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8/2009

천국 패스포트 - 천국을 향한 기다림의 자세(마지막 편) [이진희 목사]



바울은 인생의 종점에 서서 자신의 인생을 회고하면서 고백했다.
“나는 선한 싸움을 다 싸우고,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습니다. 이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마련되어 있으므로, 의로운 재판장이신 주님께서 그 날에 그것을 나에게 주실 것이며, 나에게만이 아니라 주님께서 나타나시길을 사모하는 모든 사람에게도 주실 것입니다(딤후 4:7-8).


바울은 다른 것이 아니라 끝까지 믿음을 지켜 완주한 것을 자랑하며 고백했다. 1등을 해서 상을 받을 것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끝까지 다 달려왔고 마지막까지 믿음을 지켰으므로, 상을 받을 것이라고 고백했다.

1968
년 멕시코 올림픽에서 있었던 일이다. 승리의 월계관을 쓰기 위해 세계 각국에서 출전한 수백명의 선수들이 출발 신호와 함께 일제히 힘찬 질주를 시작했다. 그런데 한 선수가 옆에 있는 선수와 부딪히면서 쓰러지고 말았다. 뒤따라오던 선수들은 그를 밟고 지나갈 수 밖에 없었다. 그는 무릎과 발목에 심한 부상을 입었다. 일어나 다시 뛰어보려고 했지만 뛸 수가 없었다. 눈에서는 눈물이 글썽거렸다. 그러나 포기하지 않았다. 가는 데까지 가보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는 넘어질 듯 넘어질 듯 위태위태한 모습으로 달렸다. 아니 걸었다. 한쪽 다리에는 피가 흥건히 고여 있었다. 그래도 그는 계속 달렸다.

환호해주는 이 한명도 없는 외로운 레이스였다. 그렇지만 이를 악물고 끝까지 뛰었다. 어느덧 해는 다 저물어가고 경찰차 두 대만이 불을 밝히며 그의 뒤를 따랐다. 경기가 끝난지 오래였다. 메인 스타디움의 불도 거의 다 꺼져가고 있었다. 결승점에 도달하자마자 그는 땅에 엎어졌다.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그러나 그는 결코 불행해 보이지 않았다. 그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미소를 마음 속으로 짓고 있었을 것이다.

이 선수는 아프리카의 탄자니아에서 온 36세의 존 스테판 이쿠와리였다. 그에게 물었다.
“꼴지할 것을 알면서도 뭐하러 부상당한 몸으로 어려운 코스를 다 뛰었습니까?

그가 답했다.
“나는 7천 마일을 날아서 이곳에 왔습니다. 내 조국이 나를 이렇게 먼 곳에 보낸 것은 경기를 시작하라고 보낸 것이 아니라, 완주하라고 보낸 것입니다.


믿음의 경주를 끝까지 하는 사람만이 천국 문에 들어갈 수 있다. 그런 사람만이 영광의 면류관을 받아 쓸 수 있다. 그러나 끝까지 신앙을 지킨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반드시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합니다( 14:22).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다( 24:13).

“우리가 처음 믿을 때에 가졌던 확신을 끝까지 가지고 있으면,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구원을 함께 누리를 사람이 될 것입니다( 3:14).

옥중 생활을 했던 주기철 목사님도 어려운 때에 이렇게 노래했다.
“눈물 없이 못가는 길, 피 없이 못가는 길, 영문 밖의 좁은 길이 골고다의 길이라네. 영생 복락 얻으려면 이 길만은 걸어야 해. 배고파도 올라가고 죽더라도 올라가세.

1997년에 소천한 안이숙 여사도 이렇게 노래했다.
“좁은 이 길, 진리의 길, 주님 가신 그 옛길, 힘이 들고 어려워도 찬송하며 갑니다. 성령이여, 그 음성을 항상 들려줍소서. 내 마음은 정했어요. 변치 말게 하소서. 내일 일은 난 몰라요. 장래 일도 몰라요. 아버지여, 아버지여, 주신 소명 이루소서.


천국 패스포드는 믿음을 지키는 동안만 유효하다
환난과 시험과 고난을 극복하고 끝까지 믿음을 지킨 사람들에게는 영광의 면류관이 주어질 것이다. 우리도 인생의 종착점에 서서 선한 싸움을 다 싸웠다고, 달려갈 길을 다 달려갔다고, 끝까지 믿음을 지켰다고 고백할 수 있을 때, 우리는 천국 심사 대에서 천국 시민권을 자신 있게 보여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에게 주어진 천국 열쇠로 천국 문을 활짝 열고 들어가 그립던 주님을 만나 뵙고 그곳에서 영원히 주님을 찬양하며 영생 복락을 누리게 될 것이다



천국 패스포트 - 천국을 향한 기다림의 자세(21) [이진희 목사]



천국행 열차에서 도중하차 하면 절대로 안된다. 비행기 티켓이나 버스표에만 ‘도중하차 전도무효’가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천국행 티켓도 ‘도중하차 전도무효’이다.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서 천국행 티켓을 얻었다. 그리고 그 티켓을 가지고 구원 열차에 올라탈 수 있게 되었다. 우리는 지금 구원 열차를 타고 천국을 향해 가고 있다. 그러나 이 열차에 올라탔다고 해서 다 천국에 이르는 것은 아니다. 도중에 내리는 사람들이 많이 있기 때문이다. 교회 앞문으로 들어왔다가 뒷문으로 슬그머니 빠져나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교회 다니지 않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어렸을 때 교회 한 두번 쯤은 다 나가본 사람들이다. 천국행 열차를 올라탔다가 도중에 하차를 하고 만 것이다. 성경에도 그런 사람들이 나온다.

“믿음과 선한 양심을 가지십시오. 어떤 사람들은 선한 양심을 버리고, 그 신앙생활에 파선을 당하였습니다. 그렇게 된 사람 가운데 두 사람이 바로 후메내오와 알렉산더입니다(딤전 1:19-20).

알렉산더과 후메내오도 천국행 열차에 올라탔고, 천국 입국자 명단에 올라가 있었지만, 도중에 내렸다.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지긴 했지만 스스로 포기해서 못 들어가고만 것이다. 천국행 티켓을 가지고 있었지만 도중에 하차한 것이다. 도중하차 전도무효가 된 것이다. 처음에는 예수 잘 믿다가 나중에 믿음에서 떠난 사람들이 다 그런 사람들이 아니겠는가?

천성 가는 길이 아무리 어렵고 힘들어도 끝까지 가야 한다. 어떤 일이 있어도 천국에 이르는 고속도로에서 도중하차 해서는 안된다.

도중하차 전도무효
존 번연의 ‘천로역정’은 천국에 이르는 길이 얼마나 험한 길인지를 잘 보여준다. 장망성을 떠나 천국을 향해 가지만, 세상 사람들이 붙잡는다. 뜻하지 않은 진탕에 빠지고, 좁은 문을 통과해야 하는 상황을 맞기도 한다. 사자를 만나기도 하고, 곁길로 빠져 위험한 지경에 놓일 때도 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 사단과 영적인 전쟁을 치르기도 한다. 핍박과 억울한 일이 기다리고 있으며, 또 어떤 사람은 순교를 당하기도 한다. 때로는 절망의 옥에 갇히기도 한다.

천로역정에 나오는 ‘크리스천’처럼 장망성을 떠나 천성을 향해 떠나기는 했지만 세상에 매이고 유혹을 덫에 걸려 고난과 시련의 용광로를 통과하지 못하고 도중하차 하는 사람, 불 같은 시험을 만나 도중하차 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출애굽시키려고 하실 때 바로는 10가지 재앙을 다 받으면서도 그들을 보내주려고 하지 않았다. 이것이 바로 세상이고 사단이다. 결코 우리가 쉽게 천성을 향해 가도록 내버려두지 않는다. 많은 사람들이 교회 나오는 것이 그렇게 어려운 것도 사단이 놓아주지 않기 때문이다. 전도가 어려운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교회 나오고 예수 믿기 시작했다고 해서, 다 되는 것이 아니다. 출애굽을 했다고 해서 다 가나안에 들어간 것이 아니었다. 바로는 할 수 없이 놓아주긴 했지만, 금방 후회하고 뒤쫓아 갔다. 이집트의 군사들이 병거를 타고 이스라엘의 뒤를 쫓았다.

사단은 끝까지 우리를 포기하지 않는다.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나왔다가 다시 세상으로 돌아간다. 뒤쫓아 온 바로의 군대가 무서워 항복하고 다시 이집트로 돌아가는 것이다. 이집트에서 나와 가나안을 향해 출발은 했지만 얼마 가지 못해서 다시 이집트로 돌아가 종노릇을 하며 사는 것이다.

또한 가나안을 향해 가다가 보면 홍해를 만나기도 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로 홍해도 잘 건너게 된다. 홍해를 건넜다고 해서 가나안에 다 온 것이 아니다. 광야를 지나야 한다. 때로는 아말렉 군대와 싸워야 한다. 너무 힘들고 지친 나머지, 이집트로 돌아간 것이 더 낫겠다고 생각될 때도 있다.

그러나 광야에서 불평하고 원망하고 이집트로 다시 돌아가려고 했던 사람들은 단 한 사람도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했다. 영적으로 출애굽은 했어도 가나안에는 들어가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 장망성을 떠나 오긴 했지만 천성에는 들어가지 못하는 것이다.

천국 패스포트 - 천국을 향한 기다림의 자세(20) [이진희 목사]



예수님은 두가지 길이 있다고 하셨다. ‘멸망에 이르는 길(highway to hell)’과 ‘생명에 이르게 하는 길(highway to heaven)’이다. 사람들이 다 다른 길을 가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인생의 종착역은 둘 중의 하나다. 지옥 또는 천국이다.

안타깝게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천국에 이르는 길이 아니라 멸망에 이르는 길을 가고 있다. 생명에 이르는 길은 좁고 험하나, 멸망에 이르는 길은 넓고 편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기들이 가는 그 길이 지옥에 이르는 길이라는 것을 알고 가는 사람이 있겠는가? 그 길이 지옥에 이르는 길인지 모르기 때문에 그 길을 가는 것 아니겠는가? 지옥에 가서 물어보라. 백이면 백, 다 지옥이 있는 것을 알았다면 절대로 그곳에 오지 않았을 것이라고 이야기할 것이다. 그리고 왜 지옥이 있는 것을 가르쳐주지 않았느냐고 우리를 원망할 것이다.

우리는 감사하게도 지금 천국에 이르는 길에 들어섰다. 지금 가는 그 길로 계속 가면 생명에 이르는 문, 천국 문이 나올 것이다. 문제는 천국에 이르는 길에 들어섰다고 해서 모두 천국에 가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많은 사람들이 천국행 고속도로를 올라탔다가 도중에 다른 출구로 빠져버리는 이유가 무엇일까? 도중하차 하고 마는 이유가 무엇일까? 출구 인터뷰(exit interview)를 해보았더니 이런 대답들이 나왔다고 한다(이상화의 ‘청소년들이 교회를 떠나는 33가지 이유’).

*
무조건 덮어놓고 믿으라고 해서 싫다.

*
예수님은 좋은데 교회는 싫다. 반드시 교회 나가서 예배드려야만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 “
하지 말라!”는 것이 너무 많아서 싫다.

*
서로 충돌하는 교리들 때문에 혼돈이 생긴다. 이성적으로 납득이 가지 않는다.

*
이 세상과 너무 동 덜어진 설교 때문에 교회 가기 싫다.

*
구체적인 체험이 없어서 교회 가기 싫다.

*
사랑을 강조하는 교회가 다른 종교를 인정하지 않는 것 같아 교회 가기 싫다.

* 내가 겪고 있는 현실적인 어려움을 당장 해결해주는 곳이 아니다.

*
교회가 너무 자기 중심적인 것 같다.

*
교인들이 질투하고 싸우는 모습이 싫어서 교회 가고 싶지 않다.

*
헌금을 강요하는 것 같아서 싫다.

*
교인들이 교회 안에서 하는 행동과 교회 밖에서 하는 행동이 다르기 때문에 교회 가기 싫다.

* 교회의 분위기에 잘 어울리지 못하겠다

*
너무 따분하고 지루해서 교회 가기 싫다.

* 적응하기 너무 어렵다.


* 이렇게 도중하차 해버리면 결국 멸망에 이르는 길로 접어들게 된다.
   그리고 종착역인 지옥에 도착하게 된다. 지옥은 어떤 곳인가?

* 입구만 있고 출구는 없는 곳이다. 한번 들어가면 영원무궁토록 나올 수 없는 곳이 지옥이다.


*
그곳에서는 회개해도 소용없다. 이 땅에서 회개했으면 절대로 그곳에 가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곳에서  회개했다면 이미 너무 늦어버린 것이다. 지옥에서는 두번 다시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다.

*
그곳은 “걸” “걸” 하는 소리만 들린다. “예수 믿을 걸…” “교회 잘 다닐 걸…” “끝까지 신앙생활 잘 할 걸…” “죄 짓지 말걸…” 그러나 후회해도 소용 없다.

*
사실 지옥은 선택해서 간 곳이다. 그러나 그곳에서는 더 이상 선택의 여지가 없다. 이땅에서는 지옥갈 지 천국갈 지 선택할 수 있지만 그곳에 가서는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 “이곳에 들어가는 이들은 일절 모든 소망을 다 포기할 것.” 지옥 입구에 쓰여있는 문구다. 그곳에서는 아무런 소망도 가질 수 없다. 더 나아질 수 있는 가능성은 전혀 존재하지 않는 곳, 영원무궁토록 절망 가운데 살아갈 수 밖에 없는 곳이 바로 지옥이다.

* 지옥은 영원한 형벌을 받는 곳이다. 죄질에 따라 형량이 달라지는 곳이 아니다. 그곳에 들어간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형량은 똑같다. 절대로 풀려날 수 없는 무기수로서 형을 받아야 한다. 죄가 좀 가벼운 사람은 십만년 형벌을 받고 더 무거운 사람은 백만년 형벌을 받는 곳이 아니다. 그곳에서 백반년 동안 형벌을 받았더라도 그들이 앞으로 받아야 할 형벌에 비하면 한 시간 아니 일분도 되지 못한다

천국 패스포트 - 천국을 향한 기다림의 자세(19) [이진희 목사]



장마철에 나무도 뿌리채 뽑히고, 집과 소까지 떠내려가는 것을 어렸을 때 본 적이 있다. 그러나 유일하게 떠내려가지 않는 것이 있다. 물고기다.

물고기는 아무리 거센 물살이 밀려와도 떠내려 가지 않는다. 오히려 거슬러 올라간다. 힘센 물고기만 그런 것이 아니다. 송사리들도 그 엄청난 물살을 헤치고 거슬러 올라간다. 그래야 살 수 있기 때문이다. 물살이 세고, 거슬러 올라가기 힘들다고, 물 흐르는 대로 자신을 맡기고 떠내려가다 보면 죽고 만다. 그래서 죽기 살기로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다.

우리도 세상 조류에 떠밀려 내려가면 영적으로 다 죽고 만다. 물살을 거슬러 올라가지 않는 물고기는 죽은 물고기다. 세상을 거슬러 살지 않는 기독교인은 죽은 기독교인이다. 거듭나지 않은 기독교인이다. 그래서 세상 물결을 거슬러 올라갈 수 없는 것이다. 세상 물결에 떠밀려 내려가다 죽는 것이다.

우리는 세상 사람들과 가치관과 인생관이 다르다. 삶의 방식이 다르다. 삶의 종착지도 전혀 다르다. 우리는 그들과 똑같은 삶을 살 수 없는 존재이다.

A.W.
토저 목사님은 이렇게 외친다.
“과거에 세상이 교회를 따랐던 적이 있다. 교회가 주도권을 쥐고 앞장서 나갔으며 세상은 교회를 뒤따랐다. 하지만 지금은 정반대다. 지금은 교회가 무릎을 꿇고 세상을 흉내내고 있다. 오늘날 교회는 ‘제발 우리를 이상한 사람으로 취급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을 제외하고는 다른 모든 면에서 당신들과 똑같습니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 같다. 오늘날 기독교가 많은 시간과 돈과 노력을 쏟아 부으면서 세상에 전하는 것이 무엇인가? 성경과 세상을 섞어놓은 기독교를 전하고 있지는 않는가? 십자가의 기독교는 세상의 비위를 맞추려고 아첨하지 않는다. 교회는 세상의 적대적인 태도를 두려워하여 움츠러들지만 성령님은 말씀하신다. 세상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참된 기독교인은 이 세상에 살지 않는 것처럼 이 세상에서 살아야 한다(A.W.토저, ‘세상과 충돌하라’).


거듭난 사람은 세상 사람들이 살아가는 방식대로 살아가지 않는다. 세상 사람들이 하는 대로 따라하지 않는다. 세상 사람들이 가는 길을 좇아가지 않는다.

거듭난 사람은 구습을 좇는 옛사람을 벗어버리고 새사람을 입은 사람들이다. 세상 사람들의 사고방식을 따르지 않는다.

거듭난 사람은 세상 사람들이 갖고 있는 세속적인 가치관을 거부한다.
세상적인 것에 얽매여 살아가지 않는다. 세상적인 것에 집착하지 않는다.

거듭난 사람은 세상에 파묻혀 살아가지 않는다. 거듭난 사람은 세상의 물결에 휩쓸려 내려가지 않고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세상 물결을 거슬러 올라가는 삶을 살아야 한다.

우리는 세상 일로 염려하지 말고, 세상적인 것을 얻으려고 발버둥치지 말고, 세상이 가져다주는 기쁨과 즐거움에 빠지지 말고, 믿음으로 유혹을 떨쳐버리고, 하늘의 것을 바라보며 하늘의 것을 추구하며 하늘의 기쁨을 맛보며 살아야 한다.

거듭난 사람은 죄를 반복적으로 범하지 않는다

거듭난 사람은 그 안에 하나님의 거룩한 씨를 가지고 있다. 우리 안에 하나님의 거룩한 씨가 있는지 없는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우리 안에 하나님의 씨가 있다면 죄를 범하지 않을 것이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다.

아무리 거듭난 사람이라고 해도 죄를 짓지 않고 살 수 없을 것이다. 여기에서 말하고 있는 것은, 거듭난 사람은 절대로 아무 죄도 짓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세상 사람들처럼 죄를 습관처럼 짓지 않는다고 하는 것이다.

세상 사람들은 죄를 습관처럼 짓는다. 또 세상 사람들은 죄를 지으면서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죄라는 것을 알면서도 죄를 짓는다. 그러나 거듭난 사람들은 그렇지 않다. 그들 안에는 하나님의 씨가 있기 때문에, 죄를 무서워하고 두려워하며 멀리한다.

아직도 죄 가운데 살아가고 있는가? 거듭나지 못해서 그런 것이다. 죄를 이기려면 죄를 짓게 하는 옛사람이 죽어야 한다. 우리 안에 있는 옛 본성을 십자가에 주님과 더불어 못 박아야 한다. 죄를 이길 힘은 보혈의 능력밖에 없다. 죄를 이길 힘은 오직 성령의 능력 뿐이다.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 죄를 이기고 죄를 정복하기를 바란다.

천국 패스포트 -천국을 향한 기다림의 자세(18) [이진희 목사]


미국에서 대통령이 되기 위해서는 국민들에게 믿음 좋은 사람으로 인정을 받아야 하는 것 같다. 그래서인지 서로 자신의 믿음을 강조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미국 역대 대통령 가운데 신앙심이 가장 깊었던 사람은 지미 카터 대통령일 것이다.

그는 1976년 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나서면서 공개적으로 자신이 ‘거듭난 기독교인(born-again Christian)’이라고 밝혔다. 이 고백은 크게 화제가 되었다. 이때부터 ‘born-again’이라는 말이 널리 퍼지기 시작했다. 미국 사람들 가운데는 기독교인이냐고 물을 때 그렇다고 하면 또 한번 묻는 사람들이 많다.

Are you a born again Christian?
구원의 확신이 있는 묻는 질문이다. 그런 질문을 받고, ‘남이 구원받든 말든 무슨 상관이야? 혼자 예수 잘 믿는 척하네” 하면서 기분 나빠하는 사람이 있다. 그리고 비꼬아 대답을 한다. No, I am a Methodist.(아니오, 저는 감리교도입니다.)


“당신은 거듭난 기독교인 입니까?”라는 질문에 기분 나빠하는 것은 “예, 나는 거듭난 기독교인 입니다”라고 대답할 수 없기 때문은 아닐까?

존 웨슬리는 두종류의 기독교인이 있다고 했다. ‘거의 기독교인(almost Christian)’과 ‘완전히 기독교인(altogether Christian)’이다. ‘완전히 기독교인’은 모든 면에 있어서 100% 기독교인이 사람을 말하고, ‘거의 기독교인’은 그렇지 못한 사람을 말한다. 당신은 ‘거의 기독교인’인가, 아니면 ‘완전히 기독교인’ 인가?’ 거듭난 기독교인’인가, 아니면 ‘아직 거듭나지 못한 기독교인’ 인가?

여기 구원받을 수도 있었으나 구원받지 못한 사람이 있다. 지옥 가지 않아도 될 사람이었는데 지옥에 가고 말았다. 사람들은 그가 기독교인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하나님 보시기에는 아니었다. 거듭난 기독교인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 사람은 거의 구원받을 뻔했다. 천국 문 앞에까지 갔으나 들어가지는 못했다. 기독교인이긴 했지만 거듭난 기독교인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누구든지 물과 성령으로거듭나지 아니하고는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말씀하지 않았는가? 그 사람이 당신이 아니기를 바란다.

니고데모는 바리새인이었다. 우리는 ‘바리새인’하면 부정적으로만 생각한다. 바리새인은 곧 위선자라는 편견이 있다. 물론 바리새인들 가운데 그런 사람들도 있었지만 일부분이었다. 모든 바리새인들을 다 위선자, 외식주의자, 율법주의자로 보아서는 안된다. 그들은 누구보다도 하나님을 열심히 믿는 신실한 사람들이었으며,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것에 가장 큰 관심을 두고 살았던 사람들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계명을 철저하게 준수하려고 얼마나 노력을 했는지 모른다. 이스라엘에서 공부하던 목사님 한 분이 안식일에 회당을 방문하였다. 예배를 드리면서 랍비의 설교를 받아쓰고 있는데, 옆에 있는 사람이 자꾸 쳐다보았다. 낯선 이방인이 와서 그러는가 보다 생각하고는 계속 받아쓰는데, 안내하는 사람이 와서는 얼굴을 붉히면서 노트에 메모를 못하게 했다고 한다.

유대인들은 안식일에 글 쓰는 것도 일하는 것으로 여겼던 것이다. 우리는 그들을 율법주의자로 몰아붙일지 몰라도, 그들은 그 정도로 철저하게 하나님의 계명대로 살려고 노력했던 사람들이다.

이렇게 니고데모는 아주 열심히 하나님을 섬기며 신실하게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경견한 사람이었다. 그는 모든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다. 그는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자격을 충분히 갖고 있었다. ‘니고데모 같은 사람이 천국에 못가면 도대체 누가 간단 말인가?’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니고데모를 보고 “너라면 하늘나라에 충분히 들어갈 수 있겠다”고 말씀하시지 않으셨다.

“내가 진정으로 너에게 말한다. 말한다. 누구든지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3:5).

아무리 선한 사람이라고 할 지라도 그 선함으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아무리 종교적인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거듭나지 아니하면 결코 하나님 나라에 들어 갈 수 없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때는 다른 것을 보지 않는다. 거듭났는지 못했는지만을 확인한다.


천국 패스포트 - 천국을 향한 기다림의 자세(17) [이진희 목사]


지옥 문 앞에서 안 들어가려고 발버둥치는 불쌍한 영혼들이 보이지 않는가? 지옥에서 슬피 울며 이를 가는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가? 그들이 나중에 우리를 보고 이를 갈지도 모른다.

“당신은 왜 영원한 고통과 저주에서 나를 구하기 위해 나를 전도를 하지 않았던 거요?

“당신은 나를 죄와 지옥에서 구할 수 있었는데도 나를 내버려 두었소. 당신이야말로 이곳에 와야 할 사람이 아니오?

지옥에 가는 사람들을 보고도 가만히 있는 사람은 천국에 갈 자격이 없는 사람이다.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다.

“또 만약 의인이 지금까지 걸어온 올바른 길에서 떠나서 악한 일을 할 때에는, 내가 그 앞에 올무를 놓아, 그 의인 역시 죽게 할 것이다. 네가 그를 깨우쳐 주지 않는다면, 그는 자기가 지은 그 죄 때문에 죽을 것이다. 그리고 그가 이미 행한 의로운 행실은 하나도 기억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 사람이 죽은 책임을 내가 너에게 묻겠다( 3:20).

어떤 사람이 지옥에 갔다고 하자. 물론 그 사람은 지옥에 갈말한 죄를 졌기 때문에 지옥에 갔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책임을 우리에게 물으실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우리에게 무슨 책임이 있단 말인가? 만일 그 사람에게 전도를 해서 그 사람이 회개를 했으면 그 사람은 지옥에 가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니 그 사람이 지옥 간 것은 우리 책임이라는 것이다.

영원히 끝나지 않는 저주의 장소를 향해 나아가는 구원받지 못한 영혼들의 무거운 발걸음 소리에 귀를 기울여 보라. 그 소리를 듣는다면 편안한 잠을 잘 수 없을 것이다. 우리가 서로 미워하고 비방하고 헐뜯는 동안에 매일매일 무수한 영혼들이 그리스도 없이 무덤에 들어가고 있다.

전도, 기독교인 인생의 주제가 되어야
지옥에는 낮이 없다. 밤이 있을 뿐이다. 그것은 영원한 밤이요, 끝나지 않는 고통의 밤이다. 세상은 지옥불로 타고 있는데, 우리 기독교인들은 깊이 잠들어 있지 않은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

1분만이라도 지옥불을 체험하고 지옥을 견학한다면, 지옥은 텅텅 빌 것이다. 도너츠를 굽는 기름이 한 방울만 손등에 튀어도 우리는 기겁을 한다. 지옥에서는 그 펄펄 끓는 기름 안에 아예 들어가 있어야 한다.

지옥 간 사람 쳐놓고 지옥에는 있는 것을 미리 알았던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을 것이다. 모르기 때문에 다 거기 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천국이 있고 지옥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지 않는가?

그것을 모르는 사람에게 알려주는 것이 바로 전도다. 우리가 전도하지 않는 것은 “당신은 지옥에 가도 괜찮습니다”라고 말하는 것과 다를 것이 없다.

하나님은 한 영혼도 잃는 것을 원하지 않으신다. 한 영혼도 지옥에 가는 것을 원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다 구원받기를 원하신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가 구원받은 것으로 만족하고 있지 않는가?

예수님은 지금도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찾아 헤매고 계신데 우리는 양 우리 안에 있다고 그것으로 만족하고 있지 않는가?

예수님은 지금도 잃어버린 아들을 기다리고 있는데 우리는 탕자의 비유에 나오는 큰 아들처럼 집 나간 동생에 대해서는 전혀 무관심한 채로 집에 머물러 있는 것으로 만족해 하지 않는가?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 할 수 있는 가장 큰 일은 전도하는 것이다. 누군가를 그리스도 앞으로 인도하는 일이다. 그것이 하나님의 소원이다.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이 없는 의인 99명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것보다 더 기뻐한다고 말씀하고 있지 않는가?
잃은 양 한 마리를 도로 찾았을 때 잔치를 열지 않았는가?
잃은 동전 한닢을 찾았을 때 온 동네 잔치를 벌이지 않았는가?
잃은 아들이 돌아왔을 때 아버지가 잔치를 열어주지 않았는가?

한 영혼이라도 더 주님께 인도해야 한다. 우리 때문에 천국 가는 영혼들이 많아져야 한다.
“한 영혼이라도 더 예수님께!
“한 영혼이라도 더 예수님께!
이것이 우리의 인생의 주제가 되어야 한다.



천국 패스포트 - 천국을 향한 기다림의 자세(16) [이진희 목사]



TV 광고 중 한 장면이다. 크리스마스 장식이 된 방. 남편과 아내가 소파에 앉아 있다. 밖에는 눈이 내리고 벽난로에서는 장작불이 활활 타오르고 있다. 아내가 남편에게 말한다. “우리 보험 들어야 하잖아요?” 남편이 대답한다. “이번 크리스마스 지나고 듭시다.

장면이 바뀐다. 같은 방이다. 남편이 세금 보고를 하느라고 정신이 없다. 아내가 남편에게 이야기한다. “여보, 우리 보험 들어야 하잖아요?” “이번 세금 보고나 끝내놓고 들도록 합시다.

또 장면이 바뀐다. 해변에서 휴가를 즐기고 있는 낭만적인 부부의 모습이 나온다. 아내가 말한다. “여보, 보험은 언제 들려고 그래요? 빨리 듭시다.” “알았소. 내가 이번 휴가 끝나면 꼭 들테니 걱정 마시오.

계절이 바뀌고 나뭇잎이 한 잎 두 잎 떨어지는 가을이 되었다. 아내가 그녀의 의자에 앉아 창 밖으로 낙엽 지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다. 그런데 앞에 있는 의자는 비어 있다. 주인을 잃은 남편의 빈 의자였다. 남편이 죽은 것이다. 이어서 자막이 떠오른다.
“생명 보험을 구입하십시오. 지금!
보험 회사에서는 생명 보험을 팔지만, 예수님을 믿는 것은 생명 보험 정도가 아니라 영생 보험을 드는 일이다. 예수 믿고 회개하고 하늘나라 시민권자가 되어 영생 복락을 누리는 일을 뒤로 미루지 말라.


랍비들은 죽기 하루 전에만 회개하면 된다고 가르쳤다. 평생 예수님을 안 믿고 살았어도 죽기 하루 전에라도 예수님 영접하고 회개하면 천국에 갈 수 있는 것이 사실이다.

전도를 하다 보면, 믿더라도 지금은 안 믿고 나중에 죽을 때쯤 믿겠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 세상에서 실컷 즐기다가 죽기 딱 하루 전에 회개하고 죽어서 천국 가면 될 텐데 일찍부터 예수 믿느라고 고생할 필요가 있는냐는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우리가 언제 죽을 지 모른다는 사실이다.

죽기 하루 전에만 회개하면 된다는 말은, 언제 죽을지 모르니까 항상 매일 회개하며 살아야 한다는 가르침을 역설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유대인들은 자기 전에 깨끗이 목욕을 하고 옷을 갈아입는다. 그리고 모든 것을 다 정리정돈 해놓고 잔다. 죽을 준비를 하는 것이다. 언제 죽을지 모르기 때문이다.

성 유다라는 사람을 아는가? 모를 것이다. 그런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성 유다가 될 뻔한 사람은 있다. 바로 가룟 유다이다. 가룟 유다의 이름에는 배신자의 낙인이 찍혔다. 가장 저주받은 이름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알고보면 그 사람도 ‘성 유다’가 될 뻔했던 사람이다.

베드로는 회개했지만, 유다는 회개하지 않았다. 유다는 원래 나쁜 사람이 아니었다. 최후의 만찬 자리에서 예수님께서 “너희 중에 한 사람이 나를 팔아넘기리라”고 했을 때, 제자들은 누가 예수님을 팔아넘길 것인지 전혀 감을 잡지 못했다. 11명의 제자 어느 누구도 유다를 의심하지 않았다. 우리가 상상하는 것처럼 유다는 그렇게 사악한 사람이 아니었다. 예수님을 행해 있던 불만의 틈을 타고 마귀가 들어왔고 순간 돌변해서 예수를 팔아 넘기고 만 것이다.

그는 뻔뻔한 사람이 아니었다. 양심도 없는 철면피가 아니었다. 그랬다면 자살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유다가 베드로처럼 회개했다면 예수님은 그를 용서해 주었을 것이고 복음을 전하다가 순교했을 것이다. 그리고 성 유다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회개하지 않았고 성 유다가 되지 못했다. 예수님을 배신한 사람으로 낙인이 찍히고 말았다.

지옥은 죄 지은 사람들이 가는 곳이 아니라 회개하지 않은 사람들이 가는 곳이다. 죄를 지었기 때문이 아니라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에 지옥불에 던져지는 것이다. 천국은 의인들이 가는 곳이 아니라 회개한 죄인들이 가는 곳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통회하고 자복하고 회개하는 심령이다( 51:17). 지은 죄 때문에 가슴 아파하며 하나님 앞에 간절하게 죄사함을 구하는 그런 심령이다. 하나님은 죄는 미워하시지만, 그 죄를 회개하는 사람은 기뻐하신다.

“내 이름으로 일컫는 나의 백성이 스스로 겸손해져서, 기도하며 나를 찾고, 악한 길에서 떠나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 죄를 용서하여 주며, 그 땅을 다시 번영시켜 주겠다(대하 7:14).

천국 패스포트 -천국을 향한 기다림의 자세(15) [이진희 목사]



꼬마 아이들이 어둑어둑해 질 때까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땅 따먹기 놀이를 하고 있다. 영철이는 땅을 이만큼 땄다. 의기양양했다. 철수는 요만큼 밖에 따지 못했다. 의기소침했다. 그런데 철수 엄마가 저녁 먹으라고 철수를 부르러 왔다. 철수는 아무 미련없이 딴 땅을 다 버리고 엄마와 함께 집으로 달려간다. 그런데 영철이는 우두커니 혼자 남아 있다. 아무도 부르는 사람이 없다. 집 없는 아이인 것이다. 땅을 아무리 많이 땄다고 해도 소용이 없다. 돌아갈 집이 없다. 아무도 기다리는 사람이 없다.

인생이 이런 것이다. 지금 열심히 돈 벌려고 노력하지 않는가? 다 땅 따먹기 놀이와 같다. 그러나 인생의 해가 뉘엿뉘엿 저물고, 때가 되면 주님께서 우리를 부르실 것이다. 그러면 그동안 딴 땅 다 버리고 주님께로 가야 한다. 주님께서 오라고 하실 때 우리는 달려갈 수 있다. 우리를 부르는 분이 우리의 아버지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하여 거할 처소를 예비해 놓겠다고 약속하셨다.

우리의 인생이 끝나는 날 우리는 아버지 집으로 돌아갈 것이다. 그러나 인생이 다 끝났는데도 돌아갈 영원한 집이 없는 사람, 하늘 나라에 처소가 예비되어 있지 않은 사람은 얼마나 불행한 사람인가? 믿지 않는 사람들이 왜 지옥에 가는가? 죄를 지었기 때문에? 아니다. 우리라고 죄를 안짓는가? 그들이 지옥에 가는 이유는 그들의 아버지가 지옥에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본향 집은 천국이다. 왜냐하면 그곳이 우리 아버지 집이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그곳에 우리를 위해 처소를 예비해두셨다. 그곳에 우리가 거하게 될 영원한 집이 있다. 우리는 그곳에 가게 될 것이다.

우리가 하늘 본향 집에 이를 때 예수님은 “Welcome Home!” 두 팔을 벌리고 우리를 반갑게 맞아주실 것이다. 우리를 주님 품 안에 꼭 안아주실 것이다.

우리의 죄를 깨끗히 용서하시는 하나님
“오너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의 죄가 주홍빛과 같다하여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며, 진홍빛과 같이 붉어도 양털과 같이 희어질 것이다( 1:18).

우리를 왜 부르시는가? 마지막 때에 부르시는 부르심은 심판을 위한 것이다. 우리의 죄를 따지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지금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는 것은 죄를 따지기 위함이 아니다. 우리의 죄를 용서해주시기 위해서이다.

여기에서 죄를 진홍빛과 주홍빛에 비유했다. 진홍빛이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톨라(tola)’이다. 톨라는 벌레 이름이다. 이 톨라라는 벌레를 짓이겨서 뜨거운 물에 담그면 거기서 밝은 진홍빛 물감이 나온다. 이 물감으로 물을 들이면 여간해서 지워지거나 색이 바래지 않는다고 한다.

진홍같이 붉은 죄라는 말은 단순히 우리의 죄가 붉다는 표현이 아니다. 그 무엇으로도 씻을 수 없고 깨끗하게 할 수 없다는 뜻이다. 죄로 물든 우리의 심령은 그 어느 것으로도 깨끗게 할 수 없다.

그러나 그러한 우리의 심령을 하나님께서 어떻게 해주시겠다고 하시는가?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며.” 헤르몬 산 정상에 막 내린 희고 정결한 눈과 같이, 그리고 털을 깎기 위해 이제 막 요단 강에서 목욕을 하고 올라온 양의 털과 같이 희고, 정하게 해주시겠다는 것이다.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주님께서 다시 우리에게 자비를 베푸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주님의 발로 밟아서, 저 바다 밑 깊은 곳으로 던지십니다( 7:19).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깊고 깊은 바닷속으로 영원히 던져버리셨다. 우리의 죄를 잊어버리시기 위해 그 바닷속으로 던져버리신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자꾸 그 바다에서 낚시질을 한다. 과거에 지은 죄를, 하나님께서 집어던져 버린 죄를 꺼내 올리는 것이다.

이미 회개한 죄의 문제를 가지고 더 이상 염려하거나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이미 회개한 죄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절대로 천국 입국 심사대에서 문제 삼지 않으실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의 죄를 이미 바다 깊은 곳으로 던져버리셨기 때문이다. 우리의 죄를 이미 다 지워버리셨고 또 잊어버리셨기 때문이다. 우리의 죄를 우리에게서 영원히 먼 곳으로 집어 던져 버리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주홍같이 붉은 우리의 죄를 흰눈보다, 양털보다 더 희게 하셨기 때문이다

천국 패스포트 - 천국을 향한 기다림의 자세(14) [이진희 목사]



성경에도 ‘Wrong Way’로 들어섰다가 ‘Dead End’를 만나 유턴해서 되돌아 나온 사람들이 많이 나온다. 요나가 바로 그런 사람이었다. 하나님께서 니누웨로 가라고 하셨지만, 그는 다시스로 갔다. 동쪽이 아닌 서쪽을 택했다. 그 결과 그가 탄 배가 큰 풍랑을 만나게 되었고, 그는 바다 한 가운데 던져졌다.

그리고 고기 뱃 속에 들어가 음부의 고통을 경험한 다음에야 제 정신을 차리고 다시 방향을 바꾸어 니느웨로 갔다. “각기 제 길로” 가다가 제 정신을 차리고 그 길에서 돌이켜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길로 갔던 것이다. 잘못된 길로 가다가 유턴을 한 것이다. 유턴이 바로 회개이다.

신약에서 요나와 가장 비슷한 사람은 예수님의 비유에 나오는 탕자이다. 탕자는 아버지에게 유산을 미리 물려달라고 요청했다. 아버지가 살아있는데 유산을 거론하는 것은 당시 유대인들에게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아버지, 왜 아버지는 죽지도 않는 겁니까? 빨리 죽어야 내가 내 유산을 챙길 것 아닙니까?” 그런 뜻이었다. 그러나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고 결국 아버지는 그에게 유산을 물려주고 말았다. 그는 아버지 집을 떠나 아주 먼 나라로 갔다. Wrong Way’로 갔던 것이다. 결국 그가 도달한 곳은 돼지우리라는 ‘Dead End’였다.

그곳에서 그는 정신을 차렸다. 성경에는 “이에 스스로 돌이켜”( 15:17)라고 했는데, 영어 성경에서는 “He came to himself”라고 표현하고 있다. 제 정신을 차리게 되었다는 것이다.

제 정신이 돌아온 탕자는 방향을 바꾸어 아버지 집으로 향했다. 아버지 집을 떠나 먼 나라로 갔던 탕자는 다시 아버지 집으로 돌아갔다. 말하자면 유턴을 한 것이다. 이렇게 잘못된 길로 가다가 방향을 바꾸어 바른 길로 돌아서는 것을 우리는 ‘회개’라고 한다.

하나님께서 왜 탕자에게 돼지우리를 경험하게 했을까? 유턴을 하게 하기 위해서이다. Wrong Way’에서 바른 길로, 제 길로 돌아서게 하기 위해서, 방향을 바꾸게 하기 위해서, 그렇게 하신 것이다. 잘못된 길로 갈 때 우리는 속히 그 길에서 유턴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Dead End’에 이르게 된다. 요나처럼 물고기 뱃 속을 경험하고, 탕자처럼 인생의 흉년을 만나게 된다. 유턴은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 그래야 더 큰 풍랑을 만나지 않고 더 큰 흉년을 만나지 않는다.

성경은 끊임없이 우리에게 “돌아오라”고 말씀하고 있다. 지금 당신은 어떤 길을 가고 있는가? 탕자처럼 혹시 하나님에게서 멀리 떠나 있지는 않은가? 요나처럼 하나님을 피해 도망가고 있지는 않은가? 혹시 하나님께서 계속 당신에게 유턴 사인을 보내고 계시다면 절대로 그 길로 가면 안된다. 인생의 무서운 풍랑이나 흉년을 만나기 전에 유턴해야 한다.

니느웨 백성들이 어떻게 회개를 했는가? “그들의 행한 것 곧 그 악한 길에서 돌이켜”( 3:10) 떠났다. 회개를 했으면 잘못된 길에서 뒤돌아서야 한다. 방향을 바꾸어야 한다. 유턴해야 한다. 바로 그것이 회개이다.

진정한 회개는 방향을 바꾸는 것이다. 우리가 잘못된 길로 갈 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여러 방법으로 빨간 신호들을 켜주신다. 그때 우리는 머뭇거리지 말고 즉시 유턴해야 한다. 계속 가면 ‘Dead End’가 나온다. 돌이킬 수 없는 상황에 이르게 된다. 그곳에 이르기 전에 유턴을 해야한다. 다시 돌아와야 한다. 회개해야 한다
 
악한 사람이 그 길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이 회개이다. 불의한 자가 그 생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이 회개이다. 옛 사람을 벗어버려야 한다. 그것이 바로 진정한 회개이다. 회개는 입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 뉘우치는 것만이 아니다. 삶의 방향을 바꾸는 것이다. 궤도를 수정하는 것이다.

히브리어에는 회개라는 말이 없다. 다시 말해 구약에는 회개하라는 말이 없다. 회개라는 말은 추상적인 단어이다. 그런데 히브리인들은 구체적인 단어를 사용하기 좋아했다. 그래서 회개라는 모호한 단어 대신에 누구나 들으면 알 수 있는 분명한 단어를 회개라는 말 대신에 사용했다. 그것이 바로 ‘돌아오라(shuv)’였다.

성경에서 회개는 하나님에게 돌아오는 것을 말한다. 모든 문제는 하나님에게서 떠났을 때 생긴다. 하나님에게서 떠났을 때 죄를 짓게 된다. 탕자처럼 멀리 떠나 있는가? 빨리 다시 돌아오라. 그것이 바로 회개이다.   

천국 패스포트 - 천국을 향한 기다림의 자세(13) [이진희 목사]


오래 전에 상영되었던 영화다. 한 여배우가 백만장자와 결혼하기 위해 프랑스에서 비행기를 타고 미국으로 가고 있었다. 하지만 엔진에 불이 붙었고 비행기는 곧 추락하려고 했다. 모두가 최후의 순간을 맞이하였다. 이 영화에서 추락 직전 비행기에서 죽음을 준비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클로즈업 됐다.

아수라장이 된 비행기 안에서 여러 사람들의 모습을 비춰주다가 여배우의 모습이 화면에 잡혔다. 그녀는 핸드백에서 손거울을 꺼냈다. 그리고 자기의 얼굴을 유심히 들여다 보았다. 여배우는 비행기가 추락하고 있는 생의 마지막 순간에 거울을 들여다 보았던 것이다.

그녀는 손수건으로 진하게 화장한 얼굴을 닦아냈다. 속눈썹을 떼어냈다. 의치도 빼내고, 가발도 벗었다. 그러자 그 아름답던 얼굴은 어디론가 사라져 버리고 흉한 모습만 남게 됐다. 그녀는 평생 자기의 모습을 감추고 살았던 것이다. 그러나 죽음 앞에서 그녀는 자신의 거짓된 모습을 다 버리고 자기 자신에게로 돌아온 것이다. 그녀는 죽음 앞에서 마지막으로 자신의 진실된 모습을 바라보고 싶었던 것이다.

거울을 들여다 보면서, 그 안에 비쳐진 나를 바라보면서, ‘너는 누구냐’고 물어본 적이 있는가? 우리의 내적인 자아, 진정한 나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는 거울이 있다. 바로 예수님이라고 하는 거울이다. 그 앞에 서면 나의 모습이 사정없이 폭로되고 만다. 나의 숨겨진 ‘X 파일’이 다 공개되어 버린다.

이른 새벽, 막 동이 터오르고 있었다. 밤새도록 갈릴리 호수에서 고기를 낚던 베드로가 한마리의 고기도 거두어 올리지 못한 채 실의에 빠져 빈 그물을 정리하며 집에 돌아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 때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다가오시더니, 배를 빌려달라고 하셨다. 예수님은 그의 배에 올라 타시고 가르치셨다. 말씀을 다 마치시고는 베드로에게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던져보라고 하셨다. 그랬더니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고기가 많이 잡혔다.

그 순간 그러나 베드로는 심각해졌다.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더니 “주님, 나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나는 죄인입니다”( 5:8)라고 고백했다. 예수님과의 만남을 통해서 비로서 자신의 진실된 모습을 발견했던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만 우리는 우리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하나님 앞에 서지 아니하고는 자신이 얼마나 심각한 죄인인지 깨달을 수가 없다. 예수님이라고 하는 거울을 통해 죄인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고 회개할 때 우리는 주님의 보혈을 통해 죄사함을 받고 천국 시민권자가 될 수 있다.

그런데 회개하려고 해도 죄가 생각나지 않는다면 어떻게 회개할 수 있겠는가? 내가 얼마나 큰 죄인인지를 모르는데 어떻게 회개할 수 있겠는가? 회개는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다. 성령께서 역사하셔야 죄를 회개하게 하는 역사가 나타난다.

성령이 임하시면 죄를 깨닫고 가슴을 치며 회개하는 역사가 일어나게 된다. 우리 교회 성도에게서 기도하는 가운데 30년 전에 지은 죄까지 생각이 났다고 하는 이야기를 들었다. 자신은 까마득하게 잊고 있었지만 회개 기도를 하는 가운데 그 장면이 선명하게 떠올랐다고 한다. 회개의 영이 임하지 않으면 회개하고 싶어도 회개를 하지 못한다. 죄가 생각나지 않기 때문이다. 죄가 실감나지 않기 때문이다.

길선주 목사님이 장로였을 때,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부흥집회를 열게 되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통곡을 하면서 죄를 고백하고 회개를 하고 간증을 했다. 아내를 구박한 일, 첩을 둔 일, 남을 속여 폭리를 취한 일, 도둑질한 일, 달걀 값을 속여 선교사 돈을 갈취한 일 뿐만 아니라 간음, 강간 심지어는 살인죄까지 고백하였다. 심지어는 그 자리에 몰래 들어와 있던 형사들까지 회개하는 역사가 일어났다고 한다.

이렇게 시작된 회개 운동은 평양에서 시작해서 한반도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한국교회의 부흥은 회개운동에서 시작되었다. 진정한 부흥은 회개의 역사가 일어날 때 일어난다. 회개가 없는 부흥은 부흥이 아니다. 교회가 부흥하려면 다시 회개운동이 불일 듯 일어나야 한다.

성령은 우리의 모든 죄를 생각나게 하시고 회개하게 하신다. 성령이 임하셔서 죄를 자복하고 회개하는 역사가 일어나야 한다. 그래야 주님의 보혈을 통해 죄사함을 받고 천국 시민권자가 될 수 있다.

천국 패스포트 - 천국을 향한 기다림의 자세(12) [이진희 목사]



율법을 통해서 구원받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다시 말해서 선행이나 공로나 업적을 통해서 구원받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구원은 오직 믿음으로만 받을 수 있다.

“여러분은 믿음을 통하여 은혜로 구원을 얻었습니다. 이것은 여러분께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2:8).

그렇다면 율법은 무엇인가? 율법이 우리에게 주어진 가장 큰 목적은 죄를 깨닫게 하는데 있다.
“율법의 행위로는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인정받을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율법으로는 죄를 인식할 뿐입니다( 3:20).


율법은 우리가 죄인임을 깨닫게 하고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고하여 영생을 얻도록 하기 위하여 주어졌다( 3:21-24, 3:19). 그리고 우리의 죄를 알게 하고 그 죄의 심각성을 닫게 하기 위하여( 3:20, 4:15, 7:7-9, 20:47) 주어졌다.

율법에는 하나님의 뜻이 담겨 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을 원하는지,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기를 원하시는지 보여주는 것이 율법이다. 율법이 없으면 죄인지 아닌지를 알 길이 없다. 전에는 분명히 죄로 여겨졌으나 지금은 그렇지 않은 것이 얼마나 많은가?

율법이 없으면 동성연애가 죄인지 아닌지 알 길이 없었을 것이다. 율법을 통해 우리는 명확히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분별할 수 있게 되었다. 죄가 무엇인지 깨닫게 해주는 것이 율법의 가장 큰 역할이다. 우리는 율법을 통해서 우리가 얼마나 큰 죄인인지를 깨닫게 된다. 그리고 회개하고,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구하게 된다. 그래서 죄사함을 박고, 의롭다 인정을 받고, 구원을 받는 것이다. 이처럼 율법은 중요하다.

율법의 중요성
마틴 루터는 오직 믿음만으로 구원받는다는 진리를 재발견한 사람이다. 그렇다고 믿음만을 강조하고 율법을 경시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율법에 대하여 이렇게 말했다.

“복음을 증거하는 사람들은 반드시 먼저 하나님의 율법을 선포해서 죄의 본성을 깨닫게 해야 한다. 율법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영생으로 사람들을 인도할 것이다.

존 웨슬리는 “사랑이나 자비나 은혜를 선포하기 전에 항상 먼저 죄와 율법 그리고 심판에 대하여 설교한다”고 말했다. 그는 친구에게 “율법에 대하여 90%를 설교하고 나마지 10%는 은혜에 대하여 설교하라”고 권고했다. 하지만 율법에 대해 10%, 복음에 대해서는 90%를 설교하고 있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찰스 스펄전은 “사람들은 의롭고 거룩한 율법 앞에서 두려워 떨기 전에는 은혜를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율법을 통해 우리는 행함으로나 선함으로나 공로로 구원받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구원받기 위해서 주님만을 전적으로 의지하게 된다. 율법은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고 구원받게 한다. 율법은 구원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믿음으로 구원 받는다고 해서 율법을 무시해서는 안된다.

아파서 병원에 가면 의사가 먼저 어디가 어떻게 아픈지를 묻고 병의 원인이 무엇인지 찾아낸다. 그런 다음에야 약을 처방해준다. 율법은 의사의 진단과 같다. 율법은 우리의 문제를 보게 해준다. 율법은 우리 인간의 문제를 해결해 주지는 못하지만 무엇이 문제인지를 알려준다. 그리고 복음은 약을 처방해서 치료를 해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율법을 통해 죄인임을 깨닫는 사람만이 복음을 통해 의롭다 인정받는다. 율법을 통해 정죄받은 사람만이 복음을 통해 용서받는다. 율법을 통해 사형선고를 받은 사람만이 복음을 통해 영생을 얻는다. 율법에 의해 자신의 병을 진단 받은 사람만이 복음을 통해 치유받을 수 있다.

지금 우리는 은혜의 시대에 살고 있기 때문에 율법이 필요없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우리는 율법도 필요하고 복음도 필요한다. 우리는 율법을 통해 죄를 깨닫고 회개하게 된다. 그렇게 함으로 죄사함을 받고 거듭나 천국 시민권자가 될 수 있다.

천국 패스포트 -천국을 향한 기다림의 자세(11) [이진희 목사]



“당신이 만일 예수는 주님이라고 입으로 고백하고,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마음으로 믿으면 구원을 얻을 것입니다( 10:9).

‘예수 그리스도’라는 말은 예수님은 우리의 주님이시고 우리의 구세주라는 뜻이다.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고 고백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는 일은 쉽지 않다.

생각해보라. 당신의 인생의 주인으로 그 분을 받아들일 수 있는가? 당신의 마음의 보좌를 예수님에게 내어드릴 수 있는가

당신의 안방을 그 분에게 내어드리고 당신은 건너방으로 옮겨갈 수 있는가? 손님처럼 섬기던 그 분을 주인처럼 섬길 수 있는가?

그 분이 요구하실 때 언제나 순종할 수 있는가

당신이 원하는 것과는 다른 방향으로 예수님께서 당신을 인도하실 때도 따라가겠는가

죄인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한 세상의 쾌락들을 즐기면서 살아왔지만 그 분은 더 이상 그런 생활을 용인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도 좋은가?

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셔들이면 당신은 모든 권리를 포기해야 한다. 그렇게 할 수 있는가?


지금까지는 하나님께 일부만 드려도 되었지만 그 분을 주님으로 모셔들이면 당신의 전부를 그 분에게 드려야 한다. 그럴 수 있는가?


예수님을 주님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구세주로, 메시아로 고백하면서 동시에 그 분을 주님으로 섬기는 사람들은 그렇게 많지 않다. 그러나 예수님을 나를 구원하시는 분으로만 받아들이고 나의 주인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셔들이기 전에는 내가 내 인생의 주인이었다. 나는 앉아 있고 예수님께서는 서 계셨다. 내가 예수님보다 훨씬 컸고 내가 예수님보다 항상 앞섰다. 그러나 예수님을 주님으로 영접하면 나는 점점 작아지고 예수님께서 점점 커지게 된다. 예수님께서 먼저이고 내가 나중이 된다. 나는 낮아지고 예수님은 높아지게 된다. 나는 서있고 예수님께서 앉아 계시게 된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영접하려면 자아를 죽여야 한다. 옛사람을 벗어버리고 새사람을 입어야 한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가야 한다.

사막에서 차가 모래에 빠졌을 때 액셀러레이터를 더 세게 밟으면 앞으로 나갈 것 같지만 차는 빠져나오지 못한다. 바퀴가 더 깊이 빠져 들어갈 뿐이다. 뒤에서 밀어볼 수도 있지만 그것으로는 해결이 안된다. 방법은 하나다. 아주 간단하다. 그것은 바퀴에서 바람을 빼는 것이다. 바퀴에서 바람을 빼면 차가 내려앉게 되고 그렇게 한 다음 밀면 모래 구덩이에서 빠져나올 수 있다.

우리가 옴짝달싹할 수 없는 상황에 빠졌을 때 거기서 벗어나기 위해 더 안간힘을 쓸 것이다. 그렇지만 그 구덩이에서 빠져나올 수 없다.

방법은 하나. 우리의 자신만만한 자아에서 바람을 빼는 것이다. 교만해질 대로 교만해진 자아에서 교만의 바람을 빼내고 우리 자신이 낮아지는 것이다. 그럴 때 우리를 가두어두었던 인생의 모래 구덩이에서 빠져 나올 수 있을 것이다(스티브 도나휴, <사막을 건너는 여섯가지 방법>).

어느 노인 부부가 교회에 새로 나와서 세례를 받고 열심히 신앙생활을 시작했다. 그런데 이 부부는 글을 읽을 줄 몰랐다. 그 부부가 교회 모임에 참석해 보니 모두 등에 글자가 새겨진 티셔츠를 입고 있었다. 노인 부부는 집에 돌아오자마자 어떤 건물에 쓰여 있는 글을 그대로 본 떠와서 옷에다 새겼다. 그리고 다음번 모임에 그 옷을 입고 나갔다. 보는 사람마다 노인 부부를 보고 웃었다. 거기에는 이렇게 씌어 있었다.


Under New Management.
아파트 단지 같은 곳에서나 가끔 볼 수 있는 문구로, 주인이 바뀌었다는 뜻이다. 그러나 그 문구는 노인 부부에게 더없이 적절한 것이었다. 그들은 주인이 새롭게 바뀌었다. 그들은 평생 자기들이 주인 노릇을 하면서 살아왔지만 뒤늦게 예수님을 영접하고 새로운 삶을 살기 시작한 것이다. 글자 그대로 ‘Under New Management’의 삶을 살기 시작한 것이다. 우리도 예수님을 삶의 주인으로 모셔들이고 새로운 삶을 살 때 천국 시민권이 주어지고 천국 열쇠도 주어질 것이다.


천국 패스포트 - 천국을 향한 기다림의 자세(10) [이진희 목사]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사람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3:16).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처럼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주셨다. 멸망치 낳고 영생을 얻도록 하기 위해서다. 우리는 죄로 인해 죽을 수 밖에 없다. 심판을 피할 수 없다. 멸망 당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하나님은 저주를 받아 지옥에 떨어질 수 밖에 없는 우리를 가만히 보고 계실 수 없으셨다.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님을 우리에게 보내주신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 위해 해야 할 일은 하나도 없다. 영생을 얻기 위해 따로 해야할 일이 있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된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우리에게 선물로 주셨다. 예수님이라고 하는 선물 보따리에는 영생이 들어 있다. 영원한 생명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선물로 주신 것이다.

“죄의 삯은 죽음이요, 하나님의 선물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영원한 생명입니다( 6:23).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는다. 죄의 삯은 사망이다. 죄로 인해 영원히 죽을 수 밖에 없는 우리들이다. 그런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선물로 주셨으니, 실로 놀라운 은혜가 아닐 수 없다.

하나님은 구원을 팔지 않으신다. 아무도 구원을 사기 위해 대가를 지불할 만한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구원을 선물로 거저 주신다. 구원이 우리에게는 거저 주어졌지만 하나님과 예수님은 엄청난 대가를 치러야 했다. 절대 싸구려 은혜가 아니다.

뉴욕에 라구아디아(LaGuardia)공항이 있다. 라구아디아는 제2차 세계대전과 대공항 때 뉴욕시장을 지냈던 사람이다. 한번은 그가 판사 대신에 재판 자리에 앉게 되었다. 법정에는 빵 한조각을 훔친 죄목으로 어떤 할머니가 법정에 끌려나와 있었다. 사연인즉 딸은 병들어 누워있고 사위가 그 할머니를 내쫓았다. 하지만 손녀들마저 굶주리고 있어 빵 한조각을 훔치다가 들킨 것이다. 그러나 가게 주인은 딱한 사정을 알고도 매정하게 그 할머니를 처벌해 줄 것을 요구했다.

라구아디아 시장은 그 할머니에게 10달러를 벌금으로 내든지 아니면 열흘동안 감옥에 가야 한다고 판결을 내렸다. 재판을 끝낸 라구아디아는 그 자리에서 자기 수표로 10달러를 써서 대신 벌금을 내주었다. 그리고 참석한 모든 사람에게 불우한 할머니를 돕지 않은 책임을 물어 50센트씩 벌금형을 내렸다. 무정한 가게 주인도 50센트를 내야했다. 그렇게 해서 47달러 50센트를 그 할머니에게 주어서 집으로 보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하신 일이 바로 이런 일이었다. 우리가 받아야 할 형벌을 대신 받으시고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셨다. 예수님께서 우리 대신 값을 지불하시고 우리를 그 보혈로 구속해 주신 것이다.

하나님은 이미 우리를 용서하시고 우리를 위해 구원을 예비해 놓으셨다. “아멘”으로 하나님께서 주시는 구원의 선물과 용서의 선물을 받아들이면 된다. 구원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이기 때문이다.

“여러분은 믿음을 통하여 은혜로 구원을 얻었습니다( 2:8).

하나님의 은혜는 구원의 원천(source)이고, 믿음은 구원의 통로(channel)이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서 십자가에서 이루어 놓으신 구원을 받아들이는 것, 그것이 믿음이다.
한 어린 아이가 물었다.


“구원을 받으려면 무엇을 해야 하나요?
그러자 목사님이 너무 늦었다고 대답했다.
“예? 너무 늦었다구요? 그럼 난 구원받을 수 없다는 말인가요?
“그게 아니고, 네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아무것도 없단다. 왜냐하면 네가 구원받기 위해 필요한 일을 이미 2,000년 전에 예수님께서 다 해놓으셨기 때문이지.


우리가 구원받기 위해 해야 할 일은 정말 하나도 없다. 단지 믿음으로 그것을 받아들이기만 하면 된다. 하나님께서 은혜의 선물로 주시는 구원을 받기만 하면 된다.


구원은 노력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천국은 시험봐서 들어가는 곳이 아니다. 구원의 커트라인이 있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하고 믿기만 하면, 구원을 얻는다

천국 패스포트 - 천국을 향한 기다림의 자세(9) [이진희 목사]



미국에는 노예를 팔고 살 수 있는 제도가 있었다. , 몸무게, 나이가 기입된 노예매매 광고가 버젓이 신문에 게제되었다. 어떤 사람이 많은 돈을 주고 한 노예를 샀다. 매매와 동시에 노예는 그 사람의 소유가 된다. 그런데 이 사람이 돈을 주고 산 그 노예를 풀어주었다고 하자. “너는 이제부터 노예가 아니다.” 그러면 노예는 자유로운 사람이 된다.

노예가 노예의 신분에서 풀려나 자유로운 사람이 된다고 하는 것은 꿈 속에서나 가능한 일이었다. 노예는 절대로 자신의 힘으로는 노예 신분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도망을 갔다가 잡히면 가차없이 죽음을 당했다. 노예의 신분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딱 하나 밖에 없었다. 주인이 풀어주든지, 다른 사람이 그 노예를 사서 풀어주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었다.

우리는 사단에게 종 노릇하고 있었다. 절대로 우리 힘으로는 사단에게서 벗어날 수 없다. 하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사단에게 값을 지불하고 우리를 사셨다. 그래서 우리는 사단의 노예에서 풀려나게 되었고, 하나님의 자녀로서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게 된 것이다.

우리가 도난당한 차를 대가를 지불하고 다시 찾아오지 않았다면,   강도들은 차를 다른 데 팔아 넘겼던지, 아니면 타다가 버렸을 것이다. 남들이 알아보지 못하도록, 색깔도 다시 칠하고 번호판도 다시 달았을 것이다.

훔친 차를 주인처럼 애지중지 하면서 탔을까? 타다가 고장나면 고장난 대로 그냥 탔을 것이고 굴러가지 않으면 아무데나 버렸을 것이다. 우리 차를 가지고 또 다른 범죄를 저질렀을지도 모른다. 나중에 알아본 결과 그들은 전과가 많은 사람들이었다. 그 사람들이 타고 있던 차도 강탈한 차였을 것이다. 우리가 빼앗겼던 차는 하나님의 일을 하는 데 쓰였던 차였다. 도로 찾아오지 않았다면 강도짓 하는데 사용되는 차가 되고 말았을 것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우리를 구속하시기 위해, 우리를 다시 찾아오시기 위해 피를 흘리지 않으셨다면, 우리도 똑같은 신세가 되었을 것이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대가를 지불하지 않으셨다면, 우리는 평생동안 죄와 죽음과 사단의 노예로서 비참하게 살아가야만 했을 것이다. 사단의 발 밑에서, 죄와 죽음과 어둠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십자가에서 흘린 보혈로 말미암아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영생복락을 누리게 되었다. 얼마나 감사하고 감사한 일인가! 정말 무한 감사할 일 아닌가!

하나님은 보혈의 능력으로 우리를 지켜주신다
“문틀에 피를 발랐으면, 그것은 너희가 살고 있는 집의 표적이니, 내가 이집트 땅을 칠 때에, 문설주에 피를 바른 집은, 그 피를 보고 내가 너희를 치지 않고 넘어갈 터이니, 너희는 재앙을 피하여 살아남을 것이다( 12:13).

이스라엘 민족이 출애굽할 때 하나님께서 이집트 백성에게 10가지 재앙을 내리셨다. 그 때 마지막 10번 째 재앙이 장자를 죽이는 것이었다.
이집트에 10번째 재앙이 내리기 직전이었다. 한 히브리 노인이 맏아들의 집에 살고 있었다. 그 맏아들에게는 어린 아들이 하나 있었다. 노인이 아들에게 물었다.
“아들아, 명령받은 대로 모든 일을 제대로 행했느냐?
“예, 아버지 걱정 마십시오.
노인은 얼마 지나지 않아 불안한 마음으로 아들에게 다시 물었다.
“아들아, 정말 확실하게 잘 해놓았겠지? 문설주에 어린 양의 피를 잘 뿌려 놓았겠지?
“그럼요, 염려하지 마세요.
하지만 밤이 깊어갈수록 노인은 불안했다.
“아들아, 나를 밖으로 데려가다오, 직접 내 눈으로 확인을 해보야야 마음이 놓일 것 같구나.
나이가 많아 거동이 불편했지만 노인은 밖으로 나갔다. 문설주에 어린 양의 피가 발라져 있는 것을 보고서야 비로소 마음을 놓았다고 하는 이야기가 있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가정과 자녀, 사업, 그리고 우리의 심령에 예수님의 보혈이 분명하게 뿌려져 있는지 확인해야 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의 믿음을 보시고 그의 능력으로 여러분을 보호해 주시며, 마지막 때에 나타나기로 되어 있는 구원을 얻게 해 주십니다(벧전 1:5).

천국 패스포트 - 천국을 향한 기다림의 자세(8) [이진희 목사]



구원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거져주신 은혜의 선물이다. 우리는 그 선물을 거저 받았지만, 하나님은 거저 주신 것이다. 선물을 받는 사람은 공짜로 받지만, 주는 사람은 그 선물을 주기 위해 대가를 치른다. 우리는 거저 구원의 선물을 받았지만, 하나니께서는 그 선물을 우리에게 주시기 위해 자기 아들을 이 땅에 보내시고, 십자가에 못박혀 죽게 하셨다. 엄청난 대가를 지불하신 것이다.

모든 것에는 가치가 있다. 가치는 저마다 다 다르다. 보통 가치를 수치로 환산한 것을 값어치라고 부른다. “이거 얼만가요?” 라고 물으면 “만원 짜리입니다” 라고 답한다. 우리는 얼마 짜리일까? 우리는 ‘예수님 짜리’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살리기 위해 죽음으로 값을 치르셨기 때문이다. 당신은 대단히 소중한 존재다. 당신을 위해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피 흘려 돌아가셨다.

성지 순례를 갔을 때의 일이다. 친구 목사님과 함께 예루살렘 시내로 가던 중 갑자기 뒤에서 쿵 하는 소리가 들렸다. 뒷 차가 들이 받은 것이었다. 얼른 도로 옆으로 차를 세웠다. 추돌사고를 낸 차에는 두 사람의 아랍 청년이 타고 있었다. 한 사람은 차에서 내렸고 한 사람은 내리지 않았다.

우리는 둘 다 내려서 차를 확인했다. 그런데 어처구니 없는 일이 벌어졌다. 뒷 차에서 내린 사람이 우리 차에 올라타고는 쏜살같이 도주한 것이다. 눈 깜짝할 사이에 일어난 일이었다. 엔진을 끄지 않고 내렸던 것이 실수였다. 지나가던 차를 부랴부랴 붙잡고 그 사람들을 뒤쫓아 갔다. 그러나 벌써 사라지고 없었다. 찾을 길이 막막했다. 너무 기가 막히고 어안이 벙벙하고 황당했다. 경찰서에 가서 신고를 했다.

세계에서 차량 도난 사고가 제일 많은 나라는 이스라엘이라고 한다. 신고를 해도 찾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한다. 차량 도난 신고를 하고 허탈한 마음으로 돌아오는데, 친구 목사님의 휴대전화가 차 안에 있는 것이 생각났다. 그래서 그 번호로 여러번 전화를 한 끝에 마침내 그들과 통화를 할 수 있었다.

다행히 이야기가 잘 돼서 2,000 달러를 주고 차를 돌려 받기로 했다. 그리고 돈을 준비해서 약속 장소인 아랍 동네로 갔다. 아랍 지역은 분위기부터 달랐다. 잘못하면 큰 일을 당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두려움 마저 들었다. 꽤 시간이 지났는데도 범인들은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우리를 믿을 수가 없으니까 우리가 온 것을 보고도 계속 감시를 한 것이다. 몇 번이나 약속 장소를 변경한 다음 그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고 2,000 달러를 주고 차를 다시 찾아왔다.

경찰서에 가서 차를 다시 찾았노라고 보고했다. 경찰은 어이 없다는 듯이 우리를 쳐다보며 이렇게 말했다. “당신들 미쳤냐? 죽으려고 그런 짓 했냐?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우리가 상당히 위험한 상황에 처해 있었다. 그는 강도였다. 우리가 차를 찾으러 갔을 때 돈 2,000 달러를 뺏고 다시 도망갈 수 있는 상황이었다. 후한을 없애려고 -얼굴을 아니까- 칼로 찌를 수 있었을 것이다. 우리가 타고 갔던 택시 기사도(아랍 사람이었다) 그들이 칼을 가지고 있을지 모르니 조심하라고 당부한 터였다. 꼼짝없이 당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하나님도 2,000년 전에 똑같은 일을 당하셨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였다. 하지만 사단이 우리를 강도질 해갔다. 순식간에 사단의 종 노릇을 하는 자로 전락하고 말았다. 하나님 보실 때 얼마나 기가 막힐 노릇이었겠는가?

그 대가가 무엇인가? 바로 십자가였다. 사단은 예수님의 피를 요구했다. “네 아들을 나에게 내놓아라. 그러면 다시 돌려주겠다.” 그래서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게 하셨던 것이다. 예수님께서 보혈을 흘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다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차를 도단당했을 때 억울했지만, 돈을 주고 찾아왔다. 하나님도 어쩔 수 없이 피의 대가를 지불하시고 우리를 다시 찾아오신 것이다,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다.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값을 치르고 사들인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몸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십시오(고전 6:20).

천국 패스포트 - 천국을 향한 기다림의 자세(7) [이진희 목사]


루터가 말했듯이 빨래를 짜듯 성경을 짜면 피가 나온다. 구약을 짜면 짐승의 피가 나오고, 신약을 짜면 예수님의 피가 나온다. 구약의 짐승의 피와 신약의 예수의 피의 차이는 무엇인가? 짐승의 피는 덮어주는 피다. 죄는 그대로 있다. 그냥 덮어두는 것 뿐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피는 깨끗이 씻겨주는 피다. 그 피로 씻으면 죄가 없어진다.

제물로 죄사함 받을 때는 해마다 짐승의 피를 흘려야 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완전하고 영원한 제물로 하나님 앞에 스스로를 바치셨다. 구약의 제사법은 임시방편이다. 죄를 지을 때마다 제사를 드려야 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단번에 완전한 제물로 드려져서 다시 되풀이할 필요가 없다.

유대인들은 부정한 것을 정결하게 하는 여러 방법을 규정하고 있다. 예를 들어서 부정한 것을 담은 그릇을 씻을 때는 수돗물로 씻어서는 안된다. 반드시 펄펄 끓는 뜨거운 물로 씻어야 한다. 오븐이 부정하게 되었을 때는 뜨거운 물로 씻는 것으로는 안된다. 토치(torch)나 전기 용접기 같은 것으로 오븐을 달궈야 한다.

‘물 가지고 날 씻든지 불 가지고 태우든지 내 안과 밖 다 닦으사 내 모든 죄 멸하소서’ 찬송처럼 유대인들은 부정 탄 것을 깨끗하게 하기 위해 물로 씻든지 불로 사르든지 한다. 그러나 더러워진 우리의 마음은 물로 씻을 수도 없고 불로 사를 수도 없다. 예수님의 피만이 죄로 더러워진 우리의 심령을 깨끗하게 씻기고, 예수님의 피만이 우리를 정결하게 할 수 있다.

서양의 신문명이 한국에 들어왔을 때의 일이다. 어느 대감이 서양 선교사한테서 비누를 선물 받았다. 비누를 써보니 때가 잘 씻기는 것이 여간 신기하지 않았다. 이에 대감은 문객들을 불러 비누를 자랑하며 하나씩 나누어 주었다. 그런데 그 자리에 있던 월남 이상재 선생이 주머니에서 작은 칼을 꺼내더니 비누를 깎아 먹는 것이 아닌가? 놀란 대감은 이상재 선생을 말렸다.
“여보게, 이것은 먹는 것이 아니라 때를 씻는 물건일세.
이에 이상재 선생은 말했다.
“예, 잘 압니다. 여러분은 이것으로 얼굴의 때를 씻지만 저는 뱃 속의 때를 씻어 볼까 해서 먹었습니다.

우리가 비누로 때를 씻어 내듯이, 죄로 더러워진 우리의 심령을 씻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러나 우리의 속사람, 내면, 마음, 심령을 깨끗하게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예수의 피 밖에는 없다.

어떤 목사님 간증이다. 미가엘 천사장이 나타나서 목사님을 하나님의 존전에 데리고 가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려면 깨끗해야 하니까 먼저 몸을 씻으라고 했다.

샤워장에 들어가서 물을 튼 목사님으 기겁을 하며 밖으로 뛰쳐나왔다. 피가 쏟아져 나왔던 것이다. 이를 지켜보던 미가엘이 말했다.

“세상 사람들은 깨끗하다는 의미를 모른다. 세상에서 아무리 깨끗한 것이라 할 지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깨끗한 것이라 할 수 없다. 천국에서 깨끗하다고 하는 것은 예수님의 보혈의 피로 목욕했을 때를 말한다.

그러면서 예수님의 보혈의 피로 깨끗하게 된 사람만이 하나님의 존전에 나아갈 수 있다고 설명을 해주었다. 목사님은 무섭긴 했지만 다시 샤워실에 들어가서 예수님의 피로 온 몸을 적시며 샤워를 했다. 그 피로 샤워를 마치자, 뭐라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깨끗한 몸이 되어 있었다.

몸에서 빛이 나는 것 같았다. 그 때 저만치에서 환한 빛이 점점 가까이 다가왔다. 자세히 보니까 천사들이 손에 빛을 들고 있었다. 그리고 그 빛을 목사님에게 내밀었다. 빛의 옷이었다.
“이 옷을 입어야 하나님의 존전에 나아갈 수 있습니다.

목사님은 옷을 받아 입었다. 그리고 하나님 계신 곳으로 이끌려 갔다. 그곳은 하나님께서 계신 지성소였다. 하나님께서 빛 가운데 계셨다. 목사님은 한없는 영광 가운데 넋을 잃고 있다가 환상에서 깨어났다고 한다.

“우리는 예수의 피를 힘 입어서 담대하게 지성소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10:19).
예수님의 피로 거룩함을 입게 되어, 우리가 이제는 대제사장처럼 하나님의 지성소에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 예수님의 피로 말미암아 우리가 담대하게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게 된 것이다. 천국에서 하나님 존전에 설 수 있게 된 것이다.

“이 사람들은 큰 환난을 겪어 낸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어린 양이 흘리신 피에 자기들의 두루마기를 빨아서 희게 하였습니다( 7: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