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4/2009

사랑과 지혜의 탈무드 - 혀 길들이기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크산투스는 그의 친구들을 만찬에 청하려고 하인 이솝에게 시장에 가서 최고급 요리 재료들을 사오라고 일렀습니다. 그러나 이솝이 사온 것은 혀 뿐이었습니다.

화가 난 크산투스는 어떻게 해서 혀만 사왔느냐고 호통을 쳤습니다. 그러자 이솝이 말합니다. “저는 명령하신 대로 가장 좋은 요리재료를 사왔습니다. 혀보다 더 좋은 것이 어디 있습니까? 혀야말로 문명사회의 결속물이고 진실과 이성의 기관이며 신에 대한 저희들의 사랑과 찬미의 기구가 아니겠습니까?”

다음날 크산투스는 하인에게 다시 시장에 가서 이번에는 가장 나쁜 요리재료를 사오게 하였습니다. 그러자 이번에도 이솝은 혀를 사들고 왔습니다. “뭐라고! 이번에도 혀를 사왔어?” 이솝은 대답했습니다. “혀라는 것은 확실히 이 세상에서 가장 나쁜 것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것은 투쟁과 다툼을 일으키는 도구이고 분규와 분쟁의 근원이기 때문입니다”.

삼위일체 반대론 - 가현설 2


삼위일체 반대론 - 가현설 1


삼위일체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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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속성 11 - 여호와의 선하심

여호와의 선하심(키-토브 예호와)

성서는 선의 본질이 무어라고 정의를 내리지 않는다. 왜냐하면, 성서에서 이 선은 독립적인 실재가 아니며, 또한 그 자체로서는 본질상 다른 어떤 개념이나 실재와 더불어 비교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나님 자신이 선이며, 이 선은 하나님을 제외하고는 생각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뜻한 바가 곧 선이다. 하나님을 아는 자, 하나님을 체험한 자는 다만 찬양할 수 있을 뿐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선하시기 때문이다. 역사에 있어서의 하나님의 계시는 그의 선하심을 나타내 준다. 그리고 하나님은 선하시므로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모든 것은 선하다. '우리는…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엡2:10). 인간이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지 않는 한 선을 이룰 수 없다. 그리스도는 모든 선한 것의 집약인 동시에 성취이기 때문이다.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막10:18). 어떤 부자 청년이 예수님을 '선한 선생'이라 부르면서 어떻게 해야 영생을 얻을 수 있는지를 물었습니다. 이 때 예수님은 이 질문의 대답에 앞서 먼저 그 청년의 '선'에 대한 시각을 바로 잡아 주시기 위해서 이 말씀을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에 '선'이란 수식어가 붙은 많은 사물들이 있지만 참으로 선한 분은 하나님 한 분이심을 깨닫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이 창조한 모든 피조물을 선하게 다스리시는 '선의 근원'이시며 또한 모든 피조물이 바라보아야 할 '최고 선'입니다. 이러한 내용들에 대해 함께 생각하도록 하겠습니다.

1. 일반 피조물을 향한 하나님의 선
'여호와께서는 만유를 선대하시며 그 지으신 모든 것에 긍휼을 베푸시는도다…손을 펴사 모든 생물의 소원을 만족케 하시나이다'(시145:9,16). 일반 피조물을 향한 하나님의 자선은 창조주되신 하나님이 자신의 피조물인 모든 생물들에 대하여 가지시는 애정입니다. 이 하나님의 자선은 자연의 전구조에 계시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인간은 다른 피조물과는 달리 더 많은 하나님의 자선을 받았습니다. 이것은 인간으로 하여금 찬양을 받으시려는 하나님의 특별한 배려와 관심에 따른 것입니다.

2.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요3:16). 하나님의 선이 인간들을 향해서 베풀어 질 때 성경은 '사랑'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가 죄인이었을 때 그의 독생자의 죽음으로 인간에게 베풀어진 것으로 이 사랑을 힘입어 구원받은 자들은 더 큰 하나님의 사랑을 받게 됩니다(참조; 요16:27). 또한 현재 회개치 않은 죄인일지라도 자신의 형상으로 지음받았기에 하나님은 그의 사랑을 완전히 철회하시지 않으시고 그가 회개하고 돌아올 때까지 언제까지 기다리십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사랑은 그의 선하신 속성을 잘 나타내 준다고 하겠습니다.

3. 하나님의 은혜
성경에서 '은혜'는 중요한 용어입니다. 성경에 의하면 '은혜'는 하나님의 속성일 뿐 아니라, 사람과 사람 사이의 총애를 의미하기도 합니다(참조; 창33:8; 룻2:2). 그러므로 보통 은혜는 '청구권 없는 사람에게 값없이 인자를 베풀어 줌'이란 의미를 지닙니다. 하지만 이 은혜가 '하나님의 은혜'로 쓰일 때는 그 의미가 좀더 강화됩니다. 즉 이 때 은혜는 '사랑을 상실했거나 또는 본래부터 정죄의 선고 아래 있는 자들에게 하나님께서 무상으로 베푸시는 선 또는 사랑'을 의미합니다.

이같이 하나님의 은혜는 죄인들에게 베풀어지는 모든 영적 행복의 원천인 것입니다(참조; 엡1:6,7; 딛2:11). 이 하나님의 은혜로 인하여 죄인들에게 구원의 길이 열리었으며(참조; 롬3:24), 구원의 소식이 전파되었고(참조; 행14:3), 죄인들이 의롭게 되었으며(참조; 롬4:16; 딛3:7), 마침내 구원을 받게 되었습니다(참조; 엡2:8). 이러한 하나님의 은혜를 인간의 노력이나 요구로 주어진 것이 아닌 전적으로 하나님 편에서 주어진 인간의 구원을 위한 선물입니다.

4. 하나님의 긍휼
하나님의 긍휼은 다른 말로 '불쌍히 여김' 혹은 '민망히 여김'으로 표현되는 선하신 하나님의 또 다른 한 면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긍휼은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의 바탕이 되는 것으로 하나님으로 하여금 그가 지은 피조물들의 고난에 대하여 동정을 느끼게 하고, 마침내는 구원을 계획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긍휼은 구약에서는 크고 영구한 것으로(참조; 시57:10;대하7:6;스3:11), 신약에서는 하나님의 은혜와 함께 언급되었으며, 특히 서신서의 인사말에서 많이 나타납니다(참조; 딤전1:2;딛1:4).

5.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
'주여 주는 긍휼히 여기시며 은혜를 베푸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자와 진실이 풍부하신 하나님이시오니'(시86:15).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은 그의 '선함'의 또 다른 방편입니다. 이것이 회개하지 않는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선으로 하나님은 구약 여러 곳에서 죄인들의 악을 당장 벌하시지 않으시고 그들이 회개할 때를 기다리시는 분으로 묘사되어 왔습니다(참조; 욘4:2;욜2:13). 그리고 이 오래 참으심은 신약에서는 그리스도의 오래 참으심으로 나타났습니다(참조; 딤전1:16). 이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으로 말미암아 죄인 된 우리도 당장 멸망당하지 아니하고 구원을 얻게 된 것입니다.

지금도 우리는 '선'이란 수식어가 붙은 말들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살펴본 대로 이 수식어는 인간이나 다른 피조물에게는 적용될 수 없는 단어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이나 피조물은 유한한 존재이며, 죄로 물든 존재이기 때문에 이 단어는 오직 하나님께만 사용될 수 있는 단어입니다. 인간은 단지 선하신 하나님이 베푸신 사랑과 은혜, 긍휼, 오래 참으심으로 인해 구원받을 때 비로소 선해질 수 있으며, 선을 베풀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 하나님의 선은 인간에게 항상 풍성히 임함(시31:19)
☆ 하나님의 선은 죄사함에서 나타남(시86:5)

1. 일반 피조물을 향한 하나님의선

하나님의 선
사람에게 만족스러움(시65:4,5) 자비와 은혜로 인간에게 베푸심(출3:46,7) 세상 모든 것을 선대하심(시145:9) 인간에게 크게 임하심(시31:19) 항상 있음(시52:1)

하나님의 선이 나타난 증거
인간에게 결실하게 하심(행14:17) 영적인 은혜로 나타냄(시31:19) 죄를 사하심(시86:5)

하나님의 선에 대한 성도의 태도
기뻐함(출18:9) 찬양함(시145:7) 하나님의 은혜를 만족함(렘31:14)

2.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
그리스도인(살후2:16) 독생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요3:35)

하나님의 사랑이 나타난 증거
이스라엘을 무궁한 사랑으로 인도해 내심(렘31:3) 죄인을 위해 독생자를 보내심(요8:42) 죄인을 위해 독생자를 희생시키심(롬5:8) 하나님의 역사가 독생자 예수그리스도로 인해 드러남(요5:20) 성도를 위해 성령을 보내어 주심(롬5:6)

하나님을 사랑하는 성도
하나님의 계명을 지킴(신7:9)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함(신19:9) 하나님을 경외하며 모든 도를 행함(신10:12) 말씀을 순종하고 하나님께 엎드려 축복함(신30;20) 마음과 성품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함(신6:5) 교회와 성도 간에 덕을 세움(고전8:1)

하나님을 사랑하는 성도에게 내리는 축복
천대까지 은혜를 입음(신7:9) 위험에서 건짐을 받음(시91:4) 하나님의 성산으로 인도됨(사56:6,7)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됨(롬8:28)

3. 하나님의 은혜

하나님의 은혜의 범위
신자에게(빌4:19) 불신자에게(행14:15)

하나님의 은혜를 얻은 성도의 결과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음(롬3:24)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 얻음(롬3:24) 하나님의 일꾼이 됨(엡3:7) 즐겨 구제함(고후9:8) 그리스도의 영광을 사모하게 됨(딛2:13)

4. 하나님의 긍휼

긍휼에 대한 성경의 묘사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이 무궁하심(애3:22) 멸하지도 않고 버리지도 않는 긍휼이 크심(느9:31) 긍휼이 사랑으로 나타났음(엡2:4) 선민에 대한 긍휼이 불붙듯하심(호11:8) 영원부터 있는 긍휼임(시25:6)

하나님이 긍휼히 여기시는 자
가난한 자와 궁핍한 자(시72:13) 포로된 자(렘33:26) 하나님이 불쌍히 여기실 자(롬9:15-18) 고아된 자(호14:3) 죄를 자복하고 버리는 자(잠28:13)

5. 하나님의 인내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
이유 - 멸망에 이르는 자를 적게 하시려고(벧후3:9) 사람을 사랑하시므로(고전13:4) 능력을 보이시려고(롬9:22)

오래 참으시는 때
진노를 오래 참으심(롬9:22) 구원의 때를 기다리심(벧전3:20) 성도의 회개를 기다리심(롬2:4)

성도의 인내
성령의 열매로써 가능함(갈5:22) 그리스도인의 미덕임(엡4:2) 하나님의 일을 할 때 필요함(고후6:4-6) 하나님의 약속하신 기업을 받기 위해 필요함(히6:12,15)


하나님의 속성 10 – 자비로우신 하나님

1) 큰 긍휼로(우베라하밈 께돌림)

본문에서 '긍휼'로 번역된 단어(라하밈)은 '자궁'이라는 뜻의 명사(레헴)에서 유래되었다. 따라서 히브리인들이 하나님의 긍휼을 말할 때에 그들은 생명을 잉태하고 보호하여 출산하는 어머니의 자궁을 연상한다.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에 의하여 출생하였다(참조; 욥31:15).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은 임신에서 출생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의 특별한 보호를 받는다(참조; 사46:3). 따라서 하나님(라하밈)은 이스라엘로 하여금 다양한 상황 속에서 하나님의 자비가 거져 주시는 그의 사랑과 은혜에 근거한 것임을 믿게한다.

2) 영원한 자비로(우베헤세드 올람)
오랫동안(헤세드)란 단어는 '자비, 친절, 사랑'으로 번역되었다. 그러나 고대 근동 문헌에 대한 활발한 연구의 결과로 그 단어에 대한 새로운 의미를 발견하게 되었다. 히타이트의 계약들이난 다른 계약 문서들에서처럼, 이스라엘은 계약에 의해서 하나님에게 구속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런 관계 속에서 하나님의(헤세드)는 '자비'가 아니라, '계약 의무들에 대한 충성'을 나타낸다는 것이다. 이것은 이스라엘이 그의 하나님에게 보여야 하는 충성이기도 하다.

구약성경 호세아서를 읽어 보면 음란한 아내 '고멜'을 용서해 주는 호세아의 사랑에서 우리는 다시 한 번 하나님의 자비를 생각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자기를 배반한 이스라엘을 찾아서 사유하시고 구원하신다고 말씀하고 있으며(참조; 호2:19;호11:8), 또한 제사보다 자비를 중요하게 여기시기 때문에 우리들에게도 자비를 베풀며 살아가라고 권면하고 계십니다(참조; 마9:13). 초대 교회의 예배에서 축복의 권면에는 반드시 자비하는 용어를 사용함으로써 주님의 사랑을 확인시켜 주었습니다(참조; 딤전 1:2;요이1:3). 이제 자비로우신 하나님에 대해 살펴봄으로 은혜를 받도록 하겠습니다.

1. '자비'의 성서적인 고찰

1) 자비하심의 본질
하나님의 자비하심은 영원 무궁하시며(참조; 시103:17), 한량없이 땅에 충만하며(참조; 시108:4;시119:64), 배역한 자식들을 돌아오게 만들어 생명을 연장시키며(참조; 애3:22-23), 죄를 회개하도록 백성들의 마음을 고무시키며(참조; 욜2:13)죄를 용서하여 주시며(참조; 눅1:50), 사람을 거듭나게 만드십니다(참조; 딛3:5)

2) 자비하심의 약속
구약성경은 특히 자비하신 하나님에 대한 언급을 많이 하고 있습니다(출34:7;시89:28;렘3:12)

3) 자비하심의 권면
하나님께서는 사람들로 하여금 자비를 베풀 것을 분부하십니다. 눅10:30-37을 보면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났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강도한테 맞아서 거반 죽게 되었습니다. 이 광경을 제사장도 보았고 레위인도 보았지만 피하여 지나갔습니다. 그런데 사마리아인은 불쌍히 여기어서 기름과 포도주를 상처에 붓고 주막으로 데려가다 치료시킨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도 이와 같이 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참조; 마5:7;눅6:36).

2. 하나님의 자비

1) 인간의 창조 사역에서 나타남
창1:26,27을 보면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려고 계획을 세우셨을 때 성부, 성자 성령님이 함께 참여하신 사실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즉 '우리'라는 이 말씀이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말해 준다고 볼 수 있습니다.

2) 예수님께서 세례받으실 때 나타남
마3:13-17에 나와 있는 예수님의 세례에서 '성령님이 비둘기 같이' 임하시고, 하나님 아버지는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고 말씀을 하시면서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보여 주고 계십니다.

3) 선교의 현장에서 나타남
마28:19,20에서 주님이 제자들에게 선교의 사명을 강조하시면서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보여 주심으로 그들을 격려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하나님의 자비하신 사역이 세상 끝 날까지 함께 하심을 강조하고 계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3. 자비의 종류
하나님께서는 그 택하신 백성을 언제나 사랑하사 그들이 범죄하였을지라도 그들을 사랑으로 다루십니다. 또 진노 중에서도 긍휼을 기억하시고(참조; 합3:2) 택한 백성에 대하여 '그 노염은 잠깐이요 그 은혜는 평생이로다 저녁에는 울음이 기숙할지라도 아침에는 기쁨이 오리로다'하시면서 시편 기자를 통하여 주님의 자비를 선포케 하십니다. 이제 무궁하신 하나님의 자비에 대해 세 가지만 간략하게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1) 충만한 자비하심
주님께서는 죄에 대한 형벌로 사망과 고통을 주는 대신에 자비와 많은 축복들을 우리에게 주십니다. 예를 들면 구원받게 해주시고 잃어 버린 영혼들에게 건강과 위로와 참된 기쁨들을 주십니다(참조; 시103:8)

2) 영원한 자비하심
하나님의 자비는 유한한 인간들에게 영원토록 무한하게 임하시는 자비입니다. 창8:21을 보면 '여호와께서 그 향기를 흠향하시고 그 중심에 이르시되 내가 다시는 사람으로 인하여 땅을 저주하지 아니하리니'라고 말씀하시면서 노아 시대에 내렸던 홍수를 다시는 내리시지 않겠다는 굳은 의지를 표명하고 계십니다.

3) 측량할 수 없는 자비하심
하나님의 자비는 얼마나 클까요? 하나님의 자비를 측량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은 자기를 의지하는 자에게 자비를 베푸시며 '하늘이 땅에서 높음같이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 그 인자하심이 크심이로다'라고 말씀하시면서 하나님의 자비는 무한히 높고 깊고 넓어서 측량할 수 없음을 말해 주고 계십니다. 예를 들어 회개한 죄인이 용서받기 위하여 예수님에게 돌아올 때 그는 공로를 주장하지 않고 다만 자신을 주님의 자비 앞에 맡길 뿐입니다. 다윗은 시편 51편에서 회개의 기도를 하면서 하나님의 자비를 구하였는데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를 쫓아 나를 긍휼히 여기시며'(시51:1)라고 울부짖었습니다. 이러한 그에게 하나님의 자비는 임하였습니다. 갈보리 산 위에서의 십자가는 죄를 벌하시는 하나님의 공의와 정죄함을 받은 죄인에 대한 하나님의 자비의 표현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어제도 오늘도 그리고 내일도 영원하신 하나님. 자비하신 하나님의 풍성한 긍휼과 사랑과 은혜를 받을 수 있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 자비로우신 하나님은 성도의 죄에 대해 자비를 베푸심(사54:7,8)
☆ 자비는 도움과 위로를 이웃에게 베푸는 행위임(잠14:21)
☆ 자비의 대상은 대적하는 자까지도 포함됨(눅6:34,35)

             1. 자비의 성서적인 의미

하나님의 속성임
패역한 백성을 버리지 않으심(느9:17) 노하기를 더디하시고 긍휼히 여기심(사64:7,8) 사람을 사랑하심(딛3:4)

성령의 열매로 주어짐(갈5:22,23)

빈곤한 이웃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임
과부를 도움(왕상17:9,10) 가난한 성도를 도움(잠14:21) 어려움을 당하는 자를 도움(눅10:30-37) 여인이 갖추어야 할 성품임(잠31:20)

하나님의 일꾼이 갖추어야 할 성품임(고후6:6)

정직한 자의 성품임(시112:5)

이웃에 대한 사랑임
율법을 완성하는 사랑임(롬13:8-10) 원수도 사랑해야 함(마5:44) 지속적으로 사랑해야 함(히13:1)

자비를 베푼 성서 속의 사람
모세를 건져 내어 기른 바로 왕의 딸(출2:6-10) 정탐꾼을 영접한 기생 라합(수2:1-3) 요나단의 아들에게 자비를 베푼 다윗 왕(삼하9:1-3) 압살롬을 도운 요압(삼하14:1-24) 수넵 여인을 도운 엘리사(왕하8:1) 아하시야의 아들 요아스를 구한 여호사브앗(대하22:11) 에스더를 양육한 모르드개(에2:7) 예레미야를 선대한 느부갓네살(렘39:11,12) 마리아를 참아 준 요셉(마1:19) 예수의 어머니를 선대한 사도요한(요19:27) 바울을 도운 총독 벨릭스(행24:24) 바울을 도운 오네시보로(딤후1:16-18)

2. 하나님의 자비하심

그리스도 안에서 자비를 베푸심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허물을 없이하셨음(엡2:14)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의 자비가 나타남(엡2:7,8)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8절)

차별 없는 자비를 베푸심(눅6:35,36)
…그는 은혜를 모르는 자와 악한 자에게도 인자로우시니라(35절)

영원한 자비를 베푸심(사54:8)
내가 넘치는 진노로 내 얼굴을 네게서 너를 긍휼히 여기리라 네 구속자 여호와의 말이니라

크신 자비로 재앙을 내리지 않으심(욘4:2)
…주께서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신 줄을 내가 알았음이니이다

3. 성도의 의무로서의 자비

자비를 베풀어야 할 대상
고아 된 사람(욥29:12), 궁핍한 형제(요일3:17) 약점을 가진 사람(롬15:1) 성도를 핍박하는 사람(롬12:14,15) 시험에 처한 사람(갈6:1,2) 타국인(레19:34) 신앙을 같이하는 성도(엡4:32) 모든 사람(눅6:34,35)

자비를 권면한 사람
모세가 종에 대해 자비를 베풀 것을 권면함(신15:12,13) 지혜자의 권면임(잠25:21) 선지자 이사야의 권면임(사58:7) 그리스도의 권면임(마5:42) 바울 사도의 권면임(롬12:13)

자비를 베푸는 방법
그리스도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음(빌4:1-3)
        내가 유오디아을 권하고 순두게를 권하노니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2절)
비판을 금함(마7:1-3)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너희의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2절)
고통을 서로 나눔(가6:2)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
용서하고 위로함(고후2:10)
      너희가 무슨 일이든지 뉘게 용서하면 나도 그리하고 내가 만일 용서한 일이 있으면
      용서한 것은 너희를 위하여 그리스도 앞에서 한 것이니

하나님의 속성 9 – 진실하신 하나님

진실하심이 영원함이로다(에메트-레올람)


본문에는 구약성서에서 아주 핵심적인 두 개의 명사가 나온다. 그 하나가(헤쎄드)이고, 다른 하나가(에메트)이다. 이 두 가지는 하나님이 인간을 돌보시는 내용이다. 인간의 배반에도 불구하고 인간을 향하여 하신 약속에 근거한 사랑, 그 사랑은 일시적인 것이 아니다. 인간의 사랑 처럼 변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진실한 사랑이다. 그의 사랑의 진실함은 영원하다. 원문에서 '진실'이란 뜻으로 사용된(에메트)의 어근이 되는 (아만)의 기본 개념에는 '지지하다, 버티다, 지탱하다'라는 의미가 들어 있다. 따라서 (에메트)라는 말 속에는 변치않고 지속되는 확실성, 신뢰성이라는 기본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이 단어는 하나님의 품성의 한 특징으로서 하나님께 자주 적용된다. 출34:6에서는 하나님의 성품을 구성하는 특징들 가운데 하나로 제시되고 있다. 이 하나님의(에메트)는 하나님이 베푸시는 구원 가운데에서, 그리고 하나님을 궁극적으로 의지하며 살아가는 인간의 삶 가운데에서 드러나는 하나님의 속성이다. 성서적 의미의 진실. 즉 참된 진실은 하나님으로부터만 오며, 하나님에게만 찾을 수 있다.

성경에서 '진실'이라는 말은 구약은 '에메트', 신약은 '알레데이아'로 묘사되어 있으며 이 뜻은 대략 '진실, 참, 진리, 정말'이라는 의미를 지녔습니다. '진실'이라는 이 말은 오직 '하나님의 성품'과 '하나님과 관계된 사물'에 국한시켜 사용되었는데, 성경상의 '미쁘신 하나님'(참조; 시3:5; 살전5:24; 벧전4:19)에 대한 뜻이 바로 '진실하신 하나님'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아들인 그리스도도(참조; 딤전1:12) 성경도(참조; 계19:9) 진실이요, 진리요, 미쁜 것이 됩니다. 이렇듯 하나님은 진실하시기에 우리 인생들이 의지하고 헌실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진실성'은 '신(^)'과 '인생'의 '교제의 기반'입니다. 함께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1. 하나님의 진실성을 입증하는 근거

1) 참된 '신(神)'이심을 그리스도 안에서 입증하심
하나님은 인간들이 만들어 낸 '우상'과 비교하여 유일하고 참된 살아계신 '신'이라는 의미에서 진실하십니다. '비록 하늘에나 땅에 나 신이라 칭하는 자가 있어 많은 신과 주가 있으나…우리에게는 한 하나님…께서 계시니'(고전8:5,6) 하나님만이 유일하고 진실하신 '신(神)'이 십니다. 인간들이 만든 '우상'과는 달리,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인격체'로 구체적으로 인생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참조; 요일1:1).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속죄를 통해 그 사랑을,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해 그 신적 능력을, 그리고 그리스도의 재림을 통해 그 권세와 의로우심을 알게 될 것입니다. 인간들이 만들어낸 우상들과 신화의 인물 중에 어느 누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내신 하나님의 진실성을 흉내라도 낼 수 있겠습니까?

2) 참된 능력으로 입증하심
하나님은 성경으로 말씀하신 내용과 '일치'하는 '능력'을 소유하고 행사하시기에 '진실'하십니다. '내 입에서나가는 말도 헛되이…아니하고 나의 뜻을 이루며…형통하리라'(사55:11). 말과 행동이 일치하고 조화를 이룬 사람을 우리는 '진실'하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태초부터 말씀하신 '성경'을 그 신적인 능력으로 이루어 오시고 있기에 '진실'하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하나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음이라'(고전4:20)고 했는지도 모릅니다. 하나님께서는 성경을 통해서 말씀하신 대로 구세주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셨고, 그 그리스도는 온갖 방해와 유혹과 핍박을 물리치시고 속죄 사역을 단행하시며, 끝내는 부활하심으로써 '말씀'을 성취하셨습니다. 인간들이 조작해 낸 목석의 우상, 사상의 우상, 정치의 우상, 희망의 우상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 우상들의 법과 교리, 이데올로기, 그리고 언약들이 거짓과 기만과 시행 착오를 범할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2. 진리이신 하나님의 특징

1) 거짓을 미워하심
이처럼 '진실 무망하신 하나님'(신32:4)은 절대적으로 '거짓'을 미워하시고 대적하십니다. 이와 같은 성품의 특징이 성경 전체에 흐르고 있는데 그 일례로 십계명을 살펴보십시오. 한 마디로 '하나님과 자기 자신과 이웃에게 거짓을 버리고 진실로 행하라'는 것이 십계명의 의의입니다(참조; 출20:16). 특히 성경은 '죄'를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경배하고 섬기는 것'(롬1:25)으로 정의하기도 합니다. 이는 진리 되신 하나님과 관계가 단절된 인본주의적 삶이 '죄'요 '거짓'된 상태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불인정하고 불신하는 인생들은 모두가 '거짓된 존재요 하나님의 심판과 정죄하에 있는 불행한 존재들입니다.

2) 거짓을 이기심
하나님은 거짓을 미워하실 뿐만 아니라 적극적으로는 거짓을 이기시는 분이십니다. '주의 말씀에 의롭다 함을 얻으시고 판단 받으실 때에 이기려 하심이라'(롬3:4). 일례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음미해 보십시오. 그 사건은 진실이 거짓을 제압한 사건입니다. 즉 하나님이 악마와 세상의 거짓을 이기신 사건입니다. 처음에는 진실이 십자가에 못박힌 것처럼 보였지만 결국엔 사탄의 거짓 권세가 못박힌 결과가 되었습니다(참조; 골2:14,15). 진실하신 하나님은 이처럼 언제나 세상의 거짓을 제압합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어느 환경, 어느 처지에 있든지 '진리의 복음'을 의뢰하고 그 복음의 진리 안에서 행하시기 바랍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은 하나님의 진실의 '결정체'이기에 그 진리안에서 행하는 자는 항상 악과 불의에 대해 승리할 수밖에 없습니다(참조; 고전15:55-58).

3. 진실하신 하나님과 인생

1) 진실을 사랑해야 함
하나님의 '진실성'을 온전히 나타내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참된 '사랑의 증거'(롬5:8)요, 참된 '인생 구원의 방법'(요14:6; 롬3:21-26)이요, 인생의 참된 '시금석'(눅2:34,35)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순종하는 것이 바로 인본주의의 '거짓'된 상태로부터 구출받는 것이됨을 기억합시다(참조; 벧전1:22)

2) 진실 안에서 행해야 함
내가 내 자녀들이 진리 안에서 행한다 함을 듣는 것보다 더 즐거움이 없도다'(요삼:13). 즉 그리스도의 복음 진리의 교훈을 말과 행동으로 실천하고 지키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 길만이 진실하신 하나님과 '교제'를 유지하는 삶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요14:21).

3) 그 진실성을 의뢰해야 함
'에메트'라는 말의 원뜻은 '든든한 기반'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진실성은 '신앙의 기반'입니다(참조; 히11:1,2,6). 왜냐하면 하나님은 진실하셔서 '거짓말을 하실 수 없'(히16:18)기에 그리스도 안에서 언약하신 그 '구원의 약속'을 의뢰하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진실성이 '영혼의 닻'(히6:19)이 되어 줍니다. 세상의 거짓, 불의의 풍랑이 드세게 휘몰아치는 때에도 진실하신 하나님을 의뢰하십시오. 그 안에 삶의 닻을 드리운 인생은 복됩니다.

☆ 진실의 의미
견고함(시12;2) 신실함(민12:7) 믿을 만함(사49:7) 틀림없음(호5:9) 신임할 만함(욥4:18) 참됨(욥9:2; 사37:18) 영구적임(수2:12) 말과 행동이 순수함(습3:9) 깨끗케 함(사52:11) 진리임(단4:34)
단순함(골3:22) 너그러움(롬12:8; 고후8:2)

☆ 진실한 것은 하나님의 속성 중 하나(신32:4)

☆ 하나님은 영원히 진실하심(시146:6)

1. 하나님이 진실하시다는 증거

진리의 근원들이 증거함
하나님의 법임(시119:142-160) 그리스도의 진리임(요14:6) 성령이 진리의 영임(요14:17) 복음이 진리임(갈2:5,14) 하나님의 교회가 진실됨(딤전3:15) 하나님이 진실의 근원이심(시57:3)

참되신 하나님이 증거함
하나님은 유일하신 참신이심(요17:4)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참되게 하심(요8:13-18) 사람에 의해 증거함(요10:41) 사람이 핑게치 못함(롬1:20)

2. 진실하신 하나님

진실함은 하나님의 속성임
진실이 많으심(출34:6) 거짓이 없으심(딤1:2) 성실하심(시100:5) 하나님의 길이 참됨(계15:3)
하나님의 행사가 진실함(시33:4) 하나님의 말씀이 진실함(요17:17)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된 것에서 나타남(미7:20) 하나님의 구원이 진실함(시57:3) 하나님의 심판이 참됨(계16:7) 진실로 성도를 보호하심(시61:7) 왕위를 보호하고 견고케 하심(잠20:28) 진리로 공의를 베푸심(사42:3) 진실로써 판단하심(롬2:2)

거짓을 미워하심

거짓말
사탄이 유혹하는 말(창3:4,5) 책임을 미루는 말(창3:12,13) 자기 죄를 부인하는 말(창4:9)
불순종하는 말(마21:29)

거짓의 이유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음(사57:11) 사람이 자기의 정욕대로 행함(롬1:24,25) 양심에 화인맞았음(딤전4:2) 미혹의 영과 사탄의 지시임(딤전4:1)

거짓된 자를 치시는 하나님
거짓 증인을 패망케 하심(잠19:9) 거짓말하는 자는 형벌을 당케 하심(행5:4,5) 하늘나라에 들이지 않으심(계21:27)

3. 진실하신 하나님에 대한 성도의 자세

진실해야 함
말씀을 진실로 사모함(벧전2:2) 선한 양심과 거짓없는 믿음을 가짐(딤전1:5) 성도를 진실로 사랑함(고후8:8,24) 진실로 예배를 드림(요4:23,24) 말씀을 전파함(고후2:17) 생활을 진실하게 삶(롬9:12) 거짓말을 하지 않음(롬9:1) 간사한 생각을 품지 않음(요1:47) 참된 말을 함(고후7:14) 주의 일을 진실하게 함(엡6:21) 성도의 사정을 진실하게 생각해 줌(빌2:19,20) 참된 증거를 함(요삼12) 신실함(벧전5:12)

진실하신 하나님을 의뢰함
사람이 의뢰해서는 안 되는 것
무기(시44:6) 물질(시49:6,7) 사람(렘17:5) 자기의 의로움(겔33:13) 사람의 능력(렘48:7)

사람이 의뢰할 하나님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시33:2) 하나님의 말씀(시119:42) 하나님의 약속(시31:19)

하나님의 의뢰하는 자의 복
기쁨을 얻음(시5:11) 승리함(시22:4,5) 하나님의 보호를 받음(잠3:5,6) 기업을 받음(사57:13)
요동치 않음(시125:1) 평안함(사26:3) 구속받음(시34:22) 안전함(잠29:25)

하나님의 속성 8 – 영원하신 하나님

나 여호와는 변역지 아니하나니(아니 예호와 로 솨 니티)


원문에서 '변화하다'라는 뜻으로 사용된 히브리어 동사는(솨나)이다. 이 동사는 성격이나 방법의 변경, 또는 삶에 나타나는 변화를 묘사하는데 쓰인다. 본문에서는 하나님의 불변성을 말해 주는 동사로 쓰여 지난날 야곱의 자손을 향해 지녔던 그 모든 것들이 변하지 않았음을 나타내 주고 있다. 즉 그가 말씀하신 약속에 대한 하나님의 신실성을 반영한다. 그러나 기독교 신앙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불변성을 완고함이나 틀에 꽉 짜인 상태로 이해하여서는 안 된다. 이 말은 그리스 철학의 영향으로 인해 소위 하나님의 '초연성'을 강조하는 영향으로 인해 소위 하나님의 '초연성'을 강조하는 것으로 해석되기도 했는데 그렇게 될 경우 하나님은 역사의 영역 밖으로 밀려나는 것이 된다. 따라서 기독교 신앙은 하나님의 불변성을, 하나님의 뜻의 요동치 않는 방향을 나타내는 것으로 이해한다.

러시아 속담에 '변치 않는 친구를 구하려거든 무덤으로 가라'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가 자신에게, 혹은 이웃에게 실망을 느끼는 점 중에 한 이유가 있다면 '변덕'일 것입니다. 그리고 인간의 변덕은 사회에 '불신, 위선' 풍조를 만드는 제 일 원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본질과 사상과 의지에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약1:17) 없으신 '불변의 존재'입니다. 그러기에 성경은 하나님을 '미쁘시며 신실하신 분'(고전1:9; 살전5:24)으로 증언하며, 인생들의 영원한 '의지자'로 권하고 있습니다. 함께 그와 같은 내용을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1. 하나님이 변치 않으시는 이유

1) 절대자이시기 때문임
불변한다는 것은 양적으로나 질적으로나 조금도 변동이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그 '변동'은 그 스스로의 내적 요인과 외적인 힘에 '영향'을 받을 때 발생합니다. 가령 인간의 변덕의 원인을 살펴보면 그 자신의 내적인 강박성, 혹은 외부의 압력 등을 다 수용하는 '허약성'에서 기인되기도 하며, 더 중요한 원인은 자기 스스로 어떤 일에 흥미를 잃는 데서 '변덕'이 생기는 것이 통례입니다. 그 '변동'이 발전을 위한 긍정적인 의미를 포함할 때 '변혁'이라 하고, 무지와 이기심에서 기인한 것은 '변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렇듯 인간은 어디까지나 유한하며 '상대적인 존재'이기에 환경에 따라 변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스스로 있는 자'(출3:14) 이십니다. 창조주요, 절대자요, 자존자이시기에 어떤 외적인 요인과 영향력에도 전혀 자유로우시며, 영향을 받지 않으십니다.

2) 완전자이시기 때문임
'사람의 마음에는 많은 계획이 있어도 오직 여호와의 뜻이 완전히 서리라'(잠19:21). 인생들은 '불완전한 존재'이기에 본질적으로 변화와 변혁은 필수적입니다. 인간이 성장, 발전해 나가는 데는 '긍정적인 변화'가 필요하며 그 변화 과정에서 그 사람의 인생관, 가치관이 수시로 바뀔 때도 있습니다. 역사의 가치관, 시대의 풍조도 사람의 변화에 따라 바뀝니다. 그리고 그 변화에 따라 시행 착오도 속출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태초 이전부터 영원까지 '동일'(히13:8)하신 '완전자'이시기에 본질적으로 '변화'가 필요 없으신 분이십니다. 또 그 사상과 의지도 그러하며 그 행사도 변함이 없으십니다. 성경에 하나님의 창조 섭리, 그리고 뜻 중에 '변화'가 있는 듯이 보여지는 부분도 있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하나님과 관계된 '인간'들의 '변화'에 상대적으로 맞추신 것이지 그 궁극적인 뜻과 행사에는 추호도 변함이 없으심을 알게 될 것입니다.

2. 변치 않으시는 내용들

1) 본질과 성품
하나님은 '신'으로서의 본질, 그 능력과 거룩하신 성품들이 변치 않으십니다. 성육신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십시오. 이 땅에서 육신과 공간과 시간, 그리고 인간들의 죄악에 둘러싸여 있었지만 '성자 하나님'으로서의 품위와 능력과 성품에는 조금도 흐트러 짐도, 또 침해도 당하지 않으시고 변함이 없으셨습니다. 그리고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롬1:4) 하심으로써 그 '신성'이 재확인되셨으며, 그 인생 구원의 의지도 불변하심을 입증하지 않으셨습니까?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성자 하나님도 그럴진대, 성부, 성령 하나님이야 그 무엇에 의해 변함을 받으시겠습니까? '나 여호와는 변역지 아니하니'(말3:6).

2) 사상과 뜻
'여호와의 도모는 영영히 서고 그 심사는 대대에 이르리로다'(시33:11). 하나님의 사상은 그 '창조 사역'에 분명히 나타납니다. 즉 '영생, 번영, 행복'을 제공하시기 위해 만물과 인생을 창조하신 것으로(참조; 창2:9,16,28), 이 사상은 인간의 타락, 죄의 오염에도 불구하고 변함이 없으십니다. 요한계시록을 읽어 보면, 창세기에 언약하셨던 그 창조 원리가 모두 인생과 만물에 적용되어지는 것임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 사상을 고수하기 위하여 창세 전에 예수 그리스도를 인류의 구세주로 정하시고(참조; 창3:15) 보내신 것이 바로 하나님의 '뜻'입니다(참조; 엡1:10,11). 오늘도 그 뜻 역시 변치 않으시고 그리스도 안에서 인류를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십니다. 결코 '다른 구세주'(참조; 행4:12), 다른 '구원의 방법'(참조; 갈1:7-9)을 제시하시지 않을 것입니다. 때로는 하나님께서 만물과 인류를 창조하신 '원의'에 대해 '후회'(참조; 삼상15:11,35) 하시며 '한탄'(창6:6)하시는 것을 성경을 통해 볼 수도 있지만 그 '후회와 한탄'은 '창조 원의'에 대한 변화가 아니라, '인간의 변심과 타락'에 대한 창조주의 동정심과 긍휼심을 묘사한 것뿐입니다. 예를 들면 자녀의 실수와 실패에 대한 어버이의 걱정과도 같은 것이니, 결코 자녀에 대한 어버이의 뜻과 사랑에는 변함이 없는 것과 동일합니다. 다만 이러한 하나님께서도 그 태도를 바꿀 수밖에 없는 요인이 있다면 그것은 '죄인의 회개'일 것입니다(참조; 욘1:2; 욘3:4,10). 그 '자비의 변화' 또한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 인류를 구원하시겠다는 '구속원의'의 변치 않는 언약에 의한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참조; 사14:24).

3. 하나님과 인생

1) 하나님의 공의가 불변함을 유념합시다.
'너희의 사망으로 더불어 세운 언약…그것에게 밟힘을 당하리라'(사28:18). 이는 하나님을 배신하고 '피조물' 들을 '신'으로 삼은 죄에는 필경 하나님의 심판이 임할 것을 경고하신 것입니다. 에덴 동산에서 범죄자에게 '정녕 죽으리라'(창2:17)고 하신 맹세는 세상 끝날 '백보좌 대심판'에서 이루어지고 말 것입니다(참조; 계20:11-15).

2) 하나님의 사랑이 불변함을 기억합시다
우리의 하나님이 '변치 않으시는 하나님'이라는 사실은 성도들에게 큰 안위가 됩니다. 그리스도 예수를 '주'와 '왕'으로 섬기는 자들에게 언약하신 '영생'은 기필코 주어질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사랑'은 추호도 변함이 없으시기 때문입니다(참조; 롬8:37-39).

☆ 천지는 없어지려니와 주는 영존하시겠고 그것들은 다 옷같이 낡으리니 의복같이 바꾸시면 바뀌려니와 주는 여상하시고 주의 년대는 무궁하리이다(시102:26,27)

☆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빌1:6)

1. 변치 않으시는 하나님은 어떤 분인가

a. 스스로 계신 분이심
㉠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에게 스스로 선언하심(출3:14)
㉡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계신 자이심(요8:58)
㉢ 세세토록 살아 계신 자이심(계1:18)

b. 결코 후회함이 없으심
㉠ 하나님의 부르심은 후회함이 없으심(롬11:29)
㉡ 하나님의 통찰하심이 후회 없으심(롬11:29)
㉢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심이 후회 없으심(롬11:29)
㉣ 약속하신 뜻이 후회없으심(히6:17)

c. 변함이 없으심
㉠ 하나님의 꾀하시는 일이 영원함(시33:10)
㉡ 하나님의 자비가 영원함(대상16:41)
㉢ 항상 동일하심(시102:25-27)
㉣ 변역함이 없으심(말3:6)
㉤ 거짓 됨이 없으심(딛1:2)
㉥ 변동이나 변화가 없으심(약1:17)
㉦ 알파와 오메가이심(계1:8-18)

d. 유일하심
㉠ 참하나님이심(요17:3,22)
㉡ 구원의 유일한 주관자이심(요14:6)

2. 하나님의 변치 않는 것들

a. 뜻이 변치 않음

하나님의 뜻은 광대하므로(사28:29)
이도 만군의 여호와께로서 난 것이라 그의 모략은 기묘하며 지혜는 광대하니라

하나님의 뜻은 그리스도안에서 통일됨(엡1:9,10)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셨으니 곧 그 기쁘심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니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

b. 하나님의 말씀이 변치 않음

살았고 운동력이 있는 말씀임(히4:12)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하나님의 말씀은 서로 합치됨(행15:15)
선지자들의 말씀이 이와 합하도다 기록된 바

성도에게는 신앙의 원동력이 됨(벧전1:23)
너희가 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하나님의 살아 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c. 하나님의 약속이 변치 않음

모두 성취됨(눅1:32,33)
저가 큰 자가 되도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라 일컬을 것이요 주 하나님께서 그 조상 다윗의 위를 저에게 주시리니…

정한 때에 성취됨(행7:6)
하나님이 또 이같이 말씀하시되 그 씨가 다른 땅에 나그네 되리니 그 땅 사람이 종을 삼아 사백 년 동안을 괴롭게 하리라 하시고

하나님의 긍휼하심으로 인해 약속이 폐하지 않음(사54:10)
산들은 떠나며 작은 산들은 옮길지라고 나의 인자는 네게서 떠나지 아니하며…

d.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변치 않음

하나님의 인자는 영원함(시103:17)
여호와의 인자하심은 자기를 경외하는 자에게 영원부터 영원까지 이르며 그의 의는 자손의 자손에게 미치리니

하늘과 땅에 충만함(시108:4)
대저 주의 인자하심이 하늘위에 광대하시며 주의 진실은 궁창에 미치나이다

성도의 삶의 근거가 됨(애3:22,23)
여호와의 자비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 이것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이 크도소이다.

하나님의 인자는 죄를 사유함(엡2:4,5)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

하나님의 속성 7 – 사랑의 하나님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호 데오스 아가페 에스틴)

기독교 신앙이 '하나님은 사랑이라'고 말할 때, 이사랑은 다른 여러가지 속성중의 하나로 분리되어 있는것이 아니다. 사랑은 하나님이 우리 인간에게 향하신 모든것을 충분하고도 궁극적으로 표현해 주고 있는 포괄적 개념인 것이다. 여호와의 사랑은 자기 백성을 위해서 그 백성의 역사에 간섭하심으로 나타나고, 표현되고, 계시된다. 그러므로 이 하나님의 사랑은 적극적인 것이다. 또 기독교 신앙이 '하나님은 사랑이라' 고 말할때, 이것은 사랑의 본질 자체를 설명하려는 것이 아니다. 이 주장은 하나의 정의(定義)가 아니다. 왜냐하면 그 문장을 뒤집어서 '사랑이 하나님이다'고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사랑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활동을, 즉 인간을 향한 그의 행위를 표현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사랑이신 것을 인식한 사람, 또는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한 사람은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요한은 하나님의 속성에 대해 '하나님은 빛이시고'(요일1:5), 영이시며(요4:24), '사랑이시다'(요일4:7,8)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현대인의 삶에 있어서 가장 의미 있고 가치 있는 것을 고르라고 한다면 우리는 '소유와 사랑'을 선택할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그 사랑은 우리 삶의 주요 부분이 아니라 장식품에 불과하며 돈과 권력과 명예와 더불어 인간의 이기적인 소유 대상으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그 어느 누구가 기독교가 사랑의 종교인 줄 모르겠습니까? 그 누구도 하나님이 '사랑'이 아니라고 반박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말하는 사랑의 의미와 하나님의 사랑과는 근본적인 차이점이 있습니다. 함께 생각해 보겠습니다.

1.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기독교는 어느 지혜로운 자를, 힘 있는 자를 존경하고 사랑하며 그를 섬기는 종교가 아닙니다. 수백 년 된 나무와 돌을 경외하여 하나의 영으로 믿는 미신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창조주이시며 우리는 피조물입니다. 그 관계로부터 우리는 자녀로 부르심을 받은 것입니다.

1)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자녀가 된다 함은 자녀 될 자가 자신의 수태 시기, 성의 구분, 부모에 대한 선택 등을 할 수 없는 속성을 가집니다. 그것은 곧 우리가 전적으로 하나님의 손에 의해 그의 자녀가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들은 성령의 증거를 통해 스스로 하나님의 자녀임을 깨닫게 됩니다. 즉 다시 오실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 된 그 자리를 차지할 자녀로서의 권리를 부여받게 됩니다. 이와 같이 아무 공로 없는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됨은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의 시작인 것입니다(참조; 롬8:16).

2) 우리는 하나님을 따릅니다.
가장 훌륭한 교육은 부모나 스승이 몸소 바른 행위를 함으로써 그의 자녀나 제자들이 그들을 본받게 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악이나 선에 대해서 도무지 바르게 분별하지 못하는 소경과 같은 존재입니다. 때로 우리 신앙의 양심은 너무도 무디어져서 죄로 인하여 우리 영혼의 상처가 악화되어가도 고통을 느끼지 못하고 마음은 강팍하게 되어 마비된 양심으로 전락하고 맙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음으로 그의 자녀가 되며(참조; 롬8:14), 이로써 우리의 무디어진 양심은 치료를 받고 생명을 건질수가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를 때 가능한 것이며 바로 하나님의 사랑에 기초한 것입니다.

2. 하나님은 희생적으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희생적인 하나님의 사랑은 성경 전체에 표현되고 있습니다. 그러한 하나님의 희생적 사랑은 조건적이고 순간적인 것이 아닙니다.

1) 하나님은 오래 참으십니다.
창세기 18장에는 소돔 성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를 피하게 하기 위해 의인의 수를 헤아리는 아브라함의 노력이 나타나 있으며, 요나서에는 니느웨 성을 멸망시키기 전에 요나를 통해 구원하고자 하는 니느웨 백성들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이렇듯 우리는 성경을 통하여 이스라엘의 수많은 불법을 보면서도 진노보다는 용서를 하려 하시는 그의 참으심을 수없이 발견할 수 있습니다.

2) 하나님은 독생자를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끝없는 참으심은 결국 예수 그리스도의 보내심으로 완전한 뜻을 보여 주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내심은 하나님의 인간에 대한 사랑의 극치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죄에 대한 참으심을 진노와 멸망으로 나타내지 않으시고 그의 독생자를 내어 보내 주시는 보다 적극적인 방법을 취하셨습니다. 만물을 다 그의 손에 두시고 아들을 믿는 자에게는 영생을 주셨으며 아들에게 순종치 않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진노를 내리신다고 말씀하십니다(요3:35,36).

3) 하나님은 우리가 사랑을 행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 됨의 증거는 바로 우리의 사랑 여부에 달려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형제를 미워하면 그는 거짓말하는 자라고(참조; 요4:11) 성경에는 분명히 못박고 있습니다. 사랑의 완전한 표현은 자기 생명을 내어 놓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의 고통과 함께 내 놓은 그 생명은 전쟁터에서 조국을 위해, 혹은 명예를 위해, 의리를 위해 생명을 내 놓는 것과는 또 다른 높은 차원의 것입니다. 그의 죽으심은 우리들의 순간적 안전을 위한 것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게 위한 것입니다. 세상에 있는 그 누구도 남에게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진 못합니다. 이 세상에는 사랑이 많은 듯하나 그것은 참음이 없는 사랑이요, 희생이 없는 사랑이요, 행함이 없는 사랑일 뿐입니다. 자기의 유익을 위해 꾸준히 참고 더 나은 안위를 위해 현재를 희생하며 바쁘게 살아가는 사람들은 많지만 오로지 사랑을 위해 진실되게 살아가는 사람은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사랑의 하나님은 오늘도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엄숙히 경종을 울려 주십니다.

사랑의 어원적 의미
㉠ 즐거워하고 만족하게 여김(잠5:18,19) ㉡ 특별한 대상을 소중히 여김(신33:3) ㉢ 은혜를 베풂(출3:21) ㉣ 악을 행치 않음(롬13:10) ㉤ 벗이 되어 친함(약4:4) ㉥ 아끼고 사랑함(요12:25)

사랑의 성경적 정의
㉠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 되는 것(마22:40) ㉡ 형제를 근심하거나 실망하게 하지 않는 것(롬14:15) ㉢ 수고와 인내로 봉사하는 것(살전1:3) ㉣ 죽음과 같이 강한 것(아8:6) ㉤ 두려움을 이기는 것(요일4:18) ㉥ 허물을 가려 주는 것(잠10:12) ㉦ 거짓됨이 없는 것(롬12:9) ㉧ 마음을 같이하는 것(빌2:2)

사랑의 표준이 되시는 하나님
㉠ 하나님의 사람을 사랑하심(엡5:1) ㉡ 그리스도의 성도를 사랑하심(엡5:2) ㉢ 성령의 돌보시는 사랑(롬8:26)

사랑이 초월하는 것
㉠ 거짓(롬12:9) ㉡ 율법(롬13:8) ㉢ 방언이나 예언(고전13:1,2) ㉣ 믿음이나 소망(고전13:13) ㉤ 죄(벧전4:8) ㉥ 시간의 한계(고전13:8)

1. 우리를 먼저 사랑하신 하나님

a. 하나님이 우리를 먼저 사랑하신 이유
㉠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 보이시기 위하여(요일4:10) ㉡ 하나님이 작정하신 구원 사역을 실행하시기 위하여(요3:16) ㉢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를 알게 하시기 위하여(요5:20)

b.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자
㉠ 그리스도를 사랑하심
① 창세 전부터 사랑하심(요17:23,24) ② 아버지의 아들에 대한 사랑임(요5:20) ③ 하나님은 자신의 역사를 아들에게 보이셨음(요5:20) ④ 만물을 아들의 손에 붙이셨음(요3:35)

㉡ 택한 백성 이스라엘을 사랑하심
① 특별히 기뻐하시고 택하셨음(신7:7) ② 친히 애굽의 손에서 인도해 내심(신4:37) ③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심(신7:13) ④ 기업과 자손을 복으로 주심(신7:13) ⑤ 이스라엘을 잠잠히 사랑하시고 기뻐하심(습3:17) ⑥ 환난에서 구원하실 것임(사63:9)

㉢ 그리스도 안에서 성도를 사랑하심
①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심(잠8:17) ② 고아와 나그네를 더욱 사랑하심(신10:18) ③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를 사랑하심(시103:13,14) ④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자녀된 자를 사랑하심(요일3:1) ⑤ 의인을 사랑하심(시146:8) ⑥ 부르신 성도들을 사랑하심(유1,2)

c.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자에게 내리시는 축복
㉠ 천 대까지 은혜를 주심(신7:9) ㉡ 위험에서 건지시고 높이심(시91:14) ㉢ 멸망에서 건지심(사38:17) ㉣ 하나의 특별한 백성으로 삼으심(말3:17) ㉤ 인생을 평안케 하심(시119:165) ㉥ 영원한 위로를 주심(살후2:16)

2. 하나님의 희생적인 사랑

a. 희생적인 사랑의 내용
㉠ 당신의 아들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심(마20:28)
인자가 온 것을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 사람과의 화목함을 회복하심(롬5:10,11)
이뿐 아니라 이제 우리로 화목을 얻게 하신 우리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하느니라(11절). ㉢ 율법의 저주에서 속량하심(갈3:13)

b.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성도의 자세
㉠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함(마22:37) ㉡ 부모나 자식보다 더 사랑함(마10:37) ㉢ 목숨을 다해 그리스도를 사랑함(요13:37,38)

우리는 사랑을 행해야 합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인으로서 당연한 본분이며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가장 훌륭한 보답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랑을 행하는 자녀의 모습을 가장 기쁘게 여기십니다. '아아 허탄한 사람아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 것인 줄 알고자 하느냐'(약2:20)고 외쳤던 야고보의 교훈에서 우리는 다시 한 번 행함의 중요성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누가 더 훌륭한 그리스도인인가?' 라고 묻는다면 '누가 더 많은 사랑을 행하고 있는가?'라고 되물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속성 6 - 의로우신 하나님

주는 의로우시며(차띠크아타)


본문에서 '의로운'이라는 뜻으로 사용된 형용사는 의미를 갖는다. 첫째는, 사람에게 사용되는 경우이다. 의로운 사람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자이다. 하나님에게 궁극적으로 의지하는 사람은 그 하나님의 성품을 따라 사람들에 대해 늘 긍휼히 여기는 마음을 가진다. 둘째는, 하나님께 대해 사용되는 경우이다. 이 단어는 하나님에게 적용되어 하나님의 성품을 나타내준다. 하나님은 공의로운 재판관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나타난 규범과 판단들은 의로우며, 그 의는 영원한 것이기에 하나님의 백성에게 확신을 준다. 하나님의 사람을 악인들의 손아귀에서, 그의 택하신 이스라엘 민족을 적들의 손에서 건지시는 분은 의로우신 하나님이시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의로우심'으로 이스라엘로 하여금 환난 속에서 승리를 확신케 해주신다. 또한 그 '의로우심'으로 죄에 빠진 이스라엘을 심판하신다.

'여호와께서 통치하시나니…의와 공평이 그 보좌의 기초로다'(참조; 시97:1,2). 하나님은 모든 행사와 그가 만드신 피조물과의 관계에 있어서 직•간접적으로 불가 분리의 관계에 있는 하나님의 속성 가운데 '하나님의 의'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의'자체이시며, 모든 피조물을 그의 '의'의 개념과 종류를 살펴봄으로써 의로우신 하나님에 대해 좀더 자세히 알아보겠습니다.

1. '의(義)'의 개념

1) 구약의 개념
'…그 말씀대로 이루셨사오니 주는 의로우심이로소이다'(느9:8). 구약은 하나님의 '의'에 대해 여러 곳에서 언급하고 있습니다(참조; 스9:15; 렘12:1; 단9:14). 이 '의'는 히브리어로 '체데카혹은 '체데크'로 이 단어의 뜻은 표준, 방정(方正), 정확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구약에서 이 단어는 두 가지 차원에서 사용되었습니다. 하나는 그 '의'를 소유한 자의 '본질적 의'이며, 하나는 그 '의'를 소유한 자의 '행동적 의'입니다. 따라서 이 단어가 하나님의 본질과 속성에 관한 용어로 사용될 때 전자는 하나님은 스스로 의롭다는, 즉 '하나님의 거룩함'을 의미하며, 후자는 하나님이 피조물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의롭다는, 즉 '하나님의 공의'를 의미합니다.

2) 신약에서의 개념
신약에서 '의'를 나타내는 헬라어는(디카이오스)와 (디카니오수네)이며 이 단어는 '어떤 기준에 일치한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특히 이 단어는 신약 시대 당시에는 주로 사회에 있어서나 하나님 앞에 있어서 올바른 행동을 의미하는 윤리적 개념을 강하게 가지고 있었던 단어였으며 동시에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를 규정하는 의미로도 사용되었습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신구약 성경 속에서의 '의'의 개념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러면 이제 '하나님의 의'가 그의 피조물, 특히 인간과의 관계에서 어떻게 나타나는가에 따라 '하나님의 의'를 두 종류로 나누어서 살펴보겠습니다.

\ 2. 두 종류의 '의'
'하나님의 의'는 하나님이 피조된 세계의 통치주임을 의미하는 '주재적(主宰的)의'와 심판주임을 의미하는 '분배적(分培的)의'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1) 주재적 의
'주재적 의'는 그 명칭이 뜻하는 바와 같이 하나님이 피조된 세계의 통치자로서 선악 간의 모든 판단을 공정하게 하시는 분임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판단에 있어서 차별이나 불의하게 판단하시지 않고 그의 신적인 속성에 따라 모든 것을 공평하게 결정하십니다. 시7:11의 '하나님은 의로우신 재판장이라'는 표현은 이러한 하나님의 속성을 잘 표현해 주고 있습니다. 인간이 볼 때 때로는 하나님의 판단에 대해 의혹을 지닐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이 어찌 심판을 굽게 하시겠으며, 전능하신 이가 어찌 공의를 굽게 하시겠는가'(욥8:3)라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어떤 일을 판단하시고 집행하심에 있어서 언제든지 공정하게 하시는 분입니다. 한 순간을 살다 가는 인간의 좁은 지식으로 볼 때 하나님의 의가 왜곡되는 것처럼 보일 때도 있으나, 시•공간을 초월하여 영원히 계신 하나님은 언제나 '의'로써 자신이 창조한 세계를 다스리는 분입니다.

2) 분재적 의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되'(롬2:6). 이 '분재적 의'는 하나님이 현세에 있어서나 최후 심판에 있어서 인간의 행위에 대하여 영생 또는 영벌로 결정하실 때 매우 공정하게 심판하시는 분임을 의미합니다. 이 '분배적 의'에 대한 설명은 성경 마25:31-46에 보면 잘 나와 있는데, 여기에 보면 마지막 날에 '임금'이 그 '오른 편에 앉은 자'들에게 말하기를 '너희들이 세상에서 나에게 먹을 것과 입을 것으로 도와 주었으니 내 상을 받아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때 사람들은 자신들에 대한 임금의 판단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임금의 설명을 들은 후 그들은 임금의 판단이 옳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판단은 그의 '의'에 기초한 것으로, 모든 사람들의 행위를 심판하시며, 그들의 행위에 따라 상•벌을 내리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때때로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 속에서 '하나님의 의가 제대로 시행되고 있는가'라는 의문을 갖게 될 때가 있습니다. 의로운 사람이 고난을 받을 때, 그리고 가난한 자들이 더욱 비참해지고, 악한 방법으로 재물을 얻은 자들이 더욱 부요해지는 것을 볼 때 우리는 이런 의문은 갖게 됩니다. 하지만 성경은 오늘도 의로우신 하나님이 세상을 살피시며, 자신의 의로써 세상을 다스리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의로우신 하나님은 졸지도 주무지시지 않으시는 분으로 세상의 의로운 사람들과 불의한 사람들을 살펴보고 계십니다. 단지 심판이 잠시 지체될 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인내함으로 의로우신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의로운 일들을 굳게 세우기 위해 계속 힘써야 할 것입니다.

* 의는 사람의 온전한 상태임(욥22:3)
* 의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짐(롬3:24,26)
* 하나님의 의는 재판 과정에서의 공정함임(사11:4)

1. 의의 개념

a. 구약 시대의 의

㉠ 개인의 상태에
① 성결함(욥4:17)  ② 행위의 온전함(욥22:3) ③ 판단이 공정함(사11:4) ④ 정직함(렘4:2) ⑤ 진실됨(시15:2-4) ⑥ 평강(시72:7) ⑦ 화평(시85:10) ⑧ 고아를 도움(욥29:12-15) ⑨ 소경과 과부의 어려움을 대신함(욥31:16-19) ⑩ 가난한 자에 대한 자비(잠29:7)

㉡ 사회적 상태에서
① 공동사회의 화목을 유지하는 힘(시15:2-5), 바른말을 함(사59:4), 사회 관계의 요구를 다함(창38:26)

㉢ 법적 관계에서
① 재판을 공정하게 함(신16:18) ② 곤란한 자와 빈궁한 자에게 베푸는 공의(시82:3) ③ 억울한 일이 없게 함(사29:21) ④ 고아나 과부를 압제하거나 학대하지 않음(렘22:3)

b. 신약 시대의 의

㉠ 윤리적인 의
       ① 인간적인 욕망을 이겨냄(롬1:26-32) ② 율법대로 행함(롬2:13)

㉡ 영적인 의
① 하나님의 은혜로 얻어지는 인간의 상태(롬3:24,26) ② 율법대로 행함(롬2:13) ③ 율법에서 풀려난 상태(롬2:27) ④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얻어지는 상태(롬:22) ⑤ 하나님을 경외함(행10:22) ⑥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한 후에 얻어짐(롬6:13) ⑦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거쳐야 할 단계임(마6:33)

2. 하나님의 두 가지 의

a. 세상을 통치하시는 의

㉠ 그 백성을 인도하심(시5:8)
여호와여 나의 원수들을 인하여 주의 의로 나를 인도하시고 주의 길을 내 목전에 곧게 하소서

㉡ 백성의 기도에 응답하심(시65:5)
우리 구원의 하나님이시여 땅의 모든 끝과 먼 바다에 있는 자의 의지할 주께서 의를 좇아 엄위하신 일로 우리에게 응답하시리이다

㉢ 의로 소성케 하심(시119:40)
내가 주의 법도를 사모하였사오니 주의 의로 나를 소성케 하소서

㉣ 피난처가 되어 주심(시31:1)
여호와여 내가 주께 피하오니 나로 영원히 부끄럽게 마시고 주의 의로 나를 건지소서

㉤ 유일한 구원주이심(사45:21)
너희는 고하여 진술하고 또 피차 상의하여 보라 이 일을 이전부터 보인 자가 누구냐 예로부터 고한 자가 누구냐 나 외에 다른 신이 없나니 나는 공의를 행하며 구원을 베푸는 하나님이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느니라

b. 세상을 심판하시는 의

㉠ 만민을 심판하심(사51:5)
㉡ 공의로 심판하심(사11:4)
㉢ 행위대로 심판하심(왕상8:32)
㉣ 악인에 대해 분노하심(시7:11-13)

c. 성도의 의

㉠ 하나님께서 의롭다 여기시는 자
① 하나님을 믿는 자(롬4:2,3) ②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시103:11) ③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시37:39,40) ④ 하나님께 순종하는 자(롬6:18,19)

㉡ 성도가 의롭게 되지 못하는 이유
① 말씀을 듣지 않음으로(사48:18) ② 범죄함으로(겔33:12) ③ 자기의 의만을 세움으로(롬10:3) ④ 화평을 도모하지 않음으로(약3:18)

㉢ 의롭다 함을 얻은 자의 축복
① 하나님의 형상을 입음(시17:15) ② 몸은 죽으나 영혼이 삶(롬8:10) ③ 구원을 얻음(잠11:6)

하나님의 속성 5 – 무소부재하신 하나님

먼 데 하나님은 아니냐(웨로 엘로헤이 메라 호크)


본문의 질문은 수사적인 질문으로 긍정을 강조하고 있다. 먼 데 하나님임을 주지시키려고 한다. 하지만 이것은 하나님이 멀리 떨어져 계셔서 그의 피조물들의 행위를 알지 못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우리가 그로부터 숨을 수 있다고 믿는 것 같이 지역적 존재가 아니라, 하늘에 계셔서 모든 것을 볼 수 있다는 것을 말하려고 한다. 기독교 신앙은 일찍부터 무소 부재하신 하나님을 이야기해 왔다. 이 '무소 부재'는 만물 가운데 하나님이 편재한다는 범신론적인 개념을 뜻하지 않는다. '무소 부재'라는 뜻은 하나님의 사랑이 어떤 공간의 제한에도 구애받지 않으며, 어디서든 스스로 존재할 수 있는 능력을 가리키는 것이다. 하나님의 주권적인 사랑의 능력에 대하여 그 어디에도 닫혀진 장소는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무소 부재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사랑의 본질이다.

'나는 천지에 충만하지 아니하냐.' 하나님은 무소 부재하십니다. 즉 환경, 시간, 공간에 제한받지 아니하시고 초월적으로 활동하시는 하나님을 말할 때 '무소 부재'하신 하나님, 혹은 '편재'하신 하나님이라고 합니다. 다윗은 그와 같이 무소 부재하신 하나님을 고백하되 '내가 주의 신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시139:7)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무소 부재하신 하나님은 그 사실을 믿는 성도들에게는 큰 힘이 되어 주시고, 불신자들에게는 엄중한 '심판주'가 되십니다. 그 사실을 함께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1. 무소 부재하신 하나님께 대한 그릇된 생각들
하나님께서 어느 곳, 어디에서도 활동하고 계심을 증거하는 성경의 증언은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그릇된 신관을 지적해 줍니다.

1) 이상주의적 신관.
이는 하나님의 '거룩성'을 너무나 강조한 나머지 하나님은 오직 '하늘 보좌'에만 계시는 지고하신 분으로만 여기는 생각입니다. 이와 같은 이상주의적 신관은 자칫하면 하나님을 '비인격적'이며 '비윤리적'인 '우상'으로 격하시킬 우려가 있습니다. 즉 오직 '자기 세계'에만 머무는 하나님, 그래서 인간의 세계와 그 문제에는 냉담하며, 인간들이 울부짖어도 일언 반구의 대답도 없는 하나님, 바로 '모리아' 산에서의 '바알' 신과 같은 하나님입니다(참조; 왕상18:26-28). 또 '하늘 세계'에만 계시는 하나님을 주장하는 자들 중에는 초대 교회에서 '영지주의'자들이 있었는데, 이들은 '인간 세계'는 '악'이요, '하나님 세계'는 '선'이기에 선이신 하나님께서 어떻게 인간 세계와 직접 연관을 가질 수 있느냐고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 사건은 실제로 하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이 아니라 일종의 '환상'이라고 했던 것입니다(참조; 요일4:1-3). 그러나 성경은 '거룩하신 하나님'을 증언할 뿐만 아니라 그 하나님은 '사랑'의 인격자로서 창조하신 만물과 인간 세계의 문제에도 동참하시기를 기뻐하시는 분으로 증언합니다(참조; 창28:15; 신20:1;마28:20)

2) 범신론 주의적 신관.
즉 이상주의적 신관과는 아주 반대의 생각으로서, 하나님께서 '무소 부재'하신다면 모든 사물이나 사람 속에도 천래적으로 임재해 계시다는 신관입니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나무나 바위 속에도 '신'들이 있다고 생각하거나, 인간의 깊은 영혼 속에도 '신'이 있다고 여기는 이들도 있습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불심', 혹은 철학 세계 속에서 나타나는 '순수이성'도 이 범신론의 신관의 일종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이상주의적 신관 및 범신론주의적 신관은 성경의 '무소 부재' 하신 하나님과는 배치되는 극단적 신관임을 기억합시다.

2. 무소 부재하신 하나님에 대한 참된 이해
그렇다면 성경의 '무소 부재'라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여기에서 주의할 것은 어떤 '공간'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님을 유의해야 합니다. 즉 인간의 '유한성'과는 달리 '전능 무한'하신 하나님께서 모든 환경, 시간, 공간을 초월하심을 강조한 말입니다.

1) 환경에 무소 부재하십니다(참조; 욥11:7-10; 시145:3).
인간은 환경에 따라 제약을 받는 존재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어떤 악한 세력이나 환경에도 제한받지 아니하시고 자신의 뜻을 이루실수 있는 분이십니다.

2) 시간에 무소 부재하십니다(참조; 시90:2;시102:12).
인간은 '시간'에 제한받는 존재이기에 '영원'한 존재가 아니라 '유한'한 존재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는 '인간적 시간'은 의미가 없습니다. '영원자'이시기에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시간에 제약받지 아니하시고 자신의 뜻을 이루십니다.

3) 공간에 무소 부재하십니다(참조; 왕상8:27;사66:1;렘17:27,28).
이와 같은 무한성을 '편재성'이라고도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늘보좌'에서 자신의 '신적인 본질'을 '고수'하시면서도, '만유의 주로서 만유 안에'(고전 15:28) 계시는 분이십니다. 이 또한 '신비'에 속하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신비'는 인간 편에서 볼 때나 신비이지 하나님 편에서는 자연스러운 일일 뿐입니다.

3. 무소 부재하신 하나님과 인생들

1) 불신자들에게는 엄중하신 섭리주요 심판주가 되심
'하늘, 음부, 바다 끝, 흑암'(시139:8,9)에서 하나님의 손길을 피하려고 해도 소용없습니다. 오직 무소 부재하신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회개하는 길밖에는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길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롬1:20)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특히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하나님의 무소 부재성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예입니다. 그리스도는 환경과 공간과 시간을 초월하셔서 만유와 관계를 맺고 계시는 '하나님'의 '실체'요 '증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이 허물치 아니하셨거니와 이제는…정하신 사람으로…믿을 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니라'(행17:30,31)고 했습니다. 이 때 인생들은 '불가지론'이나 '범신론'을 주장할 수 없으며, 오직 그리스도 안에 계시는 무소 부재하신 하나님을 영접해야 합니다.

2) 성도들에게는 보혜사가 되어 주심
하나님께서는 '네가 물 가운데…불 가운데'(슥2:10) 지날 때도 함께 하사 보호해 주신다고 하셨으며,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마18:20) 곳에도 함께 계실 것이며, '세상 끝날까지'(마28:20) 곁에서 지켜 주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때로는 고집쟁이 '야곱'처럼 '루스 광야'에서 고난의 '돌베게'를 베고 공포와 슬픔에 젖어 있을 때 바로 그 환경과 장소마저도 '무소 부재'하신 '하나님의 전'(창28:17)임을 고백하도록 도우실 것입니다.

* 무소 부재하신 하나님은 편재하심(시139:7-12)

* 하나님은 성도 가까이 계심(렘23:23)

1. 하나님이 계시는 곳

a. 높고 거룩한 곳에(시57:15)
… 내가 높고 거룩한 곳에 거하며 또한 통회하고 마음이 겸손한 자와 함께 거하나니 이는 겸손한 자의 영을 소성케 하며 통회하는 자의 마음을 소성케 하려 함이라

b. 음란과 더러운 것이 없는 곳에(겔43:9)
이제는 그들이 그 음란과 그 왕들의 시체를 내게서 멀리 제하여 버려야 할 것이라 그리하면 내가 영원토록 그들의 가운데 거하리라

c. 시온에(슥2:10,11)
여호와의 말씀에 시온의 딸아 노래하고 기뻐하라 이는 내가 임하여 네 가운데 거할 것임이니라

d. 성전에(삼하7:5)
가서 내 종 다윗에게 말하기를 여호와의 말씀이 네가 나를 위하여 나의 거할 집을 건축하겠느냐

e. 성도가 어디 있든지(시139:8)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음부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f. 하늘과 땅에(시66:1)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등상이니 너희가 나를 위하여 무슨 집을 지을꼬 나의 안식할 처소가 어디랴

2. 성도의 곁에 계시는 하나님

a. 성도의 우편에 계심(시16:8)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심이여 그가 내 우편에 계시므로 내가 요동치 아니하리로다

b. 마음이 상한 자에게 가까이 하심(시34:18)
여호와는 마음이 상한 자에게 가까이 하시고 중심에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시는도다

c. 먼데 계시지 않음(렘23:23)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는 가까운 데 하나님이요 먼 데 하나님은 아니냐

d. 성도는 믿음으로 하나님께 가까이 갈 수 있음(히7:19)
(율법은 아무것도 온전케 못할지라) 이에 더 좋은 소망이 생기니 이것으로 우리가 하나님께 가까이 가느니라

e. 하나님은 가까이 계심으로 우리가 하나님을 알 수 있음(행17:27)
이는 사람으로 하나님을 혹 더듬어 찾아 발견케 하려 하심이로되 그는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떠나 계시지 아니하도다

f. 하나님은 자기를 찾는 자를 가까이 하심(약4:8)
하나님을 가까이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 하시리라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 하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케 하라

g. 성도는 참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갈 수 있음(히10:22)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양심의 악을 깨닫고 몸을 맑은 물로 씻었으니 참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





3. 무소 부재하신 하나님

a. 하나님의 이름으로 모인 곳에 언제나 임재하심(마18:20)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b. 하나님의 눈이 어디나 있음(잠15:3)

여호와의 눈은 어디서든지 악인과 선인을 감찰하시느니라

c. 하나님의 성령이 어디나 있음(고전2:10-13)

사람의 사정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 외에는 누가 알리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사정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

d. 사람은 하나님이 경자를 벗어날수 없음(시139:9-12)

하나님의 속성 4 - 전지 하신 하나님

모든 것을 아시는(기노스케이 판타)

기독교 신앙은 하나님의 전지하심을 이야기한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전지는 무엇일까? 이 말 속에서 일반적으로 하나님의 예지만을 생각하려는 경향이 있다. 즉 '하나님은 모든 사람에게 앞으로 되어 질 모든 일들(특히 신앙과 구원에 관련된)일 이미 알고 계시다'는 측면만을 보려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 신앙이 '전지 하신 하나님'으로 고백하는 이유 중 핵심은 그런 문제보다는, 오히려 하나님의 심판의 확실성을 나타내고, 만사를 내다보되 남김없이 똑똑히 내다보심을 표현하는 것이다. 전지하신 하나님을 고백하는 기독교 신앙은 하나님에게는 아무것도 감추어질 것이 없음을 알고 있다. 그는 사람의 마음속 깊이까지 보시는 분이시다(참조; 요2:25).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서 인간의 죄는 하나도 숨김없이 낱낱이 드러나게 된다. 어둠 자체도 그 앞에서는 이미 어둠이 아니다. 하나님의 전지하심 앞에서 무엇을 감추려고 하는 일은 모두 실패하고만다. 이것이 바로 전지하신 하나님의 심판의 확실성이다.

“주께서 나의 전후를 두르시며 내게 안수하셨나이다 이 지식이 내게 너무 기이하니 높아서 내가 능히 미치지 못하나이다”(시139:5,6).

이 말씀은 다윗이 하나님의 전지하심에 대해 고백한 것입니다. 사실 성경은 여러 곳에서 하나님의 전지하심에 대해 언급하였는데(삼상2:3;욥12:13등), 우리 인간들은 시•공간적으로 제한된 지식을 가지고 하나님의 전지하심을 이해하려는 오류를 범해왔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인간의 잘못으로 인해 '전지하신 하나님'이라는 하나님의 지적 속성은 하나님을 믿는 자들과 믿고자 했던 자들에게 많은 오해를 낳게 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본문의 말씀을 통해서 '전지하신 하나님'의 의미를 정확히 파악하여 믿음에 굳게 서는 신자들이 되도록 합시다.

1. 시간의 제약을 받지 않으심
'전지하신 하나님'의 첫번째 의미는 하나님의 지식은 시간의 제약을 받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지식은 한정되어서 과거의 한 부분과 현재의 한 부분밖에는 알지 못합니다. 또한 현재 인간이 알고 있는 지식은 전 우주 안에서, 과거와 현재에 있었고 미래에 있을 전체 지식의 지극히 작은 부분에 불과합니다. 이렇듯 이 인간의 지식은 그 범위와 양이 너무 적으며, 인간의 기억력은 너무 약하며, 미래의 일에 대해서도 인간은 아무것도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지식은 인간처럼 이러한 제한이 없습니다. 하나님에게는 과거나 미래가 없습니다.

그에게는 언제나 현재만이 있을 뿐입니다. 만일 하나님에게 과거가 있다면, 그 과거는 하나님의 지배권의 범위를 벗어난 것을 의미합니다. 동시에 하나님에게 미래가 있다면 그 미래는 아직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있지 않은 하나님에게는 생소한 시간이기 때문에 거기에서 일어날 사건들의 내용을 하나님은 알 수 없음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에게는 언제나 현재만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하나님에게 현재만 있다는 것을 하나님이 과거와 미래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는 뜻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이것을 하나님은 모든 시간을, 즉 시간의 양과 질 모두를 자신의 지식 속에 포함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창조 전에 대해서도 모두 아시는 동시에, 창조된 시간이 그 때부터 그 시간이 계속될 영원까지도 모두 알고 계신 분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믿음은 과거에도 있었고, 현재에도 있으며, 미래에도 있을 결단이지만 하나님에게는 모두 현재적인 결단이며 그 믿음은 모두 동일하게 귀한 것들입니다.

2. 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으심
'전지하신 하나님'의 또 다른 의미는 하나님의 지식은 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앞에서 보았듯이 인간의 지식은 시간의 제약을 받으며, 또한 공간의 제약도 받습니다. 인간은 현재 자기 주변 가까이에서 일어나는 일은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같은 시간에 자신의 몸 속에서 일어나는 일과 지구 반대 편에서 일어나는 일, 그리고 우주 저편에서 일어나는 일은 알 수 없습니다.

즉 인간의 지식은 그 범위에 있어서 제한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공간의 제약성을 초월하여 인간의 몸 안에서 모두 아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이 창조한 모든 것을 통찰하고 계시기 때문에 그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십니다. 이같은 사실에 대해 바울은 롬8:22에서 다음과 같이 고백했습니다.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하는 우리가 아나니'. 바울의 이같은 고백은 바울이 자신의 지식만으로 이 사실을 알았다는 것이 아니라 그가 믿음으로 '전지하신 하나님'께 의지했을 때 바울은 각 피조물이 당하는 고통을 알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공간에 의해서 제약받는 분이 아니라 그러한 공간의 제약 없이 언제 어디서나 무슨 일이 일어나던 간에 모두 아시는 '전진하신 하나님'입니다.

3. 모든 피조물에 관심을 갖고 계심
시간과 공간에 제약받지 않는 전지하신 하나님은 또한 자신의 지식의 대상인 모든 피조물에게 깊은 관심을 갖고 계십니다(참조; 롬8:22). 특별히 하나님은 인간의 머리털의 수를 아실 정도로 인간에게 관심을 갖고 계시는데(참조; 마10:30), 이러한 하나님의 관심은 바로 하나님의 전지하신 신적 속성에 기인한 것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이 인간을 구속하시게 된 것도 죄 아래서 신음하는 인간의 비참함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전지하신 하나님'은 시•공간을 초월하여 모든 피조물을 단지 아는 것으로만 끝나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아실 뿐만 아니라 모든 피조물에게 깊은 관심을 두고 살피시며 그들이 완전히 회복될 날을 예비하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의 전지하심에 대해 알아보았지만 아직도 우리는 부분적으로 인식할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계약을 받은 피조 된 인간 이성으로 창조주이신 하나님을 완전히 안다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 우리에게 주신 영적 지혜를 사용하여 성경이 드러내는 하나님의 전지하심을 깨달을 수 있으며 또한 피조 된 세게의 모습 속에서도 하나님의 전지하심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왜곡된 인간 이성을 의지하기보다는 우리 속에 계신 성령의 음성에 귀를 귀울여 하나님의 전지하심을 오류 없이 파악하고 이해하도록 노력해야겠습니다.

하나님은 영원 전부터의 역사를 알고 진행하심(행2:23)
그가 하나님의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 내어 준 바 되었거늘 너희가 법 없는 자들의 손을 빌어 못박아 죽였으나

하나님은 극히 작은 것도 아심(마10:30)
    너희에게는 머리털까지 다 세신 바 되었나니

1. 전지하신 하나님
a. 하나님은 별의 수효까지 세심(시147:4,5)
b. 하나님은 음부와 유명도 아심(잠15:11)
c. 인간의마음과 행사를 아심(시33:13-15)
d. 인간의 계획과 걸음을 아심(욥14:16)
e. 인간의 머리털까지도 세심(마10:30)
f. 미래의 일을 아심(사44:28)
g. 영원 전부터 아심(렘1:5)
h. 심령을 감찰하심(잠21:2)
 i. 사람의 의식주를 아심(마6:8)
j. 최후의 날과 때를 아심(마24:36)
k. 그리스도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것을 가지심(골2:2,3)

2.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으시는 하나님

시간을 초월하심
㉠ 시간을 만드심(창1:15)
      또 그 광명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에 비취라 하시고(그대로 되니라)
㉡ 과거의 역사를 주관해 오심(행14:15-17)
     하나님이 지나간 세대에는 모든 족속으로 자기의 길들을 다니게 묵인하셨으나
     그러나 자기를 증거하지 아니하신 것이 아니니 곧 너희에게 하늘로서 비를 내리시며…
㉢ 인생의 미래는 불확실하나 하나님은 영원하심

① 하나님의 역사가 영원함(전3:4)
     무릇 하나님의 행하시는 것은 영원히 있을 것이라 더할 수도 없고 덜할 수도 없나니
     하나님이 이같이 행하심은 사람으로 그 앞에서 경외하게 하려 하심인 줄을 내가 알았도다

② 하나님의 미쁘심이 영원함(딤후2:13)
     우리는 미쁨이 없을지라도 주는 일향 미쁘시니 자기를 부인하실 수 없으시리라

③ 하나님의 말씀이 영원함 (벧전1:23)
     너희가 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로 된 것이니 하나님의 살아 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공간을 초월하심
㉠ 하나님은 성도의 가까이에 계심(렘23:23)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는 가까운 데 하나님이요 먼 데 하나님은 아니냐

㉡ 천지에 충만하심(렘23:24)
     사람이 내게 보이지 아니하려고 누가 자기를 은밀한 곳에 숨길 수 있겠느냐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는 천지에 충만하지 아니하냐

㉢ 성도 가운데 계심(마18:20)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 성도는 하나님을 피할 수 없음(시139:7-12)
      내가 주의 신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내가 하늘에 올라
      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음부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3. 모든 피조물에 관심을 갖고 계시는 하나님

a. 모든 인생을 돌보심(시33:13)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감찰하사 모든 인생을 보심이여

b. 사람의 마음속의 생각을 감찰하심(대상28:9)
      내 아들 솔로몬아 너는 네 아비의 하나님을 알고 온전한 마음과 기쁜 뜻으로 섬길지어다
      여호와께서는 뭇 마음을 감찰하사 모든 사상을 아시나니 네가 저를 찾으면 만날 것이요
      버리면 저가 너를 영원히 버리시리라

c. 만물을 새롭게 하심(계21:5)
     보좌에 앉으신 이가 가라사대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

하나님의 속성 3 - 전능하신 하나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할 수 있느니라(파라…데오 판타 뒤나타 에스티)


이 구절은 부자와 천국에 관한 교훈 중에 한 부분으로 사람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는 내용이다. 사람이 재물에 집착하고 재물에 대한 욕심을 버리지 못하는 한 하나님을 섬기는 일, 곧 '예수를 따르는 일'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이 세상에서 사람이 재물을 포기한다는 것은 사실상 난처한 일이다. 인간에게 있어서 재물은 일상적인 생활의 근거가 되기 때문이다.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사람이 재물을 완전히 포기하기는 불가능하다. 하지만 기독교 신앙의 본질은 자기의 생명의 근거, 삶의 근거를 오직 하나님께만 두는 것이요,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만을 자신의 안전과 행복의 유일한 근거로 삼는데 있다. 이것이 기독교 신앙이 하나님을 전능하신 분으로 고백하는 이유임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인간이 신을 찾고 의지하는 요인 중 가장 비중이 큰 이유가 있다면 그 신의 '전능성'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본문에서 그리스도도 인간의 구원 문제를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할 수 있느니라'(마19:26)고 하십니다. 이처럼 성경이 계시해 주는 하나님은 '전지'하신 하나님이십니다(참조; 창28:3;겔1:24;계4:8). 그 '전지성'이 있기에 그 사랑도, 그 공의도 자유롭게 행사하실 수 있으시며, 인생들을 죄와 죽음과 허무에서 구원하실 수가 있으신 것입니다. 함께 전능하신 하나님에 대해 살펴보면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1. 하나님의 전능성의 특징

1) 모든 속성들과 조화를 이룸
전능하신 하나님은 무엇이든지 다 하실 수 있으시지만 결코 그분의 거룩한 소성들과 상치되는 일은 하시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시기에 결코 '악'은 행하실 수 없으시며(참조; 약1:13), 공의로우신 분이시기에 결코 '거짓'도 행치 못하십니다(참조; 히6:18).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능성은 항상 그분의 영원, 사랑, 거룩 공의의 속성들 안에서만 발휘됩니다. 만일 악과 거짓까지 하나님께서 행하신다면, 그분은 결코 '전능자'라고 볼 숴가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와 같은 하나님은 자기 자신을 '통제할 능력'이 결여 된 존재이며, '사랑'을 행할 '능력'이 결여 된 '신'이 되시기에 참하나님이 되실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전능하신 '의지'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성품에 의해 제한되어 있으며 그 진리 되신 속성과 조화를 이루고 있음을 인식합시다.

2) 창조 원리와 조화를 이룸
하나님은 세상과 우주를 창조하시되 물질은 물질의 고유한 성품대로, 영적 세계는 영적 세계의 성품대로 지으셨습니다. 그리고 모든 만물은 '피조물'로서의 제한성을 지니도록 창조하셨으며, 하나님과 계속 교제를 해야만이 생존, 발전, 번영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창조적 원리에 모순 되는 일까지는 하시지 않으십니다. 이렇듯 하나님의 '전능성'은 그 거룩하신 속성과 또 창조 원리와 조화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거룩하신 뜻을 좇는 인생들만이 하나님의 전능하신 은총을 입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악을 행하고 창조주 하나님의 뜻을 불신하면서도 전능하신 축복을 누리기를 원할 수는 없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은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에게도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완전하라'(창17:1)고 요구하셨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2. 전능하신 하나님의 사역

1) 천지를 창조하셨음
'주 여호와여 주께서는 큰 능과 드신 팔로 천지를 지으셨사오니'(렘32:17). 우리가 하나님을 '전능자'로 고백하는 것은 하나님을 '창조주'로 고백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전능하신 분이시기에 '무에서 유'를 또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실 수가 있는 것입니다.

2) 세상을 통치하심
'할렐루야 주 우리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가 통치하시도다'(계19:6). 요한 사도가 이 고백을 할 때에는 '밧모' 섬에 유배되었을 때였고 교회도 역시 '로마'로부터 모진 핍박과 환란을 당할 때였습니다(참조; 계1:9). 한마디로 불의의 권세가 난무하고 정의로운 하나님의 교회는 '풍전 등화'격이었던 것입니다. 그와 같은 때에도 요한 사도는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이 세상과 역사를 통치하고 계심을 믿었습니다. 요한이 하나님께서 '전능자'라고 믿는 것처럼 우리 성도들도 어떤 환경일지라도 하나님께서 세상과 교회를 그 거룩하신 뜻대로 통치하고 계심을 믿어야 할 것입니다.

3) 인생들을 구원하심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마19:36). 이 대답은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느냐'는 제자들의 물음에 대한 '그리스도'의 답변 내용입니다. 인생이 하나님을 전능하신 분으로 믿는 실존적 이유는 하나님이 바로 죄인 된 인생을 죄와 사망과 형벌에서 구해 주시는 유일한 '구원주'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때때로 이 전능하신 하나님을 불신하기에 자신의 의에 대한 무능과 연약함과 모순성에 실망과 좌절을 하기도 합니다(참조; 롬7:24). 그러나 신앙이란 '나'를 바라보는 신념을 초월하여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안에 계시된 하나님의 사랑과 언약을 절대적으로 신뢰하는 것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시기에 '그리스도의 십자가 속죄'를 통해 나 같은 죄인 까지도 능히 구원하실 수가 있음을 감사합시다(참조; 눅3:8)

3. 전능하신 하나님께 대한 성도들의 자세

1) 성경 말씀을 신뢰해야 함
'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치 못하심이 없느니라'(눅1:37). 하나님은 전능하시기에 그의 뜻을 오류 없이 종들을 통하여 '성경'으로 기록하게 하실 수가 있으셨습니다. 이러한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 것이 곧 하나님의 전능성을 인정하는 첩경이 됩니다(살전2:13).

2) 하나님의 사랑을 신뢰해야 함
전능하신 하나님이시기에 죽음과 악도 주관하실 수가 있으십니다. 선한 일, 평탄한 길에서만 전능하신 하나님을 고백할 것이 아니라, 내게 악하고 두려운 일이 닥칠 때에는 하나님께서 나와 동행하신다는 사실을 믿을 수 있어야 합니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시23:4).

3) 하나님의 권세를 의뢰해야 함
현세에는 얼핏보면 사탄과 불의가 득세하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전능하신 하나님이시기에 장자 '새 하늘과 새 땅'을 재창조하실 것입니다. 그 때에는 모든 불의한 자가 전능하신 하나님의 권세를 피할 수 없을 것이며(참조; 시43:13; 계6:15-17) 성도들은 의의 보상을 누릴 것입니다. 그 전능하신 권세를 의뢰하고 악한 세대 속에서도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합시다.

a 전능함은 인간의 힘이 큰 것을 나타냄(왕상11:28)
이 사람 여로보암은 큰 용사라 솔로몬이 이 소년의 부지런함을 보고 세워 요셉 족속의 역사를 감독하게 하였더니

b. 전능함은 위대한 것을 나타냄(사28:2)
보라 주께 있는 강하고 힘있는 자가 쏟아지는 우박같이, 파괴하는 광풍같이 큰 물의 창일함같이 그 면류관을 땅에 던지리니


1. 전능하신 하나님을 알 수 있는 것

a. 하나님의 이름 - 아브라함에게 스스로 선언하심(창17:1)

b. 천지 창조 - 모든 것을 다 이루심(사44:24)

c. 자연 만물을 제어하시는 역사(암4:13)

d. 인류 열방을 통제하심(암1:1,2:3)

e. 만물 질서를 통제하심(시115:3)

f. 죽은 자를 살리심(롬4:17,24)

g. 하나님은 피곤치 않으심(사40:28)

h. 하나님은 능치 못함이 없으심(창18:14)

i. 그리스도의 전능하심
     질병을 치유하심(마8:3), 귀신을 내어쫓으심(막1:23-27), 사탄과의 시험에서 승리하심(마4:1-
     11), 죽음의 권세를 이기심(요10:17,18), 심판의 권세를 이기심(마25:31-33)
j. 성령의 전능하심
     그리스도 위에 강림하심(사11:2), 복음 위에 역사하심(롬15:18,19)

2. 하나님의 전능성의 본질
의로움(욥8:3). 멸시함이 없음(욥36:5). 큰 권능임(욥37:23). 공의임(계16:7). 힘이 큼(욥24:22). 완전함(고후6:18)

3. 전능하신 하나님의 사역
a. 창조하심
     말씀으로 만물을 창조하심(히11:3), 모든 만물을 창조하심(엡3:9), 질서를 창조하심(창1:2-
     19), 헛되게 창조하지 않으심(사45:18),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시려고 창조하심(시19:1),
     생명과 호흡을 친히 주심(행17:25)
b. 통치하심
     영원히 통치하심(출15:18), 의롭게 통치하심(삿5:11), 만유를 통치하심(시103:19),
     인간 나라를 통치하심(단4:17), 이방 국가를 통치하심(대하20:6)

c. 복 주심
     현세에 복 주심(창24:35), 병을 없게 하심(출23:25), 백성 위에 임하심(신23:5), 다양한 은사로
     축복하심(마25:15), 성도의 길을 완전케 하심(시18:32), 성도의 길을 완전케 하심(시18:32),
     대적하는 자를 치심(시18:32), 큰 구원을 주심(시18:49, 50), 총명을 주심(욥32:8),
     생명을 주심(욥33:4)

d. 경책하심
     ㉠ 때에 따라 경책하심(시103:9)
            항상 경책치 아니하시며 노를 영원히 품지 아니하시리로다
     
      ㉡ 죽기까지는 하지 않으심(시118:18)
             여호와께서 나를 심히 경책하셨어도 죽음에는 붙이지 아니하셨도다

      ㉢ 하나님을 떠난 자를 괴롭게 하심(룻1:20,21)
             나오미가 그들에게 이르되 나를 나오미라 칭하지 말고 마라라 칭하라 이는 전능자가
             나를 심히 괴롭게 하셨음이라 내가 풍족하게 나갔더니 여호와께서 나로 비어 돌아오
             게 하셨느니라…

       ㉣ 사람의 경책은 아첨보다 귀함(잠28:23)
             사람을 경책하는 자는 혀로 아첨하는 자보다 나중에 더욱 사랑을 받느니라

       ㉤ 전도자는 말씀을 전파할 때 경책하기를 힘씀(딤후4:2)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
4. 전능하신 하나님을 일컬은 실례
      축복 기도 때에(창28:3), 사람의 맹세에(욥27:2), 하나님을 찬양한 때(계4:8

하나님의 속성 2 – 영원하신 하나님 여호와

영원하신 하나님 여호와 (엘로헤-올람 예호와)

하나님의 영원성은 먼저 그가 만물과 모든 생명이 있기전에 계셨고 또한 행동하셨다는 사실에서 비롯된다. 그분은 세계가 있기 전에 계셨으며, 모든 피조물이 없어진 후에도 계실 분이시다. 그는 알파와 오메가, 곧 이 세상, 이 역사의 시작과 마지막을 초월해 계시며 다스리시는 분이시다. 그는 영원부터 영원까지 하나님이시다. 그는 피조물처럼 시간을 한계로 삼고 존재하는 분이 아니다. 그래서 '주께는 하루가 천년같고 천년이 하루같다'(벧후3:8). 하나님의 영원성에 비하여 인간의 일생은 너무나 불안정하다. 하나님의 영원성 앞에서의 인간의 삶은, 무상(無常) 그 자체이다(참조;시103:15). 기독교 신앙이 영원하신 하나님을 말할 때 그것은 피조물로서 시간의 한계에 지배당하면서 살아야 하는 불확실성 속애서 하나님을 향한 의지를 고백하는 것이다. 사람은 결코 하나님이 될 수 없다. 존재의 궁극적인 한계들을 벗어나지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원한 젊은'(시103:5)이 영원하신 하나님의 주권아래 복종하는 인간에게 주어지는 것임을 기독교 신앙은 잊지 않는다.

시편 기자는 '영원부터 영원까지 주는 하나님이시다'(시90:2)라고 기록하였습니다. 이 말씀의 뜻은 하나님의 여러 속성 가운데 그의 영원성을 드러낸 말씀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시간과 시간의 연결 속에서 끊임없이 존재하시는 분이시라는 사실입니다. 과거에도 계셨고 현재에도 계시며 미래에도 계실 영원한 하나님에 대하여 상고해 봄으로 은혜를 받도록 하겠습니다.

1. 영원하다는 말의 뜻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영원하시다'라는 의미는 하나님의 속성에 속하는 문제인데, 이 속성이란 말의 뜻은 어떤 사물의 성질 혹은 어떤 것의 유일한 특징을 나타내는 말로 쓰입니다. 하나님은 변치 아니하시고 영원하시다라는 사실을 성서에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참조; 요8:58; 딤전1:17;딤전6:16;히1:12;히13:8;계1:4).

1) 시작과 끝이 없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크시니 우리가 그를 알 수 없고 그 년수를 계산할 수 없느니라'(욥36:26). 욥은 광대무변하신 하나님께 대해 인간은 무지할 수밖에 없다고 고백합니다(계22:13). 또한 요한은 주님은 시작과 끝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바로 하나님은 스스로 존재하시는 분이기에 시작과 끝이 어디인지를 알 수가 없다는 말씀입니다. 예를 들면, 우상은 어떤 사람에 의하여 인위적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그것이 만들어진 시기가 있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우상은 반드시 마지막이 있는 법입니다. 이렇듯 세상 사람들은 이미 존재하여 있는 재료에서 물건을 만듭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존재해 있지 않은 재료에서 우주 만물을 만드셨습니다. 요컨대 하나님이 만드신 모든 피조물을 항상 완전한 것들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2) 시간을 초월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영원하시다'라는 말은 시간과 관계해서 생각해 볼 때, 하나님의 영원성을 말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처음과 마지막, 즉 시작과 종말이 없는 하나님은 시간 그 자체의 원인이 되십니다(참조; 요1:3;벧후3:8). 다시 말하면 모든 창조물 안에는 시간이 포함되어 있는데 그 모든 만물을 영원하신 하나님이 창조하셨기에 시간은 결국 영원하신 하나님의 권한하에 있다고 말할수 있습니다. 유한한 피조물인 인간이 한정된 지식 혹은 지성을 갖고서 생각하고 느끼고 행동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올바로 볼수는 없지만 하나님은 우리들 모두를 다 알고 계신다는 사실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3) 영으로 존재한다는 뜻입니다.
성도가 믿는 하나님은 어떤 물질적인 외형을 지니신 분이 아니라 영적인 실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요4:24에서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고 말씀하셨는데, 이 말의 뜻은 하나님의 본질이 영적이라는 의미입니다. 사람은 거울 속에 나타나 있는 자기의 얼굴은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하나님의 본질이난 속성을 볼 수는 없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의 영원성의 본질
하나님은 자존자이시기 때문에 영원하십니다(참조; 출3:14). 성경은 '영생하시는 하나님'(창21:33), '주는 여상하시고 주의 년대는 무궁하리이다'(시102:27), '지존 무상하시며 영원히 거하신다'(사57:15)라고 증거함으로써 하나님의 영원성의 본질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영원히 불변하시는 속성을 가지고 계시는데(딤전6:16) 그것은 오직 하나님께만 적용되는 신적 속성이라 할 수 있습니다.

3. 영원하신 하나님

1) 성경의 증거
하나님에 대한 바른 지식은 성서로부터 얻을 수 있는데 시93:2에 보면 '주의 보좌는 예로부터 견고히 섰으며 주는 영원부터 계셨나이다'라고 했습니다. 또한 '인자하심이 영원하시다'(역대상16:34; 시106:1) '자비하심이 영원하시다'(역대상1:41; 역대하5:13)라고 말씀하시면서 우리에게 영원하신 하나님에 대해 증거해 주고 계십니다.

2) 교회사적인 증거
콘스탄틴 대제가 기독교를 공인할 시점인 사도 후 시대를 살펴보면 네로 황제 이후, 이백오십년에 걸친 박해 속에서 폴리갑, 키프리안 같은 교부들이 순교를 당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저들은 살아 계신 영원한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입니다(참조; 행7:59,60). 성경은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11:6)고 말합니다. 하나님 앞에 순교했던 많은 순교자들은 영원하신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믿음을 가지고 행동으로 실천했던 사람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에게 있어서 영원은 '하나의 현재'입니다. 성경은 이 사실을 '오늘날'도 말씀하고 계십니다(참조; 시2:7;시90:4;벧후3:8). 하나님께서 현재를 살피시고 계시듯이 너무나도 명백하게 과거와 미래를 보신다는 사실입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경우에서 보듯이 사람의 행동과 마음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의 두려움을 깨달아야 하겠습니다(참조; 행5:5;행6:10,11). 에녹과 동행하신 그 하나님이 오늘도 우리와 동행하신다는 사실을 깊이 깨달아 영원하신 하나님과 함께 살아가시는 축복받는 인생들이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참조; 창5:22;고후13:13).

하나님의 속성 1 – 거룩하신 하나님

거룩하다(카도쉬)

'거룩'이라고 하는 개념 속에는 두 가지의 의미가 반영되어 있다. 하나는 분리, 즉 세속적인 것으로부터의 구별이며, 다른 하나는 영적인 능력이다. 즉 하나님의 거룩함에는 여러 신적인 세력들이나 인간의 운명을 지배하는 어떤 힘이 부여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거룩함에 대한 인간의 반응은 숭배와 두려움으로 나타난다. 성서는 하나님이 거룩하신 분임을 여러 가지로 가르쳐 주고 있다. 기독교 신앙이 하나님을 거룩하다고 고백할 때, 그것은 이 세계를 완전히 초월해 있다는 의미에서의 거룩이다. 이것은 다시 말해서 그는 불가침의 존재이며, 분석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측량할 수 없는 존재임을 말하는 것이다. 그분은 인간이 스스로의 힘으로 도달할 수 없는 전적인 타자로서 존재한다. 그의 거룩성은 가장 깊은 곳에 감추어져 있는 그분의 본질을 나타낸다. 그러나 이 하나님의 거룩성은 정적인 것이 아닌, 역동적인 힘으로서 심판과, 사랑의 형태로 인간에게 다가와서 인간으로 하여금 거룩한 생활에 참여하라고 요구한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레11:44,45;레19:2;레20:7;레20:26;민15:40)

거룩하신 하나님
선지자 이사야가 활동을 개시한 주전 739년 경의 유다 왕국은 그야말로 부정과 불의가 판을 치던 때였습니다. 하나님의 율법은 무시되고 이방의 우상 숭배 풍조가 횡횡하고(참조; 사2:6-8), 정치가들은 하나님 대신 이방의 군사력을 의뢰했으며 종교 지도자들은 관원들과 결탁하여 '악법'을 제정하여 백성들의 재산을 수탈하기에 급급했었습니다(참조; 사1:23). 이에 선지자 이사야는 비분 강개하여 성전에서 기도를 하던 중 '하나님의 영광'을 접하게 되었는데 그 하나님은 유다 민족의 부정과 불의와는 너무나 거리가 먼 '거룩'하신 분이시기에 큰 두려움을 가질 수밖에 없었습니다(참조; 사6:5). 이와 같이 하나님은 인간들의 불의와 죄와는 전혀 관계가 없으신 '거룩하신'분으로 성경은 증언을 합니다. 함께 거룩하신 하나님의 성품에 대해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1. 거룩의 뜻
'거룩'에 대해 구약에서는 '카도슈', 신약에서는 <하기오스> 말로 표현되었는데 이에 대한 원뜻은 '불의와 부정에서 분리된 상태'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거룩한 하나님'이라고 했을 때에는 하나님의 고유하신 속성을 뜻하는 것으로서 첫째, 죄와는 관계가 없으신 '하나님의 윤리, 도덕적인 완전성'을 뜻하는 것이며 둘째, 적극적인 의미로는 본질적으로 피조물들과는 구별된 '신의 속성'을 지니신 것을 말하고자 함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성부 하나님도(참조; 레11:44, 45; 요17:11) 성자 예수님도(참조; 막1:24; 요6:69)또 성경 하나님도(참조; 마3:11; 눅3:22) '거룩'하신 하나님으로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가 있는 사물이나 사건, 그리고 인간(성도)도 '거룩함'을 입은 것으로 말해 주고 있습니다(참조; 출26:33; 레1, 8장; 고전1:2).

2. 거룩하신 하나님의 성품
그렇다면 '거룩성'을 지니신 하나님은 세상 만물과 어떤 관계로 계시는가?

1) 존재적으로 구별되신 분이심
'신 중에 주와 같은 자 누구니이까 주와 같이 거룩함에 영광스러우며 위엄스러우신 분'(출15:11)이 누가 있겠느냐고 모세는 고백했습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거룩'이라는 뜻으로 하나님께서는 본질적으로 피조물인 만물과 인생들과 '구별'된 '창조주'요 '섭리주'로서 계시는 분이십니다. 즉 '인간'과 '곤충'과는 엄연히 '존재적'으로 구별되듯이 하나님은 절대적인 거룩한 '신'으로서 우리 인생들과 구별된 분이심을 뜻합니다.

2) 완전 무흠하신 분이심
'거룩…거룩…거룩'(사6:36)이라고 천사들이 찬양한 것은 하나님의 거룩성은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완전 무흠'하다는 사실을 시사해 줍니다. 아무리 의로운 인생일지라도 '완전'할 수는 없습니다. 또 그 삶에서 도덕적으로 '흠집'이 없는 이들도 없을 것입니다. 민족의 불의와 부정에 비분 강개한 '이사야'도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는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사6:5)라고 절규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처럼 '거룩하신 하나님'은 인간들과는 달리 존재적으로는 '신'이시요 윤리 도덕적으로는 '완전 무흠'하신 존재로서 '절대적'으로 인간과 인간 세계와는 '분리되신'분으로 계심을 인식합시다.

3. 거룩하신 하나님의 특성

1) 죄악을 행치 않으심
'그러므로…하나님은 단정코 악을 행치 아니하시며…불의를 행치 아니하시며'(욥34:10). 하나님은 인생들이나 창조하신 만물들에게 결코 '악이나 불의'를 행치 않으십니다. '죄악'을 불인정하시고, 용납하지 않으시는 거룩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참조; 사59:1,2 ;합1:13). 그러므로 성경은 '사람이 시험받을 때에…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약1:13)고 원망 불평하지 말 것을 주의 시켰습니다.

2) 거룩하심을 요구하심
소극적인 의미로 하나님께서는 인생들의 죄악을 원치 않으시고 적극적인 면으로는 인생들의 '거룩한 행위'를 기뻐하십니다(참조; 20:26; 잠15:9). 그리고 필연적으로는 하나님을 닮아 '거룩함에 이르라'고 요구하십니다(참조; 레11:44,4; 히12:14; 벧전1:15,16).

3) 거룩한 희생을 치루심
그런데 이 하나님의 '거룩성'이 온전히 계시된 사건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사건이요, 십자가의 대속 사건임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만일 그와 같은 '적극적인 거룩적 행동'이 하나님께 없었더라면 기독교의 하나님도 인간들이 지어 낸 신화적인 신과 다를 바가 별로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은 스스로 거룩하신 분이시요 또 인생들에게 거룩을 요구하시는 분으로만 머무르시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적극적으로 거룩을 행하셨으니 바로 불의한 인생들에게 당신의 '거룩한 성품'을 선물 하시려고 이 땅에 오셔서 속죄를 해주셨던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바로 절대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절대 불의한 인생들의 죄값을 몸소 담당하신 '희생'인 셈입니다. 이 십자가의 희생 앞에서 인생들의 '진정한 거룩'이 무엇인지 알게 됩니다.

4. 거룩하신 하나님께 나아가려면

1) 그리스도의 속죄 은혜를 힘입음
'율법'은 하나님의 거룩성과 그 요구를 반영해 줍니다. 그 율법안에서 인생들은 자신과 하나님 사이에는 '절대적 간격'이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참조; 롬7:12-15). 그러므로 오직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 은총을 힘입어야만 거룩하신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음을 인정해야 합니다(참조; 롬3:21,22; 히4:16). 바로 그리스도의 은혜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거룩성을 인정하는 것이되는 셈입니다(참조; 롬3:25-27).

2) 겸손함과 회개하는 생활을 해야 함
성도들은, 하나님은 언제나 절대적 거룩자요 우리는 항상 상대적 불완전자임을 인식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항상 '겸허'한 자의식을 지니고, 늘 회개하여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맺는 삶을 구현해야 합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a. 하나님의 거룩하심은 모든악에서 떠나 계시다는 의미임(히7:26)
b. 하나님은 성도를 거룩하게 하심(레11:45)

1. 하나님이 거룩하시다는 뜻

a. 하나님의 속성이 거룩하심
스스로 거룩하다 선언하심(렘11:45), 육과 영의 더러운 것이 없으심(고후7:1), 영광을 지니시며 위엄을 지니심(출15:11), 사람이 가미 다가설 수 없는 존재이심(삼상6:20), 마땅히 경배의 대상이 되심(시99:9) 하나님의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함(사6:3), 만국에 의로운 일을 펼치심(계15:4), 강포와 궤사가 없으심(사53:9), 악이 없고 흠이 없으심(히7:26)

b. 하나님의 사랑이 거룩함
하나님은 자신의 종을 사랑하심(민12:8), 이스라엘 백성을 사랑하심(대하20:7)
믿음이 돈독한 자를 사랑하심(약2:23)

c. 하나님의 요구하심이 거룩함
성도에게 거룩할 것을 요구하심(레11:45), 어린이와 같은 심령 상태를 요구하심(마18:3), 더러운 죄를 회개할 것을 요구하심(눅13:2,3), 영혼의 의로움을 요구하심(마5:20), 신령한 제사를 요구하심(요4:24) 신실한 믿음을 요구하심(요8:24)

d. 하나님이 성도에게 거룩한 목표가 되심
성도는 더욱 큰 은사를 목표로 함(고전12:31), 하나님이 주시는 믿음의 상을 목표로 함(빌3:13,14)  세상을 이김(고전9:24)

e. 하나님이 경배의 대상이 되심
우상에게 하는 경배는 잘못됨(레26:1), 사탄에게 하는 경배는 잘못됨(마4:9), 피조물에 대한 경배는 잘못됨(롬1:25), 오직 하나님께서 경배해야함(사6:1-5)

2. 거룩하신 하나님의 사역

a. 거룩한 약속을 주심

㉠ 믿음의 사역자에 대해
많은 사람을 주께로 인도한 자는 별과 같이 비취게 하실 것을 약속하심(단12:3), 구제하는 자에게 큰 상을 약속하심(막9:41), 선을 행하는 자에게 존귀와 평강을 약속하심(롬2:10), 율법을 실행하는 자에게 복을 약속하심(약1:25)

㉡ 회개하는 자에 대해
회개를 기뻐하심(눅15:7), 죄를 다시는 기억지 않으심(욜2:13), 성령을 주심(행2:38), 구원하심(시34:18)

㉢ 고난 중에 있는 자에 대해
밝은 날을 주심(시30:5), 구출하심(시34:19,20), 보호하심(시41:3), 위로를 주심(사43:2), 평안한 길을 예비하심(요14:1,2), 슬픔과 고통에서 구원하심(계21:4)

㉣ 시험받는 자에 대해
능력을 주심(눅10:19), 안전함을 주심(눅22:31,32), 사탄의 머리를 상하게 하심(롬16:20), 피할 곳을 주심(고전10:13), 시험을 받을 때에 도우심(히2:18), 최후에 승리하게 하심(약4:7)

㉤ 모든 성도에 대해
일용할 양식을 공급하심(시37:3), 축복을 주심(막9:23), 기도의 응답을 주심(막11:24), 영원한 생명을 주심(요3:14,15), 영적인 은혜를 주심(요6:35), 구월을 주심(롬1:16)

b. 거룩한 부르심
㉠ 거룩한 음성으로 부르심(사30:30)
㉡ 하나님이 성도를 세우기 위해 부르심(롬8:29)
㉢ 거룩케 하시려고 부르심(살전4:7)
㉣ 사랑을 통해 부르심(롬12:1,2)

하나님의 본질 4 – 스스로 계신 하나님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에흐예 아셰르 에흐예)


모세는 자기를 이스라엘에게로 보내시는 그 하나님의 이름을 물었다. 그 대답은 이러했다(에흐예 아셰르 에흐예). 그리고 같은 절 안에서 이 말은 다시 한 단어로 줄어져서 표현된다.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스스로 있는 자, 곧(에흐예)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 하나님이 자신의 이름으로 계시한(에흐예)는 영어로 'be' 동사에 해당하는(하야)의 1인칭 단수형이다. 즉 '나는…이다' 라는 뜻이다. 그런데 구약성서에서 (하야)가 단순히 '존재함' 또는 사람이나 물건의 '정체된 상태'를 나타내는데 사용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왜냐하면, 히브리어의 언어 구조상 영어의 'be' 동사와 같은 것은 필요치 않기 때문이다. 즉 '명사 문장'이라는 것을 사용함으로써 동사나 연계사(be동사)가 없이도 하나의 문장은 이루어질 수 있다. 이러한 히브리의 언어 구조는 그들이 정적인 사고에는 익숙하지 못하고 오직 동적인 범주에서 모든 개념을 생각한다는 그들의 사고 경향을 보여 준다.

아삽은 그의 시에서 이렇게 하나님의 성호를 노래합니다. '하나님이 유다에 알린 바 되셨으며 그 이름은 이스라엘에 크시도다'(시76:1). 하나님의 칭호는 다양합니다. 그 중 제일 독특한 칭호는 오늘 말씀의 제목이 되는 '스스로 계시는 하나님'인 것입니다(참조; 출15:3). 이 하나님의 칭호는 '여호와'로서 특별히 은혜의 하나님 되심을 밝히는 자기 계시로서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겸허한 접근이라 하겠습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인지하는 방법은 다양하지만 구속의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을 발견하게 되는 것은 하나님의 초자연적 계시에서만이 가능한 것입니다. 스스로 계시는 하나님이라는 제하에서 말씀을 상고할 때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을 발견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1. 유일하신 하나님

1) 우상과 비교될 수 없음
고금을 막론하고 우상이 없는 곳이 없습니다. 그 모든 우상들이 저마다의 형상을 가지고 있음에도 예외없이 누군가의 손에 의하여 조각되거나 만들어졌음을 보여 줍니다(참조; 행19:23-26). 그러나 모세의 질문에 응답하는 하나님은 누구에 의하여 존재하시는 분이 아니라 스스로 계시는 하나님 되심을 밝혀 줍니다.

2) 구속의 계약을 맺은 인격적 하나님
스스로 계시는 하나님은 인간에게 강요가 아닌 은혜의 계약을 하여 주십니다. '…나는 너의 방패요 상급이라'(창15:1). '하나님이 가라사대 내가 정녕 너와 함께 있으리라 네가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후에 너희가 이 산에서 하나님을 섬기리니 이것이 내가 너를 보낸 증거니라'(출3:12). 또한 중요한 것은 은혜의 계약을 주시는 하나님은 변개치 않으시다는 사실입니다(참조; 말3:6; 레24:4). 이처럼 스스로 계시는 하나님은 역동적이고 능동적인 자존자로서의 능력의 소유자이심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2. 역사적인 하나님
가시나무 불꽃 가운데서 나타나 사명을 주시는 하나님을 모세는 창조의 역사를 포함한 이스라엘 조상의 하나님으로 받아들입니다(참조; 출3:13)

1)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하나님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더욱 확고한 가르침을 주십니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를 너희에게 보내신 이는 너희 조상의 하나님 곧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여호와라 하는 이는 나의 영원한 이름이요 대대로 기억할 나의 표호니라'(출3:15).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서부터 시작한 선민의 하나님으로서 그들의 역사의 중앙에서 어제나 오늘이나 변치않는 동일한 하나님이 되심을 적극적인 계시로서 보여 주셨습니다(참조; 히13:8).

2) 아브라함의 자손을 붙드시는 하나님
역사 속에서 살아계신 하나님께서는 관망자로 그치지 않으십니다. '이는 실로 천사들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아브라함의 자손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라'(히2:16). 과거의 하나님께서, 오늘의 역사 선상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믿고 따르는 아브라함의 믿음의 후손인 모든 성도들을 붙잡고 계신 것입니다(참조; 롬4:16). 뿐만 아니라 스스로 계시는 하나님은 성도를 떠나지 않고 임마누엘의 하나님으로 믿음의 사람들과 언제나 함께 하여 주시는 것입니다(참조; 마1:23).

3. 예배의 대상이 되심
스스로 계시는 하나님은 홀로 예배의 대상이 되십니다. 전도서 기자는 전도서 12:13절에서 이렇게 결론적 단언을 합니다.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킬지어다' 그렇다면 어떤 내용의 경배가 가능할까요?

1) 언약의 성취를 바라며, 언약의 성취됨을 기뻐함
성서에 기록된 수많은 노래들을 살펴보면 하나님의 신실하신 약속의 성취됨을 즐거워 노래하였습니다(참조; 출15:1).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를 그리며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참조; 눅1:39-56).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입술에서 '애굽에서 구원'을 베푸신 은혜의 노래가 끊이지 않기를 바라고 있습니다(참조; 신32:1-47). 마찬가지로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를 입은 성도들은 언제나 구속의 감격이 떠나지 않는 경배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나가서는 천국의 영생까지 성취될 것을 바라면서 기뻐하는 삶을 살아가야 하는데, 이것이 곧 하나님을 예배하는 삶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참조; 히13:15).

2) 계명을 지킴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살아가는 삶은 곧 하나님이 기뻐받으시는 예배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참조; 히13:16). 즉 계명을 지켜 사는 것이 최선을 다하는 삶임을 말합니다. 예수께서는 이렇게 가르치십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 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에서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막12:30,31). 경배의 대상이 되셔서 예배를 기뻐받으시는 스스로 계시는 하나님은 계명을 지켜 사는 믿음의 사람들의 삶에 두 가지의 약속을 더하십니다. 하나는, 이 땅의 삶 가운데서의 은혜이며 또 하나는, 천국의 상급으로 기억하며 갚아 주신다는 것입니다(참조; 마19:28, 29; 히11:6).

모세는 스스로 계시는 하나님을 이렇게 노래합니다. '여호와는 나의 힘이요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시로다 그는 나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그를 찬송할 것이요 내 아비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그를 높이리로다 여호와는 용사시니 여호와는 그의 이름이시로다'(출15:2,3).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되심을 깨달은 모세는 그의 삶속에서 은혜의 계약이 성취됨을 기뻐하며 노래하였습니다. '여호와'의 이름은 견고한 망대와 같고(잠18:10) 그 이름은 이스라엘에 크시며(참조; 시76:1) '여호와'의 이름보다 아름다운 이름은 존재 하지 않습니다(참조; 출20:7). '호흡이 있는 자마다 여호와를 찬양할지어다 할렐루야'(시150:6). '할렐루야'의 '야'는 '여호와'의 약어입니다. 오직 '스스로 계시는 하나님'만이 모든 입술의 영광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십니다.

하나님의 본질 3 – 유일하신 하나님

1) 이스라엘아 들으라(아쿠에 이스라엘)

이 부름말은 고대에 제의적인 집회를 시작할 때의 외침이다. 구약성서에서는 이 말로써 도입되는 외침의 내용이 이방 민족들의 다신교와는 달리 하나님이 한 분이라는 의미에서, 또는 각기 다르게 전해진 신앙 전승들이 여러 가지임에도 불구하고 오직 한 분 여호와만이 존재한다는 의미에서 여호와 하나님의 유일성을 강조한다. 여호와의 유일성을 외치는 이 말은 그 본문의 서두를 따라 '쉐마'라고 부른다. 히브리어로는 (쉐마 이스라엘)이다.

2) 유일하신 주시라(퀴리오스 에이스 에스티)
'유일하신 하나님'.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유일자요 참하나님이시라는 이 정의는 구약성서의 유일무이한 진리라고 할지라도 이스라엘의 종교사 가운데서 비교적 후대에 형성된 개념이다. 이 사상을 조직적으로 발전시키고 정립한 이는 이사야이다. 그는 포로기라는 고난의 역사 한 가운데에서 여호와는 유일신으로 선포하며, 이 전에도 그 이후에도 다른 신은 없다고 외쳤다. 특히 이스라엘을 사로잡아 그 힘과 과시한 바벨론의 위대한 신들조차도 한낱 나무 조각이나 금속 조각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즉 여호와만이 살아 계신 하나님이다.

우리가 '하나님'이라고 그분을 부르는 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유일하게 존재하시는 신(神)이심을 고백하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이렇듯 성경은 하나님은 오직 '한 분'이심을 증언해 줍니다(참조; 출8:10;사40:18;요일5:7). 그러나 삼위일체로 계신 하나님을 부인하는 '일신론주의'와는 혼동을 피해야 합니다. 이제 그와 같은 내용을 함께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하나님의 유일성의 의미

하나님께서 유일하시다고 할 때 그 말은 단순히 '수'적인 개념으로 유일하다는 뜻만이 아니라 여러 가지로 깊은 신앙 고백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1) 존재적으로 단 한 분이라는 의미
본문에 '오직 하나'로 번역된 히브리 말은 원래 '에하드'라는 뜻입니다. 이는 숫자적으로 '하나'라는 뜻으로, 하나님께서는 존재적으로 한 분이라는 의미입니다. 그와 같은 증거는 성경 곳곳에 있는데 '세상 만민에게 여호와께서만 하나님이시고 그 외에는 없는 줄을 알게 하시기를 원하노라'(왕상8:60) 했으며, 신약성경에서도 바울 사도가 '비록 하늘에나 땅에나 신이라 칭하는 자가 있어 많은 신과 많은 주가 있으나…우리에게는 한 하나님 곧 아버지가 계시니'(고전8:5,6)라고 했습니다. 이방인들이 바알 신들을 섬기고, 또 쥬피터니 아프로디테니 하여 '다신론주의'에 젖어있을 때에도 이스라엘 민족과 기독교인들은 오직 하나님은 '한분' 이심을 믿었던 것입니다.

2) 질적으로 하나라는 의미
이 의미는 삼위일체로 계신 하나님의 교리와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즉 성부, 성자, 성령의 '삼위'로 계시기는 하지만 본질적으로나 속성으로나 모두 통일되게 계시다는 의미에서 '유일하신 하나님'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어떻게 성부, 성자, 성령의 세인격으로 계신 분이 '하나'라고 하는지 납득이 잘 되지 않으실 줄로 압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본질은 '물질'이 아닌 '영'임을 우리는 이미 배웠습니다. '영'이신 하나님이시기에 숫자적인 논리로 '삼위일체'의 교리를 이해할 수는 없지만 '영'의 세계에서는 얼마든지 가능한 일입니다. 따라서 그와 같은 신앙을 가지지 못한 '유대교'나 '마호메트교'에서는 '유일하신 하나님'은 믿지만 삼위일체로 계신 하나님은 믿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독교의 '유일하신 하나님'관은 단순히 한 분으로만 계시는 하나님을 뜻함이 아니라 삼위일체로 계시면서도 본질적으로는 한 분으로 계시는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은 세 위격이 모두 동일하신 신적 능력과 본질과 권위를 가지고 계심을 믿는 것입니다(참조; 엡4:4-6).

3) 단 한 분만이 신앙의 대상이라는 의미
'카일'이라는 구약 신학자는 말하기를 '하나님께서 유일하신 분이시라는 의미는 신이라고 이름 붙이기에 오직 홀로 합당하다는 뜻이다'라고 했습니다. 옳습니다. 유일하신 하나님이라고 우리가 고백하는 의미는 오직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만이 우리가 경배해야 할 참하나님이라는 신앙 고백적인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모세는 '신 중에 주와 같은 자 누구입니까…거룩…영광스러우시며 찬송할 만한 위엄이 있으며 기이한 일을 행하는 자 누구니이까'(출15:11)라고 했습니다.

2. 유일하신 하나님의 행사

그렇다면 유일하신 하나님으로서 우리 인생들에게 행사하시는 내용은 어떤 것들이 있는지 성경의 증언을 들어보도록 하겠습니다.

1) 유일하신 창조주로서 계심
이 세상 모든 만물과 인생의 유일하신 주인으로 계신다는 의미입니다. 말라기 선지자는 '우리는…한 하나님이 지으신 바가 아니냐'(말2:10) 라고 했는데 이는 창조주는 오직 하나님 한분이시며 우리 인생들은 본질적으로 '피조자'임을 인식하라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아무리 훌륭한 업적이나 가치관을 이루어 놓았다 해도 겸허하게 이웃을 대하고 내가 무슨 '창조자'나 되듯이 교만에 빠지지 말라는 것입니다.

2) 유일하신 구원주이심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시니'(딤전2:5)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유일하신 '신'(神)이시요, 창조주이시니 지으신 인생들을 구원하실 수 있는 분도 오직 하나님 밖에 안 계심을 인정해야 합니다. '인간의 힘' 도 또 '인간의 지혜'로 만들어 낸 사상이나 제도도 또 '인간의 탐심'으로 만들어 낸 모든 '신화적 우상'들도 인간의 '의뢰의 대상'이 될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 옛날 이스라엘 민족을 애굽에서 구해 내신 분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뿐이시며, 인간의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를 지신 분도 오직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 한 분밖에 안 계십니다.

3) 유일하신 심판주이심
'입법자와 재판자는 오직 하나이시니 능히 구원하기도 하며 멸하기도 하시느니라'(약4:12). 인간들이 자꾸 신화와 우상들을 만들어 내는 이유를 어떤 종교심리학자는 '회피와 은혜와 기만심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즉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을 회피하고, 자신의 죄를 전가시키며, 하나님께서 심판하신다는 사실을 기만하기 위해 여러 신화와 우상들을 만든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인간들은 '아전 인수'격으로 자기들에게 좋은 신들을 많이 만들어 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유일하시기에 그 뜻과 공의가 나뉘지도 않고 변질되지도 않으십니다. 한번 심판하기로 작정하셨다면 기필코 심판하실 뿐입니다(참조; 시139편). 그리고 그 심판을 막아 주거나 그치게 할 다른 신적인 존재는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 앞의 진실한 회개만이 그 심판을 피할 수 있는 길이 됩니다.

하나님의 본질 2 – 인격적인 하나님

살아 계신 하나님께로(에피 톤 데오 톤 존타)


성서의 하나님은 역사 속에서 움직이시고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역사하신다. 하나님은 바로 이 역사하심으로 자신의 존재를 나타내시고, 이것으로 우리에게 자신을 계시하신다. 구약성서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잘 표현하고 있다. 그 이스라엘은 곧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장(場)을 제공하고 있다. 성서가 하나님을 이스라엘의 하나님으로 소개하는 것은 행동하시는 하나님, 살아 계신 하나님을 말하기 위함이다. 하나님 앞에선 이스라엘은 언제나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를 요구받는다. 흔히 하나님을 인격적인 분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이 인격이라는 개념을 의인론적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인격(person)이란 말이 라틴어의 persona(가면, 탈)에서 왔다면, 하나님의 인격성이란 역사 속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여러 가지 활동의 모습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그 인격성은 살아있음에 그 특징이 있다. 인격적인 하나님은 곧 살아계신 하나님이다.

성경은 하나님을 살아 행동하시는 '인격적인 신(神)'으로 계시해 줍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마26:63; 행14:15)이라는 뜻은 바로 하나님의 '인격성'을 강조한 고백입니다. 그리고 그 인격적이신 하나님은 우상들과는 달리 인간들의 뜻을 초월하셔서 자신의 거룩하신 뜻을 결정하시고, 섭리하시며, 이루어 나가십니다. 그와 같은 하나님의 '인격'을 살펴봄으로 하나님께 대한 지식을 더하고자 합니다.

1. 하나님의 인격성에 대한 성경의 증언

1) 하나님의 인격적 요소들
우리는 '인격의 요소'를 '감정, 지성, 의지'로 봅니다. 성경은 그와 같은 세 요소를 하나님께서 지니고 계심을 보여 줍니다. 예민한 '감수성'을 지니시고(참조; 창6:6; 시103:8-13) 그 '감수성' 중에 가장 뛰어난 특징을 '사랑'(요3:16) 이라고 증언해 줍니다. 또 완전하신 '지성'을 소유하고 계시며(참조; 창18:19; 출3:7; 행15:18), 거룩하신 '의지'를 소유하고 계십니다(참조; 창3:15; 시115:3; 요6:38).

2) 인격적이신 하나님의 활동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인격'을 지니신 하나님께서는 인생들과 만물들에 대해 어떻게 행동하시고 계시는지 알아 보겠습니다.

첫째, 대화하기를 원하십니다(참조; 창1:3). 하나님은 당신의 '형상', 즉 '인격성'을 따라 인간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창조한 인생들과 인격적인 대화로 사귐을 원하시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그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대화'를 깨뜨리고, 거절하고 거부하는 것은 결국 '불신앙의 죄'인 셈입니다. 그래도 하나님께서는 '성경'과 예언자를 통해서 '말씀'을 해오시고,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히1:1)하기를 원하신다고 성경은 증거해 줍니다. 이와 같은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사귐'이 곧 '영생'임을 알아야 하겠습니다(참조; 요일1:2,3).

둘째, 인생들의 행위를 보시고 듣고 계십니다(참조; 창11:5; 시94:9). 인생들이 자신의 행동과 삶을 책임져야 할 근거는 바로 인격을 지니신 하나님께서 인생사 모두를 듣고, 보고, 판단하고 계시는 데 있습니다.

셋째, 인생의 '불의'에 대해 진노하십니다(참조; 창6:6; 신1:37). 특히 인생들이 마땅히 섬겨야 할 하나님 대신에 인간과 물질과 세상의 허영들을 '우상화'하는 것에는 맹렬한 '질투'를 하신다고 했습니다(참조; 출20:5).

넷째,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이들에게는 따뜻한 마음으로 '자비'를 베푸십니다(참조; 시114:4). 이와 같은 인격적 특성을 지니신 하나님은 그 인격의 특성들을 따라서 만물을 창조, 섭리, 보존, 통치하십니다(참조; 행14:15; 느9:6; 시7:6,7).

2.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드러난 하나님의 인격성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요14:10). 이 말씀은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을 보여 달라고 한 제자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인격성은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밝히 드러났습니다. 그 사실을 함께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1)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마음'을 보여 주셨음
인생들의 '불의'에 대한 '거룩한 의분'(참조; 마23장), 또 한없으신 '긍휼심'(참조; 마9:36; 요5:6)은 바로 인생을 향하신 '창조주의 감정'을 보여 주신 예입니다. 그러나 그 모든 감정은 '사랑'에서 기인된 것임을 그리스도를 통해서 보여 주셨으니, 하나님께서 세상의 인생들을 사랑하시되 '독생자'까지 이 땅으로 보내 주셨다는 사실이 바로 그것입니다. 우리는 말구유에 누우신 아기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마음'을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2)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지성'을 보여 주셨음
'산상 수훈'(마5-7장)을 읽어 보십시오. '너희 중에 죄없는 이부터 돌로 치라'시던 그 뛰어나신 '지성'을 생각해 보십시오(참조; 요8:3-9). 또 앞날에 대한 전지하신 통찰력들(참조; 마24장)은 모든 인간들의 지혜를 초월하신 하나님의 거룩한 '지성'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특히 사탄과 인간들의 불의를 참으시고 끝까지 '골고다의 십자가'를 지신 것은 하나님께서 그 얼마나 거룩하신 '지성'의 소유자인지를 보여 준 예가 됩니다.

3)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의지'임
'인격적 존재'라는 의미는 한마디로 스스로 결단을 내리는 존재라는 뜻입니다. 그와 같은 의미에서 성육신하신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의지'그 자체입니다. '인생 구원'의 거룩하신 뜻을 이루시기 위하여 우주 최대의 '결단'을 내리신 사건이 그리스도의 성육신 사건이며, 또한 모든 악의 세력들의 도전과 훼방을 물리치시고, 또 '인성'의 한계도 극복하시고 십자가를 지신 '겟세마네의 결단'(참조; 눅22:42)은 오직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초의지적 행동'입니다.

3. 인격적이신 하나님과 관계를 맺는 조건들
그렇다면 그와 같은 '인격적 존재'이신 하나님과 교제를 맺으려면 우리 인생들은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할까요?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안에서의 '믿음'입니다. 믿음은 '인격적 관계'를 가능케 하는 유일한 수단입니다. 이기적 '상업주의' 풍조에 물든 우리 인생들은 하나님마저도 그와 같이 비인격적으로 섬기려 하고 있습니다(참조; 딤전6:5). 그러나 하나님은 '인격'이 없는 '우상'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죄값으로 내주시기까지 우리를 '인격적'으로 대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마땅히 인생들도 '마음과 성품과 뜻'을 다하여 하나님의 사랑에 전인격적으로 응답해야 합니다(참조; 마22:37-40). 또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인격을 걸고 언약하신 그 '구원의 약속'을 의심없이 믿고, 그 언약을 끝까지 의뢰하며, 그 언약에 합당한 존재가 되기를 힘쓰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인격'을 존중해 드리는 것임을 유념합시다(참조; 요14:21; 히6:16-18).

하나님의 본질 1 – 영이신 하나님

하나님의 정체를 설명코자 하는 접근으로는 그 본질적 규명, 속성적인 접근, 그리고 구약에서 하나님이 갖는 명칭들과 신약에서 갖는 명칭들의 성격을 찾아봄으로써 가능하다. 하나님의 본질은 그가 영이시고 인격적인 존재이심을 우선 들수 있는데 하나님은 그 본질상유일하시고 스스로 계시는 자존자 이시다. 따라서 하나님은 영이신 까닭에 시간이나 공간의 제한을 벗어나신다.

하나님은 역사를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까지 한 순간에 읽으시므로 그 역사를 경영하여 나가시며 인간의 삶이 영위되는 현재 세계는 물론 우주와 사후의 세계까지 통치하신다. 이러하신 하나님은 동시에 인격을 소유하고 계신다. 이러한 점에서 철학적 사고자들의 '막연한 궁극자' 또는 우주 밖에서 세상을 피상적으로 관찰하는 '절대자' 라는 개념의 신관과는 판이하다.

기독교에서 언급되는 성부 하나님은 유일의 하나님인 까닭에 자연주의의 범신론 이나 서방종교의 다신론과 구별되는 독특성을 갖는다. 더구나 인간들의 사고나 필요에 의하여 표상화되어지고 의미가 부여된 타종교의 신과는 달리 우리 하나님은 그 스스로 자신의 존재를 개시하여 주는 자존적 존재이시다. 기독교에 있어 나타나는 독특한 신관은 바로 이 하나님의 본질에서 찾아볼 수 있다.

하나님의 속성을 살펴봄으로써 그 정체를 보다 적절히 이해할 수 있다. 먼저 하나님의 속성에 나열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그분의 거룩성이라 할 것이다. 이사야 선지자는 자신의 이상 가운데서 하나님께 스랍들이 거룩함을 강조하여 찬양하는 장면을 묘사하고 있다(참조; 사6:2). 하나님은 또 영원하여 시작과 끝이 없으시다. 이 영원하신 하나님은 전능성과 전지성을 겸유하고 계신다. 전능하시므로 무에서 유의 창조를 이끄셨으며 전지하시므로 자신의 창조하신 모든 피조물들의 상태를 파악하고 계신다. 하나님의 전능성과 전진하심은 곧 그 운동 거취의 무소부재하심에 귀결된다.

하나님이 세상의 경영과 우주의 통치에서 일관되게 적용하여 오시는 원칙이 있다면 그것은 사랑과 공의의 선하신 실천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속성에 내재된 자비와 진실하심, 그리고 변치 않으심은 이 실천들의 세밀한 구체화에서 나타나고 있다.

1) 하나님은 영이시니(프뉴마 호 데오스)
요한복음은 영(프뉴마)과 육(사르크스)을 구별하여 대립시킨다. 전자는 하나님의 영역을 나타내고 후자는 세상의 영역을 나타낸다. 육(사르크스)은 마귀(디아볼로스)나 세상(코스모스)과 같다. 반면에 하나님은 영(프뉴마)이시다. 인간은 언제나 양자 택일의 책임 앞에 서있다(참조; 요3:6). 즉 육(사르크스)은 차안적이며 인간적인 삶의 양식을 뜻하고, 영(프뉴마)은 피안적이며 신적인 삶의 양식을 뜻하는 것이다.

2) 신령과 진정으로(엔 프뉴마티 카이 알레데이아)
영이신 하나님은 그 예배하는 자들에게 영(프뉴마)과 진리(알레데이아)를 요구하신다. 영 안에서 예배한다는 것은 자기의 세계에서 즉 내면에 있는 하나님의 본성과 유사한 본성 안에서 드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세계 다시 말해 참된 실재의 세계에서 예배드리는 것을 의미한다. 그 하나님의 참된 실재는 그리스도로 세상에 성육신하셨다. 참된 예배는 성육하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다. 그것만이 참된 예배 곧 진리의 예배이다.

하나님은 영이시니'라는 말씀은 하나님의 신적 본질을 가장 적절하게 가르쳐 주는 말씀입니다. 원래 히브리어<루아흐>로 묘사된 '영'은 '움직이는 바람'이라는 뜻으로, 죄로 물들고 또 유한한 인생들과 대비하여 하나님의 신적 본질을 강조하기 위하여 쓰인 말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움직이는 바람'처럼 '무형적 존재'이시며, 동시에 '행동하는 인격자'이시며, 또 '생명의 근원'이심을 '영'이라는 말로 표현한 것입니다. 함께 구체적으로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1. '영'의 성서적 의미

1) '영'에 대한 일반적 인식
먼저 하나님을 '영'이라고 증언하는 성서적 '영'관을 생각하기 전에 우리가 혼동하기 쉬운 일반적인 '영'에 대한 인식을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히브리어<루아흐>를 영어성경은 'Sprit'로 번역했고 한글성경은 그것을 '영'으로 번역했습니다. 일반적으로 알려진 '영적 존재'에 대해 살펴보면 첫째, 원시적인 관념으로서의 '영'관이 있습니다. 이는 모든 물체 안에는 '정령'들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으로 우리나라에도 아직 그와 같은 원시적인 영관을 생각하는 것으로 우리나라에도 아직 그와 같은 원시적인 영관을 지닌 자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시골 교회에서는 집 뒷뜰에 있는 '나무'를 베는 일에도 목사님에게 기도를 부탁하는 집사님도 계십니다. 둘째, 미신적인 영관이 있습니다. 이는 죽은 사람의 '귀신'이나 '유령'을 '영'이라고 여기는 것입니다. 셋째, 인간의 '영혼'은 불멸 하기에 그 '영혼'을 '영'으로 여기는 경우도 있습니다. 넷째, 한발 더 나아가 물질적 세계는 악하고 불안한 '미완의 세계'요 오직 보이지 않는 '본질적 철학의 세계'가 '영'이라고 생각하는 경우로 세계에 대한 관념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수양으로, 철학으로, 종교적 노력으로 이 불완전한 세계를 탈피하여 어떤 이상적인 세계에 도달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그 세계를 '영적 세계'라고 여깁니다.

2) 성경적 증언
성경에서 '하나님은 영'이시라고 증언하는 것은 그처럼 인간들이 생각하는 '요정, 유령, 인간의 영혼, 이상적인 세계'를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는 오직 하나님께만 있는 '신적인 특성'을 말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신적인 특성'이라 한다면, 인간이나 인간 세계에서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하나님의 고유하신 본질'을 나타내는 말로서 '하나님은 영'이라고 한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그 '영'이신 하나님과 대비하여 유한한 인생들을 가리켜 '육적 존재'라고 했습니다(참조; 사31:3;롬8:7;롬9:3-5).

2. '영'이신 하나님의 특성

1) 무형적 존재이심
앞에서도 논의했듯이 '영'은 '바람'이라는 의미가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바람'이 '무형'이듯 영이신 하나님은 '무형적 존재'이십니다. 결코 인간들의 육체적 '눈'으로는 볼 수가 없는 분이십니다. 요한 사도는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다'(요1:18)라고 했고, 바울 사도도 그처럼 증언했습니다(참조; 롬1:20; 골1:15; 딤전6:16). 그렇다면 성경에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보았다는 증언들이 있는데(참조; 창32:30;출3:4;신34:10;사6:1) 그것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요? 그와 같은 말씀들은 그들이 '하나님의 실체'를 보았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영광스런 상징을 통하여 가시적 형상으로 자신을 계시하신 것을 보았다는 뜻입니다(참조; 창18:1; 출24:9,10). 죄인인 인간은 본래적으로 하나님을 뵐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거룩은 죄를 용납치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2) 비물질적 존재이심
'영'이라는 뜻은 철저히 '비물질적'임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인생들이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면서 '하늘, 땅, 땅 아래 물 속'(출20:4,5)에 있는 어떤 '물질적 형상'으로도 생각하지 말 것을 경고하셨습니다. 물론 성경은 하나님께서 '손, 발, 얼굴'(참조; 창3:8;왕상8:29;시34:15;사65:2) 등은 가지고 계신 분으로 묘사를 했습니다. 그러나 그와 같은 표현은 영이신 하나님을 '의인화'하여 우리 인생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섭리를 이해하도록 한 것뿐임을 알아야 합니다.

3) 생명의 근원자이심
'바람'은 '생명의 힘'을 상징하기도 합니다. 구약성경 겔1:12에는 모든 '생물'들이 '하나님의 신'에 의해 활동하고 있음을 환성적으로 보여 줍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다라고 하는 큰 의미는 만물과 인생에게 '생명과 힘'의 근원자가 되심을 나타내 주는 말씀입니다.

3. '영'이신 하나님과 관계를 맺는 조건

1) 예배의 대상으로 여겨야 함
'육'적인 존재인 인생은 오직 '영'적 존재이신 하나님께 '예배'할 수밖에 없는 '본문'을 지녔습니다. 하나님은 결코 인간의 이성이나 지혜로 만나볼 수 있는 분이 아닙니다. 오직 그리스도안에서 경배하고 신앙하는 자들만이 그 존재를 인식할 수 있습니다.

2) 신령으로 섬겨야 함
'신령'(요4:24)은 '인간의 정신'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비물질적 존재이시기에 결코 물질적인 그분을 섬길 수는 없습니다. 인간에게 하나님을 가장 기쁘시게 해드릴 '헌물'이 있다면 바로 '정신'일 것입니다. 인간의 '사랑, 희망, 충성, 뜻'이 깃들어 있는 '정신'을 하나님께 드려야만 진정한 '헌신'이요 '영적 예배'(롬12:1)가 되는 것입니다.

3) 진리를 따라 섬겨야 함
'진실'(요4:24)은 바로 '진리'라는 뜻입니다. '진리'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참조;요1:17). '영'이신 하나님이시기에 비진리적인 인간적인 노력과 지혜와 수단으로는 하나님과 친교를 나눌 수가 없습니다. 오직 '육신의 모양'(롬8:3)으로 친히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 은총을 믿음으로만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바깥 어두운 곳을 만든 이유

대개의 사람들은 좋은 날을 보려고 교회로 들어와서 예수님을 구원주로 받아들이고 믿음 생활을 합니다. 또한 사후에는 아버지 하나님의 보좌 앞에까지 간다고 말합니다. 당연히 그래야 되고 그것이 아버지 하나님의 소원입니다. 그러나 말처럼 그렇게 믿음으로 행하지 않음으로 인해서 아버지의 보좌 앞에까지 갈수가 없다는 점입니다. 그러면 어디까지 가며 그곳에서 무엇을 하는지 아는 지식이 중요합니다.

이러한 내용을 읽는 사람들 중에서 불쾌하게 생각하거나, 또는 미친 소리라고 외면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왜입니까? 우리는 믿기만 하면 모두 천국에 간다고 알았기 때문입니다. 또한 하늘나라가 3층천으로 된 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완전한 공의와 보상 제도를 엄격하게 시행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누구든지 살아있을 때, 행한 대로 하늘나라에서 보상하시는 분이십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공의에는 첫째 하늘나라(낙원)와 둘째 하늘나라(왕국)와 셋째 하늘나라(시온)의 보상이 있고, 같은 층 하늘나라에서도 등급으로 나누십니다.

또 택함을 받았을 지라도 세 곳 중에서 어느 한 곳으로도 가지 못하면 바깥 어두운 곳에 가서 심판이라는 연단을 받게 됩니다(β?μτ?s). 사랑 때문에 하나님은 그렇게 해서라도 지옥으로 보내지 않으시려는 뜻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자비입니다. 하나님을 인자하시고 사랑으로만 생각하면 안 됩니다. 오히려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며 예수를 온전하게 믿어야 됩니다.

바깥 어두운 곳으로 기록된 연단장은 하나님으로부터 택함을 받은 자들이 더러워서 그 더러움을 씻는 곳입니다. 그러나 음부는 믿지 않아서 마귀에게 끌려갔던 자들을 백보좌 심판 때까지 가두어두는 감옥입니다. 그러므로 연단장과 음부의 중간은 없습니다. 연단장은 예수를 믿었던 자들이 죄를 참회하지 않아서 음부로는 보낼 수 없는 형편에 있는 자들에게 인격교정을 받게 하는 곳입니다. 그들은 세상에서 많은 죄를 지은 자들입니다. 낙원으로도 갈수 없고, 음부로도 갈수 없는 영혼들이며, 이것도 저것도 아닌 그런 자들로서 하나님을 곤란하게 했던 자들의 영혼입니다.

그들은 예수를 믿었던 자들이며, 연단장으로 가는 자들은 라오디게아 교인들과 같은 자들입니다. 그들은 금을 사서 믿음을 부요케 해야 될 자들이기에 입으로만 잘 믿는다고 말하던 자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보실 때는 형편없는 가짜 신자들이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들도 하나님을 찾았고, 예수 이름을 불렀고, 하늘나라로 가려했던 자들이었기에 음부로는 버릴 수 없는 자들이었습니다. 부족한 것은 있었어도 하나님이 긍휼을 베푸시기 때문에 연단장 까지라도 보내서 온전하게 되기를 바라시는 아버지의 심정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마음 아파하시는 것은 이러한 신자들이 교회에 너무 많다고 하셨습니다. 믿음은 있었으나 올바로 배우지 못해서 하나님의 속을 많이 섞이던 온전치 못한 신자들입니다. 바로 고침을 받아질 때까지 교정을 받아야 될 고통이 연단입니다. 하늘나라에는 병신자식들이기에 예수님께서 부름을 받고도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하지 아니하는 사람들은 영원한 불 못으로 가기 전에 연단장으로 가야된다고 하십니다.

너희는 나를 불러 주여 주여 하면서도 어찌하여 나의 말하는 것을 행치 아니하느냐?(눅7:46)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 된 영영한 불에 들어가라.(마25:41)

그곳에서는 무서운 연단을 받아야 병신이 아닌 완전한 자로서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연단장은 편안하게 죄 씻는 곳이 아닙니다. 무서운 형벌을 받으며 조금씩 깨달으면 조금씩 가벼운 장소로 옮겨집니다. 바울이 말했던 심판대(β?μα-베마)가 연단장을 말합니다. 심판대의 뜻은 회개하는 만큼 한 단계 한 단계씩 좋은 곳으로 올라간다는 뜻입니다. 많이 깨달은 자들은 많이 깨달은 만큼 가벼운 연단장으로 옮겨집니다. 연단장에서 죄를 뉘우치고 회개하는 것을 바울은 직고(λ??ον-로곤)라 했는데, 이는 회개를 말합니다.

직고라는 의미는 가슴을 찢는다는 뜻입니다. 연단장에까지 간 영혼들은 많은 세월이 지나서야 구원의 가능성이 있게 됩니다. 그곳에서도 하늘나라(천국복음)는 전달됩니다. 연단장에 있는 천사들이 전달하지만 그러나 쉽게 받아들이지 아니하고, 원망과 불평뿐입니다. 깨닫지 못하는 영혼들은 혹독한 형벌로 교정될 때까지 반복하며 아우성을 치지만 누구하나 동정하지 않습니다. 그곳에서는 죽을 수 없으며 고통만이 연속될 뿐입니다. 고통을 당하지 아니하려면 깨닫는 자가 복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병신자식을 받아들일 수 없다 하시면서 “하늘나라는 완전한 곳이므로 온전하게 고침을 받게 하기 위하여 연단장에서 연단을 받도록 하는 것이다” 하셨습니다. 따라서 택함을 받은 자가 죄지으면 형벌이 그만큼 큽니다. 연단장에 한번 떨어지면 무서운 연단이 시작됩니다. 따라서 누구든지 다윗의 회개를 하는 자가 복 있는 자며 회개는 그리스도의 보혈로 씻겨집니다.

하나님의 은총을 받는 자가 영원토록 복이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듣고 순종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절대로 순종해야 됩니다. 그것이 택함 받은 자들에게 영원한 축복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부르심을 받았을지라도 잘못된 길로 따라가는 수가 있습니다. 마귀들이 천사처럼 가장하기 때문에 영분별을 잘하되, 영을 분별하는 은사를 받아야 됩니다. 이성적으로 보면 흠과 티가 없지만 성경과 맞지 않는 짓을 하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