정부의 눈에 불충성하고 반역하는 자들로 비추어졌기에 박해는 더 심했다. 내 이름을 굳게 붙들고(벧전4:14) 신실한 증인 안디바는 이러한 여건 때문에 순교한 것으로 보인다. 믿음을 버리지 않은 버가모 교회(13절 중반부) 핍박이 너무 강하다 보면 성도들은 위축되고 세상과 타협하기 쉽지만 버가모 교회는 자기들의 믿음을 끝까지 버리지 않고 굳게 지켜 나갔다. 특히 버가모에 사탄의 자리가 있고 그곳이 우상 숭배의 본거지였음을 상기할 때 버가모 교회의 믿음은 대단한 것이었다. 그들은 안디바처럼 모두 신실한 증인이었다. 터툴리안이 기록한 문서에 의하면 안디바는 놋쇠 가마에서 서서히 구워지면서 죽임을 당했다고 한다. 계2:14 책망, 버가모 교회의 문제점: 우상 숭배 14절은 우상숭배자들을 가리켜 ‘발람의 교리를 붙잡는 자들’이라고 말한다. 발람은 시팀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바알브올 숭배를 가르친 장본인이다. 그의 감언이설로 인해 이스라엘 백성은 우상을 섬기고 음행을 하여 큰 재앙을 당했다(민22:1-9; 25:1-5; 31:16). 우상 숭배는 항상 타협과 함께 들어온다. 주후 313년 콘스탄틴 대제의 기독교 공인 이후에 교회 안에 이교도들의 우상 숭배 풍습이 들어와 기독교와 혼합되어 천주교를 만들어 냈다. 주후300년(죽은 자를 위한 기도, 성호를 긋는 풍습), 375년(성인과 천사 숭배), 394년(미사 제도 시작), 431년(성모 마리아 숭배), 500년(성직자 계급 체제 확립, 옷의 구별), 526년(종부성사), 593년(라틴어 예배), 600년(중보자 마리아에게 기도를 드림). 계2:15 니골라당의 교리를 붙잡는 자들, 콘스탄틴의 기독교 공인 이후에 두드러지게 나타난 것이 바로 성직자와 평신도의 구분이었다. 계2:16 회개 촉구, 내 입의 칼(계1:16) 예수님은 우상 숭배의 허탄한 교리를 받아들인 버가모 교회에게 회개하라고 명하신다. 거짓 교리를 받아들인 것은 교회의 일부분이지만 회개는 온 교회를 향한 명령이다. 계2:17 주님의 약속 주님은 17절에서 이기는 자에게 감추어 둔 만나를 주겠다고 하신다. 만나는 하나님이 광야에서 이스라엘에게 주신 하늘의 양식이다. 출16:32-33을 보면 모세가 아론에게 항아리를 가져다가 그 속에 만나일 오멜을 가득히 담아 주 앞에 곧 증언 판 앞에 두어 간수하게 하는 장면이 나온다. 이런 식으로 만나는 하나님 앞에 감추어졌다. 우리 주님은 우상에게 바치는 것을 먹지 말라고 하시면서 하나님 앞에 숨겨진 만나를 주겠다고 말씀하신다(빌4:19). 또 주님은 이기는 자에게 흰 돌을 주겠다고 말씀하신다. 고대 사회에서 흰 돌은 무죄의 의미로 쓰였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고소를 당하게 되면 배심원들이 투표를 하는데 그때 흰 돌을 놓으면 무죄가 되었다. 이 일은 이미 십자가에서 끝이 났다.

  두아디라 교회에 보내는 편지(계2:18-29) 배경: 두아디라는 버가모와 사데 사이에 위치한 조그마한 공업 도시로 주전 300년경 알렉산더가 세운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곳은 요한 계시록에 소개된 일곱 도시 중에서 가장 작고 보잘것없는 도시이다. 하지만 이 도시는 소아시아의 수도격인 버가모로 들어가는 길목에 위치했기 때문에 수비대가 주둔했으며 염색 공장으로 유명했다. 사도 바울이 빌립보에서 두아디라 출신의 자주 장사 루디아를 만났는데 그녀 역시 옷감 장사였다. 그래서 이 도시의 주민도 직공들과 상인들 그리고 군인 등 여러 부류로 구성되었고 이 때문에 두아디라 교회의 회원들은 거의가 이방인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이 교회의 기원에 대해서는 분명치 않으나 서머나나 버가모의 경우처럼 바울이 에베소 체재 중에 전도해서 세운 것으로 추측되다.

  주 예수님: 계2:18 주님은 “눈이 불꽃 같고 발이 정제된 놋 같은 하나님의 아들”로, 두려운 모습으로 자신을 드러내신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표현은 계시록에서 단 한 번 이곳에만 나타난다. 따라서 이 구절은 ‘하나님의 아들’의 위엄을 묘사하고 있으며 그곳 성도들에게 예수님이 태양신이나 로마 황제 보다 뛰어난 위엄을 지닌 존재임을 보여 주고 있다. 사실 두아디라에는 ‘제우스’의 아들 ‘아폴로’의 신당이 있었으며 이 아폴로가 두아디라의 주신으로 숭배를 받았다. 따라서 요한계시록에 처음 등장하는 ‘하나님의 아들’이란 표현은 여러 가지 우상이 즐비하지만 참 하나님의 아들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점을 일깨우기 위해 사용된 듯하다. 특히 ‘하나님의 아들’은 그리스도의 신성을 나타내는 표현으로서 정의와 불의를 구분하는 통찰력과 심판자의 권위를 지닌 그리스도를 잘 묘사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것은 특별히 2장 27절의 철장 권세를 지닌 분과 연관되어 있다(시편 2편 7-8절).

  두아디라 교회의 특징: 계2:19 주님의 칭찬이 먼저 나온다. 거짓 가르침과 악행이 팽배한 두아디라 교회에도 선한 성도들이 존재했다. 우리 주님은 사랑과 믿음을 갖고 그리스도의 복음 사역을 위해 충성했던 그들의 행위를 아셨다. 주님께서 행위를 두 번이나 안다고 하시며 또 마지막 행위가 처음 것보다 많다고 칭찬하셨다. 즉 믿음의 행위에 진보가 있었다. 계2:20 주님의 책망. 두아디라 교회의 가장 큰 잘못은 이세벨이라는 거짓 대언자를 용납한 것이다. 이스라엘 역사에서 발람과 이세벨은 우상 숭배를 부추긴 장본인이며 이에 대항해서 구약 시대의 두 대언자 모세와 엘리야가 나온다. 이세벨은 왕상 16장에서 아합 왕의 아내로 등장한다. 아합의 아내 이세벨은 바알을 숭배함으로 이스라엘에 많은 문제점을 야기했고 주의 종들을 수없이 탄압하였으며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시켜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바알을 숭배하게 만들었다. 음행, 우상숭배 계2:21 이러한 이세벨에게 주님은 마치 자신을 배반한 가룟 유다에게 기회를 주셨던 것처럼 회개할 기회를 주셨으나 이세벨은 회개하지 않았다. 계2:22 주님의 심판. 하나님은 거짓 대언자들의 행위를 용납하지 않으신다. 회개할 기회를 주었으되 회개하지 않은 이세벨에게 내려진 심판은 죽음이며 이러한 심판은 이세벨에게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요, 그녀와 함께 한 모든 자들에게 동일하게 적용된다. 이제 교회가 해야 할 일은 이세벨과 같은 거짓 대언자를 추방하고 회개 운동을 일으키는 것이다. 계2:23 주님의 심판. 하나님은 거짓 대언자들의 행위를 용납하지 않고 사망으로 벌하신다. 속 중심과 마음을 살피는 분(렘11:20; 17:9-10), 행위에 따라 보상해 주신다. 계2:24 사탄의 깊은 곳을 알지 아니한 자들, 이단은 항상 자기들만이 아는 신비가 있다고 말해 사람을 유혹한다. 여호와의 증인, 몰몬, 지방교회, 기타 한국에 무수한 자생 이단들을 보면 한결같이 무언가 자기들만의 신비한 것이 있다고 주장한다. 성경은 이런 것을 가리켜 사탄의 깊은 것들이라고 말한다. 우리 성경 신자들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성경 이외의 신비한 것을 원치 않는다. 두아디라 교회에 우상 숭배를 도입한 이세벨이 그대로 용납될 수 있었던 가장 큰 원인 중 하나는 성도들이 말씀에 따라 생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말씀에 따라 생활한다면 결코 거짓 교리에 넘어갈 수 없다. 교회가 말씀에 바로 설 때 건강하고 아름다울 수 있다. 이런 성도들에게 예수님은 “내가 너희에게 어떤 다른 짐도 지우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한다. 계2:25 주님의 권고. 이 어려운 상황에서 그리스도께서는 이세벨의 교리를 따르지 아니한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에게 참된 교리와 믿음을 굳게 잡고 그 시험을 물리쳐 이기라고 권고하셨다. 계2:26-27 주님의 약속. 시 2:8, 9, 메시아의 1000년 왕국. 믿음의 승리자에게 메시아의 통치권을 나누어 주겠다는 말씀. 계2:28 승리자에게 “새벽별을 주리라”고 하셨다. 새벽별(계22:16), 예수님 자신, 그분의 영광과 빛

  요한계시록 강해 제9과 - 사데 교회에 보내는 편지(계3:1-6) 배경: 사데는 두아디라에서 동남쪽으로 48km 정도 떨어진 곳에 있었으며 헤르무스 강과 트몰루스 산 사이의 해발 약 450m 고지에 위치한 요새형 도시였다. 이 도시는 주전 6세기경에 루디아 왕국의 수도로 세계적인 도시였으나 그 후 페르시아, 그리스 제국에 의해 차례로 점령되었고 결국에는 로마의 속국이되었다. 사금이 흐르는 팍톨루스 시내가 이 도시의 부의 원천이기도 했으나 이는 사데가 도덕적으로타락하는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사데는 또한 양탄자 생산으로 유명했고 부유했지만 지진으로 멸망하고 말았다. 사데 교회의 기원은 분명치 않지만 본서가 기록될 당시에는 소아시아 지역에 어느 정도 알려진 교회였던 것 같다(사도 바울의 3차 여행 시 에베소 두란노 학교 행19:9-10). 그러나 그 도시의 퇴폐풍조가 교회에도 숨어들어 사데 교회는 안일과 부도덕으로 타락한 교회요 죽은 교회라는 책망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지금까지 살펴본 여러 교회에는 특징이 있었는데 사데 교회의 특징은 한 마디로 ‘죽은 교회’라는 것이다. 사실 이보다 더 나쁜 명칭은 없을 것이다. 이것은 마치 사막에서 우물을 발견하고 뛰어갔으나 가 보니 거기에는 물이 한 방울도 없는 경우와 비슷하다.

  주 예수님: 계3:1 예수님은 자신을 가리켜 하나님의 일곱 영과 일곱 별을 가진 이라고 말씀한다. 일곱 영: 성령님의 완전함을 강조함(계3:1; 4:5; 5:6) 교회는 오순절에 성령님과 함께 시작되었다. 교회의 생명은 성령님에게서 온다. 성령님을 근심하게 하면 교회는 힘을 잃고 생명력을 잃는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로 갖는 것이 필요하다. 주님은 일곱 영이라는 완전한 표현을 통해 죽어가고 있는 사데 교회에 성령님의 무한한 영적 은혜를 주려고 하시면서 지금의 행위를 벗어버리고 회개하라고 촉구하고 있다. 일곱 별(계1:20)을 쥐고 계신다는 의미 역시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목회자들을 통해 교회를 지키는 분임을 보여 주고 있다. 사데라는 말은 “도망하는 자”, “빠져나온 자”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이것은 세상에서 분리되어 나온 것을 가리키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세상에 오염되어 결국 1절에 언급된 것 같이 사데 교회는 ‘살아 있다’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교회로 전락하고 말았다. 교회의 네 단계; man, movement, machine, monument, 사데(네 번째 단계) 예수님은 사데 교회에게 “내가 네 행위를 안다”고 간단히 말씀하시고는 곧바로 꾸짖는 일을 시작하신다. 이 교회에는 칭찬이 없다. 박해나 반대도 언급되지 않았다. 사데 교회는 겉으로 보기에 아무 문제도 없어 보이는 교회였다. 성도들은 모두 열심 있는 신앙생활을 하는 것처럼 보였고 조직이나 재정도 결코 다른 교회에 뒤지지 않았다. 그러나 실상 사데 교회는 신앙적인 부패와 도덕적 타락으로 가득 차 있었다. 계3:2 사데 교회 성도들 대부분이 하나님 앞에 의로움을 인정받을 만한 신앙생활을 영위하지 못했다. 원가지에서 떨어져나간 가지는 말라죽게 되는 것처럼 신앙으로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하지 못한 교회는 죽은 교회가 되고 만다(요15:4-6). 사데 교회는 말로는 하나님을 시인하나 행위로는 부인하는 타락한 무리들이 모인 곳이었다. 믿음의 고백과 행위가 일치하지 못하고 실생활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는 교회는 한 마디로 죽은 교회이다. “죽었다”는 표현은 매우 무서운 말이다. 예수님께서 “너희가 죽었다”라고 말씀하신 것은 사데 교회 회원들의 대부분이 교회는 나오지만 영원한 생명을 소유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사실 현대 교회의 문제이다. 계3:3 받았고(살전4:1) 교회의 회개. 예수님은 사태를 정확하게 판단하신 뒤 그냥 정죄하지 않고 다시 한 번 이들에게 은혜를 베푸신다. 책망을 받을 때에 마음을 부드럽게 하고 회개하는 자세가 누구에게나 필요하다. 회개하지 않으면 도둑같이 임하신다. 계3:4 사데 교회에는 전반적인 타락상에도 불구하고 죄악의 풍조에 물들지 않은 순결한 성도들이 남아 있었다. 옷을 더럽히지 않는다(유23). 계3:5 생명책=산 자들의 책(시69:28; 빌4:3; 계13:8; 20:12, 15; 21:27; 22;19), 지워버리지 않는다: 안전하다는 의미

  필라델피아 교회에 보내는 편지(계3:7-13) 필라델피아: 이교회는 서머나 교회와 함께 책망을 받지 않은 모범된 교회이다. ‘형제 사랑’(살전4:9)이라는 뜻의 필라델피아는 루디아 왕국 시대에 칼라테부스라는 이름의 도시로 건설되었다. 그 후 BC 159-138년에 ‘버가모의 필라델포스’라는 칭호를 받았던 아탈로스 2세가 동부 진출의 전초 기지로 이 지역에 도시를 건립하고 자신의 칭호를 따서 이곳을 필라델피아라고 명명하게 되었다. 이것은 ‘필로/Philo(사랑)’와 ‘델포/Delpho(형제)’의 합성어로서 ‘형제 사랑’을 뜻한다. 이곳은 사데에서 44km 동남쪽, 서머나에서 150km 서쪽의 소아시아 루디아 성읍에 위치하며 소아시아 고원 지대와 서머나 사이의 중요한 산업도시 역할을 한다. 그 후 버가모가 로마제국에 예속됨에 따라 BC 133년경에 이 지역도 로마의 속주가 되었다. 이 지역이 포도 재배의 중심지였으므로 이곳 사람들은 주신인 디오니소스 즉 로마 신화의 박카스 신을 크게 숭배했다. BC 17년과 BC 23년경에 큰 지진이 일어나 이 도시는 대파되었고 이 도시에는 고대 유적이 남아 있지 않다.

  주 예수님: 계3:7 거룩하고(행2:27; 3:14, 말과 행동과 생각에서) 진실하며(요1:17; 14:6; 계6:10) 다윗의 열쇠를 가진 분(사22:22), 모든 것을 열고 닫는 분

  요한계시록 강해 제10과 계3:8 열린 문을 두었다(행14:27; 고전16:9; 고후2:12). 버가모의 외곽 지대에 있던 필라델피아는 전초 기지 성격의 도시였다. 즉 그리스시대에는 루디아 동부 지역을 상대로 한 그리스 문화 및 언어의 전파를 담당했고 기독교 시대에는 부루기아의 이교도들을 향한 선교의 전초 기지였다. 사도 요한은 필라델피아의 이러한 성격을 간파하여 “내가 네 앞에 열린 문을 두었으니 아무도 그것을 닫지 못하리라”(3:8)라고 했다. 여기서 열린 문이란 브루기아, 루디아 등을 향한 선교사업의 기회를 암시한 말로 기독교 사회의 끊임없는 도전과 기회를 향해 열려 있는 문을 말한 것이다. 그분이 열쇠로 열었으므로(3:7) 아무도 닫지 못한다. 적은 힘: 힘이 약하든지 수가 적든지, 내 이름을 부인하지 않았다: 끌려가서 배반하지 않았다. 계3:9 사탄의 회당에 속한 자들, 유대인들이라 하나 아닌 자들이 있음. 서머나 교회와 마찬가지로 필라델피아의 기독교인들은 이 지역에 거주하는 유대인들에 의해 고난을 받았다(3:9). 실제로 이들은 사탄의 자녀들이다. 그들이 무릎 꿇고 경배하게 함 계3:10 나의 인내의 말(살전1:3)을 지켰다. 믿음 생활에는 인내가 필요하다. I will keep thee from the hour of temptation… keep from: 하지 못하게 막는 것이다. I kept him from going(그를 가지 못하게 막았다) 시간 속에서 너를 지키는 것이 아니라 시간에 들어가지 못하게 지키는 것이다. 즉 시간을 면하게하는 것이다. 온 세상에 임하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시험하는 시간: 7년 환난기, 온 세상의 환난(계6-19장; 계6:10; 8:13; 13:8 등) 교회는 결코 거기에 들어가지 않는다(살전5:9). 3:11과 연결됨(내가 속히 온다) 계시록의 일곱 교회는 시대에 따른 교회의 변화를 나타내지 않는다. 필라델피아 다음에 라오디게아가 있다. 권고: 계3:11 네 관(딤후4:8) 계3:12 이기는 자, 성전의 기둥(영예), 나가지 않는다: 항상 거기 있다. 기둥에 하나님의 이름과 도시의 이름과 주님의 이름이 기록된다. 새 이름: 새로운 관계를 위한 이름 계3:13 귀

  라오디게아 교회에 보내는 편지(계3:14-22) 라오디게아는 브루기아의 리쿠스 계곡에 위치한 부유한 상업도시로서 알렉산더 대왕이 죽은 후 안티오쿠스 2세가 자기의 부인인 라오디게의 이름을 따서 그곳을 라오디게아라고 불렀다. 여러 개의 라오디게아가 있었는데 이것은 브루기아와 루디아 사이에 있던 도시이다. 이곳은 처음에는 별로 중요하지 않은 도시였으나 로마가 BC 190년경에 아시아(Asia) 지방을 만들면서부터 중요한 도시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이곳은 고급 검은 양털과 브루기아 산 안약 가루 등으로 유명했다. 이곳에는 물이 귀하여 북쪽으로 6.5Km 떨어진 히에라폴리스에서 수로를 통해 온천물을 끌어들였다. 히에라폴리스에서 수도관을 통해 흘러온 온천물은 이곳에 도착하면 식어서 덥지도 차지도 않는 물이 되었다. 또한 이 물은 광물질이 섞여 있어 마시기에 부적당함으로 입에서 토하여 내겠다는 선언과 일치하고 있다.

  주 예수님: 계3:14 아멘(진실하다, 고후1:20; 계22:21), 신실하고 진실한 증인(다시 한 번 아멘 강조), 미지근한 라오디게아와 비교함 하나님의 창조를 시작하신 분(골1:15-16), of의 용례 계3:15 네가 차갑지도 않고 뜨겁지도 않다. 믿는다고 하면서 열정이 없다. 늘 그대로다(3:17). 계3:16 토해 낸다. 미워한다. 계3:17 아무것도 부족한 것이 없다(눅12:19). 벌거벗은 임금님 네가 차갑지도 않고 뜨겁지도 않다. 계3:18 counsellor(사9:6), 불로 정제한 금, 흰옷, 안약 계3:19 히12:6, 잠3:12 계3:20 교회에게 주는 말, 친밀함을 주는 말 계3:21 주님과 함께 영광과 승리를 나눈다(마19:28; 계2:26-27; 롬8:17). 주님의 이김과 왕좌에 앉음(빌2:6-11) 일곱 교회 요약: 개인에게 적용해야 한다. 에베소: 첫사랑, 니골라당 서머나: 핍박받는 교회 버가모: 우상숭배, 음행(발람), 니골라당 두아디라: 우상숭배, 음행(이세벨) 사데: 죽은 교회 필라델피아: 신실한 교회, 교회는 환난기에 들어가지 않음 라오디게아: 미지근한 교회, 주님이 토하는 교회 주님은 모든 교회에게 다시 기회를 주신다. 돌이켜서 처음 사랑을 회복하고 믿음의 행위를 해야 한다.

휴거와 지상재림간 칠년 간격의 필요성

제목:휴거와 지상재림간 칠년 간격의 필요성(교회의 환난전 휴거 이유#2)
말씀:전윤근목사 본문:계19:7-10
 성경에 계시된 예수님의 재림의 사건은 공중재림인 휴거와 지상재림으로 나누어 진다. 휴거와 지상재림 사이에 7년이라는 간격이 있는데 다니엘의 칠십 이레중 한 이레(단9:27)에서 비롯된 것이며 이때문에 성경에 나오는 어떤 미래의 사건들은 반드시 이간격이 있어야만 일어나게 되는 매우 중요한 뜻을 지니고 있다. 다시 말하면 만약 이 간격이 없었더라면 중요한 다른 사건이 일어날 수 없다는 말이다. 이렇게 꼭 필요한 간격이 있기 때문에 비로서 교회는 이땅에 일어나게 될 환난을 통과하지 않고 그 전에 공중으로 휴거받아 올라가게 된다. 교회가 환난을 통과하게 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이간격을 무시해 버리기 때문에 앞으로 일어나게 될 중요한 성경의 사건들을 아름답게 조화를 이루는 하나님의 경륜으로 자연 스럽게 해석하기 보다는 강제로 씨나리오를 무리하게 가정하게 된다. 그러나 휴거와 지상재림 사이에 있게될 7년 동안의 간격을 성경대로 그대로 믿으면 그 중간에 일어나는 사건들이 아름 답게 서로 조화를 이루어 가는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확신하게 된다.그래서 우리는 휴거와 지상재림간 칠년 간격의 필요성에 대하여 알아보고저 한다. 그러면 이 중간에 어떠한 사건들이 일어나게 될것인가?

  첫째: 상급 심판(The Bema Judgement) (고후 5:10)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 교회가 휴거되어 올라 가면 제일 먼저 성도 각자 한사람 한사람이 하나도 빠짐없이 주님의 상급 심판대 앞에 서야 한다. 이 상급 심판을 흔히 헬라어의 bema 심판이라고 부르는데 성경 여러 곳에 기록되어있다. 1. (롬 14:10) 네가 어찌하여 네 형제를 판단하느뇨 어찌하여 네 형제를 업신여기느뇨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리라 2. (고전 3:10)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내가 지혜로운 건축자와 같이 터를 닦아 두매 다른이가 그 위에 세우나 그러나 각각 어떻게 그 위에 세우기를 조심할지니라 (고전 3:11) 이 닦아 둔 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 둘 자가 없으니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 (고전 3:12) 만일 누구든지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이 터 위에 세우면 (고전 3:13) 각각 공력이 나타날 터인데 그 날이 공력을 밝히리니 이는 불로 나타내고 그 불이 각 사람의 공력이 어떠한 것을 시험할 것임이니라 (고전 3:14) 만일 누구든지 그 위에 세운 공력이 그대로 있으면 상을 받고 (고전 3:15) 누구든지 공력이 불타면 해를 받으리니 그러나 자기는 구원을 얻되 불 가운데서 얻은 것 같으리라 3. (고전 4:2) 그리고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 (고전 4:3) 너희에게나 다른 사람에게나 판단 받는 것이 내게는 매우 작은 일이라 나도 나를 판단치 아니하노니 (고전 4:4) 내가 자책할 아무 것도 깨닫지 못하나 그러나 이를 인하여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하노라 다만 나를 판단하실 이는 주시니라 (고전 4:5) 그러므로 때가 이르기 전 곧 주께서 오시기까지 아무 것도 판단치 말라 그가 어두움에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고 마음의 뜻을 나타내시리니 그 때에 각 사람에게 하나님께로부터 칭찬이 있으리라 그런데 성경에서 이렇게 우리들과 중요한 관계를 갖고 있는 상급 심판의 사건은 예수님의 지상 재림을 세부적으로 설명하는 말씀 속에서는 전혀 발견되지 않는다. 그 대신 예수님의 지상 재림은 불신자들에게 임하는 krino심판을 가져다준다.그러므로 상급심판의 사건은 오직 교회 시대의 믿는 자들에게만 적용되는 사건이며 krino 심판은 불신자들에게만 적용되는 심판이다. 상급 심판은 휴거 되어 올라간 교회의 신부들이 주님으로 부터 자기가 이땅에 있는 동안 주님을 위해 일하고 섬겼던 것을 상급으로 받게되는 칭찬이며 저질렀던 죄와는 관련되지 않는 심판이다. (계 22:12)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의 일한대로 갚아 주리라 (고전 4:5) 그러므로 때가 이르기 전 곧 주께서 오시기까지 아무 것도 판단치 말라 그가 어두움에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고 마음의 뜻을 나타내시리니 그 때에 각 사람에게 하나님께로부터 칭찬이 있으리라 이 말씀 속에서 주님의 속히 오심과 내가 줄 상이 서로 관련 지어 있는 것을 볼때 이 심판은 교회의 휴거와 지상 재림 사이의 7년 간격중에 일어나게 될 사건임을 알수있다. 성도들의 신앙 생활을 평가하는 일에는 적절한 시간이 필요하다. 그래서 휴거와 지상 재림사이 중간에 시간의 간격이 반드시 필요하다.

  둘째: 하늘에 있는 그리스도의 신부 (계 19:7) 우리가 즐거워하고 크게 기뻐하여 그에게 영광을 돌리세 어린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그 아내가 예비하였으니 (계 19:8) 그에게 허락하사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게 하셨은즉 이 세마포는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하더라 (계 19:9) 천사가 내게 말하기를 기록하라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청함을 입은 자들이 복이 있도다 하고 또 내게 말하되 이것은 하나님의 참되신 말씀이라 하기로 (계 19:10) 내가 그 발 앞에 엎드려 경배하려 하니 그가 나더러 말하기를 나는 너와 및 예수의 증거를 받은 네 형제들과 같이 된 종이니 삼가 그리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 경배하라 예수의 증거는 대언의 영이라 하더라 위에 이미 언급한 상급 심판과 공동으로 계시록19:7-10절 말씀은 신부인 교회가 신랑인 예수님을 만나 결혼할 준비 즉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즉 성도들의 옳은 행실”을 마친 교회인 신부에 대하여 말씀하고있다. 여기에서 신부들은 이미 주님과 함께 지상으로 내려갈 준비를 마쳤다.(계19:11-18) . 그러므로 이것을 준비하기 위해서는 휴거와 지상 재림사이의 적절한 간격이 반드시 필요하다. 이것을 위해서는 반드시 환난 전에 교회는 하늘로 휴거 되어 올라와 있어야 한다. 계19장에서 설명하고 있는 방법대로 준비하기 위해서는 교회가 환난 전에 이미 하늘에 올라와 있어야 한다. 분명히 똑 같은 사건에 대하여 신부들의 준비와 상급 심판은 서로 다른 실례를 사용하고있다. 상급 심판은 심판의 절차에 촛점을 두고 있으며, 신부들의 준비는 심판의 결과에 촛점을 맟추고 있다. 혼인식은 예수님께서 신부들과 같이 영광스런 지상 재림(계19:11-16)을 하시기 전에 하늘에서 이루어 진다. (계19: 7-9)

  셋째: 하늘에 있는 이십 사 장로들(계4:1-5:14) (계 4:1)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하늘에 열린 문이 있는데 내가 들은 바 처음에 내게 말하던 나팔소리 같은 그 음성이 가로되 이리로 올라 오라 이 후에 마땅히 될 일을 내가 네게 보이리라 하시더라 (계 4:2) 내가 곧 성령에 감동하였더니 보라 하늘에 보좌를 베풀었고 그 보좌 위에 앉으신 이가 있는데 (계 4:3) 앉으신 이의 모양이 벽옥과 홍보석 같고 또 무지개가 있어 보좌에 둘렸는데 그 모양이 녹보석 같더라 (계 4:4) 또 보좌에 둘려 이십 사 보좌들이 있고 그 보좌들 위에 이십 사 장로들이 흰 옷을 입고 머리에 금 면류관을 쓰고 앉았더라 (계 4:5) 보좌로부터 번개와 음성과 뇌성이 나고 보좌 앞에 일곱 등불 켠 것이 있으니 이는 하나님의 일곱 영이라 하늘의 이십 사 보좌들 위에 앉아 있는 이십 사 장로들은 구속함을 받아 금 면류관의 상을 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이다. 구약의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와 신약의 열두 사도를 합하여 하나님의 백성들의 완성을 상징하고 있다. 이십 사 장로들가운데 휴거 받은 교회가 포함되어있다. 그러므로 교회가 환난 전에 이미 하늘로 올라와 있음이 너무나도 명백히 드러나고 있다. 또 칠년 환난 기간 동안 하늘에 올라와서 주어진 의무를 수행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휴거가 칠년 환난 전에 이루어 져야 한다는 필요성과 연대순의 간격이 강력하게 요청된다.

  넷째: 이방인의 심판 (마 25:31)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 (마 25:32)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분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분별하는것 같이 하여 (마 25:33) 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 (마 25:34) 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하라 만약 휴거와 예수님의 지상재림 사이에 칠년의 시간적인 간격이 없다면 이방인의 심판이 지상재림 후에 일어나는 것이 불가능 하게된다. 만약 모든 살아 있는 성도들이 휴거때가 아닌 지상 재림때 영광의 몸으로 변한다면어떻게 구원 받은 자와 불신자들이 서로 아직도 육신의 몸으로 있는 동안 이방인의 심판때에 서로 분리 될수 있단 말인가? 이것은 불가능 한 일이다. 이에 대한 해답은 오직 환난 전에 휴거 받아 영광의 몸으로 변화되는 공중재림과 지상재림 사이에 적어도 7년이라는 시간적인 간격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비로서 가능케 되다. 만약 영광의 몸으로 변하게 되는 사건이 지상 재림때 이루어 진다면 목자가 양과 염소를 분별하는것 같이 분리시키는 이방인 심판이 필요없게된다. 그러나 주님께서 이땅에 천년 왕국의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시기 전에 이미 휴거때 성도들을 영광의 몸으로 변케하시는 사건으로 이미 분리가 이루어진 상태이다. 하나님께서 휴거시에 성도들 가운데 신부를 택하여 공중으로 올려 데려 가심으로 신부와 땅에 남는 자들을 구분 시키시고, 지상 재림후에는 이방인 심판때 양과 염소를 분별하여 심판하시게 된다. 이 모든 것이 휴거와 지상 재림 사이에 칠년이라는 간격이 있기 때문에 이루어 지게 될 것이다.

  다섯째: 천년 왕국시 체위질 인구 지상재림때 칠년 환난을 통과하여 죽지 않고 믿음으로 기적적으로 살아난 순교 당하지 않은 성도들은 아직 영광의 몸으로 변치 않은 육신의 몸으로 천년왕국에 참예하여 농사도 짓고 집도 짓고 아이들도 낳고 살게 된다. (사 65:20) 거기는 날 수가 많지 못하여 죽는 유아와 수한이 차지 못한 노인이 다시는 없을 것이라 곧 백세에 죽는 자가 아이겠고 백세에 못되어 죽는 자는 저주 받은 것이리라 (사 65:21) 그들이 가옥을 건축하고 그것에 거하겠고 포도원을 재배하고 열매를 먹을 것이며 (사 65:22) 그들의 건축한데 타인이 거하지 아니할 것이며 그들의 재배한 것을 타인이 먹지 아니하리니 이는 내 백성의 수한이 나무의 수한과 같겠고 나의 택한 자가 그 손으로 일한 것을 길이 누릴 것임이며 (사 65:23) 그들의 수고가 헛되지 않겠고 그들의 생산한 것이 재난에 걸리지 아니하리니 그들은 여호와의 복된 자의 자손이요 그 소생도 그들과 함께 될 것임이라 (사 65:24) 그들이 부르기 전에 내가 응답하겠고 그들이 말을 마치기 전에 내가 들을 것이며 (사 65:25) 이리와 어린 양이 함께 먹을 것이며 사자가 소처럼 짚을 먹을 것이며 뱀은 흙으로 식물을 삼을 것이니 나의 성산에서는 해함도 없겠고 상함도 없으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그러나 만약 모든 성도들이 환난 통과후 예수님의 지상 재림때 휴거 된다는 가르침에 따른다면 육신의 몸으로 천년 왕국에 들어 가는 것이 불가능 하게 된다.그러나 교회가 환난 전에 휴거 되어 이땅에서 사라진 후에와 지상 재림 사이에는 칠년이라는 시간적 간격이 있기 때문에 충분히 가능하게 된다. 그래서 이땅에 휴거 되지 못하고 남아서 순교 당하지 않고 기적적으로 믿음을 지킨 자들은 육신의 몸으로 천년 왕국에 들어가서 땅을 채우게 되는 성경의 예언을 성취하게 된다. 이들중에 대부분은 유대인들로써 두 증인과 십사만 사천의 전도를 받아 예수님을 메시아로 늦게나마 받아 들인 구원 받은 성도들이다. 양과 염소를 분별하여 가르는 이방인 심판은 천년왕국이 시작되기 전에 이루어 져서 양은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고 오른 편에 속한 양만 천년 왕국으로 들어가 마태복음 25:34말씀이 이루어 진다. (마 25:34) 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하라


여섯째: 이스라엘의 장래 하나님께서 교회를 향하여 갖고 계신 교회시대,성령시대의 프로그램인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이 하나의 몸으로 연합되는(엡2-3) 비밀은 반드시 시간적인 간격을 필요로 하고있다. 이 간격 때문에 칠년 환난 기간 동안 이스라엘을 향하여 갖고 계신 아직 끝내지 못한 미래의 계획과 서로 분별되어 뒤 섞이지 않게 된다. 그러나 만약 교회가 칠년 환난을 일부 중간 혹은 전체를 통과한다고 믿는다면 하나님의 이스라엘과 예루살렘을 향한 프로그램을 교회와의 프로그램과 섞어버리게 된다. 하나님께서 교회를 향하여 갖고 계신 프로그램을 완성 하신 뒤에 즉 교회의 휴거 뒤에 그다음 있게 될 프로그램을 위하여 시간적 간격이 필요하다. 그래야 이스라엘을 향하신 계획을 완성하시게 된다.다니엘의 칠십 이레중 마지막 한 이레(칠년) 의 간격은 하나님께서 특별히 이스라엘과 약속하신 계획을 성취 시키시고 완성 시키시기 위해서 맨 마지막에 남겨두셨다. 우리가 한가지 분명히 해둘것은 칠십 이레는 교회를 위하여 정하신 기한이 아니라 네 백성 즉 이스라엘과 네 거룩한 성, 즉 예루살렘을 위하여 정하여진 기한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단 9:24) 네 백성과 네 거룩한 성을 위하여 칠십 이레로 기한을 정하였나니 허물이 마치며 죄가 끝나며 죄악이 영속되며 영원한 의가 드러나며 이상과 예언이 응하며 또 지극히 거룩한 자가 기름부음을 받으리라 결론 교회의 환난전 휴거는 예수님의 지상 재림 전에 교회 시대의 성도들이 영광의 몸으로 변화되어 하늘로 올라가 없어짐으로 말미암아 다른 프로그램과 구별시키는 성경적 필요를 성취시켜준다. 이 뿐 아니라 큰 문제 없이 시간적인 간격의 필요성도 동시에 성취시켜준다.교회의 환난전 휴거는 미래에 성취될 여러가지 하나님의 프로그램의 사건을 조화시켜준다. 휴거와 지상 재림사이에 칠년 동안의 시간적 간격이 필요하게 된다는 요청은 교회가 환난 전에 공중으로 휴거되어 올라가게 되는 우리의 복스러운 소망의 믿음을 더욱 강력하게 뒷받침 해준다. (눅 21:33) 천지는 없어지겠으나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눅 21:34)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그렇지 않으면 방탕함과 술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지고 뜻밖에 그 날이 덫과 같이 너희에게 임하리라 (눅 21:35) 이 날은 온 지구상에 거하는 모든 사람에게 임하리라 (눅 21:36) 이러므로 너희는 장차 올 이 모든 일을 능히 피하고 인자 앞에 서도록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으라 하시니라

하나님의 음성을 정확하게 들을 수 있는 방법은

하나님의 음성을 정확하게 들을 수 있는 방법은,
  첫째로 성경에 익숙해져야 합니다. 이것이 기본입니다.
그 전에는 여러분이 듣는 음성들을 믿을 수 없습니다. 성경을 많이 읽고 성경에 익숙해져야 합니다. 약 90% 이상의 분별력은 성경에서 나옵니다. 성경을 많이 읽어서 스펀지가 물을 흡수하는 것처럼 여러분의 생각과 머리가 성경으로 젖고 배어야 합니다. 제가 성경을 열심히 읽을 때는 하루에 다섯 시간에서 일곱 시간을 매일 읽었습니다. 그렇게 여러 해를 읽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제게 성경을 몇 번 읽었냐고 물어보는데 성경은 몇 번 읽었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몇 시간을 읽었느냐가 중요합니다. 저는 성경을 읽으면 성경이 막 깨달아지고 묵상이 되고 다른 곳을 찾아 봐야 되고 그리고 깨달은 것을 메모해야 하고 정신없이 읽다 보니까 성경 반 페이지 읽는데 두세 시간이 걸립니다. 우리는 성경을 읽는데 시간을 투자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잘 들을 수 있는 방법은 하나님의 말씀에 아주 익숙해지는 것입니다. 주님의 음성을 정확하게 들으려면 꿈이나 환상이나 예언이 열리는 것 가지고는 안 됩니다. 그것만으로는 아주 이상한 길로 갈 수 있습니다. 말씀을 다 이해하지는 못해도 말씀에 익숙해져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익숙해져야 합니다. 그래야 분별력이 생깁니다. 이 과정을 사람들이 무시하기 때문에 탈선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잘 들으려면 성경 말씀으로 머리가 채색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첫 번째인데 하루아침에 되는 것이 아니지요. 계시가 임하는 사람일수록 성경을 신물 날 정도로 봐야 합니다. 성경을 기준으로 주셨기 때문에 성경에 익숙해지지 않으면 영분별의 은사만으로는 절대 분별 못합니다. 영분별의 은사는 성경을 대체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이 주는 분별이 따로 있고, 영분별의 은사가 주는 분별이 따로 있는데 성경이 주는 분별의 기초 위에서 영분별의 은사가 있는 것이지 성경이 주는 분별이 없는 데서의 영분별의 은사는 어둠입니다. 그것은 절대로 못 믿습니다. 그러므로 반드시 말씀에 익숙해져야 합니다.

  두 번째는 겸손입니다. 자기 지혜가, 머리가 아무것도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자기 판단력과 분별력을 도저히 신뢰할 수 없음을 인식해야 합니다. 자기는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고 주님이 자기의 전부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 앞에 자기 마음이 녹을 수밖에 없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전심으로 주님을 향할 수밖에 없고, 전적으로 주님께 매달려 기도할 수밖에 없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런 겸손이 없으면 주님의 음성을 정확하게 들을 수 없습니다. 겸손이 없으면, 내 생각을 부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내 생각이 살아나서 주님이 말하는 것처럼 자기 생각이 말하게 됩니다. 내 생각과 지혜와 판단력이 아무것도 아님을 깨달아야 합니다. 자기를 부정하지 않으면 성경 읽고 깨닫는다 하지만 실은 주님이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고 전부 자기 생각이 말합니다. 그런데도 설교자들은 그것이 주님의 음성인 줄로 착각합니다. 내 생각과 판단력을 완전히 부정해서 내가 무(無)로 내려가지 않으면 꿈을 꿔도 환상을 봐도 내 생각이 꿈과 환상을 만들어냅니다. 입신까지도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자기를 완전히 불신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을 진짜 믿을 수 있습니다. 그때 지혜의 그릇이 만들어집니다. 그래야만 자기 생각이 죽어서 성경을 볼 때 자기 생각이 말하지 않고 하나님이 말씀하시게 됩니다. 우리의 생각은 다음 세 가지 중에 하나인데, 첫 번째는 내가 나한테 말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마귀가 나한테 속삭이는 것입니다. 마귀가 가룟 유다의 마음속에 예수님을 팔려는 생각을 집어넣었잖아요. 세 번째는 하나님이 나에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성령이 오시면 그가 생각나게 하시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성령이 내게 말하고 싶은 것이 있으면 내게 생각나게 하십니다. 거의 대부분 90% 이상의 성령의 음성은 생각으로 들립니다. 인도의 성자 썬다 싱이 “주님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하실 때 생각으로 말씀하신다. 우리에게 생각을 주신다.”라고 말했는데 맞는 말입니다. 그런데 내 생각이 안 죽으면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으로 위장해서 생각이 말합니다. 내 생각이 완전히 죽어야 성경을 봐도 내가 성경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이 성경에 대해서 가르치는 것을 들을 수 있습니다. 그것이 말씀에 대한 깨달음이고 진정한 말씀의 은사입니다. 진정한 말씀의 은사는 내 생각이 죽어야 오는 것입니다. 겸손하지 않는 사람은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 없습니다. 겸손하지 않는 자는 늘 자기의 음성을 듣습니다. 겸손하지 않은 자는 잠언 말씀처럼 다른 사람의 말은 듣지 않고 자기 의사를 드러내는 것만 기뻐합니다. 겸손한 사람만 다른 사람의 말을 듣습니다. 마찬가지로 겸손이 없으면 자기가 말할 뿐 주님의 음성을 듣지 못합니다. 겸손한 자만이 진짜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세 번째는 지혜와 계시의 영이신 성령을 받는 것입니다. 꿈을 꾸게 하고 환상을 보게 하고 예언을 하게 하는 요엘이 약속한 그 성령을 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성령께로부터 주어지는 ‘지혜’와 ‘구변’이 임해야 합니다.

  네 번째는 주님과 깊이 교제하는 것입니다. 주님과 친밀해지는 것입니다. 주님과 인격적으로 교제하고 친밀해져야 합니다. 기도 생활을 통해서, 마음의 정결함을 통해서,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것을 통해서, 하나님과 친밀해지는 것입니다. 단순히 기도 응답을 받기 위해서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정말로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과 친밀해지기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주님의 음성 듣는 것에 우리의 모든 성공과 실패가 달려있습니다. 이 일에 성공하는 자는 앞으로 하나님의 위대한 종이 될 것이고, 이 일에 실패하는 자는 종교적인 설교자로 인생을 끝낼 것입니다. 앞으로 하나님께서 세우실 진정한 사도, 선지자, 복음 전하는 자, 목사, 교사의 특징은 주님의 음성을 정확하게 듣는 사람들이 될 것입니다. 주님의 음성을 정확하게 듣고 사역할 때 사도, 선지자, 복음 전하는 자, 목사, 교사의 사역에 성공과 승리가 주어질 것입니다. 앞으로 교회 안에서 오중사역자들의 완전한 회복이 있을 것이고, 일당백 일당천 할 수 있는 많은 성도들이 교회 안에서 일어날 것입니다. 그리고 교회 안에 사도적인, 선지자적인 기업가(일터 사도)를 세우실 것입니다. 세상의 부(富)를 교회 안으로 가지고 올 사람들이 일어날 것입니다. 그런 통로로 쓰임 받을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오중사역자가 하나님께 선택 받는 것처럼 하나님께 선택을 받아서 사도적인, 선지자적인 기업가로 세워질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이 사람들의 특징은 주님의 음성을 정확하게 듣는 것이 될 것입니다. 각자가 자기 분야에 있어서 주님의 음성을 정확하게 들을 것입니다. 사도는 사도 사역에 관해서 정확하게 주님의 음성을 들을 것이고, 선지자는 선지자 사역에 있어서 정확하게 주님의 음성을 들을 것이고, 복음 전하는 자는 복음 전하는 일에 있어서, 목사는 목회에 있어서, 교사는 가르치는 일에 있어서 정확하게 주님의 음성을 들을 것입니다. 주님의 음성을 들어도 다 다릅니다. 그래서 사도가 사도인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선지자고, 어떤 사람은 복음 전하는 자고, 어떤 사람은 목사고, 어떤 사람은 교사인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사도적인 기업가들을 세우실 것인데 사도적인 기업가들은 사업의 영역에서 주님의 음성을 정확하게 들을 것입니다. “이 일에 투자를 해야 하느냐, 말아야 하느냐? 이 사업을 해야 하느냐, 말아야 하느냐? 이 사람을 만나야 되느냐, 안 만나야 되느냐?” 자기 판단으로 사업하는 것이 아니고 주님의 음성을 정확하게 듣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백 번을 투자하면 백 번을 다 이득을 남기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의 음성을 정확하게 듣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굉장히 중요한 것입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께서 여호수아나 기드온이나 다윗이나 왕들에게 알려주신 전술들이 사람 보기에는 허황된 것 같았지만 그들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순종했을 때 한 번도 그 전쟁에서 패한 적이 없었습니다. 승리도 보통 승리가 아니라 압승을 거두었습니다. 아군의 전사자도 거의 없었습니다. 주님의 음성을 정확하게 듣고 사역할 때 사도 사역에 압승이 주어질 것입니다. 선지자, 복음 전하는 자, 목사, 교사의 사역에도 압승이 주어질 것입니다. 성도들이 주님의 음성을 정확하게 듣고 일하게 될 때 성도 운동에서 쓰임 받는 사람들은 압승을 거두게 될 것입니다. 성도 한 명이 수천 명, 수만 명, 수십만 명을 하나님께로 이끄는 일들이 있을 것입니다. 이와 같은 일이 여러분의 사업 분야에서도 이뤄져서 압승을 거둘 것입니다. 돈을 긁어모으게 될 것입니다. 그것을 대부흥과 대추수를 위해서, 열방과 나라와 도시와 뭇 영혼들을 위해서 하나님의 전으로 가져오게 될 것입니다. 할렐루야! 여러분, 성경을 사랑하고 성경에 익숙해져야 합니다. 성경으로 머리를, 두뇌를 채색해야 합니다. 또, 하나님 앞에 철저하게 겸손해져서 자기 지혜와 판단력을 부정하고 생각이 죽어버려야 합니다. 그래야 성경을 읽을 때나 꿈을 꿀 때나 환상을 볼 때나 예언을 할 때 자기 생각이 섞이지 않습니다. 그래야 정확한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주님과 친밀해져야 합니다. 주님이 얼굴을 가리면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 없습니다. 주님과 친밀해져야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이것이 오중 사역자로, 그리스도의 용사들로, 여호수아의 군대들로, 사도적인 기업가들로 세워져서(사도적인 기업가는 탄약창, 보급부대, 군수부대 그런 역할을 하는 분들입니다.) 마지막 때 하나님께 쓰임 받을 수 있는 비결입니다. 주님의 음성을 정확하게 들을 수 있어야 오중사역자, 평신도 사역자, 사도적인 기업가로 하나님께 쓰임 받을 수 있고 자기 분야에서 성공을 거둘 수 있고 기적적으로 풍성한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꼭 기억하시고 그대로 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마지막 때 하나님께 귀하게 쓰임 받는 복된 분들이 되시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타인을 내편으로 만드는 12가지 방법

타인을 내편으로 만드는 12가지 방법
  1. 공통점을 찾아라! 누구나 자신과 우호적인 관계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쉽게 설득하기 마련이다. 우호적인 관계를 만들기 위해선 우선 공통점을 찾아내 그에 대해 칭찬하는 것이 좋다. 예를 들어 고향이 같다든지, 좋아하는 운동 선수나 연예인이 같다든지, 나이가 비슷하다든지 하는 공통점을 내세워 얘기를 풀어간다면 상대방은 곧 바로 당신에게 흥미를 느끼고 이야기에 귀를 기울일 것이다.

  2. 너무 말을 잘해도 마이너스 너무 말을 명료하게 잘하는 사람은 말 잘하는 사람’이라는 인상은 주겠지만 ‘쉽게 다가갈 수 있는 사람’이라는 생각을 심어주지는 못한다. 당신은 속으로 사람들이 자신의 이야기에 감동받고 있다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내성적이고 자신의 얘기를 잘 꺼내지 못하는 사람들은 오히려 거부감을 가질 수 있다. 따라서 조금은 저자세로 상대방에게 당신을 웅변가가 아닌 자신들과 다를 바 없는 보통 사람이라는 느낌을 준다면, 그들은 오히려 당신을 돕고자 할 것이다.

  3. 자신의 고민을 공개하라. 다른 이들을 내 편으로 만들고 싶다면 하나에서 열까지 자신의 사정을 알리는 것이 중요하다고 전문가들은 조언한다. 문제가 생기면 막연하게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기 보다는 다른 사람들과 대화를 통해 해결한다면, 자신의 상황을 객관적으로 관찰할 수 있을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기꺼이 자신의 고민을 당신에게 공개하려고 할 것이다.

  4. 유머 감각을 키우자. 유머 감각이 있는 사람은 어디서든 환영받는 존재가 된다. 그들과 함께 있으면 잠시나마 고민도 잊을 수 있고 웃음만큼 좋은 보약도 없으니사람이 따르는건 당연지사. 대인관계에서 생기는 갈등과 긴장감은 웃음으로 완화될 수 있다.매사 모든 일을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사람은 스스로 스트레스를 잘 받기 때문에 짜증스러운 사람이 될 수 있고 인간 관계도 원만하지 못하다. 따라서 조금은 가볍게 모든 것을 즐기 는 마음 자세가 요구된다.

  5. ‘No’ 할 줄 알아야 한다. 너무 마음이 약해서 다른 사람의 부탁을 거절할 줄 모르면 과다한 업무에 시달리게 된다. 그저 남들에게 잘 보이기 위해 ‘Yes’를 남발한다면 사람들은 당신을 고마운 존재가 아닌 ‘만만한 존재’로 인식해 인간관계를 해칠 수 있다. 자신이 하기 힘든 것은 미리 안된다고 거절할 줄 아는 결단력과 배짱이 필요하다

  6. 고집 센 사람들은 이렇게! 자기 고집만 내세우면 타인의 의사를 받아들일 여지가 없어진다. 따라서 고집이 센 사람들은 늘 고독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고집 센 사람들은 의외로 연약한 면을 가지고 있다. 자신의 연약한 면을 드러내기기싫어서 겉으로 센 척 고집을 피우지만 사실 이런 사람들은 의외로 외로움을 달래주면 쉽게 마음을 연다.

  7. 먼저 상대가 원하는 것을 주어라. 세상에 공짜는 없다. 내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는 나 또한 내가 가지고 있는 것 중 하나를 상대방에게 주어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이치. 그것이 크든 작든 우선 먼저 상대가 원하는 것을 준 후에 자신이 원하는 것을 구해야 한다.

  8. 푸념하지 마라. 자시 연민을 뱉지 마라. 노골적으로든 어감으로든 푸념하지 마라. 이것은 무엇보다도 당신을 실패자처럼보이게 만든다.당신이 불공평한 취급을 받았다고 불평하는 것은 상대방을 동정심이 없고 잔인하다고 비난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당신은 암암리에 상대방을 비열하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어떤 사람도 그런 말을 듣길 좋아하지 않는다. 따라서 그 사람은 거의 틀림없이 당신에 대한 자신의 태도를 정당화할 것이며 계속 똑같이 대할 것이다. 어떤 경우 불평으로 그 사람을 움직일 수 있더라도 그것은 자칫 당신을 자신들의 삶에서 불필요한 존재라고 생각하게 만들기 쉽다. 사람들은 잘 알려진 자기 연민 중독자들을 책임지기를 꺼린다.당신이 불평만 하는 사람이라면 다른 사람보다 두 배 이상 열심히 노력해야만 한다.

  9. 당신의 주장을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지 마라. 질서 정연하게 증거를 제시함으로써 당신 말을 듣는 사람들을 이끌어라. 당신의 목적을 분명하게 말하라. 그때 그 사람이 당신의 결론을 자기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도록 당신의 입장을 제시하라. 증거는 다른 사람들이 당신의 입장을 강요하고 있다고 느끼지 않도록 제시해야 한다. 상대방이 당신과 똑같은 결론을 내리게 되면 이상적일 것이다. 그러나 그 사람이 결론을 내릴 때는 자신감을 갖도록 꼭 배려해야 한다.

  10. 말하기보다 먼저 들어야 하는 이유 ‘잘 듣는 사람이 성공한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다른 사람과의 우호적인 관계를 위해서는 그 사람의 말을 잘 들어주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말을 잘 들어준다는 것은 그 얘기에, 즉 상대방에 대한 관심의 표현이기도 하므로 자신의 얘기를 잘 들어주는 사람에게는 그만큼 호감이 가게 마련이다. 또한 상대방의 이름을 부름으로써 친근감을 키우는 것 또한 중요하다. 그리고 상대방과 나를 ‘우리’라는 말로 묶는 것도 중요하다. ‘우리’라는 말이 주는 동질감과 유대감은 순식간에 상대방과 나를 하나의 끈으로 묶어줄 것이다.

  11. 자신을 설득 상대라고 가정한다. 의견 조율을 할 때 설득 당하는 입장에서 자신이 설득할 내용을 들어본다. 스스로 납득할 수 없다면 이미그 방법은 틀린 것이다. 자신감이 필요하다. 자신도 이해하지 못한 내용으로 상대를 설득한다는 건 불가능. 설득 내용을 이해하면 자신감이라는 에너지가 생기고 그것은 추진력이 되어 상대방의 마음에 영향을 미칠 것이다.

  12. 서두르지 마라. 마지막으로 다른 사람을 내 편으로 만들려고 할 때는 절대 서두르지 말아야 한다. 한꺼번에 모든 것을 이루겠다는 성급한 마음을 가지고 상대방을 대하면 무리한 전략을 세워 좋지 못한 결과를 거두게 된다. 성급한 마음을 지니면 상대의 비위를 상하거나, 거짓말을 하게 되거나, 때 이른 양보를 함으로써 손해를보게 된다. 또한 상대방의 태도를 일시에 바꾸어놓겠다는 생각에서 그의 잘못을 지적하거나 그가 생각하는 바와 상반되는 주장을 전개하면 상대방은 화가 나서 오히려 더욱 엇나가게 된다. 따라서 가능한 한 상대에 대한 비난은 삼가야 하며, 주장을 펼 때도 상대방의 생각과 유사한 부분에서부터 출발하여 점점 자신의 생각 쪽으로 이동하는 점진적인 접근법을 사용하는 것이 좋다.

참 그리스도인의 길을 찾아가는 방법 2- 진짜 그리스도인의 길

참 그리스도인의 길을 찾아가는 방법 2- 진짜 그리스도인의 길

  진짜 그리스도인은 십자가를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처음 그리스도인이 될 때, 예수님을“받아 들이는(영접하는) 행위로써”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시작한다는 주장이 맞는 말이지만, 이것이 전부는 아닙니다. 기독교는 받아들임과 거부, 긍정과 부정을 모두 포함합니다. 이것은 회심하여 처음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뿐만 아니라, 그 후에 신앙생활을 계속할 때에도 해당되는 말입니다. 즉, 그리스도인이 평생의 싸움을 다 마치고 본향으로 돌아갈 때까지 날마다 이 진리는 적용됩니다. 그리스도를 영접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그리스도가 미워하시는 것들을 모두 거부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 생활에는 부정적인 면도 있고 단점도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분명히 단점이 있습니다.

 주님은 사람들에게 자기를 따르라고 부르실 때, 결코 쉬운 길을 제시하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은 우리가 지금 전도할 때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꺼리는 것들을 주님의 제자들에게 서슴없이 말씀하셨습니다. 오늘날의 전도자들 중 주님처럼 “아무든지 나를 따르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눅 9:13)라고 말할 용기를 가진 사람이 얼마나 있겠습니까? 그리고 안타깝게도 스스로 그리스도인이라고 고백하는 수많은 사람들은 이토록 험하고 힘든 신앙의 길을 갈 수 있는 도덕적 능력 자체가 없습니다.

 오늘날의 도덕적 풍토는 우리 주님과 사도들이 가르친 엄하고 질긴 신앙을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현재 종교적 온실에서 만들어지는 허약하고 깨지기 쉬운 성도들은, 과거에 목숨을 아끼지 않고 복음을 증거하다가 죽어간 신자들에 비교하면 참으로 한심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에 대한 책임은 오늘날 교회 지도자들에게 있습니다. 그들은 사람들에게 희생 없이도 하나님을 섬길 수 있다고 말할 뿐입니다. 오늘날 교회들은 유약한 그리스도인들로 가득합니다. 그들은 무엇인가 재미있는 것들로 즐겁게 해주어야만 교회에 나옵니다.

의를 사랑하기 위해서는 죄를 미워해야 하며,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자신을 거부해야 하며, 선한 길을 따르기 위해서는 악한 길을 떠나냐 한다는 것을 그리스도인들이 언제 깨달을 것인가요? 이 세상과 친구가 되는 것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아가면서 앞으로 전진할 수록, 그리고 높이 올라갈 수록 우리 앞에는 더 많은 어려움이 놓여 있고, 우리 영혼의 공격이 더 거세어진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사람들이 별로 없습니다. 그러나 성숙한 그리스도인들은 이 사실을 알고, 어려움과 고난의 길을 즐거움으로 가며, 또한 그 고난을 해결하는 방법을 배워야 합니다. 예수님을 따라가는 길은 성령 충만한 삶이지만, 강도들이 창궐하는 숲을 통과하는 순례의 길이요, 마귀와 처절하게 싸우는 전쟁이다. 성령 충만하면 언제나 갈등이 있게 마련입니다. 때로는 자신의 본성과 사력을 다해서 싸워야 할 때도 있습니다. 우리가 완전히 승리하는 방법은 승리하신 그리스도의 길을 따르는 것입니다.


진짜는 가시면류관 복음을 믿는다 이 세상에는 극소수이지만 생사의 문제처럼 필수적인 일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 그리스도와 어떤 관계를 맺느냐 하는 것은 바로 생사가 달린 가장 큰 문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죄인들을 구하기 위하여 이 세상에 오셨으며, 우리의 공로와 상관없이 오직 그분에 의해서 구원을 받는다고 성경이 가르치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죽으심이 자동적으로 모든 사람들을 구원하는 것은 아닙니다. 거기에는 세가지 아주 중요한 질문이 적용되어야 하고, 그 질문에 어떻게 대답하는가에 따라 우리의 영생이 결정되는 것입니다. 

그 질문은, “객관적으로 제공된 구속이 어떻게 하면 주관적으로 받아들여진 구원이 되는가?”, 또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이루신 일이 어떻게 내 안에서 효력을 발휘할 수 있는가?”, 그리고 “구원을 얻기 위해서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라는 세 가지입니다. 이 중대한 질문에 대해 복음적인 그리스도인들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라”, “그리스도를 당신의 개인적인 구주로 받아들여라”, “그리스도를 영접하라”는 세 가지 답을 내 놓습니다. 그러나 이 세 가지 대답들은 사실 다 동일한 것입니다. 요즈음의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 영접”을 마치 만병통치약(?)처럼 여깁니다.

우리는 영적으로 게으릅니다. 그래서 신앙적인 문제들을 해결하려고 할 때 가장 쉬운 길을 택하려는 쪽으로 기울어지며, 그리하여 “그리스도 영접”을 만병통치 약처럼 사용하여 보편적으로 적용합니다. 심지어 그들은 순간적인 마음의 충동에 의해서, 고통이나 손해 없이, 평상시의 삶의 방식을 바꾸는 수고 없이 그리스도를 영접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이 태도는 생사를 가르는 중대한 문제를 해결하는 데 아무런 효과가 없습니다. 비유를 들어보겠습니다. 만일 과거에 이스라엘 민족이 유월절의 피를“받아들인(영접한)”후에 계속해서 애굽에서 종살이를 하겠다고 고집했다면, 탕자가 아버지의 용서를 “받아들인(영접한)” 후에 계속 먼 나라의 돼지들 틈에서 생활했다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그리스도를 영접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를 가지려면 거기에 따르는 행동의 변화가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요?

  그리스도를 영접한다는 뜻 “그리스도를 영접한다”는 것은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경험은 아주 독특한 경험으로서, 이 연합은 지적인 측면, 의지적인 측면, 그리고 감정적인 측면을 포괄합니다. 지적인 면에서 신자는 예수님이 자신의 주시요, 그리스도라고 확신합니다. 의지적인 면에서 그는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그리스도를 따르겠다고 결심합니다. 그 결과 감정적인 면에서 그는 그리스도와의 교제에서 오는 큰 기쁨을 누립니다. 그리스도를 구주로 인정할 뿐만 아니라, 주로 인정하는 데는 많은 혁명이 따릅니다. 진짜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일부분만을 받아들이지 않고 그분의 모든 것을 받아들입니다. 그리스도의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그분 이외의 다른 것들을 철저히 부정하는 것은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것은 “주의 어떠하심과 같이 우리도 세상에서 그러하니라”(요일 4:17)라는 말씀의 의미를 이해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신앙은 그리스도의 친구들을 우리의 친구들로, 그리스도의 원수들을 우리의 원수들로, 그리스도의 방법들을 우리의 방법들로, 그리스도의 거부하시는 것을 우리가 거부하는 것으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우리의 십자가로, 그리스도의 생명을 우리의 생명으로, 그리스도의 미래를 우리의 미래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솜사탕처럼 달콤한 복음”을 제시하면서 산허리 양지 바른 곳을 약속하는 것은 사람들을 잔인하게 속이는 것입니다. 소위 “쌀 크리스천”이라는 말이 있는데, 그 뜻은 물질적 이익을 위해서 기독교를 받아들이는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복음을 제시할 때,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기 위해서 치러야 할 대가를 제대로 알려주지 않기 때문에 교회들에서 많은 “쌀 크리스천”들이 양산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자신의 제자가 되겠다는 사람들에게 무엇을 약속하시나요? 그분은 죄 사함, 내적 청결, 하나님과의 화평, 영생, 성령을 선물로 받는 것, 유혹의 극복, 부활, 영화롭게 됨, 하나님과 영원히 거할 수 있는 처소들을 약속하십니다. 이런 것들은 영적인 축복이지 물질적인 것들이 아닙니다. 진짜 신앙을 가진 사람은 그리스도의 승리를 믿기 때문에, 그 승리에 참여하기 위해서 어떤 고난도 마다하지 않으며,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데 요구되는 가시 면류관도 달게 받습니다. 반면, 가짜 신앙을 가진 사람에게는 아무런 극기도, 희생도, 자아부인도 요구되지 않는 솜사탕 같은 편안한 신앙의 길만이 좋을 뿐입니다.

  진짜는 주님의“일” 보다“주님”에 우선 순위를 둔다 그리스도인은 사고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성경은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빌 2:5).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니라”(고후 13:5) 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신자의 마음은 그리스도 안에 거하시는 그리스도의 영이 지배하고 인도해야 합니다. 성령으로 충만하여 기도를 열심히 하는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마음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에, 외부 세계에 대한 그의 반응은 그리스도의 반응과 동일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는 사람들과 사물들에 대해서 그리스도처럼 생각합니다. 이렇게 될 때 모든 삶이 달콤하게 변합니다. 그러나 이런 과정이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처럼 사고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늘 생각해야 합니다.

프랑소와 마라발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에게 오직 나밖에 없는 것처럼 언제나 나를 생각하신다. 그러므로 내가 나에게 하나님밖에 없는 것처럼 언제나 하나님만을 생각할 때 비로소 나는 하나님의 은혜에 겨우 보답하는 것이다.”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사람들과 사물들에 대해서 생각할 때,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사고에 비추어서 생각해야 합니다. 성숙한 그리스도인은 어떤 것에 대해서도 직접적으로 사고하지 않습니다. 그의 사고는 먼저 하나님께 갔다가, 그분에게서 다시 그분의 피조물로 나아갑니다. 하늘을 향하는 마음을 가지려면 하늘을 향하는 사고를 해야 합니다. 우리 마음이 성화되려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사고들을 주관하셔야 합니다.

  하나님을 묵상하는 것 시대와 다양한 교리적 강조점들을 초월하여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동의하는 한 가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진지한 열망을 가진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을 자주 오랜 시간 묵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을 깊이 묵상하려면 우선 건전한 신학적 지식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성령의 감동에 의하여 기록된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자기 계시를 떠나서 그분을 찾는 것은 아무 소득이 없을 뿐 아니라 위험합니다. 이 시대에 그리스도를 진심으로 믿는 사람들 중에 위대한 성자들을 찾아보기 힘든 이유는 무엇인가요? 확신하건대 적어도 부분적으로 그 원인은, 우리가 하나님을 아는 일에 충분한 시간을 투자하려고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활동주의의 희생자? 그리스도인은 안타깝게도 잘못 이해된 “활동주의”의 희생자들입니다. 누군가 표현했듯이, 소위 “일(work)의 복음”이 교회 안으로 밀고 들어와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밀어냈습니다. “주님의 일”을 이루려고 하는 중에 종종 우리는 “일의 주님”과의 접촉을 잃어버릴 뿐만 아니라, 말 그대로 사람들을 탈진시킵니다. 자신들의 교회가 살아있는 교회라고 자랑하는 목회자들을 종종 만나게 됩니다. 그들은 주간과 야간의 여러 집회들과 행사들을 적어놓은 달력을 그 증거로 제시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그 목회자와 교인들이 잘못된 철학의 인도를 따르고 있음을 말해 줄 뿐입니다. 만일 지금 많은 교회들에서 이루어지는 활동들이 죄인을 구원하고 신자를 온전케 한다면, 그것은 큰 열매를 맺을 것입니다. 고독과 침묵의 열매들을 많이 맺을 수 있도록 시간을 할애하는 방향으로 교회의 활동들이 재편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시끄럽고 분주한 활동들이 다 중지되어 우리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하나님을 느낄 수 있게 될 때까지 하나님은 기다리십니다. 성경을 깊이 묵상하고,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을 신앙으로 받아들이십시오. 이것이 하나님을 아는 최고의 방법입니다.

  진짜 신령한 그리스도인은? 자신들이 남보다 더 거룩하다고 말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행복에 대한 갈망”은 실상 그들이 거룩하지 않다는 충분한 증거입니다. 정말로 신령한 사람은, 기쁜 일이 생겨나도 교만해지지 않을 정도로 성숙했을 때에 비로소 하나님이 우리에게 기쁨을 부어 주신다는 것을 잘 압니다. 존 웨슬리는 초기 감리교 단체들 중 한 단체의 구성원들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보기에 그들은 사랑 안에서 온전해진 것 같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어떻게 하면 거룩해질 수 있는지를 배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종교를 즐기기 위해 교회에 오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서 스스로 고난과 수치를 당하면서까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노력하는 사람은 신령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는 자신이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것을 기쁨으로 삼으며, 늘 그분의 영광을 갈망합니다. 역경과 환난은 의인과 악인에게 모두 찾아오는 것입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그것을 십자가라고 부르지만, 사실 “십자가”라는 것은 우리가 굳이 당하지 않아도 되는 환난을 그리스도를 순종하기 때문에 당하는 것입니다. 영적인 사람은 그리스도에게 순종하기를 선택함으로써 십자가를 선택하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그리스도에게 연합되고, 그리스도의 주권적 지배를 받아들이고, 그리스도의 명령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는 사람이 영성이 깊은 그리스도인입니다. 모든 것을 하나님의 저울로 달아보고, 하나님께서 단지 표면만 아니라 본질을 꿰뚫어 보고 평가하시듯이 그것들의 가치를 평가하는 것이 성령 충만한 삶의 표시입니다. 육적인 그리스도인은 본질을 보지 못하고 겉모습만 보기 때문에 그에 따라 우쭐하기도 하고 낙심하기도 합니다. 영적인 그리스도인은 곤란을 당한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관점에서 모든 것을 판단하기를 고집합니다.

 신령한 사람의 특징은 옳게 사는 것을 택하는 것입니다. 성숙한 하나님의 사람의 특징은 세상에 대해 초연한 자세를 취하는 것입니다. 세상을 사랑하며 집착하는 그리스도인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만, 성령으로 사는 사람은 이 땅에 집착하지 않고 오히려 남은 인생을 가치 있게 살며, 의로운 삶을 살기를 원합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여생의 길이를 결정하시도록 맡기고 평안을 누리며 삽니다. 성령이 충만한 그리스도인의 또 다른 특징은 다른 사람들이 발전할 수 있도록 자신을 기꺼이 희생하는 것입니다.

그는 다른 그리스도인들을 자신보다 낫게 여기고, 자신은 주목 받지 못해도 그들이 향상되는 것을 보고 기뻐합니다. 그의 마음에는 시기심이 없습니다. 그의 형제들이 영예를 얻을 때 그는 기뻐하는 데, 왜냐하면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뜻이며, 그 뜻이 그의 지상 천국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실 때 그도 역시 기뻐하는데,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이 기뻐하시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그보다 높아지는 것을 하나님이 기뻐하신다면 그는 자신의 낮아짐을 얼마든지 기쁨으로 받아들입니다.

  무료 교환 기독교의 교리의 뿌리는 “대속의 교리”입니다. 대속은 죄인들의 죄가 구주에게 전가된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죄인이 죄에서 벗어나 그리스도의 의를 취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 누구도 이 진리를 믿도록 강요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이 이것을 받아들이든지 받아들이지 않든지 진리는 진리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단지 시작에 불과합니다. 이런 시작 이후에 거의 모든 것은 나쁜 것을 좋은 것으로 교환하는 과정의 연속입니다. 죄가 의로 바뀐(교환된) 다음에는 “진노”가 “받아들임”으로 교환됩니다. 그 다음에 일어나는 교환은 죽음과 생명의 교환입니다.

하나님의 방법은 사람의 방법과 다릅니다. 그분은 기존의 것들을 꿰매어서 좀 더 좋은 것으로 만들어내는 방법을 사용하지 않으십니다. 그분은 인간을 새 사람으로 만듦으로써 인간을 변화시키십니다. 그분은 새 생명을 주시고 옛 사람을 파괴하는 작업에 착수 하십니다.그런데 이 단계에서 그리스도인은 약한 것을 강한 것으로 교환합니다.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니라”(고후 12:10). 사실, 가장 강한 상태에 있는 가장 순수한 성도조차 그의 회심 전과 마찬가지로 약합니다. 회심을 통해서 일어난 변화는 단지 미미한 인간의 자원이 아닌 하나님의 무한한 능력으로 살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말 그대로 그는 약한 것을 강한 것으로 교환했습니다. 물론 그 교환 후에도 그 “강함”은 그의 것이 아니다. 그 “강함”은 그가 그리스도 안에 머무는 동안 하나님으로부터 그에게 흘러 들어온 것일 뿐입니다.

  진짜 그리스도인은 신앙의 기본에 충실하다 세상을 살다 보면 참과 악을 구별하기가 참으로 힘들기 때문에 오류에서 완전히 벗어나기가 쉽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도 예외가 아니어서 생각(판단)과 행동이 오류에 빠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민한 영적 식별력을 가지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런 혼미함에서 구하기 위해 마련해 주신 모든 수단들을 충분히 이용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그 수단들은 기도, 신앙, 꾸준한 성경말씀의 묵상, 순종, 겸손, 진지한 사색, 성령님의 조명입니다. 올바른 기도와 성경에서 발견되는 하나님의 “자기 계시”를 믿는 신앙, 또 깨우침과 지식을 주는 성경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고 그 말씀에 순종하는 것은 아주 중요합니다. 또한 겸손은 아주 중요하며, 교만하면 진리를 떠나기가 쉽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사색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사색하지 않는 사람의 마음 속에는 많은 진리가 저장될 수 없을 것입니다. 성경은 지극히 높으신 분의 성도들은 진지하고 사려 깊은 사람들일 것이라고 당연시 합니다. 그러나 성령님의 내적 조명이 없는 사색은 무익할 뿐만 아니라 위험스럽습니다. 하나님께서 성령님을 주셔서 우리 마음에 빛을 비추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결코 그분 없이 살아가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진짜 그리스도인은 변화를 믿는다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인간의 성품을 완전하게 만들어 주는 신비로운 힘이 시간에게 있다고 착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그리스도인이 전혀 그리스도인답지 않게 행동하는 것을 보면 세월이 흐르면 그가 언젠가 거룩한 사람으로 변할 것이라고 믿습니다. 바보를 현인으로, 죄인을 성자로 만드는 것은 “시간” 이 아니고 “변화” 입니다. 더 정확히 말해서, 그리스도께서 사람들의 마음 속에 변화를 일으키시기 때문에 그들이 변하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박해자 사울이 변하여 하나님의 종 바울이 된 것은 시간이 만들어낸 변화가 아니었습니다. 그 변화를 이루신분은 물을 포도주로 바꾸신 그리스도이셨습니다. 젊었을 때 충동적이고 고집 센 사람이 노년에 모세나 야곱처럼 변화는 것을 볼 때 우리는 세월이 그런 변화를 가져왔다고 쉽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시간이 그렇게 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그 변화를 이룬 것입니다.

많은 죄인들은 구원의 날을 미루면서, 언제까지나 시간이 자기의 편이기를 막연히 바랍니다. 그러나 그가 실상 그리스도인이 될 가능성은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줄어들게 됩니다.우리는 “여호와를 만날만한 때에” 찾아야 합니다.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고 악한 길을, 불의한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와 회개하여야 합니다. 우리는 이제 모두 하나님께로 돌아와 회개하고, 진정한 성품의 변화를 얻고 성령의 충만하신 열매를 생애에 맺는 진짜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처음 믿을 때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인이 된 때부터 죽을 때까지 우리의 삶이 영적인 완전함을 향해 항상 전진하는 변화들을 겪으며 살아가야 합니다. 성령의 능력과 은혜를 매일 체험하며 사는 변화 있는 진짜 그리스도인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참 그리스도인의 길을 찾아가는 방법 1 - 누가 진짜 그리스도인인가?

진짜 그리스도인? 요즘처럼 기독교가 인기 있는 시대는 또 없었던 것 같습니다. 마치 명함 한 장 지니듯이, 사람들은 자신의 사업을 위하여, 사교를 위하여, 명예를 위하여, 교회에 나가고 쉽게 그리스도인이 됩니다. 그리고 교인이 된 후의 편리함을 즐깁니다. 그러나 많은 교인들은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를 모르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란 그리스도와 같은 사람, 곧 그리스도와 같은 삶을 사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적당히 세상과 어울려 세상과 같이 사는 사람이 아니고, 자신을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대가를 치르며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진짜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를 믿는 자들입니다. 자기 자신의 의견이나, 아니면 어느 인간의 학설을 따르는 자들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자기 좋은 대로 사는 자들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의 모본을 따라 살기로 작정한 자들입니다.

세상을 살기에 편리한 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원하시고 또한 제시하여 주신 길대로 사는 자들입니다. 그렇기에 그리스도인의 길과 세상의 길 사이에는 항상 투쟁이 있기 마련입니다. 믿는 자들이 예수를 구세주로 받아들일 때에는 동시에 예수를 자기의 주인이요 왕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수반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날 현대 기독교회 안에는 예수를 자기 편리한 대로, 자기 마음 내키는 대로 믿고 사는 가짜 그리스도인들로 가득 차있는 이상한 시대가 되어 버렸습니다. 어떤 교회들은 기업이 되어 가는가 하면 어떤 교회들은 사회 친목 단체나 클럽처럼 변신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이러한 시점에서 우리는 참된 그리스도인의 좌표를 다시 살펴 보는 일이 중요합니다.

과연 성경은 이 문제에 대하여 어떻게 말씀하고 있을까요? 어떠한 사람이 진짜 그리스도인일까요? 예수께서는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하여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 마태복음 7:13,14. 다시 말해서 이 말씀은 그리스도인들은 살기에 적합하지 않은 세상에 살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들이 이 세상에서 사는 일이란 참으로 많은 희생이 필요 되는 생애라는 말씀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추구하는 기쁨과 즐거움은 이 세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 있다는 말씀입니다. 마음이 거듭나서 취미와 좋아하는 것들이 바뀌어지지 않은 사람들은 그리스도인 생애를 살 수가 없다는 말씀입니다. 쉽게, 그리고 편하게 사는 길은 멸망의 길이라고 말씀하신 셈입니다.

 사도 바울도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 골로새서 3:1-3. 세상에서도 재미를 보고 하늘도 가겠다는 태도로 사는 그리스도인들은 멸망의 길을 걷고 있는 것입니다. 구원을 얻는 길에는 중간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적당히 믿는다는 사고 방식은 신앙이 아닙니다. 우리가 물려 받은 성경과 진리는 피 묻은 것들입니다. 얼마나 많은 선조들이 자기들의 생명을 바쳐가며 신앙과 진리와 그리고 표준을 고수하여 왔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빚진 자들입니다. 

한번은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길을 가시는데 어떤 사람이 질문을 하였습니다. “혹이 여짜오되 주여 구원을 얻는 자가 적으니이까?” 누가복음 13:23. 옛날이나 지금이나 인간의 궁금증은 한결같은 것을 보게 됩니다. 이에 예수님은 주님을 따르는 제자의 길,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란 어떠한 각오로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인지를 아주 명료하게 설명해 주셨습니다. “저희에게 이르시되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눅13:24) 라고 말씀 하시고는 길을 가시다가 뒤 따르는 수많은 군중들을 향하여 다시 더 자세하게 이렇게 말씀하시었습니다. “허다한 무리가 함께 갈쌔 예수께서 돌이키사 이르시되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및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고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좇지 않는 자도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너희 중에 누가 망대를 세우고자 할진대 자기의 가진 것이 준공하기까지에 족할는지 먼저 앉아 그 비용을 계산하지 않겠느냐 그렇게 아니하여 그 기초만 쌓고 능히 이루지 못하면 보는 자가 다 비웃어 가로되 이 사람이 역사를 시작하여 다 이루지 못하였다 하리라 또 어느 임금이 다른 임금과 싸우러 갈 때에 먼저 앉아 일만으로서 저 이만을 가지고 오는 자를 대적할 수 있을까 헤아리지 아니하겠느냐 만일 못할 터이면 저가 아직 멀리 있을 동안에 사신을 보내어 화친을 청할지니라. 이와 같이 너희 중에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누가복음 14:25-33. 

예수님을 따르라는 부르심은 아주 명백합니다. 예수께서는 따르기 전에 먼저 어떠한 대가를 치르어야 하는지에 대하여 분명하게 제시하여 주셨습니다. 하나님과 부모 형제 사이에 선택하여야 할 입장에 놓이게 되었을 때에 하나님을 먼저 선택하지 않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않다고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자기 자신의 정욕을 부인하고 예수를 따를 때에 자연히 짊어지고 가야 할 십자가가 따르게 됩니다. 그것은 자기 자신을 죽이는 길입니다.

그 길은 어떤 의미에서 수치스러운 일입니다. 옛날에 십자가를 지는 일이 그러했던 것처럼 말이죠! 그리스도인이란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요, 또한 주님의 축복 때문에 그것들을 소유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철저하게 이해하고 사는 사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자기의 재산이나 시간이나 재능들은 모두 주님께서 주신 것이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서 사용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따르는 자들입니다. 이러한 제자 됨의 대가에 대한 가르침이 타협되거나, 가르쳐지지 않고 망각되어 버렸을 때에 교회는 곤두박질 하게 되었고 급기야는 세상 사람들과 교인들 사이를 구분하지 못할 만큼 타락하게 된 것입니다. 어떤 한 청년이 사랑하는 애인에게 다음과 같이 편지를 썼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그대여 나는 당신을 그리워하오! 내가 당신을 찾아 만나기 위하여서는 에베레스트 산보다 더 높은 산이라도 넘어 가겠고 태평양보다 더 넓은 대양이라도 헤엄쳐 가겠소! 오, 나는 당신을 그리워하오!” 그리고는 그 편지 밑에다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고 합니다.

“추신 - 오는 수요일에 당신을 만나러 가겠소! 비가 오지 않는다면...” 얼마나 우스꽝스러운 일입니까! 그러나 실제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그렇게 살고 있지 않습니까? 입으로는 주님을 사랑하며 믿는다고 말은 하지마는 실상에 있어서는 적은 일들로 하나님을 부인하며 살고 있지 않습니까? 자신의 편안함과 세상의 재미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의 인정을 받고 싶은 욕망들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은 매일매일 예수를 배반하며 팔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교회들은 마치 예수님의 십자가를 지고 가는 사람들인 양 여전히 십자가를 자기 교회 지붕 위에 높다랗게 달아놓고 선전하며 살고 있지 아니한가요! 과연 우리는 진짜 예수를 믿는 사람들인지 다시 한번 살펴 보아야겠습니다.현대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바로 눈 앞에 두고 살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을 만나기 위하여 예비하는 생활을 살아야 하는 때에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선지자 아모스는 다음과 같이 외쳤습니다.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을 만나기를 예비하라”아모스 4:12. 우리는 하늘에서 거룩한 천사들과 이웃이 되어 살아야 할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초림하셨을 때에 그 분의 길을 예비하기 위하여 부르심을 받았던 선지자 침례 요한도 회개의 기별을 전파하였습니다. 그는 유대인들이 오시는 메시야를 마음속에 받아들일 수 있게 하기 위하여서 그들의 생애의 개혁과 부흥을 촉구하는 회개의 기별을 전하였던 것입니다. 그의 사명에 대하여 이사야 선지자는 이미 이렇게 예언해 두었습니다. “선지자 이사야의 책에 쓴 바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가로되 너희는 주의 길을 예비하라 그의 첩경을 평탄케 하라 모든 골짜기가 메워지고 모든 산과 작은 산이 낮아지고 굽은 것이 곧아지고 험한 길이 평탄하여 질 것이요 모든 육체가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보리라 함과 같으니라” 누가복음 3:4-6, 이사야 40:3-5. 그렇습니다. 산처럼 높아져 있는 우리의 교만한 마음들이 낮아져야 합니다.

골짜기처럼 깊숙하게 들어가 있는 음흉한 마음들과 이기심들이 돋아져 평평하게 되어야 합니다. 타협하며 적당하게 살아가는 굽은 마음들이 곧바로 펴져야 합니다. 그리고 돌들과 파인 곳들이 많은 길처럼, 거칠고 모나며 세상의 잔재들로 가득 찬 성품들이 치워져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오시는 길이 평탄하여 지도록 말입니다. 침례 요한은 광야에서 다음과 같이 외쳤습니다. “요한이 침례 받으러 나오는 무리에게 이르되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장차 올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 말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리라” 누가복음 3:7-9. 그리스도인들이 세상 사람들이 좋아하는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똑같이 좋아하며,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듣고 웃는 농담들과 코미디 쇼들을 보면서 같이 깔깔거리며 웃고 있다면 우리들과 그들 사이에 무슨 차이가 있겠습니까?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뒤늦을세라 유행 옷을 걸치고 다니고, 하나님의 은혜로 마음을 단장하는 대신에 더욱더 예쁘게 보이기 위하여 짙은 화장을 하느라 많은 시간들과 돈들을 낭비하면서도 우리는 과연 예수를 믿는 그리스도인이라고 스스로 자칭할 수가 있을까요? 속 사람을 단장하기 보다는 값진 패물과 장신구들, 반지, 귀고리, 팔찌, 목거리, 비싼 시계들로 몸을 치장하고 다니면서 우리는 과연 어떻게 세상을 향하여서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할 수가 있겠습니까? 파티의 좌석에서 같이 술 마시며 담배를 피우며, 성경이 하지 말라고 분부한 일들을 같이 행하면서 어찌 그리스도의 제자라고 할 수 있나요? 세상 사람들을 즐겁게 하고 몸을 흔들게 하는 그러한 유행가를 따라 부르면서 어떻게 우리가 하늘을 가고 있는 성도들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몸을 과다하게 노출 시키는 짧은 치마나 상의를 입고서 어떻게 하나님을 경배한다고 교회 문을 들어설 수가 있을까요? 그러한 옷 차림들은 예배드리는 자들을 위하여 디자인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한 옷차림들은 우상을 숭배하는 세상 사람들이 남자들의 눈을 현혹하기 위하여 만든 옷들입니다. 오늘날 교회는 성경의 표준에서 너무나 멀리 떨어져 나와 있습니다. 우리는 다시 종교 개혁이 필요한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곧 다시 오시기 때문입니다. 이 시대는 참된 회개를 촉구하는 제2의 침례 요한의 사역이 필요한 시대가 되었습니다. 마태복음 13장에는 또 다른 예수님의 호소의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여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샀느니라 또 천국은 마치 좋은 진주를 구하는 장사와 같으니 극히 값진 진주 하나를 만나매 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진주를 샀느니라” 마태복음 13:44-46. 보화가 감추인 밭의 값은 얼마였습니까? 백만불? 천만불? 아닙니다.

그 밭의 값은 그 농부가 가지고 있던 모든 것이었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진주의 비유”에서 진주의 값도 마찬가지였다. 진리와 영생의 대가는,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의 제자가 됨의 대가는 자기의 옛 생애를 완전히 다 포기하고 예수님의 길에 서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문을 좁은 문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길은 가장 즐거운 길입니다. 그 길은 가장 보람되고 행복한 길입니다. 그 길은 세상이 줄 수 없는 평안과 쉼을 주는 길입니다.그러나 그 길에는 한 가지 조건이 있는데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온유함과 겸손함을 배워야 하는 길입니다. 진리를 발견하려고 헤매던 인간이, 창조주요 구속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찾아 만나고 나면 과거에 살던 죗된 길이 얼마나 어리석게 보이는지 모릅니다. 그리고 신기루와 같은 세상이 제시하는 행복에 속임 당했던 자신을 후회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죄를 미워하게 됩니다. 그것이 거듭난 자들의 특징입니다. 그리고는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사는 영생의 길이 그렇게도 매력적으로 다가오는 것입니다.

 “전에 악한 행실로 멀리 떠나 마음으로 원수가 되었던 너희를 이제는 그의 육체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화목케 하사 너희를 거룩하고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그 앞에 세우고자 하셨으니”(골로새서 1:21,22) 라고 바울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도 베드로도 합세하여 우리들에게 이렇게 호소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의 날이 도적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 이 모든 것이 이렇게 풀어지리니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뇨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사모하라...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것을 바라보나니 주 앞에서 점도 없고 흠도 없이 평강 가운데 나타나기를 힘쓰라” 베드로 후서 3:10-12, 14.

  값비싼 은혜를 찾아서 - 은혜의 진정한 의미 - 기독교인들이 가장 즐겨 사용하는 단어가 있다면, 그것은“은혜”란 단어일 것입니다. 죄를 용서 받기 위하여, 또는 축복을 받기 위하여, 또는 모든 것의 해결책으로“은혜”가 제시되고, 기독교인들은 진정한 은혜의 의미를 모른 채, 모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수단으로 값싼 은혜를 남용(?)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리하여“은혜”란 단어는 진정한 반쪽의 의미를 잃은 채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 사용되고 있습니다. 사도시대 이후, 그리스도 교회의 성장과 함께 교회는 점점 더 세속화 되었으며, 은혜가 요구하는 대가에 대한 가르침도 점차 빛을 잃어버린 채 희미해져 갔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와 12제자들에 의해서 세워진 진리는 중세기의 종교 암흑 시대에도 소수의 사람들에 의해서 여전히 전수되고 있었습니다.

은혜란 그리스도의 초청을 포함하고 있으며, 그분의 부르심에 응하는 데에는 희생적인 대가가 지불되어야 한다는 진리를 이해하는 사람들이 남아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모든 것을 버리고, 날마다 그분의 명령을 따르기 위해서 노력하는 생애를 살았습니다. 비록 수도승 제도가 나중에는 행함으로 말미암는 의의 대표적인 예로 전락하고 말았지만, 초창기의 경건한 수도승들의 동기와 목적은 성경의 가르침에 일치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 교회에 들어오는 세속적인 정신과 값싼 은혜에 대하여 경종을 울리는 파수꾼의 역할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교회의 행정과 정치를 맡아보던 성직자들과 신부들은 수도승 제도를 교회 조직의 타락한 모습을 가리우는 가면으로 이용하였던 것입니다.


루터의 부르심 종교 개혁시대가 되자, 하나님께서는 순수한 복음인 값비싼 은혜에 대한 가르침을 회복시키기 위해서 수도승이었던 마틴 루터를 개혁자로서 선택하셨습니다. 그는 수도원 생활을 거쳐서 수도승이 되었는데, 이러한 모든 과정은 거룩하신 하나님의 섭리 하에서 이루어진 것이었습니다. 루터는 완전한 순종의 길로 그리스도를 따르기 위해서 모든 것을 버렸던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그는 참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생애를 위하여 세상이 주는 장미빛 유혹들을 거절하였습니다. 그러나 처음에는 마틴 루터 역시 수도원 생활을 통하여 개인적인 성취를 이룩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러한 그에게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의 길이 소수의 제한된 수도승들의 개인적인 성취나 공로로 이용되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보여주셨으며, 그리스도를 따르는 일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해당되는 하나님의 부르심이라는 사실을 성경을 통하여 보여주셨습니다. 영적 눈이 열린 마틴 루터는 수도승 제도가 제자들의 소박하고 겸손한 봉사로부터 벗어나 자신의 공로를 쌓으며 극단적인 영적 교만으로 빗나가는 현실을 보게 되었습니다. 세속이 수도승들의 심장부에 찾아들자, 말할 수 없는 혼란이 야기되었습니다. 세상을 버리려고 하던 수도승들이, 이제는 수도원 안에서 세상을 그리워하는 미묘한 모습으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종교계가 이처럼 바닥까지 타락할 즈음, 루터는 하나님의 은혜를 붙잡게 되었습니다. 그가 하나님의 은혜를 주장하기 시작하자, 거의 모든 수도승들이 그에 대항하여 일어섰습니다. 루터는 인류의 구원을 위하여 손을 뻗고 계신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루터는 믿음의 손을 뻗어서,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라는 사도 바울의 말씀을 붙잡았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비록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을 지라도, 우리는 믿음으로 선한 생애를 살 수 있다” 라고 말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그를 위하여 마련하여 주신 은혜는 값으로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위대한 은혜라는 사실이 그의 마음을 산산이 깨뜨렸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다시 한번 더 그물을 버리고, 그리스도를 따르게 되었습니다. 그가 처음에 수도원에 들어갔을 때, 그는 모든 것을 희생하고 버렸지만 자기 자신을 버리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는 남아있던 자아마저 버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자아를 버리게 되자, 그때까지 그를 붙잡고 있던 자신에 대한 신앙적인 평판도 하잘것없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그는 스스로 공로를 쌓으려고 애쓰는 대신에, 단순히 하나님의 은혜의 초청에 응하라는 부르심에 순종하였습니다. 루터는 “그대는 지금까지 죄를 범해 왔다. 그러나 이제 모든 것이 용서되었으니, 그대는 현재의 상태에 만족하여 머물러 있으면서, 용서가 주는 위로를 즐겨라” 라고 속삭이는 사단의 음성을 거절하였습니다. 드디어, 그는 수도원을 떠나서 세상으로 돌아갔습니다.

그가 세상으로 돌아간 것은 세상이 선하고 거룩하기 때문에 돌아간 것이 아니라, 수도원도 세상의 일부라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에 돌아갔던 것입니다. 루터가 세상으로 돌아간 사건은 세상에게 가장 큰 충격을 안겨 주었습니다. 그가 수도원에 들어갈 당시에 했던 세상의 포기는, 그가 세상으로 돌아왔을 때에 했던 자아의 포기에 비하면 어린아이의 장난에 불과한 것이었습니다. 그의 개심은 그 당시 종교계에 대한 정면 도전이었습니다. 루터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길은 세상 속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진리를 깨달았습니다. 수도원이 안전한 피신처가 될 수 없었습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일은 날마다의 삶 속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나를 따르라”라는 그리스도의 명령은 매일의 생활 속에서 완전한 순종의 형태로 나타나야 한다는 진리를 발견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삶과 세상 사람들의 삶 사이에는 끊이지 않는 투쟁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오해 받고 있는 루터의 믿음 어떤 사람들은, 마틴 루터가 깨달은 복음은 하나님의 계명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의무를 제거해 준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치명적인 오해입니다. 그들의 오해와는 반대로, 루터는 세상에 살지만 세속에 대하여 결정적인 저항을 하는 그리스도인들만이 하나님의 은혜를 통하여 거룩함에 이른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는 타락한 세상 속에서도 그리스도를 따를 수 있음을 설교하였으며, 세상에서의 삶을 통해서도 거룩한 경험을 지속할 수 있다고 가르쳤습니다. 루터가 믿었던 신앙은, 하나님께서는 죄를 의로운 것으로 인정해 주신다고 믿는 신앙이 아니라, 죄를 버린 죄인을 의인으로 인정해 주심을 믿는 신앙이었습니다. 그가 받아들인 은혜는 값비싼 은혜였습니다. 그는 자신의 모든 죄에 대해서 용서를 가져오는 것은 자신이 힘들게 쌓아나가는 공로나 희생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자비와 긍휼로 베푸시는 은혜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는 고달픈 수도승 생활로부터 해방되었지만, 이전보다 더욱 엄숙한 마음으로 그리스도의 부르심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 베푸신 값비싼 은혜를 깨달음으로써, 그리스도의 제자의 길을 위대한 확신과 믿음을 가지고 걸어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루터는, 하나님의 아들이 치르신 대가가 너무나 크기에 그것은 타락한 인류에게 은혜가 될 수 있으며, 그러한 엄청난 은혜를 바라보고 묵상하는 그리스도인마다 희생적인 대가를 치르면서 그리스도를 끝까지 따라가게 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루터가 수도원에서 매우 참담한 경험을 하고 있을 때, 그는 믿음을 통하여 모든 죄로부터의 자유와 용서를 붙잡게 되었습니다. 그는 스스로의 힘으로 결코 극복할 수 없었던 죄를 하나님의 용서하시는 은혜에 의존하여 사함을 받을 수 있다는 진리를 깨닫게 되자, 그는 그러한 은혜를 베푸시는 그리스도께 이전보다 더욱 큰 헌신과 충성을 바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한 개인적인 경험을 통해서, 루터는 하나님의 은혜는 자신의 생애 전체를 대가로 지불하는 삶을 살도록 요구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루터는 자신이 그리스도의 은혜를 깨닫는 순간, 일생 처음으로 그리스도께 완전하고 순수한 순종을 드릴 수 있었다고 고백하였습니다.

루터에게 있어서 사랑과 감사의 정신은 그로 하여금 그리스도께 완전한 헌신과 충성을 드릴 수 있도록 만들었습니다. 은혜는 그에게 그리스도 제자로서의 직분을 면제해 주는 것이 아니라, 더욱 더 열성적인 제자의 길을 걸을 수 있게 해주는 원동력이 된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바로 이것이 마틴 루터가 은혜에 대해서 깨달았던 바입니다. 루터는 오직 은혜만이 사람을 구원할 수 있다고 말하였습니다. 루터를 따르던 그의 후예들은 루터의 교리를 받아들였지만, 루터의 경험을 이해하는 일에는 실패하였으며, 루터가 했던 말만을 되풀이 하였습니다. 루터의 경험을 체험하지 못한 그의 후예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은 그리스도인들이 걷게 되는 제자의 길을 가르치는 일에 실패하였습니다. 물론, 마틴 루터는 오직 은혜를 통해서만 구원받을 수 있음을 말하였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가 그러한 설교나 가르침을 강조할 수 밖에 없었던 상황과 배경을 이해해야만 합니다.

그는 그 당시에 가장 열성적이고, 가장 엄격한 방법으로 그리스도를 따르고자 결심한 수도승들을 대상으로 설교하였다는 사실을 이해해야 합니다. 그러한 사람들의 믿음을 하나님의 은혜를 향하여 돌리고자 했던 루터의 의도를 이해해야 합니다. 혹독한 규율과 엄격한 생활을 통하여 그리스도를 따르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제자로서의 의무나 직분을 강조할 필요가 있었을까요? 대답은 분명합니다. 그 당시 루터는 수도승들에게 가장 적합한 설교를 하였을 뿐입니다. 루터는 우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선한 생애를 살 수 있다고 말하였습니다. 또한 어떤 것도 우리를 하나님 앞에서 인정받도록 만들 수 없으며, 오직“죄를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 만이 우리에게 가능성을 제공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말은 그가 수도원을 나올 때, 즉 두 번째로 모든 것을 버리고 그리스도를 따르라는 부르심에 응하면서 했던 말이라는 사실을 이해해야 합니다.

루터는 엄청난 죄로부터 사함을 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은혜에 의지하는 것이라는 진리를 깨달았습니다. 이와 같이 죄에 대한 보다 분명한 깨달음은 루터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더욱 열심히 따르게 만들었습니다. 그는 언제나 죄의 문제에 대한 해결책으로서 은혜를 바라보았지, 방종과 게으름에 대한 핑계로서 은혜를 간구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얻은 해결책은 인간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에 의해서 마련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루터를 따르던 후예들은 루터가 발견한 해결책을 자신들의 경험으로 깨닫지 못하였으며, 은혜를 거듭나지 못한 사람들의 마음을 위로하는 교리나 수단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바로 그것이 오늘날 기독교계에 가장 치명적인 타격을 주고 있는 값싼 은혜에 대한 가르침의 기초가 되었습니다.

  값 싼 은혜가 가져온 재앙들 만일 은혜가 그리스도인 신앙 생활에 있어서 한낱 지식에 불과한 것이 된다면,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모든 곳을 가게 되며, 우리가 원하는 모든 죄를 범하게 되고, 그러면서도 여전히 하나님의 용서하시는 은혜가 우리의 죄를 덮어준다고 믿게 됩니다. 본성적으로, 사람은 가장 싼 값을 주고 은혜를 얻을 수 있는 장소를 찾으려고 합니다. 본성적으로, 사람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자신의 이기적이고 세속적인 마음을 만족시켜 주는 설교를 하는 목사나 교회를 좋아하게 됩니다. 마틴 루터가 말했던 오직 은혜로만 구원받는다는 말을 잘못 이해한 사람들은 이기적이고 세속적인 신앙을 붙들게 되며,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기 이전의 상태 그대로 남아 있으면서도, 여전히 하나님의 은혜가 자신을 덮어주고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살게 됩니다.

 은혜에 대한 잘못된 가르침으로 인하여, 교회는 깊은 세속으로 빠져들어 갔습니다. 교회와 세상 사이에 차이가 없어졌으며, 그리스도인과 세상 사람 사이에도 극적인 대조가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세상 사람처럼 이기적이고 위선적이며, 세상 사람처럼 말하고 행동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의 가치를 깨닫고 그리스도의 제자의 길을 걷고자 하는 진실한 그리스도인들이 교회 안에서 이상한 사람으로 취급 받는 상황에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오늘날에는 일주일에 한번씩 교회에 가는 것으로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의무를 충분히 수행했으며, 그것으로 자신의 죄를 용서함 받았다고 생각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대량으로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바로 이것이 은혜에 대한 잘못된 가르침이 그리스도 교회에 가져온 참상입니다. 이제, 사람들은 더 이상 그리스도를 따르려고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값싼 은혜가 그들을 제자로서의 의무와 직분으로부터 해방시켰으며, 그리스도를 따르는 길에 나타나는 필연적인 대가를 면제하여 주었기 때문입니다.

지식으로만 이해하는 값싼 은혜는 사람들로 하여금 가장 싼 값을 치르고 그리스도를 따라가도록 만들고 있습니다. 우리는 값싼 은혜의 가르침이 만들어 놓은 결과들을 보면서 엄숙한 두려움을 느껴야 합니다. 누가 값싼 은혜의 가르침 때문에 멸망으로 들어가는 영혼들에 대한 책임을 질 것인가요? 매우 미묘하고 혼돈시키는 기만이 여기 있는데, 값싼 은혜를 믿는 사람들과 값비싼 은혜를 믿는 사람들이 공히“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된다”고 주장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를 잘못 이해하거나, 그것을 개인적으로 체험하지 못할 때, 그리스도인의 신앙이 크게 빗나갈 수 있다는 사실을 깊이 이해해야만 합니다. 오늘날, 루터의 의도와는 달리 그의 말이 정반대의 의미로 해석되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깊은 절망마저 느끼게 됩니다. 물론, 아직도 루터와 개혁자들이 가르쳤던 값비싼 은혜에 대하여 존경심을 표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값싼 은혜의 가르침에 대항하기 위해서 일어서는 사람들은 극히 드문 것을 봅니다. 사람은 자신이 믿는 대로 된다는 것이 성경이 말하는 진리입니다.

만일 우리가 값싼 은혜의 가르침을 믿는다면, 우리는 그것이 말하는 바대로 살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값비싼 은혜를 믿는다면, 우리는 그리스도의 부르심에 감사의 정신으로 대가를 치르면서 응답하게 될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은혜를 가장 값싸고 쉬운 것으로 만드는 것이 루터의 후예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하는 듯 합니다. 그들은 은혜를 어떻게 하면 쉽고 간편하며 값싸게 만들 수 있을까를 위해서 골몰하는 듯 보입니다. 그래서 오늘날, 루터의 가르침을 지지한다고 공언하는 사람들의 대다수가 그리스도인은 십자가를 지고 그리스도를 따라가야 된다고 믿는 사람들을 율법주의자로 보게 되는 상황에까지 이르렀습니다.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발자취를 따르기 위해서 희생하고 노력하는 사람들이 극단 또는 이단으로 정죄 받는 세대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분위기 때문에, 기독교는 가장 인기 있는 종교가 되었고,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회로 개종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비록 기독교계에서 루터를 지지한다고 말하는 목사들이 가장 믿을 수 있는 성직자로 신뢰받고 있지만, 참된 제자의 직분에 대한 가르침은 희생되고 말았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마땅히 지불해야 할 대가가 너무나 싼 값으로 책정되었으며, 값싼 은혜의 가르침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교회 안에서 승리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값싼 은혜가 가져온 결과가 부메랑처럼 우리 자신들에게 돌아오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세속과 부정직으로 붕괴되어 가고 있는 커다란 교단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습니까? 그리스도인의 위선과 부도덕에 치를 떨면서 교회를 무시하는 세상 사람들의 코웃음 소리가 들리지 않나요? 수많은 사람들을 도매 값으로 침례 주며, 회개하고 진리를 확신하는 일없이 구원받았다고 자위하는 그리스도인들이 교회를 채워가고 있습니다.

마땅히 책망 받아야 할 죄인들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그들의 죄를 가리워 줄 것이라고 위로하는 무책임한 성직자들의 숫자가 날로 증가하고 있습니다. 그치지 않는 은혜의 샘을 퍼붓듯이 나누어 주고 있지만, 그리스도를 따르기 위해서 좁은 길로 들어가라는 설교는 점점 더 듣기 힘들게 되었습니다. 초기 사도 시대의 교회에서 가르쳐졌던 그러한 진리를 어디서 찾을 수 있나요? 값비싼 은혜에 감격하여 자신의 목숨을 단두대와 화형 대 위에 던졌던 선구자들의 모습을 어디서 찾을 수 있나요? 기독교계 전반에 걸쳐서 내리고 있는 값싼 은혜의 재앙이 보이지 않나요? 바로 이것이 소위 복음주의자들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교회 안에서 값싼 은혜를 가르친 결과로 내려진 재앙들입니다.

  구원을 빼앗아 가는 값 싼 은혜 아무런 양심의 가책도 없이 불순종의 생애를 살 수 있도록 교인들을 준비시키는 것이 값싼 은혜의 가르침입니다. 값싼 은혜는 그리스도인들을 세상에서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어중간한 사람들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제자로서의 직분을 잃어버렸으며, 그리스도의 헌신적인 도구가 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급기야는 하나님의 은혜로 인하여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구원이 이미 완성되었다는 말을 듣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가르침에 익숙해져 있는 사람들은 그리스도께서 지금 당신을 부르고 계신다는 말을 들을 때에 어리둥절하며 당황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값싼 은혜에 대한 가르침을 붙들고 있는 사람들은 값비싼 은혜에 대한 진리에 대하여 눈이 가리워지게 되기 때문입니다. 깊은 기만 속에서, 그들은 값싼 은혜가 자신들을 구원하여 줄 것이라고 확신하면서 살게 됩니다.

그들의 생애 속에서 제자로서의 의무와 순종의 삶을 이끌어 갈만한 실제적인 능력이 결여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자신들을 위한 구원이 이미 모두 이루어졌다고 믿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자신들의 마음 속에서 들려오는 성령의 음성을 정확하게 듣지 못하게 되며, 성령의 능력이 자신의 실제적인 생활 속에서 어떻게 역사하는지를 전혀 이해하지 못합니다. 오늘날 그리스도 교회에 있어서 은혜에 대한 오해는 계명의 행함에 대한 오해보다 훨씬 무서운 재앙을 가져오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값비싼 은혜에 대한 가르침을 올바로 이해하지 못하면 자신을 부르시는 그리스도의 음성을 듣지 못하게 됩니다. 우리는 정직한 마음으로 대다수의 교인들이 참된 제자의 길을 걷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인정해야만 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정통이라고 불리는 큰 교단에 다니는 교인들로 인정해 줄지라도, 우리가 그리스도의 부르심에 정직하게 응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참 교회에 속한 진짜 그리스도인들이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해야만 합니다. 우리는 “제자 되는 직분(discipleship)”과 “은혜”사이에 존재하는 상관 관계를 반드시 이해해야만 합니다. 우리는“무엇이 그리스도 교회를 이토록 참담하게 만들었는가?” 라는 질문에 대해서 분명한 대답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값 비싼 은혜 - 참 은혜 하나님의 참 은혜를 발견한 사람은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그들은 세상이 줄 수 없는 만족과 평화를 마음에 담고서 살아갈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은혜를 통하여 사단의 권세를 이기는 사람은 겸손한 마음으로 그분의 한량없는 은혜를 찬송하게 될 것입니다. 은혜를 아는 사람들은 사람들에게 은혜로운 사람이 될 것이며,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라감으로써 세상이 흉내 낼 수 없는 자유를 만끽하게 될 것이고, 하늘 시민으로서의 확신을 자랑하지는 않지만 분명하게 인식하면서 살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값비싼 은혜를 통하여 가장 가치 있는 삶을 사는 그리스도인으로 변화될 수 있다는 소식이야말로 우리 모두에게 진정한 복음이 아니겠습니까?

자존감 평가

(♥복사해서 사랑하는 가족들과 함께 해보세요.)
 점수는 0-아니다, 1-약간 그렇다, 2-대체로 그렇다, 3-그렇다
1. 나는 대체로 다른 사람보다 열등함을 느낀다 ( )
2. 나는 보통 나 스스로를 향해 따뜻함과 행복을 느낀다. ( )
3. 나는 새로운 상황을 만났을 때 걱정이 많다.( )
4. 나는 대개 내가 만나는 모든 사람을 향해 따뜻함과 우정을 느낀다.( )
5. 나는 습관적으로 내 실수나 약점에 대해 스스로 정죄한다. ( )
6. 나는 부끄러움, 책망, 죄책감, 후회로부터 자유하다.( )
7. 나는 나의 가치와 탁월함을 증명하려는 욕망이 강하다. ( )
8. 나는 살아가는데 큰 기쁨과 열정을 갖고 있다. ( )
9. 나는 다른 사람이 나에 대해 생각하고 말하는 것에 신경을 많이 쓴다. ( )
10. 나는 다른 사람들이 잘못되는 것을 고쳐주려 하지 않고 가만 놔둘 수 있다. ( )
11. 나는 인정받으려는 강한 욕구가 있다. ( )
12. 나는 대체로 정서적 불안, 갈등, 좌절로부터 자유하다. ( )
13. 패배하는 것은 보통 나를 몹시 화나게 한다.( )
14. 나는 대개 차분한 확신을 가지고 새로운 일을 기대한다. ( )
15. 나는 다른 사람을 정죄하는 경향이 있고 가끔씩 그들이 처벌 받기를 원한다. ( )
16. 나는 보통 나 스스로 생각해서 내 스스로 결정을 한다. ( )
17. 나는 자주 다른 사람들의 능력, 부, 특권 때문에 그들의 의견을 좇아가곤 한다. ( )
18. 나는 나의 행동의 결과를 기꺼이 책임진다. ( )
19. 나는 바람직한 이미지를 유지하려고 과장하고 거짓말을 하는 경향이 있다. ( )
20. 나는 나 자신의 필요와 욕구에 우선을 두고 산다. ( )
21. 나는 나의 가진 재능이나 소유, 성취를 과소평가하곤 한다. ( )
22. 나는 보통 내 자신의 의견이나 확신을 강력히 표현한다. ( )
23. 나는 습관적으로 내 실수나 패배, 좌절을 부인하거나 변명하거나 합리화한다. ( )
24. 나는 낯선 사람들 속에서도 편안하다. ( )
25. 나는 다른 사람들에 대해 자주 비판한다. ( )
26. 나는 사랑, 분노, 적대감, 증오, 기쁨 등을 표현하는데 자유롭다. ( )
27. 나는 다른 사람들의 의견, 비평, 태도에서 상처를 받는다. ( )
28. 나는 질투나 부러움 또는 의심을 경험한 적이 거의 없다. ( )
29. 나는 사람들을 즐겁게 하는데 전문가이다. ( )
30. 나는 인종적, 민족적 혹은 종교적 그룹에 편견을 갖고 있지 않다. ( )
31. 나는 "진짜 나"를 드러내기를 두려워한다. ( )
32. 나는 다른 사람에게 친근감 있고 사려깊고 너그러운 사람이다. ( )
33. 나는 종종 내 약점, 문제, 실수에 대해 다른 사람을 비난한다. ( )
34. 나는 홀로 있을 때 불안하거나 외롭고 소외감을 거의 느끼지 않다. ( )
35. 나는 강박적으로 완벽주의자이다. ( )
36. 나는 당황하거나 보답해야 한다는 생각 없이도 칭찬이나 선물을 받는다. ( )
37. 나는 먹거나 담배 피우거나 술 마시고 싶은 충동을 종종 느낀다. ( )
38. 나는 다른 사람들을 인정하고 자주 칭찬한다. ( )
39. 나는 종종 실수나 실패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새로운 시도를 피한다. ( )
40. 나는 노력하지 않고도 친구를 사귀고 유지한다. ( )
41. 나는 자주 나의 가족이나 친구의 행동 때문에 당황한다. ( )
42. 나는 내 실수나 단점, 패배를 기꺼이 인정한다. ( )
43. 나는 나의 행동, 의견, 신념을 변호할 강한 필요를 경험한다. ( )
44. 나는 패배감이나 비참함을 느끼지 않고 의견의 불일치, 거절을 받아들인다. ( )
45. 나는 확인과 동의를 강하게 필요로 한다. ( )
46. 나는 새로운 생각과 재안에 정말로 마음이 열려있다. ( )
47. 나는 관습적으로 다른 사람과 인격적 비교로 나 자신의 가치를 판단한다. ( )
48. 나는 내 마음에 와 닿는 어떤 생각을 하는데 자유롭다. ( )
49. 나는 자주 나 자신과 내 소유와 성취에 대해 떠 벌린다. ( )
50. 나는 자신의 권위를 인정하고 나 자신이 적합하다고 느껴지는 대로 행동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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짝수번호 질문의 각 점수를 더한다. 이 짝수번호 질문의 점수 합계에서 모든 홀수번호 질문의 점수의 합을 뺀다. 이 점수가 당신의 현재 자존감 지수이다.
예) 짝수 번호의 점수 37점, 홀수 번호의 점수 62점 이면 37-62= (-25점), 짝수 번호의 점수 47점, 홀수 번호의 점수20점 이면 47-20= ( +27점).

 ※ 0점이나 - 점수는 정말 심각한 수준의 자존감 결여를 나타낸다.

참고로 미국의 전형적인 대학 졸업자의 평균 점수가 22점이고, MBA(경영학박사) 출신으로 기업체에서 이사로 승진한 사람들의 평균 점수가 28점이다. 모든 사람은 노력하면 취약 수준의 자존감을 증진 시키고 자아 실현 할 수 있는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

예수님이 고난 받고 죽으신 50가지 이유 -존 파이퍼-

예수님이 고난 받고 죽으신 50가지 이유 -존 파이퍼- 
1. 하나님의 진노를 한 몸에 받으시기 위해 고난과 죽음을 당하셨습니다. (갈3:13)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우리를 속량 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롬2:25)네가 율법을 행한즉 할례가 유익하나 만일 율법을 범한즉 네 할례가 무할례가 되었느니라 (요일4:10)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2. 하늘 아버지를 기쁘시게 해드리기 위해 고난과 죽음을 당하셨습니다. (사53:4-6)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며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사53:10)여호와께서 그로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질고를 당케 하셨은즉 그 영혼을 속건제물로 드리기에 이르면 그가 그 씨를 보게 되며 그 날은 길 것이요 또 그의 손으로 여호와의 뜻을 성취하리 로다 (엡5:2)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 같이 너희고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생축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

 3. 순종을 배워 온전케 되시기 위해 고난과 죽음을 당하셨습니다. (히5:8)그가 아들이시라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히2:10)만물이 인하고 만물이 말미암은 자에게는 많은 아들을 이끌어 영광에 들어가게 하시는 일에 저희 구원의 주를 고난으로 말미암아 온전케 하심이 합당하도다 

4. 몸소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시기 위해 고난과 죽음을 당하셨습니다. (히13:20-21) 양의 큰 목자이신 우리 주 예수를 영원한 언약의 피로 죽은 자 가운데서 이끌어 내신 평강의 하나님이 모든 선한 일에 너희를 온전케 하사 자기뜻을 행하게 하시고 그앞에 즐거운 것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속에 이루시기를 원하노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 무궁토록 있을지어다 (고전15:17)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것이요 (롬6:4)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세 하려 함이니라

 5. 하나님이 죄인들에게 베푸시는 사랑과 은혜의 풍성함을나타내시기 위해 고난과 죽음을 당하셨습니다. (롬5:7)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요3:16)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엡1:7)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

6. 나를 위한 그리스도의 사랑을 나타내시기 위해 고난과 죽음을 당하셨습니다. (엡5:2)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 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재물과 생축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 (엡5:25)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 (요15:13)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나니 (갈2:20)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7. 나를 사납게 짓누르는 율법의 요구를 도말하시기 위해 고난과 죽음을 당하셨습니다. (골2:13-14)또 너희의 범죄와 육체의 무할례로 죽었던 너희를 하나님이 그와 함께 살리시고 우리에게 모든 죄를 사하시고 우리를 거스리고 우리를 대적하는 의문에 쓴 증서를 도말하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 박으시고 

8. 많은 사람의 죄를 대신 속죄하는 제물이 되시기 위해 고난과 죽음을 당하셨습니다. (막10:45)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 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엡5:2)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 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생축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 (롬3:23)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9. 나의 죄를 용서하시기 위해 고난과 죽음을 당하셨습니다. (엡1:7)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 (마26:28)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행10:43) 저에 대하여 모든 선지자도 증거하되 저를 믿는 사람들이 다 그 이름을 힘입어 죄 사함을 받는다 하였느니라 

10.내가 의롭다 함을 받을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시기 위해 고난과 죽음을 당하셨습니다. (롬5:9)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니 (롬3:24)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롬3:28)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줄 우리가 인정하노라 

11. 나의 의가 되는 순종을 이루시기 위해 고난과 죽음을 당하셨습니다. (빌2:8)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롬5:19)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것 같이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고후5:21)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빌3:9)3:9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 

12. 내가 정죄함 받지 않게 하기 위해 고난과 죽음을 당하셨습니다. (롬8:1-2)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롬8:34)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13. 구원의 조건이던 할례와 모든 의식법을 폐지하시기 위해 고난과 죽음을 당하셨습니다. (갈5:11) 형제들아 내가 지금까지 할례를 전하면 어찌하여 지금까지 핍박을 받으리요 그리하였으면 십자가의 거치는 것이 그쳤으리니 (갈6:12) 무릇 육체의 모양을 내려 하는 자들이 억지로 너희로 할례 받게 함은 저희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인하여 핍박을 면하려 함 뿐이라 (행13:38-39) 그러므로 형제들아 너희가 알 것은 이 사람을 힘입어 죄사함을 너희에게 전하는 이것이며 또 모세의 율법으로 너희가 의롭다 하심을 얻지 못하던 모든 일에도 이 사람을 힘입어 믿는 자마다 의롭다 하심을 얻는 이것이라 (갈5:1)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14. 나로 믿게 하고 나를 끝까지 보존하시기 위해 고난과 죽음을 당하셨습니다. (막14:24)가라사대 이것은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렘31:31-34)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세우리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 언약은 내가 그들의 열조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세운것과 같지 아니할 것은 내가 그들의 남편이 되었어도 그들이 내 언약을 파하였음이니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러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에 세울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것이라 그들이 다시는 각기 이웃과 형제를 가리켜 이르기를 너는 여호와를 알라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나를 앎이니라 내가 그들의 죄악을 사하고 다시는 그 죄를 기억지 아니하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렘32:40) 내가 그들에게 복을 주기 위하여 그들을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는 영영한 언약을 그들에게 세우고 나를 경외함을 그들의 마음에 두어 나를 떠나지 않게 하고

 15. 나를 거룩하고 책망 받을 것이 없는 온전한 백성을 만드시기 위해 고난과 죽음을 당하셨습니다. (히10:14) 저가 한 제물로 거룩하게 된 자들을 영원히 온전케 하셨느니라 (골1:22) 이제는 그의 육체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화목케 하사 너희를 거룩하고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그 앞에 세우고자 하셨으니 (고전5:7)5:7 너희는 누룩 없는 자인데 새 덩어리가 되기 위하여 묵은 누룩을 내어버리라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이 되셨느니라 

16.나에게 깨끗한 양심을 주시기 위해 고난과 죽음을 당하셨습니다. (히9:14)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으로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못하겠느뇨 (막7:20-23) 또 가라사대 사람에게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속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 곧 음란과 도적질과 살인과 간음과 탐욕과 악독과 속임과 음탕과 흘기는 눈과 훼방과 교만과 광패니 이 모든 악한 것이 다 속에서 나와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17. 나에게 선한 모든 것을 확보해주시기 위해 고난과 죽음을 당하셨습니다. (롬8:32)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18. 나의 도덕적 신체적 질병을 고쳐 주시기 위해 고난과 죽음을 당하셨습니다. (사53:5)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마8:16-17) 저물매 사람들이 귀신 들린 자를 많이 데리고 예수께 오거늘 예수께서 말씀으로 귀신들을 쫓아 내시고 병든 자를 다 고치시니 이는 선지자 이사야로 하신 말씀에 우리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더라 (고전15:54)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에는 사망이 이김의 삼킨바 되리라고 기록된 말씀이 응하리라 (고후5:4) 이 장막에 있는 우리가 짐 진것 같이 탄식하는 것은 벗고자 함이 아니요 오직 덧입고자 함이니 죽을 것이 생명에게 삼킨바 되게 하려 함이라

 19.믿는 모든 자들에게 영생을 주시기 위해 고난과 죽음을 당하셨습니다. (요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요3:36)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아들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

 20. 나를 이 악한 세대에서 건져 주시기 위해 고난과 죽음을 당하셨습니다. (갈1:4)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위하여 자기 몸을 드리셨으니 (고후4:4) 그 중에 이 세상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 (요17:15)1내가 비옵는 것은 저희를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오직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 

21. 나를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기 위해 고난과 죽음을 당하셨습니다. (롬5:10)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되었은즉 화목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 (롬8:7)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고후5:19) 이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저희의 죄를 저희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

 22. 나를 하나님께로 인도하시기 위해 고난과 죽음을 당하셨습니다. (벧전3:18) 그리스도께서도 한번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으니 (엡2:13)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와졌느니라 

23. 나를 그리스도의 소유로 삼으시기 위해 고난과 죽음을 당하셨습니다. (롬7:4) 그러므로 내 형제들아 너희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으니 이는 다른이 곧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이에게 가서 우리로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히게 하려 함이니라 (고전6:19-20)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행20:28) 너희는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저들 가운데 너희로 감독자를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치게 하셨느니라

 24. 내가 지성소에 담대하게 들어가도록 하기 위해 고난과 죽음을 당하셨습니다. (히10:19-20)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 (히9:11-12)히 9:11 그리스도께서 장래 좋은 일의 대제사장으로 오사 손으로 짓지 아니한 곧 이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더 크고 온전한 장막으로 말미암아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 가셨느니라 (마27:51)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고 땅이 진동하며 바위가 터지고 

25. 내가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처소가 되기 위해 고난과 죽음을 당하셨습니다. (요2:19-21)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유대인들이 가로되 이 성전은 사십 륙년 동안에 지었거늘 네가 삼 일 동안에 일으키겠느뇨 하더라 그러나 예수는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마12:6)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성전보다 더 큰이가 여기 있느니라 (딤전2:5) 2:5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 

26. 구약의 제사제도를 폐지하고 영원한 대제사장이 되시기 위해 고난과 죽음을 당하셨습니다. (히7:23-27) 저희 제사장 된 자의 수효가 많은 것은 죽음을 인하여 항상 있지 못함이로되 예수는 영원히 계시므로 그 제사 직분도 갈리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서 저희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이러한 대제사장은 우리에게 합당하니 거룩하고 악이 없고 더러움이 없고 죄인에게서 떠나 계시고 하늘보다 높이 되신 자라 저가 저 대제사장들이 먼저 자기 죄를 위하고 다음에 백성의 죄를 위하여 날마다 제사 드리는 것과 같이 할 필요가 없으니 이는 저가 단번에 자기를 드려 이루셨음이니라 (히9:24-26)히 9:24 그리스도께서는 참 것의 그림자인 손으로 만든 성소에 들어가지 아니하시고 오직 참 하늘에 들어가사 이제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 앞에 나타나시고 대제사장이 해마다 다른 것의 피로써 성소에 들어가는 것 같이 자주 자기를 드리려고 아니하실찌니 그리하면 그가 세상을 창조할 때부터 자주 고난을 받았어야 할 것이로되 이제 자기를 단번에 제사로 드려 죄를 없게 하시려고 세상 끝에 나타나셨느니라 (히10:11-12) 제사장마다 매일 서서 섬기며 자주 같은 제사를 드리되 이 제사는 언제든지 죄를 없게 하지 못하거니와 오직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사

 27. 인간의 연약함을 동정하고 도울 수 있는 제사장이 되기 위해 고난과 죽음을 당하셨습니다. (히4:15-16)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 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히9:26) 그리하면 그가 세상을 창조할 때부터 자주 고난을 받았어야 할 것이로되 이제 자기를 단번에 제사로 드려 죄를 없게 하시려고 세상 끝에 나타나셨느니라

 28. 나를 조상의 망령된 행실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고난과 죽음을 당하셨습니다. (벧전1:18-19)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의 유전한 망령된 행실에서 구속된 것은 은이나 금 같이 없어질 것으로 한 것이 아니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이니라

 29. 나를 죄의 사슬에서 해방시키기 위해 고난과 죽음을 당하셨습니다. (계1:5-6) 또 충성된 증인으로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시고 땅의 임금들의 머리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기를 원하노라 우리를 사랑하사 그의 피로 우리 죄에서 우리를 해방하시고 그 아버지 하나님을 위하여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신 그에게 영광과 능력이 세세토록 있기를 원하노라 아멘 (히13:12) 그러므로 예수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케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느니라

 30. 내가 죄에 대해서 죽고 의에 대해서 살도록 하기 위해 고난과 죽음을 당하셨습니다. (벧전2:24)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고후5:14)5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롬6:13-14)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드리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음이니라 

31. 내가 율법에 대하여 죽고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도록 하기 위해 고난과 죽음을 당하셨습니다. (롬7:4) 그러므로 내 형제들아 너희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으니 이는 다른이 곧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이에게 가서 우리로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히게 하려 함이니라 (갈3:13)3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롬3:20-21)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32. 나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그리스도를 위해 살도록 하시려고 고난과 죽음을 당하셨습니다. (고후5:15)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 (빌3:7-9)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 

33. 십자가가 나의 큰 자랑이 되도록 하시기 위해 고난과 죽음을 당하셨습니다. (갈6:14)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고전2:1-3)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며 두려워하며 심히 떨었노라 

34. 내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 살 수 있도록 하시기 위해 고난과 죽음을 당하셨습니다. (갈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35. 결혼의 깊은 의미를 깨우쳐 주시기 위해 고난과 죽음을 당하셨습니다. (엡5:25)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 (엡5:31-32) 이러므로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찌니 이 비밀이 크도다 내가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 

36. 선한 일에 열심인 백성을 세우시기 위해 고난과 죽음을 당하셨습니다. (딤후1:9)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부르심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 뜻과 영원한 때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 (딛2:14)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구속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에 열심하는 친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엡2:8-9)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37. 겸손히 큰 사랑을 베푸신 예수님을 본받게 하시려고 고난과 죽음을 당하셨습니다. (벧전2:19-21) 애매히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오직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 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히12:3-4)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치 않기 위하여 죄인들의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자를 생각하라 너희가 죄와 싸우되 아직 피흘리기까지는 대항치 아니하고 (빌2:5-8)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38. 십자가를 지고 따르는 제자들을 세우시기 위해 고난과 죽음을 당하셨습니다. (눅9:23) 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마10:38)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 (계12:11) 또 여러 형제가 어린 양의 피와 자기의 증거하는 말을 인하여 저를 이기었으니 그들은 죽기까지 자기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였도다 

39. 나를 죽음의 공포에서 해방시켜주시기 위해 고난과 죽음을 당하셨습니다. (히2:14-15) 자녀들은 혈육에 함께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심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며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니

 40. 내가 죽을 때 즉시 주님과 함께 있도록 하시기 위해 고난과 죽음을 당하셨습니다. (살전5:10)5:10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사 우리로 하여금 깨든지 자든지 자기와 함께 살게 하려 하셨느니라 (빌1:21-23)빌 1:21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 그러나 만일 육신으로 사는 이것이 내 일의 열매일찐대 무엇을 가릴는지 나는 알지 못하노라 내가 그 두 사이에 끼였으니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욕망을 가진 이것이 더욱 좋으나 (고후5:8)5:8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그것이라 

41. 내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도록 하기 위해 고난과 죽음을 당하셨습니다. (롬6:5)6:5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 (롬8:11)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딤후2:11) 미쁘다 이 말이여, 우리가 주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함께 살 것이요

42. 사탄의 세력을 무장 해제시키기 위해 고난과 죽음을 당하셨습니다. (골2:14-15)우리를 거스리고 우리를 대적하는 의문에 쓴 증서를 도말하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 박으시고 정사와 권세를 벗어버려 밝히 드러내시고 십자가로 승리하셨느니라 (요일3:8)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니라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니라 (계12:10) 내가 또 들으니 하늘에 큰 음성이 있어 가로되 이제 우리 하나님의 구원과 능력과 나라와 또 그의 그리스도의 권세가 이루었으니 우리 형제들을 참소하던 자 곧 우리 하나님 앞에서 밤낮 참소하던 자가 쫓겨 났고 

43. 복음으로 하나님의 권능을 나타내시기 위해 고난과 죽음을 당하셨습니다. (고전1:18)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롬1:16-17)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44. 민족 간의 적대감을 무너뜨리시기 위해 고난과 죽음을 당하셨습니다. (엡2:14-16)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원수 된 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의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45.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가운데서 사람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고난과 죽음을 당하셨습니다. (계5:6-9) 내가 또 보니 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사이에 어린 양이 섰는데 일찍 죽임을 당한것 같더라 일곱 뿔과 일곱 눈이 있으니 이 눈은 온 땅에 보내심을 입은 하나님의 일곱 영이더라 어린 양이 나아와서 보좌에 앉으신 이의 오른손에서 책을 취하시니라 책을 취하시매 네 생물과 이십 사 장로들이 어린 양 앞에 엎드려 각각 거문고와 향이 가득한 금 대접을 가졌으니 이 향은 성도의 기도들이라 새 노래를 노래하여 가로되 책을 가지시고 그 인봉을 떼기에 합당하시도다 일찍 죽임을 당하사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가운데서 사람들을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시고 

46. 전 세계에서 자신의 양들을 불러 모으시기 위해 고난과 죽음을 당하셨습니다. (요11:51-52)요 11:51 이 말은 스스로 함이 아니요 그 해에 대제사장이므로 예수께서 그 민족을 위하시고 또 그 민족만 위할뿐 아니라 흩어진 하나님의 자녀를 모아 하나가 되게 하기 위하여 죽으실 것을 미리 말함이러라 (요10:16) 또 이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이 내게 있어 내가 인도하여야 할터이니 저희도 내 음성을 듣고 한 무리가 되어 한 목자에게 있으리라 (요6:37)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어 쫓지 아니하리라 (요17:6) 세상 중에서 내게 주신 사람들에게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내었나이다 저희는 아버지의 것이었는데 내게 주셨으며 저희는 아버지의 말씀을 지키었나이다

 47. 나를 최후 심판에서 구하시기 위해 고난과 죽음을 당하셨습니다. (살전1:10)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그의 아들이 하늘로부터 강림하심을 기다린다고 말하니 이는 장래 노하심에서 우리를 건지시는 예수시니라 (살후1:7-9) 환난 받는 너희에게는 우리와 함께 안식으로 갚으시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시니 주 예수께서 저의 능력의 천사들과 함께 하늘로부터 불꽃 중에 나타나실 때에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과 우리 주 예수의 복음을 복종치 않는 자들에게 형벌을 주시리니 이런 자들이 주의 얼굴과 그의 힘의 영광을 떠나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받으리로다 (히9:28) 이와 같이 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바 되셨고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죄와 상관 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번째 나타나시리라

 48. 나와 함께 기쁨을 누리시기 위해 고난과 죽음을 당하셨습니다. (히12:2)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시16:11) 주께서 생명의 길로 내게 보이시리니 주의 앞에는 기쁨이 충만하고 주의 우편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 (마5:11-12)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 (롬8:18)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49. 영광과 존귀로 관을 쓰시기 위해 고난과 죽음을 당하셨습니다. (히2:9) 오직 우리가 천사들보다 잠간 동안 못하게 하심을 입은 자 곧 죽음의 고난 받으심을 인하여 영광과 존귀로 관 쓰신 예수를 보니 이를 행하심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려 하심이라 (빌2:7-11)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계5:12) 큰 음성으로 가로되 죽임을 당하신 어린 양이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도다 하더라 

50. 아무리 악한 상황도 선으로 바꿔놓으신다는 것을 입증하시기 위해 고난과 죽음을 당하셨습니다. (행4:27-28)행 4:27 과연 헤롯과 본디오 빌라도는 이방인과 이스라엘 백성과 합동하여 하나님의 기름부으신 거룩한 종 예수를 거스려 하나님의 권능과 뜻대로 이루려고 예정하신 그것을 행하려고 이 성에 모였나이다(창50:20)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만민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