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0/2009

원죄 사함과 허물의 사함을 구별합시다 (3)

예수님의 의
“이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서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하심이니라.”(롬3:26)

예수께서 인류의 구원을 위해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신 희생으로 말미암아 인류가 원죄에서 구원을 얻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본문을 자세히 보면 의롭‘다'가 아니라 의롭게 '하려'라는 전치사 소유격 프로스(πρ)의 포이에우(ποω)이므로 의롭게‘된것'이 아니라, 의롭게‘되게’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께서 의롭게 되셨으니 너희도‘의롭게 되라'는 말이지,‘의로워 진 것'이 아닙니다.

헬라어 디카이오수네(δικαιοσνη)를 우리말로 의로 발음합니다. 의는‘정의, 공의, 정당성, 옮음, 의’등으로 사람의 행위(ρων)로 선이나 악으로 나타나는 결과를 말합니다. 자신의 행위를 선용하면 좋은 사람으로 나타나고, 악용하면 나쁜 사람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처럼은 못되더라도 그분의 말씀대로 선하게 살겠다고 말하면서 행위로는 따르지 아니합니다.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아는 고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율법의 행위에서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갈2:16 ~17)

이 구절에서 잘못을 범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말 성경에는‘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가 아이라'고 표기되어 있습니다. 율법을 표기할 때 시내산의 율법은‘노모 데테오(νομο θετω)’이고, 서기관들이 제정한 국법은 ‘초리스 노모오(Χωρs νομου)입니다.

시내 산의 법이라는 하나님의 명령(θετω)이 빠지고, 서기관들이 제정한 국가(Χωρs)를 빼고, 단순히 법(νομοs)자만으로 표기되어있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이 말하는 율법의 행위는 시내 산의 율법이 아니라, 서기관들이 만들고 지키도록 했던 국법을 말입니다.

다른 말로 바꾸면 국법대로 행해서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니라, 시내 산에서 명령하신 계명대로 해하는 믿음이라야 의롭게 된다는 말입니다. 바울의 교훈을 우리말 성경대로 읽으면 의롭게 되는 것은 행위가 아니라 믿음으로만 된다는 인식을 갖도록 잘못표기 되어있습니다.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들음이니라.”(롬3:20)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롬3:22,24)

물두멍에서부터 믿음생활을 하는 사람의 행위는 어떻습니까? 우리말 성경에는 율법의‘행위(ρων-엘곤)로는 의롭게 되지 못하고...믿음(πιστεω-피스테우)의 은혜로 하나님이 값없이 의롭게 하셨다’고 기록되지 않았느냐! 그러므로 나의 행위가 나를 의롭게 하지 못하고 오직 예수를 믿음으로 의롭게 된 것이라는 논리로서 자신은 행하지 아니하고 예수께서 스스로를 위해 이루어놓으신 그분의 의를 도적질해서 자기 것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앞에서 지적했던 대로 바울 사도는 율법의 행위를 27절에서‘초리스 엘곤 노모우(Χωρs ρων νομου)'라고 분명하게‘국법의 행위'로 표기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를 상고할 때, 원전에서 국법의 행위(Χωρs ρον νομου)로 기록되었으나 우리말 성경에는 국가(Χωρs)를 빼버리고 율법으로만 번역되어있음을 생각해야 됩니다.

이러므로 바울은 한 번도 율법을 부인하지 아니하고, 다만 서기관들이 제정해 놓은 국법을 지키는 행위로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이것을 사람들이 오해하고 행위를 부정하고 입으로만 믿기 때문에 봉사하지 않으며 찬양하지 아니합니다. 이유는 자기 육신만을 위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의를 도적질하면 안 됩니다. 저기는 행하지 아니하고 말입니다. 이것이 바깥뜰에서 경배하는 신자의 태도입니다.

야고보서 2장 24절은‘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은 아니라’고 교훈합니다. 행하지 않는 믿음은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합니다(약2: 26). 그런데도 사람들은‘하나님’과‘나’와의 관계를 이루기 싫어하기 때문에 행위를 의롭게 됨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결과는 42개월 동안 지구정부가 시행하는 Ubiquitous 문화사회에서 눈물을 흘리게 됩니다.

나의 의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느니라.”(롬10:3)

요한 사도는 예수를 구주로 믿고 예수님이 내 안에 거한다고 말하는 사람이라면 자기도 예수님처럼 행할 때만이 의롭게 된다고 행위(ρον)를 강조했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자신의 의를 이루기 위해서 감사와 기쁨으로 하나님과의 관계부터 이루어야 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이루어지지 않고서는 감사가 있을 수 없고, 기쁨이 있을 수 없습니다. 따라서 감사와 기쁨은 내재적인 거룩함으로 성화시켜줍니다. 이 성화는 자신의 영적나이를 높여주고, 거룩한 세마포르 깨끗하게 보전시켜줍니다. 그리고 빠른 속도로 전체적인 성결은 큼직한 보석으로 흉패를 장식하게 됩니다.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하심이니라.”(엡2:10)

바울은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의 일을 하도록 지음을 받았다 합니다. 선한 일은 자기를 위한 것이 아니라, 예수 안이라 했습니다. 사람은 예수를 믿어야 되고, 아버지 하나님을 섬기는 삶이어야 사람으로 지음을 받은 목적에 부합된다는 뜻입니다.

어두움의 권세는 인간을 하나님과 멀어지게 하고, 봉사하지 못하게 하려고 육신의 정욕과 안목으로 미혹시킵니다. 이러한 사람들이 라오디게아 신자들처럼 믿음이 뜨겁지도 차지도 아니합니다. 그러면서도 자기는 좋은 믿음인줄로 착각하고 자기 의를 이루려하지만 이루지 못한다고 성경에 일렀으되,

“저[예수]안에 거한다 하는 자는 그의 행하시는 대로 자기도 행할지니라.”(요일2:6)

자기도 행하라는 말은 마태복은 7당에서 교훈한 좁고 협착한 길을 말합니다. 예수께서 행하신 그 고난의 길을 걸어가는 자라야 의로운 삶을 말합니다. 행함을 페리파데인(περιπατεν)으로 표기 됐습니다.

전치사 페리(περ)+능동태 파데인(πατεν)은 페리파테우(περιπατω)의 미래능동 소유격입니다. 전치사 περ?는 ‘관하여, 대하여, 때문에, 둘레에, 주위에, 근처에’입니다. 그리고 목적을 위한 소유격 πατω는 좁은 길을 ‘밟다, 걸아가다, 짓밟다’입니다.

사람은 철저하게 예수님이 걸어가신 가시밭길을 함께 가지 않고서는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시온의 복을 받지 못합니다. 지성소의 삶으로서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를 이루라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러나 신앙을 물두멍에서부터 시작하는 사람들은 좁은 길로 가려하지 않기 때문에 감사와 기쁨이 없습니다.                                                                                                      

이러한 사람은 이교회 저 교회를 끼웃거립니다. 말로는 예수의 보혈로 죄 사함을 받았다 하면서도 또 다른 물두멍을 찾아간다면 스스로의 말과 행동이 일치하지 않습니다. 저 교회에 있을 때에 물두멍(예수의 피)에서 씻겠는데, 다른 교회 물두멍을 찾아간다면 또다시 예수의 피로 씻으려는 옳지 못한 신앙이 됩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런 사람은 근본적으로 거듭나지 못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봉사는 하나님을 향한 선한행위가 나타남을 말합니다. 때로는 선하지도 않으면서 교회에서 일하는 행위를 봉사로 착각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진정한 봉사는 섬김(-애바드)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너희가 진정으로 하나님을 섬기라'합니다. 그러므로 진정이 없는 섬김은 봉사가 될 수 없습니다. 진정으로 섬기는 봉사는 무엇을 말합니까?

무슨 일을 하더라도 감사와 기쁨으로 일할 때 진정한 봉사요 섬김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행위, 곧 선행의 기초는 감사와 기쁨이어야 됩니다. 이러한 기초위에 행위라는 봉사는 자신의 외적 정결로 이어져서 의로움을 나타내게 합니다. 생을 육신을 위해 소유로 살지 말고 삶으로 살아야 내 의가 나타납니다.

씻기만 하는 결과
참으로 안타까운 일은 예수를 두주로 믿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믿음이 아니라, 세상을 사랑한다는 점입니다. 그러한 생활은 현재로는 좋겠으나, 지구정부가 시작되는 순간부터는 엄청난 고통이 따르기 때문에 대 환난으로 표현하는 것입니다. 또한 내세에서는 말로는 표현할 수 없으리만큼 가혹하다는 점입니다.                                                                                                     

불행하게도 많은 사람들이 이교회에서 저 교회로 연례행사처럼 1년에 몇 차례씩 옮기는 점입니다. 장로, 집사, 권사, 등 자신의 뜻대로 안되면 무리를 지어서 옮겨는 신앙은 이 물두멍 저 물두멍을 전전하는 행위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면서도 물두멍이라는 예수의 페로 죄 사함을 받고 거듭났다고 말합니다. 거듭났는데 왜 자시 거듭나려고 다른 물두멍이라는 예수의 피를 찾아다니니까? 근본적으로 거듭나지 않은 증거입니다. 그래서 씻기만 하는 그들로 말미암아 모든 면에서 문제가 생깁니다.

당을 만드는 사람

“이 사람들은 당을 짓는 자며 육에 속한 자며 성령은 없는 자니라.”(유19)

“오직 당을 지어 진리를 좇지 아니하고....”(롬2:8)

“유대인들이 당을 지어 맹세하되....”(행23:12)

유다서는 성령으로 거듭나지 못한 사람들이 당을 짓는다 합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육에 속한 사람이기에 물두멍에서부터 생을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사도행전 23장12절에서 말하는 당은‘아포디오리조(ποδιορζω)’인데,‘분리시키다, 나누다’입니다.

뜻은 __으로부터, __에게서 거절하고 배척함을 말합니다. 로마서에서 말하는 당이라는 에리데이리아(ριθεα)는‘당파싸움, 다툼, 이기심, 사욕’입니다. 고린도후서 12장 20절에서 말하는 당은 수스트로페(συστρο)로 발음하고, 뜻은‘모임, 무질서한 집단, 소동, 소란, 폭동’입니다.

그러므로 물두멍에서부터 신앙생활을 시작하는 신앙인들은 이기심이나 사욕을 채우기 위해 구릅을 형성시키는 모임을 만듭니다. 이러한 현상은 육신의 유익 또는 자신의 뜻을 관철시키기 위해 말씀에 문제를 삼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렇게 하는 것은 감사와 기쁨이 없기 때문에 말씀이 자기 생각과 다르다고 합니다.

교회에서 서클을 만들고 교회를 갈라놓기도 하는데, 이런 경우는 지도자들이 더 심합니다. 그리고 문제를 만들어서 결국은 다른 데로 옮겨가는 경우가 가장 많습니다. 결과는 교회질서를 파괴시키는 무질서한 집단이라고 성경에 일렀으되, “인간이 세운 제도를 주를 위하여 순복하되....”(벧전2;13)

베드로가 말하는 크티시스(κτσι)는‘창조, 피조물, 세계, 권위, 제도를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아들 예수를 죽이기까지 하시면서 세우신 조직체가 교회입니다. 성막의 지성소에 있는 증거궤 안에 말씀에 순종하라는 만나와 위임권위에 순종하라는 싹 난 지팡이와 절서를 지키라는 돌 판을 넣어주시고 순종(πεικω-후페이코)을 요구하십니다. 자기 뜻을 관철시키려고 서클을 만드는 해위는 하나님의 말씀에 복종하지 않는 거절입니다. 이러한 무리들은 이기심으로 사욕을 채우려고 당파를 구성시키는 것은 위임권위에 촉동을 일으키는 행위입니다.

결과는 예수의 피 값으로 세우신 조직을 무질서하게 만들고 다른 조직으로 떠나가지만 그것은 예수님을 떠나가는 행위입니다. 이 뜻은 하나님이 그들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그들 스스로 예수님으로부터 분리죄고 구원 주되시는 예수님을 배척하는 행위입니다.

대 환난에 남겨 진다
볼지어다 내가 그를 침상에 던질 터이요 또 그로 더불어 간음하는 자들도 만일 그의 행위를 회개치 아니하면 큰 환난가운데 던지고.....(계2:22)

요한 사도는 이세벨이라는 여자와 간음하는 자들은 큰 환난에 남겨진다고 합니다. 이세벨(εζβελ)이라는 이름의 의미는 브올에서 유래되며, 곧 바알세불(βεελζεβολ)이라는 뜻입니다.

우리말 성경에는 간음으로 표기됐는데, 헬라어 원전에는 모이체우(μοιχεω)로 되어있습니다. 뜻은 어두움의 존재와의 결합을 말합니다. 남녀 간의 관계는 에크포르네오(κπορρνεω)이므로 두아디라교회에 경고한 간음은 마귀와의 결합을 말합니다.

가롯 유다가 예수님을 떠나 산헤드린 회원들과 관계를 유지할 때 그에게 간음하는 자로 지목하였는데 그 단어가 모이초스(μοιχs)라 했습니다. 이는 μοιχοs의 호격이므로 유다가 남녀와의 성관계가 아니라 사탄관의 결합을 지적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제정하신 교회를 무질서하게 만들고 이교회 저 교회로 전전하며 물두멍에서 씻기만 하겠다는 사람들은 어두움에 미혹당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예수를 떠났기 때문에 휴거에서 탈락되고 대 환난에 넘겨지는 것은 저들 스스로 마귀와 결합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탄이 지배하게 될 적그리스도 정부시대에 42달 동안 남겨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막바깥 뜰에서 경배하는 신자들의 결과입니다.

두 갈래 길에서 택일
물두멍에서부터 신앙을 시작하려는 사람들은 대 환난에 남겨집니다. 그때에는 예수 그리스도냐, 적그리스도냐? 영생이냐, 영벌이냐? 이러한 양자택일은 전적으로 그 사람의 의지로서 자신에게 주어진 자유에 있습니다.

하나님과 나와를 이루는 사람은 자기 영혼을 깨끗하게 유지시키려고 지성소의 삶으로부터 시작합니다. 그러므로 믿음을 물두멍에서 시작하지 말고 증거 궤에서부터 성막이 지어진 순서대로 삶을 살아야 됩니다. 그러한 믿음이라야 세마포를 입혀주십니다.

아버지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고 어린양의 신부가 되려는 믿음이 얼마나 귀중하니까! 얼마나 값지고 아름다운 믿음인가를 깨달아야 시온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날마다의 삶에서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를 떠나지 않도록 힘써야 새 예루살렘의 축복이 있게 됩니다. <장죠셉목사>

원죄 사함과 허물의 사함을 구별합시다 (2)

예수의 피와 물
“아론과 그 아들들을 회막문으로 데려다가 물로 씻기고”(출40;12, 레8:6). 제사장들은 물로 씻어야 하나님 앞에 들어가도 죽임을 당하지 아니합니다. 따라서 신약시대부터 누구든지 예수의 피로 허물이 씻기지 아니하면 거듭나지 못하므로 하나님이 계시는 곳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죽임을 당합니다. 그것이 이방인들에게 내어주어서 42달 동안 짓밟히게 된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되는 이유는 성정바깥 뜰에서만 경배하였기 때문입니다.

성전바깥 뜰에서만 경배하는 원인은 진설상이 있는 안으로 들어가려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들어가지 아니하는 것은 육신을 위해서만 살았다는 말입니다. 자기 육신만을 위하여 세상에 쌓기에만 급급하고 하나님을 위해 투자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믿음은 예수님의 의를 도적질해서 자기 것으로 만든 것입니다. 왜 이러한 현상이 일어납니까?

“이스라엘 중에 섞여 사는 무리가 탐욕을 품으매 이스라엘 자손도 다시 울며 가로되....우리가 애굽에 있을 때에는 값없이 생선과 외와 수박과 부추와 파와 마늘을 먹은 것이 생각나거늘....”(민11:4~5)

“너희가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나오게 하여 이 악한 곳으로 인도하였느냐. 이곳에는 파종할 곳도 없고 무화과도 없고 석류도 없고 마실 물도 없도다.”(민20:5)

여기서‘탐욕’그리고‘ㅡ도’라는 두 가지 단어가 주는 교훈이 있습니다. 자신의 욕구를 충족시키려는 행동이 탐욕입니다. 어떤 서클에 휩쓸리는 ‘편승(便乘)’이‘-도’입니다. 민수기 기자는 탐욕을 ‘애바’라 하였는데, 이는 헬라어 프레오네시아(πλεογεξα)와 같인 ‘부당한 욕심, 지나친 욕심, 강요’ 등입니다.

민수기서 에서 말하는 탐욕이 지나친 욕심이나 부당한 욕심이라면 주제파악을 못하는 행위가 됩니다. 따라서 성전바깥 뜰에서 경배하는 자들, 곧 물두멍에서부터 믿음생활을 시작하는 그들도 주제파악을 못했다는 결론입니다. 자신의 존재인식을 파악하지 못했다면 그는 분명히 지나친 욕심 때문에 물두멍에서 떠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편승이라는 ‘래카브’는 보조사(補助詞)입니다.‘ㅡ도’는 주격에서‘누구ㅡ도 좋은 사람이다’ 감탄사에서는‘과연 좋기ㅡ도 하구나’또 양보면에서‘오늘 안 되면 내일ㅡ좋소.’이러한 편승을 나타냅니다. 그렇지만 이 편승이 얼마나 나쁜지를 알아야 합니다.

민수기서를 보면 혼혈된 사람들이 불평할 때 그들의 불평에 이스라엘 사람들이 편승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선동에 합류했다는 결론입니다. 그렇게 편승한 것도 탐욕에 따른 결과입니다. 그러므로 편승하는 사람역시 주제파악을 못하는 사람이며 이런 사람은 자기 의지가 약해서 남이 끌어가는 대로 끌려 다니는 사람입니다.

왜 씻기만 하나?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엡2:8~9)

원죄사함을 위해 하나님의 선물로 그 아들을 주셨다는 뜻이지, 육신의 권세이거나 죄의 현존(現存)에서 씻김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죄의 현존이라는 뜻은 살아있는 육신이 허물이라는 죄와 함께 살고 있음을 말합니다.

육신을 가진 인간은 육신을 떠나서는 살수 없기에 어두움의 올무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육신으로 말미암아 일어나는 욕심을 이용하여 마귀가 죄를 범하도록 미혹하기 때문에 성결함이 요구됩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리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5:24)

믿음의 기초를 물두멍에서부터 시작하는 사람은 자신은 예수를 믿고 있으므로 주님의 십자가 의로 자신이 일상생활에서 짓는 허물이라는 죄까지 사함을 받았다고 착각합니다. 착각이라고 말하는 이유는 그들이 말하는 대로라면 성전안으로 들어가서 감사와 기쁨으로 진설상을 배설해야 됩니다. 또한 감사와 기쁨으로 등대의 삶으로 어두움을 밝혀야 됩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는 않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이 인식하고 말하는 죄 사함은 허구일 뿐입니다. 진정한 그리스도의 은혜를 체험한 사람은 육신을 대신하여 물질을 아낌없이 풍성하게 드려도 기쁘기만 합니다. 누구든지 하나님 앞으로 나아올 때 자기가 드리는 예물로서 스스로가 성전안에서 경배하느냐, 바깥에서 경배하느냐를 알 수 있습니다.

왜 들어가지 않는가?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느니라.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롬8;7~8)

결론부터 말하면 하나님의 범에 굴복하지 않는데 있습니다. 하나님의 법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법은 하나님의 입으로 하신 말씀대로 거짓 없이 준행하는 행위를 말합니다. 따라서 법대로 준행하지 아니하는 사람은 성전바깥 뜰에서 경배하는 신자이기 때문입니다. 말라기선지는“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법대로 행하는 사람의 이름을 생명책에 기록한다.”(말3:16~18) 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정하신 날은 어떤 날이며, 특별한 소유는 무엇을 말합니까?

문제는 어디에서 오는가?
“그러나 어리석은 변론과 족보 이야기와 분쟁과 율법에 대한 다툼을 피하라 이것은 무익한 것이니라.”(딛3:9)

가정이나 교회에서 문제가 일어나는 원인은 바깥에서 경배하는 사람으로 말미암아 발생합니다. 가정이든 교회든 하나님을 향한 감사가 없고 기뻐함이 없는 사람들을 관찰해보면 매사에 자기 뜻대로 하려합니다. 가정은 그 가정에 하나님께서 주신 질서라는 가정법이 있습니다. 교회도 같습니다.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의 질서를 위한 하나남의 법이 있습니다. 이법을 무시하고 질서를 파괴할 때 생기는 문제가 되는 네 가지 원인을 알려주십니다.

족보(ενεαλοα):‘게너아로기아’로 발음되는 족보는 조상들의 역사를 통한‘혈통자랑, 가문자랑’등으로 쓰이는 단어입니다. 족보 자랑은 자신의 부족함을 은폐시키게 위해 조상들의 업적을 부각시킵니다.

율법(νομιs):‘노미코스’로 발음되는 율법은‘율법[성경]해석, 법전’등으로 쓰이는 단어입니다. 대부분의 신자들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하지 않음으로서 자신의 영혼이 타락된 것을 숨기려고 ‘특정한 구절의 내용에 관한 말씀을 한쪽으로 치우침만을 모아서 세계적으로 변증[론]합니다’그런 일은 하나님이 주신 시내산 율법과 서기관들이 만들어 놓은 국법과 비교하면서 다툼이 일어난다는 말입니다. 사실 하나님의 말씀과 교단이 정해놓은 교단 법(-도그마)은 항상 상충되는 문제를 일으키고 있습니다.

변론(ζτσιs):‘지테시스’로 발음되는 변론은‘조사, 토론, 논쟁’등으로 쓰이는 단어입니다. 바울은 어떤 이유일지라도 변론하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결론을 냈습니다. 논쟁의 원인은 자기 믿음이 온전치 못한 것을 가리우기 위해 족보자랑이나 세상법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변론하려 합니다.

분쟁(ριs):‘에리스’로 발음되는 분쟁은‘다툼, 논쟁, 불화’등으로 쓰이는 단어입니다. 결과적으로는 물두멍에서부터 신앙생활을 시작하는 사람들로 말미암아 교회나 가정에서 불화가 일어납니다. 자기족보 자랑이나 율법에 대한 다툼은 교단들이 만들어놓은 교법은 자신들의 사상에서 기인될 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원수가 되는데, 이런 일은 어두운 세력의 지배를 받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십일조는 구약에서 끝났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그런 것이 율법에 대한 다툼입니다. 왜 그러한 해석을 합니까? 물질을 하나님께 드리기 싫어하기 때문입니다. 만물은 하나님의 것인데, 하나님의 것을 자기 것으로 생각하는 탐욕 때문입니다.

잘 믿는 줄 알았는데.....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온 것이라.”(요일2:16)

항상 잘 믿는다고 말하는 그런 사람으로 인하여 문제가 생깁니다. 이유는 그들의 욕심은 육신문제에 있고, 다음은 눈으로 보는 문제인데, 잘못 보는데서 문제가 생깁니다. 본질을 떠나 지엽적인 일을 볼 때 그렇게 됩니다. 또한 사물을 볼 때도 육신의 욕구를 충족시키려 하는데서 문제를 일으킵니다.

그것은 이생(βοs-비오스)에 집착하기 때문입니다. 이생이라는 βοs는‘생활, 생활방편, 재산’등으로 쓰이는 단어입니다. 결국은 자신의 육신을 위하여 재산을 쌓기 위한 방편으로 생활하고, 하나님을 위하지 않기 때문에 물두멍에서 씻기만 하고 안으로 들어가지 않는 것입니다.

주의 의와 내 의
신앙생활을 물두멍에서부터 시작하는 사람들의 주장은 ㅡ그리스도 예수께서 인류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의로운 구세주가 되셨다. 따라서 내가 예수를 구주로 믿기 때문에 예수님의 의로 나도 의로워졌다 ㅡ 합니다. 참으로 위험한 발상입니다. 자기는 행하지 아니하고 그리스도께서 이루어 놓은 그분의 의를 도적질하여 자기 것으로 만들면 안 됩니다.

그리스도의 의는 그리스도의 것이지 우리의 것은 아닙니다. 왜 그렇게 인식할까요? 생을 소유로 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사람은 자기는 움직이지 아니하고 남의 것을 빼앗아서 자기 것으로 소유하려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지음을 받은 인간은 두 가지 다른 길로 살고 있습니다. 하나님께로 향하는 생활로‘삶'으로 살아갑니다. 다른 한 면은 사탄의 사주에 미혹 되는 생활로‘소유'로 살아갑니다.

삶(Life):은 자기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뜻을 추구하면서 그것을 얻고 사랑을 공유하고 자기를 성화시켜서 영원한 행복을 누리려는 행위를 말합니다.

소유(possess):는 양식(良試)이라는 좋은 식견을 활용하여 다른 사람보다 높아지려 합니다. 이러한 쟁취를 위하여 분석하게 되는데, 그 사람의 약점을 찾아내서 그를 정복하려는 행위를 말합니다. 소유를‘크테마(κτμα)'라 하였는데, 뜻은‘재산, 토지, 밭, 짐승'까지 포함되는 소유물을 말합니다. 따라서 재산을 증식시키려고 모든 지식(idea)을 동원한다는 말입니다.

“그런즉 자랑할 데가 어디뇨, 있을 수가 없느니라. 무슨 법으로냐? 행위로냐? 아니라. 오직 믿음의 법으로니라.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롬3:27~28)

대부분의 믿는 사람들이 이 구절을 오해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ㅡ봐라! 의롭게 되는 것은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고 하지 않았느냐! 그러므로 예수께서 나의 죄를 위해 죽으시고 의롭게 되셨고, 나도 의롭게 되었다ㅡ는 논리를 세우면서,‘나는 예수를 믿으니 의롭게 되었다’그렇게 인식하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경우는 성경을 자기 뜻에 맞추는 경우가 됩니다. 그리고 성경을 제대로 해석하지 못한 탓입니다. 헬라어 로마서 3장27절에는‘국가(Χρα-초라)’를 생략하고 다만‘법(νμοs-노모스)’으로만 표기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28절에서는‘국법의 행위(Χωρs ρων νμου)’로 표기되어 있는데, 우리말 성경에는‘국법의 행위(Χωρs ρων)’를 빼버리고 그 자리에‘율법(νμου)’자만을 표기해 놓았습니다. 이것을’율법‘으로 번역되었기에 그래서 오해하는 것입니다.

원죄 사함과 허물의 사함을 구별합시다 (1)

물두멍(키요아)

“그가 놋으로 물두멍을 만들고 그 받침도 놋으로 하였으니 곧 회막문에서 수종드는 여인들의 거울로 만들었더라.”(출38:8)

물두멍의 원리는 일상생활에서 범하는 허물이 씻김 받는 과정이고, 원죄를 사함 받는 것은 번제 단에서 입니다. 누구든지 예수를 구주로 믿는 자에게는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희생이라는 번제로써 우리의 원죄를 사해주셨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원죄로 말미암아 약해져서 항상 마귀의 미혹을 받으며, 그로 인하여 날마다 죄를 짓게 되는데, 그것을 허물이라 합니다.

물두멍은 자신의 더러운 행실을 깨끗하게 씻는데 있습니다. 물두멍을 성막바깥 뜰에 두었습니다. 그 당시 광야생활에서의 물두멍은 제사장들이 작업을 끝내고 지성소에 들어가 하나님을 뵈옵기에 앞에 더러운 손발을 씻는 기구였습니다.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두 가지로 정리가 되어야 합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희생은 인류에게 전가된 원죄를 없애주신 일입니다. 이것을 “행위에서가 아니라 예수를 구주로 믿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거저주신 선물이라”합니다(엡2:8). 다르게 설명하면, 하나님께서‘인류의 원죄를 없애기 위해 아들 예수를 십자가에 죽인 일은 사람의 행위와는 상관없이 준 선물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한 사건에서 원죄사함과 허물의 씻김이라는 두 가지 원리가 적용됩니다.

그리스도께서ㅡⓐ십자가에서 죽으심은 인류의 원죄 사함이요, ⓑ흘리신 피는 날마다의 생활에서 범하는 허물의 씻김ㅡ을 말합니다. 믿는 자는 예수의 희생으로 구원의 은총을 받았으면 성전 안에 들어가야 됩니다.

그런데도 십자가의 은혜로 구원받은 사람이 미움과 질투와 술수와 분리시키면서 당을 짓는 사람이라면 그는 날마다 물두멍 주변에서만 맴도는 사람일뿐입니다. ‘예수의 피로 구원받았다’고 생각하고 말하는데 크게 오해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잘못으로 인하여 날마다 번제단과 물두멍 사이로 왔다 갔다 하면서 입으로 ‘믿기만 하면 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그도의 보혈로 죄 씻음을 받았으므로 거듭났다고 말은 하지만 지성소와 성전, 그리고 그 안에 놓여 질 기구들을 만들지 않아서 예수님이 그와 함께 거하지 아니하는데 어떻게 거듭납니까? 번제 단에서 자기를 희생시키지 않았는데 어떻게 피로 허물이 씻김을 받습니까?

그런 사람의 사람을 보면 항상 불만이 가득하며, 기만과 술수와 입에서는 항상 거짓말을 만들어 냅니다. 이런 신자들이‘믿기만 하면 된다.’는 신앙으로 살고 있습니다. 그들은 제사장들이 물두멍에서 씻음으로써 깨끗하듯이 자기도 그리스도께서 흘려주신 보혈로 죄 씻음을 받았으므로 깨끗하여 졌다고 착각하고 있습니다.

번제 단에서의 희생이 없는 사람은 십자가에서 죽어주신 예수를 구주로 믿지 않는 사람입니다. 이처럼 처음부터 거듭나지 못했기 때문에 날마다 범하는 허물이 물두멍에서 씻어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전 안으로 들어가지 아니합니다. 왜 들어가지 않습니까?

하나님을 향한 감사와 기쁨으로 드리려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처음부터 하나님을 삶의 우선으로 두지 아니하고 자신을 우성순위에 두었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예물(헌금)을 드리는 희생이 없었습니다. 혹이 예물을 드릴지라도 믿는다는 흉내만 애면서 인색함을 떨치지 못하는 것은 희생하지 않는 탓입니다.

“나의 이 말을 듣고 행치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매 그 무너짐이 심하니라.”(마7:26~27)

이 말씀은 삶이 바탕이나, 믿음의 기초를 증거 궤에서 시작하지 아니하고, 반대로 물두멍에서부터 시작하는 사람에게 예수님께서 그들의 잘못을 경고하신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경고하시는 반석이라는 페트라(πτρα)는 예수님 자신을 말합니다.

이 뜻은 삶이나 믿음의 기초를 예수에게 주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말씀은 삶이 기초를 증거 궤에 두라고 하셨는데도 그 말씀을 듣지 않고 물두멍에 기초를 두는 사람이 모래위에 집을 짓은 자라는 뜻입니다. 이것이 거듭나지 못하는 원입니다. 거듭나지 못했기 때문에 항상 물두멍 주변에만 맴돌고 성전 안으로는 들어가지(희생하지) 않는 것입니다.

물두멍의 의미
“아론과 그 아들들이 그 두멍에서 수족을 씻되 회막에 들어갈 때에 물로 씻어 죽기를 면할 것이요 단에 가까이 가서 그 직분을 행하여 화제를 여호와 앞에 사를 때에도 그리할지니라.”(출30:19~20)

수족은 손과 발입니다. 손과 발을 물로 씻지 아니하고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는 자는 죽습니다. 그래서 제사장은 회막에 들어가기 전에 손발을 씻어서 죽임을 면 하게하는 것이 물두멍의 원리입니다. 히브리어 아드브레겔이라는 수족은 손과 발을 말하는데,‘아드’는 팔꿈치아래 부분을 말하고,‘브레겔’은 무릎관절 아랫부분입니다. 수족을 씻는 물(마임)은 신약에서 예수님께서 채찍으로 맞으실 때 흘리신 피로 바꾸어졌습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주로 영접할 때 갈보리 산위에서 십자가에 매달리신 주를 바라보면서 회개하며 구원을 간구하면 원죄는 사함 받아집니다. 그러나 거듭남이라는 성화가 되지못했기 때문에 일상생활에서 범하는 허물은 피로 씻김을 받아야 됩니다. 이것이 물두멍의 원리입니다. 이 약속은 창세기에서 하나님과 노아와의 약속에서 이루어집니다.

“내가 나와 너희와 및 혈기 있는 생물사이의 내 언약을 기억하리니 다시는 물로 모든 혈기 있는 자를 멸하는 홍수가 되지 아니할지라.”(창9:15)

갈보리 산 십자가위에서 예수께서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모든 혈기 있는 자가 멸망하지 않는 것은 그분의 희생으로서 구원을 이루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원죄는 사해졌으나 날마다 범하는 허물이 씻김을 받아야 됩니다. 그 허물이 씻김 받는 곳이 물두멍입니다.

물로 씻는 행위를 아사프로 발음합니다. 이는 허물을 씻어서 깨끗하게 함을 말합니다. 화제를 아쉬세로 발음하는데, 이는 제물을 불에 태워서 그 향연이 하나님께로 올라가서 화해를 이루게 하는 제사입니다. 기본적으로 화제는 구원론 적 입장에서 취하며, 신약으로 넘어와서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연결됩니다. 왜 하나님 앞으로 나아오는 성도들은 허물을 씻어야 됩니까? 그 씻음의 뜻과 물두멍은 어떤 의미를 가집니까? 또 물두멍 안에 담겨져서 제사장들의 수족을 씻게 했던 물이 지니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율법을 좇아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케 되나니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히9:22)

언제부터 더러워졌는가?
모든 사람은 아담으로부터 이어지는 원죄로 말미암아 의지가 약해지고 판단이 흐려져서 마귀의 미혹에 빠지게 됩니다. 그래서 항상 더러워지는 것입니다. 더러운 허물을 페샤와 파라프토마(παρπτωμα)로 발음하며, 뜻은‘탈락, 이탈’또는‘실책’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따르지 아니하는 오류로 인하여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이탈됐다는 뜻이 허물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다시 회복시키기 위하여 더러움을 씻는 제사가 구약에서 화제였습니다. 신약에서는 예수의 피로 허물이 씻김으로 바꾸어졌습니다. 그렇다면 어느 시점에서부터 씻음을 가져야 됩니까? 증거 궤에서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를 맺고, 자신이 거룩하게 되기 위하여 감사와 기쁨으로 어두움을 밝히고 영혼구원에 힘쓰는 삶이 희생입니다.

다음은 물두멍에서 씻어야 된다고 성경은 교훈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예수를 구주로 믿을 때 하나님과의 관계는 맺지 아니하고, 뜰에 있는 물두멍에서부터 믿음을 시작하는 잘못을 범하기 때문에 근본적으로 거듭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믿음의 시작을 증거 궤와 물두멍, 두 곳 중에서 시작하는 순서가 바꾸어졌을 때 어떠한 결과를 가져옵니까? 앞에서 설명했듯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가져야 되는 증거 궤에서부터 시작할 때에는 항상 성전에 머물러 있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물두멍에서부터 시작할 때에는 항상 바깥에 머문다는‘위치’를 깊이 생각해야 됩니다.

계시록 11장2절에서 성전바깥 마당에서 경배하는 자들은 믿음의 물두멍에서부터 시작한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그들의 믿음 거듭나지 못했기 때문에 42달 동안 이방인들에게 내어주어서 짓밟힌다 하였습니다. 말씀의 뜻은 대 환난에 남겨져서 지구정부가 실시하는 제도 사회에서 박해를 당할 때 모든 사람에게 짐승의 표를 받도록 강요함을 당하게 됨을 말합니다.

물두멍에서 씻김을 받았다고 했는데 어째서 대 환난에 남겨져서 짐승의 표를 받지 않으려고 싸와야 합니까? 예수님의 의로 교회가 다 어린양의 신부로서 들림 받는다고 했는데 어째서 휴거되지 못하고 대 환난에 남겨집니까? 그리고 어떻게 됩니까?

①.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계7:14)
그때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면서 육신의 죽임을 당하고 영은 부끄럽게 구원은 받습니다. 그들이 구원받는 것은 살았을 때, 곧 대 환난이전에 허물이 씻김 받지 못했던 것을 대 환난을 통해서 자기를 희생시켰기 때문에 예수의 피가 그들의 허물을 깨끗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②. 친구여 어찌하여 예복을 입지 않고 여기 들어왔느냐....임금이 사환들에게 말하되 그 수족을 결박하여 바깥 어두움에 내어 던지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니라.(마22:12~14)

여기서 예수를 부인하고 지구정부 통치자에게 경배하고 짐승의 표를 받는 사람은 유황불 못이라는 영원한 저주가 있다는 뜻입니다. 또한 예수의 피로 허물이 씻기지 않아서 세마포 옷을 입지 못하고 벌거벗은 탓으로 대 환난에 남겨졌다가 연단 장으로 가는 경우도 있습니다.

요한복음 11장44절을 읽으면 죽음에서 살아난 나사로의 수족을 묶임에서 풀어놓아 다니게 하라 합니다. 또 사도행전 21장11절을 읽으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바울에게 수족을 결박한다고 성령의 말씀이 예언되었다 했습니다. 죽음 뜻할 때 수족이 묶입니다. 그리고 바깥 어두움에 쫓겨날 때에도 손발이 묶임을 당합니다. 살아난 자는 수족을 풀어 놓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죄짓게 하는 손발의 역할을 묶어버린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예수의 피로 씻음을 받지 못하면 수족을 씻지 않음과 동일하므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수족이 묶임을 당하지 않으려면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씻음이 되어야 죽임을 면하게 됩니다. 이것이 물두멍에서의 씻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