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0/2009

원죄 사함과 허물의 사함을 구별합시다 (3)

예수님의 의
“이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서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하심이니라.”(롬3:26)

예수께서 인류의 구원을 위해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신 희생으로 말미암아 인류가 원죄에서 구원을 얻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본문을 자세히 보면 의롭‘다'가 아니라 의롭게 '하려'라는 전치사 소유격 프로스(πρ)의 포이에우(ποω)이므로 의롭게‘된것'이 아니라, 의롭게‘되게’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께서 의롭게 되셨으니 너희도‘의롭게 되라'는 말이지,‘의로워 진 것'이 아닙니다.

헬라어 디카이오수네(δικαιοσνη)를 우리말로 의로 발음합니다. 의는‘정의, 공의, 정당성, 옮음, 의’등으로 사람의 행위(ρων)로 선이나 악으로 나타나는 결과를 말합니다. 자신의 행위를 선용하면 좋은 사람으로 나타나고, 악용하면 나쁜 사람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처럼은 못되더라도 그분의 말씀대로 선하게 살겠다고 말하면서 행위로는 따르지 아니합니다.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아는 고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율법의 행위에서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갈2:16 ~17)

이 구절에서 잘못을 범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말 성경에는‘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가 아이라'고 표기되어 있습니다. 율법을 표기할 때 시내산의 율법은‘노모 데테오(νομο θετω)’이고, 서기관들이 제정한 국법은 ‘초리스 노모오(Χωρs νομου)입니다.

시내 산의 법이라는 하나님의 명령(θετω)이 빠지고, 서기관들이 제정한 국가(Χωρs)를 빼고, 단순히 법(νομοs)자만으로 표기되어있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이 말하는 율법의 행위는 시내 산의 율법이 아니라, 서기관들이 만들고 지키도록 했던 국법을 말입니다.

다른 말로 바꾸면 국법대로 행해서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니라, 시내 산에서 명령하신 계명대로 해하는 믿음이라야 의롭게 된다는 말입니다. 바울의 교훈을 우리말 성경대로 읽으면 의롭게 되는 것은 행위가 아니라 믿음으로만 된다는 인식을 갖도록 잘못표기 되어있습니다.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들음이니라.”(롬3:20)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롬3:22,24)

물두멍에서부터 믿음생활을 하는 사람의 행위는 어떻습니까? 우리말 성경에는 율법의‘행위(ρων-엘곤)로는 의롭게 되지 못하고...믿음(πιστεω-피스테우)의 은혜로 하나님이 값없이 의롭게 하셨다’고 기록되지 않았느냐! 그러므로 나의 행위가 나를 의롭게 하지 못하고 오직 예수를 믿음으로 의롭게 된 것이라는 논리로서 자신은 행하지 아니하고 예수께서 스스로를 위해 이루어놓으신 그분의 의를 도적질해서 자기 것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앞에서 지적했던 대로 바울 사도는 율법의 행위를 27절에서‘초리스 엘곤 노모우(Χωρs ρων νομου)'라고 분명하게‘국법의 행위'로 표기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를 상고할 때, 원전에서 국법의 행위(Χωρs ρον νομου)로 기록되었으나 우리말 성경에는 국가(Χωρs)를 빼버리고 율법으로만 번역되어있음을 생각해야 됩니다.

이러므로 바울은 한 번도 율법을 부인하지 아니하고, 다만 서기관들이 제정해 놓은 국법을 지키는 행위로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이것을 사람들이 오해하고 행위를 부정하고 입으로만 믿기 때문에 봉사하지 않으며 찬양하지 아니합니다. 이유는 자기 육신만을 위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의를 도적질하면 안 됩니다. 저기는 행하지 아니하고 말입니다. 이것이 바깥뜰에서 경배하는 신자의 태도입니다.

야고보서 2장 24절은‘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은 아니라’고 교훈합니다. 행하지 않는 믿음은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합니다(약2: 26). 그런데도 사람들은‘하나님’과‘나’와의 관계를 이루기 싫어하기 때문에 행위를 의롭게 됨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결과는 42개월 동안 지구정부가 시행하는 Ubiquitous 문화사회에서 눈물을 흘리게 됩니다.

나의 의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느니라.”(롬10:3)

요한 사도는 예수를 구주로 믿고 예수님이 내 안에 거한다고 말하는 사람이라면 자기도 예수님처럼 행할 때만이 의롭게 된다고 행위(ρον)를 강조했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자신의 의를 이루기 위해서 감사와 기쁨으로 하나님과의 관계부터 이루어야 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이루어지지 않고서는 감사가 있을 수 없고, 기쁨이 있을 수 없습니다. 따라서 감사와 기쁨은 내재적인 거룩함으로 성화시켜줍니다. 이 성화는 자신의 영적나이를 높여주고, 거룩한 세마포르 깨끗하게 보전시켜줍니다. 그리고 빠른 속도로 전체적인 성결은 큼직한 보석으로 흉패를 장식하게 됩니다.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하심이니라.”(엡2:10)

바울은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의 일을 하도록 지음을 받았다 합니다. 선한 일은 자기를 위한 것이 아니라, 예수 안이라 했습니다. 사람은 예수를 믿어야 되고, 아버지 하나님을 섬기는 삶이어야 사람으로 지음을 받은 목적에 부합된다는 뜻입니다.

어두움의 권세는 인간을 하나님과 멀어지게 하고, 봉사하지 못하게 하려고 육신의 정욕과 안목으로 미혹시킵니다. 이러한 사람들이 라오디게아 신자들처럼 믿음이 뜨겁지도 차지도 아니합니다. 그러면서도 자기는 좋은 믿음인줄로 착각하고 자기 의를 이루려하지만 이루지 못한다고 성경에 일렀으되,

“저[예수]안에 거한다 하는 자는 그의 행하시는 대로 자기도 행할지니라.”(요일2:6)

자기도 행하라는 말은 마태복은 7당에서 교훈한 좁고 협착한 길을 말합니다. 예수께서 행하신 그 고난의 길을 걸어가는 자라야 의로운 삶을 말합니다. 행함을 페리파데인(περιπατεν)으로 표기 됐습니다.

전치사 페리(περ)+능동태 파데인(πατεν)은 페리파테우(περιπατω)의 미래능동 소유격입니다. 전치사 περ?는 ‘관하여, 대하여, 때문에, 둘레에, 주위에, 근처에’입니다. 그리고 목적을 위한 소유격 πατω는 좁은 길을 ‘밟다, 걸아가다, 짓밟다’입니다.

사람은 철저하게 예수님이 걸어가신 가시밭길을 함께 가지 않고서는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시온의 복을 받지 못합니다. 지성소의 삶으로서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를 이루라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러나 신앙을 물두멍에서부터 시작하는 사람들은 좁은 길로 가려하지 않기 때문에 감사와 기쁨이 없습니다.                                                                                                      

이러한 사람은 이교회 저 교회를 끼웃거립니다. 말로는 예수의 보혈로 죄 사함을 받았다 하면서도 또 다른 물두멍을 찾아간다면 스스로의 말과 행동이 일치하지 않습니다. 저 교회에 있을 때에 물두멍(예수의 피)에서 씻겠는데, 다른 교회 물두멍을 찾아간다면 또다시 예수의 피로 씻으려는 옳지 못한 신앙이 됩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런 사람은 근본적으로 거듭나지 못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봉사는 하나님을 향한 선한행위가 나타남을 말합니다. 때로는 선하지도 않으면서 교회에서 일하는 행위를 봉사로 착각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진정한 봉사는 섬김(-애바드)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너희가 진정으로 하나님을 섬기라'합니다. 그러므로 진정이 없는 섬김은 봉사가 될 수 없습니다. 진정으로 섬기는 봉사는 무엇을 말합니까?

무슨 일을 하더라도 감사와 기쁨으로 일할 때 진정한 봉사요 섬김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행위, 곧 선행의 기초는 감사와 기쁨이어야 됩니다. 이러한 기초위에 행위라는 봉사는 자신의 외적 정결로 이어져서 의로움을 나타내게 합니다. 생을 육신을 위해 소유로 살지 말고 삶으로 살아야 내 의가 나타납니다.

씻기만 하는 결과
참으로 안타까운 일은 예수를 두주로 믿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믿음이 아니라, 세상을 사랑한다는 점입니다. 그러한 생활은 현재로는 좋겠으나, 지구정부가 시작되는 순간부터는 엄청난 고통이 따르기 때문에 대 환난으로 표현하는 것입니다. 또한 내세에서는 말로는 표현할 수 없으리만큼 가혹하다는 점입니다.                                                                                                     

불행하게도 많은 사람들이 이교회에서 저 교회로 연례행사처럼 1년에 몇 차례씩 옮기는 점입니다. 장로, 집사, 권사, 등 자신의 뜻대로 안되면 무리를 지어서 옮겨는 신앙은 이 물두멍 저 물두멍을 전전하는 행위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면서도 물두멍이라는 예수의 페로 죄 사함을 받고 거듭났다고 말합니다. 거듭났는데 왜 자시 거듭나려고 다른 물두멍이라는 예수의 피를 찾아다니니까? 근본적으로 거듭나지 않은 증거입니다. 그래서 씻기만 하는 그들로 말미암아 모든 면에서 문제가 생깁니다.

당을 만드는 사람

“이 사람들은 당을 짓는 자며 육에 속한 자며 성령은 없는 자니라.”(유19)

“오직 당을 지어 진리를 좇지 아니하고....”(롬2:8)

“유대인들이 당을 지어 맹세하되....”(행23:12)

유다서는 성령으로 거듭나지 못한 사람들이 당을 짓는다 합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육에 속한 사람이기에 물두멍에서부터 생을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사도행전 23장12절에서 말하는 당은‘아포디오리조(ποδιορζω)’인데,‘분리시키다, 나누다’입니다.

뜻은 __으로부터, __에게서 거절하고 배척함을 말합니다. 로마서에서 말하는 당이라는 에리데이리아(ριθεα)는‘당파싸움, 다툼, 이기심, 사욕’입니다. 고린도후서 12장 20절에서 말하는 당은 수스트로페(συστρο)로 발음하고, 뜻은‘모임, 무질서한 집단, 소동, 소란, 폭동’입니다.

그러므로 물두멍에서부터 신앙생활을 시작하는 신앙인들은 이기심이나 사욕을 채우기 위해 구릅을 형성시키는 모임을 만듭니다. 이러한 현상은 육신의 유익 또는 자신의 뜻을 관철시키기 위해 말씀에 문제를 삼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렇게 하는 것은 감사와 기쁨이 없기 때문에 말씀이 자기 생각과 다르다고 합니다.

교회에서 서클을 만들고 교회를 갈라놓기도 하는데, 이런 경우는 지도자들이 더 심합니다. 그리고 문제를 만들어서 결국은 다른 데로 옮겨가는 경우가 가장 많습니다. 결과는 교회질서를 파괴시키는 무질서한 집단이라고 성경에 일렀으되, “인간이 세운 제도를 주를 위하여 순복하되....”(벧전2;13)

베드로가 말하는 크티시스(κτσι)는‘창조, 피조물, 세계, 권위, 제도를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아들 예수를 죽이기까지 하시면서 세우신 조직체가 교회입니다. 성막의 지성소에 있는 증거궤 안에 말씀에 순종하라는 만나와 위임권위에 순종하라는 싹 난 지팡이와 절서를 지키라는 돌 판을 넣어주시고 순종(πεικω-후페이코)을 요구하십니다. 자기 뜻을 관철시키려고 서클을 만드는 해위는 하나님의 말씀에 복종하지 않는 거절입니다. 이러한 무리들은 이기심으로 사욕을 채우려고 당파를 구성시키는 것은 위임권위에 촉동을 일으키는 행위입니다.

결과는 예수의 피 값으로 세우신 조직을 무질서하게 만들고 다른 조직으로 떠나가지만 그것은 예수님을 떠나가는 행위입니다. 이 뜻은 하나님이 그들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그들 스스로 예수님으로부터 분리죄고 구원 주되시는 예수님을 배척하는 행위입니다.

대 환난에 남겨 진다
볼지어다 내가 그를 침상에 던질 터이요 또 그로 더불어 간음하는 자들도 만일 그의 행위를 회개치 아니하면 큰 환난가운데 던지고.....(계2:22)

요한 사도는 이세벨이라는 여자와 간음하는 자들은 큰 환난에 남겨진다고 합니다. 이세벨(εζβελ)이라는 이름의 의미는 브올에서 유래되며, 곧 바알세불(βεελζεβολ)이라는 뜻입니다.

우리말 성경에는 간음으로 표기됐는데, 헬라어 원전에는 모이체우(μοιχεω)로 되어있습니다. 뜻은 어두움의 존재와의 결합을 말합니다. 남녀 간의 관계는 에크포르네오(κπορρνεω)이므로 두아디라교회에 경고한 간음은 마귀와의 결합을 말합니다.

가롯 유다가 예수님을 떠나 산헤드린 회원들과 관계를 유지할 때 그에게 간음하는 자로 지목하였는데 그 단어가 모이초스(μοιχs)라 했습니다. 이는 μοιχοs의 호격이므로 유다가 남녀와의 성관계가 아니라 사탄관의 결합을 지적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제정하신 교회를 무질서하게 만들고 이교회 저 교회로 전전하며 물두멍에서 씻기만 하겠다는 사람들은 어두움에 미혹당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예수를 떠났기 때문에 휴거에서 탈락되고 대 환난에 넘겨지는 것은 저들 스스로 마귀와 결합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탄이 지배하게 될 적그리스도 정부시대에 42달 동안 남겨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막바깥 뜰에서 경배하는 신자들의 결과입니다.

두 갈래 길에서 택일
물두멍에서부터 신앙을 시작하려는 사람들은 대 환난에 남겨집니다. 그때에는 예수 그리스도냐, 적그리스도냐? 영생이냐, 영벌이냐? 이러한 양자택일은 전적으로 그 사람의 의지로서 자신에게 주어진 자유에 있습니다.

하나님과 나와를 이루는 사람은 자기 영혼을 깨끗하게 유지시키려고 지성소의 삶으로부터 시작합니다. 그러므로 믿음을 물두멍에서 시작하지 말고 증거 궤에서부터 성막이 지어진 순서대로 삶을 살아야 됩니다. 그러한 믿음이라야 세마포를 입혀주십니다.

아버지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고 어린양의 신부가 되려는 믿음이 얼마나 귀중하니까! 얼마나 값지고 아름다운 믿음인가를 깨달아야 시온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날마다의 삶에서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를 떠나지 않도록 힘써야 새 예루살렘의 축복이 있게 됩니다. <장죠셉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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