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2/2011

선교의 영이신 성령님께 열려 있어야 합니다.

사도행전 13 : 1 ~ 12
* 안디옥(1절) : 지중해에서 동으로 27km 떨어진 로마의 행정구역 수리아의 수도임

안디옥 교회는 스데반의 순교를 계기로 세워진 교회였습니다(행 11:19~21절). 하나님께서는 안디옥 교회를 베이스캠프로 놀라운 선교역사를 이루어가십니다. 안디옥 교회는 어떠한 교회였으며, 어떻게 안디옥 교회 같이 될 수 있겠습니까?

선교의 영이신 성령님께 열려 있어야 합니다. 
바울의 1차 선교 여행의 기획자는 성령 하나님이셨습니다. 성령 하나님께서는 미리 준비하신 안디옥 교회를 통해 새로운 선교의 장을 여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선교의 역사에 안디옥 교회를 적극 기용하신 이유는 안디옥 교회가 복음을 잘 알고, 하나님의 뜻을 알기에 힘쓰는 교회였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평소에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고자 금식하며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고 난 후에는, 다시 그 뜻에 순종하고자 금식하고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어렵지만 기둥 같은 지도자였던 바나바와 바울을 파송하는 일에 기꺼이 순종하였습니다. 영혼 구원을 이루는 하나님의 선교 역사는 성령님이 친히 이루시되, 성령의 인도하심에 민감한 자들을 통해 이루십니다. 때문에 주님의 몸된 교회로서 믿는 우리들은 선교를 향한 성령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민감하게 깨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항상 선교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선교 역사에 순종하기 위해 서로 세워주고, 순종으로 반응하도록 격려해야 합니다. 영원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그 영원한 소명(Calling), 땅 끝까지 이르러 복음의 증인이 되는 선교적 삶을 향해 깨어있는 우리 삶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성령의 충만함으로 문제를 돌파해야 합니다. 
안디옥 교회는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바나바와 바울을 파송하였습니다. 바나바와 바울은 구브로섬 바보 지역에서 유대인 거짓 선지자요 마술사인 바예수를 만났습니다. 이 박수 엘루마(마술사)는 힘을 다해 총독 서기오 바울이 예수를 믿지 못하도록 방해하였습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 가는 길이라고 해도 모든 일이 순탄하게 이루어지는 것만은 아닙니다.

힘들게 직접 가는 인간적인 수고와 노력이 있어야 하고, 때로 사역을 방해하는 ‘바예수’와 같은 훼방꾼을 만나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낙심하여 뒤로 물러서지 말고, 사도 바울과 같이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담대하게 문제를 꾸짖고 돌파해 나가야 합니다. 그렇게 나아 갈 때, 성령의 역사가 나타나고, 사역의 열매도 풍성하게 맺히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 내 신앙 생활을 가로막고 있는 어려운 문제가 무엇입니까? 그 어려움의 문제를 인해 낙심하지 말고, 말씀과 기도로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담대하게 돌파해 나가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할 때, 지금의 바로 그 문제가 크나 큰 감사의 제목이 되고, 평생 돌아볼 때마다 기뻐하며 감사하게 될 그런 생명의 열매가 되게 될 것입니다.

기다리고 기다려라. 하나님은 당신을 잊지 않으신다!

"내가 잠시 너를 버렸으나 큰 긍휼로 너를 모을 것이요 내가 넘치는 진노로 내 얼굴을 네게서 잠시 가리웠으나 영원한 자비로 너를 긍휼히 여기리라 네 구속자 여호와의 말이니라 이는 노아의 홍수에 비하리로다 내가 다시는 노아의 홍수로 땅 위에 범람치 않게 하리라 맹세한 것같이 내가 다시는 너를 노하지 아니하며 다시는 너를 책망하지 아니하기로 맹세하였노니"(사54:7-9)

때때로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기다리도록 만드신다. 그분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성령을 받기 위해 예루살렘에서 기다리도록 하셨다(행1:4참조). 바로 그 하나님이 당신은 기다리게 하실 수도 있다. 그러나 당신을 부르신 하나님은 성실(신실)하신 분이며, 그분이 또한 이수실 것이다. 이것을 잊지 말라. 우리의 하나님은 성실하시다.

나는 당신에게 강력하게 권한다. 
믿을 수 없고 거짓되고 급변하는 세상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예수 그리스도를 신뢰하라고! 그분은 성실하신 분이며, 그분이 시작하신 것을 끝가지 이루실 것이다.

아버지시여! 우리가 믿을 수있도록 도우소서. 우리으 의심을 용서하소서. 우리의 불신앙, 우리의 의기소침 그리고 우리가 더디 믿는 것, 이런 것들을 모두 극복하게 하소서.

아버지를 의지하는 마으을 우리에게 주소서. 부모의 품에 있는 아이가 부모에게 자신은 온전히 맡기듯이 우리도 아버지께 우리를 온전히 맡기게 하소서. 이제 우리가 아버지를 믿게 하소서.

낙심한 사람들, 죄인들, 아버지를 실망시킨 그리스도인들, 절망의 문턱을 넘나드는 사람들, 너무나 견디기 힘든 상황에 처한 사람들, 이런 사람들을 위해 이제 우기가 기도합니다.

오 하나님! 아버지는 성실하시므로 우리가 실패하도록 내러벼두지 않으실 것입니다. 아버지께서 우리를 지키고 붙들어 우리에게 복을 주실 것입니다. 이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를 구해주소서. 아멘!

그 분을 따르든지,아니면 거역하든지…

초대교회 당시에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이 얼마나 큰 파장을 일으켰는지 당신은 상상할 수 있겠는가? 물론, 그 이름에는 나름대로 합당한 의미가 담겨 있었다. 하지만 또 그 이름에는 한 순간에 폭발할 수도 있는 엄청난 파괴력이 있었다.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이 드리면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따르든지 아니면 그리스도께 거역하든지 태도를 표명해야 했다.

예수님 시대의사람들과 달리 이 시대의 사람들은 분명한 태도를 보이기 싫어하는 경향이 있는데, 그것은 순진하지도 않고 직선적이지도 않고 인간적이지도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너희가 돌이켜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기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18:3)라는 예수님의 말씀에서도 알 수 있듯이, 예수님은 순진함을 인간 최고의 미덕으로 꼽으셨다.

예수님이 높이 평가하신 것은 어린아이의 무지나 더러움이나 시끄러움이 아니라 어린아이의 순진함이었다.

가식이 없고 꼬인 것이 없는 순진함은 때 묻지 않은 마음에서 나온다. 초대교회의 신자들은 그리스도에 대해 순진하 태도를 취했다. 세상 사람들은 그분의 이름을 들으면 분노했지만, 그들은 머리를 숙이며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했다.

세상 사람들과 그리스도인들 사이에는 그 토록 날카로운 대립이 있었다. 교회가 순수함을 잃지 않은 곳에서는 언제나 그런 대립이 존재했다. 어린아이처럼 그리스도를 찾는 곳에서는 언제나 그런 대립이 존재했다.<이것이그리스도인이다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