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과 사람에 대한 성도의 최대의 책무는 복음을 멋진 설교로 전하는 것도 아니고, 초자연적인 기적을 일으키는 것도 아니다. 혹은 유창한 언어로 복음을 설명하며 일대일 전도를 하는 것도 아니다. 성도의 최대의 의무는 하나님을 알고 그분을 알리는 것이다. 그것을 최대한 효율적으로 하는 법을 터득하는 것이 성도의 마음을 사로 잡아야겠으며, 일생을 과업이 되어야 할 것이다.
적어도 지난 20년 이상, 나는 ‘사람들을 하나님과 만나게 해주는 일에 빚진 자다’라는 신념에 사로잡혀 살아왔다. 그것은 단지 진리로 가득한 메시지를 전하는 것 이상이었다. 내가 어떤 일을 하든지, 그것을 통해 사람들이 하나님과 직접 마주치는 기회가 제공되기를 원했다. 내가 성령 충만하다면, 나의 설교, 봉사, 그리고 각종 목회사역을 통해 그런 기회들이 제공되리라 믿어 왔다.
사도 바울의 다음과 같은 진술은 바로 그런 점을 부분적으로 나타내준다.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하여”(고전2:4). 즉, 복음 전하는 인간의 통찰력, 재능, 능력에 의존해서 사람들을 설득하려 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물론 전혀 쓸데없는 건 아니지만, 단지 이차적인 중요성만 가질 뿐이다. 인간에게 필요한 건 하나님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권능에 맞닥뜨리는 건 그분과 직접 마주치는 것이다. 사도 바울에게는 그런 신앙의 확신이 있었다.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였노라”(고전2;5).
※ 풀어놓는 법을 배우자 – 하나님은 언약의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그분의 자녀와 모종의 협정을 체결할 정도로 전능하시고 자신만만하시다. 나는 그런 관계를 일종의 계약으로 간주하고 싶지 않다. 계약이라는 단어는 법적인 용어로, 딱딱하고 황량한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나는 ‘관계의 울타리’라는 개념을 선호한다. 순종함으로써 예수님을 닮아 가면, 주님의 임재, 주님의 능력, 주님의 영광이 풀어놓아진다.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지만, 주님은 인간의 의견이나 제안에도 귀기울이신다. 주님은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고 약속하신 분이다(요15:7). 주님이 우리를 처음에 로봇처럼 만들고, 나중에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고 말했다면 그것은 어불성설이다. 하나님은 그분의 아들처럼 되는 모든 이들을 신뢰하신다. 그렇다면, 부서진 인생에 하나님의 권능이 나타나도록 애타게 열망하는 건 정상이 아니겠는가.
권능의 개입 없이, 하나님을 적합하고 정확하게 표현할 길은 없다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명백하게 보도록 인도하는 데는 기적이 반드시 수반되어야 한다. 신자들은 이 세상에 대해 그런 ‘기적들을 증언하는 빛’을 진 사람들이다. 신자가 그런 증언을 입을 열기 시작하면, 하나님이 오셔서 그분의 말씀을 직접 확증하신다.
주님은 그분께 온전히 순복하는 자를 사용해 그분을 계시하신다. 역사를 통해 보듯이, 그분이 나타나실 때에는 종종 눈부신 장관이 펼쳐지기도 하고 극적인 사건이 발생하기도 한다. 그분의 백성을 통해 현시하실 때에 때론 놀랄 만하지만, 또한 평범하고 실용적인 경우도 있다.
나는 흔히 헤매다가 우연찮게 진리를 발견하곤 한다. 나는 대개 충분히 이해하기도 전에 먼저 그 결과부터 본다. 순종의 삶만 산다면, 어떤 일이 발생한다 해도, 결과적으로는 배움의 기회가 될 게 확실하기 때문이다. 다르게 표현하자면, 순종하기 위해 완전히 이해해야 할 필요가 없다는 말이다.
순종에는 반드시 열매가 뒤따른다. 그러나 열매가 존재하는 이유는, 그 배후에 있는 신비를 추구하게 하려 함이다. 순종을 통해 권세와 권능이 방출될 때에, 하나님의 나라의 원리들을 전부 다 이해할 필요는 없다. 그렇지만, 이해하지 못하면 그분의 임재를 풀어놓는 기회가 적어지고, 다른 이들도 동일한 일을 하도록 훈련시킬 수 없게 된다.
나의 경험에 의하면, 하나님의 임재가 방출하는 건 아래의 5가지 원리에 입각해서 이루어진다고 생각한다. 그것은은 안수, 기름부으심에 근접함, 믿음의 행위, 예언적 행동, 그리고 선언이다. 우선 안수는 성경의 지시이고, 기독교의 기본 교리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의 초보… 죽은 행실을 회개함과 하나님께 대한 신앙과 세례들과 안수와 죽은 자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에 관한 교훈의 터…”(히6:12).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 가운데’ 있는 이유로, 믿음으로 손을 대면 능력이 방출된다. 안수는 치유, 축복, 혹은 은사의 전이를 위한 의도적인 행위이다(막16:18; 딤전4:14). 손대면 방출된다는 원리이다.
둘째는, 기름 부으심이 발생하는 곳과 근거리에 있어야 한다는 원리이다. 병자를 베드로 사도의 그림자가 있는 곳에 가져다 놓으니 치유가 발생했던 사건을 실례로 들 수 있다. 능력의 그림자가 드리워진 곳은 그 능력이 미치는 곳이다. 예수님의 옷자락도 이 범주에 들어간다고 볼 수 있다. 예수님은 혈루증을 앓고 있던 여인에게 병 낫기를 위해 의도적으로 안수한 것이 없다(막5:28-29). 마가복음 6장 56절은 이런 원리를 증명해 준다. “아무 데나 예수께서 들어가시는 지방이나 도시나 마을에서 병자를 시장에 두고 예수께 그의 옷 가에라도 손을 대게 하시기를 간구하니 손을 대는 자는 다 성함을 얻으니라.” 그와 비슷한 사건이 사도 바울에게도 일어났다. “하나님이 바울의 손으로 놀라운 능력을 행하게 하시니 심지어 사람들이 바울의 몸에서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가져다가 병든 사람에게 얹으면 그 병이 떠나고 악귀고 나가더라”(행전19:11-12). 위의 모든 경우는 하나님의 능력이 충만하게 임한 곳과 근접해야 그 능력을 체험할 수 있다는 걸 보여 준다.
물리적인 위치는 하나님 나라의 기름부으심을 풀어놓는 데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최근에 우리 교회에서 한 귀머거리 환자에게 치유의 방으로 들어가려고 했다. 그런데 그가 치유의 방으로 걸어 들어가는 바로 그 순간에 귀가 열렸다. 그리고 또 다른 귀머거리 환자는 치유의 방 쪽으로 스쳐 지나가다가 치유함을 받았다. 그는 지상에 존재하는 천국의 대기권 안으로 들어온 것이다. 이런 능력의 방출은, 어떤 특정한 행위를 하는 순간 발생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임재가 머무르는 곳 근처를 지나갈 때에 발생하는 것이므로, 그렇게까지 명확하게 체험되는 것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능력이 방출되려면 먼저 능력이 어느 특정 장소에 머물러야 하는 것에 주목하기 바란다.
셋째는, ‘믿음의 행위가 천국의 능력을 풀어 놓는다’는 원리이다. 믿음에는 항상 행위가 뒤따라야 한다. 이 원리는 성경적으로 증명하기 가장 쉬운 원리이다. 예수님은 많은 경우에, 타인이 대신 믿음으로 구하더라도 치유의 기적을 베풀어 주셨다. 마태복음 8장 10절을 보면,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도 그만한 믿음을 본 적이 없다고 하시며, 예수님께서 백부장의 믿음에 경탄하셨다는 내용이 나온다. 백부장은 로마제국의 고위 관리이지 유대인이 아니다. 그렇지만 그의 믿음은 예수님을 완전히 사로잡았다. 하나님의 이목을 끌어 그분을 우리의 난제가 있는 상황 쪽으로 돌아보게 하는 그런 믿음을 나는 좋아한다. 하나님을 기쁘게 하려면 반드시 믿음이 필요하다. 그리고 나는 항상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리고 싶다.
넷째는, 예언적 행위의 원리인데, 좀 특이한 것이다. 왜냐하면 보이는 행동이 원하는 결과와 직접적인 상관관계를 나타내지 않기 때문이다. 예컨대, 엘리사는 예언자들의 아들들의 “아아-” 하는 비명 소리를 들었다(왕하6장). 나무를 베다가 빌려온 쇠도끼를 물이 떨어뜨렸기 때문이다. 그런데 엘리사는 나뭇가지를 베어 물에 던져 쇠도끼를 떠오르게 했다. 나뭇가지에는 쇠도끼를 끌어 잡아당기는 속성이 없다. 그러나 그런 기적이 발생했다. 그러므로 이 기적은 순종의 결과라고밖에는 해석할 수 없다. 쇠도끼는 떠오르게 하는 것과 엘리사가 한 행동 사이에는 아무런 논리적인 연관관계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뭇가지를 던지지 않았다면, 쇠도끼는 떠오르지 않았을 것이다. 물리적인 순종은 일종의 예언적 행위가 되어 기적을 방출한다.
마지막은 선언(선포)의 원리인데, 이 원리가 본서의 주요 쟁점이다. 선언이 없이 하나님의 나라에서 발생하는 건 하나도 없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인간이 받아서 선언하게 되면, 천국의 것이 이 땅에 실질적이니 결과로 나타난다. 특히 그 선언이 ‘주의 증거’ 인 경우는, 하나님께서 인류를 다루시는 그 역사의 여세에 편승하게 된다. 그러면 창조적인 예언의 능력이 지상으로 방출되고, 지상에 하나님의 계시가 수립된다.
그런데 위와 같은 행위를 간헐적으로나 혹은 무심코 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위의 원리들은, 이제 이 마지막 때에 그리스도의 군대의 계획된 전략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속성과 그분의 임재를 모든 이들이 볼 수 있도록 과시하는 자들이 바로 성도들이라는 신념으로 불타 올라야 한다. 신자라면 누구라도, 그의 간증 한에 하나님의 속성을 드러내는 그런 비범한 계시를 소유하고 있다. 물론 그런 것들은 세상이 보기에는 비범한 것들이다. 그러나 성도들에게는 평범한 것일 수도 있다. 기적이 일상이 되는 그런 삶, 그것이 바로 이 세상이 보고 듣기 원하는 것이다.
신자는 열방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에 집중해야 한다. ‘주의 증거’를 간증함과 그에 부어지는 성령의 기름부으심으로, 열방이 하나님께로 돌아올 것이며,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서 이루어질 것이다. 이것이 바로 모든 것을 우리에게 기접(유업)으로 주신 이유이다(요16:15; 고전3:21)
<예수의 권세를 땅에 풀어 놓아라/빌 존슨/Shekina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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