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7/2011

하나님의 임재에 흠뻑 젖기 - 존 아놋

94년 1월 성령님이 우리에게 오신 이후로 우리는 하나님의 임재로 흠뻑 젖어 있습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의 임재로 흠뻑 젖음으로 말미암아 그들의 마음이 크게 변화 되는 경험을 했습니다. 결혼 생활이 회복되고, 두려움이 물러가고, 우울증과 병들이 떠나가는 등 삶이 변화 되었습니다.

흠뻑 젖는것이 무엇인가? BUT What is "Soaking"?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 흠뻑 젖는 것은 기도하면서 무언가 얻기를 애쓰기 보다 하나님의 사랑안에서 안식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만지심을 받으면서 실제적인 성령의 임재와 연결이 되기 시작합니다. 사람들은 때로 앉거나 혹은 단순히 바닥에 눕는 반응을 보이기도합니다.

기대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 쉴때 성령님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더 많은 사랑을 나타내시고 각 사람을 치유하시고 새롭게 하십니다. 신자들이 하나님의 임재에 흠뻑 젖었을 때 주님은 사람들의 주의를 성경 말씀을 통해서든, 내적 음성이나 마음의 눈을 통해 보이는 그림들로 이끄십니다.

캐롤은 임재에 젖는 것을 오이 피클 만드는 것에 비유하기를 좋아합니다. 그리스어 bapto, 곧 살짝 담드다 , 그리고 baptidzo, 곧 푹 담그다라는 뜻입니다. 피클을 만드는 것을 예로 든다면, 생야채를 데치기 위해, 오이를 소독하기 위해 끓는 물에 살짝 담구는 조리법인데  bapto라는 단어는 살짝 담구었다 빼는 것이고 오이를 푹 담그는 것은 baptidzo라는 단어를 써서 소금 물에 절이고 몇주를 두는 것입니다.

이 몇주의 시간 동안 피클의 맛이 만들어지기까지 오이 깊숙히 맛이 배어 들어가게 되어 더 이상의 생오이의 맛이 나지 않게 됩니다. 성령의 임재에 담구어지게 되고, 하나님의 생수의 강에 흠뻑 젖게 되면 과거의 당신, 그대로의 성품이 아닌 예전의 'taste' 맛이 아닙니다. 그리고 당신은 성령으로 채워진 'taste' 맛이 되는 것입니다.

"Pickle us, Lord! 적셔지게 해주세요 주님! 성령으로 적셔주셔서 점점 더 주님을 닮아갈수 있도록 당신의 위대한 임재로 흠뻑 젖게 해주세요"

왜 흠뻑 잠기는것이 필요한가? Why do we need to soak?토론토에서 모든 모임의 마지막은 임재에 젖는 기도 시간으로 마치게됩니다. 우리 사역팀이 " 주님, 오셔서 주님의 임재로 채워주소서, 당신의 더 많은 사랑을 부으소서"라고  서 있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며 사역합니다. 그들은 서 있기도 하고 때로는 쓰러지기도 하면서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 안식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우리들의 모임에서 이런 현상들을 경험하기 때문에 우리는 'catcher'를 준비해 기도 받는 사람들 뒤에서 돕도록 합니다. 이러므로 기도할 때 쓰러지는 것에 대해 덜 염려하게 되고 편안히 기도 받을 수 있도록 허락합니다. 흠뻑 젖는 기도는 또한 당신의 집에서도 가능합니다. 혼자 혹은 배우자와 자녀들과 또는 몇몇의 친구들을 초대하여 차례를 바꿔가며 기도할 수 있습니다.

우리 TACF 사역자 중의 한 사람인 steve long은 처음으로 집에서 혼자 흠뻑 젖는 임재의 기도를 시작한 사람입니다. CD를 틀어 놓고 누워서 친밀한 찬양으로 아름답고 새로운 시간을 주님과 함께하는 것입니다.

Jeff Metzger라는 오하이오 아크론에서 온 사역자는 7년 이상을 "Soaking Prayer 흠뻑 젖는 기도" 모임을 해오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자유롭게 오고 가고 기뻐하며 조용히 바닥에 누워 평안히 생기를 얻는 시간을 주님과 함께 경험합니다. 많은 삶의 변화들이 Jeff의 집에서 참여한 흠뻑 젖는 기도 시간을 통하여 생겨났습니다.

어떻게 흠뻑 젖을 수 있나? How do I Soak? 바닥에 눕지 않더라고 앉거나 침대에 누워서든 중요한것은 안전해서 넘어질 수도 있는 장소라야 합니다. 당신의 애정을 예수님께 고정하고, 친밀한 찬양으로 의미있는 음악을 들으면서 나의 영이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갈 수 있도록 돕습니다.

당신이 십자가를 깊게 생각하고 예수님께서 당신을 사신 그 사랑을 생각할때 당신의 죄를 자백하기 시작하고 예수님께 가까이 가기를 갈망할 것입니다. 조금 뒤 당신은 성령님의 보이지 않는 임재를 알게 될 것이고 사람들은 몸에 무게가 느껴진다거나, 몸에 전기가 오는 듯한 진동이 오거나 따뜻한 사랑의 기운을 느끼는 등 여러 방법으로 체험하면서 하나님께 연결됩니다. 

바로 이런 만남을 통해 묶여지고 하나가 되어 사랑이 자라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만이 합리적인 방법은 아니지만 당신의 마음은 반드시 하나로 연결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는 것은 당신을 당신의 온 마음과 영으로 주님을 사랑하게 해줍니다.

마22:37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렇게 기도하십시오 " 주 예수님. 당신을 경배합니다. 나의 주인이 되어주세요. 당신을 초대합니다. 오셔서 나의 마음을 채워주세요. 가까이 와주시고 당신의 사랑을 알게 해주세요."
마음이 산란해지면 다시 예수님께 초점 맞추고 왜 이 찬양을 들으며 흠뻑 젖어야 하는지를 상기시키십시오.

성령님이 일하시는것을 믿을수 있나요? Can I trust that It is holy sprit working?
물론 그렇습니다. 명심하십시오. 하나님께 받은 모든 것들은 우리가 믿음으로 받는 것입니다. 믿음은 반드시 긍정적이여야 하며 하나님께 초점 맞춘것이라야 합니다. (부정적이거나, 두려움이나, 적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닌)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눅11:11-13 너희 중에 아버지 된 자로서 누가 아들이 생선을 달라 하는데 생선 대신에 뱀을 주며 알을 달라 하는데 전갈을 주겠느냐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

키는 바로 친밀감입니다. 이것은 프로그램을 운영하거나 관리하는 것이 아니라 유지하기 위한 관계입니다.

얼마나 오래 잠겨야하나?How long do I continue Soaking? 예수님이 안식의 주인이시고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그의 쉼으로 들어오기를 원하십니다. 성령의 열매는 사랑, 희락과 화평이니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소중한 시간을 주님과 보내야합니다. 억지로나 서둘러서는 안됩니다. 이 아이디어는 무엇을 얻느냐가 아니고 누군가와 함께 하는 것입니다.

시간을 갖고 주님과 함께하므로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이 당신을 사랑하게 하십시오. 만약 잠이 든다면 그것도 괜찮습니다. 방해 받았다면 언제라도 다시 시작하십시오. 당신은 당신의 시간이 언제 끝나는지 알게 될 것입니다. 마음에 만족감을 가질 것이고 삶속으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이 흠뻑 젖는 기도 시간 중에 때로 사람들은 감정적이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마음 깊은 곳을 만지시기를 원하십니다. 드러내고 싶지 않아 마음내키지 않는 오래전의 상처들을 주님은 방문하셔서 자유케하시고 두려움이나 아픔으로부터 치유하시기를 원하십니다. 이럴때 동역자나 경험있는 사역자들이 한 자리에 함께 해서 그들이 당신을 사랑하고 안심시켜서 믿음으로 이 상처들로 가까이 갈 수 있도록 도울 수 있습니다.

집에서 흠뻑젖는 기도 센터의 시작 Starting a Home Soaking center
나는 수백의 성령의 불을 잡는 " 주님의 임재에 흠뻑 젖는 기도 센터(Soaking Center)"가 북미와 전 세계에 생기는 것을 보길 원합니다. 이것은 생수의 강에 배고파하고 더 많은 주님의 임재를 원해 더 깊이 주님과 친밀해지기를 원하는 사람들을 위한 기회입니다. 프로그램을 갖는 것 없이 하나님과의 소중한 시간을 보내는 것입니다.

예수님께 초점을 맞춤으로 우리의 삶이 진정으로 변화되는 시간입니다.

성령의 은사들[2]

Ⅲ. 은사의 세 가지 종류(분류)
이 9 가지 은사들은 모든 믿는 자에게 주어지는 중요한 사역도구들이다. 우리 생활 속에서 역사함과 그 기능을 이해하기 위하여 세 가지로 분류해 본다. 각각 세 가지의 은사들을 포함하는데 아래와 같다.

발성 은사들 (말함)
a. 각종 방언 말함
b. 방언통역
c. 예언

계시 은사들 (들음)
a. 영들을 분별함
b. 지식의 말씀
c. 지혜의 말씀

능력 은사들 (행함)
a. 믿음의 은사
b. 병 고치는 은사
c. 능력 행함

A. 발성 은사들 (말함)
소리를 내어 언어를 구사해서 나타나는 이 은사들은 우리에게 또는 우리를 통해 초자연적으로 말하는 성령님의 나타나심이다. 이 은사들이 발휘될 때 믿는 자들은 힘을 얻고 세움을 입으며 용기와 안위를 받는다. 결코 정죄함을 받지 않는다. 발성은사는 곧 각종 방언을 말함과 방언을 통역하는 것과 예언하는 은사다.

B. 계시의 은사들 (들음)
하나님께서 영들의 정체, 성질, 활동 등을 초자연적으로 계시하거나 그의 백성들에게 지식이나 지혜를 초자연적으로 계시하여 나타나게 하실 때 발휘된다.

이런 계시는 우리의 영을 통하여 마음속에 생각, 인상, 느낌, 꿈 또는 이상 등의 형태로 전달되는데 곧 영들을 분별하는 은사, 지식의 말씀, 지혜의 말씀의 은사들이다.

C. 능력 은사들 (행함)
이들 능력 은사는 하나님께서 그의 초자연적 믿음이나 능력을 우리를 통하여 흘러 나가게 하시든지 또는 역사 하도록 풀어놓으실 때에 그에 의하여서 나타나게 된다.

Ⅳ. 각종 방언들
“사람이 하나님께 말하는 것” 혹은 “하나님이 사람에게 말씀하시는 것” 성경에는 저들이 성령으로 세례를 받고 모두가 방언을 말하는 것이 나타났던 것과 믿는 자들이 방언의 은사를 초자연적으로 받아서 메시지를 전한 것과는 차이가 있다고 구별한다.

하나는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언어요, 다른 하나는 하나님으로부터 사람에게 전달되는 메시지 인 것이다. 오순절 날이 임하매 “저희가 다 성려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행 2:4).

A. 천사의 말 혹은 사람의 말
방언의 초자연적 나타남은 천국의 언어 즉 천사의 말이거나 자기는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하지 못하나 듣는 자들 중에 누군가는 이해할 수 있는 초자연적으로 나타나는 사람의 말이다(고전 13:1).

행 2:6,7,8,11b “이 소리가 나매 큰 무리가 모여 각각 자기의 방언으로 제자들의 말하는 것을 듣고 소동하여 다 놀라 기이히 여겨 이르되 보라 이 말하는 사람이 다 갈릴리 사람이 아니냐. 우리가 우리 각 사람의 난 곳 방언으로 듣게 되는 것이 어찜이뇨... 우리가 다 우리의 각 방언으로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함을 듣는도다 하고”

B. 방언: 하나님께 드리는 찬양
성령충만을 받았을 때 방언을 말한 표적을 갖고 있는 모든 경건한 신자들은 매일같이 이 초자연적인 언어를 사용하여 하나님과 대화하며 하나님께 노래 부르며 찬양하기를 계속해야 된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의 영으로 비밀을 말하게 되는 것이다.

고전 14:2 “방언은 말하는 자는 사람에게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하나니 이는 알아듣는 자가 없고 그의 영으로 비밀을 말함이니라.”

고전 14:4 “방언을 말하는 자는 자기의 덕을 세우고...”

C. 바울은 방언으로 말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강조했다.
고전 14:18 “내가 너희 모든 사람보다 방언을 더 말하므로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고전 14:5a “나는 너희가 다 방언 말하기를 원하나...” 그리고 39절엔 “...방언 말하기를 금하지 말라”고 강조했다.

D. 방언: 불신자들에게 대한 표적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저희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쫒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막 16:17).

믿는 자들이 복음을 전파할 때에 말씀을 확실히 증거 하시는 초자연적인 표적이 따르는데 그 중의 하나가 방언이요 이는 불신자들에게 표적이 된다.

막 16:20 “제자들이 나가 두루 전파할 새 주께서 함께 역사하사 그 따르는 표적으로 말씀을 확실히 증거 하시니라” 하셨다.

오순절 성령 강림시에 새 방언을 말한 초자연적 표적은 그날에 삼천 명이 구원을 받는 역사를 초래했다.

방언 말함은 성령의 초자연적 은사의 통로에 첫 입문이라고 말할 수 있다.

성령의 은사들[1]

우리는 성령을 선물로 받았다. 그러므로 우리는 초자연적인 삶의 문을 통과했다. 즉 성령의 은사들을 체험하고 사용하는 초자연적 새로운 영역으로 들어오게 된 것이다. 성령의 은사들을 살펴보기로 하자.

Ⅰ. 은사의 중요성
사도 바울은 성령의 은사와 중요성을 강조했다.
고전 12:1 “형제들아 신령한 것에 대하여는 내가 너희의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A. 계시된 9가지 은사들
사도바울은 성령의 9 가지 은사에 대한 그 다른 점, 활동, 나타남에 대하여 가르쳤다.

고전 12:4~10 “은사는 여러 가지나 성령은 같고 직임은 여러 가지나 주는 같으며 또 역사는 여러 가지나 모든 것을 모든 사람 가운데 역사하시는 하나님은 같으니 각 사람에게 성령의 나타남을 주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 어떤 이에게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말씀을 어떤 이에게는 같은 성령을 따라 자식의 말씀을 다른 이에게는 성령으로 믿음을 어떤 이에게는 한 성령으로 병 고치는 은사를 어떤 이에게는 능력 행함을 어떤 이에게는 예언함을 어떤 이에게는 영들 분별함을 다른 이에게는 각종 방언 말함을 어떤 이에게는 방언을 통역함을 주시나니”

B. 모든 신자들을 위함
바울은 고린도전서 12장 7절에 “각 사람에게” 은사를 주신 것은 모든 자를 유익하게 하려함이라고 가르쳤다. 이 은사들을 모두 활용하지 않는다면 하나님께서 뜻하시는 바 그대로 모든 신자들에게 유익을 줄 수 없다. 또한 이 9가지 은사는 각 사람에게 주어진다고 가르쳤다.

이 구절을 통하여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은 초자연적인 성령의 권능으로 인하여 모든 신자들을 통해 이 9가지의 은사가 성령의 지시하심을 따라서 역사하게 되며 그렇게 되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C. 은사의 공용(Public Use)에 대한 교훈
각 신자는 함께 모인 모임에서 은사를 활용하게 된다. 마치 두뇌의 지시를 받아서 몸에 붙은 각 지체들이 나름대로 기능을 발휘하는 것과 같이 모든 성도들도 각각 성령의 지시하심을 따라서 은사를 발휘해야 된다.

고전 12:11,12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몸의 지체가 많으나 한 몸임과 같이 그리스도도 그러하니라.”

히 2:4 “하나님도 표적들과 기사들과 여러 가지 능력과 및 자기 뜻을 따라 성령이 나눠주신 것으로써 저희와 함께 증거하셨느니라.”

Ⅱ. 은사로서 사역하는 우리의 동기
우리는 각자가 이 모든 은사들을 마음껏 활용하는 것을 간절하게 아주 열심을 갖고 사모하고 소원해야 하며, 또 우리 자신들을 뽐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모든 교회에 덕을 세우기 위하여 은사를 활용하여 일해야 한다.

고전 14:12 “그러면 너희도 신령한 것을 사모하는 자인즉 교회의 덕 세우기를 위하여 풍성하기를 구하라.”

A. 교회에 덕을 세우기 위함
예수께서는 그가 당신의 교회를 세우리라고 말씀하셨다. 그의 교회는 이들 은사들이 활용되었을 때 세워졌다. 여러 은사에 대하여 무지해서는 안 되고, 우리는 오히려 배우고 은사들을 알고 실습 해보고 그리고 우리 자신들이 각 은사와 모든 은사를 우수하게 활용하는데 까지 우리 자신들을 계속 훈련시켜야 된다.

우리 삶속에서 이 모든 은사들이 최우수하게 활용되도록 간절하게 소원해야 된다. 교회에서나 혹은 일상생활 속에서 누군가 문제를 당했을 때에 문제를 해결해줄 수 있는 가장 좋은 은사를 활용할 수 있도록 간구하고 찾아야 할 것이다.

벧전 4:10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각양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 같이 서로 봉사하라.”

B. 이러한 은사들을 간절하게 사모하라
고전 12:31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또한 제일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이런 은사들을 최우수한 방법으로 활용하려면 고린도전서 13장 말씀대로 믿음, 소망, 사랑 안에 거해야 된다.

C. 하나님의 은사를 불 일듯 하게 하라
딤후 1:6 “그러므로 내가 나의 안수함으로 네 속에 있는 하나님의 은사를 다시 불 일듯 하게 하기 위하여 너로 생각하게 하노니”

롬 1:11 “내가 너희 보기를 심히 원하는 것은 무슨 신령한 은사를 너희에게 나눠주어 너희를 견고케 하려 함이니”

이 은사들은 바울이 디모데에게 안수할 때 전이되어서 그의 삶속에서 역사 했다. 이와 같이 전이된 은사가 불일 듯 일어나는 일은 디모데에게 달렸으며 그 자신의 삶과 사역을 통해서 불이 바람을 타고 활활 붙듯이 역사하게 된다. 이와 같이 우리는 성령 안에서 걷고 살아가게 된다.

갈 5:25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지니”

성령의 기름부으심이란?

Anointing이란?  "머리에 기름(성령)을 부어 거룩하게 하는"이라는 의미를 가집니다. 따라서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님과 함께 쓰여질 때 '성령의 기름부으심'이란 의미가 됩니다

1. 기름부음 받으신 예수님
예수께서 30세가 되셨을 때 요단강으로 나아가 침례요한으로부터 물침례를 받으셨습니다. 이때 하늘 문이 열리면서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임하시어 예수님 위에 머물러 계셨습니다.
 
"예수께서 침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하늘로서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마3:16-17)
 
그후 예수께서는 안식일에 고향인 나사렛으로 가셔서 회당으로 들어가 이사야서 6장 1절을 읽으시면서(눅4:18-19) 이 글이 오늘날 응하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눅4:21).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눅4:18)
 
우리는 이 말씀에서 언급한 성령을 예수께서는 기름부으심으로 말씀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자신이 받은 성령을 기름부으심으로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이러한 기름부으심을 받으므로 말미암아 이사야가 예언한 대로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포로 된 자를 자유케 하는 그리스도로서의 사명을 감당하시게 된 것입니다.

2. 제자들과 성령의 기름부으심
예수께서는 십자가를 앞에 두고 제자들에게 다른 보혜사를 언급하셨습니다요한복음 14장에서 15장은 보혜사 성령의 강림에 대해서 여러 번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말씀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은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자 이 말씀을 잊어버리고 뿔뿔이 이전의 삶으로 돌아가 버립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께서는 이러한 제자들을 찾아다니시면서 자신의 부활을 나타내시면서 성령으로 침례를 받아야 한다고 말씀하셨고 그 후에 하늘로 승천하셨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3년 반 동안이나 함께하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기적과 표적을 보면서도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 앞에서 흩어졌던 제자들이 예수님의 부활과 함께 다시금 예루살렘에 모여서 예수께서 말씀하신 약속을 붙들고 다른 보혜사를 기다립니다. 그리한즉 몇 날이 못되어 마가 다락방에 모였던 120명의 성도들은 성령으로 침례를 받았습니다.
 
이러한 사실에 대해서 베드로는 사도행전 2:33절에서 설교하기를 "하나님이 오른손으로 예수를 높이시매 그가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너희 보고 듣는 이것을 부어 주셨느니라" 라고 했습니다.

성령침례를 받았던 제자들은 완전히 변화되어 있었습니다. 그들은 이제 더 이상 비굴한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 담대한 증인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새롭게 거듭나 있었습니다.
 
성령의 기름부으심이란 믿는 자들에게 부어주시는 성령침례, 성령충만을 말합니다. 곧 예수를 그리스도되게 했던 성령, 비굴했던 제자들을 그리스도인되게 했던 성령충만을 일컬어 성령의 기름부으심이라 합니다.
 
성령의 기름부으심은 예수님의 제자로서 온전한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 오늘의 성도들에게도 필요한 진리인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십자가에 죽으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믿는 너희들이 성령으로 침례를 받으면 "나의 하는 일도 할 수 있을 것이요, 보다 큰 것도 할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요14;12).  예수님의 사역은 가르침, 전파함, 고침을 베푸시는 일입니다. 이러한 사역에는 기름부음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요단강에서 물침례를 받음과 동시에 성령으로 침례를 받으셨던 것입니다.
 
예수님께 임하셨던 이러한 기름부음이 믿는 자들에게 임하면 예수께서 위임하신 사역들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따르는 자들에게는 성령의 기름부으심이 필요합니다. 사역을 감당하기 위해서 기름부음이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영접하므로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은 동일하시나 각자가 받은 기름부음은 다르다 할 수 있습니다. 기름부으심은 개인적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사역을 하지 않아도 그분을 사랑하며, 그분과 함께 걸으며, 규칙적으로 친교를 나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사역의 길로 들어서는 순간 우리는 죄, 질병, 세상, 마귀들과 싸워야 합니다. 기름 부으심이 없으면 결코 승리할 수 없습니다.
 
우리들 자신의 직분에 좋은 역할을 하려 한다면 거기에는 기름부음이 있어야 합니다. 기름부음은 더욱 강해질 수 있고, 증가될 수도 있습니다. 반대로 우리들 자신이 기름부음을 축소시키거나 약화시킬 수도 있습니다.
 
"우리를 너희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견고케 하시고 우리에게 기름을 부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저가 또한 우리에게 인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 마음에 주셨느니라"(고후1:21)
    
"너희는 거룩하신 자에게서 기름 부음을 받고 모든 것을 아느니라"(요일2:20)
 
"너희는 주께 받은 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요일2:27)
 
우리에게 기름부으심이 임할 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게 될 것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이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그리스도로 영접할 때 예수님은 우리의 죄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제사장이 되시며,  우리 안에 들어오시므로 사탄의 권세를 결박하시는 우리의 왕이 되시며,  구원에 대해서 무능한 우리에게 구원의 길이 되신 선지자가 되십니다(요14:6).

그러나 하나님께서 예수 이름으로 우리에게 성령으로 기름 부어 주실 때,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우리가 더욱 확신하게 되며(요20:31),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를 수가 있습니다(엡4:13).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케 되고(빌1:20), 제사장, 왕, 선지자적인 권능이 나타나며 증인이 됩니다(행1:8). 성령의 은사와 열매들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영광이 드러날 것입니다(요14:26).
 
"그가 내게 일러 가로되 여호와께서 스룹바벨에게 하신 말씀이 이러하니라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신으로 되느니라"(슥4:6)
 
우리는 하나님의 성령과 관련지어서 힘과 능력을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힘과 능'이라 하신 것은 인간의 힘을 일컫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스룹바벨에게 하신 말씀은 "전쟁을 이기게 함은 군대의 힘이 아니라 나의 신(성령)으로 되어지느니라"고 하신 것입니다. 승리를 얻는 것은 하나님의 성령으로 되어지는 것이지 인간의 손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 날에 그의 무거운 짐이 네 어깨에서 떠나고 그의 멍에가 네 목에서 벗어지되 기름진 까닭에 멍에가 부러지리라."(사10:27)
 
"기름진 까닭에"란 말씀은 "기름부음 때문에"란 말씀입니다. 가끔 위의 구절을 바꾸어서 "그 멍에를 부러지게 하는 것은 기름부음이니라"고 말하기도 하는데 이것은 "기름부음 때문에 멍에가 부러지리라"는 말씀과 완전히 똑같은 의미입니다.
 
"이러한 일은 우리의 삶에서나 목회사역에서 똑같이 해당되는 진실인 것입니다. 즉 병마로 인한 멍에나 마귀가 우리에게 씌워 주는 모든 멍에는 기름부음을 받음으로 모두 깨뜨려질 것입니다.
 
구약에서의 기름 부으심은 히브리어 '미세하', '마세하'로 '기름붓다'는 동사 '마사흐'에서 나온 말입니다.

이 '마사흐'가 구약에 어떻게 사용되었는지 그 범위는 집을 새롭게 단장하거나 기름으로 덧입히는 경우에 기름을 부었습니다(민6:16, 사21:5). 또한 성별, 헌신, 성화시키는 행위로서 기름을 부었습니다. 예언자로서(왕상19:16), 왕으로서(삼상9:16, 왕상1:39, 왕하11:12), 제사장으로서(출28:41, 레4:3), 거룩한 것들에(창31:13, 민7:1, 출29:36) 기름을 부었습니다.
 
신약에서는 예수께서 기름 부음 받으시고 또한 믿는 자들에게 기름 부어주셨고 지금도 기름붓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기름부음 받은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 믿는 자들도 더욱 성령의 기름부으심을 받아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온전한 사명을 감당해야 할 것입니다.

빛도 비추이고 시력도 받아야 한다 - A.W 토저

길을 찾기 위해서는 빛만 있어서는 안 된다. 빛과 함께 볼 줄 아는 시력도 필요하다. 성경은 도덕적이고 영적인 빛의 근원이다. 시편 기자는 "당신의 말씀에 들어감이 빛이니이다",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길에 빛이니이다"라고 말하였다.

나는 성경이 처음 주어질 때 완전하게 영감되었다는 것을 믿고 다음과 같은 찬송가를 부를 수 있었다. 우리는 신성한 말씀 속에서 비치는 빛을 찬양하네. 이는 우리 발자취의 등불이 되고 그 등불은 온 세대를 비춘다네.

"빛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이 말은 신성한 말씀을 비난하거나, 또는 말씀에 오점이 있다고 지적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빛 자체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말을 하고 싶었을 뿐이다.

빛은 성경에서 간혹 교사들이"지식"을 말할 때 사용했다. 그래서 무지한 사람들을 이야기할 때 "어둠 속에 있다"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지식이 오는 것은 태양이 떠오르는 것과 같다. 그러나 아침 해가 떠오르더라도 그것을 보는 눈이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 시력이 있는 사람만이 태양에서 오는 빛을 이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빛과 시력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 어떤 사람은 시력이 없기 때문에 빛을 누릴 수가 없다. 바로 맹인이다. 한편 어떤 사람은 빛은 없으면서도 시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있다. 이런 사람은 일시적인 소경이라 할 수 있지만, 언제든 빛만 비추면 곧 볼 수 있게 된다. 예를 들어 빌립보에 있던 간수장은 좋은 시력을 가지고 있었으나 빛이 없었기 때문에 바울을 알아보지 못했다. 반면 삼손에게는 별빛과 달빛과 햇빛이 모두 있었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블레셋 사람들이 삼손의 눈을 멀게 했기 때문이다.

이처럼 시력이 없는 사람은 언제나 밤과 같이 생활하지만, 시력이 있는 사람은 전등만 준비하면 언제나 낮과 같이 생활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것들이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는 무엇일까? 간단히 말해, 종교적인 교훈이 아무리 건전하다 하더라도 그 자체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것이다. 즉 종교적인 교훈이 빛이 되어 줄 수는 있지만, 그렇다고 시력을 회복시켜 주는 것은 아니라는 뜻이다.

성령의 비추심이 없는 말씀만으로는 죄인들을 구원할 수가 없다. 다시 말해, 진리가 없는 구원은 불가능하지만, 구원이 없는 진리는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교리 문답은 정성스럽게 배우면서도 내적 조명이 없었기 때문에 아직도 도덕적으로 어둠 속에서 방황하고 있는 것이다.

빛과 시력이 같은 뜻이라고 생각하는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지금도 이런 비극 속으로 들어가고 있다. 눈먼 사람도 닫힌 눈꺼풀을 열고 아름다운 풍경 쪽으로 시선을 둘 수는 있으나 실제로 그의 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눈먼 마음이 구원하는 진리를 들을 수는 있으나, 그는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한다. 바리새인들은 3년 동안이나 직접 "세상의 빛 되신 이"를 보았다. 그러나 그 빛의 어떤 빛줄기도 그들의 존재 속으로 들어가지 못했다. 빛 자체만으로는 충분하지 못한 것이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성경을 통해 배웠다. 예수님이 직접 모세와 선지자들과 시편 기자들의 말을 가르쳤지만 제자들이 진리를 파악하고 깨닫기 위해서는 먼저 그들의 내면이 "열려야"했다.

"이에 저희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시고"(눅 24:45). 바울이 빌립보에서 전도할 때 하나님을 공경하는 루디아라는 한 여인이 말씀을 듣고, 믿고, 세례를 받은 후에 즉시 자기 집을 바울에게 내놓았다. 한 절 말씀으로 아주 간단하게 이 모든 일을 설명하고 있다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행 16:14). 루디아는 빛뿐만 아니라 시력도 받았던 것이다.

바울 사도는 이 사실을 대단히 일찍 깨닫고서 "모든 사람이 다 믿음을 가진 것이 아니다"라는 말을 하기도 했다. 그는 왜 그렇게 되는지 그 이유를 알고 있었던 것이다.

"만일 우리 복음이 가리웠으면 망하는 자들에게 가리운 것이라 그 중에 이 세상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고후 4:3~4)

사탄은 사람들이 보는 능력이 없을 때는 빛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깨닫지 못하는 머리로는 아무리 진리를 접한다 하더라도 아무런 영향을 받지 못하기 때문이다. 물론 지적인 사람은 구원의 진리를 파악할 수도 있다. 그러나 보는 능력이 없다면 구원의 진리를 파악했더라도 도덕적으로 그 어떤 반응도 나타내지 못한다.

이러한 문제에 대한 고전적인 예를 벤저민 프랭클린과 조지 휫필드의 이야기에서 찾아볼 수 있다. 프랭클린은 그의 자서전에서 자신이 능력 있는 부흥사의 설교를 어떻게 듣고 있었는지 상세하게 기록해 두었다.

프랭클린 은 휫필드가 자신의 목소리가 얼마나 멀리까지 들리는지 알아보기 위해 서 있던 광장 주위에서 서성였다. 휫필드는 프랭클린에게 개별적으로 그리스도가 필요하다는 사실에 관하여 이야기해 주고 그를 위해서 기도해 줄 것을 약속했다. 그러나 수년후에 프랭클린은 그 부흥사에게 "당신이 해 준 기도는 아직도 내게 별 효험이 없습니다"라는 슬픈 소식을 전했다.

그때까지 프랭클린은 회심하지 못했던 것이다. 프랭클린이 지적으로 얼마나 명민한 사람인지는 누구나 다 알 것이다. 뿐만 아니라 휫필드도 프랭클린에게 진리 전체를 잘 전달했다. 그러나 프랭클린에게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프랭클린은 빛은 있었지만 시력은 얻지 못했던 것이다. 시력이 없이는 결코 "세상의 빛"을 볼 수 없다. 세상의 빛을 보기 위해서는 반드시 내면에 성령의 역사가 나타나야 한다. 그러나 벤저민 프랭클린은 아직 그것을 받지 못했던 것이다.

구원에 이르는 믿음이 되려면 성령의 내적 역사가 필요하다. 복음은 빛이다. 그러나 성령만이 시력을 주실 수 있다. 때문에 우리가 잃어버린 자를 그리스도 앞으로 인도하려고 할 때는 그들이 빛을 볼 수 있는 시력도 허락해 달라고 기도해야 한다. 아울러 사람들의 마음을 어둡게 만드는 어둠의 영들에 대항해서도 기도해야 한다.

<능력:거듭난자의삶에드러나는것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