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4/2010

초자연적 능력의 근원을 분별함 - 줄리아 로렌

초자연적 능력의 근원이나 출처를 분별하기는 그리 어렵지 않다. 계시적, 초자연적 능력의 영역 안으로 들어가는 사람은 자신이 본대로(마귀의 능력이든 성령의 능력이든 그대로) 변화되기 때문이다. 능력의 원천이 무엇이건 근원에 스스로를 맡기면 맡길수록, 능력의 근원이 점점 정제된 형태로, 점차 순수한 형태로 나타날 것이다. 책의 후반에 기록된 간증들을 통해 마귀의 뜻에 자신을 맡긴 사람들은 파괴의 능력을 점점 많이 받기도 하고 많이 표출하면서 힘의 압제에 놀린 , 성격파탄의 결과를 맞게 된다는 사실을 살펴볼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성령에 맡긴 사람들은 진정한 능력을 받고 표출함으로써 사랑, 평화, 기쁨으로 특징지어진 성격과 삶을 소유하게 것이다.

개개인을 통해 표현되는 초자연적 능력의 근원을 특징지어두는 특별한 표식이 있다. 리처드 포드터는 그의 [The Challenge of the Disciplined Life/훈련된 삶의 도전]에서 하나님의 진정한 능력이 드러내는 7가지 특징에 대해 자세히 설명했다. 사랑, 겸손, 절제, 희락, 온유, 순종, 통제하려는 욕구로부터의 자유가 그것이다. 만일 이러한 지표가 하나님의 능력의 근원을 분별하는 지침으로 사용된다면, 신비사술과 마귀의 영향력으로부터 기인한 능력의 표식은 정확히 정반대의 성격이어야 것이다.

증오(hate), 교만(pride), 고삐 풀린 힘의 과시(unbridled displays of power), 우울(depression), 질투(jealousy), 남을 생각지 못하거나(inability to relate to others), 다른 이의 이야기를 듣지 않음(allow others not to speak into their lives), 통제하려는 욕구(desire to control others) 그것이다.

사람의 생각 혹은 마음 상태에서 기인하는 혼적인 능력은 위에 열거된 부류의 표식들이 다양하게 혼합된 형태로 표현된다. 치유 받지 못하고 인정받지 못한 사람들은 자신의 무능력함에 대한 보상 심리로 종종 혼적 능력을 사용하여 사람들을 조종하고 일을 교묘히 꾸미곤 한다. 예수님과의 관계에 부리를 내린 강한 정체성, 내면의 진정한 자아의식이 결여되었으므로, 그들은 자신의 중요성을 외부로 표출하여 증명하고자 노력하는 것이다.

결과 이들이 영적 은사를 사용하여 사역하면, 피사역자들은 사역자의 혼적 요소 속의 찌꺼기들로 더럽힘을 당하는 느낌을 받을지도 모른다. 사역자가 혼적 능력으로 예언의 말씀을 전한다면, 말씀을 받는 사람은 말씀이 단지 조종하기 위한 , 아첨하는 , 혹은 기를 죽이거나 잠깐 영향을 미치고 마는 능력의 정도일 뿐이라는 느낌을 받는다. 치유를 위해 손을 얹는다고 해도, 피사역자에게 있어서 그것은 잠깐 영향을 미치고 끝나버릴 행위같이 다가온다. 그것은 사역자가 그리스도의 고통과 임재 가운데 일어날 치유 능력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다 손을 얹은 사람, 자기 자신에게 시선을 집중시키려 하는 의도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어떤 사람에게는 혼의 능력을 발휘하는 것이 정상적인 영적 성장 과정, 치유 과정의 일부일 수도 있다. 건장하게만 발휘된다면, 혼의 능력은 다른 사람을 통제하지 않고 오히려 다른 사람과 경계를 그으며 감정적 안정을 취하는 데에 도움이 수도 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임재 가운데 치유되는 경험을 반복적으로 누릴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건장치 못한 혼의 접근 방법은 우리를 신비사슬의 영역으로 인도할 것이며, 마침내 우리의 정신 영역(생각) 마귀가 부리는 광대들의 놀이터가 것이다.

사실 혼에서 기인한 능력을 통제하는 , 혼적 능력을 표현하는 것은 서로 다른 극단처럼 보이지만 본질상 하나이다. 다른 하나의 극단은 자기중심점(narcissistic) 욕구에 근간한 능력의 추구이다. 통제와 표현’, 그리고 추구 양극단을 이루는 것이다. 스스로를 영화롭게 하기 위해 영적 능력을 추구하는 행위는 스스로 마귀 편에 서는 것과 같다. 루시퍼는 자기중심적 욕망의 최첨단을 달린다.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능력의 특징은 하나님의 사랑 속에서 안정을 취하는 성숙한 크리스천의 특징이랄 있다. 건강한 성격에서 풍겨나는 특징과도 같다. 진정한 능력이 상처를 치유하며 개개인의 깊숙이 역사한다면, 이들은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의 마음에서 흘러나온 지식의 말씀, 예언과 기적 그리고 치유를 통해 다른 사람들에게 더욱 순수하고 정제된 능력을 흘려보낼 있을 것이다. 우리들 대부분이 급진적인 치유과 성화(sanctification)  필요로 하고, 증오, 교만, 질투와 우울함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처지인데, 어떻게 인간에세서 흘러 나오는 능력의 근원을 분별할 있을까?

첫째, 우리는 혼의 능력이 전부 나쁘지만은 않다는 사실을 인지해야 한다우리 인생의 표현들(좋거나 나쁘거나), 성격, 재능 등은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어서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다-부르심을 향해 나아갈 하나님과 동역하는 일에 도움 되기 위한 이유가 그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비전을 주신다. 우리는 일의 수행 역할을 임무로 부여받았다. 하나님의 사랑에 부리내린 혼적 능력, 삶의 목표에 대한 이해(지적) 하나님이 보여주신 비전 덕에, 우리는 짜증나고 불쾌한 날마다 가시 돋으려 하는본성을 잠재울 있다.

하나님의 능력에 복종함으로써 발휘되는 혼의 능력 역시 하나님의 일을 수행해낸다. 우리는 우리의 혹은 사려(생각) 깊은 행동을 통해 하나님의 능력을 풀어낼 있다. 이에 따라 능력의 특징이 우리 인격의 특징을 담아낼 것이다. 특별한 성격을 당신에게 주신 하나님은 당신이 하나님을 표현하는 방법 그대로를 사랑하신다.

둘째, 성령의 기름부음에 압도된다면, 우리의 마음과 생각이 어떻든 우리의 성숙 정도나 통회하는 정도에 상관없이 우리 혼의 흔적들은 사라져버릴 것이다. 점을 인지해야 한다. 하나님 사랑의 임재는 가장 어린 아이나 미숙하고 치유 받지 못한 성인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낸다. 그의 능력은 우리의 연약함 속에서 완전해진다.

하나님의 참된 능력을 풀어내다 우리가 당면한 도전과제 우리의 임무는 능력 안에서 행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 행하는 것이다. 우리를 통해 기름부음을 흘려주시는 그분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는 . 우리는 우리가 바라보고 경배하는 대상을 닮아간다. 능력의 하나님께로 가까이 나아가길 추구함으로써 우리는 더욱 하나님을 닮아갈 있다.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능력의 표식에는 그의 성품이 반영되어 있다. 능력의 표식은 성품의 표식이다. 참된 능력의 하나님을 추구하면 추구할수록 맑고 깨끗하게 정제된 기름부음이 우리를 통해 흘러나올 것이다. 반대로 사술의 능력을 많이 추구하거나 스스로의 능력을 신으로 삼으면 삼을수록 우리의 삶과 성격은 더욱더 조각나고 파괴될 것이다.

잃어버린 영혼을 구하기 위해 하나님의 능력을 풀어내고, 참된 기름부음 가운데 행하기를 갈망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나라가 임박했다는 사실을 펼쳐보일 것이다. 그들은 어제도, 오늘도, 영원히 동일하실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를 다른 사람들에게 선보일 것이다. 또한 특별한 성품들[그리스도와의 친밀함을 누리고, 그의 임재를 사모하며, 그의 성품을 닮아가는 실력자로서의 성품들] 보여줄 것이다. 리처드 포스더에 의하면 참된 능력의 표식은 아래와 같이 설명된다.

사랑(Love) - 사랑은 자신의 평판을 위해서라기보다 다른 사람의 유익을 위해서 능력을 사용한다. 사랑은 우리 영혼의 연인, 사랑의 하나님께 관심을 기울이게 만든다. 또한 사랑은 모든 찬양과 영광을 그리스도에게 올려드린다.

겸손(Humility) - 겸손은 하나님의 능력이 자기의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래 통제되어 사용될 선물임을, 또한 올바른 능력 사용법을 가르쳐준 사람의 지시에 따라 사용될 선물임을 깨닫는다.

절제(Restraint) – 절제는 개인의 평판을 견고히 하기 위해서, 다른 이의 욕망을 따르기 위해서, 혹은 불신을 없애려는 용도로 능력 사용하기를 거절한다. 또한 하나님의 정하신 때보다 앞선 때에, 은사와 부르심을 좇아가도록 사람들을 격려하는 일도 거절한다. 예수님은 특정한 상황에서만 모든 사람들을 치유하시고 귀신을 쫓으시면서 능력 가운데 행하셨다. 그러나 다른 상황에서는 치유하는 일을 절제하셨다. 죽은 이를 살려내는 일도, 예언의 말씀을 선포하는 일도 절제하셨다.

희락(Joy) – 희락은 하나님의 임재 안에 들어갔다는 증거이다. 그의 임재는 희락으로 충만하기 때문이다-주변 환경을 감싸고 있는 어둠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희락의 마음으로 능력을 풀어내는 사람은 그리스도의보혈이 대적의 모든 궤계를 이긴다는 사실을 확실히 알고 있다.

온유(유약함/Vulnerability) – 온유는 능력이 있다고 다른 이를 압제하거나 통제할 권한이 있는 것이 아님을 깨닫는다. 능력이 발휘되었다고 해서 실력자가 힘을 소유하고 있다는 증거가 수는 없다. 하나님의 진정한 능력은 우리의 연약함 가운데 온전해지기 때문이다.

순종(Submission) – 순종은 그리스도의 머리되심을 인정하는 것이다. 또한 성령의 능력을 받는 과정과 은사가 개발되는 과정 속에서 우리가 지혜롭게 행할 있도록 돕고, 여러 가지 지침과 격려의 말을 전해줄 있는 사람에게 리더십을 인정해주는 것이다.

자유(Freedom) – 자유는 극한 상황에 처해있는 삶을 이용하거나 통제하기 위해 능력을 사용하지 않는다. 예수님은 자유함 가운데 치유하셨고, 귀신을 쫒으셨고, 군중을 먹이셨다. 그들 모두는 감사하는 마음으로 예수님이 바라시리라 생각되는 일이라면 뭐든지 하려고 했던 사람들이다. 이를테면 그리스도를 땅의 왕으로 삼기 위해 유대관료들, 로마관료들을 몰아내는 .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을 조종하지 않으려고 무던히 애쓰셨다. 또한 자신을 따르라고 강권하지 않으려고 분투하셨다. 대신 그들이 스스로 결정할 있도록 그들에게 힘을 부어주셨다.

성령의 내주하심  우리 모두는 자기기만과 자기파멸의 위험 속에 살고 있다. 앞으로 책에 펼쳐질 내용을 통해 당신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예수 그리스도와의 깊은 교제를 이루지 못하며, 진정한 능력 얻는 일에 실패하면, 결국 환상과 자기파멸로 이러질 오염된 능력의 발휘만이 남게 된다는 사실을 보게 것이다. 성령과의 인격적인 만남이 없고, 그의 진정한 능력을 받지 못할 경우 우리는 자기기만에 빠지게 된다.

국제적으로 알려진 사역자이며 오늘날 은사주의적 치유운동의 선두주자인 마헤쉬 차브다는 그의 저서(The Hidden Power of the Blood of Jesus 예수의 피에 숨겨진 능력)에서 다음과 같이 경고했다. “하나님은 우리를 성령의 거주지로서 창조하시고 의도하셨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령을 거부하면 남는 것은 대적의 영뿐이다.”

찰스 피니(Charles Finney) 의해 시작된 2 대각성(The Second Great Awakening) 영계(靈界) 문을 열어 많은 사람에게 성령을 만날 기회, 구원을 얻을 기회를 제공해주었다. 이러한 부흥운동으로부터 설교의 새로운 기술이 탄생하였다. 종교적 예식과 사고의 특이 깨졌고, 사회 정의 , 인종 간의 평등 개념이 꿈틀대기 시작했다. 부흥은 장차 일어날 근자의 은사주의 운동 오순절 운동을 위한 길을 예비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2 대각성이 길을 예비해준 것은 은사주의 운동과 오순절 운동뿐만이 아니었다.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강신술에 관심을 갖게 만든, 거짓 영계의 현상들에도 길이 열린 것이다. 쇠퇴기에 이른 부흥은 영적 공황을 남겼고 이에 근대적 강신술과 신비사술의 부흥이 태동하였다. 성령을 거부한 사람들을 지식제일주의, 열렬한 칼빈주의, 혹은 냉담한 영향력에 스스로를 내던졌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의 영역으로 들어간 사람들은 거침없는 기세로 영광으로 영광에 이르기 위한 걸음을 걸어왔고, 시대의 마지막-종국엔 능력의 충돌로 절정에 이를 시대-까지 진정한 성령의 능력을 발휘할 것이다. 이것은 역사가 증거 하는 바이다. 크리스천들은 누구를 섬겨야 할지 선택해야 한다. 현재를 위해, 하나님의 계획 속에 자신의 입지를 관철시켜야 한다. 또한 하나님의 나라를 위로 풀어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땅은 우리의 대적이 활개 치는 광활한 거주지로 변할 것이다.

<초자연적 능력의 회전하는 그림자/줄리아 로렌/ 존슨/마하쉬 차브다/순전한나드>

성도의 최대 사명 – 빌 존슨

최고로 값진 보물은 하나님 자신이다. 최고의 명예는 그분을 나타내는 쓰임받는 것이다. 세계에 산재한 하나님의 백성들은 주께서 더욱 현저하게 나타나시기를 울부짖고 있다. 그것은 건전한 울부짖음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수년간 그와 같은 기도를 드렸음에도 하나님의 방문을 체험하지 못한 사람들로 역사는 그득하다. 부흥에 관한 서적을 집필한 사람들조차도 자신이 직접 기적을 체험해 보지 못한 사람들이 있다.

하나님을 직접 체험하는 것이 그렇게도 어려운가? 예수님은 아무 데라도 나타나신다. 그분은 자신이 나타나는 장소에 대해 그렇게까지 까다롭지 않으시다. 예수님은 말구유도 마다하지 않고 탄생하시지 않았는가? 물론 하나님은 국왕과 같은 권위를 가지신 분이라 아무 데나 출현하시지 않는다고 설명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성취되지 않는 약속을 하나님의 주권이라는 범주 안에 집어넣어 주님의 신비함 안으로 가려버리는 것은 온당치 않다고 생각한다. 덧붙여서, 우리가 체험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 하나님을 비난하는 행위는 더욱 불공평하다고 생각한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귀신들린 아이 하나를 고치지 못한 사건이 있다. 그들은 기적이 일어나지 않은 것이 하나님의 주권 속한 것이라고 하면서 합리화시켜 버리지 않았다(9:28 옮긴이) 설명을 요구하는 제자들의 요구에 응해서, 예수님은 그리고 어떻게 귀신들린 아이를 해방시킬 있는지 보여 주셨다. 다른 말로 하자면, 하나님의 주권을 들먹이며 기적이 없음을 합리화시키지 말자는 것이다. 초자연적인 개입이 없는 것은 하나님 탓이 아니다. 기적의 부재는 인간 편의 문제이다. 주님의 약속은 완전하며, 신자라면 누구에게라도 유효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주의 증거를 선망하는 정성으로, 주의 증거 기꺼이 지킬 의향 보이면, 하나님은 그분의 임재를 우리 안에 얼마든지 머물게 하실 것이다. 얼마나 주님의 임재가 우리와 함께할 있는지 상상조차 가질 않는다. 아직 거듭나지 못한 모세는 (왜냐하면 예수님이 죄인들을 위해 돌아가시기 이전이므로), 오늘날의 형편과 비교해 보면, 엄청난 주님의 임재를 체험했다. 그러나 그것은 비정상이다. 오늘날 모든 신자들이 예수님의 피로 인해 모세가 체험했던 것보다 휠씬 영광을 체험해야 그것이 정상이 아닐까(고후3:7-11).

하늘의 조화 앞서 진술했듯이, 하늘의 자원은 선언을 통해 방출된다. 그렇기에 주의 증거(혹은 간증) 효과적인 것이다. 각각의 증거에는 하나님의 속성과 그분의 언약에 관한 계시 들어 있다. 그래서 주의 증거가 선포될 때에, 하늘의 자원이 방출되기도 하고 새로운 환경이 조성되기도 한다.

예수님은 말씀이 육신이 되신 분이다. 예수님께서 말하셨을 적에 말들은 영이었다. “살리는 것은 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은 이요 생명이라”(6:63). 성도들은 주변의 현실에 영향을 끼칠 만한 말을 하도록 부름받은 사람들이다.

우리가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을 때에, 듣는 이들은 천국의 영향을 받게 된다. 예수님이 하신 말들이 영이 것처럼, 우리들이 하는 말도 영이 된다. 그러면 주변에 막대한 영향을 주게 된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말씀을 전함으로써 현실을 변화시키는 것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말씀을 전함으로써 현실을 변화시키는 것보다 중요한 일은 아마 없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말씀을 통해 현시하신다는 사실에 주목하기 바란다. 우리들의 말에 생사가 달려 있다는 말고도, 우리가 하는 말이 하나님의 마음으로부터 시발된 것이며,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말을 타고 오신다는 점에 유의하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마음으로부터 나오는 말씀을 듣는 모든 신자들이 열중해야 일이다. 왜냐하면 물어야 믿음이 생기고(10:17), 믿음이 생겨야 하나님의 임재가 가까이 풀어놓아지기 때문이다. 이보다 책임이나 특권을 나는 생각할 없다.

<예수의 권세를 땅에 풀어 놓아라/ 존슨/Shekina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