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7/2009

참 그리스도인의 길을 찾아가는 방법 2- 진짜 그리스도인의 길

참 그리스도인의 길을 찾아가는 방법 2- 진짜 그리스도인의 길

  진짜 그리스도인은 십자가를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처음 그리스도인이 될 때, 예수님을“받아 들이는(영접하는) 행위로써”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시작한다는 주장이 맞는 말이지만, 이것이 전부는 아닙니다. 기독교는 받아들임과 거부, 긍정과 부정을 모두 포함합니다. 이것은 회심하여 처음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뿐만 아니라, 그 후에 신앙생활을 계속할 때에도 해당되는 말입니다. 즉, 그리스도인이 평생의 싸움을 다 마치고 본향으로 돌아갈 때까지 날마다 이 진리는 적용됩니다. 그리스도를 영접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그리스도가 미워하시는 것들을 모두 거부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 생활에는 부정적인 면도 있고 단점도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분명히 단점이 있습니다.

 주님은 사람들에게 자기를 따르라고 부르실 때, 결코 쉬운 길을 제시하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은 우리가 지금 전도할 때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꺼리는 것들을 주님의 제자들에게 서슴없이 말씀하셨습니다. 오늘날의 전도자들 중 주님처럼 “아무든지 나를 따르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눅 9:13)라고 말할 용기를 가진 사람이 얼마나 있겠습니까? 그리고 안타깝게도 스스로 그리스도인이라고 고백하는 수많은 사람들은 이토록 험하고 힘든 신앙의 길을 갈 수 있는 도덕적 능력 자체가 없습니다.

 오늘날의 도덕적 풍토는 우리 주님과 사도들이 가르친 엄하고 질긴 신앙을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현재 종교적 온실에서 만들어지는 허약하고 깨지기 쉬운 성도들은, 과거에 목숨을 아끼지 않고 복음을 증거하다가 죽어간 신자들에 비교하면 참으로 한심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에 대한 책임은 오늘날 교회 지도자들에게 있습니다. 그들은 사람들에게 희생 없이도 하나님을 섬길 수 있다고 말할 뿐입니다. 오늘날 교회들은 유약한 그리스도인들로 가득합니다. 그들은 무엇인가 재미있는 것들로 즐겁게 해주어야만 교회에 나옵니다.

의를 사랑하기 위해서는 죄를 미워해야 하며,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자신을 거부해야 하며, 선한 길을 따르기 위해서는 악한 길을 떠나냐 한다는 것을 그리스도인들이 언제 깨달을 것인가요? 이 세상과 친구가 되는 것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아가면서 앞으로 전진할 수록, 그리고 높이 올라갈 수록 우리 앞에는 더 많은 어려움이 놓여 있고, 우리 영혼의 공격이 더 거세어진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사람들이 별로 없습니다. 그러나 성숙한 그리스도인들은 이 사실을 알고, 어려움과 고난의 길을 즐거움으로 가며, 또한 그 고난을 해결하는 방법을 배워야 합니다. 예수님을 따라가는 길은 성령 충만한 삶이지만, 강도들이 창궐하는 숲을 통과하는 순례의 길이요, 마귀와 처절하게 싸우는 전쟁이다. 성령 충만하면 언제나 갈등이 있게 마련입니다. 때로는 자신의 본성과 사력을 다해서 싸워야 할 때도 있습니다. 우리가 완전히 승리하는 방법은 승리하신 그리스도의 길을 따르는 것입니다.


진짜는 가시면류관 복음을 믿는다 이 세상에는 극소수이지만 생사의 문제처럼 필수적인 일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 그리스도와 어떤 관계를 맺느냐 하는 것은 바로 생사가 달린 가장 큰 문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죄인들을 구하기 위하여 이 세상에 오셨으며, 우리의 공로와 상관없이 오직 그분에 의해서 구원을 받는다고 성경이 가르치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죽으심이 자동적으로 모든 사람들을 구원하는 것은 아닙니다. 거기에는 세가지 아주 중요한 질문이 적용되어야 하고, 그 질문에 어떻게 대답하는가에 따라 우리의 영생이 결정되는 것입니다. 

그 질문은, “객관적으로 제공된 구속이 어떻게 하면 주관적으로 받아들여진 구원이 되는가?”, 또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이루신 일이 어떻게 내 안에서 효력을 발휘할 수 있는가?”, 그리고 “구원을 얻기 위해서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라는 세 가지입니다. 이 중대한 질문에 대해 복음적인 그리스도인들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라”, “그리스도를 당신의 개인적인 구주로 받아들여라”, “그리스도를 영접하라”는 세 가지 답을 내 놓습니다. 그러나 이 세 가지 대답들은 사실 다 동일한 것입니다. 요즈음의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 영접”을 마치 만병통치약(?)처럼 여깁니다.

우리는 영적으로 게으릅니다. 그래서 신앙적인 문제들을 해결하려고 할 때 가장 쉬운 길을 택하려는 쪽으로 기울어지며, 그리하여 “그리스도 영접”을 만병통치 약처럼 사용하여 보편적으로 적용합니다. 심지어 그들은 순간적인 마음의 충동에 의해서, 고통이나 손해 없이, 평상시의 삶의 방식을 바꾸는 수고 없이 그리스도를 영접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이 태도는 생사를 가르는 중대한 문제를 해결하는 데 아무런 효과가 없습니다. 비유를 들어보겠습니다. 만일 과거에 이스라엘 민족이 유월절의 피를“받아들인(영접한)”후에 계속해서 애굽에서 종살이를 하겠다고 고집했다면, 탕자가 아버지의 용서를 “받아들인(영접한)” 후에 계속 먼 나라의 돼지들 틈에서 생활했다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그리스도를 영접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를 가지려면 거기에 따르는 행동의 변화가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요?

  그리스도를 영접한다는 뜻 “그리스도를 영접한다”는 것은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경험은 아주 독특한 경험으로서, 이 연합은 지적인 측면, 의지적인 측면, 그리고 감정적인 측면을 포괄합니다. 지적인 면에서 신자는 예수님이 자신의 주시요, 그리스도라고 확신합니다. 의지적인 면에서 그는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그리스도를 따르겠다고 결심합니다. 그 결과 감정적인 면에서 그는 그리스도와의 교제에서 오는 큰 기쁨을 누립니다. 그리스도를 구주로 인정할 뿐만 아니라, 주로 인정하는 데는 많은 혁명이 따릅니다. 진짜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일부분만을 받아들이지 않고 그분의 모든 것을 받아들입니다. 그리스도의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그분 이외의 다른 것들을 철저히 부정하는 것은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것은 “주의 어떠하심과 같이 우리도 세상에서 그러하니라”(요일 4:17)라는 말씀의 의미를 이해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신앙은 그리스도의 친구들을 우리의 친구들로, 그리스도의 원수들을 우리의 원수들로, 그리스도의 방법들을 우리의 방법들로, 그리스도의 거부하시는 것을 우리가 거부하는 것으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우리의 십자가로, 그리스도의 생명을 우리의 생명으로, 그리스도의 미래를 우리의 미래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솜사탕처럼 달콤한 복음”을 제시하면서 산허리 양지 바른 곳을 약속하는 것은 사람들을 잔인하게 속이는 것입니다. 소위 “쌀 크리스천”이라는 말이 있는데, 그 뜻은 물질적 이익을 위해서 기독교를 받아들이는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복음을 제시할 때,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기 위해서 치러야 할 대가를 제대로 알려주지 않기 때문에 교회들에서 많은 “쌀 크리스천”들이 양산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자신의 제자가 되겠다는 사람들에게 무엇을 약속하시나요? 그분은 죄 사함, 내적 청결, 하나님과의 화평, 영생, 성령을 선물로 받는 것, 유혹의 극복, 부활, 영화롭게 됨, 하나님과 영원히 거할 수 있는 처소들을 약속하십니다. 이런 것들은 영적인 축복이지 물질적인 것들이 아닙니다. 진짜 신앙을 가진 사람은 그리스도의 승리를 믿기 때문에, 그 승리에 참여하기 위해서 어떤 고난도 마다하지 않으며,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데 요구되는 가시 면류관도 달게 받습니다. 반면, 가짜 신앙을 가진 사람에게는 아무런 극기도, 희생도, 자아부인도 요구되지 않는 솜사탕 같은 편안한 신앙의 길만이 좋을 뿐입니다.

  진짜는 주님의“일” 보다“주님”에 우선 순위를 둔다 그리스도인은 사고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성경은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빌 2:5).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니라”(고후 13:5) 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신자의 마음은 그리스도 안에 거하시는 그리스도의 영이 지배하고 인도해야 합니다. 성령으로 충만하여 기도를 열심히 하는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마음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에, 외부 세계에 대한 그의 반응은 그리스도의 반응과 동일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는 사람들과 사물들에 대해서 그리스도처럼 생각합니다. 이렇게 될 때 모든 삶이 달콤하게 변합니다. 그러나 이런 과정이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처럼 사고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늘 생각해야 합니다.

프랑소와 마라발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에게 오직 나밖에 없는 것처럼 언제나 나를 생각하신다. 그러므로 내가 나에게 하나님밖에 없는 것처럼 언제나 하나님만을 생각할 때 비로소 나는 하나님의 은혜에 겨우 보답하는 것이다.”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사람들과 사물들에 대해서 생각할 때,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사고에 비추어서 생각해야 합니다. 성숙한 그리스도인은 어떤 것에 대해서도 직접적으로 사고하지 않습니다. 그의 사고는 먼저 하나님께 갔다가, 그분에게서 다시 그분의 피조물로 나아갑니다. 하늘을 향하는 마음을 가지려면 하늘을 향하는 사고를 해야 합니다. 우리 마음이 성화되려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사고들을 주관하셔야 합니다.

  하나님을 묵상하는 것 시대와 다양한 교리적 강조점들을 초월하여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동의하는 한 가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진지한 열망을 가진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을 자주 오랜 시간 묵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을 깊이 묵상하려면 우선 건전한 신학적 지식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성령의 감동에 의하여 기록된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자기 계시를 떠나서 그분을 찾는 것은 아무 소득이 없을 뿐 아니라 위험합니다. 이 시대에 그리스도를 진심으로 믿는 사람들 중에 위대한 성자들을 찾아보기 힘든 이유는 무엇인가요? 확신하건대 적어도 부분적으로 그 원인은, 우리가 하나님을 아는 일에 충분한 시간을 투자하려고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활동주의의 희생자? 그리스도인은 안타깝게도 잘못 이해된 “활동주의”의 희생자들입니다. 누군가 표현했듯이, 소위 “일(work)의 복음”이 교회 안으로 밀고 들어와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밀어냈습니다. “주님의 일”을 이루려고 하는 중에 종종 우리는 “일의 주님”과의 접촉을 잃어버릴 뿐만 아니라, 말 그대로 사람들을 탈진시킵니다. 자신들의 교회가 살아있는 교회라고 자랑하는 목회자들을 종종 만나게 됩니다. 그들은 주간과 야간의 여러 집회들과 행사들을 적어놓은 달력을 그 증거로 제시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그 목회자와 교인들이 잘못된 철학의 인도를 따르고 있음을 말해 줄 뿐입니다. 만일 지금 많은 교회들에서 이루어지는 활동들이 죄인을 구원하고 신자를 온전케 한다면, 그것은 큰 열매를 맺을 것입니다. 고독과 침묵의 열매들을 많이 맺을 수 있도록 시간을 할애하는 방향으로 교회의 활동들이 재편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시끄럽고 분주한 활동들이 다 중지되어 우리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하나님을 느낄 수 있게 될 때까지 하나님은 기다리십니다. 성경을 깊이 묵상하고,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을 신앙으로 받아들이십시오. 이것이 하나님을 아는 최고의 방법입니다.

  진짜 신령한 그리스도인은? 자신들이 남보다 더 거룩하다고 말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행복에 대한 갈망”은 실상 그들이 거룩하지 않다는 충분한 증거입니다. 정말로 신령한 사람은, 기쁜 일이 생겨나도 교만해지지 않을 정도로 성숙했을 때에 비로소 하나님이 우리에게 기쁨을 부어 주신다는 것을 잘 압니다. 존 웨슬리는 초기 감리교 단체들 중 한 단체의 구성원들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보기에 그들은 사랑 안에서 온전해진 것 같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어떻게 하면 거룩해질 수 있는지를 배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종교를 즐기기 위해 교회에 오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서 스스로 고난과 수치를 당하면서까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노력하는 사람은 신령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는 자신이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것을 기쁨으로 삼으며, 늘 그분의 영광을 갈망합니다. 역경과 환난은 의인과 악인에게 모두 찾아오는 것입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그것을 십자가라고 부르지만, 사실 “십자가”라는 것은 우리가 굳이 당하지 않아도 되는 환난을 그리스도를 순종하기 때문에 당하는 것입니다. 영적인 사람은 그리스도에게 순종하기를 선택함으로써 십자가를 선택하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그리스도에게 연합되고, 그리스도의 주권적 지배를 받아들이고, 그리스도의 명령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는 사람이 영성이 깊은 그리스도인입니다. 모든 것을 하나님의 저울로 달아보고, 하나님께서 단지 표면만 아니라 본질을 꿰뚫어 보고 평가하시듯이 그것들의 가치를 평가하는 것이 성령 충만한 삶의 표시입니다. 육적인 그리스도인은 본질을 보지 못하고 겉모습만 보기 때문에 그에 따라 우쭐하기도 하고 낙심하기도 합니다. 영적인 그리스도인은 곤란을 당한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관점에서 모든 것을 판단하기를 고집합니다.

 신령한 사람의 특징은 옳게 사는 것을 택하는 것입니다. 성숙한 하나님의 사람의 특징은 세상에 대해 초연한 자세를 취하는 것입니다. 세상을 사랑하며 집착하는 그리스도인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만, 성령으로 사는 사람은 이 땅에 집착하지 않고 오히려 남은 인생을 가치 있게 살며, 의로운 삶을 살기를 원합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여생의 길이를 결정하시도록 맡기고 평안을 누리며 삽니다. 성령이 충만한 그리스도인의 또 다른 특징은 다른 사람들이 발전할 수 있도록 자신을 기꺼이 희생하는 것입니다.

그는 다른 그리스도인들을 자신보다 낫게 여기고, 자신은 주목 받지 못해도 그들이 향상되는 것을 보고 기뻐합니다. 그의 마음에는 시기심이 없습니다. 그의 형제들이 영예를 얻을 때 그는 기뻐하는 데, 왜냐하면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뜻이며, 그 뜻이 그의 지상 천국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실 때 그도 역시 기뻐하는데,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이 기뻐하시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그보다 높아지는 것을 하나님이 기뻐하신다면 그는 자신의 낮아짐을 얼마든지 기쁨으로 받아들입니다.

  무료 교환 기독교의 교리의 뿌리는 “대속의 교리”입니다. 대속은 죄인들의 죄가 구주에게 전가된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죄인이 죄에서 벗어나 그리스도의 의를 취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 누구도 이 진리를 믿도록 강요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이 이것을 받아들이든지 받아들이지 않든지 진리는 진리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단지 시작에 불과합니다. 이런 시작 이후에 거의 모든 것은 나쁜 것을 좋은 것으로 교환하는 과정의 연속입니다. 죄가 의로 바뀐(교환된) 다음에는 “진노”가 “받아들임”으로 교환됩니다. 그 다음에 일어나는 교환은 죽음과 생명의 교환입니다.

하나님의 방법은 사람의 방법과 다릅니다. 그분은 기존의 것들을 꿰매어서 좀 더 좋은 것으로 만들어내는 방법을 사용하지 않으십니다. 그분은 인간을 새 사람으로 만듦으로써 인간을 변화시키십니다. 그분은 새 생명을 주시고 옛 사람을 파괴하는 작업에 착수 하십니다.그런데 이 단계에서 그리스도인은 약한 것을 강한 것으로 교환합니다.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니라”(고후 12:10). 사실, 가장 강한 상태에 있는 가장 순수한 성도조차 그의 회심 전과 마찬가지로 약합니다. 회심을 통해서 일어난 변화는 단지 미미한 인간의 자원이 아닌 하나님의 무한한 능력으로 살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말 그대로 그는 약한 것을 강한 것으로 교환했습니다. 물론 그 교환 후에도 그 “강함”은 그의 것이 아니다. 그 “강함”은 그가 그리스도 안에 머무는 동안 하나님으로부터 그에게 흘러 들어온 것일 뿐입니다.

  진짜 그리스도인은 신앙의 기본에 충실하다 세상을 살다 보면 참과 악을 구별하기가 참으로 힘들기 때문에 오류에서 완전히 벗어나기가 쉽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도 예외가 아니어서 생각(판단)과 행동이 오류에 빠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민한 영적 식별력을 가지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런 혼미함에서 구하기 위해 마련해 주신 모든 수단들을 충분히 이용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그 수단들은 기도, 신앙, 꾸준한 성경말씀의 묵상, 순종, 겸손, 진지한 사색, 성령님의 조명입니다. 올바른 기도와 성경에서 발견되는 하나님의 “자기 계시”를 믿는 신앙, 또 깨우침과 지식을 주는 성경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고 그 말씀에 순종하는 것은 아주 중요합니다. 또한 겸손은 아주 중요하며, 교만하면 진리를 떠나기가 쉽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사색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사색하지 않는 사람의 마음 속에는 많은 진리가 저장될 수 없을 것입니다. 성경은 지극히 높으신 분의 성도들은 진지하고 사려 깊은 사람들일 것이라고 당연시 합니다. 그러나 성령님의 내적 조명이 없는 사색은 무익할 뿐만 아니라 위험스럽습니다. 하나님께서 성령님을 주셔서 우리 마음에 빛을 비추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결코 그분 없이 살아가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진짜 그리스도인은 변화를 믿는다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인간의 성품을 완전하게 만들어 주는 신비로운 힘이 시간에게 있다고 착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그리스도인이 전혀 그리스도인답지 않게 행동하는 것을 보면 세월이 흐르면 그가 언젠가 거룩한 사람으로 변할 것이라고 믿습니다. 바보를 현인으로, 죄인을 성자로 만드는 것은 “시간” 이 아니고 “변화” 입니다. 더 정확히 말해서, 그리스도께서 사람들의 마음 속에 변화를 일으키시기 때문에 그들이 변하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박해자 사울이 변하여 하나님의 종 바울이 된 것은 시간이 만들어낸 변화가 아니었습니다. 그 변화를 이루신분은 물을 포도주로 바꾸신 그리스도이셨습니다. 젊었을 때 충동적이고 고집 센 사람이 노년에 모세나 야곱처럼 변화는 것을 볼 때 우리는 세월이 그런 변화를 가져왔다고 쉽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시간이 그렇게 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그 변화를 이룬 것입니다.

많은 죄인들은 구원의 날을 미루면서, 언제까지나 시간이 자기의 편이기를 막연히 바랍니다. 그러나 그가 실상 그리스도인이 될 가능성은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줄어들게 됩니다.우리는 “여호와를 만날만한 때에” 찾아야 합니다.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고 악한 길을, 불의한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와 회개하여야 합니다. 우리는 이제 모두 하나님께로 돌아와 회개하고, 진정한 성품의 변화를 얻고 성령의 충만하신 열매를 생애에 맺는 진짜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처음 믿을 때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인이 된 때부터 죽을 때까지 우리의 삶이 영적인 완전함을 향해 항상 전진하는 변화들을 겪으며 살아가야 합니다. 성령의 능력과 은혜를 매일 체험하며 사는 변화 있는 진짜 그리스도인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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