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4/2010

하나님의 사랑 4 - 하나님의 의와 자신의 의

내가 증거하노니 저희가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 모르고 자기 ()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느니라”(10:2,3).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지식(知識) 좇지 않으면 어떻게 됩니까? 그 사람은 “하나님의 의”는 알지 못한 채 자기 의()를 쌓으려고만 합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않는 것이 되고 맙니다. 사람이 하나님께 열심하는 것, 교회당 다니고 율법을 지키고 하나님을 위해 살려고 하는 열심, 그것이 바로 자기 ‘의()’입니다. 자기 열심, 자기 의로 하나님 앞에 갈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의란 무엇입니까? 인간이 하나님 앞에 갈 수 있는 길, 사람이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을 수 있는 모든 준비를 하나님 편에서 다 해 놓으셨습니다. 그 해 놓으신 일이 바로 하나님의 의입니다. 하나님의 의로 하나님 앞에 가는 것입니다. “바라던 천국 올라가 하나님 전에 뵈올 때 구주의 의를 힘입어 어엿이 앞에 서리라”는 찬송처럼, 하나님 앞에 설 때 나의 의가 아닌 구주(救主)의 의를 힘입어 하나님 앞에 섭니다. 하나님의 의가 무엇이지 모르기 때문에 자기 의를 세우려고 끝까지 열심히 하다 보니 결국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않고 것입니다.

하나님께 열심히 하다가 지옥 가는 사람도 많습니다. 하나님께 열심도 내고 지옥에도 가고, 참 이상한 일도 다 있지요. 그런데 그것이 사실입니다. 이 사실을 깨닫는 것은 우리가 구원받는 데 매우 중요합니다. 그것을 알아야 구원이 무엇인지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의 의나 열심, 율법을 지키려는 노력이나 우리의 공로로 심판과 멸망을 피할 수 없고 하나님 앞에 갈 수 없다는 것이 확실해졌을 것입니다. 이 사실을 모르면 이것을  알 때까지 이 문제를 계속 이야기해야 합니다.

울어도 못하고, 힘써도 못 하고 참아도 못한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죄인,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입니다. 수영할 줄 모르는 사람이 깊은 물에 빠진 것과 같습니다. 누가 건져주지 않는 한 죽을 가능성은 100%입니다. 꼼짝없이 죽는 것 외에 다른 길이 없습니다. 그와 같이, 하나님 편에서 우리를 지옥 운명에서 조건 없이 건져주시면 사는 것이고, 건져주지 않으시면 우리에게는 단지 멸망이 있을 뿐입니다. 하나님만이 우리를 구원하실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면 우리는 그저 구원받을 따름입니다.

구원의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罪人)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디모데전서 1:15).  

디모데전서를 비롯하여 14권의 신약성경을 기록했던 바울 사도는 본래 예수 믿는 사람을 잡아 죽이는 데 앞장섰던 사람입니다. 그래서 자기를 죄인 중에 괴수라고 한 것이며, 그런 죄인 중에 괴수도 구원받았는데 어떤 사람이 구원을 못 받겠느냐는 말입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심은 죄인을 구원하시기위함이며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마태 20:28)이었습니다.  

물에 빠져 죽기만 기다리는 사람에게 살려줄 사람이 나타나듯 예수님은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오셨다고 했는데, 그럼 죄인은 누구입니까? 죄인을 달리 표현하면 지옥 갈 사람인데 우리 각자가 지옥 갈 죄인입니다. 그러므로 죄인을 구원하려고 예수님께서 많은 세상에 오셨다는 말씀은, 바로 나를 구원하러 오셨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아무도 없고 나 혼자 있었을지라도 주님께서는 나를 구원하러 오셨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상( 있는 사람)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요한복음 3:16)라는 말씀대로, 우리 각 개개인을 위해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오셨다는 것은 결국 나를 구원하러 오셨다는 말입니다. 내가 죄인으로 태어나 온갖 죄를 지으며 살다가 죽은 후 심판을 받고 지옥 갈 운명에 있기 때문에, 나를 그 심판과 멸망 받을 운명에서 건져주시려고 주님이 오신 것입니다.  

물에 빠져 죽게 된 사람은, 누가 자기를 건지려고 하면 어떻게 해야 됩니까? 가만히 있으면 됩니다. 그래야 구조하기가 쉽습니다. 사람이 물에 빠져 죽게 되면 뭐든지 꽉 붙잡고 놓지를 않습니다. 말 그대로 필사적(必死的)이라 힘이 장사라고 합니다. 구조자가 섣불리 그 사람한테 잡히면 둘 다 같이 죽습니다. 그래서 물에 빠진 사람이 기를 쓰고 막 허우적거릴 때는 그냥 놔둔다고 합니다. 힘이 다 빠져서 더 이상 허우적거리지 못할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좋다고 합니다.

잘 모르는 사람은 “빨리 건져 주시오. 저 사람 물 많이 먹을텐데” 하고 걱정하지만, 구조자들은 “물 좀 먹어도 괜찮아요. 그냥 놔둬요” 하며 기다립니다. 한참 기를 쓰고 허우적거리다가 물 좀 먹고 힘도 빠지고 나면, 그 때는 물에 빠진 사람의 머리카락만 슬쩍 잡아끌어도 구조할 수 있습니다. 너무 힘을 써대면 어떤 때는 구조자가 물에 빠진 사람을 일부러 잠시 기절 시키기도 한다는 것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주님이 죄인을 구원하시는 일도 같습니다. 주님은 죄인을 구원해 주고 싶은데 죽어가는 죄인이 자기 의를 세우느라 얼마나 힘을 쓰고 있는지…. “힘쓰고 애쓰고 열심히 충성하고” 있어서, 주님은 그 사람의 그 힘 다 빠질 때까지 놔두십니다. “무거운 짐을 나 홀로 지고 견디다 못해 쓰러질 때”(찬송가)까지는 주님도 그를 그냥 지켜보십니다. 건져줄 사람이 오면 물에 빠진 사람은 힘 빼고 죽은 듯이 가만히 있으면 됩니다.

믿는다는 말은 믿는 상대방에게 의지한다, 맡긴다, 부탁한다는 뜻입니다. 내 쪽에서는 힘을 빼고 그 사람에게 완전히 맡기는 것입니다. 머리카락을 끌고 가든지 떠밀고 가든지 그것은 그 사람이 할 일이고, 나는 가만히 있어야 합니다. 그 사람이 나를 살려 줄 능력이 있으면 나는 사는 것이고, 살려 줄 능력이 없으면 나는 죽는 것입니다. 오로지 내 목숨은 그 사람에게 달려 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있는 일은 완전히 맡기는 것입니다. 다음부터는 주님이 하시므로 우리는 주님이 어떻게 구원하시는지 보기만 하면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의 인도로 이집트(애굽)에서 나왔습니다. 한참 가다 보니 홍해가 앞을 가로막고 있는데 뒤에는 애굽군대가 추격해 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에게 애굽에 매장지가 없으므로 당신이 우리를 이끌어 내어 광야에서 죽게 하느뇨 어찌하여 당신이 우리를 애굽에서 이끌어 내어 광야에서 죽게 하느뇨”(14:11)라며 원망을 늘어놓습니다. 모세는 너희는 두려워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날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해서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 14:13,14)고 말했습니다.

모세가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대로 지팡이를 들고 손을 바다 위로 내어 밀매 바다가 갈라지고 그 가운데로 길이 생겼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바다 사이로 육지 같이 난 그 길을 무사히 통과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 건너갈 때까지 구름기둥을 옮겨 애굽군대를 흑암 가운데 가둬 두심으로써 추격이 어렵게 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두 통과하자, 이번에는 바다 사이에 난 길로 따라 들어온 애굽 군대를 바다 물로 전부 죽이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자기들을 위해 하나님이 “행하시는 구원을” 가만히 서서 본 것입니다. 이제 우리도 하나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해 하신 일을 보면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죄인을 구원하시러 세상에 오셨다가 구원하는 일을 하시고 가셨습니다. 하나님은 독생자를 죽는 데까지 내어주실 만큼 세상(사람)을 사랑하셨다는 것은 예수님 시대 사람 뿐 아니라 이 세상 끝 날까지의 모든 세상(사람)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시간을 초월해 사람을 똑같이 취급하십니다. 예수님은 세상에 오셨다가 가셨습니다. 그러면 주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죄인을 구원하시는 일을 다 하시고 가셨을까요, 다 하지 못하고 가셨을까요? 물론 다 하시고 가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죄인을 구원하시는 일을 하셨는데, 구원받지 못하신 분들은 받으셨을까요? 예수님은 구원하시는 일을 하셨지만, 사람이 그 ‘하신 일’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자기 죄를 위해 무엇을 하셨는지, 그 하신 일을 모릅니다. 찬송가에 “울어도 못하네… 힘써도 못하네… 참아도 못하네…”라고 한 것처럼 우리의 행위로서는 할 수 없는 것을, “믿으면 하겠네… 구주 예수만 믿어 하신 일을 힘입고 주께 가기만 하면 영원 삶을 얻네”와 같이 그 하신 일을 믿기만 하면 됩니다.

요즘의 찬송가(343)에는 “그 은혜를 힘입고”라고 되어 있는데, 예전 찬송가의 “하신 일을 힘입고”란 가사가 더 명확합니다. “그 은혜를 힘입고”란 말도 근본적으로는 같은 의미이지만, 그로부터 받는 느낌이 좀 희미합니다. 더구나 주님이 하신 일이 “은혜”인 것은 틀림없으나, “은혜”에 대해 갖고 있는 사람들의 선입견이 정확치 못한 경우도 많습니다. 부흥회나 기도원에 가서 기분만 좀 좋아도 “은혜 받았다”고 하고, 눈물만 좀 나와도 그것을 은혜라고 합니다. 무엇이 진정한 은혜인지 알지 못합니다.

예수님이 하신 일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은혜입니다. 예수님은 죄인을 구원하는 일을 다 하셨습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이 하신 일을 믿는다’는 뜻입니다. “하신 일을 힘입“는다는 말은 예수님이 해놓으신 것에 의지한다는 말입니다. 그 주님의 공로(하신 일)를 의지해 주님께 나갈 때만 오로지 영원한 생명을 얻습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왜 구원받지 못하느냐하면, 예수님은 믿는데 그 하신 일을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 믿습니까?”라고 하면, 어떤 사람은 “예! 제가 집사입니다”라고 대답합니다. 또 “천국 갈 자신 있습니까?”라고 물으면, “아이구! 부족해서… 믿기는 믿어도 믿음이 부족해서요”라고 겸손한 듯 대답합니다. “믿음이 부족해서” 천국 갈 자신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 말은 예수님의 공로가 자기를 천국 보내기에 부족하다는 것입니까, 자기의 공로가 부족하다는 말입니까? 그 말의 속뜻은 결국 자기의 공로가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남들은 새벽기도도 잘만 가던데 나는 게을러서 새벽기도도 못가고, 주일도 꼭꼭 나가야 하는데 장사하다 보니 주일도 더러 빼먹고… 십일조도 바쳐야 하는데 나는 인색해서 십일조도 제대로 못하고, 말씀대로 살아야 되는데 성경말씀대로 살지도 못합니다. 거짓말도 살짝 살짝 더러 하고, 믿기는 믿어도 부족해서요…”. 그래서 “믿음이 부족해서” 천국에 갈 자신이 없다고 말하는 데 그것은 겸손이 아닙니다

“부족하다”는 말은 전혀 없다는 말이 아니고 천국 가기에는 부족하지만 그래도 뭔가 조금은 있다는 말입니다. 그 “조금” 있다는 그것이 자기의 ‘믿음’입니까? 말은 믿음인데 그 본질은 공로입니다. 넉넉하고 부족한 것은 자기 공로를 계산할 때나 적용되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믿음이 부족하다’는 말은 자기가 ‘쌓은 공로가 부족하다’는 말의 다른 표현에 불과합니다.  

공로야 당연히 부족합니다. 부족하고말고요. 100점 맞아야 천국 가는데, 내 자신이 쌓은 점수가 얼마나 되겠습니까? “나는 15점 밖에 안 되는데 봄에 부흥회할 때 가서 새벽기도, 철야기도 하고 열심히 찬송도 부르고 연보도 좀 하고 해서 그때 한 30점 올려놨는데, 여름에 어름 장사하다가 한 20점 까먹어 버렸습니다. 또 가을에 부흥회할 때 가서 애통하고 회개함으로 한 35점 올려놨습니다. 그런데 또 겨울에 고구마 장사하다가 한 20점 까먹어 버렸습니다. 아이고 부족해서…”. 부족하고 말고요. 지옥 갈 만큼 부족합니다.

성경에 비추어 볼 때 우리가 따놓은 점수가 천국 가는 데 몇 점입니까? 0점입니다. 그러면 지옥 가는 데는 몇 점입니까? 그건 100점입니다. 우리 점수는 지옥 가는 데는 만점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더 이상 큰 죄를 짓지 않아도 지옥 가는 데는 충분합니다.  

자기가 좀 잘하면 천국 갈 것 같고, 잘 못하면 못 갈 것 같고…. 그것이 말로는 예수를 믿지만, 실은 자기를 믿는 것입니다. ‘잘 하고 못하는’ 주체(主體)는 자신이기 때문입니다. 어쨌든 결국 자기가 어떻게 했느냐를 믿는 것일 뿐 예수님이 하신 일을 믿는 것은 아닙니다.

‘하신 일’을 믿는다는 것은 주님이 ‘내 죄 값을 치루기 위해 해 주신 일’을 믿는 것입니다. 내가 어떤 죄인이고 또 얼마나 죄를 지었느냐, 내가 하나님 앞에 율법을 얼마만큼 잘 행했느냐는 아무 상관이 없는 문제입니다. 나는 죄인이므로 나를 구원하시기 위해 예수님이 무엇을 하셨느냐가 열쇠입니다. 그 하신 일을 깨닫는 것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것을 깨달음으로 구원을 받습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하신 일이 무엇입니까?

<출처:생명의말씀선교회>

하나님의 사랑 3 - 율법 행위에 속한 자는 결국 저주를 받음, 율법과 은혜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나니 기록된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갈라디아서 3:10).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이란,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의()의 표준인 율법을 지킴으로써 하나님께 나아가고자 하는 자들입니다. 평생 죄만 짓는 사람도 많고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도 부지기수인데, 이들은 선하게 살려고 노력하니 나쁜 사람들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인간의 기준으로 본다면 선한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이 복을 받는다고 해야 이해하기가 쉬운데, 오히려 “저주(詛呪) 아래” 있다는 것은 쉽게 납득하기 어려운 것으로 보입니다.  

‘율법이 정한 바를 행하고자 하는 자는 복을 받을 것이다’라고 해야 맞을 것 같지 않습니까? 물론 “율법책에 기록된 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면 복()을 받습니다. 율법을 완전하게 행할 수만 있다면 복을 받아 천국에 가는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습니다. 그런데 죄성(罪性) 갖고 태어나 죄악 세상에서 죄를 범하고 사는 인간이 율법이 규정하는 의와 선을 행할 수는 없습니다.

사람은 율법의 모든 계명을 규정대로 항상 행할 수 없습니다. 그 때문에 저주를 받습니다. 율법을 범한 것이 죄입니다. 성경은 죄의 삯은 사망”(로마서 6:23)이라고 말씀하기 때문에, 율법을 범한 죄의 대가(對價)는 죽음입니다. 그것이 율법을 행해 하나님께 의롭다 함을 받으려는 자에게 주어지는 저주입니다.

율법을 지켜 하나님께 가려고 하는 사람이 저주를 받을 수밖에 없는 이유는 생각해 보면 자명합니다. 제대로 다 지키면 저주를 받을 리가 없습니다. 문제는 지킬 수 없다는 데 있습니다. 몇 가지는 지키고 몇 가지는 못 지키고, 그렇게 해서는 안 됩니다. 지키려면 성경이 요구하는 대로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해야 하는 것입니다.

율법을 지키다가 하나에 거치면 모두 범한 자가”(야고보서 2:10) 된다는 말씀도 같은 원칙을 설명합니다. 가령 열 개의 고리로 이어져 천국에 걸려 있는 줄을 어떤 사람이 붙잡고 있다고 합시다. 그리고 줄의 고리가 끊어지면 지옥으로 떨어진다고 합시다. 그 열 개의 고리가 십계명이라고 가정한다면, 그 고리가 몇 개 끊어지면 떨어지겠습니까? 하나 끊어져도 떨어지고, 열 개 다 끊어져도 물론 떨어집니다. 주전자나 솥 밑의 구멍이 열개 뚫어지나 하나 뚫어지나 사용하지 못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십계명 중에 몇 개범하면 지옥 갑니까?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말씀했는데, 큰 죄 값은? 사망입니다. 그럼 작은 죄 값은? 그것 역시 사망, 즉 죽어 심판받고 불못에 던지우는 것입니다. 꼭 행위로 범죄하지 않았을지라도,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노하는 자는 심판을 받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도 지옥에 들어갑니다. 마음에 음욕을 품는 자도 이미 간음한 것입니다. 그런데 누가 율법을 지켰다고 있습니까? 말로 욕설도 하고 마음으로 미워하며, 실제 행동으로 죄도 지었습니다. 마음으로, 말과 행동으로 율법을 이미 철저히 범했습니다. 그런 까닭에 율법을 지켜 의롭다 함을 받으려는 사람은 결국 저주 아래 있습니다.  

요즈음 수영 잘 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부산항에서 헤엄쳐서 미국까지 건너갈 수 있는 사람 있습니까? “미국 가는데 비자 받고 비행기표 사고, 그렇게 복잡하게 절차 밟고 돈 들여 갈 것 뭐 있느냐? 나는 수영 잘 하니까 헤엄쳐서 가련다”며 한 100명쯤의 사람이 헤엄쳐서 건너가기 시작했습니다. 미국까지 헤엄쳐서 건너가면 경비절약이 문제가 아니라 영웅이 될 것이지만, 건너가다 실패하면 죽습니다. 100명 가운데 몇 명쯤이나 건너가고, 몇 명 쯤 못 건너갈 것 같습니까? 다 죽습니다. 10,000명 쯤 출발한다면 몇 명 정도 건너갈 것 같습니까? 그래도 역시 다 죽습니다. 이 세상 모든 사람이 다 출발하면 어떨까요? 물론 다 죽습니다. 그것은 처음부터 실현가능성이 전혀 없는, 무모하고 어리석은 짓입니다. 두려워 할 것을 두려워 할 줄 아는 것은 비겁도, 어리석음도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을 모르는 것이 어리석은 것입니다. 어림도 없는 일, 하나마나 뻔한 일은 시작하지 않는 것이 지혜입니다. 여기에서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우리의 생활 속에 율법을 지키는 행위가 전혀 필요 없다는 말이 아니라 지금 우리는 구원의 조건을 논하고 있는 것입니다.

율법이 요구하는 선을 행하여 하나님 앞에 가려고 하는 사람은 우리나라에서 수영으로 미국까지 건너가려는 사람보다 훨씬 어리석습니다. 그러므로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나니”라는 말씀과 같이, 그들은 선하게 살고자 노력하고서도 끝내 지옥에 가는 결과를 맞습니다.  

그러므로 율법을 지켜서 구원 얻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이제까지 쌓았다고 스스로 생각하는 공로(功勞)와 선행이 어떠하든, 또한 그것들이 천국 가는 데 아무 도움도 되지 않음을 발견함으로 갖는 허무함이 어떠하든, 떨쳐버릴 것은 떨쳐야 합니다. 자기 공로와 생각이 다 깨져야 한다고 해서 억울해 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밑천을 많이 들여 벌인 사업이라도 안 될 것이 뻔한 경우도 있습니다. 그것을 알면서도 투자한 밑천만 아까워하여 끝까지 끌고 가다가 결국 다 털어먹는 사람이 있습니다.『유태인 상술비법』이라는 책을 본 적이 있습니다. 유태인들은 장사를 시작하여 일단 해 보고, 안되면 다시 한 번 해 보고, 그리고 또 한 번 더 시도해 본답니다. 그렇게 세 번 정도 해봐서 안 될 것 같으면, 얼마의 돈이 투자되었든지 간에 그 일을 치워버리고 “아이구! 속 시원하다”고 한답니다.
우리나라 사람 가운데는 한 번 투자하고, 두 번 투자하고, 세 번 투자하고서도 안 되면 네 번째는 가진 것을 아예 싹 쓸어넣는 사람들이 더러 있습니다. 노름판에서도 처음에는 작은 단위로 하다가, 막판에 가서는 많은 돈을 잃은 사람이 그 손실을 한꺼번에 만회하려고 나머지를 다 거는 경우가 많다고 하지 않습니까. 왜 그렇습니까? 들어간 밑천 아까운 것만 생각하는 것이지요.

어떤 사람이 밀가루 장사를 하는데, 밀가루를 잔뜩 사 놓았습니다. 그런데 밀가루 값이 그만 폭락을 해서 망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까짓것 내가 망해서 패가망신 당하느니 보다는 차라리 죽어버려야지”하고, 자살하려고 노끈을 하나 샀답니다. 대들보에다가 노끈을 매놓고 방 한 가운데서 목매어 자살하려고 하는데, 라디오에서 밀가루 값이 갑자기 폭등했다는 뉴스가 나와 자살을 하지 않고 큰 돈을 벌어 부자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은 자살하려고 산 그 끈을 못 써먹을까 봐 아까워서 자살했다면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 어이없는 짓을 할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 쓸데없게 된 노끈은 미련 없이 내버릴 것입니다. 아무리 없는 돈에 어렵게 구입했을지라도, 필요없게 된 이상 버려야지요.

이제까지 율법을 지켜 하나님께 의롭다 함을 받고자 했을지라도, 그것이 소용없는 일인 줄 알았다면 즉시 포기해야 합니다. 버릴 것을 버려야, 손에 붙잡고 있는 쓸데 없는 것을 놓아야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것을 놓으면 천국 가는 줄을 놓는 것이 아니고, 그것을 놓음으로써 주님께서 내려주시는 은혜의 줄을 잡을 수 있습니다.

이런 사실을 말씀드리는데도, 수십 년간 교회 다니며 쌓은 자기의 공로에 미련이 남아서 “그래도 율법을 지켜야죠! 지키는 데까지는 지켜보아야죠!” 하고 고집하시는 사람도 있으실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부산에서 미국까지 헤엄쳐서 갈 수 없다는 자명한 사실 앞에서도 ‘내가 이미 많이 왔는데 가는데 까지는 가봐야지요’라며 계속 헤엄치는 사람과 같습니다. 그러나 너무 많이 나갔다가는 돌아오지도 못하고 죽습니다.

율법과 은혜
내가 하나님의 은혜(恩惠)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律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갈라디아서 2:21).

율법을 지켜서 사람이 의롭게 될 수 있다면, 예수님께서 육신으로 세상에 오실 이유도 없고 십자가에 죽으실 필요도 없으며, 예수님의 죽음은 헛된 죽음에 불과합니다. 율법으로 의롭게 될 수 없기 때문에 예수님이 형벌을 대신 받으신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 이는 의인이 믿음으로 살리라 하였음이니라. 율법은 믿음에서 것이 아니라 이를 행하는 자는 가운데서 살리라 하였느니라”( 3:11,12). 은혜는 믿으라 그리하면 살리라고 말씀하고 율법은 행하라 그리하면 살리라고 명합니다. 그러므로 율법과 은혜는 정반대의 것입니다. 그런데도 많은 사람들이 율법과 은혜를 분별하지 못하고 섞어놓아 신앙에 혼란을 일으키고 있는 것입니다.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너희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로다”(갈라디아서 5:4).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믿는다”고 하고  그것도 “잘 믿어 보겠다”고 하는 사람입니다. 믿지 않는 사람이 율법을 왜 지키려 하겠으며,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받으려는 이유는 더욱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사람은 큰 상을 받을 것이다”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로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우리의 () 더러운 옷과 같아서”(이사야 64:6) 우리의 행위로는 자기( 수치) 가리울 없을 ”(이사야 59:6)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우리가 의롭게 되고자 기울이는 노력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마치 더러운 사람이 더러운 옷을 걸친 것과 같아서 우리의 의()는 우리의 죄악의 수치를 결코 가릴 수 없음을 선언하신 것입니다. 그것은 문둥이가 걸치고 있는 온갖 병균으로 더럽혀진 다 떨어진 넝마나 같습니다. 그런 것을 입고 하나님 앞에 설 수 없습니다.  

마귀는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에게 이렇게 속삭입니다. “이 봐! 하나님이니 영혼이니, 천국이니 지옥이니 그런 말 듣지 마라. 그건 할 일 없는 인간들이 지어낸 소리야. 이 우주 만물을 창조하기는 누가 창조했다고 그래. 옛날부터 있었던 거야. 해와 달과 별도 저절로 생겼고, 지구도 다 저절로 생겨서 돌고 있는 것이야. 그리고, 아메바가 진화해서 곤충도 되고, 또 더 진화해서 물고기도 되고 날짐승도 된 거야. 그렇게 짐승도 되고 원숭이도 되었고, 원숭이가 꼬리가 슬슬 들어가서 사람도 되고 한 거야”.

또 “사람이 별것이냐? 다 진화해서 그렇게 된 거야. 그래서 사람을 고등동물이라고 하잖아. 인간은 짐승이 조금 발전한 것뿐이야. 영혼(靈魂)은 무슨! 그런 것 있으면 내 놔봐라. 그러니까 자연의 순리대로 짐승들처럼 약육강식으로 살다가 죽으면 그만이야. 죽으면 그것으로 다 끝나는 것이야. 믿는다고 맹꽁이처럼 그러지 말고 ‘쾌쎄라 쎄라(될 대로 되라)…’ 사는 거야”라고 거짓을 집어넣습니다.

그런 마귀 속임수에 빠진 사람들은, 자신이 속고 있다는 것도 전혀 모른 채 쾌락을 추구하며 삽니다. 영원한 것에 대한 소망이 없으니 육신이 전부인 알고 육신을 즐겁게 하기 위해 먹고 마시고 합니다. 그리하여 “마시고 또 마시고 이 밤이 지나도록 춤을 춥시다”라며 한없이 마시고, 토하고 또 마시고 인사불성이 됩니다. 하나님이니, 영혼이니 그런 것 생각할 시간을 마귀는 주지 않습니다. 지옥 갈 때까지 막 몰아 붙여 정신 못 차리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 믿는 사람에게는 마귀가 뭐라고 할까요? “너, 예수 믿을래? 그래, 그러면 잘 믿고 천당 가라. 바이 바이(Bye-Bye)” 그럴 줄 아십니까? 믿으려고 하는 사람에게는, 마귀가 믿지 말라고는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열심히 믿으라”고 합니다. 이는 마귀에게는 종교라는 제의 무기가 또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 다니고 믿을 바에는 열심히 믿어라. 새벽기도도 가고 주일도 지키고, 교회에서 열심히 봉사도 하고 돈도 바치고 잘 해라! 교회당 얼마든지 많이 지어라. 목사, 얼마든지 많이 만들고, 집사도 얼마든지 많이 세워라. 성가대도 천사처럼 꾸며라. 경건하게 예배의식을 행해라”고 부추깁니다. 마귀는 그런 것 전혀 겁내지 않습니다.

마귀는 다만 “구원만 받지 마! 거듭나는 것 신경 쓰지 마라! 그런 것은 지금 몰라도 괜찮아. 하다 보면 세월 지나면 알게 돼. 믿는 것이 따로 있나? 교회 나가면 믿는 것이고, 열심히 하면 그것이 잘 믿는 것이야. 너는 큰 상 받을 것이다” 라고 가르칩니다. 게다가 “아무개 집사님은 하나님께 큰 상 받을 것입니다”라고 목사가 부추기기라도 하면, 속으로는 “그렇죠. 그렇죠. 나는 큰 상 받을 것입니다”라면서도 “에이 뭘요…” 하며 점잔까지 뺍니다.

‘비행기 태워’ 어딘지 모르게 끌고 가는데, 그 비행기 운전사가 바로 마귀인줄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가는 목적지는 지옥, 그 비행기 타면 지옥 직행입니다. 목사님이 칭찬해 준다고 하나님께서도 칭찬해 주십니까? 세상일에는 그렇게도 똑똑한 척 하면서, 사람이 그 중요한 영혼문제에는 어리석기 짝이 없습니다.

물건 하나 사면서도 속지 않으려고 이 집 가서 물어 보고 저 집 가서 물어 봅니다. 그렇게 제일 싼 집에 가서 깎고 또 깎습니다. 그렇게 했는데도 남보다 비싸게 샀다 싶으면 ‘바가지 썼다’고 기분 나빠합니다. 세상 일에는 그렇게 속지 않으려고 똑똑한 척 하면서, 예수 믿는 것에는 마귀에게 푹 속습니다. 다른 것은 다 속을지라도, 그래서 물질적인 손해는 좀 보아도 그만이지만, 믿는 데 속으면 절대로 안 됩니다.

독자 여러분들도 목사님 말이나 부흥강사 설교나 신학박사의 말을 전적으로 믿어서는 안 됩니다. 말하는 사람이 누구이건 성경 말씀과 일치할 때 믿으십시오. 천국 가고 지옥 가는 것은 세상 일이 아닌데 사람이 하는 말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하나님 말씀인 성경 외에는 진리가 없습니다. 남이 믿는다고 무조건 따라갈 것이 아니라, 그 말씀이 성경에 있는지 없는지 확인을 하고 믿어야 합니다.   

“구원받아야 된다. 거듭나야 된다”고 하면, 깜짝 놀라는 사람이 많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없느니라”(요한복음 3:3)고 하셨는데도, “거듭나야 천국 간다”고 하면 아주 기분 나빠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정말 이상한 일입니다.

“구원받아야 된다. 거듭나야 한다”는 말을 들으면 마땅히 “아! 그럼요. 거듭나야죠. 어떻게 해야 거듭납니까? 구원받아야 될 텐데, 저는 구원의 확신이 없습니다. 어떻게 하면 될까요?”라고 말해야 할 텐데, 오히려 “너만 받았어? 제깟게 무슨 구원받았다고, 교만하게 말이야. 그리고 남이야 구원받았든지 말았든지 무슨 상관이야. 믿으면 받은 것이고, 받았으니까 믿고 믿으니까 다니지” 하며 몹시 불쾌해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구원받아야 된다는 말을 그렇게 싫어하는 것은 무언가 잘못 된 것입니다.

<출처:생명의말씀선교회>

하나님의 사랑 2 - 율법이란 무엇인가, 율법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발견케 하는 것임

믿음이 무엇인지 알려면, 영혼이 구원받는 데 있어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부터 알아야 합니다. 먼저 그것을 깨닫게 하기 위해 이스라엘 민족을 선택하신 하나님께서는 그들로 하나님의 존재를 알게 하시고, 그들에게 율법(律法) 주셨습니다. 율법의 대표적인 것이 십계명(十誡命)입니다.  

요한복음 1 17절에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신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 말씀했습니다. 모세로 말미암아 주신 율법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은혜와 진리는 대조적인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은혜를 허락하시기 전에 율법을 주셨습니다.  

율법이 무엇인지 정확히 아는 것이 필요합니다.
로마서 7 12절에이로 보건대 율법도 거룩하며 계명도 거룩하며 의로우며 선하도다 했습니다. 율법은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선하심을 나타낸 것이므로 율법 자체는 거룩하며 의로우며 선합니다. 율법은 사람에게 거룩하게 살아라, 선하게 살아라고 명령하는 것입니다. 율법을 모두 지킬 있다면, 사람은 거룩하고 의롭고 선한 사람이라고 있습니다.

필자는 중학교 1학년 때부터 교회당에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주일날 교회에 가면 의례히 목사님의 말씀에 따라 십계명을 복창했으며 그것을 지켜야 한다고 들었습니다. 그래서 십계명을 지켜야 천국에 가는 알고 열심히 지키려고 노력했지만 나중에 마태복음 5장을 보면서 사람이 율법을 지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옛 사람에게 말한바 살인치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히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마태 5:21,22).

예수님은 사람을 실제로 죽이지 않았을지라도, ()하기만 해도 심판을 받고라가’(머리가 빈 놈이라는 경멸과 조롱의 표현)라고 하거나, 미련한 놈이라고 욕만 해도 지옥 불에 들어간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미워하는 자는 살인한 자라고 성경은 말씀했습니다(요한 1 3:15). 왜냐하면 살인의 근본은 미움에서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나타난 행동 이전의 , 근원부터 따지십니다. 사람은 행위로 구체화된 결과를 보고 살인을 규정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마음에 살인할 생각을 했다면 그것이 비록 행위로 나타나지 않았어도 하나님은 사람의 중심으로 보시므로 이미 살인한 것으로 보신다는 말씀입니다.

간음치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마태 5:27). 육체로 간음을 하지 않았을지라도 마음에 음욕을 품으면 이미 간음했다는 것입니다.

또한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또 너를 송사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마태 5:49,50),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마태 5:44) 예수님은 말씀했습니다.

율법은 결국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말씀과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마가 12:30,31) 말씀으로 요약할 있습니다. 나면서부터 이기적이고 아담의 성품을 이어받은 타락한 죄인이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자신의 몸과 같이 사랑할 있겠습니까? 이웃을 자신의 몸과 같이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사람에 대한 율법을 모두 범했으며, 마음과 목숨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께 대한 계명도 범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율법을 주신 목적은 무엇일까요? 많은 사람들이 질문을 받으면, “그야 지키라고 주셨지요”라고 대답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율법을 아무도 지킬 없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율법은 지키라고 주신 것이 아닙니다. 율법을 주심은 사람이 하나님의 표준에 스스로 도달할 수 없으며, 죄의 기질을 타고난 사람으로서는 절대로 지킬 수 없음을 깨닫게 하기 위함입니다.

사람은 나무로 말하자면 나쁜 나무입니다. 죄인으로 태어나서 나면서부터 타락된 마음을 가지고 죄를 짓는데 익숙합니다. 그런 죄인에게 거룩하게 살아라, 선하게 살아라, 의롭게 살아라고 요구하는 것은 마치 나쁜 나무인 가시나무에게 포도 열매를 맺어라, 귤이나 사과를 맺으라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것이 가능하겠습니까?

율법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발견케 하는 것임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로마서 7:18).  

성경으로 우리가 확실히 알게 되는 것은, 하나님께서 보실 때 우리 속에는 선()한 것이 하나도 없다는 사실입니다. 우리 속에는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예레미야 17:9) 마음이 있을 따름입니다.   

이 말씀을 기록한 바울 사도와 마찬가지로 우리도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것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우리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므로 “(선을 행하기)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을 수밖에 없습니다. 좋은 일을 행해야 할 줄 알지만, 또한 행하려고 노력도 하지만 할 힘이 없습니다.

()한 것이 나쁘다는 것을 알면서도 사람은 악을 행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것은 근본이 악하기 때문입니다. 나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고 싶어 나쁜 열매를 맺습니까? 나쁜 나무는 나쁜 열매를 맺을 수 밖에 없는, 나쁜 나무의 속성을 갖고 있습니다. 좋은 열매를 맺고 싶어도 맺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나쁜 나무나 마찬가지인 이 타락된 죄인에게서 선한 열매를 기대하시겠습니까?  

인간에게 율법을 주실 때 하나님께서는 아무도 그것을 지킬 수 없음을 처음부터 잘 아셨습니다. 율법을 지키리란 것을 한 사람에게도 기대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십계명을 받은 모세조차도 사람을 쳐 죽인 살인자입니다. 누가 율법을 지켰습니까?  

그렇다면, 지키지도 못하는 법을 하나님께서는 왜 주셨을까요? 율법을 주신 목적은 다른 데 있습니다.  수십 년 교회당에 다니면서 사람들이 그 사실을 잘 모르므로 “지키라고 주셨지요. 그러니 지켜야지요”라고 대답합니다. “그러면 지킬 수 있으시던가요?”라고 물으면, “지키려고 노력은 해야지요. 그럼 마음대로 어깁니까?”라고 반문까지 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지켜지던가요? 결국 지킬 수 없는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합니다. 율법을 지키면서 선하게 살려고 노력하는 것은 좋은데, 그것과 하나님께 의롭다 함을 받는 것과는 전혀 별개의 문제입니다.

지나가는 사람 붙잡고 대화하는 가상의 상황을 생각해 봅시다. “선생님! 잠깐만 실례하겠습니다”. “왜 그러십니까?. “선생님, 살인하지 마십시오. 도덕캠페인 나왔습니다.” 라고 했다면, 그 행인이 “아! 그것 십계명에 있는 말씀이지요. 좋은 말씀 해주셔서 고맙습니다” 그러겠습니까? “너 방금 뭐라고 했냐, 내가 살인범처럼 생겼냐? 네 눈에는 내가 지존파나 막가파로 보이냐?”며 당장 잡아먹을 듯 할 것입니다.  

만일 또 “선생님, 도둑질 하지 마십시오”라고 했다면, “내가 도둑놈인 줄 알아? 도적질하는 것 봤어?” 하며 화를 낼 것입니다. 속으로는 아마 “내가 도둑질 한 것을 이 놈이 어떻게 알까?”하고 뜨끔해 하는 사람도 있겠지요. ‘도적질 하지 마시오’ 라고 하는 것은 한편으로는 ‘당신, 도둑놈 같이 생겼다’ 다른 한편으로는  ‘당신, 도적질하게 생겼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선생님! 이웃의 아내를 탐내지 마십시오” 라고 했다면, 그 사람은 정말로 가만히 있지 않을 것입니다. 아마 속으로는 ‘내가 뒷집 여자 좋아하는 것을 이 놈이 어떻게 알았을까?’ 했을 수도 있겠지요. 또 지나가는 어떤 아가씨에게 “아가씨! 잠깐만 실례하겠습니다”. “왜 그러세요?. “아가씨, 간음하지 마세요”. 이쯤 되면 가만두지 않을 것입니다. 그것은 인격모독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니까 “살인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거짓말하지 말라, 이웃의 아내를 탐내지 말라” 그렇게 명령해도 꼼짝 못하는 것이지, 만일 사람이 사람에게 그런 말을 한다면 야단날 것입니다. “살인하지 말라!” 는 말은 ‘너는 살인하게 생겼다’는 말이고, “도둑질하지 말라”는 말은 ‘너, 도적질했지? , 도둑놈처럼 생겼다’는 말입니다. “탐내지 마!” 라는 말은 ‘너, 탐내고 있지?, “거짓말 하지 마!”라는 말은 ‘너, 거짓말했지?’ “이웃의 아내를 탐내지 마!”라는 말은 ‘너, 이웃의 아내, 남의 여자를 좋아하고 있지?’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율법은범법함을 인하여 더한 것이라”(갈라디아서 3;19). 죄를 지어놓고도 죄인 줄 모르기 때문에 죄를 더 분명히 하기 위해 덧붙여주신 것이 율법이라는 말씀입니다. 범법함을 인해 율법이 더해진 것이므로 율법을 배우게 되면 지은 죄를 더 분명히 깨닫게 됩니다. 무엇이 죄인가를 규정하는 법()이 없다면, 범죄자를 벌()할 수 없습니다. 죄를 지어도 그 행위가 죄 됨을 규율하는 법이 없으면, 그것이 죄인 줄 모르고 처벌할 수도 없습니다. 법이 나타나면 그것이 비로소 죄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죄가 있기 때문에 율법이 있는 것입니다.  

알 것은 이것이니 법은 옳은 사람을 위하여 세우신 것이 아니요 오직 불법한 자와 복종치 아니하는 자며 경건치 아니한 자와 죄인이며 거룩하지 아니한 자와 망령된 자며 아비를 치는 자와 어미를 치는 자며 살인하는 자며 음행하는 자와 남색 하는 자며 사람을 탈취하는 자며 거짓말하는 자며 거짓 맹세하는 자와 기타 바른 교훈을 거스리는 자를 위함이니”(디모데전서 1:9-10).  

선한 사람에게는 율법이 필요 없습니다. 거룩하고 의롭고 선한 사람은 죄가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대로 법은 옳은 사람을 위해 세운 것이 아니고 죄 있는 사람을 위해 세운 것입니다.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하려 함이니라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로마서 3:19-20).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죄에 따른 율법의 심판인)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로마서 5:12) 이르게 된 것입니다. 모든 죄인은 율법 아래 있으므로, 율법은 율법 아래 있는 모든 죄인들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율법은 율법 아래 있는 모든 죄인들의 입을 막습니다.

어떤 사람은 죄를 짓고도 “내가 무슨 죄를 지었느냐?”고 큰소리칩니다. 사람이 법을 모르면 오히려 담대합니다. 그러나 법을 알게 되면 “아! 그런 법이 있었구나” 하고 입을 다물게 됩니다. 모든 입을 막는다는 말은 ‘죄 없다’는 소리를 못하게 한다는 말입니다.

제 멋대로 운전을 해놓고서, “내 자동차 가지고 내 맘대로 가는데 왜 날 잡느냐? 신호등이 빨간 불이 켜 있든 파란 불이 켜 있든 그것이 나와 무슨 상관이냐?”고 주장할 수 없는데, 운전에는 교통법규가 있기 때문입니다. 교통법규를 어기면, 그 법규를 알았든 알지 못했든 처벌받습니다. 정지해야 할 때는 정지해야 하고, 좌회전 금지 지역에서는 좌회전하지 말아야 합니다. 규정된 법규를 어기고서도 “난 그런 교통법규를 모르는데 왜 날 잡아가느냐?”고 말할 수 없습니다.

어떤 사돈끼리 교도소에서 만났습니다. 두 사돈어른이 교도소에서 만났으니 얼마나 멋쩍었겠습니까. 한 사돈이 다른 사돈에게 물었습니다. “사돈께서는 어떻게 해서 여기 들어오셨소?. 그러자 질문을 받은 사돈은 “아! 저는 참 억울하게 들어 왔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래도 무슨 죄가 있기에 들어오셨겠지요”. “아∼ 조그만한 죄 하나 있었지요. 어떤 집에서 새끼줄 하나 주운 것으로 여기까지 왔습니다”. “아니, 새끼줄 하나 주워 왔는데 여기까지 오셨단 말입니까?. “그런데, 알고 보니 새끼줄 끝에 황소 한 마리가 달려 있었단 말입니다” 그는 황소도둑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 한다는 말이, 황소는 모른다는 것입니다. 새끼줄만 주워왔을 따름인데, 나중에 일고 보니 재수 없게 황소가 따라왔더라는 것입니다.  

이번에는 다른 사돈이 반대로 물었습니다. “그러면, 사돈은 어째서 들어왔습니까?. “아∼나도 죄가 없는데, 억울하게 들어 왔지요”. “그래도 무슨 일이 있었길래 오셨겠지요”. “나는 커다란 잠바 하나 입고 슈퍼마켓에 가서 물건을 주섬주섬 옷 안에 주워 넣고 나오면서 ‘이것 외상이오’ 하는 말을 그만 잊고 나왔소”. 그는 슈퍼마켓 물건 도적질하다가 잡혀온 사람입니다. 법이 그 사람 말대로 ‘그렇다’고 인정하겠습니까? ‘외상이라는 말을 깜빡 잊었다’고 재판기록에 죄목을 적겠습니까? 한 사람은 소도둑놈이고, 다른 한 사람은 슈퍼마켓 물건 도둑질한 사람입니다. 법대로 판결 내리면, ‘죄가 없다’고 우겨대지 못합니다. 입을 다물고 판결 내리는 대로 벌 받을 각오를 해야 됩니다.

율법은 사람이 하나님 앞에 ‘죄 없다’는 소리를 못하도록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음을 깨닫게 하기 위함입니다.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로마서 3:20).

병원에 가면 약부터 주는 것이 아니라 진찰부터 합니다. 진단을 정확하게 내리고 나서 투약을 하든지, 수술을 받게 하든지 합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우리 영혼을 고쳐 주시기 전에 ‘왜 구원을 받아야 되는지’ 우리의 영적 상태를 진찰해 주시며, 그 역할을 맡은 것이 율법입니다. 율법을 배우면 자신의 죄를 깨달을 수 있고 자신이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음을 알게 되고 구원받고 싶은 마음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선생님, 어디가 아프셔서 오셨습니까?”라는 의사의 물음에, 병원에 간 환자가 기껏 대답한다는 것이 “내가 아프긴 어디가 아파요. 멀쩡합니다. 아무렇지도 않습니다”라고 한다면, 의사가 뭐라고 하겠습니까? “그럼 뭐 하러 왔습니까? 가시오!”라고 하지 않겠습니까? “글쎄요, 뭔가 좀 이상한데 어디가 잘못됐는지 진찰 좀 해 주십시오. 종합검진이라도 받을까요?”라고 해야 합니다.  

그처럼 병이 있는지 없는지 먼저 진찰을 받고 나면 어떤 결과가 나오겠지요. 의사가 “아! 진찰을 빨리 받은 것이 참 다행입니다. 암 초기입니다. 빨리 수술 받으면 됩니다” 라는 진단이 내려졌다면, “아, 그렇습니까? 의사선생님이 시키시는 대로 하겠습니다. 언제 수술 받으면 될까요?”하고 대책을 강구할 것입니다. 자기가 병이 있는 줄 알면 의사가 시키는 대로 합니다. 어느 부위를 잘라내자고 하면 그것에 동의하고 수술을 받기 위해 벌거벗고 수술대 위에 눕습니다. 그렇게 해야 낫기 때문입니다. 의사가 진단을 내렸는데도 “쓸 데 없는 소리하지 마시오. 내가 왜 병이 있어요. 나는 멀쩡합니다”라고 고집하면, 의사는 그 사람을 고쳐 줄 수 없습니다. 이와 같이 율법은 진단하는 것입니다.

어린 아이가 밖에서 놀다가 얼굴을 새카맣게 되어서 들어왔습니다. 이를 본 엄마가 “얘야, 얼굴에 더러운 것 묻었으니까 얼른 가서 씻어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자기 얼굴이 보이지 않는 그 아이는 “아무것도 안 묻었는데 왜 그래요. 엄마는 괜히 나만 갖고 귀찮게 하고… 안 씻어요” 라고 대꾸한다면 그럴 때 그 아이로 얼굴을 씻게 하려면 어떻게 하면 됩니까? “얘, 가서 얼른 거울을 봐!. 거울에 제 얼굴을 비춰보고서야 “아! 더럽구나” 하면서 스스로 씻습니다.  

율법은 거울과 같은 역할을 합니다. 율법은 하나님의 거룩하심 앞에 우리 인간이 어떠한 죄인인가를 깨닫게 해 줍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의로우심과 선하심의 기준(基準)에 우리 자신을 비춰봄으로써, 우리 각자는 얼마나 거짓되고 악하며 비참한 상태에 있는가를 알게 됩니다. 율법 앞에서 더러운 죄를 깨닫고 나서 예수님 앞에 나아가 그 죄를 씻김 받습니다. 거울은 더러운 것을 깨닫게 해 줄 뿐이지 더러운 것을 씻어 주지는 못합니다.

율법 역시 우리의 죄를 깨닫게 해 줄 따름이지 죄 문제를 해결해 주지는 못합니다. 우리를 선하게 해주지도 못하고,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게 만들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율법은 오직 죄와 그에 따른 심판을 깨닫게 해 줍니다.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는 말씀 속에,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율법을 주신 목적이 설명되어 있습니다. 율법을 통해 죄를 깨닫고, 예수님 앞에 가서 죄 씻음을 받는 것입니다.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갈라디아서 3:24).

율법은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이라고 하였는데, 몽학선생(蒙學先生)은 어린애들의 깨우침을 맡은 초보적인 선생을 뜻합니다. 정식 학문을 배울 수 있도록, 그 전단계의 가르침을 맡았다가 정식 선생에게 인계해 주는 일이 몽학선생의 업무입니다. 그와 같이 율법은 우리의 죄를 깨닫게 해서, 그 죄를 씻김 받을 수 있는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합니다.

율법이 죄를 깨닫게 해서 우리를 예수님 앞으로 인도한다는 것은, 우리가 율법을 지킴으로써 예수님 앞에 갈 수 있다는 것이 아니라 오직 율법 앞에서 죄를 깨닫고, 예수님 앞에 가서 그 죄를 씻음 받는다는 뜻입니다. 죄와 심판을 깨달음으로써 예수님 앞에 나아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받도록 해 주는 것이 율법의 역할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뜻인 성경의 가르침과는 아무 상관없이, 사람들은 오로지 율법은 지키라고 주신 것으로 알고 평생 그것들을 지키려고만 함으로써 하나님의 의도를 오해하고 있습니다.

<출처:생명의말씀선교회>

하나님의 사랑 1 - 성경을 상고하는 목적은 영생임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성경이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요한복음 5:39).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성경을 배우는 궁극적인 목적은 우리의 영혼이 구원받는 것 입니다. 구원을 받아야 영생을 얻게 되며, 영생을 얻어야만 하나님께 영광이 되어 우리가 하나님의 계획과 목적에 참여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구원하시는 길을 성경에서 말씀해 주셨고, 우리는 그 말씀을 통해 구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구원을 받는다, 거듭난다, 영생을 얻는다 또는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모두 같은 뜻입니다.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라는 것은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자세히 상고(상고의 원래 뜻은 사냥꾼이 사냥감을 추적할 때 쓰는 용어임)하는 것이 옳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즉 성경을 상고하는 목적은 영생을 얻기 위함이며 이는 곧 성경을 통해서만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을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성경”이라 함은 예수님 당시로 보면 구약성경입니다. 예수님 당시에는 아직 신약이 기록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구약(舊約)은 그리스도를 보내 주신다는 약속이고, 신약(新約)은 그 약속대로 오신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구속의 역사를 이루신 사실과 믿는 자에게 허락하신 은혜와 마지막 때에 주님께서 다시 오시겠다는 재림의 약속입니다.

성경이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모든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을 우리에게 나타내고자 함이 가장 큰 목적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 얻는 길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것이 성경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많은 말씀을 배워서 안다고 할지라도, 영혼이 구원받을 수 있는 진리를 깨닫지 못한다면 성경을 상고하는 목적은 상실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성경을 많이 안다고 하는데도 불구하고 자신이 구원받았는지, 거듭났는지를 전혀 알지 못하는 경우를 자주 봅니다. 그것은 성경의 핵심이 되는 가르침과 진리를 배우지 못한 까닭입니다. 구원받기 전에는 성경이 깨달아지지도 않습니다. 말씀을 ‘영의 양식’이라고 하는데, 양식은 산 사람에게 필요합니다. 성경은 윤리나 도덕책도 아니고 또한 육신의 양식이 아닌 영혼의 양식인 까닭에, 영혼이 구원을 받아야 성경 말씀이 양식이 됩니다. 그때부터 말씀이 깨달아지기 시작합니다.

구원은 말씀을 통해 받습니다. 골로새서 1 6절의 복음이 이미 너희에게 이르매 너희가 듣고 참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은 날부터 너희 중에서와 같이 또한 천하에서도 열매를 맺어 자라는도다라는 말씀대로, 복음(福音)을 듣고 참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는 것이 구원받는 것이며, 그것을 깨달은 날이 구원받은 날입니다.

복음이 무엇입니까? 성경의 많은 말씀 가운데 우리 영혼이 구원받을 수 있는 말씀이 따로 있습니다. 사도행전 11장 내용에 보면, 하나님께서 고넬료에게 천사를 보내어 베드로라 하는 시몬을 청하라 그가 너와 집의 구원 얻을 말씀을 네게 이르리라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는 고넬료 집에 가서 구원 얻을 말씀을 증거했고 고넬료와 그 온 가족이 구원을 받았습니다. ‘구원얻을 말씀’을 가리켜 복음이라고 합니다. 그 구원받을 말씀을 깨달으면 영원한 생명을 얻습니다.

그 복음을 듣고 참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은 날”, 그 날이 한 번 있습니다.  찬송가에 있는 “주의 말씀 처음 받은 날. 참 기쁜 날이 아닌가”라는 찬송도 같은 의미입니다. ‘주의 말씀 처음 받은 날’, 그것은 교회당에 가서 처음으로 성경 듣는 때를 말씀하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생활한 지 몇 십년 만에 그 복음을 깨달은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운 좋게 교회당에 가자마자 구원받을 말씀을 듣고 깨닫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평생 교회당에 다니는데도 그 구원받을 복음은 제대로 듣지 못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내 주의 도   처음 받은 날, 참 기쁜 날이 아닌가, 이 좋은 날 내 천한 몸 참 중생한 새 몸일세”(찬송가). 그 복음을 듣고 깨달은 날, 참 중생(重生)한 날이 구원받은 사람에게는 반드시 있습니다. 영어로는 Born again, 즉 거듭난 날이 구원받은 날입니다.  

(하나님) 조물 중에 우리로 열매가 되게 하시려고 자기의 뜻을 좇아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느니라”(야고보서 1:18)라는 말씀과 같이, 진리의 말씀으로 하나님께서는 자기 자녀를 낳으십니다. 복음의 말씀을 듣고 깨달을 때 그 영혼이 구원받고 거듭나서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그러므로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신 것입니다. 또한 너희가 거듭난 것이썩지 아니할 씨로 것이니 하나님의 살아 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되었느니라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말씀이니라”(베드로전서 1:23, 25)라는 말씀처럼, 거듭난 사람에게  생명이 된 ‘썩지 아니할 씨’는 바로 하나님의 살아 있고 항상 있는 말씀, 즉 복음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일만 스승이 있으되 아비는 많지 아니하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복음으로써 내가 너희를 낳았음이라”(고린도전서 4:15).  

누가복음 8에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비밀을 씨 뿌리는 비유로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비유로 말씀하시되 씨를 뿌리는 자가 씨를 뿌리러 나가 뿌릴 더러는 길가에 떨어지매 밟히며 공중의 새들이 먹어버렸고 더러는 바위 위에 떨어지매 났다가 습기가 없으므로 말랐고 더러는 가시떨기 속에 떨어지매 가시가 함께 자라서 기운을 막았고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나서 백배의 결실을 하였느니라”.

예수님께서 씨는 하나님의 말씀이요”(누가 8:11), 길가에 있다는 것은 말씀을 들은 자니 이에 마귀가 와서 그들로 믿어 구원을 얻지 못하게 하려고 말씀을 마음에서 빼앗는 것이요 라고 이 비유를 설명하셨습니다. 어떤 사람은 말씀을 들어도 깨닫지 못한 채 잠깐 기억하다가 새까맣게 잊어버립니다. 길바닥에 떨어진 씨가 심기우지 못하고 있을 때 새가 날아와 쪼아먹어 버리듯이, 말씀을 듣긴 들어도 그 말씀을 마음에 확실히 깨닫지 못하고 있을 때 마귀가 그 말씀을 빼앗아간다고 하셨습니다.

길가, 돌짝밭, 그리고 가시떨기에 떨어진 씨와 같이, 하나님의 복음의 말씀이 심기어지지 않은 마음에는 하나님의 생명이 없습니다. 그런 것은 모두 구원이 아닙니다. 좋은 땅에 뿌리웠다는 말씀은 듣고 깨닫는 자니”(마태 13:23) 말씀을 듣고 깨달아야 구원입니다. 말씀은 하나님의 생명을 우리 안에 심기워주는 씨입니다.  

씨는 특별한 모양도 없고, 흙 묻은 씨앗 하나가 굴러다닐 때는 아무것도 아닌 것 같지만, 그것이 옥토에 심기어지면 움이 트고 큰 나무가 되기도 합니다. 씨는 한 알갱이에 불과하지만, 그것을 심으면 자라서 꽃도 피고 열매도 맺습니다. 성경책에 기록되어 있는 말씀, 전파하는 사람의 입을 통해 우리 귓전을 울리고 지나가는 그 말씀이 준비된 사람의 마음속에 깨달아집니다. 좋은 땅은 준비된 사람의 마음입니다.

처음부터 좋은 땅은 없습니다. 전부 길바닥처럼 단단하고 완고하며, 돌짝밭처럼 그 속에 죄가 숨어 있고, 가시떨기처럼 세상의 욕심으로 꽉 차 있습니다. 그런 불모의 땅을 가시덤불을 걷어내고, 흙을 파헤쳐 돌맹이를 주워내고 부드러운 땅을 만드는 것처럼, 성경을 배울 때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마음에 씨앗이 뿌리를 내리고 자라서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부드럽게 만듭니다. 말씀을 듣고자 하는 간절한 마음, 구원받고자 하는 순수한 마음으로 부드럽게 바꾸십니다.

그 준비된 마음속에 구원받을 수 있는 말씀이 전해지면, 그 말씀은 생명이 움트기 시작합니다. 씨가 적당한 온도와 습도가 되면 싹이 나듯이, 준비된 마음에 생명의 말씀은 뿌리가 박히고 자랍니다. 복음의 말씀이 준비된 사람의 마음 속에 전해지면, 신비하게도 그는 말씀을 깨닫게 됩니다. 말씀으로 인해 하나님의 생명이 그 마음 속에 심기어진다는 것은 정말 신비한 일입니다.  

우리 귀에 들리지 않는 전파(電波)가 지금도 우리의 귓전을 스쳐 지나가고 있습니다. 주파수를 맞춰 라디오를 켜면 소리를 들을 수 있고, 그것을 녹음하면 그대로 녹음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마음의 방향이 간절히 하나님을 향해 있고 또 구원받을 수 있는 말씀을 깨달으면, 그때 그 말씀이 그 영혼 속에 기록(記錄)됩니다. 법을 저희 마음에 두고 저희 생각에 기록하리라”(히브리서 10:16).  

우리 마음과 생각 속에 기록된 말씀은 영원히 지워지지 않습니다. 그것을 가리켜서 “깨닫는다”고 하는 것이며, 그 때부터 하나님의 생명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구원하시는 방법이고, 참 신비한 일입니다.  

‘구원받았습니까’라고 물어보면, ‘구원받은 것을 어떻게 압니까 그것은 죽어 봐야 알지요’ 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렇게 주장하는 사람은 구원받지 않은 것으로 보면 틀림없습니다. 구원, 즉 거듭나는 것은 영적 출생이라는 하나의 사건(事件)이요 확실한 경험입니다. 모든 일(사건)은 일정한 시간과 공간의 제한을 받습니다. 이 세상에 일어난 때도 없고 발생한 곳도 없는 사건이 있습니까? 그런 것이 있다면, 그 일은 원래부터 없었던 사건입니다.  

어떤 사람은 구원받았다고는 하는데, ‘어떻게 구원받았습니까’라고 물으면 어물어물 대강 넘어가버립니다. 또는 ‘예수님을 믿으니까 구원받았고, 구원받았으니까 믿지요’라고 대답합니다. ‘언제부터 믿었습니까’라고 물으면 ‘저는 모태 교인입니다’라거나, ‘세례 받았으니까 구원받았지요’라고 대답하기도 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내가 기도하다가 십자가 환상을 봤습니다. 기도하는데 온 몸이 화끈했고 뜨거웠습니다’ 라든지 ‘이상한 기적이 있었습니다. 병이 낳았습니다’ 라는 등의 별별 이야기를 다 합니다. 그런 기적은 하나님의 능력일 수도 있고, 마귀의 능력일 수도 있습니다. 비록 하나님의 능력으로 병이 나았다 할지라도, 그 병 치유 자체는 구원과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구원받는 것은 반드시 성경 말씀을 통해 진리의 말씀을 깨달음으로 되는 것입니다. 그 구원받았다는 실체가 성경 말씀과 일치하지 않으면, 그 구원은 착각이고 거짓입니다. 구원받았다고 하는 사람들의 그 믿음도 말씀에 비춰 점검해 보면 구원이 아닌 경우를 많이 보았습니다. 구원받지도 않았는데도 구원받은 줄 아는 것은 더 큰 문제입니다.
  
요즈음 가짜 돈, 가짜 수표, 가짜 카드가 많이 돕니다. 진짜와 비슷한 것 같지만 사실은 가짜인데, 위조나 변조 사실이 나중에 밝혀지게 되면 큰 문제가 생깁니다. 가짜 여권, 가짜 비자로 수속을 밟다가 그것이 들통 나서 출입국관리국에 체포되는 경우도 종종 봅니다. 사람은 설사 속일 수 있다 할지라도, 하나님 앞에는 어물쩍 넘어갈 수 없으므로 완전하고 철저해야 합니다. 성경에서 구원받을 수 있는 길을,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그 방식대로 깨닫고 믿어야만 됩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대로, 하나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는 일은 하나님의 능력,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로 조건 없이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구원받기 위해 사람이 먼저 해야 일은 먼저 구원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는 것입니다. 약속은 쌍방이 지켜야 이루어지듯 성경 속에 하나님의 약속도 먼저 인간 편에서 해야할 일이 있는 것입니다. 구약과 신약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사람을 구원하시겠다고 하는 약속이라고도 할 수 있으므로 사람이 하나님을 만나고자 한다면 그 마음이 먼저 준비되어야 합니다.   

‘내일 **시에 **에서 만납시다. 그러면 당신이 필요한 것을 내가 주겠습니다’ 라는 약속을 했을 때, 약속한 일이 이루어지려면 두 사람이 똑같이 그 약속을 지켜야 합니다. 그 중에 한 사람이라도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 그 일은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약속을 반드시 지키십니다. 문제는 사람이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는데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해 자기 독생자를 희생하셨고, 하루가 천년 같이 기다리시며(베드로후서 3:8)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원하신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디모데전서 2:4). 그런데 정작 그 은혜를 받아야 할 대상인 사람이 원치 않기 때문에 구원의 선물을 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여러 사람에게 ‘구원받을 수 있는 말씀’을 드리면, 똑같이 구원받을 말씀을 들었는데도 그 중에 어떤 사람은 깨닫고 어떤 사람은 깨닫지 못합니다. 깨닫는 사람은 머리가 좋고, 못 깨닫는 사람은 머리가 나빠서가 아닙니다. 이것은  마음과 양심의 문제입니다. 듣는 사람이 얼마나 하나님의 은혜를 간절히 찾느냐를 보시고 그 찾는 영혼에게만 복음의 진리를 심어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죄인을 구하러 오셨으므로 자신이 죄인인 줄 아는 사람에게만 예수님은 찾아가십니다. 자기 자신이 죄인인 줄 알고 구원받기 원하는 사람만 예수님께서 구원해 주십니다. 자기가 의롭다고 생각하는 사람, 이미 하나님을 잘 공경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그런 사람은 오히려 그리스도를 배척합니다. 그러므로 구원받기 위해서는 자신이 먼저 죄인이라는 사실부터 알아야 합니다.  

‘인간은 나면서부터 죄인’이며 타락된 마음을 가지고 이 세상에 태어났고 살아가는 생활 전부가 죄라는 것을 배웠습니다.   

죄인(罪人)이라는 말은, 자기가 어떤 죄를 얼마나 지은 자인가를 말하기에 앞서 ‘아담의 자손’이라는 말이라고도 했습니다. 그것은 인간이 하나님과 영적으로 단절되어 하나님 앞에 잃어졌다는 의미이자, 영혼이 죽은 상태에 있고,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다는 것입니다. 성경을 통해 우리는 그것을 먼저 깨닫습니다.

하나님을 등지고 타락된 육체의 소욕을 따라 죄를 물 먹듯 마시고 사는 인생, 하나님과 원수 되어 있는 인생, 그것이 인간의 모습입니다. 비록 인간이 의롭고 선하게 산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죄인인 자신들이 볼 때나 선한 것이지 거룩한 하나님이 보실 때는 조금도 의롭지 못합니다. 평생 사는 동안 죄를 짓고, 죽은 후에 하나님 앞에 건너가서 심판을 받는 것이 우리 인간의 운명인 것입니다.  

나의 가죽 이것이 썩은 후에 내가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보리라”(욥기 19:26). 

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 간에 심판하시리라”(12:14).

심장이 멈춰 서는 순간부터 사람의 육체는 썩기 시작하고, 육체를 벗어난 영혼은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거듭난 사람은 천국으로 가지만 거듭나지 못한 죄인은 죄에 대한 심판을 받고 불과 유황이 타는 영원한 지옥으로 가 다시는 나올 수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죄 가운데 태어나 평생 온갖 죄를 짓고 살다가 언젠가 죽어서 심판 받고 영혼이 지옥에 들어갈 운명에 있다는 사실을 먼저 인정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영혼이 지옥 운명에서 어떻게 하면 건짐 받을 있겠습니까? 다시금 우리가 분명히 알 것은 그 심판과 멸망 받을 운명에서 자기 스스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전혀 없다는 사실입니다.   

기도하면서 죄를 위해 울고, 금식하며 몸과 마음을 괴롭게 하면 하나님께서 자기를 용서해 주시리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지만, 죄의 용서는 울어서 될 일이 아닙니다. 찬송가(343)에 있는 대로 “울어도 못하네 눈물 많이 흘려도 겁을 없게 못하고 죄를 씻지 못하니 울어도 못하네”(찬송가)라고 했듯이, 아무리 울어도 죄는 털끝만큼도 없어지지 않습니다. 사형선고 받은 사형수가 살려 달라고 몇 날, 며칠을 울면서 재판장을 졸라댄다고 죄를 용서받을 수 있겠습니까?   

언행이 단정하고 남에게 많은 선을 베풀면, 그것으로 죄를 하나님 앞에 씻음 받을 수 있습니까? 유감스럽게도 자기의 의()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힘써도 못하네 말과 뜻과 행실이 깨끗하고 착해도 다시 나게 못하니 힘써도 못하네”(찬송가). 힘쓰고 애쓰고 말과 뜻과 행실이 깨끗하고 착해도, 그것이 자신을 다시 나게 못합니다. 다시 나는 것(Born again), 즉 거듭나는 것은 힘써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부흥강사는 “은혜 받으려면 눈물을 흘려야 됩니다”라며, “눈물 한 방울 없이 은혜 받을 줄 아십니까? 힘쓰고 애 써야 됩니다. 힘 써야 천당 갑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성경 어느 곳에서도 눈물로 구원받는다고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참고 인내하는 것으로 구원받을 수 있을까요? 수십 년 끈질기게 교회 다니고, 추우나 더우나, 남이야 욕을 하든 말든 어떤 어려움도 이기면서 교회당에만 끝까지 다니면 죄를 사()함 받습니까? “참아도 못하네. 할 수 없는 죄인이 흉한 죄에 빠져서 어찌 아니 죽을까 참아도 못하네”(찬송가 343). 찬송가에 있는 대로 참아도 되지 않습니다. 무엇을 하든 스스로 구원하는 것은 불가능함을 알아야 합니다.

“믿으면 하겠네 구주 예수만 믿어 하신 일을 힘입고 오직 주께 나가면 영원 삶을 얻네.” 울어도, 힘써도, 참아도 안 되는 것을 믿으면 된다고 했습니다. 믿는다는 것은 사람이 무엇을 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무엇을 해서(행위) 가능할 것 같으면 그것을 행하는 것으로 됐지, 또 무슨 믿음()이 필요하겠습니까?

종교적인 열성을 행함이 곧 믿음인 줄 아는 데서부터 오해가 생깁니다. 게다가 종교인들이 ‘믿는’ 것과 ‘하는’ 것을 뒤섞어 놓았습니다. 교회 다니는 것이 믿는 것이고, 열심히 하는(行爲) 것이 잘 믿는 것이라고 가르칩니다. 한편으로는 ‘믿음’을 가르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열심히 하면 복 받을 것’이라고 행위를 가르칩니다. 그러다 보니 믿음이 무엇인지 모른 채 행함이 믿는 것인지, 믿는 것이 행하는 것인지 근본부터 혼동합니다. 그것이 바로 문제의 시발점입니다.

<출처:생명의말씀선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