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4/2012

하나님에 대한 죄 된 태도

로마서 1 : 18 ~ 32
경건치 않음(18절) : 하나님에 대한 죄 된 태도
불의(18절) : 인간에 대한 죄 된 태도
저희 속(19절) : 이성과 양심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은 사랑이시라’(요일 4:16)는 말씀만 의존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은 죄에 대해 진노하시고, 반드시 심판하시는 공의의 하나님에 대해서 논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죄에 대해 진노하십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들이 자신을 알 수 있도록 자연 계시, 즉 양심과 자연세계를 통해 자신을 나타내 보이셨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하나님을 알 수 있었지만, 어리석게도 생각이 허망하여지고,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져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고 도리어 짐승과 벌레의 형상을 만들어 그것들을 하나님처럼 섬겼습니다. 이러한 우상숭배의 죄가 하나님의 무서운 진노를 불러옵니다.

마땅히 창조주 하나님을 섬겨야 할 인간이지만, 스스로 지혜 있다 하면서도 하나님 대신에 다른 피조물들을 조물주처럼 섬기는 것입니다. 돈, 성공, 건강을 하나님처럼 섬깁니다. 또한 여러 가지 형상들과 죽은 조상을 하나님처럼 섬기기도 합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모든 것은 바로 탐심과 관련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것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하여 더 많은 것을 가지려고 하는 마음이 우상을 숭배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탐심은 즉각적인 우상숭배가 됩니다(골 3:5). 즉 우상 숭배는 밖이 아니라 내 안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여 내 맘에 싹 트는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는 것이 하나님의 진노를 벗어나는 길입니다.

하나님의 진노는 심판으로 나타납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기에 심판을 아끼시지만, 죄가 쌓이면 반드시 심판을 집행하십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첫째로 사람들이 마음의 정욕대로 살도록 일정기간 내버려 두는 것입니다. 그 결과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것이 바로 동성끼리 서로 음욕이 불 일듯 하는 것입니다(26,27절).

진실로 하나님은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고, 남녀의 결혼관계 속에서만 성의 사용을 허락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남자와 남자, 여자와 여자간의 성적행위와 결혼은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무너뜨리는 점에서 어떤 경우에도 합리화될 수 없는 큰 죄악입니다. 둘째로 상실한 마음대로 살도록 내버려두는 것입니다. 그 결과 불의한 모든 죄악들이 세상에 범람하게 되었습니다. 추악, 탐욕, 악의, 시기, 살인, 분쟁 등 이러한 불의한 일들이 사형에 해당되는 무서운 것들이지만, 사람들은 그것을 기꺼이 행하고, 또 다른 사람들에게 옳은 일이라며 부추깁니다(32절).

하나님의 심판은 인간의 자 의지 남용에 대한 심판입니다. 자유의지의 무제한적인 사용으로 인간들은 도덕적 파산에 이르게 되는데, 이 모두는 하나님의 심판의 결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말씀으로 자신을 쳐서 복종시켜야 합니다. 말씀을 따라 삼가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시 119:9).

복음은 그 무엇에도 결코 제한 받지 않습니다.

"바울이 자기 셋집에서 만 이 년을 거하며 자기에게 오는 사람은 다 받아들이고 전적으로 학신 있게 하나님의 왕국을 선포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그것들을 가르치되 아무도 그를 막지 못하더라"(행전28:30-31)


사도행전은 로마의 셋집에서 사도 바울이 성경을 가르치는 것으로 끝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28장이 이렇게 미완성적인 모습으로 끝나고 있는 것은 사도행전은 계속되어야 한다는 것을 시사해 줍니다. 사도행전적인 복음의 역사를 이루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계속적으로 성경을 가르침] 
사도 바울은 그를 방문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성경을 가르쳤습니다. 군사들이 그를 감시하고 있었지만 결코 성경 가르치는 것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성령의 충만함 가운데서 확신을 가지고 담대하게 전하고 가르쳤습니다. 이러한 사도 바울의 가르침을 금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아마도 감시하는 군사들조차 호의적이 되었거나 복음화 되었을 가능성이 농후합니다. 비록 사도 바울의 몸은 쇠사슬에 매어 있었지만 그가 전한 복음은 매이지 않았습니다.

복음은 그 무엇에도 결코 제한 받지 않습니다.
사도행전적인 복음의 역사를 이루려고 한다면 계속적으로 성경을 가르쳐야 합니다.
성경을 잘 가르쳐서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을 듣게 해야 합니다. 사람들이 하나님 나라와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들어야 새로운 영혼들의 중생하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중생하는 이들이 있어야 진정한 부흥의 역사가 일어나며, 말씀이 풍성하게 증거 될 때 성령의 역사가 일어납니다(롬 10:17). 계속적으로 성경을 가르치려면 성경선생들이 있어야 합니다. 유능한 성경선생들을 제대로 양육하는 교회와 단체들이 많아지고 그곳에서 교육받고 훈련받고자 하는 좋은 지원자들이 많이 있어야합니다.

[세계의 중심지 복음화전략] 
사도 바울은 당시 세계의 중심지, 세계의 심장부 로마의 한 셋집에서 성경을 가르쳤습니다. 마치 한 점 누룩과도 같은 역사입니다. 사도 바울의 이러한 헌신의 결과 복음은 로마제국 전체로 퍼져나갔습니다. 역사적으로 이때가 AD62년경인데 AD313년에 로마는 콘스탄티누스 황제에 의해 밀라노 칙령으로 기독교를 핍박하던 나라에서 기독교를 자유롭게 믿고 신앙생활 할 수 있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기독교를 국교로 공인했고 복음은 로마를 벗어나 유럽과 온 세계로 퍼져 나갔습니다.

사도행전적인 복음역사를 이루려면 세계의 중심지 복음화전략을 가져야 합니다. 오늘날 세계의 중심지는 어디입니까? 각 나라의 대학입니다. 대학은 세계를 경영하는 지도자들을 교육합니다. 세계를 경영하는 이념과 철학, 경제이론과 과학기술 등이 대학에서 만들어집니다. 그러므로 대학은 오늘날의 세계 중심지입니다. 세계의 중심지 복음화전략을 가지고 사도 바울처럼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성경선생으로서 사역한다면 사도행전적인 역사는 일어납니다.

사도행전의 29장에 기록되는 제2, 제3의 사도 바울이 곳곳에서 일어나야 하겠습니다.
사도행전을 묵상하신 당신의 모습이길 기도합니다.

누가 요청한 것일까?

“여호와는 나의 능력과 찬송이시요 또 나의 구원이 되셨도다” (사118:14)

마태복음에는 예수님께 주님의 좌우편에 앉는 일에 대해 요청한 사람이 세베대의 두 아들의 어머니로 되어있다. 그러나 마가복음에는 두 아들이 직접 예수님께 부탁한 것으로 기록 되어 있다.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이 주께 나아와 여짜오되 선생님이여 무엇이든지 우리의 구하는 바를 우리에게 하여주시기를 원하옵나이다. 이르시되 너희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여짜오되 주의 영광 중에서 우리를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하여 주옵소서”(마가복음 10:35~37).

얼마 전 성경을 정독하다가 새삼스럽게 그 차이를 발견한 말씀이었다. 누구든지 이런 차이점을 발견하면 의구심이 든다. 아니 어떻게 된 거지? 누가 맞는 거야? 이거 잘못된 것 아냐? 성경을 온전히 믿지 못하는 사람들은 바로 이런 문제를 가지고 열을 올린다. 성경도 인간이 기록한 글인데 어떻게 정확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어느 설명이 정확한가? 함께 살펴보자. 
대부분의 성서학자들은 두 가지 다 정확한 것으로 본다. 그 어머니와 두 아들이 주님께 이런 간청을 드리기로 동의하고 어머니가 먼저 이 문제를 가지고 예수님께로 나아감으로써 이 간청을 드릴 수 있는 길을 마련했다면 이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두 아들은 곧 뒤따라 나아와서 자기들을 위한 어머니의 청원이 단순히 어머니만의 생각이 아님을 분명히 했던 것이다. 그래서 마태복음에는 ‘세베대의 아들의 어미가 두 아들을 데리고’라고 기록한 것이다.

아마 마가는 먼 훗날 그 어머니가 요청하는 것을 제대로 보지 못했던 사도들의 증언을 토대로 두 아들이 직접 예수님께 요청한 것으로 기록했던 것 같다. 두 복음서에서는 동일하게도 그 요청에 대해 어머니에게 말한 것이 아니라 두 아들에게 직접 대답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지 않은가?

이것은 선지자 나단이 솔로몬의 모친 밧세바를 늙고 병든 다윗 왕에게 먼저 들여보낸 것과 같은 맥락이다(왕상 1:11~21). 그런 연후에야 나단 자신이 들어가서 다윗이 전에 왕위 계승자로 지목하였던 솔로몬이 아닌 아도니야가 다윗의 후계자로서 권력을 잡고 있었다는 그녀의 진언을 입증해 주었던 것이다(왕상 1:22~27절).

우리는 종종 성경을 읽다보면 이 같은 기록의 차이점을 보기도 하고 때론 번역 성경의 오류를 발견하기도 한다. 하지만 믿음이 성숙한 그리스도인은 그 정황을 이해하며 동시에 성경이 정확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이란 신앙고백에는 흔들림이 없다.(큐티일대일)

오늘의 Daily Bread는 (http://blog.naver.com/paul_jhkim)에서 다시 보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