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고로 값진 보물은 하나님 자신이다. 최고의 명예는 그분을 나타내는 데 쓰임받는 것이다. 전 세계에 산재한 하나님의 백성들은 주께서 더욱 현저하게 나타나시기를 울부짖고 있다. 그것은 건전한 울부짖음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수년간 그와 같은 기도를 드렸음에도 하나님의 방문을 체험하지 못한 사람들로 역사는 그득하다. 부흥에 관한 서적을 집필한 사람들조차도 자신이 직접 기적을 체험해 보지 못한 사람들이 있다.
하나님을 직접 체험하는 것이 그렇게도 어려운가? 예수님은 아무 데라도 나타나신다. 그분은 자신이 나타나는 장소에 대해 그렇게까지 까다롭지 않으시다. 예수님은 말구유도 마다하지 않고 탄생하시지 않았는가? 물론 하나님은 국왕과 같은 권위를 가지신 분이라 아무 데나 출현하시지 않는다고 설명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성취되지 않는 약속을 ‘하나님의 주권’이라는 범주 안에 집어넣어 주님의 신비함 안으로 가려버리는 것은 온당치 않다고 생각한다. 덧붙여서, 우리가 체험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 하나님을 비난하는 행위는 더욱 불공평하다고 생각한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귀신들린 아이 하나를 고치지 못한 사건이 있다. 그들은 기적이 일어나지 않은 것이 하나님의 주권에 속한 것이라고 하면서 합리화시켜 버리지 않았다(막9:28 옮긴이) 설명을 요구하는 제자들의 요구에 응해서, 예수님은 왜 그리고 어떻게 귀신들린 아이를 해방시킬 수 있는지 보여 주셨다. 다른 말로 하자면, 하나님의 주권을 들먹이며 기적이 없음을 합리화시키지 말자는 것이다. 초자연적인 개입이 없는 것은 하나님 탓이 아니다. 기적의 부재는 늘 인간 편의 문제이다. 주님의 약속은 완전하며, 신자라면 누구에게라도 유효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주의 증거를 선망하는 정성으로, ‘주의 증거’를 기꺼이 지킬 의향만 보이면, 하나님은 그분의 임재를 우리 안에 얼마든지 머물게 하실 것이다. 얼마나 더 큰 주님의 임재가 우리와 함께할 수 있는지 상상조차 가질 않는다. 아직 거듭나지 못한 모세는 (왜냐하면 예수님이 죄인들을 위해 돌아가시기 이전이므로), 오늘날의 형편과 비교해 보면, 엄청난 주님의 임재를 체험했다. 그러나 그것은 비정상이다. 오늘날 모든 신자들이 예수님의 피로 인해 모세가 체험했던 것보다 휠씬 더 큰 영광을 체험해야 그것이 정상이 아닐까(고후3:7-11).
※ 하늘의 조화 – 앞서 진술했듯이, 하늘의 자원은 선언을 통해 방출된다. 그렇기에 주의 증거(혹은 간증)가 효과적인 것이다. 각각의 증거에는 하나님의 속성과 그분의 언약에 관한 계시가 들어 있다. 그래서 주의 증거가 선포될 때에, 하늘의 자원이 방출되기도 하고 새로운 환경이 조성되기도 한다.
예수님은 말씀이 육신이 되신 분이다. 예수님께서 말하셨을 적에 그 말들은 영이었다.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은 영이요 생명이라”(요6:63). 성도들은 주변의 현실에 영향을 끼칠 만한 말을 하도록 부름받은 사람들이다.
우리가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을 할 때에, 듣는 이들은 천국의 영향을 받게 된다. 예수님이 하신 말들이 영이 된 것처럼, 우리들이 하는 말도 영이 된다. 그러면 주변에 막대한 영향을 주게 된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전함으로써 현실을 변화시키는 것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전함으로써 현실을 변화시키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은 아마 없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말씀을 통해 현시하신다는 사실에 주목하기 바란다. 우리들의 말에 생사가 달려 있다는 것 말고도, 우리가 하는 그 말이 하나님의 마음으로부터 시발된 것이며,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말을 타고 오신다는 점에 유의하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마음으로부터 나오는 말씀을 듣는 건 모든 신자들이 열중해야 할 일이다. 왜냐하면 물어야 믿음이 생기고(롬10:17), 믿음이 생겨야 하나님의 임재가 가까이 풀어놓아지기 때문이다. 이보다 더 큰 책임이나 특권을 나는 생각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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